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16강

홍익학당 아카이브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부제 식인편識仁篇
강의일자 2016. 09. 24. 土.
게시일자 2017. 07. 13.
동영상 길이 55:43
강의 중 인용 도서 식인편(識仁篇)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abE_DKzata0



00:02

늘 마음관리 하시면서 몰라 괜찮아만 하셔도요, 대단한 게, 몰라 괜찮아만 해도 양심 나오게 하는 단계까지 가야 돼요. 그럴려고 지금, 몰라 괜찮아만 하고 계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목표는 몰라 괜찮아만 했을 때 양심 나오는 거예요. 몰라 괜찮아 했을 때, 몰라 괜찮아만 했을 때 여러분 안에서 양심이 들썩여요. 금 근심 걱정도 초연해지고 근심 걱정에서 떠나니까 양심 안 나오겠습니까? 짐 욕심이 약해졌는데 욕심이 마비되고 있는데. 진통제거든요. 몰라 괜찮아 땜에 욕심과 편견이 지금 마비되고 있는데 양심이 안 살아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양심 살아난 첫 번째 징표로 걱정이 사라지고 편안해져요.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이 충족 안 됐는데도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그래, 근데 문제는 我空이나 닦는 분들은 여기서 멈춘다는 거예요. 이 기분 알딸딸하고 좋을 때, 딱 요 때가 “내가 이거 얻을라고 공부했구나.” 하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지 마시고 여기서, 양심이 뭐라고 내 안에서 지금 주장하는지 따라가 보셔야 돼요. 양심이 뭘 할려고 하고 뭘 옳다고 하고 뭘 할려고 하는지. 이게 良知良能이죠. 이게 양심이 갖고 있는 良知 지적판단과, 良能. 지·능이 있어요. 전지전능한 힘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게 이거예요. 이걸 유교에서 良知良能 그러면 전지전능이에요. 여러분 양심은 원래 퍼펙트하니까 양심이, 시비지심을 통해 “뭐가 옳다. 뭐는 아니다. 뭐는 자명하다. 뭐는 찜찜하다.” 바로 나와버려요. 양심에서. 양심에서 “그거 하자.” 하고 바로 나와버립니다. 그 증거가, 부당한 걸 보면 바로 분노하구요 잘못된 걸 보면 바로 부끄러워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보면 바로 측은해합니다. 남을 보면 바로 겸손하구요. 바로 바로 나와요. 바로 바로 선악 따지고 있고. 문제는 에고가, 에고가 뭐로 막아요. 무지와 아집.

02:00

무지가 자꾸 잔꾀를 부려요. 자신의 편견을 갖, 주장하면서 자꾸 잔꾀를 부려요. 요게 다 망칩니다. 아집과 잔꾀, 아집과 편견이 다 망쳐 놔요. 그래서, 그런데 문제는 거, 건 괜찮아요. 지금 이거는 원래 그렇게 살았던 거고. 우리가. 안(양심)에서 회생 가능성을 보는 거죠. 지금 뭐 중병 걸리셨는데 문제는 짐, 중병은 이미 걸리신 거고. 회생 가능성이죠. 안에서 끝없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안에서 끝없이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몰라 괜찮아만 해도 사실은 다 나와야 돼요. 몰라 괜찮아만 했을 때 양지양능이 다 나오면 聖人이에요. 까 성인은 몰라 괜찮아만 해도 돼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만 하시면 안 되는데 성인은 몰라 괜찮아만 해도 돼요. 왜냐, 몰라 괜찮아만 해도 나와버려요. 왜냐, 그게 습관화 돼 있기 때문에. 데 지금 여러분 문제는, 안에서 양지 양능은 똑같이 올라온다는 거예요. 성인처럼 올라오세요. 문제는, 이게 지금 습관화가 안 돼 있어요. 겁, 금 뭐냐. 양화가 악화를 구축해 내야 되는 거예요. 밀어내야 되는. 지금 惡貨가 꽉 차지하고 있어요. 여러분 마음을 에고의 못된 습관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무, 그 습관이, 무지와 아집의 습관이 차지하고 있어요. 근데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지양능은 전혀 거기에 장애받지 않고 터져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그거를 현실에서 여러분이 응원해 주실 때만 습관이 교정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상한 습관들 있죠. 양심에 크게 어긋나는 거 아니면 그거 고칠려고 하지 마시구요 6바라밀 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여러분 그 이상한 습관 고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세요. 웬만하면. 크게 문제 안 되면 그냥 그렇게 사시고 양심에 크게 어긋난 것만 고치세요. 왜? 그냥 양심 하자는 습관 하나만 더 들이세요. 양, 보세요. 몰라 괜찮아 하시면 여러분 안에서 똑같이 양지 “이거 좀. 이게 더 자명한데.” 이 느낌이 있어요.

04:02

왠지 이렇게 해야 될 거 같은 게 있다구요. 할 만한 게 있어요. 할 만한 게 있고 알 만한 게 있어요. 요거를 따라가 주시면 되는 건데 보통 안 따라간단 말이에요. 왜? 욕심에, 욕심이 이미 습관화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 가던 길로 갈려고 그래요. 그거를 조금 제동을 걸고 양심의 뜻 한 번만 들어봐 주면 그게 깨어있음이에요. 결국 깨어있음은요, 우리가 흔히 이 에고를 초월해서 양심각성 하는 것만을 깨어있음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유교에서는 깨어있음을 敬이라고 합니다. 이 敬이 깊어져서 참나, 참나 그대로 살아가면 誠 그래요. 말이 이루어졌다고 그래서 誠. 敬은, 이거는 몰입, 몰입 1단계부터 이 4단계까지 에고를 몰고 가는 거고. 誠은 시, 4단계에 도달해서 신바람이 나고 있는 상태예요. 양심과 하나된 상태. 誠은 내 노력이 필요 없는 단계고 敬은 노력이 필요해요. 마음을 하나로 잡아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 경건할려는 노력이 있어요. 敬은. 誠은 하느님과 하나 된 상태예요. 그래서 천주교로 치면 묵상(敬)이고 관, 관상(誠)입니다. 관상에선 노력이 필요 없어요. 하나님과 함께 그냥 즐기시면 돼요. 여기서 노력을 부린다는 거는 오히려 망상이에요. 하느님과 하나로 이미 돼 있는데 거기서 하느님 찾겠다든가 이러면 다 망상이에요. 그래서 불교에서 살불살조 하라는 거예요. 여기서는 부처도 조사도 다 여기선 죽여야 돼요. 놔야 돼요. 그래야 하느님을 만나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을 죽여야 돼요. 이런 말 하면 막 큰일나는 줄 아는데 무지의 구름 같은 수도자들이 쓴 책 보세요. 하느님에 대한 어떤 생각도 다 버리라고 돼 있. 그건 다 죽여야 되는. 내가 만든 相이기 때문에. 다 똑같애요. 여러분 이렇게만 정신을 몰고 가면 내 안의 양심이 터져 나옵니다. 이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거예요. 여러분 뇌가 건강하고 명상이 잘 될 때 뇌는 자비롭고 지혜롭고 몰입을 잘 합니다. 6바라밀을 다 갖추고 있다구요. 이건 과학, 과학적으로 이미 다 입증된 얘깁니다.

06:02

예전 어른들은 이걸 알아낸 거죠. 여, 영혼의 실험을 통해 알아낸 거죠. 그럼 이게 양심의 달인 되는 법이 어렵지 않죠. 몰라 괜찮아 해서 내면에서 뭔가. 양심, 양심아. 하고 물어보세요. 평소에 이렇게 기도하세요. 기도를 여러 개 얘기해 드리면 안 되는데 아무튼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이렇게 하세요. 딱 양, 몰라 괜찮아 한 다음에 양심 상태에서 “사랑아. 정의야. 내 안에 있는 사랑아. 정의야. 예절아. 지혜야. 몰입아. 성실아. 나를 인도해. 인도해 주오.” 이렇게 한 번씩 기도해 보세요. 자꾸 내면의 그 긍정적 힘을 북돋아 주시면요, 그냥 긍정이 아니고 자명한 긍정의 힘을 북돋아 주시면 여러분이 살 길을 여기서 이미 알아요. 가르쳐 준다구요. 그대로만 하시면 돼요. 까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에 귀를 기울여 보고. 이게 양심성찰입니다. 그걸 돕는 것뿐이에요. 6바라밀 분석이라던가 양심노트 분석은요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구리, 귀 기울이는 방식이지 억지로 분석하시면 안 돼요. 금 그건 잔꾀예요. 여러분이 잔꾀로 분석하는 게 있습니다. 자기를 합리화 하고. 교묘하게. 예. 분석을 통해서 상, 죄를 상대방한테 전가하고 자기는 빠져나온다던가. 이런 분석 하면 뭐 합니까. 이게 잔꾄데. 다. 이해되시죠? 솔직한 소리 들을려고 명상하는 거예요. 몰라 괜찮아 한 다음에, 까 무슨 깊은 삼매에 들려고 명상하는 게 아니에요. 원래 聖人들은. 양심의 소리 듣고 싶어서. 에고 소리 좀 끄고 양심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서 명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견성이 중요한 건, 견성이라는 건 여러분 양심을 만났단 얘기예요. 그런데 그게 我空 法空 차원에서만 얘기하면요 단순한 낮은 단계의 법공, 그리고 아공에서만 얘기하면 그냥 “내가 우주의 근원.”이니 “내가 하느님.”이니 하고 끝나버린다구요. 거기서 어떤 신성한 게 안 나와요.

08:00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거예요. 양심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견성이라는 건 양심 각성하는 거고 우리가 이제 이 6바라밀 실천한다는 건 양심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살아가는 문제고. 그래서 별 게 아니에요. 그냥 여러분 먹고 살아가는 문제고. 늘 몰라 괜찮아 해서 양심의 소리 들으면서, 우주의 근원인 내 마음의 근원인 양심과 함께, 어, 모든 거를 판단하고 실천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전부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갖자. 이겁니다. 그런 분들이 이 양심지킴이고, 이 보살이고 군자고 선비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짐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에서 인제 요 말씀 드린 게, 이게(판서의 내용) 다예요. 유교적으로 얘기해도 불교적으로 얘기해도 이게 답니다. 그래서 그,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몰라 괜찮아 하시고. 일단 몰라 괜찮아가 안 되면, “몰라 괜찮아”라 하니까 꼭 그 방법만 제가 미는 거 같으니까, 아무튼 양심각성이요. 여러분이 하시는 어떤 명상법도 좋아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여러분 내면의 존재를 각성하게 하는 방법이면 뭐든지 좋아요. 저는 그거 그냥 몰라 괜찮아로 그냥 대명사로 쓰는 겁니다. 내려놓고. 에고의 편견 욕심 내려놓고 여러분 내면의 존재감에 집중할 수 있으면 충분해요. 그래서 유교에서 양심을 뭐라고 부르냐면 허령지각 그럽니다. 虛靈知覺. 텅 비고 신령하게 지각, 알아차리는 자리. 그냥 이게 다예요. 엄청난 도덕적인 자리가 아니구요, 모든 도덕이 여기서 다 나오는데 모든 도덕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 자리를 설명할 때 “텅 비어서 신령하게 알아차리고 있다.”라고 설명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까 여러분 내면에서 모른다 하고 앉아 계시면 “내가 뭐 이케, 그렇게 善해보이지 않는데. 이 자리는.” 텅 비어서 알아차리고 있다는 게 모든 善의 토댑니다. 거기, 그 자리에서 여러분 판단하시고 그 자리에서 실천하시면 모든 양심이 다 나오게 돼 있어요. 문제는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고요할 땐 그 자리 지키고 있다가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여러분 편견과 아집으로 쭉 끌려가 버려요.

10:04

그래서 학당 오시면 이거(무지와 아집) 털려고 오시는 거예요. 명상하는 법 배우시고. 명상을 왜 배워요? 진통제 그냥 한 방 맞을려고 하는 게 아니구요 양심각성할라고 하시는. 그 다음에, 근본적 치료는 뭐가 해요? 양심을 따를 때 치료돼요. 그래서 여러분 이게 둘이 아니에요. 몰라 괜찮아 하시면서 늘 양심 돌아보시면 양심과 양, 이 6바라밀이 양지 양능이 어떻게 둘이에요? 함께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몰라 괜찮아만 하셔도 사실은 양심이 각성되고 들썩인단 말이에요. 활성화 된단 말이에요. 그 때 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라 주시는 그 깨어있음, 이 敬을 단순히 명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양지양능, 양심 전체적으로 다 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깨어서, 깨어서 욕망이 침범할 때 깨어서. 그래서 희노애, 이 뭔 일 없을 때는 욕망을 내려놓고 그냥 나에 대한 몰입, 양심에 대한 몰입만 하셔도 되지만. 뭔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을 양심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몰입해 주시는 게 또 敬이죠. 욕심에,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양심 50% 이상 지켜 주는 게 깨어있음이고. 뭔 일 없을 땐 양심 각성하는 게 그, 몰입의 핵심이고. 무슨 일 하실 때는 양심을 실천하는 게 몰입의 핵심이에요. 매사에 몰입 아닌 게 없습니다. 몰입으로 다 하셔야 돼요. 몰입은 신바람 날 때까지 가야 진짜 몰입이고. 양심이 드러나, 이 드러나서 작동해야 진짜 몰입이고. 이렇게만 구분하시면. 지금도 여러분 가만히 계시더라도 몰라 괜찮아 한 번 더 해보세요. 몰라 해 보시고. “지금 여기.” 하시면서 여러분 내면의 양심에 꽤 관심을 좀 더 줘 보세요. 50% 이상 줘 보세요. 금 보고 듣고 다 하시지만 우주를 통으로 觀하는 자리에 서게 돼요. 이 양심 자리는요 여기는 정, 물질의 세계 정신의 세계, 이렇게 나눠볼까요?

12:04

여기가 물질의 세계구요 여기가 정신의 세계면요 이 양심은요 우주의 근원 자립니다. 마음과, 예, 물건의 더 근원이에요. 그래서 이 양심 자리에서 물질 운영하는 원리, 5행의 원리를 제시하고. 동양에선 5행으로 보죠. 정신을 경영하는 원리도 5행으로 제시하는 겁. 그래서 결국 이 자리에서 우주, 우주가 다 나와요. 우주 원리가 저기 다 들어있. 그거 확인하는 작업이에요. 지금 이 얘기 듣고 다 좋으시, “아 좋다.” 막 “내 생, 내 마음 같다. 내 생각 같다.” 그러지 마시고 확인해 보셨, 실험을 통해 확인하세요. 실험은 각자 하셔야 돼요. 여기가 무슨 과학 실습시, 실습시간 같은 거예요. 그, 재료는 드릴 테니까 실험은 여러분이 하세요. 재료도 드리고 방법도 가르쳐 드리니까 실험은 여러분이 하셔서 보고서를 쓰세요. 그 보고서가 여러분의 그 이 실력을 체크하는 그게 됩니다. 기준이 돼요. 여러분 그 견성이니 뭐니 해도 꼭 글로 논문 안 써도요 논문 쓰셔야 한 레벨씩 올라갑니다. 학당은 그거 도와드리는 거예요. 학당에서 하는 거에 힘들어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여러분 참나한테 논문을 제출하는 거예요. 제가 진솔하게 “난 여기까지 압니다. 여기까지는 하겠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학당에서 이케 지도하다가 힘들 때가 뭐냐면요 그걸 자꾸 이케 포장하실 때 힘들어져요. 서로. 한 쪽이 자꾸 포장해 버리면. 예. 보면 이, 이 분이 그걸 모르시는 거 같은데 개념으로만 알고 계시는 거 같은데 본인은 안다고 자꾸. 메타인지에 오류가 있는 거죠. 그럼 이 경우 서로 난감해집니다. 그래서 제일, 학당에서 보는 제일 상근기는요, 여러분 그 뭘, 뭐 수행 잘 하고 뭘 신비체험 잘 하고 말 잘 하시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학당에서 보는 제일 상근기는 알면 안다 그러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분이 제일 상근기에요.

14:02

메타인지가 제일 건강한. 메타인지가 얼마나 건강하냐를 봐요. 모르는 건요 그냥 제가 그건 가르쳐 드리면 돼요. ㅎ 과외를 해서라도 가르쳐 드릴 테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데 메타인지가 건강하지 않은 분 한테는 뭘 제시해도 다 왜곡되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화가 더 안 되고 지도가 안 일어나요. 그래서 지도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영적 성장이 멈춰 있다는 거죠. 후퇴하고 있다, 오히려 후퇴해요. 에, 저희가 그 분을, 저희도 이제, 아니 저희도 책임지고 맡았는데 그 분이 잘 되길 바라지, 그 분이 지금 시간과 정력을 엄한 데서 낭비하고 계시길 바라겠습니까? 데, 저희가 치료가 안 되면 빨리 다른 병원에 보내드리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으로 저희는 봐요. 왜냐면 여기서 어, 우리가 “치료도 안 되는데 우리 병원 더 다니게 해라. 돈이라도 받게.” 이런 마인드로 접근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봐서 안 되겠으면요 뭐라고 이케 조언해 드리고 더 강력한 조언도 해 드리고 합니다. 그거 싫어하지 마시구요 그거 극복하시면 여러분 업장을 터는 일인데. 지금 업장 터는 게 쉬, 이 장난인줄 아세요? 업장 하나 턴다는 게 여러분 제일 친한 거를 버리는 거예요. 정말 그거 없으면 죽겠는 거를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무덤덤해지면서 내려놔질 때 여러분 영성이 한 번 점프합니다. 지금 갖고 계신 편견들요, 그 잔꾀들 정말 여러분과 그냥 일심동체가 돼서 짐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에요. 요거 지금 내려놓는 게 이거 이별하는 게 쉬운지 아세요? 거기 갑자기 낯선 학당이 들어와서 이 둘 사이를, 나랑 이 편견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게 치욕적이죠.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걸 불교에서 忍辱바라밀 하는 겁니다. 그, 저 치욕을 이겨내야 되니까. 저 치욕 이겨낸 분만 올라갑니다. 인욕 한 분만 올라가요. “내 편견은 딱 이랬고 나는 우주가 딱 이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저 말이 자명하다.” 할 때 ㅎ, 자명해서 받아들일 때 인욕바라밀이 이루어지면서 여러분이 점프해요.

16:05

근데 전 안타까운 게, 이 과정이 좀, 좀 그래요. 아무튼. 이케 제가 봐도 이, 쉬운 얘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저희가, 제가 이제 쉽고, 강의 때, 강의만 들으시면 쉽고 그냥 다 내 마음같고 하실지 모르지만. 지도를 저희가 해 드리게 되면 저희도 힘들어지고 여러분도 힘들어져요. 그래서 아무튼 지도에 임하는, 지도를 받는, 임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오직 자명한 것만 따르기로 서로 서약을 해야 돼요. “자명한 거만 따릅시다. 다른 부수적인 거 보지 말고 자명하면 인정합시다. 고 솔직히 모르면 모른다고 합시다. 알면 안다고 합시다.” 이게 어려워요.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지식인들 다 만나고 다녀보니까 한 놈도, 모르는데 모른다고 하는 놈이 없는 거예요. 자기만, 소크라테스만 모르면 모른다고 얘길 하더라는 거예요. 이게 4대 성인 중에 한 분을 만들어 낸 힘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논어에 子路한테 공자님이 “자로야 내가 지혜를 얻는 법 가르쳐 줄게.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라. 이게 진짜 아는 거다.”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분이 무슨 지혜를 얻어요. 자기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는 분이 무슨 지혜를 얻어요. 지혜는 자명한 앎인데. 이렇게 벌써 왜곡이 돼 있으면 힘들어져요. 그래서 제가 짐 걱정돼서 말씀드립니다. 이 쉬운 길을 제일 어렵게 가는 법이 있어요. 아는 거 모르는 거 섞어버리면 제일 어려워져요. 근데 아는 것만 자명한 것만 추리시면 이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단 말이에요. 쉽단 말이에요. 그냥 내 양심은 계속 자명 찜찜 신호를 안에서 보내고 있는데요. 제 얘기를 믿으라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 양심이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왜 그 신호를 못, 그 받아들이시냐는 거죠. 여러분 내면과의 대화가 안 되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여러분 내면하고 소통하시라는 거예요. 내면하고 소통하시면 문제가 다 끝나요.

18:02

내면하고 소통하면서 그대로 살아가면 그냥 성인이에요. 전 세계 성인은 자기 내면의 양심하고 늘 소통하고 있던 분들이에요. 금 중생은, 소통이 잘, 어쩌다 한 번 소통이 일어나는 분들. 君子는 이, 비교적 중생보다는 훨씬 잘 일어나는데, 예, 안 될 때가 많은. 賢者는 소통이 되는 게 훨씬 많아요. 聖人은 늘 소통이 되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처럼 나, 나, “나의 말과 행동은 다 나를 보낸 아버지 뜻대로 하는 거다.”라고 말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정도예요. 거기를 우리가 목표로 하는, 가는 겁니다. 그래서 꼭 거기 안 가도 좋아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양심하고 소통했으면 그게요, 그게 이 敬에서 정성으로 가서 여기서 희열이 일어납니다. 신바람이 나요. 誠에 들어가면 신바람이 나요. 그래서 敬의 극치죠. 敬의 극치가 결국 誠이고, 誠 단계에 들어가면 우린 양심과 하나 된 그런, 이런 황홀, 황홀감이라면 황홀감이고, 그런 홮, 내면의 화평이 일어나요. 양심과 하나 되면 여러분 걱정이 사라집니다. 하느님하고 하나 되는 거랑 똑같으니까 걱정이 사라져요. 데 요 기쁨을 계속 맛보고 사시라는 거예요. 기쁨을 맛보자. “그 기쁨을 나누자.”예요. 사실은. 기쁨을 늘 맛보자. 내면에서. 지금 이 순간 샘솟는 그 영원한 기쁨을 맛보자. 그리고 그 기쁨과 함께 살아가자. 즐거운 얘긴데 이게 힘들어져가는 거는요 이 인간의 이 무지와 아집을 극복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사실은. 그래서 좀 감수는 하시라. 다만 어렵게만 생각하실 게 아닌 게 매순간 내면에서 이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올라오고 있다는 거 아셔야 돼요. 이게 다른 종교에서 “하느님이 지금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신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랑하신다.” 이런 게 이런 거예요. 결국. 양심은 우릴 포기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아무리 막 살아도 저 내면에서 양심이 또 외칩니다. 그러지 마라고.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따라가 보시는 게 어떤가.

20:00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무지와 아집을 양심의 힘으로 극복해 가는 삶. 시작은 몰라 괜찮아 하면서 양심한테 관심을 주는 걸로 시작, 양심을 관이, 양심에 관심을 주고 몰입해 주는 걸로 이 내면에서 엄청난 힘이 터져나온다. 그 힘도 자꾸 쓰다 보면 계발된다. 안 쓰는 습관을 쓰는 습관으로 바꾸자. 요것만 여러분이 해 주시면, 예, 안에서 힘이 나옵니다. 안에서 자명하다고 하는 거지 여러분이 억지로 분석해서 만들어내는 자명은 다 의미 없어요. 그걸로 하늘을 속일 수가 없어요. 하늘은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이미 “이게 양심 어디에 어긋나서 죄.” 하고 이미 판정 끝나서 과보까지 이미 예정돼 있는데 여러분이 분석하면서 그거를 粉飾해 가지고 이쁘게 그리면 이게 됩니까? 하늘이 ㅎ 속습니까? 안 속아요. 하늘은 한 번 더 죄를 물어요. “저거 반성도 안 하고 이제 합리화까지 하고 있네.” 여기서 반성이라도 들어가야 이게 과보가 바뀔 텐데. 이해되시죠. 이게 이제 핵심입니다. 자, 이 분위기에서 識仁篇 한 번 읽어볼까요? 제가 미리 설명은 다 드린 거예요. 자, 근데 이거를 지금 우리가 하는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랑 연결지을려면요 요거 하나 더 생각해 보시죠. 자, 일체 만물에, 일체 정신과 물질에, 자, 양심이 여기서는 物理, 사물의 어떤 물리의 보편법칙이 나옵니다. 사물의 세계에 적용되는 이 陰陽五行의, 陰陽까지 할게요. 陰陽五行의 구체적 법칙들이 나와요. 그리고 이 정신을 통해서는요 이런 윤리적인 보편법칙. 물리적인 보편법칙이라면 여긴 윤리적인 보편법칙. 仁義禮智를 어떻게 정신을 통해 구현할 건가.

22:01

인의예지를, 사물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가. 결국 여러분이 연구하셔야 되는 건요, 자, 이, 이 분야(物)를 연구하는 게 과학이죠. 자, 과학 탐구를 통해서는요 양심의 원리가 현상계에서 물건들을 통해서 어떻게 창조원리가 구현되고 있는가예요. 또 한 편에서 나는 그럼 어떻게 윤리적으로 이 세계에서 善을 추구하고 惡을 피할 건가 이겁니다. 이 두 개를 다 알아야 돼요. 여긴(心) 철학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과학과 철학이 결국은요 이 근본원리는 하나구요 구체적 보편법칙이 달라집니다. 적용하는 세계에 대해서. 그래서 물리세계에서는요 여러분이 이제 이런 이 현상을 관찰하면서 물리세계를 다 알 수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 시대에 우리가 꼭 필요해, 알아야 되는 것들만 아시면 돼요. 정 궁금하시면 EBS 틀어놓고, 다큐랑 EBS 넘나들면서 계속 보시면 사물의 원리들이 많이, 가르쳐 주죠. 자, 사물의 원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들은 알아야 돼요. 자, 우리 삶에 편리하니까. 이거는. 그리고 이거는. 여러분이 이건(물리) 편리하게 살려면 반드시 알아야 되고 이거(윤리)는 제대로 살려면, 올바르게 살려면 이거 아셔야 돼요. 물리법칙을 아무리 꿰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게 불교적으로 말하면 다르마죠. 다르마. 이게 근본원리니 보편법칙이니 하는 게 다 법입니다. 자, 法의 본체가, 양심 안에 법의 본체가 있기 때문에 법의 작용이 있어요. 모든 만물이 일체 만법이, 만법이죠. 지금. 만법이 나와요. 여러분 양심에서 만법이 펼쳐져요. 그러면 법 중에 제일 법이 뭐예요? 만법 중에 제일 핵심이. 예, 6바라밀입니다. 6바라밀. 그래서 여, 예전에 그 裴休라는 분이 그, 圭峰宗密禪師 서문 쓸 때 그, 그분 글 서문 쓸 때 “一心이, 한 마음을 쪼개면 三學이고 펼치면 6바라밀이고, 이제 완전히 그 흩어지게 하며는 만법이 나온다. 거기서.”

24:03

결국 핵심이 뭐예요? 이게 똑같애요. 동양이랑. 천지만물을, 핵심이 뭐예요? 천지만물의? 陰陽五行이고 불교에서 만법의 핵심이 뭐예요? 삼학 6바라밀이요. 6바라밀 안에 다 들어있어요. 6바라밀을 더 줄이면 3학이에요. 戒定慧. 깨어있음, 보세요, 줄이면 이거 3학이잖아요. 깨어서 양심과 하나가 되고. 戒定. 定으로 스, 선정으로 깨어있음으로 양심과 하나 되, 되고. 지혜로 양심의 길을 알고. 계율로, 行으로 양심을 실천하면 끝이에요. 줄이면 3학이고 그걸 또 한 번 나누면 6바라밀이 돼요. 그래서 이게 답니다. 그래서 이 6바라밀을 가지고,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요 천지만물이 그래서, 6바라밀을 할려면요 철학의 영역이고. 6바라밀을, 단순히 여러분 윤리학 아니에요. 윤리학은 그냥 과학적인 학문이구요 지금 여기서 말한 윤리적 보편법칙은요 여러분 내면의 본성에서 바로 끌어낸 거예요. 본성을 모르는 분은 윤리적 보편법칙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걍 남한테 들은 윤리 덕목을 실천하고 계신 거지 양심에서 바로 끄집어내서, 사물이 본성대로 살듯이 여러분도 본성에 따라서 양심을 하고 있을 때 그거를 철학적으로 우리가 공부해서 알아낸 윤리적 보편법칙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저기, 무슨 보편법칙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대승보살도로 치면. 이게 구공입니다. 俱空. 구공의 근본원리와 보편법칙을 꿰뚫어 알지 않으면 양심적으로 살 수가 없고 우주에서 경, 우주를 경영할 수가 없어요. 그건 구공, 내 안에 6바라밀 들어있다. 이게 俱空입니다. 6바라밀을 갖춘 空. 그 공을 어, 얻으셔야 되고 그 전에, 그럼 결국 6바라밀로 이게 경영이 될려면 6바라밀로 현상계를요 경영할 수 있으려면 천지만물이나 나나 결국 다 하나에서 나와야 되죠. 만법이 본래 한 근원이니까 그게 통하는 거 아닙니까. 만법이 한 근원이라는 거 어떠, 어디서 알아내요? 법공으로 알아내요. 法空 공부로. 만법이 본래 하나다. 하는 거 알아내요. 그래야, 만법이 하나다는 거 알아냈고 그 법이 뭐라구요?

26:05

6바라밀이란 걸 알아낸 거죠. 그럼 그 전에 아공은 뭐죠? 에고가 전분 줄 알고 나는, 내 정신이, 내 혼이 전분 줄 알고 물질이 전분 줄 알고 살았는데 내 안에 참나 있더라. 내 안에 양심이 있더라. 하는 거 알아내면 我空입니다. 그래서 아공 알아내, 양심 알아내면 아공이구요. 양심으로 천지만물을 설명할 수 있으면 法空이고. 구체적으로 뭐로 천지만물과 수작할 거냐? 6바라밀로 수작합니다. 따, 까지 알아내면 俱空이에요. 결국 구공 알아낼려고 아공 법공 연구한 거예요. 아공 법공에서 끝나버리면 기형적인 성자가 나와요. 도인이 나와요. 이해되시죠? 이 금 유교는 다르겠습니까? 똑같죠. 유교는 오로지 仁義禮智만 얘기하지만 사실은 구공 얘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안에 仁義禮智 있다. 그러면서 유교도 이런 말을 해요 “喜怒哀樂未發.” 중용에 보면요 “喜怒哀樂이 발동하기 전.” 자, 보세요. 희노애락이 발동하기 전의 내 마음. 중심. “희노애락이 발동하기 전의 내 중심이 천하의 뿌리다.” 이래버려요. 법공 사상이죠. 中庸에 이미 법공이 들어있다구요. 불교 나,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그로부터 한 오륙백 년 전에 이미 子思가 뭐라고 써 놨냐면 “희노애락이 발동하기 전의 중심 자리가 天下之大本이다.” 천하의 뿌리다. 그랬어요. 내 마음의, 황당하잖아요. 내가 희노애락 안 일으키고 있, 있는 그 자리가 천하의 뿌리 자리다. 라는 건요 그 자리가 그대로 하느님 자리라고 얘기한 거고 거기 그, 그 자리에서 만물이 나왔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만물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 내면에 있는 그 신성의 자리에서 천지만물이 나왔다고 주장. 이게 이미 유교엔 다 있어요. 그래서 자사한테, 자사 바로 제자거나 이제 再傳弟子로 보이는 맹자가 뭐라고 했냐면 “萬物皆備於我.” 만물이, 예, 모두(皆), 예, 갖춰져 있다(備).

28:06

오늘, 오늘 여기 識仁篇에 나와요. 한자 거기 참고하시고. 만물이, 만물이 다 皆備돼 있다 이거죠. ㅎ 다 갖춰져 있다. 나한테. 맹자 때 이미 하, 나올 얘기 다 나왔어요. 성리학은요 맹자의 재탕입니다. 근데 어떤 재탕이냐, 불교 도교 용어까지 이제 활용해서 맹자를 다시 설명해요. 맹자가 사실 할 수 있는 정리 다 해놨어요. 자사와 맹자가. 중용과 맹자만 보셔도요 이, 이런 유교의 心法이 다 정리돼 있어요. 공자 때 원래 안자한테 전수됐던 게 안자가 일찍 서른넷인가에 요절하시는 바람에 맥이 끊겼던 게 자사 손자가 다시 밝혀내고 그거를 맹자가 다시 계승해서 꽃피웁니다. 그러다가 그게 성, 이 송나라때 6군자, 北宋六君子가 이 주렴계 장횡거 소강절 사마광 정명도 정이천. 程明道 程伊川이 형제예요. 이 중에 정명도가 제일 道가 높다고 합니다. 한 6지보살 얘기, 6, 6단이란 얘기 그 봉우선생님도 하시더라구요. 거기서 제일 道가 높은데 그 정명도 선생이 쓴 게 지금 제일, 남아있는 글이 몇 편이 없어요. 識仁篇이라는 게, 요게 이름이 좀 살벌하죠. 제목이 살벌하지만, 仁을 알자. 사랑을 알자는 제목인데 이름이 좀 식인, 識仁篇. 仁을 알아야 된다. 사랑만 알면 된다. 양심만 알면 된다는 거예요. 양심만 정확히 알면 양심은 터져 나온다. 천지만물이 다 나로부터 나왔고 내가 양, 내 안에 있는 양심만 펼쳐 내면 천지만물과 하나가 돼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이 법공의 극치가 나오고 구공의 극치가 나옵니다. 내 안에서 양심이 다 터져나온다. 천지만물이 본래 하나다. 그래서 내가 양심만 따르면 천지만물과 온전하게 수작할 수 있다.

30:00

요 주장을 유교식으로 쓰신 게 識仁篇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게 다 연결돼 있습니다. 유교의 핵심사상이기도 해요. 그래서 俱空만 얘기하는 거 같지만 그 안에 我空 法空 俱空이 다 들어있어요. 유교, 그래서 제가 유교 가르침이 좋다는 겁니다. 핵심을 정확히 얘기해 주잖아요. 안 그러면 불교식으로요 이케 되게 난삽하게 지도하다 보면요 아공 공부한, 아공 경전만 해도 너무 많죠. 그러면 평생 보다가 아공 경전만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공에서 끝나버려요. 내가 다 얻었나보다 할 수도 있어요. 법공 정도 다룬 경전들만 계속 보다 보면 법공에서 끝나버려요. 바로 구공으로 가게 못 도와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홍익학당은 그걸 돕기 위해서 지금 아공 법공 떠들고 있지만 오시면 무조건 양심분석도 들어가죠. 구공 공부 바로 시작하신 거예요. 양심노트를 쓰고 분석한다는 건요 구공 공부 바로 들어간 거예요. 양심분석을 하는 중에 아공 법공 구공의 그 진리들이, 깨우친 진리들이 도움이 돼야지 진짜 공붑니다. 근데 일단 양심분석을 안 하시면서는요 답이 안 나와요. 이해되시죠. 학당의 공부 순서가 왜 이렇게 돼 있는지. 한 번 좀 볼게요. 識仁篇 “學者는 반드시” 예전에 한 번 유튜브에 올려드린 것도 있습니다. 근데 또 지금 이 시간에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서 제가 가져왔어요. “학자는 반드시 사랑, 仁을 알아야 된다.” 仁. 자, 仁이라는 글자는 이겁니다. 남하고 나를 똑같이(=) 여겨라. 갑골문에서는 이거(亻=)예요. 지금은 두이자가 됐어요. 그래서 두이자가 돼 버리니까 정약용선생이 남과 나 두 사람과의, 두 사람간의 인간관계의 도리가 仁이다. 하고 이렇게 한자를 푸셨는데 정약용성생도, 선생도 한자 푸는 거 좋아하셨는데, 그 당신 갑골문은 없었어요. 그래서 篆書만 가지고 푸니까 한계가 있어요. 이제 갑골문까지 해서 연구해 보면 仁이라는 거는 사람 간의 평등을 말합니다. 사람 간에 똑같은, 自他一如. 그럼 저기 이미 自他不二가 나오죠. 불교의 핵심, 대승의 핵심사상.

32:01

자타불이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가 이미 仁에 들어있어요. 또 다른 말 뭐 있죠? 仁을 할려면 해야 되는 거. 유교에서. 恕. 내가 당해서 싫은 거 남한테 하지 마라. 똑같을여자에 마음심자죠. 남하고 나는 똑같다고 여겨라. 그래서 이거는 둘 다 자타불이 사상입니다. 이 他에는 만물이 다 들어가요. 사람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나와 만물이 본래 둘이 아니다. “학자는 반드시 사랑을 먼저 알아야 된다. 사랑이라는 거는 혼연히 만물과 더불어 한 몸이 되는 거다.” 만물과 더불어 同體가 되는 거다. 다 나오죠. 왜 제가 유교 경, 유교 글이 좋냐면요 요 짐 A4 두, 짐 두 장 밖에 안 되죠. 요 안에 여러분이 공부할 핵심만 써머리 해 놔요. 유교 선비들은 써머리 해서 얘기합니다. 항상. 방만하게 얘기 안 해요. 딱 자명하게 핵심만 정리해 줘요. 요것만 취하면 나머지 곁, 잔가지들은 여러분이 얼마든지 여러분이 지, 여러분이 뻗어 나갈 수 있게 줄기만 딱 얘기해 줍니다. 데 자세히 해 줄려다가 너무 잔가지 설명 들어가잖아요? 헤매기 시작해요. 원래 이제 어니가, 어디가 본 줄긴지 잊어버려요. 그게 문젭니다. “정의니 예절이니 지혜니 성실이니 하는 모든 덕목들이 모두 사랑이다.” 사랑이 제일 重하고 사랑이, 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정의, 보세요. 남, 남이, 남이 나랑 하나다 하는 게 제일 전제죠. 그러니까 내가 당해서 싫은 일 남한테 안 하게 되고. 정의가 나오고. 그러니까 남한테 무례하지 않게 대하게 되고. 예절이 나오고. 그러니까 매사를 자명하게 처리하게 되는 거죠. 지혜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게 쉬는 법이 있으면 안 되니까 성실이 나오고. 자, “우리는 이런 원리를 알아서” 사랑 안에 仁義禮智가 갖춰져 있다. 자, 이게 뭘까요? 俱空이잖아요. 우리 양심 안에 仁義禮智가 다 갖춰져 있다. 그 중에 제일 重한 건 사랑이다. 이 원리를 잘 알아서 뭘로 보존할까요?

34:03

자, 양심을 보존하는 거죠. 이 원리만 보존하는 게 아닙니다. 원리만 개념으로 보존하는 게 아니에요. 양심을 통으로 보존해야 이 원리가 내 안에서 늘 살아 움직일 거 아닙니까. 원리를 개념화시켜 버리면요, 그래서 개, 개념만 저장하면 재미가 없어요. 실감이 안 나요. 그 개념은. 통으로 그 물건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 다녀야지. 양심이라는 물건을 품고 다녀야 그 안에 그 원리가 늘 살아 숨쉬며 내 안에서 작동할 거 아닙니까. 개념도 당연히 따라 오는 거죠. 일단 내 안에서 그 원리가 살아 숨셔야 돼요. 그게 지혭니다. 지식으로만 갖고 계시면 안 되고 지혜로 내 안에 살아 있어야 돼요. 양심을 늘 품고 사셔야 돼요. 양심과 늘 만나셔야 돼요. 아무리 맛난 요리도요 한 한 달, 그 요리 안 먹은지 한 달 되면 맛났다는 기억만 있지 가서 먹어봐야 압니다. 먹어봐야 自明해요. 그래서 “이거 먹자고 내가 여기까지 왔나.” 막 하다가, 궁시렁대시다가 한 입 딱 먹으면 “아.” 짐 똑같애요. 양심도 “양심 좋지. 다 좋은데” 뭐 궁시렁궁시렁 하다가 탁 양심과 만나면 “.”하고 몸이, 몸과 마음이 풀려야 됩니다. 이 정도로 계속 만나지 않으면 양심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몰라 괜찮아가 중요한 건요, 그것만 하면 되신다는 건 아니지만 몰라 괜찮아를 통해 양심을 계속 만나신다는 게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일단 그게 모든 좋은 거의, 善의 토대예요. 그래서 여기도 뭐라고 얘기해요? 誠과 敬. 에고의 초월과, 誠은 에고의 초월이라고 제가 풀었습니다. 敬은요, 마음을 챙기는 거죠. 하나로 몰입해 들어가는 거죠. “誠과” 敬의 극치가 誠입니다. “誠과 敬으로 이 仁을 보존할 따름이다.” 仁이 뭘 보존하라는 거예요? 사, 양심을 보존하라는 거예요. 짐 양심을 사랑이란 말로 대표하고 있는 거예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그 마음. 그걸 지금 仁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예요. 정명도 선생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그 자리를 계속 보존하라. 이겁니다. 그럼 양심 보존하란 얘기죠. 仁義禮智는요 짐 단순, 仁義禮智의 상대적 덕목 중에 仁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仁은 그냥 仁義禮智를 포괄한 仁이니까 양심을 말해요. 그냥 양심.

36:08

예수님이 양심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듯이 정명도 선생도 지금 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늘 깨어서요 에고를 초월한 양심의 현존을 자각하며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양심에 충실하게 살아가라. 늘 양심과 하나가 되고 양심과 함께 살아가라. 이것 말고 다른 가르침이 없다 이겁니다. 정명도 선생은. “방지하고 검속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사랑 정의 예절 성실을 구할려고 할 필요가 없다.” 어 여, 여러분이요 억지로 자기를, 에고를 단속해 가지고 양심 할려고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양심 어길려는 나를 때려 잡아서, 욕심을 때려 잡아서 억지로 내가 생각하는 이 양심을 구현해야겠다. 그렇게 될 일이 아니라는. 억지로 방지하고 억지로 검속하고. 억지로 지금 욕심을 막아서 양심 하겠다. 이러면 안 된다는. “억지로 궁구하여 찾아낼 필요도 없다.” 억지로 지혜로워질려고 여러분 명언집 뒤지고 인터넷 해서 막 이레 지식 뒤지고 다니지 마시라는 거예요. 자, 뭐, 짐 뭔 얘기 하는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이 깨어있음과, 깨어있음(敬)과 이 정성스러움(誠), 성실함으로 양심만 성실하게(誠), 양심과 하나 돼서 살아가시면 거기서 자명 찜찜의 신호가 다 나오고, 뭐가 옳은지 다 나오고. 그거 하고 싶게 돼 있다는 거예요. 양심. 여러분 이미 마음이 바뀌잖아요. 양심 상태에 있으면요 잘못된 걸 보면 찜찜하구요 안타까운 걸 보면 측은해하고 짐, 또 분노하고 다 합니다. 알아서. 그, 그, 그 싹이 난 거예요. 싹은 이미 나요. 즉 行까지 시작돼요. 몰라 괜찮아만 해도요 사실은 行까지 여러분 마음에서 욕심을, 욕심을 이겨낼만한 양심의 싹을 자라게 해 줘요. 문제는, 그걸 북돋아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죽인다는 거. 근데 이런 양심의 힘이, 양심에서 올라온 싹을 키우는 방식으로 양심을 하지 않고 억지로 내가 양심적이 될려고 노력하시면 안 돼요.

38:11

억지로 사랑을 할려고 하고 억지로 예절을 지킬려고 하면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랑 정의 예절 지혜가 될지는 몰라도 사랑바라밀은 안 돼요. 정의바라밀은 안 될 거예요. 양심에서 나온 사랑이 못 된다는 거예요. 제 노자책 보시면 노자가 비판합니다. 당시의 仁義禮智를 비판해요. 왜? 욕심으로 하는 仁義禮智예요. 다 지만 사랑이래요. 지 사랑만 사랑이래요. 지 정의만 정의래요. 지 하는 식으로 해야 예절이래요. 그니가 인의예지를 싸잡아서 노자가 다 비판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뭐 하자고 그래요? 인의예지란 말은 안 쓰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절제하고 서로 겸손하자고 그래요. 그럼 거 그게 인의예지의 핵심이죠. 그 당시만 해도 그랬단 얘기예요. 노자 공자 살 때만 해도. 그러니까 지금 이 정명도 선생 말하는 것도 “억지로 사랑 정의 예절 할려고 하느냐?” 불교식으로 말하면 억지로 인욕하고 억지로 보시하면 직, 정말 억지로 하는 보신 뭡니까? 여기 잘 사는 물고기 잡아다 저 쪽 연못에다 풀어주고 또 방생했다구요 후, 흐뭇해합니다. 잘 살고 있었는데 이산가족 만들어 가지고 낯선데다가 입양 보내고는 “내가~” 이해되세요? 인간으로 치면 뭡니까? 잘 사는데 가정에서 애 하나 데려다가 다른 집에 입양 보내주고 “내가 한 애를 살렸도다.” 이러는 형국일 수도 있죠. 자, 그런, 그, 그 막연한 보시 말구요. 보시바라밀은 뭘까요? 정말 죽을 지경에 있는 물고기 하나 살려주는 게 보시죠. 사다가 푸는 게 아니고. 왜냐, 그러면 저 사람도 사갈 거 상, 생각하고 잡아 놓은 거잖아요. 뭐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이 방생 안 했으면 그 물고기 안 잡혔다구요. 죽게 처한 물고기를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살려주는 게 보시. 자, 이 미묘하게 달라요. 바라밀로서의 보시와 그냥 하는 보시는.

40:03

에고가 하는 보시는 보시했다는 걸로 자기가 생색내고 만족해 버립니다. 사랑 정의 예절도 지금 억지로, 억지로 자기가 욕심을 억지로 이겨내서 “사랑했다. 내가 남을 배려했다.” 하고 만족하지 마라는 거예요. 또 지혜, 억지로 뭘 알려고 하지 마라는 거예요. 양심이 다 가르쳐 주고 있는데. 안에서 자명 찜찜 신호를 보내는데 요건 안 들으면서, 자기 편견으로 남을 재단하면서 잔꾀를 가지고 자꾸 판단하면서 자기가 지혜롭다고 해요. 아무튼 인간은요 이 버릇만 고치면 다 성잡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이 2장, 두 가지 장애. 二障義라는 책을 쓰셨어요. 두 가지 업장. 所知障이라고 해요. 무지. 지적인 장애(무지)와 심리적 장애(아집). 번뇌장. 요 두 가지 장애만 없애면 10지보살 다 될 수 있다는 게 이장의에 써 있습니다. 다 부처 된다. 저 장애가 사라진 만큼 여러분은 지혜가 올라오고 사랑이 올라와요. 다른 말로 양지가 터져나오고 양능이 터져나와요. 원래 터져 나오고 있는데 지금 막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잔꾀가 막고 있어요. 지금 왜 여러분이 우주의 이치를 모르시는지 아세요? 여러분의 편견과 잔꾀가 막고 있어요. 막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 알 수밖에 없어요. 근데 막고 있어요. 안에서 자명하게 그건 아니라는 게 올라올 때 막고 있어요. 근데 편견이 “집어 치워. 맞아. 그거.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거랑 똑같네. 맞네.” 해 버려요. 또 아집이, 이거, 이거 하면 좀 내가 민망한 거 아닌가 할 때 아집이 나와서 “야. 조용히 해. 이렇게 하며는 나한테 딱 좋아.” 그러면 이게 넘어가 버리고 넘어가 버리고. 에고가 貪瞋癡가 본성이라 탐욕이 막아버리고, 이, 어리석음이 막아버려요. 요것만 치우면 된다는 거예요. 정명도, 유교의 결론이 불교의 결론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럼 양심만, 몰라 괜찮아만 잘 하고, 양심의 소리만 따라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양심의 명령만.

42:01

그러니까 “억지로 검속할 필요도 없고 방지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뭘 찾아낼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마음 편해지지 않으세요? 이 매, 정명도 선생이니까 이런 말 하는 겁니다. 이 분은 이렇게 해도 이, 仁義禮智가 나오는 경지까지 가신 분이에요. 그건 감안해서 보세요. 이 분이 말을 좀 쉽게 하고 계신 게 있어서. 이 분은 이 정도로 살고 계셨던 분이에요. 6지보살, 6, 6지보, 6지까지 가면요 요 정도 하거든요. 예. 크, 크게 어긋나지 않게 삽니다. 몰라 괜찮아만 잘 해도. 아주 이제 어긋나지 않으면 7지보살 되겠지만 고건 아니더라도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耳順의 경지 그러잖아요. 天命대로 잘 순종하는 경지기 때문에 요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요 밑, 요 동생분이 程伊川인데 정이천 선생은 한 3지나 돼요. 그 분 글을 보면 엄청 엄격하고 딱딱합니다 “욕심과 죽으, 사투를 벌여라.” 막 이런 내용이 나와요. 근데 형님 글은 “욕심도 ㅎ 둘이 아니요” 막 이제 이런 얘기만 해요. 그래서, 근데 동생이, 이 저, 전해 오는 야, 이야기가 그래요. 野史가. 동생이 자꾸 형을 이제 너무 견제하니까 형이 자기 책을 싹 불태워 버렸다 그래요. 그 중에 몇 편 남은 게 짐 이겁니다. 식인편은. 원래 글을 더 썼는데, 에, 태워 버렸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데 재밌는 거는 정이천 선생을 더 주자가 중시합니다. 정이천 선생이 욕망을 제어하고 지혜를 계발하는 꼼꼼한 방법은 더 제시를 많이 했거든요. 근데 정명도 선생의 기상을 얘기해주지 못하면, 정, 주자가 정이천 선생 정도 수준이에요. 둘이 비슷해요. 근데 정명도 선생의 가르침은 더 통이 크거든요. 데 요거는 좀 너무 이렇게 佛家의, 불가적인 맛까지 나니까 주자가 조금, 까 바로 이게 고수의 입장을 바로 초보자들한테 얘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한 거 같애요. 그런데 나중에 그러면 이, 이 분 주장이 사장되는 게 안타까워서 陸象山이나 왕양명선생은 정명도를 더 중시합니다.

44:03

고 기상을 더 배우자 하고. 그니까 지금 정명도 선생 주장대로 왕양명이 “良知만 따르면 다 해결된다.” 이런 주장을 과감하게 한 게 다 정명도 선생 가르침의 영향이에요. 이해되시죠. 이제 흐름이 그래요. 정이천은 꼭 이 개념 하나 하나 따지는 걸 중시하고. 정명도 선생은 실제로 그렇게 넉넉하게 살아가는 경지에서 나온 얘기를 많이 하시고. 자, 그래서 “만약, 만약 마음이 게으르지 아, 게으르다면 방지해야 된다.” 마음이 게으르다면 막아야지. 그런데 “게으르지 않다면 막을 필요가 있나?” 이겁니다. 그면 여러분이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과 하나가 돼서, 양심 51%로 살아가시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거죠. 양심 51%로 살아가면 막을 일 자체가 아예 없지 않겠냐 이거죠. 근데 이제 주자나 정이천이 이 말을 들으면 “말씀은 좋습니다만 대부분은 안 그래요.” 이제 이렇게 나가겠죠. 근데 정명도 선생은 기, 근본원리를 얘기해 주는 거예요. 원리가 그렇지 않냐 이거죠. 양심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원리를 아직 못 얻었다면.” 지금 계속 무지와 아집을 얘기하는 거예요. 아집 차원에서 게으름 부리거나 욕심 나면 막아야겠지만, 양심을 잘 보존하면 그럴 일 없지 않겠는가. 이제 지혜 차원에서 무지를 터는 측면이에요. “원리를 아직 못 얻었다면 찾아야 마땅하다.” 모르면 찾아야 마땅하다. 그건 맞는데 “양심을 잘 보존하고 있다면 자연히 원리가 밝아지지 않겠는가?” 양심이 자명하다는 거 계속 따라가다 보면 당연히 원리를 알지 않겠는가? 어때요. 희망이 막 샘솟지 않으세요? 이거다 하지 않으세요? 막 영어공부 찾다가 “영어공부 하지 마라” 이런 책 손 가잖아요. 내 마음 같고. 데 그러다 진짜 안 하시면 또 다시 또 다른 책 찾아 다니셔야죠.

46:02

이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잘 취하시면 아주 보배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보존함이 오래 되면” 자연히 원리가 밝아질 것이다. 이 말도 맞잖아요. 원리가. 자명함만 자꾸 취하다 보면, 여러분 보세요. 이렇게 사시면 돼요. 이걸 딱 요약해서 제가 말씀드릴게요. 여러분 늘 몰라 괜찮아 하시면서 자명 찜찜을 잘,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걸 옳다고 여기시면서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쪽으로 자꾸 몸을 움직이세요. 자명한 쪽에 가 이, 계세요. 계속. 찜찜한 거 같으면 또 옮기세요. 계속 하다 보면 여러분 어느덧 성인의 경지에 가 있습니다. 자명한 거 다 알고 있고 자명한 거 다 하고 있는 경지. 이게 성인 경지예요. 어렵지 않죠? 지금 여러분 욕심은, 욕심 명령은 정말 잘 들어요. 여기 있다가 몸이 쫌만 불편하다 찜찜하다고 하면 금방 옮기시죠. 이 쪽으로. 근데 양심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냥 버티세요. 고건 아직 참을만 하다. 라고 생각하. 욕심이 주는 달콤함 때문에 양심이 찜찜하다고 해도 좀 버텨요. 최대한 버텨봅니다. 우리는. 진짜 찜찜하다고 할 때까지. 까 고 차이만 아시면 돼요. 그래서 별 거 아니다. 사실은. 인간은 이런 방식의 삶도 가능하고 이런 방식도 가능하다. 그래서 무조건 양심 따르자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양심 따르는 길이 우주에서, 우주가 인간을 설계할 때 더 고차원적인 길로 이케 예정해 놓은 길인 거 같다 이거죠. 실제로 우주 만물도 다 그렇게 돌아가고 있고 인간도 양심 따를 때 제일 화평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좋은 과보가 오니까 “이왕이면 이 길을 선택합시다.” 하고 권해 보는 겁니다. 지금. 선택, 자유의지가 있기 땜에 인간은요 여러분이 선택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나 죄 짓고 지옥 가겠다.” 그러면 그러시는 거죠. 이건 우주가 허락한 자윱니다. 여러분의 자유예요. 여러분 이런 얘기 들으시면서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그냥 죄 지으시면 돼요. “내가 책임진다.” 하고 가는 거예요. 인간은 그게 맛입니다. 우주에서 이런 존재가 없어요.

48:02

내가 책임진다 하고 죄도 지을 수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런 자유의 존재기 때문에 저도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성자도 여러분한테 강요할 수 없어요. 그건 우주가 허락한 일이기 때문에. 권해보는 거죠. 유혹해보고 자극해보는 거죠 “이 길이 더 좋은데” 하고 자꾸 권해 보는. 그래서 여러분이 결국 선택하셔야 끝나요. 선택은 무조건 여러분 몫이기 때문에 제가 만약에 마음이 앞서서 여러분 선택을 도와드리면 여러분은 못 가요. 양심의 길을. 건, 그건 노예상태기 때문에 여러분, 양심은 어떻게든 이 게임의 조건은 “자발적으로 선택할 것”이에요. 예전 햇볕과 그거 있죠, 바람이 옷 벗기기 게임하는 거. 선택은 그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니까 옷 벗고 싶게 만드는 게 보살의 임무지 강제로 “야 이리 와” 하고 벗겨 버리면 여러분 그건,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고 이거는 양심 기르는 법은 아닙니다. 우주가 지금 제시한 게임의 룰은 자기 양심을 따르면 보살 될 수 있다는 거랑, 그런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남이 또 벗, 오, 그 이 무지와 아집을 벗고 보살이 될 수 있게 유혹해 봐라. 이겁. 이해되시죠. 이게 게임의 룰이에요. 이거 잘 하면 레벨 올라가요. 그럼 만렙의 경지는 아주 유혹의 달인이죠. 까 만렙 근처만 가면 막 양심 하고 싶어지는. 까 시킨 적은, 이게 강요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지는 거죠. 그렇게 만들어야 돼요. 강요해서 하게 하면요 안 돼요. 바리새파들이 강요받아서 십계명을 지키고 있었잖아요. 천국 가고 싶어서. 협박을 받은 거죠 “이거 안 지키면 지옥 가. 이거 지키면 천국 가.” 강요받아서 십계명 지키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와서 “야. 그렇게 백 날 지켜봤자 천국 못 가.” 양심으로 지켜야 천국 가지 무슨 천국 가고 싶어서 계율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가냐는 거죠. 여러분 천국 가는 분은 천국 갈 생각을 내려 놓은 분들이 천국 가요. “천국이 뭐냐? 나는 이 땅에서 양심 지키는 게 더 重하다. 한 마리 어린 양을 이 땅에서 더 구하는 게 옳다.” 하는 분이 천국 가지, “빨리 어린 양 구해서 천국 가야지.” 하면 못 가요.

50:03

건 당연한 겁니다. 마음의 공식입니다. 한 단락이 이렇게 뭐, 먼가요? 갈, 갈 길이. 자, “어찌하여 궁구하여 찾음을 기다릴 것인가?” 뭘 또 어디서 찾겠다는 거냐 이거죠. 양심이 자명하다고 하는 것만 옳다고 여기고 살아 보시라는 겁니다. “양심은 본래 자비롭고 정의롭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자명하다. 오직 양심을 보존하면 된다.”라고 제가 이제 말을 좀 붙여 봤어요. 자, “이 道는 사물과 대립함이 없고” 자, 만물하고, 자, 정신도 만물 중에 하나죠. 여기 물질과 정신 다 포함해서 천지만물. 천지만물하고 道가 대립할 수 있겠어요? 道가 본원인데. 이 중에 한 물건이면, 정신과 물질은 대립하죠. 근데 道랑 정신 물질이 대립할 순 없다는 거예요. 나온 자리니까. 그래서 “이 道는 사물과 대립할 수 없고 아무리, 이 현상계에서 아무리 큰 거라 할지라도” 이 道랑 맞먹을 순 없다 “道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없다.” 대등한 건 없다. “天地의 모든 작용은 나의 작용이다.” 이 때 나는 참나를 말해요. 에고가 아니고. 천지의 모든 작용은 나의 작용이다. 법공이죠. 아공 법공이 여기 다 들어있습니다. 자, 我空이 나왔습니다. 보세요. 아공. 유교식 아공이에요. 천지만물하고 道는 맞짱 뜰 수 없다. 현상계는 無常 苦 無我일 뿐이고 열반이 寂靜하다. 열반만이 고요하다. 라고 얘기한 거랑 똑같애요. 이걸 양심적으로 얘기해서 그렇지. 그 다음 法空 들어갑니다. 천지작용, 천지가 모두 나의 작용이다. 어때요? 그냥 이게 기본인 거예요. 양심 얘기하기 전에 기본인 거예요. 그래서 아공 법공 얘기를 저희가 얼마나 확, 이거를 실험적으로 확인하셨는지만 질문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 聞士나 學士 과정 할 때 긴장하지 마세요. 여러분 긴장하신다는 거는요 제가 봤을 때는요 짐 뭔가 꼼수를 부리고 계신 거예요.

52:00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왜 긴장을 하세요? “아 대답 잘 해야 되는데.” 아니에요. 잘 하지 마세요. 그냥 되면 “된다.” 아니면 “아니다.” 모르면 “모르겠다. 답답하다.” 답답하면 “답답하다.” 그래야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이 지금 어느 상탠질 알아요. 병원 가서 “대답 잘 해야지.” 하고 계시는 거랑 똑같애요. “의사가 오늘 질문할 때 정말 건강한 사람처럼 대답해야지.” 왜 가세요? 병원을. 의사가 “이상한데. 딱 봐서 딱 병색인데.” 물어보면 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 모범답안을 준비해 가서 대답을 다 잘 해요. 이거 의미가 없지 않나요? 아니 정신병 검사 하는데 모범답안 준비해서 다 아니라고 하면 이게 체크가 돼요? 짐 치료가 목적인지 求道가 목적인지 정확히 하시면요 학당에 오셔서 좀, 여기 병원 왔다고 생각하세요. 까놓으세요. 환부를 좀 드러내세요. “이기적인 거 같아요.” 학당에서 만약에, 이런 멘토는 없겠지만 “당신 무지와 아집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당당해지세요 “아니 그러니까 왔지. 빨리 고쳐라. 아니 아퍼서 왔지 그러면.” 꼭 화내는 의사들 있잖아요. 오면. “이 지경까지 뭐 했냐”고. “됐고 빨리 고치라”고. 환자 입장은 그거 아닙니까? 됐고 빨리 고쳐. 지금 아퍼 죽겠는데 그것까지, 지적까지 받아야겠어요? 빨리 고치라고. 당신 역할은 빨리 고치는 거. ㅎ. 마찬가지로 학당에 오셨으면 에, 이레, 별 얘기 다 하세요. 어디 아프네. 어디 아프네. 사소한 거라도 얘기하세요. 어디가 힘드네. 뭐가 힘드네. 그래야 이게 제대로 된, 우리가 진짜 자명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요. 서로 함께. “와 이게 진짜 진리구나.” 가르친 사람도 놀랩니다 “진짜로 이렇게 하니까 사람이 낫네.” 의사도 놀래요. 자기가 병 고치고 자기 놀래는 의사들 많으실 걸요? ㅎ. “우와 이케 낫네.” 금 아픈 사람도 “그렇게 아퍼서 왔는데 병원 가니까 또 낫네.” 이게 지금 학당이 원하는 겁니다. 이런 꼴을 보자고 연 건데 서로 지금 막 숨기고 상처 주고 피하고 긴장하고 막 이레, 이러시면 안 돼요.

54:05

환자 잡으러 다니고 환자 도망다니고. 짐 이 병원 목표가 지금 상실된 거죠. 걱정돼서 말씀드린. 자, 천지작용은 모두 나의 작용이다. 이게 법공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런데 이 말 듣고 “. 너무 감동이다.” 하지 맛, 이제 그건 즐기시고. 5분 정도 즐, 감동 받으시구요. “나는 이 말 할 수 있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요걸 물어보시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느낌을 솔직하게 멘토들한테 얘기해 주시면 돼요. 그래야 멘토도 조언을 해 줄 수가 있어요. “솔직히 지금 나는 그 느낌 안 든다. 법공 법공 하는데 솔직히 나 생각이랑 나 참나랑 둘이 아니란 거 나 못 믿겠다.” 이 얘길 해 주셔야 멘토도 긴장해서 연구를 합니다. 아니, 의사가요, 여러분, 의사가 막, 의사가 애 쓴다고 적당히 “예. 예. 괜찮네요.” ㅎ. 침 놔 주고 “안, 안 아프세요?” “아. 예.” 아프긴 한데, 어제랑 똑같은데. 아이고 이 하도 고생하니까. 의사가 하도 고생하니까 “예. 예. 뭐 많이 좀 괜찮은 것도 같네요.” 이런 말은 다 신뢰할 말은 아니잖아요. 이해되시죠. 솔직히 얘기해 줘야 돼요. 그래야 의사가 또 연구를 한단 말이에요 “아. 지금 이게 안 먹힌다.” 이 방법이 안 먹히면 다른 방법을 연구해야 돼요. 좀 저는 이런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홍익학당만큼은 와서 솔직하게 그냥,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점검받고 진짜 자기 마음이 치유되는 기쁨을 느끼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5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