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1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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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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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2 43 49절, 67절
부제 씨를 뿌리는 자
강의일자 2020. 01. 18. 土.
게시일자 2020. 04. 11.
동영상 길이 49:21
강의 중 인용 도서 도마복음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SG504pVWThg


지금 야고보가 등장하는데 야고보 혹시 아시나요? 예수님 동생입니다. '주의 형제다' 이렇게 알려진, 형제들이 있어요, 형제자매들이 있는데 계속 마리아는 동정녀래요. 그런식이면, 아닙니다. 동정녀는 동이족의 난생신화처럼 하늘에서 낳았다는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는 표현방식 입니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야' '하늘이 냈다고 어떻게 냈는데?' '알에서 나왔어' 뭐라도 얘기를 해야될거 아니예요, '동정녀인데 그냥 하늘이 잉태해서 낳았어'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말을 쓴 이유가 뭔지 알자는 거예요. 진짜 동정녀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성경에 쓴 이유? 안쓴 복음도 있어요. 4대복음 중에는 동정녀를 안밝힌 복음도 있어요., 그런데 궂이 그 얘기를 밝힌 복음의 의도는 뭐냐? '하늘에서 온 사람이야, 이 양반은 날때부터 하나님 자녀야, 하나님 사람이야' 이 말을 밝히고 싶었다. 이렇게 받아들이시는게 맞죠. 야고보는 주의 형제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였어요. 이방선교에서 바울이 리더라면 예루살렘에서는 야고보가 리더였습니다.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완전한 법, 자유의 법 나왔습니다. 이거 기억해 두세요. 하나님의 진리를 법이라고도 하잖아요. 성령의 법, 천국의 법, 너무 많아요. 다 같은 말이예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형상,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생겼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눈으로 볼수 있겠습니까? 없죠.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놓은게 십자가예요. 십자가의 진리, 예수님도 살아 생전에 십자가를 '자기들 각자의 십자가를 져라'

이게 십자가가 사람 메달려 죽은 곳을 단순히 의미하는게 아니예요. 실제 십자가는, 사람 죽이는데 이렇게 생긴 십자가도 많아요. 지금 우리가 그리는 십자가는 제대로된 십자가도 아니죠. 뭔 소리냐? 제가 그때 말씀 드렸잖아요. 예수님이 단두대에 돌아가셨으면 교회에 단두대 그려놓을 거예요? '단두대의 진리에 순복하라' 그러실 거예요. 아니예요. 십자가가 진리인데 마침 로마의 처형 방식도 십자가에 메다는게 재미있으니까 예수님이 살아생전에도 얘기 하신거예요. '각자대로 자기 십자가를 져라' 이거는 십자가의 진리성을 얘기한 거예요. 십자가를 그려놓고 우리가 믿는 것은 그게 그리스도의 진리이기 때문인거예요. 단순히 돌아가셔서가 아니라,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그래서 완전한 법, 자유의 법 이라고도 표현한다. 하나님의 법을 이거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생겼어요. 사랑과 정의, 지혜와 질서로 생겼다구요. 이 얘기는 구약에 나온 말을 제가 그대로 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기셨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게 가장 완전한 법입니다. 이걸 따를 때 완전해요. 십계명보다 이게 완전한 법이라는 거예요. 십계명은 당시 구약으로, 옛 언약으로 유대인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니네 최소한 이건 지켜' 하고 내려준거고, 진짜 완전한 법은 뭐냐면, 내 안에 성령이 나를 진리 그대로 인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돌멩이에 새겨진 계율 이잖아요? 불완전하다는 거예요. 그 자체는 맞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속사정이 다 드러나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속사정을 다 아니까 왜 십계명이 중요한 지도 알고, 십계명을 적용할때도 응용이 자유자재하고, 십계명에 설명 안된 것까지 자기가 알아서 선악을 식별해서 쓴단 말이죠.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율법을 없애려고 온게 아니라 완성 시키려고 왔다.' 하는 예수님 말씀도 이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다 보니 한계가 생겨요. '안식일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라, 다른거 하지마라'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을 그대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돼요? 어디 교회나 회당가서 앉아 있어야 된다구요. 거기 하나님 안에 앉아 있는거 맞아요? 그냥 교회에 앉아있는거 아니예요? 좀 충격적이죠? 아무일만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있는 거예요? 안식일 제대로 지키려면 성령 안에서 안식하고 있어야 되고, 성령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성령의 현존 안에서 쉬는 거고, 성령의 현존 안에서 쉴려고 하면 불행하게도 쉴 수가 없습니다. 여기 안식하는 순간 성령의 지혜가 오고, 계시가 와서, '자명하게 살려라' 해서 살려야 돼요. 예수님은 성령에 안식했기 때문에 안식일 날 제대로 안식일 지킨 사람은 예수님 이예요. 성령에 안식하니까 '사람 살려라' 해서 사람 고쳐줬더니 바리새인들이, 율법학자들이 뛰어와서 '너, 아웃, 방금 율법 어김, 십계명, 그것도 안식일날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는데, 십계명을 네가 위반해' 이렇게 서로 입장이 달라져 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린대로 해야만 율법이 완성되지, '너희는 율법의 한 조각 붙잡고 그거 지키면 천국 간다고 믿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절대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성령 안에서만 이루어져'

(스타워즈) 이번 스터워즈 영화, 아, 이거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나? 아주 미미한 얘기 입니다. 스타워즈 영화에서 제가 재미있게 본거, 저는 포스 나오면 일단 재미있어 하거든요. 포스가 성령이거든요. 그런데 어때요? 스타워즈를 보면 후반부 작품들을 보면 제다이만의 특권을 자꾸 버릴려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수만이, 제다이만이 포스를 썼어요. 그런데 요즘 나오는 스타워즈 영화를 보면 일반인도 포스를 자각하는 듯한 내용으로 자꾸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도 보면 일반인이 포스를 자각하는 '필링이 왔어, 느낌 왔어' 제다이도 아니예요. 그냥 일반인인데 '느낌왔어' 그러더라구요. 그럼 홍익학당에서 신사, 그정도면 신사, 영화에서 확신한다고 하더라고요. '나 포스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어' 제다이도 아닌데, 제다이는 정사, 대사라면 홍익학당에서 수사가 파다완 정도 됩니다.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제자, 파다완에서 승급하면 기사가 됩니다. 라이트가 됐다가 마스터가 돼요. 요다같은 사람이 마스터죠. 학당 대사급 입니다. 원불교는 출가위, 마스터는 출가위, 그 밑에 법강항마위, 원불교 식으로, 기사는, 그 아래는 수사, 법마상종, 이 사람들은 이거 왔다갔다 해요. 그래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난 느꼈어, 확신해, 포스가 있다는거 확신해'

제가 이 영화를 제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는 방식은 저게 구약에서 신약으로 가는 내용이예요. 구약은 소수의 예언자들만 성령을 받습니다. 그걸로 사람도 살리고, 지금 제다이들 포스 가지고 다 하는 거예요. 사람도 살려요. 엘리야, 엘리사 성령 받아서 별짓 다했어요. 하늘로 그대로 올라가서 승천해 버리기도 하고, 엘리야 같은 경우는 살아서 그대로 승천해 버리고, 우화등선 해버렸습니다. 포스로 살아가던 소수 예언자들, 신약은 뭔지 아세요? 구약은 소수만 성령을 받고 다수는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올인하던 시대, 즉, 주어진 계율만 지키고 소수만 성령을 받아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면, 신약은 뭘까요? 이건 구약에 예언된 거예요. 신약은 소수의 마스터가 아니라 누구예요? 남녀노소 누구나 성령받아 버리는 시대라는 거예요. 누구나 인류가 다 포스를 받아버리면 제다이에서의 새시대죠. 그건 개벽이죠. 지상천국이 오는, 그때 거부하는 다크포스들은 싹 지옥에 보내버리겠다. 그래서 세상천지는 다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 넘치게 하겠다. 왜냐? 성령안에 살아야 성령에서 율법이 터져 나온다. 그게 완전한 법입니다. 그래서 구약까지 알아야 돼요. 구약에 이미 예언 된거예요. 예수님이 이전에 '옛 언약, 구약은 이미 나가리 됐다.' 여호와 말씀 입니다. '이미 나가리다. 새 언약의 시대가 올거다. 새 언약의 시대는 특징이 뭐냐? 모두에게 성령이 주어져서 영혼에 율법을 새겨놓게 해서 성령에 새겨진 율법이 영혼에 새겨져서 거기서 터져나오게 하겠다.' 그럼 그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이 말까지 써 있어요. '하나님을 알란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 누구나 하나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누구나 다 하나님 자녀고 인류가 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시대가 온다. 이게 구약에 나오는 예언 이예요. 그걸 예수님은 내가 그걸 선포한다. 이제 시작 됐다' 라고 선포만 한거예요. 그 시대가 나로 말미암아 이제 시작됐다. 뭔가 이벤트를 해야되니까 십자가에 메달리고 하신거죠. 확실히 왔다는 걸, 구약에 그렇게 써있거든요. '어린양이 와서 중생의 죄를 대신 안고 재물로 바쳐진다.' 그거 다 구현해 준거예요. 그럼 이제 그 시대가 온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건 2,000년이 됐는데 지금도 성령을 몰라요. 그러니까 지금 이게 심각한 거죠.

그래서 이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을 야고보가 주장할 때는 뭐겠어요? 성령 안에서 누구나 성령 받아서 성령 안에 있는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을 들여다 보고 거기에 안주하는 자, 이것도 진리의 안주죠? 이게 말씀의 안주고, 진리의 안주예요. 단순한 성령의 안주가 아니라구요. 단순히 성령에 안주한 분들은 성령에서 기쁨과 감사와 평안만 얻습니다. 그게 아니라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두개를, 성령이 앞으로, '보혜사 성령이 그대들에게 임해서 그대들을 보호해 주면서 잘 도와줄건데, 진리를 가르쳐줄건데 성령이 주는게 두개다, 하나, 진리, 내가 말했던 것을 너희가 제대로 알아먹게 해줄거다. 또 하나 내가 세상에 평안을 남겨놓고 간다.' 그것도 성령이 준다는 얘기예요. '평안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평안만 얻고있으면 칭의, 진리까지 알아먹어야, 진리 안주가 이루어져야 성화, 간단하죠.

제 눈이 잘못되었는지 저는 성경만 보면 그 말만 보여요. 지금 이런 구절 하나도 '아, 좋은 말이네' 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저는 뭐로 보여요? 분석이 된단 말이예요. 왜 이말 하시는지? 완전한 법, 자유의 법을 들여다 보고, 이게 칭의는 이룬 거예요. 의로워지기는 했는데 이 법을 들여다만 보고, 일반인은 이 법을 들여다 볼 수도 없어요. 왜? 이건 성령안에 새겨진 거라 성령을 못받았으면 이 법도 모르는 겁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까, 그럼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 봅니까?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살다 보니까, 성령에서 이게 자명하다고 하고, 이게 찜찜하다고 하는게 직관으로 들려요. 그럼 이게 들여다 본거예요. 그런데 그대로 안한다는 거예요. '아버지 미안한데 저는 일단 대학가고 하겠습니다.' 대학가니까 또 뭐라고 그래요? '취직하고 하겠습니다.' '아버지 지금 상황을 잘 모르시나본데 취직만 해도 대단한 거예요.' 취직하고 나면, '아버지 일단 안정적 자리까지는 가야죠.' 그러다가 우리가 언제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문제가 지금 바로 성령과 만나야 되고 성령의 법을 지금 바로 들어야 되고, 더 나아가서 거기서 끝나면 안되고 들여다보고 있지만 말고, 안주하라는 것은 실천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늘 해야 안주한 거예요. 늘 해야,

자녀 중에 게임에 안주한 친구 있죠? '저 친구는 게임에 안주했네' 틈나면 어디 있어요? 게임기 앞에, 컴퓨터 앞에, 그 정도해야 안주한 거예요. 그런데 이 놈이 말 안하면 게임을 안해요. 그러면 안주가 아니죠. '아빠 게임 좀 있다가 할께요' 전혀 안착이 안되어 있는거죠. 억지로 하고 있는거지, 안주한 친구들은요? 몸이 따른 곳에 있어도 어때요? 이미 영혼이 게임에 안주하고 있어요.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그 친구 머리속에 게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봐도 게임 채널만 봐요. 마음이 게임에 꽃혀 버렸으니까,

그게 몰입이 되버리면 안주한 겁니다. 그래서 몰입이 안된 분들은 안주한게 아니거든요. 안해요.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지금 지적한 겁니다. 칭의는 이뤘다면서 성화로 가고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과 똑같이 야고보, 예루살렘의 지도자도 똑같은 말 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들은 지금 서로 다른 처지에 있으면서도 웬만하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똑같은 점을 찾아내야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마다 개성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데 그 안에서 공통의 소리가 나온다면 심지어 예수님의 형제이자, 예수님에게 직접 배운 야고보랑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도 바울이 똑같은 소리를 한다면 신기한거 아닌가요? 그 부분을 주목해야 됩니다. 거기에 답이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거예요. 2,000년 전에 지구에서 울렸던 성령의 소리를 지금 우리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과 예수님 말씀을 잘 충돌시켜보면 나와요. 자!

[거기에 안주하는 자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는 자가 됩니다.]

진짜 안주한 자는 실천한다. 같은 말이구요

[그들은 그들의 실천으로 축복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1:25)]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람이 그 당시에 많았겠죠. '저 믿었구요, 믿으니까 성령 받았어요. 믿고 성령 받았으면 되는거 아닌가요? 믿음으로 이미 구원 받은거 아닌가요?' 그럼 야고보가 뭐라고 그래요? '그럼 해봐, 선을 해봐, 악을 하지 말아봐, 그런데 악은 하고 있고 선은 안하고 있으면 너희는 구원된 자가 아니고, 믿는 자도 아니요. 예정된 자도 아니다' 이겁니다. 이런 강의는 따로 많으니까 참고해 보시고요.

자! 6번 각주요. 이글 전체에 대한 각주 한번 볼까요?

[“여러분 형제들이여, 내가 오늘까지 ‘양심’을 온전히 따르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도행전 23:1)]

여러분 뭘 배양해야 돼요? 양심, 속사람을 배양해야 돼요.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만드는게 60배, 120배의 열매를 얻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이말이 너무 똑같죠. 뭐랑 똑같냐? 바로 밑에 있는 말이랑 똑같아요. 자! 보세요.

["그 '양심'을 극진히 하면 그 '본성'(양심의 진리, 하나님의 형상)을 알 수 있으니(본성의 직관),]

내 영혼안에 새겨진 본성을 알수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알 수 있고, 양심의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이게 본성이 직관되는 거죠.

[그 본성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보세요, 양심의 그 뿌리를 캔 사람은 밖으로 속사람이 작동하는데 이 양심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이 양심이 어디서 나왔는지 근원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그게 영에서 나오는 걸 알죠. 그 영에 뭐가 새겨져 있어요? 내 영에? 내 혼의 뿌리라는 점에서는 영이죠, 그러니까 내 혼의 뿌리인 영에 뭐가 새겨져 있어요? 양심의 진리, 사랑의 진리가, 하나님의 법이, 이걸 알고 난 다음에 뭘 알아요? 내 영이 원래 뭐예요? 성령이요.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버린 다구요. 자, 이 말 정말 설명 잘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의 뿌리를 정확히 알면, 영을 알면, 영에 새겨져 있는 진리를 직관하게 되는데 그러면 내 본성을 안건데 알고보면 하나님의 본성을 알게된거다. 그리고 배양법도 나옵니다.

[그 ‘양심’을 잘 보존하면(양심의 실천)]

그래서 이 속사람이 내 마음에 일어날 때마다 양심을 응원해서 속사람이 강건해지게 만드는 짓은

[그 ‘본성’을 배양할 수 있으니,]

내 본성에서 하라는거 한거잖아요. 그게 알고보면 뭐예요? 내 본성은 본래 하나님의 본성이니까,

[그 본성을 배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분은 어떤 사도 일까요?

[오래 살고 짧게 사는 것을 둘로 보지 않고 자신을 닦으면서 천수가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이렇게 진리의 무한루프에 빠져서 죽을때까지 길게 살든, 짧게 살든 이렇게 살다 가는게, 이게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확립하는 길이다.”]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맹자 「진심盡心 상」

맹자 사도가 하신 말씀, 앞에만 써놓으면 교회에서 '훌륭하신, 야고보서나 그쯤에 있겠네' 맹자에 있는 말이예요. 어떠세요? 죽이게 써있죠? 이래도 유교가, 이렇게 얘기한 맹자는 지옥에 가 있을까요? 머리에 총 맞지 않는한 이게 말이 안되는 소리죠. 똑같은 얘기를 하신거예요. 왜? 누구나 자기안에 영이 있기 때문에 다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주장을 해요. 하나님이 우리안에 그 씨앗을 심어놓고 자신을 들어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기 때문에, 사람이면 하나님을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모를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안하고 악을 했을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거다. 왜? 알만한데 안하니까 진노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로 부터 완전히 숨겨버렸으면 우리가 악을 했을때 진노를 못합니다. '내가 잘 숨겼네' 죠. '내가 완전 숨겼네' '이 놈이 악으로만 가는거 보니까, 욕심만 따르는거 보니까 내가 날 잘숨겼네' 이렇게 될 일이죠. 안 숨겼단 거예요. 드러내고 있다는, 드러냈기 때문에 악을 했을때, 양심을 어겼을때 하나님이 진노한다. 이런 논리를 로마서 첫부분에서 사도바울이 펼칩니다.

그래서 하늘로 부터 받은 돌멩이에 써있는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다, 양심의 영이예요, 이건, 속사람은 양심의 작용이고, 양심의 본체는 영이예요. 영이 원래 양심이거든요. 율법이 자신의 양심안에 새겨져 있다. 그게 '완전한 법, 자유의 법' 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복음적 율법' 이라고 그래요. 그냥 율법은 우리가 아는 구약의 율법을 말하니까, 신약에 나오는 이런 완전한 법이니, 성령의 법이니 하는건, 자유를 주는 법이니 하는건 이 진리만 따르면 자유가 와요. 어떤 계율에 억매일 필요가 없어요. 유대인들의 그 탈무드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성령에서 터져나오는 자명한 진리만 펼치면 돼요. 그래서 자유의 법이예요. 이 법은 복음적 율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와서 선포하신 복음의 율법이라는 거예요. 우리를 자유롭게할 성령안에 새겨진 율법, 돌멩이에 새겨진게 아니라 성령에 새겨져 있다가 그게 이제 어디에, 자! 성령에 이 도장이 새겨져 있어요. 이 성령을 어디에 찍어요? 우리 혼에 인을 치면 어떻게 돼요? 도장을 찍으면 우리 혼도 거룩, 그 돼지에 1등급 이런거 찍듯이, 우리 혼에 '성령' 하고 찍어야 우리 혼이 거룩해 지는 거예요. 이게 제대로 도장이 안찍히면 우리 혼에 도장이 찍히면 이렇게 안살수가 없고, 도장 찍혔다는게 직관이고 직관하면 살아야되고, 도장이 덜 찍히면, 직관이 덜되면 덜 사는거고, 도장이 희미한 거예요. '잘하면 지워지겠는데' 하는, 그런 공부하실래요? 아니면 거룩해서 딱 구별되는, 확실하게, 이 사람은 성도하고 도장 딱 찍히시는게 낫겠어요? 그래서 도장 찍히면 생명책에도 기록될텐데, 그렇죠? 칭의 얻어도 방탕하게 살면 생명책에 이름 썼다가 지워집니다. 도리가 없죠. 그래서 여러분 혼에 새겨야 합니다. 성령에 새겨진 진리가 혼에 새겨져야 된다. 그게 성화다. 이 말씀 드리고요.


진리와 진리의 표현 (20:32)

중요한 얘기 해야겠네요. 마지막 10분동안 이 그림까지만 설명드리면 오늘의 강의는 끝납니다. 뭘 지울까요? 잠깐만 지우고 할께요. 마지막 10분, 중요하니까

이때 진리를 직관한다고 그랬죠. 성령의 현존안에서 성령의 진리를 직관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형상을 알게된다. 성령안에 이게 새겨져 있어요. 성령안에 하나님의 진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뭘로 새겨져 있냐? 아까 말씀드렸죠. 질서, 봄처럼 사랑하고, 가을처럼 심판하는, 결국 예수님도 정의 심판을 얘기할 때는 뭘 예로 들죠. 알곡과 쭉정이,

타작마당, 타작마당 요즘 유명하잖아요. '그것이 알고 싶다' 에 나오는, 지들끼리 타작하고 있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정의의 심판이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거지 그게 왜 하늘이 한다고 하느냐? 하늘의 법을 어겼냐? 따랐냐? 거든요. 인간들끼리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할게 아니라는 거죠. 성령의 법으로 판단해야 됩니다.

사랑, 예수님이 말씀하신게 있죠. 태양이 죄인, 의인 가리드냐? 태양은 누구에게나 비춰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이건, 의인이건 누구에게나 고루 갑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건 봄기운 이예요. 누구나 그때는 잡초도 잘 자라고, 가을은? 쭉정이는 쳐버리는, 여름처럼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겨울처럼 지혜를 품고 있고, 그렇죠. 가운데가, 이 전체가 성실함을, 이걸 제가 성실이라고 써놨는데 이 전체가 사실은 성령이니까, 성령이니까 성실 써도 되지만 이 가운데에 성령 써도 돼요. '성령이 이 말씀들을 품고 있다.' 라는 형상으로 그려도 좋습니다. '성령이 진리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다. 진리를 직관하고 있는 영이예요. 성령은 진리의 영인데, 자! 이렇게 풀수있어요.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 성령의 진리를 직관하는 영이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다. 진리를 품고 있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품느냐? 직관하고 있는 방식으로 품어요. 품고 있어요. 성령은 진리를 꿰뚫어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영은 진리를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진리대로,

(진리의 표현) 이 진리를 밖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돼요? 봄이나오고, 그렇죠. 이렇게하면 여름이 나오고, 가을이 펼쳐지고 겨울이 펼쳐지는 겁니다. 춘하추동이 펼쳐져요. 춘분 낮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 추분, 낮이 제일 긴 하지, 밤이 제일 긴 동지, 춘하추동이 굴러간다. 이거는 동서양이 없습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게 저런것 밖에 없기 때문에 동서양이 똑같이 십자가의 진리, 오행의 진리 똑같은 거예요. 진리 그러면 저게 떠올라요. 왜? 옛날 사람들에게 1년, 2년, 3년 거치는데 항상 일정하게 굴러가는게 진리거든요. 삶속에서 똑같이 관찰되는 것, 개별 구체적 현상에서 발견되는 보편 추상적 법칙, 진리 그러면 누구나 춘하추동 입니다. 동서양에서 춘하추동, 동서고금 항상 춘하추동, 거기서 오행설도 나오고 다 나온거예요.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다는 걸 보는 거예요. 이걸 하루하루 보면 어때요? 봄여름가을겨울 이게 우리 태극처럼 그려질 수도 있는 거예요. 왜? 봄은 낮밤의 길이가 같은데 덜 따뜻하고, 많이 따뜻하고, 양기가 발산되었다가, 서늘해 졌다가 추워졌다가 이게 하루에도 반복됩니다. 아침, 낮, 저녁, 밤 계속 똑같은 사이클이 하루도 그렇게 돌고, 일년도 그렇게 돌고, 쉬지도 않고, 매년 돌고, 그러니까 성실한 거예요. '하나님 성실하시네' 그리고 봄에는 그렇게 만물을 사랑하시더라, 가을에는 그렇게 엄격하시더라, 그냥 도장 좀 찍어주지 쭉정이는 탁, 퇴출. 엄단에 처하시고, 그런데 이걸 다 꿰뚫어 보고 계시더라, 어떻게 만물을 다스려야 할지 다 알고 계시더라. 실제로 다시리는 것 보니까 질서정연하게 조화롭게 잘 다스리시더라.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예요. 이걸 성령안에서, 성령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예민하게 느낄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직관력이 자꾸 좋아지는 겁니다. 왜? 원래 성령이 진리를 직관하는 영이니까, 이 말씀 드리고,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고 말씀이라는 겁니다. 진리안에 거하면, '성령안에 거하면' 이라고 안하고 왜? '진리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을 쓰느냐? 성령안에 거하면 기쁨과 감사와 평안은 올지 모르지만 진리안에 거해야 '거룩' 이라는게 열매를 얻을 수가 있어요. 진리안에 거해야, 또 뭐를 얻어요. '자유' 를, 진정한 자유를 진리 안에 거하면 그건 반드시 실천되는 것이죠. 실천까지 이어져야 거룩의 열매를 얻고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쪽은 칭의 쪽이고 이쪽은 성화 쪽이다. 이 두 공부가 다르다. 예수님한테 부터 이미 달라요. 예수님은 계속 강조해요. 제자들에게 성령 받으라고 할때가 있고, 남에게 본보기가 되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두개가 다른 얘기 입니다. 공부의 단계예요.


성부, 성자, 성령 (26:34)

자, 그리고 오늘 얘기 나온김에 제가 요즘 설명하는 이런 방식으로, 이 그림 이해되시면 좋겠죠. 이해 되시나요? 아, 이거, 구버전이 있어서, 이 버전에서는 이렇게 그려요. 이제 하다하다 윤홍식이 멀리 가는구나 하실수도 있고, '자기만의 세계로 가고 있구나' 이렇게 작가주의 막 이런, 작가주의 하면 멀리 가잖아요. 대중과는 전혀 호흡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면서 혼자 막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제가 혼자 벽에 이런거 그리고 있으면 미친 거잖아요. 그런데 이거 하나로 동서양 모든 종교를 제가 다 설명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성령 안에서 진리를 꿰뚫어 알면 모든 종교에 다 통할 수 밖에 없어요. 성령을 제대로 꿰뚫었는데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 다른 종교를 이해 못한다? 엉터리 입니다. 아직 모자라서 그래요. 성령의 뜻을 잘못 이해하시거나, 아직 이해가 부족한 거예요, 이 성경의 진리도 이 세가지 단계의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텅비어있죠? 이거는 천지창조랑 상관도 없습니다. 천지창조랑 상관도 없이 텅비어 계시는 하나님이 있어요.

(세피로트) 이게 카발라에서는 나와요. 카발라에서는 세피로트 아시죠? 세피로트 어디다 그릴까? 여기 설명 지나갔으니까 여기다 할께요. 카발라에서는 텅빈 동그라미 똑같이 그려놓고 아인소프라고 합니다. 아인은 무라는 뜻이고 소프는 한정, 무한정자, 무극이예요. 동양의 무극, 어떤 극성도 없는 자리, 어떤 제약도 없는 자리, 이 텅빈자리가 한점으로 응축돼요. 촛점이 잡혀요. 이게 지금 이거 그려놓은 겁니다. 텅빈자리에서 촛점이 응축돼요. 거기서 뭐가 나오냐? 그 텅빈자리에서 음양이 또 갖추어져있고, 이게 하늘을 구성하면 인간, 땅이 또 펼쳐져요. 인간의 세계에서 또 이 세개의 짝이 나오고 땅의 세계에서 또 세개의 짝이 나오고 전체 완성이라는게 펼쳐져서, 이렇게 되서, 이게 세피로트 입니다. 1에서 10이 나와요. 이게 동양의 천부경하고 똑같아요. 1에서 10이 나오게 되어있고 그게 무에서 나와요. 무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허공의 자리에서, 공에서 하나가 나온다. 그 하나안에 10이 다 들어있는 하나예요.

자, 텅빈자리에서 한점이 나옵니다. 이 한점에는 1부터 10이 사실은 다 들어있는 하나예요. 이 한점이 우리가 말하는 I AM 입니다. 나라는 현존, 이 텅빈자리는 그냥 AM이라고 할 수 있죠. 순수존재예요. 순수한 천지창조랑 상관없이 존재하는 자리가 있어요. 이 차원대가 있어요. 이 차원대가 작용을 일으키면 한 점 촛점이 잡힙니다. 이 텅빈자리 안에 진리의 십자가도 이미 들어있겠지만 활성화 되어있는게 아니예요. 이게 한점의식이 또렷해질때 세피로트로 치면 그게 무극이면 이게 태극이죠. 동양철학식으로 얘기해 본 겁니다. 무극과 태극인데, 왜? 클 태자, 꼭지점 극자, 우주가 다 여기서 나오거든요. 이 차이입니다. 천지창조와 상관없이 현존하는 존재입니다. 이 자리는? 천지창조를 시작시키는 시작점 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두모습 이예요. 동양에서 선비들은 무극과 태극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무극과 태극이 하나다. 무극이 태극이다. 천부경에서는? '무에서 1이 나왔다. 그 1 안에 10이 들어있다 그걸로 우주가 만들어진다.' 이게 똑같다는 거예요. 천부경, 카발라, 자!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도마복음과 성경에서는 이 무극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부안에 이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성부하면 여기까지 성부거든요.

보세요! 존재하는 중에, 촛점이 잡혀서 스스로 있는 나, 스스로 있는 나가 되고, 스스로 있는 나가 나만 있는게 아니고 뭘 알아차려요? 본래 잠재되어 있던 진리를 선명히 알아차립니다. 이게 뭐냐? 말씀을 알아차려요. 영이 말씀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이게 직관 상태예요. 이게 성령 상태죠. 그러니까 지금 성부가 영이시다. 성부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님은 그러죠.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부의 영을 뭐라고 그래요? 성령이라고 그래요. 지금 궂이 나누면 여기가 성부고 여기가 성령이 됩니다. 원래는 한덩어리예요. 한덩어리인데 하나님은 본래 영이기 때문에 성부의 영이 성령이라고 그러면 그냥 지금 이게 성령인거예요. 성령이 하는 일이 뭐예요? 진리를 직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진리의 영이예요. 그런데 여기까지를 또 성부라고 얘기하냐? 하나님 아버지 자리거든요. 하나님 아버지가 텅빈중에 존재하시면서 또렷하게 말씀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 여기까지 아버지 할 수 있단 말이예요. 그런데 궂이 따지면 여기에도 이미 성령이, 성령이란 표현이 이미 맞아요. 이미 성령의 단계예요. 그래서 억지로 나누자면 성부를 무극에 배당하면 성령을 태극에 배당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실제적으로는 뭐예요. 여기까지가 성부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할때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고 할때 이미 뭘 전제하고 있어요? 창조 이전의 하나님인 순수한 존재, 아인소프 상태를 전제하고 그 상태에서 촛점이 맞춰져서, 진리를 품고 있다, 말씀이 뭐냐? 이 세피로트 전체가 하나님 말씀이예요. '나는 우주를 이렇게 천지인으로 창조할거야' 말씀을 다르게 그리면 이렇게 그릴수도 있어요. 이스라엘, 오늘 토요일이라 제가 시내 관통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이거 많이 들고 계시더라구요.

재미있죠? 태극기랑, 성조기랑, 이스라엘 국기를 듭니다. 3개를, 3개를 나란히 붙여서 들고계신 분 많아요. 그 국기를 보고 저는 수화의 비밀을 푸셨으면 좋겠어요. 위로 타오르는 불과 아래로 향하는 물, 음양의 비밀을, 음양이 최대한 조화된 상태를 그려놓은 거예요. 이게 불이죠. '불과 물로 거듭나라' 가 이거예요. 불, 성령으로 거듭나고, 불은 영적인 성령을 상징하고, 물은? 생명수, 성령의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성령과 에너지가 만날때 천지가 창조돼요.

자, 창세기도 그렇게 시작돼요. 창세기부터 이미 성령이 나와요. 요즘 기독교 신학자들은 중세때부터 성령을 잘못 이해한 분들이 많아요. 하나님의 시다바리 정도로 생각해요. 하나님 시다바리, 예수님 시다바리, 누구 명령을 많이 듣느냐? 이런걸 가지고 토론하고 그래요. 돌아버리죠.

창세기부터 읽어 보세요. 창세기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고 계시다' 하고, 성령이 창조한 거예요. 왜냐하면 성부가 영이거든요. 머리 쥐납니다. 성령은 뭐죠? 사전적으로 공부해 보세요. 성령은 뭡니까? 하나님의 영, 하나님은요? 영이시다. 뭐죠? 성부는 영이고 성령은 성부의 영, 그러면 영영 인가요? 말장난에 속는 겁니다. 창세기때 이미, 창세기에 설명이 다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성령 에너지 위에, 일반적인 물질의 물이 아니예요. 에너지를 말하지, 광대한 에너지를 품고 광대한 에너지 속에 성령이 성성하게 말씀과 함께 그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성령, 그 성령이 광대한 에너지로 우주를 창조합니다. 그다음 뭐가 나와요? '빛이 있으라' 하면서 현상계를 만들어 버립니다. 지수화풍을 만들어 버려요. 땅, 바람, 불, 빛이 있으라, 불이 있으라, 물이 있으라, 땅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다 할 수 있어요. 다 만들어 버려요. 이게 중심이 되서 현상계를 창조합니다. 여기서 이 동그라미 원은 현상계예요. 이 위에 원들은 다 하나님 이예요. 이 안에 있는 원을 확대해 놓은 겁니다. 원 안에 이런짓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원이 순수한 원일때가 순수한 존재의 하나님 상태고 성부, 촛점이 잡히면 성령이고 현상계가 만들어지면 현상계에서 뭐가 제일 중요해요? 성자가 중요합니다. 지수화풍의 혈육을 갖춘 성령, 성령이 진리의 화신으로 온 양반, 혈과 육이 있는 성전, 진리의 화신, 말씀이, 인의예지, 사랑, 정의, 질서, 지혜의 말씀이 그대로 혈육에서 인격으로 구현된 분, 누구예요? 성자요, 성부, 성령, 성자로 강조해서, 서로 통해있는데 억지로 나누면 이렇게 나눌 수도 있다. 또 이쪽에서 나누면 여기까지가 성부 하나님이고, 또 보시면, 자! 보세요. 성부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천지창조 전에, 이 그림을 뭘로 나누느냐 보다 그림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시는게 중요해요. 순수한 존재, 영원한 존재예요. 그 존재가 I AM 이라고 내가 존재한다는 촛점을 잡고, '내가 존재한다' 안에는 온 우주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냥 순수한 존재만 있다가 I 할때 여기 우주가 다 들어있어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내가 우주거든요. 이 안에 우주를 만든 설계도 세피로트가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가 있으면 십도 이미 들어있는 거예요. 이때 하나가 선포된 거예요. '오로지 하나로 있다' 그러면 그 안에 열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우주만상이 다 들어있다. 우주만상을 어떻게 품고 있냐? 말씀으로 품고 있어요. 자, 아직 창조가 된건 아니죠. 창조의 주체는 맞는데 창조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건 아니죠. '텅비어 있는데 스스로 현존하고 있다' 라고 까지만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게 맞다. 그런데 이 분은 존재의 하나님이다. 존재하면서 사실은 말씀을 품고 있다. 그런데 이 영이 촛점을 잡고 말씀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대로 현상계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그리면 어떨까요? 그럼 성령이라고 하는게 더 맞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작용을 하면 성령이 돼요. 실제로는 다 영이 예요. 본체와 작용으로 얘기를 해야지, 영은 다 영이예요. 성부 하나님이 우주에 촛점을 잡고 있다가 말씀을 품고 있는 거기까지만 중심으로 얘기하면 우주의 제일 아버지, 우주의 근원,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구나' 라고 하는게 맞고, 그렇죠? 그 촛점이, 보세요, 이 두 그림이 의미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 중간지대가 의미하는게, 텅빈중에 또렷이 알아차리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이렇게 그리면 어떻게 돼요? 그 하나가 말씀을 직관하면서 현실에 그대로 만들고 계시다가 돼요. 이게 성령이라구요. 이 성령은 창조 하나님 이라구요. 주재, 현실을 창조하고 경영하는 하나님, 중간은 양쪽 다 끼어요.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보세요, 여러분, 성령의 현존 상태에 들어가보면 텅비고, 시공도 없고, 생각, 감정도 없고, 시공도 없는 중에 또렷하게 알아차리는 의식, 영만 있어서, 나의 현존만 있어서 진리를 직관하고 있는 상태가 성령의 현존이죠? 자! 이상태는 성부냐? 성령이냐? 할때 지금 밖으로 뭔가 창조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여기가 창조의 이미 본판이잖아요. 창조의 원형을 다 가지고 있잖아요. 말씀을, 그때는 성부라고 부르자는 거예요. 그 성부가, 실제로 지금 제가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뭘하고 있어요? 경영을 하고 있잖아요. 뿌린대로 거두게 해주면서 우주를 경영하고 있잖아요. 경영할때 이 자리는 뭘 하고 있어요? 중심이 되서 중심 역할을 해주죠. 이 자리가 중심이 되서 우주를 활발하게 경영하고 있으면 성령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알고보면 둘다 똑같은 자린데 아버지로서의 인격, 우주를 진리대로 우주를 활발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성령, 그 본체가 되는 성부 할때 이 중간지대는 사실은 겹친다. 느낌은 다르다,

보세요. 아까 얘기 했죠. 제 안에 진리를 직관하고 있는 순수한 영이 있습니다. 제가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그 진리의 영인 상태로만 있으면 여기 구분으로는 성부 상태인 거고, 제가 거기에서 한 생각을 일으켜서 여러분하고 강의를 하고 있고 말씀을 나누고 있는 중에 제 안에서 진리를 직관하고 있는 성령이 놀까요? 아니요, 그 진리를 직관한걸 가지고 지금 말로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이 자리가 현상계를 경영하고 있으면 성령, 원래 성령 자리예요. 이 자리를 현상계를 경영하는 자리에서 분리해서 순수한 우주의 근원이라고 설명할때는 성부라는 거예요. 성부와 성령은 이렇게도 나눌 수 있습니다.

좀 어려우신 가요? 이거 이해하시면 칭의, 성화의 경지에 가셔야 제대로 이해가 되실겁니다. 영적 비밀이 이게 다예요. 여기에 그림 더 안붙여도 이게 다니까 지금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구나, 이거 전반적으로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고,

(중세 삼위일체론) 요한복음 볼까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얘기해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말씀이 계셨다.' 십자가의 진리가 태초에,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거예요. 누구랑 있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게 하나님의 영이랑 함께 있었던 거예요. 성령과 함께 누가 있었어요? 말씀이, 그 말씀이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터무니 없죠? 그런데 이치는 맞죠.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 창조된게 없다. 맞죠? 요한복음에 정확하게 써놓은 거예요. 다만 그 말씀이 그리스도시다 그러면 약간 힘들어지죠. '예수님이 왜 갑자기 거기끼지?' 왜 그런지 아세요? 성자가 진리의 화신이죠. 자! 이걸 그대로 그리면 이거 잖아요. 이 속에 또 뭐가 있어요? 말씀이 속에 있다가 온전히 선포된게 성자예요. 성자를 뭐라 그래요?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네, 말씀육신이예요, 말씀육신이니까 '어, 그래' 그리스도가 말씀육신이니까 하나님 안에 뭐가 있어요? '말씀이 있네, 그리스도가 여기 계셨네' 그래서 이게 성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또 이렇게 됩니다. 여기까지 성부, 여기서 말씀만 성자, 그리고 이 성령의 작용을 성령이라고, 성령이기도 한 우주 존재의 근원 자리를, 존재의 근원을 존재의 하나님, 말씀이 우주 만물의 본질이니까 본질의 하나님, 우주의 주재 하나님, 우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중세때 만들어 집니다. 저런 논리로,

이해 되세요? 이게 중세의 모든 삼위일체론도 꿰뚫으면서 또 다른식의 삼위일체론도 이해해 보는 거예요. 성부는 순수한 존재, 성령은? 진리의 영, 성자는? 진리의 화신. 어떠세요? 모든 존재의 근원, 진리의 영, 진리의 화신,

성령의 위상을 정확히 안잡아주면 개판이 돼요. 성령은 누구 시다바리일까? 이런, 왜 시다바리처럼 생각하는지 아세요? 예수님의 진리를 구현해 준게 성령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이 또 성령이예요. 그럼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야? 하나님의 영이야? 이 논쟁이 붙습니다. 빠질만한 함정에 인류는 다 빠져요. 함정에 안빠지고 봐 보세요. 뭐예요? 하나님은 원래 영이예요. 사실은 성령이 성부예요. 그 성령이 활발하게 우주를 창조하고 경영하는데 관여할 때 성령이라고 하고, 우주의 근원으로써 자리매김할때 성부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하나 더 보태려고 했는데 위험해서, 겨우 지금 기분 좋은데...

하나 더 보태면 성부, 성령을 또 이렇게도 나눌 수 있어요. 지금 보세요, 그러면 우주 안에서도 성령이 주재하고 우주안에서 성령이 우주를 경영하고 있고, 우리 안에서도 뭐가 우리 혼육을 경영하고 있어요? 우리의 영이, 우리의 영과 이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면서 우리의 영이죠. 우주자리에서 볼때 같은 성령인데, 우주적으로 성령이 우주를 경영하고 있고, 저에게는 영으로 경영하고 있죠. 성령과 영의 관계가 있죠? 이럴때 일반적으로 여기를 성령이라고 하고 여기를 성부라고 하더라는 거죠. 우주를 경영하는 성령을 성부라고 붙이기도 하더라는 거예요. '통일 좀 해서 쓰지' 이런 마음도 있지만, 이게 나올거 다 나온 겁니다. 이 그림 하나만 이해하시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서 더이상 모르셔도 돼요. 이 그림 자체를 이해하시는게 중요해요. 이해하시면 얼마든지 이걸 응용할 수가 있어요. 이걸 모르면 또 외워야 돼요. '존재, 그 다음 뭐였는데' 빈칸 쳐 놓으면 존재, 본질, 주재, 헷갈리신다구요. 그림을 이해하시면

자! 여러분 안에도 성부 하나님이 들어있어요. 성부 하나님이 여러분 영 안에 임해계시면서 여러분 안에서 진리를 직관하게 해주고 진리를 구현하게 해줍니다. 우주에서도 성부 하나님이 우주의 영으로써 계시면서 우주 전체를 굽어 보시면서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하고 계십니다. 이럴때 우주 하나님을 성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령, 이렇게도 부르더라는 거죠. 결국 성령이 뭐예요? 하나님의 영, 그럼 내 안에 누가 계세요? 하나님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더라' 하면 결국 뭐예요?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의 영이예요. 성령이 창조했다는 거예요. 성령이 진리를 품고 창조했다. 그 진리를 그리스도라고 또 주장할 수도 있더라. 사도은이, 예수님은 그런 주장 안했습니다만 사도들이 볼때 예수님은 진리의 화신이니까 사랑의 진리가 혼육을 입은게 예수님 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본체는 뭐예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법신은 뭐예요? 진리, 그럼 진리는 원래 어디있어요? 성령안에 진리로, 애초에 우주 천지가 창조될때 하나님의 영이랑, 말씀이랑 합쳐서 창조된 거잖아요. 그러면서 사도가 무릎을 딱 치는 거죠. '예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네' 그래서 사도들의 글에는 천지창조를 예수님이 했다고 나와요. 그 이유 아시겠어요? 그 논리의 흐름? 왜그러냐? 예수님은 진리의 화신이니까, 그러면 성령안에 계시던 진리가 예수님의 본체 아니냐? '그렇네' 이거예요. 그러면 천지창조할때 진리가 없이 영만으로 창조가돼? 그럴리가? 그럼 우주를 누가 창조했어요? 예수님이, 됐죠?

저는 이렇게 잘못된 경로도 다 추적합니다. 어디서 삐끗했는가, 그럼 거기서 또 취할게 나와요. 그러면 이 말을 자명하다고 우길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진리의 화신이 되면 여러분이 천지창조를 한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왜? 여러분은 사랑의 진리의 화신이니까, 사랑의 진리가 하나님 안에 말씀으로 있다가 우주가 나왔으니 여러분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도 되는 거죠. 이렇게 인정할거 아니면 예수님만 너무 과하게 밀어붙이지 말라, 왜? 도마복음에 시작부터 나오죠, 우리는 예수님 쌍둥이니까, 너무 한쪽만 몰아주면 다른 형제가 상처받는다. 아시겠죠? 이제 느낌 오시죠.

그래서 성부, 성령, 성자, 다른 관점입니다. 이것은 이 자체가 성령이라는 관점에서 그럼 그 근원은 성부라고 하고, 본체, 성령의 본체를 성부라고 하고, 성령의 인간적인 작용을 성자라고 하자. 이 소리고, 여기는 그게 아니라 우주 만물의 가장 근원에 성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작용으로 본체와 작용의 관계예요. 본체가 작용으로 우주를 창조하더라. 작용하고 있는 중에도 본체는 항상 똑같으니까 불변하니까 성부, 성령으로 우주가 존재하고 굴러가는 것을 다 설명할 수 있고, 성자가 여기 꼽사리로 낍니다. 사도들이 넣어준거죠. 말씀을 성자라고 밀어붙이면서, 그러면 딱 나눠지죠. 이게 중세식 삼위일체예요. 존재의 하나님, 본질의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주재의 하나님 보다 역사의 하나님이 좋겠네요. 바꾸겠습니다. 이게 기독교 분들은 아시겠죠. 역사한다. 하나님이 역사한다. 그 역사를 성령이 한다고 하니깐 시다바리인 줄 아는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 잘들어 성령' 이런 느낌인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런데 좀 이상한거죠. '이해는 되지만 약간 좀 탈선했구나,' 아시겠죠? '이해는 되지만 그거는 아닌 것 같다' 라는 느낌 가지시면 오늘 이해 잘하신 겁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