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1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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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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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법공
강의일자 2016. 09. 24. 土.
게시일자 2018. 01. 03.
동영상 길이 39:07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33Tv6dkZSgI



(00:03) 오늘 법공 공부하는 방법이라도 파악해보죠. 다음에 이 교재 그대로 가져오시면 되겠네요. 오늘 법공만 한 번 해볼게요. 법공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법이 다 참나다. 다 참나의 작용이다, 이런 소리입니다. 자, 보세요. 생각, 감정, 오감이라고 만법을 쪼갰을 뿐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이나 오감밖에 없어요. 다른 만법이 발견되시면 보고해 주시구요. 현재 다른 만법이 없고, 이것들이 우리 만법... 우리가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계는 생각이거나 감정이거나 오감이더라는 거죠. 아무튼 이 친구들이, 이 만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면서 우리는 보고 듣고 삽니다. 그 만법이 모두 나라는 본체의, 참나의 작용이더라. 뭐, 지금도 충분히 아실만한 분들은 아실겁니다만. 그리고 만법은 참나의 작용으로 불변하는 독자적 실체가 없다. 자, 만법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죠? 참나의 작용이니까, 참나가 있어야 참나에 기대서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 선사들이요, 선사들은 이런 설명을 자세히 안 해주고 그냥 질러버려요. “천지만물이 나로 인해 있다!”고 해버립니다, 갑자기. 납득 안되시지만, 여러분 그냥 적고 마시잖아요. 제가 절에 가서 제일 황당했던 게 스님이 그렇게 대책 없이 막 지르세요. “만법이 본시 나로 나왔으니...” 하면, 사람들은 저걸 분명히 이해하실 것 같지 않은데. 저는 신도들을 둘러봐요, 눈빛들을. 이분들은 사실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그냥 “스님 앞에 있어서 너무 좋다. 스님 열기 쬐고 좋다”지, 뭐라고 판단하시는 분들을 제가 못 봤어요. 끝나고 물어봅니다, “오늘 말씀 어떠셨어요?” “잘 몰라요.” 쉽게 말하면 무슨 얘기 들었는지도 잘 모르세요. 그냥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은혜받은 것 같고, 기분도... 이게 종교를 운영하는 힘인데. 그것도 저는 좋아요. 아니, 힘든 사람을 그렇게 편안하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해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럼 이게 왜 그럴까, 저도 고민해 봤어요. 일단 스님들이 좀 쉽게 해 주셔야 돼요. 너무 어렵게 설명하세요. 그러니까 쉽게 할려고 하다가도 안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그래도 쉽게 해야하지 않나?” 하는 측면에서 제가... 이 말도 어렵습니다. “자기도 어렵게 얘기해 놓고 무슨 소리야?”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고민을 엄청 하면서 한다는 것, 그래도 더 쉽게 안 되어서 이렇게 드렸다는 것만 이해해 달라는 겁니다.

(02:32) 그래서 만법은... 제가 꼭 풀어드리는 게, 참나의 작용을 만법이라고 해야지, 막연히 만법이라고 하면, 여러분 모르실까봐. 만법은 참나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구요, 왜 독자적 실체가 없냐? 참나의 작용이니까요. 참나에 기대어서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보세요, 이거 간단하게 입증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봤다고 그래요.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했다고 그래요. 어떤 감정을 느꼈대요, 보고 듣고 느꼈대요. 천지만물이, 여러분 마음 안에 어마어마한 만물이 들어와 있어요. 그런데 뭐가 생략되어 있는 게 있어요. 주어가 다 ‘나’예요. 내가 봤고, 내가 느꼈고, 내가 생각했습니다. 이 주어 빼버리면 이건 다 사라져요. 간단하죠? 천지만물은 다 여러분의 작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나’를 빼고 얘기해요. 객관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이나 오감이 있는 것처럼. 다 여러분 마음이면서.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에고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대승적으로 에고라는 정당한 지위를 찾아줘야 돼요. 에고의 작용으로, 쉽게 말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에고의 근원이 ‘나’예요. 간단합니다. 에고는 어디에서 생겨나느냐. 참나라는 게 생각과 만나면 에고가 돼요. 재밌죠? 참나랑 생각이 만나면 에고가 돼요. 참나가 생각을 일으키면 제약된 자아로 변해요, 작용해요. 이 자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어떤 변화하는 작용을 드러냅니다. 순수 참나는 변하지 않지만 그 ‘나’라는 느낌이 되게 제약되어서 작아져요. 왜냐하면 생각하는 ‘나’이어야 하니까. 참나가 배고파지면 어떻게 돼요? 배고픔을 느끼려면? 작은 나로 변해야 돼요. 배고픔을 느끼는 나로 변해야 돼요.

(04:19) 그러니까, 여기는 지금 ‘I AM’인데 뒤에 뭐가 붙느냐에 따라서 이때의 ‘I’가 작아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뒤의 플러스 알파를 날려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I AM’으로만 있으면 신이에요. 기독교에서 신이에요. ‘I AM’은 신이에요. 여호와가 “나는 ‘I AM’이다” 그랬단 말이에요. 신이에요. 뒤에 하나도 안 붙으면 신이에요. 그때의 나라는 느낌은 우주적인 느낌이에요.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니에요. 착각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니에요. 우주적인 느낌이고 존재이지. 초기불교 하는 분들이 그렇게 참나만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방하려고 노력하시는 데 이 ‘I AM’을 부처님이 열반이라고 부른 거예요. 이걸 대승불교에서는 참나라고 부른 거예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라고 부른 거예요. 이거 말고 다른 게 있을까요? 여러분, 그 순수한 존재하는 여러분의 느낌이, 그게 신이라는 걸 여러분이 알 때 인생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걸 못 알아채시면 영원히 못 만나요. 그래서 선불교 선사들도 저거의 달인이거든요. 부처 보여달라고 자꾸 사람들이 와서, 제자들이 부처 내놓으라고, “부처 만나고 싶어요.” 그 ‘I AM’을 느끼고 있어야 되는데 부처를 자꾸 만나겠다고 그러면 ‘I AM’ 뒤에 자꾸 뭐가 붙어요. “나는 부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부처를 아직 못 만난 사람이다”, “나는 견성을 하고 싶다”, “나는 견성을 못했다”... 계속 이원성 속에 들어가 있어요. 뒤를 날려버리면 바로 부처인데. 그러니까 뒤에 붙은 것을 뭐라고 한 거예요, 선사들이? 부처님 아니라, 하느님이라도 이거는 똥막대기라는 거예요, 이거 버려라. 이거 버리면 바로 부처예요. 이게 인간 실존에 기적적인 일입니다. 인간 실존이 하느님의 신성과 하나될 수 있는 비결이 생각, 감정, 오감으로부터 떠나면 돼요. 사실 안 떠나도 돼요. 원래 그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데 떠나면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짓을 자꾸 하다 보면 이제 떠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대로 신성이란 것을 알아요. 이 단계로 인간의 영성은 발전합니다.

(06:27) 만법이 참나의 작용이란 것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만법은 참나의 작용이라, 그러면 ‘나’라는 것에 기대어서 존재하는 생각이니, 감정이니, 오감이니 하는 것이 어떻게 독자적 실체일 수 있습니까? 그 자체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이죠. 다만, 참나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참나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그러면 이것조차도 사실 참나의 작용이니까 참나랑 둘로 보지 않을 필요도 있죠? 참나랑 하나로 볼 때 반야심경처럼 “오온이 본래 공하고 불생불멸이다”라는 말도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참나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시죠? 그 자체로 보면 되게 외로운 고아인데 부모가 참나였어요, 알고 보니. 그렇게 되면 참나의 자녀가 되어버리는 거죠? 그때의 생각, 감정, 오감은 격상됩니다. 참나의 작용이 되어버려요. 아공에서는 현상계와 절대계의 구분을 중시했다면, 법공에서는 그 현상계가 모두 절대계의 작용이라는 것을 긍정함으로써... 자, 이것을 긍정한 사람은, 법공을 깨달은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열반을 꿈꾸지 않아야 돼요. 이대로 참나여야 돼요.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지금이 그대로 열반이어야 돼요. 이거 모르시면 지금 대승보살도의 기본이 안 되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반 찾고 하면 벌써 소승성자 쪽으로, 그쪽 길로 가시는 게 되고, 대승하고는 지금 멀어지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대승성자는 지금 이 순간을 열반으로 봅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중에 이미 열반이라고 봅니다. 열반의 작용으로 본인이 듣느니, 말하느니, 냄새 맡느니, 생각하느니, 따지느니, 울고 웃느니 하는 작용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둘로 보지 마세요. 나와 타자를 둘로 보지 마세요. 여러분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 감정, 오감도 다 타자예요.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다 타자예요. 다른 생각이 들어와서 나를 괴롭히잖아요. 다 타자예요. 나 밖에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타자예요. 그 타자들하고 싸우지 마시고 “둘이 아니다, 너 또한 나의 다른 모습이다”하고 긍정해버리라는 거예요. 암 덩어리도 “나의 작용이다”하고 보자는 거죠. “병이건 독이건 무엇이건,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나의 작용이다.” 다만, 인과의 결을 내가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좋은 결을 만들 수도 있고 나쁜 결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걸 명심하셔야 돼요. 그래야 이제 6바라밀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일단은 좋고 나쁜 모든 결이 다 참나의 작용이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상황도 다 생각, 감정, 오감이고, 내가 좋아하는 상황도 생각, 감정, 오감이면, 생각, 감정, 오감이라는 측면에서는 다 내 작용 아닌가요? 좋은 경계이건, 나쁜 경계이건. 그것을 실감나게 느끼실 수 있나요? 이 공식을 정확히 아셨다면 6바라밀을 적용하고 풀어나가실 때 항상 에고와 참나를 구분하시면서, 아공으로 구분하시면서, 동시에 법공으로, 현상계와 나를 또 둘로 보지도 않으시면서 6바라밀로 문제를 풀어가실 수 있는지.

(09:40) “이 상황이 지긋지긋하게 싫다”하는 마음으로 6바라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요? 빨리 열반에 들어야 되는데, 그때까지만 참겠다는 마음으로 6바라밀 쓰시면 안돼요. 6바라밀 쓰는 기본자세가 법공의 자세여야 돼요. 현상계와 내가 둘이 아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 그대로 참나의 작용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 감정, 오감에 참나의 뜻을 더 담으면 훨씬 고귀한 결이 만들어지고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우주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 우주에 사는 내 작은 일도 다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 작업을 해야 돼요. 그래서 법공이 전제가 안되면 보살도를 할 수가 없어요. 법공을 모르는 보살은 어떨까요? 아공만 아는 보살은요, 남을 도와줍니다. 6바라밀 해야 한다니까 도와주면서 밤마다 기도할 거예요. “제발 빨리 이곳을 떠나게 해주세요. 돌겠습니다, 지금, 중생들 때문에.” 계속 둘로 보고 있으니까, 역경을 떠나야 할 무언가로 보고 있고 계속... 그런데 근본적으로 역경 또한 내 마음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서, 그것을 즐기시라는 게 아니라, 상황을 직시하고 6바라밀로 바꿔버리시라는 거예요. 거기를 떠나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시고. 모든 상황을 6바라밀로 풀려면 상황을 일단 긍정해야 되잖아요. 내 문제로 가져와야 돼요. 법공이 아니면 내 문제로 가져오지를 않아요. 떠나버릴 생각을 하지. 그래서 현상계를 그대로 긍정하는 철학입니다, 법공은. 만법이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이 모든 존재들이 모두 극락이고 천국이고 열반이다.” 하는 그런 느낌으로 접근하시는 거예요. 여기가 천국이다, 지금. 다른 천국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결핍감이 있는 마음이죠? 그 마음으로는 법공을 이해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11:30) 머리로는 이해되시지만 잘 실감 안 나시죠? 자, 이렇게 접근해보세요. 실감이 나려면요, 여러분, 참나 상태여야 실감이 납니다. 실감이 안 나시면 뭐만 하면 돼요? 정명도 선생이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고, 양심을 먼저 챙기라고 하시듯이, 여러분 지금 참나를 챙겨보세요. 그럼 다시 여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금방 들어요. 그런데 에고의 마음으로, 나와 남이 찢어져 있고 현상계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이 가득한 에고의 마음을 가지고 현상계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 되게 힘들어요. 막 수용이 안 돼요. 이런 분들에게 수용하라고 하면 “다 수용하겠는데, 어떤 친구 하나는 수용이 안 돼요.” 지금 그런 마음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수용하고 계신거죠. 이해되시죠? 지금 참나로 돌아가세요. “모른다”하는 마음으로 가시면 수용이... 이게 더 지당한 생각이에요. 법공이 더 지당한 생각이에요, 참나 입장에서. 에고 입장에서는 저게 와닿지 않는 생각이고. 그러면 법공을 인가하시려면 여러분, 무조건 먼저 깨어나셔야 돼요. 몰입 4단계는 들어가셔야 됩니다. 여러분, 제가 면접할 때도, 멘토들한테도 그렇게 면접을 하고 상담을 하라고 그랬어요. “법공을 아시냐?” 할 때 일단 깨어있는 상태에서 아시냐고 물어보라고 그랬어요. 그냥 아시냐고 물어보면 여러분이 막 고민하시거든요. 솔직히 그렇게 안 사는데. 그렇지 않으세요? 솔직히 법공대로 안 사는데. 그런데 깨어계시면 여러분 법공대로 살 수 있어요. 자연스럽게. 천지만물을 나의 작용으로 여기게 되어있어요, 깨어계시면, 참나의 힘이 강해지면. 그런데 에고의 힘이 강하면 그 느낌이 사라져요. 느낌은 사라졌는데 개념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니까 이게 괴리가 일어나요. 그래서 말을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못살고 그게 실감 나게 느껴지지도 않는 경지에 빠져버리면 좌절이 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인정하세요. 지금 내가 에고 상태라서 인정이 안 되지, 깨어있으면 그게 인정이 된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인정하세요. 그러니까, 깨어있을 때 인가가 되시는지가 포인트죠, 처음에 아셔야 할 게. 문제는 깨어있을 때도 인가가 안 된다는 거예요, 고민을 안 하면. 일단 깨어있을 때 고민해서 인가하는 것을 연습하셔서 그게 습관이 되면 나중에 안 깨어있을 때도 쉽게 그걸 수긍을 하는 데 깨어있을 때 작업을 안 하면, 그걸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오히려 멀어집니다. 거부감만 생겨요. 다 이 조건이요, 깨어있을 때에요. 몰입 4단계. 그래서 보세요. 다 “몰입 4단계의 상태에서” 라고 전제하고 있죠? 이 탐구에서. 이해되시죠?

(13:59) 만법은 불생불멸이니, 좀 더 나가볼게요. 만법은 불생불멸이니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만법이 본래 공하다. 만법은 불생불멸이니, 어떤 의미에서 불생불멸이죠? 어떤 분이 오타 아니냐고 물어보신적 있는데. 아공 때는 무상, 고, 무아라고 하다가 갑자기 법공 때는 불생불멸이라고 하니까 꼭 오타 같잖아요. 어떤 측면에서요? 참나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참나가 불생불멸이니까 만법 또한 불생불멸의 측면이 있죠? 그러니까 만법을 없애겠다는 발상은 잘못되어 있다. 즉, “열반에 들겠다, 만법을 다 버리고.” 잘못됐다는 거예요.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대승의 입장에서는 소승식 관점은 잘못됐다는 거예요. 잘못됐다. 부분적 진리에 집착하다가 전체적 흐름을 놓친 진리라고 보는 거예요.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자명한 부분들도 있겠지만 만법에 대한 정의나, 만법을 떠날 수 있다거나, 열반에 들자거나 이런 내용들은 그 부분 만큼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부분적 진리로 결론이 너무 성급하게, 성급한 결론이 나왔다는 겁니다. 따라서 만법은 불생불멸이니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15:14) ‘지금, 여기, 나’로부터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이 생겨난다. 마지막 것은 좀 어려우시죠? 설명드릴게요. 별 게 아니라 순수한 참나 상태에서, 참나 상태를 굳이 말로 하자면 ‘I AM’ 상태인데, ‘지금’,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지금’이요, 오직 ‘지금’, 오직 ‘여기’, 어떤 정신적인 지점이죠? ‘여기’. 거기엔 ‘나’밖에 없어요. 남이 없어요, ‘나’. 여기서 한 생각이 딱 일어나면 ‘지금’이 뭐가 돼요? 과거, 현재, 미래가 됩니다. 한 생각이 딱 일어나면 시간의 흐름이 생겨요. 인식되어요, 여러분 마음에.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요. ‘여기’밖에 없었는데 한 생각이 딱 일어나면 앞, 뒤, 전, 후, 좌, 우가 나와요. 공간이 나와요, 여러분 마음에. ‘나’밖에 없었는데, 나와 남이 등장해요, 여러분. 그러면 이원성 안에 들어온 겁니다. 여러분 의식 밖에는 없어요. 물질은 이원성을 초월 못 합니다. 정신만 이원성을 초월해요. 정신을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동서남북 속에서 헤매고 다니는, 나와 남의 관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여러분의 정신을 ‘지금, 여기, 나’에만 몰입하게 하면 그대로 이원성을 초월해버려요. 간단한 방식이 ‘몰라’예요. 왜냐하면 ‘몰라’는 어떤 판단도 안 하고 있죠? 판단중지에 들어가면 여러분 초월해버려요. 이원성이라는 것은 이거냐 이거냐를 고민해야 이원성의 세계인데 판단중지에 들어가면 그대로 초월입니다. 지금 여러분 눈 뜨고도 초월할 수 있어요. 무슨 얘기냐면 여러분 눈 뜨고 보면서 이거, 저거 구분하고 계시죠? 그럼 이원성의 세계입니다. 눈 뜨고 보는데 통으로 ‘몰라’ 해버리세요. “여기까지가 나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 몰라. 전체가 나야.”하는 느낌으로 통으로 ‘몰라’ 해버리시면, 분별만 안 하고 계시면 전체가 분별이 안 돼요, 이 전체 세계가. 이해되세요? 눈 뜨고 그대로 ‘몰라’ 하셔도 돼요. 여러분이 마음으로 분별만 안 하고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고 공간의 다양성을 의식하지 않고 나와 남이 분리되었다고 느끼지만 않으시면서 계시면요, 그대로 여러분 안에 있는 참나가 각성되어 버려요. 드러납니다. 이것에서 자유자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왜 해야하느냐? 열반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시각각 깨어서 6바라밀하려니까 이게 필요한거예요. 왜냐? 법공을 자각하지 않으면 내가 현상계에서 올바로 대처할 수가 없잖아요. 현상계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나랑 다른 남이라고 생각하면서 6바라밀을 어떻게 합니까? “나랑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하셔야죠. 그러니까 유교 선비도 뭐라고 그랬어요, 아까? 천지가 나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안에서 양심을 부리자는 것 아니에요? 다 연결되어 있는 얘기입니다, 법공과 구공은, 양심 얘기는요.

(17:55) 자, 그럼 이런 진리들을 탐구하는 법을 말씀드려볼게요. 구체적으로 체험하며 관찰하기. 먼저 머리를 가지고 분석하기 전에, 개념으로 분석하기 전에 한 번 순수하게 경험해보시라는 거예요. 경험하면서 관찰해보세요. 단 참나를 관찰하시려면, 체험하시려면 몰입 4단계는 필수겠죠? 몰입 4단계 상태에서 생각, 감정, 오감과 참나가 하나로 통하는 느낌을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 체험하며 관찰하라. 이게 불교의 4단계 위빠사나에서는 주변심사, 주편심사라고,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냉정히 관찰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개념화해보는 거죠. 법칙을 찾는 것은 아니고. “음, 참나는 이러하네. 생각, 감정, 오감과 참나는 이런 식으로 함께 작용하네.” 이런 것을 느껴보시라는 거예요. 느끼면서 이런 것을 말로 표현해보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솔직한, 진솔한 팩트만 한번 말로 해보는 거예요. 팩트만 추리는 거예요, 지금은. 팩트를 객관적으로 체험하지 않으시면, 여러분, 올바른 분석이 안 되잖아요. 경험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관찰해보기. 두 번째, 보편법칙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기. 체험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명하게 우리가 느껴본다는 겁니다. 완벽한 자명은 아니지만 자명한 요소가 생기겠죠? 체험을 하게 되면요, 체험과 개념이 만나면서, 개념은 이미 있으니까, 체험과 개념이 만나면서 여러분 안에서 자명함이 커져요. 그것을 지금 체험의 단계, 제가 이렇게 구분했죠? 먼저, 개념의 단계, 개념적 이해. 그다음에 체험적 이해. 그다음에요? 자명한 이해. 자명하다는 것은 체험과 개념이 일치. 체험(적 이해)은 아직 체험보다는 개념이 앞선다는 의미이구요. 이제 이 두 개가 일치하면 자명해집니다. 이해되시죠? 아무튼 개념이 먼저 앞서요. 아공, 법공에 대해 들은 것이 앞섭니다. 근데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요 들은 것이 있는 그대로 소화되게, “너무 지당한 얘기고, 당연한 얘기네. 너무 당연해서 할 말이 없네.”까지 가시면 자명해진 거예요. 그래서 매사에 그것을, 그 공식을 잊어버리고 살 수 없는. 늘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 공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요. 제가 늘 말씀드리죠? 중력의 법칙을 제가 늘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연단 끝)에 오면 돌아갑니다, 본능적으로. 떨어지니까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이 법공을, 자연스럽게 이런 정도로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자명한 거예요. 처음엔 바로 그런 자명한 단계보다는 자명을 키워가는 단계이죠. 이때(체험적 이해 단계)도 체험과 개념이 이미 만난 부분들은 있기 때문에 자명함은 있어요. 자명함이 부분적인 자명함이라 그렇지. 이건(자명한 이해) 전체적인 자명함, (체험적 이해는) 부분적인 자명함. 부분적인 자명함은 있죠. 천지만물이 나랑 둘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자명한 체험들이 있지 않으세요? 그것을 계속 키워가시라. 그게 깨어있을 때는 자명하단 말이에요. 깨어서 자명하다고 자꾸 인가를 내리시다 보면 언제 자명해질까요? 1급의 단계에 가면요, 깨어있음이 늘 흐르게 된다는 얘기는 다른 말로 하면요? 자명함도 늘 흐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는 깨어있음이 자꾸 끊기죠? 그러면 자명함도 그때는 자명했는데 금방 다시 또 미궁에 빠져요. 감이 확 떨어집니다. 아까까지 분명히 선명했는데 또 확 떨어져요. 학당에 있을 때는 양심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는데 집에 오니까 약간 보류. 내일 생각해 보는 걸로. 이렇게 마음이 확확 떨어져요. 그게 별 게 아니구요, 자명도가 떨어져서 그래요. 참나를 직접 만나고 있을 때는 참나의 열기 때문에, 여러분이 참나에게 끌려가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나로부터 조금만 멀어지면 에고가 이제 머리를 굴려요. “굳이 그렇게 할 것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걸 조절하면서 능숙해져요, 나중에. 처음에는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깨어있을 때 인가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위빠사나는 사마타가 안 들어가면 위빠사나는 불가능해요. 사마타에 들어갔을 때만 위빠사나하는 겁니다. 몰입 4단계 이상에 들어갔을 때만 분석해서 자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1급은 늘 자명해야 되잖아요, 개념이? 그래서 1급은 늘 깨어있는 토대가 필요한 거예요. 늘 깨어있지 못하면 늘 인가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법공의 진리들이 삶의 토대가 되려면 1급까지는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깨어있을 때만 자명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 깨어있음의 시간을 늘려가면 되는 거니까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실전적으로 팁을 못 드리면 못 하세요. 말로 아무리 제가 쉽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 말이 또 오해를 낳아요, 또 오해를 낳고.

(22:49) 두 번째, 보편법칙을 이해하려면요, 몰입과 몰입사고로, 즉, 몰입 4단계에서 그 상태에서 자꾸 지혜로운 생각을 하면서 각 개별상황에서 느낀 에고의 체험을 분석하여. 즉, 에고를 잘 분석해 봐서요, 이런 결론, 이런 것을 알아보는 거예요. 각각의 보편법칙들을 한번 찾아봅니다. 즉,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생각, 감정, 오감으로 이루어진다.” 이 말을 자명하게 인가하실 수 있는지 한번 연구해보세요. “생각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럴까요? 연구를 해보는 겁니다. “감정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게 자명한지? “오감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거를 하나하나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시고 나면요 딱딱 떨어질 거예요. 명상을 하면 계속 이런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고민하시다 보면 자명해서 더이상 고민할 수 없을 때가 와요. 그때 이제 자명해지시는 거니까. “시간성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공간성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주객의 이원성은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보편법칙의 기초가 되는 법칙들이죠? 그 부분들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정사택, 그때 말씀드린 정사택과 최극사택. 참나가 어떻다라는 것도 결론 내려야, 인가를 해야 하고, 에고가 어떻다하는 것도 인가를 해야 되니까. 에고의 인가는 정사택 그랬죠? 참나의 인가는 최극사택 그랬죠? 그래서 두 가지 사택을 통해셔 여러분이 생각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24:37) 이게 사실은 각각의 보편법칙이라고 했지만, 법공의 기초가 되는 법칙들이죠? 그러니까 법공의 기초가 되는 것들을 하나씩 각개격파 해 나가는 겁니다. 오늘 하나, 내일 하나, 이렇게 알아가다 보면요, 이게 느린 게 아닙니다. 진리가 많지 않잖아요. 법공, 이거 몇 개 안 되죠? 이걸 한 달 잡고, 계속 명상을 통해 사유해서 확실하게 의심이 안 될 정도까지 여러분 정신을 계속 밀고 가서 결론을 내리시면요, 그럼 평생 써먹는 겁니다. 이 공식들은 여러분 것이 되는 거예요. 이거 남는 장사 아닙니까, 이게? 보편법칙이 막 삼백 개 된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아니면 이게 매일 늘어난다면 모르겠는데, 지금 이게 다예요. 아공 몇 개, 법공 몇 개, 구공 몇 개. 구공 그거 여섯 개 아닙니까? 여섯 개, 6바라밀이니까. 그것만 계속 사유하시면요 다 철학자 됩니다. 지금 말만 들어도, 이 정도 알면 세계적인 철학자일걸요? “시간성은 참나로부터 나왔다.” 이런 주장하면, 여러분, 세계적인 철학자가 됩니다.

(25:42) 얘기하다가 저도 의문이... 왜 저는 못 됐을까, 왜 세계적인 철학자가 못 됐을까 의문이 들기는 하는데요(웃음). 자, 세 번째, 근본원리로 가겠습니다. 근본원리는 이제 법의 본체죠, 다르마. 법의 본체는 여기 존재하는, 참나 안에 존재하는 정보를 법의 본체, 근본원리라고 그러고, 현상계를 통해 표현되는 다르마는 보편법칙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천법칙, 보편법칙. 현상계에서 구현되는. 알아내는 방식이요, 보편법칙을 알아내려면요, 보세요. 현상계 안에서 구현된 6바라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보편법칙을 알고 싶으시면 현상계에 생각, 감정, 오감들이 어떤 결을 가지고 작용을 일으키는지 관찰해보면 돼요. 그럼 거기서, 보편법칙은 사실 인과법칙이거든요. 어떤 인과를 가지고 현상계가 운영되는지를 현상계에서 알아내시는 거예요, 보편법칙은. 근본원리는, 그래서 여기는(보편법칙은), 여러분, 추론을 통해서 알아내면 되는데요, 이 근본원리는 직관을 해야 됩니다. 참나 상태에 들어가서, 이 느낌들이, 참나 안에도 실제로 이런 느낌들이 있는지 찾아내는 거죠. 뭔가 어긋난 느낌들이 있으면 찜찜한 느낌들이 올라올 테니까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이렇게 하셔야 돼요. 바로 직관에, 바로 참나 상태에 들어가시면 아무것도 몰라요, 여러분. 그러니까 참나가 직관해주는 것들은 있어요, 참나에 그냥 들어가셔도. 그런데 지금 더 계발을 해야되는 입장이니까, 아공 법공까지 다 인가하려면, 먼저 생각을 정리해서 현상계에서 이렇게 에고와 참나를 계속 분석해서 보편법칙을 알아낸 다음에 그 각각의 보편법칙들에 대해서 내가...

(27:19) 보세요, 이렇게 작업을 하는 거예요. 격물치지의 비법입니다. 이데아 알아내는 비법이에요. 객관적 사실에서, 개별 사물에서 그것을 잘 분석해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자명한 보편법칙을 추출해내요. 그럴 때 이 보편법칙이 “맞다!”라는 느낌을 이 참나가 줍니다. 그때 “맞다!”라는 느낌이 사실은 이데아예요, “맞다!”라는. 그래서 이런 보편법칙을 잘 정리한 다음에 보편법칙을 내려놓고 자명한 느낌 상태로만 있어 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찜찜한 게 있으면 또 올라와요. 그래서 그 자명한 느낌이 근본원리라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편법칙이 맞다는 걸 누가 인정해주겠어요? 보편법칙을 누가 지금 현상계에서 구현하고 있죠? 근본원리가요. 결국 여러분 안에 참나가 있듯이 여러분 안에 있는 근본원리만이 보편법칙이 맞는지 틀린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 안에서 “맞다!”라는 느낌이 사실 제일 중한 거예요. 자명한 느낌이, 여러분, 인간한테 자명한 느낌이 없다면 인간은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어요. “맞다!”라는 느낌이 있으니까 우리는 학문을 하는 거구요, “아름답다!”라는 느낌이 있으니까 예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름답다!”는 자명한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예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되시죠? 우리 안에 보편적인 감각이 있어요. 맞는 말을 했을 때 “맞다!”라고 안에서 인가해주는 게 누가 인가해주느냐? 그게 양심이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알아내는 게 철학이 하는 일입니다. 이게 과학자들에게 할 얘기는 아닌데 철학에서는 수많은 영적 실험으로 그것을 알아낸 거예요. 우리 안에 동질의 것이 동질의 것을 파악하더라. 근본원리를 이해하려면, 개별 사물의 근본원리를 이해하려면, 결국 내 안에 있는 근본원리가 인가해 줘야 되더라. 그런데 이런 얘기를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하더라는 거예요, 실제로. <아인슈타인에게 묻다>라는 책에 보면요, 우주를 경영하는 창조원리가 인간한테서 작용하는 게 양심이다. 그래서 양심이 주는 직관은 우주가 내리는 명령이다. 이렇게 설명해요, 아인슈타인이. 이 양반 영성이 대단하죠? 뭐, 바람둥이 뭐다 하는 것은 그분 에고의 덜 닦인 부분이고, 그분의 영적 수준이 그 정도 알 정도까지 계발되어 있더라구요. 신기하죠? 과학자 중에 누가 그런 얘기 못해요. 대단하죠? 그래서 이런 양반들은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예요. 우주의 원리가... 결국 아인슈타인은 뭘 직관한 거예요? 내 안의 양심의 명령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직관한 거예요. 이거 우주가 명령하고 있지, 내 개인적인 마음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양심은. 그래서 그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우주적인 종교라고 주장했어요. 우리랑 비슷한 소리를 하셨더라구요. 그러면 우주적 인간이 된다. 우주적 종교를 따르는 우주적 인간이... 앞으로 우주적 종교가 이 지구에 나오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막 해요. 그 양반 영성이 거기까진 되는 거죠. 제가 볼 땐 종교인들보다 영성이 더 깊어보여요. 과학자가 훨씬 깊어보여요. 그러니까 과학자다 종교인이다 따지면 안돼요, 누가 더 영성 깊은가를 봐야지.

(30:30) 자, 근본원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신다는 것은 직관의 문제이구요, 몰입과 몰입사고를 바탕으로 각각의 보편법칙들, 아까 하나씩 살폈던 각개격파했던 보편법칙들을요, 다 자명한지를 점검한 다음에, 부품들이 자명하면 이제 결합을 해봅니다. 결합을 해서 우리가 앞서 얘기했던 법공의 근본적인 보편법칙 있죠? 법공의 보편법칙이 과연 정립이 되는지 한번 해보세요. 그래서 여기에선 아공도 재정립되는데요, 뭐라고 재정립되냐면. 만법 안에 에고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에고와 만법은 참나의 작용으로 불변하는 독자적 실체가 없다. 에고도 여기 만법에다 넣어서도 이해해 보세요. 뭐가 다르냐면요, 아공에서 에고의 작용이 독자적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상, 고, 무아니까 였거든요. 법공에 오면 의미가 달라져요. 에고 또한 참나의 작용이니까 독자적 실체가 없다는 법공 사상의 관점에서 법공 사상 관점에서 아공도 다시 짚어보시라는 거예요. 대승에서 볼 때 아공, 법공은요 “에고나 만물은 다 참나의 작용이다.”하고 끝납니다. 별 게 아닙니다. 에고도 참나의 작용, 만법도 참나의 작용. 법공 안에서 아공도 다 돌아가 버립니다. 이해되시죠? 거기까지 고민해보라고 제가 써놓은 거구요. 이렇게 고민하시다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법공의 보편법칙... 앞에서 살펴본 것은 법공의 기초가 되는 보편법칙들이었으면, 이제 딱 결론 내리는 거죠. “만법은 이래서 참나의 작용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자명하게 이 개념을 정립할 수 있으면 정사택, 최극사택이 이루어집니다. 에고에 대해서도 입장을 정리하셨고, 참나에 대해서도 입장을 정리하셨잖아요. 참나가 이 모든 것의 토대라는 것도 참나의 입장에서는 정리가 된 것이고, 에고는 참나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도 에고의 실상을 정립하신 거죠. 양방면을 다 정립하셨기 때문에 정사택, 최극사택을 제가 다 써놓았구요.

(32:30) 여기까진 분별지였어요. 분별로 알아낸 것이고. 이제 무분별지로 들어갑니다. 이를 자명하게 인가하는 내면의 느낌에 몰입하여 언어 이전의 법공의 근본원리를 침묵 속에서 직관하시라. 이것을 유교에서는 무기식지라고 합니다. 침묵 속에서 아는 거예요. 침묵, 말하지 않고 생각... 침묵이라는 것은, 말을 안 한다는 것, 생각을 안 한다는 겁니다. 속 말이잖아요, 생각이란 건. 속으로도 말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면서 양심과 하나가 되어서 양심의 사정을 내가 그대로 느껴보는 거죠. 그러면서 이 법공의 원리가 양심의 근본 사정과 안 맞으면 안 맞다는 느낌이 드시겠죠? 편하게 말씀드리면, 순수하게 양심으로 존재하시면서 뭔가 어긋난 느낌은 없는지 느껴보시는 거예요. 크게 어긋난 느낌이 없으면 이 보편법칙을 내면에서 인가해 준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직관하면서 무분별지를 통해서 법공이라는 것이 자명하다는 걸 스스로 한번 느껴보시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지만 한 번 해보세요.

(33:33)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무분별지로만 알면 안되요. 말로 할 수 있어야 진짜 안 거니까. 이 개념들, 내가 알아낸 보편법칙들을 참나한테 던져 넣었다가 다시 꺼내서 다시 분석해보세요. 그래도 자명한가? 보통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있으면 나옵니다. 찜찜한 게 있으면 바로 발각돼요. 왜냐? 에고는 찜찜한 것을 편견으로 우기고 있는데요, 내려놓고 참나랑 하나가 됐다 다시 돌아오면 찜찜한 거 확 드러나요. 그러면 그거 또 털어야 돼요. 저는 이 짓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자명한 것만, 살아남은 놈만 데리고 갑니다. 매일매일. 제가 어제까지 떠들었더라도 오늘 자명하지 않은 친구로 발각되면 바로 버려야죠. 오늘 살아남은 친구들을 데리고 제가 가야죠. 제 삶을 운영하고 여러분한테 법 보시를 해드리고. 그렇게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매일매일 내가 지금 얻은 법들이 자명한가는, 사실 매일매일 검토해야 돼요. 그래서 그 검토하는 방법입니다. 생각으로 먼저 자명한지 정립할 것. 생각을 내려놓고 참나 속에서, 침묵 속에서 자명한지 느껴볼 것. 다시 생각을 일으켜서 그래도 자명한지 또 검토해 볼 것. 이 짓을 계속 반복할 것. 이러고도 안 걸리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웬만하면 걸리겠죠? 여러분 영성이 높아지면 점점 예전에 안 보이던 게 또 보여요. 이런 식입니다. 또 경험치가 늘기 때문에, 체험이 늘기 때문에 미처 발견 안 되었던 게 또 발견돼요. 이 짓을 계속하다가 궁극에 가면 성인이 되는 거예요. 성인이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이 짓을 계속 한 사람들이에요. 태어날 때마다 이 짓을 계속했던 사람들이 성인되는 거예요. 태어날 때마다 귀찮아서 안 하고 안 하고 안 하다 보면 이렇게 멀리멀리 중생이 되는 거고. 귀찮아도 하고 하고 하다 보면 멀리 갑니다.

(35:22) 이를 다시 개념으로 정립하여 찜찜한 부분이 없나 점검하여 법공의 근본원리를 자명하게 직관하기. 이것을 무분멸후득지, 무분별에서 나와서 다시 개념으로 성취한 지혜라는 겁니다. 이때 대승 4법인 중에 진속불이, “참나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다”하는 거나, 진속불이를 제가 어떻게 풀었죠? 일체는, 만법은 참나의 작용이다. 그 다음에 무주열반, “늘 참나와 함께 살아가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열반을 떠날 수 없다는 그런 열반. 고정된 열반이 아니라, 생각, 감정, 오감 속에서 우리는 이미 열반이라는 무주열반의 진리를 이때 깨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공만으로 우리가 무주열반이나 진속불이는 깨쳐요. 그 다음에 구공을 공부해서 깨치는 대승의 4법인 중에 2개는 뭘까요? 자타일여, “나와 남은 둘이 아니더라.” 양심의 인도대로 남을 나처럼 사랑해야 되더라하는 것은 이제 6바라밀이 나온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구공 단계에 가면 대승 4법인 중에 자타불이를 알게 되고, 그다음 요익중생,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게 내 사명이다”하는 걸 알게 돼요. “그게 양심의 명령이다”하는 걸. 양심의 명령이 나오면 구공. 양심까지 안 가고 현상계와 절대계를 하나로 꿰는 설명은 법공, 이렇게 나눠서 보는 겁니다. 알고 보면 사실 다 법공인데, 법공 안에서도 좀 깊이가 달라요. 그래서 구분해서 얘기해 드립니다.

(36:48)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런 철학 방법을 통해서 아공, 법공까지 알아내면 구공도 똑같겠죠? 에고와 참나의 작용을 통해서 에고가 양심적으로 얼마나 구는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본 다음에, 에고가 참나랑 만나면 양심적이 되는지를 하나하나 보편법칙들을 점검한 다음에 마지막에 꿰어서 내 안에서 자명한지 느껴보는. 이게 다예요. 이짓을 계속 하다 보면 우리는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고, 내 삶에 아공, 법공, 구공의 원리를 들이게 됩니다. 이제 그 원칙대로 내 삶의 문제를 풀어가게 돼요. 가끔씩 가끔씩 풀어나가다가, 깨어있을 때만 풀어나가다가 깨어있음이 연장되면서 삶에 점점 더 스며들다가 나중에는 삶에 그냥 생활화가 되는 게 다예요. 성인들은 특별히 뭘 안 해도 그냥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이 성인이에요. 자연스럽게 깨어있고, 자연스럽게 6바라밀하고, 누가 유혹을 해서 흔들리다가도... 치면 요동이 일어요. 중생이니까 다같이, 성인도. 요동이 일어나는 데 정리가 되면서 슥 6바라밀로 정리가 되어서 나가버리고. 이 지경까지 가시면 성인이 됩니다. 돌아올 수가 없어요. 막 나가고 싶어도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오늘 진짜 망가진다!”하고 나가서 레몬소주 마시고, 그런 경지. “오늘 한번 나 진짜 갈 데까지 갈 거야!” 그러면서 또 건전한 데 가서 스트레스 풀고 계시고. 그러니까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 욕심대로 해도 법도를 못 어기는 경지까지 가면 성인이에요. 공자님이 정확히 얘기해준 거예요. 종심소욕불유구. 그게 7지 보살, 8지 보살의 경지입니다. 거기까지만 가도 살만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거기 생각하면 안 돼요. 찰나 찰나 어떻게 보살이 될 수 있는지 그걸 연구하셔야지, 주욱 늘 보살이 될 연구를 하실 필요가 없어요. 지금 맛을 보시는 게 중요하고, 재미 붙이는 게 중요하지, 늘 그렇게 사는 것을 지금부터 염두에 두실 필요는 없다. 이해되시죠? 예,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