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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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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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영원불변한 그분의 보물을 찾아라
강의일자 2020. 10. 10. 土.
게시일자 2021. 04. 06.
동영상 길이 27:59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agRMmnGOidI


자, 오늘은 또 도마복음 먼저 하겠습니다. 72절부터 하겠습니다.

《72절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다》

도마복음에서는 아주 강조되는 거에요. '하나가 되라' 자, 이런식으로, 저희 항상 이런 얘기하죠. 에고의 세계, 참나의 세계, 이런 말할 때 에고의 세계의 특징이 뭐죠? 이원성, 그러면 참나의 세계는요? 이원성 그러면 전일성이럴 수 있지만, 하나라고 할게요. '하나가 되라' 하나인 자리는 무조건 하느님 자리입니다. 여기는 시공도 초월해요. 이원성의 세계는 시공부터 찢어져있죠. 또 시간은요? 과거, 현재, 미래가 찢어져 있고, 공간은요? 동서남북이 찢어져 있고, 이원성의 세계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나와 남이 찢어집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찢어지는 세계에요. 자, 이원성의 세계를 초월하면 어떻게 돼요? 분별이 없는 세계, 하나인 세계, 자, 그러니까 도마복음에선 '하나가 되라' 하나를 계속 강조합니다. '하나가 되야 된다' 특히 오늘 72절부터 오늘 할 내용에 하나가 되라는 말이 이제 또 나옵니다. 그래서 일단 72절 내용도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다' 이게 이원성의 세계를 초월하라는 얘기를 하는 거죠.

《한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나의 형제들에게 말씀 하시어 나의 아버지의 재산을 나와 나누도록 해주십시오》

이 질문 자체는 타당한 얘기에요. 욕먹을 얘기 아니에요. 형제들 때문에 지금 재산분쟁이 낫고 형제가 재산을 독식하려고 하니 이웃사랑하는 차원에서, 형제사랑은 이웃사랑보다 더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재산을 좀 공정하게 나눠어 달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 하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이렇게 공정하게 나눠주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겠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이 메세지를 주고 싶은 거에요. 그런 것들로부터 한번 초월해봐라. 이거죠, 저희 학당식으로 뭐죠? 가족간에 재산 분쟁이 붙였어요. 저희 형제들에게 재산 좀 독식하지 말고 저한테도 좀 나눠주라고 얘기 좀 해주세요. 라고 했을 때, 제가 만약에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아 그거 중요한데요, 일단 몰라 한번 해보시죠' 그 몰라가 뭐에요? 이거 하나로 그냥 들어가는 비법이 몰라예요, 모른다. 이원성의 세계를 모른다 해버리면 그냥 하나죠. 몰라 해버리면 바로 하나죠. 그래서 '몰라해라' 이 소리에요. 재산 나누는 것을 떠나서 일단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라.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야지, 하나님 사랑해서 나오는 마음이 이웃사랑 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야 형제간에 문제도 풀어갈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남자여 누가 나를 나누는 자로 만드는 것이냐》

나더러 나눠 달라고? 쪼개 달라고?

《그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몸을 확 돌리시면서 제자 전체한테 얘기합니다.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나누지 마라. 이 소리입니다. 나누지 마라, 일단 하나가 되라, 이 메세지를 잘 읽어내야 여기서 뭔가 우리가 영감으로 얻습니다. '아이 좀 공정하게 얘기 좀 해주시지 갑자기 나누지 않는 자라고 이렇게 해버리시면 뭐 해결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이게 해결책이예요. 일단 '나누지 말라' '몰라해라' 이거에요. '몰라해라'

각주 1번 보실래요.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아서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니]

이 얘기를 제가 삼조 승찬 대사의 글인데, 신심명에 있는 글인데 왜 말씀드렸냐?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지극한 도가 여기 참나 자리죠? 기독교에서는 성령자리, 불교에서는 참나자리, 불성자리인데 이 자리에 들어가는 법은 안어려워요. 이원성을 몰라해버리면 바로 들어가요. 나누려는 그 마음을 몰라하고 내려놔 버리면 곧장 하나가 되버려요. 같은 얘기입니다. 지극한 도 들어가는 법은 너무 쉬워요. 간택은요? 선택이죠. 분별, 선택만 안하면 된다.

[단지 싫어하거나 아끼지만 않는다면]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간에 몰라 해버리면 바로 지극한 도에 들어가 버린다. 지금 지극한 도, 지도라고 얘기한 게 성령자리죠. 같은 얘기죠.

노자 보실래요. 노자 글에도 이런 글이 있어요.

[만물이 변화하되 욕심이 일어날 때]

지금이 가족 간에도 재산 때문에 욕심이 일어났죠? 일어났을 때

[나는 이름없는 통나무로 그걸 눌러버릴 것이다.]

이름없는 통나무가 또 하나인 자리를 말합니다. 자, 노자가 말하는 통나무는, 통나무 박, 제 호가 대학때 '박산' 이렇게 정한적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박은 통나무고, 통나무 박, 흩어질 산, 통나무를 쪼개서 다양한 그릇을 만든거, 동그란 그릇, 네모난 그릇, 이렇게 용도에 따라 다양한 것을 만들어버린 건 후천이고 선천세계는요? 뭐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는 쪼개지지 않아 있어요. 그게 하나님 자리죠, 성령자리죠. 산이 에고자리죠. 다양한 에고로 쪼개져 있죠. 그릇들이죠. 다양한 그릇들, 그릇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우리의 에고의 세계가 그래요. 이원성의 세계가 그래요. 그걸 넘어선 일원성의 세계는 뭐예요? 텅빈 하나자리,

[욕심이 일어난다면 나는 이름도 없는]

이름도 없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 있다는 거예요. 이름의 생기면 이원성이 생기니까, 시공을 초월한

[그 통나무로 눌러 버릴 거다. 그래서 장차 욕심이 없어야만 할 것이니 욕심이 없어지며, 고요해질 것이며, 천하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지금 이걸 예수님이 구현하고 있는 거에요. 형제간에 재산분쟁 난 가정에 이름없는 통나무로 눌러버린 거예요. '난 나누는 자가 아니다. 하나가 되라.' 그럼 그 제자가 몰라해야 되잖아요. 자기 욕심 지금 형제 욕심쟁이가 아니라 자기도 지금 욕심 부리고 있으니까, '나는 그래도 정당하지 않나요?' 할 수 있지만 일단 욕심쟁이인건 맞으니까, 이원성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맞으니까, 길고 짧은 걸 대보면서 싸우는거 맞으니까, '몰라해라' 이거에요. '하나가 되라.' 그 자리에서 이웃사랑이 나오고, 형제사랑이 나와서 문제를 풀어갈 거다. 천하가 절로 안정될 거다. 노자, 성인들 해법이 같다는 거 아시겠어요? 72절 여기까지 해드릴께요. 지금 하나가 되라는건 앞으로도 계속 나와요.

73절 볼게요.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

이건 뭐 추수꾼,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추수꾼 이야기입니다.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게 뭘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칭의, 성화, 영화를 얻어서 하느님 자녀가 될 사람, 천국 갈 사람, 하나님 자녀가 될 사람이 많았단 얘기에요. 알곡들이 지금 자라고 있는데, 그럼 누가 배양했냐? 예수님 당시에 그 추수할 알곡들은 누가 배양했을까요? 예수님만 배양한 게 아니에요. 그전에 예언자들이 뿌려놓은 씨로 인해서 추수할 알곡들이 지금 자라고 있단 말이예요. 양심 있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건들기만 하면, 성령 받아라 하면 바로 터질 사람들이 천국 갈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추수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는건 하나님 자녀가 적다는 거예요. 하나님 자녀라야 다른 사람을 하나님 자녀로 인도해 줄 수 있잖아요.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남 한테도 줄 수 있죠. 하나님 자녀가 될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데, 자기도 천국가고 남도 천국으로 인도할 추수꾼은 적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저 하나님한테 밭으로 일꾼 좀 보내달라고 간청 하라. 이 얘긴 하나님 자녀 많이 배출되게, 우리식으로 말하면 군자, 보살들 많이 나오라고 하나님한테 기도하라. 이겁니다. 일단 너부터 빨리 하나님 자녀되라. 이 소리죠.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 빨리 되라.

각주 3번 보실래요. 각주 2번부터 볼게요. 이 관련 구절이 각주 2번에 보면, 누가복음 10장 1절, 2절 말씀에 이런게 있어요.

[이후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70인 혹은 이제 문헌에 따라 72인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제자들을 따로 선발해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시면서]

장차 이제 본인이 가려고 했던덴데 거기 미리 보내면서 뭐라구 해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 하나님 자녀 좀 보내달라고 하여라]

너희로는 부족하다. 더 보내야 된다. 더 필요하다. 이 소리입니다. 너희부터 추수꾼이 되고, 올바른 추수꾼이 되려고 노력하고, 더 많은 추수꾼이 나오도록 너희도 힘쓰고, 하나님한테도 기도하라. 이거죠. 너희도 빨리 성령 안에서 안주하고, 그럼 칭의, 성령의 뜻대로 선과 악을 판단하면서 살아가고, 성화, 영화, 부활체까지 얻어라. 이 소리죠. 남들도 그렇게 도와라.

각주 3번이요.

[추수란 혈육의 자녀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니 추수를 통해 인류를 구제할 더 많은 추수꾼, 즉 하나님 자녀들이 지상에 나타나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밝은 성령을 다시 밝히고 남들의 성령까지도 밝혀 주는 사람입니다. 우선 자신부터, 우리 자신부터 자신을 밝히고 남을 밝혀야 합니다. 나와 남은 모두 하나님, 즉 하나인 성령 자리, I AM 영원한 나의 현존,]

여기서 나라는 것은 나와 남이 없는 나예요. 우주적인 나예요. 하나님과 우리가 둘이 아닌 그 자리에요.

[그래서 하나인 성령 자리에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그러니 나와 남은 모두 하나이니까, 본래 뿌리가 하나니까 남을 나처럼 사랑하고 아끼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죠. '서로 사랑하라'는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게 이제 포인트입니다.

74절 가볼게요. 오늘은 이야기가 짧네요. 짧아서 5구절을 뽑아 왔는데, 그래도 짧을 수도 있겠네요. 이야기들이 짧고 간명하면서, 이야기가 짧다고 메세지가 약한 게 아니에요. 짧고 간명한 이 메세지를 통해 여러분 깨어나시고 성령과 하나 되시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이

《우물로 곧장 뛰어들어라》

예요. 궁금하시죠? 뭔소린지?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주님, 우물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물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우물가에는 사람들이 더럽게 많은데 한놈도 우물 안으로 뛰어드는 놈이 없네요. 제자들한테 들으라고 이렇게 얘기 하셨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다 뭐가 되요? '아 우리도 아직 우물에 못뛰어 들었구나' 반성했겠죠.

각주 4번 보세요.

[지금 곧장]

여러분, 여러분한테 지금 하는 말이라고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신데 이렇게 얘기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우물가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놈도 우물 안에 뛰어드는 놈이 없네요'하면, 뭐라고 느끼셔야 될까요? 천국 가려면 우물로 뛰어들어야 된다는데, '어디로 뛰어들지? 하시면 안되요. '지금 곧장'

[시공을 포함한 일체의 이원성을 초월해서]

몰라 해버리고

[오직 하나인 성령 자리, 순수한 나의 현존, I AM 안으로 곧장 뛰어들어 가셔야 돼요.]

지금 곧장 몰라 하시고 현존하세요. 몰라 하시고, 일체를 알아차리는 그 의식, 그 자체, 의식의 빛에 광원이 있죠? 여러분 지금 뭐가 있어서 알아차리세요? 여러분 생각하고, 울고웃고, 보고듣고 하는거 말고요. 생각하고, 울고웃고, 보고듣는 건 이원성의 세계고 그건 나와 남이 있고 시간과 공간성이 있잖아요. 생각 하나 하려고 해도 시간이 흘러야 되잖아요. '나는 배고프다' 하려면 시간이 흘러야 되고, 공간성이 전제되야 되고, 그렇죠? 나와 이 먹을게 있어야 되고, 나와 남이 있어야 되고, 그 안에서 생각, 감정, 오감이 굴러가는데 그게 뭐가 있어서 이게 내 마음에서, 내영혼에서 존재하지? 그럼 그걸 알아차리는 영이 있어야 돼요. 영, 그게 알아차리는 의식 자체입니다. 몰라하고 하나 되있으면, 나와 남을 구분 안하고 계시면 그냥 I AM 자리에요. '나는 현존한다'는 그 자리에요.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 자리로 곧장 들어가셔야 돼요. 그냥 몰라하시라는 거예요. 묻지마, 몰라, 몰라, 괜찮아 하고 딱 존재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 몰라, 괜찮아 하는 순간 이원성을 초월합니다. 우물 안에 들어가 계신 거예요.

[우물이 하나인 성령 자리입니다]

하나인 자리를 우물이라고 표현했어요. 우물 주위에 에고들이 득실득실한데 한놈도 뛰어들지 않는다. 하나님 제자라고, 하나님 자녀라고, 내가 하나님의 목자라고 떠드는 존재들은 지금 이 땅에도 지금 우글우글해요. 자칭 예수들도 우글거리는데 한놈도 우물 안으로 바로 뛰어 드는 놈이 없다. 곧장 몰라 하시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현존하실 수 있어야 돼요. 그게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입니다. 하나님이 신랑이면 여러분이 신부가 되서 하나가 되야 돼요. 온전히 하나가 되야 돼요.

[그 우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현존할 수 있습니다.]

거긴 나와 남이 없고, 나와 남이 없다는건 나와 하나님간의 간격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가 되버려요. 하나라고 했잖아요, 거기는 분별이 없어요. 그 자리는 신과 인간의 분별도 없어요.

[나와 남을 가르는 하나를 이루지 못한 자들은 바리새파들 처럼 오직 우물가에만 머물고 끝내 우물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도마복음이 재미있는게 도마가 본인이 좋아하는 글들을 적어 낫겠죠. 본인이 감명 깊게 들은 구절들, 또 비슷한 얘기들을 잘도 들었어요.

75절 보세요.

《신부의 방에 들어가는 조건》

예수님께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주려고 이렇게도 얘기해 주셨어요.

《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있는데 오직 하나가 된 자라야만 신부의 방(즉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신부방 들어가고 싶지? 하나가 되야돼' '하나님 만나서 하나가 되고 싶지? 하나가 되야돼' 대놓고 하나가 되라고 하죠. 몰라 하셔야 돼요. 몰라 안하고 무슨 수로 하나가 돼요? 머리를 굴리는 순간 둘이에요. 그거는 다 둘이에요.

자, 각주 5번

[우리의 에고인 나는 시공과 주객에 의해 제약된 나입니다. 그러나 에고의 뿌리는 결국 순수하고 무제약적인 나 일뿐입니다. 주객을 초월하면 우리는 곧장 일체의 이원성을 초월한 하나의 성령 자리, 순수한 나의 현존에 도달할 겁니다]

이게 하나가 된 자에요. 이 하나가 된 자라야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장자 대종사편 보실래요. 장자 대종사편, 장자에도 이런 말이 나와요. 하나가 되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늘과 더불어 무리가 되고]

하늘 사람이고

[하나가 못된 자들은 사람과 더불어 무리가 된다]

하나가 된 하나님과 더부는 무리요, 하나가 못된 자는 중생들 더부는 무리가 된다. 장자가 참나와 에고의 세계 정확히 얘기해줬죠.

자, 그리고 유학자 중에, 장자 글만 그런게 아니라 유학자 중에도 정명도 선생이라고 유학자 중에 대표적인 유학자인데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학자는 반드시 사랑을 알아야 된다.]

이 사랑이라는 게 하나입니다. 이 선비는 여기까지 꿰뚫어 봤어요. 사랑을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얘기까지 했어요. 제가 항상 강조하는 거죠. 사랑은 몰라가 사랑입니다. 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와 남을 몰라 해버리면 그냥 하나가 되죠. 이 하나는 사실 사랑인 거에요. 그냥 이 하나를 텅빔으로만 아시면 안돼요. 사랑이예요, 사랑. 나와 남을 몰라 한다는 것은 나와 남을 하나로 본다는 겁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학자는 반드시 먼저 사랑하라 알아야 된다' 이 말이 아주 귀한 말입니다. 그 다음 설명 보세요.

[사랑이란건 혼연히 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거다.]

하나가 사랑이다. 하나됨이 사랑이다. 인의예지 중에 인(사랑)이 하나가 되는 거다.

[정의니, 지혜니, 예절이니, 성실이니 하는 것은 다 사랑이다]

사랑 안에 있다. 사도바울 얘기 같죠? 정의롭고, 인내하고, 예절 바르고, 지혜롭고, 성실함은 모두 사랑이다. 지금 사도바울식으로 얘기하면 어떻게 돼요? 사랑은 정의롭고, 사랑은 예절 바르며, 사랑은 지혜롭고, 사랑은 성실합니다. 이렇게 얘기 했겠죠? 정명도 선생도 그 얘기를 한 거예요.

[우리는 이런 원리를 알아서]

정성스러움, 이게 유교에서 정성스러움 그러면 양심과 하나가 됨을,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정성스러움 이라고 합니다. 한점 에고의 작용이 없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걸 정성스러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공경 그럽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경, 하나님의 대한 공경과

[하나님과 하나가 되서 정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것으로 우리는 사랑을 챙길 따름이다.]

사랑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다. 이게 정명도 선생이 한 말이에요. 한글로 보면 이름이 좀 무섭죠? 식인편, '인을 알자'는 얘깁니다. '인을 알자'

자, 논어에는 이런 말 없냐? 논어에 공자님이 이런 말씀하세요. 지금 유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뭔지 아셨죠? 그럼 이걸 알고 논어를 읽으면 맛이 다릅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랑에 머무는 것이 아름다우니 사랑을 선택하여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사랑에 머무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오직 나와 남을 초월하여 하나가 된 자가 지혜로운 자다. 그리고 나와 남을 구분하더라도 나와 남을 둘로보지 않고 사랑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자, 보세요. 나와 남을 초월하여 참나 안에서 하나가 된 자가 사랑하는 자요. 나와 남이 나눠진 이원성의 세계에서도 뭐예요? 이원성의 세계에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 이 자가 지혜롭다. 이 소리입니다. 왜? 사랑과 지혜는 원래 하나니까, 사랑하는 자가 지혜로운 거고 지혜로운 자가 사랑을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여러분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이 뭐에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보지를 못했으니까, 그래서 현상계의 사랑이건 절대계의 사랑이건 사랑은 한마디로하면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자리죠. 이게 현상계 차원에서 하나로 보려는 게 이웃사랑 이고, 절대계 차원에서 하나가 된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자, 요한1서 방금 보신 것은 4장 7절에서 8절이고요.

4장 16절 보실래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은 사랑하시니까,

[사랑 안에 나와 남을 둘로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서 머무십니다]

이 말씀 멋지죠. 여기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다음 바로 76절 볼까요? 몰라만 하시면 돼요. 몰라, 제가 얘기하는 '사랑의 몰라' 하라는 거예요. 그냥 '몰라하라' 그러면 하나가 된다. 이 말도 맞구요. 이원성을 몰라하면 하나가 되서 하나님과 합일이 된다. 이 말도 맞고, 이원성을 몰라한다는 것은 사실은 사랑이다. 그러니 이 하나됨이라는 것 사실은 사랑이다. 사랑의 본체요, 사랑의 작용이다.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겠죠. 현상계에서 펼쳐지는 건 작용, 절대계는 본체, 본체건 작용이건, 현상계건 절대계건 사랑은 뭐에여?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거죠. 하나가 되는 것,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계속 하나를 강조 하십니다. 절대계 차원의 하나를 강조하시기도 하고, 현상계 차원에서 하나됨을 강조하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를 자꾸 강조하시고 있다는 거 아실 수 있죠? 76절 볼까요?

《영원불변한 그분의 보물을 찾아라》

아버지의 보물을 찾으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의 왕국은》

아버지 왕국이 아버지 보물이겠죠?

《마치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으나 한개의 진주를》

성령이예요. 성령을

《발견한 상인과 같다. 그 상인은 진주가 너무 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 감정, 오감을 다

《팔아서》

뭘 사야 돼요?

《그 한개의 진주를 사야》

현명한 상인이죠? 이렇게 아버지 왕국은 현명한 상인이 전재산을 팔아서 얻은 그 진주와 같다는 거에요.

《그대를도 그래야 된다. 좀이 먹지 않고 어떤 벌레도 파괴할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하며 변치 않는 그 분의 보물을 찾아야 된다》

성령 자리입니다. 성령 자리 말고는 다 변하겠죠. 그렇죠?

각주 6번 볼게요.

[우리는 영(하나님의 성령, I AM 자리)의]

에고에이미하는, 나는 현존한다는 영원한 현존의 자리, 그 현존의 자리의

[작용이 혼의 생각, 감정, 오감에]

이에요. 그 생각, 감정, 오감에, 이원성의 세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 내 생각, 내 감정, 내 오감 모든 것 내려놓고]

여러분 탐진치 부리는 모든 것들이죠. 그것 내려놓고

[그것들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진리가 새겨진

[영을 바로 깨달으면]

그 자리가 영원불멸하다는 거 알겠죠.

[영원불변한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게 또 하나가 되라는 소리랑 같은 소리죠. 그래서 지금 글들이 그 근처에 있는 거예요. 하나가 되라는 거에요. 일체를 내려놓고 하나가 되라.

여기에 또 불경 한번 제가 가져왔습니다. 불경하고 장자 얘기 인용문으로 가져와봤는데요.

[사리자야 일체 사물의 텅 빈 형상(영원불변한 본체)은]

입니다. 영원불변의 본체 텅 빈 형상은

[생겨나지도, 죽지도, 더럽혀지지도, 깨끗해 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반야심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에요. 하나님 자리에요. 텅 빔이라는 하나님 자리입니다. 일체의 무상한 현상계를 초월한 그 텅 빔의 세계를 얘기한 거예요.

신심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삼조승찬 대사는

[이 자리는 둥글기가 큰허공과 같고]

온 우주랑 같고,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조금도 남음이 없다]

그러니까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은거지 사실은 이 자리는 눈에 보이는 허공도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허공도 한계가 있는데 이건 한계가 없다는 겁니다. 모자란 것도 남는 것도 없는 그 자리, 참나 자리입니다. 참나 자리만이 영원한 텅비되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자리죠. 그러니까 영원불변의 자리죠.

심신명에 다른 구절 보면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오히려 도와 더욱 상응하지 못하니, 말도 끊고 생각을 버리면 통하지 못하는 게 없을 것이다]

여러분 가지고 것, 귀하다는 게 결국 뭡니까? 생각 아니면, 감정 아니면, 오감이에요. 여러분 귀하 다는게, 오감의 대상이 물질 아니면 생각, 감정, 내 생각 귀하고, 내 감정 귀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귀하고, 물질이 귀하다는 건 내 오감 작용이 귀하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내 촉감이 귀하고, 내가 느낀 그 맛이 귀하고, 그 냄새가 귀하고, 내가 본 그게 귀하고 그거 놔버리고 바로 그냥 도랑 통해라. 몰라 해버리면 바로 도랑 통한다. 이 소리구요.

장자 좌망, 앉아서 다 잊어 버려라는 편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팔다리]

내 귀한 팔다리

[와 몸뚱이]

오감 작용이겠죠. 물질의 몸뚱이 잊어버리고, 그러면 오감도 잊어버리겠죠.

[총명함도 버리고]

남보다 생각 참 잘하네 하는거, 생각 뛰어나네 하는거, 머리 뛰어나네, 버리고

[형체를 떠나고 앎을 떠나서]

이게 다시 반복하는 거죠. 팔다리와 몸뚱이 잊버리고, 머리 좋은거 잊어버리고 나면, 형체도, 뭘 안다는 것도, 다 떠나버리면 어떻게 돼요?

[크게 통함과 하나가 되어]

대통해요. 대통과 하나가 돼요. 크게 통함이 어디겠어요? 크게 통하는 자리, 하나님 자리죠. 영원불멸의 도의 자리겠죠. 장자에서 말한 도의 자리, 그 도와 하나가

[되버리는걸 일러서 좌망]

불교에서 말하는 좌선이죠. 앉아서 일체를 놔버린 그 자리다. 그 자리가 하느님 자리, 대통 자리다. 하나님, 우주의 근원과 크게 통하는 자리다. 이 소리입니다.

어째 불안하다 했더니 진짜로 빨리 끝났네요. 하나 더 뽑아올걸 그랬네요. 다음 구절이 도마복음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돌멩이를 들어봐라. 거기도 내가 있다. 하는 유명한 도마복음, 일체유심조의 도를 논하는 자리라서 좀 아껴뒀는데요. 오늘 가져올 걸 그랬네요. 다음시간에 또 재미있는 도마복음 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 중에 하나에요. 예전에 어떤 영화죠? '시그' 하지말죠. 그 영화에 그 한구절 가지고 영화 전체를 끌고가는 영화도 있었어요. 아 뭐였죠? 성은, 성은을 나타내는 영어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서 그 영화가 죽이는게 창녀가 마지막에 예수님처럼 부활 해버립니다. 충격적인 도마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만든 영화인데,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세요. 오래되서 기억이 안나네, 아마 성은이었던 것 같은데요. 여기까지 도마복음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