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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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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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2 43 49절, 67절
부제 나의 것은 나에게 돌려주어라
강의일자 2020. 11. 14. 土.
게시일자 2021. 06. 08.
동영상 길이 43:13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gL8Nvpl54Pg


반갑습니다. 도마복음 하고 도담 나누죠. 오늘은 105절까지 나눠드렸어요. 총 114절 중에 현재 98절까지 했다는거 아시죠? 99절부터 갈께요.

《99절 누가 나의 형제와 어머니인가?

제자들이 그분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형제와 어머니께서 밖에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이건 기존 복음에도 있는 말씀이죠,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요, 뭐라고했냐?

《여기서 나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그들이 나의 아버지 왕국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혈육의 부모, 형제보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형제, 부모가 더 중하다. 이 말을 하신 거예요.

우리 에고의 마음, 에고는 혈육을 나로 여기죠. 몸뚱이를 나로 여기는 마음이라면, 십자가의 성령, 성령은 사랑, 정의, 겸손, 지혜, 성실을 아버지의 진리, 아버지의 뜻으로 품고 있죠. 이 성령을 따르는 에고를 하나님 자녀, 성령을 모르고 그냥 혈육만 따르는 에고를 혈육의 자녀, 이렇게 구분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이 소리는 성령의 자녀라는 거죠. 자기 내면에서 성령을 각성하고 성령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100% 겠어요? 100%에 가깝게는 안되겠지만 예수님을 100%로 봤을때도 100%에 도달하려면 멀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늘 이긴자 되려고, 혈육의 육정, 탐진치를 이겨내고 양심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자들, 이런 분들을 하나님 자녀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합니다. 혈육의 부모, 형제를 얘기하니까 혈육의 자녀인데, 예수님께 직접적으로는 '당신의 형제와 어머니가 와 계세요' 이러니까 혈육의 가족들이 아니라 성령의 가족들을 얘기합니다. 아버지 왕국에 같이 들어갈 성령의 가족을 얘기하는데 성령의 가족이 되는 조건이 뭐예요? 자, 이거 기억하세요. 성령 안에서 성령의 진리, 아버지 뜻을 밖으로까지 실천하는 그런 에고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겁니다.

기존 복음에서 한번 볼까요? 누가복음 8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이요.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무리가 너무 많아서 가까이 못 가고 있으니까

[어떤 이가]

길 열어 주려고 한 얘기죠.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길 '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 내 부모, 형제 여기 다 있는데, 아버지 말씀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부모, 형제 인데'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가르침을 주려는 거죠.

그래서 각주 2번, 풀어드릴게요. 내용을 좀 풀어 드리면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라고 해서 아버지 왕국에 가는 게 아니다.]

그 후에 천주교 같은 경우는 마리아 신앙이 더해져서 예수님을 낳은 부모님, 어머니인 마리아도 죄없는 존재로서 자꾸 승격시키려고 하는데, 오바죠. 성경에 근거한 게 아니에요. 신앙적 목적 때문에 그렇게 지금 방편으로 쓰는 거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왠지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님 어머니한테 기도하면 잘들어 주실 것 같잖아요. 위로도 되고, 예수님은 또 뭐라고 하실 것 같은데 어머닌 또 '아이고 그랬어'하고 들어줄 것 같습니다.

저도 기억나는게 마리아, 그런데 감사한 존재에요. 저 예전에 학당 열때쯤에 힘들어서, 고시 떨어지고 학당 열었는데 뭐 인생이 이렇게, 에고측면에서 학당 열고도 답이 있겠어요? 이 도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 만나서 기쁘긴 하지만 현상계적으로 답이 안나오니까, 힘든 시절에 돌아다니다가 대치동 쪽에 대치동 성당일 거에요. 거기 마리아, 막 힘들게 거리를 헤매다가 딱 눈을 들어보니까 마리아상이 앞에 있는 거예요. 대치동 작은 성당, 최근에 가봤더니 잘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마리아를 딱 뵈는데 그때 어머니 돌아가신지도 얼마 안됐었고, 입에서 엄마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마리아상을 보면서 어머니한테 하고 싶었던 얘기가 툭 나오더라구요. '엄마, 엄마, 졸라 힘드네요' 뭐 이런 얘길 했던 기억이 나요. 위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마리아 신앙이 위안된다는 건 누구보다 실감한 사람이지만, 이건 신앙적 방편으로 나온 거지 성경에 근거한 건 아니다. 마리아 승천설 이런 것까지 가면

'대치동 엄마' 아 읽어 버렸네요. 대치동 엄마, 왠지 대치동 엄마는 공부도 잘 시킬 것 같고, 느낌 좋습니다. 지난번에도 '대치동 엄마나 보러 가야겠다'해서 십 몇 년만에 간거 같아요. 십 몇 년 만에 갔어요. 대치동 가봤더니, 지난번에 대치동 한번 갔다고 했죠, 갔더니 잘 계시더라구요.

마태복음 7장 21에서 23절에 이 구절은 제가 왜 인용했느냐? 육신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게 우리 하나님 자녀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의 가족들 이잖아요. 분명히 예수님이 기준을 제시해요. 아버지가 원하는 걸 실천해야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이건 천국의 가족 아닌가요? 그래서 그 말씀이 잘 드러난게 이 구절 이잖아요. 지금 교회 다니시는 분들, 크리스천 분들 잘 들어보세요.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앙만 막 타오르게 한다고 가는거 아니다. 이거예요.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 하셨어요. '주여 주여' 이게요 '믿습니다 믿습니다'한다고 가는게 아니다.

[오직 하늘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 뜻을 실천하는 자라야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그냥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말로 하는 믿음, 그걸로 못 간다. 어떤 믿음이라야 천국 갈 수 있어요? 성령과 하나되서 성령의 뜻을 이해하고 아버지 말씀, 아버지 뜻을 실제로 실천하는 그 믿음이요, 믿음이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믿음은 믿음인데 '주님 주님'하고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요, '성령 안에서'는 반드시 여기 들어가야 될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왜냐? 내 뜻대로 아버지 뜻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는 절대로 없어요. 성령이 임해야만 아버지의 뜻이 이해가 됩니다. 4대복음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얘기하세요. '성령 받아라' 왜 성령 받으라고 해요? 그래야 내 말도 이해하고, 아버지 말도 이해하고,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죠.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아버지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라야 아버지 왕국에 간다]

지금 교회에서 이런 분이 몇이나 될까요?

[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심판의 날에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고, 기적도 했어요]

이 정도는 누구죠? 목사급들이죠. 목사들이 얘길할 거예요. '저희는 일반 주여 주여하는 애들이랑 달라요, 저는 신통도 부렸어요. 주님이 주신 그 은총 아닌가요?'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거다. 너희 악한 자들아]

이 마구니 새끼들아 이거예요. 꺼져,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 뜻을 실천하라고 했더니 그런 맹목적 믿음으로 지혜도 없이 성령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욕심 안에서 자기들의, 예언도 하고 할 수 있다는 거에요. 마귀도 쫓고, 예언도 할 수 있어도 성령의 진리대로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면 악마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입장은 분명히 해요. 아버지가 주신 은총을 욕심 구현에 써버린 자들은 자기들의 명예, 돈, 권력을 위해서 쓴 자들은 악한 자들이다. 꺼져라 이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서로 사랑하라'가 아버지 뜻이잖아요. 사랑을 실천하는데, 내가 당에서 싫은 일 남한테 안하는데 실제 이 은총을 쓰는 자들이라야, 성령의 은총을 쓰는 자들이라야, 천국 간다. 분명히 하고 계시죠.

이 말씀을 크리스천들은 매일 보셔야 돼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보세요. 읽고 하루를 시작하세요. 나는 어느 쪽인지?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이 말씀하세요.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 마저도 예수님 에고의 뜻이 아니래요. 나는 내 에고의 뜻대로 안 살고

[나를 보내신 분 아버지 뜻을 실천하고자 하늘에서 내려왔다]

천국에 계시다가 지상에 아버지 뜻을 실천하는 자의 본보기가 필요해서 내려오신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 한테도 똑같은 말을 하세요. 제자들한테 '너희도 본보기가 되어라' '성령 받아라.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너희가 본보기가 되어라. 나도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왔다' 이겁니다.

《100절 나의 것은 나에게 돌려주어라》

이 구절 되게 신기해요. 기존 복음에 있는 이야기 거든요. 그런데 뭐가 더 추가 되어있어요.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께 금화 한닙을 보여주면서》

이걸 도마복음 바로 보지말고, 본문을 바로 보지말고

마태복음 22장 15에서 22절을 먼저 보죠. 이 얘기가 더 상세하거든요. 상세한데 도마복음은 또 맛이 달라요. 차이도 느껴보시면서 보세요. 먼저 마태복음 볼게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함정에 빠지게 할까]

예수님은 말 꼬투리 잡아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논의를 하다가

[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요 그래서 말씀 드리게 해요. 선생님이여, 우리는 당신이 참되고]

구라죠, 뻥인데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며 어떤 사람도 꺼리지 않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라도 말로 '물짜다' 그러거든요. '외모가 물짜다' 안좋다는 거죠. 그래도 외모가 그냥 별볼일 없고, 물짜도 다 꺼려하지 않고 포용해주시잖아요. 그러면

[당신 생각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래요? 카이사]

이제 황제죠. 카이사에게, 로마 황제

[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습니다, 옳지 않습니까?]

이게 함정이죠. 만약에 예수님이 바치지 말라고 하면 그걸 꼬투리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할 수도 있죠. 선동할 수도 있죠. 예수가 로마 황제한테 반항한다. 또 바치라고 하면, 그냥 바치라고 하면 '봐라, 예수도 별거없다.' 그렇죠? 왜냐? 유대인들한테 메시아는 로마인의 식민지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줄 왕이거든요. 그러면 이 한마디로 메시아로 지금 알려지고 있는 예수님 엿 먹일 수 있다는 거죠. 바치라고 해도, 바치지 말라고 해도... 바치라고 하면, 저거 별거 아니다. 바치지 말라고 하면, 저거 반역자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놈들이 하고 있다가

[대답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벌써 까고 시작하죠. 야,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날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내게 보이라]

동전줘봐, 로마 황제한테 세금으로 내는 동전줘봐, 하니까

[데나리온 하나를 갖고 왔어요]

당시 동전을 갖고 오니까, 예수님께서 물어봐요.

[이 동전에]

예전 동전에 황제가 새겨져 있거든요.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 것이냐?]

누구를 그려놓은 거고 누구 이름 써있냐?

[카이사라고 써있는데요. 그래? 카이사 것은 카이사에게 줘라.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을 떠나갔다]

할 말이 없어서, 아닥하고 떠난 거죠. 엿먹여야지, 꼼짝없이, 선문답 같은 거죠. 딱 던져서 뭐라고 하든지 땡 하려고 했는데, 그래 여기 누가 그려져 있어? 카이사 그려졌는데요, 카이사 건 카이사줘, 그러니까 할말 없어진 거죠. 이건 로마의 식민지배를 인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죠? 뭐 거역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끝난 얘기예요. 그런데 도마복음은 정말 다르게 이걸 활용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금화 한닙 보여주면서 로마 황제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 요구합니다. 어쩔까요?》

이렇게 물은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황제거는 황제에게 줘라, 하나님거는 하나님한테 줘라.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줘라》

이 뒤에 말은 없었잖아요? 이게 또 철학적인 이야기가 되버린 겁니다. 황제에 속해 있는 돈은 황제한테 바쳐라. 하나님한테 속해 있는 건 뭐죠? 천지만물이요. 천지만물은 하나님한테 돌려라. 나의 것은 뭐죠? 나가 여기서 뭘까요? 여기서 하나님이에요. I AM, 도마복음에서 뭐라고 했죠? 돌멩이를 들어봐라, 거기 내가 있다. 나무를 쪼개봐라, 거기 내가 있다. 천지만물에 나 아닌 게 없잖아요. 똑같아요. 하나님이랑, 나랑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도마복음 한번 더 때린 거에요. 하나님을 멀리 계신 존재가 아니라, I AM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I AM에 속한 것은 I AM한테 줘라. 여러분 I AM한테 속한 게 뭐 있죠? I AM은 여러분의 존재예요. 여러분의 존재 자체에 속해 있는 게 뭐 있죠? I AM 뒤에 뭐가 붙어요? 생각이요, 감정이요, 오감이요, 이거 밖에 없잖아요. 이런저런 생각, 이런저런 감정, 이런저런 감각들 말고 뭐가 있어요? I AM에게 속해 있는 것들이, 그럼 이 세가지 어떻게해요? 생각도 I A안한테, 감정도 I AM한테, 오감도 I AM한테 바쳐버리면 뭐가 될까요? I AM 홀로 하나되서 존재하겠죠.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서 둘로 찢어졌던 것들이 하나로 만나버리겠죠. 도마복음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하나로 돌아가라, 둘로 나누지 말고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버리라는 심법이 나와버리는, 재미있죠? 도마복음은 4대복음하고 살짝 달라요. 4대복음이 역사적 스토리, 실제 사건들 위주라면 도마복음은 사건을 살짝 틀어서 깨어나게 합니다. 성령을 바로 만나게 도와주는 화두나 공안으로 활용해 버려요. 예수님의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지금까지 쭉 그런거 많이 보아 오셨죠.

각주 4 번 보실래요.

[이 대화는 바리새파와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시험한 질문에 대한 답인데, 세금에 반대한다는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엮으려 하였으나 지혜롭게 물리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어라,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다. I AM, 나에게 속해 있는 거, 혼과 육은 나에게 돌려주어라.]

혼과 육을 나한테 바쳐버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한테 몸과 마음을 다, 혼과 육을 다 바쳐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는 소리입니다. 그럼 하나가 되겠죠.

그다음

《101절 참된 아버지와 참된 어머니》

이게 또 맛이 있는 글입니다. 특이한 글이예요. 그런데 이것도 기존복음에 있는 글하고 좀 연결은 돼요. 그런데 연결되지 않는 내용이 또 나와요. 도마복음 얘기는 되게 재미있습니다. 기존복음에 있는 글들에 뭔가 추가된 게 있어요. 그게 또 내용을 확 바꿔버려요, 질적으로 승화시켜 버려요. 보세요. 참된 아버지와 참된 어머니, 이거 느낌 오시죠? 육신의, 혈육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 뭔가 비판적일 거고, 성령을, 어떻게 하겠어요? 성령 자체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다. 우리를 낳고 우리를 길러준 아버지, 어머니 자리다. 이런 얘기를 하시려는 거에요. 짐작은 가시죠? 보시죠.

《나처럼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미워까지 해야 되나요? 하는데, 그게 미워한다는 건, 지금 이스라엘인들 입장에서는 영생을 얻어 천국 가는게 중요하죠. 그런데 이 육신은 어때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육신의 부모님을 혐오하라는 얘기는 육신의 부모님이 낳아준 우리 몸은 죽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 부분을 혐오하라는 겁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 이 육신의 한계를 혐오하고 어디로 나아가라는 거예요? 영혼육을 성령 안에서 온전히 해서 영생으로 나아가서 천국으로 가라는 거죠. 자 그러니까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그 죽음을, 사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은 절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육신의 부모만 부모인줄 알고 그 육신 하나만 간수하다가, 보살피다가 죽고 끝나는 그 운명의 존재들은, 절대로, 혈육의 자녀들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나처럼 '영적인' 거에요. 괄호가 생략되어 있지만, 제가 추가했습니다.

《영적인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아버지, 어머니는 누구에요? 단순한 성령의 가족이 아니고 성령 그 자체입니다. '나의 어머니는'하고 좀 유실된 부분이 있어요.

《나의 어머니는, 그리고 나의 참된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

누가 예수님한테 생명을 줬을까요? 성령이죠. 그래서 아버지가 성부라면 어머니는 성령, 이런식으로, 본체가 성부고 작용이 성령이니까, 시공을 초월한 본체는 성부, 시공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 영은 성령, 이러니까, 이거를 또 음양으로 나눠서 남성, 여성으로 나눠서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이런게 노자에 나온 얘기들이랑 참 통합니다. 영생에 관련해서 생명을 주셨다는 건 영원한 생명이거든요. 육신의 부모는 죽음을 줬지만 참된 부모는 영생을 준다는게 포인트예요. 특히 어머니, 참된 어머니는 영생을 주더라.

이거 관련된 기존복음 구절 한번 볼게요. 기존복음에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39절 말씀이에요.

[내가 세상에 평화주러 온 줄 알지?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쌈 나게 하려고 왔다. 분쟁 주러왔다. 평화가 있는 곳에 분쟁을, 예수님의 기도 입니다. 이 평화는 거짓 평화거든요. 사탄의 종이 되서 살아가는 평화 말고, 분쟁을 일으켜서 다들 깨어나게 하겠다는 거예요. 매트릭스 세계가, 영화에 보면 매트릭스 안에서 잘 살고 있죠? 누가 분란을 일으켜요? 모피어스가, 네오가, 모피어스, 네오가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내가 이 매트릭스 세계를 박살내려고 왔다. 다 깨어나게 해버리려고 왔다. 이 소리죠, 싸우게 하려고 왔다.

[내가 온건 아들이 아버지랑 싸우고, 딸이 어머니와 싸우고]

완전 막장 드라마죠.

[며느리가 시어머니랑 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김치로 때리고, 이런 막장드라마 상상해 보세요. 이 얘기는 혈육의 자녀를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거다]

식구가 제일 미울 거다.

[아버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러니까 혈육의 자녀 안에서, 혈육의 자녀로서 자기 신분을 딱 정하고 혈육의 가족만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한테는 갑자기 찾아온 이 분쟁이 버겁겠죠. 그런데 영적으로 거듭나려고 하다보면 이 혈육의 자녀로서의 속성을 벗어나야 된단 말이예요. 한 개인 개인하고 싸움을 얘기하는게 아니에요. 그 뭐죠? 혈육의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자녀가 되라는 거예요. 하나님 가족이 되라는, 그러니까 이게 분쟁이잖아요, 싸우는 거 잖아요.

[내게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또 이 얘기가 나와요. 결국 뭔 얘기냐?

[자신의 십자가]

하나님의 진리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이 얘기도 아버지 뜻을 실천하지 않는 자도 내 제자 아니다. 이 얘기는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는 거예요. 천국 가고 싶다고? 아버지 뜻을 실천해 그래야 천국가, 혈육의 자녀가 되지마, 하나님 자녀가 돼, 그래야 천국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천국 소속 아닌가요? 소속이 바껴야 천국을 가죠. 지금 크리스천들이 다 혈육의 자녀고, 다 이 육신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자꾸 천국의 구성원이라고 자기를 생각하는 망상에 빠지는 병이 있습니다. 혈육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 자녀가 됐다면 증거가 필요해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십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스스로 지고 실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어야 돼요. 그래서 영생 얘기까지 바로 갑니다. 이걸 굳이 나누면 앞부분은 칭의예요. 여기까지는 칭의예요. 사도 바울이 칭의, 성화, 영화 그냥 얘기한 게 아니예요. 보세요.

예수님 말씀 중에 육신의 가족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칭의쪽에 속해요. 하나님 자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된다.]

육신의 자녀, 혈육의 자녀, 신분이면 안된다. 신분이 한번 바뀌어야 된다. 이게 칭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신분이 바껴요. 그 다음에 뭐예요?

[성화, 하나님의 십자가를 자기가 직접 메고 걸어야 돼요.]

자기의 십자가로 삼고 걸어야 돼요. 그러니까 남이 해줄 수 있는게 아니예요. 성화, 스스로의 혼을 거룩하게 바꿔야 돼요. '서로 사랑하라'는 아버지의 진리, 아버지의 십자가의 진리를 자기가 묵묵히 실천해야 된다.

마지막은 뭐예요? 영화, 그래서

[자기 생명을, 육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자라야 영원한 생명으로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육신을 초월할 수 있어야 진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건 영화 쪽이죠. 칭의, 성화, 영화 아닌가요? 먼저 하나님 자녀로 신분이 바뀌고, 성령 받아야 되죠? 성령 받아서 신분이 바뀌어야 되고,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혈육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 자녀가 되어야 되고,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성령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어야 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육신을 초월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영화,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될 수 있어야 된다.

여기 지금 칭의, 성화, 영화 다 들어 있죠? 이런식으로 거듭나셔야 됩니다. 이걸 누가 해줘요? 성령이요. 성부, 성령이,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하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는 나한테 생명을 주신다.

각주 6번이요.

[나의 육신의 어머니는 나에게 죽음을 주었으나 (육적인 몸은 죽어 사라질 몸이니까) 나의 참된 어머니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영적인 몸은 영원히 불멸합니다) 참된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의 본체를 말하고) 참된 어머니는 성령이다, 성모라고도 할 수 있겠죠. 성령이다 (하나님의 작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게 노자 얘기 들어보실래요? 노자가 기가막히게 이 성경과 통하는 말씀들이 많아요.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안그런데

[나는 홀로 사람들과 다르고 자하니]

나는 사람들과 달라

[먹여주는 엄마]

젖 먹여 주는 엄마, 밥 먹여주는 엄마를

[귀하게 여기네]

이 먹여주는 엄마가 우주의 도를 말해요. 하나님 자리, '우주의 하나님은 나를 먹여 살려주더라' 이겁니다. 또 하나 보실래요?

[나라의 엄마가 있어야]

나라의 엄마, 한 나라가 있으려면 그 나라의 엄마가 있어야 된다. 근데 이 나라는 뭘 말하냐면 이 몸뚱이를 나라에 비유한 겁니다. 나라의 엄마가 있어야

[오래 갈 수 있다.]

그 나라가, 나라가 오래간다는 건 우리 몸뚱이가 영생불멸 한다는 거예요. 몸을 길러 주신 하나님이 있어야 영생의 몸을 얻을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이것을 뿌리를 깊게 하고 뿌리를 견고하게함 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장생구시長生久視, 장생불사하는 도리가 거기 있다]

이 몸뚱이를 나라에 비유한 거예요. 이 나라가 안망하고 오래가게 하려면 엄마가 있어야 돼, 그 엄마가 계속해서 양분을 대주는 거예요.

뭔 얘기 했어요? 여기서 예수님이 참된 어머니라고 한건 성령인데 성령의 어떤 작용이겠어요? 생명 에너지를 대주는 작용, 자 성령은 진리를 가르쳐주면서 동시에 생명 에너지를 대주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진리의 축면에서 이 성령을 대변해서 뭐라고 했어요? 나는, 성령의 온전한 구현자인 예수님, 성자는, 결국 성령 얘기에요. 성자 얘기지만 들어가 보면 성령 얘기입니다. 나는 길이요, 빛이요, 진리요, 이거 다 진리 소리 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죠? 생명이요, 결국 둘로 나누면 길, 빛, 진리 다하면 빛이나 진리나 하나예요, 진리요, 생명이드라. 진리가 가르쳐주고 생명에너지 대주고요. 이게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우리를 인도해서 영생을 얻게 만들어주는 그 성령의 작용으로써의 하느님이신 성령을 참된 어머니, 그러면 본체 로써의, 그 모든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니까, 하나님 자체가 본체겠죠. 하나님은 성부로써 참된 아버지, 성령은 참된 어머니,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죠. 예수님한테서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모습도 나왔다는 것 명심 하셔야 돼요. 도마복음에서는 하나님을 어머니라고도 부릅니다.

노자도 항상 하나님을 어머니라고도 불렀어요. 현묘한 여성, 먹여주는 엄마, 또 다른 데서는 만물의 아버지란 말도 써요. 노자도 아버지, 어머니를 다 썼어요.

예수님도 다 썼습니다. 평소에 기도할때는 '아빠' 이렇게 기도했지만 어머니라고 부를때도 있었다. '엄마' 이럴 때도 있었다.

《102절 잠자는 개와 같은 바리새인들》

'아 이거 개같은 것들이네' 이런 게 아니라 들어보시면, 왜 이 말이 나오는지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화가 있을 거다 바리새인들이여》

위선자를 말하잖아요. 위선자들, 구체적으로 위선적인 성직자들

《그들은 소의 여물통을 지키는 잠자는 개랑 같다》

소의 여물통을 개가 지키는데 잠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도 못쳐먹고 소도 못먹게해요》

최악이죠. 그러니까 지금 소가 백성들이면 그 여물이 성령이라면, 진리를 품은 성령이라면 그 진리 품은 성령 안에서 개도 소도, 개나 소나 다 성령 받아서 천국갈 키를 거기서 얻어야 되는데, 이 개가 무슨 짓을 하느냐? 그 여물통을 소들이 못먹게 막아놓고 지도 잠자고 있어요, 결국 아무도 못먹잖아요.

그래서 제가 각주에,

[참된 군자는 수인기치(나를 닦아서 남을 다림)하며, 참된 보살은 자리이타(나를 이롭게 하여 남을 이롭게 함), 바리새파들은 자해해타(나도 망쳐서 남도 망치게 함)]

예수님한테

[저주 받아도 마땅한 것 같다]

저의 소감을 적어 놨습니다.

《103절 반역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막아라》

제목들이 다 좀 맥락이 없죠. 갑자기 막 반역자들이 나오고, 왜 이런 소리가 나왔나?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길 반역자들이 장차 어디를 공격해올지 아는 사람들은 축복받을 것이다. 그들이 가서 황제의 자원들을 모아서, 반역자들이 도착하기전에 미리 방비할 수 있을 것이다》

실감 난 비유를 들어준 거에요. 반역자들이, 그때 반역도 많이 하고 할 때니까, 반역자들이 장차 어디 공격해올지 아는 사람은 복받은거지, 황제의 자원들을 모아서 반역자 도착하기전에 미리 막으면 되는거 아냐? 그러네요. 그렇게 천국갈 준비를해, 이 소리죠.

각주 8번

[매순간 깨어있어라. 깨어있는 자는 생각, 감정, 오감을 통해 우리를 악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도발을 곧장 알아차리고 막을 수 있다]

이해되시죠?

[깨어있지 못한 비몽사몽의 상태에서는 사탄의 도발을 알아차릴 수 없고]

반역자를 알아차릴 수 없는 거죠. 반역자의 공격을

[막아낼 수도 없을 거다. 비몽사몽의 상태에서는 겉사람(혈육의 자녀의 마음, 욕심) 위주로 산다. 그래서 사탄의 도발에 방어할 수 없다. 그러나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속사람(성령의 자녀의 마음, 양심)으로 산다]

양심 위주로 산다.

[그래서 사탄의 유혹이 있더라도 모든 것이 성령에 의해 간파되며 곧장 제압된다]

이 얘기를 주자어류, 동양의 선비, 주자 말씀으로 들어보면

[경(깨어 있어라, 깨어서 양심의 현존)]

안에, 양심의 현존 안에 앉아 있으면, 성령이 양심이죠. 깨어서 양심의 현존 안에 안주해 있으면, 양심 안에 새겨져있는

[천리(하나님의 진리)가 밝게 드러나서(진리의 직관) 인욕(인간의 비양심)이 억제되고 사라질 것이다(진리의 분석과 실천)]

비양심이 억제될 것이다. 이 얘기랑 다를 바 없죠. 늘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 '서로 사랑하라'는 그 양심의 진리를 직관하고 실천하라. 그러면 아버지 뜻이 실천되는 곳에서 반역자들은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소리고요.

동양의 고전 채근담에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채근담은 유불선이 잘 녹아 있는 경전인데, 거의 경전이죠. 진리의 말씀들이 많으니까, 여기 보시면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밖의 도적이며]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밖의 도적이며, 우리가 오감을 통해 이렇게 유혹받는 것, 사탄의 유혹이 어디서 와요? 오감으로 오죠? 생각, 감정, 오감으로 온다고 했잖아요. 오감을 통해 이렇게 들어오는 것은 바깥에 있는 도적이고

[내 감정이나 욕망 그리고 아름알이]

라는건 헛된 생각인데 망상으로 나한테 사탄의 유혹이

[일어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도적이다.]

도적이 안밖에 다 있는거예요. 오감을 통해 공격해오고, 우리를 유혹해오고 안에서 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요, 반역이, 안밖에서 반역이 일어나는데

[다만 주인옹이]

이러면 주인공이예요. 참나가, 주인공이, 참나가

[홀로 집 가운데 앉아서 또랑또랑 깨어있어서 어둡지 않으면]

깨어있으면

[도적들이 곧장 변하여 집안 식구들이 될 것이다]

생각, 감정, 오감이 반역자가 아니라 반역의 무리들이 이제 뭐가 돼요? 황제의 부하들이 되버리는 거죠. 황제가 딱 지켜보고 있으면 도적이 가족으로 변해버린다. 이건 놀라운 일이죠. 생각, 감정, 오감이 날 유혹하고 안에서 번뇌, 망상을 일으키다가 탁 깨어있었더니, 아버지의 진리를 이해했더니 어떻게 돼요? 아버지의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니까 어떻게 되버려요? 생각도 지혜로, 감정은 사랑으로, 자비로, 오감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실천력으로 바뀌어버리드라. 이런 얘기들이 도마복음 하고 잘 어우러져서 제가 가져왔습니다.

《104 절》

여기까지 해볼까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거 재밌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씀했습니다》

주로 바리새파들이겠죠.

《오십시오. 오늘 저희랑 기도도 하고 저희랑 금식도 합시다》

기도, 하나님한테 시간 정해서 기도도 같이 하 고요. 금식, 먹는 것도 좀 절제하고 합시다.

《예수님께서》

바로 뭐라고 그래요? 내가 죄졌냐

《내가 무슨 죄지었느냐?》

이게 복음에 이미 있다는게 너무 재밌지 않나요? '내가 무슨 죄 지었느냐?' 기존복음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어요. 여기가 훨씬 더 말이 셉니다.

제가 이것을 각주로 안넣었나요? 왜 이렇게 됐지? 왜 각주로 안넣었지?

한번 읽어볼까요? 혹시 제가 이게, 읽어 볼게요. 제대로 다듬어진 글이 아닌지 걱정이되서 그러는데 일단 읽어 볼게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아니면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느냐?》

내가 왜 기도하고 금식을 해야 되느냐?

《신랑이 신부의 방을 떠날 때 금식하고 기도하게 하라》

이 얘기는 자기가 신랑이에요. 신랑이 지금 신부의 방에 있을 때, 신랑이 백성들과 함께 있을 때는 '파티를 벌려라' '나 있을땐 파티야' '나 죽고 난 뒤에 금식하고 기도하던지해' 이거죠.

이게 기존 복음에 한번 보실래요? 각주 9번 보시면 자세한 스토리가 있어요. 마태복음 9장 14에서 17절 이에요.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들 하고 요한 제자들이죠. 요한 제자들도 금식을 중시한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 제자들은 금식 안합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길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냐?]

파티를 해야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거다. 그때 금식해라. 새 천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이는 기우려고하는 천조각이 그것을 당겨서 오히려 더 찢어지게 한다.]

서로 이렇게 늘어나는 강도가 다르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

팽창력이 다르다. 이거죠,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린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라]

그때도 한번 읽어드렸어요. 여기서 새부대는 새로운 율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거듭난 이 영혼은 기존 구약에서 전해오는 형식적인 율법에 맞지 않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이 진리에 기반한 율법, 사랑의 율법, 복음의 율법 이라야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 소리 거든요. 그러니까 기존의 형식적 율법에 매여있는 사람들을 지적한 겁니다. 의례적으로 기도하고 의례적으로 금식해야만 하나님과 합의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지적하신 거예요.

뒤에 있는 부분은 각주에 들어갈 부분입니다. 각주로 같다고 보시고 제가 읽어드릴게요.

[형식적인 금식과 기도는 혼과 육의 죄를 정화시키고자 하는 방편일 뿐이다. 하나님과 하나로 합일되어 빛으로, 성령으로, 온전해진 빛의 사람, 즉 예수님이죠. 성자는 그런 형식적인 금식과 기도가 필요 없다]

이미 불타는 쇠공인데 불타는 쇠공한테 기도, 금식 하라는 말이 통해요? 기도, 금식은 차가운 쇠공이 하나님 만나려고 용을 써보는 그런 방편이거든요. 그렇게해서 만난다는 보장도 없어요, 형식적인 금식, 기도 해서, 성령을 못만나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온 거 잖아요. 성령덩어리, 불덩어리로써 사람들에게 임했기 때문에

[성령의 열기로 타오르는 쇠공인 성자가 우리 곁에 있을 때는 우리도 눈에 보이는 성령의 화신을 맞이하게 된다]

는겁니다. 성령이 눈에 안보여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성령의 불로 타오르는 사람을 보니까 '이렇게 빛나고 이렇게 잘 타는구나'하는 걸 보고 우리가 성령도 이해하게 된거죠. '성령의 확실히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저사람 보낸 양반이 하나님이구나.

[이렇게 인류도 눈에 보이는 성령의 화신을 맞이하게 되니 낡은 율법에 따른 형식적인 금식, 기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성자와의 연합에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 성자, 성도가 하나되고]

성령 안에서 성령은 아버지 영이니까, 성부랑 하나가 되고, 우리가 성령만 받으면 이제 구시대의 율법 따지지 말구요, 새시대의, 신약의 시대는 일단 '성령 받아라'에서 시작합니다. 성령 받으면 성부 아버지도 만나게 되고, 이 성령을 그대로 구현하신 화신인 성자도 이해하게 되고, 인격 차원에서 구현하시는, 그럼 이걸 따라가는 자신, 성도도 함께 연합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성도와 성자와 성부, 아버지, 아들, 형제, 자매가 하나가 됩니다. 진정한 참된 가족 이루어지죠. 이렇게 되야 된다.

[빛의 사람인 신랑, 성자가 신부의 방을 떠나 인류가 다시 빛을 잃고 어둠에 빠졌을 때 그때는 혹 금식과 기도가 필요할 수 있다]

그때도 뭐가 더 필요하겠어요? '성령 받아라' 해줘야돼요. 금식, 기도 가르치려고 예수님이 오신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금식과 기도를 아예 거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때는 금식하고 기도해라. 빛을 받다가 빛을 잃어버렸으니 금식하고 기도해라. 그때나 모를까 나 있는 동안에는 나랑 함께 연합해서, 나랑 함께 타오르자,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가 되자. '성령 받아라' 이게 목표죠, 성령과 받아요. 혹시 성령을 못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빛을 잃어버리고 그때는 금식과 기도를 찾아라.

《105절》

짧아서 할께요.

《참된 부모를 모르는 창녀의 자녀》

뭔소리냐?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만 알고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를 모르는 자는 창녀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욕하려고 이러나 한데, 들여다보면

[육체의 아버지 어머니만 아는 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르는]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창녀의 자식과도 같더라]

이거죠. 진짜 본 아버지를 모르잖아요. 이 경우는 엄마는 알겠죠. 그런데 아버지는 모르잖아요. '아버지 누구세요?' '그런 분 있어' 그러면 알수없죠. 사실 어머니도 모를 수 있고, 이게 실질적인 비유예요. 욕하려고 '에이 땡땡이 자녀야' 이런 의미가 아니라 진짜 부모 모르는 사람이랑 뭐가 달라? 진짜 부모 알아야지, 이런 느낌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어.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그 당시 거친 비유들도 잘 활용하십니다. 살인자 가지고도 비유를 들었잖아요. 천국 가는거는 힘센 사람 죽이려고 칼로 연습해서 언젠가 죽이는 그런 거야. 느낌이 팍 오거든요. '아 진짜 목숨걸고 연습해야겠네요.' 자칫하다간 내가 죽으니까, '그래 그런거야, 그런 마음으로 준비해야 천국가' 천국 가는 걸 쉽게 생각한 사람들을 위해서 센 경고한 거죠. 천국 가는 건 뭘까요? 너가 마이크 타이슨이랑 싸워서 한방에 제압하는 거야. 얼마나 연습해야겠니? 다시 태어나야 겠네요. 위로해줄 수도 있지만 '한번 해볼까요'하면 이게 목숨걸고 한번 덤벼야되는 일이잖아요. 이런식으로 실감난, 당시의 비유를 해주셨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도마복음이 와닿으실 거예요.

오늘 105절까지 버렸습니다. 이제 진짜로 얼마 안남았네요. 두번하면, 두번하면 확실히 끝나겠네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도마복음 함께 또 이렇게 들어주시고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