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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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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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성령은 본래 그대들 안에 있다!
강의일자 2020. 01. 11. 土.
게시일자 2020. 02. 22.
동영상 길이 46:08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liv6h9neDKg


도마복음 그 앞에 3구절은 지난 시간에 같이 다루었으면 좋았을 구절들인데 강의하다 제가 좀 추가하고 싶어서, 지금 이 자료가 나눠드린 자료가 그대로 책이예요. 각주들이 글이 이렇게 긴게, 책으로 이미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도마복음을 제가 책으로 쓰고 있는 것을 문고판용 책이죠. 그대로 가져와서 드리다 보니까 이 세구절을 각주에 추가했어요. 지난 시간에 한 부분에, 책으로 나갈때는 아마 이게 각주로 들어갈거고 여러분에게는 따로 읽어드리고 싶어서 하나씩 읽어 드릴께요.

도마복음 하려면 이거는 그려놓고 시작을 해야죠. 기독교 강의 할때는 원을 3개 그려놓고 합니다. 영혼육으로 이렇게 설명드리는게 좋거든요. 혼과 육에 대해서도 기독교는 답을 따로따로 제시하니까, 그래서 이 영은 사실은 뭐다? 성령이다. 왜냐? 흙으로 육을 빚고, 성령, 하나님의 숨결을 넣어주니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영혼육 삼분설이, 제가 만든게 아니예요.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육 삼분설을 가지고 말씀드리는게 좋아요. 이 영은 사실은 성령이다. 왜냐? 영이라고 할때는 사실 성령 자리는 I AM 이고, 영이라고 할때는 혼의 뿌리라는 입장이죠. 혼의 본체, 우리가 혼 작용이라는게 생각, 감정, 오감 작용, 아니면 지성, 감성, 의지 작용, 어떤식으로 얘기하건 간에, 이 혼에 뿌리가 있다. 뭐냐? I AM이요, 나라는 현존이 있어야 알고, 울고, 웃고, 하고 싶고, 의욕하고 하지 않겠어요?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오감 작용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혼의 뿌리 측면에서는 내 혼의 뿌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 마음, 감정, 내 오감의 뿌리니까 내 입장에서는 내 영인데 알고보면 그 영이 뭐라구요? 본체가? 하나님이요, 숨결이요, 성령이예요. 성령 받아서 우리가 살고 있다.

(칭의) 그래서 우리가 해야될 건 뭐냐? 그런데 혼이 육만 알고 살고 있다. 육을 위해서만 복무한다. 육의 만족, 육의 쾌락을 위해서 성령은 모른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 혈육의 자녀, 혼이 성령을 위해서 살아가면 하나님 자녀, 그러니까 성령부터 각성 해야겠죠. 이게 칭의 입니다. 칭의단계에서는 영의 각성, 성령의 각성이 포인트다. 성령을 깨달아서, 성령뿌리, 바오로가 말하듯이 항상 기도하고, 기뻐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임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내 안에 임하면 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는게 그대로 기도예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죠. 하나님을 뵙는게 그냥 경배죠.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그러면 늘 경배죠. 경외하고 그게 기도 입니다. 기도하고 기뻐하고 아니 밖으로 보면 육 차원에서는 내 뜻대로 안되서 웃고, 울고 하겠지만 그렇죠? 한탄이 오고, 좌절이 오지만 혼의 입장에서 보세요. 세상일은 내 뜻대로 안되서 울고, 좌절하고, 비탄에 빠져도 영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에게 그런게 있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면 거기서 평안이 오겠죠. 그러니까 '지금 슬퍼 죽겠는데 어떻게 늘 기뻐합니까?' 하나님 얘기지 에고는, 우리 혼은 늘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 안되는 소리죠, 그렇죠? 기뻐할 일이 없으면 없는 거죠. 그래도 늘 기쁠 이유는 뭐죠? 우리 안에 성령을 의식하기 때문에, 늘 기도해야 늘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이 하나님 입장에서, 성령 입장에서 이 영혼육의 세계를 바라보니까 거기서 뭐가 와요? 감사가 오죠. 하나님 덕에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하나님 덕에 이 생각을 마주하고, 이 감정을 마주하고, 이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렇죠? 지금 내가 비탄에 빠져도 이것 또한 무상한 겁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이것 또한 하나님의 작용인거고, 이 모든게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을 알면, 자! 혼은 여전히 슬퍼하고 있지만 감사라고 하는 다른 안목이 생겨버린 다구요. 그래서 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안그러면 우리 혼은 늘 감사할 수가 없죠. 하루에만 별의별 일을 다 겪는데, 늘 감사하겠다고 다짐해 보세요. 나가다가 뭔일 날지 모릅니다. 그렇죠? 쌍욕 나올일이 바로 생길 수 있어요. 이건 혼 차원 이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차원에서의 감사와 기쁨이 늘 있을 수 있느냐? 있죠. 왜? 남하고 욕하고 싸우면서도 '이 또한 은혜다' 라고, '이 또한 하나님 신비다' 라고 바로볼 수 있는 성령의 지혜가 있다면 상황은 달리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칭의, 영적 각성이 없으면 다른 모든 영적 변화는 없어요. 그래서 먼저 이 칭의, 각성이 있고,

(성화) 혼 차원에서는 뭐예요? 성화, 거룩해지는 작업, 거룩은 누가하냐? 혼이 해야돼요. 혼의 성화입니다. 영은 원래 성스러워요. 영이 성화될 필요는 없어요. 영은 각성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하면 되는 것이고, 이거는? 내 혼을 내가 다듬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칭의 라는 건 뭐가 의로워졌다고 하는거냐? 원죄가 날아갔거든요. 성령 모르고 살던 원죄가 날아가서 내가 의로워졌고, 일단 죄의 종에서 하나님 자녀로 승격했어요. 승격은 했는데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는 못해요. 하나님 자녀답게 살려니까, 또 뭐랑 싸우냐? 본죄, 자기가 짓는 죄랑 싸워야 돼요. 원죄는 이때 날아가지만 하나님하고 단절이 이루어졌던 그 죄는 사라졌지만, 뭐는 남아있어요? 내가 짓는 죄, 생각으로, 감정으로, 오감으로, 지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 짓는 죄는 남아 있으니까, 본죄랑 싸워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영화) 육 차원에서는요? 영화, 영광이라는 뜻이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기 위해서 육의 부활, 육의 영생을 우리는 성취해야 됩니다. 기독교는 이게 핵심이다. 말씀드리고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 다 드렸어요. 이 차원에서 읽어보세요.

에베소서 4장 6절이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자! 우리 혼의 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 차원이 분열되어 있을 것 같아요. 왜? 내 영, 너 영 다 다르니까, 사실은 뭐예요? 우주에 한 성령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각각 I AM이 있어요. 우리 안에 I AM이 있어야, 나의 현존이 있어야 생각, 감정, 오감이 거기서 나오는데 나의 현존이라는 차원에서, 나의 현존과 하나님이 'I AM, 나는 스스로 현존하는 자다' 라고 했을때 그 현존과 다를까요? 이거예요.

☆ 이게 같다는 것을 알아야 성령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내 영 따로 있고, 성령 따로 있으면 그 분은 아직도 뭐가 있는 거예요? 자기 에고 속에서 성령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 성령이야, 내 성령 따로 있어' 하나의 성령이라는 걸 몰라요. 우주에 아버지도 한 분, 성령도 한 분, 하나님도 한 분 입니다. 한 성령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많이 나오죠. 한 성령이라는 것을 알아내야 여러분이 비밀이 풀려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이 성령안에 새겨져 있는게 뭐예요? 이 성령은 진리의 영 입니다.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 안에 십자가의 진리를 품고 있다. 성령을 만난다는 얘기는 진리를 직관한다는 얘기 이기도 합니다. 같은 얘기예요. 성령의 현존을 체험했는데 진리를 직관할 수 없다? 그럴 수는 없어요. 여러분이 직관 했는지 안했는지 여러분의 혼이 아직 모를 수는 있어도, 성령을 만났는데 성령이 진리의 영인데 '성령을 만났는데 진리는 없던데' 이거는 잘못된 만남이죠. 엉뚱한 걸 만나거죠. 아시겠죠? 만나더라도 자기가 자기 선입견 속에서 성령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제대로 성령을 못만난 거예요. 얼굴 봤다고 만나겁니까? 속이 통해야 만난거죠. 속마음까지 통해야죠. 소통이 안일어난 거예요. 성령이 일어나면 우리는 성령을 만난다 그러면 진리도 얻는다는 뜻이예요. 왜? 애초에 진리의 영이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한분 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이렇게 얘기하면 어딘가 하늘에 있는 것 같죠. 지난 번 도마복음에서 뭐라고 했죠? '하나님이 하늘이 있다면,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들이 더 가까울거고, 바다 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너보다 더 성령에, 천국에 가까울 거다' 헛소리다 이거죠. '시공안에서 어딘가 있을거야' 이거 아니라는 이거죠. 만물 위라고 하면 뭐라고 이해하셔야 돼요? 만물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고 해야지,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지, 만물의 위에 계시다고 그러니까 '맨 위에 계시나 보다' 그럼 밑에는 안계시겠네요. 그렇죠? 이건 모순에 빠지죠. 만물의 위에 계시다는 것은 3차원 위에 4차원에 있다는 말입니다. 3차원과 4차원의 문제는 3차원 안에서는 4차원을 찾을 수가 없죠. 여러분 2차원 면의 세계에서 3차원 공간을 못느끼는데, 그렇죠? 없는거죠. 그런데 이미 같이 있는거죠. 같이 있는데 다른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랑 함께 계세요. 그런데 다른 차원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 감정, 오감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요. 오직 영으로 접근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안에 애초에 영이 없다면 어떻겠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기도할때는 '영과 진리로 기도해라, 예배해라' 그랬으면 여러분 안에 영과 진리가 없다면 여러분은 일단 기도할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너희 안에 영과 진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진리의 영이 뭐라고요? 성령이요. '그걸로 하나님을 예배해라, 그걸로 하나님을 만나라' 무슨 소리입니까? '너희 안에 이미 신성이 있다' 는 거죠. 신성없는 양반은 신성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로 만나요? 3차원의 존재가 무슨 수로 4차원을 느끼겠다는 거예요? 내 안에 4차원이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영이 없다면, 진리의 영인 성령이 없다면 여러분은 성령과 하나 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왜? 성령만이 하나님의 모든 속사정을 알지 여러분 혼은 알 수가 없어요. 모르니까 그렇게 살았죠, 성령을 안만나고 내 혼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 기본값이 탐진치인데 기본값이 탐욕과 어리석음, 이기심, 질투심, 분노, 시기 인데, 이 혼을 가지고 하나님이 되보겠다, 그렇죠? '자기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되보겠다' 라고 하면 바리새파가 되는 겁니다. 꽝이죠. 예수님은 그래서 무조건 뭐라고 하신거예요? '성령 받아라'

어제 제가 재미로 하다가 커져서 인스타, 페북에도 올렸는데 제가 찍은 사진에 제가 '성령부흥' '성령 받아라' '성령 제대로 받읍시다' 이렇게 써서 보다가, 딱 보니까 요즘 광고 있잖아요? '야 너두 받을 수 있어' 그래서 '야, 너두 받아' 이렇게 하다가 장난이 커져서, 멋지게 왕뚜껑이 해줘서 올렸습니다. '야, 너두 받아'

'성령 받아라' 가 예수님의 최고 간절한 소망이예요. 제발, 왜? 기본값이 안달라져요. 성령 안받으시잖아요 백날 우리가 모여서 얘기해 봤자, 개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한번 인간처럼 멋지게 말해보자' 라고 노력하는 거랑 같아요. 사실은 노력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안의 성령이 임해 계시진 않다면 여러분은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인간답게, 고등침팬치 답게 열심히 먹고, 싸고, 탐욕하고, 분노하고, 이기심 부리고, 무지, 아집에 빠져서 사시면 돼요. 왜? 원래 그게 기본값 이니까, 그게 원죄에 빠진 인류의 기본값 이예요. '원죄를 탕감했다는 건 뭐예요? 성령을 만났다' 그 얘기는 이제 새로운 기본값이 작동해서 기존의 기본값 만으로 사는게 아니다. 기존 기본값도 있지만 이제 새로운 기본값이 뭐예요? 성령의 은총과 열매요. 지혜와 평안과 사랑과 정의와 희열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그게 '기본값이 되셨나요?' 이거죠. 여러분이 막 삐뚤어지려고 해도 내 안에서 그게 올라올 정도되야 기본값 입니다. 내가 어떤 노력을 안기울여도 작동해야 기본값 입니다. 어떤 노력도 안기울이면 우리는 뭐가 작동해요? 탐진치가요. 그럼 혈육의 자녀죠. 죄의 종입니다. 나약하니까 종이죠. 죄에게 끌려다니니까, 그런데 성령을 받고나면 기본값이 달라져요. 어떤 노력을 안해도 내 안에 뭐가 흘러요? 평안이 흐릅니다. 진리가 흘러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 어떤 노력을 안해도 평안이 흐르고, 진리가 자각돼요.

그때부터는 이제 힘들어 집니다. 이게 로마서에 나온 바울의 심경이예요. '내 마음에서 둘이 싸우고 있다. 두 마음이 싸운다' 기본값 두개가 작동하는 거예요. '이쪽도 너무 좋고, 이쪽도 너무 좋다' 그래서 결국 성령쪽이 이길때 예수님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과정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거룩해지는 과정,

자! 그러니까 여기서 되게 중요한건 이거예요. 성령이 우리 안에 원래 있어야 한다는 것, 원래 없는데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 자녀가 된다는 발상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발상인가? 이거는 원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달래려고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쏴준데 걱정하지마, 믿어, 제발 믿으면 하나님이 성령 쏴주신데,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날 믿어, 날 믿으면 받게 해줄께' 이정도 방편을 쓸 정도면 안타까운 상황이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 당시 상황이 되게 안타까운 상황이다. 아시겠죠? '원래 그대들 안에 있어' 도 성경에 나와요. 이런 얘기는 접고, '받아라' 이런 얘기들이 많은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얘기였다. 내 안에 원래 있다는 얘기를, 그런데 자기들 구약에도 있어요. 찾으면 다 있는데 그걸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거예요. '내 안에 성령이 임해계시다,' 그러면 '내가 예언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령을 예언자나 받는 걸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에베소서 말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이 말이 원래 구약의 시편에 있는 말이예요. 그런 말들을 가져다 한 거예요. 에베소서에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뜻을 구현하시는 분이예요. 그러니까 그냥 위에만 계시는게 아니예요. 고차원적인 존재이고, 저차원에서도 모든게 자기 뜻대로 운영되게 관리하시며 만물안에 계십니다. 만물 안에 내재되 계신 분이예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안계시겠어요? 지금 보세요. 성령이 안계시다면 무슨 수로 여러분이 생각, 감정, 오감을 느끼고, 지성, 감성, 의지를 작동시키고 혼이 굴러가고, 육을 경영하고, 육도 여러분이 운영하는게 아니예요. 보통 여러분은 육 가지고 이상한데 쓰시죠. 과로, 스트레스 이런, 탐닉, 폭식 그렇죠. 야식, 그런데 이 몸은 원래 어떻게 작동해요? 성령이 굴리는 거예요. 땀구멍 열고, 닫고, 여러분 심장 뛰고 이거 다 여러분이 하는게 아니예요. 성령이 관리하는거지,

☆ '만물 안에 성령이 안계시다' 여러분 바로 사망입니다. 그냥 여기서 존재가 사라져요.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누구 덕이예요? 성령,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 덕에 존재한다고만 하기에는 뭐예요? 내가 사실 성령이더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성령의 표현이예요. 충격적이지 않나요? 나를 혼에다만 놓고보면 성령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 맞는데, 나의 본질도 역시 성령이라는 걸 알고보면 나 또한 하나님 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에서 그 내용을 끄집어내서 유대인들에게 신의 아들이라고 건방지게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슨 소리냐' 구약에는 '너희 하나님들아' 라고 여호와가 인간들에게 얘기하는 부분이 있어요. '봐라, 하나님 이라고도 하지 않았냐? 왜 나한테 그러느냐' 시비를 거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응합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어요. 인간들이 하나님 이라는 것을, '나도 하나님이 될 수 있고, 다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뭐냐? '영이 있는지도 모른다. 혼은 기본값이 탐진치다.' 이게 심각한 상황인거고 해결책은? '성령 받아라, 성령 안에서 진리로 거룩해져라. 진리를 실천해서 거룩해져라. 진리에 안주해서 자유를 얻어라. 거룩해져라. 그러면 육의 영생까지 얻어서 천국에 살수있게 될 것이다'

[만물안에 계십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사도바울이 더 구체적으로 얘기 합니다. 17장 28절,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되시죠? 이때 우리라고하면 혼의 입장에서 말하는거 아시겠죠? 혼의 입장에서 혼 안에 뭐가 있어요? 성령이 있어요. 혼과 육 안이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혼 안에 성령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 혼이 뭐예요?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예요. 성령의 작용이예요.

지금 이게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공, 법공 다 터져야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내 안에 성령계시다 알려면 아공,

☆ 내 혼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게 아집이예요.

아집이 털리는게 아공이예요. 아집이 털려서, 불교 얘기 하나만 할께요. 아공이라는게 아공의 반대가 '집' 입니다. 집착, 나에 대한 집착, 이 혼이 혈육의 자녀가 자기의 혼이 최고인줄 알고 하나님 안계신줄 알고 살다가, 아집에 빠져 살다가 '내가 헛된거고 내 안에 진짜 참나가 있구나' 아는게 아집에서 아공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또 법공이라는게 있어요. 법공의 반대는 뭐냐? 법집, 그게 뭐냐? 나를 둘러싼, 나를 구성하는 생각, 감정, 오감을 이루는 요소를 포함한 나를 둘러싼 모든 것,

사실은 우리가 과학에서 빙뱅에서 한 근원에서 나온거 아닌가요? 우리의 에너지 다 하나예요. 온 우주가 한덩어리예요. 나만이 아니라, 나, 여러분 까지 다해서 뭐예요? 다 우주의 근원에서 나왔다구요. 한 에너지가 폭발해서 나온거예요. 과학적으로도 우리는 지금 아집(→법집)을 부리는게 사실 우수운 거죠. 부리고 살지만 근원은 알아야 돼요. 우리는 원래 한덩어리에서 놔왔다. 만법이 결국 하나에서 나온거예요. 이건 과학적 접근이고,

철학적으로는 그게 어디서 나와요?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게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으니까 나니 남이니, 나 따로있고 남 따로있고, 우리는 서로 별개고 이런 발상들이 다 박살납니다. 이게 법집이예요. 존재에 대한 집착, 존재들은 다 별개로 존재한다. 나와 남도 별개다. 이런 집착들이 박살나면서 법공이 뭐예요?

☆ 일체만법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이라는 참나로 부터 나온 것이다.

우린 사실 그래서 한덩어리다. 여기까지가 불교에서 중요한 아공, 법공의 진리인데 지금 보세요.

칭의만 이루어도 우리가 성령만 만나도 성령의 현존을 체험할때, 무상한 혼이 아니라 영원한 현존인 성령을 체험하고, 영원한 현존입니다. 시공도 없어요. 그냥 현존하는 자리예요. 그냥 현존하는 내 자신의 본체를 만나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 그 덕에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숨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일체 우주만유가 다 하나님의 신비다. 왜? 하나님이 우주만유 위에 계시면서 우주 만유를 통해서 일하시면서 우주만유 안에 내재되 계시다. 아까 그게 지금 아공, 법공 다 총정리해서 얘기하신 거예요.

사도들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미 깨달은 자들이예요. 견성한 자들 이예요. 들어가보면 사실은 다 같다구요. 용어가 다르지, 제가 용어가 다른 것을 소통시켜 드린 것 뿐이예요. 원래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정도 알아야 칭의 입니다. 그래야 내가 좀 '하나님 자식이구나' 하는 거죠. '하나님 자녀구나,' '그럼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겠구나' 가 이제 성화죠. 하나님 자녀구나 하는게 먼저 정확히 와 닿아야죠.

그런데 교회에서 성령부흥회니 뭐니 하다가 일시적인 감정적 고양, 일명 감정뽕 '와~' 나오면 싹 사라집니다. 거기가야 또 '와~' 이것도 일시적으로 맛보는 것 뿐이예요. 사실 여러분 참나나 이런 신성한 체험은 약물에 의존해서도 부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옳지 않죠. 뭔가에 의존해서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이 웃기잖아요.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왜 다이렉트로 못만나죠? 이게 카톨릭에서 강조하는 관상입니다. 그냥 관, 볼 관자 관하겠다는 거예요. 묵상중에 하나님을 그냥 관하는게 관상이예요. 다이렉트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어떤 의지없이 그대로, 왜? 나의 본체니까, 나의 본체, 나의 아버지 자리를, 부모님 자리를 왜 약물에 의존하고, 무슨 분위기를, 왜 거기 앰프까지 갖추어야만 내가 느낄까요? 노래가 나오고 같이 흥분해야만 느낄까요? 이것도 일시적인 만남은 일어날 수 있지만 뭔가 본질적인 변화가 나에게 일어난 건 아니죠. 즉, 원죄가 사해졌다고 하려면 엄청난 경지예요. '원죄가 사해졌다' 를 딱 한마디로 말하려면, 사도바울이 말한걸로

☆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돼요'

그게 사해진거죠. 사했다가 지금 어떤 상태예요? 일시적으로 성령 만났다가, 그 감정 사라지면, 만약에 성령이 사라진다면 지금 원죄가 사해진거 맞나요? 아니죠. 죄가 사해진게 아니고 잠깐 외박 나온거죠. 잠깐 외출 나온거죠. 다시 감방 들어가야 돼요. 이해되시죠? 죄가 사해졌으면 출소를 해야 되는데 출소를 한게 아니예요. 왔다가 수시로 잠깐 성령 만났다가 바로 들어오고, 하루에 1분 만나고 23시간 59분은 감방안에 있으면 이게 원죄가 사해진 겁니까? 죄의 종입니까? 하나님 자녀입니까? 난감하죠? 자녀는 맞는데 좀 덜 자녀죠. 이런 상태에 머무시면 안된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얘기인데 문제는 뭐냐면 목사나 지도자들이 이런 얘기를 안해주고 작은 성취에 되게 만족하게 침소봉대針小棒大해 가지고 넘어가 버린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얘기를 안하니까 아무도 원죄에서 사면 받는다는게 뭔지 모르는 겁니다.

제가 말씀 드립니다. 원죄에서 사면 받는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진짜 의로워졌다고 느끼려면 기본값이 바뀌어야 된다니까요. 나를 가만둬도 내 안에서 성령의 현존이 자각되고 성령이 진리로 나를 인도한다는게 그냥 명명백백 해야돼요. 뭐처럼? 나를 가만두면 내 안에서 탐욕에 이끌리는게 당연한 것처럼 어떤 노력을 안기울여도 성령이 나를 인도하는게 너무 당연해야 돼요. 그러면 기본값 바뀐거 맞아요. 그러면 여러분 의로워진거 맞아요. 그게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 잠깐 맛본 거예요. 이제 에베소서로 다시가서 4장 13절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이해’에서 하나가 되고 (칭의)]

사도바울은 머리속에 칭의, 성화 영화가 딱 박혀있는 양반이예요. 딱 박혀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성자를 믿자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잖아요.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은 바로 믿기 힘드니까 눈에 보이는 하나님, 성령 안에서, 보세요, 성령은 안보이지만 성령 안에서 그대로 거룩한 혼을 가지고, 부활한 육신을 가지고 살다가신 분이 계시다면 이 혼과 육이 그대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서, 성령을 그대로 드러냈겠죠. 그대로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성령을 믿는게 더 빠르지 않겠어요. 눈에 보이는 성령이 누구예요? 그리스도요.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성자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본인이 성령을 못만나면 끝내 예수님의 실체도 모르는 거예요.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자기 안에서 성령을 만나야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딱 나와요. '와~ 나는 이렇게 힘든데 성령 안에서 혼을 거룩하게 하고 육을 부활 시키기가 힘든데 저 분은 그걸 다 완성시켜서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경지로 덕을 완성시켰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구나, 말하고 행동하는게 다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하시는 그 완덕의 경지, 천주교에서 완덕이라고 합니다. 완성된 덕의 경지까지 가셨구나, 이걸 알고 따라 가자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얘기 합니다. '하나님 아들 성자에 대한 믿음과 이해' 성자를 진짜로 믿을 수 있고, 처음에는 모르고 믿어요. 그런데 그 다음이 뭐예요? 이해를 동반한 믿음이어야 된다는 얘기죠. 믿음과 이해 속에서 우리가, 성령체험이 없이 어떻게 성자를 믿고 이해할 수가 있겠어요? 그전에 믿음이라는 것은 무지 속에서 믿음이예요. '모르지만 왠지 촉이 왔어' 이 정도 믿음, 보통 촉이 많이 틀리죠? '음, 촉 왔어, 필링 왔어'

이게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필링이 있고, 촉이 있기 때문에 틀리는 거예요. 성령에서 오는 직관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종교를 믿고 하는게 귀한게 뭐냐면 믿을때 그 내면에서 뭔가 자명함이 있어서 믿은 거거든요. 그거는 하나님의 인도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 상태에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하면, 결국은 왜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는지도 모르는 거에요. 그런데 그 믿음이 자라서 어떻게 돼요? 이해로까지 성숙하게 됐다면 이제 속사정을 아는 믿음이 된거예요. 믿음이 커진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과 이해가 자라서 어떻게 돼요? 제가 말씀 드렸죠?

기독교에서 믿음이 뭐예요? 칭의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성자에 대한 믿음 플러스 이해에서 하나가 되면 된다. 자! 성령을 믿고, 성자를 믿은 거지만 결국 성자 안에 있는 성령을 믿은 거죠. 성자를 믿고 성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성령을 이해하다보면 성령과 하나가 됩니다.역시 그때 성자와 하나가 돼요. 성자의 본체는 뭐예요? 성령이요. 성령을 믿고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성령과의 합일을 말하는 것이고, 성령과의 하나됨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전에 믿음은 길을 안내해 주는 정도의 믿음이고 성령과 하나되는 믿음 속에서, 자! 성령과 하나가 되면 어떻게 돼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의 진리가 직관되고 더 나아가서 분석도 됩니다. 이해되시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과 진정한 하나가 돼요. 하나가 되고,

[나아가 더욱 성숙해지며(성화)]

성화라는 건 성숙이예요.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영화와 완덕)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스도의 경지는 완덕이고, 부활에 해당되는 영화도 이미 전제되 있는거죠. 이게 결국은 뭐겠어요? 칭의요. 진짜 의로워지려면 믿음과 이해 속에서 성령과 진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과 하나가 된 뒤에는 내 혼을 성숙시켜야 돼요. 뭘 성숙시켜요? 혼을, 그래서 성화 입니다. 성숙시키는 방법은 뭐냐? 지금 보세요. 성령과 합일을 통해 진리를 알았잖아요. 이해했잖아요. 그럼 뭐예요? 진리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겁니다. 진리를 이해한 것을 실천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완성된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3단계 입니다. 이번에는 단순한 영화보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라는데 강조를 둬서 훨씬 말이 더 심오해요. 단순한 육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된 경지까지 가야돼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경지까지 목표로 한 양반이예요.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야겠다' 에베소서에서 강조하는 겁니다.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경지까지도 가자고 그러고, 지금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의 경지가 그리스도의 경지예요. 인간으로써 하나님이 되신 분, 인간으로써 하나님이신 분, 그리스도 잖아요? 반대로 사도들 간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뭐죠?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써 그리스도가 상정됐다. 자! 됐죠.

이 얘기 하나 더 해볼께요. 요즘 제가 Z로 설명, 글자로, 최근에 제가 원불교나 불교적인 학당의 가르침을, 핵심을 선정과 지혜와 실천이라는 세항목으로 설명드린적이 있는데 얘기 나온김에, 믿음과 이해 떳잖아요. 성숙 떳잖아요. 그러면 믿음, 이해, 실천이거든요. 분석해 볼께요.

여러분이 성령의 현존을, 성령의 영원한 현존 입니다. 하나님은, 현존이라는 것은 진짜 생각, 감정, 오감의 위에 있어요. 초월해 있어요.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의 영을 각성하면 영 자리에서는 시공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I AM 내가 존재한다' 만 있지 '어떤 생각, 어떤 감정, 어떤 오감으로 존재한다' 가 없어요. 그냥 존재한다예요. 현존한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는 그대로 하나님이예요.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여러분 혼의 세계로 들어오면 이 혼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요. 성령을 만나고 나면 바로 무슨 소리가 나오냐? 아빠 소리가 나와요. 아버지 소리가 나와요. 혼의 입장에서 아버지라고 알게돼요. '거기서 내가 시공간 안에 내가 태어났군요. 시공 넘어의 부모님 덕에 시공 안에 내가 존재하고 이 육을 가지고, 혼을 부리고 사는 군요' 하는 이 자각이 안오면 엉터리 입니다. 성령을 만났다는데 이게 안오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냐? '성령을 통해 우리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아빠 소리가 나와야 돼요. 이 자리가 눈물 나야돼요. 성령의 현존을 자각하면 성령안에 있는 진리의 직관이 일어납니다. 자 이거는 왜? 이 방향으로만 그리느냐? 상호방향으로 안하느냐? 한덩어리예요. 쪼개놓은거지, 성령의 현존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진리의 직관이 일어나요. 왜? 성령은 진리의 영이니까, 진리의 영으로써 여러분이 현존하는데 진리의 영을 받았다는 것도 어패가 있고, 혼 입장에서는 받은 것 같지만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고 하면 여러분도 영이 되서 존재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미 성령이예요. 혼 작용이 안일어나고 성령 안에서 안식하고 계시면 어떨까요? 이게 진짜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성령안에서 안식을 해버리면 여러분도 시공을 초월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그대로 진리가 돼요.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진리를 여러분이 그대로 직관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령이 되어서 성령안의 속사정을 당연히 아는 거예요. 성령이 되는 것과 성령의 속사정 아는게 다른게 아니겠죠. 되면 그냥 아는 거예요. 여러분이 제가 되보면 제 속사정을 그냥 알겠죠. 제가 되고 싶나요? 저의 온갖 번뇌도 함께 실감하실 겁니다. 제가 되는 순간, 그렇죠? 제가 여러분이 되는 순간 '어우, 이렇게 살았어? 뭔 생각을 하고 사는거야' 이럴 수도 있잖아요? 되보면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 속사정을 그냥 아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는게 아니고 그냥 아는 거예요. 그냥 알면,

(기도, 말씀, 실천) 여기는 아직 시공을 초월한 세계죠? 그럼 시공 안의 세계로 뭐가 올까요? 자명과 찜찜의 느낌을 통해, 이 직관에서 오는 신호를 통해 여러분은 뭘 할 수 있냐? 선악의 식별을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식별할 수 있게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 이렇게 하나, 겹치면서 간다는게 포인트 입니다. 선악을 식별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진리, 성령의 진리의 실천이 가능해지죠. 자! 이름을 붙여 볼께요. 여기는 제가 기도라고 할께요. 여기 믿음의 상태입니다. 기도를 통해 믿음의 상태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돼요? 성령의 진리를 직관하게 됩니다. 그냥 알게돼요. 성령이 돼요. 그래서 성령에서 오는 열매와 은총이 어디에 나려요? 성령에서 혼에게 주어지는 거죠? 성령 스스로는 은총의 열매를 말할 필요가 없죠? 성령 자체로 이미 천국이고, 완벽한 성령의 법,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진 자리인데 여기서 혼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뭐예요? 열매와 은사가 내립니다. 천주교에서 7가지 은사 얘기하죠? 사도바울이 9가지 열매 얘기했죠. 주어집니다. 열매와 은사가 주어져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명과 찜찜의 느낌 속에서 이제 판단할 수 있어요. 스스로 판단합니다. 뭐가 하나님 뜻에 맞는 선이고, 뭐가 하나님 뜻에 어긋난 악인지 영적 식별능력을 가지고 판단을 해요. 그리고 그걸 실천을 해요. 그래서 여기는 기도라고 할께요. 여기의 포인트는 말씀이라고 할께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실천이라고 할께요. 그래서 불교 같으면 선정, 지혜, 실천 이럴걸, 제가 기도, 말씀, 실천, 이건 기독교인들도 다 받아들이기 쉬울 겁니다. 기도와 말씀은 늘 강조하는 거예요. 기도와 말씀, 실천 이 세개가 불교의 삼학이랑 똑같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기도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고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십시요.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한말을 가지고 얘기해 볼께요. '성령의 불이 늘 꺼지지 않게 해라' 또 뭐라고 했죠? '늘 기도하라, 늘 성령 안에서 기뻐하라, 늘 감사하라' 그러면 이 부분은 뭐예요? 그러면 성령안에서 현존하면서, 진리를 직관하면서 칭의가 이루어지죠. 그런데 이 진리를 직관만 하고 있으면 안되죠. 직관은 우리 생각 이전에 느낌이예요. 생각으로 표현해야죠.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늘 기도하고, 늘 기뻐하고, 늘 감사하고, 늘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면서, 여기까지 칭의 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라? '선악을 분별해서 선은 반드시 하고 악은 절대로 하지 마라' 여기까지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온 바울의 심법 입니다. 바울이 이 부분은 본격적인 성화작업에 들어간 걸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해봤더니 어때요? 로마서에 사도바울의 고백, 이렇게 해봤더니 잘 안되더라, 성령의 법을 간절히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반면, 죄의 법에 휘둘리는, 끌려가는 내 마음도 있더라, 둘이 싸우고 있더라. 그런데 나는 감사하다는 거예요. 왜? 나는 구원 받았다. 왜? 성령이 현존하니까, 로마서 보시면 '그러건 저러건 나는 구원받았다' 고 하면서 혼자 정신승리로 갑니다. 이렇게 공부한 사람이 바로 다음 구절에 그런데 구원받았습니다. 갑자기 기뻐해요. 왜? 자기 성령에 힘을 더 실어주는 거예요. 이렇게 공부하다 빠져있으면 안돼요. 그것도 다 심법 입니다. 나를 보면 선악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네 하다가도 선악 싸우는데 골몰하면 악에 집니다. 다시 성령 안에서 기뻐해야 돼요. '와 이것도 또 하나의 하나님의 신비로다' 이게 지금 가장 현명한 사도의 정신관리, 멘탈관리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기뻐하면서 그 얘기가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공부하자고 해놓고 뭔가 답을 줄지 알았는데 갑자기 자뻑에 빠지면서 이야기가 끝나 버려요. '좀 이상한데' 이상한게 아니예요. 여기서 되네, 안되네 따져봤자 안돼요. 그래서 실천이 안되잖아요, 그럼 다시 분석해 봅니다. 내 선악식별 능력에 문제가 있나? 선악식별 능력이 제대로 됐는지 직관차원에서, 성령의 진리를 직관하는 차원에서, 성령 안에서 다시 점검해 봅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하다가 안되면 다시 성령안에 돌아가서 거기서 또 기쁨과 평안 속에서 안식하면서 다시 충전해서 또 나와야 돼요. 이해되시죠?

그 말이 아주 저는 실감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도바울이 참 공부를 잘 하셨다. 하나님 공부를 참 잘한 사람이다라고 제가 느끼는 이유고, 저희 카페같으면 제가 답을 달아드리죠. 소중한 체험기 공유 감사드립니다. 리얼하게 잘써놨거든요. 거기서 사기쳐 버리면 안돼요. '나는 성령현존 체험하고 나니까 이세상 모든 것들이 끊어져 버리더라' 이렇게 써놨으면 뒷사람들 다 헤매는 건데 '나도 안되더라' 라고 써놨잖아요. 그럼 뒷사람들이 '이건 원래 잘 안되는 거구나' 왜? 왜그런지 아세요? 여러분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죄를 줄때 뭘 했어요? '너는 고등침팬치로 살아라' 하고 기본값을 고등침팬치로 줘버렸어요. 여러분은 7죄종 이라고 하는 인간의 탐진치 속에서 사는게 기본값이 맞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벗어나는게 힘든거예요. 좀 수준 높여 보려는게 되게 힘든거예요. 여러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여러분을 그렇게 프로그램 해놨어요. 아담과 이브 신화를 가지고 말씀드리면 '네가 아버지 뜻을 어겨? 너희 고생 좀 해봐, 가죽 주머니, 육체 속에 들어가서 아주 고생 좀 해봐, 하나님 모르고, 나랑 단절된 상태로 살아봐' 하고 프로그램을 해놓은 거에요. 그럼 하나님이 기본값을 뭐라고 컴퓨터에 입력했겠어요? 탐진치 '졸라 고생해봐라, 너희끼리 싸우고, 살인하고, 자기 욕심에 못이겨서 이렇게 살아가라' 그런데 안에 성령은 줬어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열어놨어요. '아는 놈은 찾아서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시요' 하고 '그럼 어떤 조건이 맞으면 원죄를 사해줄것임' 이게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죄가 아니라 이렇게 태어났는데, 탐진치 욕심속에 살게 만들어졌는데 욕심 부리는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욕심 자체랑 싸우시면 안돼요. 욕심 없애려면 봉쇄수도원까지 가야 됩니다. 욕심하고 싸워야 돼요. 욕심하고 싸울게 아니라니까요. 그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입력해 놓으신 기본값 이예요.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탈출하게 해놨어요? '성령 받아라' 로 탈출하게 해놨지 성령 안받고 '욕심하고 싸워서 이겨라' 라고 하신게 아니예요. 많은 분들이 욕심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무소유) 무소유, 무소유하면 주머니만 뒤져도 무소유에 반대되는게 한두개가 아니죠. 이것도 버릴려고 하면 유소유, 소유하고 싶고, 그렇죠, '갠소, 이걸 어떻게 내가 얻은건데' 무소유, 그럼 보세요 얼마나 코미디인가? 무소유, 갠소, 무소유, 갠소 버렸어요. '이겼다' 그러면 제가 이긴 건가요? 지금 성령이랑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저 혼자 놀고 있는 거예요. 고등침팬치가 혼자 괜히 바나나를 버렸다, 주섰다, 버렸다, 주섰다 하고 있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다고 인간되는게 아니야' 라고 하겠죠. '인간되려면 성령받아 기본값이 바껴야돼, 너 안에 있는 숨겨진 프로그램을 찾아서 작동시켜야 돼' 이거예요. 그게 작동되야 네가 성숙한 인간이 되는 거지 그 바나나를 버리고 말고, 무소유 해가지고 집에 있는 물건 내다 버리네, 마네 집에 있는 물건 다 버리면 어떻게 돼요? 최고죠. 신상으로 또 대치하면 되니까. 제가 어릴때 장난감을 많이 샀는데 어머니가 계속 버려주셨어요. 암묵적 합의속에서, 버려지면 또 신상을 사 놓습니다. 그럼 버려지고, 공간이 생기니까 또 신상을 사서 채우고, 되게 유기적인 시스템이 될 수도 있어요.

이게 왜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되느냐? 그걸 내가 안한다고 텅빈 방 만들어 놓고 앉아 있다고 내가 그러면 하나님 자녀가 되냐? 문제가 이거라는 거예요. 그런 차원은 아니다. 삶의 필요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무소유, 뭐 이렇게 적당하게 관리하는 것은 삶의 유용성에서 좋은 문제인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금식이니, 자선이니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인거예요. 성령받아야지 뭔 짓거리 하고 있어?

바리새파가 금식하고 있으니까 굶은 느낌 주지않게 기름이라도 바르고 다녀라, 굶은 사람처럼 티내고, '나 금식합니다' '모르게 해라, 남 모르게' 남 모르게 금식하려면 그럼 흥이 좀 떨어지죠. 자기만 알고 있으라고 그러면 그거 하겠어요? 자선도 너만 알고 있어라, 기도도 너만, 골방에 들어가서 너 혼자해라. 예수님은 얼마나 꼴보기 싫으면 '야, 나 보이는 곳에서 금식하지마, 뭘 바라고 하는거야? 그런다고 하나님이 알아줄지 알아?' 이거예요. '성령 안에서 하는 것 아니면 다 꽝이야' 이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저 금식합니다' '성령이 하라고 하더냐?' '네' '그러면 해라' '성령이 하라고 하더냐?' '누구요?' 그러면 '너 하지마라' '성령이 누구죠?' 그러면 '하지마라' 지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지가 지를 돋보이고 싶어서, 이러면 천국가지 않을까해서 '그런 짓 하지마라'

제 강의 들으시면서 이 부분은 확실히 해야 됩니다. 왜? 이게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무섭게 얘기하셨던건데 지금 다 묵살하고 있는 내용이예요. 이 구절을 모른척 해요. 그럼 또 지금 새로운 금식을 하고, 새로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 가지고, 신상이면 괜찮나요? '예수님 때거 아닌데요, 신상인데요' 천주교에서 하는 것도 다 신상이죠. 예수님 때 이후 것 이잖아요. 천주교에서 하는 그 복잡한 미사, 예수님이 지금 오시면 천주교 교회 가서 앉으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왜 이런걸 하고 있지? 난 이런걸 하라고 한적이 없어'

제가 군대 있을때 천주교도 가고, 교회도 가고 필요에 따라 가요. 오늘 자유시간 누리고 싶다 그러면 절에 가요. 스님은 아예 통제를 안합니다. 방임주의, 저희 군대는 그랬어요. 군대 안에 종교 타운에 가면, 교회는 계속 졸다가 박수치다가 하면 돼요. 천주교 가면 조금 힘듭니다. 따로 초코바를 줘서 갔지 계속 일어나서 뭘 해야돼요. 일어났다 앉았다 졸수가 없어요. 막 각오를 하고 갑니다. '오늘 천주교를 갈까? 교회를 갈까? 교회가서 한숨 잘까? 천주교가서 초코바를 하나 얻어 먹을까?' 교회는 커피 2잔만 주거든요. 천주교는 교리 교육을 받으면 아트라스바를 하나줘요. 군대에서 이거는 상상초월하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건 이거예요. 그럼 미사가 쓸모없냐? '미사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나는데요' 라는 신부님이 계시다면, 사제가 계시다면 그건 맞다는 거예요. 제 얘기 잘 들으셔야 돼요. 미사를 정해놓고, 미사를 왜 정했느냐, 미사를 인간들이 몰입을 할 거리를 만들어 줘야 돼요. 몰입을 할 거리를 만들어주면 그거 하나 하다가 깨어납니다. 딴 생각을 못하니까, 미사를 드리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해요. 제 얘기는 이 말도 맞는 말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볼때는 '왜 저러고 있지?' 예요. '왜 저런식으로 하나님 현존을 체험하지?' '그냥 삶의 모든 순간에 체험할 수 있는데, 룰을 정해놓고 이것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이것도 다 방편인거예요. 방편이라는 것은 쓰고, 필요없으면 버리면 됩니다. 사람들이 방편 버리는 걸 못버려요. 정작 버려야 할거는 이건데 이것도 못버려요.

이런 것도 생각해 보세요. 더 드릴말씀은 끝이 없지만, 기독교 식으로 이거 잘하시면 칭의, 성화가 이루어져서 그리스도에 거룩한 경지까지 나아가실 수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하구요

이제 드디어 도마복음 들어가겠습니다.

10분 쉬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