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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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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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3. 03. 土.
게시일자 2020. 05. 29.
동영상 길이 47:52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z1Q4yXpFkQw



0:11 그래서 이렇게 달라진 것도 아셔야 돼요. 통현장자 주장 좀 더 읽어보면요 십주의 처음에 그 지위가 불과와 동등하다. 그러니까 1주에 이미 불과랑 동등하다. 이미 성불이다. 이게 견성성불을 얘기하신 거예요. 1주 때 견성했고 이미 성불이다. 부처랑 똑같다. 왜? 온전한 부처가 이때 이미 드러났다라고 보는 거예요. 견성했을 때 드러났다. 에고가 소화를 다 못 해서 그렇지 불성 차원에서는 이미 온전하다. 에고가 모자란 거는 보지 말고 온전한 불성을 봐라. 그러니까 성불이다. 원래 화두선 논리가 그거예요. 화두선 논리가 한 칼에 에고의 생각을 끊어버리고 나면 나는 바로 부처다 할 때 에고 입장을 보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있는 불성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견성성불론이나 1주에 성불한다는 논리는 사실 같은 논리예요. 똑같아요.

1:00 선불교랑 화엄경이 만나 버리는 겁니다. 이런 논리로 가버린 거예요. 일과 일이. 사사무애법계를 말하는 거예요. 사사무애법계, 즉 일과 일이 서로 융합하며 통하는 경지 차원에서 보면 이게 설명이 된다는 거예요.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각 지위마다 부처의 경지와 통함). 즉 각 레벨마다 이미 부처니. 화엄경 논리도 좋은 게 있죠. 자 이 얘기예요. 보세요. 1주도 부처 2주도 부처 3주도 부처. 거듭거듭 계속 부처고 일과 일이 서로 통해버린다. 1주가 분명히 12지랑은 다르지만 이미 불성에선 하나다 이렇게 나가버려요. 사사무애. 이런 논리까지 가면 여러분 지금 몰라 해서 참나 만났죠. 이미 부처예요. 여러분 지금 육바라밀 겁나 못 하죠. 겁나 못한 안에서 우리는 불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사사무애라.

2:00 일과 일이 하나기 때문에 내가 이미 12지랑 진배없다라는 논리도 주장하실 수 있어요. 일과 일이 하나이기 때문에. 즉 이 일과 이 일이 에고 눈에는 차별성 있게 보이죠. 그러나 참나 차원에서 하나라는 거예요. 따라서 내가 몰라 하고 참나를 구현하면요 뭐 끊기고 모자라고 다 필요 없이 나는 참나대로 살았기 때문에 겁나 못난 보살이고 겁나 못난 부처로서 이미 부처라는 겁니다. 겁나 못남과 겁나 잘남도 둘이 아니다. 화엄경 논리는 이런 게 죽여요. 이미 다 하나하나 걸음마다 부처요 티끌마다 부처로다 해버리면요 못나면 못난 대로 불성만 담아 버리면 다 불성의 작용이 돼요. 그래서 이런 느낌이에요. 내가 지금 역량이 8급 밖에 안 돼서 8급으로서 불성을 드러내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부러 8급으로 불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냥 내가 오늘은 한 8급으로 살아 보자 해서 8급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사사무애, 일마다 다 하나로 불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역할을

3:00 한 것뿐이지 내가 못 나서 8급으로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갖고 있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무섭죠.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직 양심 오직 참나” 그러는 거예요. “오직 참나 오직 양심 오직 성령 안에” 살아가면 잘나고 못 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만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내 역할만 해주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더 마음 내는 건 다 욕심인 거예요. 사사로운 욕심. 내가 더 잘 나고 싶고 남보다 뒤지지 않고 싶은 이런 사사로운 거 다 떼고 나면요 그냥 내가 우주 참나의 한 분자로서 지금 여기서 내가 이렇게 손을 거들어주는 게 필요해서 손 거들어준 것뿐이에요. 8급에서건 9급에서건 뭐든지 필요해서 내가 그냥 해준 것뿐이에요. 그래서 일마다 서로 하나로 다 돌아가서 전체에서 내가 해야 될 역할만 해 준 것뿐이에요. 전체가 잘 돌아가서 여래의 사업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잘났다 못 났다도 없는 거예요. 사사무애라는 것은


4:00 내가 양심대로만 하고 참나대로만 작용을 일으켜 주면요 그 작용들도 이미 다 참나 덩어리이기 때문에 전체가 한 덩어리로 굴러간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요 결국에요 여기까지 다 알아내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교회는 몸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라 각자 자기 역할만 잘해주면 된다. 잘 났고 못 났고 중요치 않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 역할만 해줘라. 그럼 전체가 하느님의 사업이 이루어진다. 이런 논리랑 똑같은 겁니다. 지금 일과 일이 서로 융합한다는 게 그거예요. 우리는 부분의 지체로서 우리 역할만 충실히 해주면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불성의 작용으로 굴러간다. 그리고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 걸음걸음마다 불성의 작용이니. 여러분 보세요. 내가 8급이에요. 아 8급 언제 7급 되냐? 7급 언제 6급 되냐? 이건 에고의 관점입니다. 불성의 관점이에요. 8급 안에

5:00 8급의 걸음걸음마다 부처예요. 8급의 부처, 7급의 부처, 6급의 부처, 계속 부처는 거예요. 계속 부처로 사셔야 돼요. 사사무애와 걸음걸음마다 이미 다 부처의 경지요 걸음걸음마다 삼매다. 이게 화엄삼매거든요. 화엄삼매라는 건요 1지도 삼매, 2지도 삼매, 3지도 삼매. 걸음걸음마다 다 부처고 그 안에 다 불성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1주 안에 52레벨이 다 들어 있고요 2주 안에 52레벨이 다 들어있어요. 다 같은 불성의 작용이다. 한 불성이 1주로 모습을 나타내고 2주로 모습을 나타낼 뿐인 거예요. 이런 느낌의 주장이에요. 화엄경이 이런 논리를 설명해주는 데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각 지위마다 이미 부처랑 다 통해 있어요. 여러분 8급이다. 쪼실 필요가 없어요. 나는 8급 부처인 거예요. 내가 이번 생은 나는 오늘은 8급 부처로서 살다 가고 싶다. 걸음걸음마다 부처니까.

6:00 뭐 거기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지만 이미 부처라는 건 확고히 아셔야 돼요. 여러분 이미 부처예요. 공부 안 한 범부는 어떨까요? 공부 안 한 범부는 범부로서의 부처예요. 탐진치를 막 부리고 있어요. 탐진치 내고 있는 부처예요. 불성의 눈으로 보면 다 부처님. 그런데 그 안에서 닦아가야 돼요. 모두 부처인데 그 해인삼매, 닦아가는 과정도 다 불성의 작용일 뿐이다. 닦아가는 걸음걸음이 다 부처의 작용이다. 이건 화엄삼매입니다. 화엄삼매에는 닦아가자는 게 들어있어요. 해인삼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부처라는 거고 화엄삼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닦아가야 된다. 그래서 아공 법공만 얻어서, 법공으로만 세상을 보면 화엄삼매에 가까워요. 이미 다 부처인데 뭘 우리가 공부를 하고 안 하고 뭔 필요가 있나? 그게 아니라 구공까지 가고 나면요 닦아가야 된다는 게 나와요. 닦아줘야 맛이다. 닦아줘야 맛이지만 닦는 과정도 다 부처다. 닦는 과정도 다 부처예요.

7:00 다 삼매다. 이게 화엄경 논리입니다. 통현장자가 이런 화엄경 논리를 아주 정말 설명을 잘해요. 이분하고 그 청량국사. 그분들의 논리는 결국 이렇다. 걸음걸음마다 부처다. 여러분 화낼 때도 부처여야 되고, 남하고 실랑이할 때도 부처고, 온화할 때도 부처고, 다 부처여야 됩니다. 이것 또한 불성의 작용입니다. 알고 살아가시면 돼요. 그때그때 계속 양심만 쓰시면 됩니다. 정혜쌍수라는 게 늘 몰라 하시고 그 자리에서 제일 자명한 것만 선택하시면 정혜쌍수만 얻어도 이미 양심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1주만 해도 이미 됐다라고 인정을 하는 거예요. 이를 깨달으면 불과와 온전히 같으니. 이미 부처의 과보를 갖고 있으니. 바야흐로 원만한 원인이다. 자 이때는 분명히 씨앗 단계는 맞지만 이미 원만한 씨앗이다.

8:00 이 얘기입니다. 이미 원만한 씨앗이다. 왜? 이미 과보가 들어있으니까. 앞으로 얻을 과보가 이미 씨앗 단계에서 온전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씨앗은 씨앗인데 원만한 씨앗이다. 이미 온전한 씨앗이다 이 말입니다. 에고 차원에서는이런 말들이 다 말이 안 되는 말이에요. 근데 이치적으로 이해가 되시면 여러분들도 이제 같은 안목을 갖게 돼요. 각각의 물방울 속에 모두 바다가 있으며. 물방울 하나하나에 이미 바다가 다 들어있다. 각각의 레벨 안에 모든 불과가 있다. 그러니까 52레벨 안에 처음 믿은 그 순간에도 이미 부처가 다 들어있다. 자 보세요. 시간의 차별을 떼고 보면, 여러분 처음 믿은 그 순간 이미 부처가 되기로 예정돼 있지 않았나요? 시간을 압축해서 보면요 처음 믿은 그 순간이 부처가 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요

9:00 처음에 소설 단을 딱 잡았을 때죠. 그때 이미 저는 인생이 쫙 꼬였던 거죠. 그 후 꼬여서 여기까지 와요. 그 순간이 귀하고 귀하죠. 잡았는데 이미 그때 씨앗이 뿌려져서 그 씨앗 안에 과보가 들어있었다니까요. 현상계에서 시공을 다 펼쳐놓고 보면 다른 것 같지만 시공을 압축해서 보면요 그것 잡을 때 이미 오늘날의 저가 이 안에 씨앗으로 들어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처음 불성을 딱 보는 순간 원만한 부처가 된 그 모습도 이미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시공 떼고 보면 다 있는 거예요.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방울의 그 물 안에 이미 전체 바다와 그 바다를 이루는 한 구성 분자로서의 물이죠. 근데 단순한 구성 분자가 아니라 이 한 방울은요 모든 바다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한 방울입니다. 정보를 함蓄하고 있는

10:00 물 한 방울이 이미 바다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요. 바다에서 우리가 한 방울을 딱 떠도, 한 방울 물을 거기 바다에서 떼고 봐도 이 물은요 모든 바다와의 관계 속의 한 방울이지 그냥 한 방울이 아니에요. 모든 바다의 정보를 다 갖고 있는 한 방울 물이에요. 한 방울의 물에 바다가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한 레벨 안에도 부처의 경지가 다 들어있어요. 이게 이상한 말 같죠? 어떻게 말을 해야 될까요? 1주라는 건요 과거의 공부 10신을 전제하고 있고 앞으로 10행 10회향 10지를 다 전제하고 그 관계 속에서 1주예요. 1주 안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쵸. 초중고 과정 공부한다 그러면 초등 과정 공부 안에 이미 대학 과정까지가 이미 예비되어 있다니까요. 그 관계 속에서 초등이라는 게 있는 거지.

11:00 그렇지 않나요? 딱딱 끊어져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 공부하셔서 처음 믿는다고 해도 그 믿음 안에는 12지 부처에 대한 정보까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해 봐도. 상식적이지 않나요? 아무튼 개념적으로 이해해보자구요. 체험적으로 이해하시는 것은 또 직관을 가지고 더욱 더 풍성하게 이해하실 수 있고, 말로 해보죠. 말로 이해를 도와 드리려고 해도 이런 말씀이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 우주의 티끌 하나에도 우주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설명하면 되냐면, 제 안에 저는 저의 정보만 갖고 있을 것 같죠? 그런데 보세요. 지금 이 시점에 제가 여기 서 있어도요 땅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제 밑의 쪽에 대한 정보가 다 있어야 됩니다. 제 아래쪽에 있는 정보를 저는 다 갖고 있어야 돼요. 전제해야 돼요. 저를 위에서 비춰주고 있는 이 무수한 별들의 대한 정보도

12:00 다 저는 전제해야 돼요. 왜? 저는 그냥 이 지금의 저가 아니에요. 어느 별자리가 지금 어디서 비춰주고 있는 저죠. 어느 별자리가 어느 밑에서 또 저를 받쳐주고 있고 지금 이 지구가 어떤 상태로 저를 받쳐주고 있고 제 인간관계가 전후좌우 다 그 속에 저지 우주에 저 하나라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저에 대한 정보 하나를 캐도 그때의 우주 위에는 뭐가 있고 아래는 뭐가 있고 전후좌우 다 캐면 우주 전체가 복원될 수밖에 없어요. 물방울 하나에 모든 우주의 정보가 사실은 다 들어 있어요. 홀로그램처럼 일부의 정보만 갖고 있어도 전체상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고 이걸 인드라망의 구슬이라고 하죠. 인드라망은 인드라 신 제석천의 무기인데 그물에 구슬이 박혀 있잖아요. 그런데 이 구슬들이 서로 비쳐줘요. 얘가 얘를 비치고 얘는 얘를 비치고 서로 끝없이 비춰줍니다. 그래서

13:00 이 한 구슬 안에 모든 구슬의 정보가 다 들어 있다구요. 서로 끝없이 비춰주는 거예요. 우주에 존재하는 티끌 하나도 거기에는요 우주 전체를 전제하고 있어요. 그 관계 속의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1지 안에 이미 12지가 들어있고. 아시겠어요? 1주 안에 52레벨 체계에 대한 정보가 다 들어 있어요.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초등과정 안에 중등 고등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이해해 봐도 그렇다. 아시겠죠. 이런 말을 제가 이렇게까지 풀어드리지 않으면 물방울 속에 바다가 있고 “와! 말 멋있다” 하고 그냥 지나가신다구요. 멋있자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아셔야 돼요. 사실은 각각의 레벨 안에 모두 불과가 있다. 그러니까 1주에 성불할 수도 있는 거다 이거예요. 1주에도 이미 성불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부처가 된다라고

14:00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또 냉정합니다. 7지 이전에 모두 공용(인위적 노력)이 있으며, 8지 이상에서는 공용이 없다. 하지만 7지 이전에는 모두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육바라밀이 나오고요. 8지 이상에 가야 노력을 안 해도 육바라밀이 나온다. 레벨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주고 계세요. 7지 8지 이 레벨하고 지금 분명히 다르다는 거예요. 1주는 분명히 다르지만 다르면서도 그 안에 이미 성불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 얘기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불교 너희들이 견성해서 성불했다고 하는 말도 이치가 있다마는 이미 부처가 된 건 맞는데 온전한 부처는 아니다라는 거. 7지 8지 넘어가야 진짜 부처다. 이게 경고가 딱 들어있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지금 보세요. 여러분이 범부죠? 범부지만 이미 나는 불성을 갖고 있잖아요. 불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미 원만한 부처의

15:00 경지도 내 안에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마음만 돌이키면, 몰라 하고 한 번 마음 쓰면요 지금 이 순간에 12지 부처보다 더 마음 잘 쓸 수도 있다니까요. “나는 레벨이 이제 공부 시작이라 12지랑 나랑 아무 인연이 없어”라고 말하지 마시라고요. 모든 공부 과정에 12지 부처의 완벽한 경지도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몰라 하고 마음 내버리면요, 찰나찰나 여러분이 보살이 돼 주시면요 여러분이 찰나 낸 마음이요 우주 인과를 틀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찰나 여러분이 몰라의 마음으로 탁 해버리면 갑자기 그 순간에 우주의 12지 부처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질 수도 있다니까요. 그 격이 될 수도 있죠. 완벽한 부처가 안 나온다, 부처 없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여러분이 한 생각 딱 돌이키는 그 순간에 여러분한테 부처가 현신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 순간만은 찰나 부처의 화신이

16:00 될 수도 있어요. 왜?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물방울 안에 바다가 들어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 안에 하느님이 바로 등장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내가 레벨이 낮아서 뭐가 어쩌니 그거 다 떼고 얘기하자고요. 그거 다 감안하더라도 등장할 수 있다. 이거 재미있죠. 화엄경 공부하게 되면 머리가 막 이상해집니다. 이런 얘기를 계속 듣고 계시면요. 의상법사의 화엄일승법계도 거기 게송 보셔도 “삼세가 서로 하나요 하나 안에 모든 게 들어있고” 이런 얘기 다 나오죠. 그런 얘기들이 그거예요. 우주의 어느 작은 거 하나 잡아도 우주 모든 정보가 거기 다 들어 있습니다. 전후좌우 다 거기 존재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지금 저 은하계 끝의 정보 모르시죠. 은하계 끝의 정보가 그 근처에 알려져 있겠죠. 그 정보가 그 근처에 그 근처에 그 근처에서 여러분한테까지 다 알려지는 거예요. 이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알 수도 없는 은하계 끝에 저

17:00 어딘가의 정보가 이미 나한테도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그 전제 속에 살고 있다. 지금 그냥 사는 것 같아도 북극성이 현재 어디 있고 뭐가 어디 있고 그 순간에 살고 계시지, 그 관계 속에 살고 계시지 우주에서 그냥 여러분 혼자 계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도 모르지만 지금 저 어딘가에서는 별이 폭발했고 어떻고 어떻고 한 그 시점의 지금 여러분입니다. 그 모든 관계 속에서의 나. 여러분이 한 생각 한 생각 내주시는 게 무서운 게요 지구의 계속 보살심을 찰나찰나 자꾸자꾸 보살이 등장하게 자꾸 만들어 버리면, 우리가 몰라 하고 양심성찰 해버리면요 순간순간 중요한 순간에 지구에 자꾸 부처가 등장해요. 하느님이 등장해요. 그럼 과보가 달라져요. 근데 그거 얼마 안 된다고 방치해버리면 정말 저급한 시대로 가겠죠. 정말 이게 묘한 얘기입니다.

18:00 “내가 부처만 못하다”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한 생각에 한 찰나에 12지 부처도 다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범부 안에 부처가 또 있는 거니까. 여러분이 범부의 마음으로 살더라도 부처처럼 또 볼 수도 있는 겁니다. 부처의 힘을 끌어다 쓸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죠. 여러분 주변 사람들한테 서로 부처 되어주기 하셔야 돼요. 여러분 열 받는데 욕 한 번 참으시면 그 순간 부처죠. 가족 간에도요 사실 다른 가족들이 찰나찰나 부처로 화연해주니까 돌아가는 겁니다. 저희 준우만 해도 제가 호되게 뭐라고 해도 또 웃으면서 덤비잖아요. 얘가 찰나찰나 놓아주기 때문에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준우가 어느 날 방에 들어앉아서 안 나오고 꽁해 가지고 한 번 지적당했다고 막 한 품고 이러면 가정 꼬이는 겁니다. 근데 아이들 보면 찰나찰나 흘려보내고 또 웃고 나오잖아요. 사실은 부모가

19:00 과하게 화내는 경우 많잖아요. 자녀가 찰나찰나 그것을 풀고 또 나와 주니까 돌아가는 거예요. 이쪽도 또 내가 고집부리면 꼬여 버려요. 찰나찰나 몰라 하면서 육바라밀 쓰니까 지금 서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친구 간에도 그렇죠. 또 친구가 나한테 서운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때 친구를 단절할 수도 있지만 또 내가 한 번 풀고 갔더니. 계속 변하기 때문에 사람 일은 모릅니다. 아주 여러 번 지내봤는데도 아니면 아닌 거지만 또 여유를, 기회를 한 번씩 주는 거죠. 주고 가보는 거예요. 가보다 보면 나중에 또 여러분 “야, 그때 그 친구 끊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는 그런 날이 또 옵니다. 이렇게 찰나찰나 서로 북돋아주면서 계속 서로 정토를 만들어가는 이 원리가 있어요. 말로 참 설명하기 힘들지만 모든 경전에 나오는 건 그 원리예요. 그 원리 알고 쓰는 사람들이 지구에 많이 나오면 지구가 정토가 되는 거고. 요 원리에

20:00 너무 둔감하시면 양심 있는 사람도 막 화병 걸려 죽어요. 이거 뭐가 잘못된 거죠. 양심 지키려다 화병 걸려 돌아가시면 안 돼요. 우주 공식이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양심은 그런 화병마저도 풀어서 결과적으로 우주를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마음이지 순간의 화를 못 이겨서 스스로 자멸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 검토해 봐야 돼요. 내가 양심적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게 난 양심적인데 왜 이렇게 나 혼자 힘들지? 스스로 위안합니다. “내가 양심적이라서 그래.”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려놓고 또 돌이켜보고 몰라 하고 부처님 마음 돼서 또 보면요 자기가 갖고 있는 또 그게 있어요. 고집이나 한이 있어요. 또 풀고 풀고 가면요 지구에 찰나찰나라도 원만해진 부처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10신초 잠깐 부처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부처예요. 부처 봤잖아요.

21:00 부처 알았으면 됐잖아요. 그쵸. 여러분 미국 여행 한 번 갔다 오나 여러 번 갔다 오나 연륜은 다르지만 한 번 갔다 왔다는 게 어딥니까 갔다 온 거잖아요. 그게 내 기억 속에서 평생 나를 변화시킬 거 아닙니까. 나를 지배할 거 아닙니까. 달나라 한 번 갔다 오시면 여러분 두 번 세 번 안 가도 일생이 바뀔 것 같지 않으세요. 마찬가지예요. 부처를 찰나 만났다. 1초 만났다. 만났으면, 여러분 하느님을 1초 만났다면 평생 바뀌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알아 버렸으면 그 후 평생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막 처음 공부해서 처음 믿은 그 순간 안에 12지 부처의 경지가 또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이해를 해보시면. 이런 얘기 드릴 자리가 없었지만, 짧은 글이지만 화엄론에 이런 얘기들이 충만합니다. 그러니까 탄허스님 같은 분도 너무 재미있으니까 이거 알리려고 번역하시고 하신 거예요.

22:00 “내 생을 걸고 이걸 알리겠다.” “화엄경이 뭡니까?” 하면, “바다다. 바다랑 같은 거다. 진리의 바다다. 우주의 모든 게 거기 다 들어있다.” 또 성경 보신 분들은 성경이 바다라고 하실 거예요. 성경 안에 없는 게 없다. 성경에 없으면 진리가 아닐 것이다. 더 나가서 성경에 없으면 가짜다. 이렇게까지 가시면 안 되고. 그 맛은 아실 거예요. 그 안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 지혜의 바다. 진리의 바다. 근데 사실은요 화엄경이나 그런 경만 그런 게 아니고. 제약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살아 숨 쉬는 이 세상이 그대로 진리의 바다입니다. 경전들은 개념으로 그걸 설명해 주는 거예요. “니가 사는 세계가 사실은 하느님의 신비 속에 살고 있는 곳이야 불성의 신비로 돌아가는 곳이야” 하고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지시라고 제가 이런저런 말씀드려 봅니다. 그러니까

23:04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거 하나에도 우주가 다 담겨 있고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이 불성이 다 우주의 뿌리니까 불성에 우주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불성만 잘 챙기고 가면 우주의 근원 뿌리를 잡고 살아가는 게 되고, 우주의 근원적 관점에서, 현상계 안에서도 이런 이치를 다 알고 사니까 절대계에서 볼 때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요 일체라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덩어리예요. 둘이 아니에요. 낮은 자 높은 자가 있으면, 연극이나 이런 거 하셔도 낮은 사람의 역할 누가 해줘야 되잖아요. 낮은 자도 있고 높은 자도 있고 다 해줘야 돼요. 이 우주 안에서 각자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 하느님, 한 불성,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24:00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우주의 모든 게 들어 있다. 내가 볼 때는 별거 아닌 내 삶의 모습. 내가 요즘 사는 걸 보니까 매일 먹고 싸고 먹고 싸고만 하고 있다. “진짜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실지 몰라도 먹고 싸고 하는 삶에 부처의 삶도 들어있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을 자꾸 넓혀 가시면요, 정신 승리가 아니라 이치가 그런 거예요. 그 안에 다 있는 거예요. 뭐 빌게이츠도 먹고 싸고 먹고 싸고 하고 있는 거죠.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건희 씨도 먹고 싸고. 그분이라고 뭐 한꺼번에 햄버거 10개씩 먹을 건 아니잖아요. 먹고 싸고. 다 일정량 먹고 싸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삶이 비참하다 이런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서로 역할이 따르고 누구는 부자 역할, 누구는 좀 쪼들린 삶의 역할도 하는 거구요. 다만 그 안에 불성만 담기면 사실은 다 똑같아요. 하나로 돌아가요.

25:00 일체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아시면 안 되고, 불성 안에서 이 일체 세계가 나투고 있다는 것까지 아셔야 돼요. 아공 법공까지 아시면서 이 화엄경 논리를 아시면 정말 재미있고요. 화엄경 논리만 막 익히셔 가지고 일체 안에 하나 있고 뭐 이런 식으로만 논리의 대변론자 되시라고, 논리의 달인되시라고 이 얘기를 드리는 게 아니에요. 참나의 관점에서 이게 자명한지 한 번 생각해 보시라는 거예요. 참나의 관점에서 이 말이 자명한지? 참나의 관점에서 보면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 인과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 다 하나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서 여러분 살아가시면 “견성했을 때 이미 부처”라는 말도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찰나찰나 부처가 된다”는 것이 뭔지도 아실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에서부터 또 다시 볼까요? 아무튼 “1주에 이미

26:00 부처의 경지랑 동등하다.” 이 말도 아실 수 있고요. 근데 분명히 또 달라요. 다르면서 동등한 거예요. 근데 다르면서 동등하니까 일과 일이 서로 융합한다는 거예요. 분명히 일과 일은 달라요. 1주에 경지라는 상황과 12지의 경지라는 상황은 분명히 다른 상황입니다. 다른 일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사사무애라는 말이 이거거든요. 분명히 이 일과 이 일은 달라요. 다른데 일과 일이 하나로 만나 버려요. 하나가 되어버려요. 그 이유는 뭘까요? 보세요. 그러니까 사사무애 전에 이사무애를 먼저 논해야 되잖아요. 사는 진리의 작용입니다. 현상계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참나의 작용이에요. 그리고 그 참나는 아까 무생법인이라고 그랬죠. 생겨난 적이 없는 시공을 초월한 진리예요. 그 진리의 작용이니까 현상계가 정말 다양해 보이고 시공간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27:00 일으켜도 사실은 생겨난 적이 없는 진리가 이런 아공 법공의 시각에서는 이 순간 이런 모습으로 나툰 것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요 참나의 작용이란 관점에서 보면요 여러분 이렇게도 보실 수 있어요. “지금 내가 8급이고 7급 되려면 한참 또 고생해야 7급 된다”라고 보는 게 아니라 “지금은 내가 8급의 역할을 하고 일정 시간 뒤에는 7급의 역할을 한다.” 완전히 다른 사고죠. 조금 다르죠. 찰나찰나 지금 나한테 주어져 있는 재료로 그냥 멋진 불성의 작품을 만들 뿐인 거예요. 오버 안 합니다. 나 8급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러다 어느 날 7급이래. 그럼 7급으로 또 최선을 다해요. 무섭죠? 그러다 어느 날 1급이래요. 1급으로 최선을 다해요. 그럼 나는 어때요? 나는 늘 부처였던 거죠. 그렇죠. 나는 늘 부처였는데 내가 갖고 있던 재료들이 계속 좋아질 뿐이에요. 나는

28:00 늘 최선을 다해 요리하고 있을 뿐인데 재료가 좋아지고 솜씨도 나아져요. 불성 입장에서는 솜씨 또한 나한테는 재료예요. 솜씨가 좋네. 좋은 솜씨 가지고 또 만들어 봐요. 다 재료예요. 참나 입장에서 다 재료예요. 그때그때 인과가 다 재료예요. 그 인과를 가지고 멋진 작품을 계속 만들어가요. 이런 얘기가 황당한 생각인 것 같죠? 재미있는 거예요. 사사무애라는 것은 이사무애가 전제된 얘기에요. 일체의 일들은 다 진리의 작용입니다. 지금 보세요. 여러분의 모습 내 모습 다 일로 보면 다 다양하죠. 다 근원적으로 참나의 작용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됩니다. 한 덩어리일 뿐이에요. 우리 모두가 다 참나의 나툼일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일과 일이 하나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잘 났네 못 났네도 다 한 덩어리인 거예요. 참나의 관점에서 하나인 거예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한 성령 안에서 여러분 우리가 모두 한 몸의 지체일 뿐인 거예요. 이 관점이 지금 화엄경 관점이에요.

29:00 사도 바울의 관점이고. 그럼 성령 안에서 내 역할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자 이게 전제입니다. 불성 안에서 내 역할만 잘하면 1주가 12지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견성이고. 이게 다 한 덩어리가 돼서 돌아가요. 잘 났네 못 났네도 말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서로 다 관계 속에 존재하는 거고. 현상계적으로 봤을 때도 관계 속의 존재요 절대계랑 같이 봐서는 절대계의 나툼이 되는 이런 관점. 아공 법공에서 여기까지 이해하시면 대박이죠. 1주 보살 정도는 지금 이걸 이렇게 봐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1주에 경지에서 이걸 설명했잖아요. 1주 정도면 요 정도로 이렇게 우주를 관할 수 있어야 된다. 잘 났네 못 났네가 아니라 이 순간 양심에 최선을 다할 뿐. 이 순간 내 참나에 최선을 다할 뿐. 결과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야 알아서 오는 거고 오는 결과를 가지고 또

30:00 최선을 다해서 요리할 뿐. 이런 마음을 매일매일 다지시면요 생사도 넘어서는 그런 정신 경지에 도달하시지 않겠어요? 이럼 멋있죠. 그러니까 도인들이 많이 나오면 멋있어요. 꼰대들이 많이 나오면 세상 살맛이 안 나는 거구요. 여러분 나이 들면 티 납니다. 지금부터 공부 안 하시면요 나이 들면 이건 이제 숨길 수가 없어요. 과보가 그때 나타나거든요. 지금은 씨 뿌리는 단계라 여러분 티가 덜 나시는 거예요. 나이 들면 과보가 나타납니다. 무서워져요. 지금 과보가 이미 나타나신 분도 계실 수 있지만 과보가 나타나요. 그러나 아직 포기할 게 아니에요. 계속 씨를 뿌려야 돼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니까. 과보가 나타나면 무서운 거예요. 어느 순간 과보가 나타나 버려요. 부처님 그 법구경인가에 있잖아요. 악인들도 과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복이 있거든요. 잘 사는 줄 알아요. 선인들도 과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되게 고생합니다. 답이 안 보여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뿌린 것들이

31:00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하는 순간 달라집니다. 레벨이 서로 확 달라져요. 나이 들어간다는 건 사실은 인생에서 이제 열매를 맺는 단계잖아요. 그때 맺는 열매가 형편없을 수 있다는 거예요. 평생 떵떵거리고 살았는데 지금 고는 시인은 어떻게 해요? 제가 걱정이 돼서 “저거 어떻게 해야 돼요?” 무섭게 나타나죠. 과보가 탁 나타나면 무서워집니다. 과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냥 하늘이 그 사람만 엄청 사랑하는 것 같아요. 과보 딱 나타난 순간 갑자기 팽 당하는 것. 이게 노자가 말한 “천지불인.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그 뜻이에요.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가요 딱 냉정합니다. 양심 지키면 사랑해주다가 양심 어기면 바로 팽해버립니다. 무섭죠. 하느님은 늘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봐도

32:00 솔로몬이나 다윗도 잘하면 사랑해주지만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순간 바로 팽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일 저주 받은 데가 이스라엘이에요. 자주 하느님을 버리니까. 버릴 때마다 저주가 쌓여있어요. “니네 진짜 다 죽여 버릴 거야” 하는 그런 저주가. 하느님의 저주를 제일 많이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왜? 계속 버리니까. 사랑해줬다가 하느님을 버리면 바로 팽했다고요. 계속 반복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요 못 했어도 잘해 주는 게 아니에요. 양심 저버리는 순간, 하느님을 저버리는 순간 바로 그 과보를 누리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게 부모의 사랑이랑 똑같은 겁니다. 오냐 오냐 해줘서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막 뱉은 말씀들,

33:00 제 양심에서 지금 자명하다고 하는 얘기를 막 질렀는데요 잘 추스르셔서 잘 수拾하셔서 가지고 정리하시면, 1주 보살에서 이런 경지만 우리가 간다면 어느 종교 어느 철학의 입장에서 봐도 사실은 그 양반은 우주에서 좀 스스로 선 사람이에요. 완전히 선 것은 아니어도 주체적 판단을 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몰라 하실 수 있고. 즉 몰라 한다는 건 에고 입장에서 몰라지만 절대계랑 관계 속에서는 뭐죠? 에고가 몰라 해버린다는 얘기는 참나랑 바로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를 푸는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 참나랑 합일이 돼서 참나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거예요. 참나가 더 주체가 되는 관계를 회복한다는 거고요. 그게 선정이 잘 된다는 거고요. 지혜라는 건 결국 내 관점에서, 에고의 입장에서 지혜가 아니라 참나의 안목으로 항상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거예요. 매순간 양심한테 묻고 풀어가겠다. 그러면 아직 양심 잘하지는 못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1주는 답 나온 사람이라는 거예요.

34:00 이미 이 경지 안에 12지의 경지가 들어있는 거예요. 여러분 12지 가도 결국 뭘까요? 결국 몰라의 달인이에요. 몰라 하고 판단을 더 잘하실 뿐이겠죠. 똑같다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몰라 해서 문제 풀이한다는 방식은요 어떤 의미에선 12지 가도 결국 정혜쌍수입니다. 12지 가면 그 전보다 더 몰라를 잘하고, 더 불성이랑 연결돼 있고, 더 불성 뜻대로 판단할 뿐이죠. 본질은 같아요. 근데 놀라운 건 1주까지 안 가고 지금 여러분 학당 오면 신입반에서 뭐부터 가르쳐 드립니까? 몰라 하는 법, 양심 노트 쓰는 법. 그럼 이미 여러분 정혜쌍수의 기본은 다 돼 있어요. 거기에다 일단 제 강의 좀 들으시다 오시잖아요. 지혜가 아주 부족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벌써 제 강의로 이론적 배경 깔죠. 양심분석 실전적으로 해보죠. 몰라 진짜 되나 해보죠. 이미 정혜쌍수의 기초가 또 갖춰져 있습니다. 이게 우리식으로 말할 수 있는,

35:00 학당에 처음 오시는 순간, 아니 안 오셔도 돼요. 유튜브 강의 들으시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12지 부처의 경지가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그냥 누리시면 되는 거예요. 몰라 하고 양심성찰하는 것을 누리시기만 하면 이미 여러분은 안 부러워요. “나 이번 생에 언제 그 급수 면하나?” 이런 생각하실 필요도 없는 거예요. “나는 원래 부처인데 뜻한 바 있어서 지금 9급으로 행세하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9급으로 열심히 살아가시면 또 어느덧 또 8급 되어있는 거예요. 이거 어쩔 수 없어요. 왜? 뿌린 게 과보를 얻어 거두게 되면 그 위에 올라가 버리기 때문에 여러분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뿌리기만 하면 열매를 맺게 돼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열매를 안 받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뿌리면 과보가 와요.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화엄경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자 보조지눌스님 말씀으로 좀 정리하고

36:02 끝내죠. 오늘 막 큰소리치고 한 페이지의 반 나갔네요. 저도 뭐 안 됩니다. 재밌죠. 보조지눌의 원돈성불론이라는 게 사실은 통현장자의 화엄경에 기초한 선교합일의 회통론입니다. 자 그래서 점수. 자 이겁니다. 1주 때 돈오하고. 보조지눌스님은 돈오가 더 넓어요. 해오도 돈오로 봐요. 해오도 돈오고 1주의 견성도 돈오예요. 다만 여기 해오의 돈오는 지혜가 앞서는 해오니까 개념이 체험보다 앞서는 단계고. 체험은 있어요.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해오, 깨달음은 아니에요. 왜냐? 이때 이미 불성을 만나거든요. 체험이 있고 근데 불성을 만난 체험보다 갖고 있는 개념이

37:00 더 큰 경우는 머리가 앞서니까 해오라고 해요. 그런데 이때의 1주 돈오는 증오라고 해요. 증오는 증득해버린 깨달음. 이때 증득이라는 것은 이게 우리말로 자명입니다. 체험과 개념이 일치하는 경우. 내가 불성과 함께 살아가고 말로도 불성은 나를 떠나지 않는 자리. 이게 딱 만나요. 자 보세요. 이때 왜 앞서는지? 왜 해오인지? 딱 만나요. 불성이 시공을 초월한 자리라는 걸 알아요. “아 불성은 생사도 없구나” 하고 다 깨달아요. 근데 지금 나한테 불성이 없어요. 개념과 체험이 지금 충돌하죠. 체험은 했어요. 체험하면서 내가 개념적으로 알았어요. “불성은 시공을 초월해서 생멸이 없구나.” 여러분 잠깐만 부처 만나도 불성 만나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긴 생사가 없는 자리구나.” 근데 딱 선정에서 깨고 나니까

38:00 불성이 안 느껴져요. 개념만 남았죠. “아, 불성은 생사가 없는데 왜 난 불성이 없지?” 모순된 상태에 빠지면서. 해오 상태에서는 만났기 때문에 이미 인식은 바뀌어요. 개념이 바뀌어버려요. 근데 체험이 뒷받침을 못 해줘요. 지속적으로 불성을 못 만나요. 그러니까 개념이 더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가 더 빨리 되고 아직 온전히 내건 안 돼서. 여러분 십우도 보면 해오 단계가 어떻게 그려져 있냐면? 소년이 소를요 보기만 해요.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소를 어떤 한 부분만 봐요. 견우라고 합니다. 견우 단계. 증오는요? 소의 코를 뚫어서 내 것으로 해요. 득우의 단계. 십우도 보시면 이걸 여기는 득우라고 되어있고 처음에는 견우. 그전에는 소 발자국 찾아다니는 경지가 있어요. 소년이 아직

39:00 소는 본 적도 없어요. 그건 경전 공부만 하고 있다는 거예요. 글만 배웠다는 얘기고요. 개념 먼저 공부하다가 소를 봐요. 그럼 체험이 생겨요. 그래도 개념이 더 앞서요. 그런데 소를 내 것으로 하잖아요. 체험과 개념이 딱 만나요. 진짜 내게 돼요. 진짜 내 안에서 늘 참나를 만나면서 “참나가 늘 나랑 함께 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돼요. 개념과 체험이 딱 만나 버려요. 그리고 이제 한 번 더 개념과 체험이 만나면 1지가 되는 거는요 “내 안에 양심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당당해지는 거예요. 근데 1주는요 “내 안에 양심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게 꼭 그렇진 않아요. 내 안에 참나가 있는 건 맞는데 내 안에 양심이 있다라고 말하면 양심을 놓아 버릴 때도 꽤 많다는 거예요. 깨어있긴 한데 양심 못 챙길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내 안에 참나는 양심으로 생겼어. 참나 안엔 양심이 들어 있어”라고 말할 정도 되려면요 늘 몰라만 하면 내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게 느껴져야 되잖아요. 그 단계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40:00 1지는 몰라만 하면 내 안에 양심이 뜨끈뜨끈하다는 게 느껴져야 돼요. 잘하지 못 하더라도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 되고. 1주는 몰라 하면 내 안에 참나 있다는 건 알아요. 즉 공적영지가 늘 있다는 건 알아요. 지금 어느 단계인지 보면 아실 거예요. 근데 체험은 했는데 아직 온전히 내 것이 안 된 단계도 있구요. 요 단계를 다 거칩니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이래요. 자 이때(해오)부터 돈오가 일어나니까 이 이후는 사실 다 점수 과정이에요. 점수하다 또 돈오가 오는 거죠. 이때 돈오가 이미 이루어지니까 *보조 지눌, 원돈성불론.점수의 연기문을 요약해보면 ‘10신 초심’에서 먼저 깨달은 뒤에(해오). 10신초에서 즉 이 단계(해오)를 말해요. 해오에 이미 돈오를 해요. 해오 상태에서 이미 먼저 깨닫고 나서 해오를 하고 이때 이미 부처 불성을 본다는 거예요. 보조스님은 처음 믿고 얼마 안 돼서 이미 우리는 다 불성 만난다는 거예요. 돈오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때 이미 부처됐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거예요. 12지 가야 얻는 불성을 이미 봤기 때문에 이 단계에선

41:00 이미 나름 찰나 부처인 거예요. 능히 ‘지관’을 닦아서. 그 이후 능히 지관을 닦아요. 이제 불성을 본 이후 개념과 체험을 이제 끌어올리려면 어떡해야 돼요? 늘 지관. 지: 선정 수련으로 체험을 더 깊게 하고 관: 지혜 계발을 통해서 개념을 더 명확히 하라고 그래요. 이 두 가지 공부를 계속해나가다 보면 개념과 체험이 딱 만날 때가 오겠죠. 지관 공부를 닦아서 몸(색)과 마음(심)의 번뇌가 다하게 되면 이때가 이미 부처게요. 완전히 다한 건 아니지만 참나 안에서 늘 살아갈 정도까지는 때를 다 벗겨내요. 그러면 ‘10주초’에 이르게 된다. 1주가 된다. 1주 보살, 10주초라고 하는 건 1주를 말합니다. 10신초 그러면 1신을 말해요. 1신. 10신 중에 1신이 초죠. 10주 중에 1주가 초죠. 10주초에 이르게 된다. ‘정력’이 이미 이루어지니. 이때는 이미 선정력 이루어지니. 뭡니까? 참나 안주잖아요. 1주 보살의 특징은 참나 안주죠. 선정이 완성되어야 돼요.

42:00 그러니까 정력이 이미 이루어진다는 말하는 거예요. 선정의 힘이 이루어지니 그리고 ‘이해의 장애’가 모두 없어짐에. 이해의 장애가 모두 없어지니. 이건 정혜쌍수라는 겁니다. 아공 법공에 대해서 꿰뚫어보게 되니 이해의 장애, 지혜의 장애가 없어지니 증오하여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깨달음을 증득하여 1주 보살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① 10주 ② 10행 ③ 10회향 ④ 10지를 단계적으로 닦아서, ‘등각위’에 이르게 된다. 그 이후 10주, 1주부터 10주를 다 채우고, 10행을 채우고, 10회향을 채우고, 10지로 나아가서, 단계적으로 나아가 마침내 등각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등각이 사실은 11지인데 보조스님은 그냥 등각으로 끝내시는 거 보면 지금 등각 묘각 아울러서 쓰신 것 같아요. 궁극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불지에 이르게 된다. 이해되시죠. 오늘 읽은 이 세 구절이요 제일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1주에 견성해서 이미 부처가 된 다음에 12지 가서 더 완전한

43:00 부처가 된다.” 이게 기본 이론이에요. 유식학부터 이미 그렇게 돼 있다고 했죠. 1지가 이미 견도위인데 통달위라고 불러준다. 이미 통달을 했다는 거예요. 1지에 이미 통달을 했다. 이런 느낌하고 지금 만나요. 1지에 이미 통달했다. 그런데 지금 보조스님이나 천태종 화엄경의 대가들은 1주에 이미 통달했다고 봐도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1주에 이미 통달했고 그 이후는 점수만 하는 거다. 육바라밀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가는 것뿐이지 1주에 이미 불성은 다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난 걸 소화해내는데 이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뭐라고요? 우리는 여기까지 끌어와 보자고요. 10신초에 우리는 이미 부처다. 여러분 10신초보다 우리 학당은 더 빨라요. 오셔서 참나 체험하시고 양심노트 쓸 줄 아시면, 제 강의 좋아하시면 바로 신사 드립니다. 학당에서는 신사에 이미

44:00 구원받았다. 왜냐? 8급 7급도 좀 어렵거든요. 공부 좀 하셔야 돼요. 정말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오셔서 신사까지만 마음 내셔도 우리가 봤을 때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요 예전보다 상황이 더 좋잖아요. 여러분 스마트폰 들고 다니잖아요. 예전에는요 법문을 절에 가야 들어요. 평일에는요 못 들어요. 요즘은요? 인터넷 켜면 나와요. 계속 법문 듣고. 바빠진 것 같지만 오히려 여러분이 마음만 조금 내면요 훨씬 좋은 환경입니다. 늘 법문 듣고 틈틈이 양심성찰 하고 순간순간 몰라 하는 법. 예전 최상승선이라고 해서 소수에게만 공개되던 이 법이 다수가 다 알게 됐잖아요. 거기다 그건 진짜 비기인데 단학의 요결까지 다 까발려 놨잖아요. 저도 까발릴 때마다 혹시 천기누설해서 잡혀가지 않나? 뭔 일 나지 않나? 겁내면서 용호비결 썼거든요.

45:00 아마 그 내용이 엉터리거나 하늘이 봐 주거나 해서 안 잡혀간 거 같아요. 별일 없는 거 보면 내용이 엉터리일 수도 있습니다. 장담은 못 해요. 천기누설이 아닐 수도 있다구요. 아니면 천기를 루洩했는데 하늘이 지금은 이런 게 까발려질 시대라고 좋게 봐주셨거나. 예전에 안 돌던 내용을 공개한 건 분명히 맞아요. 아무튼 지금 이렇게 좋은 시대입니다. 돈 만원 내면요 예전에 비급이라고 하던 거 그냥 여러분 다 보실 수 있는 시대예요. 유튜브에 또 얼마나 좋은 자료들 많이 올라옵니까? 정보의 바다죠. 뭐든지 취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시대에 공부를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예전에는요 여러분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스승을 찾아가야 되고 10리 100리 찾아가야 돼요. 가서도 인연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고 또 가짜면 못 만납니다. 어느 산에 들어가서 오늘 도사를 만나야겠다. 어디를 가실 거예요? 소문난 데 가요.

46:00 지리산에서 어느 봉우리에서 도인을 본 적이 있다. 그 봉우리 찾아가보는 거예요.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님이 젊어서 신선 만나겠다고 엄청 돌아다니셨는데 못 만났어요. 다 포기하고 다시 고향 와서 마음 비우고 도 닦다가 견성하시죠. 가보니까 다 사이비들이고 얕은 기술 하나 갖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소문이 과장된 경우가 태반입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못 만나요. 지금은 얼마나 정보가 많습니까. 그러니까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 강의 들으시고 양심성찰 하시고 몰라만 하셔도 이미 부처고 이미 구원받으셨습니다. 이미 성령이 임하세요. 교회 가셔야 성령세례 받는 게 아니라 교회 다니셔도 성령 모르면 구원을 영 못 받으시는 거예요. 교회 안 가도 지금 내 안에 성령이 느껴져야 세례를 받은 거죠. 불성이 느껴지고

47:00 성령이 느껴지시면, 찰나라도 느껴지시면 여러분 된 거라니까요. 그 마음으로 찰나찰나 살아가세요. 그러면 이런 분은 이미 불지의 삶을 살고 계신다. 이미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계신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서 이미 천국이다. 다만 온전한 천국을 향해 갈 뿐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