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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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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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죽음을 맛보지 않는 비결
강의일자 2019. 12. 21. 土.
게시일자 2020. 02. 15.
동영상 길이 44:30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2Um-LjpZEuQ


그럼 진도 나가겠습니다. 1절에 대한 각주가 있죠. 2번 한번 보시죠. 4페이지 각주 2번 이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는 영적 육체’를 얻어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의 성전이 영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육, 육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강조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이 영이 하나님 이라면, 사실 아까 성령이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한테 임한 존재 거든요. I AM 자리, 영원한 현존, 영원히 현존하는 나, 영원한 나의 현존, 그냥 영원한 현존, 영원하게 현존하는 자리는 하나님 밖에 없거든요.

여러분 존재, 우리가 혼을 나라고 생각하잖아요. 에고의 마음, 남하고 나를 다르게 여기는 나의 개체성, 내 정체성은 에고죠. 이 에고의 뿌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 이걸 받아들이는 게 성령을 받는 거예요.

'성령 받아라' 이게 기운을 쏴주는게 아니고, 사도들이 '성령 받아라' 하고 기운을 쏴줘도 그건 기운을 쏴준 거예요. 그 기운 받아서 의식이 고양 되었을때 뭘 깨닫는 거예요. 성령을 받는 거예요. 성령을 깨닫는 거예요. 결론은 안수를 하고 어떤 방법을 해도 성령을 받는 거지 나머지는 그냥 그걸 돕는 거예요.

사실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원래 임해계신 하나님을 각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각성이라는 말이 좋아요. 받았다고 그러면 당시 사람들이 성령은 하나님이 주는 걸로 알아요. 쏴주는 걸로 알아요. 그러니까 비둘기가 내려오고 성령에 대한 이미지가 이상하게 왜곡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비둘기처럼 생겼을까요? 그건 다 상징이죠. 그러니까 상징이지, 성령 자체는 하나님의 영이예요.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의 신령한 영이 우주 천지 만물 안에 내재해 계시면서 만물을 질서있게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영을 우리가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제대로 성령을 받으신 분은, 성령 체험하신 분은 바로 뭐라고 하겠어요? 아까 얘기했듯이 성령을 제대로 받으면 '아버지' 소리가 나옵니다. 어머니 라고 하던지, 아버지 라고 하던지, 나의 뿌리구나 하는 걸 알아요. '내 존재, 에고의 뿌리구나. 내 존재의 뿌리구나, 내 진짜 부모님이구나.' 하는 걸 알고,

그래서 도마복음에서도 어머니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소리가 나옵니다. 혼 입장에서는, 영. 그래서 성령 받아야 여러분이 하나님 자녀인줄 안다는게 그거예요. 성령 받아야 성자를 알게 됩니다. 성부도 알게되고, 성자도 알게 됩니다. 받아야, 아,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걸 알아야 성자가 어떤 존재인줄도 알아요. '하나님의 자녀 중에 제일 맏이구나' 라는 걸 알아요. '아버지 뜻 그대로 사시는 인간 중에 하나님 이시고 우리 중에 맏이구나' 하는 걸 내가 하나님 자녀가 되지 않고는 성부도 모르고 성자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게 결국 성령, 성령 받아야 성부도 알고 성자도 아니까 이게 삼위일체죠. 셋이 하나로 돌아가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나도 거기에 같이 성도가 되서 동참하게 됩니다. 또 다른 삼위일체예요. 성부, 성자, 성도의 삼위일체, 왜냐? 성령은 성부의 영이니까, 성부, 성자, 성도의 삼위일체가 또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맏이, 그리고 맏이의 형제, 자매들, 이렇게 해서 또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다 나와요. '나랑 하나가 되면 아버지랑 하나가 되어 우리 같이 하나가 된다. 그래서 '이 우주에서 천국을 확장시키자.' 하는 거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자! 여기서는 지금 죽음을 맛보지 않는 영적 육체를 얻는다는 것의 의미, 영혼육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 수 있다. 다음장에서 더 자세히 해드릴게요. 일단 여기까지 하고

“기독교의 순교 성인이자, 마지막 로마 철학자 혹은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로 불리는”


그러니까 철학자이자 크리스천 입니다. 이 분이 누구냐면

“보에티우스”

인데요. 그러니까 이 분은 성 보에티우스죠.

“그의 대표적 저서 철학의 위안에서 말하는”

여기에

“신에 다가간 성인들이 지니는 ‘재난과 병을 겪지 않는 에테르의 몸’에 해당한다.”

이게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그리스 로마 철학과 기독교가 만났어요. 이 분은 로마 철학자의 마지막 후계자이자, 또 새로운 철학의 시작점에 계신 분인데 거기다 크리스천 이죠. 이 분에게는 영적인 몸이 어떻게 해석돼요? 소크라테스가 주장한게 신들이 계신 곳에, 제우스 신이나 이런 분들이 계신 곳에 지금 우리가 올림푸스 산이라고 하죠. 그곳에 가면 에테르로 된 몸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산다. 이렇게 얘기했거든요. 그게 이제 만난거에요. 그러니까 이것도 재미있는 해석이니까, 신에 다가간 성인들은 불변하는 에테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에너지예요. 에너지의 몸을 얻는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기의 몸' 이죠.

““물질적인 육체가 있다면 영적인 육체도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4) “살과 피를 지닌 육체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받지 못하며, 썩어서 부패하는 것으로는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15:50)”

이 알들은 뭘까요? 신기하죠. 아시면 의미가 있는 그림들 입니다. 그전에, 두 구절만 더 보죠.

““만약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육체)이”

장막집이라는게 육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이런 집들, 장막으로 만든 집들, 이게 육체예요. 왜냐? 무너지는 집이거든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영적인 몸, 부활체),”

이게 부활체를 말합니다.

“즉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부활체 하나님이 주실 걸 압니다.

“우리는 여기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부활체)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내 육신 이외에 부활체를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이 분도 지금 부활체를 얻어서 올라가려면 부활체를 쏴주셔야 내가 받아서 이 육신을 벗고 올라갈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심판의 날에 그렇게 해주셨으면 하는거죠.

내가 그때까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성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성령의 뜻대로 살고, 육정의 뜻대로 안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시여 부활체를 쏴주세요' 하는거죠.

“이렇게 옷을 입는 것은 우리는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입니다.”

우리가 죽었을때 육신이 없는 벗은 자, 육신이 없는 존재를 말해요. 그러면 이건 사망이거든요. 영생은 영적인 몸까지 얻어야 진정한 영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 거죠. 영적인 육체가 없이, 죽었을때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것처럼 탄식하는 것은, (육체를) 벗어버리고자 함이 아니요, (영적인 몸을)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육체 위에 부활체를 쏴주세요.' 이겁니다

“죽을 것(육체)이 생명(영생)에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죽을 몸이 영생의 몸에 삼켜지게 하고 싶다. 그러니까 이 발상에는 뭐가 있죠? '에테르 몸은 우리 육체의 몸과 같이 공존할 수 있다.' 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지금 육체의 몸을 입은채로 그대로 부활체를 덧입고 싶다는 거예요.

이것도 묘한 정보인데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이미 부활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닐까요? '육신안에 부활체가 공존할 수 있더라' 하는 걸 아니까 '내가 죽고 싶다는게 아니라 죽었을 때 맨 몸이고 싶지 않습니다. 육체를 주세요. 그런데 제가 죽고 싶다는게 아니구요 지금 이 몸 위에 덧입혀 주시라고요.' 이게 되게 구체적인 얘기예요. 지금 에테르 몸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얻어야 되는지 모르시니까 하나님에게 빌고, 탄식하고 계신거죠. 감각은 있어요. 어떤 몸인줄은 알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런 몸이 있다는 걸 사도들에게 보여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감각은 있단 말이예요. 일정 정보는 있어요. 그런데 더 구체적인 정보는 없는 상태죠.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이를 보증하시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고린도후서 5:1~5)”

그러니까 성령 받은 것 자체로 영생이라고 안보시는 거죠. 아시겠죠?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은 받았어요.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았고 혼도 거룩하게 하는 사람 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열심히 성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간절히 바라는거 하나가 뭐예요? 영적인 몸을 죽어가는 몸 위에 덧씌워 주시기를 그래야 내가 부활의 날에 우화등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부활이 곧 올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예요. 그러면 '바울도 살아서 부활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라고 하듯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울 입장에서는 부활의 날이 곧 온다고 생각 했던 분이예요. 그러니까 곧 나팔소리 들리고 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지금 빨리 내가 살아 있을때 부활의 날에 올라가게 덧입혀주세요.' 그런 관점에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되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는거, 성령은 뭐가 돼요? 영적인 성령 각성이 칭의죠? 그리고 혼의 거룩화 작업이 성화구요. 이 육의 부활이 영화인데, 영적인 몸을 얻는거죠, 육의 부활. 영광스러운 몸을 얻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부분에 (영화) 대해서는 탄식하고 있는데, 이거는 (칭의, 성화) 바울이 잘하는 거란 말이예요. 바울이 답을 얻은 부분이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에 대해서는 달라고 탄식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도 보실 수 있고,

또 여기서 보셔야 되는게 칭의, 성화는 결국 성령을 받아서 이루어진거 아닙니까? 성령을 받아서 칭의가 됐고, 성령의 뜻대로 살면서 성화가 이루어 지는데 이거는 보증이라고 보는 거예요. 영생의 보증이지 실제 영생은 뭐라고요? 영화가 영생이라고 보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지금 보증은 해주셨다.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앞으로 영적인 몸을 얻을 보증은 얻었다고 보는 거예요. '나는 영생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라고 확신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체적 방법은 하나님이 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거죠. 그게 도마복음과 입장 차이 입니다.

도마복음은 성령으로 보증받고 성령에너지로 자기가 거듭나 버리면 되는 거예요.

이게 관점 차이다. 이게 예수님과 바울의 차이 입니다. 바울과 예수님의 차이. 펜이 사라졌다. 아, 자! 재미있죠? 영생의 보증이다. 보증은 받았지만 영생의 확증은 영화때 얻어야 된다. 이런 부분에서, 그래서 예수님 가르침, 바울의 가르침을 충돌을 시키다 보면 더 선명히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을 잘 캐치 하시고, 방금 거기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5절 이야기 였습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17절 보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그러면 이때는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혼과 육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 이라는 걸 아시겠죠. 여러분의 마음도 여러분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 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깃든 곳은 하나님의 성전 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성전을 정화하시죠. 그게 뭘 상징하냐면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의 건설을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볼장 다 봤다, 끝났다' 예요. 요한복음의 입장은 '볼장 다 봤다, 끝났다.' 성전에 대해서 저주하는 내용이 그겁니다. '무화과 너는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 끝났다' 그때 성전 가시면서 하는 얘기예요. '끝났다' 이 성전은 곧 파괴될 것이다. 진짜 성전은 뭐라구요? '우리 한명한명의 몸과 마음이 그대로 성전이다. 각자대로 성전을 온전하게 하라' 사실은 충격적인 얘기들을 막 하신 거예요.

이게 구약에서 신약으로 오는 겁니다. 구약은 성전 따로 지어놓고 이걸 상징하는 걸 성전으로 지어 놨어요. 성전 여기 보세요. 하나님 모시는 실제 성전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여기가 뭐라고요? 성소 뜰 (육), 여기서 불피우고 뭐 하죠? 제물들 처리하고 하죠. 그다음에 여기가 (혼) 뭐예요, 성소. 여기 영자리가 지성소, 여기 지성소 안에 들어가야 성괘가 있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개 넣어놓은 횡금으로, 도금 했나요? 황금 성괘가 있습니다. 모세가 여기까지 들어가서 지성소에서 하나님하고 만나요. 여기는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밑에 설명 보세요. 4번 설명 먼저 볼께요.

“우리의 마음(혼)과 몸(육)이야 말로 하나님(영)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소의 뜰’은 ‘육체’와 같으며, 제사장들이 출입하는 ‘성소’는 ‘혼’과 같으며,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출입하여 제사를 지내는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는 바로 ‘영’과 같다.”

하나님의 영과, 성령과 소통하려면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야 돼요? 우리의 영 자리까지 들어가야 돼요. 자, 아시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지성소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까지 들어가야 돼요? 영 차원까지 가야 돼요. 혼이 영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이 영 자리에서 성령을 만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성령)과 소통하는 이 내면의 지성소야 말로, 우리의 ‘참된 영’(참나, I Am)이다.”

참나 자리죠.

“참된 영 안에 ‘하나님의 형상’ 즉”

참된 영에 새겨져 있는 기본값이라고 아까 얘기했죠.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형상

“‘진리’(사랑의 진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지금 거기, 물질로 만든 이 성전에는 진리가 뭐로 새겨져 있어요? 십계명, 돌멩이에 십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영에 뭐가 새겨져 있어요? 십계명이요. 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겠죠.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겠죠. 십계명보다 더 온전한, 영에 새겨져 있는, 언어화 되기 이전의 진리가 새겨져 있겠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그 뜻이 터져 나오면 다 율법 지키는 사람이 돼요. 그래서 신약의 시대는 다 성령 받아서, 자기 안에서 성령이의 법이 육신의 법을 누르고 구현돼 버리는 시대가 온다는게 예언되어 있던 신약의 시대 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왔다' 라고 선포하신 거예요. '이제는 신약의 시대가 왔다' 그러니까 바리새파 같은 '중간 브로커들 필요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 브로커들 필요 없다. 물질의 성전 저거 파괴될 거다.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다 성령 받아서 하나하나가 빛의 자녀, 온전한 자녀, 하나님의 온전한 성전으로 거듭나야 된다. 칭의, 영화, 성화에 대한 가르침들을 다 주신거죠. 바울이 그 부분은 나중에 그걸 잘 정리 한거죠. 그래서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24)”

이게 뭐예요? 지성소 예요. 아시겠죠? 영과 그 영에 새겨져 있는 진리 안에서 예배 드려라. 그러니까 육신 차원에서 벗어나서, 혼이 육신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돼요? 일단 혈육의 자녀에서 벗어납니다. 그 혼이 온전히 영에 몰입할 때 혼이 생각, 감정, 오감을 멈추고 온전히 영에 몰입할 때 지성소에 들어간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통합니다. 오직 영과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과 통합니다. 그 혼은 이제 빛의 자녀가 되는 거죠. 빛을 받았으니까 빛의 자녀가 되고 온전한 자녀가 되는 겁니다. 아직 혈육의 자녀로써의 기본값은 있다고 그랬죠. 계속 충돌은 나지만 충돌이 나는 중에 정복이 되면서 하나님의 왕국이 내 안에서 온전히 선포 되겠죠. 이런식으로 우리가 자기 영혼에서 천국을 개척해야 돼요. 그리고 이 땅에서 천국을 확장 시켜야 돼요. 나만 천국 갈게 아니라 남들도 같이 가게,

그 얘기가 바로 2장에서 이어져 나오는데 아직 1장에서 하나 더 볼게 영혼육 이 문제요, 어디다 그릴까요? 여기 지성소 얘기는 다 했으니까, 알이 여러게 있는 그림 설명 드릴께요.

자, 여러분 영, 혼, 육이 있는데 이 육은 지금 죽는 육이죠. 색깔을 좀 탁하게 그려 봤습니다. 이건 죽는 육이예요. 사멸하는 육체를 지닌 영혼, 자! 아까 죽은 뒤에 벌거벗는 상태가 뭐죠? 이 상태죠. 죽은 뒤에 벌거벗은 상태, 영혼만 남습니다. 그럼 이거는 영생이 아니예요. 사실은 이때 성령을 깨달은 혼은 아직 부활체를 못얻었어도 영생의 보증은 받은 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 보증받은 사람은 나올 수 있어요. 이 분들은 예수님 논리로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분들은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셔야 돼요. 그때와서 해주겠다는 거예요. 문제는 살아서 영적인 육을 얻어버린 사람도 있겠죠. 이 양반들은 그냥 천국을 바로 침략해 들어 갑니다. 불멸의 육체를 지닌 이 육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천국에 가 버립니다. 이 논리로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증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까처럼 육이 없는 이 영혼의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던 그 상태다. 온전한 영생은 아직 아니다. 그래서 만약에 보증받은 존재라면 천국의 영주권자, 시민권자는 될 수 있다.

자! 보증이 뭘 보증 받았을까요? 왜 보증이라고 할까요? 재미있는게 불교랑 비교하면 성령 각성자가 칭의죠? 그럼 내 안에 성령이 늘 임해계시는 그 경지, 그 다음에 혼이 거룩해지면 성화죠. 생각, 감정, 오감까지, 육근 작용, 불교에서는 육근 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 육근 작용, 마음과 오감의 작용이 점점 불법대로, 진리대로 굴러가는 경지, 이런 경지로 나아가요. 이러면 불교에서는 1주 (칭의) 보살 그럽니다. 성화는 1지 보살, 바둑으로 치면 1단, 이쪽은 1급, 이 정도가 (성화) 되면 불교에서 뭐라고 하냐면 불퇴전 이라고 그래요. 뒤로 물러나지 않는 경지, 왜냐면 칭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자리 참나를 참나라고 아까 불렀으니까 I AM 참나 자리가 늘 내 안에 현존해 있으면, 불교에서는 그걸 불성이라고 봅니다, 참나가 현존해 있으면 1주 보살 그래요. 그리고 이 불성에 접속만 되는게 아니라 이 때는 (칭의) 접속만 확실한 거예요. 불성이 지닌 기본값 이게 불교에서는 육바라밀 입니다. 육바라밀이 내가 안하려고해도 자동으로 기본값이 설정되어 있는게 육바라밀이라, 내가 안하려고 해도 육바라밀이 내 안에서 자꾸 발출되면 발보리심, 깨달은 마음이, 육바라밀의 마음이 계속 발출한다고 발보리심의 경지에 들어가 버려서 1지 보살이 됩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1지 보살이 되면 확실하게 이 때도 1주 보살만 되도, 여래의 집안에 태어났다 이런 말을 써주는데 1지 보살이 되면 확실하게 범부의 자녀가 아니고 여래 집안의 자녀가 된다라고 화엄경에 나옵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해석해보면 어떻게 돼요? 기본값이 바꼈다. 탐진치 기본값 가지고 있던 존재가 확실하게 자동으로 육바라밀이 나올 정도면 이제 기존 기본값에 더해서 확실히 새 기본값이 작동하고 있다. 이거 불퇴전 입니다. 뒤로 못무른다. 참나에 접속만 되도 못무른다. 참나의 기본값 진리대로 굴러가는 것을 못막는 경지 입니다. 잘한다는 아니어도 자동으로 굴러가는 경지, 이게 잘한다고 하면 완덕의 경지로 가겠죠. 성인의 경지로, 여기서 좋은 말이 불퇴전 입니다.

기독교식으로 이 보증이 불퇴전 이예요. 영생 보증 받았다는 것은 이제 퇴보할 수 없다는 거예요. 영생에 대해서는 물라날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 얻게 되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결국 영생을 얻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제가 천국의 영주권자, 천국의 시민권자 그러는 겁니다. 통치권자로 갈 수 밖에 없는 그 자리에는 들어섰다. 이해되시죠, 성령 받았는데, 성령 자체가 불생불멸의 영인데, 내 영혼이 육신은 못얻었어도 내 혼이 영과 하나가 됐는데 나는 영생이죠. 이미 일종의 영생이다. 육신의 영생까지 얘기할 때는 이 부분이 좀 소홀히 될 수도 있지만 이건 분명히 영생이라고 봐서 저는 '천국의 영주권자는 확실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재미있는게 제가 이 가설을 주장하고 칭의는 천국의 영주권, 성화는 천국의 시민권 이렇게 주장했는데 놀랍게도 제가 성경을 보다가 사도 바울이 자기는 육신은 로마의 시민권자지만 자기의 혼은 천국의 시민권자라고 주장하는 걸 봤읍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요. 이걸 보고 한건 아니었는데 맞아주니까, 거기서 영주권자라고 주장하면 제 이론이 흔들리는데 딱 정확히 그 얘기를 해주더라구요. '나는 육신은 로마의 시민권자지만 영혼은 천국의 시민권자다'

정확히 이중 국적자의 삶을 사시는 겁니다. 이래야 하나님의 자녀예요. 두개의 기본값이 돌아가는 걸 알아야 돼요. 그럼 이중 국적자 입니다. 이 중에 이게 확실히 승해버리면 확실하게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성령의 기본값이 내 삶을 주도하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확실하게 주도하기 시작하면 점점 영성이 계발 되다가 예수님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나는 성령의 뜻대로만 말하고 행동했다.' 이겁니다. 그럼 이게 완덕의 경지예요. 성령의 기본값이 완전히 잡아먹은 거죠. 육신의 기본값은 여전히 작동을 하겠지만 그 세력이 미약해지고 성령의 기본값이 삶의 전반을 이끄는,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럼 육신의, 혈육의 자녀로써의 기본값은 작동 안했을까요? 아니요. 배고프면 먹고 이건 여전히 혈육의 자녀로써의 작용이죠. 하지만 배고플때 양심에 안맞는 것은 안먹었다는 거죠. 이거는 확실하게 됐다. 성령의 뜻대로 나는 먹고 마시고 다 했다. 자, 이런식으로 접근하시면 이해가 쉬우실 거라고 봅니다.

자, 2장까지 끝났습니다. 2장이 아니라,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1절, 2절 해놨군요. 장으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적어놓은대로 절로 갈께요. 2절 가볼까요? 1절은 세게 시작 됐죠. '죽음을 맛보지 않는 비결' 자, 2절은요. 도마복음은 이래서 어렵습니다. 맥락이 없어요. 맥락이 없이 예수님의 어록을 정리해 놓은 거잖아요. 앞의 얘기랑 뒤에 얘기랑 이어지는 상황이 없다는 거죠. 또 새롭게 보셔야 돼요.

《2절 찾는 것을 멈추지 말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논어도 그래요. 논어도 지금 각 구절, 구절들 간의 관계를 맺을 수 없잖아요. 그냥 그때그때 적어놓은 어록인데, 그냥 대충 주제별로 묶어놨을 뿐이지, 자, 그런데 보세요. 이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국을) 찾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마가 편집해서 배치한 어떤 의도는 있겠죠.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억지로 이을 필요는 없고, 예수님은 항상 한결 같은 얘기를 하셨을 거고, 도마가 그 이야기를 주제별로 묶었을 수는 있죠. 그 점은 감안하시고 보시고요.

지금 '죽음을 맛보지 않는 법' 크게 질라놓고 그 다음 첫번째 한 얘기가 이 얘기라는 것도 의미는 있죠. 보세요. '천국을 찾는자들' 천국을 이라는 건 제가 넣은 겁니다. 원래 원문에는 없어요. '찾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찾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도마복음의 어려운 점이 이겁니다. 어떤 맥락도 없이 무조건 갑자기 '찾는 자들은 찾는 걸 멈추지 말라' 뭘 찾아야 될지도 못들었 거든요. '예수님 뭐라구요?' 이래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천국 이라고 넣었습니다. '천국을', '성령을, 천국을 찾는 자들은 발견할 때까지 찾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 천국 아니면 뭐 겠어요? 성령 아니면 뭐 겠습니까?

《그들이 발견했을 때,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그들이 혼란스럽게 될 때 놀라게 될 것이며, 그들은 모든 것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복한 뒤에 그들은 쉬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어떠세요? 도마복음 좀 맵죠? 갑자기 코를 한방 맞은 기분 아닙니까? 이걸 어떻게 해석 하느냐가 해석하는 사람들 역량에 달려있기 때문에 도마복음이 어렵습니다. 자! 제 식으로 해석할께요. 5번 보세요. 5번 각주

“에고의 마음이 모두 정화되어, 성령의 뜻을 어기는 법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예요? 제가 말을 좀더 정리해야 겠네요. '에고의 마음이 모두 정화되어, 성령의 뜻을 어기는 법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쉬게 된다는게 그런 뜻 이라는 겁니다. '에고의 마음이 모두 정화되어, 성령의 뜻을 어기는 법이 없는 경지까지 간다' 이게 우리 논어에서 보던 그거 아닙니까? 종심소욕 불유구의 경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天命)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從心所欲 不踰矩, 논어 「위정」”

욕심이 하자는대로 해도 양심을 못 어기는 경지, 이게 예수님이 말하신 성령대로 말하고 행동하신 경지죠. 자! 요한복음 14장 10절 볼까요?

““그대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는가?”

아버지랑 나랑은 하나다.

“내가 그대들에게 하는 말은 나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0)”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가 하시는 거야.' 이런 경지까지 가려면 완전히 제압 되어야겠죠. 기본값의 중심이 확실히 넘어가야겠죠. 성령의 법대로 살아가야겠죠. 그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모든게 정복된 뒤에 쉰다는 것은 그 경지 간다는 거구요.

자! 6번 볼까요? 전체 글에 대한, 방금 5번은 '정복한 뒤에 그들은 쉬게 될 것이다.' 그거 하나 푼거구요. 6번은 전체글에 대한 설명 입니다. 보세요.

“먼저 우리 내면에서 ‘참된 천국’인 ‘성령’(참나,영,I Am)을 되찾아야 한다. 이 ‘영원한 나의 현존’을 늘 체험하지 못하고서는”

참나랑 접속이 안되면, 영원한 나의 현존과 접속이 안되면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의 속성이 발현되지 않아요. 그럼 여러분은 바리새파가 되야 돼요. 코스프레를 해야 돼요. 고등침팬치가 진정한 인간이 된게 아니라 인간 흉내를 내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게 바리새파예요. 예수님이 지적했죠. '그런식으로는 절대 천국 못간다.' '사람 못된다' 이거죠. 그러면 고등침팬치일 뿐이다. 기본값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이 숨겨 놓은 기본값이 있다' 하는 거죠. 성령을 찾으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거둬지고 성령의 뜻대로 우리가 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영원한 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이 된다.”

지금 이미 고등침팬치로 분리되서 살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 고등침팬치로 살아가고 있는 분도 사실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왜냐? 뿌린대로 거두게 해주는 분이 하나님 이니까, 하나님이 지금 다 경영하고 계신데 안타까운건 식물, 동물처럼, 동물 중에 상위 동물인 고등침팬치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기본값만 있으면 우리가, 개한테 예수님이 하나님 뜻대로 따르라고 따로 말 안하거든요. 개도 하나님이 정한 기본값대로 잘살고 있잖아요. 소도, 돼지도, 닭도... 문제는 사람이예요. 사람은 고등침팬치의 기본값만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써 기본값도 있단 말이예요. 숨겨져 있죠. 되찼기만 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 자녀가 돼요. 이 얘기는 안해줄 수가 없는거예요. 이 얘기 안해주면 이거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자녀가 먼저 된 사람이 다른 중생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살아봐라' 이렇게 할 수가 없잖아요. 한명이라도 구제해야 되고, 99마리를 구제했어도 마지막 한마리가 더 애타는 법이거든요. 이게 대승정신 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대승 보살 이세요. 중생 구제하러 일부러 오셨고, 한명이라도 구제 못하면 안된다라고 생각하셨고 구제라는 건 성령 각성을 시켜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아가 영생을 얻게 하는 것, (32:48)

불교적으로 다 설명됩니다. 앞으로 미륵 보살이 불교의 메시야죠. 와서 용화세계, 그게 지상천국 입니다. 용화세계 열고, 다 견성시켜서, 부활체에 해당하는게 불교에서는 뭐겠어요? 의성신, '마음으로 만드는 몸' 이라는 에너지 몸이 있어요. 의성신 만들게 해서 천국에 살게 해줄 수 있죠. 지상극락을 만들어 줄 수도 있죠.

예수님이 주장하신게 그거예요. 그런게 불경에도 녹아 있어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봅니다. 나온 시기가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참고하시고

자!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맹목적 ‘믿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한 믿음은 무지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지잖아요. 하나님과 소통이 일어나야 되는데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각성하지 못하고 그냥 믿고 있다는 것은 믿음이 많은 고등침팬치 인거죠. 거기서 어떤 구원이 오겠습니까? 예수님에게 부정당한 바리새파도 열심히 믿었을 거예요.

“예수님은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아서 ‘진정한 믿음’, ‘확신’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살아서 확신하지 못하는 진리를 죽은 뒤에 얻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살아서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서 그토록 찾던 ‘천국’(성령, 참나)을”

지금 성령과 참나를 왜 자꾸 천국이라고 하느냐? 자! 보세요. 여기도 (영) 천국 입니다. 여기는 확실한 천국 이예요. 천국은 뭐냐? 하나님의 주권이 구현된 곳이 천국이예요. 무슨 영토 개념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의 주권이 구현된 곳이 하나님의 왕국이죠. 성령은요? 가장 확실하죠 하나님의 법이, 십자가의 진리가 온전히 구현되고 있는 자리는 하나님의 영 자리 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대로의 영이거든요. 이 성령을 뭐라고 합니까? 진리의 영이라고 불러요. 진리 그대로의 영이거든요. 그런데 이 영이 혼에 임하면 어떻게 돼요? 혼에서도 하나님의 질서가 선포되어야 겠죠? 육에서도 하나님의... 자! 혼에서, 생각, 감정, 오감에서 하나님의 질서가 선포되면 육은 따라 오겠죠. 나중에 육은 부활까지 하겠죠. 이런식으로 천국은 확장됩니다. 그래서 가장 본체로써의 천국이고 (영) 나머지는 현상으로써의 천국 입니다. (혼, 육) 다 천국 이예요.

이것도 신기하게 똑같아요. 불교도 이 영 자리가 불성 자리인데, 불교에서 천국이 정토인데, 자성정토라고 그럽니다. 성령은 자성정토예요. 그래서 천국이예요. 본질의 천국, 본질적인 천국, 나머지 이거는 (혼, 육), 불교는 일체를 마음의 작용으로 보니까 유심정토라고 그럽니다. 마음으로 만들어진 정토, 육근 작용이 움직이는 세계니까, 전체가 정토다. 현상으로서의 천국이고 정토죠. 자성정토는 시공을 초월한 본질로서의 천국이자, 정토.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은 현상으로서의 천국이자, 정토. 서로 불교랑 잘 만나니까 소개 좀 해드렸습니다.

자! 제가 자꾸 성령과 참나를 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겁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쓰셨어요. 성령을 천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예수님이 너무 많습니다. 바리새파들에게 '천국이 여기왔네, 저기왔네, 지상에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지상에 천국이 왔다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믿지마라 천국은 이미 그대들 안에 있다' 그래요. 그럼 바리새파가 혼이 거룩 합니까? 아직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뭐예요? '성령이 임해있다' 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성령이 이미 너희들 안에 다 임해 계시다.' 예수님은 바로 다 얘기 했어요. 바리새파는 예수님 따르던 사람들도 아니예요. '그대들 마음 안에 있다.' 긴가민가 하면서 예수님과 대화하던 바리새파에게도 '이미 천국은 와있다' 라고 그랬어요. '이미 그대들 안에 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천국이 있었겠어요? 천국은 하나님의 법이, 통치가 이루어진 곳이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무슨 바리새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요? 성령 자리에서만 그 말이 가능 합니다. 왜냐? 아직 그들은 성령을 각성해서 거룩해진 존재가 아니니까, 이게 논리적인 추론이죠. 자! 그토록 찾던 천국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럼 끝내줄 거 같죠? 끝내주기도 하지만 뭐가 돼요? 에고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왜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칭의稱義의 경지), 우리의 ‘에고’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놀라게 된다.”

여기서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 그겁니다. 칭의의 경지, 칭의에 들어가면 성령이 임했는데 거기서 알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법대로 따르려는 내가, 나의 마음이 있는 만큼 또 육신의 법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혼란에 빠집니다.

그때 '모든 것을 정복하게 될것이다' 라고 했잖아요. 혼란스러운 뒤에, 혼란스럽게 되서 놀란 뒤에 모든 것을 정복하게 될거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 즉 에고가 가진 모든 악의 가능성을 정복해 나간다(성화聖化의 경지).”

는 겁니다. 그게 성화의 경지를 말하는 거예요. 처음에 놀랬다가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게 성화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늘 양심이 욕심을 제압하는 경지(양심 51%이상)에 이른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성령의 뜻을 마음이 어기지 법이 없어지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겁니다.

이해되시죠? 아무튼 재미있으시죠? 기독교는 쉽습니다. 저는 불교랑 또 다른 기독교의 강점을 소개해 드리자면 불교는 말이 너무 복잡합니다. 누가 잘 정리해주지 않으면 너무 혼란스러운데 기독교는 일단 용어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칭의, 성화, 영화 정도 알면 되는데 이것도 왠만한 기독교인들 모르세요. 그러니까

① 칭의, 성화, 영화 이 세가지만 정확히 구분하시고 영혼육의 정화라는 것만 아시고

② 성령이 우리 안에 본래 있는 걸, 우리가 깨닫는 걸, 에고 입장에서는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 한다는 것, 그것도 하나 알아두시고

그래서 성령을 받았을 때 처음에 성령을 받고 나면 환희심에 빠지지만 곧장 다시 또 어떻게 된다구요? 놀래게 돼요. 내 안에서 어둠을 발견하거든요, 하나님 뜻대로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칭의만 됐으면, 칭의만 되면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줄 알았더니 놀래요. 사실 이 얘기도 기독교는 사실 모릅니다. 왜? 놀란적도 없어요. 왜? 성령을 못받았거든요. 놀랄 일이 따로 없었습니다. 교회다니면 구원받는 줄 그렇게 믿었던 거지 성령을 제대로 만나면 내가 아빠 소리가 나오게 돼있어요. 성령을 향해서 아빠 소리 하게 되어있고, '내 모든 존재의 활동에 함께 하셨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항상 내가 힘들때, 기쁠때, 어떨때도 사랑의 하나님이 나랑 함께 하셨구나, 이걸 압니다. 당연히 알죠. 왜냐하면 성령을 만나면, 영원한 나의 현존이기 때문에 진짜로 나의 현존 이예요. 에고의 현존이 아니라 에고의 본질로써의 나의 현존, 참나의 현존이기 때문에 그게 그대로 나의 현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나와 함께 했다는 걸 알게돼요. 눈물나죠? 아빠이고, 나의 부모이고, 엄마이고 나랑 영원히 함께 해왔던 그 존재를 깨닫게 되고, 그럼 이 존재의 뜻대로만 난 이제 살거라고, 난 아버지 자녀라고, 하나님 자녀라고 했는데 놀라요. 왜요? 자기가 금방 사탄의 부대에 가 있는 거예요. '이상하다, 나 아까 좀전에 장난 아니었는데, 환희심에 장난 아니었는데' 금방 또 탐진치의 기본값이 작동하는 순간, 사탄의 종으로 또 복무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군대에서, 다시 정신차리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몰입했더니 어떻게 돼요? 또 이쪽에 와 있어요. 하나님의 성령과 접속이 또 이루어지니까 하나님의 기본값이 또 내 안에서 작동해요. 성령의 열매들이 내 안에서 거둬져요. 성령의 은총이 내 영혼에 내려져요. 옷도 살만하고 은혜와 평강이 가득찼는데 또 견물, 뭘 봤어요 또 여기 와있습니다. '다 재끼고 내가 저거 갖고 싶다.'

이게 인간 실존 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늘 이 안에서 우리는 돌고 돕니다만 혼란스럽고, 놀래겠지만 한걸음씩, 한걸음씩 모든 걸 정복해 가다보면 어떻게 돼요? 모든 걸 정복한다는 건, 그렇게 탐진치에, 욕망에, 어리석음에 끌려갔을 때 마다 다시 하나님과 접속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접속을 강화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열매를 이 땅에 구현하는 사도로써, 성도로써 살아가실 때 또 구원이 이루어지죠. 하나님 자녀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또 구원 받습니다. 왔다갔다 하다가 언젠가 어때요? 저쪽으로 차츰 덜가겠죠. 안갈때가 오면 그때 예수님을 닮은, 또 다른 예수님의 등장입니다. 성자 수준의 성도가 되가는 거예요. 예수님과 쌍둥이인 우리가 반드시 목표로 하고 나아갈 경지가 그 경지이다.

그래서 누구나 정복하게 되면 모든 악의 가능성은, 이제 사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경지가 된겁니다. 그게 예수님이 40일 금식때 보여주신게 그거예요. '나는 이제 사탄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 경지가 되면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하나님과 둘이 아니게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 경지를 완덕이라고 하면, 이 자리는 완덕에 가까이 간 경지겠죠. 아주 완덕이라고 못하겠지만 온전한 그런 경지에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완덕에 가까운 경지가 되겠죠.

이렇게 해서 우리가 나아가면 된다. 도마복음은 이런 얘기를 하나씩 풀어나갑니다. 영혼육 전체의 구원, 이게 도마복음의 주제고, 거기 육도 반드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포함 된다는 거, 그리고 성령의 구원 법에 대한 다양한 방편들이 나온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다. 겨자씨 비유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분들은 아주 탁월한 비유와 방편들을 만나게 될겁니다.

여기까지 예고편격 맛배기로, 도마복음 첫 시간 이니까 맛배기, 또 가장 중요한 도마복음 핵심도 논해보고 도마복음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소개해 드리는 시간 가졌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