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4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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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 |
| 강의일자 | 2017. 12. 02. 土. |
| 게시일자 | 2018. 09. 20. |
| 동영상 길이 | 52:16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S1ulkVbCUYs |
(00:07) 어디서든 양심 없는 사람 없으니까 자기 양심에 대해서 각성하면요, 그전 인생과는 달라집니다.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요. 깨어나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가는 거예요. 저 무량겁이라는 것도 깨어났을 때부터입니다. 나 이렇게 안 살래, 할 때부터 무량겁 걸리는 거지, 안 그러면 무량이 아니라, 그냥 가는 거예요. 그냥 놀았는데, 계속 무량겁 노니까 1지가 되었다, 이런 게 아니에요. 10신부터 시작하잖아요. 진짜로 믿고 공부 시작한 때부터 저런 세월을 지나서 진짜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끝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투자 안 하고 그냥 얻어지는 게 없어요. 아미타불도 수많은 겁을 수행해서 그 자리 갔다고 되어있는데요, 그렇게 안 간 분이 없죠. 그래서 큰 원을 세우고 가서 큰 보살도를 하시는 거예요, 예전 불보살들, 성인들이. 예수님도 다 마찬가지죠.
(01:11) 기독교에 윤회 개념이 없으니까, 윤회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불교식 윤회 개념 하고는 다르죠. 윤회하면서 성장한다, 이런 내용이 유대교 카발라에도 있어요. 어느 파들은 그걸 따르는데요, 예수님 왔을 때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세상을 윤회 개념으로 본 건 아니에요. 직선적 개념으로 본 거죠. 한 번 왔다 가고, 나중에 최종 심판 오고. 이게 원래 꼭 유대인들만의 그런 게 아니고요, 바빌론 잡혀 갔다 오면서, 민족이 대거 잡혀 갔다 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중동의 조로아스터교 영향을 받아서. 조로아스터교가 최종 심판을 강조하는, 선악의 대결, 최종 심판 이런 관념들은 그때 배운 거라고 봐요, 유대인들이. 그전에는 그게 강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만의 사상도 아닌 거예요. 아닌데? 구약을 보면 옛날 아브라함 때부터 일관된 것 같은데? 그런 구약이 바빌론 잡혀 갔다 와서 쓴 것들이에요, 정리한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에요. 옛날 내려오던 얘기들을 바빌론 갔다 와서 그쪽 신화도 대거 배우죠. 특히 창세기 같은 것은 거의 수메르 신화 편집본입니다, 그냥. 수메르 신화를 편집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내용이 엉터리라는 게 아니라 기존 다른 민족 신화를 되게 잘 편집한 거예요. 물론 따져보면 인연이 있어요. 원래 아브라함이 그쪽 수메르 쪽 지방에서 출발해서 이리 와요. 인연은 있는데 들어가 보면 이질적인 문화들인데, 그게 막 통합하는 과정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무오류니 그런 망발은 하지 마시구요. 그건 세상과 담쌓고 나 혼자만의 길을 가겠다, 하는 것밖에 안 돼요. 유대인들이 그러는 것도 걱정인데 거기 동조하는 분 늘어서 해결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같은 것은 진짜 편집본이에요. 수메르 신화를 보시는 게 나아요. 점토판에 다 남아있습니다. 지금 번역되어서 시중에 다 있어요. 그거 보면 수메르 신화에는 신들이 많아요. 다신이에요. 수많은 신들이 벌인 일을 여호와 혼자 하는 일로 편집하다 보니까 여호와가 좀 이상하죠? 막 홍수로 날려버리겠다고 했다가 또 노아한테 가서 피하라고 했다가 이런게요, 수메르 신화에는 다 다른 신들이 하는 거예요. 인간을 미워하는 신들이 홍수로 날리려고 하고, 인간한테 지혜를 전수해줬던 신은 와서 배 만들어서 피하라고 하고. 그래서 (인간이) 살아 남아버리니까 다른 신들이 좌절을 합니다. 아, 인간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하다가 어쩔 수 없다, 하고 인정하고 그때부턴 봐줘요. 이 얘기를 여호와 혼자서 하니까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서 막 하는 거예요. 더구나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풀려날 때, 그게 수메르 신화에서는, 신들이 여럿이죠? 그 사건이 인간이 타락한 사건이 아니고 원래 수메르 신화에서는요, 인간들을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창조해요, 신들이. 에덴동산이란 게 일종의 사역장이에요. 거기 잡혀있다가 탈출한 거예요. 그때도 한 신이 와서 지혜를 줘요. 그게 창세기에는 뱀이 와서 사과를. 그 사과가 지혜를 상징합니다. 지혜를 주고 나니까 자기들이 부끄럽게 살아왔다는 걸 알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가 엉망인 이유가요, 뱀이 사과를 줘요. 인간이 타락했다고 그러죠? 그럼 타락한 걸 걱정해야 하는데, 거기 “이들이 우리들처럼” 그 우리들이란 건 편집본이 그대로 들어간 거예요. 편집할 때 수메르 신화가 그대로 들어가다 보니까 우리들이라고 나와버린 거예요. 원래 일신교인데 우리들이 나오면 안 되죠. 여호와 혼자인데. 그걸 지금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가져다 붙이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구요. “인간이 우리들처럼 지혜로워졌다.” 라고 그래요. “선악을 알게 되었으니, 생명의 나무까지 얻으면 큰일 난다. 우리들과 똑같아진다. 막아라!” 해 가지고 천사들이 가서 인류를 막습니다. 그게 창세기에도 그대로 있어요. 그러니까 스토리가 안 맞는 거예요. 타락한 게 아니라 신들한테 도전한 게 되는 거예요. 그게 수메르 신화에서 원래 인간의 성장기입니다. 지혜로워진 거예요. 그것도 신의 도움이지만. 지혜를 얻은 뒤에 생명의 나무까지 얻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신들처럼 영생을 얻는 거죠. 그걸 신들이 막습니다. 그런 내용이 지금 그대로 편집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증거가 ‘우리들’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거죠. 여호와 혼자인데 “인간이 우리들처럼” 이거에 대해 할 말 없으니까 지금은 삼위일체도 없던 구약을 신약의 관점을 가지고 그 ‘우리들’을 삼위일체로 해석하려고 하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처럼. 그럼 일단 우리라고 해도 웃긴거죠. 우리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 거 아닌가요? 창세기 가서 보세요, 그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이제 인간이 타락한 스토리를 써 내려 가는 중에 다른 신화를 편집해서 넣다 보니까 좀 안맞는 게 나온 거예요. 물론 그 스토리는, 인간이 타락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데, 유대인들은. 근데 원래의 신화는 그런 신화가 아니다 보니까 이걸 가지고 편집해서 이런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가 보인다는 거죠. 그런 거 다 아셔야 해요. 이건 기본입니다. 널렸어요, 그런 내용은, 인터넷 가시면. 저도 옛날에 수메르 신화 책을 보다가 충격받았었는데요, 다 있는 거예요. 등장인물도 훨씬 풍부해요. 그래서 팩트 무시하고 신앙의 힘으로 계속 가시는 건요 한계가 있습니다. 팩트를 누구나 알아버리면 신앙은 무너지는 거예요, 사상누각이에요. 그래서 자명한 팩트에 기반해서 신앙을 하더라도 해야죠.
(07:21) 그래서 공자님 말씀 좀 들으셔야 하는 게, 논어에 나옵니다. 독실히 믿되, 학문을 좋아하라. 의심해 보라는 거예요. 진짜 자명한지 의심해 보라. 배우라구요. 그냥 믿기만 하시면 안됩니다. 모르니까 믿는다, 이런 식으로 나가시면 안돼요. 중세 수도자들, 교부들 막 살벌했잖아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해가 안 가니까 믿는 거야, 믿어. 최근에 어떤 목사님 강의를 듣는데 “안 믿기죠, 삼위일체? 그런데 자꾸 믿으면 믿어져요.”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지. 아니, 믿어지겠죠, 언젠가는. 그걸 말이라고 하고 계신지, 지금. 빵 터졌는데요. 아무튼 뭐 다양한 의견이 있으니까 골고루 들으시되, 저는 찜찜한 것은 못 견뎌하는 성미니까 이런 말씀도 드립니다. 팩트에 근거하면 종교, 철학 이런 거 정말 재밌습니다. 벽을 세우지 않고 자명하면 난 취하고 찜찜하면 거부하겠다는 관점만 확고히 하시고 보면 성경이건 불경이건 다 재밌어요. 물론 자명해지려면 여러분이 하라는 건 해봐야 돼요. 명상하라고 하면 해보고, 견성해보라고 하면 해봐야죠. 성령 만나라고 하면 만나보고 그걸 가지고 또 자명을 검토하고. 저는 그런 식으로 해봤더니, 저는 무슨 엄청난 일가를 이루고 싶은 것도 아니구요 제가 그렇게 해봤더니 너무 재밌어서 벽 속에서 답답하게 하고 계신 분들을 보면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강의를 하는 것뿐이에요. 이런 거로 인정 못 받아도 좋구요. 저는 그냥 제 마음 좋자고 하는거니까. 이럴수록 저는 더 자명해지고 밝아져서 좋아서 하는 겁니다. 자리, 이타가 저한테는 하나에요. 제가 좋아야 남도 도와주는 거고, 일단 제가 좋아서 자꾸 하는 겁니다. 저 좋자고 하는 건데, 양심에 맞는 건 저 좋자고 해도 남에게 도움이 가더라구요. 그래서 저 좋자고 하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좋으실 거고, 제가 자명하게 한 일은. 막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지, 그런 건 아니구요. 저도 욕심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일에는 욕심도 거부를 못해요. “죽이지 않냐?” 하면 욕심도 같이 가봐요. “어, 재밌겠다.” 하고 가보는 거죠. 양심에 진짜 맞는 건요 욕심도 솔깃해합니다. 가면 욕심도 편해지고 다른 높은 시각을 얻게 되면 욕심도 새로운 차원에서 만족을 얻어요. 여러분 지금 작은 소견에는 당장 욕망이 안 이루어지면 죽겠죠? 그런데 시야가 넓어지면 또 다른 욕망이 생겨요, 자연스럽게. 우리가 정토종만 해도 극락가고 싶다고 하면 현상계에 욕심이 안 생깁니다. 극락에 욕심이 생기지. 생각이 바뀌면 욕망은 알아서 바뀌어요. 그러니까 자명한 걸 자꾸 즐겨버릇하시면, 진리를 즐기시면 욕망도 거기 맞춰서 바뀝니다. 예전에 막 쓸데없는 것 사다가 진짜 이런 거 좋아하게 되면요, 만다라 사다가 걸고. 벌써 욕망이 바뀌었어요. 이거 못 사면 가슴 떨리고. 매절 임박하면 가슴 떨리고 그러는 거죠. 어디서 귀한 거 구했다고 걸어놓고. 본인 혼자 좋죠. 가족들도 다 안 좋죠. 하지만 본인은 막 신나서. 그러니까 욕망이란 건 여러분들이 뭘 원하느냐. 진짜 양심이 계발된 정도에 따라 욕망은 알아서 계속 바뀌어요. 욕망 갖고 싸우지 마시란 겁니다. 견성을 차라리 빨리 하시면 바뀌어요, 욕망이. 견성이란 걸 맛보고 나시면 그걸 또 맛보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데 욕망이 또 집중합니다. 그걸 재밌다 그래요. 신기하죠? 예전엔 쇼핑 즐기다가 또 어떨 때 가면 좋은 절 찾아가는 걸 즐길 수도 있잖아요. 들어가 보면 같은 욕심이에요. 자기 욕망에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짜증나고, 열 받고. 다 똑같은데 수준은, 생각이 바뀌니까 영성의 수준이 높아지면 달라지는 거예요. 욕망은 자연스럽게 성숙해집니다,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욕망하고 싸우지 마시라. 그런 말씀도 드리고 싶구요.
(12:07) 자, 이제 들어가 볼게요. 보조 지눌스님. 이번에 아마 수심결 강의 때 자세히 하겠지만 여러분 미리 맛보시죠. 수심결의 핵심은 정혜쌍수 얘기입니다. 제일 액기스만 뽑아왔어요. 수심결의 제일 액기스입니다. “만약 마음에 산란함이 들끓거든” 우리 그동안 얘기해온 게 보조스님에게서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들어보자는 거죠. 자, 선정과 지혜입니다, 정혜쌍수이니까. 선정과 지혜를 닦는데, 정혜쌍운 그러면요, 쌍으로 운행된다는 건요 그냥 참나가 각성되어야만 가능한 거예요. 쌍수는 통용되어 쓰이는데요, 쌍수는 닦는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죠? 그런데 쌍운은 굴러간다는 거예요. 정혜가 굴러가버려요. 그러니까 선정에만 들어도 지혜가 나오고 지혜만 이루어도 선정이 따라오는. 쌍으로 굴러간다는 건 내가 힘을 빼도 굴러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정혜쌍운은 참나 각성 이후에만 씁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쌍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같이 닦는 거니까. 닦는 건 같이 닦는 게 맞는데, 쌍운이라고 할 때는 맛이 달라집니다. 쌍으로 굴러간다는 뜻이 있어요. 운영이 된다. 자, 그러니까 지금 정혜쌍수 그러면 더 포괄적인 얘기구요, 쌍운은 참나를 만나야만 이 말이 나옵니다. 자, 뭔 얘기냐. 예전에 제가 했던 말씀으로 설명을 드리면. 에고가 억지로 하는 선정, 억지로 경전을 공부하며 닦는 지혜가 아니라 정사마타, 정위빠사나 그랬죠? 바를 ‘정’자가 붙거나 아니면 차라리 바라밀을 붙이거나 요게 쌍으로 굴러가는 지혜와 선정이에요. 즉 참나를 깨달아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선정, 참나상태에서 얻어지는 그 무분별지, 직관에 근거한 지혜. 무분별에 근거해서 우리가 추론하고 따지고 하는 지혜. 그건 힘이 다르죠? 그냥 여러분이 쌩으로 따지는 건 힘이 없구요, 참나를 만난 뒤에 오는 직관. 아, 참나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고 머리를 쓰시면 참나에 대한 설명서를 읽어도 느낌이 다릅니다. 그러면 그거를 무분별지와 무분별후득지라고 그래요, 무분별 뒤에 오는 분별지. 일반 분별지는 문제가 있는 건데 무분별 뒤에 오는 분별지는 후득지로서의 무분별지는, 이건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큰 깨달음을 얻고 자기 깨달음을 논리정연하게 풀어보는 것 이건 지혜예요. 그냥 분별이 아니고. 자, 그래서 참나각성에 기반한 것들은 좋은 겁니다. 힘이 빠진 것들이에요. 참나가 각성되었다는 건 여러분이 억지로 선정을 유지하고 억지로 지혜를 닦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참나와 함께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쌍운이 가능해요. 그래서 지관쌍운의 체험이 가능하다는 건 이때 참나각성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정혜쌍수 그러면 지금 선정의 맛도 모르면서 지혜의 실체도 모르면서 지금 억지로 하는 것도 포함해요, 정혜쌍수에는. 그래서 지금 이 설명을 들을 때 마음이 지금 산란해 죽겠어요. 마음이 요동하고 있어요. 물 끓듯이 끓고 있습니다. 물 끓을 때 생각해보세요. 쉬지도 않고 막 요동하죠? 내 마음이 그래요.
(15:39) 그런데 “그때는 선정의 문을 활용하여 순리대로.” 자, 내가 선정을 닦아야겠다. “모른다!” 하고 앉아있다고 치죠, 우리 방식으로. “모르겠다. 모르겠다.” 할 때 산란해서 요동하는 마음이 쉽게 진정이 안되겠죠? 그래도 선정을 닦는다 하는 데 뜻을 세우고 순리대로, 선정의 이치대로 판단을 중지하면서, 잡념에 끌려가지 않으면서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이리저리 흩어진 마음이 거두어들여지겠죠? 그걸 거두어들여서 마음이 의식에 떠오른 이런저런 대상을 따라가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 본래 고요한 참나랑 딱 만날 때가 온다는 거예요, 합해질 때가. 계합한다고, 어려운 용어로 계합이라고 하는데요, 딱 부합할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렇죠? 자, 이게 선정 닦는 법입니다. 이건 포괄합니다. 꼭 지관쌍운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참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선정을 시작해서 참나를 만나는 것까지 말하는 거죠. 올바른 선정을 닦으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지관쌍운보다 그러니까 8급 되기 이전에 9급에서 우리가 지도할 내용인거죠. 9급에서 지도할 내용인데, 왜 지금 1급 얘기하는 데 정혜쌍수를 얘기하느냐. 이 얘기가 이어지니까요. 보세요, 9급에서 뭣도 모르고 마음이 요동하니까 선정을 해야겠다고 몰라를 했어요. 판단중지를 하다가 보니까, 떡하니 참나의 고요함을 딱 마주하게 된거죠. 참나각성이 일어난 거예요. “아, 내가 원래 고요하구나!” 하는. 그러니까 에고에서 시작한 작업이, 후천적인 공부가 선천적인 참나와의 합일을 통해서 승화된거죠. 이게 정사마타, 올바른 선정, 선정바라밀 그럽니다. 선정이, 아직 참나를 못 만난 선정은 (바라밀이 아니라) 그냥 선정이라고 해요. 지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참나 못 만나고 선정에만 들고 있습니까. 딱 앉아계실 땐 부처님이에요. 일어나면 “아, 도저히 모르겠는데.” 이러고 딱 일어나시면 아직 선정인 거고, 찰나를 앉았더라도 참나를 정확히 만났으면 선정바라밀인 거예요. 원래 딱 앉아있다고 그래서 견성한 건 아니죠. 선정을 잘하는 건 아닙니다. 앉아있는 달인들이 있어요. 멋있게 앉아있는 달인. 참나랑 상관없이. 그러니까 이게 선정바라밀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참나를 못 만나고 선정에만 잘 들면 뭐해요. 목적이 안 이루어진 거잖아요. 우리 학교 때도 보면 공부 진짜 잘할 것 같은 애들 있어요. 딱 눈빛 예리해가지고요, 막 줄치고. 나중에 보면 “신령한 앎에 합치되도록 한다.”에서 “한다.”에만 동그라미 쳐져 있어요, 걔 교과서를 보면. 전혀 포인트가 맞질 않아요. 성적도 딱 그만큼 나옵니다. 그런데 남이 보면 공부 되게 잘해 보여요. “아, 쟤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물어보면 몰라요. “겸손한가?” 그래서 보면 노트, 교과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엉뚱한데 동그라미, 별 쳐져 있습니다. 주로 마지막 말에. “한다.” “있다.” 뭔 얘기냐면 지금 교실에서 수업 열심히 듣는 데는 달인인데, 전혀 성적하고는 영 관계가 없죠? 마찬가지로 선정 끝내주게 해요. 경을 앞뒤로 외워요, 반야심경을. 뒤집어서 외우고.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뭐냐면, 그게 지혜로 연결이 안 되면 참 안타깝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만 잘해도 그걸로 어필해서 세상 살아가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목표로 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아주 의미 없다는 건 아니구요. 세상에 의미 없는 건 없어요. 그런 것도 하나 잘하면 또 그걸로 어딘가에서 장가가고 다 합니다. 저는 그거 다 중시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패가 많은 건 아니기 때문에 있는 패 잘 살려서 써야 돼요. 이상하게 내가 잘 앉더라. 그러면 앉는 것 가지고 먹고 살아야 돼요. 저는 그건 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만 우리가 원하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제 말 혹시 오해하실까봐. “아, 난 부질 없구나.” 그게 아니구요, 그거 해서 다 잘 사셔야 돼요. 있는 패 잘 쓰셔야 돼요. “나가리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나한테 들어온 패가 이거밖에 없으면 요걸 살려서 장가가고 다 해야 되거든요. 저는 그거 다 인정합니다. 다만 남한테 피해만 주지 마시라. 그건 악이니까 그러진 마시라 하는 거고 중생의 삶은 다 그렇습니다. 다만, 공부를 하시려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선정과 지혜를 얻으셔야 돼요.
(20:17)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얻느냐? “마음이 흐리멍텅해지거든.” 반대 상황입니다. 마음이 산란하거든 선정을 써서 가라앉히다가 참나를 만나고, 참나의 본래 고요함을 만나고. 마음이 흐리멍텅해지거든 지혜를 써가지고, 지혜가 뭐겠어요?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다. 에고는 무상, 고, 무아다. 참나는 상락아정이다. 일체만법은 참나의 작용이다. 이 아공, 법공의 지혜를 곱씹으시는 거예요. 이게 방편이에요. 이 지혜를 계속 곱씹고 머릿속으로 개념을 정립하고. 아까 얘기했죠? 뭐든지 공부는 이런 순서입니다, 4단계. 자, 체험이 없을 경우엔 이 순서를 따르셔야 돼요. 이 4단계 순서는 체험이 이미 있는 경우고요, 체험 없는 경우엔 이 순서를 따르셔야 돼요. 먼저 개념적으로 이해합니다. 아공이 뭔 말인지, 법공이 뭔 말인지. 그다음에 아공, 법공이 이해가 점점 편해져요. 첨엔 낯설다가. 그다음엔 말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에고가 무상, 고, 무아고, 참나가 반대라는 말이고, 그런데 그 에고의 무상한 만법들이 참나의 작용이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거잖아.” 이겁니다. 체험은 없어요, 여기까지. 아주 없을 순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참나를 만나요. 여러분 살아 숨 쉰다는 게 참나의 작용이죠? 사실 만나기 때문에 뭔가 이런 개념적 판단에 체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판단이 좀 서실 거예요.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막연해요. 그건 무의식적인 판단이라 막연해요. 그러다가 체험이 딱 생겨요. 내가 연구했던 개념에 부합하는 체험을 하게 돼요. “아, 이거구나!” 하게 돼요.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게 되는 겁니다. 그럼 해오, 돈오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상황도, 지혜를 통해 들어가는 것도 그래요. 아공, 법공의 지혜의 문을 가지고. 자, 보세요. 마음이 흐리멍텅해지거든, 이건 뭐냐? 마음이 산란하거든 하는 건 마음의 선정이 깨졌단 얘기고요, 마음이 흐리멍텅하다는 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무지의 상태. 그렇죠? 아집과 무지입니다. 마음이 욕심에 빠져 산란하거든 선정으로 가라앉히고, 마음이 어리석어지거든 아공, 법공의 지혜, 여러분 같으면 홍익학당에서 뭐 나눠드리죠, 그래서? 실천지침 14조. 그거의 내용을 곱씹으시다 보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상황을 파악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진리를 분별, 선택하게 되죠. “아, 이게 진리야.” 개념적 이해이지만, 아직은. “이게 진리야.” 하게 되고, “모든 현상계가 본래 참나의 작용이야.” 즉 “현상계가 텅 비어있어.” 이게 보여요. 그러다가 비추어보고 관찰함에 어리석음이 없게 하여. 그렇게 이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자명해지다 보면 어떻게 돼요? 자명해지다 보면 체험이 따릅니다. 그 체험이 결국은 본래의 신령한 앎에 합해질 때, 참나에 대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직관지가 생겨요. 그 전엔 개념지였는데, 탁 직관하게 돼요. “진짜 그렇구나!” 하고 선언할 때가 와요. 그러면 이게 정위빠사나예요. 그 앞 단계는 정위빠사나가 아닌데 마지막에 본래 성품에, 참나의 신령한 앎. 참나는 원래 알고 있잖아요. 참나가 원래 알고 있는 그 직관과 부합하게 되면 우리가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23:42) 그러니까 지금 보조스님은 정말 쉬운 단계부터 얘기해주시는 거예요. 일반인들도 이렇게 접근하라 이거죠. 선정의 기본단계부터 하나하나. 몰입의 4단계부터 밟아 올라가다 보면, 몰입 4단계 되면 참나 만나죠? 마찬가지로 이 아공, 법공의 기본 개념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우린 자명한 이해, 자명한 직관에 도달하게 된다. 너무 자명해서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돼요. 그래서 의심할 수 없는 지혜가 정지혜이고, 반야바라밀이고. 참나를 만나서 참나에서 오는 고요함 속에 쉴 때, 내가 마음을 진정시켜서 오는 고요함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던 나의 존재의 고요함을 만날 때 정사마타, 아니면 선정바라밀 그럽니다. 바라밀이란 말은 억지로 하고 있을 땐 안 붙여요. 툭 터지듯이, 힘이 빠져도 이루어질 때 우리가 제대로 (바라밀이) 됐다고 하고 그때는 쌍운이라고 하는. 이 둘이 이제 함께 굴러가게 되면요 둘다 참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깨어계시기만 하면 쌍으로 굴러가요. 여러분이 이제 모른다만 딱 하고 계셔도 본연의 참나의 선정이 굴러가고 참나에서 오는 그 직관이 아공, 법공의 지혜로 나한테 표현됩니다. “이건 참나지, 이건 에고지.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지.” 저희 14조 실천지침을 가지고 얘기하면 알게 되는 거죠. “이게 나의 현존이지. 본래 현존이지.” 하는 것도 알게 되고, 무상, 고, 무아로부터 떠난 그 자리도 알게 되고, 또 동시에 “일체가 참나의 신비지.” 그러면서 “나는 늘 참나와 함께 이렇게 가는 게 옳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게 돼요. 이게 지관쌍운입니다. 그런데 깨어있음이 딱 짧잖아요. 8급, 7급은. 깨지고 나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런데 말이야, 현상계가 참나의 작용인건데 말이야.” 이렇게 됩니다. 말이 바뀌어요. 아까까지는, 좀 전까지는 “아, 참나의 작용이구나!” 깨어있을 땐. 의식이 확 떨어져요. 초의식에서 일반의식 상태로 툭 떨어지면 그때 판단했던 게 자신이 없어져요. 아까는 분명 그런 기분이었는데, 일체가 참나의 작용인 것 같았는데. 그런데 이 짓을 계속 하다보면 늘어요. 또 들어가면 또 확신이 강해져요. 튕겨 나오면 또 약해져요. 계속 하다보면 아무튼 이게 맞긴 맞구나 하는 게 이제 자리 잡겠죠? 그러면서 참나랑 있는 시간도 길어지고 이제 처음엔 낯설었던 판단이 너무 당연해지니까 여기서 사고가 자꾸 확장됩니다. 이건 뭐 당연한 얘기 같고 이렇게 사고가 커지다가 이제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게 1급인 거죠. 대충 그림은 그려지시죠? 이 정도 설명 드릴게요.
(26:32) 자,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산란한 마음이 들면 선정으로 다스리고. 멍한 상태는 지혜로. 흐리멍텅한 상태는 지혜로 똑똑하게 만들어주면,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잊고. 움직이건 고요하건 항상. 어떻게 될까요? 움직이건 고요하건 그건 신경 쓰지 않고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끝나면. 대상에 따라 다스린다는 건요, 내 마음이 산란할 때는 선정, 흐리멍텅할 때는 지혜. 이게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흐리멍텅함을 만나고 있으면, 내가 만나고 있는 대상이 흐리멍텅함이면 빨리 지혜 출동. 아공, 법공의 지혜를 곱씹으면서 극복하고, 마음이 산란하기만 하면 몰라를 통해 그것을 진정시키면서 극복하고. 이게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입니다. 움직이건 고요하건 이 공부를 계속 쓰면서 이 공부가 끝나면 바깥 경계를 대하여도 생각, 생각이 모두 근본으로 돌아가고. 이제 참나를 다 알게 됐죠?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공부가 대상에 따라, 마음이 어느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선정이 출동해서 진압하고, 지혜가 출동해서 진압하고, 이런 공부를 하다보면요, 나중에 참나에 완전히 자리잡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바깥 경계를 대하여도 생각, 생각이 모두 근본으로 돌아가고. 경계를 만나도 자동으로 몰라 상태가 되고, 그리고 자동으로 어떤 인연을 만나도 다 마음, 마음이 도에 부합하게 돼요. 항상 진리 위에, 자명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진리 위에 살아가게 되어, 길에 부합하게 된다는 건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혜쌍수의 도에서 안 떠나게 된다는 거예요. 상상해 보세요. 처음엔 어색해요. 산란하면 선정 때리고, 진정이 좀 되면 지혜 공부하고. 처음엔 공부순서가 찢어져 있습니다. 선정 먼저, 지혜 다음이에요. 석가모니 때부터도 명상에서 지혜 나온다고. 명상이 먼저, 지혜가 다음입니다. 이렇게 공부순서가 찢어져 있죠? 그러니까 찢어져 있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공부로서의 선정과 지혜예요. 그런데 도인이 되면, 참나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참나에서 나오는 선정과 지혜죠? 이미 지관쌍운의 상태에 살아가게 되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알약이 24시간 활동하듯이 어떤 경계를 만나면 자동으로 진정시켜버리고, 자동으로 상황을 파악해버려요. “이건 아공, 법공에 의거해서 판단할 때 이게 옳아. 이건 아니야.” 바른 판단을 바로바로 내려주겠죠? 이거를 표현해놓은 겁니다. 경계를 만나도 생각, 생각이 모두 근본으로 돌아가 버린다. 참나로 돌아가게 되고. 인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항상 진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진리를 바로 알아보고 거기에 서 있어요. 자명한 쪽에 항상 서 있어요.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고요함과 신령함을 함께 닦음에, 참나의 고요함, 참나의 신령한 앎이죠? 그래서 공적영지입니다. 참나의 텅 빈, 공적한 고요함과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그 지혜의 부분을 함께 닦음에, 정혜쌍수죠?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정혜쌍수가 걸림이 없어지면 뭐라구요? 정혜쌍운이요. 지관쌍운. 쌍으로 굴러가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29:58) 비로소 이 경지가 되면. 자, 여기 뭐라고 써 있냐면, 고요함과 신령한 앎을 함께 닦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가요, 원래 한문으로는 임운쌍수입니다. 그러니까 맡겨버릴 수 있다. 맡겨버려서 쌍으로 닦는다. 닦긴 닦는 데 노력으로 닦는 게 아니라, 그냥 맡겨 놓으면 자동으로 굴러간다는 뜻이에요, 임운이라는 것은. 맡길 ‘임’자. 그러니까 본래 알아서 움직이니까 본래의 움직임에 내가 맡겨버렸다는 것을 임운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본래 고요하고 본래 지혜로움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그냥 맡겨버리면 알아서, 참나가 알아서 마음이 시끄러우면 고요하게 만들어버리고 마음이 판단을 못 하고 있으면 흐리멍텅해 있으면 지혜를 택하게 도와준다는 겁니다. 이끌어내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비로소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정도 하면 확철대오죠? 할 일이 없는 사람, 하면 확철대오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이제 확철대오에서 더 나아가면 구경각을 의미할 수도 있겠죠? 선불교에서는 보통 확철대오, 이 정도 지관쌍운 얻어서 어디 가도 걸림 없이 살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만, 구경각은 6바라밀을 끝내주게 잘 하는 경지이기 때문에 어려워요. 그런데 보조스님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하신 얘긴지 보죠. 만약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르게 챙겨서 밝게 부처의 본성을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견성 제대로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튼 확철대오는, 일단 확철대오라고 보자구요. 확철대오는 확실히 한 사람이다. 그렇죠? 지관쌍운이 확실히 되면 확철대오입니다. 1주 보살. 옛날부터 그런 사람을 일 없는 사람. 아라한한테 뭐라고 불렀죠? 예전에 아라한이요, 초기불교 때부터 아라한을 일 마친 사람, 배울 게 없는 사람. 이렇게 불렀어요. 재미있는 게 그 전통이 선불교에서도요, 둘 다 1급 비슷하거든요. 그러니까 아공으로만 1급 가면 아라한, 법공까지 가서 1급 경지 가면, 그러니까 준 1급이겠죠, 대승에서 볼 때 아라한은. 아공만 닦으니까. 법공까지 다 닦은 1급이 제대로 된 1주 보살인데, 1주 보살 되면 일 마친 사람이라고 할 만하죠. 확철대오 얻으시면 왜 일 마쳤다고 하냐면요, 정혜쌍수가 알아서 작동하니까 일 마쳤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선정과 지혜 속에서 살다 갈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걸로 6바라밀을 끝내주게 파보자까진 아직 안 간 거예요. 이게 등산으로 치면요, 정상은 정상이에요. 그런데 뒤에 더 큰 봉우리가 첩첩산중인데 저기까지 가려면 힘드니까 이미 확고한 정상에서 쉬는 분 정도 됩니다. 아라한이나 1주 보살이. 그래서 나 하나 앞으로 마음 추스르면서 사는 데는 자신 있다, 하는 경지예요. 노력 안 해도 내 안에 참나가 늘 있다는 걸 알고 아공, 법공의 지혜가. 자, 보세요. 참나가 늘 있다는 걸 알면 참나의 뭐가 따라와요? 아공, 법공의 지혜가 늘 따라오기 때문에 이분은 아까 말씀드린 선정과 지혜가 쌍으로 굴러가는 경지죠? 이 정도 되면 일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1차로 일 마친 사람. 완전히 마친 것은 아니구요. 물론 보조스님이 완전히 마친 경지까지 연속선 상에서 얘기하셨을 수도 있죠. 그런데 보조스님 논리가 그래요. 1급 보살만 되어서 돈오만, 증오만 얻어 놓으면 그 뒤는 닦음 없는 닦음이라는 거예요. 6바라밀을 닦되 이미 정혜쌍수가 굴러가니까 6바라밀은 그냥 옳으니까 하지 않겠어요? “응, 자명, 자명, 자명” 해서 6바라밀 하다 보면 나중에 6바라밀이 선명해지면 1지 되고, 또 6바라밀이 노련해지면 2지, 3지, 10지까지 가는데, 보조스님 계산으로는, 1급이 확실하면 왜 고속도로 톨게이트 통과한 거랑 똑같다고 봤냐면요, 화엄경 입장에선 아닌데도, 정혜쌍수만 확고하면 확철대오만 확고하면 6바라밀 쪽으로 발전해 가는데 이미 제일 어려운 것은 끝났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대로 그냥 살아가면 6바라밀을 하지, 그럼 다른 걸 하겠냐고 보신 거죠. 근데 여기서 문제는 실제로 양심분석을 안 하시면 여기서 멈춰버린다는 거예요. 실제론 그냥 알아서 굴러가는 게 아니라. 보조스님이 말씀하신 경우는 나름 양심지능이 있는 사람들 얘기고 양심지능이 떨어지는데 확철대오까지 가신 분들은 양심 안 밝히더라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보조스님도. 이런 얘길 하세요. 근기가 예리하여 견성을 쉽게 얻었는데 선행을 더 닦지 않으면. 아까 그 대승기신론 그런 논리예요. 선행을 더 닦지 않아버리면 거기서 그대로 타락해서 다시 악도로 떨어지더라. 더 타락해버리더라. 그러니까 참나 안다고, 참나를 쉽게 알고는 더 닦지 않으면 타락해버리더라. 이런 내용이 보조스님 글로도 있구요, 진심직설이라고 보조스님 글로 전해왔는데 최근에는 다른 저자일 수도 있다고 보는 그런 책인데, 거기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오고. 대승기신론에도 나와요. 대승기신론 아까 그 구절은 아직 1주 되기 전이죠? 1주 된 뒤에도 또 나와요. 1주 된 뒤에도 온갖 선행을, 6바라밀을 다 안 닦으면 타락한다. 왜? 우리의 업장이 너무나 많다. 견성을 했어도 우리 업장은 너무나 많다. 그걸 다 털지 않으면 불성이 구현되지 않는다. 이게 대승기신론에도 나오고, 보조스님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확실치는 않는, 진심직설에도 나오고, 보조스님의 의견에도 또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들을 성철스님 이런 분들이 싫어하세요. 돈오했으면 끝이지, 뭘 또 닦고 뭐 6바라밀을 해야 되고. 이런 거 싫어하세요. 성철스님은 견성했으면 12지라고 주장하시는 분이라. 그런데 보조스님은 냉정하게 확철대오가 1급이라고 보신 거예요. 정혜쌍운이면 무조건 1급이에요. 선정과 지혜가 쌍으로 닦인다, 그러면 1급이에요, 보조스님은. 그 관점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견성 확실히 한 사람이 된다. 자, 보시고, 그 다음.
(36:47) 6근이 경계를 대하더라도 마음이 의식에 반영된 대상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고. 6근이 보고 듣고 온갖 정보에 노출되죠? 그래도 그 대상에 끌려가지 않으면 선정입니다.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끌려가지 않는 나의 존재 있죠? 공적영지가 생생하면요, 알아차리는 마음만 51프로 이상이면요, 어떤 대상 만나도 안 끌려가요, 실제로. 이게 선정이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텅 비어있음. 아까 말씀드린 게 이거에요. 마음이 돌아가는 내 에고의 모습과 내 에고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하나로 보여요.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건 이거죠? 그럼 거기서 어떤 지혜가 나오겠어요? 법공이요. 일체 만법은, 나를 포함해서, 나와 남의 모든 만법의 작용은 다 알아차리는 참나의 작용이구나, 알아차림이 있어 존재하는구나, 하는 아공, 법공의 지혜를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과 경계가 본래 텅 비어있지, 하고 아는 게, 그래서 관찰할 수 있는 게 뭐라구요?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라고 한다. 선정과 지혜의 핵심이 뭔지 아시겠죠? 선정은 몰라 잘하는 것, 지혜는 아공, 법공 확실히 아는 것. 나아가서 선악 판단까지 하는 것. 이게 그냥 다입니다. 이 이상이 없어요. 보조스님과 대승기신론 논리를 다 들어봐도, 정혜쌍수의 논리를 다 들어봐도 이 이상 내용이 없습니다. 자, 지관을 함께 행함. 그래서 지관을 함께 닦을 때 대승기신론에서 무슨 힌트를 주는지 보죠. 이게 다 여러분 공부하시는 데 힌트 삼으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시간이 다 끝나서 조금만 보고 끝내겠습니다.
(38:50) 지를 닦으면, 선정을 닦으면요, 범부가 세간에 집착하는 걸 다스릴 수 있으며. 여러분, 선정을 닦아야 일반 중생도 세상에 덜 집착하게 된대요. 그리고 선정을 닦으면요, 이승, 이승은 누구죠? 성문, 연각. 아라한들이요. 엄밀히 말하면, 성문은 아라한, 연각은 벽지불 그럽니다. 그런데 사실 벽지불도 아라한이죠. 하나로 말하면 아라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에. 그런데 구분하면 아라한과 벽지불들이 갖고 있는 나약한 견해, 아공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아공에만 집착해 있어요, 이 양반들은. 나라는 실체가 없다. 나라는 실체를 못 찾겠으니까 에고를 초월해서 열반에 들겠다는 이 생각만 있어요. 범부들은 선정을 닦으면, 이게 대승 선정인 거예요. 제대로 된 선정을 닦으면 범부들은 세간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욕심 좀 줄어들고, 이승 성자들은 아공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제대로 된 선정을 닦으면. 즉 이 얘기는 참나를 제대로 만나게 되면 법공의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얘기를 해 놓은 거예요. 자, 관을 닦으면 어떤 게 좋냐? 올바른 지혜를 닦으면 이승 성자들은 큰 자비를 일으키지 않는 그런 좁고 용렬한 마음의 허물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이 양심분석을 하다 보면요 “아, 내가 너무 좁게 살았구나. 열반에만 집착했구나. 아공에만 집착했구나.” 이걸 깨달을 수 있게 되고요, 범부들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떠날 수 있다. 6바라밀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선근. 이 선근이 공덕이면서 지능이에요. 좋은 공덕을 많이 쌓아야 선근이 생기고, 선근은 결국 좋은 공덕을 많이 쌓다 보니까 영성지능이 높아진 거예요. 그러니까 근기가 좋아진 거예요. 6바라밀을 할 수 있는 재능, 지능이 높아진 걸 말합니다. 결국 공덕을 많이 쌓아야 그 지능이 생겨요. 그러니까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해요, 뭐든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관의 두 문이 서로 도와서 이루어지며. 그러니까 대승기신론식 정혜쌍수의 설명입니다. 지관의 두 문은 항상 서로를 도와주게 되어있다. 즉 대승의 방식으로 참나를 만나야 아공, 법공의 제대로 된 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서로 도와준다. 선정에만 들면 지혜가 따라오고, 지혜를 얻으면 선정이 따라오는. 그래서 이걸 지관쌍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만약 지관을 함께 갖추지 못하면, 이 중에 하나만 갖추면 도를 못 얻으신 거예요. 지관을 갖추지 못하면 보리의 도,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다, 견성 못 한다, 이겁니다. 지관을 함께 딱 얻어서 찰나라도 갖추면, 여러분, 해오. 완연하게 지관쌍운의 경지에 자리 잡으시면, 머무를 ‘주’자 써서 1주 보살. 머물렀다고 해서 1주 그러는 겁니다. 이 정도 되시면 일단 6바라밀을 분석을 해도 잘하시게 되어있죠? 아까 홍익학당식 설명으론 뭐죠? 1급 정도 되면 6바라밀 분석도 상급으로 한다. 잘한다고 되어있죠? 그러니까 이 두 개는 같이 가는 겁니다. 6바라밀 분석 안 하시면 안 돼요, 학당에 오셔서. 곤혹스런 분들 많아요. “제가 견성은 했습니다. 양심분석은 안 하렵니다.” 아니면, “저는 호흡을 하러 왔습니다. 단학의 비결만 배우고 양심분석은 안 하렵니다.” 어떻게든 양심분석은 안 하려고 하세요. 더 어려운 것도 하시면서. “차라리 태식을 하겠습니다. 양심분석은 안 하렵니다.” 그런데 양심분석을 안 하면 대승기신론 논리로만 봐도 도를 얻을 수 없게 되어있어요. 이게 안타까운 점입니다.
(42:48) 가톨릭에서도 양심분석 하죠? 훌륭한 겁니다. 가톨릭에서 양심분석할 때요, 어떤 신부님이 써 놓으신 글에, 외국 신부님이었는데, 정말 설명 잘 하셨더라구요. 양심성찰이란, 오늘 하루 매 순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내가 아버지 뜻에 얼마나 부응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게 다죠? 양심이 아버지 뜻이니까 매 순간, 과거의 것을 분석하더라도 그 당시에 양심적 답은 뭐였는지? 그게 아버지 뜻이었던 거예요. 내가 거기에 얼마나 부응했는지 이걸 체크하면서 반성하는. 그럼 앞으로 일어날 일도 미리 분석이 가능해지죠? “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양심, 아버지 뜻이 어디 있겠구나. 그럼 내가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까?” 이런 걸 고찰하게 되겠죠? 이게 양심성찰이란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 초월해서 다 하셔야 돼요. 불교도 똑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정혜쌍수에 충실했는가는 결국은 양심성찰을 통해 드러납니다.
(43:50) 자, 여기까지만 읽을게요. 마지막, 보조 지눌의 1주 경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요. 이거 보시면 1주가 정리됩니다. 지관쌍운이 1주 보살의 핵심이었죠? 자, 이거 외우셔야 돼요. 밑줄 딱 치시고. 1주 하면? 정혜쌍운. 지관쌍운. 이게 바로 떠오르셔야 돼요. 10가지 믿음 중에, 10신. 자, 이게 이겁니다. 10신, 10가지 믿음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좋은 말 다 써놨어요, 옛날 분들이. 그냥 불법은 진심으로 믿는 거예요. 내 안에 불성이 있다. 불성만 밝히면 보살이 될 수 있다. 그 여러분이 들은 불법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거예요. 아직 만난 적은 없어요. 개념적 이해예요. 10신의 핵심은 개념적 이해인데 그럼 명상을 안 하느냐? 아니에요. 선정은 열심히 해요. 개념적 분석도 해요. 그런데 뭐죠, 문제가? 둘다 ‘정’ 붙을 정도는 아직 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마음을 진정은 시키는 데 선정은 잘 하는데, 참나는 아직 모르겠는 선정. 지혜, 개념은 많은데 아직 체험은 없는 지혜. 체험 없는 지혜, 참나각성 없는 선정. 이 상태가 10신의 상태예요. 그러다가 10신 중에 방편으로써 지관을 닦는다는 게 그거예요. 아까 그 올바른 지관이 아니고, 말씀드렸죠? 체험 없는 개념 공부, 참나각성 없는 선정 공부. 이거를 방편으로써의 지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닦다가 탁 터져서 8급부터 1급까지 닦게 되면 어떻게 되죠? 이걸 한 마디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임운공성. 자유로이 맡길 수 있는 공부가 이루어지면 무슨 느낌이겠어요? 그냥, 참나가 원래 고요하고 원래 지혜롭다는 걸 알고 참나한테 탁 맡길 수 있다는 건요, 그냥 몰라만 하고 있으면 알아서 나오는 경지란 거예요. 몰라만 하고 계시면 알아서 지혜까지 나오는 경지를 임운공성이라고 해요. ‘임’, 맡길 ‘임’자, ‘운’, 참나가 원래 굴러가는 대로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쉴 수 있는 그런 공부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정혜원명.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광명해요. 죽이죠? 여기까지만 가시면. 홍익학당에서 1급입니다. 단, 1급이 다 1주 보살은 아닙니다. 뭔 소릴까요? 저희가 어떻게 다 알아요. 1주는 하늘이 체크하는 거고, 저희는 저희대로 이 기준대로 드린다고 드립니다만 1급이 아닌데 1급인 경우가, 받은 경우가 있으면 나중에 꼭 색출해서 강등시키겠습니다. 또 이런 게 있어요. 지금은 1급인데 방만해질 수도 있죠? 그럼 꼭 강등시키겠습니다. 수질 관리는 확실히 해야 돼요. 그래서 항상 홍익학당 1급이면 이 정도는 한다 하는 걸 맞추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인간이 하는 일은 모자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학당에도 1급도 있고, 문사, 뭐 수사, 정사. 최대한 여기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정사들이 1급 정도가 되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사람 속을 다 알아요. 또 문제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으면 거기에 맞게 자명하게 계속 조치를 취해갈 겁니다. 왜 이 얘기를 미리 드리냐면, “와, 장난 아닌데, 1급.” 하고 딱 학당 갔는데, 정사가, “저분이 1급이라고?” 해서 너무 높게 보지 마시라구요. “그런데 좀 이상한데.” 이럴 수 있거든요. 여러분이 정확히 1급이 뭔지 아시는 건 아니잖아요, 체험적으로. 여러분의 상상 속의 1급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지도 마시고 실제로 좀 모자란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그건 그때그때 맞춰서 계속 자명해지려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일상에서 우리가 1급을 드리고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예요. 저희가 그 사람과 24시간 붙어서 살아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여러분 학당에 오셔선 되게 천사신데, 가정에선 어떤지 우리 솔직히. 가정방문 해봐야 알죠. 가정방문 해서 여러분 좀 나가계시라고 하고, 자녀들 모아서 솔직하게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진짜 나 학당이라면 이가 갈린다. 막 윤홍식 그 사람만 보면 이가 갈린다. 하루종일 우리를 괴롭힌다.” 이럴 수도 있죠? “아, 이거 6바라밀에 안 맞는데.” 이런 일이 우리한테 안 보여지는 모습 속에서 또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제가 천안통을 얻어서 다 보면 좋겠습니다만,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구요. 그러니까 최대한 자명함을 찾아가자는 거죠. 제가 이 얘기를 미리 까는 이유가, 우리 함께 도를 만들어 가는 거지, 우리가 심사하고 여러분이 감추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서로 오픈해서 “저, 학당에서 1급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저는 이러이런게 안돼요, 솔직히. 저는 진짜가 되고 싶거든요.” 이렇게 얘기해 주셔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함께 1급을 찾아갈 수 있어요. 그래야 둘 다 자명해지는 거예요. “와, 진짜 이런 경지가 가능하구나.” 내가 진짜 되는구나. 둘 다 자명해야 아름다운 건데 학당에서 오판하고 1급 드렸는데 좋다고 하고 받으시면 안 된다구요. 그 뒤로 괜히 받아놓고 잠 안 옵니다. 그런 분들 제 주위에 많아요. 태권도 몇 단이래서, “야, 너 태권도 몇 단이라며?” “아니에요, 사실 저 돈 주고 산 거예요. 실제론 몇 단쯤 돼요.” 양심에 걸려서 당당해지지 못해요. 그런 공부 하시면 안 돼요. 여기 오셔서 우리 학당에서 만약에 드린다고 해도요, “나 이 부분 찜찜해서 이거 다 보강되면 진짜 내가 당당하면 그때 받을게요.” 라고 서로 얘기해 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방적으로 심사하고, 이런 게 아니에요. 우주가 알지, 우린 다 몰라요. 인간들끼린 다 몰라요. 서로 정보를 계속 소통하는 중에 이런 상을 찾아가 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경지가 진짜 가능한지 가보자는 거죠. 가서 되면 죽이는 거 아닙니까? 저는 자명한 게 좋지, 서로 막 레벨 올라가고 이런 거 다... 예전에 나라 망할 때 다 그래요. 부풀리고, 분식회계죠? 여러분 수행도 분식하실 거예요? 화려하게 꾸며가지고 멋지게. 이렇게 해선 답이 안 나와요. 분식 수행이 되면 안 돼요. 결과만 부풀리지 마시고, 조작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내놓았을 때 서로 딱 맞을 때 이게 진짜입니다. 그런 공부를 같이 해 나갔으면 좋겠구요. 이런 게 진짜 발심주다 하는 건요, 정혜가 광명해질 때, 그때 진짜 발심했다. 이게 별 게 아니구요, 이제 발심했다 이거예요. 공부에 뜻이 섰다, 이 정도면 공부 이제 할 만하다. 이제 공부 재밌게 할 만하다 정도라는 겁니다. 지금 어떤 분들 입장은 이거예요. “정혜가 원명하니, 12지다.” 지금 여러분, 견성만 하면 부처 된다는 주장 가서 다 보세요. 6바라밀 잘한다는 얘기 한 마디도 없고, 견성 해서 뭐 얻습니까, 하면 정혜가 원명해진다, 이 얘기 밖에 안 해요. 그러면 우리가 보면, 보조스님이 보면 “어, 그래. 너 1주야.” “아니라니까요. 전 12지라니까요. 정혜가 원명해요!” “그래, 원명하면 1주야!” 여기서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 보세요. 견성 하면 부처 된다는 분들이 뭘 자랑하나. 늘 성성한 그 자리 있다는 것밖에 자랑을 못 해요. 그럼 1주입니다. 교학 체계로 1주예요. 막 부풀리고 싶은 거예요. 체험은 그거 하고는, 얻는 건 부처 자격증 얻고 싶어 하시는데 안됩니다, 그건. 1주 보살 자격증 밖에 못 나갑니다. 여기까지 아시면 공부의 큰 흐름 중에 1주 보살까지 설명이 왔습니다. 다음에 또 이어서 나가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