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7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 69 | 70 |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 81 | 82 | 83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 91 |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百 |
| 강의일자 | 2018. 03. 03. 土. |
| 게시일자 | 2020. 05. 24. |
| 동영상 길이 | 1:02:02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SDtd_iNjU-c |
0:13 대승보살의 길은 사실은 유불선 기독교 이슬람 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길이에요. 길은 하나예요. 우주에 인간이 존재한다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그러면요 길은 하나예요. 모든 생명체가 다 같은 길을 가고 있어요. 그 길을 말로도 할 수 있는 건 인간인 것뿐이지 동물이건 모든 존재들은 그 길 안에 무생물들도 그 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는 그 길, 이게 이제 예전 어른들이 항상 추구하는 길이죠. 간단하게 공부 얘기 좀 하다가 보살의 길
1:00 또 본격적인 진도 따라서 공부해 나가는 순서 얘기는 좀 있다 하구요. 먼저 좀 큰 그림을 그리시라고 종교를 초월해서 요게 우리의 육근의 마음 에고의 마음, 에고라고 하는 건 육근 전체를 나라고 여기시잖아요. 이걸 나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에고. 에고가 또 뭔지를 두고 막 싸우시더라고요. 난데. 납니다. 나. 여러분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 그럼 이거는 자동으로 그냥 나가 아니죠. 참나가 되죠. 이 자리가 사실은 양심이겠죠. 성령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불성이라고 해도 되고 다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름 붙일 수가 없어요. 시공을 초월한 여러분의 뿌리예요. 지금 시공 안의 여러분은 육근은 시공 안에 들어와서 지금 움직이고 있죠.
2:00 VR 끼고 보듯이 VR 끼면 그 시공간 안에 내 몸뚱이 생기고 제약을 받는 나라는 게 생겨요. 시공이 생기고 내 몸이 생기고 시공 안에서 움직이는 내 몸이 생기는 거죠.
2:13 그 안에서 내 수명도 나와요. 수명도 나오고 그 공간에 시간이라는 게 또 있으니까 시간 속에 존재하다 보니까 수명이 나오고.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4가지 상. ①아상, 나라고 하는 게 생기고 ②중생상이라는 건요 그 안에서 살아요. 그 안에서 제약된 존재라는 거예요. 나라는 게 또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체고 그 생명체는 ③수자상. 수자상은 나이 수자죠. 나이를 먹는 존재라는 거예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수자상. 아상, 중생상, 수자상 그리고 ④인상 그럽니다. 원래 인상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분석하거든요. 나라는 거(아상),
3:00 중생이라는 거(중생상), 나이를 먹는 존재(수자상) 그리고 사람이라는 거(인상). 사람이라는 상에 내가 그 안에 있다고는 하는데 원래 이게 인도말 번역어잖아요. 인도말로는 이 말이 뭔 말이냐 하면 윤회하는 나예요. 윤회하는 나가 있다는, 윤회하는 나를 사람으로 번역한 거예요. 윤회하는 내가 있다. 꼭 다른 동물하고 다른 사람이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4가지 상이 다 같은 말이에요. 현상계 안에 여러분이 마음에 VR을 끼고 현상계를 체험하시는 순간 저 4상이 그대로 생겨요. 나라고 하는 거, 에고(아상). 근데 그 나라는 게 지금 중생 중에 하나죠(중생상). 현상계 안에 살아가는 생명체가 되고요. 생명체라는 건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수자상). 나이를 먹어요.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어요. 그리고 윤회하는 나예요(인상). 제약된 나예요. 다 같은 말이에요. 어느 한 속성을 강조했을 뿐이지 네 가지는 다 같은 말입니다. 그냥 한 마디로 하면
4:00 아상이에요 아상. 요거 하나면 끝인데 이렇게 저렇게 풀어준 거예요. 나의 다른 모습들. 나는 간단하게 우리도요 나는 육근을 가지고 있죠. 육근을 가진 중생이죠. 나이를 먹죠. 이렇게 육근을 갖고 육도에서 윤회하죠. 이런 느낌으로 4가지 상에 꼭 4가지여야 된다는 게 아니고 나누면 더 설명을 더 많이 할 수 있어요. 다만 에고라는 거죠. 시공 속에 제약된 나, 여기는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 나, 나의 뿌리예요. 나의 뿌리니까 이게 있어서 지금 내가 굴러가요. 그래서 내가 우주의 주인인 줄 알고 살다가 에고가 외롭죠. 내가 우주의 주인인데 어떻게 태어난 지도 모르고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사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몰라요. 세상 돌아가는 공식도 몰라요.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공식도 몰라요. 내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는 지도 몰라요. 이런 거죠. 세상 살아가는 공식이라는 건요? 안으로 들어가면 내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도 모르고 밖으로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5:00 알 수가 없고 이 현상계 공식도 모르고 그냥 내던져져서, 영화 “큐브” 보셨으면 눈 뜨니까 큐브 안에 있죠. 죽을 고생하면서 조금씩 공식을 알아갑니다. 우리가 산다는 게 그런 거랑 똑같아요. 그냥 눈 뜨니까 던져져 있죠. 거기서 좀 인간 구실하려면 한 30년 또 굴러야 돼요. 이제 겨우 자립하는 사람이 돼요. 그래서 또 전후좌우 둘러봐도 사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잘 알기 힘듭니다. 왜? 나보다 앞선 사람들이 답을 모두 못 주거든요. 보면 그 사람들도 헤매고 있거든요. 요즘 미투운동 하니까 막 무너지죠. 우리가 좀 멘토라고 생각했던 사람, 그래도 저 사람은 좀 잘 살고 있겠지 하는 사람들이 사실 알고 보면 나보다도 형편없게 살고 있었다. 이런 게 되게 충격적입니다. 사실 이런 게 더 무서워요.
6:00 선한 사람처럼 보이면 더 안 돼요. 왜냐하면 그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을 때 다른 사람들의 양심마저 다 붕괴시키거든요. 아싸리 그냥 저놈은 그냥 아예 논다이야 해야 나중에 사람들한테 큰 타격을 안 주는데 내가 포장을 해버리면,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파들을 제일 지적하는 게 위선자들은 까발려지면 그건 다함께 천국 못 가게 되거든요. 오히려 악인은요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은 지옥 갈지라도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보고 이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양심을 가르쳐줘요. 근데 이 위선자는요 교묘하게 함께 다 같이 가야 돼요. 그 사람의 맹인의 길 안내가 돼요. 거길 따라갔다가 다 같이 죽는 거예요. 그게 겉으로 보면 꼭 선처럼 보이거든요. 우리 이 마음의 구조를 잘 보시면 마음공부의 길도 보이고 잘못되는 길도 보이고 왜 그렇게 됐는지도 다 보입니다. 이 근원적인 참나
7:00 양심 불성 성령에 이 에고가 감화돼서 에고가 공명하는 영역이 생기면 이것도 우리가 역시 양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 반대되는 여전히 차가운 영역은요? 욕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는 양심 51%면 되는 겁니다. 다 뜨거울 필요는 없어요. 왜? 여기는 이기적일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살라면 이기심도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양심이 다시 더 강해야죠. 보편적인 양심도 누구나 있습니다. 있기는 다 있는데 얼마나 미약하냐 강하냐 이 차이죠. 양심을 불심만 키워내면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려는 건요. 일단 1차로 참나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내고, 2차로 이 참나의 관점에서, 자 이게 제가 주장하는 불교의 아공의 원리입니다. 에고를 넘어선 근원의 나를 찾는 거예요. 아공이라는 거. 여기서 아는 에고거든요. 에고가 공하다 하는 건 에고가 실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더 근원적 실체를 찾자는 거예요. 그리고
8:00 참나의 관점에서 현상계를 이해하면 참나의 작용이 육근이었다는 걸 알면 법공이라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만법 또한 에고를 포함한 거예요. 에고 포함, 이 모든 세계가 사실은 다 공하다. 여기(법공)서 “공이라는 것은 참나의 작용이더라.” 여기(아공)서의 “공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에고가 나의 진정한 실체가 아니더라” 차원의 의미라면요 법공은 좀 맛이 달라요. 법공은 “에고건 세계건 다 참나의 작용이더라.” 이제 식견이 높아진 겁니다. 여기까지 가면 대단한데 더 가면요 이거예요. 이제 왜 여기까지 왔나요? 양심 51% 할라고 온 거예요. 여러분 이게 공부예요. 양심 51% 만들려고 처음에 아공, “너가 전부가 아니야. 너의 근원인 참나가 있어.” 두 번째 “참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니 어떻더냐?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더라.” 거기까지만 알고 살면요 선불교의 선승 경지가 됩니다.
9:00 확철대오. “도를 얻은 뒤 어떻게 사십니까?” 물어보면요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 그래요.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개돼지도 그걸 할 줄 알아요. 개돼지도 할 줄 아는 거를 참나를 알고 보니 그것이 참나의 작용이더라. 우리가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참나의 작용이더라 하는 거를 알았다는 거예요. 그것도 대단하신데 이걸로는 도가 아닙니다. 아직 온전한 도가 아닙니다. 왜? 온전한 도는 양심 51%가 나와야 돼요. 즉 “도를 얻어서 뭐합니까?” “내 일상생활을 도의 마음으로 하고 있다.” 요 정도 차원은 법공 차원이구요. 이제 제가 주장하는, 궁극적으로 여기 이제 구공의 차원, 갖출 구자 공 공자. 이 공이 그냥 공이 아니라 육바라밀, 양심을 늘 갖추고 있는 공이더라는 겁니다. 이 공이 그냥 공이 아니라 이 공 안에 인의예지로 나누면 이렇게(⊕)되고요. 육바라밀
10:00 이렇게(⊛) 할 수도 있죠. 인의예지신 그렇죠. 인‧의‧예‧지‧신. 이거 조선 선비들 퇴계나 율곡 그림 보면 우리 양심에다가 십자가 모양으로 인의예지신 써 놨습니다. 양심에다가 인의예지신 딱 새겨놔요. 우리 마음 안에 십자가 형상이 있는 거예요. 조선 선비들, 모든 그 선비들 마음 안에는 내 안에 십자가의 진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꼭 그 십자가라고 말 안 해서 그렇지 십자가 모양으로 다 새겨놨어요. 그리고 불교식으로 하면 육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렇게(⊕) 표현 하나 이렇게(⊛) 표현하나 다 똑 같습니다. 우리 안에 그냥 공이 아니라 이게(⊕⊛) 공이에요. 그냥 공이 아니라 공 안에 유교 같으면 천리가 들어 있더라. 천리가 천명입니다. 하늘의 명령. 하늘이 인간더러
11:00 어떻게 살아라 하는 명령이 들어 있더라. 천리가 들어 있더라. 그게 우리 본성이죠.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하느님의 명령이 우리 안에 완전히 새겨져 있더라. 하느님이 생긴 모습이 그대로 인간의 생긴 모습이 돼서 우리 안에 새겨져 있어요. 불교 같으면요 진여법성이라 그래요. 진여의 진리의 본성이 우리 안에 육바라밀로 새겨져 있어요. 대승기신론에서 진여법성 그래요. 진여법성이 생긴 모습이 육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으로 육바라밀해야 돼요. 그 본성을 따라야만 되니까. 그래서 자 이걸 유교에서는 양심 그럽니다. 불교에서는요 보리심 그래요. 똑같아요. 이 진리대로만 살면 나와 남 모두를 살릴 수밖에 없어요. 사랑하고(인) 겸손하고(예) 정의롭고(의) 지혜롭고(지) 성실하다면(신) 우리는 모두를 살릴 수밖에 없고, 불교식으로 베풀고(보시) 절제하고(지계) 인욕하고 성실하고(정진) 깨어있고(선정) 지혜롭다면(반야) 우리는 나와 남 모두를 살릴 수밖에 없어요.
12:00 양심과 보리심. 그럼 유교는 죽으나 사나 양심 하나 키우는 종교입니다. 양심계발교예요 불교는요? 소승불교 말고요. 좀 구분해야 되니까 초기불교나 소승불교 빼고 대승불교는 죽으나 사나 보리심 계발하는 종교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 강의하는 것 들어보세요. 죽으나 사나 보리심 계발 밖에 얘기 안 해요. 보리심 계발. 공부의 시작도 보리심 끝도 보리심. 그래서 대승과 소승 종자의 구분은요 소승 아라한보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 보리심, 나와 남 모두 잘 되게 해야겠다는 마음 하나 먹은 사람이 아라한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봅니다. 대승의 마음을 품었다는, 즉 양심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위대하게 봅니다. 왜? 그게 보리심이니까. 그게 양심이거든요. 자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그럼 우리 안에 있는 양심, 보리심. 왜? 대승불교보다 더 정확히 설명 드리자면 불성보다 이걸 보리심이라고도 이해하실 수 있어야 돼요.
13:00 불성이라고만 아시면 안 되고 또 다른 말로 공성 그럴 수도 있죠. 텅 빈 공성이라고만 이해하실 때 이 말도 맞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아셔야 돼요. 그 공 안에는 양심이 꽉 차 있다는 것까지 아셔야 되는데 법공까지만 아는 분들이 일체가 참나의 작용인 줄만 알고 마음 자유자재로 사는 거, 늘 깨어서 현상계를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경지거든요. 현상계에 무슨 일이 생겨도 참나의 작용인 줄 알고 살면요 여유롭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소승적입니다. 왜? 현상계를 경영할 줄은 몰라요. 현상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한 소식은 얻었는데 현상계를 경영하고 진짜로 카르마를 경영할 수 있으려면 육바라밀 해줘야 선한 카르마로 굴러가거든요. 즉 현상계가 굴러가는 공식을 어느 정도 알긴 아는데 선악의 공식을 모르니까 현상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경영을 할 순 없는 단계입니다. 경영이 아니라 졸리면 자고
14:00 배고프면 밥 먹는다는 겁니다. 보살은 육바라밀로 우주를, 우주의 운명을 개척하는 경지입니다. 운명을 바꿔버려요. 이건 다른 경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 부분은 구공이라고 해서 따로 설명 드리는 겁니다. 지금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강의가 어디로 가고 있냐? 아공 법공 공부하는 법 다 말씀드렸죠. 어디로 가고 있어요? 이제 구공을 향해 가고 있어요. 아공 법공 공부가 일차적으로 완성이 되면 어느 경지가 되죠? 1주 보살이 됩니다. 저희가 말하는 1급의 경지. 그런데 지금 1단의 경지, 1지 보살 경지 가야 구공을 확실히 알거든요. 그러면 1주는 구공을 아예 모르느냐? 아니에요. 일반인도 어느 정도는 알아요. 양심 중요한진 알잖아요. 양심 옳다는 것 직감적으로 알고 계시죠. 아주 모르진 않긴 때문에 1주 보살도요 그럼 아주 모르는 일반인보다 꽤 계발했잖아요. 아공 법공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구공 공부의 기초도
15:00 시킵니다. 홍익학당에서 강조하는 그게 양심성찰이에요. 양심성찰. 양심 노트 계속 쓰시잖아요. 그러다 보면 이 공부가 합쳐지면요 1주 보살에 구공의 기초는 닦여요. 그래서 구공에 대한 체험적 이해는 가능합니다. 즉 구공이 빈 소리가 아니라, 개념이 아니라 내 안에 분명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아요. 즉 내가 내 참나를 아공 법공 차원에서 깨치고 양심분석을 꾸준히 해온 결과, “내 안에 양심이 있다” 하는 이 직감은 있어요. 그런데 아직 육바라밀을 온전히 실천을 못 해봐서 감으로만 있는 거죠. 그걸 체험적 이해라고 하는 겁니다. 체험은 있어요. 양심에 대한 체험은 있는데 아직 그게 체험이 아직 약한 거죠.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체험적 이해 다음이 자명한 이해인데 자명한 이해는 뭐였죠? 체험 이코르 개념(체험=개념)이다.
16:00 즉 내 안에 있는, 우리 공 안에 갖춰진 육바라밀을 온전히 체험하고 온전히 이해하는 경지. 그러면 1지 보살입니다. 그래도 1지도 여전히 내 안에 육바라밀이 있다는 거 온전히 이해했지 육바라밀을 잘하지는 못 해요. 그래서 1지부터 육바라밀의 실력 여하에 따라서 1지부터 10지까지 화엄경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겁니다. 지금 제 강의, 이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강의는 화엄경 전 단계를 다루는 거죠. 화엄경이 1지부터 시작해버리니까 1지까지 가는 길을 말해주는 내용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역대 스님들이나 유교 불교경전이 주인데요 거기서 추려서 아공 법공 얘기는 불교 스님들이 많이 얘기를 잘해주셨고 불교경전들이나 스님 말씀이. 특히 대승기신론이나 보조스님 말씀을 많이 소개해 드렸죠. 구공에 가면요 유교가 설명을 잘합니다.
17:01 우리 조선 문명이요 다른 거 잘못한 것 많지만 “우리 양심 안에 인의예지의 원리 갖춰져 있어!”만 500년간 연구한 문명이에요. 정몽주 선생 아시죠? 정몽주 선생이 고려 말에 정도전이랑 다 동기잖아요. 나중에 다 싸웠지만 학문적 도반이죠. 정도전 선생이 “불씨잡변” 써서 불교 공격할 때 정몽주 선생도 똑같이 불교 공격합니다. 그 핵심 내용이 뭐냐면 불교는 즉 대승불교를 잘하고 있다면 정도전 선생이나 정몽주 선생이나 공격할 수 없습니다. 뭐냐? 핵심을 들어보면, “불교는 마음이 공하다고만 한다. 그런데 우리 유교는 공 안에 인의예지의 원리가 있다고 한다. 이게 유교와 불교의 차이다.” 즉 그 전에 고려 말에 불교가 공만을 강조했던 거예요 아공 법공만. 일체가 공하다고만 얘기하니까
18:00 공격한 겁니다. 공만 알아가지고 무슨 짓을 하냐? 그때 불씨잡변에서 정도전 선생이 정확히 그런 얘기까지 다해요. 아까 그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도는 뭡니까? 땔 나무 하러 가고 물 깃는 게 도다. 이런 식으로 자꾸 선사들이 얘기해요. 그건 법공에서 맞는 얘기인데요. 인의예지에서는 안 맞는 얘기예요. 이해되세요? 물을 깃더라도 양심적으로 길러야 되고요. 육바라밀에 맞게 물을 길러야 되고 나무를 하더라도 양심에 맞게 해야 이게 구공의 경지인데 아공 법공의 경지만 선사들이 다 노래한다는 거예요. 이걸 공격합니다. “불교는 그냥 중생들의 모든 작용을 다 본성이라고 해버린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인의예지를 본성으로 삼는다.” 이게 유교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했던 내용인데 놀랍게도 대승기신론에서 정확하게 그냥 우리 본성은 공한 게 아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이걸
19:00 불공이란 말까지 써요. “공이 아니다. 불공이다.” “공이 아닌 부분이 뭐냐?” “우리 안에 진리의 형상인, 진리의 본성인 육바라밀이 있다. 공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바라밀을 해야 되고 육바라밀을 잘해야만 1지 보살에서 10지에 이르는 그 진정한 보살도에 들어갈 수 있다. 중생을 도울 수 있다.” 이게 유교랑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니죠. 기독교로 오셔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양심을 따를 때 우리는 구원받고 우리는 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심법을 딱 한 마디로 얘기하시죠. “성령을 따르라” 그랬죠. 성령의 법은 뭐냐? 황금률이에요. “니가 받고 싶은 대로 남한테 해줘라.” 또 다른 표현으로 뭐죠?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 이게 다입니다. 인의예지 육바라밀 다 하면 뭘까요? 이거 딱 짜면? “너가 당해서 싫은 거 남한테 하지마라. 너가 받아서 좋았던 거 남한테 해줘라.”
20:00 이게 다입니다. 중생은 이거 하면 잘 산 거예요. 양심대로 산 거고 본성대로 산 거고 보리심 최고로 계발한 거예요. 지금 미투운동 걸리는 거 보세요. 요거 반대로 해서 걸렸을 뿐이죠.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한테 해서 걸렸을 뿐인 거예요. 반대로 했으면 인간은 욕을 하고 싶어도 욕을 할 수가 없어요. 욕을 할 수 없게 돼 있어요. 자기가 받고 싶은 걸 남한테 주는 사람한테 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욕을 하면 그걸 욕한 사람이 욕먹게 돼 있어요. 공식입니다. 우리 마음의 공식. 전국민이 욕해도 될 거 같을 때가 있어요. 언제? 이렇게 걸렸을 때요. 자기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한테 함부로 한 사람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처벌해야 된다고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재밌죠? 우리 마음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 그래서 그냥 공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공하게 깨어서
21:00 밥 먹고 일상사 하는 데 늘 깨어있는 거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더 깨어있으면요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런 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깨어있음. 욕망의 장난을, 에고의 장난을 정확히 잡아내서 바로잡을 수 있는 깨어 있음. 그게 더 깨어 있어요. 이 정도 경지 가신 분들은요 술 먹고 뭐 하고 하셔도 “아니 술 드시면 안 되고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안 되잖아요.” 해도요 “나 깨어 있어” 그럽니다. “나 지금 깨어서 하는 거야.” 이 논리에서는 그게 답이 돼요. “나 지금 깨어서 하는 거야.” “그렇게 탈선하시면 안 되죠.” “니 눈엔 탈선으로 보이지만 나 지금 깨어 있어.” 참나의 관점에서, 참나가 우주를 경영하는 근본이라는 걸 알고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경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에요. 우주의 근원이 참나라는 거만 알고 있지 경영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못 합니다. 왜? 반드시 업보를 책임져야 되거든요. 반드시 뒷감당해야 될 때가 오거든요. 거기까지 알고 경영하신다는 게 구공입니다.
22:00 구공을 안다는 건요? 지난 시간까지 아공 법공 어떻게 공부하는지 제가 다 설명 드렸어요. 아공 법공의 지혜를 늘 마음에 품고 있고, 늘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1주 보살의 경지는요 두 가지거든요. 정혜쌍수거든요. “정혜가 쌍으로 닦인다.” 뭡니까? 선정은 늘 깨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참나에 안주해 있다.” 지혜는요? “아공 법공을 자명하게 이미 알아버렸다.” 자명한 이해는요? 제가 이렇게 설명 드렸죠. “늘 떠올려서 곱씹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냥 그게 그런 건줄 뼛속까지 알고 있는 상태.” 그리고 이 지혜는 참나 안주의 선정으로 계발되고, 늘 우리 안에서 우리가 늘 깨어있기만 해도 이 지혜는 자동으로 알아서 계발되고, 이 지혜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더 깨어나게 됩니다. 이게 정혜쌍수의 경지예요.
23:00 선정이 지혜를 계발시키고 지혜가 선정을 계발시켜서 자동으로 여러분 안에서요 늘 깨어있고. 늘 깨어있다고 해서 강하게 깨어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참나가 늘 내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는 경지에 가고. 그러니까 자유자재로 명상의 들어가고, 근본적으로 늘 깨어있고, 늘 깨어있다 보니까 이 지혜도 늘 우리랑 함께 하는 거죠. 참나를 알면 이 지혜도 아는 겁니다. 처음에 공부하실 때 잘 모르실 때는 먼저 참나부터 만나요. 그리고 참나랑 함께 지내면서 참나에 갖춰져 있는 이런 진리들을 내가 이해하는 거예요. “아! 참나랑 함께 지내다보니 에고가 주가 아니고 참나가 주구나!” 하며 아공을 이해합니다. 참나 체험이 먼저 옵니다. 따로따로 들어가요. 처음에 참나 체험과 아공 법공의 개념적 이해가 따로 들어갔다가 속에서 이제 화학적으로 만나면서 체험적 이해로 발전하는 거예요.
24:00 참나 체험이 전제돼야 되고 거기에 그 전부터 읽었건 알고 있던 개념들이 이제 참나 체험의 토대 위에서 다시 꽃피는 거죠. “어! 말로만 들었는데 내가 참나를 만나보니까 진짜 참나가 이러네.” 이러네 하는 말들이 하나씩 나오는 중에 아공이 정립되고 좀 더 나가다 보면 “일체가 진짜 참나의 작용이네”까지 가는 거죠. 그렇게 명확히 확인하고 나면 나중에 더 할 말이 없어지겠죠. 그걸 부정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럼 그 다음부터는 그냥 여러분이 몰라만 해도 그 지혜가 함께 하는 거예요. 몰라만 해도 참나를 더 만나게 되고, 평소에 은근히 만나다가 더 잘 만나게 되고, 더 잘 만나게 되면 지혜도 더 강해져요. 일체를 초연하게 보는 그런 안목도 더 강해져서 아공 법공에 대해서 더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게 같이 간다는 걸 잘 아셔야 돼요. 선정 상태가 약해지면 이 개념도 약해집니다.
25:00 선정이 강해지면 개념도 강해져요. 여러분이 지금 참나를 만나면 당연히 세상을 참나의 작용으로 알아요. 근데 참나랑 잘 강하게 못 만나다 보면 또 의심이 생기죠. “진짜 그럴까?” 근데 참나 만나면 자동으로 그런 쓸데없는 개념이 날아가 버려요. 요 정도로 잘 되게 여러분이 익숙하게 닦으시면 정혜쌍수가 뭔지 아실 수 있어요. 깨어 있으면 지혜가 강해지게 되죠. 왜? 참나의 관점에선 저게 너무 지당한 관점이기 때문에 참나 상태에서 계속해서 저 관점이 지당한지 확인하게 된다면 나중에는 “몰라”만 해도 저 관점을 갖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보세요. “몰라”만 잘해도 이 아공 법공을 그냥 알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다 우리가 하나 더하죠. 양심성찰. 양심성찰을 꾸준히 하시다보면 요거(참나 안주+아공 법공) 플러스 이게(양심성찰). 이것(양심성찰)도 지혜에 들어갑니다. 선정과 지혜의 공부라고 할 때 몰라 잘하는 거랑
2600 아공 법공 개념 정립, 플러스 양심성찰. 사실은 지혜 공부 하나 더 있어요. 제 강의를 듣든지 책을 보든지 해서 경전의 정보를 끊임없이 구하셔야 돼요. 여러분 경지에서 이해하실 만한 구절은 많이 접하셔서 아공 법공이나 이 양심의 길의 기초를 설명해 주는 경전적 내용, 여러분이 이 단계에서 충분히 소화하실 수 있거든요. 그걸 많이 소화해 놓으시는 게 좋아요. 그래서 아공 법공과 이런 경전 공부의 이론적 토대 위에 실전에 나가서, 이게(양심성찰) 실전입니다. 실전에 나가서 내가 지금 하려는 행동이 아니면 했던 행동이 선인지 아닌지 판정해보는 실전 연습까지. 아공 법공과 경전공부는 이론적 베이스죠. 이건 이론적 베이스고 거기에서 실전에 나가서 선악 판정을 해서 내가 선인 줄 알고 한 번 해봐요. 과연 그 과보도 그런 지까지 보는 거죠. 과보도 그런지?
27:00 내가 옳다고 봤던 일이 나중에 봐도 진짜 옳은 일이었는지? 내가 나쁘다고 봤던 일이 나중에 봐도 진짜 나빴는지? 그럼 이제 정보 부족이나 내 판단에서 육바라밀 분석에 좀 미스가 생기면요 분명히 나중에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끝없는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러분 양심 실력이 조금씩 나아져요. 지난 시간까지 한 거를 설명 드리면서 겸해서 마음공부 핵심도 좀 말씀드려본 거예요. 우리가 아공 법공을 왜 공부하고 있느냐? 결론은 양심 잘하려고요. 양심 잘하려고, 양심 51% 하려고 시작한 일이에요. 양심에 대해서 아공 법공 구공이 다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구공을 이해하는 전 단계예요. 일단 “에고 너머 참나 있다”는 거라도 알자. 좀 더 들어가서 “참나에서 우주가 나왔다”는 것도 알자. 더 들어가서 “참나가 육바라밀로 우주를 경영한다”는 것도 알자. 그러면 양심에 대해서 다 아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28:00 1지 보살되면요 1지 보살이 사실은 이 단계가 진짜 이제 견성이거든요. 그 전 1주도 견성인데 요거는 사실은 초견성이라고 부를 만해요. 아직 참나의 모든 걸 안 건 아니에요. 아공 법공까지만 알았지 모든 걸 안 건 아니니까 진짜 견성은 이때입니다. 이게 진짜 견성, 진견성인데. 진짜 견성 때는요 “내 참나 안에 저렇게 육바라밀이, 진리의 형상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까지 여러분 알아내셔야 돼요. 무슨 수를 쓰든지 알아내셔야 돼요. 제일 쉬운 건 뭐예요? “몰라” 하시면서 늘 경전공부 하시면서, 아공 법공 곱씹으시면서, 양심성찰 하다보면 구공의 경지로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갑니다. 참나에 대해서 내가 알아내는 데까지 정확히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 양심 공부를 계속하시면서, 참나 안에 진짜 양심이 있는지 끝없이 실험하신다면요
29:00 어느 날 여러분이 선언하게 돼요. “아! 내 안에 참나 안에 인의예지신 육바라밀 다 들어있더라” 하는 게 정확해질 때가 오죠. 그리고 이거는 내 안에 있다는 선언만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이 1지의 견성에서는요 “내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게 우주의 뿌리니까 우주가 다 육바라밀로 굴러가고 그 우주적 양심을 기준으로 선악이 나뉘는구나!”까지 아셔야 돼요. 선악의 전문가가 되시는 거죠. 그래서 “옳은 일을 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알아보는 이가 있고 악한 일을 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이게 처벌받게 되어있다. 그리고 처벌 받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상처 입고 한을 품게 되어있다.” 이 공식을 정확히 아셔야 돼요. “우주에서 저걸 악으로 본다. 우주에서 이걸 선으로 본다.” 이거 알아내셔야 돼요. 여러분 자명하십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우주가 어떻게 선악 판정하는지 알아냈어!”라고
30:00 말하실 수 있어야 1지예요. 오늘 좀 그런 기분 드시는 거 말고요. 아시겠어요? 오늘 해보고 내일 해보고 계속해보다가 어느 날 하느님 마음을 선명히 안 거예요. 하느님이 뭘 옳다고 하고 뭘 그르다고 하는지 하느님 관점에서 선명히 볼 정도로. 하느님처럼 정밀하게는 못 봐도 뼈대는 알아낸 거예요. 그래서 이 1지를요 견성했다고 “견도위”라고도 하고요 다른 말로 이미 통달했다고 해서 유식학에서는 “통달위”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 “통달위”라고 불러요. 통달위. 이미 통달한 거예요. 1지에 다 통달한 거예요. 알아낸 거예요. 하느님 마음은 근본은 다 안 거예요. 다만 하느님 마음이 이럴 땐 어떻게 적용되고 저럴 땐 어떻게 적용되는지 섬세하게 이렇게 정밀하게 쓰이는 거 있죠? 그거 알아내는 데는 10지까지 또 가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더 디테일한 데까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지.
31:00 여러분 자라면서 어느 날 디테일한 데까지 알게 되지 않아요? “이럴 때 부모님이 화내고 이럴 때 잘했다고 하는구나.” 꼭 아닐 수도 있어요. 이 정도면 내가 잘한 것 같은데 부모님이 잘했다고 할 것 같은데 욕먹을 때도 있고 오차는 좀 있지만 큰 이 대강이 보이니까 통달위라고 하는 거예요. “아! 우주 하느님이 육바라밀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구나.” 이건 알아낸 거예요. 그런데 내가 육바라밀을 잘하지는 못 하다보니까 앞으로도 계속 더 닦아가야 할 길은 멀지만, 닦아가야 할 게 많지만, 길이 멀고 공부해 나갈 게 많고 하지만, 가야할 길도 멀고 하지만 알아내기는 알아낸 거예요. 그래서 이때부터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통과했다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1지부터는 통과한 거예요. 부모님 마음을 알아요. 하느님 마음을 알아요. 제가 최근에도 사도 바울이 하느님 마음을 그래도 알아냈으니까 사랑에 대해서 “사랑은
32:00 온유하며 오래 참고…” 이런 사랑에 대해서 쭉 써놓은 거 보면 육바라밀에 다 맞게 설명하죠. 그쵸. 이 항목들 다 나와요.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나눔이 사랑이죠. “사랑이란 절제하고 인내하고 성실하며 늘 깨어있고 진리를 사랑한다. 진리와 함께 한다.” 요 사랑의 모든 걸 설명할 때 보면 육바라밀이 다 나옵니다. 제 “산상수훈 책”에 다 조목조목 비교해서 해놨어요. 이 정도 자기가 논문 써야 된다구요. 여러분이 스스로 논문 쓰셔야 돼요. 이건 다른 여러분 선배분의 논문입니다. 박사 학위 받은 논문을 지금 소개해 드린 거예요. 여러분도 이런 논문을 쓰셔야 돼요. 이 영적인 논문은요 “아! 이 분이 이미 써버려서 나 이제 어떡하지? 독창적인 얘기를 써야할 텐데.” 영적인 세계는 독창적인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진짜 체험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가 중요합니다.
33:00 똑같은 말을 해도 좋은데 진짜 확인해서 하는 얘기인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난 실험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얘기인지 아니면 남의 걸 보고 하는 얘기인지 그건 저희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하느님 앞에서 딱 독대하고 여러분이 스스로 양심에 가장 솔직하게 얘기를 해야 되는 부분이에요. 거기서 저런 논문을 쓰실 수 있으면 결론이 저렇게 딱 나면 여러분이 당당하게 1지 받고 가는 거죠.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 이런 원리로 갖춰져 있다. 기독교적으로 보실래요. 이게 똑같은 얘기입니다. 유교에서 천명천리라고 하는 걸요 기독교에서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부터 나와요. 이게(⊕) 뭘까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십자가가 뭘까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그럽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어요. 그럼 그 하느님의 형상이 어디 들어있을까요?
34:00 성령에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요 본래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해 계신 거예요. 왜? 누가 그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을 건데요? 여러분의 혼이요? 아니오. 여러분 혼은 그걸 감당 못 해요. 여러분의 영 안에 들어있어요. 사실은 인간의 입장에서 에고가 볼 때 나의 뿌리다 해서 영 하는 게 사실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지점이에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영혼 안에 지점을 내고 들어와 계신 게 하느님 입장에선 성령이고 내 입장에선 거기가 내 영혼의 뿌리니까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동전의 앞뒤입니다. 영과 성령. 그래서 성령을 모르면 영도 모르고요 영을 모르면 성령도 몰라요. 우리는 혼과 육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육신의 충실한 혼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에고는 육근의 작용에만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 안에 영이 있다는 걸 탁 알아내는 날, 여러분 그 영이 영어로 뭡니까? I AM 입니다. 나의 뿌리 내가 존재한다는 게 영이거든요.
35:00 여기 뒤에 붙는 모든 것은요 이게 혼 아니면 육입니다. I AM 뒤에 술어가 붙어보세요. 뭐 생각하고 있거나 울고 웃고 있거나 뭐 먹고 있거나 만지고 있거나 다 뭔가 하고 있겠죠. 오감 아니면 생각 감정이죠. 뒤에 뭐라도 붙으면 다 에고의 세계입니다. 아무것도 안 붙는 그 근원의 세계는요 그냥 내가 존재한다는 거 외엔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러죠. 여러분 내면에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니까요. 그게 여러분의 영이고 사실은 스스로 있는 나 I AM은요 유태인들한테 하느님의 이름이거든요. 여호와가 난 I AM이라고 했거든요. 나는 있는 자다 스스로 있는 자다 그랬으니까 여러분 안에 스스로 있는 그 자리 찾아내시면요. 어떤 것에도 의존해 있지 않아요. 그냥 스스로 있지. 스스로 있는 그 자리는 여러분이 아니에요. 여러분이면서 여러분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영이면서 성령이에요. 그 성령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만들 때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라고
36:00 하실 때 우리 혼과 육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근본적으로 영을 말하고 있어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들어와 있어요. 왜? 실제 창세기에서 창조할 때 어떻게 창조하나요? 흙으로, 사람 몸뚱이는 흙으로 빚습니다. 흙으로 빚어가지고 하느님이 숨결을 불어넣었는데 그 숨결이 성령이에요. 유태인들한테 숨결이란 건 성령입니다. 성령을 불어넣어주니까. 자 보세요. 영 혼 육이 탄생되는 과정이에요. 성경에 다 써 있습니다. 육체로 몸을 빚어요. 이건 흙으로 빚었죠. 하느님이 숨결을 불어 넣어줘요. 영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그 영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이 영이 작용을 일으킵니다. 그게 혼이에요. 흙은 육이고. 육체를 만들어주고 영을 불어넣어 주니까 혼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영을 망각하고 죽은 영 상태로 살기 때문에 이 혼이 육체, 육근 작용에만 집착한다니까요. 이 혼이,
37:00 생명의 활동이 육체적인 활동에 집중해 있어요. 육체의 법만 따라요. 이 이기심의 영역. 육체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의 법, 양심의 법이 있다는 걸 몰라요. 요게 성령법이죠. 영을 모르니까. 자 육체가 생기고 영을 넣어주니까 살아 움직이게 됐는데. 영이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흙이 어떻게 움직여요? 하느님이 아니면 어떻게 흙이 움직입니까? 하느님이 자기의 영을 나눠준 거예요. 그게 성령이에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들어와서 이 흙덩어리 육신을 움직여요. 그러다가 여러분 영이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흙으로 그냥 돌아갑니다. 근데 살아 움직인다는 건 뭐죠? 생각하고 말하고 울고 웃고 오감 작용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생각하고 울고 없고 말하는 이생명의 작용 안에 영이 뿌리인데도 영을 모르고 살겠죠? 여러분 생각할 때 영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생각에 빠지세요?
38:00 울고 웃을 때 영이 울고 웃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울고 웃는 데 빠지세요? 오감 작용도 똑같죠? 영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요. 찾지 않아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의 숨결을 찾지 않아요. 거기가 성령 자리인데. 영혼육에서 영이고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땐 성령이에요. 하느님의 작용이 성령이에요. 이런 기본도 안 되어 있으면 제가 하는 얘기가 무슨 기독교 이단 소리같이 틀릴 수도 있지만. 보세요. 원래 하느님이 만들 때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살게 육체를 줬지만 영을 줬기 때문에, 이 혼이 영을 받들면 성령법을 따르게 되고요 이 혼이 육을 받들면 육체의 법을 따르게 돼 있어요. 즉 여기는 욕심의 세계고 여기는 양심의 세계입니다. 양심도 따를 수도 있고 육신도 따를 수도 있었는데 아담과 이브 때부터
39:00 육신을 따르기 시작한 거예요. 양심은 안 돌아봤어요. 간간이 돌아본 사람들이 나와요. 선지자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양심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면 또 잠깐 반성했다가 또다시 계속 육신으로 돌아오고. 그쵸. 그런데 이 세월이 언제 끝난다? 기독교에서 예언이 인자가 오면 끝날 거다. 메시아가 오면 끝낼 거다. 그 메시아가 예수님. 예수님이 와서 이제 성령법을 闡명하고. 육체의 법만 따르는 사람들이 육체의 법의 율법으로 육체를 절제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볼 때 이건 답이 나올 일이에요? 성령을 아무도 모르는데 육체의 법을 근본적으로 따르면서 계율만 지키면 절제만 하면 천국 간다 말이 됩니까? 성령이 살아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천국을 가요? 천국이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법대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이 육체의 법을 따르면서 율법만 지키면 우리는 된다라고 생각하면 꽝인 거죠.
40:00 율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영, 양심에서 나오는, 제가 늘 말씀 드리는 자명 찜찜이 제일 핵입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성령의 소리를 못 들으면서 “율법에 맞냐 안 맞냐?”만 가지고 판단했을 때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래서 여러분 바리새파들이 예수님을 뭘로 규정했죠? 율법을 어긴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탄으로 본 거죠. 그래서 죽인 거죠. 죽이자고 한 거죠. 이해되시죠? 왜? 율법을 어겼으니까 안식일날 일을 하는 거예요. 사람 살리는 일이지만 안식일날 일하면 안 된다고 돼 있는 자기네 율법을 어겼어요. 밥을 손도 안 씻고 먹어요. 율법을, 자기들의 규율을 계속 무시해요. 이 사람들이 볼 때는 악으로 보인다는 거예요. 이게 엉터리라는 거죠. 저 양심에선 어때요? 양심에서는? 양심에서는 안식일 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 살리는 게 자명하다고 하겠죠? 양심의 소리를 안 듣고
41:00 율법의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육체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양심법이랑 전혀 상관없는 판단을 하게 돼 있어요. 이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자명 찜찜의 신호를 있는 그대로만 듣고 살면 돼요. 더 잘 들을 필요도 없어요. “내가 양심보다 더 잘해야지” 할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안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있는 그대로만 반응하면 우리는 다 성자가 될 수 있거든요. 자, 다시 한 번 정리해볼게요. 기독교적으로 볼 때,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랑과 정의와 겸손과 지혜와 성실로 살게 만들어져 있는데, 유교랑 통합해서 이렇게 말씀 드리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살게 돼 있는데. 이게 유교랑 통합한 게 아니라 단순히 구약에서 하느님을 설명할 때 딱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실 질서 사랑 정의 그리고 지혜의 하느님”이라고. 인의예지신이 다 나와요. 인간한테는 겸손 그러고
42:00 하느님한테는 질서 그래야 맞거든요. 그러니까 인의예지신이 이미 구약에서 다 나옵니다. 이런 얘기는 제가 산상수훈 책에 다 넣어놨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형상대로 살라고 만들었는데 영을 모르고 혼과 육으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는데 드디어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느님 형상대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준 거예요. 하느님의 형상은 영이니까 인간들은 아무도 본 적이 없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이시다.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만 예배해야 된다. 하느님 만나려면 너도 영 깨달아야 된다”고 얘기하시면서 제자들이 “하느님 좀 보여 달라”고 할 때 영을 어떻게 보여줘요? “나를 봐라” 그랬어요. 왜? 내가 이 영을 하느님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육근의 삶을 살고 있거든요.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동했으니까 내가 눈에 보이는 영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자는 눈에 보이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요 눈에 안
43:00 보이는 존재라면, 영이라면 성자는요 우리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육근을 쓰고 있는 존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에요. 그래서 성자를 본받아서 우리도 하느님의 형상을 닮는, 즉 늘 성령 안에서 황금률, 양심 지키는 삶을 살다 보면 우리도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 이게 기독교의 핵심이죠. 지금 이해되세요? 이게 유교랑 다른가요?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명령을 해서 우리 안에 인의예지의 이 형상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그게 인간의 본성이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 하느님이 주신 성령의 마음이 우리한테는 뭐라고요 그게? 양심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이게 천심인데 인간한테는 양심이다. 이게 불교의 보리심입니다. 요것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면요 우리도요 성자처럼 되면 하느님의 형상 그대로 살면 우리도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뭐라고요? 우리도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44:00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말은 누가 할 수 있어요? 하느님의 형상 그대로 산 사람이면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그건 예수님만 해야 돼. 안 돼.” 이러면 안 됩니다. 제가 중용 책이 있으면 중용 책을 바로 보여드리면서 읽어줄 텐데. 중용 책 몇 페이지인지 모르지만 있어요. 제가 낸 중용 책에 있습니다. 그럴까요. 아우, 잘 가져오셨네. 중용 책에, 중용에 이런 거 있다는 것도 좀 아셔야 돼요. 보세요. 중용 책 160 페이지에 있습니다. 그림까지 있어요. 그림이 있는데 뭐라고 써 있냐면 “군자가 움직이면 천하의 길이 되고.” 왜? 천리 그대로 살아가니까요. “군자가 행동을 하면 천하의 법이 되며, 군자가 말을 하면 대대로 천하의 표준이 된다. 만세의 표준이 된다.” 그 말은 뭐죠?
45:00 이걸 군자 입장 말해 볼게요. 군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길이요 법이요 표준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나대로만 살면 된다고 군자가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때 군자는요 그냥 일반 군자가 아니고 성인이에요. 성인을 지금 군자라고 써놓은 거예요. 왜? 아직 오류가 있기 때문에 일반 군자는 이렇게 말 못해요. 근데 이 성인들은 이 말 할 수 있어요. 즉 성인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인의예지 천리를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 입장에선요 “내가 길이요 법이요 인간들의 표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예수님도 그러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나로 말미암지 않은 자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게 지금 “나처럼 이렇게 살지 않는 자는 절대로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한 거예요. 말이 다른 가요? 똑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그리고요 여기까지만 하고 좀 쉴게요.
46:00 갑자기 제가 막 어려운 얘기해서 힘드시죠? 한 마디만 더 해 드릴게요. 자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 영혼의 뿌리인 양심이 되었다. 이 얘기를요 주자가 이렇게 써 놨습니다. 대학 책 24페이지 보면요 동양에서는 유교에서는 양심을 “명덕”이라고도 부릅니다. 양심이란 말도 유교 말이에요. 맹자가 양심이란 말 처음 썼어요. 대학에서는 양심을 뭐라고 부르냐면 명덕이라고 불러요. 원래 본래 광명한 인간의 덕성, 인간의 가장 덕스러운 양심 덩어리인 그 마음을 양심을 명덕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명덕을 설명할 때 주자가, 송나라 때 주자의 설명입니다. 사람이 천, 하늘로부터 받아서 허령불매한 마음
47:00 텅 비고 신령하여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 있으니 이게 명덕이다. 양심이다. 그런데 그 안에 구중리, 인의예지의 모든 원리를 갖추고 있어서 응만사. 만사에 대응해서 인의예지 원리대로 경영하게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명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데 타고날 때 선천적으로 기질의 한계와 후천적인 욕심의 한계로 인해서 때때로 이 영의 세계가 어두워져 보이나, 유교에서도 이 영 자 쓴 겁니다. 허령, 텅 비되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불매라는 건 어둡지 않게 환히 비추고 있다는 거예요. 비추고 있는 우리 의식, 이게 I AM 상태죠. 우리 I AM의 마음은 하느님한테 인간이 받아서 인간의 양심으로 삼은 것으로, 항상 인의예지의 원리라는 건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그 형상대로 일 처리를
48:00 하게 하는 마음인데 사람들은 욕심과 기질의 한계로 인해서 제대로 못 펴고 있지만, 그 본체의 광명함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인간이 살면서 한 번도 영이 우리 안에서 소멸된 적이 없다. 늘 존재했기 때문에 학자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만약에 우리 안에서 이 성령의 마음이, 이 허령, 이 양심의 마음이 발동할 때라도 그것에 따라서 밝혀내면 복기초. 이게 유교의 핵심입니다. 광복이랑 비슷해요. 복기초. 원래 밝았죠. 원래 광명했죠. 그러니까 광복이죠. 광복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원래 광명했던 걸 다시 회복한 거예요. 광복절은요 없던 나라 세운 게 아니에요. 원래 있던 나라 다시 밝힌, 다시 회복한 거죠. 빛을 회복했다는 뜻이죠. 원래 광명했는데 원래 우리 영은 살아 있었는데 죽은 것처럼 살고 있었지만 지금
49:00 다시 살려냈다는 거예요. 다시 살려내기만 하면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왜?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요. 이게 유교 선비랑 저 기독교랑 크리스천의 길, 성도의 길과 이런 유교 선비들의 길이 다를 것 같으시죠?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아까 군자가 뭐라 그랬죠? “내가 길이요 법이요 표준이다.” 유교도 그런 성인들의, 그 본성을 온전히 구현했던 존재들의 그 삶을 본받으면서 걸어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 5백년간 연구했어요.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왜? 그 중에 일부만이 온전히 그 양심을 알았겠지만 그래도 5백 년간 계속 공부해 왔던 문명이라는 요거는 우리가 남들한테 자랑해야 됩니다. 잘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중한 줄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인류 역사상 500년간 양심만 판 민족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 그런데 우리가 잘하고
50:00 얘기를 해야 되는데 못 하고 이런 얘기하면 “근데 왜 그렇게 됐냐? 왜 더 안 좋아졌냐?” 그러면 더 할 말이 없지만요. 우리의 그런 매력은 있다 하는 걸 알고 계셔야 된다. 그게 또 인과가 있잖아요. 씨를 많이 뿌렸으면 의외로요 또 우리가 다시 인연만 되면 그런 과보를 또 맺게 될 수도 있습니다. 뿌려 놓은 건 있으니까. 제가 기대하는 게, 이런 얘기를 자꾸 드리는 게, “뭔가 있을 텐데, 뿌려 놓은 게 있을 텐데. 언젠가 한 번 올라오지 않을까?” 해서 이제 뿌리고 있습니다. 최근 미투운동도 제가 적극 지지한다고 밝힌 게 이런 걸 통해서 어느 한 일에서라도 자꾸자꾸 양심, 아까 양심 계발하는 법 뭐라고 그랬습니까? 어두워지지 않고 우리 안에 분명히 있다. 양심 중요한지는 다들 알고는 있는데 욕심에 가려지고 자신의 어떤 한계 때문에, 기질적인 한계 때문에 못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밝혀졌을 때 그걸 가지고 확장시키면
51:00 복기초, 애초의 원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게요 결국 아공 법공 구공 공부하는 비결입니다. 아공 법공 우리가 왜 공부합니까? 내 마음에서 양심이 올라올 때마다 응원해가지고 더 온전히 밝혀낼 밑천을 만드는 거예요. 이 공부가 됐으면 부지런히 양심성찰을 해가지고요 참나에 늘 안주하고 아공 법공의 이 모든 게 참나의 신비라는 걸 알았다면 본격적으로 참나 안에 새겨져 있는 인의예지의 형상을 알아내가지고, 양심의 형상을 알아내는 작업을 할 때 양심성찰을 하셔야만 되는 이유가, 내 안에서 조금이나마 자명한 마음, 양심의 마음, 찜찜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그걸 가지고 연구할 수밖에 없어요. 보세요. 지나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봤어요. 돕고 싶어요. 양심이 확 나왔죠. 지금 이게 양심이 발동했던 거예요. 방금 대학에서 주자가 표현했던
52:00 실마리를 찾아서 확충하라는 게요 뭔가 한 번 발동한 거예요. 우리 안에 늘 양심이 있다 보니까 측은한 마음, 겸손한 마음, 정의감, 옳고 그름의 판단은요 우리 안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올라와요. 우리가 무시하면 그게 그냥 사라지는 거죠. 근데 또 한 번 올라왔죠. “측은하다. 저 사람, 난 모르는 사람인데 왠지 나 같다. 나처럼 저 사람을 순간적이나마 사랑하게 됐다. 배려하게 됐다.” 그때 무시하고 넘어가면 그냥 끝나는데 그 마음이 탁 올라왔을 때 아공 법공의 마음으로 “몰라” 하시고 보세요. 몰라 하고 보면요 참나가 더 강하게 드러나면서 “해줘 버리자” 하고 그냥 해주고 끝나는데, 그래서 도와주고 끝나면 얼마나 깔끔합니까. 그런데 도와주려는 마음이 확 올라올 때 “그럼 나는?” 하면서 다시 싹 그걸 꺼뜨리고 가버립니다. “이 돈 있으면 우리 자식들한테나 잘하자.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라
53:00 다행이다.” 그러고 돌아서 가버리면요 확 식어버려요. 이게요 자해해타인 게 나도 안 좋아져요. 내 양심 꺼졌으니까 안 좋고 그 사람은 도움 못 받아서 안 좋죠. 근데 반대로 하면 자리이타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냥 보리심의 계발이 돼버리고 양심에 계발이 돼버리는 게 몰라만 한 번 해주시면 돼요. 욕심 올라올 때 몰라 하고 잠깐만 시간을 좀 달라 하고 1분만 몰라 하면요 뭔가 마음이 좀 우주적인 마음이 되죠. 초연해지죠. 그때 양심이 힘을 타거든요. 그래서 양심에 싹이 하나 올라올 때, 측은한 마음이건 정의감이건 뭔가 올라왔을 때 몰라로 힘을 키워줘서 빨리 일 처리해버리면 자리이타가 이루어집니다. 정의감도 똑같아요. “저건 옳지 않은데. 에이 내가 당하는 거 아니니까 참자.” 미투운동 처음에 연극이나 이쪽에서 터졌죠? 연극 관객들이 연극을 지금 못 보겠대요. 미치겠대요. 왜? 연극을 보러 가면 어떻게 돼요? 내가 보고 있는 연극인이 가해자거나 피해자거나 방조자 아니에요?
54:00 셋 중에 하나 아닙니까? 무섭죠? 찜찜해서 못 보는 거예요. 이것도 양심에 찔려서 못 보시는 거예요. 이러면 무섭지 않나요? 왜냐? 분명히 모를 일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몇 십년간 있었던 일인데 그럼 분명히 누군가는 알지만 참았단 얘기죠. 적극적인 가해자는 아니더라도 알지만 참았다는 것도 우리는 사실 짜증나는 거예요. 그런 사람 보는 것도 불편하다는 거예요. 이게 다 양심에서 나온다는 거 아시겠어요? 결국 이 모든 우리가 지금 힘들어하고 미투운동으로 인해서 뭔가 불편한 사람, 힘든 사람, 억울한 거 풀려는 사람, 또 그걸 응원하는 사람 아니면 또 묻으려는 사람, 다 들여다보면요 욕심과 양심의 충돌일 뿐이에요. 들어가 보면. 간단해요. 그 양심이라는 건 사랑 정의 예절 지혜 성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고 어긋나면 찜찜해하고 그게 충족되면 자명해합니다. 이 간단한 공식을 우리가 아는 데까지 왜 이렇게 고생해야 되느냐?
55:00 알려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실제로. 자기가 찜찜해하는데도 왜 내가 찜찜한지도 고민 안 해보고 가버려요. 그러니까 찜찜함이 올라올 때 그게 정의감 때문인지 측은지심 때문인지 탁 捕捉해 가지고 양심성찰 해버리면, 그때그때 해버리고 잊어 버리셔도 괜찮으니까 올라올 때라도 양심성찰을 하시라는 거예요. 그게 그대로 하는 법입니다. 아까 대충 읽은 것 같은데 주자가 뭐라고 했는지 요거 조금만 더 풀어 드릴까요? “배우는 자는 그 양심이 발동하는 바로 인하여 거기에 바탕을 두고 그걸 밝히기만 하면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가 본성 회복하는 법은 욕심에 충만해 있더라도, 욕심이 꽉 차 있더라도 양심이 우리 안에 있다 보면 양심이 언젠가 한 번은 치고 올라온단 말이에요. 측은함이건 겸손함이건 정의감이건 이건 옳지 않아 하는 어떤 도덕적 판단력이건 한 번 올라올 때,
56:00 그것만 응원해줘도 우리는 본성 회복할 수 있다. “억지로 쥐어짜내는 게 아니라 올라올 때만이라도 해줘라” 이거죠. 여러분이 만약에 직장에서나 그 사회에서 누군가가 부당한 피해를 받는 걸 봤을 때 “옳지 않은데” 할 때 그 마음을 조금만 더 계발해 주면 그게 양심계발입니다. 그게 양심성찰 안 하면 계발되겠습니까? 왜냐?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은요 나한테 올 손해가 두려워서 못 하게 돼있어요. 이것도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그게 나만 걸린 게 아니라 내 새끼 내 가정이 걸려 있으면 참아야 될 때도 있거든요. 그런 것까지 제가 다 지적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요 그 인과는 분명하다는 거예요. 내가 양심을 눌렀을 때 나도 해로워지고 같이 해로워지니까. 어떻게라도 방법을 찾는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냐? 내 역량에 맞게 뭐라도 해 볼 수 없냐? 이거죠. “뭐라도 해 볼 수 없나” 하는 그 마음이 양심을 계발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을
57:00 계발하다보면 뭐라도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죠. 그런 노력이라도 했다면 여러분 나중에 덜 찜찜하실 거예요. “나도 한다고 했는데 그때 길이 없었다” 이거랑 “난 그 때 그냥 눈 딱 감았다” 하는 거랑은 과보가 분명히 다릅니다. 평생 자기 마음에 남는 그 흔적이 달라요. 이거 어쩔 수가 없어요. 남들이 모두 아무리 옆에서요 “그러지마. 기분 풀어. 너도 어쩔 수 있었니?” 해도 자기는 알거든요. “어쩔 수 있었는데” 하는 거. 자기는 알기 때문에 남이 아무리 위로해줘도 소용없어요. “사실 그때 나 어떻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 나한테 더 이익이 떨어진다니까 참았던 것도 있거든요.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걸 제가 이제 와서 다 비판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 양심 공부는 인간이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고 해법을 찾아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 문화가 다르게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더 진화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양심 세상에 살기를 원하신다. 여러분도 노력하셔야 돼요.
58:00 여러분이 노력 안 하면서, 내가 천국 갈 공부를 안 하면서 세상이 천국이 되길 바란다는 것은 그거는 얼마나 자명하지 않은 소리입니까? 찜찜한 소리입니까? 나부터 천국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는 그런 마음공부를 해 나가지 않고서요 천국 가기를 바란다는 거, 그거는 욕심이죠. 사심이죠. 그건 육신의 법을 따르는 거지 성령의 법을 따르는 마음은 아니죠. 여러분도 그런 생각하실 때마다 조금 찜찜하실 거예요. “사실 내가 남보다 뭐 잘하는 게 있나? 교회에다 십일조만 더 바쳤는데 이것만으로 천국 간다고?” 사실 찜찜한데 일단 내가 또 가고 봐야 되니까 사람은 간다는 걸 믿게 돼 있어요. 찜찜한데도 믿게 되어있습니다. 왜? 일단 가야 되니까. 일단 나는 살고 봐야 되잖아요. 그거 당연한 겁니다. 나는 살고 보자는 마음이 당연해요. 부모 자식 간에도요 결정적으로 갈 때 사람은 나는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게 에고의 작용이에요. 양심이 얼마나 그걸
59:00 다스리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양심이 더 강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챙기는 거고요. 욕심을 더 우선시 한 사람은 자기 욕심이 그걸 못 막는 거예요. 가버리는 거예요. 정말 자기 죽겠으면 실제로 자식도 버립니다. 옛날에 진짜 굶주렸을 때 인류가 배고프면 자식도 잡아먹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죠. 우리도 닥쳐보지 않으면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한테는 그런 에고의 가능성이 있다는 거 우리는 수용하자구요. 다만 막을 길은 양심 밖에 없다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 보자고요. 이런 현실적 고민을 가지고 공부를 하시라는 거예요. 아공 법공 추상적인 얘기하자는 게 아니에요. 이 공부를 왜 하느냐? 양심 힘 실어주려고. 양심이 내 안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하려면 양심에 진정한 의미. 우주를 양심이 경영하고 있다는 것까지 깊이 이해하실 수 있어야 돼요. 조선 선비도 다 했어요. 천리, 천명이요, 이 오행이 천명인데
1:00:00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걸 오행이 지배합니다. 그 얘기는 뭡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우주 천지 만물이 다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인간은 그 중에 제일 하느님의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가장 신령한 존재라는 게 유교의 결론입니다. 그럼 인간 중에 제일 신령한 인간, 성인이 얼마나 신령한 존재예요. 하느님 대신이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유교에서도 성인들한테 아까처럼 “길이요 진리요 표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전 인류가 알아요. 이런 감각을 갖고 있어요. 모든 문명이 이런 얘기 알고 있어요.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진짜로 이 길을 닦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죠. 아공 법공까지 왔어요. 그래서 5분 쉬고 1주 보살에서 이제 또 다시 구공의 단계로, 양심의 단계로 나아가는 그 길목에 대해서 구체적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지금 제가 얘기한 큰 그림, 의도한 건 아닌데 제가 엄청나게
1:01:00 써 버렸네요. 죄송합니다마는 신기하지 않나요? 양심 얘기 하나 하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이런 개념과 이런 게 필요한대요. 이 정도 아시면 충분합니다. 제가 많이 소개해 드린 거니까 이 정도까지 모르셔도 되는데 제가 어느 종교가 지금 여기와 계신지 몰라서 다 해 드린 거예요.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다 알아야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종교만으로도 이해하셔도 충분합니다. 다만 저는 항상 모든 종교, 아니면 종교가 없는 분을 상대로 얘기하다 보니까 이 얘기 저 얘기 두루 드리는 것뿐입니다. 꼭 이렇게 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참고하시고요.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1:0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