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1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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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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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식인편識仁篇
강의일자 2016. 09. 24. 土.
게시일자 2017. 12. 28.
동영상 길이 1:10:31
강의 중 인용 도서 식인편(識仁篇)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pHA9hGRvj_w



(00:03) 그러니까 솔직해지자. 그래야 메타인지가 자명해지면서 우리가 다함께... 이게 함께 건강해지는 방법이에요. 멘토까지도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함께 자명해져요. 안 그러면 이제 멘토도 잘못돼요. 나의 치료법에 문제가 있나 보다 해서 보살이 좌절합니다. 좌절한 보살이 되어서 이제 중생 만나는 걸 꺼려하게 되고 보살이 이제 마음에 병이 생기고. 감정 노동자가 되어 가지고. 그렇죠? 중생 만나면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보살도 괴로워요. 밤에 막 환락가 헤메고 다닐 수도 있어요. 나중에 못 이기고, 술에 손을 대고 막. 그런 보살도 가능해요. 그렇죠? 이게 같이 사는 법이에요. 상대방이 서로 자명해지게 도와주는 게 보살도입니다. 이게 너무 안 맞는 분은 일단 다른 학원을, 다른 병원을 먼저 다녀보시는 게... 학당에 오셨으면 일단 서로 솔직해지는 게 제일 좋아요. 저도 제가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잖아요? 저부터 까는 데 여러분도 까셔야 서로 치유가 되죠, 그렇죠?

(01:12)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만물개비화. 이게 맹자가 한 말입니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있다. 그다음 말도 좋아요. 마땅히 자신을 돌이켜보아 정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면 그 즐거움이 위대하다. 자, 보세요. 여기까지 다 이해하시면 맹자의 정신 경지를 알 수 있어요. 만물이 다 나한테 있으니 나를 돌아보아서 정성스러워지면 내 안에서 나에게 몰입해보는 겁니다. 나 자신한테만 순수하게 몰입하면, 허령지각의 양심에만 몰입하겠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경에서 성으로 나아가게 돼요. 지극한 정성이란 상태는 진실무망. 한 점 욕심이 없는 상태를 성 그럽니다, 유교에서는. 그래서 성을 풀면요, 진실무망. 참되어서 조금도 망령됨이 없는 상태, 양심과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성이라고 해요. 그때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요. 즉 양지가 그대로 양능으로 구현돼요. 그런데 경은 뭐라고 풀죠? 주일무적. 마음이 하나로 딱 몰입되어 있어서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지 않는다예요. 그러니까 경은 에고가 하는 거예요. 에고가 하는 게 경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챙기는 작업은 에고가 해요. 노력이 필요하죠. 그러다가 참나랑 하나가 되어버리면 성 그래요. 이게 전형적인 묵상에서 관상, 천주교의,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한가지 기도문이나 성경의 한 구절에 집중하는 게 묵상(경)이면 하느님하고 다이렉트로 만나면 관상(성)이에요. 다른 보조적인 게 필요없어요. 하느님과 그대로 만나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 누리시면 돼요, 그 화평을.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나를 돌이켜 봐서 성에 이르면, 양심과 하나 되는 경지까지 가면 그 희열이 엄청나다 하고 맹자가 써놓은 거예요. 만물이 다 내 안에 있다. 그러면 천지가, 그 자리에서는 천지가 둘로 보이지 않겠죠? 맹자는 그 즐거움을 가지고 보살도, 군자도를 걸으신 겁니다. 정명도가 그것을 딱 캐치해서 얘기하신 거예요.

(03:28) 자, 그러니 만약 자신을 돌이켜보아 정성스러운 경지,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그 초월적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두 가지 물건이 대립하게 될 것이다. 나와 남이 여전히 살아서 서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즉 욕심이 남아있으면 내 것 더 챙기게 되어있다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나를 가지고 남하고 합치시키려고 하는 것이니 끝내 합치되지 않을 것이며 어찌 즐거움을 얻겠는가? 나를 돌이켜 봐서 내 안에서 나와 남이, 자타가 둘이 아닌 그 자리를 찾아야 정성스러워지고 화평이 오고 즐거움이 오지, 만약에 내 안을 돌이켰는 데 제대로 못 돌이켜서 욕심이 살아있으면 자타가 불이가 아니라, 필이겠죠? 자타는 반드시 둘이다 하는 경지에 도달하시면 어떻게 정성스러워지고 양심에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양심에서 오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신 거예요.

(04:25) 지금 이 두 구절 읽었는데 여기 종교의, 철학의 핵심이 다 들어있는 거 아시겠어요? 그리고 아주 오묘한 심법이 들어있습니다. 이게 고수들 글 읽는 기쁨이에요. 고수들 글은 읽으면 엄청난 팁을 제시해주면서도 심오한 원리까지 다 가르쳐줘요. 쉬운 듯하면서 심오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경지는 자기가 거기까지 해본, 알아낸 원리들을 지금 다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원리만 알면 고수될 수 있다, 하는 거예요. 장횡거 선생의 서명의 뜻은. 동시대 사람들이에요. 장횡거가 나이가 좀 더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장횡거 선생이 나이가 더 많은데도 정명도 선생한테 배웠습니다. 스승격이에요, 정명도 선생이. 그 당시 북송 6군자 중에 제일 깊은 분이었기 때문에, 경지가. 그래서 장횡거 선생이 질문한 내용을 따끔하게 꾸짖는 내용이 정성서라고, 식인편하고 정성서 두 편이 제일 온전히 전하는 글인데 유튜브에 제가 다 해서 올려놨어요. 나중에 궁금하시면 보시고, 일단 식인편만 보면요. 장횡거의 서명을 보면 본체에 대해서, 만물이 본래 하나라는 것에 대해서 잘 설명해 놓은 게 서명입니다,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이런 뜻을 가지고 사랑을 보존하는 것 외에, 만물이 나랑 둘이 아니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양심노트도 그 마음으로 쓰세요. 기독교인이라면 십계명도 그 마음으로 지켜야 돼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라는 그 마음으로 황금률을 따를 때 십계명이 나옵니다. 그 마음으로 인과 서를 따를 때, 여러분, 인의예지가 다 구현돼요, 유교적으로는. 불교적으로는 그 마음으로 6바라밀을 할 때 보살이 됩니다. 그 마음 없으면 꽝이에요. 양심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꽝입니다. 천지만물의 본원에서 작용하지 않는 도라는 것은 엉터리이기 때문에, 욕심에서 나온 엉터리 도일 거기 때문에 나와 남을 다 살릴 수가 없단 말예요. 인의예지가 안 나온단 말이에요.

(06:30) 자, 그래서 양심만 보존하면 되지,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해야할 일을 반드시 실천할 뿐. 양심에 찜찜하다고 하는 건 하지 말구요, 양심에서 자명하다고 하는 것만 그냥 하시면 돼요. 그 얘기입니다. 바로 잡으려 하지도 않으며. 양심이 시키는 것보다 더 잘하려고 하지 마시란 겁니다. 더 멋지게 해야지, 하지 마시라. 지금 찜찜한 거 빨리 바로 잡으세요. 찜찜한 것만. 그런데 찜찜하지 않은데 더 멋있게 하려다가 망칩니다. 이해되시죠? 딱 찜찜한 것만 바로 잡아라. 이것도 맹자가 해준 얘기예요. 지금 정명도 선생이 맹자 얘기를 그대로 전하는 거예요. 맹자가 한 말이에요, 이게 다. 반드시 해야할 일, 양심에 걸리는 것만 하지 말고 양심에 합당한 것만 구현할 뿐, 완벽하게 하려 하지 말 것. 그 말을 다시 해줍니다. 마음으로 양심 하는 것을 잊지 말되, 억지로 조장하지 말 것. 절대로 더 잘 하려고 하지 말 것. 그래서 아까 정명도 선생이 억지로 더 지혜로워지려고 하지 말고 억지로 마음을 절제하려고 하지 마시란 거예요. 양심에 찜찜한 것만 막으라는 거예요. 자명한 것 키워주고 찜찜한 것 막는. 딱 지금, 여러분 내면에 울리는 그 울림, 양심의 신호에만 충실하셔야지,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낫게 했겠지, 하고 더 오바하다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내 내면엔 딱 만 원 내면 맞겠어요. 저 기부금에, ARS에. 그런데 만 원이 창피하다, 삼만 원 했다가 아 그때 만 원만 할 걸, 하고. 자, 양심이 배양된 게 아니었잖아요. 처음의 만 원은 양심 배양이었어요. 에이 하는 김에 더 쏘지, 하는 것은 뭔가 체면 따지고 뭐하는 마음이 붙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양심 배양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순수하게 하나, 작더라도 미세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하는 실적이 쌓여서 여러분 양심이 늘어요. 그러니까 가족한테도 여러 가지 안 따지고... 계산은 해봐야겠죠. 이것저것 대봐야 뭐가 자명한지 나오니까. 대어보는 중에 제일 자명한 것을. 자, 계산하지 마시라는 게, 따져보긴 다 따져보셔야 돼요. 그런데 결정할 때는 계산으로 결정하지 마시고 제일 자명한 걸 결정하시면 돼요. 충분히 따져보시고, 제일 양심에 자명한 것을 딱 선택하시면 그 힘이 점점 더 커져서 여러분 양심이 계발됩니다. 양심은 이게 자명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계산 때문에 이걸 하지 마시라구요. 다른 걸 하시면 양심이 덜 계발된다, 하는 겁니다. 그럼 나중에 양심하는 건지 뭐하는 건지 모르실 거예요. 내 머리만 더 복잡해져 있어요. 더 단순해져야 되는데. 삶이 더 단순해져야 되는데, 더 복잡해지면 잘못되는 거죠.

(09:15) 그렇게 해서 이것이 억지로, 일찍이 털끝만한 억지로 조장하는 힘도 기울인 바가 없으니. 이건 정명도 선생이 말 붙인 거예요, 맹자 말에다가. 털끝만큼도 조장하지 마라. 인위적인 노력 하지마라. 이것이 바로 사랑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만약 사랑을 보존한다면 곧장 나와 남이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여러분 몰라 괜찮아만 하시면 돼요. 그러면 나와 남이 하나가 됩니다. 알딸딸해져요, 나와 남의 경계가. 그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자명한 느낌만 따라가시면 된다는 거예요. 양지, 시비지심, 양심의 판단능력이죠? 양심의 타고난 판단능력을 양지 그럽니다. 양능, 양심의 타고난 실천능력. 이건 여러분이 계발하는 거지, 확충하는 거지, 만들어내는 건 아니에요. 원래 있어요. 원래 있는 퍼펙트한 능력이에요. 계발이라는 것도 이것을 따르는 에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뿐입니다. 양심이 계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양심 계발이라고 하면요. 보세요, 양심을 계발하는 게 아니고 양심은 원래 퍼펙트해요. 에고가 양심을 구현 못 하죠? 양심을 구현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거예요, 원래 있는 것을. 태양은 원래 있는 데, 여러분, 태양은 원래 있는데 유리창이 시커매요. 그럼 때를 닦고 있는 거지, 태양을 키우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 때를 닦으면 태양이 내 방으로 들어오는 빛은 점점 더 계발돼요. 그쵸? 더 나아지죠? 이런 느낌입니다. 양심을 계발한다는 것은 양심의, 양지양능의 구현을 막고 있는 무지와 아집만 치워주는 거예요. 양심더러 더 잘하라고 다그치고 더 양심적이 되라고 양심한테 우리가 따지고 계발시키겠다고 덤빌 일이 아니라는 거죠. 문제는 에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이 얘기 바로 하죠? 양지와 양능은 원래 잃어버릴 수가 없다. 한순간도 없어질 수 없다. 퍼펙트하다. 다만, 옛날부터 습관화된 마음, 습심 때문에, 그것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마음을 보존하여 익숙하게 해야 한다. 자,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뭐냐? 습관화된 마음이, 잘못된 습관이 들어있어서 좋은 습관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양심과 만나기만 하면 문제 해결이, 솔루션이 거기서 나온다는 거예요. 양심으로부터 나온다. 익히는 것이 오래되면, 이렇게 오래가다 보면 옛날 습관을 떨칠 수 있다. 좋은 습관들이라는 겁니다. 습관들이는 것마저 안 하면 안되죠. 좋은 습관은 들이시라. 무슨 습관이냐? 항상 양심만 잘 챙기는 습관을 들이시라. 이게 맹자가 말한 사단 확충론입니다. 사단을 확충하기만 하면 된다. 사단은 원래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샘솟으니까 잘 배양만 시켜주어라. 우리 마음에서 배양만 시켜줘라, 하는 겁니다.

(12:18) 이 원리는 지극히 간단하니 오로지 그것을 능히 지킬 수 없을까 걱정일 뿐이다. 너무 쉬어서, 그냥 양심만 보존하면 되기 때문에 그것만 문제다. 얼마나 양심을 잘 챙길까 그것만 문제이지 다른 것... 여기서 인의예지가 다 나오니까 문제가 어렵지 않다. 푸는 게 어렵지 않다, 이겁니다. 이미 그것을 체득하여 즐거울 수 있다면. 그런데 이미 몰라 괜찮아 하면서 양심과 만나고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게 즐겁기까지 하다면 또한 지킬 수 없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양심만 잘 보존하면, 챙기면 돼요, 하면 아유 어떻게 매순간 양심을 챙겨요, 하고 또 걱정부터 시작해요. 어떻게 그걸 늘 지킨대요, 그러지 마시고 양심과 자꾸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먼저 느끼시라. 재밌으면 그것을 왜 잃어버릴까 걱정하겠냐. 아주 친절한 팁이에요, 지금. 그것도 걱정할까봐 지금 이 얘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참나를 챙기시면 돼요. 참나를 어떻게 늘 챙겨요. 꼭 안될 것부터 먼저 걱정하는 분이 있어요. 참나랑 만나세요. 여러분 어떤 남자배우 여자배우 좋아하시는데 그 배우 생각만 해도 좋지, 그 배우 혹시 생각 안 할까 걱정하세요? 아니면 틈나는 대로 그 생각하세요? 그 드라마 보고, 그 음악 듣고. 틈날 때마다 누릴 생각부터 먼저 하는데, 좋아하는 건. 싫어하는 거 하라고 하면 내가 안 할 것 같은데 걱정부터 합니다. 그러니까 양심도 챙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라는 거예요. 자꾸 만나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양심 만나는, 체득하는 즐거움 먼저 느끼시라. 그러면 나머지 걱정할 것이 없다. 재미를 붙이시면 끝난다, 이겁니다. 재미 붙이면 잠 안 자고도 하니까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14:11) 의학서에 이르기를 손발이 마비되는 병을 불인이라고 한다. 참 재밌는 말이죠? 마비병을 불인이라고 한다. 이 말을 왜 꺼냈을까요? 인이라는 게 뭐라고요? 인의 반대가 마비라는 겁니다. 당시 의학서에서 마비병을 불인이라고 부르는 데 착안해서 그 설명을 해주고 싶은 거예요. 즉 공감 능력이 마비된 거죠? 마비된 게 불인이에요. 신경이나 이런 게 마비된 걸 불인이라고 하는 데서 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시는 거죠. 인이라는 게 뭡니까? 마비되지 않은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 누가 다쳤대요. 마비되지 않은 마음이면 같이 공감합니다. 마비된 마음은 공감을 못해요. 남이 지금 죽어가도 공감을 못해요. 마비가 심하게 된 사람을 뭐라고 하죠? 사이코패스라 그래요. 이해되시죠? 마비병입니다. 마비의 반대가 뭐죠? 통하게 해주는 것. 소통하게 해주는 거요. 상대방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로 흐르게 해주는 거죠. 상대방이 나처럼 느끼게 해주면 된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지금 공부법을 어떻게 잡으셔야 돼요? 여러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돼요. 누군가 뭔 일 났다는 데 내가 전혀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이 안 올라오는 게 병이에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화 되어가고 계신 거예요.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으시거나 후천적으로 지금 잘못된 삶을 사시면서 잘못된 습관 때문에 소시오패스화 되어가고 계신 거예요. 무감각해지고 계신 거예요, 마비증. 정신적으로 지금 마비증세가 오고 계신 거라구요. 그걸 빨리 뚫어줘야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몰라 괜찮아 하셔야죠. 다시 양심과 하나가 되면서 몰라 괜찮아를 통해서 양심과 만나시면서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게 뭔지 그 느낌을 느껴보는 연습을 하시다 보면 마비가 풀린다는 겁니다. 왜냐? 우리 양심 안에는 원래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양심과 접속만 하라, 이거예요. 양심과 접속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16:17) 손발이 마비되는 것을 불인이라고 한다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이름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천지만물을 나와 하나의 몸으로 삼는다. 무슨 얘기죠? 자타불이죠? 천지만물을 나랑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이 결국 인이라는 겁니다, 사랑. 내가 아닌 것이 없다. 다 나다. 크게 보면 다 나다. 대아죠. 큰 나의 입장에서 보면 다 나다. 참나 입장에서 보면 다 나라는 거예요. 만물이 다 참나에 뿌리를 박고 사니까요. 여러분 학당 로고 기억하세요, 알. 이 알은 천지만물, 이 원주에 있는 모든 점의 중심입니다. 한 점의 중심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참나는 모든 이의 참나입니다. 모든 만물의 참나이고. 이것을 아는 게 법공이에요. 이것을 아셔야 여기에서 인의예지가 나오죠, 제대로. 아공, 법공이 별 게 아니에요. 아공, 현상계를 떠나서 참나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공. 법공, 참나 입장에서 현상계를 다시 껴안는 게 법공. 구공, 6바라밀로 이 현상계를 경영하는 게 구공. 지금 끝없이 반복합니다. 이 3개만 알면 되는데. 시험과목이 이 3개인데 이걸 안 하실 거예요? 딱 3개인데.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에서 이 3개 공부하는 방법 다 알려드리고 있잖아요. 아공 공부하는 법 지난 시간에 알려드렸어요. 오늘은 조금 있다가 쉬는 시간 갖고, 법공 공부하는 법 얘기해 드릴게요. 그런데 이런 감각을 가지고 하시라구요. 유교가 써머리를 잘해줘서 좋아요. 써머리를 보고 들어가시면 좋아요. 각 부분 부분에서, 지엽적인 데서 길을 안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7:53) 자, 모든 게 나다. 이겁니다. 이거는 견성한 선사들만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유교 선비들이면 당연히 해야 돼요. 천지만물이 나다, 이 말이 나와야 돼요. 맹자부터 다 했는데요. 그 전에 자사가 했구요. 희로애락이 없는 나의 중심이 천하의 뿌리다, 이 말을 자사가 했잖아요, 벌써. 만물이 모두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느 곳엔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이 온 우주가 내 마음 안이니 뭘 걱정하냐, 이거죠. 만약 만물이 나에게 갖춰져 있지 않게 된다면. 그런데 지금 여러분하고 만물이 둘로 쪼개져 있다면 에고 상태이죠? 에고 상태에선 만물이 나라는 게 안 와닿아요. 깨어있지 못하면 만물이 나라는 게 안 와닿습니다. 경과 성을 이루어야, 여러분, 만물이 나라는 게 느껴져요. 자, 보세요. 참나 상태라야 느껴지지, 에고 상태에서 어떻게 여기서 여기가 나랑 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랑 남은 반드시 둘이죠. 이 원주에 있는 점에 계시다면. 여러분이 법공이 이해가 안 되시는 건 에고 상태에서 판단하시기 때문이에요. 몰라 하고 참나 상태에서 보시면 전체가 통으로 나예요. 통으로 들어와요. 이런 체험이 없이 아공, 법공을 머리로 이해하면요, 그건 그냥 지식 밖에 안 됩니다. 잔꾀에요. 만물이 나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게 된다면 즉 에고 상태에서 양심을 못 느끼고 있다면, 양심 보존이 안 되고 있다면, 만물은 절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에고의 입장에서 만물은 죽어 나가도 나랑 상관이 없어요. 마비된 상태이죠, 양심이. 예컨대 손과 발이 불인되면 기운이 이미 관통되지 않아서 모두 자기에게 속하지 않게 된 것과 같다. 딱 마비증세 아니냐 이겁니다. 짧은 글인데 버릴 말이 없어요. 딱딱 핵심만 다 얘기해줍니다.

(19:42) 그러므로 널리 베풀어 중생을 구제함은, 이제 양심 얘기하다가 중생을 구제하는 얘기를 해요. 널리 중생을 구제함은 성인의 공용이다. 성인의 작용이 뭐냐?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이건 논어에 나온 말입니다. 지금 맹자와 논어를 인용해서 정명도 선생은 자신의 의견을 편 거예요.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논어의 구절입니다.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도 이르게 해준다. 보세요, 내가 그걸 갖고 싶잖아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알죠? 내 욕심을 알죠, 내가? 그런데 욕심에 빠져 있는 사람한테는요, 내가 이걸 간절히 갖고 싶으면 남이 갖는 걸 막아야 돼요. 내가 가져야 되니까. 그런데 양심의 눈에서 보면요, 내 에고도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야, 중생이라는 게,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저걸 저렇게 원하는구나. 그러면 남들도 얼마나 원할까를 이해해야 돼요. 남들도 이를 수 있게,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여러분, 좋은 집에 사시면서 만족해하시면 여러분 소시오패스입니다. 내가 좋은 집 살 듯이 집 없는 사람들도 이런 집에 살면, 사람으로서 이런 집에 살면서 좀 누릴 것 누려야 되지 않나. 그게 사람으로서 올바른 일 아닌가 하고 마음이 짠하시다면 여러분, 그게 군자의 길이에요. 그래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양심 품고 살면 끝나요, 다. 그게 뭐니 돈을 주니 마니, 복지를 하니 마니, 성장을 하니 마니... 다 부질없어요. 양심을 품고 사시면 성장도 모든 사람 살리려고 하고, 복지도 모든 사람 더 잘 살게 하려고 복지합니다. 이게 싸울 일이 아니에요, 애초에. 근데 나 먹고 살려고 성장한 사람은 나누고 싶지 않죠? 성장의 개념부터 다른 거예요. 양심 품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어야 하고, 국민들도 양심 품은 사람들로 꽉 채우자는 게 인류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입니다. 공존하는 답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작업하는 게 별일 아닌 것 같아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양심 돌아보자는 운동을 해야 돼요. 그래서 21세기, 이게 가장 필요할 때입니다. 송나라 때보다 더 필요해요. 이때보다 훨씬 더 필요해요. 세계적으로 필요할 때니까 저희가 이런 묵은 지혜도 꺼내서 살려서 잘 쓰자는 겁니다.

(22:02)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이르고 싶으면 남도 이르게 해준다. 자기를 살펴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내 마음을 잘 이해해서... 자, 이게 두 가지가 들어갑니다. 사실 세 가지예요. 지금, 보세요. 어떻게 두 가지냐? 자기 마음을 일단 봐야 돼요. 자기랑 소통을 해야 됩니다. 문제아들은 자기랑 소통이 안 돼요, 일단. 헛것을 좇아 살지, 자기의 진솔한 마음도 몰라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일단, 자기랑 소통하고 나면, 또 다른 자신인 남하고도 소통이 됩니다. 남도 그 마음이겠구나를 알아요. 소통이 됩니다. 자, 자기랑 소통이 안 되면, 일단, 남하고 소통이 안 돼요. 솔직히 남이 무슨 마음인지 몰라요. 즉, 내 욕망 성취의 걸림돌이 되거나 도구가 되는 거지 그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내 마음도 안 헤아리는 사람이 남을 왜 헤아리겠어요. 일단 내 마음을 진솔하게 헤아리면서 소통. 내 마음을 가지고, 내가 제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에고의 마음은 내 마음밖에 없잖아요? 내 마음을 가지고 남의 마음을 이제 유추해냅니다. 남의 마음을 이해해 봅니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해해보는 거예요. 그게 두 번째 작업이고, 그게 결국 양심하고 소통하는 방법, 하늘하고 소통하는 방법이에요. 이래서 온 우주랑 소통할 수 있어요. 자기부터 먼저, 자기랑 좀 친해지시라. 자기부터 정확히 모르시면 남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되게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는 분은 남도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어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남이 괴롭다 그러면 딱 자기 마음으로 이해하잖아요. 돈을 얼마나 더 달라는 거야?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사람한테, 어디까지 달라는 거야? 왜곡된 역지사지를 해요. 제가 예전에, 장난으로 저도 와이프한테 지금 이걸 원하지? 하고 놀려보면, 그런 역지사지는 아예 하지를 마라...(웃음) 우리가 이거 되게 불쾌한 거 아닙니까? 난 전혀 그럴 마음 아닌데, 그렇게 좋냐, 이렇게. 제가 장난치는 겁니다. 그럼 상대방이, 어디서 그런 역지사지를, 왜곡된 역지사지를 하느냐. 그럼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배려한다면서 이상한 수작을 걸어오면? 이해되시죠? 그게 꼼수에요. 상대방 꼼수라구요, 잔꾀이고 꼼수예요. 그런 꼼수들이 쌓여서 인류가 이렇게 된 겁니다. 수많은 꼼수가 누적되어서 인류가 이 지경까지 왔어요. 그래서 꼼수도 전 항상 부릴려면 바라밀을 붙여서 부리시라. 모두가 좋은 꼼수 아니면 부리지 마시라.

(24:47) 그래서, 이게 사랑의 올바른 방법이다. 그런데 이 말이 참 가슴 아픈 말인 게요, 우리는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는 데 참 이렇게 못 해줘요. 이 말 할 때마다 저도 참 찔리는 게 내가 사랑한다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못 해줘요. 오히려 사랑한다는 사람들을 착취하죠, 여러분? 날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하는 쪽이 을이 되잖아요. 사랑받는 쪽이 갑이 되어서 착취합니다. 못됐죠? 욕심은 그래요. 그러니까 그거 안 하기만 해도 보살이에요. 사랑한다는 사람 더 챙겨주려고 하시면, 여러분이 마음 쓰시면, 여러분 보살이에요. 그게 더 힘든 일이에요.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리더들보다 그거 하는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에요. 우주가 볼 땐 더 믿음직한 사람이에요. 양심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 아니에요? 보세요, 여러분. 인터스텔라 영화에 저 우주 저편에서 신호 보내는데, 아니, 원수들이라도 알아듣는 사람이 제일 고맙지 않을까요? 저 멀리서 신호 보내는 입장에서는 누구든지 좀 알아듣는 사람이 제일 귀합니다.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이게 크건 작건, 우주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는 사람이 제일 귀한 사람이에요. 인류는 그런 사람 귀한 줄 알고 키워야 되는데, 짓밟습니다. 호구로 보고, 무시하고.

(26:03) 이번에 양심 지키다가 죽은 사람도 있죠? 자기는 이미 탈출했는데 들어가서 원룸 초인종 눌러서 다 나오라고 하다가 죽었잖아요. 양심이 시켜서 했겠죠? 자기도 잊어버리고 한 거죠. 양심한테 어마어마한 힘이 있어서 그 사람을 내 몬 것 아닙니까? 그런 분들 기려야 돼요. 양심 지키다가 피해 입으신 분들. 이건 우리가 기려주지 않고, 우리가 그분을 기억해주지 않으면 그게 결국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난 양심을 우리가 져버린 겁니다. 그 양심에 응했던 그 사람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종교는 양심을 신앙하고 양심을 기려주고 양심을 지키겠다고 조금이라도 호응했던 분들 있죠? 그 행적을 기려줘야 돼요. 한 사람이 매 잘못 살다가 한순간이라도 양심 따라 산적이 있죠? 그럼 그것은 기려줘야 돼요. 그걸 응원해주지 않으면 누가 양심합니까? 우리 솔직히 다 막 살잖아요? 욕심대로 살고 있으면서 완벽한 양심이라야 나는 기려주겠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누구도 못 기려요. 우리 양심도 죽어요, 같이. 조금이라도, 얼마든지 욕심으로 다 살 수 있는데, 그 순간만이라도 양심의 화신이 되었던 분들 있죠? 찰나라도 그분은 보살로서 보살도를 하신 거예요. 그 찰나 보살들도 우리가 기려줘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결국 우리 양심을 응원해주는 일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같이 응하겠다는 것이고 자라는 뒷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살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일이에요. 이해되시죠? 아무리 막 살았더라도 양심적으로 잘 한 건 정말 기려줘야 돼요. 이걸로 이걸 덮으면 안 돼요. 또 반대로 막 산 걸 덮어도 안 돼요. 한번 잘 한 거 가지고 막 산 걸 덮어도 안 돼요. 다만 중생이면 막 살 수 있는데 그 순간에 양심의 화신이 되었던 것 그건 하느님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것은 그 한 개인사가 아니에요. 욕심부리고 산 건 그 개인사인데요 그 사람이 한순간이라도 나라 위해서 뭐하고 다른 사람 위해 뭐할 때 있죠? 그땐 하느님이 나와서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우주적인 사건이에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건 우주적 사건이에요. 여러분이 오늘 가족한테 뭔가 하나 더 인욕하고 깨어서 뭔가 하나 하신 것 있으면 그건 우주적인 사건이에요. 여러분으로 인해 양심이 즉 하느님이 이 지상에 뜻을 잠깐이라도 펴신 것이거든요. 그게 우주적인 사건이란 걸 아셔야 됩니다. 이게 보살도예요. 작은 일, 큰 일 가르고 계신 것 자체가 욕심의 입장에서 가르고 계신 거예요. 욕심 입장에서 뽀대나는 일과 뽀대가 덜 나는 일. 그렇죠? 욕심의 입장에서 이득이 되는 일과 손해가 되는 일. 욕심이 자꾸 뭐라고 중얼거리고 따지기 전에 그 사건의 우주적 의미를 이해하셔야 돼요. 내가 잠깐이라도 양심을 따랐다는 게, 양심한테 몸을 맡겼다는 게. 그건 하느님한테 나를 맡긴 거예요. 순간적으로. 찰나라도. 그거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 순간은 비로자나불의 화신이고, 하느님의 화신이셨던 거예요. 그 감동을 계속 지키며 살다가 우리가 더, 더 보살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작은 싹을 짓밟아요. 에이, 뭐 어쩌다 한번 그런 거야. 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또 그러겠어, 내가. 이제 이런 식으로 잠깐 난 싹을 무참히 저주하고 짓밟아서 없애버립니다, 우리는. 남이 한 것도 그래요. 누가 착한 일 했다고 그래도, 아유 원래 그런 애 아니야, 걔. 막 사는 애야. 잠깐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남도 끌어내리고, 나도 끌어내리고 그러면서 서로 공멸한다는 거죠. 자꾸 북돋아 주지 않으면 보살 안 나옵니다. 우리가 인재 안 나온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나부터 그런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계신지, 집에서. 자녀가 양심 지켰을 때 그거 북돋아 주십니까, 아니면 그거 나무라십니까. 그런 시간에 공부나 하나 더 해라. 나라 걱정하는 자녀한테 보통 그러죠? 그 걱정 할 시간에 영어 하나를 더 외워. 우리가 흔히 그러기 쉬운데요, 그거 되게 우주적인 사건이에요. 그 아이 안에서 신성이 꿈틀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걸 잘 확충시킬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양심은 나만 잘 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내 것은 내 것대로 하면서 거기서 요령을 얻어서 남 것도 계속 해줘야 돼요. 이해되시죠? 양심은 그래요. 안 그러면 여러분, 찜찜하지 않으시겠어요? 남 안에서 자라고 있는 양심의 싹을 여러분이 짓밟거나 기죽이거나 무시하시면 찜찜하지 않으세요? 하느님이 꼭 여러분을 통해서만 우주에 등장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 지금 하느님이 등장하고 계신데, 그 하느님은 지금 하느님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나를 통해서만 등장하는 하느님만 나는 따르겠습니다, 하는 게 아니잖아요.온 우주의 근원이니까. 심지어 강아지나 동물을 통해서도 양심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때는 단순한 강아지가 아니라, 신성의 화현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까 인도인들도 이해가 돼요. 원숭이도 신으로 모시고... 그 거죽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신성을 보는 거예요. 사실은 다 신이거든요. 곤충 하나도 신이에요. 신이 그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 거예요. 알아보는 사람 눈에는 다 신성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티끌 하나에도 화장세계가 있다는 게, 티끌도 사실 신성이에요. 티끌이 그냥 날아다니나요. 우주 보편법칙에 따라 날아다닙니다. 신성의 표현이에요. 6바라밀의 공식들이 물리적으로 표현된 모습이에요. 천지만물이 나랑 둘이 아니라는 얘기가 이런 것까지 다 맛보신 분들이 하는 얘기예요. 정명도 선생이 쓰신 다른 유명한 시에서도 구름의 변화까지도 나와 둘이 아니다, 하고 꿰뚫어 보는 시 있어요. 옛날 선비들이 아주 좋아하던 시인데, 이 분은 일상에서 늘 만물과 하나 되어 살아가시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무리수도 안 부려요. 양심을 따를 뿐이에요. 욕심 힘 빼시면 돼요. 꼼수, 편견 힘 빼세요. 그냥 양심대로 하시면 돼요. 힘 빼고 양심대로. 힘 들어가 있으세요. 힘 빼시고 양심대로. 인간관계 문제. 힘 들어가세요. 막 머리를 싸매고 계시면 힘 들어가세요. 힘 빼고 양심대로. 그냥 그렇게만 살면 지금은 성인이 아니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히 성인 된다는 것. 성인 되는 길에 들어섰다, 이거죠.

(32:42) 자, 이게 사랑의 올바른 방법이다. 이와 같이 사랑을 살필 때만이 사랑의 본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해가는 중에 사랑의 본체는 뭐죠? 사랑의 근본원리가 구현된다, 이 땅에. 사랑의 본체가 이 땅에 구현되려면 늘 양심을 지키면서 양심을 각성하고, 늘 삶 속에서 양심을 실천하다 보면 양심의 본체가 이 온 우주에서 구현될 것이다. 이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 뜻이 구현되는 방법입니다. 주기도문하고도 통하고 이거는 모든 경에 다 통한다고 저는 봐요. 불경 같기도 하고 유교 경전 같기도 하고. 이 식인편. 제목 때문에 많이 권하지는 못하는데, 아름다운 글이죠? 그래서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어드렸습니다.

(33:34) 자, 대승불교는요, 여러분 안에 부처가 있어요. 무슨 불이요? 비로자나불. 법신불이죠. 우주적 참나예요, 우주적 참나. 제 안에 있는 참나, 여러분 안에 있는 참나의 통합 참나요. 온 우주의 참나. 온 우주의 참나가 에고를 통해 표현된 존재가 우리죠? 그래서 또 다양한 천지만물들은 만물대로 다 그 참나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통합적인 참나가 있어야 하잖아요. 우주 대법신이라고 해요, 비로자나불을. 제가 이걸 먹으로 예전에, 수묵으로 그릴 때, 검은색하고 가운데는 빨간색을 칠한 게, 태양의 광명함을 나타내고 싶어서 빨간색을 찍은 거예요. 근데 비로자나불의 밀교적 이름이 뭐죠? 비로자나불은 빛이라는 뜻이에요, 빛. 밀교에서 대일여래라고 해요. 태양여래. 태양 같은 빛. 이게 다예요. 천부경에서 우리 본심을 뭐라고 하죠? 우리 본심이 양심 아닙니까? 본심은 본래 태양의 광명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태양앙명, 그러죠, 천부경에서? 태양이에요, 태양. 우리 안에 영적 태양이 있다는 거예요, 물질 태양이 아니라. 영적 태양이 있다. 달하고 태양의 상징물이 다릅니다. 달은 크기가 변하죠? 형이하의 세계를 상징해요. 태양은 안 변하죠? 형이상을 상징해요. 그 자체는 물질이지만, 상징물로 쓸 때 불변의 세계를 상징할 때 태양을 씁니다. 달은 쓰면 안 돼요. 달은 변하거든요. 달도 보름달일 때는 그냥 취해서 쓰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태양이 더 상징물에 맞아요, 불변하니까. 이해되시죠? 우리 안에 영적 태양이 있다는 건요, 불변하는 영원히 타오르는 그 광명한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빛과 그 열. 빛은 지혜를 주고 열은 우리한테 자비를 주고요.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는 우리한테 힘을 줘서 전지, 전능, 자비의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태양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죠? 아까 양심으로 얘기했던 걸 태양으로 얘기해도 이해되시죠? 여기서 빛이 나오고. 천지만물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건 빛이죠? 열이 나와요. 만물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살게 해줘요. 여기서 에너지가 나와요.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줘요. 영적 태양이 지금 여러분한테 빛을 주고 능력을 주고 따뜻한 마음, 자비심을 주는데 그거를 가져다 쓰시는 거죠. 영적 태양은 광명한데 대부분은 추워 죽겠다고 살고 있어요. 그렇죠? 진리를 찾아 헤매고 다니시는 분들은 추워 죽겠는 거예요. 춥고 배고프고... 갈 길도 모르겠고, 춥고, 힘도 없고. 더 살 힘이 없다. 이 상태에서 참나랑 만나면, 빛이... 눈이 열리고. 캄캄한 밤에 춥고 힘도 없다가 태양, 물질 태양이지만 뜨면 어떻게 돼요? 환해집니다. 내가 바로 길 옆에서 헤매고 있었구나, 다 보여요. 불 끄면 안 보여요. 바로 길 옆에 있어도 안 보여요. 불 켜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불 끄고, 여러분 방에 들어가서 물건 찾아보세요. 짜증나죠? 죽겠죠?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딱 그래요. 불 켜면 끝납니다. 불 켜는게 영적 태양을 만나면 돼요. 참나를 만나면 자명 찜찜, 뭐가 자명한지 뭐가 찜찜한지 알게 됩니다. 그게 빛이에요. 또 엉뚱한 거 기대하지 마세요. 영적인 태양 하면 밤낮으로 막 천안통이 열려 가지고... 이런게 아니고, 자명 찜찜 감각이 여러분 안에서 작동한다구요. 뭐가 자명한지, 뭐가 찜찜한지. 요즘 유행하는, 뭣이 중헌지 아는 힘이 태양. 태양이 안 뜨면 뭣이 중헌지 몰라요. 대학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대학. 지혜를 대학의 격물치지장에서 뭐라고 했나요? 대학 기억나세요? 사물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종시, 시작과 끝이 있으니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인지 알면 도에 가깝다. 격물치지의 결론이에요. 한마디로 뭐죠? 뭣이 중헌지 알면 지혜를 이루었다는 거예요, 유교에서. 아시겠죠? 그러니까 선후를 모르면요, 본질과 말단을 구분 못 하면 말단에 우리는 힘을 씁니다. 욕심한테 힘을 쓰고 양심한텐 힘을 안 써요. 이게 바로 본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악을 짓게 되어있어요. 본말 어긋나면 악이에요. 이거 맞춰주면 선이 되고. 뿌리가 있어야 가지가 나오는데 반대로 뒤집어 놨으니 살 수가 있나요. 이게 악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영적 태양과 함께 살아가자, 이게 보살도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비로자나불, 양심이 부처예요. 이 불성에 따라서 이 에너지, 이 열, 이 빛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뭐라고 해요? 그 중생을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성이 보리가 되고, 우리 안에 누구나 불성이 있으니까. 살타, 또 중생성도 누구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는 보살입니다. 초기불교의 부처가 아니에요. 그래서 소승불교의 관점에서는 보살이 부처되는 거죠? 그러니까 보살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부처 못 된 양반이에요. 견도 못 한 양반이에요. 열반을 못 얻은 양반이에요. 따라서 초기불교식으로 말하면 보살은 아라한보다 아래예요. 공덕은 엄청나지만 견도를 못했다는 측면에서 열반을 못 얻었단 측면에서는 아라한보다 아래라구요. 부처가 아라한이에요. 그럼 보살도하는 동안에는 견도를 못했다는 얘기예요. 논리가 안 맞죠, 사실. 말이 안되지만 초기불교 논리대로라면 그렇다구요. 아라한이 더 높다구요, 열반을 얻었다는 측면에서. 보살은 열반 못 얻은 양반이잖아요.

(39:44) 초기불교의 보살, 부처관이 지금도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 이해를 못 해요. 제가 볼 때 대승불교를 한국불교는 전혀 수용을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뭔지 몰라요. 솔직한 말로 제가 봐서 뭔지 몰라요. 이해되시죠? 대승불교는 종교도 아니에요. 종교를 초월해요. 이런 것을 아는 분이, 대행스님 같은 분이 그런 말을 하잖아요. 불교는 불은 생명이고, 교는 삶이다. 내 참 생명따라 살아가는 거지, 특정 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푸시는 그 마음에 답은 있는데. 그냥 우리 본 생명따라 살자는 거예요. 이게 무슨 종교가 필요해요? 우주적인 종교죠. 내 양심따라 가겠다는 거예요. 양심교예교, 그래서. 불교는 양심교로 이름을 바꿔서 이해해야 됩니다. 여러분 양심따라 살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면의 빛과 내면의 사랑과 내면에서 나오는 그 힘을 올바르게, 진선미하게, 6바라밀에 맞게 표현하면서 살겠다는 거예요, 그냥. 정토니 열반이니 이런 거 다 부질없는 소리고,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살겠다는 거예요. 포인트가 지금 이 순간이에요.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살겠다. 내세가 보장되어서가 아니고, 정토를 가기 위해서도 아니고, 열반에 들기 위해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미 열반이고 여기서 그렇게 살겠다. 이미 부처고, 이미 부처로서 여기서 품위 지키며 살겠다는 거예요. 이미 부처예요, 대승에서는, 그러니까. 불성이 지금 말하고, 불성이 듣고 불성이 울고 불성이 욕심부리고 하는 거지, 불성이 아닌 뭐가 이 천지에 작용할 수가 있어요. 작용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인과를 맺는 흐름이 나와요, 에고를 통과하다 보면. 그래서 그것만 바로 잡아주면 끝나요. 이 외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주에. 이게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요. 열반에 들겠다. 나는 이 우주에서 열외를 해야겠다. 이 우주는 고해의 세계니까 나는 벗어나야겠다. 이런게 다 망상들이 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게 망상이 돼요. 충격적이죠? 이 얘기를 어떻게 해요? 초기불교 이론이랑 배치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한국불교에서 이거 수용하냐는 거예요. 이거 수용하면 초기불교의 어떤 질곡이 떨어져 나가야 돼요. 소승불교의 질곡이 대승불교를 지금 잡고 있어요. 지금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수용했지만, 사실은 소승불교에 의해 이미 제약되어 있는 대승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42:11) 절 문화부터가 이미 안 맞아요. 대승에서 산에 절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꼭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형식의 절이 필요가 없어요. 개념이 달라져 버리죠? 그럼 그냥 뭐가 있으면 돼요? 그냥 하나의 직업으로서, 제가 얘기하는, 직업으로서의, 멘토로서의 그냥... 이 절은 멘토 역할만 해주면 돼요. 근데 지금 멘토로서 준비된 곳이 아니고 속세로부터 떠나기 위한 곳으로 만약에 개념이 잡혀 있다면 소승불교적이라는 거예요. 이 개념을 바꿔버리면 저는 더 재밌어집니다. 저는 이번에 수녀분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수원교구청에서 강의했는데 재밌어요. 그래도 도를 이루시겠다고 출가해 계신 분들을 보면 전 반갑기 때문에 말을 하나라도, 더 정보 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더 바라는 것은... 저는 출가로 보이기 보다는, 독신을 선언한 직업인으로 보이는 거죠. 결혼 안 하기로 한 직업인인 거죠. 출퇴근을 집에서 안하는 것 뿐이지. 제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저는 그렇게 보고 대합니다. 왜냐면 그게 보살도에 맞아요. 봉쇄하거나, 자기를. 그러지 마시라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나는 세상의 일원이고, 중생의 일원으로서 중생의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시자는 거죠. 철저히 자기는 중생이라는 걸 자각하시고, 다만 나는 내 안에 있는 양심을 따르는 데 목숨 걸었다, 하는 각오를 가진 중생이다. 보살 전업을 하기 위해 선언한 중생이다. 이런 각오로 일해주시면, 각 종교 성직자분들이,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보살도 펴는데 얼마나 그분들이 힘이, 도움이 되겠어요? 왜냐? 지금 먹고 사는 데 힘드시다는 분들보다, 전업으로 선언한 분들을 보면 제가 말을 더 안할 수 있겠어요? 하시겠다는데. 하겠다고 지금 다른 것 다 내려놓으셨는데, 그분들 보면 말이 더 나갈 수 밖에 없죠. 그래서 그 분들이, 저는, 소승적인... 지금 기독교에도 보이고 다 있어요. 어느 종교에나 있어요, 소승적인 모습이. 그걸 날려버리시고 진짜 대승적인 보살로서 거듭나시면 어떨까,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금 한국불교가 제대로 대승불교를 소화 못합니다.

(44:28) 그러면서 제가 열 받았던 게, 한다는 말이, 어떤 선사가 나와서. 화두선 잘하는 분이에요. 선불교는 남방불교보다 위대하고, 대승불교보다도 훨씬 위대하다. 그래놓고 한다는 거는 산 속에서 견성한다고 들어앉아서 얼마나 용맹정진하는지 모른다, 그래요. 알고 싶지 않아요. 알려주지도 마세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오타쿠들이 얼마나 용맹정진하고 계신지 아세요, 곳곳에서, 삶에? 그건 당연히 하는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뮤지컬 하나에만 빠지셔도 얼마나 배우를 위해서 헌신하고 다 하는지 아세요? 몸이 아파도 내가 안가면 혹시 그 배우가 힘들까 해서 가서 보고 또... 뭔 얘긴 줄 아세요? 사람 욕심 나는 데는 다 그렇게 해요. 그 얘기 하지 마시고. 뭘 추구하고 있는데요? 제가 볼 때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소승화예요. 대승불교를 소화를 못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타까웠던게, 이 얘기를 왜 안 드릴 수 없느냐. 어느 한 개인 비방하고자 드린 얘기가 아니라 대승불교가 소화가 안 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도. 나온지가 2,000년이 되었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소화되는 걸 제가 못봤어요. 티벳도 안돼요. 거긴 거기 민족종교랑 합쳐져서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어요. 거기 벤교(?)라고 하는 민족 종교랑 합쳐져서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종교에요, 종교. 종교를 초월한 종교가 아니고. 그래서 대승은, 보세요, 초기에 숲에서 다 아라한 됐습니다. 그래서 그걸 깨자고 대승이 나왔어요. 숲에만 있지 말고 중생을 구제하자. 유마거사처럼 장사꾼이 되어서라도 도를 펴자. 이 뜻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다시 2,000년 뒤에 와서 뭡니까? 2,000년까지도 아니죠? 중간에 선불교가 나와서 뭘 주장했죠? 견성만 하면 끝난다가 다시 나왔어요. 아라한으로 돌아간 겁니다. 제가 항상 말하죠? 확철대오는 아라한하고 경지가 같아요. 보살은 아니에요. 견성했다고 보살이 어떻게 됩니까? 그 뒤에 6바라밀을 해야 보살이 되지. 그런데 6바라밀 알기를 우습게 알아요. 성철스님도 그랬잖아요. 6바라밀은 하근기나 하는 거다. 견성 하나만, 화두만 붙잡아라. 화두로 12지 부처간다. 이런 게 전형적인 소승사상입니다. 소승이라니까요. 이렇게 얘기를 해도. 곧이 들으셔야 되는데, 들으셔야할 분들이. 선불교는요, 결국 대승불교를 못 감당하고 소승화된 불교예요. 그 안에서는 더 나은 분들도 계셨겠지만 전체적 흐름이 그래요. 이 대승불교의 가치가 지금 땅에 이렇게 떨어져서 이 지경이라는 거예요. 불교도 망하고 다 망해요. 진짜 대승불교는 이미 불교가 아니고 양심교예요. 실제로 화엄경에서도, 모든 대승경전에서 보살은 다른 종교로도 옵니다. 종교 초월이에요. 종교로 이미 제약하지 마란 거예요. 그 사람이 6바라밀라고 있냐 아니냐만 봐야지 종교를 가지고 저 사람이 보살이냐 아니냐 따지시면 이미 그 사람은 아주 보살도를 전혀 이해 못 하는 분이에요. 종교인이 아닐 수도 있고 아주 무지렁이로 왔을 수도 있지만 6바라밀 하는 그분이 보살이라는 거예요. 일제 때 종교인들이 보살이 아니구요. 일본한테 붙어서 스님 생활하던 그분들 중에 보살이 있는 게 아니구요,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는 분들 중에 보살이 있습니다. 보살을 엄한 곳에서 찾고 계세요.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걸어왔는데, 자기 희생해가면서 가족 위해서 나라 위해서 고생하신 그분이 보살입니다. 어디 호위호식하고 산에서 누리시던 분 중에 보살이 있는 게 아니구요. 6바라밀 얼마나 했냐예요. 꼭 거기 없다는 것도 아니에요. 6바라밀 했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거예요. 종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대승불교를 아직도 이렇게 이해를 못하신다니까요.

(48:40) 제가 왜 많은 용어 중에 보살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이 의미 자체가 우리는 철저히 중생이면서 우리는 부처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보살이란 말이. 그래서 전 보살이란 말만 들어도 되게 가슴이 뛰었어요. 누구든지 될 수 있으니까. 영화 보세요. 망나니도 마지막에 착한 일 한 번 합니다. 그런 사람을 주연으로 영화도 나오죠? 이해되세요? 영화로 기려서 볼 만한 내용이란 거죠? 실존인물이 아니더라도. 양아치가 조폭이 양심적인 일 하나 하는 내용이 보통 많죠? 그걸 돈 내고 가서 본다니까요. 감동 받으면서. 무슨 얘긴지 아시겠어요? 이게 엄청난 일이에요. 막 살아도 좋아요. 지금 정신 차리고 양심의 울림을 따르는 순간 인간은 고귀해지고 신성해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구요. 보살 사상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지금 합시다, 이거죠. 우리 양심은 매순간 꺼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으니까 한번 마음 돌려서, 기독교식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역사가 임하기를,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역사가 드러나기를. 그래서 이 땅에 아버지 뜻이 구현되기를. 이해되시죠? 수녀님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 막 얘기하다가 딱 와닿게 얘기 잘 해준다고. 다 하나죠? 이 마음으로 평생을 살다 가세요. 별 거 없어요. 어차피 여러분 정토 그런 거 몰라요. 가실 때 어차피 불안해서 가실 거예요. 가기 전에 다 불안할 거예요. 정토 없으면 큰일 나는데. 이런 생각 하시면서. 또 의미 부여하면서. 그래도 뭐 좋은 공덕이라도 쌓았겠지. 계속 이러고 사실 거 아니에요? 저는 포기했어요. 중생의 실존적 불안을 제가 어떻게 그걸 없애요? 그것도 프로그램이 된 건데. 이것도 법의 표현이라 우리는 불안해 해야돼요. 무상, 고, 무아가 다르마의 표현입니다. 그럼 무상하셔야 돼요, 여러분. 괴로우셔야 돼요, 뜻대로 안 되셔야 돼요. 기분 좋을 때 망치는 일 생길 겁니다, 분명히. 이해되시죠? 무아, 또 놓으셔야 돼요. 산다는 게 그런 건데요. 지금 좀 전에 기분 좋으셨어도, 흘러가는 거 잡으실 수 있나요? 무상, 고, 무아가 거기 다 들어있어요. 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안돼요. 무상해요. 내 뜻대로 안돼요. 딱 좋았는데 흘러가 버려요. 제 아이 보고 있으면 느껴져요. 지금 딱 예쁜데 계속 커가고 있어요. 불안하더라구요. 귀여울 때가 지나가면 안되는데. 그럼 애는, 저한테서 애는 없어진 거잖아요. 이해되시죠. 이게 우리 실존이에요. 없어지잖아요. 그럼 그게 무상, 고, 무아잖아요. 없어진다는게. 우린 매 순간 없어져요. 이 룰 속에서 우리는 게임을 해야 돼요. 이렇게 살아야 돼요. 무엇으로 극복할거냐? 대승으로 극복해야지, 그걸 열반과 정토로 극복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대승으로 극복하자는 건 그걸 다 껴안고 그 재료들을 가지고 진선미를 만들어보자는 거죠, 제한된 여건에서. 그럼 불안해 하시는 게 맞고 괴로우신 게 맞고 죽을 때까지 힘드실 게 맞아요. 저는 고통에 일정량이 있다고 봐요. 여러분 계속 괴로우실 거예요. 그 일정량 다 겪으셔야 할 거예요. 그런데 그 고통이 왔을 때 무엇으로 대응하실 거예요? 6바라밀이란 무기가 없이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내시고 허무를 이겨내시고 그 고독을 이겨내실 거예요? 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요. 예전에 제가 30살이 되었다는 것에 자다 벌떡 일어난 적이 많았어요. 20대가 사라진 거잖아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50이 다 되어간다는 것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요. 이건 에고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럼 인욕하잖아요? 일반인도.

(52:45) 여러분 보살도가 왜 위대하냐? 일반인도 보살도를 다 하고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 길을 걷고 있다. 모르고 걷고 있어서 그렇지. 알고 걸으면 보살도이고, 모르고 걸으면 중생도이지만 사실 중생도도 보살도에 뿌리를 두고 있지, 별개의 것이 아니에요. 중생들도 매순간 어떻게 살아가요? 방금 저처럼 "아이구, 20대가 끝났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돼요? 인욕해야죠. 인욕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무상함을요, 인생의 괴로움을 통으로 인정하고, 반야로 인정하고 선정으로 마음 추스려서 인욕하고 다시 의지를 냅니다. 우린 살아야하니까. 정진바라밀로 다시 힘 내서 또 남하고 나누고, 내가 할 일 하는 겁니다.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우린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프로그램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여러분은 무조건 보살도 게임 안에 들어와있어요. 게임을 잘 하냐, 못 하냐만 있지 이 게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어요. 조건은 무상, 고, 무아의 재료를 갖고 게임을 하란 거예요. 그럼 이 재료들에 낙망해가지고, 이 재료만 없으면 내가 행복했을텐데 하면서 이제 아공 성자들이 나옵니다. 게임을 거부하는 거죠. 게임은 안 하고 제일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만히 앉아있는 거예요. 게임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언젠가는 게임 끝나겠지, 하고. 왜 태어났는지 의미도 없는 존재예요. 이해되세요?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그 생이 의미가 없는 거라구요. 우주가 이렇게 뻘짓 하는 것 같으세요? 아공 성자들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무상, 고, 무아만 알지, 그 깊은 속은 하나도 모른다. 보살의 위대한 이유는 뭔지 아세요? 인간으로써 추구해야하는 그 아주 아름다운 가치들이 귀한 줄 알면 보살이 돼요. 진짜 보살도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 걸고 남 구하고 죽잖아요. 그럼 그 고귀한 가치를 아공 성자가 이해하겠냐는 거죠. 역시 무상하도다, 하고 말겠죠. 인생은 괴로운 거야. 분석이 안돼요.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로는. 무상한거야, 괴로운거야, 무아야. 거봐, 다 내려놔야 돼. 다 부질 없는 짓이야. 괜히 카르마만 쌓아. 대승보살 눈엔 뭐만 보여요? 양심의 화현으로 보여요. 이렇게 같은 걸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대승, 소승은 완전히 다른 길이에요. 대승이 방편으로 취하는 소승이랑은 달라요. 소승이 목표인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요. 그래서 제가 이 땅에 대승을 펴겠다고 계속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한 줄 아세요? 어느 한 종교의 문제가 아니에요. 중생들이 살아가는 문제예요.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는 거예요. 알파고고 나발이고 간에 앞으로 어떻게 사실거냐구요. 남은 세월 어떻게 살거고 내 뒷사람들은 또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길 원하냐는 거죠. 저는 그 문제예요. 죽은 이후 그런 것은 관심 없어요. 우주가 알아서 해줄 거니까. 제가 알아낸 우주의 자명한 법칙이 알아서 해줄 거예요. 그걸 신뢰 못하면 신앙이 부족한거고, 믿음이 부족한거고, 확신이 부족한거죠. 그건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일이에요. 제가 고민할 일이 아니에요. 제가 고민할 일은 지금 이 순간 양심을 따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신호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따라 살면서 찜찜함을 계속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문제죠. 그리고 이 허무하고 무상하고 괴로운 이 실존을 어떻게 의미있게 살아낼 거냐는 거죠. 어차피 살아야 되니까. 죽고 싶다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카르마가 있어요, 여러분. 풀고 가야할 게 있거든요. 일정 고통량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일정 고통 받으실 때까지 살아계셔야 돼요. 여기서 풀고 가셔야 되거든요. 이 생에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구요. 그거 다 풀 때까지 하늘이 안 놓아줄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살면서 어떻게 사실 건지 고민하셔야 돼요. 욕심을 달래는 법도 아셔야 돼요. 욕심도 재미를 봐야 사니까. 욕심 기운 나라고, 살맛 나라고 또 자꾸 욕심을 위한 방편도 취하셔야 되지만, 근본적으로 양심을 위한 방편도 계속 쌓으셔야 됩니다. 양심이 근본적으로 계발되지 않고 재미를 못보면 내 인생 전체가 영성이 떨어지는 삶이 되어버리고, 나쁜 과보를 짓는 삶이 돼요. 이 생을 걸쳐서 내가 한 일들이 결국 나쁜 과보의 씨앗이 된다구요. 남한테 실질적으로 피해가 가요.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고. 보살도는 말이 보살이지 중생이에요. 사람 사는 얘기예요. 멋진 중생. 보살도는 양심적인 중생이에요. 양심적인 사람. 그래서 제가 양심지킴이라고 하는 겁니다.

(57:30) 아까 정명도 선생 글도 다 양심 지키란 말밖에 없죠? 여러분 양심만 지키면 되는 것 아니에요, 지금? 공부 잘 하고 못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양심을 자꾸 보존하고 지키는 쪽의 사람인가 양심을 무시하는 쪽의 사람인가 그것만 결정하세요. 여러분 결정하실 수 있잖아요. 양심 지키는 쪽으로 결정하세요. 역량껏이요, 너무 오버하지 마시고. 그럼 여러분은 보살의 바른 길을 걷고 계신 겁니다. 우린 원래 부처고 양심 지키면서 보살이 되는 겁니다. 선비가 되고 군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다입니다. 이 이상을 붙이면 그건 다 욕심에서 나온 소리예요. 저것 말고 뭐가 자명합니까? 분명히 자명한 길이 있다, 인류의 삶에는. 더 올바른 게 있다. 이것은 유치원생도 다 알아요. 뭐가 더 올바른지. 양심분석 다 해요. 개콘 보세요. 여자친구가 나 이뻐? 했을 때 정신 바짝 차리자로 시작합니다. 마음 리셋부터 시작합니다. 양심분석을 보고 싶으면 개콘 보세요, 그 코너. 정신 바짝 차리자. 끌려가지 않으려고요. 마음 리셋을 한 다음에 여러 수를 생각해서 더 자명한 것을 택하려고 합니다. 중생은 이렇게 양심성찰도 하고 있어요. 다 이렇게 살아가요. 6바라밀을 쓰고 살아가요. 성자들이 와서 얘기해준 것은요 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왕이면 알고 살라는 거예요. 모르고 살면 중생, 알면 보살이다. 다른 수가 없어요. 알았다고 해서 뭐 뾰족한 수도 없어요. 알고 사니까 더 나은거죠. 대처를 더 주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된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겪을 일 다 겪으실 거고, 괴로울 것 다 올겁니다. 보살되면 안 옵니다, 이런 거 아니에요. 다 와요. 올 때 얼마나 성숙된 모습으로 이겨내실 건지는 6바라밀의 힘이 여러분을 도와줄 겁니다. 하늘이 여러분을 도와줄 거예요. 그 순간순간 어떻게 이겨낼지, 하늘이 같이 도와서 이것을 이겨내야 돼요. 여러분 혼자서 쌩으로 가시면 못갈 길이에요. 무상, 고, 무아의 길을 계속 걷고 계시면 우울증 안오겠어요? 지금 아무리 행복한 일이 오면 뭐합니까? 무상, 고, 무아를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지죠. 이 또한 지나갈 거고. 준우 이뻐죽겠다 해도 뭐합니까? 무상. 생각하면 밥맛 떨어지죠. 오히려 이거 괜히 봤다. 좋은 걸 보면 나중에 이것을 이별한 후에 고통이 더 크지 않겠나? 그래서 소승철학에선, 법구경에선 뭐라고 그래요? 좋아하지 마라, 못 봐서 괴롭다. 미워하지 마라, 자꾸 봐서 괴롭다. 좋고 미움을 아예 떠나라. 숲으로 가라. 다른 결론이 없어요. 소승철학에선. 아예 관계를 맺지 말란 거예요. 그게 사람으로 사는 것 같지가 않잖아요? 중생성은 안 그래요. 그게 사람의 맛이란 거예요. 우주에 존재하는 그 괴롭고 고독한 존재가 사람이란 거예요. 나는 그걸 멋지게 살아내 보겠다는 겁니다. 그 진흙탕 속에서 연꽃을 한 번 피워보겠다. 보살의 꽃을 한 번 피워보겠다. 그게 제일 우주에서 가치있는 일이다. 중생의 고통과 그런 힘든 실존 속에서 양심의 꽃을 피우는 그게 제일 귀한 일이라는 걸 모르시면 보살도 못 걷습니다. 보살과 소승은 영성 수준 자체가 달라요. 깊이가 달라요. 우주를 이해하는 안목이 달라요. 인간을 이해하는 안목이 달라요. 다 달라요.

(1:01:04) 그러니 제가 어떻게 소승을 편 들 수가 있겠어요? 이해되시죠? 소시오패스로 가는 길이에요. 소승이란 건 좋고 싫음에 대해서 마비.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부터 다 떠나자는 거예요. 정 힘든 분들은 일단 그거라도 필요한 분들은 방편으로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게 우리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해되시죠? 지금 출가를 하셨든 재가를 하셨건 다 똑같아요. 속세에 살면서 현상계 취해버리나 숲에 들어가서 숲에 취해있으나 다 똑같죠. 뭐가 달라요? 양심 하냐 안하냐예요. 다른게 아니고. 견성을 하면 뭐해요? 견성을 해도 양심을 안한다. 그럼 다 별볼 일 없는 거예요. 그분 평생 자기 안에서 마약 끌어다 쓸 수 있는 능력 얻은 것 뿐이에요. 돈 안내고 뽕 맞을 수 있는 테크닉을 얻으신 것 뿐이에요. 뭔 일 있으면 계속 뽕 맞고 들어가 버려요. 본인은 죽을 때까지 알딸딸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인도 성자들은 계속 뽕 맞고 있습니다. 알딸딸해서 인도 성자들은, 마하리쉬도 그래요, 세상이 꿈인지 아닌지도 잘 몰라요, 실제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질문해요. 그때 이렇게 대답한 적도 있어요. 나는 지금 네가 꿈인지 아닌지 모른다. 너가 꿈일 수도 있다, 너 자체가. 이런 상태로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인도 성자들은 마약을 합니다. 이 환각 상태나 명상에 빠져있는 환각 상태나 똑같다는 거예요. 실제로 해보니까. 그게 욕할 게 아닌게, 똑같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명상을 하나 뽕 맞고 있나 그 상태에서 현상계를 꿈으로 보면서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고. 도덕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명상 안하느니만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걸로 사람 잡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자기를 타락시키고 남을 타락시키고. 보살이 인간 중에 제일 성스러운 겁니다. 제가 많은 스승들을 찾아가 보고 글로도 보고 했지만, 제가 말씀드렸죠? 부모님이 제일 성스럽다고, 제가 만난 분 중에, 제 입장에선. 자식 위해서 희생하시고 챙겨주시는 모습 봤을 때 부모님이 제일 성스럽게 느껴졌지 다른 누구 가서 보고 성스럽다 느끼지 않습니다. 분위기에 취해서 느끼시는 거고 진짜 인간적으로 성스럽다고 느껴지는 분 있죠? 참 존경할 만한 삶을 사신 걸 옆에서 본, 그분이 보살이에요. 그분들이 실제로 보살이에요, 여러분. 그 공적 어디 안 갑니다. 그 영성을 갖고 그분들이 다 챙기실 거예요, 공 쌓으신 만큼. 그러니까 보살도라는 관점을 잡으시면.

(1:04:07) 오늘 보살의 길 열다 강의인데 관점을 바꾸셔야 돼요. 기존의 묵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보살도를 대하시면 답이 안 나와요. 제가 왜 이 얘기를 드리냐? 2,000년이 지났는데 안 나왔잖아요, 실제로. 이게 빈 말이 아니라, 2,000년이 되었는데, 대승불교가 나온지. 지금 2,000년 뒤에 대승 얘기를 누가 제대로 하고 있냐는 거예요. 좀 충격적이지 않아요? 제가 또 이걸 왜 떠들어야 하냐는 거죠. 이걸 알아서 다 알고 있어야지. 제가 답답해요. 왜 이런 얘기를 내가 하고 있는지. 그쵸? 당연히 지당한 이야기여야 되는데. 다 알고 계셨어야 하는데. 2,000년이 지났는데. 인류가 바보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냐 이거죠. 지금 과거는 어차피 지나간 거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잘 살아야죠. 제가 항상 주장하듯이. 지금 우리가 정신 차리고 이해하면 우리 뒷사람들은 다 알고 살 것 아닙니까. 여전히 우리가 게임하는 와중에 있어요. 우리가 게임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따라서 인류 미래가 바뀝니다. 일단 우리 학당으로 인해서 유튜브에 보살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있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쵸? 쉽게 없어지진 않게 해놨어요. 유튜브에다 1,700개를 올려놨기 때문에. 한편만 남아도 보살도가 뭔지 알만하게 다 해놨기 때문에. 한편 한편에 정성을 담아서 올렸기 때문에 지금 저는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는 겁니다. 우리 학당에서 계속 작업을 하는 거예요. 보살도가 안 잊혀지게, 안 사라지게, 상식이 되게, 구현까지 되게. 우리만 잘 하면 뭐해요? 다 같이 잘 해야 의미가 있지, 보살도라는 게. 그래서 보살도는 그냥 사람 사는 얘기예요. 이걸 아셔야 대승불교에 대해 감을 좀 잡지 않으실까 안 그러면 감 못잡아요. 한국불교 지금 다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도 좋아요. 보살도 하는 종교로 거듭나야 됩니다. 종교를 초월한. 그래서 저는 조계종도 한 번 생각해보시란 겁니다. 과감하게 한번 날려버리시고 멋진 보살도 하는 종단으로 거듭날 수 있음 좋겠다.

(1:06:19) 조계종 영원한 것 같죠? 그거 일제 때 만들어진 거예요. 해방 후에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고. 얼마 안 돼요. 한국불교 몇 천 년 역사 그건 과거 불교지, 조계종이란 종단 생긴 지는 얼마 안 돼요. 무슨 얘기냐면 무상하다구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구요. 아주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라구요. 불교 교리에 안 맞는 얘기니까.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승려들의 삶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왜 결혼하면 안되는데요? 결혼해서 올바른 모습 보여주는 게 좋지, 결혼 안 한다고 해놓고 뒤로... 애들은 또 뭔 고생입니까. 그게 뭐가 정당해요? 저는 결혼해서 정당하게 가정 꾸리고 거기서 보살도 하는 모습 보여주면 유마거사 같은 모습이 나올 거 아닙니까?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기준은 무조건 양심에 맞냐 안 맞냐지, 묵은 제도에 맞냐 안 맞냐. 그 묵은 제도조차도 소승, 대승이 뒤섞여서 제가 보기엔 맞지도 않는 얘기인데. 대승불교에 맞지 않은 제도예요, 지금 한국불교의 제도들이. 소승불교가 적당히 변형된 불교이지 대승에 맞게 최적화된 조직이 아니에요, 제도도 아니고. 그거 해보겠다고 원불교가 나온 것이거든요. 원불교도 또 출가, 재가를 나누더라구요. 이름부터 좀 바꿨으면 좋겠어요. 그냥 전업으로 하냐 아니냐지 그걸 자꾸 집을 벗어나려고 하시고. 그런 의미로 쓰신 건 아니겠지만 출가라는 말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출가자도 출가자라고 생각하다 보면 자꾸 속세랑 떨어지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는 이게 안 좋다는 거예요. 출가, 재가를 왜 나누냐는 거죠. 어차피 사바세계가 다 카르마 속에, 인연 속에 굴러가면서. 그러지 말고 양심 잘 하는 것에만 몰입하자. 우리가 올인하자. 그럼 기존 종교 조직들도 아주 효율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전 그분들 데리고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실제로. 견성콘서트 왜 했겠어요? 전국의 스님들에게 알리면 뭔가 호응이 있겠지 하고. 견성을 그토록 구했고 보살도를 구한 분들이 제일 먼저 알아봐 주실거야, 하고 막 했는데 다들 몰래 보시더라구요. 밖으로 얘기 안 하고 몰래. 서로 통 대화를 안 해요, 제가 볼 땐. 서로 보면서 왜 대화를 안 하고 몰래 보시냐는 거예요. 이게 안 커지네, 하고. 제가 여기저기 들어보니까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왜냐면 수녀님 중에도 보고 계시고 신부님도 많고 원불교 교무님들도 아무튼 저한테 연락 주시는 분들도 많고... 다 보고 계신단 말이에요. 저는 기대는 해요. 이렇게 보고 계신 것 보면 보편성이 있으니까 통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 기대는 그거죠. 그분들 중에 보살이 나오셔서 개혁을 좀 해보셨으면 그래서 보살들이 연합해서 뭔가 도를 펼 수 있는 기반이 더 구축되면 좋겠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보살들을 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보살 양성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홍익학당을 통해서, 남들한테 기대하는 건 다음 문제고. 학당을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보살 양성이고 내용에 들어가면 이거예요. 사는 맛을, 여기서 고차원적으로 사는 맛을 느끼셨음 좋겠다는 거예요. 그냥 삶이에요. 저는 신비한 것은 못해드립니다. 위기가 왔을 때 삶이 힘들 때 6바라밀로 이겨내는 그 이야기만 계속 드릴 겁니다. 이게 내가 찾던 답이 아닌데 하시면 다른 데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저희는 뭐 신비한 걸 해드릴 수가 없어요. 정면 돌파하는 법이죠. 양심으로 정면 돌파해서 삶의 고뇌를 승화시키는 법, 거기서 의미를 찾는 법, 그래서 인생 자체를 작품으로 만드는 법 이것 연구하는 데라는 것만 아시고, 저는 이게 보살도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