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6강
| 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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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영적인 벌거숭이가 되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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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일자 | 2020. 07. 18. 土. |
| 게시일자 | 2020. 12. 10. |
| 동영상 길이 | 49:16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도마복음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aZJuqO2a3cU |
반갑습니다. 강의 중이라 제가 답변을 못 드려요. 강의에 일단 집중해 주시죠. 도마복음 34절 부터 하겠습니다. 유명해서 잘 아시는 이야기네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라고 하셨다》
워낙 유명하죠? 각주 1번 한번 보시면 마태복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나와요. 15장 13절에서 14절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으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뽑힐 것이다.]
이 소리죠? 사탄을 따르는 것들은 모두 나중에 뽑혀서 유황불에 태워질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 얘기구요.
[그냥 두어라]
나중에 다 처벌 받을 거다. 어차피 걔네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이러면서 그들은 할 때 바리새파 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도마복음에도 그 말씀이 지금 있어요. 이걸 좀 우리가 이해해 보면, 우리가 그 전에 빛의 사람 얘기를 했잖아요. 아버지가 빛이죠. 우리 아버지, 한자로 쓸께요. 부모, 자식 그러면 이 아버지가 빛이 잖아요, 자식이 우리 에고의 마음이면 에고의 마음이 혼이고 이 육까지도 에고 작용이죠. 혼과 육을 이 영이, 아버지의 영, 성령이 그 빛으로 밝혀서 밝게 경영을 해야겠죠. 이런 사람들은 빛이죠? 그래서 이 빛의 사람이 아닌 어둠의 사람, 성령이 인도하지 않는 사람,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사람, 실제로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 본인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 어둠의 사람이 되는 거죠. 아버지 성령과 단절이 되죠. 그래서 어둠의 사람이 인도하면 모두 구덩이에 빠진다. 빛이 안 보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항상 강조하는 자리이타, 보살은 빛으로 자기를 먼저 밝히고, 그렇죠? 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빛으로 자기를 먼저 밝히고, 주변까지 밝힐 수 있어야 되죠. 자기를 밝힌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리, 스스로를 밝혔고, 성령의 뜻대로 성령 안에서 살 수 있게 된게 자리고, 남들 까지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타죠. 바리새파는 반대죠. 성령의 빛으로 자신을 밝히지 못 했기 때문에 자해, 자기도 진리를 모르고, 해타, 남들도 다 함께 구덩이에 빠뜨리는 그런 존재다. 이 얘기는 계속 나옵니다. 바리새파 비판은 나중에 또 보죠.
35절 볼게요.
《먼저 힘센 자의 두 손을 결박하라》
이것도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12장 28절에서 29절 말씀 인데요. 참고해서 보면 좋아요.
[만약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쫓아냈다면]
이 마태복음 얘긴 되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더니 비판하는 세력들이 뭐라고 했냐? '사탄의 힘으로 귀신들을 쫓아낸 게 아닐까? 하나님 영으로 쫓아낸 게 아니라, 사탄의 영의 힘으로 쫓아낸 게 아닐까?' 바알세불 이러죠? 사탄의 다른 이름들, 모든 악귀들의 우두머리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 거 아니겠냐? 윗사람이 명령 하니까 아랫사람이 도망간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음해를 하니까 이런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 성령의 힘으로 했다 하시면서
[만약에 내가 진짜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쫓아냈다면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그대들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왕국이 여기 온 거 아니냐? 왜 그러냐 이거죠,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이런 악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면, 악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사탄도 제압했다는 거다' 이 말을 하려고 이 말씀을 하세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사탄을 묶어 두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살이를 약탈할 수 있겠느냐, 사탄을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다]
이 소리는 뭐겠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악귀들을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사탄을 때려 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했다면 지금 사탄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이 이 지상에 도래한 거다. 이래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사실은 지상천국을 선포 하십니다. 사탄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의 그런 은혜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구현되는 이 세상의 도래에 대해서 이미 얘기 하셨어요. '이미 임했다' 실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쫓아냈잖아요.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 한테 볼때는 이미 왔답니다. 이미 임했다. 이 구절 주목하세요. 이미 임했다. 그럼 지금 도마복음에 35절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내용이 비슷해요. 보세요. 딱 그때 같이 했던 얘기인지는 모릅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힘센 사람 집에 들어가서 그 집을 취하려면 먼저 그 두 손을 묶어야 한다. 그 두 손을 묶지 않고서는 그의 집을 훔칠 수가 없다.》
이거를 이제 이 구절만 놓고, 아까 귀신 쫓는 얘기랑 상관없이 이 구절만 놓고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려면 각주 4번이요.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되겠죠.
[먼저 비양심 즉 사탄의 마음을 제압하지 않고는 온전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할 수 없다]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죠. 힘센 자를 때려 잡아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좋은 내용은 아니죠, 좋은 예는 아닌데, 사실은 도둑질하는 법 아니에요? 그런데 사탄의 집을 터니까 이제 좋은 일이 되는 거죠. '예수님이 그 당시 정말 시장 통에서 일반인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예를, 비유를 들어 주셨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실감나겠죠? '아 진짜 그러네, 일단 사탄의 두 손을 묶어 놔야겠네' 그럴려면, 자 보세요. 사탄의 두 손을 묶어놓으려면 여러분 힘으로 묶을 수 있나요? 오판이죠. 여러분은 뭐 하셔야되죠? 사탄과 대적하려면 성령과 접속해야죠. 지금 성령과 접속하지 않는 분들은 절대 사탄의 두 손을 묶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묶을 수 있었으면 잡귀랑도 우리가 싸워서 이기가가 쉽지 않아요. 비등비등 하잖아요. 사탄하고 어떻게 싸워요? 사탄은 성령의 힘으로 제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접속해서 성령 안에, 하나님의 영 안에, 여기는 성령 자리죠? 아버지의 영이 성령이죠? I AM, 영원한 성령의 현존, 거기에 접속해서, 벽에 콘센트에 코드 꽂아야 전기가 들어올 거 아니에요? 빛이 들어 오려면 성령과 먼저 접속하시라. 그 빛으로 사방으로 길을 찾으세요. 그 빛으로, 어둠 속에 계시지 마시고 성령의 빛으로 삶을 경영하자. 그럼 여기가 천국이죠. 그러면 사탄이 제압되고, 성령이 사탄을 잡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수많은 잡귀들, 꼭 귀신이 붙어서 가 아니라 사탄의 명령 따르는 내 마음도 잡귀의 마음 아니에요? 수많은 잡귀들을 제압해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 한다는 건? 여기서 이 빛의 마음이, 성령을 따르는 성령에서 나온 이 빛의 마음이 51% 이상이 되면 우린 사탄의 군대와 싸워서 이긴 거 아닙니까? 그렇죠? 성령에서 터져나오는 성령의 열매, 성령과 공명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욕심과 싸워서, 비양심과 싸워서 이깁시다. 욕심은 없을 순 없습니다. 그런데 비양심은 우리가 역량이 허락하는 한 싸우서 이겨야 겠죠. 욕심은 양심의 말, 성령의 말을 듣게 만들고 그래서 비양심 세력을 약화시키고야 겠죠. 36절이요. 지금 34절 부터는 도마복음에 친숙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죠. 도마복음에 막 겁내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도마복음을 이상한 시각으로 보실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늘 하시던 말씀들 어록으로 모아놓은 것 뿐이에요.
《36절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본문 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날마다 예요. 날마다
《그대들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네, 전 옷 다 사놨어요' 이런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말일까요? 그냥 말에만 주목해서 '옷 입을 것만 걱정하지 마라.' 이런 뜻도 아니죠. 의식주 걱정 하지말라는 얘기죠. 이 중에 도마가 이 구절만 핵심이 되는 구절로 봐서 이렇게 적어 놓은 거지 풀면 더 자세하죠.
풀어볼까요? 풀어진 내용이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4절에 있습니다. 같이 볼께요. 각주 5번 입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그대들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하지마라.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마라.]
그러니까 내 생명이 중하니까 내 생명 살릴려고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잖아요. 그 걱정도 하고, 또 이 몸뚱이를 치장 하려고, 살려고는 옷이 없어서 추위로 죽을 수 있으니까 또 생명하고 직결되기도 합니다만 또 그 몸을 치장하기 위해 무엇을 입을까, 생존과 또 치장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이렇게 걱정도 우리가 하겠죠. 그런데 목숨보다 너 생명보다 음식이 중하고, 이럼 안되죠. 지금
[생명이 음식보다 중하고]
지금 막 본심이 나오나, 몸뚱이 보다 또 말 잘못 나갔죠.
[몸뚱이가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그렇죠 몸뚱이 보다 말고요, 하느님 한테도, 우리한테도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통이가 옷보다 소중하겠죠. 그래서
[저 하늘을 나는 새들을 봐라. 그들은 씨도 안뿌리고 거두지도 않고]
농사도 안짓고
[곳간에 쌓아 두지도 않는데]
저축해둬서 걱정 안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없는데도 걱정 안한다는 거에요. 그렇지 않냐?
[그러나 그대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다 먹여 주신다. 그대들은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은가? 그대들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대들은 왜 옷을 걱정 하는가?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봐라. 그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고]
옷도 안만드는데, 자연스럽게 만들겠죠. 인간처럼 이렇게 노력해서 만들지는 않지만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솔로몬의 온갖 영광으로도]
솔로몬이 아무리 멋있게 차려입어봐라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차려입은 그 모습이 더 뛰어나지 않냐? 이거죠. 그러니까 '옷 만들려고 막 고민하지 않아도 하늘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치장해주는데' 이런 얘기입니다.
[오늘 여기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까지도]
정말 순간을 사는 경우죠. 순간 쓰고 버려지는 존재들 마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혀주시는데 그대들이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는가?]
진짜 이 자연의 신비를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미세한 존재들, 그런 존재들도 보면 다 먹고 살고, 우리 인간의 눈에는 몸이 정말 징그러울 수도 있지만, 정말 뭔가 고심해서 디자인한 듯한 그런 놈들을 갖고 있더라구요. 눈에 안보이는 세균이나 벌레들 봐도,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경우에 어떻게 된다는 거죠? 이런 걱정을 하게된다는 거예요. 먹을 거, 입을 거 걱정을 하게 된다.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거 이 세가지를 주로 얘기 하셨는데 도마복음에는 하나로 모아서 입을 것만 그냥 얘기 하신 거죠. 입을 거, 그러니까 몸뚱이,
[너 몸뚱이 살림살이 너무 신경쓰지마]
몸뚱이 살려야 되니까 옷 입혀야 되고 또 치장도 해야 되니까 입혀야 되지만 '그런거 신경 쓰지마' 좀 잘 안와닿으시죠? 우리 마음에, 에고의 마음에는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나, 할 수 있지만 취지를 잘 살펴서 듣자구요. 왜 지금 제자들한테 이런 얘기 하시나,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도 다 찾는다]
하나님 안믿는 존재들도 다 자기 먹을 것, 입을 것, 옷 걱정 하는 거 다 할줄 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 자녀라면 그렇게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거 생각하는 만큼 뭘 생각해야 될까?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겠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뭘 해야될까?
[그대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고]
사실 우리 보다도 잘 알고 계시다. 이정도 믿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이런 신뢰가 있어야 되지 않나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이런 신뢰, 있으신지? 생각해 보시면서 들으세요.
[그대들은 무엇보다 그분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왕국이 이겁니다. 성령, 하나님의 성령이, 성령 자체가 하나님이 왕국이고, 이 성령이 구현된, 성령의 발현이라고 했는데, 성령의 구현이라고 말씀 드릴게요. 성령의 구현, 성령이 온전히 구현된 게 천국이죠. 자, 성령 자체가 본체로서의 천국이고, 내 영혼육에서 구현되면 또 여기에서의 내 영혼육이 하나의 작은 천국이 되고, 성령이 구현된 곳이니까, 이 성령의 진리가 선포된 곳이 천국 아니겠어요? 죽은 뒤가 아니에요. 지금 성령의 뜻이 내 영혼육을 통해 구현 되버리면 여기가 천국이죠. 내 몸뚱이가 천국이고 내가 사는 세계가 천국이 되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그 영혼육에서 천국이 구현되어야 되겠죠. 그래서 그분의 왕국 즉,
[성령의 현존과 성령의 구현, 그리고 그분의 정의로움, 성령의 진리죠]
성령의 정의로움이란 건 성령의 진리
[구하라]
오로지 성령의 현존과 성령의 진리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 모든 것들도 함께 받게 될 것이다]
먹을거, 입을거, 걱정 안해도 아버지께서 다 챙겨 주실 것이다. 그대들 몫을 챙겨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이 걱정 하도록 하라.]
저도 그런 말씀 드린적 있죠? 내일 일을, 내일 걱정 할 수 있는 걸 미리 끌어당겨서 걱정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 걱정 해라' 이거죠. '내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해라'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충분하다]
오늘 하루 무사히, 이런 마음으로 오늘 하루 성령의 현존과 접속하고, 성령을 구현하려고, 성령의 진리를 추구하는 그런 삶, 성령의 진리를 분석하고 실천하는 그런 삶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드리던 말씀으로 하면 이렇게도, 이렇게 설명 드려도 되겠네요. 우리 공부하는 게 뭔가요? 제가 이런 도해로 이런거 얘기 드린 적이 있지 않나요? 우리가 할 일이 성령의 현존에 접속하기, 성령 진리를 직관하기, 직관한 진리를 생각으로 분석하기,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하기, 이것만 합시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 말씀을 여기다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할 수 있겠죠. 자, 성령의 현존이 천국이죠? 천국과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정의로움이란 건 이 진리를 분석해서 실천하는 것까지 다 진리죠? 진리의 이야기죠. 자, 성령의 현존과 천국과 그리고 그분의 정의로움과 즉, 진리의 구현, 여기에만 관심두면 지상에서 천국이, 진짜로 구현 되겠죠. 이거 외에 다른 걱정은 부수적으로 하라.
저는 예수님처럼 아예 하지말라고 못 하겠어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아예 안할 수가 있나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또 내 문제만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자식 다 걸려 있는데, 부모자식 걸려있는데 걱정 안 할 수 있나요? 걱정하세요. 다만 저는 51%를 제안할게요. 51% 이상은 성령의 현존과 성령의 진리, 성령의 정의로움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성령의 현존에 어떻게 접속해서 그 성령의 현존 안에 있는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서 이 땅에 구현할 것인지? '거기에 더 주된 관심을 두고 마음을 쓰라' 이렇게 설명 드려 보겠습니다.
그 얘기가 도마복음에도 있다. 이거 기억하세요. 성경의 한 구절 중에 외우 두세요.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거 보다 뭘 더 신경 쓰라고요? 그분의 왕국 그리고 그분의 정의로움, 그분의 왕국이라는 건요? 성령과 그 성령의 구현을 말하는 거고 그 분의 정의로움이라는 건 진리죠. 선악의 기준인 그 진리, 어기면 불의, 정의롭지 못한게 되는 그 진리, 진리를 따르면 정의로움이 되겠죠? 자,
《37절 살아계신 분의 아들》
이 얘기 또 재밌습니다. 보세요. 이런 얘기는 또 다른데 없죠? 다른 복음에 없어요.
《그분의 제자들이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언제쯤 저희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저희는 언제나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게 헤어질 때쯤 얘기 아닐까요? 우리가 언제나 당신을 다시 볼까요? 어디서 당신을 찾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여기 주목해 보세요. 특이한 얘기가 나와요. 그대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부끄러움 없이 벌거숭이가 되어 옷을 벗어서 발아래 두고 밟을 때》
그림 그려 보세요. 이상하죠? 애기가 전혀 부끄러움 없이 벌거숭이 상태로 옷을 밟고 있는 모습, '그런 상태로 너희가 해라' 이거죠.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지금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근데 어린아이처럼 벌거숭이가 됐는데 부끄러움도 하나 없이 또 옷을 밟을 수 있을 때, 그럴 때
《살아계신 분의 아들을 보게 될 거다》
예수님 언제 볼까요? 했더니 '살아계신 분의 아들을 보게 될 거다.' 하고 딱 나를 보게 될거라고 안하고 말을 좀 약간 다르게 하셨죠? 살아계신 분의 아들을 보게 될 거다. 이렇게 얘기 하셨죠? 그리고 보게 될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거 이상한 구절이죠. 각주5번 풀어볼까요? 각주를 제가 두 가지 관점에서 풀어 봤어요. 이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현교적 관점과 밀교적 관점으로 풀어 봤어요. 볼게요. 먼저 지금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칭의적 관점과 영화적 관점, 즉 에너지체, 부활체의 관점과 성령과 하나된다는 칭의의 관점,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게 현교, 드러내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가르침, 보편적 가르침과 밀교, 이런 에너지체 얘기는 불교에서 밀교적으로 다루거든요. 은밀하게 전해지는 가르침, 불교식으로 말하면 4대복음이 현교적인 관점이라면 도마복음은 밀교적인 관점의 복음이죠. 이해하실 거구요. 제가 지난 시간에 얘기 드린 것들 많이 들으셨습니까.
각주 6번 볼게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영적 베일이 있어요.]
장막이 있습니다. 이 장막이 있어서 하나님과 나를 둘로 보게 만들고 우리끼리도 서로 둘로 보게 만들어요. 자,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영적인 베일이 있습니다.
[하나를 둘로 가르는 마음,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이 있는데]
그 베일을 옷이라고 보고 그걸 벗어버린다는 건 어떻게 되죠? 그럼 부끄러움이 없겠죠.
[하나의 성령]
둘이 아닌 하나의 성령, 하나님과 우리도 둘이 아닌,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그래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그 성령 자리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현존 자리에서, I AM, 나의 현존 자리
[안에서, 거기에 머물고 거하면서]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지 않았나요? 나와 남을 따지면서, 남녀를 따지게 되고 하나님과도 거리감이 생기고, 그렇죠? 그러니까 선악과 먹기 전에
[영적인 벌거숭이가 되어라.]
이렇게 이해해도 좋죠? 영적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벌거숭이가 되어라.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이거죠. 하나가 되면
[그대들이 바로 영원한 현존의 참된 분신,]
살아 계신 분의 아들이란걸
[알게 될거고,]
그러면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제자들한테, 그대들이 먼저 살아계신 분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야 나를 볼 수 있다는 얘기예요. 지금 이 얘기 이해 되시죠? 예수님 말씀이 이상하잖아요 당신을 언제 보게 될까요? 라고 했더니 영적인 벌거숭이가 돼라. 그러면 살아계신 분의 아들을 보게 될거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거다. 그러려면 그대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령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분신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걸 알아라. 온전한 자녀는 아니죠. 성령이 온전하지, 온전한 자녀가 있죠? 맏이인 예수님,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걸 알게 될 때, 맏이인 예수님, '아 똑같은 자녀인데 더 온전하신 분이구나' 이런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다. 이렇게 지금 설명해 주셨다고 봐도 무방 하겠죠. 그래서 먼저 그대들 스스로 빨리 성령 안에 안주해서 이원성의 분별심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그대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걸 알아라. 그러면
[성령의 온전한 구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거다.]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거다. 이렇게 이해해도 돼요. 밀교적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만 얘기하기 아쉬운 게, '옷을 벗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가 돼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면 하나님 자녀를 만날 수 있다' 본인이 이미 하나님 자녀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라는 걸 이해하고 만나게 될 거다. 이렇게 이해도 좋지만 '옷을 벗고 막 밟을 때' 이야기가 너무 구체적이잖아요. 그 구절 까지 생각하면 방금은 칭의적으로, 성령 안에서 안주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를 만나는 얘기를 했다면, 제가 하나 추가로 이 비유가 아쉬워서 이런 의미도 담을 수 있다. 적어드린 게 이겁니다. 보세요.
[죽음이 자신의 것을 찾으러 오기 전에]
이 옷을 우리 몸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벌거숭이가 돼도 당당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부활체를 얻어야지, 이 육신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쓰고 있으니까 내 거지만 죽음의 신이 오면 줘야되잖아요. 도마복음의 논리에서는, 그래서 벗어주고도 그 옷을 밟으면서, 그 옷을 진짜로 초월한 거죠. 밟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 없이 당당할 수 있으려면 부활체를 얻어야 제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죽음의 신이 자신의 것을, 즉 육신 찾으러 오기 전에
[육신을 벗어 버리고]
육신은 죽음의 신한테 줘버리고 난 이미
[영적 육체를 지녔기에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육신을 벗고도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조건을 갖출 때
[영생을 얻어서]
이거는 진짜 영생을 얻은 거죠. 영혼육의 영생이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
이때는 영화를 말씀드린 겁니다.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성자를 영접할 수 있다]
이렇게도 한번 풀어 드리고 싶어서,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에 '사문과경' 불교에 사문과경 이라고 사문은 출가승 이거든요. 출가승이 수도를 해서 얻는 과보, 열매가 뭐냐? 라고 묻는 그 왕한테 부처님이 대답한 게 사문과경입니다. 자, 보세요. 여기 어떤 얘기가 나오냐면 부처님도 이런 경지를 얻으신 거에요.
[어떤 사람이 뱀에게서 허물을 벗겨내고 이것이 뱀이고 저건 허물이다.]
뱀이 허물 벗는 거에요. 그렇게
[뱀과 허물은 다르죠.]
이거 지금 우리 도교에서도 뭐라고 그래요? 우화등선, 신선사상에서도 우화등선, 나비가 이제 허물을 벗고 날개가 생겨서 날아 가는 것, 매미가 날개가 생겨서 허물을 벗고 날아가는 것, 원래 날개가 없었잖아요. 허물을 벗으니까 어떻게 됐어요? 본체는 날개가 있었죠? 원래 날아다니는 애였어요. 그런데 지상에서 굴렀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나비의 경우에 우화등선, 매미 경우에 금선탈각, 매미가 금선 입니다. 신선 선자 아니고 매미 선자예요. 금선이 허물을 벗었다고 해서 탈각, 자 이게 동양의 신선사상인데 부처님 말씀하고 너무 똑같죠? 뱀이 허물 벗는 걸로 부처님은 얘기해요. 이 뱀 얘기보다 나비나 매미 얘기가 더 좋은게 뭐냐면 원래 날아다니는 존재였다는 거에요. 그런데 지상에서 기어다녔다는 거예요. 허물 벗고 나니까 진짜 더 상승의 몸을, 더 뛰어난 몸을 얻게된 거죠. 그 점은 부처님도 똑같아요. 보세요. 뱀이 허물 벗었잖아요? 그래서
[이 허물은 뱀으로 부터 벗겨낸 거다.]
여기서 끝나는데 뒤에 더 많이 있어요. 더 뛰어난 몸을 얻게 된다는 얘기도 있어요. 길어서 제가 잘랐는데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똑같아요. 이 육신 벗어버리고 더 뛰어난 영적인 육체를 얻게 된다. 그게 영생의 몸이다.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게 신기하죠? 자, 신선사상이나 도교, 중국 도교사상 우리 민족의 신선사상도 있으니까 도교랑 신선사상은 좀 구분하죠. 우리의 신선사상이나 중국의 도교사상이나 불교에도 이게 지금 의성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이게, 마음으로, 생각으로 만들어낸 몸, 재료는 에너지에요. 그런데 생각으로 만들어낸 몸, 기독교요? 영으로, 영에서난 영의 몸, 다 똑같은 소리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애들이 옷을 벗어버리고 옷을 밟고 뛰놀 수 있다는 건, 그 옷이 육신이라고 본다면 진정한 육체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하겠죠? 그럴 때 진짜 너희가 그래야 날 알아보고 날 만나지, 이 소리에요. 너희가 성령 안에 안주하 건, 부활체까지 얻어서 진짜 영생을 얻건 그래야 살아계신 분의 아들, 영원히 현존하시는 분의 아들이죠. '살아계신' 이란 건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에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의 아들이 스스로 되서 영원히 살아계신 분의 맏이인 나를 알아 보게 될 거다. 이 얘기가 지금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재미 있죠? 재미 있으시겠죠? 아무튼 저는 재미 있습니다.
38장, 이런 얘기를 혼자만 알고 있어서 답답했는데 이렇게 얘기 나눌 수 있으니까 더 재미 있죠?
《38절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가르침》
예수님의 속마음을 지금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거는 복음에도 있어요. 비슷한 얘기들이 있어요. 복음에 비슷한 것 좀 이따 보고, 먼저 본문부터 볼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는 이러한 가르침들을 듣기를 갈망 했었다.》
너희 내 얘기 진짜 듣고 싶어 했잖아?
《그대들은 누구에게서도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얘기 들을 수 없었잖아.
《그대들이 나를 찾아도 나를 발견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성령 각성 안하면 예수님 못 만나니까 이 말도 맞죠. 요한복음에 보면 또 이렇게 얘기 하셨다가 나중에 또 볼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성령 각성하면 만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 나를 찾아도 발견 못 할 것이다' 그런건 영원히가 아니고 지금 무슨 상황이겠어요? 예수님이 귀한 가르침을 주는데 제자들이 지금 잘 이해를 못하거나, 이해를 못 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그렇죠? 지금 건성으로 듣고 있는 경우겠죠. 제자들이 가르침 듣는 걸 소홀히 하니까 이 얘기 하신 거 아니겠어요? '지금 내가 말한 이런 가르침 듣기를 그대들은 얼마나 갈망 했느냐? 그리고 이런 얘긴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 가면 다시는 못 만나, 근데 이 자식들아' 이런 느낌 아니예요? 그렇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라면 그런 느낌의 얘기일 것 같아요. 이해 잘하고 있는데 이런 얘기 안 하지 않을까요?
각주 7번 볼께요. 마태복음에 또 통하는 구절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16절에서 17절,
[그대들의 눈은 볼 수 있으니 축복받을 것이고]
이땐 좀 분위기 좋게 나가네요. 그대들 눈은 진짜 축복 받을 거다. 볼 수 있잖아.
[그대들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축복받을 것이다]
왜요? '나를 보고 내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축복 받을 일이다' 이거예요. 약간 말씀이 느낌은 다르지만 뭐 같은 내용이죠? 이 자식들아 지금 이게 어떤 건데 이렇게 안 들을래? 이런 얘기나, 너희는 좋겠다. 복 받았네, 내 얘길 들을 수 있어서, 뭐 같은 얘기아니예요?
[진실로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어차피 지금 이 말씀 같이 하시고 계시죠? 더 세죠? 아까 도마복음 보다 더 쎄요.
[수많은 선지자들과 정의로운 사람들]
의인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구현했던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던 선지자들, 이 사람들이 다
[그대들이 지금 보고 듣는 것을 간절히 보고자 원하였으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도다.]
말 세죠? '그때는 누구에게서도 이런 소리 못 들었어' 이 얘기를 또 다른 각도에서 하신 거죠. 수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그토록 나를 보고 내 얘기 듣기를 원했었는데 시대가 달라서 못들었죠. 시대가 달라서 못 듣고 못 본거를 니네는 시대가 좋아서 보고 듣는데 '또 그 따위로 할래' 이런 느낌 아니예요? 그 제자들의 훈계가 포인트가 아니고 예수님 스스로 지금 얘기하시는 이 내용, 내가 지금 전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이 정도까지 얘기하신 다는 게 재밌죠? 어떤 선지자나, 구약에 나온 모든 의인들과 선지자들 이겠죠. 믿음의 선조들이 그토록 보고자 했던 게 나고 그토록 듣고자 했던 게 내 말이다. 왜요? 이 말씀에서 예수님만 주목하시면 안돼요. 선지자들이 보고, 듣고, 알고 싶은 게 뭐예요? 하나님의 참된 진리, 하나님의 그 모습 아니에요? 그런 거룩한 모습, 그 거룩한 모습을 누가 지금 갖고 있어요? 하나님의 맏이인 예수님, 메시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가장 온전히 구현하는 존재죠. 성령과 제일 제대로 통한 존재죠. 그러니까 모든 선지자들이 메시아를 보고 싶어했죠. 인자를 보고 싶어했죠. 인류 중에 제일 맏이, 인류 중에 제일 꼭대기, 최고의 인간을 보고 싶어 했고,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그 분의 행동을 보고 싶어 했고, 삶을 보고 싶어 했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걸 해 줄 수 있는 인간, 도와줄 수 있는 인간이 누구냐? 메시아이고 인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그렇게 간절히 보고 듣길 원했던 거죠. 자, 이렇게 이해해 보시면 이렇게까지 마태복음에서 센 얘기를 하셨던 분 이예요.
그러니까 도마복음 말씀이 센 게 아니에요. '누구한테서도 이런 가르침 못 들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앞으로 떠나면 내 얘기 못 들어, 이런 얘기는 요한복음에도 나오는 얘기죠. 그러니까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얘기가 전제되어 있는 분들은 이 구절 봐도 어색하지 않으실 거예요. 익히 듣던 말씀들 같을 거예요. 39절 까지만 할게요.
《위선자 바리새파의 죄악》
이 구절도 마태복음에 통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자, 볼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깨달음의 열쇠들을 취하고는 그것들을 감추어 버렸다》
깨달음의 열쇠들, 하나님의 말씀들 이에요. 십계명도 하나님의 말씀 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놓고는 그걸 실천을 해야 되는데 실천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게 또 포인트예요. 성령 안에서 실천해야 하나님 말씀의 구현 아닌가요? 하나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실천하는, 남 보여주려고 실천하는, 이런 위선적인 모습의 실천은 하나님 말씀을 엿 매기는 짓이죠. 능욕하는 짓이죠. 그래서 깨달음의 열쇠들,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어 놓고는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하나님 말씀 전문가 아닙니까? 그런데 감춰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실천을 안했다는 거예요. 그냥 말씀만 듣고는 먹어 버린 거예요. 자기 맘대로 계산해서 자기 말씀을 선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행동에 옮긴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며》
자해, 자해 한거죠.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도 다 막아 버렸어요.》
하나님 말씀을 율법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게 왜곡시켜 버렸죠. '성령 받아라'는 얘기를 안 했죠. 성령 받게 도와주지도 못했죠. 이게 해타죠. 자해해타, 보살의 반대 아닙니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살은 뭐예요? 자리이타, 자기도 천국 가고, 불교식으로 하면 자기도 정토 가고, 남도 정토 가게 해주는 존재, 기독교식으로는 자기부터 천국가고 남도 천국가게 해주는 존재, 그래서 예수님이 심법입니다.
《그대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이건 자리 쪽이죠. 먼저 그대들 스스로 진리를 보는 안목을 키우고, 그 다음,
《비둘기처럼 순수해라.》
이 얘기는 성령 안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자리이타로 꼭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앞에 바리새파의 행동과 반대되는 덕목들로 제가 자리이타를 붙여봤어요. '뱀처럼 지혜롭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라'는 건 자리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서 성령 안에서 사심없이 다른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줘야 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이타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얘기가 다 기존 복음에 있습니다. 보시면
8번 각주 보면 기존 복음에 있는 얘기들 이예요. 두 얘기가 합쳐진 거에요.
[재앙이 있을 것이다.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아!]
늘 욕먹는 분들이죠. 두 부류,
[왜냐하면 너희가 사람들을 막고서]
막아 버렸어요.
[하늘의 왕국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문 닫아 버렸어요.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지금 같이 문 밖에 있읍니다. 문 안에 들어가서 막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스스로도 못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도 다 막아 버렸다]
이 얘기는 이미 마태복음 23장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얘기랑 좀 또 다른 얘기예요. 10장 16절에 있는 말씀
[보라 내가 그대들을 내보내는 것이]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뭐라고 해요?
[마치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이]
지금 걱정되는 거죠.
[그러므로 그대들은]
어떻게 해야되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져라]
비둘기 두려워하는 분도 계시죠? 닭둘기, 닭둘기 요즘 비둘기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얗고 뭔가 순수함의 상징으로서의 비둘기 입니다. 또 요즘 뱀 키우는 분들 많죠? 애완뱀, 반려뱀 인가요? '뱀이 얼마나 또 귀여운데요' 이렇게, 지혜롭다, 왜냐하면 지혜롭다는 말이 원래 왜 나왔냐면, 제가 이 얘기가 이해 안되실 수도 있겠네요. '왜 귀여운 거랑, 지혜로운 거랑 충돌이 나나요?'
옆에 각주 9번 보세요. 창세기에 뭐라고 되어있는면 창세기 3장 1절에, 왜 뱀이 지혜에 거론 되냐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 '가장 대가리를 잘 굴린다' 이런거죠.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원래
쓰이던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뱀이 사탄을 대표하게 됐잖아요. 간교한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까지 왜곡시켜 버릴 수 있는 간교한 지혜를 가진 무서운 지혜죠. 지혜는 지혜인데 하나님 안에서의 지혜의 의미는 아니죠. 그래서 뱀이 원래 간교함을 상징하는 동물이 이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좋게도 쓰는 거예요. 그렇게 지혜로워져라. 그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니? 뱀처럼 머리가 좋아져라, 비둘기처럼 사심이 없어야 된다. 마음이 순수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 사랑하라는 마음을 구현하겠죠? 그러니까 뱀은 지혜를, 비둘기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남들을 도와주고 지혜로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나님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불교의 보살이랑 비교하면 자리이타의 덕목을 갖춘 겁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라' 이게 보살되란 얘기랑 똑같은 거예요. 사도들한테, 아니 이리들 가운데, 그 거친 중생들 있는 곳에 양들, 사도들,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살들을 보내면서 심법으로 전해준 게, 그들보다 지혜로워지고, 얼마나 중생들이 간교해요? 그런데 그런 중생들 보다 더 머리가 좋아야 된다. 더 지혜로워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중생과 다르게 뭐예요? 그 지혜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여야 되요.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지혜가 되려면 마음이 순수해야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돼요. 머리만 좋고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뱀처럼 지혜로운데 비둘기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그냥 간교한 거에요. 그렇죠? 소시오패스가 얼마나 머리 좋습니까? 세상 사는 지혜를 얼마나 달달 꿰고 있는데요. 그게 그냥 뱀처럼 지혜로운 거예요. 비둘기처럼 순수 해버리면 이게 둘이 충돌이나요. 그러면 재밌어져요. 이 뱀의 지혜가 성령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지혜가 되버리고, 이 비둘기의 사랑도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지혜를 갖춘 순수한 사랑이 되서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랑이 되고 이 지혜도 순수함을 전제한 지혜니까 나를 살릴 수 있는 지혜가 되는 겁니다. 반대로 하면 바리새파가 돼요. 자기도 지혜가 없어서 아니면 그냥 뱀같은 지혜만 갖고 순수한 마음이 없어서 자기도 사실은 망치고, 그 꽤 부리고, 머리 좋은게 꼭 자기를 이롭게 하는게 아니예요. 자기 망치는 거에요. 왜?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만드니까, 그리고 남들도 도와 주지 않죠? 남들도 다 망쳐버리는, 사랑의 마음이 없기에 남들까지 망쳐 버리는,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수함 가지고 여기까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이런 말씀까지 드렸어요. 제가 정리한 말만 드릴께요. 오늘 1시간 꽉 채우겠네,
[뱀은 지혜를 상징하니]
각주 9번,
[무지를 타파함이요. 비둘기는 순수함을 상징하니 아집을 타파한 거다]
나만 아는 그 이기심, 아집을 타파하는 거다. 그래서 불교도 두가지 업장이 있죠? 부처님 되는데 두 가지 업장이 있어요. 훌륭한 보살 되는데 두 가지 닦아야 할 업장 있습니다. 무지와 아집, 지적인 장애와 심리적 장애, 지금 예수님이 정확하게 제자들한테 뱀처럼 지혜로움을 통해 지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져서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라. 그래야 바리새파처럼 안된다. 저 위선자들, 저 소시오패스들 처럼 안 된다. 그래야 그 거친 이리들 같은 중생 속에 들어가서도 선한 양의 마음을 갖고도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렵죠? 보살직 어렵듯이 지금 사도직도 어렵습니다.
지혜와 사랑 얘기 이거 하나만 더 제가 말씀드리고 끝낼께요. 맹자에 나온 말씀인데, 유불선, 도교 제가 너무 왔다갔다 하는데, 재미 있으시죠? 알아서 정리하세요.
[옛날에 자공이]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 맹자한테 제자가
[선생님은 성인이시네요.]
이랬어요. 성인 성자가, 보세요. 귀 이자, 입 구자,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서있습니다. 흙 위에, 높은 언덕 위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이게 지금 성인 성자, 이게 문자로도 분류됩니다. 원래는 정자죠. 탁월할 정자, 이 가운데가 밑보다 더 길면 인자가 되고, 가운데가 더 짧으면 정자가 돼요. 탁월한 정자, 지금은 이걸 통용해서도 쓰거든요 그런데 원칙적으로 구별이 되니까 구별하죠. 자, 이렇게 해서 뭐냐? 사람이 높은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사람, 우뚝 솟아 있는 사람, 탁월한 사람, 일반인이 아니에요. 어디에서 탁월한 사람이냐면 인간은 못 듣는, 중생들을 못 듣는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듣는데 탁월하고 그거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데 탁월한 사람이예요. 이게 지혜죠? 이게 사랑이죠? 이해 되세요? 비둘기의 순수함을 갖춘 뱀의 지혜고, 이거는 뱀의 지혜를 갖춘 비둘기의 순수함 입니다. 2개가 함께 가야 돼요. 어느 쪽이 더 포인트냐지, 자, 그래서 지혜와 사랑, 불교도 지혜와 자비, 기독교도 지혜와 사랑, 그렇죠? 진리와 사랑, 지혜와 사랑, 유교도 지혜와 사랑, 이거밖에 없어요. 인간이 성령을 구현하는 방식은, 전세계 모든 철학과 종교는 이거밖에 없습니다. 지혜, 아는 것에서 성령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꿰뚫어 보는 것, 자, 심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수용하고 표현하는 것, 자, 그래서 맹자 한테 제자가 선생님 성인이시네요. 이러니까 옛날 자공이 공자님 한테 '선생님 성인입니다' 이랬는데
[공자님이 이렇게 얘기 하셨다. '성스러움은 내가 감당 못한다.]
아니 성인이라니? 공자님은 정말 겸손하신 성인 이시라, '성인이라니 나 부족한거 많다' '나 인간적 약점 많다' '나도 중생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닦아야 할게 많다' '성인이라니? 완벽한 성인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 말이 중요해요. '다만 나는'
[진리를 배우는데 실증 안내고]
이거 지혜의 아닙니까? '진리를 배우는데 실증 안내고' 진리를
[내가 배운 진리를 내가 아는 만큼 남한테 가르쳐 주는데]
이건 사랑이에요. 가르쳐 주는데
[염증 안냈다]
게을리 안했다. 그러니까 자공이 정말 머리 제일 좋은 제자거든요. IQ 제일 좋고 말 제일 잘하는 제자예요. 자공이 어떻게 받아치는지 보세요.
[진리를 배움에 실증 내지 않으신 거는 지혜요, 진리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신 것은 인자함, 사랑이시니 지혜롭고, 인자하시니 성인 맞네요]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대저 성인은]
이 얘기를 맹자가 꺼낸 거예요. 성인은
[공자님도 감히 사양 하셨는데 내가 무슨 성인이야]
이 얘기하다가 성인의 어떤 덕목들이 나왔죠. 지혜와 사랑, 이 얘기가 제가 꼭 나누고 싶어서 각주에 넣어봤습니다. 뱀과 비둘기를 떠올릴때 지혜와 사랑이 떠오르시기를, 그게 불교식으로 보살되는 비결이요. 기독교식으로는 사도가 돼서 거친 이리들 사이에 뛰어들어서 전도를 할 수 있는 심법이요, 또 유교식으로는 백성들의 리더인 군자가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심법 입니다. 지혜와 사랑, 진리를 열심히 배우고 남한테 열심히 가르쳐 주는, 바리새파는 진리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했고 남들에게 엉터리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써 다함께 천국을 못가는 최악의 사태, '소경의 길안내'가 이루어졌어요. 이거 명심 하시면서 도마복음 또 재미있게 공부 하셨죠? 다음주에는 40절 부터 한번 또 나가 보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