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1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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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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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
강의일자 2020. 02. 22. 土.
게시일자 2020. 05. 20.
동영상 길이 52:31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OnuUNXWbmoI


《17절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는 오감으로 파악이 안된다는 것이고, '생각할 수 없다' 는 것은 생각 차원에서도, 마음 차원에서도 파악이 안된다는 거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근을 넘어선거죠, 불교에서 이 참나자리, 성령의 자리는, 육근을 넘어선다고 그러는데 비슷한 표현입니다. 똑같은 표현이 다 있어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이러면 육근 이거든요, 안(눈), 이(귀), 비(코), 설(혀) 맛볼 수도 없고, 신 몸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참나자리는, 성령자리는, 이게 참나죠, I AM 자리죠, I AM 뒤에 이게 붙어서 작동하는 거 거든요. '나는 생각한다, 나는 봤다, 나는 들었다, 나는 냄새 맡았다, 나는 맛봤다, 나는 만져봤다'인데 그게 뒤에 뭔가가 붙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본체를 이걸로 어떻게 파악하냐는 거예요, 말단으로 본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왜? 그 자리는 모든 것의 배후에서 인식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를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봤다' 그러면 본것도 뭐냐면 이 자리에서 근거해서 본거지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주체가 되는, 순수한 주체 자리는 인식되지 않고 인식하는 존재 입니다. 인식하는 존재, 기본적으로 인식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하는 존재, 그래서 이 자리가 모든 것 배후에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는 거니까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겁니다. 차별화 하기 위해서, 이 육근의 작용과 이 자리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자리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자리입니다. 알아차려지는 자리가 아니라 알아차리는 자리,

설사 생각을 통해서, 한 생각을 일으켜서, 그 한 생각을 가지고 나를 다시 반성해 봤다 하더라도 결국 이 자리가 알아차리지,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는, 결국 알아차리는 자리는 최종적으로 누구예요?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알아차리는 거예요, 생각이 알아차리는게 아니예요, 이 자리가 이 자리를 알아차리는 거지, 근원적으로 절대 남에게 인식되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는 그 자리, 그러면 그 자리가 I AM 자리고 하나님 자리 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자리를 찾아보면 혼은 그 자리가 못돼요, 이거 모두 혼 작용이잖아요, 육근이라는 것은 혼의 세계입니다. 여기는 성령이 영의 세계고, 영은 알아차리는 자다, 혼은 영에게 알아차려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혼이 영을 알 수 있는게 아니다' 이겁니다. 이해되시죠?

이런 영적인 세계를 다루기 힘든게 개념정립이 힘들어요. 체험이 튼튼하지 않으면 말 살짝 바뀌면 다 흔들립니다. '이 말인가, 저 말인가' 체험없이 개념만 가지고 누가 더 논리적이냐 따지고 있는 짓은 참 무용해요. 그래서 개념과 체험의 일치가 중요한거지 절대 논리 배틀에서 승리하고 이런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여기서 말싸움으로 '사람은 원래 손이 3개다' 하고 논리로 이길 수도 있어요, 둘 밖에 없는데 '세개라는 논리가 맞네, 원래 세개여야 되는데 내가 둘만 가졌네' 팩트 무시하고 가다보면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게 논리예요, 팩트체크가 제일 중요합니다. 제일 힘을 가진게 뭐예요? 팩트체크죠, 팩트폭력, 팩트폭격 이게 왜? 무섭습니까? 팩트에는 누구도 '아' 하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아' 하고 아닥할 수 밖에 없는 힘을 팩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저력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영적인 얘기도 팩트에 기반해서 정확히 설명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해봤자, 논리로 붙는 분들은 자기 기상천외한 논리를 들고와서 이런 말에 대해서 거부할 수도 있겠죠? '만져지지 않는게 어디있냐?, 생각할 수 없는게 어디있냐? 참나도 생각할 수 있지 않냐?' 그럴싸하지 않으세요? '나 방금 생각했어 어떻게해? 참나 생각 해버렸어' 생각할 수 있는데 왜 생각할 수 없다고 하죠? 그건 하나의 개념이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 배후에 알아차리는 그 자리가 성령이고 참나라는 거예요. 개념 붙잡고 나는, 생각이 파악한 것은 개념이지 참나 그 자체가 아니란 말이예요, 이상하죠? 오감의 대상들은 오감으로 파악가능한데 그런데 이 참나자리는 왜? 파악이 안된다는 거냐? 오감 배후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 정확히 이해못하시면,

이 말도 쉬운말 같아도 피상적으로 다 아는 것 같은데 논리적으로 저는 따지자는게 아니예요, 자명하다고 분석해 보면, 팩트체크 하면서 보면 이상하다는 게 나옵니다. 그게 진짜 논리지, 전제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걸 막 진리인냥 끌고가는 그런 논리는, 논리배틀 이긴들 의미 없습니다. 돌아서면 다 무상한 거니까 팩트에 기반한 논리만이 힘을 갖죠, 팩트체크된 논리가 제일 무서운 논리예요, 자명한 논리구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귀’도 들은 적이 없고, 어떤 ‘손’도 만진 적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던 것을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죽이죠, 그런데 그걸 또 준데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받아야지' 이것도 이상하잖아요, 이게 '성령 받으라' 인데 아니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라면 마음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거 아닌가요? 이말을 조금만, 제가 논리적으로 궤변을 하는게 아니예요, 그냥 자명하냐는 거죠? 이 자체, 이거는 아주 단순한 논리입니다. 복잡한 것도 아니예요, 인간의 마음에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을 내가 줄테니까 받으라는거 아니예요. '자 준비하고 있어요, 주세요, 쏘세요' 이상하잖아요.

(이심전심) 그래서 불교에서 또 똑같습니다. 이것은 마음으로만 전해질 수 있다. 이런말이 (이심전심) 왜 나올까요?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복사 가능하다. 다운받으려면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다운된다, 이것도 한계가 있는 말이예요, 개념도 마음으로 주고받을 수 있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음에서 마음으로밖에 못주고받는다는 것은 이게 언어화도 안된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예요, '언어화도 안된다' 말로 주고받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가는거지,

이런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성령을 느끼고 있어요, 말은 방편이구요, 어떤 말을 통해서 선문답을 할 수도 있고 말을 안하고 침묵으로 보여줄 수도 있고 어떤 행위로 보여줄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제자 마음에 '아, 여기가 성령이군요' 하면 이게 복사된 겁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송된 거예요. 그런데 원래 전송된게 아니예요. 왜? 그러면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되니까,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애초에 아니거든요.

☆ 원래 있는 거예요, 원래 있는 것을 자각하게 도와준것 뿐이예요

내 안에 있는 성령은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주체예요,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것 넘어에 있는 나의 현존, 영원한 현존이예요. 그러면 '당신도 현존있지않냐?' 그 현존을 스스로 자각하게 도와주는 거지 개념으로 설명해서 마음에 떠오르게 해봤자 그게 아니기 때문에, 현존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현존은 언어를 초월해서 영의 경지에, 영의 상태에 들어가야 알 수 있거든요.

(선문답) 영의 상태에 내몰아야 되니까 모든 불교의 선문답들도 참나를 말로 설명해서 안되니까, 참나를 영의 경지로 끌어올려 주는게 선문답입니다. 이게 차이예요, '선문답도 참나를 말로 할 수 없다면서 말 더럽게 많이 하더라' 선문답도 말 더럽게 많거든요. 그럼 이게 '말로 설명한게 아니냐?' 아니예요, 선문답은 왜 선문답이냐? 그 말을 따라가다보면 언어를 초월해서 영으로 직행하게돼요. 그래서 선문답 입니다. 그 효과가 안나면 선문답을, 활구참구, 사구참구 그러죠. 살아있는 참구는 언어를 바로 떠나는거고, 죽은 참구는, 화두선을 죽은 방식으로 공부하는 분은, 언어를 가지고 자꾸 논리를 펴고있는, 개념화하여 내마음에서 파악 가능햐 개념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노는 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생각의 대상은 법) 자! 보세요, 마음은 뭘봐요? 색깔을요, 귀는요? (색성) 소리를요, 코는요? (향) 향을 맡죠, (색성향, 맛 미자) 미, (촉감) 신체는 촉감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각자 대상이예요, 마음은 뭘 대상으로 삼을까요? 불교에서는 법, 그럼 이게 법칙도 되지만 일반적으로는 법칙을 담은 개념을 의미합니다. 의미하는 바는 본래 법칙이예요, 여러분이 뭔가 생각한다는 것은 일정한 법칙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어떤식으로 생각해요? 생각은 뭘 대상으로 삼아요? 직접적으로 개념이예요, 마음은 개념을 떠올려서 개념을 가지고 놉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 법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 진리의 법이 아니라 마음안에 떠오른 법들이예요, 그래서 개념이라고도 하는 거예요, 마음의 대상은 법이다. 그런데 알기쉽게 말씀드리면 마음의 대상은 개념이예요 (개념) 마음은 어떤 개념을 떠올리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런데 그 개념안에 들어있는 것은 일정한 법칙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본질을 말하면 마음의 대상은 법칙인거고, 그런데 사실 좀 따져보면 마음은 개념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개념화가 안된다는 거예요, 어느 마음에도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개념화 되지 않은거다. '개념이 아닌거다' 이거예요, 개념화는 됐겠죠, 말을 좀 정정합니다. 개념화는 됐겠지만 개념 자체는 그게 아닌거예요, 그냥 개념이지, 마음이 자기에 맞게 대상화한 것 뿐이예요, 진짜 그 참나는 아닌거예요.

(노자1장) 그러니까 노자 1장에 뭐라고 그래요? 도가도비상도, 개념화할 수 있는 도는, 그 개념은, 비상도, 진짜 도가 아니다. 왜냐? 명가명비상명, 그 명은 개념이예요, 이름 붙인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니까, 개념화 해버리면 여러분은 개념을 상대하지 진짜를 놓친다는 거예요.

장미꽃 그러면 여러분은 장미꽃 개념을 가지고 얼마든지 놀 수 있어요, 사실 장미를 한번도 본적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죠? 개념으로만 들었을 수 있어요. 여러분 개념으로만 가지고 있는거 얼마나 많은데요, 체험도 못했지만 개념을 가지고 그걸 우리는 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님도 개념으로 많이 친해지다 보니까, '하나님 잘알아요? 알죠, 저 모태신앙이예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개념만 가지고 놀았지 '하나님을 본적이 있어요?' 그러면, 이거죠, '체험한적 있어요?' 이게 본질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에 한번도 나타난적이 없다고 하겠어요? 그것은 그런 개념화가 아니라 '너 하나님을 진짜 마음으로 만난적 있어?' 이거예요, '하나님을 진짜 만나적 있어? 개념 떼고 만난적 있어?' 만나고 나면 또 개념화가 되겠지만 '실체를 만나적이 있어? 만나적이 없어'

'인간의 마음에 한번도 나타난적이 없는 것을 줄것이다'

이소리 입니다. 그런데 준데요, 결국 만나게 해준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만나고 나면 개념화도 될거예요, 또 '이렇다, 저렇다' 말이 나올거예요, 그런걸 부정하는게 아니예요, 지금까지 인간이 맛보지 못한 하나님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거죠, 마음으로 맛보게 해주겠다.

이런 얘기가 이상한 얘기 같지만 보세요, 고린도전서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고, 어떠한 귀도 듣지 못하고, 어떠한 사람의 마음에도 의식에도 그려진 적이]

이게 개념화 되었다는 거예요,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준비해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9)]

성령 준비 다 됐습니다. 지금 이 말씀 와 닿으시죠, 우린 개념이 없으면 안돼요. 개념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우린 개념이 없으면 어디로 마음을 향하게할지 몰라요. 개념이 있어야,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있어야 달을 찾죠, 지금 여기서 '달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면 누가 손가락 해줘야 빨리 찾지 이게 개념인데, 이게 달이 아니라는 이유로 손가락 보면 다 잘라버리면 어떻게 돼요? 아무도 달을 못찾게 돼요. '언어가 하나님이 아니지,' 도가도비상도 하면서 책 모아서 다 불태우고, 이 지랄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못만나게 되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로 만납니다. 언어는 하나님이 어디계신지 얘기해줄 수 있는 네비게이션이예요, 지금 가서 직접 만났느냐가 문제인거지, 개념이 없고 언어가 없으면 안돼요, 그래서 지금 나름대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개념도 가지고 있고 그림도 그리고 있지만 '그게 아닌 진짜 하나님 그 자체를 만나야된다' 이 소리를 하고있는거죠. 노자에 보실래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진짜 도라는 것은 '도가도비상도 그건 말로 될 수 있는게 아냐' 그런데 이거죠, 도가도비상도 도는 말로 될 수 있는게 아닌데 나는 도라고 부를래, 나는 이 개념을 쓸래, 이 소리도 들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당신들 마음에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지만 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쓸래요, 이 소리예요. 왜? 이 개념마저 없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가짜라도 마음에 그림을, 개념을 그리고 있어야죠.

(동굴의 비유) 그, 동굴 우상 있죠? 동굴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우상에 빠져있는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보면 동굴에 빠져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불빛으로 앞에다 산 모형을 대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 산 모양의 그림자가 비추죠, 우린 이 형체를 봐요, 형체를 보고 사는데 그 너머에 더 실체가 있죠, 그런데 동굴밖에 나가보면 어떻게 돼요? 진짜 산이 있어요, 태양이 있죠, 이 사람이 얼마나 허상을 보고 사느냐? 실제 산에 그림자의 그림자를 보고 사는 거예요, 실제 우리가 보는 형체들은, 이 형체들을 보고 머리속에 개념을 떠올리겠죠, 형체를 개념화 합니다. 그런데 이 개념화한 것 마져도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이걸 또 봐야돼요, 배후에 그 실체가 있어요, 이게 보편법칙이예요, 형이하의 법칙들, 형이하의 법칙들이 그럼 진짜냐? 그 너머에는 형이상의 이데아가 있어요, 그리고 각종 만물의 이데아를 비춰주는, 이게 신입니다. 선의 이데아라고 하는 신이 있어요. 신에 의해서 수많은 이데아가 존재하고 천지만물이 존재하고 천지만물의 이데아가 동굴안에 들어와서, 그럼 이미 어두워진거예요, 동굴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현상계로 들어온거예요, 절대계에서 현상계로 들어와보니 보편법칙이 실체가 그 중에 더 말단이 형체드라, 그런데 이 형체를 보고 우리는 개념을 잡는다구요, '이거 펜이네' 개념은 이름 붙이기예요, 아직 법칙도 몰라요, 이름붙여서 개념을 모아서, 개념들간에 잘 정리해 놓은게 보편법칙이예요, 펜은 어떨때 어떻게 움직인다, 그럼 하나님은 어떨까요? 이 태양의 신의 이데아, 플라톤의 비유에서도 이 신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요? 영원한 촌놈이죠, 본적이 없어요. 사실은 저 태양빛에 의해서 우리가 다 살아가면서도 그것의 그림자, 그림자 받아쓰면서도 우리는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건 이 세계에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본질인 현상계의 진리, 인과법칙도 몰라요. 이것도 겨우 찾아내요, 오랜 세월 살다가 만유인력법칙 있다는 걸 알아내고, 이렇게 하나씩 알아내는 과정이죠, 과학법칙도 그렇고 철학법칙 그렇고 인류가 살아오면서 하나씩 찾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의 근원인 이데아, 이데아를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인데, 로고스잖아요, 말씀, 진리, 로고스를 이게 하나님이 계시니까 로고스가 만물을 만들어 내는데 하나님과 이 로고스의 세계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개념화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들 오감에 나타나지도 않고 생각으로 개념화도 해볼 수 없는 그것을 보여줄게요, 줄께요 하는 거예요. 이 그림 그려놓고 보면 더 실감나지 않으세요?

존재의 원천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만나야 된다. 노자도 그 자리는, 이 도자리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감을 초월해있다는 거예요, 시각을 초월해 있습니다. 또 청각을 초월해 있어요.

[‘이’(夷, 평평함)라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 희미함)라고 하고,]

이夷니, 희希니 이거는 뭐 중요치 않죠, 노자도 뭔말하고 있어요? 도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 미세함)라고 한다. 이 셋은 우리가 따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개념화도 안된다. 개념화된 것을 일정한 질서로 배열하는 것을 논리라고 합니다. 개념화가 안되면 그 자리에 대해서는 논리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개념화가 안된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도에 대해서 개념화하여 떠들겠죠, 그런데 그건 에고 생각이고 문제는 진짜 하나님을 본적도 없다는 거예요, 체험도 한적이 없는데, 여기서 지금 '밖의 신은 어떤 존재겠지' 개념화 한다고 해봤자, 이거는 실체를 보고 개념화 한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심각한 거죠, 진짜 허상인 거죠, 실체에 근거한 개념도 아닌거예요, 개념만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보고 개념화하는 것은 자명한 개념인데 실체를 본적이 없는데 개념화하는 것은 그 자체를 본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우리 마음에 떠오른적도 없고 생각이 된적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파가 평생 하나님의 개념을 붙잡고 논리를 세우고, 탈무드를 가지고 연구를 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법칙까지 다 연구를 했는데, 하나님의 법칙을 연구한 사람들이 랍비들 입니다. 식사후에 커피는 몇분뒤에 먹는 것이 좋은냐까지 유대율법에는 다 있어요, 수많은 율법을 계속 만들어내면서 전통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제일 잘아는 존재처럼 착각하고 있는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겠어요? '하나님은 너희들 마음에 한번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이다' 이거는 충격이죠, '너희가 메타인지 오류로 익숙하게 개념화해서 다루다보니 안다고 착각하게 된거지 실제는 한번도 너희 마음에 나타난 적이 없는거다.' 라고 때리는 거죠,

이게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가지고 때린거랑 똑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안다고 떠들지만 실제로 플라톤이 뭐라고 그랬어요? 목도 고정되어 있어요, 목이 고정되어 있어서 뒤를 못돌아봅니다. 한쪽만 보게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개별구체적 사물밖에 없어요. 개별구체적 사물을 이해하려고 개념을 쓰는 거예요, 그런데 법칙도 못찾아내요, 이때 이 개념가지고 뭘 만들어 내는지 아세요? 억측을 만들어내요,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대충 분석해서 '이럴때는 이런거 아냐? 이럴때는 이런거 아냐?' 자기 마음대로 임의로 만든 법칙들을 억측이라고 합니다. 억측 만들어서 살다가, 죄수가 이게 풀려요, 풀려서 도망나와 보니까 실체를 본거예요, 뭐야? 이게 더 실체였네, 이 그림자를 나는 봤네, 보편법칙을 깨달아요, 그런데 동굴밖을 나가니까 진짜 산을 봐요, 이데아를 봐요, 그런데 이 이데아가 뭘로 인해서 존재해요? 태양빛으로 인해서 이게 비춰져서 눈 앞에 나나탄 거예요, 그래서 태양빛이 하나님이구나 하는 걸 깨닫는게 플라톤 국가론에 나온 동굴의 비유입니다.

이게 동굴속에서 어떤 우상에 사로잡혀서 사는 거예요, 동굴의 우상이예요, 우리가 우상에 빠져서, 분별, 망상에 빠져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깨버리겠다는게 동서양 성현들의 말씀이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따져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건 혼연한 하나이다, '혼연한, 말로 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적인 실체다' 이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걸 뭐라고 그러겠어요, 이 자리가 하나님 자리다, 스스로 현존하는, 영원히 현존하시는 I AM 하나님 자리다, 하겠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고,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이걸 잘 이해하세요

이 말을 전하면 누군가 여러분에게 따질 수 있어요, '나 하나님 생각되는데' 그러면 그게 지금 포인트가 아니라는 거죠, '너는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 그런데 그대 마음에 하나님이 진짜로 떠올라서 개념화된거냐? 이거죠. 그런적이 없는거다.

자, 공자님은 중용에서 뭐라고 했는지 보세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덕德은 성대하구나. 보고자 하여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하여도 들리지 않되, 사물의 본체本體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중용中庸)

모든 만물이 그것으로 인하, 하나님의 덕으로 생겨났구나,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작용은 보려고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구나, 어떠세요? 이것도 재미있죠?

장자 대종사편에 있는 장자의 말이예요, 좌망이라고 합니다. 도를 얻으려면 앉아서 다 몰라해버려라, 그런데 장자가 앉아서 몰라할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써놨어요.

[“팔, 다리와 몸뚱이를 잊고,]

오감을 잊어버리는 거죠, 그다음

[총명함을 버리고,]

논리구사 기가막히게 하는 머리굴림을 멈춰라

[형체를 떠나고 앎을 떠나서,]

몸뚱이도 떠나고 개념화하는 우리의 생각도 떠나서

[크게 통함에 하나가 되는 것,]

우주진리와 하나가 되는 걸

[이것을 ‘좌망’이라고 한다.”]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앉아서 우주 모든 것을, 천지만물을 잊어버림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분들 한 학파인가 싶게 다 같은 소리만 하시죠. 그렇죠?

자, 고려말에 백운화상, 활자에서 전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직지심체요절 그거 쓰신분이 고려말의 백운화상 이십니다.

[“온몸은 차치하고, 갑자기 눈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볼 것이며,]

눈이 만약에 없다면 여러분 어떻게 볼 것 입니까?

[갑자기 귀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들을 것이며, 갑자기 입이 없어지면 어떻게 말할 것이며, 갑자기 마음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비춰 볼 수 있겠는가?]

즉, 생각을 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속에서도 ‘그것’을 명확히 알아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지금 뭐가 있겠어요? 안보고, 안듣고, 말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그 경지가면 진짜 실체가 있겠죠, 그럼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떠올릴 수도 없는 그게 그자리에 있겠죠, 그것을, 그게 그것이예요, 그걸 명확히 알아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옛 부처님들과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았으니까, 아까 이심전심 그랬죠, 부처님의 마음이 그대로 와서 응해있는 거니까, 그 사람은 부처님과 함께 자리할 것이다.

[자 말해보라! 부처님들과 함께 자리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釋迦老子 初生下時 一手指天 一手指地 云天上天下 唯我獨尊 是獨尊獨貴底面目 雖是通身眼見不得 通身是耳聞不得 通身是口說不得 通身是心鑑不出 通身且置 忽若無眼作麽見 無耳作麽聞 無口作麽說 無心作麽鑑 若向這裏辨得出 便與古佛同參 且道叅箇什麽人,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 백운화상어록)

뭐냐? 입니다. 그게 뭐냐? 그 자리가 뭐냐? 여인에게 태어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은 뭐냐?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사람 그 사람은 뭐냐? 다 똑같지 않으세요? 그럼 이거 다 해서 뭘 하라는 얘기예요? 몰라하고 가만히 있으면 돼요, 몰라, 존만, 몰라하고 존재에 만족하고 있으면 그 자리예요, 그 자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그러니까 보던 주체고, 듣던 주체고, 말하던 주체고, 생각하던 주체지 보는 대상이 안되고, 듣는 대상이 안되고, 생각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이 안되는 그거죠, 그 자리를 바로 찾아내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몰라, 괜찮아하고 몰라하고, 괜찮아 하면서 존재에 만족해 버리시면, 몰라하면서 생각, 감정, 오감을 무시하시고 괜찮아 하면서 존재 그 자리에 만족하시면 하나님과 다이렉트로 만나는거지 뭔 딴소리가 필요해요? 여기 딴소리 붙이는 분들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는 방해꾼, 사랑의 방해꾼 이라고 보시면 돼요, 바로 불붙기 직전인데 왜 거기 나서서,

그 이태원클라쓰 이번에 보니까 뽀뽀하기 직전에 손 집어넣어서 막는, 드라마 보다가 이런 경우도, 음 뽀뽀할 기분인데 '탁' 라이벌이 와서 손 집어넣어서 입을 막고, '안돼' 하고 막더만요,

그 급입니다. 참나와 지금 만나려는데 '아니 참나는 그렇게 쉽게 만나는게 아냐, 내 말을 들어, 오매일여를 해야돼, 뭘 해야돼, 굿을 해야돼, 의식을 치뤄야돼, 스승과 제자간에 엄격한 의식을 해야돼' 다 개소리구 그냥 만나면 돼요, 왜? 내가 육근을 쓰면서 늘 보고, 듣고, 맛보고, 엄청나게 따지고 살아온 내가, 그렇게 육근을 굴리던 육근의 마음을 쓰던 그 주체를 만나겠다는데 이걸 왜 못만나게 해요? 지금 몰라해버리면 이 자리잖아요, 육근이 돌아가건 말건 난, 몰라해버리면 내 혼의 뿌리인 영으로 바로 들어간단 말이예요, 영적각성이 이루어지는데 이걸 뭔, '영을 내가 쏴줘야 받느니' 이런 헛소리하는 사이비 교주가 등장하고 별의별 이간질이 등장합니다. 현혹되지 마세요, '우리 수행을 해야 만나니, 우리 종교를 믿어야 만나니, 예수님을 믿어야 성령을 만나니' 다 그거 헛소리예요, 도마복음에서 예수님도 인정하지 않는 소리입니다.

'나는 너의 선생도 아니야, 나도 그 성령 맛보고있는 사람이야, 너도 맛봐'

독점권도 주장하지 않아요, 그 샘물은 예수님거라고 써있지도 않아요, 그렇죠? 이거 잘 기억하시구요, 이렇게해서 또 유불선이 합일되 봅니다. 도마복음 하나가지고 재미있죠? 쐐기를 박아보죠,

《18절 시작이자 종말이 되는 자리》

제목들이 다 세요, 도마복음은 한편한편이, 한절한절이 되게 재미있어요, 자극적이고, 그 암호를 풀면 도와 통하게 되는 선문답 같아요, 도랑 바로 만날 수 있는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어렵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은 저는 기존복음보다 이게 더 쉬워요, 기존 복음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많이 해놔서 그 맥락을 한참 이해해야 되는데, 말이 짧다는 얘기는 부가설명이 필요없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거 이해하세요,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이 사태의 전후맥락을 잘 알아야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말이 짧다는 것은 전후맥락이 필요없다는 거예요, 지금 이 짧은 말만 들어도 이거 이해하면 바로 도랑 통한다는 거예요, 짧은 말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 이예요, 그래서 선문답이 제일 어렵다고 하는데 사실 제일 쉬운 말이예요, 왜? 군더더기 하나도 없고 '이것만 알면 너 바로 견성이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말이 길면? 이 긴 말속에 나오는 다양한 정보, 상황 다 인식해야돼요, '이 말을 왜 하셨을까?' 그런데 제시하는 사람이 말을 짧게 제시하는 것은 다른 건 몰라도 된다는 거잖아요, 고맙지 않으세요? 저는 글 짧으면 눈물나게 고마운데,

사실은 그렇지만 않죠, 말이 짧은데 못알아들으면 제일 답답하죠, 정보가 없거든요, 말에 정보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알 수 있었는데 지금 내가 시대가 다르니까 이 말 듣고 느낌이 안올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어려운거지,

(최상승선) 실제로 짧은 말은 오히려 도와주려고 나온겁니다. '너 이 말만 알면돼, 다른건 몰라도돼' '제가 대학 못나와서, 도를 얻을 수 있나요?' '됐고, 너 몰라 못하냐? 몰라 할 수 있잖아' 이런거죠, '대학 나오고 말았건, 대학이 너 아니잖아, 그러면 너 누구야?' '억' 하면 그겁니다. '넌 누구야? '어~' '말로 하지말고, 넌 누구야?' '말로 안하고 날 어떻게 설명해요?' '그래 그거야, 끝, 다음' 견성학원이 이런식이예요, 이런 견성학원이 인도에 있어요, 마하리쉬 제자 파파지가 하는 수련지도, 파파지는 참나 아는데, 사실은 사람들이 당황하죠, '저 참나가 뭘까요?' '지금 방금에 말 안하고 생각 안일어날때 그때 뭐였어? 어땠어?' '있어요' '거기야' '예?' '그래, 견성이야, 가' '제가요?' 이러고 나와요, 견성 했다는데 당황스러운, 잠깐 맛은 봤는데 거기는 맛 보면 또 견성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시 마하리쉬 제자 찾아간 사람 얘기도 있었어요, '자꾸 거기서 견성했다고 그러는데 저는 모르겠어요' 하고, 가르침이 너무 급하죠? 왜? 이 분, 파파지는 최상승선을 가르치고 싶다는 거예요, 시간도 필요없고, 최상승선은 원래 시간도 안걸려요, 왜? 본래있는 영을 각성하는 거니까, 평상심이 도니 찾을 필요도 없다는 선 정신이 있어요, '지금 당신 마음이 도야' 생각 이전에 그 마음이 도라는 거예요, 생각이 평상심이라는게 아니고 '생각 지금 어디서 나오고 있어? 뭘로 생각을 알아차려? 뭘로 오감을 알아차려? 지금 알아차리고 있잖아' 그 평상적인 마음, 그러면 못들어가니까 도와주려고 몰라만 좀 시켜주는 거예요, 앞뒤 좀 끊어주고, '지금 여기 당신 뭐하고 있어?' '어~' '그거야' '제가요?' '다음' 이것도 가능한 거예요, 맞아요, 그 말은 맞는 말이예요, 시간도 안걸린다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는 수행은 가짜다' 그 분은 그렇게 주장해요, 파파지는 인도에 최상승선을 가르치는 선사입니다. 마하리쉬 제자예요, 그 분은 일상의 일 다 하시고 산 분이예요. 일상을 왜 버리냐는 거예요, 그냥 그게 그건지 알고 살면되지, '내가 참나인줄 알고 살면되지 뭐가 더 필요하냐?'

그런데 이 분들은 법공에 빠져서 또 문제가 있어요, 선악 안따지고 그냥 참나만 바라보면 내가 제일 잘 살고 있다고 느껴요, 그러면 기독교로 말하면 여기는 칭의차원 이거든요, 하나님만 바로보면 돼, 그러면 봉쇄수도원 논리밖에 안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야지' 이게 없으면 성화가 안된 거예요, 칭의는 되도, 성화가 안돼요.

칭의에만 빠진 단점은 있습니다만 그런 최상승법도 아주 유용한데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이 최상승법을 쓰세요, 예수님 말씀하고도 인도 성자들 그리고 선불교의 최상승법 지도했던 분들 말이 맞아떨어지는 이유가 이거예요, 좀전에 읽은 선사들의 '눈 떼고, 코 떼고, 입 떼고, 다 떼면 넌 뭐야?' 이거예요 '넌 뭐야? 그자리에 너 있어? 있으면 너도 부처야' '제가요?' 또 그러겠죠, '제가요 소리 방금 어디서 나왔어? 거기 들여다봐, 거기가 부처야' 혼자 궁시렁 거려도 계속 참선할 수 밖에 없겠죠? '그럴리가, 그럴리가, 어디서 나왔지?' 다시 들어가보고, 자꾸 몰라를 하다보면 '음~' 하는 거죠, 보지도 듣지도 못했고, 한번도 마음에 개념화 되지 않았던, 제대로, 자명하게 개념화 되지 않았던 그 자리를 만납니다. 그 뒤에 개념화는 자명한 개념화가 나와요, 개념화 자체를 반대하는게 아니예요, 허상으로 개념화를 하고 있다는게 문제죠, 공상과, 망상과, 허상으로 개념화를 하고 있는 그것을 딱 끊어버리고, 진실을 바로 마주했을때, 그때 자명한 개념이 등장해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우리의 ‘종말’은 어떻게 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대인이 당시에 궁금해 하는건 뭐예요? 그날 이예요, 그날이 오면 둘중에 하나는 유황불에 던져지고 하나는 천국에 가요, 이게 너무 갭이 커요, 쉽게말하면 그날이 오면 둘중에 하나는 유황불 1시간, 천국 1시간 이렇게 있는게 아니라, 한 놈은 영원히 천국에 가고, 한 놈은 영원히 지옥에 가요, 너무 갭이 크잖아요, 사실은 겁주려고 이렇게 한거죠, 이게 말이 안되죠, 비슷비슷 했는데 한 놈은 우연히 전날 교회 신도증 써서 가고, 하나는 못가고,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럴리는 없고 이게 인간의 탐진치를 다스리기 위해서 강력한 이런 종말의 날에 대한 여러가지 그런 예언적인 비젼을 제시해 준건데, 제자들이 거기에 말려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여러분이 성령안에 산다면 이런 얘기는 다 헛소리예요, 종말을 왜 따지고 계세요? 성령은 지금 여기 현존하지 그날에 가서 현존하는게 아니예요, 지금 여기에 현존해요, 성령의 현존 안에서 이미 하나되 계시면서 성령의 뜻에 자명한게 살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은 천국에 살고 계신거예요, 그날을 왜 걱정해요? 마음이 미래에 가서 헤매고 있다는 것은 저희가 항상 얘기하는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미래를 걱정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라' 하는 이 가르침에 위배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겠어요?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 마음하고 통할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시작’을 발견하고서 ‘종말’을 찾는 것인가?》

'종말은 어떻게 올까요?' '너희 시작은 아냐?' 그럼 이게 뭐냐면 화두예요, '부모가 널 낳기 전에 넌 누구냐?' 하는 것처럼 '천지가 시작되기 전에 그 자리는 어디냐? 종말하면 그 자리 갈거 아니냐? 시작전에 그 자리가 어디냐? 시작된 자리를 알면 종말인 그 자리도 알거다, 시작된 자리가 어디냐?' 이겁니다.

《그대들은 보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다.》

알파가 오메가야, 그 자리가 그 자리야,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자리가 어디예요? 유대인들은 알아요, 하나님 자리라는 걸

《‘시작’에 머무르는 자는축복받을 것이다.》

'종말에 신경쓰지마, 그 시작이 되는 자리에 머물러버려, 천지 만물이 나온 자리에 머물러버려' 그 자리에 있으면

《그가 종말을 알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천지만물이 거기서 나왔고 생사의 관문이니까, 생사의 관문에 있으면 생사를 초월할거야, 이거 그대로 어느 선사 어록에 넣어놓으면 '선사 도를 얘기 잘하시네' 할 겁니다. 알파와 오메가인 나의 현존에 머무르라는 얘기 입니다. 시작이 되는 자리가 거기가 끝날때 돌아가는 자리다, 좀 부연설명 하면요, 제 각주 보세요.

[나온 자리가 돌아갈 자리이다. 생각, 감정, 오감이]

어디서 나왔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얘기하면 천지만물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조금만 성찰해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지금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나의 우주의 내용물은 나의 생각, 감정, 오감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 감정, 오감이 어디서 나왔나?' 하는, '내 생각, 감정이 어디서 끝날까?' 라는게 궁금하시다면 어디서 나왔나를 보시라는 거예요.

[나온 ‘그 자리’에 안주하라! 그 자리가 바로 온 우주의 씨알이 되는 ‘성령’(하나님 영원한 현존)이니, 우리 내면의 ‘참나’(영원한 나의 현존)이다.]

같은 자리라는 겁니다. 나의 영원한 현존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 자리이다.

[이 자리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자리이고 시작과 종말의 근원이 되는 자리이다. 그 자리(성령, 참나)에 안주하는 자는 ‘영생’을 얻어 죽음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얘기하셨죠, 왜냐하면 성령은 생사를 초월한 자리니까 성령에 접속된 존재는 이미 생사를 초월했다, 부활체를 얻지 않더라도 이미 성령을 얻은 것 만으로, 즉 '칭의를 이룬 것 만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성화, 영화까지 가면 더 완벽한 영생을 얻는 것 뿐이지, 영생은 이미 왔다, 그런데 완벽한 부활체까지 가지고 영생을 얘기하면 성령안에 살아가는 자는 정확히 말하면 '영생의 보증을 얻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죠. 부활체까지해서 영생이라고 본다면,

자~ 이거예요, 칭의, 성화, 영화 이것가지고 말한다면 제가 뭐라고 했죠? 칭의는 이미 성령안에서 안주해 있는 존재입니다. 성령안에 이미 24시간 안주해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의 영주권은 확실히 나왔죠, 성화는 천국의 법까지 알고, 진리까지 따르는 거룩한 존재가 됐으니까 시민권자는 됐고, 영화는 예수님이 말하는 왕 노릇할 자, 통치권자라고 본다면 영화는 부활체만 얻어서는 통치권자가 아닙니다. 혹시 단학수련만 잘해서 부활체를 먼저 얻으시는 분도 있어요,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왜냐? 칭의, 성화가 안되어 있잖아요, 혹시 여러분 단전호흡하는 곳에서 '에너지체 얻었어, 왜 교회다니냐? 나는 바로 부활한다' 그렇게 안돼요, 칭의, 성화가 된 분이 에너지체를 얻었을때 영화라고 하는 거예요, 더 영광스러워 졌다고 영화라고 하는거지 앞의 것이 없는데 이것만 얻으면 동네에서 영광스러운 것이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자녀는 아니예요, 동네에서는 귀한 존재죠, 동네에서는 자랑할만 하죠, 이게 한계가 있어요, 저는 이런 것까지 디테일하게 다 챙겨줍니다. '동네에서는 자랑하세요, 그런데 천국가서는 명함 못내밉니다' 그래도 기회있으면 얻은 것은 자랑해야죠, 칭의, 성화, 영화 칭의만 얻어도, 24시간 성령과 하나되어 살아가면 이것도 영생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성경에서는 어느때는 이것도 영생이라고 도마복음처럼 얘기를 하고, 또 어떨때는 이런 존재는 영생의 보증을 얻었다라고 성령이 지금 보증해 주신다, 성령과 24시간 붙어사니까 '너도 영생에 들어섰는데 부활체의 이 영생까지 가는데 있어서 내가, 성령이 보증하마 너는 부활을 얻을거야' 라고 보증을 해주시는 단계다 라고 설명해야되는 성경의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이미 영생이죠, 아니 성령이 죽지 않는데 성령과 하나되서 24시간 안주한다면 그럼 이 혼도 사실은 죽지 않는거죠, 다만 천국의 영주권자 입장이라서 또 차이는 있다. 레벨의 차이는, 상급의 차이는 있다. 공부는 더 해나가야 된다, 더 공부해 나가는 입장에서는 영생의 보증을 얻었다, 그런데 이 자리만 해도 이미 성령과 하나된 자리라는 측면에서는, 천국의 거주자라는 측면에서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문맥에 따라서 조금씩 구별해서 보셔야 돼요, 그런거는 제가 다 도와드릴테니까 성령안에서 제 얘기를 들으시고 자명한지, 찜찜한지 판단해 보세요, 제가 필요한 실전팁이나, 정보들은 끝없이 드릴거예요, 그건 제가 할 역할이니까, 여러분들이 성령안에서 살면서 제 얘기를 듣고 자명한지 아니닌지 판판하면서 그 길을 실제로 걸어주시는게, 그건 여러분 몫이죠,

[나는 스스로 현존하는 나이다]

출애굽기에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하나님 이름이 뭐예요? 'I AM' 입니다, 나는 현존한다, '현존하는 나' 라는게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이예요, 요한계시록에 뭐라고 나와요?

[지금도 존재하시며 과거에도 존재하셨고 장차 존재하실]

뭐예요? 영원한 현존이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과거에도 존재하셨고 지금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하실, 하나님만 이럴거같죠?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임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존재도 어때요?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하실 겁니다. 왜? 여러분은 하나님 영의, 성령의 작영이거든요. 흙을 모아서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작동하는게 우리기 때문에 혼의 작용을 보면 무상한 것 같지만 그게 이 모든게 현존, 나라는 현존에서 일어난거기 때문에 현존의 측면에서 여러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시공을 (42:32) 초월해서 현존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현존했다라고 얘기하실 수 있는 거예요, 심지어 천지창조 전에도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얘기하실 수 있어야 돼요, '어디 감히 그런말을' 하면 성령 모르시는 분이예요, 자신의 영원한 현존을 맛보지 못한 분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이해합니다.

최근에도 저에게 '참나가 어디있어? 참나는 없어, 참나 얘기하는 놈들은 다 구라야' 라고 참나를 맛보지 못한 분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이해합니다. 자기가 못얻으면 혐오하는 것도 에고의 좋은 방어기제죠, 이해해요

[지금도 존재하시며 과거에도 존재하셨고 장차 존재하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시공을 초월해서 현존하는 존재이며, 늘 영원으로 존재하시기에, 모든 시간의 시작이자 끝이 되시는 하나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계시록 1:8)]

그런데 고려말에 태고 보우스님이라고 또 유명한 스님한분 있죠, 그 분은 뭐라고 하셨는지 한번 볼께요, 불교랑 너무 잘 맞아서, 도마복음의 훌륭한 해설서가 선어록집이예요, 보세요,

[여기 ‘한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명하고 또렷하여, 어떠한 행위도 없고 이기심도 없으며,]

에고가 없으니까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생각, 감정, 오감이 없으니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죠, 애초에 움직임이 파악이 안되죠

[크게 신령한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본래 태어남도 죽음도 없으니, 또한 분별도 없고, 또한 이름이나]

개념화가 안돼요, '이름이나'

[모양도 없으며, 또한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허공을 모두 삼키고, 하늘, 땅을 모두 덮었으며, 소리, 빛깔을 모두 덮었습니다.”

(有一物 明明歷歷 無爲無私 寂然不動 有大知 本無生死 亦無分別 亦無名相 亦無言設 呑盡空 盖盡天地 盖盡色聲,태고太古 보우普愚, 태고집太古集)

천지만물을 다 품고있는 허공의 한물건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가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그 자리죠. 이것도 한번 보시고요

이 자리에 지금 바로 들어가셔야 돼요, 이런말 듣고 또 희망가지시면 안돼요, '미래에도 존재하지, 오늘 할필요는 없지않나? 영원한 자리인데 꼭 오늘 할필요는 없는거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알면 오늘 이순간 내가 현존하면 과거에 내가 놓쳤던 현존도 이 현존이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현존도 이 현존이라는 걸 알고 이순간 이순간 사셔야죠, 겁이 없어지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 오죠, 영원한 현존을 찾은거라니까요, 과거라고해서 다를게 없고, 미래라고 해서 다를게 없고, 예수님, 부처님이라고 해서 다를게 없고, 금수라고 해서 다를게 없어요. 다 이자리예요, 그 자리 한번 찾아보면 그게 하나님 자리고 일체가 하나님 신비구나, 하나님이 아공, 내 에고를 초월해서 하나님이 계시구나, 불교도 별거 없어요, 일체 마음이 다 하나님의 신비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겠구나, 선은 하고 악은 안하는, 이게 다예요, 이게 인류가 가야될 길이라고 2,000년, 3,000년 전부터 성인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는데 지금도 우리가 못알아쳐먹고 있습니다

진짜 답이없죠, 제가 이렇게 말해도 얼마나 알아들으실 줄 모르겠지만 이거는 누군가는 어쩔수없이, 부득이하게 얘기를 해야돼요, 나팔수들이 계속 노래를 불러줘야돼요, 왜냐하면 우리 탐진치를 만족시키는 것은 쉬지않고 떠들잖아요, 그렇죠? 이거사라 이거사라 하는 광고, 쉬지않아요, 탐진치를 자극하는 것들은 쉬지 않는데 양심을 자극하는 것들은 쉬면 되겠어요? 안쉬고 계속해야죠, 탐진치를 자극하는 그런 광고가 쉬지않듯이 우리의 영적광고, 양심의 광고도 쉬지않아야 됩니다. 쉬어버리면 인류가 한번 멀리 갑니다. 인류중에 누군가가 몇프로라도 깨어서 떠들어야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우리 마음이 탐진치에 확 쓸려갈때 일부라도 깨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정확히 인식해쥐야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빨리 돌아오지, 아니면 돌아오지도 못하고 반성도 안돼요, 뭐가 문제인지 경황없는 중에 더 큰일 또벌리고 또벌리리고 합니다, 한번 실수했더라도 빨리 회복하려면 마음에 중심이 있어야 되거든요, 미약하더라도 중심이 있어야 돼요, 인류중에 미약하더라도 일부는 정확히 중심을 잡고 양심의 대변인 노릇을 해줘야 돼요, 그게 하나님 사도의 역할입니다, 아무리 핍박이 와도 해줘여돼요, 이걸 해줘야 인류 전체가 빨리 균형을 잡고, 스타워즈에 나오는 포스의 균형있죠? 악은 안하고 선은 해야 포스의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빨리 자연스러운 우주의 균형, 하나님의 뜻의 온전한 펼침을 도울려면 우리는 자기 안에서 단순히 욕심을 제압하는게 아니예요, 단순히 욕심을 제압해야지 이게 아니라 성령의 뜻에 어긋난걸 쳐냄으로써 욕심을 제압하고 다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욕심을 힘으로 눌러야지가 아니예요, 목적이 없잖아요, 목적이 욕심을 누르는 건가요? 그건 도가 아닙니다. 성령에 위배되는지 아닌지 영적식별능력을 갖추고 위배되는 걸 정확히 위배됐다고 알고 쳐내고, 위배되지 않게 욕심을 잘관리하는 것이 욕심을 정복한 것이고 제압한 거지 아무 비젼도 없이, 기준도 없이 막연히 제압하겠다고 하는 것은 폭군이죠, 욕심이라는 것은 다 박살내주겠어, 금욕파들 아까 그렸었죠, 금욕파들의, 중생심의 논리입니다. 혈육의 자녀들의 논리예요, '욕심을 때려잡으면 도를 얻지 않을가?' 절대 때려잡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죽을때까지 욕심과 싸우셔야돼요, 그런데 이런 기준도 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참 무모합니다. 기준이 있어야죠, 그게 영적식별능력이예요, 이게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을 판정하는 기준을 가지고, 그것도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판정을 하셔야 돼요, 그게 하나님안에서 하는 양심성찰 입니다. 카톨릭은 양심성찰이라는 것을 중시하죠, 그게 다르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았는가에 대한 성찰이예요, 밑도 끝도 없이 욕망하고 싸우시면 안되고 내가 그 욕망을 구현하는데 있어 하나님 뜻을 져버린적 있는가를 분석하는 거예요,

그 서양에 유명한 수도사가 써놓은 글에 그렇게 되어있더만요, 우리 양심노트 같은 거예요, 양심성찰 분석을 이렇게해라, 양심성찰 이렇게 해라하고 써놓은게 하루중에 나 혼자 한 일과 하나님과 같이 한 일을 분석해 봐라, 되게 남부끄러운 짓을 했어요, 나 혼자 했다고하지 하나님과 같이 했다고하기 좀 부끄럽잖아요, '하나님은 동참하지 않으신거 같은데, 나 혼자 한 것 같은데' 친구 등쳐먹을때 나 혼자 한 것 같아요, 그럼 나 혼자했고, 그런데 내가 좀 양심적인 일할때 하나님과 같이 한 것 같아요, 그게 결국 뭡니까? 자명찜찜 분석이예요, 나 혼자한 건 찜찜해요, 같이한건 좀 뿌듯하고 자명하고,

하루하루 이걸 성찰해서 하나님과 함께 가면서 사탄에게 휘둘리지않는 그런 삶을 만들어가는게 성화라고, 성화의 노력입니다. 이런 노력없이 갑자기 거룩함이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영적분쟁을 이겨낸 자가, 이긴자가 성취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예수님 말씀보면 칭의, 성화를 이루라고 하죠, 그러면 '내가 영화는 선물로 주마' 이런정도 수준까지 얘기 나올때 이게 나와요, '내가 부활체 주마, 생명의 옷을 주마'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이긴자가 되라, 이긴자에게 주겠다, 악을 이긴자에게 주겠다' 그러면 영적전쟁에 참가해야 됩니다. 전쟁에 참가해서 이긴자들에게 그 결과물로, 보상으로, 상급으로 부활체를 주겠다, 그런데 도마복음 상에는 그것도 자세히 들어보면 그냥 주는게 아니고 뭐예요? 용호비결을 선물해 주는 거예요, 뭔얘기냐? 방법을 가르쳐주는거지 쏴주는게 아닙니다. 이건 스스로 해야되는 거라서, 하지만 '실전팁을 다, 비법을 대공개 하겠다' 며느리도 가르쳐주지 않는 그, 가족에게, 혈육의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이 진리를, 영적진리를 공유하겠다는 거예요, 가르쳐주겠다는 것은, 그렇게 이해하시는게 도마복음에 맞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이 오기전에 스스로 비밀을 풀어라' 이게 예수님이 볼때는 하나님의 과제입니다. 도마복음 상에는 그래요, 다른 복음에서는 격려차원에서 쏴준다라고 실제 유대인들은 쏴준다고 믿고 있거든요,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원래 믿고 있었거든요, 부활의 몸을 자기가 한다고 생각안했어요, 하나님이 해준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해주마' 라고 하신거고 단 '내 말을 믿고 따라라 그러면 될거다' 라고 하신것은 비법을 공개하신 거예요, 아직까지 못따라하고 있고, 그 비법까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그렇지, 그걸 최대한 제가 도와드려보겠습니다. 이 시대에 다시 영생의 비법이 되살아날 수 있게 제가 도와드려야죠,

자, 또 10분쉬고 마지막, 구체적으로 오늘 19절까지는 끝내야 돼요, 여기 에너지체 비밀이 조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