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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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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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강의일자 2020. 08. 15. 土.
게시일자 2021. 01. 05.
동영상 길이 43:19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51FyaFzVE4I


반갑습니다. 도마복음 시간이 또 돌아왔습니다. 요즘 매주 도마복음만 하는데 유마경이나 다른 것도 하고 싶은데 도마복음을 너무 좋아하셔서 일단은 하고 있습니다. 상황봐서 다른 경전도 섞어서 하면 좋겠어요. 저희가 기독교 단체인줄 알겠어요. 강의 유일하게 하나 하는데 성경만 하니까 좀 그런 감이 있습니다. 오늘도 도마복음 빨리 살펴보고 도가리 시간 갖죠. 도마복음 47절 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 얘기는 기존 복음에도 있죠? 그래서 보시면, 각주 1번에 있어요. 마태복음 6장 24절에 이런 얘기 있어요.


[어떤 사람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주인을 미워하고 다른 주인을 사랑하거나, 한 주인을 존중하고 다른 주인을 무시하게 된다. 그대들은 ‘하나님’과 ‘황금’을 모두 섬길 수 없다.]


저희가 도돈쌍수 이러고, 지금 이거 아닙니까? 하나님과 황금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게 도죠, 이게 돈이고 그런데 제가 도돈쌍수, 같이 닦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제가 의견이 갈리는 것 같죠? 안그래요, 이 중에 누가 주냐는 걸 정해야 된다는 거죠. 둘다 주로 하지마라. 하나님을 주로 해라.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이 챙겨주실 거다. 그러면 이건 종이죠. 주종을 확실히 정해라.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니까 '이 중에 하나는 우리가 버리자' 이렇게 가시면 안되고, 두 주인을 섬기지 말리는 것은 동등하게 대접할 수 없다는 거죠. 둘다 동등하게 대접하려다 보면 결국 이거예요. 도와 돈이 인생에 중요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둘다 중요해' 하고 나가다 보면 결국 뭐 한다는 거죠? '혈육의 자녀들은 결국에는 도를 멀리하고 돈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포인트는 '도를 주인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확실하게 섬기는 기본태도를 확립하라' 이겁니다.

자, 도마복음 본경 가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두 마리의 말을 동시에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동시에 구부릴 수 없다. 한 종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은 공경하고, 다른 한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


결국 한쪽을 무시하게 되고, 한쪽에 치우치더라.


《아무도 잘 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새로 담근 포도주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포도주로 예를 들어야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가 쉬웠나봐요. '그렇지 잘 익은 포도주 마셔야지' '새로 담근 포도주' 사람들이 둘 다 취하지는 않는다. 이 얘기는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있다는 얘기예요. 한쪽으로 결국 쏠리게 되어 있더라, 이 얘기를 하면서 지금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이 얘기 하려는 거예요. 황금은 욕심을 상징하고, 하나님은 양심을 상징하잖아요. 양심과 욕심 중에서 주를 양심으로 확실히 하라는 거죠. 이거 안하고 가다가, '난 둘다 챙길래' 하다가는 뭐가 된다는 거예요? 결국 '욕심을 주로 섬기더라' 이거예요. 이 사태를 막자는 거죠.

그러니까 각주 2번에


[성령을 따를 것인가? 욕망을 따를 것인가? 잘 익은 포도주 마실 것인가? 새로 갓 담근 포도주 마실 것인가?]


입장을 분명히 해라. 처음부터 확실히 정하고 가라. 그러니까 결국 뭐예요? 양심 따라라 이 소리죠. 욕심도 중요한데, 욕심 안챙기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요? 다만 주를 확실히 정하라. 어중간하게 둘다 추구한다고 했다가는 결국 한쪽으로 쏠려서, 결국은 욕심에 쏠려서 혈육의 자녀가 되버리고 끝나더라. 성령에 주를 둬야 하나님 자녀가 되지 않겠냐? 이 소리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 35절 보세요.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의 종’이다. 종은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물 수 없으니, 아들은 언제나 머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집에 살수가 있는데 죄의 종이 되버리면, 죄 짓는 순간 죄의 종이 되니까 한쪽을 선택해 버린 거잖아요, 죄 쪽으로 주를 둬버리면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어있다.

유교 경전 얘기 좀 읽어 볼까요? 각주 2번 안에 있죠? 두가지는 유교경전 글인데 한번 보세요.


[사람의 마음]


유교에서는 욕심을 재미있게 인심이라고 하다고 말씀 드렸죠. 사람의 마음이 욕심이고 양심을 뭐라고 불러요? 도심, 진리의 마음, 성령이 진리의 마음 아닌가요? 진리의 영이잖아요. 진리의 마음이라는 소리죠. 진리의 마음, 성령의 마음이예요. 성령과 성령을 따르는 마음을 말하고 성령, 본체, 성령의 작용인 성령을 따르는 마음, 자, 보세요. 이 가운데가 성령이면, 여기가 영이면 혼이라고 치죠. 혼인데 두가지 혼이 가능하죠. 성령을 그대로 따르는 도심, 양심, 그리고 성령을 따르는 마음과 충돌이 일어나는 욕심, 그런데 만약에 욕심이 양심을 이겨서 51%가 되버리면 그냥 욕심이 아니라 이제 악심이 돼요. 비양심이 돼요. 왜냐? 욕심 자체는 악은 아니예요. 양심하고 충돌은 나는데 악은 아닌데 왜냐? 양심이 만약에 51%가 되면 양심 말 듣거든요. 이해관계는 다른데 양심이 주가 되면 욕심을 추구하되, 욕심은 자기에게 이로운걸 추구하는 거니까 선한걸 추구하는 양심하고 분명히 충돌은 나요. 하지만 양심이 주가되면 욕심도 양심이 허락하는 안에서만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될거 아니예요? 그럼 이게 제한만 되면 선이 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욕심을 아예 버릴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욕심이 양심을 이겨버리면 악심, 비양심이 되버려서 이때 부터는 악입니다. 악이 되어서 죄의 종이 되버려요. 죄의 종이 되느냐? 그래서 결국은 욕심 자체는 악은 아니지만 욕심 51%가 되면 죄의 종이 되고, 양심 51%가 되면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자고요, 자녀가 더 좋다. 예수님이 그러셨으니까, '자녀가 된다'. 그래서 자녀는 하나님 집에서 살 수 있다. 자녀니까, 종은 쫓겨난다. 죄의 종이 되면 쫓겨난다. 아까 말씀에 '종은 그 집에 오래 못 머물러' 하는거 보면 하나님의 종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메세지도 있죠. '죄의 종이 되지마라' 하는 것도 있고요. 자, '사람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욕심은 악은 아닌데 위태롭다.


[도의 마음은 옳은데 미묘하다.]


'미약하다'


[오직 정밀하고 오직 한결 같다면]


그러니까 공부법이 뭐겠어요? 유교건, 기독교건 결국 공부법이 뭐냐면 결국 하나님을 주로 삼아서 양심 51%, 양심이 주가되는 마음관리하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겁니다. 욕심과 양심 차이를, 충돌나는 이 부분을 정확히 알아야겠죠. 그게 지금 뭐예요? 오직 정밀히 하고, 욕심과 양심의 차이, 혈육의 자녀와 하나님 자녀의 차이를 오직 정밀히 하고, 그다음 뭐예요? 오직 한결같다면, 양심을 주인 삼으면, 한쪽을 확실하게 밀어붙이면, 한쪽에 올인을 하면, 한쪽에 몰입을 해주면, 그러면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그러면 '오히려 욕심도 적절하게 챙길 수 있다' 예요. 자, '오직 하나님 나라와 정의만 구하면' 이게 정밀하게 하나만 취하는 거죠. 하나에만 몰입하면, 오히려 중을 잡는다는 건 오히려 '욕심도 진정되더라' 하는 말도 들어 있는 거예요. 욕심도 진정되서 관리가 되더라.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대로면 이거에요. 정밀하게 하나만 파라는 거죠. 정밀하게 해서, 둘 사이가 뭐가 다른지 정밀히 분석한 뒤에 하나만 파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정의만 구하라. 먹을거, 입을거, 의식주, '의식주보다는 하나님 나라만 구하라' 이게 정밀하게 분석에서 하나만 파들어가는 거구요, 그러면 '나머지 것도 하늘이 챙겨 주신다' 이건 욕심도 자연스럽게 충족이 된다. 이거죠. 이게 중을 잡는 요결입니다. 하나를 완전히 배척해서 없애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유교도 그래요. 잘 통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자, 주자 얘기 한번 들어볼게요.


[사람 마음을 하나라 천리가 주가 되면]


양심이 주가 되면


[인욕이 사라진다]


인욕이 약해진다. 이때 인욕은 욕심이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하실 수 있는데, 여기서 인욕이라고 하는건 유교에서, 자 보세요. 인심은 그냥 일반 욕심을 말하고 인욕이라고 하는건 사실은 별 차이는 없지만 용어가 이제 구별돼요. 유교 용어 하나만 알아둘께요. 인욕이라고 하면 이건 비양심 이에요. 이건 악심입니다. 이미 악으로 변한 마음이예요. 인욕은 없애야 돼요. 인심은 위태롭기만 하지 없애면 안돼요. 위태로운 건 어떻게 하면 돼요? 진정 시키면 돼요. 미약한 도심은요? 확연하게 드러나게 해주면 돼요. 마음공부 답 다 나왔죠. 이게 서경에 이 말씀 한 양반이 순 임금 입니다. 순 임금이 한 말이예요. 순 임금은 언제 입니까? 우리 예전 단군시대예요. 예전, 단군시대. 정밀하게 인심과 양심, 양심성찰을 해서 욕심과 양심을 구분한 다음에 '양심 위주로 해달라' 이게 '정일하다' 하는 겁니다. '정밀하게 하나만 파라' 그러면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욕심도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위태롭던 욕심이 위태롭지 않게 된다는 거지 욕심이 없어진다가 아니에요. 인욕은 뭐냐? 인욕은 없어야 돼요. 이건 비양심 이거든요. 때려 잡아서 없애야 할 것은 비양심이지 욕심 자체는 아닙니다. 욕심과 양심 중에 욕심 때려 잡아라. 이게 아니라 욕심과 양심 중에 양심을 더 주인으로 삼아라. 이게 성인들의 답이라는 말이에요. 여러분이 엄한데 힘 쓰실까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때려잡아할 건 뭐예요? 욕심이 아니라 비양심이요. 비양심은 제압하라. 그러니까 양심이 보존되면 비양심이 사라진다.


[비양심이 우세하면 양심이 사라진다.]

천리가 사라진다.

[천리와 인욕이 서로 섞이는 경우는 없으니]


결국 우리는 어느 한 쪽에 더 힘을 실어 주게 되니 양심에 힘을 실어주라.


[학자들은 마땅히 여기에 대해서]


체득하고 인가하는 걸 체인 그럽니다. 몸으로 체험해서 인가한 다음에 체험적 이해를 하라는 거에요. 체험없이 인가가 안되니까 몸으로 마음으로


[체득해서 인가하고 성찰, 양심 성찰을 잘 해야 될 것이다]


주자가 한 말도 성경의 각주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한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자, 여기까지 하고, 아직 끝난게 아니에요. 47 절 앞단락만 했어요. 뒷단락은 또 달라요. 뒷단락은 문제가 뭐냐면, 앞단락과 뒷단락이 좀 다른 시점에서 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놓은 것 같습니다. 포도주가 나오니까 그냥 하나로 묶어 놓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혀 의미하는 바가 달라요. 아까는 잘 익은 포도주가 좋은거고 새로 담은 포도주가 나쁜 거죠? 그 의식이 있죠? 그런데 뒷단락은 새로 담은 포도주가 더 중요한 겁니다. 오래된 포도주보다 새로 담은 포도주가 더 의미를 갖고 등장 하니까 포도주만 같이 등장했지 포도주가 의미하는게 다르니까, 이 앞단락과 뒷단락은 다른 상황에서 나온 얘기를 포도주란 주제가 통하니까 하나로 모아놨다. 자, 보세요. 가볼게요.


《새로 담근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지 않으니 부대가 찢어져 버립니다》


새로 담근 포도주는 팽창력이 더 크기 때문에 낡은 부대, 막 꼬매놓은 부대로는 못 감당한다.


《오래된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지 않으니, 그러면 새 부대가 망친다. 낡은 천 조각을 새 옷에 대고 꿰매지 않으니, 그러면 찢어지게 된다》


서로 질이 달라서 찢어지게 된다. 자, 이 얘기도 각주 한번 보실까요? 각주 1 번에 있어요. 마태복음에 나왔던 얘기기 때문에 각주 1번 한번 보고 다시 올게요. 각주 1 번에 제가 안 읽은 지문이 있죠? 인용문이, 마태복음 9장 14에서 17절, 이 얘기도 재밌으니까, 포도주 얘기만 보실 게 아니라 전체 글을 같이 한번 보시면 재밌는게 있습니다. 보세요.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해요]


세례 요한 제자들 이겠죠. 예수님에 대해서 라이벌 의식도 갖고 있고, 경쟁심도 갖고 있고, 또 진짜 예수님이 메시아 인가? 하는 그런 생각, 고민도 하고 있는 요한의 제자들이,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합니다]


요한 제자들도 금식을 중시했던 거에요. 날짜 정해서 음식 가리는 거,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요한의 제자들이 볼 때도 바리새인들만 그런게 아니라 세례 요한 제자들도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을 보니까 맨 치킨 먹고 햄버거 먹고 이런 느낌으로 지금 보인 거에요. 우리는 음식 철저히 가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금식을 안합니까? 단식도 하고 절식도 하고, 음식도 가려 먹고 있는데 왜 그럽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길]


뭐라고 합니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수 있겠는가?]


'나 있을 때 잔치 벌려' 이겁니다. 나랑 지금 같이 있는데 날마다 파티지 무슨 슬퍼한다고, 무엇을 슬퍼할 게 있다고 금식을 해?


[그러나]


이 얘기도 덧붙이세요.


[나를 뺏길 날이 올 것이니 그때는 금식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고난 뒤에는 혹시 모를까' 이런 거죠. '지금 예수님 가셨으니까 지금 우리도 금식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거 아니에요. 공부 더럽게 못 하는 친구들이 꼭 여기서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역시 금식이군' 아니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뭐라고 했어요? 나를 뺏기겠지만 세상에서 날 뺏기니까, 예수님 없어서 금식할 사람도 있겠지만, 성령받은 사람들은 어쩌겠어요? 성령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영접해요. 또 파티해요. 파티는 계속됩니다. 제가 파티파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금식파가 아니라서, 지금도 금식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 못만난 사람들 이잖아요. 예수님을 빼앗긴 사람들, 아시겠죠? '저게 파티 할라고 진짜 우기는구나' 하실 수 있지만, 아닙니다. 저는 자명합니다.


[새 천조각을]


이 부분 때문에 제가 이 구절을 인용했는데 앞에 있는 구절도 너무 재밌어서 같이 넣습니다. 꼭 한번 같이 읽고 싶었던 구절이라. '새 천초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그러니까 포도주 부대랑 옷 천조각 꼬매는 얘기를 가지고, 두 가지 얘기를 같이 비유로 드시는 거에요. 새로운 천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나니


[이는 기우려고 댄 천조각이 그 옷을 당겨]


서로 이렇게 늘어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옷을 더 찢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얘기고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으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다 보존 되느니라.]


이게 앞구절까지 제가 같이 읽어야 된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포도주 부대 얘기 왜 하셨을까요? 마태복음에서는 왜 하셨을까요? 느낌 오세요? 새 포도주 새 부대가 뭘 의미하는지? 뭐냐면 세례 요한과 바리새인들이 중시하는 건 구약의 율법이죠? 율법이 낡은 부대예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보여준 건 성령 충만한 마음이죠? 그냥 양심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이잖아요. 세례 요한 제자들도 양심은 있었겠죠. 그런데 이겁니다. 자, 성령으로 인해서 성령에서 거듭난 양심이요. 이 양심, 이게 제가 뭐라 그랬죠? 속사람, 그러면 원래 혈육의 자녀로서의 마음은? 겉사람, 옛사람, 이것도 똑같잖아요. 사도 바울이 옛사람 그랬잖아요. 속사람을 새 사람 그랬잖아요. 새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자, 이게 지금 새 술이예요.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 이 새 술을, 지금 술로 비유하며 겉사람이 옛 술이라는 겁니다. 옛 술, 새 술이라면, 옛 술은 어디 담겼어요? 이 옛 술은 뭘까요? 구약의 율법이요. 새로 거듭난 새 사람, 속사람은 어디에 담겨야 될까요? 새부대는 뭘까요? 이게 복음적 율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황금률, 이건 기존의 바리새파들이 연구하던 율법이고, 꽉 막힌 율법이죠. 율법주의자들이 공부하던 율법이고, 이건 양심을 따르는, 내가 당에서 싫은 건 남에게 하지 말고 내가 받고 싶은 건 남한테 해주자는 황금률, 양심에 기반한 이 복음적 율법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 율법에 빠지지 말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기존 율법대로 라면 금식을 해야 되는데, 성령 받아서 빛 안에서 충만한 빛의 자녀들이 무슨 낡은 부대에, 금식이니 뭐니 하는 낡은 부대에 즉, 낡은 율법의 룰을 따르겠는가? 이거죠. '그러다가 다 버려, 다 망쳐' 이겁니다. 새 술을, 즉 성령으로 거듭난 새 마음을, 새 사람을, 구약의 율법으로 찍어내려고 하면 다 망치는 거야. '율법도 망치고 거듭난 영혼도 망쳐' 이 소리입니다. 어떠세요? 이게 이제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입니다. 포도주 얘기, 부대 얘기를 왜 했나? 새 포도주, 옛 포도주, 낡은 부대, 새 부대, 얘기 왜 했나? 지금 여기는 그 맥락은 없어요. 앞뒤 맥락 다 짜르고 도마복음에서는 그냥 포도주랑 첫 얘기만 했죠. 마태복음에서는 그 맥락이 있죠. 무슨 사정에서 그 얘기가 나왔나.


자, 각주 3번을 그래서 제가 두 가지 방식으로 풀어봤습니다. 보세요.


[칭의, 성화 차원의 해석은 새 술, 즉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낡은 부대에 즉, 기존의 율법이 아닌 새 부대, 복음적 율법, 성령이 내면에서 인도하는 율법]


성령이 내 안에서 하라, 마라 해서 따라가는 그 율법이요. 이해 되세요?

제가 아주 안타까운 사연 하나를 알아요. 제가 소승 불교 성자 중에 아찬차 스님 이라고 제가 존경하는 아라한 경지를 이룬 스님이 있습니다. 그 스님은 저랑 주장이 너무 잘맞아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갖고 수행하다가 순수 알아차림에 들어가라. 순수 알아차림에 들어가면 진리가 알아차려진다. 진리를 체험적으로 인가, 체인하게 되는데' 그 진리가 소승이다 보니 아공의 진리예요. 현상계가 무상, 고, 무아라는 거 그리고 팔정도를 지켜야 된다는, 불교 얘기 살짝만 할게요. 팔정도 안에는 바르게 깨어있고, 바르게 지혜를 얻고, 바르게 행동하는 모든 그 명상과 지혜와 실천의 요소가 다 들어있어요. 그게 우리 안에 충만하게 돼요. 그럼 성령이 인도하는 경지거든요. 진리가 나를 인도하는 경지에 들어간다. 근데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소승 불교의 문제점이 그 다음에는 다시 계율주의로 들어가 버려요. 그 충만한, 지금 새 술이죠? 아찬차 스님이 강조한 건 새 술이었어요. 순수한 알아차림에서 나오는 이 진리의 마음을 가지고 뭘 해야됩니까? 그러면 '기존 율법을 지켜라' 이겁니다. '정오때 밥 한끼 먹고 밥 두끼 먹으면 안된다. 정오 이전에 먹어도 죄악이고, 정오 이후에 먹어도 죄악이고, 죄악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신자가 손댄 그릇으로 먹은 밥은 안 되고' 이제 이런 온갖 계율을 강조해요. 결국 율법주의로 가버려요.

이게 뭔 상황인지 아시겠죠?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은 상황,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면 자기 안에 이미 팔정도, 이 성령의 열매가 충만한 새사람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서 성령이 인도할 거 아니예요. '이 일을 해라, 이 일을 하지 마라, 이 일은 선하다, 이 일은 악하다'고 성령이 얘기할 거 아니에요. 그 소리는 못듣고 또 뭐를 해요? 율법의 써있는 조문 찾아서 금식하랬으니까 금식하고, 남들이 뭐 하랬으니까 하고, 기존의 율법책에 써있으니까 하고, 이 지랄을 해버리면 다 날아갑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인도하는 율법이 복음적 율법이고, 글로 전해오는 율법이, 전통으로 전해오는 율법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새 술과 낡은 부대, 이렇게 감잡히니까 어떠세요? 이제 이해 되시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율법에 담겨야 됩니다.


[낡은 천, 기존 율법은 새로운 천, 복음적 율법에 꿰맬 수 없습니다]


갖다 붙이면 다 죽어요. 율법 막 짜집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짜집기 하지마라. 그러면 자막에 짝잇기 이렇게 나오더군요. TV 보니까


[낡은 율법으로 새로운 성령의 율법을 재단하지 말자]


이 말씀 너무 멋있지 않나요? 금식해야 되지 않나요? 지랄하네 이거예요. 지랄하고 있네. 저같으면 그랬을 거예요. '니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이 금식하라고 하디? 왜 너는 금식하지?' '예전에, 몇 천년 전에, 금식하라고 하나님이 한번 하셔서요.' 예수님 입장에서는 지랄하네죠. 지금 내가 빛의 온전한 자녀, 성자가 여기 와있는데, 성자는 뭡니까? 성령의 온전한 대변인, 지금 이 순간 성령의 대변인이 파티 하자고 하는데, 그 예전 종이 쪼가리 들고와서 '금식해야 되는데요' 하면 '지랄하네' 안하겠어요? '너는 하나님이 버렸냐?' 이거죠. '너 안에서는 하나님이 무슨 얘기 안하냐? 성자 보고 그 소리를 지껄여야겠냐?' 이거죠. 예수님이 혹시 못하신 말 제가 풀어드리려고 좀 더 살을 보태봤습니다. 자, 칭의, 성화는 이렇구요.


[영화 차원의 해석은]


한번 보실래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야 된다.]


이때 부대를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육체로 풀면 어떨까요? 이러면 뭔가 밀교적이면서, 부활체 얘기로 갈 수도 있죠. 제가 이걸 놓칠 수가 없죠. 꼭 이렇게 풀어 드리고 갑니다. 새 술은 어디 담겨 될까요? 어떤 육체? 진짜 부대라고 생각하고, 술을 어느 부대에 담을까요? 이 썩어없어질 옛 육체, 옛 부대가 새로 거듭난 영혼에 걸맞나요? 아니죠. 진짜 걸맞는 육체는 뭘까요? 부활체, 그래서 우리가 '죽은 뒤에' 가 아니에요. 살아서 이미 부활체를 입는 거에요. 왜? 새 영혼에 걸맞는 몸이 필요하거든요. 이 육체는 혈육의 자녀로서의 마음에 걸맞는 죽어 없어질 육체고, 영원한 성령과 하나된 영혼에 걸맞는, 양심과 걸맞는 육체는 뭐라구요? 부활체요. 욕심과 걸맞는 육체, 겉사람과 걸맞는 육체는 뭐라구요? 물질의 육체, 이 속사람과 걸맞는 육체는 뭐라구요? 이거는 물질의 육체라면 이거는 영적 육체죠. 영적 육체, 물질의 육체, 이렇게 한번 구분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영화 차원에서 이 구절 해석하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고요.


[낡은 천 조각, 썩어 없어질 육체를, 천조각을 새로운 천, 불멸의 육체에 어떻게 갖다 붙일 수가 없다]


는 거예요. 차원이 다르니까,


[온전히 새로운 육체로 거듭나라.]


이렇게도 풀 수 있겠죠? 47절 하나 했더니 시간이 이렇게 갔어요. 재미 있으신가요? 뭐, 재미 없으셔도 갑니다.


《48절 산을 움직이는 권능》


산 움직이고 싶으신 분은 좀 주목해서 보세요. '도마복음에 이런 것도 나오는 구나' 하지 마시고, 봐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서로 화평하게 되면 그들이 산에게 '여기에서 움직여라' 하면 움직일 것이다》


자, 됩습니까? '뭐여?' 이럴 수도 있죠. 한 집에서, 여러분 가정에서, 두 사람이 뭐라도 티격태격 할 거 아니에요. 화평하게 지내면 여러분 산을 움직일 수 있답니다. 실망하셨죠? 각주 한번 봐볼까요. 실망 안시켜드릴 게요. 각주 봐보세요. '산을 움직이는 권능' 이 구절과 함께 읽어야할 성경의 구절이 있죠. 마태복음 17장 20절 보세요.


[그대들의 믿음이]


여기서는 도마복음의 이야기랑 기존 복음의 이야기가 만나면 정말 재밌어집니다. 놀라운 비밀이 드러납니다. 산을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자, '그대들의 믿음이' 여기서 믿음 얘기만 해요. '믿음이'


[적은 연고이다]


'왜 우리는 성령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쳐도 환자가 잘 안 낫죠?' 제자들도 성령 받아서 병 고치고, 귀신 쫓고 할 수 있었어요. 전도 여행도 보냈었잖아요. 그런데 못 고친 사례가 나온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고쳐줘요. 그런데 왜 우리는 못 고쳤을까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즉, 제가 말하는 믿음은 뭐죠? 이제 기억하시나요? 믿음 니코르, 시험 나옵니다. 성령과의 합일, 성령과 합일을 예수님 제자들이 못한 게 아니에요. 성령도 받았어요. 온전히 못받아서 그렇지 지금 부분적으로 성령을 받아서 병도 고치고 귀신 쫓고 다녔다고요. 그렇게 여행도 보냈었어요. 훈련도 시켰다고요. 근데 왜 우리는 안되죠? 하니까 믿음이 없는 연고라고 안 했죠? 뭐라고 했죠? 적다고 했죠. 분량이 적다. 믿음의 분량이 적다. '너희 레벨이 낮아서 그래' '영성이 떨어져서 그래' 이거에요. '영성레벨이 낮아서 그래'


[진실로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그대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너희가 진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는데, 겨자씨가 왜 자꾸 거론된다고 했죠? 씨알이 되게 작은데 자라면 엄청 커져요. 그러니까 팽창도가 엄청 큰 게 겨자씨 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믿음만으로도 산을 움직일 권능이 생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엄청난 믿음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거에요. 크건 작건 진실한 믿음이요. 성령과 제대로 합일만 되면 그게 아주 미세해 보여도 그게 엄청난 역량을 갖게 된다. 권능을 부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겨자씨 한 알 만큼 믿음만 있으면'


[산에게 명령하여 여기서 저기로 가라 그러면 옮겨질 것이다. 그대들이 못 할게 없다]


왜? 우리가 성령과 합일이 믿음이니까 성령과 우리가 조금만 합일되도 어떨까요? 성령은 전지전능한 자리에요. 우리가 조금만 합일된다고 해도 우리 안에서 엄청난 권능이 일어나요. 여러분 제가 늘 성령을 뭐에 비유 많이하죠? 벽에 있는 콘센트예요. 코드만 꽂으면, 믿음이 코드 꽂은 거예요. 코드 꽂아서, 살짝 꽂아서, 전기만 통하면 어떻게 돼요? 전기만 통하면 선풍기가 돌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해되세요? 코드 안꼽고 선풍기 돌려보세요. 안 돌아가죠? 꽂으면, 전기가 살짝만 통해도 일단 움직입니다. 제대로 꽂히면요?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라는건 성령과의 소통이기 때문에 미약하나마 성령과 분명히 소통이 이루어 진다면 너의 혼과 육 안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산을 움직인다는 건 그거에요. 그니까 산을 움직인다는 건, '그래도 산을 움직일 수 있나요?' 이러지 마시고, 산을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에고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성령과 소통만 일어나면, 그럼 여러분 저희가 여기에 앉아서 모른다하고 온갖 피조물의 대해서 모른다하고 마음을 오롯이 I AM 이라고 하는 에고 에이미 그러죠. 하나님 자리, 나는 현존한다는 그 하나님 자리랑 접속해 계시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과 통한거죠. 이게 미약해 보이고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믿음 하나, 성령과 소통 하나가, 여러분의 혼과 육에서 기적을 일으킵니다. 혼이 성스러워지고, 육이 거듭나요. 아시겠죠?


신부님 같나요? 목사님 같나요? 사이비 같나요? 그런데 저는 다 필요없고 성령을 대변할 뿐 입니다. 성령 답답 하신거 제가 풀어 드릴려구요.


[믿음 (성령과의 합일)을 통해 성령과 하나가 되면 인간으로]


볼 때, 에고가 볼 때


[불가능하다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룰 수 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이 문제이다. 믿음을 키우면 된다. 성령의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는]


받은 거예요. 제자 분들이


[믿음이 약한 게 문제다.]


제자를 앞에 놓고 제가 얘기 드리는 거예요. 위 구절을 풀어 들이다보니까, 일반인들은 믿음이 아애 없을 수도 있죠. 믿음이 있더라도 약하면 또 권능이 구현 되는데 한계가 있다.


[제자들에게 이미 성령 임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주는 평안과 진리 안에서 끊어짐이 없이 함께하는 온전한 세례가 아니었다]


이게 나중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맞이하면


[성령이 온전히 이제 확립]


된 거예요. 성령 안에 들어앉아 살게 된 그 체험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입증한 겁니다]


어떤 중생도 어떤 혈육의 자녀도 다 성령 안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 안에서 거듭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 오순절 사건 이에요. 그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령 안에 오롯이 안주하게 되어 믿음이 강해졌겠죠]


제자들이, 그러니까 그 때부터는 사도행전이 써지는 겁니다. 사도들이 도를 펴고 다녀요. 어떤 목사분이 그랬나요? 사도행전은 사실은 성령행전이다. 성령이 사도들의 혼과 육을 빌려서 그렇게 이 지상에서 역사하신 이야기다. 그렇죠? 이렇게 보시면 성경도 감동입니다. 저는 성경보면 가슴이 막 벅차고 뛰어요. 왜? 성령의 현현이 느껴지 거든요. 성령의 그런 현존이 느껴지고, 성령의 구현이 느껴지고, 지상에서의 역사가 느껴지고, 이거 엄청 감동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크리스천 보다 더 가슴이 뜁니다. 자, 사실 제가 크리스천이죠. 교회에 이름이 올라있는 크리스천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 안에서]


기쁨과 감사죠


[거하고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셨던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


이게 여기까지가 칭의예요. 이해가 가능해지는 게 칭의예요. 진짜로 그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고 거기 또 들어 앉으면 안주해 버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형상인 진리의 말씀에 안주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성화까지 이루어져요]


그래서 성화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칭의 했다고 바로 성화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만나서 평안과 진리가 함께 하게 되고, 늘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갖춰지고, 칭의만 해도 여기까지 가요. 실제로 선과 악을 판단해서 내 영혼을 키우는 거죠. 속사람을 키우고 겉사람을 폐퇴시켜서, 겉사람, 욕심을 제압하고, 없애라는 게 아니고 제압이지, 양심, 속사람을 키우는 경지에 가면, 그래서 이 속사람이 겉사람과 싸우면서 지더라도 다시 꼭 51%로 돌아와서 이긴자, 늘 승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면, 늘 이긴다는 건 아니에요, 고지전 처럼 지더라도 다시 뺏을 역량을 갖추게 되면 성화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 체험하고]


돈오점수에요. 예수님 제자들 탄압하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성령 체험을 하죠? 그게 돈오라면


[3년간 다메섹에 머물면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보림 공부를 합니다. 성령의 현존과 함께 하면서 자기가 알던 기존의, 바리새파였기 때문에, 유명한 바리새파 스승을 모시고 있던 제자였단 말이에요. 바울은 큰 바리새파가 될 인물이었어요. 원래 사울이었죠. 이름 이제 바울로 바꾸고 거기서 성령의 현존 안에서 자기가 알고 있던 옛 부대죠, 낡은 부대의 정보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복음적 율법을 확립합니다. 사랑이 최고이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 기본으로 하는 복음적 율법을 완성해서 다메섹에 3년 있다가 답이 나오니까 돈오점수를 어느정도 하고 성화가 이루어 지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서 얘기합니다.]


이제 베드로, 야고보는 황당하죠? 자기들을 탄압하던 놈이 성령 체험을 해서 성화까지 공부해서 찾아온 거예요.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재미있습니까? 이런 것까지 보시고,


각주 5번 가시죠. 그런데 왜? 믿음이 성령과의 합일인데 왜 예수님은 도마복음에서 두 사람이 화평하게 되라고 했을까요? 두 사람이 화평해져라. 자, 지금 보세요. 내 영혼이 한 집안 이라면, 성령이 한 사람이라면 에고를 또 한 사람으로 본다면 에고가 성령과 합일하는게 한 집안에서 화평해지는 거겠죠. '두 사람이 한 집에서 화평해지면' 하나님과의 소통, 성령과의 소통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게 앞 이야기였고, 진짜로 그냥 이 말 그대로 한 집안의 가족들끼리 소통이라고 하면 말 될까요? 안 될까요? 기존의 마태복음 얘기는 하나님과의 합일이었잖아요. 그러면 '산을 옮길 수 있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산을 옮길 수 있다' 이것도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화평해진 거죠. 아버지와 자녀가 화평해진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성령 자리고, 자녀가 우리 에고니까 아버지와 자녀가 하나가 된 거니까 밑에 있는 그림처럼 본질로서의 아버지와 그 현상으로서의 자녀가 하나가 된 현상이잖아요. 그러면 신통이 나온다니까요. 믿음은 곧 신통을 부릅니다. 왜? 하나님과의 소통이 믿음이니까, '소통은 신통이다' 자 밑줄 쫙, '소통은 신통이다' 소통이 신통입니다. 왜? 신하고 통했잖아요? 하나님과의 소통은 진짜로 그대로 신통이잖아요. 말 그대로도, 그런데 도마복음 얘기를 전 더 확장해서 얘기하고 싶더라구요. 단순히 아버지와 자녀가 아니라 자녀들 간이라면 어떨까? 한 집안에서 자녀들 간에, 그 집안 안에서는 아버지, 아들이 되고 아버지, 딸이 될 수 있지만 우주적 아버지 입장에서 다 자녀들 아닌가요? 결국 여러분 한 가정에서 부모님하고 자녀가 소통한다고 해도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녀들 간의 소통 아닌가요? 그러니까 진짜로 자녀들 간의 화평이라고 얘기하면 말이 되나? 안되나? 전 된다고 보는 겁니다. 자, 보세요.


[아무리 한 집안 식구라 하여도, 서로 다른 두 에고는 하나의 성령 안에서만 진정한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두 에고가 화평이 이루어졌다. 두 에고가 서로 사랑하고 그 소통을, 진정으로 소통했다는 건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두 에고가 화평을 이룬다는 말 안에 이미 무슨 말이 들어 있어요? '성령 안에 그 두사람이 하나 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집안 안에서 화평을 이룬다는 것은, 이룬이는 믿음으로 성령의 현존과 하나된 존재들입니다. 성령과 하나된 존재들은 이미 하나님의 권능, 성령의 권능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서로 사랑하세요. 이 말 안에 답이 또 있는거예요. 여러분 가정에서, 여러분 직장에서, 여러분 사회에서, 서로 사랑하세요. 진심으로 남을 나처럼 사랑해 보세요. 그게 그대로 황금율의 실천도 거기서 나오고 나와 남을 둘로보지 않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구현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실천 만큼 하나님의 권능이 어딨어요? 그러니까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 성령과 믿음으로 통한 그 마음에서 남을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이 나옵니다. 여러분 역량이 개발되는 거죠, 영성이 개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과 서로 사랑하라.

자, 이렇게 두가지를 요약해 볼게요. 예수님이 두가지를 강조했죠. 모든 계율을, 복음적 율법은 뭡니까? 복음적 율법의 최대 강령은? 첫째 하나님과 사랑하라. 이게 아까 믿음이죠? 하나님과 하나가 되라. 믿음, 믿음의 문제, 또 하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남을 나처럼 사랑하면, 즉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루면 어떻게 돼요? 둘 다 똑같죠? 하나님과 하나가 되건, 아버지와 자녀가 하나가 되건, 자녀들 간에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되건, 무슨 현상이 일어나요?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에고가 도저히 안된다고 하는 걸 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 전지전능의 권능이 임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자고요.


자, 그림에 대한 각주 6번 한번 더 볼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의 안에 내가 계시다는 것]


예수님 마음속에서 이미 한 집안의 두 사람이 화평을 이루고 있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걸


[그대들은 믿지 않느냐? 내가 그대들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 정도로 하나된 화평이면 예수님의 혼과 육을 통해 성령이 어떤 역사를 할까요? 전지전능한 역사를 한다는 겁니다. 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니까, 내 일이 아니니까, 요한복음 14장 10절 입니다.


그다음 요한복음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13절은 늘 했던 얘기인데 마태복음과 결론이 살짝 달라요. 마태복음은 '구하라 뭐든지 아버지께서 안주시겠냐?' 이러고 끝나는데, 자, 보세요. 누가복음은


[내가 그들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그대들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대들이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대들에게 열릴 것이다.]


여러분 제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세요.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하고 다릅니다. 일반 교회에서 믿으라 믿으라 하는건 자기가 하나의 상, 염체를 만드는 거에요.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어떤 상을 만들어서 그 상을 믿어요. 자기가 만든 관념을 자기가 믿어요. 이건 아니에요. 모든 관념을 몰라하고 내려놓고 순수한 I AM 이라는 현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과 소통이 일어납니다. 이런 식의 믿음이에요. 구하시고, 두드리시고, 청하세요, 노력하세요, 청하고, 그렇죠? 찾고, 찾아다니고, 문을 두드리세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왜 그런지 아세요? 자, 그림 보세요. 자녀가 아버지를 찾는데 왜? 못찾아요? 이미 아버지가 자녀의 뿌린데 자녀 안에 아버지가 임해계신데 왜 못찾아요? 못찾을 수 없기 때문에 구하면 무조건 얻게 되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임해계시기 때문에


[그대들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그대들이 악해도]


그대를 봐라, 악한 소시오패스도


[자녀들 한테 좋은거 준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안주시겠느냐]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 앞에까지 막 신나게 페라리 청해야지, 막 강남 건물 청해야지만 하다가 뒤에 가면 쌔해지죠, '성령 청해야 되는 거야?' 이런거죠. 성령을 청하세요. 그러면 권능이 임하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권능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일 대신할 사람을 찾으려고 예수님이 왔지 여러분 욕망을 무한정 풀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한테 어둠을 바라시며 안되죠. 그렇죠? 여기까지, 오늘 많이 못 나갔는데 47절, 48절 메세지만 정확히 이해하신다면 여러분들 공부하시는데, 영성을 닦으시고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시는데 큰 도움이 되시라고 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