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35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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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일자 | 2018. 04. 28. 土. |
| 게시일자 | 2020. 07. 14. |
| 동영상 길이 | 41:54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대승기신론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ITu0U_Dr3dM |
0:12
여기에 제가 어디 글이라고 안 써 놨네요. 대승기신론입니다. 1주 돈오의 경지. 표시가 특별히 없는 것은 대승기신론이에요. 대승기신론을 뼈대로 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경에서 가져왔다 혹시 없는 경우는 대승기신론으로 아시면 되겠어요. 대승기신론이 그래도 진짜 1지까지 가는 길을 진짜 설명 잘해놨어요. 제가 그분 존경하면서 자꾸 지적질하는데요. 존경하는 부분은 어느 경전보다 1지까지 가는 길을 잘해놨어요. 그 대승기신론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게 대승기신론을 좀 더 요약해준 게 수심결입니다. 저는 이런 체계들의 가르침이 되게 좋아요. 왜냐하면 선불
1:05 교식은요 너무 한방주의라 빠트리는 게 너무 많아요. 원만하게 얘기해 주는 것은 대승기신론, 수심결 이런 책들이 좋습니다. 대승기신론이 어디까지 설명해 주는지 자 보세요. 10. 대승기신론: 1주 돈오의 경지.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법신보살이라고는 할 수 없다. 1주 보살은요 아직 법신보살로는 못 부른데요. 육바라밀을 다 자기 참나에서 못 찾았어요. 참나가 또랑또랑하고 고요하고 늘 흐르는 건 이루었는데 참나에서 육바라밀이 행으로는 아직 나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실천으로 아직 나오지는 않는 거 보면 속에 제대로 안 밝혀졌다는 거예요. 어떻게 압니까? 저 사람이 육바라밀을 정확히 꿰찼는 줄 어떻게 압니까? 하는 짓거리 보면 알아요. 하는 짓이 매사에 육바라밀 챙기고 육바라밀 안 하면 찜찜해서 못 견디고, 육바라밀을 안 하면 잔뜩 먹고 이빨 안 닦고 자는 것처럼 찜찜해야 돼요.
2:00 잘하든 못 하든 해야 돼요. 계속해야 되고 아까 이 말씀드렸죠. 답은 육바라밀 밖에 없다는 것에서 더 이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알아요. 그러면 실천으로 나오게 돼 있어요. 밖으로 나오는 실천만 봐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저 사람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자 기독교적으로 말해 볼게요. 그 사람이 진짜 성스러워졌는지를 보면 속에 하느님의 형상이 자리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가 대번에 나와요. 속일 수가 없어요. 자 가짜 분들은 이럽니다. 친구 붙잡고 전도한다고 와서 하느님 형상대로 우리가 생겼다고 막 하는데 근데 되게 무례해요. 남의 입장 배려 안 해요. 황금률 다 어기고 있어요. 이게 가짜라는 거예요. 학당 같으면 보면 알죠. 입으로는 육바라밀이 중요하다 얘기하는데 다 어겨요. 남의 입장도 배려 안 하고 남 무시하면서 얘기하고, 얘기하는 과정에서 상처 주고. 그러면 말은 좋은데 말하면서 육바라밀이 하나도 안 보이죠.
3:08 그럼 글로 배운 육바라밀이지 입에서만 육바라밀이 지금 살아있지 실천으로 안 나오는 것은요 이 사람 영혼 안에서 아직 육바라밀이 자리를 못 잡았다는 거예요. 자리를 확고히 잡았다가 1지예요. 아시겠습니까. 육바라밀을 잘하지는 못 하는데 저 사람 안에 육바라밀이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 같아 하는 느낌이 와야 돼요. “저 사람 육바라밀 성애자야. 육바라밀 덕후야.” 진짜 남들한테 이런 느낌이 들어야 돼요. “쟤는 그냥 죽으나 사나 저거지.” 여러분 이 정도 느껴져야 돼요. 여러분이 뭐 하나만 좋아해도 주변이 다 압니다. “저건 저거라면 환장하지” 하는 그거예요. “육바라밀이라면 그냥 환장하지” 하는 정도가 실제로 돼야 해요. 그게 아니면 아직 보살의 발심이 된 건 아니에요. 하라니까 하는데 그렇게 좋진 않아요. 발심이 됐다는 것은 거의 덕후의 발심이에요.
4:04 요즘 용어로 이제 입덕했다고 그러죠. 이제 덕후가 됐다. 덕후 입문하시려면, 양심덕후가 되시려면요 그 정도로 환장해야 됩니다. 자다가도 어디서 육바라밀 얘기 들리면 일어나서 뭔 일 있냐고. 큰일이다 나 그렇게 안 좋은데 이렇게 좌절하실 일은 아니고요. 맛을 더 즐기시다가 보면 그렇게 되게 돼 있어요. 여러분도 중독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아직 그 맛이 잘 안 느껴져서 낯선 것뿐이니까 이것은 꾸준히 하시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어요. 그거 기호 따라 육바라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런 사람은 없고 모두가 해야 되는 문제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다른 분야랑 달라요. 이것만큼은 모든 인류가 결국은 중독되게 돼있어요. 그 맛을 알면 푹 빠지게 돼 있어요. 아직 낯설어서 그래요. 그 낯섦을 뚫고 닦아 가시면서 9급에서 1급으로, 1급에서 1단으로 이렇게 나아가시는 단계를 제가 소상히 해드릴 테니까
5:06 꼭 그 맛을 보시기 바래요. 그래서 그 정도 되면 법신보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사람은 그러니까 요즘 말로 “저 사람은 입덕했다”가 법신보살이에요. “그 정도면 확실히 육바라밀 덕후야.” 과거 무량한 세월 축적된 번뇌의 업(유루지업)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1주 보살 얘기입니다. 1주 보살은 아직 법신보살이 아니다라고 했죠. 아직 양심덕후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진해. 부족해. 그런데 참나덕후는 맞잖아요? 참나 안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럼 양심덕후가 못 되느냐? 과거 무량한 세월 축적된 번뇌업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태어남에 따라 미세한 고통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지금 과거의 습기가 막고 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육바라밀 이해하는 걸 막고 있어요. 사랑을 하려는데 막아요. 육바라밀 닦으려면 이래야 됩니다. 보시, 내가 받고 싶은 걸 남한테 해줄 수 있어야 되는데 이걸 할 때 방해가 일어나요. 장애가 일어나요.
6:04 지계, 내가 당해서 싫은 것 남한테 죄 안 지어야 되는데 자꾸 지어요. 그걸 못 막고 있어요. 그거 업 때문에 그래요. 인욕, 진실이면 수용해야 되는데 수용이 잘 안 돼요. 못 받아들이겠어요. 그거 업 때문에 그래요. 정진, 늘 틈만 나면 나태해요. 육바라밀 안 하고 어떻게 해결해 볼 생각을 해요. 자 아시겠죠? 전 세계에 웬만한 수행자들이 육바라밀 안 하고 어떻게 부처 돼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쉬운 길 없나 할 때 그때 딱 6조 스님 같은 분이 나타나서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지. 육바라밀 닦아서 가겠다는 것들이 등신들이야.” 바로 그래서 대박 났던 거예요. 6조 스님 그 문화가 대박 난 이유가요 경전 보면은요 무량겁 걸린다고 하는데 “옆에서 한방에 가는 수가 있지. 무량겁 걸린다고 하는 것들이 등신들이야.” 그러면서 이 말을 해요. “무량겁 걸려서 가봤자 결국 이 견성이야. 난 한방에 갔어. 견성 이거
7:01 하나지 더 있어?” 이렇게 나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확 쏠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선불교가 대박 나서 자잘한 도인 많이 만들어 주는 건 좋은데요 오히려 큰 도인들이 그 뒤로 안 나오게 됐어요. 원효스님 이런 분들, 선불교 이전에는 오히려 큰 도인들이 많이 나왔는데 선불교 이후는 큰 도인은 안 나오고요 자잘한 도인들이 많이 나와요. 1주 근처의 도인들은 많이 나왔는데 이제 7지 8지 하는 분들은요 오히려 맥이 뚝 끊겼습니다. 왜? 역량이 있어도 “넌 이미 부처야.”라고 하는데 어떻게 더 닦아요? 그냥 사는 거예요. 옛날 대승경을 공부하면요 견성 정도 해서는 택도 없다가 쓰여 있어요. 대승기신론에 지금 쓰여 있잖아요. 확철대오 정도 했다고 그건 아직 법신보살 아니야. 왜? 무량한 습기가 지금 너무 남아 있어. 그런데도 널 왜 1주라고 인정해 주느냐? 그러나 또한 ‘업력’에 묶여 있지는 않으니. 업력에 묶여 있진 않기
8:01 때문에 그래. 업이 아무리 막아도 참나가 지금 살아 있죠? 참나가 우리 안에 늘 깨어있죠. 참나의 도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능력은 돼요. “그러니까 업력이 너를 묶고 있진 않아. 그래서 너는 업이 너를 아무리 끌고 다녀도, 사실 너도 휘둘리지만 근본적으로 너 안에는 불성의 힘이 있어서 너가 원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실력은 돼.” 그러니 큰 서원의 자유자재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요 참나의 힘이 있다는 거예요. 보살도의 서원을 한 그 서원이 힘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건요 참나를 깨달았기 때문에 보살도의 서원이 힘을 갖게 된 거예요. 이게 “너는 업력의 지배에 있지 않고 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 이 얘기거든요. 아까 제가 1주 보살이 기독교의 칭의의 단계라고 얘기했죠. 이걸 그대로 기독교 버전으로 번역하면요
9:02 “너는 이제 마귀의 소속이 아니야. 하느님 소속이야. 넌 이제 하느님의 자녀야. 그래서 또 많은 자범죄, 죄를 짓겠지만 너는 근본적으로 원죄가 소멸됐기 때문에 너는 이제 죄 많은 사람이지만 너는 하느님의 자녀야”라고 말하는 거나 똑같아요. “너는 근본적으로 이제 부처의 자녀야. 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 하지만 업이 너무 많아. 그래서 계속 휘둘릴 거야.” 딱 그 상태 아시겠죠. “너 힘으로 업을 극복해내는 노하우를 얻어내면 너는 이제 1지 보살이 될 거야”라는 그 경지, 지금 느낌이 오시지 않아요? 놀라운 얘기입니다. 지금 이게 천년도 훨씬 더, 1500년 전에 나온 경전에 인간의 영성 계발에 아주 이런 디테일한 노하우가 다 적혀 있잖아요. 인류는 지금 타락한 거예요. 지금 지구상에 이런 책을 쓰실 양반이 없다니까요. 영성에 대해서 이 정도 얘기도 지금 못 써요. 이 책이 절대적인 책이 아닌데도 이 정도 책을 못 쓸 뿐더러 간단하게 지금 이
10:05 책 이해도 못 해요. 대승기신론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나오는데 요 구절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쓴 논문은 제가 못 봤어요. 어렵죠. 이게 인류 문명이 인공지능 막 나오고, “인공지능한테 인간이 밀리는 거 아니냐” 그러는데 인공지능이 이런 걸 어떻게 씁니까. 인간은 이미 이런 지능을 갖고 있어요. 근데 이런 지능 다 잊어버렸으니까 인공지능에도 놀래죠. 이런 영성지능은 상상도 못 해요. 인공지능이, 기계 돌린다고 이런 영적인 책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럴싸한 흉내 내는 책은 쓰겠죠. 근데 체험해 본 얘기가 아니잖아요. 인공지능이 뭘 체험하고 쓴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체험한 얘기는요 영성지능에서 나오는 결과물이에요. 이게 인간이 앞으로 닦아야 할 위대한 분야입니다. 영성 지능의 계발. 잡무는 인공지능한테 맡기고 이제 인간은 영성지능만 한 번 찐하게
11:02 탐구해보자고요. 이게 제 제안입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안, 4차 아니라 5차 6차 7차 로 가더라도 답은 하나다. “인간은 앞으로 잡무에서 벗어나서 영성지능의 계발로 가라”는 하늘의 계시다라고 저는 봅니다. 이 보살이 한번 발심한 후에는(1주는 발심주). 그러니까 이 1주 보살은요 한 번 발심한 후에는. 1주가 발심주니까 발심 보살은 자 발심은 했죠. 겁을 먹고 나약해짐을 멀리 떠나니. 이 보살은 이 이후로는요, 이 발심이 확고해진 경지가 1주 보살이기 때문에, 1주 보살을 다른 식 표현으로 정정취라고 합니다. 뭔 얘기냐? 올바른 길로 확정된, 무리 취자거든요. 취락 할 때 취. 무리. 왜 1주부터는 이미 부처로 봐야 되냐면요? 1주 보살은 부처가 되기로 확정된 사람이에요.
12:03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1주부터 영생이 보증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기독교에서도 칭의만 얻으면, 비슷한 개념이에요, 천국 가기로 보증된 길에 들어서니까 나태해질 수 있어요. 오히려 “나 이제 구원 받은 거야? 그럼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불러일으키는 그 안도감을 주는 게 “확정됐다” 이 말이 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안 그런 거예요. 진짜 칭의를 얻은 사람은요 확정됐기 때문에 더 힘을 내게 되어있어요. 왜? 이제 진짜 자신감이 생겨서. 마찬가지에요. 1주 보살도 발심을 했죠. 그리고 부처가 되기로 확정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흔들리지 않아요. 두려움이나 이런 걸 다 떠나요. 세상이 어떻게 나를 핍박해도 이제 흔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마침내 성문‧연각의 이승의 경지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열반으로 도피하지 않음). 이 얘기는요 이승의 성자들이에요. 이거는 둘 다 소승의 성자들입니다. 소승 중승 이렇게 나누기도 하는데
13:03 근본적으로 소승이에요. 대승에서 볼 때 둘 다 소승이에요. 성문승이나 연각승은 아라한이되는 걸로 끝내는 분들이에요. 구분하자면 성문승은 목표가 아라한이고 연각승은 목표가 벽지불입니다. 벽지불은요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 수준의 깨달음을 얻었는데 중생을 위해 도를 안 편 분들을 벽지불이라 그래요. 어차피 소승이에요. 소승인데 깨달음의 깊이가 더 깊다 얕다 차이예요. 그리고 실제로는 부처님도 아라한으로 불리잖아요. 사실은 통틀어서 아라한이라고 해도 돼요. 이분들은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분들이에요. 역량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아라한들이에요. 아라한은 뭐죠? 열반에 들어앉은 사람. 대승 보살이 대승불교의 원을 세워서 그 원력이 업력을 누를 정도가 돼 가지고, 아까 그 서원의 자유자재한 힘이라 건 원력이죠. 원력은 참나에서 나오는 힘이 진짜 원력입니다.
14:04 여러분이 세운 그 서원이라는 건 그렇게 힘이 없어요. 그런데 참나가 세운 서원하고 여러분의 서원이 딱 하나로 만날 때 그게 힘을 갖습니다. 늘 깨어 있을 때, 참나 안에 살아갈 때, 여러분의 서원력이 이제 힘이 생기는데, 그 원력으로 업력을 이길 정도가 되면 이제 부처되는 길에 들어선 확증인데, 대승에서 이 정도 서원을 세워서 그 길에 들어서는 실력을 얻었으면요 앞으로 아라한 될 일은 없다는 거예요. 열반에 들어가서 대승을 져버릴 일은 없다라는 게, “성문 연각 이승에 떨어질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 얘기는 대승의 길에 들어선 게 확정됐기 때문에 소승의 길로 다시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이다 이 얘기고요. 그는 만약 무량하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 동안 고행을 닦아야 ‘열반’(구경각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15:02 이 얘기는 부처되려면 3아승기겁이 걸린다는 기존의 정통 가르침이 있잖아요. 자 1주 보살은 언제 됐어요? 처음 공부해서 1지까지 되는데 1아승기겁입니다. 근데 만겁이면 1주가 돼요. 1주 보살 입장에서는 1지 되는데도 지금 무량겁에 가까운 기간이 남아 있어요. 1지에서 7지 되는데 또 무량겁이 남았어요. 7지에서 10지 되는데 또 무량겁이 남았어요. 그럼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1주 되면요 부처를 생각하면 진짜 살맛이 안 나겠죠. 무량겁을 다시 태어나야 되잖아요. 그때 자 1주 보살은 어떤지 보세요. 1주 보살은 무량하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 동안 고행을 닦아야만 열반을 얻는다고 해서, 여기서 열반이란 건 소승의 열반이 아니라 대승의 궁극의
16:04 부처가 얻는 열반이에요, 그 열반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겁을 먹거나 나약해지지 않는다 이 얘기죠. 쫄리면 1주 아니다 이거예요. 왜 이렇게 되겠어요? 자 에고는 쫄립니다. 에고는요 답답해요. 이 얘기 들으면 “와 지금 뽀로로를 앞으로도 몇 번 봐야 되는 거야?” 무량한 세월을 또 금수 단계에서 다시 올라오고 다시 올라오고. 사람 낳아놓으면 처음에 금수 단계죠. 금수는 돌아다니죠. 막 태어났을 때 돌아다니지도 못 하잖아요. 인간의 언어도 못 씁니다. 돌아다니지도 못 합니다. 한참 공을 들여서 이제 돌아다니게 만들고. 준우도 지금 한참 공들여서 이제 사람 말을 좀 해요. 사람 말도 하고 사람이랑 교감을 합니다. 또 한참 되어야, 사실은 한 서른 되어야 좀 제 정신이 돼요. “정상적인 사람 같네”가 나옵니다.
17:04 좀 있으면 정신이 이제 또 흔들려요. 약해져요. 이러다가 가요. 그러면 한 생에 공부를 많이 사실은 못 한다는 거예요. 한 1000살 정도 살면 한 200살 정도 방황하다가 나머지 한 800년 때 공부 열심히 하다 가고 뭐 이런 게 가능하겠지만 우리 생이 너무 짧아요. 우주도 그렇게 공부 많이 하라고 주는 기간은 아니에요. 한 생에 조금씩 조금씩 그게 쌓아가서 무량겁을 말하는 거예요. 에고가 생각하면 “그렇게 무량겁을 닦아서 내가 부처가 된다.” 이생각하면 암담하지 않으세요? 제가 1급만 돼도 구원입니다 해서 여러분이 막 기분이 좋다가도 이런 걸 읽으시면 “아 그냥 내가 10지였으면 좋겠다.” 이런 망상에 빠지게 되겠죠. 근데 진짜 1주 보살은 안 그런다. 진짜 1주 보살은, 에고가 두려워할 상황들을 지금 제시했는데도 참나 안에서 이미 안식을 얻었기 때문에 시간 공간을 초월해버려요.
18:02 난 이미 부처란 말이에요. 6조 스님이 강조한 건 이거예요. 6조 스님의 논리도 필요한 이유가요 대승불교 하는 분들은 무량겁에 질려 있어요. 근데요 6조 스님이 얼마나 한방에 날려줬습니까. 대승불교 체계식으로 말하면, “너 한방에 1주 될 수 있고 1주면 이미 넌 부처야. 너 끝이야.” “그러면 여기서(1주) 이미 부처면요 저 나머지(1지-10지)는 그럼 뭔가요?” “부처로 계속 살아가는 거야.” 선불교는 이런 위안을 주는 논리예요. “너 이미 부처야.” 그럼 자꾸 실력은 늘지 않을까요? “그거는 실력이 는다기보다 부처로서 그냥 그 생 그 생에 잘 적응해가는 것뿐이야.” 선불교는 이런 논리를 갖고 있어요. 발전한다고 생각 안 해요. 난 이미 부처고, 근데 옆 사람이 보면 “니가 볼 때 나는 발전하는 걸로 보일 거야. 그런데 나는 그냥 부처야. 부처는 시공을 초월해. 난 이미 시공을 초월한 부처가 됐기 때문에 니가 볼 때 내가 점점 노련해져가고 더 지혜로워져가는 것처럼 보일 수
19:05 있겠지.” 황당한 논리죠? 근데 이게 또 자명한 부분이 있어요. 이 두 개를 함께 보셔야 돼요. 여러분 1주 보살 되면 이미 부처면서 나날이 진보하게 됩니다. 이미 부처면서 닦음 없는 닦음을 나날이 닦아서 또 10지를 향해 가요. 그런데 이미 부처예요. 이 개념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시라고 제가 6조 스님 이야기도 해놨고 대승기신론 얘기도 실어놓은 거예요. 이 두 개를 하나로 이해하시면 그게 실상입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여러분은 이미 부처라는 안식도 얻으셔야, 평안을 갖고 있어야 1주입니다. 근데 평안이 없으시다. 아직 1주의 그 안정을 못 얻으신 거예요. 1주가 되면 이미 부처라는 걸 알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나날이 또 자기 부족을 알고 진보하려고 노력해요. 선불교처럼 “나 진보 안 해.” 이것도 아니고 또 대승불교처럼 진보하되 “난 이미 부처”란 생각이 또 있어요. 진보해서 10지 가야 부처란 생각이 있는 게 아니고 제 얘기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이미 부처인데 난 계속 진보해서 10지 갈 거야.” 왜?
20:08 그게 내 양심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 이해하시면 제일 탁월한 대승보살도를 지금 이해하신 거예요. 자 여기까지 이해하셨죠? 왜 그러냐? 일체가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나는 이미 부처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1주 보살한테 겁준다고 해서 1주 보살이 겁먹지 않는 자리다. 제가 말씀 드리면 “그럼 1주는 부처되기로 확정됐으니까 안 흔들리겠네요?” 아니요. 겁나 흔들리고요. 타락도 하고요. 제가 볼 땐 소승도 가고요. 지옥도 갈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지옥도 갈 수 있죠. 죄 계속 지으면 가는 거죠. 금수로도 태어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주 얻었는데 그런 말 하면 이게 안 맞잖아요?
21:04 제가 볼 때는 이거예요. 대승기신론도 저는 좀 너무 이상적으로 얘기했다고 봐요. 진짜 1주는요 타락도 하고 다 할 수 있어요. 단 지옥에서도 다시 살아나옵니다. 거기서 또 경험을 흡수한 다음에 살아나옵니다. 그러니까 1주만 되시면 죽인다는 게 이후 또 타락하고 뭐 해도요 계속 살아서 갈 수밖에 없어요. 그 안에 원력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경험으로 하실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살아서 다시 나오게 되어있어요. 1주 전은? 못 나오게 되어있어요. 지옥 가서 거기 들어앉을 수도 있는데 1주는 거기서 필요한 체험만 얻고 다시 또 나올 겁니다. 1주부터는 흔들려도 가는 거예요. 기독교에도 똑같은 게 있어요. 칭의를 얻은 뒤에 타락할 수 있다고 히브리서나 베드로서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되게 견고해요. 칭의를 얻은 뒤에 타락하면 그때부턴 답도 없다. 제가 볼 땐 그것도 센 말이에요. 아마 성령세례 받은 사람들한테 열심히 살으라고 좀 세게 얘기하신 거예요. 실제로 흔들려도 돼요. 왜? 다시 돌아와요.
22:10 진짜 칭의 얻은 사람은 흔들리다가 돌아와요. 왜냐? 천국 가기로 확정된 사람들이잖아요. 헤매다가도 돌아오게 돼 있어요. 어떻게든 돌아오게 돼 있어요. 헤매냐 안 헤매냐로만 판단하지 마시라고요. 경전들은 헤매지 말라고 막 각종 경고의 말들을 넣거든요. 헤매지 마라고 하는 말이고 또 위안주려고 너 이제 지옥 안 가도 돼 이렇게 얘기하는데요. 실제로는요 갈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공부의 과정에서 여러분이 실수할 수도 있고 그런 또 경험이 필요해서 갈 수도 있고. 다만 계속 살아 나온다는 게 1주 보살과 기독교에서 칭의는 확정되었다는 얘기는요 이제 그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죠. 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은요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헤매면서도 계속 그 목표를 향해 갈 겁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시는 게 옳아요. 단순히 “지옥 안 간데”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실제로 경전에 “1주도 지옥 갈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23:08 그러니까 지금 경전을 쓰신 분 따라 격려 쪽으로 해주고 싶은 분은 “너 이제 지옥 면했어” 하는 거고 경고를 해주고 싶은 분은 “너 1주 됐다고 거들먹거리다가는 바로 지옥 가” 이런 얘기도 있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11. 1주 돈오 이후 점수의 필요성. 1주면 이미 견성했죠. 부처됐죠. 그런데 점수를 왜 해야 되나요? 왜 닦아야 되나요? 자 이 얘기를 대승기신론이 시원하게 대답해줍니다. 기독교식으로는 칭의면 이미 하느님 자녀잖아요. 왜 성화를 또 노력해야 되나요? 왜 또 양심을 실천하려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려고 왜 또 노력해야 되나요? 자 ‘진여법’의 ‘본체’와 ‘본성’은 텅 비고 청정하나. 너의 본성 자리 너의 성령 자리는 거긴 죄가 붙을 수가 없으나 한량이 없는 번뇌 의해서 오염되고 더럽혀져 있다. 너 그 혼은 더럽혀져 있다.
24:04 너의 무의식까지 죄가 다 침투해 있다. 물론 기독교는 윤회론을 전제하지 않으니까 전생에서 쌓아온 어떤 습기라고 생각 안 하겠지만, 전생을 전제하건 안 하건 이미 우리 혼이 더럽다는 사실은 아시겠죠? 추잡스럽다는 사실은 아시겠죠? 기회만 주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전생을 전제하건 않건 내 무의식까지 죄성이 들어가 있다는 건 아실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사람이 ‘진여’를 알아차리더라도. 이게 기독교식으로는 만약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의 빛을 받고 성령을 깨달았더라도, ‘방편’으로. 형편에 맞는 처방이 방편입니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처방을 때려야 돼요. 그 방편으로 훈습하고 닦지 않으면. 즉 방편이라는 것은 육바라밀의 수행을 말해요. 육바라밀로 내 묵은 번뇌를, 죄성을 닦아내는 수련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25:07 청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본체는 청정한데 즉 영은 청정해질 텐데, 성령이 강림하면 영은 성령과 함께 살아나겠죠. 그렇지만 혼이 안 닦였다는 거예요. 혼이 그 죄성을 실제로 너무 좋아해요. 사도 바울이 성령 체험 이후에, 사도 바울이 칭의를 이룬 이후에 고민하시잖아요. 칭의 단계는 넘어서신 뒤의 고민 사항입니다. 내 마음의 내 혼 중의 한 부분은 성령의 법을 너무 좋아하는데 한 부분은요? 육신의 법을 너무 좋아한다. 이게 자기 혼에서 인심과 도심, 욕심과 양심이 투쟁이 일어나요. 1급 이후부터 그 투쟁 상황이 정확히 보이는 거예요. 그 전에는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다가 1급 이후가 되니까 이제 양심법이 자명하다는 것도 알았단 말이에요. 1급만 돼도 알아요. 아니까 이쪽(양심)으로 가고 싶은데 이쪽(욕심)으로 또 나를 끌고 가는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아요.
26:03 무의식에서부터 나를 끌고 가요. 마귀니 뭐니 하는 게 결국 자기 무의식 안에 있는 죄성이죠. 그게 끌고 가요. 무의식, 의식이 죄를 짓고 싶어 환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청정해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때가 한량이 없어. 때가 한량이 없대요. 더러운 무명의 요소, 죄성이 한량이 없어 온갖 법에 걸쳐 두루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니가 하는 모든 짓거리에 죄성이 그냥 넘쳐난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짓에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진치의 무명이 다 들어 있어요. 작은 일 하나에도 모든 일에 탐진치가 다 껴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체의 선행을 닦아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일체의 선행은 육바라밀로 그 모든 일들을 정화시켜 나가야만 된다.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행 즉 육바라밀을 닦는다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육바라밀을 닦고요, 기독교에서 우리가 성화의 노력을 한다는 게 결국
27:05 본질은 죄의 종이 안 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려고 양심을 실천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요 결국 뭐가 될까요? 내가 잘나서 양심한 게 아니에요. 양심을 닦는 중에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있는 성령과 더 합일을 이루게 될 거라는 말이에요. 내 안에 있는 진여와 더 하나가 된다. 여기 진여의 법이라는 게 성령의 진리입니다. 진여가 성령이죠. 그러니까 진여에 새겨져 있는 법, 그게 육바라밀하라는 거거든요. 성령에 새겨져 있는 법, 황금률을 하라는 거거든요. 거기로 돌아가게 된다는 게요 진짜 하느님 형상을 지닌 사람이 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짜 부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불자가 된다는 거예요. 똑같은 소리입니다. 진짜 불자 되고 진짜 하느님 자녀 될려면요 참나 깨치고 첫째 돈오해야 되고 두 번째 점수를 통해서 일상 모든 곳에 육바라밀 실천하고 사세요.
28:00 기독교 얘기 하나만 드리고 끝낼게요. 여기까지 진도는 나갈 거고요. 1주만 해도 이제 1지를 전제해서 1주를 이해해야 돼요. 1지로 나가는 과정일 뿐이에요. 기독교적으로 칭의했다고 나 하느님의 자녀? 아니에요.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는 돼요. 이제 성령 안에 사니까. 하느님이 의로우니까요. 하느님이 의로우니까 사실 의로운 하느님의 자녀죠.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돼서 칭의. 넌 이제 의로운 존재라고 부를 칭자예요. 부르게 됐다. 하느님이 의롭다 하셨다 그런 존재는 돼요. 그런데 죄성이 무의식까지 꽉 차있어요. 그 무의식까지 정화를 시켜가는 중에 여러분이 “너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소리가 나와요. 성화는요 의롭다의 연장선입니다. 의롭다 거룩하다 사실 같은 건데
29:01 제가 이렇게 말로 구분해 드린 이유가 의롭다 하심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하느님이 의로워서 의로운 자녀가 된 건데 이건(성화) 실제 내가 하느님의 뜻대로 실천해서 살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말이 나와요. 그래서 “넌 진짜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는구나” 하는 말이 나와야 성화의 열매를 맺는 단계에 들어갑니다. ‘진여’가 있고 ‘진여의 법’이 있죠. 진여의 법이 진여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여 안에 거한다고 해도 진여의 진리 안에 거하는 건 아니에요. “진여 안에 나는 거한다.” 이게 1주고요. “나는 진여의 진리 안에 거한다” 그러면 1지가 되는 거예요. 그럼 이 진리 안에 거한다는 건 육바라밀을 실제로 잘 지키고 살아야 돼요.
30:02 아시겠죠. 이게 기독교적으로 칭의를 얻었다고 해서 내가 거룩한 게 아니라 거룩하게 하느님 법을, 십자가의 진리를 따를 때 내가 성화의 열매를 맺은 존재가 돼요.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 나가시면 좋겠고.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게 된다는 것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형상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형상의, 그대로 읽어 볼게요.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행을 닦는다면 자연히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가 된다. 이 존재는요 칭의 단계를 넘어서 성화로 간 거고, 다른 말로는 칭의의 연장선이거든요. 칭의가 심화된 거예요. 의로운 자녀라는 게 심화돼서 진짜로 거룩해지게 된 거예요.
31:03 그래서 제가 이걸 좀 구분해 드릴게요. 이건 성경 얘기입니다. 성경 강의할 때도 제가 이 말씀드릴 텐데. 여러분의 에고가 성령과 만날 때, 에고가 어떤 행위를 해서 만나는 게 아니고 에고가 곧장 믿음을 통해서 성령과 만난다.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많이 한단 말이에요. 믿음과 행위의 문제. 그래서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행위는 율법을 말합니다. 여기서 행위가 율법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지금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쪽이 바리새파,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쪽이 이제 지금 복음주의자죠. 크리스천들. 구분되시죠? 믿음으로 구원받아야지 행위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돼야 되는데 이게 칭의인데
32:04 의롭다 칭하는,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의롭다고 불려지는 단계가 되려면 칭의를 입어야 되는데 칭의를 얻으려면 믿음으로 우리가 성령을 만나서 얻는 거지 행위를 통해 얻는 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때 행위는 좀 천시되는 거죠. 행위란 말이 나쁜 말은 아닌데 바울이 쓸 때 그 행위라고 하는 거는 율법적 행위예요. 율법적 행위의 제일 대표적인 게 뭐냐? 할례. 남자 아이들 꼬맹이들 껍데기 자르는 거. 바리새파가 그거 했냐 아니냐로 구원받냐 못 받냐를 가르고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그 짓을 하는 유태인만 구원받고 그런 할례 의식이 없는 다른 민족은 구원 못 받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거기에 대항해서 “행위로 구원 못 받고 그냥 이방인이건 유태인이건 그런 율법 계율 떠나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누구나 성령 만날 수 있다.” 이게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에요.
33:02 성령 만나서 칭의가 됐죠. 그 다음에 바울이 주장합니다. 자기를 성화시켜야 된다. 성스럽게 거룩하게 바꿔야 되는데 거룩하게 바꾸려면 성령이 우리한테 임하신 목적이 뭐냐? 바울이 이렇게 얘기해요. 선을 실천하라고 하느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거다. 실천을 강조합니다. 자 이제부터 기억해두시라고요. 기독교인들이 지금 아주 짧은 시야로 믿음과 행위 이 부분만 갖고 얘기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방금처럼 “불교는 어떻게 구원받아?” “견성한 다음에 열심히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부처가 될 수 있어.” 그럼 6조 스님처럼 기독교에서 “한 방에 가는 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가? 그냥 예수님 믿어. 그러면 끝나.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기 때문에 믿음만 하면 끝이야.” 이분 엉터리 기독교를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사도 바울 아마 이런 얘기 들으시면 저기 무덤에서 아마 킥 차실 거예요.
34:05 무덤 킥 하실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반대로 돌아가는구나. 제가 용어를 바꿔 볼게요. 행위랑 실천이라고. 앞으로 번역할 때도 율법은 행위, 거듭난 성령에서 나오는 양심의 실천은 실천이라고 번역을 하려고 제가 마음을 먹어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셔서 성령 뜻대로 살아가는 그 실천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 합니다. 그런데 행위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율법 지켰다고 해서 하느님이 여러분을 기특하게 여기시진 않아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교의 계율을 잘 지킨다고 여러분 불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극락가고 부처님 되는 게 아닙니다. 보살되는 게 아닙니다. 불성과의 만남, 견성은 여러분 화두를 잡건, 믿음을 가지고 모른다 하고 불성 자리한테 모든 걸 맡겨 버리면 그냥 견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견성한 이후에 육바라밀 실천이 없으면 여러분 절대 보살이 못
35:05 됩니다. 똑같은 논리 구조를 갖고 있어요. 사도들의 글과 불경이 똑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양쪽에서 각자대로 다르게 해석돼가지고 잘못된 수행론이 지배하고 있는지. 계율만 잘 지키면 된다. 만약 여러분이 절에 갔는데 불교에서 “계율만 잘 지키면 된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된다”고 하는 건요 여러분을 진짜 무시하시는 거예요. 불교에서는요 불교의 레벨, 교리의 레벨이 있어요. 인천교가 있고 그 위에 소승교가 있어요. 그 위에 법상교인 유식종하고 중관교. 편의상 중관학파를 중관교라고 나눠 볼게요. 요 두 개(법상교, 중관교)는 누가 먼저냐에 따라 서로 자기 파마다 이게 더 중하다 이게 더 중하다 입장이 달라요. 그 위에 일승교의 화엄 교리가 있습니다.
36:03 천태종이나 화엄종의 교리.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교리가 있고. 일체는, 만법은 아뢰야식의 작용이다(법상교), 만법은 본래 공하다(중관교), 아니면 열반에 들고 끝내자(소승교). 인천교가 뭔지 아세요?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오거나 천국에 가는 법이에요. 기독교에서는 천국 가면 끝이죠. 짱이죠. 제일 짱이죠. 불교에서 천국은 기독교의 천국은 아니에요. 여기(불교) 천국은 그냥 좀 복 받으러 가는 곳이에요. 그래서 복 다하면 다시 지상으로 윤회해요. 인천교 여기 갈려면 10계만 잘 지키면 돼요. 기독교의 10계명처럼 불교의 10계, 10선이라고 하지요 10선. 5계의 확장판입니다. 5계의 확장판인 10선만 잘 지키면 다시 사람으로 오거나 아니면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요. 기독교의 천국하고는 좀 다른 개념이에요. 기독교의 천국하고 좀 다른데 복을 받는 곳에 태어나요. 살기 좋은 곳에 태어나요. 거기 살다가 다시 윤회해 와요. 복 다하면 다시 윤회해 와요. 근데 그 위에
37:03 열반의 세계가 있고 그 위에 보살의 세계가 있고 부처의 세계가 있어요. 근데 여러분 절에 가셨는데 “계율만 잘 지키세요” 하는 건요 여러분을 완전 무시하는 거예요. “너는 소승에도 들어갈 레벨이 아직 안 된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방생이나 이렇게 복을 좀 많이 지어서 다음 생을 살아갈 포인트나 좀 마련해라”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아예 포기입니다. 인천교는 원래 지도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인천교는 진짜 일반인, 전혀 도를 못 닦는 사람한테 권하는 방식이에요. “복이라도 지으라고. 다음에 지구에 다시라도 와라. 그래야 너도 공부 인연이 생길지 모른다.” 도인한테요 “너 다음 생에 사람으로 오려면 좀 공덕 쌓아라” 이 얘기는 최악의 치욕이죠. 부처 되겠다고(소승교), 우주를 초월하겠다고(소승교), 보살이 돼서 우주를 구제하겠다고(법상교, 일승교). 이렇게 뜻을 세운 길은 안 권하는 거예요. 그건 안 권하고 “다시 사람으로 와라”라고.
38:02 “좋은 일 많이 해.” 저거는요 그냥 일반인한테 권할 내용이에요. 만약에 절에 갔는데 저걸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그럼 여기는 지금 도인이 없구나 하는 거 아셔야 돼요. 다시 사람으로 오자는 동아리지 보살되자는 동아리는 아닌 거예요. 목표가 사람으로 오자 이런 거. 다음 생에 지옥가지 말고 소나 개돼지로 오지 말고 사람으로 오자는 모임인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나 기독교는 조금씩 달라요. 저 천국가자는 게 좀 위상이 달라요. 기독교에서 천국은 영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요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예요. 정토. 저기(불교)서 말하는 천국은 정토가 아니고 중생들이 사는 세계인데 좀 더 욕망이 해결되고 있는 세계. 살기 좋은 천국. 이런 개념 좀 갖고 계시면 불교나 기독교 공부하실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믿음, 행위, 실천 요거 꼭 기억하셔서
39:06 믿고 성령 만나고, 성령 만나서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 나의 양심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나는 거룩한 자녀가 돼서. 자 기독교식 구원론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만나서 ①칭의, 1단계 칭의를 얻고, 2단계 성령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②성화를 닦아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느님이 ③영생 쏜다 하는 게 이게 3단계입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천국 간다는 얘기예요. 불교 천국이 아니에요. 기독교 천국은 부처들이 사는 정토에 간다는 그런 느낌이에요.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가서 함께 산다. 이게 3단계 구원론이에요. 구원의 레벨이에요. 이걸 아시면 우리는 뭘 봐야 되냐? 한 교리에 치우쳐서 보지 마시고
40:02 그 안에 관통하는 인간 영성의 계발의 단계를 보시면 돼요. “아 얄짤 없구나, 다른 길이 없구나” 하는 거 아셔야 돼요. “깨어서 열심히 양심을 실천하라.” 자 이 말씀만 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구원론을 가지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는 하느님 앞에 모든 일을 양심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나는 하느님을 섬겼노라. 하느님 앞에 나는 섰다”(신약성서 사도행전 23:1 참조.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느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이렇게 얘기해요. 번역이 조금씩 다른데 그 말이에요. 나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섬기면서 어떤 방식으로 섬겼느냐? 모든 일에 양심대로 처리함으로써 나는 하느님 앞에 섰다. 하느님을 섬겼다.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성화시키는 노력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나한테 영생을 쏴주실 거다 이거예요. 나는 영생을 받으리라고 이미 확신한다. 왜? 이미 부처가 되었다는 것처럼 나는 하느님 안에 살면서 이미 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41:04 이 정도 얘기하실 수 있으면 사도 맞습니다. 불교에서 이 정도 얘기하면 보살 맞아요. 아직 1주 보살, 1지 보살 뭐 좀 역량 차이는 있겠지만 이미 보살도에 들어선 보살은 맞아요. 1주 이상부터는 이미 훌륭한 보살로 커나가고 계시다. 훌륭한 사도의 길에 들어서셨다고 봐야 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여러 종교 뭘 보셔도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을 찾아 가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예 마치겠습니다. 4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