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7강
| 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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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이원성을 떠나 하나가 되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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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일자 | 2020. 01. 11. 土. |
| 게시일자 | 2020. 02. 24. |
| 동영상 길이 | 48:47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도마복음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zBAbpDGfltQ |
《이원성을 떠나 하나가 돼라》
4절 입니다. 많이 했네요. 이원성을 떠나서 하나가 돼라. 옆에 각주 있는 것은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기존 복음에, 4대복음 중에, 주로 4대복음 이예요. 4대복음 중에 이런 관련 구절이 있더라 이거예요. 관련 구절 한번 보실래요?
[“나중 된 이들이 먼저가 되고, 처음 된 이들이 나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16)]
아주 듣기 싫은 말 중에 하나죠. '뭐야? 나보다 나중에 온 이들이 먼저 된다고?' 언제 들어도 기분이 나쁘죠. 언제 가입해도 나보다 나중에 가입한 사람이 있을거 아니예요? 다 같이 불안에 떨게되는 구절입니다. '처음된 이가 나중될 것이다' '그럼 나중에 올걸' 이런, 좀 이상하죠. 이게 뭔 말을 하려고 했을까요? 이거랑 관련된 구절 입니다. 한번 본문 읽고 각주로 다시 올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많은 날을 살아온 노인이 태어난 지 7일이 된 어린아이에게, ‘생명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말씀 세죠. 노인이 태어난지 7일이 됐다는 거는요 진짜 갓난아이한테 생명의 자리에 대해서 묻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갓난아이에게 배워라 이소리죠. 자세한 내용은 하나하나 들어가 볼께요.
《왜냐하면 처음 된 많은 사람들이 나중이 될 것이며》
지금 나이든 사람들이 지혜를 얻은 것 같죠? '갓난아이만 못할 수 있다.' 이거죠. 갓난아이가 먼저 천국갈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좀더 희망적입니다.
《결국 그들은 ‘오직 하나’ 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아까는 뭔가 이간질 하는 것 같잖아요. '나중된 이가 처음되고, 처음된 이가 나중될거야' 이것보다, 이 얘기의 결론은 뭐였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마음속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은 처음이니 나중이니 따지고 있지 말라는 거죠. 내가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 따지지 말라는 거죠. '진리와 하나될 생각만 해라' 이겁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이런 부분이고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게요.
'나중된 이가 먼저되고 처음된 이가 나중될거다' 이 말씀 마태복음 20장 16절인데 무슨 말씀 일까요? 들어가 볼게요.
[먼저 ‘영의 각성’(성령 각성, 칭의稱義)을 했다고 해서 ‘혼의 성화’와 ‘육의 부활’이]
즉,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법에 있어서는
[앞서라는 법이 없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성령을 먼저 받았다고 해도, 나중에 성령받은 사람보다 못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느 부분에서요? 성화, 그렇죠? 성화, 영화 부분에서,
[나중에 영의 각성을 이룬 이가 성령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 경우 더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뭐냐면 먼저 얻었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죠? 나중에 온 사람에게 배울 준비를 하고 있어라. 나중에 온 이가 너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고 더 빨리 갈수도 있으니까 항상 상을 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안식을 해야지, 자! 성령을 얻었으면 성령 안에서, 성령은 우주를 어떻게 봐요? 하나요. 우주 전체도 성령의 작용이고 성령은 우주에 한 성령이고, 시공 초월한 자리가 둘, 셋이 있겠어요? 시공을 초월했고 나와 남,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자리인데, I AM은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예요. 그리서 이 I는 상대방이 있는 I가 아니예요. 우주 전체가 나라는 자리지, 여러분 우주 전체가 나라고 상상해 보세요. 상상으로라도, 거칠게라도, 우주 전체를 나라고 보는 의식이 있다. 그러면 그 의식은 나와 남이 없겠죠. 나와 남이 찢어져 있더라도 나와 남이 하나라는 걸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체가 나라는 걸, 이게 예수님의 마음 상태겠죠. 하나님의 마음 상태겠죠. '우주 전체가 나야' 자 다 똑같아요.
에고도 호리피해죠. 에고도 이익은 좋아하고 손해는 싫어합니다. 하나님도요 이런 말씀 드리면 되게 놀래요. 중생 마음은 뭐예요? 호리피해 입니다.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 마음은? 뭐라고 해줘야 좋아하죠?
(소아적 호리피해) 혼의 마음은 무슨 마음이예요? 호, 좋아할 호, 이건 피할 피 입니다. 뭘 좋아합니까? 이익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걸, 뭘 싫어합니까? 나에게 해로운 걸,
(호선오악) 하나님 마음은 어떻죠? 제가 뭐라고 하죠? 호, 뭘 좋아합니까? 피, 뭘 피합니까? 선을 좋아하고, 악을 피합니다. 이렇게하면 멋있죠.
(대아적 호리피해) 그런데 좀 들어가볼까요? 이익은 무슨 이익 입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 나한테 손해가 되니까 싫어한 거예요. 그럼 선은 뭡니까? 선은 이익이 아닙니까? 아니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게 선이고 모두에게 피해가 되는게 악입니다. 자, 여기까지 아시면 이것도 아셔야 돼요. 제가 얘기 잘 안하지만, 여기까지 아시면 아셔야 돼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은? 호선오악이죠.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호리피해예요. 하나님도 호리피해예요. 왜? 우주가 다 나니까, 이해되세요? 이 사람에게는 좋은데 이 사람에게는 나쁘다, 그럼 우주가 볼 때 나한테 안좋은 거예요. 모두가 나니까. 이해되세요? 나한테 제일 해가 없는 방향으로 가시겠죠. 하나님도 호리피해예요. 똑같아요. 이게 다른 거예요. 우리 호리피해는 이 몸뚱이까지가 나인데, 하나님은 우주가 나니까 우주에 이로운 것은 좋아하고 우주에 해로운 것은 싫어하시겠죠. 하나님도 욕심쟁이 입니다. 그렇죠? 양심쟁이죠. 저런 욕심은 양심이죠. 이것도 이해하셔야 돼요.
우주는 기본 공식이 이로운 것은 좋아하고 손해되는 걸 피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내 한몸에만 적용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니 세포중에 한 놈이 지한테 이롭다고 주변에 해끼치면서 계속 자라요. 암이죠. 얘를 놔두면 어때요? 몸이 죽어요. 우주 전체가 죽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나로 여기는 마음이 '이걸 조치를 취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에 처벌을 해야 겠구나, 그 공식으로 아시면 좋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우주가 나예요, 한 성령이고, 여러분도 그 '나' 라는 공통의 의식에 접속이 지금 가능하신 거예요. 접속이 되서 우주를 나로 여기는 나로부터 내 몸뚱이만 나로 여기는 나로 분화된 거예요. 사실 이게 같이 작동돼요. 여기만 의식하고 살때는 내 몸뚱이만 이익이라고 아는데, 성령의 마음이 되는 순간 우주 모두에게 이로워야 이득이라는 것을 내 욕심 추구하듯이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 기능이 살아나면, 그게 기본값이 바뀌는 거예요. 동시에 간절하게 내가 이로워졌으면 좋겠는 마음처럼, 간절하게 우주가 이로워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 버린 거예요. 같이 작동돼요. 이게 성령 받았을때의 증상입니다. 이 느낌이 안일어나시면 성령 받으신게 아니예요. 그냥 맛이나 본거지, 찍어나 본거지 제대로 들이킨게 아니예요. 그거 들이키면 '너 그거 간장 먹었어?' '어, 짜던데' '그럴리가' 제대로 들이켰으면 짜서 방바닥 굴러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 견딜만 하던데' 찍어나 봤구나 하는 걸 알듯이 그냥 아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고? 그런데 왜 저따우지?' 딱보면 아는 거예요. 성령 받았을리가 없는 거예요. 성령에 한번 쩔어지면 저렇게 될 수가 없단 말이예요. 그런 의식입니다. 이 의식이 우리안에 생생하게 현존해 있어요.
여러분이 이 의식 때문에, 이 의식이 있는지 모르고 사는데도 중생들이 괴로워해요. 이 의식이 계속 발현되니까, 속에서 계속 자명, 찜찜, 자명, 찜찜 올라오거든요. 이것 때문에 미치겠는거 아닌가요? 솔직히 양심만 긁어내버리면, 양심 제거 수술이 있다면 받고 자유자재일 분들 많을 걸요. '이제 됐다. 이제 진정한 소시오패스로 거듭나자. 그동안 내가 내 알량한 양심 때문에 계속 피해만 봤다' 소시오패스로 거듭나면 그 순간부터 막강해 지겠죠. 못쓸 패가 없어요. 다 가져다 쓰는 거예요. 그전에는 차마 못하는게 많았거든요. 도저히 이것은 못하겠다. 부끄러워서도 못하겠고, 양심상 못하겠고 이제 그거 떼버리고 나면 무서워 집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면 이해가 좀 되실 거예요.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분화된 겁니다. 자 그런데 혼의 세계에서만 분화되 보이지 성령 차원에서는 지금도 우리는 이미 하나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고 황금률을 지켜야만 우주가 만족하는 이유입니다. 왜? 우주는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좋아해요. 인간들끼리 황금률을 지켜줄때 우주는 좋아합니다. 왜? 그게 자기에게 이로우니까, 여러분이나 하나님이나 똑같아요. 나에게 이로워야 좋은 거예요. 이 우주는, 나에게 해로운 건 싫어해요. 격렬하게 싫어해요. 여러분이 격렬하게 싫듯이,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 10만원만 빼갈려고해도 격렬하게 싫죠? 그렇죠? 그냥 싫은 거예요. 우리 의식의 근원에는 그게 있어요. 호선오악의 그 마음이 있어요. 성령의 마음이, 그 마음과 하나가 되는게 포인트 입니다. 그 마음과 하나가 되는게 포인트인데
혼이 남보다 먼저 성령을 각성되었다는 이유로, 아버지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거만떨면 바로 자빠지죠. 이게 무조건 처음에 온 사람보다 나중에 온 이가 먼저 된다는 말이 아니예요. 그러면 여러분 다 나중에 오겠죠. 나중에 오려고 준비하고 있겠죠. 누구하나 먼저 가면 '재는 제꼈다' 더 나중에, 더 나중에... 이렇게 되면 이건 안맞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들이 성령 만났다고 꺼떡대고 있고, 거만 떠니까 예수님이 한말이죠. '야, 너희보다 나중에 온 이가 먼저 천국갈 수 있어' 그런데 그 말도 부족한 말인게 그 말만 들으면 제자들이 또 마음에 질투심이 나겠죠. '나중에 올걸' 그 말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결론이 뭐예요? 도마복음 말씀이 더 정확한 거예요. 결국은 하나가 되야돼, '우리는 하나야' 그걸 먼저 알았으면 뭘 해야돼요? 가르쳐 줘야죠. 뒷사람들 빨리오게 도와줘야죠. 이게 보살도인데 '내가 먼저 왔으니 다행이다' 이거는 보살이 아니죠. 예수님 말씀은 다 보살도가 깔려 있어요. 왜 깔려있을 수 밖에 없냐? 성령의 눈으로 보니까, 불교 보살도가 별게 아닙니다. 공한 진리의 마음으로 보니까 그래요. 여기는 성령의 마음으로 보니까 보여요. 이게 자명이고 이게 찜찜인지 다 보여요. 내가 먼저 됐다고 '와~ 하고, 남들은 나보다 못할거야, 걔네들은 더 굴러봐라' 이런 마음이 드시면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의로운 존재가 된지 알았더니 나오는 말이 다 의롭지가 않아요. 이상하죠. 바로 아실 수 있어요. '아, 찜찜하다, 내가 문제가 있다.' 그럼 내려놓고 마음 바로 잡으시면 되죠. 그러니까 그런 측면, 그리고 왜 하필 태어난지 7일된 어린이를 들먹였는가 한번 보시죠. 2번 노자에 이렇게 멋진 말이 있습니다.
[‘덕德’을 두텁게 머금은 자는 ‘갓난아이’와 비슷하다.]
온전한 덕, 거의 완덕이죠. 완전한 덕은 갓난아이와 비슷하다.
[벌ㆍ전갈ㆍ독사가 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이 덤비지 않으며, 사나운 새가 공격하지 않는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蠆虺蛇不螫 猛獸不據 攫鳥不搏, 노자老子)]
이게 뭔 말이냐면, '갓난아이로 거듭나라' 예수님도 그러시죠.
(갓난아이) 갓난아이가 갖는게 뭐냐면 영혼육이 온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온전한 건 아닌데 우리 어른들하고 비교했을때 갓난아이때 영혼육이 온전하다고 보는 거예요. 혼이 탐진치를 제대로 못부리고 있거든요. 왜? 기능이 딸려요. 뇌기능이 딸려서 탐진치를 제대로 못부립니다. 부릴 수 있는게 한계가 있어요. 인간중에 가장 혼이 순수하고, 육도 어때요? 육이 건강하죠. 하늘이 그 생명체 살릴려고 온갖 정성 들여서 사실은 키운 겁니다. 엄마가 키운거지만 엄마 배를 통해 하늘이 그 한 생명체를 이제 해가지고 세상에 선보일때 동양식으로 말하면 정기신 충만한 상태예요.
노자는 그 얘기를 한거예요. 정기신이 충만하다. 그때는 탐진치 제대로 못부린다. 그때는 정기가 어떠냐? 하루종일 울어도 몸이 안상한다. 몸이, 정기가 가장 충만할때다. 이걸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거예요. '갓난아이로 다시 태어나라, 다시 부활체, 온전한 육체로 다시 부활해라. 너희의 그 타락한 육체말고 온전한 육체로 거듭나라.'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갓난아이의 육체도 그렇지만, 정기신, 마음도 그래요. 마음도 어때요? 정기는 육체 관련된 거고, 신은 정신이죠. 정신도 더 순수해요. 왜? 아까 말씀드렸지만 제대로 탐진치를 못부려서 그래요.
지금 저희 집에 갓난아이 하나 있는데, 12월 22일에 낳는데 눈뜨고 저를 보지만 뭔 생각하는지는 알수없죠. 본인도 모르고 저도 모르고 그런데 보면 꿈도 꿔요. 혼자 꿈꾸다 웃고 있어요. '얘가 재미있을 상황이 뭘까?' 얘가 환하게 웃을 상황, '몽유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나?'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다만 보면 무의식 상태인데 그런데 오만 생각 안하니까 정신이 충만하단 말이예요. 순수하단 말이예요. '어머니를 어떻게 해꼬지 해야지' 이런 생각 하겠어요? '어머니를 많이 빨아먹고 먹튀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 안할거 아니예요. '아버지 돈을 내가 다 가져다 써야겠다' 이런 그러니까
[대인은 갓난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맹자孟子 「이루離婁 하」)]
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종교나 갓난아이를 중시해요. 갓난아이의 마음, 갓난아이의 몸, 이게 뭐냐면 여러분의 가장 순수했던 상태를 생각하시면 돼요. 원래 제일 순수한 건 뭐겠어요? 영적인 건데, 영적인거 말고, 육체 지닌 중에 제일 순수한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의 자리를 왜 난지 7살 (→7일) 된 아이에게 배워야 돼냐? 그때가 제일 생명력이 충만할 때라는 거예요. 그때를 보면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된다. 실제로 여러분 난지 7일된 아이에게 질문하면 답 해줄까요? 아니죠. 지금도 제가 계속 아빠를 강요하는데 '아빠 해봐, 아빠' 또 눈뜨고 저를 보고 있으면 하고 싶어져요. '애가 무슨 말을해' 하지만, 또렷하게 저를 보고 있으면 '알지 않을까? 왠지 아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정신은 다 있는데 작동을 안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순수한 상태라는 거예요. 몸도 준비만 되어 있는 상태, 아직 함부로 쓰질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그 상태에서 생명의 비밀을 그 아이에게서 캐야된다 이 소리입니다. 그 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우린 돌아갈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이거예요. 이 얘기 들으시고 '그럼 갓난아이처럼 되야지' 옹아리 하고 그러실 거예요?
(갓난아이처럼 된다는 것) 성령각성해서 내 혼이 탐진치 못부리게 하고 내 육신의 생명력이 더 온전하게 되기를 이렇게 관리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갓난아이가 되라. 나중에 최고는 뭐예요? 어차피 육신은 쓰다 버리는 거니까, 최고는 영적인 육체까지 얻는게 갓난아이로 거듭나는 방식입니다.
정말 새생명으로 거듭나려면 새로운 영적인 육체까지 얻어야 돼요. 도마복음은 거기까지 얘기를 합니다. 나중에 다 얘기해 드릴게요. 창세기에 이렇게 나오죠
[대를 이어서 그대들 가운에 모든 남자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창세기 17:12)]
생식기 껍질 벗겨내는 작업을 하라. 7일 이라는게 뭐예요? 육체까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 할례를 받으면 육체가 손상이 되잖아요. 원래의 원형의 모습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원형의 영혼육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갓난아이로 거듭나라, 그러니까 결국은 성인들에게 갓난아이로 거듭나라는 것은 그 갓난아이때처럼 온전한 영혼육을 다시 회복하라는 거예요. 차원이 달라요. 갓난아이처럼 되자는 거는 아닙니다.
자! 그리고 이 말씀 재미있지 않나요? '태어난지 7일된 아이에게도 도를 물을 수 있어야 된다' 이게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게 성령 안에서 안식한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나이에 대한 그런 분별도 없이, 처음이자 나중이다도 없이 순수하게 도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성령 안에서 성령이 우주를 통틀어 한 성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겁니다. '너와 내가 사실은 도반이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고, 우린 서로 도와야 한다. 우리는 본래 하나다' 이걸 아는 사람이나 나이를 초월해서 묻지 않겠느냐? 이런게 불교에는 없겠습니까? 보세요.
[7살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그에게 배울 것이며, 100세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내가 가르쳐줄 것이다.” (조주趙州스님의 서원)]
이게 뭐냐? 결국 '우리는 하나다' 예요. 우리는 모두 한 불성이고, 불성 안에서 하나기 때문에 자타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남이 없이 서로 도와야 된다는 거예요. 보세요, 여러분 한 육신인데도 손과 발이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될까요? 이 손이 지금 기계에 빠져들어가는데 이 손이 알아도 '짜식, 한번 당해봐라' 이러고 있으면 코미디죠. 이 손이 다치면 지한테 피해가 안올까요? 이런식인 거예요. 지는 안아플까요? 다리 하나가 피해를 보는데 다른 다리가 '짜식 내말 안듣고 맨날 쩔뚝이더니, 잘됐다' 이게 말이 안돼죠.
이정도 감각이어야 돼요. 하나님 안에서는 이게 한 손인거예요. 이 사람이 예수님이고 이 사람이 여러분이다. 이 손이 예수님이고, 이 손이 여러분이다. 그럼 이 손만 잘되면 되나요? 이 손은 못되도 되나요? 이 손만 잘하면 되나요? 이 손이 잘하면 도와줘야죠. 이 손도 잘할 수 있게, 만일 그런 상황을 가정한다면 이런 느낌이라는 거예요. 진짜 하나라고 느끼는 이게 불교에서 자타불이 라고도 하고 또 뭐라고 하나요? 불교에 좋은 말 많습니다. 자타불이, 나와 남은 원래 둘이 아니다. 그 다음에 (동체대비) 이게 뭡니까? 한 몸뚱이라는 거예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한 몸뚱이의 자비라는 거예요. 진짜 한 몸으로 아는 자비라는 거예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동체대비 라는게 참 좋은 말입니다. 동체대비, 진짜 한몸으로 아는 거예요. 저 사람이 아프면 내가 아픈 거예요. 저 사람이 배를 굶고 있으면 내가 진짜 굶은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주는 거예요. 나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 동체대비는 내가 이로워지기 위해서 저 사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이타주의, 이기주의 나눌때 이타와 이기가 사실은 하나로 굴러가요. 왜? 우주는 우주 자체가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한다니까요. 나한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나한테 손해를 싫어해요. 그 내가 참나차원으로 확장됐을 뿐이예요.
그러니까 모두가 나로 보이니까 저 사람이 괴로운건 내 괴로움 이니까 나를 위해서 저 사람을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타주의, 이기주의 막 나눠서 접근하면 또 쪼개져 버렸잖아요. 그래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생깁니다. 사람이 이타적일 수 있나? 이상하거든요. '이기심 부리지 말고 이타심 쓰세요' 그럼 이타, '남만 이롭게 할 수 있나?' 이게 또 분열됐죠? 벌써 뭐가 안맞죠. 이렇게 쪼개놓으면 안맞아요.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옵니다. 원래 표현 하고자 하는게 표현이 안돼요. 가장 좋은 표현이예요. 동체대비, 한 몸으로 알고 사랑해라. 남을 나처럼 사랑해라. 이 말이 딱 맞는 말이지, 남을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살지마라. 땡, 그런데 이런 소리를 합니다. 고승이라는 분들도 해요.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면 안됩니다.' 벌써 공부를 찢어놨어요. 이제 어떻게 공부를 해야할지 몰라요. 어떻게 하지? 내가 이로워지면 막 채찍질 합니다. '감히 너를 위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불교 기본 이론이 자리이타예요. 나를 이롭게 해서 남을 이롭게 해라. 자리이타는 하나예요. 나를 이롭게 못하면 남도 이롭게 못해줘요. 왜? 나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확장되서 남을 이롭게 하는 거예요. 이 마음이 없는데 남은 이롭게 하라구요? 애초에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거예요. 누구한테요? 글로 배운 사람들에게, 글로 사랑을 배우고, 자비를 배우면 이게 그럴싸해요. 현실에 적용해 보세요 절대 좋은 결과 안나옵니다. 문제가 터집니다. 조주는 이렇게 얘기 한거구요. 동체대비,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마복음의 말씀과 그대로 만나 잖아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구상의 나이에 집착해서는 도에 이를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자상壽者相’(나이 먹는 존재라는 상)을 버려야 한다.]
'나는 나이를 먹는 존재다' 하는 불교에 버려야 할 4가지 상중에 수자상에 빠져서
[모두 에고의 놀음일 뿐이다.]
에고 놀음에 빠져 버립니다.
[에고를 초월한 이가 가장 빨리 갈 것이다.]
에고 놀음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빨리 에고를 초월한 사람이 더 성령과 하나될텐데, 에고 세계에서 빠르니 늦니 따지고 있으면 그거 자체가, 금강경 식으로 말하면 '넌 수자상에 빠졌기 때문에 도에 못 이를거야' 이 소리를 예수님은 뭐라고 했어요? '처음 된 이가 나중될 거야' 하신 거예요. 똑같은 소리예요.
자! 4번 제가 정리해 놓은 겁니다.
[‘처음과 끝’이라는 것은 모두 이 현상계의 구성요소일 뿐이다. ‘하나님의 왕국’에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그 자리는 시공을 초월한 자리거든요.
[모두 ‘하나’일 뿐이다.]
성령안에서
[일체의 ‘이원성’을 초월해야만 우리는 ‘순수한 나’(I Am, 영원한 나의 현존, 스스로 있는 나)로 존재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걸 초월하고, 모든게 하나인 '나' 자리를 찾아야 되는데, 처음이니 나중이니 7살이니, 100세니 따지고 있다가는 분열속에 빠져서 성령을 놓칩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우리의 에고를 초월하자! 우리 모두는 본래 하나이다(自他一如)! 따라서 내가 먼저 깨달았다고 해도 결국에는 모두가 깨달아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신다. 자신이 ‘먼저’라는 사실에 집착해서는 그 행위로 인해 곧장 뒤처지고 말 것이다. ‘처음’에 집착해서는 ‘나중’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처음에 집착하다가는 나중 될것이다.
[‘순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결국엔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모두가 본래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경 중에서 아미타 부처님이 제일 예수님 닮은 부처님인데 극락을 열어요. 천국의 주인이 예수님이면 천국에 해당하는 불교 극락의 주인은 아미타불 이예요. 극락 세계가 그 분이 서원을 세워서 만든 세계 입니다. 그런데 서원을 세울때 이렇게 세웠어요.
[“제가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의 사람과 천인들의 형체와 색깔이 동등하지 않고 잘나고 못남이 있다면, 저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지 않겠습니다.” (設我得佛 國中人天 形色不同有好醜者 不取正覺, 아미타불의 4번째 서원, 무량수경)]
차라리 저는 구원받지 않겠습니다. 제가 구원받아서 극락을 열때는 그 세계 사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원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극락에 갈 사람들이 '내가 먼저 극락간다' 이러고 가면 이상하지 않나요? 좀 뭔가 이상하잖아요. 이상하다는 걸 아셔야 돼요. 교회 다니는 분들이 '나는 천국에 가지롱' 하면서 여러분을 무시 한다면, 저는 무시도 많이 겪어 봤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난 죽으면 천국 가는데, 넌 지옥 갈테니까 다시 볼일이 없는 사람이네' 이런 느낌까지 가지고 사시는 분 봤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알뜰히 챙겨요. 왜? 천국에서 또 만나야 되거든요. 인간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각별하게 챙겨야 되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사실 볼일이 없어요. 지옥에 자기가 관광갈 것도 아니고, 방문할 것도 아니니까, 이런 논리까지 형성되는 걸 봤어요. 골때리죠. 이런 사람이 천국을 갈 수 있겠나요? 뭔가 이상하죠? 모순되어 있죠? 이런 것도 생각해 보시면 재미있습니다.
(천국 가는 조건) 천국에 가는 조건이 뭐예요? 나와 남을 나누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요. 나눌때 나누더라도 본래 하나라는 걸 아는 사람이어야 돼요. 이것도 중요합니다. 안 나누고 못살아요. 나눠야 사는데, 예수님도 예수님이죠. 남은 남이죠, 그런데 현실의 측면, 혈육의 자녀 측면에서는 그런데 성령의 자녀라는 측면에서는 또 하나라는 것도 알아야 된다구요. 두개의 기본값을 다 알고계신 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도가 될 수 있고, 성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만 알면 안돼요.
자! 5절 가볼까요?
《그대 면전의 것을 알라》
이런 것 보면 예수님이 정말 설명을 잘해주셨습니다. 지금 이거를 '예수님 글이 아냐' 라고 우긴다면 저는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 말고 예수님 같은 분이 또 계셨나 보네요'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요. 왜? 이 정도 글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 있었냐는 거예요. 들어보세요, 무슨 말씀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의 면전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면전에 뭐가 있어요? 앞사람 뒷통수가 있죠? 여러분 면전에 뭐가 있냐구요? 저를 보시고 제가 있다고 치죠. 면전에 있는 저를 알아야 돼요.
《그러면 그대들에게 감추어진 것이 그대들에게 드러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뭘까요? 제가 늘 얘기하는 이거예요. '제 주먹 보세요' 이런거 하잖아요. 펜이 여러분 면전에 있습니다. 펜을 보세요. 이 펜을 알면, 면전에 것을 안다면 여러분이 알아야할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이거를 성령의 눈으로 봐야 돼요. 혼의 눈으로 보면 나랑 별개의 존재입니다. 왜냐? 불교식으로 법집에 빠져 있거든요. '나랑 다 별개의 존재들이야' 하는 집착에 빠져있어요. 무지와 아집에 빠져있는데 이게 깨집니다. 탁 깨져요. 이걸 성령의 눈으로 보면, 내 안에 있는 영, 스스로 현존하는 '나' 입장에서 보면 전체가 둘이 아니고 하나로 보여요. 그러면 이 펜도, 눈앞에 돌멩이가 있다면 돌멩이도, 여러분 눈앞에 있는 모든게 뭐예요? 다 성령의 작용, 성령의 신비로운 나툼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야 돼요. 그럼 뭐를 알게돼요? 나에게 감춰진게 뭐예요? 성령이요. 성령을 알게돼요.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성령을 안다는 거예요. 눈앞에 있는 것을 몰라요. 눈앞에 있는 이게 하나님의 작품이라는게 안보이시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거예요. 이 작품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 돌멩이 하나, 펜 하나의 의미를 이해하신다는 건 뭐예요? 결국은 여러분 안에 감춰진 성령, 천국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대들 면전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대들에게 감춰진 것이 그대들에게 들어날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희망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거 어려운데요. 제가 알 수 있을까요?' 하실지 모르지만 뭐라고 하셨나요?
《장차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어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드러난다. 왜? '하나님이 진짜 못찾게 하려고 해 놓은 건 아니다. 다 찾게 하려고 해놓은 거다. 감춰진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걱정하지마라. 너의 성령도 드러날 것이다.' 이해 되시죠? 그러니까 '제 안의 성령 제가 못찾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절대 안들켜야지' 하고 숨은게 아니라는 거예요. 힌트를 주고 있고, 찾을 수 있게, 드러날려고 '잡힐려고 숨어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이 말씀까지 해주십니다. 들어있는 의미한번 보실래요
[여기 눈앞에 ‘돌멩이’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대들의 면전에 있는 ‘돌멩이’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자! 아까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보세요. 면전에 있는 걸 알라는게 막연히 펜을 보는데 이 펜은 지금 여러분이 보셔서 여러분 의식에 나타난 겁니다. 이 펜이 여러분 의식에 있는 것은 여러분 의식에 있는거지 객관적인 펜은 아니예요. 이 펜의 반영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러분 의식에 존재하는 펜을 볼 수 있고, 그 촉감을 느껴봅니다. 과학적으로도 오감 정보를 여러분 뇌에서 재구성 한거예요. 아무튼 여러분은 결국 여러분 뇌에 있는 구성되어 있는 그 오감 정보만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걸 아신거예요. 여러분 눈앞에 있는, 면전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존재해요? 이 펜 하나가 존재하려면? 알아차리는 성령이 있어야 존재해요. 성령이 있어야 생각하고, 감정하고, 오감을 느낄 수 있잖아요. 숨쉴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잖아요. 성령으로 인해 이 펜이 여러분 의식에 지금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까지 아셔야 돼요. '면전에 있는 것을 알아야 된다.'
[돌멩이(객관)는 돌멩이를 알아차리는 그대의 ‘의식’(대상을 향한 알아차림, 주관)에 의지하여 존재한다.]
여러분의 에고성에 돌멩이가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돌멩이나, 객관이나, 돌멩이를 알아차리는 주관은 다 뭐에 의해서 존재해요? 초월적인 성령에 의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대의 의식이 없이 그대의 마음에 돌멩이가 떠오를 수 있겠는가? 또한 ‘의식’(주관)은 어떠한 대상도 없는 ‘순수한 알아차림’(순수한 나)에 의지하여 존재한다.]
보세요! I AM 이 있어야, 나는 존재하는데, 이제 어떤식으로 존재하는게 되는 거예요? 돌멩이를 바라보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객관적인 돌멩이나, 돌멩이를 바라본다는 주관적 의식이나 다 뭐에 의지해 존재해요? 순수한 나의 현존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구요. 그런 오감 작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돌멩이를 본다고 하는 이런 오감 작용이 못 일어난다는 거예요. 내가 현존해야 나의 상대물로 돌멩이가 존재할 수 있고, 돌멩이를 알아차린다는 생각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돌멩이에 대한 오감 정보도 존재할 수 있고, 저게 돌멩이네 하는 생각도 존재할 수 있고, 돌멩이를 보고, 맛보고, 느끼고 하는 감각 작용도 존재하고, 이 모든게 다 내가 있어야 펼쳐진다. 그러니까 면전에 있는 걸 정확히 알면 숨겨져있는 나의 성령을 알아버립니다. 나의 영, 나의 성령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문답) 이거 선사들이나 날리는 선문답 같죠? 예수님이 더 먼저하신 거예요. 선문답보다 이게 더 먼저 거든요. 그런데 또 엄밀히 따지면 그런 선문답 같은건 언제부터 있었냐? 중국에서는 장자때부터 있었어요. 장자가 선문답을 잘 날립니다. 선문답은 중국적 전통이기도 해요. 인도 전통은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중국 전통이 던지는 거예요. 예수님도 보면 그걸 기가막히게 잘 던지세요. 예수님은 이미 그런식으로 설명하는데 달인이시다. 선문답 던지듯이 탁 던집니다.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요. '눈 앞에 있는 것을 아느냐? 그러면 감춰진 것도 알게된다.' 너무 멋있죠? 저만 전율이 오는 것 같은데, 저만 흥분해서 죄송한데, 흥분되시죠?
모든 주관적인 의식작용도 순수한 알아차림에 의지해서 존재한다. 에고라는 건 이거예요. 돌멩이를 봐요, 돌멩이를 보기 전에는 순수한 참나상태, 현존상태였다 하더라도 돌멩이를 보는 순간 돌멩이라는 객관, 돌멩이를 보는 나라는 제약된 에고, 하지만 이걸 넘어서서 '순수한 나' 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제약된 상황에 전혀 빠져들지 않는 순수한 나, 부동의 동자예요. 자기는 안움직이면서 온갖 정신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데 자신은 변하지 않는 그자리, 성령자리죠, 그 자리를 성령말고 뭘로 설명해요? 그래서
[현상계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계 안에서 중요한 건 정신현상 입니다. 여러분 지금 다 정신에서 알아차려지는 거예요. 생각, 감정, 오감, 우주, 은하계, 돌멩이 다 여러분 정신작용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여러분이 느끼죠,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죠. 정신현상이 중요하다. 현상계 안에서 벌어지는
[‘주관과 객관’의 작용은 모두 이 순수한 나, 즉 ‘하나님’(I Am, 영원한 나의 현존, 스스로 있는 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모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멈추면서 작용하는 것이다. 시공간 안의 모든 움직임과 고요함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에 의해 가능하다. 우리는 면전의 ‘대상’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감으로써, 태어난 적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눈 앞에 나타난 걸 보고 분석하면 직관이 옵니다.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 자리에 대한 직관이 옵니다. 눈앞에 형상을 추적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눈앞의 형상의 실체를 아는 자라야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불교에서 법공 설명 제일 제대로 해주신 거예요.
그냥 아공 차원이 아니예요. '네 안에 하나님 있어' 차원이 아니예요. '눈 앞에 있는 존재의 비밀을 알면 숨겨져 있는 천국을 알 수 있어' 이 얘기는 우리가 만나는, 우리 면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다 성령의 신비라는 것까지 알아야 되는 거기 때문에 칭의가 여기까지 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공 차원이 아니라 법공 차원까지, '내 안에 내 혼이 전부인줄 알았더니 성령이 나의 주인이더라, 나의 아버지 자리더라' 알면 아공이죠. 나라는 존재의 비밀을 아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의 비밀을 아는 것은,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걸 지금 예수님이 설명해 주고 계세요.
지금 이 그림 설명 보시면 이해되실 거예요. 그림 그려놓은거 볼까요? 여기 지우고 여기다 그릴게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 마음에 어떤 대상이 나타나 있어요. 객관세계죠. 대상을 뭐가 보고 있어요? 주관, 나의 자아가요. 그런데 제약된 자아 입니다. 혈육의 자녀로써의 자아, 혈육의, 내 몸안에 갖혀있는 생각, 감정, 오감의 주체로써 작동하는 자아로 이 대상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돌멩이, 돌이 있다, 보는 내가 있다. 그럼 내가 돌멩이를 어떻게 봐요? 어떤 생각을 해가면서, 오감 정보를 바탕으로, 감정도 느껴가면서, 생각, 감정, 오감을 가지고 나라는 에고가, 돌멩이와 구별되는 자아죠. 남하고 다른 자아가 돌멩이라는 대상이 나 밖에 있다고 보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만지고 하고 있다. 이 모든게 뭐로 인해서 가능하냐? 사실은 성령으로요. 순수한 나, 초월적인 자리로 인해서 가능하다. 여러분 의식안에 존재하는 현상은 이건데, 이 현상을 괄호치고 보면 뭐만 남아요? 성령만 남아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로 몰라 해버리시라는 거예요. 어떤 현상, 그 현상에 대한 나의 반응, 이 현상을 알아차리는 나라는 에고까지도 다 몰라 해버리면 뭐만 남아요? 순수한 알아차림만 남아요.
(거울) 거울에 오만걸 비춰보면 거울에 오만게 나타나잖아요. 싹 치워버리면 거울이 그냥 아무것도 안비친채로 거울이 그냥 빛나고, 거울이 모든 걸 비추는 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알아차려지지 않는 상태가 있겠죠?
여러분 의식도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않고 존재할 때 그 본 모습은 뭐겠냐구요? 그게 I AM 이예요. 여기 돌멩이라도 하나 알아차리면, 돌멩이와 돌멩이를 알아차리는 내 의식이 나타나 버린 다구요. 주관, 객관이 딱 찢어져서, 그 순간에서도 거울은 그냥 거울 이듯이 여러분 의식은 순수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모든 것을 비춰주는 바탕으로서, 그러니까 거울에 온갖 잡것이 비춰도 비추는 것만 치워버리면 거울은 원래 거울이었지 거울에 무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여러분 의식이 천지만물을 다 알아차리고 비추고 있지만 눈 감고 몰라 해버리면, 사실 눈 떠도 상관없습니다. 다 몰라 해버리면, 여러분 본래 모습, 순수한 모습이 드러난다구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성령을 받아들이게 되고, 성령만 체험하는게 아니라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까지도 다 성령에서 나오는 구나, 이것은 전형적인 일체유심의 핵심 입니다. 불교 일체유심의 핵심이고, 반야심경의 핵심이 지금 나온거예요. 오온이 공하더라, [색] 색깔, [수] 그 색깔을 느끼는 수, 느낌, [상] 상, 생각, [행] 행, 의지, 색깔이 좋다 싫다. 의지, 그 색깔을 더 취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 저 색깔 나는 싫다. 의지, [식] 색깔이 빨갛네, 파랗네, 생각, 색깔에서 받는 느낌, 감정적인 좋다, 싫다고, 아까 마지막의 의지는 의도 입니다. 색깔을 좋으니까 계속 취하겠다는 거냐? 싫으니까 피하겠다냐? 그 의도, 모든 식별, 내 정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식별능력까지 이게 사실은 다 공, 참나의 작용 입니다. 이게 반야심경의 공에 하나님만 넣으면 이 구절하고 바로 통합니다.
'일체 오온이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오온으로 나타나느니라, 네 면전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작용이니라, 네 면전의 것을 알면 하나님도 알 수 있느니라' 이런 설법이 가능하죠.
각주 6번 보실래요, 재미있는거 읽어드릴께요. 이게 지금 반야심경과 금강경이 다 통하는 사상이죠. 불교안에 반야사상이죠. 금강경 읽어보실래요.
["대저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일체의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안다면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金剛經)]
이게 금강경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입니다. '일체의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세요?
☆ 일체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참나의 작용이니, 형상이 본래 형상이 아니라 참나의 작용이라는 것을 안다면 여래를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그대로 써놓은 거예요. 눈 앞에 면전에 있는 형상의 비밀을 안다면 감춰져 있는 여래를 알게 될것이다.
지금 금강경하고 똑같죠? 혹시 이 구절 듣고 '역시 도마복음은 불교경전 이었어, 역시 이단이야' 이러실 분도 계세요. 그렇게 사세요. 아무튼 아시겠죠? 똑같죠? 너무 똑같죠? '왜 저놈이 설명하면 다 똑같아지지' 라고 저를 의심하지 마시고, 이게 이상하잖아요. 하나 더 읽어드릴께요. 여러분 진짜 무서운, 어려운 선문답인데 이 이치를 알면 풀 수 있게 됩니다.
[“운문雲門이 대중에게 말하였다. ‘소리를 듣다가 도를 깨닫고, 색깔을 보다가 마음을 밝히는 법이다.]
지금 이 양반도 도마복음 공부했어요. 이상하죠? 소리 듣다가 '소리 듣는 놈이 누구냐?' 하면 참나를 찾아버려요. 색깔을 보다가 '색깔을 보는 놈이 누구냐? 이 뭐꼬' 하면 참나를 알아버려요. 지금 예수님 식으로 하면 뭐예요? '면전에 있는 것을 보는 이것은 무엇인고' 했더니 감춰져있던 성령이 드러나버렸어요. 지금 운문 스님도 그 얘기예요. 소리 듣다가, 색깔 보다가 도를 얻는 법이다. 그래서 이 유명한 화두 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돈을 주고 호떡을 샀는데 먹어보니 만두였다.’ (擧 雲門示衆云 聞聲悟道 見色明心 觀世音菩薩將錢來買餬餅 放下手卻是饅頭, 종용록從容錄)]
'난 호떡도 좋아하고 만두도 좋아하는데' 이런식으로 접근하면 화두 안풀립니다. 무슨 말이예요? 호떡인줄 알고 샀는데 만두더라, 자! 눈 앞에 있는, 면전에 있는 대상을 알려고 몰입해서 대상의 실체를 캐봤더니 참나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어, 이거 호떡인줄 알고 먹었는데 쨈이 나오는게 아니라 안에 만두 고기가 나오더라' 이거예요. 먹어 봤더니 다른게 나오더라. 이게 재미있는 화두 입니다.
그런데 화두선 하는 분들은 이런 전후사정 모르고 어떻게 풀어요? '왜 만두인고' 하고 풉니다. '왜 만두가 나왔는고' 이렇게 접근하면 어렵죠. 도는 언젠가 얻으실 거예요. '만두고 나발이고 다 모르겠다' 도를 얻게 되는데,
이치를 알면 이게 재미있는 거예요. 이게 이치를 얘기해 주는 거예요. 이거 지금 아셔야 돼요. 이거 지금 지식으로 알자고 하는게 아니예요. 이게 지금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형형색색의 존재들이 내 참나의 작용이다' 라는 걸 아시는 분은 이 도마복음의 이 구절을 아시는 거예요. 체득하신 거예요. 이렇게 살아야 우리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제 스님이 이 경지를 터득하고 보니까 뭐라고 그래요? 수처작주隨處作主, 내가 어디를 가든지 거기서 내가 주인공 이더라, 왜? 보세요. 여러분과 제가 함께 있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여러분이 존재하려면 제 마음에 알아차리는 의식이 있어야 여러분이 존재하는데, 정신 현상으로 여러분이 내 마음에 존재해야 하는데, 누가 알아차리고 있어요? 나요. 그러니까 '어디가든 내가 주인공 이더라' 입처개진立處皆眞 내가 서 있으면 거기가 다 참되더라, 거기가 천국 이더라, 왜? 지금 성령이 임해있는 곳이 천국이니까, 어디가 있건 내가 성령이더라, '어디에 있건 거기가 천국이더라' 이 소리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내가 서있는 곳이 다 참된 정토더라. 어디가도 다 내가 알아차리고 있더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러분이 어떤 스펙, 어떤 환경에 계시건 여러분의 우주는 여러분이 알아차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알아차리고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어디에 있건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의 성령이 이걸 알아차리고 있다는 걸 아시는 순간 여러분이 계시는 곳은 성령이 구현되는 곳 천국이 되버립니다. 여기까지 알고 살아야 인생사 문제를 다르게 풀겠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사도들은 늘 성령의 현존 안에서, 늘 일체가 성령의 작용이라는 걸 직관하면서 거기서 선악을 따져요.
그걸 베이스로 깔고 '그러니 이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지금 내가 계속 열받아 하는게 옳겠는가?' 인생에서 어떤 좌절을 만났다고 좌절하고 있는 이것 또한 하나님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버리면 '내가 계속 좌절하고 있는게 옳겠는가?' 선이겠는가, 악이겠는가? 하나님의 맞겠는가 따져서 바로잡아 버립니다. 어떤 상황에 던져놔도 하나님 뜻에 따라 다 살아서 나와버려요. 일체가 성령의 작용이면, 참나의 작용이면 나만 그러겠어요? 여러분도 그럴거 아니예요? 여러분 안에 속사정도 이제 알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들도 나랑 같을테니 내가 원하지 않는 걸 남에게 해도 안되고, 그렇죠? 상대방이 성령의 존재라는 걸 아니까, 나도 상대방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그쪽도 거기 안에 있는 성령이 만족하시지 않겠어요? 수준 높은 황금률이 나와요. 우리 모두 안에 성령이 있고, 불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 상대방을 부처 대접하고, 성령 대접해 주는게 이제는 진짜 고급 황금률 입니다. 자녀도 이제 성령 대접하고 부처님 대접하라니까, 자녀에게, 제가 준우에게 '아이고 , 부처님' 하면 글로 배운거죠. '그렇게 하라고 하던데' 아니요. 그 안에 불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자녀에게 양심적으로 대하라구요. 비양심적으로 대하면 그 안에있는 불성이 화낼테니까, 자녀가 다 안다고 봐야죠. 자녀가 다 알고 있으면 무섭지 않겠어요? 제가 어긋난짓 하고 있으면 어긋나다는 걸 안단 말이예요. 이게 부처님 대접하는거지 '우리 서로 부처님 이니까 늘 보면 맞절하자' 이런식으로 접근하시면 안되고,
(원불교) 이게 원불교에서 하는 거예요. 모두가 불상이니, 처처가 다 부처님이니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하는 일마다 다 불공으로 알고 하자. 불공드리는게 다른게 아니예요. 양심 구현해 주는거지. 내가 상대방 양심적으로 대접하는 거예요. '당신도 부처니 다 알거 아닙니까?' 하면서 양심으로 대접해 주는거, 그래서 만나보면 알죠? 좀 부처는 부처인데 조금 문제가 있는 부처구나, 자기가 부처인줄 너무 모르는 부처구나,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방편으로 욕도 해주고 그러는 겁니다. '정신 차려라 이 쓰레기야' 이건 부처인줄 알고 해야돼요. 진짜 쓰레기인줄 알고 하면 안돼요. 진짜 상대방이 쓰레인줄 알면 안돼요. 당신은 부처인데 쓰레기불이다. 뒤에 불을 꼭 붙이세요. 개자녀인데 원래 개자녀 불이다. 아시겠죠?
이게 법공을 알고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쓰레기의 모습을 버리는 순간 '불성이 이제야 제대로 드러났네' 하고 또 거기에 맞게 대접해 주는 거예요. 이게 상대방을 부처로 대한다는 겁니다. 이게 불공이예요. 사사불공, 하는 일마다 부처님 대하듯이 해야 한다는게 존재가 다 하나님 작용이니까, 이 펜 하나도 원래 의도에 맞게 잘써야되지 않겠습니까? 펜도 제가 부처 대접 해주는 거예요. 물질이지만 이것도 참나 작용이니, 자기 본성대로 잘 쓰여야 좋을거 아니예요. 이것도 다 '불공' 입니다.
성경하다가 원불교까지 갔는데, 원불교 분들도 '모든 일을 불공으로 해라' 를 잘 모르시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부처님' 해야 되는건지? 펜 불이시여' 이래야 되는건지? 그게 아니예요. 나도 부처니까 상대방도 부처면 뭘 원하는지? 뭘 싫어할지? 알잖아요. 내가 양심 좋아하고, 비양심 싫어하면 상대방도 부처 대접 해줘야죠.
이런식으로 진리대로 사시면 그게 불공입니다. 그러니까 모든일을 진리대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실천하면 그게 최고의 행입니다. 하나님 뜻을 구현하는 행입니다.
너무 재미있으시겠지만 10분 쉬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