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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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8일 (월) 18: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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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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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천국을 찾는 것을 멈추지 말라!
강의일자 2020. 01. 04. 土.
게시일자 2020. 02. 16.
동영상 길이 1:07:01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i4w_82bsdoU


도마복음은 이런 얘기하기 좋습니다. 성경인데 불경같은 성경이고, 도경같은 성경이고요. 자! 이 그림 보시죠. 영, 영은 뭐라구요? 영 그러면 항상 성령입니다, I AM. 이 정도까지는 항상 같이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의 영이 쉬운 자리가 아니예요. 왜냐? 여러분은 혼만 알고 산단 말이예요. 혼의 세계, 육의 세계 그러니까 육이 여러분 혼을 자극합니다. '먹어라, 저거 보고 싶지 않냐? 듣고 싶지 않냐? 먹고 싶지 않냐? 만지고 싶지 않냐? 맛보고 싶지 않냐?' 고 자극을 주면 어떻게 하겠어요? 혼이 끌려가죠. 이 자극에 취약하죠. 왜? 자극이 강렬하거든요. 엄청난 쾌락을 보장해 주거든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걸 혈육의 자녀라고 하는 거예요. 혈육에 끌려다니 잖아요. 혈육의 자녀,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취약하게 살고 있냐? 영을 몰라서 그래요. 영이 육체만큼 여러분에게 자극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혼은 당연히 영도 따라가죠. 영만 따라간다고 못하겠지만 영으로부터 강렬한 자극을 받으면, 성령의 자극을 받으면, 여기에(혼) 끌려가는 만큼 여기에도 (영) 끌려가겠죠. 중생들이 원하는게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극 좀 줬으면 좋겠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소원이죠. '하나님이 나타나서 딱 한번만 한번이라도 괜찮으니까 한번만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진짜 열심히 믿을텐데' 왜? 날마다 육에 끌려가니까요. 이게 영을 만나버리면 24시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이 어려운 자리입니다. 영이 성령 자리고, 그래서 영을 만나면 이 혼은 변화합니다. 혼이 영에 끌릴 때 하나님 자녀 그래요. 수없이 말씀 드렸고요. 자! 그런데

여기서 말씀 드리는 것은 혼의 성화입니다. 자! 영을 각성해야 돼요. '영의 각성' 이게 성령 체험이라는 거고, 혼은 어떨까요? 혼의 성화, 혼은 성화 되어야 합니다. 영의 각성을 '칭의' 라고 그래요. 영이 등장하자마자 혼은 영의 지배도 받기 때문에 아직 육에 끌리지만 그렇든 어떻든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됐거든요. 아직은 타락했던, 돌아온 탕자인거죠. 돌아온 탕자인데 돌아는 왔는데 방탕했을때의 습관이 꽉 차있는, 아버지 집에 와서도 예전 놀던 가락이 몸에 그대로 익혀있는, 그런데 돌아왔으니 의롭다고 칭해 준거고, 성화가 필요한 이유가 이겁니다. 못된 습관을 못버렸어요. 그렇죠. 과자도 이렇게 먹고 (동영상 참조) 새우깡을 이렇게 먹고 있단 말이예요. 그럼 이게 뭔가 제대로 집에 돌아온게 아니잖아요. 먹다가 새우깡 막 이러고 있고, 그러면 아직 돌아온게 아니니까 성화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육의 부활까지, 이게 아까 부활체죠. 이러면 끝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돼요. '성화가 다 끝나고 부활 하나보다' 가 아니예요. 성화의 답을 얻을 정도에서 부활이 가능해 지는거고, 성화는 끝이 없어요. 칭의도 끝이 없는 거고, 부활도 계속 같이 가는 겁니다.

부활체, 예수님의 부활체 더 영광스러울 겁니다. 예수님의 성스러운 마음 끝이 없이 성스러울 겁니다. 예수님의 그 의로움도 끝이 없을 겁니다. 이 세개는 완벽을 향해 갑니다. 그 궁극의 경지를 카톨릭에서 주로 뭐라고 합니까? 완덕의 경지라고 그래요.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하나님과 같아지는 경지. 인간으로써 하나님과 같아지는 경지. 이 경지까지 꼭 가라고 누가 당부했냐?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반드시 우리는 이 경지까지 가야 된다' 에베소서에서 나와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그 경지까지 우리는 가야 된다' 그러니까 바울을 오해하고, 바울은 그냥 '믿습니다' 로 끝난 분이라고 하면 바울은 섭섭하죠.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수준이 하도 떨어져서 유치부 강의만 하고 다닌 거예요. 자기가 하소연 해놔요. '당신들은 지금 단단한 걸 씹을 때가 아니다. 유치한 것 밖에 내가 얘기를 못한다. 십자가, 부활 이런 것 밖에 말 못한다.' 그런데 이게 바울 신앙의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했냐면 '이런 유치한 교리 밖에 내가 말 못하고 다닌다. 우리들끼리도 성숙한 사람들끼리는 지혜를 얘기하는데 그 지혜 라는게 뭐냐? 스스로 선악을, 하나님 뜻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신약의 시대가, 천국이 펼쳐지거든요. 성경에 다 근거 있습니다. 그런 강의는 예전에 많이 해드렸고,

자! 오늘의 도마복음은 2절 '찾는 걸 멈추지 마라' 지난 시간에 안오신 분들도 있으니까 이걸 읽고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국을)》

이건 제가 넣은 겁니다. 그냥 찾는 자들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냥 천국입니다. 성령이자, 천국을

《찾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 성령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두가지가 있어요. 본질로서의 천국이 있고, 혼육까지 다 성스러워, 여기 (혼) 성스러워지고, 여기 (육) 부활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도 천국이죠. 여기는 현상으로서의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들이 또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에클레시아, 교회, 성도들의 모임, 그게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천국도 가능하죠. 개인이건 공동체건 그건 현상으로서의 천국이고, 예수님 4대복음 안에서 천국을 얘기할 때 본질과 현상을 아울러 얘기합니다. 현상으로서의 천국도 있고 '천국이 이제 왔다' 할때 바리새파한테 이런 말 하신적도 있어요. 누가복음 인가요? '천국이 어디오느냐?' 하니까 '이미 너희들 안에 와있다' 그럼 그 바리새파들은 지금 혼이 거룩해졌나요? 육이 부활했나요? 하나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미 와 있데요. 뭐가 와있을까요? 성령은 이미 사람들에게 임해있다는 얘기를 거기서 그렇게 분명히 하십니다. '이미 천국이 그대들 안에 있다.' 이때는 본질의 천국을 얘기하시는 겁니다. 지금 도마복음에서 나온게 아니고 4대복음 이예요. 도마복음은 그런 얘기를 더 많이 해주고 있을 뿐이지 4대복음하고 다른게 아닙니다. 자! '성령을 (본질의 천국) 찾을 때 까지 멈추지 마라' 이게 다른 4대복음에 있는 이거랑 통하는 말이예요. '찾아라 얻을 것이다' 그렇죠. '두드려라, 찾아라, 열심히 찾아라 반드시 얻을 것이다' 성령은 찾으면 왜 반드시 얻을 수 있는지 아세요? 이미 가지고 계시거든요. 자! 이미 가지고 계신게 아니면 얻을 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찾으면 반드시 얻으리라' 는 말 못합니다. '찾으면 반드시 얻을 것이다.' 왜? 여러분이 들고 있거든요.

이런 사람에게는 얘기할 수 있겠죠. '빨간펜을 찾아라 반드시 얻으리라' '어떻게 얻는거죠?' 갖고 있으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되니까,

그래서 이 얻음은 반드시 얻는 얻음입니다. '찾아라 반드시 얻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찾을 것이다.

《그들이 발견했을 때,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성령을 찾고나면 이 혼이 혼란에 빠집니다. 보세요. 한 혼은 성령을 맞이해서 성령 뜻대로 살려는 하나님 자녀의 마음이 있을거고 또 성령 만났다고 육이 없어 지나요. 아니잖아요. 혈육에 끌려가는 마음이 또 있을 거거든요. 죄의 종으로서의 마음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음이 충돌합니다. 이게 혼란이예요. '혼란이 온다.' 그 혼란이 아마게돈 이예요. 영적 전쟁이 여러분 내면에서 벌어집니다. 그걸 상세히 써놓은게 로마서예요. 내 안에 내 마음이 성령의 법을, 이 성령의 진리가 성령의 법이죠. 성령의 법, 성령의 진리, 이게 다른 말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영이고 우리의 본판이예요.

창세기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여를 만들었다' 이랬거든요. 하나님이 남자처럼 생겼습니까? 여자처럼 생겼습니까? 이 말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 여자를 만들었데요. 하나님이 그러면 중간에 다 갖추고 있는 몸일까요? 아니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영 이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여를 만들었다는 걸 육체적으로 보시면 안돼요.

하나님은 영 입니다. 영의 진리, 사랑의 진리, 성령의 법이 우리 영의 본질이예요. 그 본질대로 우리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본질대로만 살면, 하나님 형상대로만 살면 사랑, 정의, 겸손, 지혜 이런게 터져 나와야 돼요. 그래야 에덴 동산에 살 자격이 있는데 우리는 쫓겨났단 말이예요.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우리는 쫓겨났어요. 그래서 혈육의 자녀로만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영을 찾아야 우린 에덴 동산에 다시 들어가죠.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고 원래 창조한 본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진리의 영, 성령을 찾아야죠. 그래서 성령이 진리의 영인 이유가 진리를 품고 있어서 그래요.

제가 이렇게 그리죠. 영에 십자가의 진리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쪽이 사랑, 정의, 겸손, 지혜 그렇죠. 이거 유교에서 가져온 겁니다. 밝혔으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 유교 아냐? 네' 자! 진도 나갈께요. 산상수훈 인문학 이라는 책에서 근거를 댔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얘기할 때 딱 이 얘기를 합니다. 신기하죠? 유교도 얘기하고 구약도 얘기하면 웬만하면 진리인거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영을 만나고 나니까 혼이 이제 남을 사랑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남에게도 겸손하고, 늘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살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뭐예요?

이건 불교에서 가져 왔습니다. 탐진치, '이거 불교 아냐?' 맞아요 그런데 뭐 인간이 다 이렇게 생겼지 다르게 생겼나요? '나는 서양 심리학 공부 못하겠어. 왜? 동양 심리학이 아니잖아' 이러면 이상하죠? 심리학이 심리학이지. 인종따라 심리학이 다릅니까? 대동소이 하죠.

그래서 탐진치 여기 끌려가 버립니다. 설명하기 너무 좋아서 그래요. 정리를 너무 잘해놔서, 왜냐? 성경에 가면 혈육의 자녀 마음이 오만가지가 다 써있거든요. 이기, 질투, 분노 이러면 탐진치면 바로 설명이 되니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끝 입니다. 이 둘이 싸워서 난리가 나니까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혼란스럽게 될 때 놀라게 될 것이며,》

그런데 이 혼란 속에서도 성령의 힘으로, 자! 이쪽 하나님 자녀의 마음을 양심이라고 하고,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면 속사람이라고 하고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이 탐진치의 마음은 겉사람이라고 하고, 욕심이라고 하자면 사도 바울 말처럼 겉사람은 쇠퇴하고 속사람은 강건해지며 이쪽이 51% 이상이 되죠. 그러면 이제 재미난 일이 벌어집니다. 놀라게 되지만 결국에는 뭘하게 돼요.

《그들은 모든 것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51% 이상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예수님처럼 안식이 올것이다.

사실은 이정도 되면 성자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성령 찾았을 때부터 성도구요.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그리스도의 경지에 도달하는 거예요. 완덕의 경지로 가는 겁니다. 그리스도 만큼의 완덕은 아니더라도 온전한 빛에 온전한 자녀가 되기 때문에 완덕의 경지에 가까이 가는 겁니다. 어떠세요? 느낌 오시죠?

이거 들으신 걸로 기독교의 모든 구원관은 다 끝난 겁니다.

(아마게돈) 아마게돈도 여기서 벌어져요. 여러분 내면에서 벌어지고 이 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와 하나님 사도들 간의 전쟁입니다. 이 사회 안에서 혈육의 자녀가 뭐예요? 소시오패스들이요. 자기 살자고 남 짓팗는 애들, 개들이 주적이예요. 하나님 사도들은요? 하나님 안에서 나와 남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나 살자고 남에게 죄 못짓는 사람들과 나 살자고 남 짓밟는 사람들의 전쟁이 아마게돈 입니다.

여기서, 이 사회에서 지금 양심꾼들이 욕심꾼들을 이기고 있나요? 못이기고 있는 것 같죠? 바로 강건너 국회쪽에 소시오패스가 많을까요? 진짜 양심 주의자가 많을까요? 그거 보면 알죠. 우리가 마구니들, 이거 불교 용어인데,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구나, 여러분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소수의 양심꾼들 있다고 해도 주된 세력이 51% 이상이 만약에 죄의 종이 뭡니까? 사탄의 종이거든요. 사탄의 종, 혈육의 자녀, 탐진치로 무장한 남 짓밟고도 올라가는 애들이 강자 거든요. 고등침팬치들 사이 에서는 강자 입니다. 왜? 양심있는 고등침팬치들은 차마 그짓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해버려요. 이 사람들은 못쓸 카드가 없거든요.

그래서 선량한 고등침팬치가 밀려요. '에이 더러워서, 똥이 뭐 무서워서 피하냐 더라워서' 사실은 무섭고, 더럽죠. 무섭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고, 그럼 피하는 거죠. 안무서우면 이런 얘기도 안하죠. 뭐하러해요. '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지금 그 얘기는 무섭다는 얘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권력은 누구한테 가요? 자꾸 자꾸 소시오패스들에게 갑니다. 선량한 고등침팬치들은 뒤로 빠져버리고 빠져버리고, 은거하고, 봉쇄하고 '난 소시오패스들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하고, 사실은 영성이 나약하죠. 예수님의 영성은 아니죠. 예수님은 가서 성전 뒤집고, 지금 국회가서 누가 뒤집어야 돼요. '누가 우리 아버지의 신령한 대리인의 집을 더럽히는가' 하고, 바로 끌려가겠죠.

(교회의 영적 전쟁) 그러니까 이게 지금 이 시대의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영적 전쟁하자고 선포하는 분들 보면, 제가 볼때 이상한 거예요. 사탄의 종들이 주로 영적 전쟁을 하자고 그걸 외치더라고요. 그러니까 될리가 있습니까? 거기 사령관들이 이미 사탄의 로비를 받고 있는 애들인데 이 전쟁은 싸워봤자 지는 거죠. 주의 군대인줄 알고 들어가 보면 거기 다 사탄의 군대예요.

그런데 그렇게 수만 가지고 따지지 마시고 성령의 힘을 믿으신다면, 왜냐하면 예수님만 해도 성령을 찾아도 한 개인 안에서의 변화도 혼란스럽고 놀랄 거라고 했잖아요. 이거 쉽지 않거든요. 그럼 여러분이 예수님같은 성자가 등장해도 그 사회에서 받아들일까요? 안받아 들였잖아요. 예수님도 안됐던 일이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정복해서 안식을 취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이 '초림때는 못하겠다. 재림때 해주마' 초림때는 여기까지 이번판은 나가리다. 재림때는 더 병력을 데리고 와서, 왜냐 쪽수가 중요하거든요. 소시오패스보다 사도들의 쪽수가 많아야 돼요.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혼이 성화된 존재들이 더 많아야 돼요. 왜 지금 안된다는 거냐? 없거든요. 성령 안에서 혼이 성화된 존재들이 지금 많으면 그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 이 사회가 변합니다. 그런 부분,

개인의 변화와 전체의 변화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 드려본 거예요.

개인의 변화만 생각하지 마세요. 사회 전체의 변화도 이 원리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에 오셨을 때 '아, 이 판은 아니다.' 왜냐하면 딱 했더니 그 사회의 제일 지도층인 바리새파들, 바리새파들이 지금 국회의원 역할까지 다 하던 종교 지도자들 이예요. 공회 하나가 거기서 모든 의사결정을 합니다. 거기서 입법, 사법, 행정을 맡아서 하던데예요. 국회만이 아니라 사법기관이기도 하고, 처벌도 하고, 로마랑 적당히 업무분담 해서 왠만한 입법, 사법, 행정을 담당하던 기관이예요. 거기에 바리새파들이 많았다구요. 그러니까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들이 거기를 차지하고 있었단 말이예요. 그럼 그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들인데 이 존재들이 소시오패스로 꽉 차있고 예수님 말 안듣고, 예수님 말 듣는 사람 누구예요? 어부, 세리 이런 사람들, 여러분이 생각해도 될 판이 아니죠. 거기다 로마 식민지배까지 받고 있어요. 될판이 아닌 거예요. 왜냐 이게 되려면 이쪽도 어마어마한 자기 병력도 있어야 돼요. 이쪽도 쪽수가 있어야 돼요. 쪽수 비교해보면 나옵니다. '안되겠구나' 성인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 왜? 이건 문화가 바뀌어야 되고, 사회 시스템이 바뀌는 문제기 때문에 성도들이 많아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불은 질렀지만 '이 불이 타오르려면 최소 2,000년은 걸리겠구나.' 그래서 나중에 재림할때 '그때 제대로 영적 전쟁 붙어서 우리가 승리하자' '하늘의 병력, 천사들 데리고 와서 제대로 추수해주마' 라고 예언 하신거죠. 물론 유대인들이 그런 예언을 미리 믿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본인의 뜻을 표현한거죠. 정확한 속뜻은 모르지만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반드시 그런 세상, 지상 천국이 열리게 할 것이다' 이런걸 이해하시고 성경을 보셔야 이해가 쉽습니다.

오늘 교재에도 있어요. '내가 불을 지피러 왔다. 불은 지폈는데 이게 타올랐으면 좋겠다. 타오르려면 몇천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 사실은? 지금 2,000년 지났는데 예수님 때보다 불이 더 타오른 것 같나요? 양적으로는 그렇죠. 편의점보다 교회가 더 많아요. 그럼 이미 지금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 나라는 지상 천국 이어야 돼요.

(홍익학당) 교회가 서로 골목길 마주보고 있어요. 저는 항상 돌아다니면서, 저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교회, 성당 이런데 관심이 있거든요. 저희 홍익학당의 성장 이런 측면에서도, 이런거 많이 느꼈어요. 한 10년을 했는데 '개척교회만 못하구나.' 이럴때 무력해질때 있어요. 뭐냐하면 이런 거예요. 홍익학당이 지금 전국 부산에 하나, 서울에 하나 두개 생긴 것도 최근 일이죠. 전세계 하나 있는 거예요. 부산에 없을 때도, 부산 생긴 뒤라고 더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만, 전세계 하나 있는데 동네 교회만 못한거예요. 이럴때 어떤... 느낌 있으시죠? 전세계 하나 있는데 동네 교회만 못할 때, 뉴타운 거기만 해도 대형 교회들이 엄청 많아요. 길 마주보고 있어요. 저는 걱정도 되고 부럽기도 하고, '어떻게 조달하는거야?, 어떻게 이게 되지? 어떻게 돌아가지?' 재미있죠?

자! 다시 돌아올께요.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 정도는 고민하고 사셔야 돼요. 내가 성령을 받아서 나부터 영혼육을 천국에 집어넣고, 천국의 개척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성령만 받아도 성령이 내 안에 안착하면 뭐라고요? 영주권, 천국의 영주권은 나온 양반이다. 왜? 성령이 천국인데 성령이 내 영혼에 자리를 잡았어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어요. 이미 이 분은 천국 분이죠. 영생을 육의 부활까지를 영생이라고 한다면 이 분은 영생의 보증을 받은 분이고 영원한 생명인 성령과 하나가 됐다는 측면에서는 이미 영생 얻으신 분이예요. 두가지 측면을 다 아셔야 돼요. 거기에서 혼까지 거룩해졌다, 완벽하지 않지만,

자! 이 차이는 아셔야 돼요. 제가 말씀드린 이 성화는 예수님의 성화의 경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분만 되도 이긴자, 기도교에서 많이 얘기하죠 '이긴자 되라, 이긴자 되면 영생을 얻는다.' 이긴자도 아직 부활 못했어요. 요한계시록에 이긴자들에게는 흰 옷을 주겠다. 흰 옷이 부활체를 상징합니다. 에너지를 흰옷이라고 그래요.

魄, 魂 신기합니다. 동양에서 에너지체가 한자로 뭔지 아세요? 백魄자 입니다. 흰 백白자 들어있죠. 백이 하얐다고, 그래서 흰 옷을 입는다는 건 부활체예요. 백魄이 에너지체예요. 여러분 몸 안의 있는 경락을 백魄이라고 그래요. 혼魂은요? 구름 운云자 써서 구름처럼 형체가 없다고 혼이라고 하고요. 백은 색깔이 더 또렸하다고 백이라고 합니다. 혼은 여러분의 인격 영혼이고, 백은 에너지체다.

(달걀 비유) 제가 이런 비유도 드렸죠? 달걀 껍질이 육체, 달걀 껍질 안에 붙어있는 하얀 막이 백, 혼은 그냥 달걀 흰자, 영은 달걀 노른자, 달걀 까면서 영혼백육에 대해서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비유가 너무 좋은게요. 백하고 에너지체 경락하고 (우리 에너지체는) 한덩어리입니다. 세포 하나하나 에너지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 깔때 보면 달걀 껍질이랑 그 막이랑 한덩어리로 잘 붙어있죠? 그 느낌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달걀을 까서 흰자와 노른자만 나오면 죽은 거예요. 영혼만 남았잖아요. 죽은 상태고, 껍질은 없는데 막은 하나 가지고 있으면 이게 영생의 몸을 얻은 겁니다. 껍질은 언제고 깨지는 사멸하는 육체를 상징하고, 달걀 막을 부활체라고 진짜 믿으시면 안되고 그냥 비유예요. 그 사이에 있는 뭔가 또 다른 몸이 있어요. 그 몸을 얻으면 영생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 안죽잖아요. 영혼육이 온전해져 버리잖아요. 여기서 내 육체는 이미 죽었어요. 육체는 사멸하는 겁니다. 육체가 죽고, '죽어야 알곡이 얻어진다' 이거예요. 그래서 죽고 살아남은게 영적인 육체입니다. 대충...

아, 중요한거 설명이 안된게 이거죠. 그래서 요한게시록에 '이긴자가 되면 흰 옷을 받는다' 는 것은 이긴자는 천국의 시민권자 입니다. 그 예를 어떻게 들 수 있냐? 사도 바울이 '나의 육체는 로마의 시민이지만, 안으로는 천국의 시민이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 바울도 소원이 뭐였어요? 영적인 부활체 입는게 소원 이었어요. 바울은 이건 하나님이 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 요한계시록도 똑같은 문제를 얘기합니다. 성화, 이긴자가 되더라도 부활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거예요. 영화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거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도마복음은 그렇게 얘기를 안하는 거예요. '네가 직접 영화를 성취하라' 고 얘기하는게 도마복음 이예요. 이래서 지금 4대복음만 믿는 분들이 도마복음을 보면 충격 받는게 이런 내용입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가 나옵니다. '영생도 네가 직접해라' 는 거예요. 물론 직접하는게 아니죠. 성령이 해주는 거죠. '살아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네가 노력해서 만들어라.' 는 겁니다. 그거는 다음에 설명하고,

이긴자만 설명 드릴께요. 이미 성화를 얻어서 이긴자면 완덕의 성화랑 무슨 차이냐 이거죠. 무슨 차이 일까요? 아까 '정복하리라' 그랬죠. 정복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성화는 정복한 성화예요. 욕심의 세력을 정복해 버렸어요. 욕심이 없는게 아니라 욕심이 절대로 성령의 진리를 실천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제압해 버렸어요. 완전히 종 부리듯이 할 수 있는, 제압해 버린 경지예요. 욕심이 없는건 아닙니다. 혈육이 있는 한은 어쩔 수 없어요. 예수님도 배고프면 느껴야 되잖아요. 그건 욕심이잖아요. 그런데 그 욕심 때문에 죄를 짓지는 않는단 말이예요. 정복해 버린 분이고, 이긴자는 정복한 건 아니예요.

(고지전) 고지전 생각해 보세요. 고지전에서 깃발 꽂으면 이겼죠? 하나님 자녀가 한번 이깁니다. 이정도만 되면 성화의 경지예요. 혈육의 자녀가 바로 다음날 이겼어요. 이쪽 51%를 누가 먹느냐 예요. 헤게모니를 혈육의 자녀가 잡았어요. 자! 그러면 하나님 자녀 측에서 어떻게 할까요? '졌다' 이러면 이긴자가 아니죠. 다음날 다시 이겨놓는 거예요. 그래서 이긴자는 결국 이긴자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결국 이긴자' 아무튼 결국 이길자, 무조건 지면 다시 이겨놓을 수 있는 정도의 거룩함을 확보한 양반들이예요.

(1지보살) 이게 불교로 치면 1지보살의 경지입니다. 칭의는 1주보살 정도면 돼요. 이거는 절에서 '화두 터져서 확철대오 했다' 가 이 정도입니다. 이 분들은 성화는 몰라요. 지금 우리나라 고승들이 성화 몰라요. 견성만 알아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 받는 법만 알아요. 화두 터지면 성령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만 알아요. 이걸로 확철대오라고 그래요. 칭의만 얻어놓고 다 됐다고 하는거랑 똑같아요. 육바라밀을 진짜 잘해서 인격까지 갖춘 양반이 1지보살입니다. 우리나라 고승중에 1지보살이 없습니다. 육바라밀을 갖춘, 고메한 인격까지 갖춘 견성자 떠올려 보세요.

(2지보살) 거기에서 더 나가서 육체까지 부활한다는 것은 티벳에서 강조하는 '의성신' 이죠. 불교에서 영원한 보신이라고 하는데 그것까지 얻은 자인데 이거는 2지보살은 되야 참나와 에너지가, 성령과 성령에너지가 한덩어리가 되듯이 그런 구슬을 얻게 되는게 2지보살 입니다.

이런 내용은 제가 번역한 화엄경에 다 써있습니다. 거기 1지, 2지 찾아보시면 다 써있습니다. 이거는 불교에 이미 학설이 다 있는 겁니다.

기독교랑 불교는 엄청 잘 맞아요. 문제는 뭐냐? 둘이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아요. 적대시 해요. '지옥가면 스님이 먼저 가겠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예요. 이쪽에서는 '지옥가면 목사가 먼저 가겠지' 이렇게, 둘이 서로, 제가 볼때는 같이 가기 쉬워요. 탔는데 옆에 딱 '아유~' 왜냐? 견성 못했는데 한것처럼 굴면 그게 원래 악업이거든요. 성령 못받았는데 받은 것처럼 굴면 예수님이 제일 저주했던게 그런 사람들 이거든요. 성령 못받았는데 받은 것처럼 군 바리새파들, '사탄의 자식들아' 하고 욕먹었으니까 지옥을 가도 제일 먼저 가는게 맞죠. 지옥을 가도 사탄의 자식들이 먼저가야 하지 않나요? 사탄의 자식들이면 거의 영순위 아니예요? 종도 아니고 자식이면 그냥 가야죠. 거의 후계자, 상속자 잖아요. 그럼 가야죠.

이런식으로 이해하시면, 이상하게 진도는 못나갈것 같은 느낌 강력하게 드는데요. 오랜만에 이런 얘기도 좀 해봤습니다.

(이긴자와 성화) 이긴자 느낌 오시죠. 여러분 이긴자 될 수 있어요. '저는 늘 지는데요' 괜찮아요. 결국 이긴자가, 지는데 반드시 다시 이기면 돼요. 이건 핵심이 뭘까요? 이기는 법을 아는 자예요. 이기는 법을 아는자, 성령 안에서 선악을 식별할 수 있고 뭐가 악인줄도 알고 뭐가 선인줄도 알아서 악의 유혹이 강력하지만 끌려갔다가도 결국은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정도의 공부는 한사람, 성화를 그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제가 그때 요한계시록을 강의 다 해드렸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화를 통해 이긴자가 딱 그 수준 이었다. 처절하게 투쟁해서 겨우 결국 이기고 또 이기고, 짐승한테 한대 맞으면 헬렐레 하다가 다시 정신차려서 또 이기고 하는, 그런 정도의 이긴자지 예수님처럼 이긴자가 아니란 말이예요. 그 차이는 분명히 이해해 두시면 그럼 혼이 성화된다는 이 그림 이해되시죠.

지금 이 혼이 성화 된다는게 지혜, 사랑, 선행 세측면, 지적으로는 지혜를 얻고, 혼이 거룩해 진다는게 뭐냐? 사랑을 실천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을 실천하려면 지금 이거잖아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사랑을 실천하고, 지혜, 지적으로 선악을 알고, 선악을 알아야죠. 그리고 선인 사랑을 실천하고 나머지 좋은 덕목들도 실천하는, 그래서 이쪽은 (겸손, 정의) 실천에 담았고 이쪽은 (사랑) 같은 실천이지만 이쪽은 사랑이라고 더 뺐습니다. 지혜와 사랑이 중요하니까요. 지혜와 사랑, 그리고 수많은 좋은 덕목들의 실천, 정의의 실천, 겸손의 실천, 믿음의 실천... 사랑, 정의, 선행, 온갖 선한 행위들, 이 세가지 측면에서 혼이 거룩해진다. 지혜롭고, 남을 나처럼 사랑하고, 나와 남을 위한 모든 옳은 일을 다 실천할 수 있는 그런 혼, 그런 혼이 되는게 혼의 성화죠.

자! 2번 각주 보실래요.

[단순한 ‘영적 각성’ 즉 ‘성령의 각성’만으로는 우리 안의 ‘죄’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원죄原罪’가 사해질 뿐이다]

여러분 지금 여기서 성령을 만나시면 죄 하나가 사해진 거예요. 이건 유대인식 관념 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데, 유대인식 관념으로는 뭐예요? 하나님을 우리가 왜 모르게 됐어요? 아담이 이브때 원죄를 지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하고 사이가 멀어진 거예요. 다시 하나님의 성령을 만났어요. 그럼 여기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견성을 했는데, 견성을 했다는 얘기는 내 본래 모습을 몰랐는데 본래 모습을 찾았어요. 원죄가 사해진거예요. 지금 어떤 스님이 견성했다고 그러면 거기가서 제가 '원죄가 사해졌군요.' 그러면 못받아 들이시겠죠? 문화와 전통이 달라서 그런거지 같은 소리입니다. 그걸 '원죄가 사해졌다.' 그런데 원죄는 사해졌는데 이 혼이 당장 성령의 형상대로 못해요. 남을 나처럼 사랑도 못하고, 선악을 판단도 못하고, 겸손도 못하고, 정의로운 짓도 못한다. 그럼 이 혼은 아직 타락한 혼이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수 없는 혼이죠. 그래서 성화 공부가 시작됩니다. 늘 성령 안에서 감사, 기도하고 기뻐하는 중에, 성령 안에서 해야 돼요. 아니면 바리새파 처럼돼요. 바리새파는 성령의 도움 안받고 자기가 사랑하고,

탈무드의 최고 진리가 뭔지 아세요? 탈무드의 최고 진리? 네가 당해서 싫은걸 남에게 하지마라.

결론은 똑같아요. 그런데 이걸 성령 안에서 해야지 사랑이지 에고가 하면 자기 위주로 합니다. 이 판단 자체도 자기 위주로 해요.

(이상한 황금률) 어머니들이 자주 자녀들에게 그러시죠. '내가 다 판단해 놨어, 너에게 뭐가 이로운지' 그럼 이게 황금률에 맞는거 같지 않으세요? 자녀 입장이 되서 자녀에게 필요한 걸 이미 내가 다 판단했다. '이거해라' 그런데 자녀가 거부를 한다. '난 너를 위해서 했는데 너는 거부하느냐?' 이런 싸움이 오가죠. 이게 황금률 같은데 약간 이상한 황금률이 돼요. 똑같아요.

에고가 해버리면, 혈육의 자녀가 하는 황금률은 흉내내는 황금률이라서 뭔가 사심이 껴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나중에 그 사심 낀 부분 만큼 다 문제가 터집니다. 그때가서 하늘을 원망하고 뭐 해도 분명히 일은 터지게 되어있어요.

(공식대로 굴러간다) 왜? 공식대로 굴러가는 거예요. 이게, 공부를 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공식대로 우주를 운영하신다' 는 것을 알아요.

(사이비) '하나님이 맘대로 운영한다' 라고 주장하는 곳이 사이비입니다. 사이비는 왜 그럴까요? 우리 종교 다니면 하나님이 다 봐준다는 얘기를 해야 되거든요. 나를 통해 로비를 하라는 것을 강조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되게 나에게 약하시다' 이런식으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내가 하나님에게 지적하는 그런 입장이다' 뭐 이런 정도로, 최근에 어떤 목사님은 '내가 혼내줄 수도 있다.' 이런식으로 가잖아요. '내가 하라는데 안하면 내가 하나님 가만히 안두지' 이게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신자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끌어내려면 나만 믿어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보다 나를 믿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브로커가 점점 힘이 세지는 거예요. 사실은 브로커가 '하나님도 브로커 수중에 들어있다' 이런 얘기를 해야 더 많은 투자를 받지 않겠어요? 그것도 탐진치 공식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형상, 이쪽 따르는 것도 공식대로 진행돼요. 이렇게 되면 '뿌린대로 받으리라' 반드시 복을 받고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문제가 터집니다.

그 입장에서 바로 드릴 말씀은 아닌데 그렇게 연구를 해보시라고 제가 말씀 드릴께요. 저를 믿으시라는 건 아니고, 저도 저를 안믿으니까 저를 믿지 마세요. 제가 하는 말이 여러분 안에서 자명하면 그 자명한 부분을 믿으세요. 여러분 안의 성령이 인가한 그걸 믿으시라는 거예요. '오직 원죄가 사해질 뿐이다'

[(자신이 지은 범죄인]

자신이 지은 범죄를 본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라고 하기도 하고요, 자신이 스스로 범한 범죄라고 자범죄 아니면 본죄라고 합니다.

[‘본죄本罪’는 여전히 남아있음).]

여러분이 성령의 힘을 가지고 본죄들은 스스로 극복 하셔야 돼요. 그게 성화예요.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이런 얘기 안해준다고요, 이런 얘기 하면 신자가 줄어요. 다 사해진다고 해야지 '이건 안되는데요' 그러면 '어, 그러면 다른 가게 알아볼게요' '다른 교회 알아볼게요' 하고 간다구요. '저희 교회에서는 이건 안되는데요' 그러면 옆 교회에서는 '본죄도 사해집니다' 그러면 그리 갈거 아니예요. 그래서 이게 힘든 거예요. 진실을 알아도 얘기를 하면 본인이 그 교회에서 탄압을 받게 돼요. '이건 안되는데' 하면, 자꾸 영업 방해하면 그 직원 자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려다 보니, 서로 중생들이 다 그런거라 서로 이해는 해주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아야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런 건 피하시라' 이런 말씀 드릴 수 있겠죠.

로마서 보실래요. 로마서의 사도 바울이 이 성화의 현장에서 현실을 고백하는 부분 입니다.

[“나의 내심은]

이 영을 자각하는 혼은 어때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존재하여]

내 몸뚱이 안에 다른 법이 있다. 죄의 법이 있단 말이예요.

[내 마음의 법과]

성령의 법과

[대결하고 있으며,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을, 나는 봅니다.” (로마서 8:22~23)]

이 얘기가 뭡니까? 기독교 신자분들은 늘 체험하시는거 아니예요? '일요일날 교회 가야지' 했다가, '교회 안가고 다른 곳 가면 죽일텐데' 그러면 '죽일텐데' 가 죄의 법이 나를 확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일요일날 교회가는게 성령의 법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예로 든거예요. 신자분들이 겪는 그 현상에서도 이런 것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분이 더 분석을 하다보니 '일요일날 교회에 자꾸 나오라는게 죄의 법인데, 나의 진정한 성령은 일요일날 오히려 성령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다니라고 하는데' 그러면 또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럴때 이 답을 바리새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나왔을때 못넘겼어요. 안식일날 사람을 살리고 다녔을때 바리새파는 못견뎠습니다. '왜 교회 안나오고 그래' 수준의 말을 예수님에게 했죠. 그랬을때 예수님에게 호된 질책을 당했죠. 이해되시죠? 이렇게도 또 보실 수 있어야 돼요.

제가 특정 종교를 안갖는 이유가 자유자재로 '모두 까기' 하려고 안갖는 겁니다. 제가 불교 신자로 있으면서 기독교를 이렇게 까면 기독교가 어떻게 반응하냐면 '불교의 탄압이다, 음해다' 라고 나온단 말이예요. 저는 그런게 없잖아요. 그렇죠? 제가 또 불교를 비판하면 '기독교의 음모다' 이렇게 나와요.

자! 바울의 얘기 하나 더 들어볼까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마십시오.]

'육의 소리 듣지 말고 성령 따르십시요.' 사도 바울 머리 속에 이 구조가 확실히 있는거죠. '혼이여 성령 따라야지 육 따르지 마라' 이겁니다. 이게 속사람이 강건해 지라는 소리고, 겉사람 패퇴하라는 소리고, 하나님 자녀로 살라는 소리고, 혈육의 자녀 되지 말라는 소리예요. 지금 이 그림만 이해하시면 기독교의 복잡한 얘기 다 정리 됩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에 반대되고, 성령의 뜻은 육체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7)]

이 말은 과한 말 입니다. 예수님 같으면 이렇게 얘기 안하셨죠.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둘이 서로 상대된다고 얘기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먹고 마시는게 널 더럽히지 않아, 니 속에서 나오는게 더럽지' 이 말은 뭐냐면, 육체의 욕망을 따른다고 더러운게 아니라 예수님 입장은 여기에 사악한 마음을 보탰을때 더러워지는 거죠. 사도 바울은 너무 과격하게 얘기하신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육체의 입장과 성령의 입장이, 육체도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움직입니다. 육체의 입장이 성령의 입장과 대립하지 않아요. 육체의 자극을 받아서 혼이 오버를 떨면 그때 문제가 됩니다. 이해되세요? 그러면 문제가 됩니다.

☆ 죄는 누가 지어요? 혼이 지어요.

육체가 짓는게 아니예요. 보세요, 육체를 여러분이 지배하는 것 같으세요? 성령이 지배해요. 춥고, 더우면 땀구멍 열고, 닫고 여러분이 하신다구요? 여러분 닫히고, 열리는지 몰라요. 성령이 하는 겁니다. 성령이 터럭 하나, 머리 카락 하나까지 성령이 관리하는 거예요. 왜? 육체가 성령과 반대가 돼요? 말이 안되는 소리죠. 육체는 성령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는 건 누가 지어요? 혼이요. 혼이 지 욕심 챙기려다가 짓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육체의 자극을 받아서 혼이 돌아버릴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육체에서 먹고 싶다고 댕기는 건 에너지 넣어 달라는 거죠. 이거 성령이 보낸 건강한 신호예요. 그 신호를 받고 혼이 돌아버리면 문제인거죠. '와~' 해서 혼이 지가 막 폭식하고, 지가 막 계산해서 육체가 달라는 걸 주는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걸, 자기가 좋은 걸 주고 있으니 이게 문제인 거죠. 막 양심 어겨가면서 쳐먹고 있으면 그게 문제인 거죠. 이해되시죠? 남의 것까지 쳐먹고 있으면, '육체가 달래' 하면서, 육체 핑계대고 이상한 짓 하는게 문제인 거예요. 정확히 아셔야 돼요.

(정확한 해석) 그러니까 육체랑 성령이 반대된다는 것은 해석을 더 해야 돼요. 육체의 자극을 받아서 혼이 성령의 뜻에 반대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죠. 그거랑 성령의 입장이 반대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 속사람과 겉사람이 바로 싸우는게 아니라 욕심이라고 죄가 아닙니다. 욕심이 패퇴 하라는 것은 '욕심이 양심의 지배하에 있으면 문제가 없다' 는 거예요. 밥 먹고 싶어도 양심껏 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나는 이상하게 이성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해요. 양심적으로 처리 하시면 되는 거예요.

이 욕망을 없애려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면 사실은 성령하고 싸우는 거예요.누구랑 싸워요? 성령하고, 성령이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내 몸을 훼손해서라도 내가 의도하는 바대로 만들어야 겠군, 옛날에 그런 승려들도 있었어요. 성욕 이기려고 자기 성기 잘라내고, 뭔가 좀 이상하죠? 대단하죠? 대단하고, 고행인데 좀 이상하죠? '하나님이 그러라고 했을까? 우주가 성불할 때 막 잘라내고 해야되게 했을까? 이상하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부분을 정확히 아셔야 돼요. 성령과 육체가 대립한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행간을 잘 이해해야 된다. 육체의 자극을 받아서 성령에 대립하게 되는, (그 마음이) 한번 돌아버린 겉사람이 속사람하고 대립하는 겁니다. '야, 양심적으로 그러면 안되지 (속), 먹고 싶어 (겉), 양심적으로 네 것만 먹자(속), 아니 남의 것까지 먹고 싶어 (겉)' 이게 돌아버린 애죠. 이게 지금 성령과 대립하는 거예요. 육체가 바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욕망 핑계대고 오바하는, 더 나가버린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겨요. 이거 알아요.

그래서 예전에 중세 수도사들도 성욕이 올라와도 자연스러운 성욕은 죄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올라온 성욕에 내가 보탠 것 부터는 죄로 봅니다. 뭔 말인지 아세요? 자연스럽게 올라온 식욕이건, 성욕이건 죄로 보지 않아요. 그건 죄로 안봐요. 자연스럽게 올라온 욕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거라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거든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원래 수용하고 마는 겁니다. 이게 도인의 기본이예요. 그런데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 욕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거기서 황금률을 어긴 짓을 했으면 그건 죄가 되는 거예요.

(탐진치가 죄의 뿌리가 되는 이유) 그런데 주로 욕망들이 왜 죄의 뿌리가 되냐면, 이 욕망은 죄는 아닌데 죄의 뿌리가 되는 이유? 탐진치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게 죄의 뿌리가 되는 이유는 어리석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금방 양심을 어기게 만들어 버려요. 양심을 망각하게 잘 만들어요. 선을 잘 넘게 만드는 요소들 이라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만 골몰히 보다보면 금방 선을 어기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을 어겨버린 육체의 욕망은 성령과 반대된다, 이렇게 까지 이해하셔야 가장 원만 합니다.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이건 로마서입니다. 육체에서 오는 쾌락에 충실하게 살아가다보면 탐진치대로 살다보면

[죽을 것입니다.]

이 얘기는 어차피 다 죽거든요. 뭐냐면, 이 말을 누가 듣고, 친구가 '사도 바울 너 죽나, 안죽나 두고 보자, 이 자식이 너는 그럼 죽나 보자' 죽었거든요. '뭐야, 이 자식도 똑같네' 이렇게 이해하시면 잘못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하는 죽음 이라는 것은 영생을 못얻고 죽는 걸 말하는 거예요. 영생을 못얻고 죽어서 지옥 가는 걸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산다는 건 뭐 겠어요? 영생을 얻어서 천국 가는 것을 산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지금 '육체를 따라 살다보면 죽어서 영생을 못얻고 지옥으로 갈 것이며' 이 소리 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서 육체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서 8:13)]

는 천국 갈거다. 육체의 행위를 죽이라는 건, '육체가 하자는대로 일체 하지말자' 로 이해하시면 안된다. 이러면 또 금욕 수도원으로 가요. 예수님의 뜻과 위배돼요. 이런 말들이 또 우리를 봉쇄시킨다구요. 왜? 육체의 행위를 죽여야 되니까, 이게 올바른 수행이 되버려요.

(고행주의) 진짜로 이렇게 수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배고프다' 그러면 밥 안줘요. 육체가 하자는 거 다 반대로 하는 거예요. '저거 보고 싶다' 안봐요. 이해되세요? '냄새 맡고 싶다' 코 막아요. 일체, 욕망을 죽이려면 이 짓밖에 없거든요. 내 육체를 죽일 수는 없잖아요. 육체가 하자는 거를 하나도 안들어 주는 거예요. '배고파' 그러면 밥 안줘요. '편안하게 눕고 싶다' 그러면 꺼끌꺼끌한 잠자리를 마련해서 거기서 잡니다. 땅에서 자요. '샘통이다, 너 당해봐라' 하는 식이죠. 이게 고행주의 입니다. '엿 먹어봐라, 육체가 하자는 거 내가 다 반대로 할거다' 이해되세요?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이게 에고가 생각한 얄팍한 수예요. 하나님의 성령과 교감이 없는채로 남다른 짓을 해서 '내가 남다른 짓을 하면 하나님이 이뻐할 거야' 하는 식의, 이럴때 이게 명분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은 되게 위험합니다.

(진짜 도) 육체의 행위를 죽이라는 건 이거예요. 이게 진짜 도예요. 육체가 하자는 것 중에 성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죽이라는 거예요. 육체가 성령에 위배되는 짓을 하자고 할때, 사실 알고보면 혼이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육체가 하자고 신호를 보내도 그건 혼이 조절할 수 있는 문제 거든요. 그냥 육체는 그런 의견을 제시한 거예요. 강력한 의견, '밥 먹고 싶다, 뭘 하고 싶다' 그럼 혼이 양심의 통제 안에서 그걸 결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강력한 신호에 끌려가 버려서 육체가 시키는대로 한다는 명분으로 양심을 져버렸을때 문제가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간단한데 간단한 얘기가 아닐 수 있는게 사도 바울도 표현을 이렇게 밖에 못했잖아요. 그럼 이게 실제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말들 입니다.

육체의 행위를 죽여야지, 그러면 예전에 수도사들 성욕 일어나면 채찍들고 있다가 채찍으로 자기 때리 잖아요. 지금도 수녀원 이런데 때리는 분들 있을 거예요. 그 정도면 제 등은 이미 날아갔죠. '가죽으로는 안되네' 여기다 막 쇠로 꼬챙이를, 이것도 변태죠. '이것도 쾌락이 있는데' 오늘 한번 안때리면 잠이 잘 안오고, 이미 이것도 육체가 원하는 겁니다. 그걸로도 답이 안나와요. 고행에 맛들이면 이것도 탐진치예요. 그땐 또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골때리죠. 이게 꼼수로는 답이 안나오는 이유가 이겁니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지 않고 육체가 나를 괴롭히는 주범이니 육체를 학대해서 답을 찾아 보겠다. 밥을 한번 굶겨 보겠다. 너무 퍼먹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굶고 거기에 모든 정신을 밥 굶는 걸로 내가 '아버지, 두끼 굶었습니다. 아버지, 나 효자죠' 이러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니 배고픔의 신호를 누가 보냈겠어요? 아버지요. 황당한 새끼죠. 황당한 자식? 새끼? 아무튼, 이해되세요? '뭐지, 제, 밥하나 먹는 거 가지고 왜 저러지?' '아버지 오늘 맨 밥만 먹었습니다.' '왜? 뭘 위해서?' '욕망을 죽이려고요' '그러니까, 왜? 왜 죽이려고? 욕망 니가 만들었냐? 내가 만들었지' 살으라고 보내는 신호들이 다 욕망이예요. 그걸 다 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뭐하자는 거예요?

예수님은 절대로 금욕 바로 안갔어요. 예수님이 금식한 기간 있습니다. 40일, 40일만 딱 했어요. 그것도 중요한 악마와의 대결을 앞두고 필요하니까 했던 의식이죠. 특수 목적 하에서 하셨던 경우 아니고 금식을 비판 했어요.

왜냐? 그걸로 혹시라도 이런 거예요. 어떤 여성분에게 남성이 막 스토커처럼 구는데, 하도 짠해서 차 한잔 마셔 줬어요. 그때 그 여성분이 뭐라고 할까요? '이걸로 혹시라도 우리 관계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라' 라고 하겠죠.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금식하고, 아버지 저 효자죠?' '혹시라도 이걸로 네가 영성이 더 계발된다던가, 천국에 가까워졌다던가 그런 생각 하지마라' 라고 꼭 얘기해 주고 싶을 겁니다. 뭐냐면 지금 다 그렇게 고행을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면 자기 만족이예요. 내가 그렇게 했을때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내 고정관념과 내 아집과 내 세계관에서 '이랬을때 성스럽다' 라고 그게 있어서 하는거지 아버지 뜻대로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그렇게 했다고 천국에 다가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라는 말을 누구를 통해서 하셨어요? 예수님을 통해 바리새파들에게 하셨어요. '너희들 금식하고, 자선하고, 기도했다고 혹시라도 너희 천국 갈거라고 생각한다면, 천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면 큰일이야, 절대 아니야' 라고 예수님이 도마복음도 아니고 4대복음에서 다 얘기 하셨어요. '금식 했으면 티 내지나마' 티내지마라고, '굶은 티 내지마, 기도, 골방에 가서해, 자선? 오른손이 한거 왼손이 모르게해' 어떻게 해요? 이렇게 하고 이게 몰라야 되는데, 뭔 얘기예요? '웬만하면 하지마' 이거예요. '진심 아니고 성령 안에서 할거 아니면 하지마' 거의 그 수준 이예요. 이 정도로 엄정 하셨다는 걸 알아야 돼요.

안타까워서 그래요. 예수님의 뜻을 완전히 왜곡해서 왜 지금 바리새파 짓을 하고 있고, 예수님 따르지 않던 에세네파가 하던, 에세네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봉쇄해서 내부에서 자기들끼리만 구원받는다고 흰옷입고 수행하던 사람들 입니다. 자기들끼리 목욕탕 하나 만들어 놓고 매일 들어갔다 나오면 정화된다고 매일매일 하면서 완전히 내가 욕심을 다 버리면, 세상안에서 욕심 버리기 힘드니까,

(견물생심) 견물생심 이잖아요. 왜 들어가는지 이해는 되실 거예요.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는지? 사막으로 들어가는지? 견물생심 입니다. 안봤으면 괜찮았을 건데 봤기 때문에 우리는 끌려갑니다. 또 보고 싶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육체의 자극이 또 보고 싶데요. 거기에 우리의 혼이 끌려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또 봐야겠다. 얻어야 겠다.' 그러니까 거기에 너무 취약하니까 육체의 자극은 성령에서 오는 겁니다만 이 자극에 혼이 너무 취약해요. 면역력이 없다고 할까요. 그냥 끌려가요. 거기서 보장해주는 쾌락에 너무 취약해요. 했더니 진짜 혼이 좋거든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육체가 하라는대로 했다가 너무 행복했던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하고는요? 별로 그런 인연이 없어요. 그러니까 육체하면 환장하니까 혈육의 자녀죠. 그런데 성령을 각성하고 성령과 계속 좋은 관계를 맺어온 사람은 이제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이 시키는대로 하면 자다가도 떡을 먹는다. 이런 좋은 기억이 쌓여가야 돼요. 그 쌓여가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인 거예요. 그런 관계 맺음이 없다면 새로운 습관 들이기가 없다면 아무리 성령을 받아도 절대 그 사람에게 거룩한 인격은 안나옵니다. 불교에서 견성을 아무리 했더라도 그 본성대로 육바라밀을 실천해본 경험이 없다면 참나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거예요. 늘 만나는데 친한 사이는 아닌거예요. 늘 만날 수는 있죠? '대화 해봤어? 아니, 우리 사실 친하지 않아, 같이 있을뿐이야 친하지 않아' 사실은 소원한 이런 관계가 되버려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조금만 더 하고 쉴께요.

오늘 교회 비판하는데 도마복음 핑계대고 제 애기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마복음에 다 나와요. 미리 보면요. 6절 가보시면, 7~8페이지 있죠? 미리 가볼까요? 오늘 못갈거 같아서요. 예고편으로 읽어만 볼까요?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 묻고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십니까?》

왜냐하면 바리새파들은 다 금식하니까, '예수님 우리도 금식해야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합니까?》

바리새파들은 남들 앞에서 멋지게 기도 하거든요. 요즘 교회들도 목사님들 멋지게 기도하면 부럽죠. '나도 좀 그렇게 멋지게 기도하고 싶다. 심금을 울리는 기도를 하고 싶다. 하나님을 울려야지 듣는 사람 심금을 울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까?》

바리새파처럼, 자선도 해야될 것 같은데

《어떤 ‘식단’을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한마디 하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거짓말하지 마라! 그대들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마라.》

'뻥치지마, 하기 싫으면 하지마, 싫어하는 것은 하지마' 뭐냐면 진심도 아니면서, 성령안에서 진짜로 필요하다고 느끼는게 아니면서 에고가 체면 때문에 '우리도 이런거 해야되지 않을까요? 예수님 딱 한마디입니다. '거짓말 하지마. 그대들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마라.'

《모든 것이 하늘의 왕국 앞에서는 밝혀지기 때문이다.》

너희 사기친 거 다 밝혀져, 하기 싫은데 한 것 그대로 다 밝혀져.

《결국에는 모든 숨겨진 것은 밝혀질 것이며, 모든 감춰진 것은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성령 안에서 백일하에 다 드러난다. 괜히 이상한 짓 하지마,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바리새파들 하니까 우리도 좀 해볼까요? 그래야 우리도 좀 거룩해 보이지 않을까요?' 이런거죠. '하지마 그런거' 세죠? 4대복음이 더 센거 많아요. 도마복음도 간간히 4대복음하고 유사한데 더 센 것도 있고 사실은 같은, 비슷한 구절들 가지고 비교해 보면 4대복음 쪽이 더 센것도 많아요. 도마복음에 있는 이런 육성의 말씀도 재미있죠. '뻥치지마'

여러분이 저에게 와서 '저 오늘 부터 철야 수련 해야 될까요?' 그래야 되는거 아닐까요? 잖아요.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이게 물을때 느낌 다 받으셨죠? 진짜 하기 싫다는 걸,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자기 속이는 수행으로는 절대 천국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솔직해야 되고, 성령안에서 진솔해야 된다. 성령의 인도대로 수행을 해야지 자기가 '이래야 되지 않나? 저래야 되지않나?' 바리새파 하는 것 흉내내고, 에세네파 하는 것 흉내내고, 세례 요한처럼 물에 한번 담궈야 될 것같고... 뭐 이런식으로 해서 종교를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관심 없는, 지들 만족, 자뻑에 빠진 집단이 나옵니다. 지들끼리는 감정 뽕 맞고 완전 황홀하죠. 문제는 아버지랑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무심하시다는게 문제죠.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것도 일정 부분 인정합니다. 왜? 세상살이가 그렇게 즐거울 일도 없거든요. 그렇게 라도 잠심라도 기쁘시다면, 감정 뽕 맞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라도 즐거우시면 좋은데

중요한 건 이거예요. '감정 풀고 위로 받으러 왔어요' 그러면 클럽가는 거나, 거기 가는 거나 똑같죠. 그러니까 '뭐가 다릅니까?' '약간 저는 거룩한 분위기에 클럽을 선호합니다' 그러면 그 쪽을 가시면 되고, 부흥회 가시면 되고, '저는 거룩함 같은 걸 짓밟는 스타일 입니다' 그러면 그쪽 가시면 되고,

그런데 이 모든게 다 에고놀음 이라는게 문제예요. 성령은 그런걸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 그런거랑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클럽에서 견성한 분도 있겠죠. 성령은 차원이 달라요. 내 안에 본래 임해계시는 나의 영혼의 본체를 자각하는 행위고, 성령의 부음 이라는 것은 거기서 나온 거룩함을 내가 온몸으로 구현하는 겁니다. 본질이 뭔지 아신다면 세상을 피하고 욕망과 싸우고 이러시면, 안타까운게 이런 구절에 꽂혀서 욕망과 싸우는 분은 앞으로 일생이 빤해요. 그 분 일생간 욕망과 싸우실 거예요. 결국 지고 돌아가실 거예요. 왜? 죽는 것도 성령의 뜻 입니다. 결국은 욕심을 부리게 하는 것도 성령의 뜻이고, 살고 싶게 하는 것도 성령의 뜻이예요. 그리고 일정기간 되면 다시 칼같이 데리고가요. 이 모든게 성령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데 그 살아있는 동안 제대로 못살고, 살라고 준 기능들하고 싸우다가 가는 거예요. 성령에게 이길 수 있나요? 죽고 끝나죠.

이게 관점을 잘 잡으셔야 됩니다. 욕망하고 싸울 일이 아니고 사실은 더 어려운 길이예요. 속세에서 욕망을, 속사람이 겉사람을 이기게 하는 것, 바울도 관점은 정확히 잡고 있어요. 저는 표현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거죠. 관점은 정확합니다. 속사람이 겉사람을 제압하면 돼요. 욕심을 양심이 제압하면 됩니다. 정복하면 되는 거예요. '싹 죽여라' 가 아니예요. '정복하라' 고 했지, 쥐새끼 한마리도 남기지 마라, 이게 아니예요. 이해되시죠. 정복하라. 예수님은 늘 파티 열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다니셨는데 왜 제자들이 갑자기 청빈과 가난과 금욕, 저는 이게 왜 어디서 나왔냐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나왔을까요? 에세네파나 이런 곳에서 하던 겁니다. 사실은 예수님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사실 저는 봉쇄 수녀원도 가서 강의했고 그때 강의하러 갈때 좀 미안하더라구요. 평소 봉쇄 수도원 욕을 많이 했는데 거기서 불러 주셔가지고 '아, 욕 좀 덜 할걸' 하면서 '제발 이분이 안들으셨기를' 하면서 갔는데, 그런적도 있고,

그런데도 이런 말을 안드릴 수 없는게 거기계신 분들이 다 맑으시고 진솔하게 하나님 앞에서 닦아가신 다는 걸 아는데, 이게 안타까운 거예요. 다 좋은데 '예수님을 닮았냐?' 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 '성령 안에서 살아가시는가?, 예수님의 삶의 길을 걷고 계시나?' 이 부분이 아니라면 뭔가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부분도 있다는 거예요. '내 역량이 안되서 그럽니다' 그러면 하나의 방편으로 인정할 수 있어요. 나는 너무나 성령 안에서 살고 싶은데 내 주변 여건이 날 가만두지 않아서 이렇게 밖에 처지가 안되서 이럽니다. 이해할 수는 있는데 저는 그러면서도 이해 못하는게 있어요. 그 안에서 왜 육체적 욕망과 싸우고 계시냐는 거예요. 그러지 마시라. 안그래도 힘든데 자기를 더 힘들게 하고 계시냐? '산에서 홀로 봉쇄하고 수도한다. 내 이번 운명이, 삶의 결이 묘하게 그렇다' 저는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안에서도 예수님을 닮은 수행을 하셔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 당당하게 '욕망에 이긴자' 되자는 거지, '욕망이 없는자' 되자는게 아니예요. 욕망에 이긴자 됩시다. 이해되시죠?

이러면 저는 그 분들도 편해지실 것 같아요. 봉쇄해서 살아가시는 그 분들도 그 안에서 성령 충만해서 예수님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수도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걸 못느꼈어요. 서양까지 수도원들 다큐나 그런 걸 보는데 서양의 어느 수도원 가니까 그 분들은 알더라구요. 여유로워요.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다는 얘기를 계속 입버릇처럼 얘기해요. '나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다' '이런 적절한 제약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 현존이 잘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러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인정 한다니까요. 사람마다 역량이 다르고 근기가 다르니까,

그런데 그 안에서 맨 밥먹고 뭔가와 싸우고 계시면 제가 볼때는 안타까운 거죠. 거기가서 왜 그러고 계시나? 처지에 따라 봉쇄를 했어도 하나님 현존에 충만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거죠. 왜냐하면 누군가가 봉쇄까지 하면서 성령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분들이 혈육의 자녀로 살다가 그 분을 보고 '이렇게 살게 아니구나' 하고 승려나 성직자를 보고 감화 받을 수도 있죠. 그것도 하나의 보살도죠.

저는 여러 경우를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경우에 좋은 결과를 내려면 성령 안에서 내 뜻대로 말고 성령 뜻대로 살아가실 때지 지금 육체랑 싸워 이겨야지 그러면 지금 에고 뜻 이예요. 어디까지 하나님 뜻인지도 모르면서 갑자기 육체랑 싸우겠다. 육체와의 전쟁, 비디오 제목 같습니다만 육체와의 전쟁이 벌어지면 이게 아마게돈 일까요? 여러분 그런게 아닙니다. 비양심과 양심의 싸움이 아마게돈 입니다. 단순한 욕심과 양심의 싸움이 아니예요. 비양심과 양심의 싸움, 주적을 좀 정확하게 구분하셨으면 좋겠다. 우리의 주적은 욕심이 아니라 비양심 입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건, 이렇게...

10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