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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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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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육체로 인해 영이 존재하게 하라
강의일자 2020. 07. 04. 土.
게시일자 2020. 11. 20.
동영상 길이 55:06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f4hkHn8UB8c


자, 교재 준비하셨죠? 지난 시간에 이어서 도마복음 24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누구나 들으실 수 있습니다.


《24절 빛은 빛의 사람 안에 있다


그분의 제자들이 묻기를 당신께서 계신 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당신의 경지를 보여달라' 이거죠.


《우리가 그 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되려면, 선생님처럼 되려면 당신이 계신 그런 경지를 얘기해주세요. 이거죠.


소리가 안들리신다고요? 들리시나요? 24절 지금 읽고 있습니다.


빛은 빛의 사람 안에 있다. 그분의 제자들이 묻기를 당신께서 계신 자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우리가 그 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요한복음 때도 읽었는데, '내가 어디있는지 너희 찾아올 수 있지?' 이런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그 제자들 입장이 '예수님이 어느 자리에 계시는지 알고 싶다' 이런 질문인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십시오.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빛은 빛의 사람 안에 있으니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


'우리 에고는 차가운 쇠공이고 이 빛은 불덩어리다'라고 보신다면, 제가 늘 드는 비유있죠. 차가운 쇠공의 비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속 빛이, 하나님의 빛이 온전히 쇠공 전체에 걸쳐서, 예수님도 우리처럼 혈육의 자녀지만, 혈육이 있는 자녀지만 동시에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죠. 그래서 이 빛의 속성에 지배받는, 혈육이 없으신 건 아니예요. 그런데 혈육의 자녀라고 안하죠. 하나님 자녀 중에 맏이. 그렇죠? 빛의 사람이란 의미가 이겁니다. 빛은 빛의 사람 안에 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빛이 빛나고 있다. 나는 온통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존재를 통해서 온 세상을 비추겠죠. 빛은 우리의 몸과 마음, 한마디로 에고죠. 우리의 자아, 우리 몸과 마음은 내 에고 소속이죠. 내 자아의 소속인 것들을 먼저 밝힌 다음에, 그 다음 나 밖에 세상, 세상을 비춘다. 이 얘기를 해주신 거예요. 만일 그것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둠이다. 밖으로 이렇게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이 소리는 갑자기 왜 빛이라고 했다가 어둠이라고 하느냐? 만약에 예수님처럼 이 빛을 에고가 내면에서 부터 수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밖으로 못비추겠죠. 그럼 뭐가 되죠? 차가운 쇠공이 됩니다.


잘 지워져야 할텐데...


차가운 쇠공이 된다. 뭐냐? 빛이 꺼질 순 없어요. 빛이 어둠이 된다는 건 아니예요. 이 빛이 안에 갇혀서 밖으로 터져나가질 못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에고는 어둠 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비춰줄 수도 없죠. 그러니까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있죠? 우리 보살도 차원에서, 중생을 구제한다, 인류를 구원한다, 이런 차원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런 위대한 역사를 할 수 있는 근원은 우리 안에 있는 빛이다. 하나님 자리다, 빛이다. 이 빛이 먼저 나를 비추게 하라. 먼저 나를 타오르게 하라. 그래서 내가 뜨거워진 만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먼저 나를 바꿔서 나를 바꾼 만큼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구제할 수 있다. 이런 원리들이 지금 다 들어있죠. 짧은 글인데요 중요한 말씀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각주 한번 볼까요. '빛의 사람'이라는 부분에 해당되는 각주요.


[아버지가 빛이니 아들은 빛의 사람이다. 불교에서도 그렇다. 성부에 해당되는]

존재, 이게 하나님이 성부가 있고 성령이 있죠. 그럼 뭐냐? 성부의 작용이 성령 이거든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이 빛은 일단 성령으로 우리가 만나겠지만 그 성령의 근원은 성부죠. 성부의 영이니까. 그러니까 성령, 성부는 다른게 아닙니다. 같은 자리인데 서로 위상이 다르죠. 그럼 뭐냐? 불교에도 비슷한 게 있다. 성부는


[비로자나불 이라는 법신불 입니다.]


성부는 비로자나불, 그럼 성령은 로사나불, 그럼 똑같은 소리예요. 이 '비'라는 강조어만 붙였다, 뺐다 합니다. 절에 가면 비로자나라는 부처가 있고, 로사나라는 부처가 있어요. 무슨 차이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근원, 법신불 자체, 그리고 로사나불은 이 빛이 우리 영혼 안에 이미 임해있는


[그 빛을 로사나불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령 이랑 똑같죠. 그리고 성자에 해당되는 존재, 이 빛의 사람은 결국 누구죠? 부처님이죠. 부처님 중에 아미타불이 빛의 사람에 해당됩니다. 왜 비로자나, 로사나, 아미타불을 얘기 했느냐? 보십시요. 재미 있는게 있어요. 도마복음하고 완전히 통하는 불교 내용입니다. 불자분들 꼭 아셔야 되요. 이 빛이 부처 자리, 불성 자리면 여기도 부처 자리지만 부처의 본체에 해당되는 자리라면 그 부처가 온전히 인격으로 화연하면, 인격까지 입으면 아미타불 이잖아요? 그런데 이 불성도 본체가 있고 작용이 있다. 성부, 성령처럼, 그럼 비로자나가 본체고 로사나가 작용이고


[아미타불은 빛의 사람이다.]


그럼 뭘로 입증하냐? 뭐가 똑같다는 거냐? 구조는 비슷할지 몰라도 뭐가 똑같냐? 비로자나는 여래로 치면 대일여래라고 하죠?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태양빛이란 뜻입니다. 비로자나도 태양빛, 로사나도 태양빛, 아미타불은요? 무량광, 무한한 빛이란 소리죠? 무량광불이죠.


[또 수명도 영생을 얻었다고 무량수죠. 빛과 생명하면 성경에서 예수님이죠.]


너무 통하죠? 요한복음 8장 12절 볼까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무량수, 무량광이죠? 영생의 빛,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이 빛은 생명도 주고 지혜도 주는 자리입니다. 그렇죠? 이렇게까지 보시면 도마복음과 불교가 또 만나죠. 제가 억지로 갖다 붙이는 거 같죠? 모르죠. 헉~ 확인해보세요. 저는 이렇게 보입니다. 25절 가볼까요?


《25절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라》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라. 이 얘기 전에 각주 2번이 빠졌네요. 2번 보고 할게요.


[빛, 아버지이자 불, 본체인 빛은 빛의 사람 아버지가 이제 아버지랑 하나가 된 아들, 그리고 불타는 쇠공 입니다.]


아까 빛은 불 자체 라면 사람이니까 이제 혈육의 요소, 인격의 요소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혼과 육의 요소가 들어가야 되니까 불타는 쇠공,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다. 주위에 빛을 비추지 못하는 사람은 더이상 빛이 아니다]


속에서 아무리 불씨가 살아있고 빛의 근원이 있더라도 밖으로 비추지 못하면 어둠이다. 이거 명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아무리 성령이 임해 있어서 성령으로 인해 말하고 울고, 웃고, 숨쉬고 살아가더라도 성령의 빛을, 성령의 생명을 온전히 우리가 수용하지 못하면 어둠일 뿐이고, 또 뭐죠? 빛을 진리 차원에서 이렇게 우리가 볼 때는 어둠이죠. 길을 모르는 진리를 모르는 어둠 상태요. 또 이 빛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상태는요? 사망만 기다리고 있는 거죠. 영생으로 갈 수 없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됩니다. 어둠에는 이런 의미도 있다는 걸 보시구요.


[만약 쇠공이 뜨겁게 달아올라 주위를 뜨겁게 하지 못하고 식어버린다면 단지 차가운 쇠공일뿐 더 이상 열기가 아니다.]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25절은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친구들을 그대의 영혼처럼 사랑하고》


이부분 말씀 참 따뜻합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그대의 친구들을, 벗들을 그대의 영혼처럼 사랑하고, 나처럼 사랑하라는 거죠. 내가 내 영혼 아끼듯 사랑하고,


《그대의 눈동자 처럼 그들을 보호하라》


우리 눈동자가 얼마나 재빠릅니까? 눈에 뭐 이렇게 날아오면 바로 깜빡깜빡 하죠? 그 정도로 우리 벗들을, 이웃들을 보호하시는지? 그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민첩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어젠가 구급차를 택시가 막아서 돌아가신 사건이 있었어요. 자기 영혼처럼 사랑하고 자기 눈동자 보호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박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양심이 마비되도 어마어마하게 마비된 상태죠. 이게 지금 고등침팬치들 살아가는, 혈육의 자녀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빛이, 성령의 불이 얼마나 식어버린 거죠? 그거 한번 생각해보시고, 3번 각주 보실래요.


[뜨거운 열기를 공유한 쇠공들은 뜨거운 열기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차가운 쇠공이라다 하더라도, 지금 보이는 이런 실존적인 모습, 정말 실망스럽고 정말 최악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우리 모습이니까 부정할 순 없죠. 수용 해야죠. 차가운 쇠공은 뭔 짓도 다 할 수 있다. 사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들 하는 모든 짓, 사실 우리도 다 할 수 있다. 한 생각 삐뚤어지게 먹으면 할 수 있다. 왜? 차가운 쇠공 상태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성령의 빛과 불만 받으면 그 뜨거운 열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도 내 영혼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거죠.


[우리는 각각의 개체이나]


쇠공들이 뜨거운 열기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의 성령 안에서 하나이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몸이니 우리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분신들이다' 이거죠.


[그러니 나와 남은 본래 한 뿌리를 가진 존재로 자신을 위하듯이 서로 위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교회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외칩니다. 근데 자기 벗들을 이렇게 사랑하지는 않아요. 위선적 사랑으로 흐르기가 쉽구요. 왜?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랑이라 위선적 사랑으로 흐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죠. 하나님을 진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한 뿌리에서 나온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죠?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진정으로 효도하는 자]


즉 부모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형제들 간의 우애 있는 자,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 일 것이다.


[부모님에게만 잘하고 형제들 간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부모님의 가슴은 피멍이 들 것이다]


이걸 명심 하신다면 좀 각이 나오죠. 어떤 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건가? 예수님은 그냥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분 일 뿐이죠. 요한복음에서 본인 스스로 자기 속 얘기를 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을 뿐, 그래서 내 이웃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내 몸처럼 사랑했던 것 뿐이예요.

그게 하느님 사랑을 경천, 그리고 이웃 사랑을 애인, 이렇게 한문으로 한번 표현해 볼게요. 성경에서 왠 한문이냐? 할 수도 있지만 설명을 쉽게하기 위해서 단어를 좀 줄이자고요. 애인과 경천 이렇게 나눠요. 이건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치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기독교랑 잘 맞아요. 경천, 하나님을 공경하자. 애인, 남들을 사랑하자. 남들을 나처럼 사랑하자 이 소리 입니다. 하나님을 지극정성으로 공경하며 남들을 나처럼 사랑하자. 여기가 '부모를 사랑한다'라면 '형제간에 우애있자'죠. 그래서 이 경천이란 것은 신성과 조화를 이루는 겁니다. 우리는 신성과 먼저 소통해야돼요. 하느님과 소통해야 돼요. 그렇죠? 그다음 남들, 타인과 조화, 타인과 소통 해야 됩니다. 근데 사실은 신성과 소통하면 자신과 또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조화를 이루려고 해도 신성과 먼저 통해야 돼요. 신성을 알아야 나의 본 모습이 나와요. '나는 아주 고아에, 이 우주에 던져진 하찮은 존재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면 육신의 부모님이 계셔도 고아같죠. 이 우주에 던져줘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르겠고, 답도 안 보인다면, 하지만 신성을 알고 나면 내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게 나오죠. 진정으로 나와 소통하고 나의 못난 부분도 이제 감싸 안을 수 있게 됩니다. 그 마음으로 타인의 못난 부분도 감싸 안으면서 동시에 타인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걸 알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게 돼요. 이 세가지 조화를 지금 경천애인으로 담은 거예요. 보십시요.


[율법학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해요]


이게 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거겠죠? 율법학자 했으니까


[계명 중에 제일 중요한 계명은 뭡니까?]


'당신 얼마나 율법 아나 봅시다' 하고 질문 하니까


[첫째는 바로 이거니 이스라엘아 들어라]


성경의 구절, 구약의 구절을 가지고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은 유일한 주이시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해]


모든 걸 바치라는 겁니다. 마음, 목숨, 온 정신, 온 힘, 사력을 다해서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경천이죠.


[두 번째는 이거다 너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애인이죠.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가복음 12장 28절에서 31절 말씀인데 여기서 이게 더 하나로 줄어듭니다. 예수님이 율법 학자에게 두 가지라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하나, '내가 새로운 계명 줄 거야' 하면서 하나로 종합 하십니다. 그게 뭡니까? '서로 사랑하라' 그거 먼저 볼까요? 요한복음, 밑에 밑에 있는 인용문 이예요. 13장 34절에서 35절 말씀이요. 이제 두 가지 계명 하나로 녹입니다. 뭘까요? 하나님 사랑하라로 녹일까요? 애인으로 녹일까요? '부모를 사랑하라'와 '자녀 간에 서로 사랑하라' 이 두가지를 하나로 종합하면 뭘까요? '자녀 간에 사랑하라' 예요. 자녀 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부모님을 사랑하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 부모님의 뜻을 온전히 받드는 거죠. 하나님의 뜻이 뭐예요? '서로 사랑하라'


[내가 그대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신성을 사랑하고 그 신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나부터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고 남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들도 제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조화를 이뤄라' 이거죠.


[내가 그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라. 만약 그대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대들이 나의 제자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 제자구나'라고 알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이 얘기는 이게 제일 핵심이라는 거에요. 그 위에 볼까요.


[무엇이든지 남이 그대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대를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게 황금률이죠. 옛날 로마 황제들이 이 말이 너무 좋아서 황금으로 된 데다가 새겨 가지고 날마다 황금은 변치않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변치않는 인간관계 최고의 룰이다' 해서 황금률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래서 황금률은 후대에 붙은 이름이고,


[제일 중요하다 이게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다]


모든 성경의 골자다. 예수님의 얘기하셨죠. 이 말을 왜 읽었냐? '서로 사랑하라'를 우리는 이게 감정적 사랑인지? 그렇죠? 어떤 사랑을 말하냐? '양심적 사랑을 말한다' 양심적 사랑, 단순한 감정적, 단순한 이성적 사랑이 아니라 양심적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 양심적 사랑은 뭡니까?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남한테 해주는, 내가 상대방 이라면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는 그게 사랑이다.' 이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제가 예전에 대선 나가서 뭐죠? 10분동안 양심을 28번 얘기했다고 누가 샜던 분들이 계셨는데, 지금 이분도 장난 아니죠.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이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왜요?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분 사랑 장난 아니죠? 사랑 성애자시죠? 얼마나 이분 감동해서 이렇게 썼을까요? 그렇죠? 사랑 합시다. 하나님은 사랑 덩어리 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꾼이고, 그렇죠? 빛은 빛의 사람 안에서 빛난다. 사랑은? 사랑 덩어리는? 누구 안에서 빛나요? 사랑꾼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빛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으로 충만해야죠. 아까 빛을 얘기했죠? 진리 얘기 했으니까 이번에 사랑 얘기해 볼게요. 자명과 사랑은 하나 입니다. 이성적 측면에서는 이 진리로, 감성적으로는 사랑으로, 그렇죠? 단순한 감성적 사랑은 아니라는 거예요. 양심적 사랑이 감성으로 피어나는 거죠. 그랬을때 사랑, 그리고 이 앙심이 이성으로 꽃을 피울 때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양심의 이성으로 꽃을 피울 때 진리, 자명함, 그렇죠? 방금 이건 요한일서에 있는 4장 7절, 8절 말씀 이고, 바울 얘기도 들어볼까요. 요한 사도 얘기도 들었으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모든 율법은 한 가지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이제 바울은 아예 노골적으로 밝혔죠. 예수님이 얘기한 두 가지 계명도 하나로 요약되고, 십계명도 하나로 요약됩니다. 그게 뭐냐?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애인, 하나로 요약되더라. 왜? 애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하나님 사랑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애인을 잘 안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사실은 경천만 해도, 예수님이 '난 아버지만 사랑했다'해도 애인이 이미 거기 들어가 있는 거죠? '나는 애인만 잘했다'라고, '나는 내 이웃들에게 양심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그들을 사랑했을 뿐이다.'라고 해도 아버지 사랑이 당연히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꼭 애인으로만 묶어야 됩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사람들은, 바리새파들 쌔고 쌨어요. 형제간에 사랑하는 사람은 없더라는 거예요. 이게 위선적 사랑이죠. 위선적 사랑에 대한 처방으로 그시대에 이게 나온 겁니다. 또 바울 말,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 말씀 들어볼까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그 의무,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마십시요.]


유일하게 서로 의무, 빚을 져도 좋은게 뭐냐구요? '사랑해야 된다' 왜냐하면 그의 동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율법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에 빠지면 율법은 엉터리다. 기존의 바리새파들아 들어라. 율법학자들아 들어라. 이거죠. 하나님한테 잘 보인다고 천국 가는거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면 천국 갈 수 없다. 이 소리고요,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는 모든 계명과 그 밖에 어떤 계명도]


이런 말이 왜 있느냐? 십계명 안에 있는 모든 항목들이 하나님을 위해하라는 거 아니고 다 뭐냐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너의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 이 사랑은 사실 양심이죠, 양심적 사랑입니다. 양심적 사랑이 뭔가요? 감정적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요? 양심적 사랑은, 아까 나왔죠, 남에게 바라는 걸 먼저 해주는 것, 이건 양심 없으면 못 하거든요. 사랑은 개나소나 합니다. 양심적 사랑을 못해서, 아까 진정한 사랑, 양심적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안끼친다고 했죠. 그게 황금률에 맞는 사랑이기 때문이겠죠. 자 26절 볼까요?

《먼저 그대의 눈 속의 들보를 빼내라》


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서 잘 아시죠? 밑에 보시면 누가복음 6장 41 절에서 42절 글을 인용해 놨어요. 근데 이게 거의 똑같은 말이라 하나만 읽어도 됩니다. 오늘은 도마복음 시간이니까 도마복음 읽어 볼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은 친구의 눈 속의 티끌은 보면서,》


다른 사람 눈에 티끌이 들어있는 것은 보면서,


《자기 눈 속의 들보가 들어있는 건 못 본다》


티끌을 보는데 큰 나무가 들어있는데도 몰라요.


《그대를 눈썹의 들보를 꺼내야》


그래야 눈이 밝아지겠죠.


《그래야 친구들 눈 속에 티끌을 제거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잘 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자기가 이미 색안경 끼고 있으면 남들 도와준다고 해봤자 다 잘못돼 있다는 거예요. 이미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서 친구들을 심판하고 재단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죄하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너의 잘못부터 먼저 반성해라.' 이 소리죠. 그 얘기가 누가복음에 거의 그대로 있어요. 각주 5번 볼게요.


[경천의 요령은 애인에 있다.]


지금 이것도 연장선상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제가 글을 각주에서 앞에 글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각주 잘못 들어온 게 아니고, 앞에 글도 타인을 내 영혼처럼 사랑하고, 그렇죠? 내 눈동자 보호 하듯이 보호하라. 그러면서 지금 이어서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 이거죠. 경천은 결국 애인에 있다. 경천을 잘 하려면 애인을 잘해야 된다.


[그러니 친구들을 나처럼 여기고 사랑해야 된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아무리 작아도 철저히 비판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아무리 커도 쉽게 용서한다.]


이거 반대로 하면 되지 않겠냐? 이거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잘못은 남의 잘못을 비판하듯 철저히 반성해야 되고 남의 잘못은 자신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래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해 되시죠? 그래서 명심보감에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남을 질책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질책하라]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 욕할때는 정말 똑똑해 지거든요. 그 똑똑한 총명함으로 자기를 비판해보라는 거구요. 자기를 용서할 때는 그렇게 하해와 같아요. 그렇죠? 그럴만 했지, 해서


[남을 용서할 때 그 마음으로 해봐라]


'이렇게 역지사지해 가면서 남을 사랑하라' 이겁니다. 이게 명심보감에,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 이란 뜻이예요. 거기다 비춰보면 내 마음의 못난 게 다 이렇게 비춰 보입니다. 마음을 항상 대조하라. 여기에 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 마음을 항상 대조해 보면서 반성하라는 게 명심보감 입니다. 여기는 유불선 모든 지혜로운 말들이, 마음에 관련된 말씀들이 다 있는 책이예요. 원본은 엄청 길어요. 그러니까 유불선의 모든 선사들의 말씀도 있고, 좋은 말씀들 다 있어요. 그게 우리나라에서 돌아다니는 명심보감은 축약본 입니다. 그렇게만 아시고, 자 27절 가볼까요. 27절 제목부터 재미있습니다.


《세상을 금식하라》


먹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현존에 인식하라》


볼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그대들이 세상을 금식하지 않으면》


완전히 다른 말씀이예요. 지금 바리새파들은 천국 가려고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고 위선적으로 이렇게 금식을 하고 있었어요. 먹는 거를 뭘 안먹고 단식도 해보고 먹는 거를 어떤 음식은 안 먹는다 해서 항목을 정해서 안먹고, 이런식으로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따위 금식을 하지말고 '세상 자체를 금식해라' 이겁니다. '세상을 끊어라'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근 작용을 끊으라는 얘기죠. 눈은 뭘 먹고 사나요? 색깔을요. 눈은 보고 싶죠. 귀는요? 소리를 먹고 살죠. 그렇죠?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촉감을, 생각은 이 수많은 탐진치의 대상을 추구하죠. 이게 뭔가를 먹고 있는 거예요. 이거 금식하라, 끊어 버려라. 그럼 뭐죠? 이거 파격적인 말씀인거 알겠죠? 세상을 금식해라. 세상과 접속을 끊어 버려요. 몰라하라는 겁니다. 무지의 기도를 하라. 몰라하라. 몰라해 버려라. 그러면 '그래야 이제 하나님의 왕국을 찾을 거다' 이거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금식하지 않으면


《그대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만 해도 벌써 선사의 말씀입니다.


《만약 그대들이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대들을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하신 말씀이, 안식 얘기를 또 왜 할까요? 금식 얘기만 하면, '세상만 끊어 버려라.' 끝나면, '몰라만 하라' 이러면 재미없죠. 몰라 다음에 뭐가 있어야 되죠? 우리가 어떻게 얘기하죠? 세상을, 이름을 모든 걸 몰라 하세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현존에 만족하세요. 몰라, '존만' 제가 그러자나요. 존재로 만족하기, 하나님의 현존으로 만족하기. 몰라, 세상을 금식하라, 자아를 부인하라, 내 이름 몰라하면 자아부인이죠. 내 이름도 몰라, 세상도 몰라 해버리면 '시간도 공간도 모르겠어' 해버리면, 이게 세상을 금식하는 거고 그 다음에 뭐죠? 하나님 안에 안식하라. 이건 우리 얘기 그대로 다 들어 있지않나요? 요즘 우리가 나누는 얘기들, 자! 각주 볼까요?


[세상을 금식하라. 오직 모를 뿐이다. 일체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라. 하나님 자리야 말로 우리의 안식처다]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안식처라는 얘기 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니 우리는 안식일을 제대로 지켜야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와 하나가 되어 존재해서 살아가야 된다.]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진리, 구분 해봤어요. 하나님의 현존, 우리가 몰라하고, 하나님의 현존 자리가 뭐죠? I AM 자리죠. 에고에 이미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게 안식이고 이것만이 안식이 아니라 널리 인류를 사랑하라는 사랑의 진리 안에도 안식해야겠죠? 그래야 진정한 안식이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진정한 안식일을 지냈어요. 안식일 날 아픈 사람들 고쳐줬다고요, 그게 하나님의 진리에 안식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에 안식했잖아요. 그랬더니 바리새파가 와서 일하지 말랬는데 일한다고 막 시비 걸었죠. 안식일 무시했다고, 누가 안식일을 무시했을까요? 율법에 얽매인 바리새파일까요? 진짜 하나님의 진리에 안식했던 예수님 일까요? 이렇게 구분해 보시면 이 구절 의미가 생생하실 겁니다. 세상을 금식해 버리고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안식하라.


여기까지, 하나 더 할까요? 잠시만요, 28절, 진짜 재미있는 게 29절인데 죄송합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28절 일단 해볼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


도마복음은 친절합니다. 별 얘기 다 있어요. '이거 궁금했지' 하는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세상 가운데 내 자리를 정하고,》


'내가 어디 태어나야지'하고 정해놓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멋지시죠? 전형적인 불교에서 보살의 모습 입니다. 중생 구제하려고 육신을 입고 화신으로 나타나셨데요. 인도에서 아바타라고 하죠. 신성한 존재가 화신으로 아바타가 돼서 육신을 입고 나타났다. 물질적인 이런 육근의 작용을 갖추고 태어났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처럼 육신을 가지고, 육근을 가지고 태어나셨어요. 여러분들도 천국에서 이 지구를 구원하러왔다. 예수님 따라서 같이 구원하려고 왔다.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게 제자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세상에 우리 자리를 정하고 육신을 입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런 사명감 한번 가져보세요. 욕심 내시라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신성을 찾으면 우리 자신과의 소통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사명도 알 수 있겠죠. 진짜로 그랬는지,


《나는 그들이 모두 취해 있다는 걸 알았으나》


모든 인류가 취해 있어요. 술에, 포도주에, 여기서 포도주는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술에 취해 있어요.


《그들 중에 누구도 목말라 하는 자를 찾지 못했다》


영적 갈망이 없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탐욕의 취해서, 물질적인 탐욕에 취해서, 탐진치에 빠져서 영적 갈망을 잊어버렸더라. 정신이 나간 거죠. 정신이 나가있더라.


《내 영혼이 인간의 자녀들로 아파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서》


심안 이죠. 제가 한문으로 써놨는데, 마음의 눈이 멀어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이 헛되이 세상에 왔다가 헛되이 세상을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는 이런 삶이 참 헛되도다, 보람이 없더라. 예수님 관점에서 입니다. 보람이 없더라.


《그러나 그동안 그들이 취해 있었으나 그들이 포도주를 떨쳐버릴 때》


술을 끊을 때 이건 그냥 술이 아니라, 탐진치죠. 탐욕이죠. 탐욕이 있으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고, 이 욕심을 내려놓을 때, 이 욕심을 절제할 수 있을 때죠. 절제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의 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제가 항상 주장하는 양심적인 삶으로, 이제 욕심을 양심으로 리드하는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게 지상 천국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이루려고 오신 분 이예요. 와서 다 데리고 승천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일부러 오신 거에요. 포도주 끊게 하려고 알콜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하려고, 그렇죠? 그래서 정말 빛의 자녀, 빛의 사람이 되서 온전하게 살게 도와주려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진리도 찾고, 성령 안에서 영생도 이루고, 그렇죠?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만들려고 오신 겁니다. 그 얘기를 불교적으로도 한번 보실래요? 법화경 방편품에 각주 7 번 보세요.


[사리불이여 보라]


부처님 제자죠. 사리불아


[부처님 세존들께서]


불교에선 여러 부처님들이 계십니다. 진리의 화신들이긴 한데 여러분이 계세요. 부처님 세존들께서


[이 세상에 왜 출현하시는지 아는가, 그 유일하고 위대한 한 가지 목적이 있다는 거 아는가]


뭡니까? 또 들어보면 한가지라고 했는데 여러가지를 얘기해요. 이게 다 한가지란 얘기예요. 사실 하나를 여러 각도에서 얘기한 거예요. 들어보세요.


[중생들의 부처의 안목을 열어주고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심]


중생들이 포도주에 취해서, 탐진치에 취해서 아까 마음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그래죠, 불교에서는 부처의 눈을 잃어 버렸다는 거예요. 그 눈을 얻게 해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출현하셨고, 두번째는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의 안목, 마음의 눈을 보여주려고]


'이런게 부처의 안목이다. 이런게 마음의 안목이다'하는 걸 보여주려고


[출현하셨고]


세번째는


[중생들이 부처의 안목을 깨닫게 하고자 출현하셨고]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뭐예요? 진짜로 마음의 눈을 열어주려고 오신 거고, 네 번째는요?


[중생들이 부처의 안목을 따르는 길에 들어서게 하려고]


다 보살의 길로 기독교 같으면 사도의 길, 하나님 자녀의 길, 성스러운 무리, 성도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고


[출현하신 거다. 사리불이여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한 가지 위대한 목적이다]


지금 예수님이 부처님으로 안보이시면 진정한 불자가 아니죠. 그렇죠? '거 이상하게 받아치네' 하실지 모르지만 '이야기 이상하게 풀어가네' 하실지 모르지만 수긍되시죠? 도마복음이 법화경이랑 지금 잘 만나고 있다는 것도 아시겠죠. 29절 가야겠네요. 29절, 제목부터 이상합니다.


《육체로 인해 영이 존재하게 하라》

무슨 소리죠? 들어보시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영으로 인해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건 신비로운 일이다》


뭔 말일까요?


《그런데 육체로 인해 영이 존재한다면 그건 대박, 신비 중에 신비다》


이건 또 뭘까요?


《난 어떻게 이런 위대한 풍요가 이런 빈곤 속에 거주하게 되었는지 신비로울 뿐이다.》


지금 끝까지 혼잣말만 하셨죠. 제자들하고 소통이 됐을까요? 첫 구절에서 뭐니? 두 번째, 이건 뭐야? 세 번째, 나랑 관계가 없구나, 전혀 뭐 소통이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알아들을 자,' 즉 예수님 늘 얘기하시는 귀 있는자는 들었겠죠. 도마 같은 경우에는, 도마복음도 실제 도마가 썼는지는 모릅니다만, 도마로 보자구요. '오 이거 대박인데, 아주 핵심이 되는 노하우인데' 하고 적어 놓으셨겠죠? 아니면, '뭔 말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적어놓자' 하고 적어 놓으셨을까요? 우리 이해해볼까요? 아주 재미 있습니다. '영으로 인해 육체가 존재한다' 아까 예수님이 얘기 하셨죠? 영혼 상태로 계셨겠죠? 여기서 영 이라는 건 영혼이라고 읽으시면 편해요. 영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의 작용이 혼 이거든요. 영혼이 육체를 입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내 자리를 정해서, 그게 영혼이 이미 있는 거죠, 생각이나 계획이 있는 거죠. 영혼이 내 육신을, 내 자리를 정해서 육신 입고 오신 거죠. 그렇죠? 좌표 찍고 육신이 입고 오셨다잖아요. 이것도 신비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존재도 그래요 영혼으로 있다가 육체를 입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영이 육체를 입어서 활발하게 혼의 작용을 일으켰겠죠. 그러니까 '영혼이 육체를 입게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를 입는 것도 참 신비다. 그런데 육체로 인해 영혼이 존재하게 된다면, 죽으면 이 육체랑 분리가 일어나죠? 육체랑 분리가 일어나서 영혼만 지옥을 가건, 천국을 가건 어디로 갈 거 아니예요? 그렇죠? 근데 이 육체로 인해서 영이 존재한다는 건, 내 육체인데 내 육체로 인해서 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 육체에서 부활체가 이루어진다'는, 내 육체에 기반해서 부활체를 만들어서 영혼을 영원히 존재하게 만든다. 영혼육이 온전하게 합일된 상태로 존재하게 만든다는 거지 영은 늘 원래 존재해요. 지금 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영이 존재한다는 거는 영이 육체 안에 늘 머물게 된다는 거죠. 원래 죽으면 육체랑 분리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데 육체로 인해서 영이 존재하게 된다는 건 이 육체에 답이 있다는 거예요. 이 육체, 사멸하는 육체인데 썩어 없어질 육체 입니다. 그거 오래 살아봤자 100년 안쪽인 이 육체 안에 뭔 답이 있길래 육체로 인해서 영혼이 온전한 영적 육체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게 신비 중에 신비다. 나는 어떻게 이런 위대한 풍요가, 이게 뭘까요? 앞에서 얘기했던 거에요. 낙원에 있는 다섯 그루 나무, 이게 5원소라고 그랬죠. 지수화풍 5원소, 생명의 원소죠. 생명의 5원소가, 생명을 만들어내는 이 5원소가 육체 안에 있다는 거에요. 이게 지금 이 5원소가 백이죠. 백의 요소죠. 백과 이 백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원기, 지수화풍을 백으로 보면, 공은 원기로 볼 수도 있겠죠? 물론 지수화풍에 공까지 같이 볼 수도 있습니다. 지수화풍에서 공이 또 있거든요. 이 얘기 지난 시간에 드렸는데 묵직한 땅의 에너지, 흐르는 물의 에너지, 타오르는 불의 에너지, 이렇게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에너지, 그리고 이 4가지 특정 성질이 없는 상태의 그 에너지, 그런데 이 공이 순수한 성령 에너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요 그러니까 공은 이 두가지 의미가 다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여기서는 지수화풍은 백의 요소, 공은 성령 에너지, 생명수, 성령에 나온 생명수라고 볼까요. 지난 번에도 그렇게도 강의 드렸던 것 같아요.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영생에 이르는 그 재료죠. 영생에 이르게 하는 그 생명력의 재료들이 어디 있어요? 이 죽어가는 몸 안에 있데요. 그러니까 어떻게 난 이런 위대한 풍요가, 영생의 열매가, 이게 영생의 열매들이예요. 낙원에 있는 다섯 그루 나무라는 게 뭐예요? 생명나무 열매들이잖아요. 고무 고무 먹으면 고무 되듯이 이거 먹으면 영생하는 거에요. 이 에너지 먹으면, 이 열매 먹으면, 그래서 이런 위대한 풍요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이 생명 나무의 열매가 어디 있었어요? '빈곤 속에' 곧 죽을 우리 몸 안에 있더라는 거예요. 이상한 얘기죠? 황당한 얘기죠? 각주 볼까요?


[영혼이 거친 육체, 즉 사멸하는 육체를 입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걸 말하는데요]

영으로 인해 육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 아까

[28절에 '나는 세상 가운데 내 자리를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하셨죠, 거친 육체 안에]


육체로 인해 영이 존재한다는 건 뭘까요? 거친 육체 안에


[존재하는 5가지 생명의 원소, 육체의 그런 에너지 의지해]


육체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 입니다. 에너지 의지해


[새로운 육체를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을 말합니다. 육체에 의해 영혼이 영적인 육체를 얻게 된 것이야 말로 신비 중에 신비다]


이게 도마복음 22절에 나왔죠.

[그대들이 육체의 눈 대신에 새로운 눈을 만들 수 있고 육체의 손 대신 새로운 손을 만들고, 육체의 발 대신 새로운 발을 만들고, 육체의 형상 대신 새로운 형상을 만들 수 있을 때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거다]

이거 만드실 수 있겠어요? 이 답이 나와야 도마복음을 마스터한 겁니다. 그래야 칭의, 성화, 영화를 본인이 다 성취한 거예요. 예수님 말씀이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까지 다 해주셨어요. 그러면 위대한 풍요와 빈곤은 뭐냐?


[육체라는 빈곤 즉 사멸하는 존재 속에 이런 위대한 풍요로움 즉 낙원의 다섯 그루 나무, 생명의 나무, 생명의 다섯 가지 원소가 존재한다는 게 신비로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이르기 전에]

이 육체와 분리되기 전에, 이 얘기 안에는 절박함이 있어요. 도마복음 안에 흐르는 절박함 입니다. 이 육체를 죽음의 신이 와서 달라고 하기 전에, 육체를 잃어버리기 전에 그걸 육체 안에서 챙겨야 된다. 그걸 못 챙기면 그게 널 죽일 거다.

우리에게는 혼이 있습니다. 구름을 뜻해요. 구름같은 영혼이 있고, 흰색, 색깔이 있는 영체가 있어요. 두가지 영체인데 이게 정신 작용을 맡은 영체구요, 이건 육신 작용을 맡은 영체 입니다. 이 백이라는 게 에너지체예요. 방금 말씀드린 그 에너지예요. 영이라는 참나가 있어요. 혼이라는 에고의 작용이 있어요. 그리고 백이라는 몸 안에 있는 에너지 작용이 있고, 육체가 있습니다. 영혼백육, 말씀드렸죠. 계란으로 치면 노른자, 흰자, 껍질에 붙어 있는 막, 그러면 이게 딱딱한 껍질, 이렇게 이해하셔도 좋다. 그래서 이걸 아시고 보셔야 돼요. 지금 이 영생을 죽기 전에 이루어야 되는 이유가 죽으면 혼비백산 이라고 하잖아요. 혼은 날아가고 백은 육신과 함께 있다가 흩어져 버려요. 이 풍요로움의 요소가 우리를 떠난다구요. 그러니까 영혼만 남게 되는 거죠. 그 영혼이 육체를 입는 것도 신비지만, 이 육체 안에서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를 얻어서 영혼육을 이렇게 온전하게 만들버린, 이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육을 온전하게 얻어서 영생을 얻어야 된다. 죽기전에 해야 된다. 이게 계속 도마복음에 나오는 거예요. 죽기 전에 해야된다.

노자 말씀 볼까요? 대놓고 이 혼은 불이죠. 하늘 올라가는 이 정신 작용이고, 이건 땅으로 흩어지는 육신에 있는 에너지 작용이라 물로 그릴 수 있겠죠. 이 혼백을 합치면요? 영혼육이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혼과 백을 하나로 합쳐서 분리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하나로 에너지를 모아서 갓난 아이처럼 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노자가 예수님보다 훨씬 전에 태어나신 분인데 노자 안에 이런 글이 남아 있어요. 재미있죠? 혼백 합쳐서 혼백 합일체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게 부활체예요. 이게 동양의 신선사상입니다. 부활체 만들어서 신선 될 수 있다. 갓난 아이로 다시 거듭나게 할 수 있겠는가?

포박자 볼까요? 중국 도교에 바이블이죠. 고전적인 바이블인데, 포박자에 보시면


[하나님과 하나로 통하고 싶다면]


심통하고 싶다면, 통심이죠? 하나님하고 통을 하고 있어 싶다면, 소통을 하고 싶다면


[물과 불을 알맞게 조절하여]


불은 머리에 있는 에너지, 불 에너지, 배에 있는 차가운 에너지, 물 에너지를 호흡을 통해 조절해서, 한 덩어리로 만들면 그래서


[이 육신에서 분리시킬 수가 있게 된다.]

육신에서 분리시켜서 독자적인 실체를 만들면 그거는 혼백 합일체죠?


[그러면 삼혼칠백이]


여기에 혼이 세개가 있고 백이 7개가 있어서 삼혼칠백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될 것이다]


혼백 합일체, 영육이 하나가 되있는 진정한 영적 육체를 확보하면 삼혼칠백을 알게 될 것이다. 거기 설명 제가 달아놨습니다.


[삼혼은 뭐냐면?]


어려운 얘기라 제가 오늘 안 할까 싶었는데 시간이 마침 되서 하겠습니다.

혼 안에 또 3단계가 있어요. 정신 작용 중에 백을 관리하는 혼이 있어요.


[백을 관리하는 정신 작용이 있고, 참나랑 소통하는, 영성을 관리하는 혼의 작용이 있고, 이 중간에 자아를 관장하는,]


이게 에고죠. 자아를 관장하는


[혼 작용이 있습니다.]


이게 3혼 이예요.


[칠백은 전후좌우상하, 이렇게 해서 중심점,]


정육면체가 나와야 물질이 만들어지죠? 창조는 칠일 걸리게 되있고, 가운데서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운데서 하나님이 중심을 잡아주면서 물질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살아 움직이는 이런 물질을 나타내려면 정육면체에 점하나 찍은 이 칠수가 필요해요. 그래서 백은 7개의 백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혼은 3가지 혼이 있다. 이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아요. 그게 말이 되냐? 할 수 있지만 보십시오.


제가 어렵게 구한 그림인데 옆에 '현자의 돌'이라는 그림 보이세요? 현자의 돌이라는 게 여기 지금 우물에서 ,여기 우물 같은 게 있죠? 여기에서 지금 돌맹이를 캐는 겁니다. 이게 현자의 돌이예요. 현자의 돌이 뭐냐? 동양의 단입니다. 물과 불 기운이, 음양의 기운이, 남성여성의 기운이 하나로 뭉친, 이 단인데 우리가 단전에서 단을 캐도 삼혼칠백의 몸을 갖추어야 된다고 했죠? 그 단이 7개의 칠백을 통해서 영적인 몸을 만들어 내고 이게 생명의 5원소가 칠백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또 삼혼, 여기 그림 보시면 세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이 들고 있습니다. 위로 향하는 양의 혼, 음의 혼, 가운데가 온전히 갖춘, 중간 혼, 밑에 사람이 7명이 앉아 있습니다. 몸을 이루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음지에 그려놓은 거예요. 이게 연금술에서 그려놓은 그림입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같은 걸 본다. 아까 포박자에 나온 얘기를 그대로 그려 놓은 거예요. 물과 불이 조화를 이루어서 단을 만들었더니 내 몸뚱이가 육신에서 분리가 되더라는 겁니다. 단을 만들어서 배양했더니 분리가 되는데 그 몸이 어떻게 만들어졌냐? 삼혼칠백으로 이루어졌더라. 이거 자체가 통틀어서 양이죠. 자, 이건 양이고, 이거는 음이고 이게 또 합쳐져서 음양 합일체가 만들어진다. 자, 음양 합일의 이 현자의 돌, 내단이 있다면 이거는 선천적인 거고 이건, 이 단이라는 것은 성령과 성령의 생명수를 상징하는 거죠? 선천적인 단이 후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냐? 이런 정신 작용과 육체 작용을 다 관장하는 하나의 온전한 몸을 만들더라 이겁니다. 이게 혼백 합일체의 의미 입니다. 그래서 보면 어린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가 될 때, 이거 도교 얘기인데 들어보세요. 어린아이가 엄마 배속에서 잉태가 되면, 도교 얘기이면서 서양 신비학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첫번째 한 혼이 와요. 일 혼이 들어와서 혼이 백을 관장해줘야 우리 몸이 전후좌우상하를 갖추면서 자라게 됩니다. 이 혼 하나가 관장해줘야돼요. 그리고 태어날 때 즈음해서, 그 전 이건, 자아를 관장하는, 이게 나다 하는 혼이 들어와줘야 나와 남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영성을 관장하는 혼이 들어와줘야, 이건 태어난 뒤에 들어온다고 전해요. 이게 작동 잘 안하는 분은, 안들어와 버린 분은 정신 작용을 제대로 못합니다. 이게 들어오면 이제 총명하게 사고를 할 수 있어요. 이게 빨리 들어오면, 봉우 선생님, 저희 선생님 말씀, 이 삼혼이 빨리 들어오면 어려서 신동 소리 듣는다. 좀 늦게 들어오면 좀 더디고요. 그렇죠? 그렇게 삼혼이 있다. 그런데 이 얘기가, 삼혼칠백 얘기가 서양 연금술에 있는 것도 알겠고, 중국 도교에 있는 것도 알겠다. 근데 솔직히 예수님은 유대교 아니냐? 그러면 유대교 카발라를 가지고 설명해 드릴께요. 그때 한번 설명 드렸죠? 카발라가 벌써 어떻게 되있죠? 3대 7로 그려져 있죠? 천지창조 7일에 해당됩니다. 삼위일체의 신성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신성도 의미해요. 성부, 성 가정이라 그랬죠? 성자, 성모, 왜 성모라고 하는지 아세요? 혼으로 치면 이 성모가 천지창조 7일을 주관합니다. 물질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관장하는 이 혼적인 작용으로 이게 성모가 음이예요. 이해 되시죠? 성자가 영감을 하늘에서 가져온 양적인 작용을 합니다. 성부가 중간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 이거 그려놓은 거예요. 이 7명은 육신을 담당 하니까, 아까 연금술 그림에서 굴 안에 어둡게 앉아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 거예요. 3,7, 세피로트에도 똑같이 나온다. 그때 세피로트 질문에 이 중간쯤에 또 하나 설정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다트라고 하나요? 평소에 일반 세피로트에서는 이걸 빼고 그리 거든요. 이걸 잘 안 그리죠. 이걸 그리면 이건 주로 사탄을 상징합니다. 사탄인데, 골 때리는게, 영지주의에서는 이게 사탄을 나타내는데 창조주예요. 우주 창조주, 여호와 같은 창조주, 영지주의에서는 창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거예요. 이걸 만들지 말았어야 된다. 성모의 자녀로서 이 자리가, 카발라에서는 성모가 우주를 만든 걸로 보면 되는데 이 성모의 자녀인, 여기서 우주를 실질적으로 만들었다고 보고 여기다 점을 찍어서 그리는 경우도 있었요. 그런데 이거는, 영지주의는 6을 혐오합니다. 현상계를 만들지 말았어야 된다는 입장 이예요. 그래서 영지주의에서 주로 거론되는 창조주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다 안 그려도 의미는 아시겠죠? 현상계, 전후좌우상하, 중심점을 갖춘 이런 물질 우주는 이런 영적인 차원에서 나왔다. 여기서 이게 나온 것도 신비한데 이걸로 인해서 영혼이, 육을 갖추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신비한 얘기다.


제가 안 한다고 했잖아요. 다음에 차분히 하려고 했더니, 오늘 해버렸습니다. 혹시 미진한 거 있으면 다음 시간에 또 이어서 하겠습니다. 오늘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