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1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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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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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
강의일자 2020. 02. 15. 土.
게시일자 2020. 05. 08.
동영상 길이 53:28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SYRnaZSG264



기독교가 좀 달라 보이시나요? 이렇게 셉니다. 센데 이걸 소화해낸 분들은 새로운 기독교를 맛보게 됩니다. 진짜 기독교, 제가 보증해요. 제가 보증해봤자 별거는 아니지만, 여기 도마복음에 있는 예수님 말씀은 다 장난이 아닌 얘기죠. 영적 진리들이예요. 세계 모든 종교에 있는 철학들과 점검해도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예수님이 안썻다면 엄청난 성인이 다녀가신 겁니다. 또 다른 성인이, 이것을 배제하고 도마복음을 논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도마복음 같은 글을 조작해서 쓸수있다고 믿는 다는게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한가에 대한 입증밖에 안돼요. 무슨 얘기인줄 아시겠죠? 이게 엉터리면 풀이가 안되야 돼요. 이런 얘기를 '예수님말고 누가 했겠는가' 하고 접근해야 도마복음에 실상이 보인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나? 유대교 문화권에서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나?' 충격적인 글인데, 이런 얘기를 좀 전달하고 싶은 겁니다.

(금강경) 각주중에 금강경 보실래요. 금강경과 통합니다. 이게 사실은 연대를 알 수 없어요. 금강경도 연대가 학자들마다 이견이 많아서 사실은 도마복음이 더 먼저 쓰여졌을 수도 있고 실제로 도마복음이 문헌화된 게 뒤라면 금강경이 더 앞설 수 있지만 금강경도 현재 대충 추정되는게 한 2~3세기 작품으로, 예수님이 다녀가신게 더 먼저죠. 도마복음이 원본이라면 도마복음이 더 앞설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면 금강경의 더 원형이 되는 반야경들이 인도에 있었거든요. 인도의 반야경들과 예수님과의 교류, 이런걸 얘기해 볼 수도 있는 겁니다. 금강경 하나만 놓고 보면 사실 도마복음과 선후를 논하기 힘들지만 '금강경의 원형이 되는 경전들이 기원전 150년 전부터 인도에는 있었다' 라고 보면 또 교류를 논해볼 수 있는, 그런데 그런 교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하나라는 측면에서 보시는게 좋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게 무상보시의 핵심이거든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라' 이게 금강경의 무상보시를 딱 한마디로 해놓은 거예요. 금강경의 핵심이 무상보시 입니다. 형상이 없게, 남에게 보시를 하되 어떤 형상도 없게 하라. 이걸 예수님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주 절묘한, 서로 호응하는 진리를 밝혀주는 말씀이거든요. 이 무상보시가 뭔지 금강경에서 한번 보실래요

[“그리고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법法’(5온, 6근)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오온이 아까 얘기한 거예요. 색, 이건 물질입니다. 수상행식은 이건 마음입니다. 심신작용이예요. 우리 심신작용을 포괄해서 오온입니다. 저는 이 오온을 현대적으로 생각, 감정, 오감 이라고 표현하는 걸 좋아합니다. 생각, 감정, 오감, 이 오온에 집착하지말고 보시해라. 니 몸뚱이, 니 생각, 니 감정, 니 오감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라, 이게 뭐겠어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마음으로 보시해라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공의 마음, 공성의 마음, 보리심의 마음, 참나의 마음으로 보시해라 이겁니다. 그게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른바 ‘색깔’(色)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오온을 다르게 표현하면 6근 입니다. 여기는 6근으로 봐야돼, 이 오온을 다르게 표현하면 색을 가지고 오감을 얘기할 수 있고요, 수상행식은 다해서 6식 이거든요. 그래서 오감과 여섯번째 의식을 합쳐서 6근, 6식 그러죠. 근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을 말해요, 눈, 코, 입, 귀, 소리듣는 귀, 눈, 보는 눈, 냄새맡는 코, 맛보는 혀, 감촉을 느끼는 몸, 우리 생각, 우리 마음 이렇게 여섯개가 육근이고, 식은 안식,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코는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의식은? 시비 작용을 일으키고, 생각을 일으키고 그래서 6식, 자, 그런데 무상보시를 하려면 6근에 집착하지 말고 해라, 그러니까 보는거, 자, 보이는 색깔에도 집착하지 마라, 들리는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법칙’(法)에]

법칙이라는 거는요, 우리 생각의 대상입니다. 이게 이런건가 저런건가 따져보는 걸 법칙이라고 그래요. 이런 어떤 우리 6근의 모든 대상, 이걸 6경이라고 합니다. 지금 색성향미촉법은 6경이라고 그래요. 자, 대표적으로 색깔, 육경입니다. 안식, 눈으로 식별하는 거, 이게 6식이고, 6근으로는 눈이예요. 눈이 색깔을 보는거죠. 그러면 안식, 눈으로 색깔을 식별하겠죠. 눈이 (6근) 색깔을 (6경) 식별한다. (6식) 6근, 6식, 6경 이거 다하면 18계 입니다. 이 18계면 현상계 전부예요. 초기불교 이래로, 일체세계 그러면 저 18계가 다 입니다. 현상계는 6근의 작용말고 없다. 제가 요즘 주장하는 거죠. 현상계는 생각, 감정, 오감 말고는 없다. 이게 부처님이 주장하신 거예요. 현상계는 18계 말고는 없다. 줄여서 말하면 6근 말고는 없다. 이게 하나죠. 하나로 말하면 눈에 관련된 이 작용말고는 없다. 그런데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 생각, 감정, 오감, 6근으로 대표했는데, 생각에도, 감정에도, 오감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해야 그게 무상보시다, 이 얘기를 하고싶은 거겠죠.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형상’(相)에]

6근이라는 만법의 형상에 조금도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왜 그런가? 만약 보살이 ‘형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금강경金剛經)

(유량복덕) 그러면 작은 걸 해도, 보세요, 큰 보시를 해도 내가 탐진치의 마음으로 보시한 것은 유량복덕, 한계가 있는 복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아까 예수님이 말한 이미 보상을 받아버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댓가를 받아버리는, 인정을 받아버리는, 남 보이려고 한 보시니까,

(무량복덕) 그런데 무상보시는 참나의 마음, 공성을 구현하려고, 참나의 마음을 구현하려고, 성령과 하나가 되서 성령이 하는 일을 내가 거들어서 대신한 거예요. 이 복덕은 헤아릴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한거예요. 하나님이 한 일을 내가 거들었어요. 그러면 이 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걸 불교에서 무량복덕이라고 하는 거예요. '은밀하게 아시고 갚아 줄거다' 하는 예수님이 말하신게 무량복덕 이예요. 그건 헤아릴 수가 없어요.

(내가 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아버지를 내가 도와서 한것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해서 감히 내가 복덕을 논할 수가 있나요? 불교도 그래요, 참나가 공성입니다. 텅빈 공자리, 일체 모든 것을 초월한 텅빈 참나자리, 불성자리에서 나온 보시작용은 공덕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 참나의 작용이니까, 에고가 거들었을뿐이죠. 그러니까 '에고가 잘 거들면, 깨어서 양심의 마음으로 거들기만하면 그 복덕은 작은 것 하나에도 무량한 복덕이 깃든다' 하는 거예요. 이해가 잘 안되지만 이치적으로 따져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하는 일에,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이 우주 창조해 놓은 것에 여러분이 복덕을 논할 수 있나요? '하나님 복 지으셨네' 이러실 거예요? 뭐 좀 이상하잖아요. 하나님이 이 풀밭에 개나리 하나를 피게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복 지으셨네, 어느정도 복 받으시겠네' 이걸 논할 수 있나요? '개나리 피개한 복으로 하나님 앞으로 좋은 일 있겠네' 말이 안되잖아요.

(참나에 코드 꼽기) 헤아릴 수가 없는 복을 우주 하나님은 짓고 있어요. 여러분은 거기에 접속해 버리는 겁니다. 여기 코드 있죠? 전기의 흐름에, 전기 받아쓰고 하지만 이미 우주적인 전기에 코드 꼽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는 모든 짓도 전기가 돌아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기운이 돌아서 하나님 영으로 하는 일이 되버려서, 복덕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덕도 따지지말고 댓가도 따지지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정의만 구해서 하나님 성령에 코드 꽂아라, 빨리 꽂아라, 너도 성령 받아쓰고, 성령과 한 기운이 되어서 제대로 발현이 되버리면 보상을 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일이 되버리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자기를 죽이겠어요? 자기가 자기를 살리지? 하나님과 하나과 됨으로써 오는 복덕을 짓는 행위가 됩니다. 이런 이상한 짓이 돼요. 이 금강경에서 이 이상한 짓을 설명하려니까 무량복덕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헤아릴 수가 없는 복덕,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은 헤아릴 수가 없잖아요? 이해되세요?

'뭐지 헤아릴 수가 없는?' '제가 공덕 많이 지었어요?' '어, 헤아릴 수가 없네,'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얘기해 주세요,' '헤아릴 수가 없다니까' '뭔소리지?' 하는 것은 에고가 복을 지었는데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되어서 그래요.

불교에도 그 개념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게 도마복음과 금강경이 하나로 돌아가요. 이런 구절이 너무 많아요. 만약에 추측해 보면 요즘 흔히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듯이 '예수님이 인도가서 공부했어' 그걸 제가 봐서는 공부하셨으면 반야경을 공부하셨어요. 그때 이미 인도에는 반야경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소승이 아니라 신흥 대승 사상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삶은 보살도니까 대승 이거든요. 혹시 인도를 갔다면 반야경과 교류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죠. 저 같으면 멀어서 못가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셨다면, 그 분들은 저보다 체력이 좋으실테니까,

어떻게 해서 가셨다면, 인도에서 뭘 배웠을까? 이것은 네피셜 입니다. 이거 가지고 시비 거시면 제가 할 말이 없어요. 저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논리적으로 이 내용을 가지고 추리해 봤을때 예수님은 반야경의 달인같은 느낌은 분명히 있어요. 자유자재로 씁니다. '오른손이 한거 왼손이 모르게 해' 이 한마디가 공 사상을 드러내는 어마어마한 얘기예요. '아버지께서 갚아줄거다' 무량공덕까지 쫙 나가요. 그럼 이게 금강경에 있는 말하고 논리 구조가 똑같아요. 그렇죠? 금강경은 내 심신이 모르게 보시하라는 거예요.

☆ 니 마음과 니 생각, 감정, 오감이 모르게 보시하라, 걸림없이 보시하라, 너의 생각, 감정, 오감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라, 너의 생각, 너의 감정, 너의 그 오감에 걸리지 말고 보시해라. 공성의 마음으로 참나의 마음으로 베풀어라.

(중간학파) 이게 무상보시 입니다. 진수를 정확히 알고 계시고, 자, 금강경에는 또 이게 있어요. 일체가 공한데 보시하라는 거예요. 자, 일체가 무상인데 보시는 하래요, 일체가 형상은 없는데 중생은 구제를 하래요, 이게 금강경에 모순된 사상입니다. 공과 자비, 다 공이라는데 자비는 하래요, 이걸 얼치기로 합치면 중간학파가 나와요. '일체가 공한데 자비를 왜 해야되는가?' 이런 모순속에서 해명하려고 나온 어설픈 학설이 중간학파 입니다. 중간학파는 실제로 이 공이 참나라는 걸 모르거든요.

공이 참나예요, 참나의 작용은 자비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죠, 텅빈 공성이라는 건 생각, 감정, 오감의 만법이 공하다는 것이지 그 안에 뭐가 꽉 차있어요? 6바라밀이 꽉 차있어요. 지혜와 자비가 꽉 차있어요. 터져나오면 자비예요, 건드리면 자비 밖에 나올게 없어요. 그러니까 금강경은 공을 논하되, 무상을 논하되 반드시 베풀고 텅비어 있지만 중생을 구제하라고 얘기 합니다.

예수님은요? 이 자리가 지금 성령 자리죠.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파들이 유상보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상이 있는 보시, 생각에, 감정에, 욕심에, 탐진치에 다 걸려있는 보시를 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그 따위 보시를 하면 영 해친다고 그랬어요. '영 해친다' 텅빈 세계를 모른다. 생각, 감정, 오감을 초월한 이 무상이 기독교에서는 I AM 입니다. 순수한, 여기서 나는 나와 남이 있는 내가 아니예요. 그냥 영원히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써의 나죠. 영원히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써의 나의 마음에서 나올 것은 사랑 밖에 없어요. '그 마음으로 사랑을 해라' 이 소리인데 '바리새파 니들은 니들 욕심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자선을 하고 있다' '땡, 그런식으로는 영원히 천국못감, 성령 받아라, 성령의 마음으로 베풀어라 그러면 오른손이 한걸 왼손이 모르는 그런 집착없는 보시가 나올거다, 자선이 나올거다'

이런 논리가 똑같다. 그리고 대승으로 귀결되는 것도 똑같다. 그래서 대승사상과 아주 하나로 통하고 있다. '인도가서 배웠다는 거냐?' '모른다' 됐죠?

☆ 내용은 엄청나게 똑같다. 연대도 아주 유사하다, 지역적으로는 나라면 안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걸어간 사람도 있다더라, 모르겠다. '마리아가 아들을 유학 보냈을 것 같냐?'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기가막히게 내용이 똑같다. 비슷한 연대에 똑같은 사상이 인도와 유대, 구약사상으로 쩔어있는 유대에서도 똑같은 '공과 자비'의 사상이 나왔다, '성령과 자비'의 사상이 나왔다. 소승적인 불교가 쩔어있는 인도에서 공과 자비의 대승이 나왔다. 기가막히죠, 기원전후로 그런 사상이 나왔다. 그게 또 예수님의 사상에 온전히 반영되어있다. 이러면 재미있는 부분을 얘기 안할 수가 없죠. 이제 마지막 결론 각주 7번이요.

[‘금식’과 ‘기도’와 ‘자선’을 하되,]

자, 이제 결론을 어떻게 맺어야 할까요?

[‘혈육의 자녀’처럼 이기적인 욕심으로 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령 안에서 양심으로 행해야 한다. 욕심으로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결국 ‘순수한 나’(I Am)인 ‘영’을 해칠 뿐이다.]

영을 해친다.

[절대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이기적인 욕심, 위선’으로 행하는 자선과 금식 기도는 반드시 정죄받을 것이다. 오직 성령과 하나가 된 ‘순수한 양심’에서 하는 행위만 그 영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논어 한 구절 써봤습니다.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위하였으나, 요즘의 학자는 남을 위한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논어 「헌문憲問」)]

다 위기지학을 하는데, 요즘 학자는 다 위인지학을 한다. 얼핏들으면 이게 이기주의 아닌가요?

'옛날 학자들은 자기만 위했는데, 요즘 학자들은 남까지 위해'

해서 '요즘 학자들 칭찬한 말 같기도 한데' 그게 아니고

'옛날 학자들은 진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했는데, 요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주는 학문만 한다. 명성 얻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냥 읽으면 되게 오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 말이 딱 통하죠. 예수님 입장에서 말하면 '옛날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들은 진짜 자신의 혼을 구제하려고 도를 닦았는데 요즘 바리새파들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기도를 하고 있구나' '옛날 예언자들은 진짜 자기 혼을 구제하려고 기도했는데 요즘 바리새파들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기도하는 구나' 공자님 말씀이 이 말하고 같은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하나하고 그 뒷구절에 아직 더 남아 있어요. 보시죠,

[그대들이 어떤 지역을 가거나]

전도여행 보낼때 하는 말씀을 좀 합니다. '그대들이 어떤 지역을 가거나'

[시골로 여행할때 사람들이 그대들을 초대하면 그들이 그대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먹을 것이며, 그들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치료해줘라,]

기치료죠, 신유神癒라고 하죠. 하나님의 성령치료죠. 동양에서 말하는 기치료 같은 거죠. 성령의 에너지로 치유하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 주는대로 가리지말고 잘 먹으라는 거예요. 왜냐? 들어가는게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으로 품는 ‘생각, 감정’ 과, 그것이 밖으로 나온 ‘언행’이 우리를 더럽힌다. “입에 들어가는 것(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탐진치의 마음을 밖으로, 말로 표현한 그게 너를 더럽히지 음식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 유대인들은 금식의 전통이 있어서, 불결한 음식, 청결한 음식 엄청 따지거든요. 그런거 따지지말고 주는대로 잘 먹어라, '그거 별로 해 안돼' 이거예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음식 따지는 것은 좋은데, 지금 예수님 말씀은 '그게 영적으로 해를 준다' 는 그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 읽고는 '이상한데요 예수님, 요즘 이런 음식은 몸을 진짜로 더럽히는데요' 그 얘기를 하시는게 아니예요, 예수님은 건강차원의 얘기가 아니고 '너의 영을 더럽히는 음식이라는 것은 없다, 먹어라, 너의 영을 더럽히는 것은 그거 먹고 네가 내뱉는 그 말들이다, 마음씀이다, 탐진치의 그 마음씀과 언행이 너를 영적으로 타락시키지 음식이 너를 영적으로 타락시킬 수 없다. 이해되세요? 육식하면 도를 못얻고 채식을 해야 도를 얻고, 이런거 있죠? 다 그거 그냥 그분들 생각에 하시는 말씀이예요, 그런거랑 상관없어요. '육식하면 도를 못얻고,' 이런거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거예요. 제가 하는거 아닙니다. 탓하려면 예수님을 하세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이것들아 그냥 먹어' 이겁니다.

다만 음식을 다루는 과정에 탐진치가 들어가고 이런 것은 우리가 지적할 수 있겠죠. 동물을 키우는데, 동물을 잡는데 너무 문제가 보인다, 이런 것은 얼마든지 '내 양심에 걸린다' 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이건 양심에 걸린다' 그 얘기는 할 수 있겠죠.

다만 이것을 먹네, 마네 가지고 따지는 것은 사실은 여러분 소관은 아니예요. 왜냐? 하나님이 고기맛을 알게해서 인간을 낳았어요. 인간이 고기맛을 알아요. 육식, 채식 고민을 안합니다. 여러분 사자가 고민하는거 봤어요? '아, 고기 먹어, 말어' 이러면서, '풀로 바꿔봐' 이런, 이거는 안해요. 풀 먹는 애가 '고기로 한번 바꿔봐' 이런 경우가 가끔 일어납니다. 진짜 먹을게 없을때는 풀먹는 애가 고기도 먹고,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요. 고기 먹던 애가 풀먹고, 진짜 특수한 환경에서, 이게 다 성령 작용이예요. 하늘이 신기하게 명령을 내립니다. 바껴요. 갑자기 본능대로 살던 애들의 본능이 바껴요. 이거 신기한 일이죠. 본능이 바뀝니다. 잠깐 이상한 짓을 해요. 뱀에게 쫓기던 애들이 어느날 뱀을 잡아먹어요. 이제 상황이 변하면 하늘이 거기에 맞게 또 관리를 해줍니다.

(진화는 성령의 역사다) 그러니까 지금 창조론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성경말 그대로 믿는 분이예요. 실제로는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나지 않아요. 진화를 누가 시키는데요? 성령이요. 뭐가 진화를 시켜요? 여러분 진화라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모아서 변수 하나가 신기하게 일어납니다. 일은, 진화는 내 몸에 개별구체적으로 일어나는데, 진화가 일어날때는 벌써 이런 우주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누가 그걸 관리해요? 성령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이렇게 진화를 시키는 거예요. 인간사에도 성령이 개입해서 계속 우리를 자명한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거구요. 만물도 계속 상황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적자생존 그러잖아요. 적합한 자는 생존시켜주고, 적합하게 만들어 주고, 이걸 다 뭐가 하는데요? 성령이요. 한번 빵하고 창조하고 끝낸다는 발상이 더 비 성경적인 겁니다. 성령을 잘 이해를 못하고 예전에 인지가 어두운 사람에게 얘기해 주는, 6일만에 우주가 창조되고 막 이런 얘기들,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을 때의 이야기를 고지곧대로 믿고 있으니까 아직도 '진짜로 6일에 창조된거 아냐?' 이렇게 덤빈다구요.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그건 상징적인 이야기 들이고 리얼은 매순간 매순간 성령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시는지 알아내는게 더 포인트 입니다. 성령은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예요. 시공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창조하고, 낳고, 관리하고, 기르고, 소멸시키고 어떤 종은 멸종되고, 어떤 종은 또 태어납니다. 이 관리를 누가해요? 성령이요. 이렇게 접근해야지 기독교도 답이 나오죠, 아직도 창조 거기 매달려 계시면 성령을 이해 못하셨다는 증거예요. 창조에만 매달린다? '보지도 않은 창조에는 매달리되, 지금 우리 안에서 느껴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른다' 좀 심각한 겁니다. 성령에 대해서 알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다 보여요. '이렇게 쓸 수 밖에 없었겠구나' 사정까지 다 이해가 됩니다. 성령에 대해 모르니까 문자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상이 못되고, 유상이 되는 거죠. 문자에 집착하고, 말 한마디에 집착하고, 글자 하나에 집착하고, 그런데 성령하고 통해버리면 그런게 중요한게 아닌데, 글을 넘어서 쭉 통해있는 우주의 결이 보이는데, 이거 재미있죠? 창조와 진화가 다 성령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창조론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창조와 진화가 그대로, 진화도 창조다, 매순간 매순간 창조되고 있는 거잖아요.

예전에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의 조상이었다, 그런데 갈려져 나왔다. 화석이 그렇게 증거한다. 그걸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서 성령의 역사로 한 그룹은 이렇게 인간으로 진화해 왔고, 한 그룹은 유인원으로, 한 그룹은 여전히 원숭이로, 유인원과 원숭이는 다릅니다. 유인원은 침팬지, 보노보,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이런, 꼬리 없고 인간하고 더 가까운 친척이예요. 꼬리 달리고 이런 애들은 그냥 원숭이라고 하구요. DNA가 더 비슷해요, 침팬지 제일 비슷해요. 94.몇 프로인가 인간하고 DNA 거의, 바나나랑도 DNA가 50% 유사하데요,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 뭘 따질수는 없지만 인간하고 제일 가깝다. 그게 중요한 거잖아요. 제일 가깝다. 그런 침팬지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드러내게 하신, 동물이 먼저 창조되잖아요. 그 다음 인간 창조될때 기존의 동물을 이용했는지 어떻게 아세요? 가능하다니까요, 그게 진화라니까요, 하나님이 진화시키시면서 우주에 놀라운 걸 계속 드러내요. 그러니까 끝없는 창조예요, 우리 마음에도 창조예요, 하나님 형상이 우리에게서 드러나면 창조예요. 지금 인간이 고등침팬지 노릇밖에 못해요. 혈육의 자녀는 고등침팬지 종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열매를 들어내면 어떻게 돼요? 성령의 열매를 우리가 수확해서 우리 혼에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면? 하나님 형상대로 사는 하나님 자녀라는 새로운 종이 등장합니다. 창조예요. 영혼의 승격으로 인한, 새로운 창조가 있어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데 '창조는 과거에 한번 있었을거야' 이런 고정관념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재미없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진리도 아니고, 이런거 생각해 보시고

그래서 자, 고기 먹네, 마네 보다 예수님 말씀은 뭐였다구요? 동물 키우고 이런게 비양심적으로 키운다, 이런건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죠. 개선해야 되죠. 육식자체를 거부하고 하시기에는 우리는 고등침팬지라는 인간의 종의 한계도 생각해 보셔야 돼요. 실존을 무시하고 얘기하는 건 공허한 이야기죠. 우리끼리 모여서 합의하면 되나요? '우리 서로 황금률을 실천합시다. 우리도 사람인데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결의하면 이루어 지나요? 안되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본능과 본성대로 살아가죠. 인간의 본능, 본성을 고찰하는게 먼저 입니다. 하자, 말자 주장하는 것보다, 우리끼리 하지 맙시다. '남의 것 욕심내지 맙시다, 그거 폭력 아닙니까?' 다 맞죠, 그런데 그럴수 있을까요? 이런게 있어요. 우리의 한계도 말을 해야되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말씀에서 그걸 인정하신 거라는 거죠. 그런거 따지지말고 먹어, 그게 영적으로, '그래도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면 더 찜찜한데요,' 당연히 찜찜하죠. '그러면 마이너스가 확실히 있겠는데요' 있을 수 있죠. 있겠죠. 찜찜하신 만큼 마이너스는 있겠죠. 그게 여러분이 구원받고 못받고랑은 상관없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종특으로 가지고 있는 찜찜함 이예요. 이해되세요? 그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설정해 놓은 거니까 우리 탓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그걸 드신다고해서 하나님이 탓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요, '고기맛을 알게해준 당신 탓이지, 고기 맛 알게 프로그램 해놓고 고기 먹지마라고 하는 것은 무슨 심보냐?' 말이 안되는 소리니까, 예수님은 '먹어라' 이겁니다. '먹어라,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영적으로 분명히 뭐가 있는데요' 있어도 '신경쓰지 마라' 는 거예요. 그 정도 변수는 신경쓰지마라, 그게 너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게, 이런 얘기는 지금 불교가 조금 들어야돼요. 벌레 밟을까봐 걸어다니지도 못합니다. 그럴바에 왜 사세요? 인간이라는 종특을 이해 못하면서, 인간의 속성을 이해 못하면서 구원을 논한다는게 얼마나 허상인지 아셔야 돼요. 인간이 뭔지도 모른다니까요, 인간이 어디까지 탐진치를 부리는 존재인지 모르면서 구원을 논해요, 해탈을 논해요, 다 그거 허황된 얘기 입니다. 기독교 얘기하는 김에, 기독교에서 불교도 한번 까보고 재미있잖아요?

불교 강의할때는 불교에서 기독교 또 까겠습니다. 저는 누구 편드는게 아니라 그런 발상 '지나다니면 벌레 밟을까' 그러면 입 열면 세균 잡아먹겠죠, 코로도 숨쉬면 안되겠죠. 그대로 죽어야죠. 뭘 먹어도 그거 다 남의 생명 뺏는거고, 식물도 생명인데, 식물도 죽잖아요. 여러분 식물 죽는거 보이시죠? '죽었네,' 생명 있어요. 더 놀라운 것은 돼지의 아이큐가 개보다 좋습니다. 돼지 먹을 때는 아무도 얘기 안해요. 맛있거든요. 맛있어서 얘기를 안해요. 이 맛을 알거든요, 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안해요, 개에 대해서는? 얘기 합니다. 그런데 개보다, 고양이 보다, 돼지가 아이큐가 더 좋아요. 아이큐 따져서는 왜 먹는지, 안먹는지 답이 안나와요. 그냥 개는 먹기 좀 그렇고, 돼지는 먹을만 해요, 이 본능이, 이 기준이 우리에게 있어요. 하늘이 먹으라고 설정해 놓은거예요. '이건 먹어' 보편적으로 먹을때 심리적으로 거부감 덜 느끼게 해놨다구요. 먹어야 사니까, 사자가 먹을때마다 번뇌 느끼고 그러면 아무것도 못먹죠. 죽어야죠.

이 자연계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하게 만들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혈육의 자녀인 속성, 세속의 영의 지배를 완전히 받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때 조심할게, 자 보세요, 금식도 그거예요 음식 가리는거 얘기하는 거예요. 음식 가릴까요? 아니, 남들 보기에 기도 잘해야 될까요? 아니, 남들 보기에 자선 많이 해야 될까요? 아니,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야, 성령과 하나되서 하는게, 성령이 시키면 하고, 안시키면 하지마, 이거예요. 기준이 뭐예요? 성령이요. 니 뜻이 아니구 성령이라구, 그런데 '지금 밖에 다니면서도 금식하고, 뭐 따지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네 뜻이야' 이거예요. '건강때문에 하는 것은 모르겠는데 영적인 타락을 가지고 거기다 가져다 붙이지마' 이겁니다. '그거랑 상관 없으니까, 니 심보가 너를 타락시키지 네가 먹는게 너를 타락시키지 않아' 이겁니다. 그런데 음식 강조하는 분들은 '먹는게 당신입니다.' 아니예요, 그거 아니예요, 그거 개구라 입니다. '먹는게 나라니요?' 내 몸을 구성하는게 내 영혼하고 어떻게 관련이 있어요? 내 영혼은 거기에 매이는게 아니예요, 영향은 받을 수 있지만 매이는게 아니예요. 그렇게 1차원적으로 얘기하시면 안돼요. 먹는거 팔려니까 그렇게 얘기하실 수 있지만, 마케팅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진리를 오묘하게 속입니다. 진리는 거기랑 상관 없습니다. '저거 막 얘기하는 구나' 하시겠죠. 그런데 설명 보실래요?

마태복음 15장 11~20절 입니다. 그 위에 풀어볼게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속으로 품는 ‘생각, 감정’과, 그것이 밖으로 나온 ‘언행’이 우리를 더럽힌다.' 예수님 말씀 들어볼게요.

[“입에 들어가는 것(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 그대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는가?]

여러분 입과 항문이 하나의 호스입니다. 들어가서 그대로 항문으로 나갑니다. 예수님은 이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들어가면 네 똥으로 다 싸잖아, 그거가지고 시비걸지마' 이게 아주 정확한 얘기는 아니시죠. 그냥 '이것만으로 우리가 안더럽혀진다는 것이 입증이 되나요?'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음식이라는 건 그런거야, 먹고 싸는거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음식이 마음과 관련된 것은 아니야' 이거예요. '니 몸하고 관련됐을 뿐이고 그나마도 먹고 싸는거야'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게 네 마음 더럽혀졌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거야. 원래 근본적으로 마음에서 나온 거니까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마태복음 15:11~20)]

더러운 음식 먹었다고 바리새파들이 바르르떨고 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금식하고 이러는거, 자! '예수님은 좀 쿨하셨네,' 우리 부처님은 안그러셨지, 보세요, 수따니빠따 입니다.

[“분노, 교만, 완고, 적대, 사기, 질투, 거짓말, 자만, 저열한 이와의 교제,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 (숫따니빠따)]

어떠세요? 이 수따니빠따가 부처님 제일 초기 육성 입니다. 현존하는 경전중에 제일 원형이 담긴 경전으로 평가받는게 수따니빠따 입니다. 법구경이랑 수따니빠따가 제일 오래된, 처음 부처님 육성이 정리된 것들로 평가 받는게 수따니빠따나 법구경 이예요. 거기에 나온 말씀이예요,

이런게 더러운게 아니다. 육식 먹었다고 견성 못하고 그런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거예요. '내 양심에 벌레나 생명체 죽이기 싫어서 피합니다.' 양심이 시켜서 하는 것은 따르세요, 다만 '그래야만 성불합니다.' 그러지는 마세요. 내 양심이 찜찜하냐, 아니 집에 있는 파리도 어느때는 과감히 죽이다가도 어떤때는 눈 마주치면 약간 애매할 때 있어요. '아, 이거 애매한데,' 지금 집에 있는 거 뭐 하나 챙겨가지고 신나 있는데 지금 죽이자니, 그런거 있죠? 개미도 막 이만한거 들고가는데 밟자니 더 죄책감, 이게 우리 양심에 찜찜하면 그때는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거예요. 양심에 찜찜하면 그때그때 양심에, 성령에 최선을 그냥 다하세요. 그런데 오바하지는 마시라는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개미 밟는 사람은 천국 못가' 이런 소리는 하지 마시라는, 갑자기 여러분이 왜 심판자가 되세요, 성령의 울림, 양심의 울림대로 사시는 거랑, 이걸 가지고 쉽게 일반화 시켜서 여러분이 구원을 재단하고 남을 심판하고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맹자에도 이런게 나와요. 맹자에 임금이 소를 제사 지내려고 소를 끌고 가는데 소가 아니까 울면서 가잖아요, 임금이 그 소리를 들은 거예요. 들으니까 못 죽이겠는 거예요, 그걸 죽이지 말라고 하고 양으로 바꾸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떤 루머가 퍼졌냐? '저 임금이 소를 아까워하고 양을 썼다.' 막 이래서, 비싼거 안쓰고 싼거 썻다.

맹자가 왕을 만나러 갔어요. 왕이 그런걸로 속상해 있는데, 속도 풀어주면서 양심으로 인도하는 맹자의 화술입니다. 이 화술이 그냥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에 입각한 설득이예요. '왕께서 최근에 이런일이 있으셨죠?' '아, 내가 그것 때문에 속상해요' 그러니까 '그거 왜 그러셨어요? 소가 아까우셨나요?' '그건 아니다, 나도 모르겠다' 맹자가 그 왕의 마음을 설명해 줘요, 소는 직접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양심에 찜찜했다는 거예요. 양은 내가 안봤으니까 양은 쓰라고 한거라는 거예요. '당신 마음 그러지 않았냐?' '맞다. 내가 그랬다' '거보세요, 당신도 왕도정치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네요' 왕도정치하자고 왕을 물고 늘어져요. 꼬실때 이렇게 얘기 합니다.

이게 놀라운 얘기예요. 여러분도 양심때문에 그렇게 사신 거예요. 직접 마주친 것은, 부처님이 이런 고기는 못먹게하죠? 죽을때 눈 마주친 고기, 나 때문에 죽인 고기, 이런거 못먹게 하는 고기가 있어요, 그거 들어가보면 그 고기는 양심에 더 찔리는 고기일뿐이예요. 부처님이 다른 고기는 먹어도 된데요. 주면 먹으래요, 고기 비린거 아니라고 먹으래요, 그런데 이런 고기는 먹지 말래요, 그런데 들어보면,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심에 되게 찔리는 거예요. 그렇죠? 나 때문에 잡았데요, 좀전에 아빠랑 뛰놀던 그 닭이 지금 나에게 와있어요. 오늘 내가 왔다고 잡은게 확실해요. 찜찜하잖아요. 그냥 '양심에 찜찜하지' 이거지 이걸 또 율법으로 정해 놓으면 또 이것 빼고 다 먹어도 된다. 이상한 논리가 나와요. 이게 율법화 되면 이상합니다. 왜? 거기에 또 탐진치가 붙어버려요. '그래 그럼 내가 직접 안죽이고 나 때문에 죽인게 아닌' 모호하게 하는거죠, '나 때문에 죽인게 아닌거죠?' 이러면서, '저 모르게 어떻게 해주세요' 결국 누가 고기 잡아주는 사람이 불특정 다수를 위해서 고기를 잡아 놓으면, 내가 가서 사먹으면 나 때문에 잡은 고기는 아니잖아요, 죽을때 눈도 안마주쳤잖아요. 이런식으로 또 피해가요. 그런데 본질은 그게 아니예요. 본질은 '양심에 찜찜 하셨나요?' 이거예요. 그러면 양심에 못먹는 거죠. 예전에 개도 잡아먹고 할때,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동네에서 개잡고 하는 걸 저도 봤습니다. 불로 태우고 장난 아니죠? 보면 못먹을 것 같은데 잡고 잘 드시는 분 보면 비위가 참 좋으세요. 그런데 자기집 개 먹겠어요? 더 찔리 잖아요. 이게 다른게 아니예요.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보시면 '이게 더 찔리는 짓이구나, 이게 덜 찔리는' 동물 먹는거 찔린다, 당연히 찔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쉽게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본인도 사실은 알 수 없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자기 양심에, 각자 양심에 충실하시면 돼요.

☆ 인간은 완벽한 성자가 아닙니다. 자기 양심에 더 급한 것부터 하나씩 치유해가는게 먼저 입니다.

그런데 부분적 자명에 빠지면 '어 이건 나쁜일이야 이거 한 놈들은 싹 천국 못가' 안그래요, 천국 다 가요, 그런 말한 자기만 못가요. '육식은 폭력이다' 그러면서 고기집 가서 난동을 부려요. 누가 더 폭력적이죠? 실제로 그러잖아요. 오죽하면 거기 댓글에 채식해서 성질이 날카로워지신거 같다고, 제가 채식을 비판하는게 아닙니다. 존중합니다. 나는 차마 내 양심에 동물을 못먹겠다. 풀을 드시겠다. 위대한 선택입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확장하시면 안돼요. 내 양심에, 각자 양심에 충실하시면 돼요. 찜찜하다, 찜찜한걸 아시고, 그래도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도 아시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중요하다. 서로 우리는 응원을 해줘야 되는 사람들이지, 뭐 하나, 한건을 잡아서 남을 제단하고 하는게 예수님 말씀에 반대되는 거다. '남 심판하지 마라, 눈에 들보가 들린 애들이 남의 눈에 티 가지고 시비건다' 이것도 다 통하는 말이예요. 부처님 마저도 '먹어라' 하는 거예요. '그런거 먹어라' 다만, 양심에 찔리면 먹지마라 이소리인데, 부처님이 가르친 소승불교는 열반에 들어야 되니까 이 지상에 업을 안지으려고 하는게 있어요. 그래서 주지도 받지도 말려는 사상이 있어요. 그래서 선행도 과하게 안하고, 악행도 어떤 악행을 안하냐면 '해탈에 방해되는 짓은 절대 하지마라' 그걸 다 악행으로 봐요. 그러다 보니까 고기를 안먹으려는 마음이 들어요. 이걸 먹으면 인연이 되서 또 태어날까봐, 대승은 그게 없죠? 대승은 온 우주 중생과 인연을 맺으면서 다 구해주겠다는 발상이예요. 온 우주 중생의 가족과 친구가 되서 내가 다 구해주겠다는 발상이니까 발상이 아예 달라요. 이런 대승의 발상이 예수님하고 통한다는 겁니다. 불교랑 연결지어 보시더라도 이런 점 감안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다되서, 이것은 마지막, 이 15절이요 15절까지 해버릴까요? 시간 약간만 오버하겠습니다. 너무 재미있잖아요, 이거 듣고 그냥 가시기에는

《15절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그대들의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하라. 바로 그 사람이 그대들의 ‘아버지’ 이시다.”라고 하셨다.》

이건 최고의 선문답 입니다. '여자에게 태어나지 않은 자를 보면 경배하라' 자! 해설 보시죠.

[여자가 낳지 않은 자는 바로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위' 현상계에 자리가 없어요. 아까 불교에서 현상계를 뭐로 규정했죠? 몸과 마음의 세계 밖에 아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으로 영혼육 하면, 지금 불교적으로 말하면 혼이 오온중에 수상행식이고 육이 색이죠. 색수상행식, 오온이 우주의 전부 입니다. 영은 오온 밖의 세계예요. 시공에 안잡혀요. 여기는 시공이 없어요. 영원한 현존 입니다. 영원한 현존, 색수상행식의 불교적 오온은 시공이 있어요. 생멸이 있어요. 일어났다 사라져요. 일어났다 사라지는게 없는 영원한 현존이예요. 그래서 불교적으로 보면 상, 여기는 어떤 근심, 걱정도 없으니까 락, I AM 상태니까 아, 거기에는 어떤 오염, 더러운게 안붙으니까 정, 상락아정 이라고 하는게 하나님 이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상락아정, 니르바라고 하는 열반 4덕이 상락아정인데 저게 하나님 이름이예요. 그냥 기독교의 하나님이예요. 영원한 I AM의 현존, 영원한 지복인 I AM의 현존, 순수한 나의 현존, 그렇죠? 여기는 시공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낳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생멸이 없는 존재예요. 현상계에서 태어난 적이 없는 존재가 있다.

이게 불교 화두로 뭐예요? 부모가 너를 낳기 전에 뭐였냐? 이겁니다. 시공안에 혼과 육의 세계를, 부모가 너를 낳고 전에 너는 뭐였냐? 그러면 영자리를 바로 찾아내야 돼요. 그럼 I AM 하면 끝입니다. I AM을 말로하면 또 상이 생기니까 선문답으로 박수도 치고 뭐라도 하는 거예요. '나 지금 현존 상태야' 라는 걸 그냥 드러내보일 뿐 입니다. 논리로 설명하려면 또 말에 집착하려는 상이 있으니까 논리적일 필요없이 그냥 직접적으로 내가, 나는 현존하는 상태야 라는 걸 드러내는 문답을 하는 걸 선문답을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바로, 이건 뭐야? 네 마음과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자리는 뭐야? 이게 '이 뭐꼬' 입니다. '이게 뭐야?' 이 뭐꼬 하다가 I AM 순수한 현존이 등장하면 이거구나 하는 겁니다. 똑같아요. 무위진인은

[즉 시공간 안에 자리가 없는 존재이다. 곧장 시공안의 모든 생각ㆍ감정ㆍ오감에]

뿌리가 뭘까요? 자 보세요, 제가 이걸 자꾸 I AM 이라고 하는 이유가 구약에서부터 나오는 얘기고 '하나님은 I AM 이다' 스스로 현존하는, 영원한 현존하는 자다. 그런데 I AM 뒤에 뭐가 붙어요? 알파가 붙는데 여기에 수생행식색이 붙습니다. 나는 어떤 몸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몸의 어떤 행위를 하고 있다. 자 어떠세요? 혼과 육은 다 어디서 나왔죠? 그 뿌리, 모체가? 다 I AM에서 나온 거예요. 현존이 있으니까 거기서 시공간 안에서 작용이 일어난거예요. 시공간 안에 있는 이 작용이 우리가 현상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거고, 그 자녀의 뿌리가 어디예요? '아버지' 여자에게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우리 아버지 자리다' 이겁니다. 시공을 초월한 생각, 감정, 오감의 뿌리자리, 현상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자리이다. 현상계 안에서 낳고 죽고 하는게 아니라, 그 자체, 생멸하는 현상계 자체의 뿌리가 되는 자리다. 그걸 알려면

[대해 “몰라!” 하고 선언하고,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나의 현존’(I Am)에 안주하라!]

그러면 답을 알겠죠. 이러면 불교에서 견성하고 기독교에서 성령체험 하는 겁니다. 이게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같죠, 지금 도마복음까지 가버리면 불교, 기독교가 하나로 회통합니다. 거기에 에너지체 얘기 나오면 도교랑 회통이 일어납니다. 모든 중요한 덕목들은 유교랑 통해요, 이미 살펴봤죠, 감춰진 것이 제일 잘 드러난다. 이게 중용의 핵심사상 이었는데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다 설파되고 계십니다. 그리고 유교의 최고의 가치, 인이 예수님의 황금률이죠. 네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해줘라, 공자님의 인, 네가 받기 싫은 건 하지마라, 네가 받고 싶은대로 해줘라, 같은 말이죠.

자, 서산대사 휴정스님, 서산대사 유명하죠, 임진왜란때 대승보살도를 하신 서산대산의 선가귀감에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한 물건’(一物, I Am)이 있다.]

한 물건이 I AM 이예요, 나라는 존재감, 나의 영원한 현존, 생각, 감정, 오감, 오온이 아니구요, 참나의 현존 입니다. 참나의 영원한 현존을 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밝고 신령스러운 것이기에 생겨난 적도 없으며 죽을 수도 없다.]

생멸이 없는 한 물건이 있다.

[뭐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며, 그 생김새를 파악할 수도 없다.”]

    •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서산대사 휴정, 선가귀감禪家龜鑑)

어떠세요? 지금 언어화 안된다 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가 있다고 하잖아요. 현존의 자리가, 여기가 그러면 서산대사는 성령 체험 하신거 아닙니까? 충격적인 진실에 접하게 됩니다. 그럼 이게 성령귀감 아닙니까? 단순한 선가귀감이 아니라,

백운화상, 고려말 백운화상의 어록에 이런 말이 있어요.

[“'지극한 도’(至道)란 무엇인가?]

우주 최고의 진리는 뭐냐? 이 소리 입니다. 지극한 도란? 우주 최고의 진리는 뭐냐?

[그것은 깊고 밝으며 텅 빈 것으로, 미묘하고 순수하되 빛나고 신령스럽게 밝도다.]

좋은 말 다섰습니다. 영명하다,

[말과 그림으로 설명할 수 없고, 알음알이와]

우리의 식별 작용과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로 미칠 바가 아니다.]

생각할 수도 떠올릴 수도 없다, 이 소리입니다. 따져볼 수도 없다.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며,]

공간을 초월해 있다. 그러면서

[10방 세계에 투철히 사무치고,]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모든 공간에 무소부재 하다. '모든 공간을 감싸고 있다' 이 말 입니다. '모든 공간이 시방세계가 다 참나의 작용이다' 이거예요. 공간을 초월해있돼, 이거는 고차원이라는 얘기 입니다. 우리가

아는 3차원 세계보다 더 고차원 세계이기 때문에 모든 3차원계의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모든 3차원 공간을 아우르고 있다는, 차원이 달라서 그래요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서,]

이원성이 없는 세계니까 가고 올 수가 없죠.

[그윽이 과거, 현재, 미래에 통한다.”]

    • (何謂至道 淵曠冲虛 妙粹炳煥靈明 非言象之所詮 非知智之所及 非中非外 洞澈十方 無去無來 冥通三際,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포월) 시간 속에서도 과거, 현재, 미르를 하나로 꿰뚫는다. 참나 자리에서는 시간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계에 있는 시공간도 한눈으로 꿰뚫고 있다. 이건 아인슈타인이 말한 4차원 시공간 입니다. 3차원 공간과 한 차원 시간을 더 보태서 4차원 시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꿰뚫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이걸 포월이라고 그러죠. 포함하고 있으면서 초월한, 포월, 그때도 한번 썻었죠. 초월이라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인데 포월이라는 것은 초월하면서도 포함한다는, 시공간을 다 포함하면서도 초월해 있어요. 다른 차원이라는 거예요. 자, 보세요, 이게 간단한게, 이차원은 면이잖아요. 3차원은 2차원을 포함한고 있죠? 그런데 지금 2차원을 초월해 있단 말이예요. 다른 차원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2차원도 포함해요. 2차원에서는 3차원이 안잡힙니다. 알 수가 없어요. 면만 있는 세계에서 공간의 세계를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우리가 마찬가지로 지금 4차원 세계에서 이 영의 차원은 모르겠어요. 안잡혀요, 그런데 이 영의 차원은 4차원 시공간을 포함할까요? 안할까요? 포함하죠. 그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하나님은 모든 곳에 없는 곳이 없으시다' 는 거예요. 다, 계신데 동시에 초월해 계세요. 재미있죠? 이런분이 하나님 이시다. 고차원이라서 그래요, 우리 차원보다 고차원이라서, 그래서 그 차원에서 보면 시공간이 한덩어리 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덩어리고 시방, 사방팔방이 한덩어리고 그런데 초월하면서도 우주를 꿰뚫고 감싸고 있는 그 하나님 자리, 그 자리는 태어난 적이 없다. 생멸이 없다. 이게 불교 고승들의 결론이고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낳지 않은 자에게 경배하라, 그 자가 하나님이다' 이런 표현도 비슷해요, 의인화 했잖아요.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 불교에서도 무위진인, 자리가 없는 진인이 있다, 이런 말을 써요. 무위, 자리가 없는 진인이 계시다, 의인화 했죠. 이거 참나예요, 사람 아니예요, 영이예요, 영을 의인화 한겁니다. 불교에서도 영을 의인화 해요, 자리가 없는 참된 사람이 계셔, 아니면 이렇게 의인화 합니다. 전신복요에서는 무심도인이 계시다. 도인이 있는 것 같죠? 아니예요, 무심한, 일체의 분별을 초월한 참나의 자리를 무심도인이라고도 합니다. 그걸 사람으로 풀면 안돼요, 전심복요에 뭐라고 나왔냐면요? 우주에 있는 모든 부처님, 성자에게 잘하는 것보다 무심도인에게 잘하는 것이 최고다. 성자에게 잘하는 것보다 성령에게 다이렉트로 경배하는게 짱이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성자들은 벌써 나랑 다른 인격체이지만 성령은 나의 뿌리니까 무심도인에게 경배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러면 사람들이 잘못읽으면 '여러 부처님보다 이 무심도인이 짱인가 본데, 무슨 도인일까?' 무심도인이라는 것은, 무심을 말해요, 우리 참나자리, 예수님이 불교랑 너무 유사한게 '여자에게 태어나지 않은 사람' 이러면서 성령자리를 되게 의인화해서 표현합니다. 이런 것도 묘하게 통한다는, 너무 신기해요.

이게 도마복음이 연대가 더 빠릅니다. 달마보다도 훨씬 빨라요 도마복음 연대가, 달마가 다녀간 뒤로 만들어진 것이 선문화인데, 선불교 문화인데 너무 통해 있어요. 이건 '진리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방식이라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문답 문화가 중국와서 특수화된 것도 있겠지만 진리를 안 사람들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보편적인 베이스에서 좀더 중국화된 모습을 보인게, 시문화랑 연결된게 선문답 문화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문답적인 이런 발언들은 보편적인 거예요. 좀더 중국화된 방식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좀 중국적인 겁니다. '답을 내봐라' 이런거, 이런 발언을 딱 때리고 '야 너 답해봐' 이게 시짓기 대회하는 버릇에서 나온 거예요. 운을 던지면 뱉어야 되거든요, 너도 뱉어봐, 나도 뱉고, 서로 배틀 붙는거, 요즘 쇼미더머니 이런거, 랩 배틀 하듯이, 배틀 붙는거 이거 중국문화 입니다. 시문화에서 온거예요, 시문화와 이런 선문답이 만나서, 배틀 붙어서 말 못하면 지는거죠. 이런게 선문답의 못된 문화도 이런 비슷한게 있어요, '말싸움해서 네가 한마디라도 밀리면 너보다 도가 높은 거다' 이거 웃기는 짓이죠. 참나 얼마나 잘 아느냐가 중요한 거지 배틀이 중요한게 아닌데,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이런 선문답도, 이게 진리를 알라고 하는거지 배틀 붙자고 하는게 아닙니다. 괜히 여기에 '내가 답하겠노라' 이런식으로 나가지 마시고, 아 무슨 말씀이구나, 하고 잘 음미해서 자기것으로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