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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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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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나는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는 빛이다
강의일자 2020. 10. 17. 土.
게시일자 2021. 04. 09.
동영상 길이 42:50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9xj6q-XT2XA


반갑습니다. 도마복음 공부하고 도담 나누는 시간 갖으시죠. 오늘은 77절부터 하겠습니다. 77, 78, 79, 80 이렇게 교재 나눠드렸죠. 81까지 나눠드렸나요? 같이 한번 공부 해보시죠.

《77절 나는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는 빛이다》

이 구절 아주 잘 읽어야 됩니다. 잘못 읽으면 오해하기 쉬워요. 이게 요한계시록 보면 이런게 있죠?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다. 만물의 시작이자 끝이다. 결국 참나자리 얘기하는 겁니다. 이걸 참나자리라고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해요. 알파와 오메가 자리가 뭘까요? I AM 이예요. 여기가 현상계라면, 현상의 모든 존재들이라면 I AM의 세계, 우리 에고의 세계, 나와 남이 찢어져있는 에고의 세계라면 여기는 나와 남이 없는 순수한, 나는 현존한다는 세계입니다. 나는 현존한다. 그래서 이 나의 현존, 이 영원한 나의 현존이 나죠? I AM, 나,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여러분, 예수님이 '나'라고 얘기할 때 I AM 하면 하나님 이름이라는 거 알아돼요. I AM, 하나님 이름, 성령자리 라는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부죠, 성부, 성령 자리에요. 그래서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여기서 '나는'하면 I AM 인줄 알아야 돼요.

《나는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는 빛이요》

모든 일체의 현상계, 모든 만물의 위에서 빛나는 빛이요, 하느님 얘기하는 거에요. 이때에 '예수의 인격이 하느님 이구나' 이렇게 접근하시면 안돼요. 예수님의 영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영, 성령과 성부는 영의 차원입니다. 아버지는 영이십니다. 영, 나라는 영은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는 빛이요.

《나는 모든 것이다》

나로부터 모든게 나왔으니까요. I AM 뒤에 뭐가 붙음으로서 시간, 공간, 현상계가 펼쳐졌죠. 만물이 나왔죠.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나로부터 모든게 나왔고

《나에게 모든 것이 도달하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일체가 돌아가도 어디로 돌아가요? 나로 돌아가죠. 이게 지금 하나님 얘길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 혈육의 존재를 가지고 접근하시면 '예수님이 창조주인가 보다,'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이 창조주인가 보다' 하는 망상에 빠집니다. '거기에 내가 있다' 아, 거기에 내가 있다. 어디있냐?

《나무토막을 쪼개보라, 거기 내가 있다.》

나무를 쪼개봐라, 거기 내가,

《돌멩이들을 봐라》

거기 내가 있다.

《거기에서 그대들은 나를 발견할거다》

무슨 소리 일까요? 이거 발견하실 수 있겠어요? 이거는 진짜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거죠? 일체가 유심, 이 자리가 '유심'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유심', 영 이니까요, 일체가 오직 영에서 나온다. 나라는 영의 작용이다. '나'입니다.

(일체유심조)

그래서 여러분, 삶에서 그냥 발견할 수 있어요. 펜을 하나 들어보세요. 여기서 나를 발견하실 수 있어요? 나를 발견할 수 있나요? 펜을 들었는데 여기 내가 있어요? 더 심한 경우에는 지금 예수님 말씀이까 여기 펜을 들어서 여기서 뭘 발견하려고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야죠. 예수님이 나를 발견할 거라고 했으니까, 마우스를 들어서 나를, 예수님을 찾아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것도 만드셨구나, 예수님이 창조하셨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창조주죠,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창조주지만 신약에 오면 이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예수님으로 봐버리니까, 오해가 오해를 나아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령의 진리의 구현자는 맞지만, 구현자는 맞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니란 말이에요. 진리는 예수니, 뭐니, 붙을 수가 없어요. 성령자리지, 진리의 영인 성령 안에 진리가 있지, 자, 이 펜을 들었는데 예수님이 보이세요? 아니면 뭐가 보이세요? '나' 있으세요? 나는 지금 성령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본질인 성령이 여기 있어요? 돌멩이, 돌멩이에도 있고, 마우스에도 있고, 재미있죠? 뭔가 이상하죠? 발견이 안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뭘까요? 어떻게 찾아야 될까요?

자, 이 펜을 들었지만 이렇게 접근하셔돼요. 여러분 낯설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 펜을 들었는데 펜을 누가 보고 있어요? 여러분이요. 여러분의 뭐가 보고 있어요? I AM이요. 여러분의 현존이 보고 있어요. 여러분의 현존의 마음에 나타났습니다. 이 펜이, 돌맹이가 나타났습니다. 모든게 나타났어요. 이 펜도 나타나고, 마우스도 나타나고, 돌멩이를 봤어요, 나무토막을 봤어요, 뭐가 있어요? 모든 것들이 어디서 나왔어요? I AM, 나의 현존이에요. 지금 나의 현존,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성령의 현존이 생각, 감정, 오감으로 나툰 것 뿐이에요. 나타낸 것 뿐이예요. 그거 발견하는 거에요. 돌멩이를 보고 이 돌멩이가 누구 마음에 들어와 있어요? 내 마음에요. 이 오감 정보가 어디 나타나있어요? 내 마음에요. 이게 불교에서 말한 일체유심조에요. 같은 소리에요. 지금 예수님이 일체유심조를 설하는 거예요. 일체가 나로부터 나왔다. 일체가 I AM으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내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다 어디서 나왔어요? 여러분이 평생동안 경험하신 게 뭐예요? 생각, 감정, 오감 밖에 없습니다. 그 생각, 감정, 오감, 돌멩이, 나무토막 다 오감의 대상이죠? 그 오감이 어떻게 있어요? 돌맹이를 볼 때 뭘 봐야죠? 돌멩이 어떻게 존재해요? 나로인해 존재한다는 걸 봐야돼요. 나로부터 나왔고 나에게 도달한다는 걸 보셔야 돼요. 일체유심조를 얘기 하신 겁니다.

이걸 이해못하면 도마복음 헛읽으신 거죠. 그러니까 계속해서 도마복음에서 불교 선문답과 같은 그런 화두를 계속 던지고 계시죠. 그런데 그럼 이거 도마복음이 불교 화두를 베낀 거 아닌가요? 도마복음이 불교 거 아닌가요? 이렇게 또 기독교분 중에도 도마복음 미워하는 분들이 '이거 불교거 아닌가요?' 불교 선문답보다 더 오래된 겁니다. 그럼 이게 선문답의 시조가 되지 선문답을 베낀 게 아니에요.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는 빛이요' '일체 빛 그 자체다' 하는게 '나는 빛이요' 하는게 요한복음하고 통하잖아요. 그러니까 '맞네, 요한복음에 나온 내가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도 예수님의 인격을 말한거겠네' 아니라구요. 그때도 말씀드렸죠. 인격은 진리를 표현한 도구일 뿐이고 본질은 뭐예요? 성령이 진리요, 에너지요, 에너지라는 게 생명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요, 빛이요 다 성령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빛나는 성령, 예수님이 성자인 이유는? 성령을 그대로 구현했기 때문에 성자다. 본질은 뭐다? 나라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라고 할 때 이게 예수님 인격의 내가 아니라 본질로서의 나, 성령을 말한다고 보셔야 됩니다.

각주 1번 볼게요.

[나(영원한 나의 현존)은]

성령을 말합니다.

[I AM]

왜 성부라고 안하나요? 성부는 온 우주의 모든 성령의 본질을, 같은 거에요. 성부라고 하는 거고, 시공 안에서 모든 만물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성부의 영은 성령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혼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니까 성령이라고 불러준 것 뿐이에요. 사실은 성부예요. 성부가 시공안에서 작용을 하면 성령이다. 예수님 안에서 역사를 하고 계시는 주체기 때문에 성령이라고 불렀다. 본질은 성부다. 그 성령 I AM, 영원한 나의 현존이

[모든 곳에 뿌리다. 나로부터 주관이 나오고 객관이 나온다]

그 알아차리는 나로부터 주관은 뭘까요? 에고요, 자, 보세요, 이 현상계가 2개가 있어요. 주객이라는 게 있어요. 다 에고의 세계라고 했는데, 이걸 엄밀히 나눠보면 주관, 객관이 나뉩니다. 그래서 주관이 뭐냐면 에고죠? 나라는 의식이 있고 그 나에 대상이 되는, 이 에고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현상계는 주관과 객관의 만남으로 굴러가죠. 지금 이 펜을 보세요. 펜을 들었죠? 돌멩이를 하나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돌멩이는 대상, 돌맹이를 보고 있는 놈은 나, 그럼 돌멩이와 돌맹이를 보고 있는 나는 I AM 일까요? 아닐까요? I AM이 아니에요. I AM 뒤에 벌써 뭐가 붙었어요. I AM 뒤에 '돌멩이라는 대상을 보고 있다' 하는게 붙었죠? 그러면 보고 있는 에고와 대상인 돌맹이가 서로 수작을 합니다. 이게 현상계예요. 돌멩이를 보는 내가 되버렸잖아요. 제약된 에고잖아요, 제약된 나잖아요, I AM은 제약이 없잖아요, 그냥 내가 현존한다는 것외에 어떤 설명도, 수식어도 없잖아요. '나는 현존한다' 그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주관, 객관이 나옵니다. 예전에 독일의 철학자 피이테가 '나로부터 나와 대상이 적립된다' 이런 주장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양반도 도를 깨달아서 그 소리 한거구요. 영원한 나의 현존, 나로부터 주관이 나오고 객관이 나온다.

[나는 주객 분리 이전의 현존이다]

오타죠. '주객 분리전에 현존이다'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모든 만물이 나로부터 나왔으니까 시작이요, 알파요, 모든 만물이 나로 다시 돌아오니까 종말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하며 나에게서 끝난다. 나무토막을 쪼개 봐라, 돌멩이를 들어봐라, 그리고 대상들(객관)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시공 안에 제약된 에고(나라는 주관)을 넘어서서 일체를 통으로 알아차리는 순수하게 알아차리는 자]

영원한 현존, I AM

[으로 존재하라. 그대들은 만물의 시작과 끝인 나를 찾게 될 것이다]

그 자리가 시작과 끝입니다. I AM, I AM 뒤에 생각이 붙고, 감정이 붙으면 주객이 찢어져요. 그 생각과 그 생각하는 놈, 그 감정과 그 감정 느끼는 놈, 그 오감과 그 오감 느끼는, 감각하는 놈, 이렇게해서 주객이 분리되는데 그 너머에 I AM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I AM에서 시작되서 I AM으로 돌아온다.

(한생)

여러분이 이 지구에 지금 태어나서 살아가시죠, 한 생을 가지고 봐도 나라고 하는 이 현존으로부터 생각, 감정, 오감이 발생하면서 이 우주를 경험하게 되고 내가 사는 세계가 존재하고 여러분이 돌아가실 때 또 그 우주가 철수 되겠죠, 그런데 어디로 돌아갈까요? I AM으로 돌아갑니다.

(하루)

하루를 놓고보면, 자 I AM 상태에서, 깊음 잠 속에서는 I AM이 현존하다가 I AM 상태에서, 여러분 한 생각 일어나서 깨어났다가 깨어나면 시간, 공간, 나와 남이 다 내 우주에 나타나죠? 다시 주무실 때 어떻게 돼요? 다시 I AM으로 돌아갑니다. I AM으로 철수 합니다.

이걸 말하는 겁니다. 나로부터 모든게 나오고, 모든게 돌아간다. 나무토막, 돌멩이 봐라. 거기 내가 있다. 실제로 돌멩이를 쪼개보면 내가 있을까요? 뭐 이상하죠? 오감 자체, 대상 자체에 매몰되서 연구해서는 I AM을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일체 만물은 모두 나에 의해 존재한다. 나는 만물의 뿌리다. 만물은 모두 나의 나타냄일 뿐이다. 만물을 모두 자신으로 알아차리는 나라야 참된 나다]

나와 남이 찢어진 나는 가짜 나다. 이건 아니고, 참된 나의 작용일 뿐이고, 진짜 참된 나, 본체의 나는 우주 모두를 나로 알아차리는 그 나겠죠.

[만물과 나를 둘로보지마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I AM 자리에서 만물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 자리에 내가 현현할 거다]

잘 생각해 보시고, 밑에 보면, 출애굽기에 보면 3장 14절에 하나님이, 여호와가 모세에게 한 말이에요. 나는 어떤 존재냐? 할 때

[나는 스스로 현존하는 나다]

이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었어요. I AM 밖에 할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현존한다. 내가 이 우주를 창조한 나다. 그러면 또 이 우주 말고 다른 우주는? 하는 분리가 일어나요. 이원성이 생겨요? 이 우주 창조했다 그러면 다른 우주는요? 그러니까 그 말도 안해요. 창조했다. 그러면 창조 말고 또 파괴는요? 경영은요? 복잡해지죠, 그러니까 I AM 입니다. 현존한다 밖에 없는거예요. 그러면 '현존 안한다'란 이원성도 또 있지 않을까요? 그걸 초월한 그냥 현존이예요. 영원한 현존이라 그래요. 그래서 영원한 현존.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지금도 존재하시며 과거에도 존재하셨고 장차 존재하실]

'이 얘긴 영원히 현존하시는' 이 소리죠. 영원히 현존하시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즉 나는 모든 그 시간에 시작이자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다)]

아무튼 '모든 것에' 시간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시작이자 끝이 되시는 하나님' 이렇게 얘기하신 거죠. 이게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보면 헷갈리게 하는게 신약에 보면 예수님도 여호와랑 자꾸 겸상을 시키거든요. 그거는 성령의 온전한 인간적 구현자란 의미에서 이제 겸상을 합니다. 실제로 신약에서 인간 중에 하나님은 예수님이니까, 그러다 보니까 창조주라든가 마치 이 우주를 낳은 존재, 여호와 즉 영에만 해당되야 되는 걸 예수님이란 인격에 붙이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면 하나님만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본인을 '내가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이렇게 말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을 말하는 거지 예수님이란 인격이, 인격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건 좀 개념이 잘못된 거에요. 영과 혼을 구분 못 하시는 거예요. 혼은 인격이고, 영은 인격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에 보면 성령은 인격이라고 자꾸 인격성을 성령에 부여하려고 해요. 왜냐? 성령 안에도 의지, 이런 감정 이런게 있다고 봐야 되니까요. 지정의 작용이, 의지, 지성, 감정 이런게 성령 안에 있지 않느냐? 그걸 인격이라고 하는거 아니예요. 그건 신격이예요. 신성한 그 작용을 말하는 거예요. 인간적 의지, 지성, 감정 그런게 있는 게 아니라구요. 그 지성, 감성, 의지의 근원인 신성한 모습이 있는 거죠. 이거 구분 못하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거 관련해서 불교 글도 한번 보실래요. 불교 글 보면 신심명에 이런 게 나와요. 아까 주관, 객관 얘기 관련되서는

[경계(객관이죠)]

경계와 마음, 객관과 주관, 경계는 객관, 마음은 주관입니다. 경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경계고]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고, 뭘 객관 이라고 하냐? 주관의 대상이 객관이다. 이 소리입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정립하게 준다는 거에요. 이원성 속에 있단 얘기죠, 주관은요? 뭘 주관이라고 하냐? 객관을 보는 놈을 주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경계는 그렇죠?

[마음은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되는 거죠.]

이 양단, 이 두가지를 알고자 한다면 이 두가지를 초월해서, 이 두가지가 뭔지 실체를 알고 싶다면

[양단을 초월해서 원래 하나의 텅빔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하나의 텅빔은 양단과 한가지라 온갖 현상을 두루 포함한다]

한가지란 얘기는 원래 텅빈 곳에서 주객이 다 나왔다. 이 소리입니다. 양단의 실체를 알고자해서 보면 결국 우리는 뭘 알게 된다? 텅빔을 알게된다. 따라서 이것도 똑같아요. 돌멩이를 하나 들었을 때 돌멩이와 돌멩이를 보는 내가 현상계에는 존재하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한거예요? 거기서 나를 봐라. 만물의 시작인 나를 봐라. 그랬어요. 그걸 보려면 주객을 초월한 그 자리를 바로 봐야겠죠? 그게 진정한 성령체험이고 성령부흥 입니다.

전등록에 보면 석가모니 얘기도 나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딱 가리키고 한손으론 땅을 가리키면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사방을 눈으로 돌아보면서]

너무 판타지한 얘기죠? 그러니까 포인트는 이거예요.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다. 여기서 이제 나옵니다. 전등록에서도 인용한거고 원래 이제 경에 있는건데

[하늘 위, 하늘 아래를 통틀어 오직 내가 홀로 귀하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어떠세요? 유명하죠? '천상천하에 유아독종이다' 이렇게 대학가에 플랭카드 붙일 때 온갖 응용을 해서 이걸 써먹는 걸 본적이 있는데, 재미있잖아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뭘까요? '내가 홀로 귀하다' 이 '나는' 석가모니란 인격이 홀로 귀하다로 가버리면 이건 재미없는 말이죠? 그러면 '딴 사람들보다 석가모니 혼자 뛰어나다' 이 소리 밖에 안되는 소리고, 찬양하는 소리, 신격화하는 소리밖에 안되고 본질은 뭘까요? 천상천하에 나라는 게 제일 귀하다. 온 우주 통틀어 '나'라는 게 제일 귀하다. 그 나는 참나입니다, 불성입니다.

그걸 깨달은 게 열반경이라는 경전인데요, 그 깨달음을 써놨어요. 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건

[바로 여래장이다]

우리 혼에 감춰져있는, 여래, 여래장 그러면 여래의 창고, 여래의 자궁, 이런 소리입니다. 여래의 씨알이 우리 혼 안에 심어져 있거든요. 우리 혼 안에 이미 성령이 임해있듯이 우리 혼 안에 불교적으로 불성이 임해있어요. 그게 여래장 이예요. 여래의 씨알, 하나님윽 씨알이죠. 기독교식으로 이건 하나님의 씨알이죠. 여래장이 있다. 근데 그게 뭐냐? 나다. I AM 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그게 바로 나라고 하는 거다]

일체 중생이 다 나라고 한다. 이거예요. '나' 근데 나와 남을 구분하는 그 에고의식의 나 말고 그 근원에 뭐가 있어서 나라는 소리가 나올까요? 우리가 나와 남이 다른 나, 이건 쉽게 말하고 다니거든요. '나는' 이럴때 남하고 구분하는 거잖아요. '니네들 말고 나는' 그게 아니고 '나는' 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더 근원이? 나라는 게 어디서 나왔냐? 중생들 속에 나라고 하는 의식의 근원이 있다. 그게 I AM 이다. '중생들 안에 영원한 나의 현존이라는 게 있다' 그게 나다.

[이와 같은 나라는 것이 애초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있어서]

그 순수한 '나'가 있는데 번뇌에 덮이다 보니까 주객이 찢어져서 나는 이 작은 나, 못난 나, 돈 많은 나, 돈 없는 나, 학벌이 좋은 나, 나쁜 나, 스펙에 지배되는 나라고 하는 제약된 나로 알고 살고있다. 이게 무량한 번뇌에 덮여 살아간다. 이겁니다. 무지, 아집에 빠져서 내가 아주 작은 건지 알고 주객 속에서 그 주관이 그냥 나의 전부인줄 알고 살다 가는데, 그래서

[중생들이 볼 수 없다]

주객을 넘어선, 주객을 창조해낸 본연의 내가 있다는 걸 모른다. 이게 열반경입니다. 대승열반경이죠. 소승은 이런 얘기 안하죠. 대승열반경이 말하는 이 나는 참나입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해놨는데 아직도 불교계는 '참나가 있는, 없네'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나라는 게, 나의 근원이 그대로 불성, 여래장 이라는 걸 꿈도 못꾸는 양반들이 불교는 참나를 부정하는 종교네, 뭐 참나는 힌두교의 아트만이네, 이렇게 헛소리를 해요. 똑같은 건데, 똑같은 거에요. 힌두교나 불교나 나라는 걸 불생이라고 보는건, 그걸 얼마나 투철히 깨우치냐에도 대승불교가 압도적으로 영성수준이 높은 건데 나부터 이해를 못하니 뭐 힌두교도 모르고 불교로 모르고 다 모르는 겁니다.

나를 모르면 기독교도 몰라요. 요한복음 보실래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건 성령에 해당되는 거예요. 길, 진리, 성령은, 그러면 나는 뭐겠어요? 나의 본질은 뭐겠어요? 성령이죠. 나는 성자이면서, 분명히 예수님이 '나는' 이랬을 거에요. 그러면 성자를 말하는 것 같지만, 더 본연은 뭐 겠냐구요? 성령이요. 왜? 이렇게 이해하세요. 성자는 성부, 성령을 온전히 혈육으로 구현해내는 존재가, 혈육, 혼과 육이라고 하면 더 정밀하겠네요. 혼과 육으로 정밀하게 구현해내는 존재가 성자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나는' 이럴 때 본질은 성령이라구요.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면 '성령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니까' 예요. 그리고

[나를 통하지 않고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는 것은 나의 본질이 성령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통하지 않고 아무도 아버지한테 못 가니까, 아버지의 영이 아니고 어떻게 아버지를 알아요?

[만약 그대들이 나를 안다면]

즉 성령, 아버지 영을 안다면

[그대를 또한 아버지를 알게 될 거다]

아버지 당연히 알게되죠.

[지금부터 그대들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뵌 거다]

이건 성자가 할 수 있는 말이에요. '나를 봐라, 나 성령 그대로야, 그러니까 나를 보면 성령이 눈에 보이지?' 눈에 보이는 성령이 성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령이 성자다 보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질을 뭐라고요? 성령 때문에 나온 말이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야말로, I AM 이 자리야말로 우리의 참된 생명이며 그 나에 새겨져있는 하나님의 말씀, 형상이 바로 길이요, 진리이다.]

빛이다. 이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과 통하는 내용을 담은 장자 지북유편에 있는 구절이 있어서 여러분도 잘 아실 수 있는데 제가 인용해봤어요,한번 보실래요.

[동곽자라는 분이 장자한테 물어요. 도는 어디에 있나요? 우주의 진리는 어디있나요?]

여러분도 한번 이 질문에 답을 해보세요. 여러분 도는 어디 있습니까? 도라는 것은 I AM 자리에요. I AM 자리, 시공을 초월한 나라는 자리가 도예요. 이 도가 어디 있을까요?

[장자가 대답하길 없는 곳이 없소]

지금 내가 경험하는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 모든 만물의 세계가 다 도의 작용인데 도가 없는데가 어디 있어요? 여러분 다 보세요. 여러분이 알아차리니까 우주만물이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라는 건 여러분의 에고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에고 너머에 참나가 알아차리니까 에고와 그 에고의 대상인 생각, 감정, 오감이 존재하는 거예요. 물론 에고도 미세한 생각이죠. 그리고 에고라는 미세한 생각에 대상이되는 생각들, 감정들, 오감들이 이 우주를 수 놓습니다. 도는 어디있나요? 일체에 다 있죠. 그 얘길 장자가 해줘요. '없는 곳이 없소'

[동곽자가 좀 한정해 주시죠]

여러분 한정을 어떻게 하실래요?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모든게 도의 작용인데 어떻게 한정을 지어 주실래요?

[장자가]

'좀 제발 그만 이거 먹고 떨어져라' 하는 마음으로

[땅강아지랑 개미에게 있소]

보이는 제일 미천한거죠. '땅강아지랑 개미에게 있소' 하면 '알아서 들어먹고 떨어져라' 이거죠. 그랬더니

[어찌 그렇게 하찮은 것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시비를 거니까, '진짜 하찮은 것 보여죠?' 이런 마음이죠.

[돌피나 피같은 잡초에 있소]

이제 동물도 아니에요, 생명이 있다 없다 복잡하게 따지자는게 아니라, 이제 동물도 아니고 식물에도 있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 하찮은데요, 더 하찮은 곳에도 있네요. 기와나 벽돌]

이제 무생물까지 얘기했습니다. 무생물 들었어요.

[어찌하여 더욱 하찮은 곳에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 자식 이래도 안떨어지네'

[똥이나 오줌에 있소 하니까 아닥게 됐죠]

'음'하고 '더 안물어야지'하고, 똥이나 요즘에도 있소, 도가 왜? 똥이나 오줌에도 있을까요? 그 일체가 참나가 알아차려서 존재하는 참나의 작용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게 나로부터 나왔다는 걸 알아야 내 안에 있는 진정한 성령, I AM을 알 수 있습니다. 이 77절만 잘 이해하셔도 여러분 성령접속, 성령체험, 성령부흥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하에서만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지, 성령을 못 깨달으면 예수님 전혀 이해못해요. 혈육의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 자녀를 이해해요? 속성이 다른데, 지배받는 속성이 다른데, 지배받는 우주의 로고스, 진리가 다른데, 예수님 성자를 이해하려면, 예수님 성자를 이해하려면 여러분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 안에서만 성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맛배기만 보여드린 거에요. 제가 말씀드린게 전부가 아니고, 맛배기만 보여드렸어요. 참고하시구요.

《78절 그대들은 광야에 왜 나왔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거는 기존 복음에도 다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조금 있다가 읽어 볼게요. 먼저 도마복음 본문 좀 볼게요.

《왜 그대들 광야에 나왔는가?》

세례요한 보러나온 사람들한테 말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거친 옷입고, '참회하라'하고 물로 세례, 물에 한번 담갔다 빼서 이렇게, '너 정화됐다'고 해주는 우리 '몰라하세요, 몰라만하면 정화돼요'하는 것처럼 거기는 물에 한번 담갔다 빼준거에요. 우리 몰라하라는 게 직접적이면, 예수님식의 성령부흥이라면, 세례 요한은 좀 거죽이죠, 물에 넣었다 빼는 외적인 형식을 중시했죠. 그래서 사실 결국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 겁니다. 성령부음을 시켜주면 거죽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다만 사람들한테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서 정화해야되고, 우리는 거듭나야되고, 참회해야되며, 천국이고 곧 온다는 내용을 세례요한한테 아주 강렬하게 주입받아요. 세례요한 보러나온 사람들한테 '왜 그대들이 광야에 나왔냐?' '너희 광야에 왜 나왔냐?' '세례요한 얘기를 또 제대로 듣고 있냐?' 이 거에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인가?》

갈대밭에 세례요한 보러 왜 왔냐? '깨어나야 된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깨어나라' '진리를 찾아라' 그런데 나왔더니, 세례요한을 봤더니, 세례요한이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좀 무시했겠죠. '저게 뭘 알겠어' 하니까, 예수님이 빡치셔서 '왜 그대들 강야에 나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보러왔냐?

《아니면 그대들의 지도자와 권세가처럼 그런 부드러운 옷》

비단 옷

《입은 사람 보려고 왔냐? 그들은 부드러운 옷 입고 있으나》

비단 옷 입고 있으나

《진리는 모른다》

와서 누가 세례요한의 겉모습을 보고 실망을 했나보죠, 니네 진리 배우러온 거 아니냐? 왜 니네 겉모습 보고 실망하냐? 도가 뭔지 알고 왔냐? 이런 얘기를 하신 거죠.

각주 2번 볼까요.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같은 이야기입니다. 11장 7, 8절에 보면

[그들을 떠나(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께서 대중에게 요한에 대하여 얘기해줘요. 그대들은 뭘 보려고 광야에 나갔는가?]

세례요한에 대해서 좀 실망한, 그 사람 볼품없던데요, 이렇게 하는 사람이 제자들 중에, 군중들 중에 있었나보죠, 그래서 그대들은 뭘 보려고 광야에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뭘 보러 나갔는가?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 보려고 했는가? 비단 옷입은 사람 보고 싶었으면 왕궁에 가봐라]

진리를 못 보고 거죽에 집착하는 당시 군중들을 꾸짖었죠. 그 내용을 이제 전달하려고 도마복음에 넣었겠죠.

각주 3번 보시면, 제가 이제 풀이해놓은 겁니다.

[그대들은 선지자를 찾아 광야까지 갔다. 게다가 그 선지자는 좋고, 부드러운 옷이 아닌 거친 옷을 입은 자이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이다. 그 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포장에 속아서는 안된다. 내면에 감춰진 참된 진리를 깨달아야한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고 싶으시지 않았나? 이 얘기를 제가 풀어봤습니다.

자, 그런데 인용하고 싶은 제가 두 구절이 있었는데, 같이 읽고 싶은 거죠. 중용과 장자 덕충부 글이에요. 한번 보시죠. 성경 보는데 지금 계속 유교, 불교, 장자 가지고 오죠. 유불선의 경전들을, 그런데 잘 통하는 게 신기하실 거에요. 제가 사기치는 게 아니고, 봐보세요. 똑같은 메시지가 있나? 없나? 중용에 보면 이 말이 나와요.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시경이면 옛날 대중가요 가사집입니다. 대중가요 가사집을 경이라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대중가요에 보면,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한 대중가요를 쭉 보면 그 안에 모든 인간의 그런 희노애락이 잘 설명되어있고, 특히 대부분 연애를 노래하죠? 사랑타령이죠? 가장 인간의 본질이 잘 드러나는 그런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잘 설명해주는 글들이예요. 그래서 공자님이 당시 대표적인 대중가요 가사들을 모아서 그 중에 인간의 심리묘사 잘 된걸 뽑아서 시경이라고 해서 제자들한테 중생심을 잘 이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중생심을 잘 절제한다는 게, 희노애락을 잘 조절한다는 게 뭔지 알라고 가르쳤어요. 그래서 공자님이 이런 말씀도 했어요. '시경 안읽은 놈이랑 내가 대화하면 담벼락이랑 대화하는 것같다.' 꽉막혀서 중생심, 에고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 공자님은 에고마음의 전문가입니다. 그 대표적인게 시경에 대한 강조예요. 그 시경에 뭔 말이 있었냐면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걸친다]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다가 더 거친 옷을 입는다. 이런 내용이 나와요. '봐라 시경 이런 말도 있지 않냐?' 요즘으로치면 '그 누구 노래에, 누구 가수 노래 가사에 이런거 있잖아' 그럼 제자들도 다 아는 거예요. '아 그런 가사 있죠' 그 말이 뭐겠냐?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거친 홑옷을 입는다. 이 말이 뭐겠냐?

[그 무늬의 광채가 밖으로 너무 드러나는 게 싫어서 그런거다]

군자들은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너무 뽐내는 걸 싫어한다. 겸손하다. 그래서 군자는 빛나는 비단옷을 입더라도 그 위에 거친 옷을 입어서 겸손을 표현하고 남들과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다. 내 안의 아무리 그런 진리의 빛이 빛나더라도 남하고 조화를 추구한다. 이겁니다. 뭐 쓸데없이 과잉으로 뭐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남과 조화를 이루려고한다. 노자가 '화광동진'이라고 그러죠? '내 빛이 너무 빛나서 남이 눈부실까봐 적절하게 조절해주는 것' 이게 군자의 덕목이다. 그래서

[군자의 길은]

겉으로 보면, 에고가 볼 때는

[어두운 것 같에요]

에고가 볼때는 별거 아닌것 같이 보여요, 너무 평범해 보이니까 하지만

[날로 빛나고, 소인의 길은]

남이 볼 때 화려하게 보이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소인들의 길은

[선명한 것 같은데 날로 사라진다]

그 광채가 날로 사라진다. 너무 화려해 보이는데 조금 만났더니 그 사람이 인격이 형편없어요. 그 사람 별로 보고싶지도 않아져요. 그런데 군자는 평범한 것 같은데 만나보면 자꾸자꾸 내 안에 있는 영성의 빚까지 빛나게 해주니까 자꾸 만날수록 그 사람이 더 빛나 보인다는 거예요. 이 얘기도 있고요,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거죽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속으로 깨어있는게 중요하다. 자기가 속으로 아무리 빛을 얻더라도 겉으로 너무 드러내지마라. 이거구요,

장자 이야기 덕충부편은 덕이 속으로 꽉차서 밖으로 터져나오는 게 중요하다는 걸 논하는 거에요. 그래서 '덕충' 속으로 양심이 꽉 차야 된다는 걸 강조하려다 보니까, 겉으로 형편없는 사람도 속에 뭐가 꽉차있으면 그게 진짜다. 이 얘기를 장자가 하고싶어서 온갖 문제있는 분들이 다 여기에 나옵니다. 보세요,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어떤 사람이]

도인인데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에요. 눈에 보이는 모습은 일반인이 부럽지 않단 말이예요. 근데

[위나라 영공에게 가서 유세]

진리를

[설했더니]

어떻게 돼요?

[영공이 기뻐해서 오히려 온전한 사람을 보니 그 목이 가늘어 보였다.]

이 양반이 목이 두껍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 안에 진리가 꽉찬 걸 알고나니까 포장지가 신경이 안쓰여지는 거예요. 오히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이 사람의 포장지가 더 온전한 것 같이 보이는 거에요. 나중에 일반사람을 보면 '제들은 왜 목이 가늘지?' 이렇게 보였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경험하시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보다 보면 다른 사람 보면 비교가 되잖아요. 나름 스타인 거에요. 영성스타인 거에요. 자, 보세요. 안에 우리가 덕이 꽉차는게 훨씬 중요하다는 거예요.

[큰 혹이 달린 사람이 제나라 환공에게 유세를 하니 황공이 너무 기뻐서 온전한 사람을 보니까]

또 어때요? 왜 목에 혹이 없는게 이상하게 보이더라는 거죠.

[목이 가늘어 보인다]

는 것은,

[그러므로 덕에 뛰어남이 있으면 형체는 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망각해야할 것은 망각하지 못하고]

망각해야할건 뭐예요? 겉모습이요, 형체요, 겉모습이요, 그런데 사람들은 뭘 망각해요? 그 사람이 진짜 양심으로 꽉차있는지 이걸 망각하고 겉모습에 빠지더라. 그래서

[망각하지 말아야할 걸 망각해버리니까 이걸 참된 망각이라고 한다]

이건 뭐죠? 일반인들 얘기하는 거죠. 일반 중생들은 진짜 진리를 보고 겉모습을 망각해야 되는데, 진리를 망각해 버리고 겉모습만 심취하니, 참으로 참된 망각이다. 이 얘기는 뭐예요? 똥멍청이다. 이런 거죠. 일반인들은 진짜 똥멍청이다. 여기까지,

79절 볼까요? 저는 좀 부족할 줄 알고 준비를 좀 더 해왔더니 시간이 79절까지만 하면 되겠네요. 79절, 이 구절도 기존복음에 있습니다만 좀 오묘하게 도마복음에서 조합을 시켜놨어요. 왜 이 얘기를 하는지 보실래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복되도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무리 중에 한 여자가 그분께 말해요. 당신을 배었던 자궁과》

품었던 자궁과

《당신을 먹였던 젖은 복됩니다》

당신 낳고 길러준 그 어머니, 어머니 찬양이죠. '그 어머니가 얼마나 복되신 분입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은 혈육을 칭찬하는 걸 싫어해요. 혈육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혈육에 집착해 있는 당시 사람들한테 혈육의 자녀가 되지 말고 하나님 성령 받아서 성령자녀 됩시다. 이 말하러 온 양반이니까, 세상에 검을 주러 온 거니까, 분란을 일으키더라도 하나님 자녀가 귀하다는 걸 알리러 온 분이니까 이 보살은 어떻게 대답하겠어요? 예수님이라는 위대한 대보살은 뭐라고 얘기하세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이를 진심으로 지키는 자가 복되도다》

나를 낳았다고 복된 게 아니라, 아버지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지키는게 복된거다. '마리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았다' 이 얘기도 아니에요. 마리아가 문제있다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에요. 뭔 말인지 아시겠죠? 나를 낳았다는 것 자체로 마리아, 우리 엄마가 위대한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잘따르는 게 진짜 위대하고, 복받을 공덕을 지은 거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낳고 안낳고에 관심 갖지 말고, 혈육의 문제에 관심 갖지 말고, '그대들이 더 복될 수 있다' 이거예요. 빨리 하나님 말씀만 지키고, 듣고 잘지켜라. 그럼 당신들이 우리 어머니보다 더 복 될 수 있다. 이 말도 있는 거고, 우리 어머니가 위대한 건 사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게 위대한 거다. 이 말씀을 하고 싶은 것도 있는 거구요. 잘 읽어주세요. 그 다음 말이 좀 이상한데요

《그대들이 아이를 배지 않았던 자궁과 모유를 주지 않았던 젖이 복되도다. 할 날이 올 거다》

이게, 도마복음식으로 풀어볼게요. 이렇게 연결 해놨어요. 이 자궁과 젖이 같이 나오니까 연결해 놨어요. 이 두 구절을 하나로 합쳐놨어요. 그래서 이 구절 안에서 도마가 합쳐놨으니 합쳐놓은 사람의 의도에 맞게 읽어 보자구요. 그러니 그대들이 누군가의 어머니가 안되더라도 하나님 말씀만 잘따르면 당신들이 정말 복된 존재가 될 것이오, 누구와 꼭 결혼 안해도 당신들은 이미 하나님 말씀대로 따르면 복된 겁니다. 이 얘기를 예수님이 하셨다고 본거죠. 도마는 이렇게 완결을 지었습니다. 이해되시죠?

자, 그런데 각주 4번을 보시면 이게 기존 복음 관점에서 보면 좀 이상한 얘기라는 걸 아실 수 있어요.

[무리 중에]

누가복음 11장 27, 28절 보면, '무리 중에'

[한 여자가 소리 높여 이르기를 당신을 밴 자궁과 당신을 먹인 젖이 복됩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바로 얘기해요,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선명하죠. 이 구절하고 또 누가복음 23장 27, 29절 내용이 이런게 있습니다. 기존 복음에서는 뒷구절은 사실은 다른 내용이라는 거예요.

[많은 백성들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

어딜 따라오냐?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 길을 슬퍼하면서 따라 옵니다. 예수님이 곧 돌아가실 판이에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돌아보면서]

지금 많은 남성, 여성들이 슬피울며 따라 왔는데 이제 여인들한테 얘기를 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말고 그대들과 그대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보라, 그날이(심판의 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잉태할 수 없는 이와 아이 낳아 본 적 없는 자궁(배)과 젖먹여 본 적 없는 그 가슴(젖)을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은 심판의 날에 다 죽어나갈 때 자식 없는 사람이 오히려 낫구나. 하는 그런 날이 올 거다.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자궁과 젖이 같이 나오잖아요? 그것 때문에 합친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따로 이런식으로 얘기하셨을 수도 있고요. 자료를 제가 제시해드리고 생각은 여러분이 각자 하시기를 바라면서, 다만 도마복음식으로 읽을 땐 어떻게 읽으면 돼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복되도다. 하는 포인트를 가지고 읽으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은 적이 없더라도 하나님 말씀 듣고 따른 사람이 위대하지 나를 나았다고, 예수님인 나를, 성자인 나를 낳았다고 복된거 아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다. 도마복음은 그런 취지로 이 글을 여기 정리, 편집해서 올렸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도마복음 77, 78절 다뤄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참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