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44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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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일자 | 2018. 08. 25. 土. |
| 게시일자 | 2020. 09. 22. |
| 동영상 길이 | 36:32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dfHgxgN0XJI |
0:11
- 소당연과 소이연. 이건 좀 말이 어렵죠. 근본원리 보편법칙 제가 이렇게 풀어드립니다만 이것도 어려우실 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몇 해 전부터 일단 이렇게 밀고 있습니다. 계속 10년 넘게 밀고 있는 것 같아요. 근본원리와 보편법칙으로 밀고 있어요. 하나로 좀 일단 회통을 해보게요. 자 이게 해()와 달(月)입니다. 해와 달. 주역. 동양에서 주역이 큰 학문인 이유가, 점치는 책이 그렇게 큰 학문일 필요가 없죠. 그런데 왜 역을 크게 보느냐? 점치는 책이라서가 아니라 점치는 원리가 우주의 창조 원리와 운영 원리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공자님이 위대하게 본 거예요. 실제로 현재 고본으로 발견된
1:02 주역들에 보면 공자와 제자들 간의 대화도 있어요.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선생님 점치는 책에 왜 그렇게 몰입하십니까. 주변 여론 안 좋아질까 봐 걱정입니다.” 공자님이 “이게 단순한 점 책이 아니야. 도가 들어있어.” 변호하십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말이 나왔다는 얘기에요. 갑자기 위대한 철학자가 아 그분 위대한 철학자라 했는데요 요즘 자꾸 타로 공부하고 계세요 그러면? 타로가 하찮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 시각에 “아 왜 점으로 빠지셨지?” 주역점이 그 당시에 딱 타로 같은 거죠. 오 왜 점으로 빠지셨지? 의아한 거예요. 제자들도 “선생님 여론 안 좋아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지금 같으면 “타로 그 안에 도가 있어.” 이렇게 얘기하신 거예요. “주역 안에 도가 있어.” 타로나 주역이나 비슷해요. 그 안에 도가 있어. 도를 설명하기에 주역 책이 참 좋은 거예요. 괘를 가지고 풀면 형이상학적인 걸 눈에 보이는 기호를 써서 설명하니까
2:03 좋은 거예요. 그 부분 때문에 공자님께서 높이 사셨다. 자 소당연 소이연에 대해 주자 얘기를 좀 들어볼까요. 제가 풀어 놓은 건데 보세요. 주자는 개별ㆍ구체적 현상을 관통하는 ‘보편법칙’을 ‘소당연’(마땅히 그렇게 작용하게 하는 인과법칙)이라고 부르고. 소당연이라고 부를 때 의미가 이것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작용하게 하는 인과법칙.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인과법칙 이런 뜻입니다. “시간․공간 속에서 쉬지 않고 작용한다!”(불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공 속에서 절대로 쉬지 않고 작용한다. 그래서요 주자가요 소당연을 설명할 때 불용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친구들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게 그칠 이(已)자거든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현상계 안의 보편법칙의 특징이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되고요 그게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어요. 물은 무조건, 항상, 한결같이 아래로 흐르게 돼있어요. 시공간 안에서 항상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3:06 소당연이고, 소이연은 불가역 그럽니다. 절대로 바꿀 수가 없다. 이건 선천적인 정보라 여러분 본성 안에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예절 지켜라” 인의예지가 박혀 있다면요 그 본성은 바꿀 수 없는 겁니다. 보세요. 시공을 초월해서 있는 정보기 때문에 시공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바꿀 수가 없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 선천 정보고 이 선천 정보 때문에 시공 안에 이런 현상이 항상 일어나게 돼 있다. ‘시공 안에서 항상’이라는 이걸 시공을 초월해서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주자가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런 걸요 개념화를 다 해버린 거예요. “조선시대 500년간 주자학만 했다. 아 우리 선비들 부끄럽게 중국에서 철학 수입해다가 500년씩이나 파고 부끄럽다.” 그런 분들이 또 화두 강조해요. 화두도 똑같이 고려 말에 수입해서
4:03 조선에서 500년간 한 겁니다. 조선은 뭐 들어오면 일단 500년이에요. 조선 사람들 무섭잖아요. 시작하면 500년 정도 해요. 기독교 들어 왔잖아요. 사실 이제 또 한 500년 이상 할 기세죠. 우리는 하나 들어오면 뽕을 뽑습니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500년씩 해요. 그런데 그 500년간 한 거 때문에 보세요. 중국에서도 “주자학은 조선에서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화두선도 지금 현재 전 세계에서 화두선 팔아먹고 싶은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왜냐? 500년간 했기 때문에 이걸 팔아먹고 싶은 거죠. 중국은 문화혁명 때 다 끊겼거든요. 한 번씩 맥의 끊겼어요. 화두선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데는 여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화두선의 세계화에만 골몰하는데 그래서 제가 비판하는 겁니다. 이름도 조계종이요 선불교. 대승불교 중에서도 선불교는 특이한 불교예요. “육바라밀 닦아서 보살되자”는 게 대승불교인데 선불교는 뭔데요? “화두 한방에 부처되자”는 거예요.
5:06 기존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나온 겁니다. 완전히 뭉개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걸 뭐라고 주장하냐? 교외별전. 우리는 대승불교 경전 외에 따로 전해오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다. “니네 3아승기겁 동안 죽어라 육바라밀해서 10지 12지 가봐라 우리는 화두 한방에 12지 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가봤자 법공까지밖에 못 깨달아요. 그게 명백한데도 지금 육바라밀 무시하고 화두만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잘못 됐기 때문에 이 화두선을 가지고 세계화 하겠다는 말에 저는 놀래요. 될 리도 없고 그러지 마시라. 한국불교는 원래 전통이, 선불교가 이렇게 융성해지기 전에 한국불교의 전통은 회통불교입니다. 원통불교고. 선교를 하나로 아우르면서 항상 대승적인 지향을 했던, 원효스님이 그 대표주자예요. 원효스님이 더 고승인데도 원효스님에 못 미치는, 육조니 이런 분들 레벨이 원효스님보다 훨씬 낮아요.
6:04 그걸 조계종이라고 해가지고 표방해서 조계산이 6조 스님이 살던 산인데 그분들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경전도 금강경. 금강경이 어려울 것 같죠? 대승경전 중에 제일 쉬운 게 금강경이에요. 왜? 거기에는 법공까지밖에 안 나오거든요. “일체 형상이 형상이 아닌 줄 알면 여래를 볼 것이다.” 뭔 소리입니까? 무상 고 무아 바로 윗단계예요. 자 이 펜이 여러분 펜으로 보이시면 여러분 여래를 못 봅니다. 이 펜이 펜이 아닌 줄 아시면 여러분 여래를 보신 거예요. 이 펜이 참나의 작용인 줄 아시면 여래를 보신 것입니다. 이 이상이 없어요. 보시 잘해라는 말은 나오죠. 무상 보시해라. 육바라밀의 실천 팁까지는 나와요. 그래서 금강경이 경인 거예요. 경은 경인데 육바라밀을 제대로 논하지는 않았어요. 주력이 어디에요? 법공이에요. 주력이 구공보다는 법공. 반야심경도 주력이 어디에요? 법공.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했다니까 바라밀이 나오긴 했다고 하지만
7:05 ‘육바라밀이 진리다’라고 밝힌 경은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화엄경을 보시면, 거기 화엄경 체계에 써 있어요. 각주에 제가 넣어놨어요. 화엄경은 시작이 “일체 법이 내 자성인 줄 알면, 내 자성 안에 우주의 모든 다르마가 있다는 걸 꿰뚫어보면 1지 보살이 된다.” 스토리가 다르다고요. 사실은 금강경이 따라올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조계종은 소의경전이 금강경이에요. 목표가 애초에 어디에요? 법공이에요. 법공이나 잘하면 좋은데 법공도 또 못 해요. 뭔 얘기인지 아시겠죠? 견성도 또 못 해요. 견성하는 거 이거는 지금 거의 다시 태어나야 되는 이 수준이에요. 화두 잡는 분들 마인드가 “이생에 견성하실 거예요?” “고승들도 못 하는데.” 즉 하루에 열 몇 시간씩 하는 사람도 못 하는데 제가 감히 하는 마음으로 화두를 잡아요. 원래 조계종은 그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조계종 원형으로
8:01 라도 돌아가시라고 그럽니다. 조계종 원형은요 “지금 당장 견성하라”는 거예요.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죠. 원형도 못 지키고 있어요. 일본은 임제종하고 라이벌이 조동종이거든요. 조선은 5백 년간 임제종이 내려왔고 일본은 그 기간만 뭐가 득세하냐면 조동종이 행세했습니다. 임제종도 있는데 화두도 잡는데 조동종이 일본은 세요. 즉 예전에 그런 유명한 선사들이 묵조선 가풍을 만들어 놔가지고 묵조선이 세요. 지금 일본에서 화두선 하는 분들이 우리 화두 잡는 거나 좀 달라요. 우리는 속으로 “무” 하고 안으로 들어가잖아요. 거기는 기합하듯이 해요. “무” 이걸 내공을 닦아서 크게 소리 내면서 화두도 하고 일본 스타일로 화두를 하고. 주력은 묵조선인데 일본에서 묵조선이 뭔지 아세요? 묵조선은 앉아 있으면 부처예요. 앉아 있는 시간만큼 부처예요. 움직이고 돌아다니면 부처가 아니고 앉아 있으면 부처예요.
9:00 하루에 제일 많이 앉아 있는 분이 제일 부처예요. 왜냐? 우리가 원래 부처기 때문에. 원래 부처라는 사상이에요. 그 말은 좋죠. 여러분 원래 부처예요. 움직이면요? 덜 부처예요. 앉아있으면요 불성이 드러나요. 무조건 앉아 있으라는 거예요. 사실은 몸이 앉아있는 게 중요한 건 아닌데 조동종 가풍이 좀 그래요. 그래서 묵조선을 화두선 창시자인 대혜 스님이 뭐라고 비판했어요? “저 앉아 있는 시체들”이라고 비판했어요. 죽어있는데 앉아 있다. 마음은 죽어서 앉아만 있다. “몸만 앉아 있으면 뭐 하냐?” 이게 화두선입니다. 늘 싸우면서 발전해 와요. 묵조선과 화두선. 둘 다 어느 부분적인 진리를 갖고 있어요. 조동종이 맞는 것도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부처니까 마음만 가라앉히면 불성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근데 그걸 꼭 육체적인 앉아 있음으로 설명하려니까 문제고. 화두선, 원래 불성이 드러나기만 하면 되는데 꼭 화두를 잡아야 드러난다고 주장하니까 문제고. 둘 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시겠죠. 서로 양쪽 다 견성자들은 계속 나옵니다. 조동종은요 지관타좌라고
10:07 무조건 앉아 있어야 돼요. 타좌가 앉아 있는 건데 앉아 있어라. 목표가 앉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조동종 공부하면 또 마음 편하실 거예요. 뭐 지금 이런 공부하실 게 아니에요. 앉아 있어야 돼요. 앉아서 참선하시면 그 시간만큼 부처인 거예요. 이렇게 서로 가풍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한국 불교가 “화두는 우리지”라고 생각해 볼 만도 한데 저는 “좁은 생각이다.” 왜냐? 제가 볼 때 우리나라에서 화두로 견성자가 매일, 아니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년 백명 천명씩 나오면 제가 세계화하라고 하겠어요. “거 참 재주는 있네 화두는 참 잘하네” 하겠어요. 그런데 화두 진짜 못 해요. 우리나라 화두선 공부 자체를 500년을 해왔는데 진짜 못 해요. 많이는 하시는데 견성자가 안 나온다고요. 이런 걸 가지고 세계화 하겠다는 발상은 저는 욕심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명하지 않잖아요. 내가 잘하는 걸 남한테 소개하는 거지 나는 진짜 안 되는데 최고란 아집을 가지고 남한테 밀어 붙이겠다.
11:06 오늘 왜 이러죠? 조금 불교랑 친해지려고 그러면 꼭 제가 이래요. 막 지적하고 비방하고. 아무튼 초기불교만 문제가 아니다. 선불교도 단단히 문제 있다는 걸 아셔야 보살이 나온다니까요. 지금 한국불교가 이상한 전법을 택하는 거예요. 절에 오신 분한테 그냥 보살이라고 불러 버려요. “보살님.” 의욕상실입니다. 육바라밀 닦기 전에 이미 보살이 돼버려요. 여러분 태권도장 갔는데 진짜 나 발차기랑 정권 끝내주게 하려고 갔는데 검은 띠 줘버려요. “넌 오늘부터 검은 띠다.” 뭐 한 게 없는데 됐잖아요. 찜찜하지 않으세요? 잘하라고 준 거겠지 하고 그냥 가는데 이게 오히려 공부를 되게 망칩니다. 여러분, 고생시킨 다음에 검은 띠를 줘야지 값을 발하지. 그냥 갔는데 “보살님.” 이미 보살인데 보살이 되기도 애매하잖아요.
12:04 화엄경 읽으면 거기 나오는 보살처럼 해야 되는데 난 이미 보살이에요. 지겨울 정도로 보살로 불렸어요.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당신들은 보살이나 해. 우리는 견성해서 부처될 거야.” 이상하게 써먹고 있는 거예요. 이 전통들 다 잘못된 거예요. 대승불교 전통으로 원형의 전통으로 돌아가야 돼요. 저는 무조건 대승주의자입니다. 비방을 누가 어떻게 하셔도 저는 대승 전하려고 온 사람이고 전 이거 잘하는 게 제 사명이기 때문에 한 분이라도 보살 많이 만드는 게 목표지. 견성자 늘리고 뭐 아라한 늘리고 이것도 도와드리긴 할 거예요. 왜? 답답하니까. 답답하니까 견성하는 법도 제가 올려요. 너무 답답하니까. 그런 선불교식 견성도 도와 드리는데, 제가 하자고 하는 견성은 그게 아니에요. 육바라밀을 꿰뚫어보는 걸 저는 견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견성은 저는 무조건 지지합니다. 사실은 저도 견성 전하러 온 사람인데 선불교식이 아니라 또 아라한식도 아니고 대승식 견성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13:07 그러려면 이걸 아셔야 돼요. 우리 안에 분명히 바꿀 수 없는 영적인 진리가 새겨져 있고 그 진리대로만 살면 된다는 거. 한결같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태어나건 이 진리대로 살면 된다는 거. 여러분 통달된 길이란 게 뭡니까? 어디 가든 이건 적용돼요. 지금 여러분 아프리카 가서, 문화가 완전히 다른 곳에 가도 “내가 당해서 싫은 거 남한테 안 하고 내가 받고 싶은 거 남한테 해주시면” 거기서 칼 안 맞습니다. 그런데 브라질 저쪽 그런 데 가면, 원주민들 산다고 반갑다고 들어가면 화살 날아와요. “왜 남의 땅에 허락 없이 침범하냐?”는 거죠. 그런데 거기도 들어가 보면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걸 지켜주면 내가 당신을 존중한다는 걸 보여주면 활 안 맞는다니까요. 이게 어디든 가면 모를 것 같죠? 그 사람 마음에 다 법이 율법이 이미 새겨져 있어요.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14:05 “모세처럼 돌로 새겨진 율법을 못 받은 이방인들은 양심에 율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돌로 새겨진 율법 받은 사람이 더 대단할까요? 양심에 율법이 새겨졌다는 거 아는 사람이 대단할까요? 제가 볼 땐 오히려 오죽 모르면 돌로 새겨서 줄까요? 넌 진짜 말하면 잊어버리는 타입이니까 돌로 새겨 줄게. 갖고 다녀. 그냥 늘 봐. 어디가 더 위대할 수 있을까요? 돌로 새겨진 거 받았다는 게 자랑이 아니에요. 여러분 학당에 오셨는데 제가 “양심 아시죠? 그대로만 사시면 됩니다” 하고, 이제 한 분 따로 불러서 써서 드려요. “아침에 일찍 일어날 것, 어른을 보면 인사할 것,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해볼 것, 잊지 마세요” 하고 드리면 갈 때 조금 그렇죠. 남들은 못 받았는데 내가 받았다고 自負心 생길까요?
15:03 유태인들이요 율법까지 받고 하는 건요 징하니 안 지키니까 그런 거지. 양심에 새겨졌다는 거 바로 안 게 동이족들이에요. 바로 오륜 읽어 버리잖아요. 인의예지 읽어 버렸잖아요. 이거 동이족들이 찾아낸 겁니다. 동이족이 중국과 우리의 뿌리예요. 음양오행설, 인의예지가 중국과 우리의 공통 조상인 동이족들이 찾아낸 거예요. 홍산문명의 주역들이 찾아낸 거예요. “우리 안에 인의예지 새겨져 있다.” 공자님 이전에 이미 인의예지란 말이 있단 말이에요. 공자님은 그걸 살려 쓴 거예요. 본인이 술이부작, “나는 옛날 선조들이 해놓은 걸 진술했을 뿐이지. 내가 창작한 건 없다”라고 한 거예요. 아시겠죠? 이런 것 역사랑 같이 이렇게 설명 드리면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그래서 이게 인류문화의 정수입니다. “내 안에 근본원리가 있으니 보편법칙으로 실천으로 옮기자. 실천법칙으로 옮기자.”
16:00 이게 다예요. 이걸 몰라서 인류가 그동안 그렇게 고생하고 명상하고 도 닦고 하늘에 기도하고 한 건데 기도나 명상 그 자체에만 집착하다가는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놓쳐 버려요.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다 견성하고 있으면 삶이 나아질까요? 안 그래요. 진도 좀만 나갈게요. 지금 10분 시간이 있습니다. 시공간 안에서, 시공간을 전제하니까 항상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보세요. 이 자리(소이연)는 시공은 없는 자리니까 사실은 영원하네 아니네도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영원하다고 흔히 얘기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시공 안에서 영원하다고 말을 하면, 영원하다 그러면 시공 안에 계속 존재하는 걸 가지고 상상하기가 쉬워요. 사실은 여기는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영원불멸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영원이니 불멸이니 하는 언어조차 초월해 있는 세계고. 이것(소당연)은, 이 세계는 눈앞에 물이 지속적으로 아래로 흐르고 있는 법칙이 발견된다는 거예요.
17:02 지속적으로. 요즘 잘 안 했는데 이거 제가 늘 하죠. 오늘은 혹시 안 떨어뜨리지 않을까요? 봐요. 늘이잖아요 늘. 불용이. 보편법칙 중에 만유인력법칙은 쉬지를 않습니다. 왜 쉬지 않느냐? 여기서(소이연) 그렇게 하라고 내몰거든요. 시공 초월한 세계에서 시공 안에서는 그렇게 움직이라고 내몰고 있어요. 그 정보가 모를 것 같죠? 음양 오행 팔괘일 뿐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음양 오행 팔괘가 그렇게 내모는 거예요. 만유인력법칙이건 모든 우주의 물리법칙이건 생명의 법칙이건 심리법칙이건 다 그렇게 내몰고 있어요. 그게 우주 근원에서 그렇게 새겨져 있지 않으면 현상계에서 그런 현상이 안 일어납니다. 이게 서양철학자가 말한 거예요. 서양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한 말인데 이게 서양 존재론의 효시입니다.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다.”
18:00 뭐냐? 있는 건 영원히 있고 없는 건 영원히 없다. 우린 있죠? 있죠. 존재하죠. 여러분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게 있기 때문에 지금 존재하는 거예요. 있는 건 있다. 없는 건? 없죠. 애초에 없었으니까. 있는 건요? 영원히 있는 거예요. 그 자리를 얘기하는 거예요. 시공을 초월한 얘기를 한 겁니다. 파르메니데스가 형이상학을 얘기한 거예요. 현상계 안의 존재들은 무상하게 변화하죠. 그 얘기를 한 게 아니고 있는 건 영원히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파르메니데스가 뭐라고 설명하는지 아세요? “있는 건 있는데 그건 나눠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고 둥그런 구와 같다” 그랬어요. 원불교죠. 또 저희 학당 로고죠. 파르메니데스가 선구자입니다. “원형의 구와 같다.” 이걸 명상록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대로 얘기해요. 파르메니데스가 “구와 같다”라고 한 그 내용을 가지고 “구와 같아야 된다. 옛날 철학자가 말하듯이 온전한, 찌그러지지 않은 구와
19:04 같은 상태로 명상을 통해서 쉴 수 있어야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알고 있었어요. 희로애락이 없는 그 상태는 온전한 구죠. 희로애락이 생기면 찌그러져요. 현상계 안에 들어오면 무조건 찌그러져요. 온전한 구가 존재하려면 언제죠? 현상계를 초월할 때만 가능합니다. 아시겠죠.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동서양 모든 철학이 다 하나로 회통됩니다. 제가 막 아무렇게나 지어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꼭 연구해 보세요. 중용에서는 이런 보편법칙을 이원성 안에서 드러나는 ‘달도’(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는 logos)라고 부릅니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는 그런 로고스,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법칙의 근본이 되는 ‘근본원리’를 ‘소이연’(보편법칙의 원인이 되는 근본원리)이라고 부르고, “시간․공간을 초월하여 바뀌지 않는다!”(불가역)이라고 하였습니다.
20:02 중용에서는 근본원리를 이원성을 초월한 ‘대본’(천지만물의 큰 뿌리가 되는 logos)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겁니다. 했는데 보세요. 그전에 시공을 초월하여 바뀌지 않는 그 불가역의 상태, 여기가 우리의 원형의 상태죠. 절대계의 상태. 시공 안에서 부지런한 상태는 이 현상계의 상태. 보세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게 이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다.” 이건(불가역) 있어요. 현재 우리 우주가 이렇게 생겨 먹었죠. 이건 바뀌지 않고 영원히 그렇다는 거예요. 무상한 것들 말고요. 영원한 게 있다는 거예요. 우리 존재를 있게 한 것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죠. 뭔 소리야? 철학자들은요 철학지능이 높아서
21:03 요런 감각이 예민해서 알아낸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우주론적인 직관을 발휘하는 거예요. 내가 있네. 울고 또 웃고 떠들고 하루 종일 해도 나를 늘 있게 하는 게 있네. 뭘까? 간단하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니 있는 것이겠지. 있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쪼개지지도 않는다. 있다. 그 있다는 것이 우리 안에 있다. 재미있죠. 기독교에서 모세한테 여호와가 뭐라 그랬죠? “나는 내가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예리한 분들은 여기서 알아내요. 파르메니데스 말을 우리 식으로 풀어 볼게요. “현존하는 것은 현존하고 현존하지 않는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존하잖아요. 영원히 현존하는 게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플라톤도 그걸 읽어내 가지고 우리 안의 생명은 영원하다. 생명은 이름이 생명 아니냐. 그러니까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22:04 생명이니까 있다는 거예요. 영원히 살아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영원한 살아있음이 우리 안에 있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이 얘기를 합니다. 지금 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이분들이 영적 직관력으로 알아낸 거예요. 경험이 도움은 됐지만 누구는 1000개를 경험해야 그걸 직관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1개만 딱 경험하고도 직관할 수 있는 것, 그게 철학지능이죠. 여러분 어떤 아이스그림 하나를 1000개를 먹어보고 알아요. “맛이 없구나.” 예민한 분은요 혀 딱 대고 “이거는 아닐세.” 그분은 진행이 빠르죠. 금방 읽어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여러 생을 살아야 아는 것도 아니에요. 딱 “아! 생이란 게 녹록치 않겠네.” 지금 준우가 “아! 인생 쉽지 않겠는데.” 예리하면 빨리 알아낼 거고. 둔하면 한 60 돼서야 “아 인생이 좀 그러네.” 이렇게 차이가 있겠죠. 자 마찬가지로. 보세요.
23:05 철학자들은요 꼭 보면 철학자가 다 고수가 아닌데도 철학지능이 좋아서 작은 경험에서 탁 알아버려요. 이 로고스를 빨리 읽어내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철학자들한테 그게 이제 상근기죠. 그걸 빨리 읽어내는 분이 상근기. 결을 빨리 읽어내니까. 제가 학당에서 강조하는 것도 육바라밀의 결을 빨리 읽어내시는 게 사실은 그게 양심지능, 철학지능, 영성지능이 그거예요. 영성지능이 높은 사람은 빨리 읽어내요. 이 결을 읽어내요. 이 결은 사실은 이게 다르마라는 거고. 진리를 빨리 읽어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알아서 진리 안에 거하면 자유가 올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짜 자유롭고 싶으시면? 과학도 우리가 왜 연구하나요? 과학적 보편법칙을 많이 알아내면
24:00 물리세계에서 자유가 옵니다. 영적인 진리까지 알아내면 어떻게 되죠? 우리 마음 상태, 마음의 어떤 상태가 자유로워지겠죠. 우리 삶이, 마음을 써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자유로워지겠죠. 주자가 뭐라고 했는지 보실래요. “천하 만물의 ‘소당연’(보편법칙)은 ‘원리’(理)이며, ‘소이연(근본원리)은 원리의 ‘근원처’(태극)이다.”(주자어류) 천하 만물의 소당연은, 보편법칙은 우리가 원리라고 하는 거고. 이 소당연은 유교에서 주자가 원리, 우리 이기론에서 리(理)죠. 원리라고 하는 거고. 소이연은 이게 태극이다. 자 구분합니다. 이것도 사실 원리예요. 주자는 평소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둘 다 원리인데 원리 중에 소이연의 원리와 소당연의 원리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태극과 원리로 구분했는데 왜 그러냐 하면 이게(소이연의 원리) 일반 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하느님이라는 거예요. 소이연이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하느님 자리라는 거예요. 하느님 자리 안에 인의예지의 근본원리가 박혀 있구요. 보편법칙은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써 가면서 자명한 걸 찾아
25:03 가야 되는 거구요. 자 이것도 구분하셔야 돼요. 소이연은 이건 사실은 타고난 겁니다. 소이연은 타고난 거예요. 보편법칙도 사실은 타고나지만 근데 이 보편법칙은 당위의 세계에서 우리가 실천을 해야 돼요. 실제로 그렇게 해야 되는 게 있어요. 실천의 영역에서 보편법칙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근본원리는 직관으로 알아낼 수 있지만 소이연은요 직관과 이성을 총동원해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야 돼요.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공부한다는 것은 보편법칙을 공부하는 겁니다. 보편법칙을 공부할 때 직관 없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보편법칙을 공부하는 중에 자꾸 직관이 돼요. 근본원리에 대한 직관력이 자꾸자꾸 높아져 갑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몇 10년 사시는 동안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돼” 하는 보편법칙을 많이 체험하시고 알아내셨죠. 거기 어떤 직관이 있지 않아요? “시공을
26:03 초월해서 인간은 이런 존재인 것 같아” 하는 직관들이 거기 들어있어요. 인간은 남한테 해코지하고 살면 안 돼 하는 보편법칙이 옳다고 여기신다면 그 안에는 뭐가 있죠? 나와 남이 둘이 아니야 하는 어떤 직관이 있다니까요. 그 직관들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보편법칙을 연구하시다보면 자연히 근본원리를 많이 아시게 돼요. 제가 지난 시간에 다 설명 드렸어요. 실제로 여러분은 보편법칙을 먼저 연구하세요. 그러다보면 보편법칙이 언어화되기 전에 내면의 어떤 직관이 있다구요. “그게 옳은 거야” 하는 영적 정보에 대한 직관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내면에 느낌이 있어요. 말로는 사람은 남도 배려하고 살아야 돼 하는데 그 말 하기 전에, 언어화하기 전에 저 내면에서 어떤 직관이 있으니까, 영적 정보가 있으니까, 우리가 어떤 느낌이 있으니까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해본 거거든요. “음 사람은 남을 사랑해야 돼.” 그런데 말로 하고 나면 좀 그 맛이 덜해요.
27:01 내면에 어떤 강력한 확신과 정보로 있었는데 말로 꺼내고 나면 좀 그 맛이, 생생함이 떨어진다. 또 정보가 약간 미진해 보이고. 율법이 이래요. 말로 표현하면 율법들은 좀 힘을 잃어요. 그런데 율법이 말로 표현되기 이전에 우리 양심에 있을 때 율법 그 자체, 그게 우리 안에 있는 근본원리입니다. 밖으로 보편법칙으로 만들고 나면 좀 생생도가 떨어져요. 언제 생생도가 다시 높아지느냐? 내가 깨어서 그걸 실천할 때 또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마는 그 원형 자체에서는 분명히 형이하의 세계로 표현되고 나면 맛이 좀 달라져요. 그런데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그 정보가 있어요. 여러분 마음이 그런 결론을 내리게 내모는 어떤 정보가 있다니까요. 그런 게 없는데 여러분이 “사람은 남과 나누고 살아야 맞는 것 같아” 이 말이 왜 나왔을까요? 언어화 이전에 내 마음을 그쪽으로 내몰고 있는 정보가 있다니까요. 만유인력법칙이 늘 작동할 수밖에 없게 내몰고 있는 우주의 힘이 있어요. 여러분 마음 안에 그 힘과 정보가 있어요. 그게 사실은 근본원리입니다.
28:07 그걸 태극이라고 불러 버리는 거예요. 태극이다. 주자 말 하나만 더 듣죠.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매 모두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작용’(사)이니, ‘소당연’(보편법칙)이 쉬지 않고 작용함(불용이)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근본원리’의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주자어류). 사람이 어린아이가의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모두 측은지심, 측은해하는 마음이 나타나는데. 이건 현상이에요. 그쵸. 자 보세요. 형입니다 형체. 육체적 형체는 아니지만 마음이 어떤 꼴을 갖췄죠. 측은하다 하는 감정이 생겼죠. 개별적인 감정이죠. 측은하다는 개별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일, 작용, 사물이고 그것은 소당연이 쉬지 않고 작용함이다. 내 안에 보편법칙이 있어서 그래요. 보편법칙이 뭐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측은해 하라.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니 너도 놀래라” 하는 게 보편법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보편법칙을 일상에서 따르고 살면 여러분은 보살이 되는 거예요. 군자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내모는 게 있을 거
29:01 아니에요. 이 보편법칙을 이 현상계에 계속 적용시키는 우주적인 에너지와 힘이, 정보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근본원리의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못 바꾼다. 우주가 인의예지로 탄생되었고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인의예지 자체는 바꿀 수가 없다. 즉 사랑을 어기면 여러분 무조건 찜찜하게 돼 있지 “근본원리에서 사랑은 좀 빼주시면 안 될까요?”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죠? 양심을 알고 나면요 “우주 굴리는 운행 원리가 양심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래서 자사처럼 “희로애락을 초월해 있는 내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이 사실은 천하 만물을 만들어낸 근본원리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이게 아공 법공 구공을 하나로 회통해서 고차원적으로 알아내는 겁니다. 근본원리도 알아내게 되니까 그 근본원리대로 실천하는 게 이제 가능해지죠. 이런 게 군자, 보살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 서양의 철인들도 이 세계까지 들어온 분들이 철인 소리 듣는 거예요.
30:08 근데 요즘 서양철학은 이데아나 로고스를 부정하는 철학들이 많습니다. 이데아 인정하는 철학자를 현대에는 못 본 것 같아요. 화이트헤드 정도 인정했는데. 러셀의 스승이죠. 러셀부터 이데아를 중시하지 않아요. 지금 이데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지금 철학자들은 보편법칙만 연구하지 근본원리로는 가지를 않아요. 이게 현대철학이에요. 그만큼 영성이 떨어진 거죠. 보편법칙에 대해서 밝아지니까 물질문명은 높아지는데 근본원리에 대해서는 어두워지니까 영성은 떨어지는 거죠. 정신문명은 떨어지는 거죠. 여러분 웬만한 동양고전 시작 보면 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물질문명이 창궐하여 정신문명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냥 그렇게 쓰는 거지 뭐가 땅에 떨어졌는지 사실 몰라요. “요즘 왠지 싸가지 없어진 것 같아” 정도의 느낌이지 싸가지가
31:02 없어졌다는 걸 이렇게 설명하실 줄 알아야 돼요. “소이연을 모르고 소당연만 연구하다 보니까 싸가지가 없어지는 거예요.” 과학만 중시하고 철학을 무시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철학 공부 제대로 하시지 않으면 인류 영성은 절대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냥 올라가진 않습니다. 위대한 철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인류 영성이 이 정도라도 온 거예요. 4대 성인들이 인류 축의 시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인류가 이 정도 철학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분들이 등장 안 했으면요? 몰라요. 물질문명만 연구했을 거예요. 그분들은 귀한 거예요. 이 진리를 꿰뚫어 보고 자기 삶에서 실험해서 남들한테 목숨을 걸고 보여준 분들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게 인류한테 귀한 거예요. “진리 때문에 목숨을 버리네.” 이거 충격적인 거예요. 왜냐? 물질의 보편법칙은 보이는데 정신세계의 보편법칙은, 철학적 보편법칙은 눈에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안 살아도 크게
32:04 찜찜해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버린 사람들이 나오니까 그 뒤로 인류가 크게 찜찜해진 거예요. 이제 법정에 가서 “너 죽을래. 니 철학 안 바꿔?” 그러면 “아 철학 바로 바꾸겠습니다. 제 사상 바꾸겠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한 번 지나가면 괜히 “아 누구는 죽기까지 했는데 나도 이제 독배를 마셔야 되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고요. 예수님이 한 번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아 누구는 진리 때문에 순교까지 하는데 내가 이렇게 위력에 굴복해서 바로 진리를 버리는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인류가 사고가 깊어진 건요 그분들이 다녀가셔서 그래요. 다르마를 진짜 깨달으시기를 기원하고 이런 공부를 통해 근본원리 보편법칙, 말도 어렵지 않아요. 두 개만 아시면 돼요. 이제부터 구공 설명하는 모든 것은 다 이것입니다. 근본원리 보편법칙. 안 어렵죠? 저걸 구분하실 수 있다면 그럼 여러분은 이미 철학자가 되신 거예요. 제 얘기 듣고 진짜 서양철학 책도 막 사 보시면 그러면 아마 안 돼요.
33:09 바로 접근하시면 힘들지만 서양철학에서 하는 소리가 뭔 소린지는 알아들으시는 눈이 열려요. 그리고 왜 안 된다고 했냐면 서양철학 용어를 모르셔서 안 될 뿐이지 내용은 사실은 알고 계십니다. 기회 되는 대로 쉬운 것부터 접근하시면 서양철학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 근본원리와 보편법칙, 두 개의 축만 잡으시면 서양철학, 동양철학, 불교, 보살 다 이해하실 수 있어요. 왜 소승불교를 대승불교가 그렇게 비판했는지도 나와요. 이걸 모르시고 소승을 비방하면요 엉터리 비방이 돼서요. 보세요. 선불교 사람들이 소승불교 아주 싫어합니다. “화두를 잡아야지 어디 위빠사나 소승이야.” 제가 볼 땐 둘이 똑같아요. 대승 모르기는 똑같아요. 철학적 진리 모르긴 똑같아요. 철학적 진리를 아신다면 그런 차원의 비방이 아니라 “아 보편법칙
34:05 정도 연구해서는 답이 안 나오는구나, 인생의 근본원리를 깨닫게 하는 진정한 철학을 우리가 공부해야 되는구나”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불교가 대승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걸 아신 보살들이 대승을 열어버린 거예요. 부처님한테는 죄가 되지만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경전들을 써내려가면서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쉽게 말하면 그거 되게 역적질입니다. 제가 홍익학당 열었는데 한 500년 뒤에 “윤홍식이 사실 얘기하고 싶었던 건 이거야” 하면서 제가 안 한 얘기를 만들어서 책을 막 유포하면 황당한 일이죠. 그런데 보살들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초기불교 분들이 볼 때 그 보살들은 역적으로 보이죠. 유마경 이런 거 책으로도 안 봅니다. 지금 초기불교 하시는 분들은 화엄경도 마구니 글로 봐요. 부처님 원육성 아니면, 부처님 말과 위배되는 것들은 다 마구니 글로 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걸 강의하고 있냐 이거죠. 그 사람들은 그게 궁금한 거죠.
35:05 “아 머리 똑똑한 것 같던데?” 제 욕하면서도 그걸 인정하더만요. “그 사람이랑 내가 말로 붙으면 분명히 질 거다만.” 말재주 좋은 사람으로 이렇게 하시는데. 저는 말재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말하는데 좀 제가 재능이 있을 순 있어도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고 저는 제 머릿속에 정리된 것을 그대로 말씀 드리는 사람일 뿐이에요. 이해하시기 쉽게 말씀 드리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까지 대승을 붙잡고 있을까요? 제가 공부해보니 이것밖에 우주의 진리가 없어요. 왜냐? 대승불교만 공부해서가 아니에요. 유교를 공부해도 같은 결론, 기독교를 공부해도 같은 결론, 뭔 종교 뭔 철학을 공부해도 다 똑같은 결론이 나는 걸 제가 무슨 수로 반대합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떠들고 있다 하는 거를, 제가 실험하는 법을 말씀드린 거예요. 여러분도 같이 실험하시면서 꼭 자명한 인가, 진리의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오늘 한 페이지 정도, 한 쪽 정도 나갔네요. 3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