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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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8일 (월) 19:38 판 (https://cafe.naver.com/bohd/6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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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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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2 43 49절, 67절
부제 그대들은 하나님들이다
강의일자 2020. 07. 11. 土.
게시일자 2020. 12. 08.
동영상 길이 47:18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es9jD9zlTzc


도마복음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마복음 강의, 지난시간 29절까지 했죠. 30절부터 해볼께요.

《30절 그대들은 하나님들 이다》

파격적이죠. 그런데 이제 이 얘기도 요한복음에 나와요. 요한복음 중에 나오는데 그게 또 이렇게 좀 다른 맛으로 강조가 됩니다. 본문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세 명의 하나님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세분 있는 곳에서, 그럼 누굴까요? 신자들, 그렇죠? 성도들이죠. 하나님과 하나가 돼서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이예요. 그냥 믿는 자들, 혈육의 자녀가 에고의 마음으로 믿는 것은 제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알고 믿는 게 아니고 진짜로 알고 믿는 자들이 있죠. 하나님과 소통한 자들, '하나님이 계실 거야, 내 안에 계실 거야, 나한테 임하실 거야, 늘 나와 함께 하실 거야' 이렇게 믿는 자들은 아직 아니예요. 소통해야 돼요. '아 계시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들 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 이 자리는 하나의 성령이예요. 하나, 예수님과 우리가 다 하나예요. 성령, 우리의 에고, 그러면 우리의 혼과 육이죠. 성령이 영이 되고, 그래서 보통 영은 우리 안에 살아 있지만 죽은 영 상태라 그래요.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고, 자각을 못하고 사니까. 이 영자리 우리의 영인 성령을 자각해 버리면, 각성해 버리면 이제 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현존을 드러내죠. 성령은 I AM 이죠. 현존을 드러내죠. 그러면 이 혼과 육이, 혼은 거룩해지고 육은 부활합니다. 재미있죠? 영생 이라고 할까요, 부활, 영생, 혼은 거룩해 지고 육은 부활해서 거룩해지 게 된다. 죽이죠,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성령으로 인해 모든 변화가 일어나죠. 그래서 성령을 각성하는 건 칭의, 이거 한 번만 하고 갈께요. 혼이 거룩해지는 것은 성화, 육이 부활하는 건 영광스러워 진다고 그래서 영화, 이 세가지, 이걸 닦아야 성도예요. 왜 칭의, 성화, 영화를 말씀드리냐면 이게 하나씩 단계별로 닦아가고 있는 중인 분들이 그래도 성도죠. 그렇죠? 성령은 받아야 성도죠. 성령을 받아야 거룩해지죠. 여러분이 믿는다고 거룩해지는 게 아니예요. 믿는다는 것도 에고 놀음이예요. 에고가 불안하니까 뭔가 상을 하나 만들어서, 형상을 하나 세워서 믿기로 해요. 이것도 사실 우상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아니거든요. 우상 입니다. 하나님 자체 아니면 다 우상이예요. 그래서 하나님 자체를 만나게 돼야 진짜 성도가 돼요. 좋은 의도로 우리가 상을 세우더라도, 믿기 위해서 상을 세워더라도, 일단 그건 일종의 우상입니다. 그걸 넘어서서 진짜 하나님과 소통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들이 되는 거예요. 자! 성령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으로 인해 거룩해지고, 영광스러워지고 있는 존재, 아직 다 영광스러워지지 않았더라도, 그걸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있다는 것 자체도 우리 안에 성령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 혼으로 이해하고 육으로 실천할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런 구절이 도마복음 너무 쎈데 하지 마시고,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에도나옵니다. 도마복음 먼저 보자구요. '세 명의 하나님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거룩하다》

성령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거예요. 그분들이 에고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에고, 혼과 육에 뿌리인 성령을 찾았기 때문에 거룩해지고 하나님들 이라고 불립니다.

《둘 또는 하나가 있는 곳에》

그럼 그런 사람, 성도 둘, 세 명이면 당연히 거룩하고 둘 또는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거룩하죠. 왜? 성령이 임했으니까, 성령이 임했다는건 보세요 이 의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뿌리는 뭐죠? 성령이 임했다는 건 항상 두 가지를 체크 하셔야 되요. 출제됩니다. 성부, 아버지의 영이니까 성령이 내 안에 임했다는 건 아버지가 임한 것이고, 이 성령으로 인해 내 혼과 육이 거룩해지고 이 영광스러워져 간다는 것은 그렇게 먼저 되신 분이 계시죠? 내가 내 안에서 이런 기적을 체험하면 성자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걸 완성하신 분이구나' 이걸 이해하게 돼요. 성령에 입문을 해야 예수님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을 깨달은 존재는 항상 이 성령의 근원인 성부와 성령의 온전한 발현, 온전한 실현이신 성자와 영원히 함께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나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

셋 있으면, 셋이면 조직이고 공동체 거든요. 그래서 세 명만 있어도 조직이고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EBS에서 실험한 거 말씀드렸지만 횡단보도 건너다가 한 명이 이렇게 허공을 돌아봐요. 사람들이 신경을 안써요. 두 명이 돌아봐요. 그래도 신경을 덜쓰다가 3명이 돌아보면 '뭐가 있구나' 하고 쳐다 봅니다. 세 명이면 우리 무의식 속에 이 세명은 조직인 거예요. 도원결의도 몇 명이 하죠? 세명이요. 그래서 쿼크도 과학자들이 세개 그러잖아요? 전 과학 잘 모릅니다만 정보는 늘 접합니다. 아주 문외한 이면 안 되니까.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과학자분한테 들은 거예요. 세개가 있어야 안정이 된다. 우주의 공식이 신기하죠? 삼위일체도 둘이면 불안하다는 거죠. 셋이어야 하나가 된다. 자! 그런 느낌으로 접근 하시라고요. 여기서 세명은 조직이자 공동체입니다. 한 개인이 아니에요. 그런데 둘 또는 하나는 개인이예요. 공동체가 있는 곳, 그럼 교회죠. 세명의 하나님들이 있는 곳, 그럼 교회예요. 또 지금의 어떤 건물로서 교회가 아니라, 원래 교회는 본래 에클레시아 라고 모임입니다. 어떤 미션을 수행하고자 하는 군사모임이나, 이런 군사조직, 조직이나 모임이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인적조직을 말해요. 세명의 하나님들이 계신 곳, 그럼 거기 교회입니다. 그들은 거룩하다. 왜? 성령이 임해계시니까, 성령이 그 세명을 통해 공동체에 구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로고스, 하나님의 진리가 펼쳐질테니까. 하지만 둘 또는 하나만 있더라도 둘은 또 최소한 인간관계가 또 펼쳐지겠죠. 온전한 공동체는 아니더라도, 둘 속에서 또 하나님이 임하셔서 성령의 진리가 구현될거고 황금률이 실천될거고, 혼자 있어도 자기 속마음을 정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황금율로 자기 속마음을 정리해야돼요. 혼자 있더라도 우린 관계 속의 존재니까 나 혼자 있더라도 관계를 염두해 두고 살아가죠. 내가 하는 생각 하나도 누군가한테 피해를 줄 수도 있죠. 그래서 혼자 있는 곳에서도 우리 에고의 세계는 절대적은 혼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이 늘 함께 하시니까 또 혼자가 아니다. 양면을 다 보셔야 돼요. 수많은 에고와의 관계 속에서 나이기 때문에, 나 하나만 얘기 하더라도 이미 혼자가 아니다. 그곳에서 항상 사랑의 진리, 그러니까 황금률, 사랑의 진리로 자기 영혼을 관리해서 거룩하게 만들어야 된다. 육은 부활해야 된다. 그러면 성령이 함께 계시다는 건, 아버지도, 아들도 함께 계시다는 거다. 이정도는 기본으로 까셔야 됩니다. 도마복음 이 구절 이해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있으셔야 돼요. 자 그러면 이 말씀 이해가 돼요. 요한복음 각주에 10장 31절에서 38절 한번 보실래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자]

'이건 신성 모독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자극한 거죠. 유대인들이 그렇게 판단해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는 전지전능한 아버지시죠. 사랑의 아버지,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보여줬다]

예수님도 똑같은 입장이예요. 예수님의 에고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은 성령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에 성령이, 아버지가 내 안에서 역사하셨다. 내가 한 모든 착한 일은 아버지로부터 나온거다. 내 에고가 잘나서 내 혈육이 잘나서 한게 아니다.

[그 중에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 하는냐?]

'왜 너희는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반항하느냐' 이거죠. 하나님을 섬긴다는 놈들이, 그러니까

[유대인이,]

유대인도 말빨이 있어요.

[우리는 그들 중에 어떤 것 때문에]

너가 한 선한 일 때문에

[돌 던지려고 하는거 아니다.]


말이 그럴싸 하죠?

[신성모독 때문에]

돌을 던지려고 한 거다. 왜냐 그대가 하나님 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스스로 칭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얘기 들어도 또 기독교 신자 분들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지' 우리는 아닐 거야. '성도는 될 수 있지만 감히 무슨 하나님' 이러실 수 있지만 '이건 삼위일체 도전하는 거야' 이럴수 있죠?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세요. 그대들의 율법에]

즉, 사실 구약의 시편에 기록되어 있어요.

[율법에 기록되기를 나는 그대들이 하나님들이 라고 말하였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하나님들 이라고 말했다'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시편 보실래요. 밑에 또 있어요. 시편 82편 6절,

[내가 말하길 너희들, 지상에 재판관들한테 하는 얘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들이다. 그리고 지극히 존귀한 분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분신이니까 너희도 그대로 하나님이다. 이 얘기를 여호와가 하신 거예요. 시편의 이 구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겁니다. 아니 너희가 믿는 구약에, 율법에 나는 '그대들이 하나님들이다' 라고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들 이라고 하였다]

그 땅의 재판관들이 훌륭한 존재도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재판을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요즘 말하면 이제 판사, 판사들한테 여호와가 하나님들 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다루니까.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재판관들한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훌륭한 재판관도 아니에요. 부정부패한 재판관들한테 얘기한 거예요. 너, 니네 내가 하나님들 이라고 했는데 이딴식으로 할래? 이런 느낌의 말씀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존재도 '하나님들' 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러면 성령받은 사람은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예요. 하나님 말씀만 받아도 지금 하나님 소릴 듣는데 영을 받은 사람은요? 이건 뭐 말할 나위도 없죠.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설득해야 되니까, 그대들 율법에도 하나님들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호와께서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들 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즉, 성령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게 해서

[이 땅에 보낸 나는 어떻겠는가?]

성령을, 하나님 말씀만 받더라도 하나님인데 성령 받아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지금 내 일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한테 그대들이 하나님이란 말 썼다고 이럴 수 있냐? 내가 그것도 하나님 이라고 한 것도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거 가지고 지금 신성모독 했다고 돌 던지려고 하는가?]

이겁니다.

[만약 내가 아버지를 행하지 않거든]

내가 빛이 아니라 어둠을 행하거든

[나를 믿지 말라 하지만]

이 말씀도 재미있죠. 돌 던지라고 하진 않죠. 내가 아버지 일를 행하지 않거든 돌을 던져라. 이러지 않으셨죠.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만약 내가 아버지 일을 행하거든 믿지 않더라도]

나는 안믿더라도 나의 에고는 안믿더라도 내 안에서 그런 선한 일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예수는 안믿어도 좋다. 내가 그래도 기특한 일한다는 것은 성령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한테서 나온 거다.

[그 선한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그대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설득은 안됐겠지만 이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이런 얘기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뭐 짧게 살펴봤지만 이 안에 엄청난 내용들이 들어있죠. 그러면 지금 성령받은 존재는 구약에 근거하면 뭐라고 불려도 되죠? 하나님들 이에요. 여러분은 하나님들 입니다. 사실 본래 하나님들인데 자각을 못했으니까 하나님이라고 하기 챙피했죠. 하지만 성령을 받았다면 성도가 됐다면 하나님들 이에요. 어이 거기 돌 내려놓고 얘기해봐. 이런 느낌 이셨겠죠. 자. 그러니까 하나님들이 세 명 모이면 교회가 얼마나 신성한 곳이 겠어요. 지금 교회도 그래야 맞을 텐데요. 이게 교회 원형 이라는거, 도마복음에서 교회의 원형을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교회를 세우세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서 제가 뭐 비판만 하지 않습니다. 지금 성령받아서 거듭나세요. 하나님들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나서 진정한 교회를 세우세요. 이미 방법이 다 써있는데요. 성령받아서 혼을 거룩하게 만들고 칭의, 성화, 나아가서 몸에서 부활의 몸, 우리 몸 안에 빛의 몸이 있어요. 이미 있어요. 지난 시간에 얘기했죠. 이 빈곤한 육신에, 빈곤한 죽어가는 육신 안에 이렇게 풍요로운게 들어있다니, 이거 죽기 전에 그러니까 부활체로 얻어라. 이 풍요로운 거 버리고 비참하게 죽고,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의 신에게 육신 뺏끼고, 비참하게 죽음 맞이하고 지옥에 끌려 갈래? 이렇게 겁을 주셨죠. 평소에 계속 그러셨나 봐요. 어떤 복음을 봐도 그 메시지는 한결 같습니다. 각주 3번 볼까요? 제 풀이 입니다.

[자신의 성령을 다시 찾은 사람들은]

이미 성령은 임해 있었어요. '너희들 안에 이미 천국은 와있다.'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찾은 거죠.

[하나님의 이미 분신이니 사실 이미 하나님이다. 그러니 깨어나 안식처를 얻은 자들이]

참나 안에서 안식하는 자들이란 소리에요.

[셋이 모인다면 그들은 참으로 거룩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3인이 되어야 공동체가 되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깨어난 자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공동체까지 해서 아름답다. 이겁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둘이나 하나만 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할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는 본래 성령에 있어서 하나이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나가 된 사람은 예수님과 본래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이 선심써서 같이 있는게 아니예요. 성령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성령의 온전한 구현자인 예수님도 우리의 맏이로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3명의 하나님들이 있는 곳'을 공동체 얘기로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31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선지자》

이 얘기는 너무 유명해서 잘 아시죠?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선지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떤 선지자도 그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의사들은 그들을 아는 자를 치료할 수 없다》

뭐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그런데 실제로 구약에 보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선지자들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을 근거로 얘기 하시는 거예요. 선지자들도, 엘리아도, 엘리아같은 선지자도 고향에서 환영 못 받았다. 오히려 이방에서 인정받고 고향에서 인정 못 받았다. 왜? 그 사람의 에고를 너무 잘 알잖아요. 고향사람이란 소리는 크면서 이 사람의 혼과 육에 대해서 너무 잘아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그 선지자의 거죽만 보고 안에 있는 성령을 못 봅니다. 지금 거죽은 아무네 가게집 아들과 딸이라 하더라도 속에 성령이 들어있는데 성령, 하나님을 못 보고 '어 저거 우리 동네에 무슨 가게네 아들인데, 무슨 가게네 딸인데' 이래 버리면 사람들이 사실 말 듣기 힘들겠죠. 그 분들 처지도 이해해야죠. 고향 사람들은 아무래도 '아 저거 목수 요셉 아들인데, 내가 이런 얘길 저 사람에게 들어야 되나' 하는 그게 있단 말이에요. 아무리 명의라고 소문나도 '우리 옆집에 살던 그 코흘리던 애인데 걔가 그걸 고칠 수 있을까?' 에고에 대해 너무 알기 때문에 그 내면에 있는 성령을 볼 수 없는 경우 이걸 지적한 거니까, 여기서 요즘도 이런다 이렇게 우리가 '아무튼 고향은 안돼' 이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되고요 '에고 거죽만 보는 자는 속에 있는 성령을 놓치기 쉽다' 이렇게 이해하시는게 좋습니다. 그래서 각주 4번 보시면, 이것도 이미 기존 복음에 다 있죠? 누가복음 4장 16절~24절 보실래요, 실제로 이게 어떤 사정에서 나온 얘기인지, 좀 자세하게 소개된 게 누가복음 이에요.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셨다]

언제 가신 적이 있어요.

[안식일이 되니까]

주일이 되면 어떻게 해요? 유대인들은 안식일 되면 교회 회당에 모여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쉰단 말이에요. 그러면 한 명씩 회당에서 설교를 할 수가 있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마련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관례대로]

그럼 예수님이 자주 그러셨다는 예전에도 거예요. 자기 관례대로 회당이면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셔서]

유대교의 교회죠. 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그러니까 옆에서 누가 도와주려고

[선지자 이사야 글을 주니까 책을 펴더니 이제 예수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구절을 찾으신 거예요]

뭘 찾았냐? 이 부분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신 거다]

기름 부었다는 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의 물질적 상징입니다.


[나를 보내셔서]

뭘 하라고 지금 성령을 부어 주셨나요?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하셨고]

그럼 이게 전쟁 포로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여러분 이미 사탄의 포로 아닙니까? 세속의 영, 사탄의 포로죠? 탐진치 영의 포로, 이기심의 영의 포로

[그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하려고]

성령을 부어 주셨다. 우리 영혼의 자유를 생각하시면 더 좋겠죠. 육신의 자유도 포함한 얘기겠지만, 예수님이 이 말을 하실 때는 영혼의 자유가 더 주된 내용 이겠죠?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셨으며]

이게 육신의 눈뜨게 하는 것도 상징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하나님의 빛을 알아 보라는 거죠. 요한복음에서 내가 빛이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빛이니 빛을 좀 알아봐라. '눈 좀 떠라' 이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런 얘기까지 하세요 '내가 소경 이라는 걸 아는 자는 눈을 뜨겠지만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누구냐? 위선자, 바리새파요. 나는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히려 장님이 될 것이다, 소경이 될 것이다' 이런 말씀도 있어요. 눈을 뜨게 해주려고 왔는데, 예수님이 영혼의 의사죠, 그 빛을 못보는 영적인 안목이 형편 없으니까 빛을 못보는 그 눈을, 소경의 눈을, 영적인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왔는데 다들 '저는 죄인입니다' 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어때요? 예수님이 눈뜨게 해주면 되는 거예요. '눈 좀 뜨게 해주세요' 하는 사람들은 뜨게 해주면 돼요. 그런데 이제 바리새파들한테 갔더니 어떻게 나온 거죠? '난 시력 좋은데' 이렇게 나온거예요. '나 하나님하고 늘 소통하는데 하나님하고 친한데, 난 눈 뜨고 있는데' 눈 뜬다고 하는 자들은 장님이 될 것이다.' 이 소리는 보인다는데 도와줄 수 없잖아요. 의사한테 가서 보인다고 사기를 치는데 어떻해요? 그 경우입니다. 위선자들, 그래서 예수님이 위선자들 욕을 많이 하시는거예요. 자, 눈먼 자들은 보게 하려고

[짓밟힌 자들은 해방 시켜주려고]

남들한테, 남들의 갑질에 억압당하고, 짓밟히고 있는 자들은 억눌린 자들은 해방 시켜주려고, 비양심한테 굴복된 양심 세력한테 힘을 주려고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거에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인데 예수님 마음이 딱 이건 거죠. '내가 이거 하려고 왔어' 라는 구절을 찾으셨겠신죠. 자, 보세요. '내가 이거 하려고 왔어' 라는 게 확실한 이유가 이

[책을 덮고 담당자 한테 책을 주고 나서]

책 담당자가 있었겠죠.

[앉으시니까 회당에 있는 자들이]

'누군데 이렇게 말을 잘해' 하고

[봤겠죠.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얘기 하셨어요. 이 글이 방금 이사야가 말한 내용이 그대들의 귀에서 이루어 졌도다.]

지금 너희들 귀에 선포되었다. 나도 지금 성령이 임해서 한 얘기 거든요. 예수님이 구약을 읽으셨지만, 성령 안에서 지금 이걸 또 선포하신 거에요. 이사야가 선포했던 걸 다시 선포하신 거예요. 성령 안에서, 지금 성령이 왜 예수인 내 안에 임했느냐? 이거 하려고, 포로에게 자유주고, 눈먼 자들 빛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짓밟히는 자들, 갑질 당하는 자들 해방 시켜주려고 성령이 임한 거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사도라고 하면서 이 땅의 정의에 눈감고, 짓밟히는 자들을 사실은 해방시켜 주는게 아니라 가서 더 밟고, 포로된 사람들, 사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는 커녕 사탄의 편에 서구요.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기는 커녕, 자기가 더 눈이 멀어 있으면 하나님 제자니, 사도니 이런말 쓰면 안되겠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셔야 앞으로 교회, 그 하나님들이 모인 교회는 뭔 일을 해야 되느냐? 지금 이거 해야되요. 예수님이 '나 이 짓 하려고 왔어, 아버지가 나 이거 하라고 보냈어' 얘기하신 거에요. '중생 구제 하라고 보냈어' 이거예요. 그리고 그때 이 말을 듣는 자들 한테 지금 주의 성령이 임해서 이 말을 또 선포 했으니까 '너희들 귀에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졌도다, 이 말씀이 이루어졌도다' 온전히 이 일이 다 실현된건 아니지만 안하니까 하나님의 영이 또 임해서 제대로 하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선포한 거죠. '그대를 귀에서 이 말이 이루어졌도다.' 현실에서 이루어 졌으면 더 좋았겠죠.

[그들은 모두가 주의 증언을 인정하면서도]

'이 말이 자명하네' 하면서도 '주의 입에서'

즉 주의 증언 이라는 것은 여기서 주는 예수님 이예요. 예수님의 증언을 인정 하겠는데, 제자들 한텐 주니까,

[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하게 여기면서]

왜? 기이하게 여겼을까요? '저거 목수 요셉 아들인데' 이거에요. 주의 증언을 인정하면서도, '말은 죽이네'

확 느낌 오네, 은혜받은 느낌 드네, 근데 그 느낌이 드는데도

[아 저사람은 요셉 아들 아닌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버렸죠. 예수님 그 다음에 이제 빡치셨죠. 말 줄임표 안에 빡치신 부분이 있구요. 멋진 말씀 해주십니다.

[진실로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을 자가 없도다]

'내가 너희들한테는 해줄게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내용 보면, 실제로 다 읽어보면 '뭐 그렇게까지 화내시나' 할 내용이예요. 여기서 나타내는 게 있는 거죠. 에고의 안목에 빠져서 거죽만 보지 마라, 속을 보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형제들도 처음에 예수님을 안 믿었다고 복음에 되있잖아요. 왜냐면 형제도 마찬가지 아니예요? 형제, 나랑 같이 분명히 똥싸면서 이렇게 컸는데 갑자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 하려고 하면 믿겠어요?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요. 저는 오히려 이런 경우 가까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분들도 힘들 거다. 분명 요셉 아들래미 사고치고 했을 것 같은데, 예수님도 어렸을 때 '아, 걘데' 그렇죠? 예수님도 그걸 아니까 이제 뭐 진심으로 빡치셨다기 보다 뭔가 중생들테 경고를 하신거겠죠. 제 풀이를 해놓았습니다. 각주 5번에

[사람들은 에고의 눈으로 거죽만 본다. 성령의 눈으로 그 거죽 안에 담긴 보물을 보지 못한다]

우리도 명심 하자구요. 32절 보죠.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굳건한 도시》

높은 언덕 위에 굳건한 도시가 세워졌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기존 복음에 보면, 각주 6번 볼까요. 마태복음 7장 24절, 27절 이 말씀하고 통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그러므로 나의 이 말들을 듣고 실천하는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는

[모두 자신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을 거다]

집을 반석 위에 지어야지 모래 위에다, 사상누각 이잖아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안 되잖아요. 당장은 그럴싸 해 보여요. 그런데 어때요?

[비가 내려서 강물이 밀려오면 그리고 바람이 불면]

그냥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지은 집만 버팁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말은 들었어요. '서로 사랑하라' '좋다. 이래야 천국 간다. 좋다' 실천하지 않는 자는 뭐예요?

[자신의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이거는 에고의 마음으로 들어서 실천이 안이루어진 거예요. 진심으로 자기 안에 성령이 강림해서, 양심이 각성되서 실천하는 자, 성령의 토대 위에서, 사실은 이 반석은 뭐예요? 성령의 토대 위에서 실천하는 자죠. 성령 위에 집을 지은 자예요. 자신의 꼼수로,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말씀은 좋다'하고 그냥 묵살해버린 자들은 사상누각과 같이 한방에 날아가고,

[비가 내려서 강물이 밀려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여러분 성령이 임해서 성령 안에서 말씀을 받고, 이해하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지 반석 입니다. 이 말씀에 좀 생략된게 있어요. 성령 받아서 성령 안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귀로만 듣고 성령 안에서 듣는게 아니라 에고의 안목으로 귀로만 듣고, 귀로만 듣고 에고가 실천이 되겠어요? 안되죠. 자기 욕심하고 충돌이 나니까 안해버려요. 바로 무너진다. 그래서 이런 구절과 통하는 내용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풀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높은 언덕 위에 아주 굳건한 반석이죠?' '성령의 토대 위에' 이렇게 이해하시는게 좋아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말씀과 하나가 돼서 그 안에 안주 하면서, 뭘 해요? 굳건한 도시를 만들어요. 그러면

《절대로 무너지거나 감춰질 수 없다》

같은 그림이지만 다시 그려 볼게요. 원래 이거 내일 하면 거의 일요예배 인데요. 설교 시간인데 토요 설교 시간 인가요? 자, 여기는 영의 자리라 그랬죠. 이렇게도 그려 볼까요. 여기는 혼의 자리, 뒤에 그림 있습니다. 보세요. 그리고 여기는 육의 자리, 그런데 높은 언덕을 성령이라고 보자고요, 성령, 우리 영을 성령 이에요. 자, 보세요. 영이란 게 뭡니까? I AM 이에요. 그럼 혼은? I AM 뒤에 생각과, 감정과, 오감이 붙은거고, 육은 이 몸뚱이가 붙은 거죠. 물질이 붙은 거죠. 내가 이 오감으로 체험하는 대상이 육이죠? 그리고 이 육신을 통해서 또 우린 오감으로 뭘 체험해요? 밖에다 쓸까요? 세계를 체험합니다. 육이나 세계, 한 세트예요. 우리 몸하고 세계는 한 세트죠. 우리 혼이 체험 할때는 똑같아요. 이게 더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그렇지, 우리 몸 안에서 신경 통해서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그렇지, 촉감을 통해서 오감 정보가 더 선명해서 그렇지, 바깥 것들도 또 육신을 거쳐서 체험 하니까 그렇지, 더 친근한 존재 육신, 마음과 더 가까운 존재 육신과, 더 먼 존재 세계, 이렇게 나누지만 사실 두 개는 한 세트다. 잘 아시죠? 자, 그런데 중요한 건 뭡니까? 이런 얘기가 아니라 자, 생각, 감정, 오감과 육신, 공부 어떻게 해야되요? 이 영이 터져나와야 돼요. 그때 그런 얘기했죠? 빛의 사람이 되라. 성령은 빛 아닙니까? 그럼 빛의 사람이 되면 빛이 우리 혼과 육까지 다 밝혀 주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성전이 되요. 지금 굳건한 도시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그런 높은 반석, 언덕 그러면 성령이죠. 성령 자리에 이 토대를 두고 뭘 지어요? 도시를 짓죠. 어떤 도시를 지어야 겠어요? 거룩한 혼, 성화죠. 거룩한 혼, 성령을 만난 건 칭의, 칭의에 바탕을 두고 성화, 거룩한 혼을 만들어내고 육신은요? 영화, 영생을 얻은 육신을 배양 한다면 당신은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도시를 세운 거죠. 무너지지도 않을 뿐더러 빛이 터져 나오니까 감출 수도 없습니다. 자, 그런 존재가 되셔야 됩니다.

자, 각주 7번 볼게요. 높은 언덕, 그러면 여기서 성령을 의미한다고 보십시오. 성령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제 성령으로 잡았어요. 왜? 성령이 진리의 영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씀을 품은 영이 성령 이에요. 말씀의 영이 성령이예요. 진리가 말씀이니까. 거룩하게 그리고 광명하게 빛나는 영 입니다.

[그 높은 언덕은 사방을 환히 비춰 줍니다]

낮은 언덕이 아니라 높은 언덕 이라고 왜 했겠어요? 높다는 건 어떤 것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의미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춰지지 않죠. 모든 사방, 동서남북 사방에서 우러러 볼 수 있는 그런 높은 언덕 위에, 이 성령의 토대 위에 빛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버리면 거룩한 혼과 부활한 육을 갖춰 버리면 어때요? 그 사람의 그 거룩함과 그 영광스러움이 만천하에 알려집니다. 감춰 질 수 없죠. 그래서 사방을 훤히 비추어 주고

[그 위에 세워진 굳건한 도시, 거룩해진 혼과 불멸하는 영적 육체는 무너지지 않는다.]

굳건하다,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감춰 질 수가 없다. 이런거 보시고, 그게 그다음 33절이랑 연결되어 함께 볼까요.

옆의 그림 있죠? '성령의 토대 위에 지어진 성전' 이게 높은 언덕, 높다는게 중요해요. 높은, 그런 반석 같은 언더 위에 지어진 무너지지 않는 도시, 즉 성전 입니다. 모든 사람들한테 감춰지지 않고 드러나게 돼 있어요. 왜 드러나야 되느냐? 그 성령이 내 성령이 따로 있고 남의 성령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영이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게 내 것이 아니에요. I AM 이면 나 같은데 I AM 상태만 있다면 여러분 이 뒤에 뭔가 생각, 감정, 오감이 붙지 않는다면 그럼 이 I AM은 그냥 성스러운 거에요. 하나님의 숨결이고 하나님의 영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I AM 이거든요. 자 그래서 이 영은 하나님 이에요. 이 영은 나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영이, 내 안에 있는 빛이 터져 나오면 이 빛은 모든 사람들한테 유용한 겁니다. 모든 사람들한테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돼요. 왜? 나를 통해서 드러나지만 모든 사람의 빛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 안에서 이 성령이 샘솟으니까, 드러나니까 모든 사람들한테 그걸 보여준 거에요. '나는 빛의 사람이다. 나랑 놀자. 나랑 놀면 그대들도 빛 안에서 놀 수 있다. 빛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빛 안으로 좀 들어와라. 가까이 와라. 이런 얘기를 하시는 이유가 내 영이면서, 나의 영이면서 동시에 성령이기 때문에 이 성령의 빛은, 성령의 진리는 만천하에 드러내야 됩니다. 왜?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빛이고, 진리 거든요.

자, 보세요. 그게 33절에 나와요.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보게 하라》

그래서 32절, 33 절은 하나로 이어서 보시면 내용이 잘 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의 귀로 들은 것을 지붕에 올라가서 다른 귀에 선포하라.》

'동네사람들' 하고 이렇게 얘기 하라는 겁니다.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성령 받으세요. 몰라 하세요. 괜찮아 하세요. 자명하게 사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외쳐야 돼요.

《아무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두진 않는다.》

여러분 등불을 켜서 집을 밝히려면 제일 높은데 놔야 될 거 아니에요.

《감추어진 곳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등경이라고 등잔 놓는 기구 있죠? 우리 사극에 보면 이런거 있죠? 이런 것 위에 이렇게 불을 놓는 겁니다. 이걸 등경이라고 해요.

《등경 위에 다가 등불을 놓고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한다》

등대를 만들었는데 불이 1층에서 빛나고 있으면 안되죠? 꼭대기에서 빛나야지.

이 소린 뭐냐 보십시오 각주 8번

[성령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성령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나의 성령은 모두의 성령 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에 성령의 빛을 갖춘 빛의 사람은 높이 들려야]

그래서 예수님이 계속 마태복음이나, 많은 4대복음에서 계속 '인자가 들려야 된다' 라는 말씀을 하시거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건 이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상징 이에요. 인자가 들려야 된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는 곳에 인자가, 그리고 십자가에 진리가 선포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높이 들린 성자만 봐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고, 구원 받는 것 보다 성령을 받고, 혼이 거룩해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인도해줘야 되거든요. 빛의 사람이 높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등불을 저 아래, 바구니 속에 넣어놓는 거죠. 그래서

[빛의 사람은 높이 들려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밝은 등불이 되어야 된다.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런데 제가 좀 싫은 소리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육신을]

지금 걸어놓고 '인자가 높이 들리신 게 저거다' 라고만 해버리면 잘못 보고 계신 거예요. 높이 들려야 되는 건 뭐예요? 빛의 사람으로서의 예수님 이예요. 그러면 십자가에 예수님을 새겨 놓더라도 어떤 예수님을 새겨야 원래 예수님의 의도에 맞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빛의 영이 거룩해진 혼을 통해, 부활한 육체를 통해서 그 빛이 터져나오는 모습을 그려서 십자가에 새겨 놓으시고 높이 들어야 모든 인류가 보고 빛을 받고 부활을, 영생을, 구원을, 거룩함을 얻지 않겠어요? 제가 불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생하시는 예수님만 높이 들어놓고는 거기서 위안 받아라, 거기서 에고는 위안을 받을 수 있어요. 에고는 위안 받습니다. '나보다 더 고생한 양반이 있네, 나 땜에 돌아가신 양반 있네' 이렇게 생각하면 위로는 옵니다만 그게 빛과 부활은 아니에요. 그거를 얻으려면 제가 볼때는 지금 제가 그런 강의도 한 적이 있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 좀 내려드리자. 그럼 거기에 예수님 놓으면 안된다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새겨드리자. 그런 십자가상도 있겠지만 워낙 고통에 일그러진 예수님의 모습만 새겨놓은 걸 많이 봐서 제가 이런 얘기 한번 드렸습니다. 좀 싫은 소리,

[왜냐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바울이 뭐라고 했나요? '십자가에 죄, 죄성을 그냥 못박았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도 십자가가 상징 하는건, 십자가는 진리지만 육신은 진리에 못 박으신 혈육의 자녀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죄를 못 박아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혼육을 우리가 느껴야 될 것 아닙니까? '나는 그 고통 받는 모습만 봐도 사랑과 빛이 느껴지던데' 하시는 분은 대단하신 분이고, 그렇게 느끼시는 건 좋은 일이고, 그렇게 위안이라도 얻으시라고 그 모습을 새겨놓은 건 맞습니다만 '높이 들린다'는 것의 참뜻은 '인자의 모습을 사람들한테 우러러 볼 수 있게 높이 든다' 이런 의미가 본 의미라는 걸 아시고 보신다면 좀 아쉬운게 있으실 거예요. 그래서 보는 사람이라도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육신에 매몰되서 보시면 안됩니다. '아이고 고통스러웠겠다. 나 때문에 저렇게 돌아가시다니'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마시고 영성적으로 접근 하세요. '저 사랑의 하나님이, 빛의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저 모습을 하고 있구나' 하고 보시면서 거기서 우리도 함께 칭의, 성화, 영화를 느껴야되지 않겠어요?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빛의 영혼육을 지니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보아야 됩니다]

높이 들린 광명한 빛의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빛의 사람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돼요. 거죽에 가려지면 안되요. 또 '그때 사형 당하신 분' 이라는 거죽에 가려서 속을 못 보시면 안돼요.

[우리는 그분을 통해 빛나는 빛을 봐야 합니다. 황극이 펼친 말은]

자, 이건 서경의 홍범에 있는 구절이예요. 동양에도 위대한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극이 펼친 말은'

[떳떳한 법도 이며]

황극 이라는 것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위대한, 지금 이거는 영혼육에서 영이 사방에서 우러러 보는 위대한 존재죠? 그럼 인간 무리 중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게 뭔지 아세요? 이게 동서남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진리도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모든 중생의 우두머리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 성도들이 다 우러러보는 존재, 성도들이 몸이라면, 지체라면 머리가 예수님 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머리에 해당되는 위대한 분이란 뜻도 있어요. 그래서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위대한 존재, 그래서 십자가에 들리신 거예요. 동서남북에서 우러러보는 위대한 존재, 그래서 동양에서는 그렇게 동서남북에서 우러러보는 위대한 존재를 황극 이라고 부릅니다. 임금 황자 써서, 임금 황자에 꼭대기 극자, 동서남북에서 바라보는 꼭대기라는 거에요. 여기 이런걸 생각하세요. 피라미드 같은걸, 동서남북에서 다 올려다 보이는 그 꼭대기 있죠. 꼭대기 극자, 극이라고 하는데, 극점 이라고 하는데 황극은 인극이라고도 해요. 사람의 극, 사람 중에 제일 꼭대기인 사람, 이게 예수님이 말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예요. 사람 중에 최고의 사람, 사람의 아들, 동양에서 황극, 그러면 황은 임금 이란 뜻이니까 메시아 라는 뜻입니다. 황극은 성경 식으로 말하면 메시아예요. 메시아가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성령에서 나온 말이니까, 유교식으로 양심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대로 진리가 되버리고, 법이 되버리고,

[가르침이 되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 입니다]

동양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요. 동양의 하느님 이에요.

[천제의 가르침 입니다.]

천제 뜻을 대행하는 황극, 메시아가 하는 위대한 성인군주, 동양에서는 성인군주 입니다. 도덕적인 성인군주가 하는 말은 그대로 법이 되버립니다. 왜? 안으로 성인이고 권력으로 임금이니까, 안그래도 임금 말을 우리가 듣게 되어 있는데, 임금이면서 동시에 양심이 제일 밝은 사람이에요. 광명한 빛의 등불이예요. 그러니 그 말 안들을 수가 있나요? 그 사람이 말을 해버리면 그대로 율법이 되버리고 가르침이 되버립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대저 여러 백성이 황극이 하는 말을 가르침으로 삼고 실천하면 천자의 광명함, 그 황극의 빛에 가까워질 겁니다.]

동양에서도 그런 위대한 메시아는 광명한 빛이 난다고 봤어요. 빛의 존재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 빛에, 그 천자의 빛, 천자는 메시아죠. 메시아의 빛에 가까워질 겁니다.

[천자께서는 백성의 부모가 되시며 천하의 왕이 되십니다]

그럼 왕이면 제대로 메시아죠. 천하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진정한 메시아, 인류를 다스릴 왕이 되려면 도덕적으로 동서남북 어디서 봐도 광명해야 된다. 이런 주장을 편 겁니다.

그 천하 왕 사상을 이어받은 게 공자, 맹자인데 맹자의 가르침에 이런게 있어요.

[천하에 중심에 우뚝 서서]

이게 또 우뚝 서야 되는 이유가 그래야 동서남북 백성들이 다 본 받을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자신의 행실로 모든 동서남북 사람들이 모두 본받게 만들어서

[동서남북 백성을 다 안정시키는 게 군자가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은 거다.' 이겁니다. 군자가 하고 싶은 건 뭐예요? 천하에 중심에 서서 사해, 모든 동서남북 백성들이 도덕적으로 광명해지게 만드는 것, 빛의 사람들이 되게 돕는 것, 이게 유교에서 말하는 보살도 입니다. 기독교의 보살도, 유교의 보살도, 불교의 보살도, 불교의 보살도는 뭐죠? 자리이타, 내가 성불해서, 내가 부처가 되서, 동서남북 모든 인류가, 중생이 우러러 볼 수 있는 부처가 돼서 그 광명한 그 양심, 보리심, 도덕으로 모든 중생들을 빛으로 인도합니다. 자리이타, 그렇죠? 성불제중, 부처가 돼서 중생을 구제한다. 이 얘기나 지금 다 같은 얘기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중심에 우뚝 서려면 높은 언덕 위에 서야 높이 서겠죠. 높은 언덕, 토대가 높으면, 내 에고가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으면 보이겠죠? 그러면 성령 위에 서있어야 돼요. 성령의 토대, 높은 언덕 이라는 것은 성령의 토대입니다. 성령의 토대 위에 에고가 집을 지으면, 혼과 육을 거룩하고 광명하게 만들면 여러분도 그런 인자 같은 존재, 성자 같은 존재가 돼서, 내가 아주 높진 않더라도, 그렇죠? 나보다 더 낮은 이들에게 빛을 베풀어 줄 수 있겠죠.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겠죠? 이런 존재가 되자.

이런 내용으로 오늘 도마복음 마무리 할게요. 도마복음 얘기랑 다른 동양철학들의 내용과 또 기존 복음들의 내용을 잘 제가 지금 섞어서 말씀 드릴 겁니다. 이렇게 들으시다 보면 도마복음이 얼마나 진리 기반한 경전인지 알 수 있어요. 복음인지 알 수 있어요. 영지주의자가 만들어 냈니, 뭐니 그런 헛소리 듣지 마시고 예수님의 원 육성을 제대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