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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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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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아담의 자녀가 되어라
강의일자 2020. 11. 21. 土.
게시일자 2021. 06. 26.
동영상 길이 33:28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zdQx3d0KN30


반갑습니다. 도마복음 106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총 114절이라 얼마 안남았고 오늘 교재에 114절 다 나눠드렸어요. 오늘 꼭 다하려고 나눠드린건 아닌데 남은게 얼마 안되서, 다 나눠드렸습니다. 참고하시구요.

《106절》

부터 가보죠.

《아담의 자녀가 되어라》

특이한 말인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을때 그대들은 아담의 자녀가 될것이다.》

둘이 되었을때 우리가 타락한 거라면, 하나가 되었을때 아담의 자녀가 될거다. 우리가 흔히 아담을 원죄를 지어서 타락한 존재로 아니까 이 말씀이 확 안와닿을수 있는데,

각주 1번 보시면

[여기서 말하는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 그대로 만든]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던 완전한 인간을 말한다]

고 보셔야 됩니다. '아담의 자녀가 될거다. 다시 하나가 되라' 그러면 남성성, 여성성을 하나로 합하면 이게 완전한 인간이라고 그랬죠. 지금 이스라엘 국기이기도 하구요. 완전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걸 지금 아담의 자녀라고 하신 거예요. 아담의 자녀, 이원성, 남녀, 남성성, 여성성을 하나로 해라.

동양 도가의 용호비결 이런거 같죠? 용호비결, 용과 호랑이, '하늘의 용과 땅의 호랑이를 하나로 합해라' '음양을 하나로 합해라' '머리의 에너지와 아랫배의 에너지를 하나로 합해라' 같은 얘기죠, 이원성을 초월하면 본래 하나인 성령이 온전하게 구현되는걸 말합니다. 영혼육이 온전한 존재,

이 가운데 영을 설정하면 성령이다 그러면 성령이 양의 에너지 남성성, 음의 에너지 여성성을 온전히 갖춘 모습의 그런 혼과 육을 갖추고 있다. 이걸 상징합니다. 성령을 담는 그릇이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그릇 안에 온전히 담겨있다. 이게 하나가 된거죠. 이렇게 되게 할 수 있어요? 성령이 불이면 혼과 육이 음이다, 이런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만 또 혼과 육의 세계에서도 또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거든요. 그럴때는 성령을 따로빼서 얘기 하자구요,

그래서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아담의 자녀가 될거다' 이랬구요.


《그래서 그대들이 '산아, 여기서 움직여라'하면 산이 움질일거다》


왜그러냐? 각주 1번에 보시면


[완전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 인간이니]


성령 그대로니까


[천지만물도 그 명령을 듣는 온전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완전한 인간, 이 그림있죠?


[예수님은 모든 이원성을 하나로 통합하신 완전한 인간이다.]


이 메세지를 도마복음에서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죠. 하나를 강조하죠, 하나. 하나를 강조하고 있죠.


《107절 잃어버린 한마리 양이 더 간절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왕국은 100마리의 양을 소유한 목자와 같다. 100마리중에 가장 큰 한마리가 길을 잃자 그는 나머지 99마리를 남겨두고 그 한마리를 찾을때까지 찾아다녔다. 그는 아주 고생하여 양을 찾아낸 뒤에 그 양에게 나는 99마리보다》


99마리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라고 말하였다.》


가장 큰 한마리가 길을 잃어서 찾아다닌 건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각주 3번 보시면 이게 마태복음에도 있죠? 마태복음 18장 12, 14절에 보시면 꼭 한 마리 양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죠. 사람들에게 드는 비유로 '가장 큰 놈이 도망가면 찾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유도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비유의 핵심은 가장 큰 한마리가 길을 잃었다는게 아니라 99마리를 찾았는데 한마리 잃었다고 찾았다는 거예요. 그게 아무리 커도 99마리보다 중요하지 않은데 사람 마음이 한마리를 찾아야 끝나는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대들 생각은 어떻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가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다면]


가장 큰 놈, 이런 말 없죠.


[그 99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을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는가? 진실로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만약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99마리보다 이것을 더욱 기뻐할 것이다. 이와같이 어린아이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린 것은 하늘에 계신 그대들 아버지 뜻이 아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어린 아이들 데리고 얘기하다가 이렇게 얘기가 나온거예요.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이 말 하려다 예수님이 얘기하신 거예요, 이건 보살의 마음이죠. 한명도 놓치지 않겠다. 한명도 놓치지 않겠다.


그래서 여러분 이 마음한번 볼까요? 각주 4번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한조각]


같은 퍼즐인데 못찾는 한조각이

[그렇게 애가 타지 않나요?]

그래서 잃어버린 한마리 양이 다른 양보다 더 위대해서가 아니라, 본문에는 가장 큰 한마리라고 해서 좀 헷갈리게 했는데 사람들이 찾고싶게 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셨겠죠. 다만 엄청난 차별성이 있는 양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애타게 되느냐, 너를 제일 사랑한다. 이렇게 하게 되느냐?


[이미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보다 지금 구원받지 못한 존재가 예수님에게는 더욱 사랑스럽니다]


하는 겁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탓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 이것에 한탄하지말고 이순간부터

[성령을 각성하고 하나님 말씀(성령의 진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 자녀가 되겠죠]

지금부터라도 되자는 겁니다.

[나중된 자가 더 큰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왜? 더 위대해서가 아니라 더 간절해진다는 거예요. '저 사람 구원해야 되는데' 애가 타다가 결국 구원받으면 예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결국 처음된 자와 하나가 될겁니다.]

차별성이 있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더 애타게 만드는게 있으니까

[포기하지말고 성령 찾아라]

예수님 말씀은 이 말씀이죠. 실감나게 느끼시라고 예수님 말씀을 좀 풀어봤어요. '나한테 이렇게 기대하시나?' 이런 생각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108절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자는 나처럼 될 것이다.》

말이 어려운 말인데 별 말 아니고 '내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을 잘 소화해내는 자는'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수용해서 소화해내는 자는' 나처럼 될거다.

《나는 그 사람이 될거고 숨겨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이걸 우리는 이해해야 됩니다. 성령자리에서 예수님과 우리는 차이가 없다. 왜? 한 성령 이니까, 그래서 성도가 있고 성자가 있으면 성자가 성도에게 하는 이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 말이죠? 성령에서 나오는 말이죠. 성령은 뭐죠? 진리의 영, 그래서 이 말은 길이요, 진리가 되는 빛이되는 영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제대로 성도가 소화했을때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이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니까 이 말씀을 성도가 따를때 본인 내면에 있는 성령을 받게되고, 각성하게 되고, 또 이 성령의 진리의 인도를 받게 되고, 성령으로 인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 성자 입에서 나오는 이 말씀, 이 말씀이 성령의 진리인줄 알고, 길과 진리와 빛인줄 알고 잘 받아 먹으면 생명을 얻게된다. 영생을 얻게된다. 이 논리예요. 원래 한 성령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말이되는 겁니다. 그래서

각주 5번 보시면

[내 입에서 나오는 나의 가르침은 아버지로 부터 나오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사랑의 진리다.

[나는 달궈진 쇠공이니 내 안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아버지의 열기다, 이 열기에 가까이 온 자들은 뜨겁게 달궈져서 나와 하나가 될거다]

지금 이 차이는 있죠, 성도는 성령을 구현해내야 되는 존재고, 성자는 구현이 됐단 말이예요, 여기 타오르고 있어요. 타오르고 있어요. 타오르는 쇠공 이예요. 차가운 쇠공 이예요, 가까이 가면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같이 타올라요. 같이 타오르다 보면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 안에 있는 본체가 자기 안에도 똑같이 있다는 걸 아니까, '나는 그 사람이 된다.'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하고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한 성령 안에서 성도와 성자가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된다.

[그는 나처럼 뜨겁게 달궈져서 나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러면 나처럼 이 열기의 근원인 하나님(성령)과 하나가 되니, 그러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 왕국의 완전한 법인 아버지의 말씀]

예수님을 통해서 나왔던 십자가의 진리, 아버지의 말씀, 사랑의 진리가 성도 안에서도 구현되겠죠. 성도의 혼과 육을 통해 구현될 겁니다. 아버지 말씀을

[훤히 깨닫고 안주하게 될거다.]

숨겨진 것들이 그 한테 다드러날 것이다. 이 말씀 정확히 이해하신 거예요, 누구든지 내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을 잘 받아 먹으면 한 성령 안에서 나처럼 된다. 내가 또 그 사람이 된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된다. 왜? 나도 그 성령을 따를 뿐이니까, 성자도 성령의 진리를 따를 뿐이니까, 성도도 성령의 진리를 따르면서 나랑 하나가 되고, 내가 아는 것들 성도에게는 감춰졌던 것들이 그에게 다 드러날 거다.

요한복은 8장 31절에서 32절 말씀 보실게요. 각주 5번에 있죠.

[만약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서로 사랑하라)에 머문다면 나의 참된 제자들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진리를 알면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본래 모두 하나라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랑의 진리죠, 진리는 사랑의 진리.

그 다음에 야고보서 2개가 인용되어 있죠, 보면 야고보서가 좋아요. 야고보도 예수님 동생분 이세요. 예수님 동생 말씀이예요. 야고보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그대들의 영혼을 구원할 힘을 지닌 여러분 안에 심겨진 말씀]

우리 안에 말씀이 심겨져 있데요. 성령을 받았으니까, 말씀이 어디에 심겨져 있겠어요? 성령에요. 진리의 영을 받으면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자리잡으면, 진리의 영은 진리를 품고있는 영 아니예요? 이 사랑의 진리가 어디에 새겨져 있어요? 영에요. 그러니까 우리 혼에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안에 심겨져 있는 말씀을 혼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순종하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대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할 얘기 다했죠? 혈육의 자녀처럼 탐진치에 끌려다니지 말고 우리 안에 이미 성령을 전제한 거예요, 성령 받은 존재, 성령 안받았어도 누구나 성령이 내재되어 있잖아요.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이 이미 심겨져 있으니까 그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각성해서 성령안에 있는 진리를 우리 혼과 육이 수용하는 거죠. 여기는 성자 자리니까 성도로 얘기하죠. 우리 안에 새겨져 있는, 심겨져 있는 진리, 즉 말씀을 성도가 받아들이고, 혼육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라. 마음으로 몸으로 실천하라. 실천해야 된다. 이거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마십시요.]

지금 예수님이 내가 하는 말 잘 받아먹으면 나처럼 돼, 잘 받아먹는 방법을 야고보서에서 얘기해 주고 있죠, 그 말씀을 듣기만하고 실천을 안하면 잘 받아먹은게 아니다. 각자 자기안에 이미 심겨져 있다.

그림 보시면 성령, 이 십자가의 영, 진리의 영, 성령이 그대로 하나님 왕국이요, 성령에 새겨져 있는 이 말씀을 왕국의 법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무슨 말씀이 새겨져 있느냐?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겸손하라, 지혜로워라, 성실하라. 이 말씀 아니겠어요? 구약에 근거해서 볼때도 이랬고 유교에서 얘기하는 양심의 진리와도 비교해보면 맞아 떨어졌죠.

야고보서 1장 25절에 보면

[완전한 법, 자유의 법]

이게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는 말씀이예요. 야보고 말이 이미 재미있지 않나요? 예수님에게 들은 말씀인데 우리 안에 심겨져 있던 말씀이예요. 우리 안에 원래 새겨져 있던 말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밖에서 성자의 말을 들었는데 사실은 우리 마음에 원래 심겨져 있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까지 옮기면 그게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수용한게 되는 거죠. 완전한 법, 자유의 법

[을 들여다 보고]

어떻게 들여다 봅니까? 우리 안에 새겨져 있으니까 들여다 보라고 하죠.

[거기 안주하는 자들은]

거기에 안주한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거죠. 그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행위로 옮기는 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축복받을 겁니다.]

자, 이게 예수님이 늘 하시는 말씀하고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잘 받아먹어라'했고, 내 말은 사실 성령이 하는 말이다. 내가 말을 전하지만 내 안에서, 성령에서 나온 말이다. 또 성도들은 그 말을 잘 받아서, 이해해서, 소화하지만 사실은 성도들의 영에 새겨져 있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성령을 받아야만, 예수님이 말씀한 것으로만 끝나면 '성도들이 내 말 들었으면 다 이해할거야' 했을거예요. 그런데 말씀은 전해놓고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얘기하시나요? 나 가고난 뒤에 성령이 와야만 이해가 될거야. 결국은 포인트가 성령입니다. 성령을 못받으면 성령에서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동질의 것이 동질의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이제 성경에 써진 말 그대로 살면 되는거죠?' 그럼 딱 바리새파죠. 이상하죠? 밖에서 주어진 말에 최선을 다해서 따르면 바리새파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 따라라, 내 말을 잘 들어라, 이렇게 얘기도 하셨단 말이예요. 그럼 무슨 말이냐? 이거죠. 하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이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온전하게 전해져요?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받고 무작정 성경말씀,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있으면 바리새파다. 바리새파도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목숨걸로 따르던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에게 그렇게 쌍욕을 들었나요? 성령 안받고 하려니깐 욕먹은 거예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신약시대가 오면 구약과 차원이 다르다.' 구약은 내가 율법을 줬는데 너희가 못지킨 시대라면, 내가 성령을 부어서 성령에 새겨진 율법이 속에서 부터 우러나서 실천이 되는 세상이 올거다.

신약시대를 여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포인트가 어디에 있겠어요? 성령에 있어요. 성령, 그래서 말씀에만 너무 집착하는 분들은 바리새파로 흐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렇게 비판했던 바리새파가 되버려요. '완전한 법, 자유의 법도 율법 아닙니까?' 그냥 율법이 아니라 성령에 새겨진 율법이예요. 인간들이 전통으로 만든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받은 것도 있지만 수많은 랍비들이 연구해서 세운 전통적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부터 우리에게 다이렉트로 주어지는 서로 사랑하라는 황금률의 율법을 말합니다. 십계명도 따지고보면 황금률 잘하라는 것 아니예요? 십계명 인정해 주자고요. 십계명 인정해 주는데 그것도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온 온전하고, 자유의 율법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서 받아들여서는 답이 없다는 거예요. 바리새파 밖에 안나와요. '내 성령에 새기고 다니면서 표현해내라' 이거죠. 실천해서 보여줘라. 아시겠죠? 이게 달라요. 각자의 성령에 십계명을 새기고 다니면서 실천에 옮기면 그것은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이 되지만 돌판에 새긴 것, 책에 새긴 것을 보고 그대로 따르면 되겠구나 하면 여러분은 바리새파가 되고 만다. 이상하죠? 그런데 이게 팩트 입니다.


《109절 보물이 숨겨진 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왕국은 그의 밭에 숨겨진 보물이 있으나 이를 모르는 한 사람과 같다.》


이것도 왕국이 그 한사람과 같다. 이런 말이 아니라고 했죠. 내가 천국 얘기해줄까? 천국에 대한 비유하나 들어줄까? 여기 지금 밭에 숨겨진 보물이 있는데 모르는 한 사람이 있어, 이 정도예요.


《그가 죽으니까 그 아들에게 이 보물을 물려줬어. 그런데》


아버지도 몰랐잖아요? 아들이 알겠어요? 아들도 역시 보물에 대해서 몰랐다가


《밭을 팔았다. 그래서 그 밭을 산 사람은 밭을 경작하다가 보물을 발견하여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이자 받지말라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비유는 왜 이렇게 했죠? 아니, 혈육의 자녀들은 이렇게 살잖아요. 이렇게 살잖아... 비유를 들때는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야 되죠? 땡기게, 아까도 양 얘기할때 '양 잃어버렸는데 한 마리 찾으러 나설거아냐?' 그러니까 '한마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할 수도 있으니까, 그 놈이 좀 커, 그러면 이야기가 더 쉽게 전달되겠죠. 이 경우도 그래요.

밭을 팔았어, 그 밭에 보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팔았어, 그런데 산 사람이 보물 찾아서 이자까지 막 벌었어, 그러면 '우아, 억울하다' 하겠죠. 듣는 사람이 '진심, 억울하다. 진심, 안탑깝다' 지금 그런 것을 유도해 낸 겁니다. 이자받고 막... 하나님 자녀는 이러지 말라고 하셨지만, 중생들 마음은, 혈육의 자녀들 마음은 이게 제일 와 닿으니까 이렇게 얘기하신 거예요. 이런 거야, 천국 비유드실때 보면 예수님은 철저히 그 비유의 내용들은 세속적이십니다. 세속사람들이 혹 해야할 내용이거든요. '와 아깝다. 천국이 그래?" 그러면 '천국 못 얻으면 진짜 아깝겠다' 이런 생각이 들거아니예요? 천국 못얻으면 대대로 손해보는 기분, '누구네는 이자까지 받았다는데' 보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럼 내가 천국을 못만나면 딱 이 경우라는 거예요. '내가 천국을 못만나면 지금 최악이네' 하는거죠. 이 천국이 뭐겠어요? 성령이죠. 하나님 왕국이 성령이라고 그랬죠. 하나님 왕국, 진리가 구현되고 있는 그 자리, 1차적으로 성령입니다. 본질의 천국이예요. 현상의 천국은 혼과 육에 구현된 것이고, 영에 이미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이미 본질로서의 하나님 왕국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왕국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는 얘기잖아요. 못 찾으면 꽝이고 그것을 찾은 사람은 몇배로 불려서 쓴다는 거예요. 이자 얘기를 왜 했냐? 몇배로, 몇배로 불려서 쓴다는 거예요. 그 성령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성령이지만 겨자씨처럼 몇배로 불려서 나도 득을 보고, 남도 도와주고 한다. 자기도 천국가고 남도 도와줘서 천국가게 한다. 이런 소리죠.


각주 6번 보시면 제가 이것과 관련된 글을 하다하다 율곡선생 글까지 가져왔습니다. '성학집요' 율곡 선생이 선조에게 올린 글이죠. '성학집요' 한번 보실래요? 비슷한 얘기가 있어서, 재미있어서 제가 가져와 봤습니다. 도마복음 보다가 성학집요까지 보는 것은 좀 어색하긴 하지만

유교에서도 어때요? 유교에서도 우리 에고의 마음이 있으면 양심의 마음이 있거든요. 양심을 유교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허령지각 그럽니다. 텅비어서 신령하게, 지각, 알아차린다. 늘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I AM 입니다. 현존하는 나, 늘 현존한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어떻게 현존합니까? 현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알아차림이예요. 그럼 현존이 뭘하겠어요? 알아차리고 있지, 그래서 퇴계나 율곡선생 글을 보면 이렇게 허령지각 그러면 이게 양심이예요, 양지고, 양심의 그 알아차림을 양지라고도 부릅니다. 허령지각, 그 허령지각에, 양심에, 여기서 양심적인 것은 4단, 욕심적인 것은 7정 이렇게 크게 구분해서 감정들이 일어납니다. 양심의 감정, 욕심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더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여기까지만 얘기할게요. 자, 그런데 이 허령지각에 사랑, 인, 정의, 겸손, 예절, 지혜, 성실, 신, 신뢰를 준다는 거죠. 인의예지신의 진리가 새겨져 있어요. 이게 양심이라고 그러면 기독교식으로는 성령 아닙니까? 성령안에 진리가 새겨져 있으니까 진리의 영이죠? 유교식 설명 들어보시면 이게 서로 합해지면서 더 재미있어요.


[신이 살피건데]


선조에게 올리는 글이라 '신이 살피건데'


[사람의 한 마음, 양심 안에는 온갖 원리]


여기 온갖 원리는 양심의 진리들, 인의예지를 말합니다. 이게 동양에서 인의예지신이 결국 5행 아니예요? 지금 서울 4대문도 동쪽은 흥인지문, 서쪽은 돈의문, 남쪽은 숭례문, 북쪽은 지자를 안쓰고 숙정문 이라고 했는데, 그 옆에 문을 지을때 지금 상명대 앞에 홍지문이 있죠, 가운데 신은? 보신각, 오행에 맞춰서 서울의 문을 설계했듯이 우리 마음안에 음양오행의 진리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우주 다해서 음양오행 밖에 진리가 없고, 양심도 오행으로,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이 되니까 온갖 원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원리인데 그 중에 특히 중요한게 뭐예요? 양심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양심에는 양심의 인의예지신의 원리


[가 갖추어져 있어서,]


그러니까 이 양심이, 이 한마음이 진리의 영이죠.


[요와 순의 사랑]


위대한 성인 천자들이었어요. 메시아들이죠. 이스라엘에서 보면 메시아같은 존재예요. 요순이 성인이면서,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이면서, 왕이었던 존재들이예요. 그 위대한 왕들의 사랑, 사랑


[의 진리도 양심안에 들어있고, 탕왕과 무왕의 정의로운]


정의를 구현했던 왕들이거든요. 성인 왕들이예요. 정의 구현에 충실했기 때문에, 정의, 그들의 정의


[공자와 맹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의 도리]


진리, 어떻게 살아야 된다. 인의예지신의 도리가


[원만하게 이 본성안에 다 갖추어져 있다]


이걸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인의예지신, 진리를 본성이라고 불러요. 우리 성령안에 진리가 들어있다, 그러면, 성령안에 본성이 갖추어져 있다. 이렇게 유교에서는 말하는 거예요. 성령안에 인의예지신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다.


[단지 이 풍부한 기운, 타고날때 기질에, 구속과 장애가 있고]


타고날때 서로 기질이 다르죠? 이 기질의 차이라는 것은 뭐냐면 다양한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의예지를 더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 덜 구현할 수 있는 사람, 이런 기질의 장애가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는 기품이라고 했는데 기질의 장애 입니다. 품부받은 기운이 다르다. 그럼 이 기질의 장애라는 것은 뭐냐면 영성지능 이예요. 영성지능이 차이가 나고 성인들은 좀더 영성지능이 높으니까 인의예지신을 잘 구현할 수 있고, 소인배들은 구현이 힘들고, 이런 차이가 있다. 거기다 더해서 타고난게 그런데


[태어난 후에 물욕]


그 탐진치가 결국 눈을 가려서 어떻게 돼요?


[무너트려서 밝은게 어두워지고, 바른게 사악해 졌다]


양심이 나오긴 나오는데 인간이면 양심이 저 속에 없을 리가 없는데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듯이 숨겨져 있어서 이 양심이 나오다가 다 왜곡되어 버린다.


[그래서 미혹하고 어리석은 중생이 되어 실상 새나 짐승과 다를게 없어진다]


금수 수준, 동물 수준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본래부터 갖추어져있던]


원래 숨겨져 있는 이 진리, 양심의 진리는


[원래부터 여전히 광명하고 올바릅니다.]


한순간도 우리 안에서, 우리 성령안에서 왜곡된 적이 없고, 오염된 적도 없습니다.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단지 가려졌을 뿐입니다. 끝내 사라지는 원리가 없기 때문에]


왜냐 허령지각이 영원히 알아차리는 자리예요. 항상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자나깨나 알아차리면서 그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겠죠? 그러니까 그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여러분 양심에서, 우리 양심에서 끝없이 사랑, 정의, 겸손, 지혜가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사람이 그러면 못쓰지, 불쌍하지 않냐? 양보해야지, 이건 옳지 않지, 이런 식으로 인의예지신의 그 마음들이, 우리가 아는 측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수오지심이 계속 올라오는 거죠. 사라지지 않으니까 계속 알아차려지니까


[진실로 그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그러니까 우리 욕심을 좀 바로잡고, 욕심을 다 없애자는게 아니라, 비양심 때려잡고, 욕심을 때려잡는게 아니라 도마복음도 금욕주의적이지 않죠? 예수님이 금욕하자, 금식하자 이러면 화내시죠. 내가 죄졌냐? 이러고, 성령에 맞게 잘쓰면 그만이거든요. 요즘도 무소유 논란이 있지만 무소유냐? 풀소유냐? 하는데 선문답같죠? 무소유도 풀소유도 답이 아닙니다. 답은 양심적 소유입니다. 자명한 소유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자명하게 욕망을 관리하라는 거니까, 욕망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어두원 것이니까 비양심이예요. 악심, 욕심이 아니라 악심을 때려잡고, 악심을 끊어버릴 수 있으면


[다시]


사랑과 정의에 반대되는 것들 잔인과 불의를 때려잡으면


[요순, 탕무, 공맹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는 겁니다. 밖에서 힘을 빌리지 않아도, 기독교가 성령 받아라 하니까 성령이 밖에서 오는 줄 알아요. 아니예요, 우리 안에 이미 임해있어요. 그런데 우리 에고가 모르니까 이런 양심, 성령을 각성하는 순간을 이 에고는 비둘기가 임하듯이 뭔가 밖에서 양심과 성령이 임한 줄 알아요. 자기한테, 왜냐? 에고 기준이죠. 나한테 양심이, 성령이 임했어, 자꾸 양심이 나에게 뭐라고 그래, 밖에서 그러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더 본질이예요, 우리의 본질, 영자리니까. 에고는 혼의 자리고, 영이 혼의 근원인데, 영에서 혼으로 각성이 일어나는, 뭔가 강림하는 느낌으로 영이 혼에게 드러나는 거죠. 영이 혼에게 임할때 '어디서 신성이 임했나보다'하고 혼이 착각을 하는거죠. 실제로는 우리 안에 원래 있어요. 혼보다 우리의 더 본질이예요. 혼은 생각, 감정, 오감인데 무상하죠. 영은요? 영원히 알아차리는 그 자리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입니다. 혼이 작동 안할때도 우리 영은 현존한다구요, 알아차리고 있다구요, 존재하고 있다구요, 여러분 아무생각 안할때도 존재하고 있단 말이예요. 욕심 안내고 있을때도 존재하고 있단 말이예요. 영이 더 바탕인데, 성령이 더 우리의 바탕인데 혼이 바탕인줄 알고 혼이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을 각성하는 것을 가지고 혼 입장에서는 '영이 강림했다, 성령이 강림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율곡 선생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 아니다' 이 말이예요. 원래 우리안에 있는게 나오는 것이지, 숨겨져 있던게 터져나오는 거예요.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한량이 없는 보물을 으슥한 곳에 묻어 두고는 자기도 잊어버리고 춥고 가난하게 구걸하면서]

살다가

[사방을 떠도는 것이랑 같습니다.]


자기가 묻어놓고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자기 소유인데 밭에 묻어놓고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만약 선각자를 만나]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데 잊어버렸다고 생각한거죠, 그런데 선각자가 뭐라고 해요?


[야 너희집 밭에 보물있잖아]


해주니까 어때요? 나한테 이미 있다구요? 지금 거지같이 살고 있었는데


[독실이 믿어서 의심하지 않고 그 묻혀있는 보물을 캐면 그대로 자기것이 잖아요]


원래 자기것이 었잖아요. '이런 상황입니다.'하고 율곡선생이 선조에게 얘기한 겁니다. 선조도 양심 찾으라고, 그래서 양심에 새겨져있는 양심의 원리도 사랑, 정의, 겸손, 지혜, 성실 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 드릴게요. 더 할까요? 말까요? 아껴둘까요? 한번 더 남은 것 같은데, 오늘 여기까지 할께요. 스토리가 다음으로 이어지는게 맞을 것 같아요. 110절은 에너지체 이야기를 하거든요. 110절도 에너지체 얘기고, 111절도 에너지체 얘기고, 112절도 연결되어 있고, 113절은 성령 얘기하는 거고요. 미리 예고편 입니다. 114절은 마리아를 남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특이한 얘기 입니다. 그것도 결국 에너지체랑 관련된 얘기 입니다. 결국 남성성, 여성성의 통합에 대한 얘기 입니다.

미리 예고 해드렸고요, 왜 예고를 해드렸냐? 여러분 다음이 마지막 이예요. 다음에 오셔서 끝내고 다음주에는 이거 끝내고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이거 끝내고 도마복음 끝낸 걸 기리는 파티? 다음주는 도마파티를 하죠. 도마파티, 파티 예고를 하는 겁니다. 도마파티, 다음주에 책걸이 하는 거죠. 책걸이, 도마복음 하나 끝냈잖아요. 의미있지 않나요? 도마복음 하나가 끝났습니다. 도마복음 파티, 도마볶음 파티, 볶음 요리 아무거나 하나 준비하셔서 함께 하셔도 좋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