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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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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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도마복음, 영생의 방법을 전하다!
강의일자 2019. 12. 21. 土.
게시일자 2020. 02. 09.
동영상 길이 40:52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EcgOJxll3A4



오시는 분들 상대로 하는 강의라 뭐 그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보지는 않고요. 제가 준비한 양이 많아요. 그래서 최대한 엑기스만 추려서 읽고 가는 식으로 한 번 가보겠습니다. 이 도마복음이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우리가 흔히 4대복음 얘기하죠? 마가복음이 오래 된 거라고 보지요. 마태, 누가, 요한. 요한복음이 제일 뒤에, 온 거다 이렇게 보는데요, 이래도 이게 뭐냐면 예수님 가시고 기원 후 한 100년경 그 전후로 고 앞쪽에서 만들었다고 보고요, 지금 이 도마복음이 발견되고 나서 이 도마복음이 제일 앞섰다고 보는, 마가복음보다 더 위라고 보는 교수님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보시면 아시겠지만 논어 같은 어록체에요. 다른 성경이랑 다른 게, 어떤 이야기가 아니고 순수하게 예수 왈이에요. 예수 왈 뭐, 예수 왈 뭐, 이렇게 해서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이렇게 따서. 이런 게 죽이지요. 그래서 사건 얘기가 없어요. 오로지 예수님의 그냥 어록만 적힌 글이에요. 이런 형식 자체가 다른 이런 예수님의 하나의 전기들이지요. 이런 전기들의 형식보다 훨씬 먼저 나왔을 거다라고 보는 그런 학자 분들이 많으시지요. 그래서 이 도마복음이 이제 중요시 되는 게 그런 부분이고 예수님의 가장 육성 녹음이, 육성이 그냥 녹음된 거 아니냐,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재미있는 게 그래서 이 요한 복음 같은 경우는 영지주의를 많이 의식한 경이기는 한데요, 이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이 성격이 되게 다릅니다. 실제 요한에서도 보면요 이 요한복음 안에서만 이 도마가 의심하는 도마로 해서 상당히 좀 비판적으로 나오고요.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도 손 찔러 본 사람이 도마지요. 의심하는. 쌍둥이 형제라고도 알려져 있고 그런데 의심하는 성격이 나오고 그래서 이 요한복음이 도마복음을 의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나온 거 아니냐 할 정도로 그런 의심받는데, 그럴만한 게요, 이 요한복음이 불교로 치면요, 요한복음은 거의 정토종이에요. 도마복음은 어떤 선종이지요. 선종이나 불교 밀종에 해당되지요.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하느님이 되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그런 내용이라면 요한복음은 아미타불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극락세계 갈 수 있다는 불교의 종파가 있지요. 불교 내에도 이런 양대 종파가 있듯이 도마복음과 요한복음이 거의 그런 반대가 되는 이치를 갖고 있습니다.


2:45 도마복음의 내용은 다른 이 복음들 하고 좀 구별해서 봐야 되요. 내용들은 도마복음의 내용의 반 이상은 여기 다 나온 얘기입니다. 여기 나온 내용들이 훨씬 더 과격한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왜 도마복음이 뭐 원자폭탄의 위력을 갖는다 이렇게 보는 분들도 있냐 하면요 내용은 여기도 반 수 이상은 나온 거지만 요거를 뽑아 놓은 이대로 읽어보면 여기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렇게 안 보여도, 여기에서 도마복음이 편집된 대로 읽어보면, 뭐냐면, 우리 자체가 하나님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있고 우리가 그대로 하나님의 분신이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결국은 답을 찾아야 된다는 바로 그게 제일 주제라는 거지요. 이건 불교의 선종이나 밀종 그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뒤지지 않아요. 스님들이 보셔도 아마 이걸 도마복음 제대로 보시면 선어록이나 어떤 심오한 밀교의 얘기를 읽는 기분을 느끼게 되실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으면 불교인들이 봐도 비슷해요. 아미타불 신앙이랑 거의 똑같아요. 아미타불 이름만 외도 극락 간다라는 그런 신앙이 있듯이 요한복음에서는 우리가 예수님 하고만 접속이 되면 우리가 그대로 천국 갈 수 있다는, 구원 받을 수 있다, 이런 내용이 나오죠. 그래서 이 도마복음 식으로 한번, 그런데 이 도마복음 식으로 봐야 되는 이유가요, 요한복음은 하나의 방편이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 육성에 가장 충실한 게 도마복음이라고 봤을 때는 거의 어록이거든요. 뒷사람들이 손을 대기 더 힘든 그 순수한 어록의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도마복음이 예수님의 가장 그 본질에 부합하지 않냐 이렇게 보입니다. 불교 내에서도 그렇죠. 너가 부처다가 더 근본이에요. 그런데 아미타불 믿으면 극락 간다 이건 방편이거든요. 실제로 결국에는 아미타불 우리가 믿었다 하더라도 내가 부처라는 걸 알기 전에는 불교에서는 인정을 못 받지요.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이 요한복음이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이 정도 볼 정도의 좀 열린 시각이 필요합니다. 도마복음 이해하시려면요 기존 4대복음에서 읽은,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어떤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아니라 순수하게 예수님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셔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지금 2천년만에 다시 1945년도에 이 도마복음이 다시 발굴되었거든요. 이것도 하나의 큰 인연이지요. 이걸 하늘의 뜻이라고 봅니다. 이걸 다시 한번 읽어봐라. 예수님의 원 육성이 나왔단 말이지요. 그거를 기존의 우리가 2천년간 봐왔던 형식을 가지고 또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은 보람이 없지요. 나온 것도 다 우리가 왜곡시켜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가장 순수하게 예수님의 원 육성 대로 보는 걸 목적으로 하고 이제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5:30 그 첫 글에요, “이 글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이다.” 이거는 아직 1절 안 들어갔습니다. 총 114절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지금 114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거는 이제 책 앞에 써져 있는 글이지요? 서문 격인. 누가 기록했느냐? ‘디두모 유다 도마’라고 했는데요, 보시면 알겠지만 ‘디두모’라는 게 그리스어로 쌍둥이란 뜻이고요, ‘도마’도 아랍어로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디두모’라는 말이나 ‘도마’라는 말이나 쌍둥이를 의미한다라는 게 재미있죠. 그래서 쌍둥이가 기록했다. 이게 되게 포인트입니다. 뭐냐면, ‘우리가 예수님의 쌍둥이가 될 수 있다’ 하는 요런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이 글을 읽으면요 예수님하고 똑같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런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이런 말을 해요. 세상에 예수님을 갖다가 그 요즘 잘못된 사상이 들어와서 예수님을 자꾸 모델로 삼고 ‘내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라는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한다’라고 아주 놀래시는 그런 분들이 계신데, 충격적이지요, 그런 내용 자체가. 왜냐하면 성경적이지 않거든요. 성경에는요 예수님이 너희들이 나보다, 그대들이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랬고 ‘하나님의 자녀니까 온전해지라’고 했어요. 빛의 자녀니까 온전해지라고 하는 건요, 이게 빛이라고 치면요 온전해지라는 건 어둠이 하나도 없어야 됩니다. 어둠이 하나도 없고 온전한 빛이면요 도마복음에서 가장, 자주 나오겠지만, 하나라고 그래요, 예수님은, 너와 내가 하나고 하나님과 내가 하나고, 오로지 하나여야 된다는 거에요. 둘이라는 말만 나와도 싫어해요, 예수님은.


7:13 도마복음 보면 어떤 형제가 와서 저 형이 우리 유산 다 가져갔는데 재산 좀 나눠주라고 하세요 하는데 거기서도 뭐라고 하냐면, 나는 가르는 자가 아니다. 나는 둘로 쪼개는 자가 아니다는 걸 강조해요. 나는 오로지 하나로 존재하는 자다. 그래서 이 어둠이라는 게요 주역으로 치면 이 음인데요, 음양 중에. 빛은 양이에요. 빛은 한 덩어리(⚊)이고 음은 쪼개져있지요(⚋). 그래서 주역에서도 음은요 소인을 상징하고 양은 군자를 상징합니다. 왜냐 하면요, 나와 남을 한 덩어리로 보는 사람이 군자에요. 쪼개서 내꺼 니꺼 나누는 사람이 소인이고 어둠이에요. 한 점 빛이, ‘너희는 빛의 자녀이니까, 한 점 어둠 없이 존재해라’라고 예수님이 우리가 익히 아는 복음에서도 얘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절대 될 수 없고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섬기기만 해야 되고 절대 그런, 불손하게 그 영역을 넘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요 이 도마복음을 그런 마인드로 읽으면 큰일납니다. 도마복음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읽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나랑 예수님이 하나고 절대 둘로 가르는 마음을 지금부터 먹지 마세요. 나와 남도 가르지 마시고요. 제가 자주 쓰는 명상기법이지요. 모른다 하세요. 나와 남 모릅니다, 지금부터. 계속 제가 요구할 겁니다.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서 도마복음을 읽을 수가 없어요. 내 이름도 모른다고 하세요. 이름 모르시지요? 여기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상태에서 나와 남 가르지 않지요? 존재만 하는 겁니다. 그 상태가 하나입니다. 예수님 말씀 하신 하나에요. 나만 존재합니다. 이게 나와 남을 이렇게 나누지요. 내꺼 남의 꺼 쪼개놓은 나가 아니고요, 이런 게 없는 그냥 나요. 모세한테 하나님이 나는 I AM이라고 해요. 나는 나다. 나는 이걸 스스로 있는 자다 이렇게 번역하는데 ‘나는 나다’라고만 해요. 하나님이요 자기 이름을 나라고만 소개해요, 나. 왜냐 하면요 모든 존재는요 우리가 지금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가 바탕을 두고 살고 있지요? ‘나’라는 게 없다면 지금 아무 것도 펼쳐질 수 없어요.

내가 있으니까요 내가 생각한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가 나오고요, 나는 뭘 보고 있다, 뭘 느끼고 있다가 나옵니다. 나로부터 다 나왔어요. 그럼 이 나요. 생각 차원에 와야 우리가 나와 남을 가릅니다. 생각차원 이전에서는요 그냥 ‘나’라는 존재에요. 이 상태가 I AM이라는 거고 요게 지금 도마복음에서 끝까지 밀고 나갈 하나에요. 우리의 뿌리. 이 모든 성령들의 뿌리, 빛이 되는 태양이 아버지에요. 하나님 아버지 자리. 우리의 뿌리이니까요. 그 아버지는 우리의 뿌리에요.


나랑 별개가 아니고. 나라는 존재감이 사실은 아버지인데 제 입장에서 볼 때는 우리 인류, 우주 인류를 통 털은 그 나랑 내 안에서 느껴지는 나를 굳이 구별하는 게 저쪽이 아버지 이쪽이 아버지의 자녀. 이쪽이 성부이면요 요쪽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성령이라고 해요. 내 안에서 느껴지는 나를 성령이라고 하고 이 나, 우주를 다 나로 여기고 있을 그 자리. 다른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나와 제 안에 있는 나가, 그걸 총합한 걸 갖다가 우리가 아버지라고 하는데, 합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죠. 원래 하나니까. 우리가 ‘나’라고만 하면 구분을 지을 수가 없으니까요, 남하고. 생각, 감정, 오감을 내려놔도 있는 그 존재감, 나라는 존재감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구약에서부터 이미 ‘나’가 하나님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I AM이다. ‘나는 I AM이다’라고 밖에 말을 못해요. 그게 우리 안에 다 있기 때문에요, 예수님만 성령이 있어서 이렇게 생각, 감정, 오감을 성스럽게 만들고 ‘우리는 그거 못한다’라고 벌써 말을 하고 시작하면요 그거는 예수님 말하고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특이 이 도마복음에서는 아주 그거는 말이 안 되는 말이에요. 요 성령대로요 모든 인류의 성령의 근원을 성부라고 하지요. 이게 불가에서 치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합니다. 달이 하나가 떴어요. 달도 좋고 태양도 좋아요. 그게 모든, 천강千江에 비췹니다. 여러분 마음에도 비췄고 제 마음에도 비췄어요. 성부가 비췬 게 우리 마음 안에 빛인 그 빛들이 똑 같은 빛입니다. 성령이고요. 성령을 통해서 생각, 감정, 오감을 완전히 제어해서 성령 그대로 생각을 바로잡고 감정을 바로잡고 오감을 바로잡아서 사시는 분이 성자에요. 성부의 뜻을 그대로 표현하는 거에요. 육신을 가지고 펴낼 때 우리가 성자라고. 결국 우리의 목적은요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자리를 통해 성불을 이해하고 이 성령을 통해서 생각을 성령으로 바꾸고 감정을 성령으로 바꾸고 오감을 성령으로 바꿔서 성자가 되는 게 목적입니다. 조금이라도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오로지 하나여야 됩니다. 예수님하고 그 각자 내면과 가르지 마세요. 그래서 쌍둥이라고 하는 겁니다. 쌍둥이라고 우리가, 도마복음입니다. 도마가 썼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도마 이름을 왜 걸었느냐는 알 수 있어요. 도마라는 뜻이 쌍둥이란 뜻이 있어서 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는 한 배에서 난 한 형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룬 성취를 본 받아서 우리도 꼭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요즘 글이 아니에요. 예전에 지금부터 1600, 최소 1600년 전에 나온 글입니다. 거기에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13:07 예수님께서 빛의 자녀가 되라. 요한복음에서도요 아까 그렇게 제가 그 예수님하고만 접속하면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던 그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빛의 자녀가 되라. 어둠을 다 불살라야 됩니다. 내 앞의 죄성이란건요 나는 예수님 아니니까 이 정돈 남겨둬도 돼, 이런 거 없습니다. 완전히 불살라서 빛의 자녀가 되어야 되요. 그리고 ‘하늘에 계신 그대들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들도 완전해야 된다’라고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얘기하고 있지요? 네, 그렇게 되야 돼요. 그래서 이 완전해져야 된다는데요, 조금이라도 후퇴하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 제자 아닙니다. 그렇지요? 사도바울도요 무슨 말을 하냐면요 여러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게 하는 성령을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다시 깨어난다면요 성령의 현존을 우리가 체험하게 되고 각성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대로 되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형제가 된단 얘기를 바로 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아빠, 지금 우리 말이랑 똑같죠?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거에요.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다는 거. 누구한테요?


성부한테요. 예. 성부 하느님한테요, 나의 가장 근원적인, 우주적인 나한테 대해서 나의 아버지, 나의 뿌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란 걸 증언합니다.’ 이 성령께서요 사실은요 생각, 감정, 오감을요, 생각, 감정을 우리가 혼이라고 부릅니다. 오감의 세계는 주로 육체의 세계이지요. 그럼 이 남는 이 나는요 영이에요. 영과 성령이 사실은 둘이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요 내 한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순수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요 기도드릴 때 혼으로 드리라고 안 해요. 혼은요 나와 남을 가르고 있고요 자꾸 작은 생각을 해요. 이게 혼의 세계가 에고의 세계에요. 에고는요 이 육신까지만 나라고 생각하는 작은 자아입니다. 이 작은 자아는 늘 나 잘되라고 빌어요. 나 잘되라고 자꾸 빌고 싶어하고 나 좀 어떻게 물질적으로 더 많이 얻고 내가 더 성공하기를 기도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영으로 기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혼으로 기도 드리라고 안 해요. 영으로 기도 드리라는 건 이 영이라야, 영이 그대로 사실은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영은요 우리의 참나지요. 영을 다른 이름으로 우리의 참나라고 불러요. 가장 순수한 나다. 여기서부터는요, 생각, 감정, 오감은요 이 세상 안에서 계속 오염됩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아요. 계속 바뀌어요. 생각도 바뀌고 감정도 오감도 바뀌는데 근데 그거의 모든 존재하는 뿌리 걸 나라고 여기는 건요 이 영이 있기 때문에요. 이 영이 순수하게 나라는 존재감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요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오감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바라보는 자가 있을 겁니다.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는 그 존재가 있어요, 우리 안에. 그렇지요?


15:59 그래서 모른다만 하시면 바로 찾을 수 있어요. 이름도 모르겠다. 이 몸도 내 몸인지 모르겠다고 계시면요 이걸 초월한 이 영이 바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 순수한 자에요.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나의 영이고요, 그 자리를 높여서 우리가 성령이라고 불러요. 왜냐? 그 자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영이 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성령이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걸 증언할 거다. 우리 안에 그런 신성이 있다는 걸 얘기해 줄 거라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도 하다. 하나님 꺼 우리 꺼라는 겁니다. 하나님 꺼 우리 꺼라고 바로 꺼내 쓸 수 있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어디로요? 생각으로, 감정으로, 오감으로요. 그래서 예수님이요 주기도문 욀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육체에 힘을 주시고, 내가 남을 용서했듯이 저를 하느님 용서해주시고요. 내가 남을 이미 용서했다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저는 기분 풀렸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지금 기분 풀렸고, 힘이 나고 있고 기분 풀렸고 다 현재시제에요. 그때는 그런 미래시제가 없어요. 그냥 현재어에요, 다. 주기도문 나중에 다시 번역해서 보여드릴게요. 다 현재 시제입니다. 영어 원문 보셔도 그렇게 돼 있어요. 이미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난 용서했어요, 이미. 다 용서했듯이 하나님이 절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내 생각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전체적으로 악에서 구원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왕국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 ‘이루어지리라’도요 하나님의 뜻이 한(?)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원래 해야 돼요. 기도. 영어 확인해보세요. ‘이루어졌습니다’에요. 하나님이, 성령이 이미 내 안에 나타날 때, 그렇지요?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이름 거룩하시고 하나님 왕국이 임했습니다’에요. 그것도 ‘임하오니’가요 ‘임했습니다’에요. 그 말을 오묘하게 번역해놨는데요 ‘임했습니다’에요. 이미 임했기 때문에 내 안에서는 땅에서도, 이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서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내 몸에 힘이 났고, 내 감정이 남을 용서했고, 내 생각이 시험에 들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서 전체가 악에서 ‘구원됐습니다’에요. 그렇게 ‘해주세요’에요. 그 부분은 해달라는 겁니다. 그거는 뭐냐면 내가 그렇게 가겠다는 거, 이미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돼서 그 힘을 얻었기 때문에 생각, 감정, 오감에서 다 힘을 얻었죠. 성령이 안에 나타나면요, 생각, 감정, 오감이 다 파워풀 해집니다. 바르게 돼요, 저절로. 인위로 하는 게 저절로 됩니다. 그래서 동양에서 노자가 노자 같은 분은 이걸 무위無爲라고 그래요, 이 성령의 작용을. 내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그대로만 하면 되요. 이걸요 내가 성령의 뜻 무시하고요 내가 선을, 자선을 베풀고 싶어하고 내가 남한테 뭐 좋은 일 하고 싶어 갖고, 내 의지로요, 이 에고의 뜻대로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을 가지고 잘 하려고 하고 뭐 하나님한테, 남들이 볼 때 기도 잘한다는 말 들으려고 기도 잘하려고 하고, 남들이 볼 때 신앙이 독실하게 보이려고 금식하고 하면요, 이걸(생각, 감정) 가지고 하면요 예수님이 바로 그거는 둘인 마음으로 하는 거잖아요. 꽝이라는 겁니다. 바로 벌 받을 것이다 그래요. 정죄 받을 것이다. 나중에 가다 나옵니다. 도마복음 안에 그런 말이 나오는데, 오로지 성령에서 나와서 해야 되요. 그게 무위에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 그대로 펼쳐지는 겁니다. 내 생각이 바뀌고 내 감정이 바뀌고 내 몸이 바뀔 때 우리가 ‘하나님 왕국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죠.


19:39 사도 바울이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는 거고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과 공동의 상속자다. 예수님만 상속자라 말 안 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 육성도 그렇고 그 충실했던 사도 바울이라든지 제자도 그랬는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후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되죠. 그래서 그 그림 보시면요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을 비교해놨는데요. 요한복음은 불교로 치면 정토종입니다. 아미타불만 믿으면, 아미타 부처님, 왜냐면요, 보세요. 요게 아주 재미있는데요, 보세요.


내 안에 에고가 있고 그럼 내 안에 나의 영이 있습니다. 성령이 있어요. 그러면 아미타불도 에고가 있고 아미타불 안에 참나가 있겠지요. 요 둘이 다르겠느냐는 거지요? 영은요 나라는 감각밖에 없습니다. 남이라는 감각이 없어요. 그래서 이 영에서는 오로지 ‘나’라는 느낌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라고만 순수하게 느끼는데요, 남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그러면 아미타불은요 이 에고가 다 정화된 존재입니다. 이 영대로 이미 성화가 일어났어요. 에고가 성스러워졌어요. 우리는요? 에고가 시꺼멓지요.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할거냐? 시꺼먼 에고 속에 영이 있다는 거 어떻게 알거냐? 아는 방식이요, 두 가지가 있지요. 곧장 안으로 뛰어들면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요, 지금 에고의 움직임이 영의 움직임이랑 똑 같은 상태의 존재가 하는 그 생각이나 감정이나 오감이지요, 에고가 부리는. 요거(생각, 감정, 오감)를 보고 이거에 우리가 그대로 몰입해서 접속해도 우리는 결국 그 안에 있는 영을 느끼게 되고요, 이분은 영 그대로 사시는 분이니까 겉에 드러난 영을 보고 추적해 들어가서 안에 있는 영을 느끼면 결국 그게 나의 영이라는 걸 아는 겁니다. 결국에서 이게 아미타불이 불교에서 방편으로 쓰일 수 있는 이유가 아미타불이 불성의 화신이거든요. 우리가 절실하게 아미타불한테 몰입함으로써 결국은 내가 나도 원래 부처였구나, 아미타불이 나의 자성이 없구나 하는 걸 깨닫습니다. 요한복음이 이거랑 똑 같은 법을 써요. 요한복음도 알고 보셔야 됩니다. 요한복음은요 예수님이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게 이겁니다. 나의 에고는 아버지랑 한 뜻이 돼서 움직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요한복음에. 나는 아버지 뜻을 실천하러 왔다, 오로지. 그래서 내 에고 뜻대로 살려 오실 분이 아니에요. 내 영의 뜻 그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의 에고가 하는 생각, 감정, 오감을 아시는 분은, 내가 영을 다 드러내 보였잖아요? 진리의 화신이지요. 진리를 다 육화시켜서 보여줬어요. 그러니까 나의 겉으로 들은 모습만 봐도 쉽게 영이 어떤 걸 원하는지 알 거다. 영이 원하는 것들이, 어렵지 않아요. 10계명이 영이 원하는 거에요. 구약에 나오는 10계명. 그거 줄이면 두 가지에요. 하나님 사랑하고 인간, 너의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하라. 사랑하라에요. 하나님하고도 하나가 되고 내 이웃과도 하나가 되라. 원래 우주는 둘이 하나도 아니다. 나라는 게 하나님인데 온 우주를 전체를 나로 여기는 게 하나님인데 하나님하고 하나 된 분이 어떻게 저 사람은 나가 아닌 남이다라고 말하겠어요?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은 저절로 남을 하나로 여기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하나인 자리이니까요. 그래서 오로지 하나인 이 자리를 알고 나면 결국 내 안에도 그게 있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됩니다.


23:01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결합을 통해서 결국에는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게 인도에서는 구루요가라고 그래요. 헌신요가나. 헌신요가. 위대한 진리의 화신한테 헌신함으로써, 내 에고를 맡김으로써 결국에 내 안의 참나를 찾는 방식이라면 이 헌신요가 중에 스승한테, 구루한테, 구루를 진리의 화신으로 보고 거기에 몰입함으로써 결국 나의 안에 있는 순수한 영을 찾게 하는 방식을 구루요가라고 합니다. 헌신요가의 또 하나의 작은 나눠진 거지요. 구루요가나 헌신요가나 방법은 같아요. 스승을 모델로 하느냐, 일반적인 하느님 전반을 모델로 하느냐인데, 예수님이 나라고 분명히, 너희들의 스승인 나랑 접속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런 건 전형적인 인도에서 머물면 전형적인 구루요가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가 원래 구루와의 목적은 사실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걸 얘기하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 나도 영대로 살 뿐이다. 하느님의 영대로 살아서 이렇게 투명해졌을 뿐이니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영대로 살아서 너희도 결국은 이 떼를 비워라. 빛의 자녀처럼 온전히 대라. 너희는 이미 빛의 자녀니까 에고를 말끔히 깨끗이 청소해서 온전해져라 라고 얘기해주는 겁니다. 이게 원래 목적이 그러면 이 에고가요 본래 더 자력이 있었으면 바로 자기 안에서 찾았겠지요? 이게 지혜요가입니다. 곧장 자기 안에 들어가는 게 지혜요가이고 외부에 있는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상을 그려서 몰입하되 결국 그 안에서 그 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내 안에 본래 하나님이 있었다는 걸 깨달아야 이제 여기까지 가야 구루요가입니다. 중간에 멈춰서 그 분의 육신의 이런 겉으로 드러난 어떤 스승의, 스승과 하나님의 모습에만 취해서 자기 영이 본래 순수한지 하나인지 영 모른다면 이거는 방편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겁니다.


24:57 요한복음은 헌신요가의 바이블이고 도마복음은 지혜요가의 바이블입니다. 두 개를 다 쓰셔도 좋은데 목적이 분명히 알고 쓰셔야 돼요.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영입니다. 이 얘길 제가 미리 드렸지만 도마복음 안에서 예수님이 친절한 설명으로 나와요. 도마가요 내가 예수님 보고 취했다고 하니까, 아니다 너도 나도 같은 샘물에서 취한 거다. 너도 내가 돌보는 샘물로 너가 취한 거다. 너도 내가 돌보는, 나의 에고가 돌보는 그 샘물 먹고 취한 거지 내가 너를 그렇게 한 거 아니다 라는 얘기를 해요. 정확히 구분해줘요. 결국 여기까지 가야 되요. 그래서 도마복음이 귀한 이유가요 요한복음에선 방편을 썼는데 거기서 결론을 이렇게 안 내려주고 끝내버리면 아미타불만 강조해버리면 불교의 본 모습이 사라지지요. 우리가 본래 자성입니다. 부처님 돌아가실 때 너 안에 있는 자성을 믿어라. 결국에는 기독교 식으로 이야기하면 너 안에 있는 성령만 믿어라 라고 얘기를 해줬는데 부처님 육신의, 부처님 모습에만 취하게 되는 그 방편만을 만약에 써버리고 만다면 그럼 심각한 결론을 났겠지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이 왜 이렇게 정토종과 유사하다고 하느냐? 그거 한번 보세요. 요한복음 보세요. 그대들은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 믿고 나를 믿어라. 나의 아버지 집에는 그대들이 머무를 곳이 많다. 그렇지요? 천국에는요. 그대들이 머무를 곳이 많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대들에게 그대들의 자리를 외비 하러 간다고 말하겠는가? 내가 자리 마련해줄 것이다. 나를 믿고 의지한 자들에게 자리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가서 그대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또 와서 그대들 데려 가겠다. 그렇지요? 이게 아미타불 신앙이랑 어떻게 만나는지 조금 있다가 바로 설명해드릴게요. 또 요한복음에 이런 말 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그 이름만 외면요 천국 갈 수 있다 라고 합니다. 또 사도행전에서는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을 것이란 말도 합니다. 요거는 방편이에요. 왜냐하면 도마복음 안에서는 이런 방법을 최대한 자제합니다. 이런 거는, 그렇지요. 예수님과 접속을 유도하는 이런 그런 방식은요 도마복음에서 분명히 나와요, 도마복음에서도. 그런데 그거는 아주 한정적으로 쓰이고 결국에는 꼭 가르쳐줍니다. 결국은 사실은 너 안에 있는 거다 라는 걸. 그런데 이런 방편이 불교에서도 쓰입니다. 보세요. 무량수경에 아미타 부처가, 법장 비구가 아미타불이 수행할 때 일이네요. 밥장 비구가요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극락세계를 만듭니다. 이 극락세계가 원래 있던 게 아니고요, 보세요. 아미타불이요 이 양반이 수행할 때, 법장 비구에요. 법장 비구가 수행을 할 때 48가지 원을 세우고 수행을 해가지고 만든 게 극락세계 라는, 극락정토, 극락정토지요. 극락정토를 만들고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요. 그걸 서원할 때 보세요. 아미타불의 그 본생이 법장 비구인데요, 10겁 전에 이제 아미타불이 됐어요. 그런데 18번째 서원을 보세요. 제가 부처가 될 때,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기면서 저의 국토에 태어나 제 이름을 10번만 생각하면 제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생각하되 태어나지 못한다면 내가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이해되십니까?


28:25 나의 이름을 10번만 외도 극락정토에 사람들이 여기 올 수 없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처가 될 때는 그렇게 되겠습니다, 만들겠습니다. 19번째요. 제가 부처가 될 때 중생들이 깨닫고 싶은 마음만 일으키고 모든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을 하면서 제 국토에 태어나기를, 우리 천국에 태어나길 원한다면 제가 그 사람들이 죽을 때 여러 대중들을 거느리고 가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나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안되겠습니다, 내가 부처. 그러면 이 아미타불이 이 무량수경에서 제시하는 방편은 간단하죠? 끝없이 아미타불을 염하라는 겁니다. 살아서 죽는 순간까지.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열린다. 그런데요 불교에서는 이렇게 해가지고 부처가 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조금 더 편의를 봐줄 수는 있어도, 아미타불이. 결국에는 자성미타 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말이 재미있지요? 그래서 결국 많은 스님들이요, 서산대사나 이런 아주 큰 스님들도, 원효스님도요, 아미타불을 그렇게 강조해요. 원효대사가 거지 소굴에 들어가서 아미타불만 가르쳐요. 아미타불만 외면 극락 간다는 얘기를요 그 거지소굴에 들어가서, 거지들이 무슨 수행을 갑자기 하겠습니까? 이런 식견이 없는데. 그러니까 요것만 외라. 그러면 성불한다. 그렇게 해서 가르치십니다. 극락세계 태어난다. 그래서 이걸 자성미타 라고 하는 게 아미타불이 결국 내 본성이라는 걸 알아야 끝나요. 이 자성미타를 알라고 그래요. 결국에는. 아미타불을 막 멋지게 그려가지고 염하더라도 결국에는 뭡니까 요 보세요. 요 그려진 아미타불은 제 오감에 불과해요. 그렇지요? 절대로 하나님이 오감 수는 없죠. 제 눈에 비친 멋진 예수님의 모습, 제 기억에 남아있는 예수님의 말씀, 다 이거는 오감과 생각, 감정에 불과해요. 그렇지요? 하나님은 절대 영에서 구해야지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서 구하면 안 됩니다. 그걸 초월해계신 자리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결국은 그 모든 오감을 봐도요 하나님의 모습을 봐도 결국은 그게 어디서 지금 비추는 거냐? 오감이 어디서 나올까요? 나라는 존재감에서 나와요. 다 시작이. 그렇지요? 오감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 다 무상하지만 그 오감을 갖다 보고 있는 나는 영원합니다. 나라고 하는 건요. 그래서 그 자리. 순수한 나라는 존재입니다. 특정 오감에 집착하는 나는 같이 무상해요. 보세요.


30:45 아미타불이 보였다 칩시다. 아주 광명하신 어떤 성인의 모습이 보였다고 해도 그걸 보고 있는 나가 있어요. 자, 보세요. 여기서 이거는 주관이라고 하고 이건 객관이라고 합니다. 주관, 객관은요 같이 꼭 같이 존재해요. 왜냐 하면요 이런 휘황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내가 없다면 이게 존재할 수가 없겠죠. 대신에 또 반대로 요게(객관) 존재하지 않다면 요거를 보는 나라는 거는, 이거(주관)는 그냥 순수한 내가 아니에요. 저 영상을 보는 나지요. 즉, 제한된 나입니다. 제한된 나는 에고에요. 시공간에서 제약을 받고 있는 나는 에고에요. 그래서 보세요. 이 펜이 여러분 보이시지요? 지금 이 펜 보이시지요? 요 펜하고 펜을 보는 나는 같이 생겨난 겁니다. 지금 순간적으로. 여러분 마음 안에 이 펜이 들어오는 순간 펜을 보는 나가 생겨났어요. 그전에는요 펜을 보는 나는 아니에요.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였지요. 요게 에고에요. 제약된 나. 하지만요 요 펜도 잊어버리고, 펜을 치워버리면 펜을 보는 나도 사라지고 결국에는 나만 남는다는, 순수한 나만. 그러니까 펜을 보다가, 펜도 잊어버리고, 펜을 잊어버리고 나면,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면, 펜을 보던 나도 지워져요, 같이 사라져요. 그럼 남는 건 나만 남습니다. 순수한 나만. 아미타불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별 영상을 보더라도 그거는 오감에 불과해요. 좀 신비한 오감일 수는 있지요. 그 오감을 보는, 그 오감을 보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특정시간 때에 특정 장소에서 특정 모습을 보던 나도 에고에요. 두 개가 같이 다 놔야 순수한 나만 남습니다. 뭐든지 될 수 있는 나.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 나만 영원해요. 이 나가 뭘 보고 있는 나가 되면 영원하지 않아요. 그건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순수한 나만 부처고 나의 영이고 나의 성령이라는 걸 아는 거기까지 공부해가야 합니다. 그게 방편을 쓰는 목적입니다. 방편은요 편법이에요. 편리한 법들이에요. 편리한 법들은 도와주는 법이긴 하지만 정법은 아닙니다.


32:50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해요. 우리도 성숙한 이들 사이에선 지혜의 계시를 말합니다. 이 말은요 바울이 그전에는 안 썼다는 거에요. 그전에는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얘기만 하고 다녔거든요. 제자들한테. 근데 이 말을 해요. 우리도 성숙한 이들 사이에서는요 지혜를 얘기합니다. 요게 이제 그로시스파 파고 지혜를 중시하는 영지주의파가 있지요. 거기 못지 않게 우리도 사실은 성숙한 이들 사이에서는 지혜를 얘기합니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장차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 무상한 지혜가 아닙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비로운 지혜입니다. 이어서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그걸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있거든요. 성령은요 사실 하나님이랑 하나에요. 그렇지요? 보세요. 이 컵에요, 지금 공기가 성부라면요, 이 공기가 성부입니다. 컵의 공기를 일정 분량 담아서 제가 컵에 담아서 놓으면요 요 공기랑 요 공기랑 구별이 지어지고 여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전체가 성부면 이게(컵 안) 성령입니다. 하지만 요 안에 보면 똑같아요 이 공기랑 이 공기랑 다르지 않아요. 다만 우리 에고 안에 들어왔을 때는 나눠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 나눠진 것처럼 보이는 자리를 성령이라고 하기 때문에 본래 성부랑 성령은 한자리이기 때문에, 보세요. 하나님, 즉 성부는 성령을 통해 우리한테 드러내어 자신의 모든 비밀을.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 통찰하세요. 왜냐하면 한자리이니까요. 다 나라는 자리에요. 나라는 존재감의 자리. 그 사람의 영이 아니고는 누가 그 사람 생각 알겠습니까? 같은 영이에요. 그 자리. 하나님 성부의 영이랑 성령의 영이 어떻게 다릅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 즉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까지 우린 다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혜 얘기합니다 이겁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방편도를 많이 썼어요. 바울도. 바울도 이런 얘기 많이 했어요. 하느님.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이 우리를 다 죄를 대속해줬으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는 구원합니다 라고 얘기했지만 그건 초급자한테 한 겁니다. 그 다음 뭔 얘기를 하냐면 중급자 이상은 우리도 결국은 지혜의 계시(?)를 얘기합니다. 결국에는 당신 안에 있는 성령 찾아야 됩니다. 왜냐? 그 성령에서만 하나님의 모든 신비가 풀립니다 라고 얘기해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요, 그대들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께서 그대들 안에서 살아계신다는 걸 그대들은 모르겠습니까?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파멸시킬 겁니다. 보세요.

우리 안에 성령이 있고 이 자리는 하나님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담고 있는 우리의 에고요. 우리의 생각, 감정, 오감은 사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요. 그래서 생각의 하나님을 어떻게 담을까요? 생각이요, 생각이라는 그릇이 하나님의 성령을 담으면 지혜가 되고요, 감정이 하나님의 성령을 담으면 사랑이 되고요, 오감이 하나님의 성령을 담으면 엄청난 능력이 되요. 그래서 전지, 생각은 전지해지고, 감정은 사랑이 되고요, 사랑은 합일간입니다. 나와 남을 둘로 나누지 않아요. 오감은요 전능이 되요. 그래서 전지, 전능, 사랑의 존재에 한 없이 가까워집니다. 우리 에고는. 그렇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성령을 담으면 달라져요. 성령을 무시하면 이 에고는요 작은 나, 나와 남을 끝없이 가르면서 작은 생각, 작은 지혜, 잔머리지요, 작은 지혜, 잔꾀를 부리고요, 감정도 이기적인 감정만 써요. 그리고 오감도 무능력합니다.

이 에고가 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 작은 자아가? 원래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요 이 에고는요, 죄성이라는 별게 아니에요. 에고는요 원죄가 있어요. 왜냐하면 작은 나 위주로 살아가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이거를 갖다가 이런 용어를 붙였습니다. 소아적 효율성만 따져요. 나한테, 작은 나한테 이익이 되냐? 이 무상한 나한테 이득이 되냐만 따져요. 성령은 안 그래요. 여기가 소아적이라면 성령은요 늘 대아적 효율성만 따져요. 우주 전체에 뭐가 유리한가? 뭐가 도움이 되나? 이거만 연구하는 자리. 성령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절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정의가 뭐니 따지고 윤리를 따지고 사랑을 따지는데 요 작은 에고로 따지면은 아무리 따져도, 천 년 만 년을 따져도 결론이 안 날 겁니다. 왜냐하면 다 자기 위주로 이익을 계산하고 있거든요. 오직 성령으로 해야만이 가장 깨끗하고 정확한 정의가 나오고 윤리가 나옵니다. 이 성령이 좋아하면 선이고요, 성령이, 내 안에서 이 순수한 나가 싫다고 하면 가짜에요. 그건 하지 마라는 짓이에요. 이 자리는 우주랑 통해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냥 알아요. 그런 짓 하면은 벌 받는다 이거 그냥 알아요.


37:57 그게 우리한테 양심의 가책이란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알아요. 죄 짓고 나면 절대 당당하지 못해요. 남이 아무 말 안 했는데 변명을 해요, 자꾸. 자기가 자기한테 변명하고 있어요. 성령한테 하는 예기에요, 사실은. 내 에고가요 성령한테 하는 얘기에요. 사실은 그게요 여차저차 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고 남이 안 들어서 혼자라도 하고 있어요. 가책이 오니까. 무섭지요? 이게 성령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는 우리가 양심이 있다는 거랑 똑같아요. 성령이 양심이 나오는 자리니까요. 1절로 가보지요. 지금 이 1절 전에 제가 말씀드린 건 이겁니다. 기존의 요한복음이라는 거는요 구루요가의 바이블입니다. 내 바깥에 하나님을 세우고 몰입해 들어가서 결국엔 내가 나랑 그 하나님과 둘이 아니라는 걸 아는 요가이고요. 지혜요가는요 결국 성숙된 요가라는 거, 곧장 내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지혜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까지 얘기했습니다. 바울이. 꼭 그 점을 유념하시고요. 성령이라는 부분 더 있지요.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정말로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십시오. 세상 거들을 내려놓아 보세요. 제가 모른다 라고 하는 게요 이 바보입니다. 이게 신기하지요? 노자는요 무지無知 하라고 그랬어요. 제발 머리 좀 쉬라 그랬어요. 바오로는 바보가 되라 그랬어요. 같은 얘기입니다. 세상 거에 대해서 좀 무지해주세요. 좀 내려놓으세요. 그러면 세상 거에 대해 내려놓는다는 건요 보세요. 세상 거를 추구하는 마음이 우리의 에고지요? 에고가 무지나 바보의 입장을 취하면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성스러운 영이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느껴지실 거에요. 요게 하나 욕심이 나요. 이 욕심이 나는 때도 욕심난다는 거에 대해서 한번 무지해 보세요. 바보가 돼보세요. 욕심나는지 모르겠다고 몰라 라고 해보세요. 그러면요 그 순간에 순수한 나에서 올라오는 지혜와 사랑과 능력이 올라옵니다, 거기에서. 그래서 바보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다, 우리가 장기부리는 거는. 에고가 잔꾀를 부릴 때, 내가 혼자 살겠다고 욕심을 부릴 때 모른다고 하시고 한번 내려놔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양심적인 어떤 메시지가 우리 안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 머리 좋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지 꾀에 지가 잡힌다는 겁니다.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는요 머리 좋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걸 아신다. 그거 다 뻘 생각이에요. 내 에고가요 아무리 지혜롭게 세상 걸 가지고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뻐하실 가야라고 아무리 따져도요 예수님이 오시면 바리세파들이요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 구원받을 거야, 내가 십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십계명 잘 지킨 양반들이에요,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이 영의 입장에서 그렇게 살면 천국 못 간다라고 바로 얘기해버리잖아요. 그런 짓을 하면. 내가 하나님한테 이쁨 받으려고 그렇게 세상을 가지고 자기 식대로 풀면은 안 된다는 겁니다. 순수한 영에서 나오는 게, 이 무지와 이 무욕의 상태에서, 노자는 무지, 무욕하라고 했는데요, 보세요.


41:08 이 순수한 영에서요 보세요. 이 에고의 세계로 순수한 영에서 나오면 사랑이 나올 거고요, 정의가 나올 거고, 지혜가 나올 거고, 겸손이 나올 거에요. 그렇지요? 그리고 이 4가지 마음을 가지고 쓰면요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갖다가 크게 둘로 나누면 경천, 하나님 사랑하고, 애인, 내 이웃 사랑하라거든요. 인간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요. 이 영을 갖다가 우리가 이 영을 존중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경천입니다. 영은 하나님 자리에요. 이 영대로요 우리가 사랑과 지혜와 정의를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서 인간 관계를 조화롭게 풀어나가면요 이런 분이 영생하고 천국 가는 거죠. 영원히 살아요. 이 영으로 인해 분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이 영을 모르고요,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는데 파도는 에고에요. 지금 영을 갖다가 에고 안에 그리니까 영이 작은 거 같죠? 사실은 에고가 파도고요, 이 바다가 영이에요. 우주적인 영에서 작은 파도가 하나가 뜨는데 이 파도를 비춰주는 이 바다의 빛을 우리가 각각의 파도가 느낄 때 성령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원래 성부인데요 크게 해서 아버지 자리인데 각자 그 아버지의 한 빛을 갖다 받아서 우리가 살아요. 우리 영으로 삼고. 그래서 이 영이 이제 나로 인해 제안, 내 안에서 비치는 영이 되는 거지요? 내 입장에서 보면, 나의 에고 입장에서. 그 빛대로 우리가 살 수 있으면 우리 에고는 정화돼요. 그래서 이 영을 알고 내 에고를 바로 잡는 게 경천애인 하는 본 맛이지요. 그런 분만이 영생을 얻습니다. 인제 이렇게 한번 보시고요. 예. 그렇지요? 그래서 이 영에서 나와서 십계명 하지 않는 분은요, 보세요. 이 영을 모르고요 바리세파처럼 내 에고로 해요. 이렇게 하면 이뻐하실 거야, 이러면 천국 갈 거야, 자기 계산을 해가지고 자꾸 계산을 때리고 있습니다. 계산기 두들기면서 선행을 해요. 그런 십계명을 지키는 그런 율법주의는 못 간다는 겁니다, 천국에. 예수님이 분명히 얘기하셨지요, 여러 복음에서도.


43:14 1절을 볼게요. 누구든지 이 가르침의 참뜻을 깨닫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될 것이다. 요게 1절에 이 말이 있는 게 되게 중요한 게요 도마복음은요 영생을 얘기하는 경전입니다. 이게 목표에요. 즉 요 경전의 목적은요 보세요.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는 거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아까 그 서문에서 쓰였던 말 기억하십니까?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 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다 그랬어요. 그거를 이 도마가 적는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건요 요게 밀교라는, 밀법이라는 거에요. 이 밀법이 다르고 이 불교에서도 현법 이렇게 구분하는데, 현법은요 대중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거구요, 밀법은 소수의 알만한 제자들한테만 얘기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은요 밀법이라고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은요 사람들 있을 때는 잘 못했던 내용이라는 거에요. 대중들 있었을 때에는. 믿을만한 제자들. 이해할만한 제자들한테 했던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 밀법의 내용이 뭐냐면, 영생이에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는 건요 죽은 뒤에 영생을 얻는 그런 게 아닙니다. 죽으면 그냥 끝나는 거에요.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은요 죽음이 찾아와서 만약에 죽음이 우리 육신과 우리 혼을 분리시키면요 그러면 영생은 글렀다고 보시는 겁니다. 기존 성경에서 보는 거랑 많이 다르지요? 기존 성경에도 이런 설명이 있는데요,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방편도 아까 아미타불만 믿으면 극락 간다는 그 불교 이론처럼 예수님의 그런 이론들 중에 이름만 외면 천국 간다 극락 간단 말 많이 듣다 보니까, 내가 살아서 잘 믿기만 하면 죽으면 간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도마복음을 통해서 한번 다시 기존 복음까지 해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세요. 영생의 조건들이요 5가지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말씀 드리면요, 영원히 내가 살아서 죽음을 맛보지 않아야 되요. 이게 포인트입니다. 죽음 뒤에 내가 극락세계 가서 영원히 산다는 게 아니에요. 죽으면은 죽음을 맛봤으면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옆에 그림 보이시지요.


45;20 사람은요 영이 있고 혼이 있어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이 육체가 있어요. 그런데 이 육체는요 도마복음에서 분명히 말해요, 이 육체는 이거는 갖고 갈 거 아니라는. 이 육체는요 지상에서 잠시 쓰는 거지, 영원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육체를 도마복음에는 시체라고 불러요.

영을 깨닫는 자는 시체를 깨달을 것이다 그래요, 시체를 알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이 육신이 나라고 알고 있지요? 에고는요 이 혼은 육신이 나라고 알고 있고 살아요, 보통. 그렇지요? 혼은 육신을 나로 아는데, 혼이 아, 나는 영, 나는 본래, 여기는 바다고요, 이 혼은 파도지요, 이 혼과 육은. 바다 위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파도구나 라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영을 깨닫고 나면. 내가 바다를 깨닫고 나면 나는 바다에 잠시 나타낸 모습이구나. 해서 이 모습에 집착을 안 해요. 이 육신도 내가 잠시 쓰고, 많이 써봤자 100년 안쪽이지요? 놓고 가는구나 하는 걸 알아요. 그러면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건 이 영혼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맛봤을까요, 맛보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으면 이 육체는 놓고 가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도 무덤 찾는다 그러고 막 하는 게 지금 예수님이 육신 찾는 거지요. 그런데 그 뛰어난 분들도 육신을 남기고 가요. 육신은 시체지요. 네. 그러면 죽어서 영혼만 천국으로 간다고 치면 요거는 죽음을 맛봤다는 겁니다, 이미. 그렇지요? 이게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요 엄청, 제가 5가지 기준이 있다는 게, 5가지 기준을 가지고 늘 얘기하세요 공관복음도 이걸 보시고 나서 공관복음 보시면 늘 그렇게 이해하고 계시는 걸 알 거에요. 그냥 뒷사람들이 편한 대로 막 이렇게 하면 갑니다, 이것도 다 자기 식, 각자들의 잔꾀에요. 이렇게 하면 가지 않을까? 내가 이 정도 했는데 가지 않을까? 그게 아니고요 예수님 말씀, 육성 그대로 가야 돼요. 영혼에서 육이 분리되는 순간 죽음을 맛보게 되니까 이거는 꽝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오는 도마복음에서 계속 얘기하는 게 죽음이 나를 찾아 오기 전에 답을 얻으라고 되어있어요.


47:33 이 육체의 주인이요. 이 육신의 주인은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건 제가 아니다는 거에요. 이 육신은 죽을 때 놓고 가야 되니까 영원한 내 게 아니잖아요? 여기까지가 영원한 내 거인데 요놈 가지고 진짜 주인이 찾아와서 이거 내놓으라고 하기 전에 답을 얻으라고 되어있어요. 그때 어떻게 되냐면 도마복음에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라고 되어있어요, 영적 육체를 만들라고 되어있어요. 요게 예수님 부활의 신비에요. 어떤 분들은 도마복음에는 부활 얘기 안 나온다고 하는데요, 부활의 핵심이 나와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런 사건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살아 생전에 계속 부활해야 된다는 얘기를 계속 하십니다. 영적으로 이 새로운 육신을 얻지 못하면요, 이건 불멸의 육체여야 되요. 영원히 내 거인 육체요. 요 육체는 내 게 아닙니다. 죽을 때에는 놓고 가야 되요. 시체라고 아예, 시체라고 불러요, 예수님은. 참나를 깨닫는, 성령을 깨닫는 자는 시체를 발견할 거다 라고 그래요. 그럼 시체라는 거는 내게 아니라는 거에요. 쓸 때는 잘 쓰겠지만 분명히 놓고 가야 되요. 그럼 놓고 갈 때 이 육신과 혼이 분리될 때 죽음을 맛보게 되어있어요. 그럼 죽음 맛보지 않으려면 살아 생전에 영적 육체를 만들라는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매미가 허물 벗듯이 나가겠지요? 이거는 동양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그래요. 매미가 날개가 생겨서 하늘로 올라가는 거, 나비나 매미 같은 존재가요. 그래서 매미를 금선이라고 하지요. 금선탈각이라고 그래요. 육신을 벗고 허물을 벗고 진짜 육체가 하늘로 올라가는 이런 존재를 동양에서 신선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 육체를 부활해야 된다. 그렇지요? 그 얘기를 보세요. 기독교의 순교 성인이에요, 이분도. 스콜라 철학, 마지막 로마 철학자나 스콜라 철학자도 되시고요. 보에티우스라는 분인데 그분의 저서 철학의 위안에요, 신에 다가간 성인들은 재난과 병을 겪지 않는 에테르의 몸을 갖고 있다고 나와요. 그렇지요? 이 에테르라는 거는 기운입니다, 에너지요. 에너지체. 에너지체로서 기운체로서의 어떤 몸이 있다는 겁니다. 요거는 절대 불멸이라는 겁니다. 부패하지 않아요. 썩지 않아요. 고린도전서에 사도바울도 이 얘기를 해요. 물질적인 육체가 있다면 영적인 육체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15장에서 이 얘기를 하십니다. 살과 피를 지닌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분명히 얘기하지요? 요거 갖고 가지 못해요. 섞어서 부패하는 것으로는 썩지 않는 것을 물려 받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얘기하지요.


50:04 영적 육체를 얻어야 되요. 그거는 그러니까 이 말에 나와 있죠. 썩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육체라야 하나님 왕국에 진짜 극락에 들어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런 에너지체를 가지고요 새로운 육신을 만들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시면 제가 하느님 모시는 성전을 그려놨는데요, 요게 실제로 지금 지성소라고 하는 거에요, 요기가요. 이 부분은 지성소에요. 모세 때부터 만들어 온 겁니다. 하나님 모시는 곳이에요. 모세가 여기 들어가서 하나님 만나지요. 여기 성궤가 있고 그래요. 지성소가. 성소는요 일반 사제도 들어가는데, 여기(지성소)는 꼭 제일 높은 양반만, 제시장만 출입해요. 그리고 여기는 일반 마당 뜰이에요. 그렇지요? 성소의 뜰이라고 그래요. 성소 뜰. 요게 상징하는 게요 여기가 육체를 상징합니다. 성소는 혼. 일반 사자도 들어가요. 여기(지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가요. 여기는 하나님 만나는 곳이에요. 여기가 우리 영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영혼육이 이렇게 나뉘어있어요. 그런데 이 육체도 없어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른 복음들 보면 꼭 부활해가지고 몸을 보여주고 하시잖아요? 이게 뭐냐면, 상징하는 게 실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도마복음에서 실제 그랬다는 얘기가 안 나오지요? 도마복음, 예수님이 살아 생전의 육성만 담았으니까.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계속 강조하시던 내용이에요. 그래서 그 예수님 그 부활은 내가 못 믿겠다 라고 하면요 도마복음은 부활 안 나와서 나는 믿겠다 그러면 안 됩니다. 도마복음에서는 새로운 육체를 형상을 만들어내 된다고 구체적으로 써놨어요. 새 눈, 새 귀, 새 팔다리. 그래서 그거 만드는 게 영생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그 부분도 있고요, 그 영이라고 하는 거는 요한복음 그 나오지요?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이 영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에요. 이때요 내용 따로 있고 하나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요. 영이라고 하는 건요 순수한 자리에요. 혼이 아닌 자리이거든요. 혼은 생각, 감정, 오감을 관리하지만 영은 그걸 초월한 자리에요. 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예배 드리는, 기도 드리려는 분이 있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만 하라. 영은 그대로 진리에요. 성스러운 자리에요. 영 따로 있고 진리 따로 있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이요, 나라고 하는 고 자리, 나라는 순수한 자리. 나, 보세요. 나라고만 하시면요, 나라고만 해보세요. 이때 나와 남이 없어요, 나. 나. 나는 하고 뭐가 붙어야 이제 생각이 일어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하면요 나와 남이 갈라져요. 나는 슬퍼. 나는 무엇 때문에 슬퍼. 나는 기뻐. 이러면요 나와 남이 지금 갈라지지만 나라고 하는 주어만 있으면요 절대로 여기에는 남이 붙지를 못해요. 나는 하고 생각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고 오감이 일어나야만, 나는 하고 뒤에 뭐가 붙어야 되요. 붙지 않는 나. 그러니까 하느님이 I AM, 나라고만 얘기하는 겁니다. 우주는 다 나로 이루어졌다는 게요 내가 뭐 하고, 내가 밥 먹고, 내가 슬프고, 내가 보고, 내가 듣고 하고 있거든요. 우리 각자가 소우주기 때문에 우리 안에 사정을 보시면 다 나와요. 살아서 지금까지 변치 않는 자리가 이 자리 말고 어디 있어요? 나라는 것만 안 바뀌었어요. 나의 내용물들도 다 바뀌었어요.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오감은 바뀌었어요.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