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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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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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3. 03. 土.
게시일자 2020. 05. 26.
동영상 길이 49:56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lBMh8Nk3Vk4


0:10 제가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까 기독교까지 설명을 해드리다 보니까 점점 더 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양심 잘하려고 이 공부하는 거다”라고 아셔야 돼요. 자나 깨나 오직 양심입니다. 기독교적으로 얘기할 때 하느님의 법이 양심이고 양심을 제일 잘 따랐던 이가 성자 그리스도고 우리 성도는 양심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양심 따르셔야 돼요. 욕심으로 양심 한다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에서 나오는 양심, 성령과 공명하는 마음으로써의 양심, 즉 이기심을 초월한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그 양심이라야, 거기서 나오는

1:01 자명함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공부는 그 양심을 따라 가시는 게 다예요.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에서 다른 공부가 없어요. 우주의 어떤 생명체도요 자기 위하는 마음이 있어요. 나 살려야 된다는 마음이 있고 또 하나 우주 전체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두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배려하는 마음이 51%로만 주도권만 자꾸 작동해주면 우주가 천국이 됩니다. 그 공식을 잘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왜 동물들은 뭐냐? 동물들은 우리가 공부를 하라 마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 인간의 문제입니다. 우주에서 지금 문제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왜? 동물은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 돼요. 뭐 달리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쪽에 욕심쪽으로 51%를 힘을 실어줄 수도 있고 양심 51%로 힘을 실어줄 수도 있어요. 여러분이 결정하셔야 돼요. 주도권을

2:00 여러분이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이게 인간들은 이런 공부를 계속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잠깐만 방심하면 여러분 또 어디 가서 이상한 짓 하고 있어요. 잠깐 방심하면 금방 미투운동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어요. 별 추잡스러운 거다 나오죠. 제발 옷 좀 벗어 달라. 도대체! 아니! 큰 거 하는 것보다 아우 추잡스러워서 이 양반 이제 어떻게 산대 그랬는데. 보통 멘탈들은 아니시겠죠. 잘 이겨내실 거라고 믿습니다만. 문제는 이겨내도 안 되잖아요. 양심 안에서 이게 회복이 돼야 되는데. 건강해져야지. 강한 멘탈 이겨낸다 그것도 아닌 거예요. 인간의 마음만큼 이렇게 어려운 게 어디 있고 이렇게 또 추잡스러워질 수도 있고 추악해질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성스러워질 수도 있는 참 엄청난 겁니다.

3:00 그래서 우리 마음공부라는 거, 정말 무서운 핵보다 무서운 거예요. 정말 무서운 걸 다루고 있는 거예요. 사람 마음 틀어지면 지금 우리는 이 우주도 이 지구도 날려버릴 수 있어요.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이 우주를 파괴하는 엄청난 이런 나쁜 짓도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을 낳고 이기심만 줬겠냐는 거죠. 통제할 수 있는 마음도 줬습니다. 그걸 계발하는 게 모든 전 세계 종교 철학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것만 잘 연구하시면 좋겠다. 진도 나갈게요. 지난 시간에 1주 보살의 경지까지 말씀드렸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혜쌍수의 경지다. 선정과 지혜가 쌍으로 닦이는 경지다. 선정은 참나에 안주해 있다. 지혜는 아공 법공을

4:00 자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플러스 또 뭐죠? 구공에 대해서는 자명한 이해는 아니고 체험적인 이해는 하고 있다. 자명 이해와 체험적 이해는 다르죠. 체험적 이해가 이제 가능한 단계. 그것도 잘한다는 아니고요 가능해졌다. 저 정도 아니까 이제 가능해졌다. 1주 보살은 늘 참나 안에 살아요. 그러면 늘 엄청난 신성의 경지에 들어 있냐? 그게 아니고 내 안에 참나가 늘 살아있다는 걸 알고 참나 덕에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거 알고 산다는 거. 그리고 틈만 나면 참나랑 접속해서 참나 안에서 더 깊은 안주를 하고요. 일상을 살아갈 때도 항상 참나에 뿌리를 두고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단계. 그래서 실제로 참나랑 찐하게 만나는 것은요 3급 4급 되면 잘해요.

5:00 1, 2급의 경지는 뭐냐? 1, 2급은 참나를 안 찾는 수행을 해야 된다. 3, 4급만 되어도 깊은 명상할 땐 참나를 만나요. 명상이 얕아지면 참나랑 끊기는 것 같아요. 제대로 된 1급에 들어가시려면 끊긴다는 그런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돼요. 지금 이 순간요 “나 지금 참나랑 멀어진 것 같아”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날려버릴 수 있어야 돼요. 그렇게 정신을 늘 말짱하게 차리고 살아가는 경지. 늘 참나랑 분리됐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는 경지예요.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참나랑 찐하게 만나다가 나중에는 “참나랑 내가 안 만나는 때라는 게 있나?” 하게 돼 버리는 거죠. 그래서 깊은 선정 얕은 선정 가리지 않고 늘 참나와 함께 한다는 경지. 그러면 참나와 함께 하게 되면, 참나가 갖고 있는 그 안목이죠. 참나의 지혜인 아공 법공의 지혜도 함께 하는 겁니다. 어디 가는 게 아니고.

6:00 그래서 늘 아공 법공 하고 아공 법공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도 근원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죠. 중력의 법칙 같은 거. 중력의 법칙, 아이 때는 무시해 봅니다. 옥상에서 한 번 발을 디뎌보고 혹시 모르니까요. 혹시 안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여러분 중력법칙 무서운 거 학문적으로 안 배워도 살다가 알죠? 계단에서 조심해서 걷고. 낭떠러지 조심해서 돌고. 늘 중력 중력 하지 않아요. 그래도 몸으로 먼저 알죠. 체험부터 먼저 해요. 그거 어기면 큰일 난다는 거 알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왜 그런지 개념적으로도 이해하죠. 그럼 이게 자명해진 거예요. 체험적 이해와 올바른 개념이 탁 만났을 때 자명해져요. 자명해지고 나면요 우리가 중력에 대해서 고민을 안 해도, 여러분 술 취해서 돌아다니시다가도 딱 낭떠러지 만나면 정신 딱 차리고 틀 수 있는 거죠. 그런 것처럼 아공 법공을 아시잖아요.

7:00 그런 경지라는 거예요. 이 1주 보살은요 아공 법공을 그냥 자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곱씹지 않아도, 곱씹을수록 좋은 거고요, 곱씹으면 당연히 좋은 거고 곱씹지 않더라도 인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딱 정신차리는 순간 자동으로 참나의 작용으로 보면서 문제를 풀어간다는 거예요. 그런 느낌이라는 거 아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게 1주고 1지는 아니냐? 1지는 딱 정신 차리면 육바라밀을 통으로 딱 껴안아요. 육바라밀이 진리라는 걸 똑같이 알아버리는 거예요. 여기(1주)는 아공 법공을 알았다는 것은 에고 너머에 참나, 진짜 나가 있고 그 참나가 내가 보고 듣고 맛보는 생각 감정 오감의 근원이다는 걸 아는 정도예요. 이게 자동이라는 거고요. “몰라” 했을 때 이 정도의 지혜(아공 법공)가 자동으로 나오면은

8:00 1주 보살이고요. 1지는 뭐가 자동이냐면요? “몰라” 했을 때 육바라밀이 통으로 나와야 돼요. 육바라밀 법칙이 통으로 작동해요. 왜냐? 하도 해서 그래요. 하도 해서. 별게 아니고 선정과 지혜 얻은 다음에 뭐 하겠어요? 이거(정혜) 얻은 다음에 플러스 나머지 바라밀 잘하려고 노력하겠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렇게 열심히 닦아가다 보면. 닦는 방법은 조금 있다 말씀드릴 게요 나중에. 깨어서 참나 상태에 살면서 참나의 아공 법공의 지혜로 판단하고, 깨어서 육바라밀에 대해서 조금씩 체험을 갖고 이해해가는 단계에서 체험이 점점 깊어져요. 육바라밀을 전체적으로 계속 닦다가 보면, 그러다보면 “몰라”만 해도 자동으로

9:00 육바라밀 법칙이 선명하게 알아질 때, 몰라만 해도 자동으로 육바라밀부터 챙기게 될 때 여러분은 1지 경지로 가는 거예요. 이때(1주)는 아직 거긴 안 돼도요 그래도 이게 대단한 게요 몰라만 해도 자동으로 깨어나서 아공 법공으로, 참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잖아요. 그러니까 육바라밀 판단이 바로바로 수월해져요. 이미 이때부터는 이미 수월해져요. 몰라만 하면 벌써 세상과 딱 접속이 끊어지면서 초연해질 수 있잖아요. 그 상태에서 육바라밀 분석을 자꾸 하면 실력이 자꾸 늘잖아요. 이 상태만 돼도 여러분 이미 훌륭한 보살입니다. 뭔 일 생기면 “몰라” 하고 깨어서 참나의 관점에서 육바라밀 분석해버려요. 이 정도만 해도 해요. 깨어 있으니까 육바라밀 분석까지 가요. 나중에는 이게 좀 단축되는 것뿐이에요. 깨어 있으면 바로 육바라밀 분석으로 들어가요. 깨어서 좀 정신을 수拾해야 들어가는 게 아니라 깨어서 아공 법공 자동으로 알았듯이

10:00 자동으로 “내 안에 육바라밀 있잖아” 하고 자동으로 육바라밀 분석에 들어가 버리면 좀 수월해진 거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결국 1주 보살된 분이 육바라밀을 열심히 또 체험하면서, 자 보세요. 몰라 해가지고 올바른 판단하고 몰라 해가지고 남한테 베풀고. 아까 남한테 베풀기 싫을 때 몰라를 해버렸어요. 자 나는 베풀겠다 안 베풀겠다가 아니라 베풀기 싫다인데 몰라를 했더니 갑자기 남을 나처럼 보게 되면서 베풀어라 하는 힘이 생기면 참나 안에 사랑이 꽉 차 있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실험할 수 있다니까요. 몰라를 이런 식으로 실험을 자꾸 해보시면요 몰라만 해봤을 때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시라고요. 정의감이 싹트다가 욕심이 올라와서 정의감을 누르려고 할 때 다른 말 말고, 정의로워야지가 아니라, 몰라만 하고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시라는 거예요. 그때 정의를 마음이 응원해버리면 참나가 정의로운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11:00 하나하나 실험을 오래 하시다 보면 “내 안에 원래 육바라밀이 다 들어 있구나.” 즉 “몰라만 하면 자동으로 사랑의 마음 샘솟고, 정의의 마음 샘솟고, 인욕하게 되고, 성실해지게 되고, 성실하려고 안 했는데 성실해지고, 깨어있지 않으려고 해도 깨어나게 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싫어도 올바른 판단이 되어버리더라”까지 알고 나면 “내 안에 육바라밀 있구나”가 선명해질 때가 오겠죠? 그때가 1지 보살입니다. 제가 얘기를 하도 드려서 요것까지는 아실 거예요. 이건 정혜쌍운. 그러면 이때는 이 정혜가 한꺼번에 다 해가지고 혜 하나로 먹고 혜 플러스 나머지를 덕이니 복이니 해서 순서는 복혜쌍운 덕혜쌍운 이렇게 많이 부릅니다. 2개로 육바라밀을 다 넣은 거죠. 실천과 지혜. 육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은 지혜에 들어가고 나머지 이런 바라밀들,

12:00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같은 실천적인 요소는 복이니 복덕에 다 넣어버리는 거예요. 왜? 나한테는 복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덕이죠. 나한테 다 복이 올 짓들이고 한편으로는 덕을 베푼 게 되잖아요. 은덕을 베푼 거고 나는 복을 쌓은 거고 하니까 이것도 또 동전의 앞뒤입니다. 한편에서 보면 덕이고 한편에서 보면 복이에요. 같은 거예요. 그래서 공덕도 쌓고 복도 짓는 요것(복덕)과 반야바라밀이 함께 돼서 다른 말로 어렵게 풀면 반야, 복덕은 방편 또는 실천이라 그래요. 반야와 그 반야를 가지고 자유자재로 응용해서 중생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형편에 따른 처방을 내려서 그때그때 다양하게 도와주는 거예요. 반야방편쌍운 이렇게 부르는 게 제일 정식이고요 줄여서는 덕혜쌍운, 복혜쌍운 이렇게도 부릅니다. 여기(1주)는 정혜쌍운이라고 부르고요. 외워두세요. 정혜쌍운 1주, 복혜쌍운 덕혜쌍운

13:00 1지. 차이는 뭐냐? 몰라 했을 때 아공 법공 지혜까지 나오느냐? 아니면 몰라 했을 때 구공, 내 안에 양심 있다 까지 그대로 나오느냐? 사실은 몰라 했을 때 자동으로 어디까지 나오느냐가 관건이긴 해요. 이렇게 설명 드릴 수 있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 드릴 수 있는데 본질 갖고 얘기하면 몰라 했을 때 육바라밀이 통으로 나오느냐? 아니면 몰라 했을 때 일단 지혜가 나와서 육바라밀을 추구하게 만드느냐? 경지의 차이가 있지만 보조지눌스님이요 1주만 가도 거의 게임 끝난 것처럼 얘기하고 많은 경전들이 1주에 이미 부처됐다라고 얘기하는 이유는요 정혜쌍수만 갖추면 참나에 대해서 꽤 안 거예요. 참나가 공적영지죠. 공적이 선정이고 영지가 지혜 아닙니까. 참나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이 이미 밝혀진 거예요. 참나는 고요하되

14:00 알아차리는 자리다. 고요하되 지혜롭다는 참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안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아공 법공의 지혜까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육바라밀이 통으로 안 나와서 그렇지 이 지혜를 갖고 나면 육바라밀을 하게 돼 있어요. 추구하게 돼 있어요. 그럼 이 정도만 해도 불지의 중요한 부분은 이미 회복했다고 보는 거예요. 근데 저는 이렇게 부릅니다. 1주는 공적영지 덕후니까 “참나덕후” 1지는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다 좋아하니까 “양심덕후.” 자나 깨나 깨어서 알아차리는 사람은 참나덕후고 자나 깨나 육바라밀만 좋아하는 사람은 양심덕후. 뭔 일만 생기면 육바라밀부터 찾으면 양심덕후고 뭔 일만 생기면 고요함과 깨어 있음을 찾으면, 깨어서 통찰하는 걸 좋아하면 참나덕후죠. 그런데 아주 다른 게 아니라 참나덕후는

15:00 진정한 양심덕후로 가는 과정에 있다. 사실 참나덕후도 양심덕후인데 굳이 나누자면 양심에 어느 부분만 복원된 거죠. 양심 중에 고요하되 깨어서 알아차리는 선정과 지혜의 능력이 복원됐기 때문에, 그걸 되찾았기 때문에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 이제 나머지 요소 되찾는 거는 시간문제예요. 보세요. 뭔 일이 생겨도 여러분이 몰라 하실 수 있고 올바른 판단하실 수 있다면 육바라밀 안 하실 리가 있나요? 이것만 얻으셔도 이미 여러분은 보살도에서는요 거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통과했다고 봐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보세요. 천태지자선사면요 천태종의 이론을 대어주신 분이에요. 자, 이 문헌들이 성철스님 선문정로에서 가져왔어요. 이분은 비판하려고 가져온 겁니다.

16:00 지난 시간까지 읽었죠. “1주 보살만 돼도 이미 부처다. 이미 부처랑 동등하다”라고 주장했어요. 왜? 아니 어차피 이 참나가 다죠. 부처돼도 다른 참나 있나요? 온전히 지금 구현을 못 해서 그렇지 이미 내 안의 온전한 부처님의 참나를 되찾은 거 맞잖아요. 내가, 에고가 다 수용을 못 해서 그렇지. 이 이전의 깨달음은 뭐가 문제가 있었냐면요 지난 시간 강의 들으셔야 압니다만 요 이전의 깨달음은 10신초 그러면요 저희 8급에서 7급 경지 깨달음 이게 해오라고 하는 게 있었거든요. 보조지눌 스님이 해오만 해도 대단하다고 했어요. 사실은 해오만 해도 이미 부처다. 왜? 이때 불성을 만났기 때문에.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불성 만났다 또 놓치니까

17:00 이때를 기점으로 부처라는 걸 이제 확신하게 된 건 맞지만, 자 여긴 달라요. 참나 안주해버렸죠. 이제 불성과 함께 살아요. 내가 성령과 불성을 다 수용하지 못 해서 그렇지 이미 성령이 나랑 함께 산다는 거, 불성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확신해 버린 자리입니다. 그리고 불성과 성령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요. “일체가 하느님의 신비구나” 하면 성령 안주자고, “일체가 불성에 작용이구나” 그러면 불성 안주자예요. 이미 이 경지까지 왔다는 건요 이미 이제 중생에서 보살의 단계로 온전히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전 보살들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1주만 돼도 우리가 육바라밀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모든 토대가 갖춰져요. 그래서 굳이 비유하자면 여기(1주)가 이제 석사급 되고 이게(1지) 박사급입니다. 자 석사 됐다 뭔 얘기죠? 박사 논문 쓸 준비 다 됐다. 이제 여기서 공부만 해나가면 박사 논문이 나와요. “사랑은 온유하고 인내하며” 이게 착 나오면 박사 합격되는 거예요.

18:00 일단은 지금은 이 말까지는 못 해요. “양심은 사랑이요 정의요 진리요” 이 말까지는 아직 안 나오지만, “양심은 고요함이요 지혜로다”까지는 알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가지고 이 고요함을 가지고 하나씩 알아내면 그만인 거예요. 이제 알아내는 게 시간문제인 경지예요. 이제 양심 전반에 대해서 실험만 해보면 다 알아낼 수 있는 연구력을 갖췄죠. 그래서 제가 석사급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즘 석사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석사의 원형 가지고 얘기할게요. 이해되시죠? 앞으로 장차 양심에 대한 큰 획기적 논문이 나올 준비가 이미 된, 그 연구를 할 준비가 됐다. 양심 연구하실려면 이 정도 하셔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이 양심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하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춘다. 정혜쌍수를 갖춰야 돼요. 언제 어디서든지 깨어있고 올바른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러면 된 거예요.

19:00 이제 인간의 길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사실은 그게 인간의 길이에요. 육바라밀이 다른 게 아니라 양심덕후다 그러면 그 양심이 뭔데요? 인간의 길이에요. 인간이 어떻게 살면 된다 이거 알아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견도라고 합니다. 도를 봤다. 길을 봤다. 아직 길을 본 건 아니에요. 길을 볼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정혜쌍수 얻었다 그러면 이제 길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라는 거예요. 장비 다 갖춘 거예요. 여러분 밤에 夜간에 볼 수 있는 장비 다 구입했다 그러면 장비를 갖췄으니까 길 찾는 건 시간문제잖아요. 선정과 지혜를 갖췄으면 찾아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주 보살을 중시하는 거예요. 잠깐 방심했더니 또다시 화이트보드 다 채웠네요. 화이트보드 스틸러(whiteboard stealer) 같은 기분인데요. 자 천태종 한 번 볼까요? 천태종 있죠. 아까 10신초라고 하는 거 요거 아시겠죠? 10신초라고 하면요 기존 대승불교 책에서는

20:00 처음 믿고 얼마 안 돼서 예요. 불교를 믿고 얼마 안 돼서 하란 대로 육바라밀 수행을 하다가 육바라밀 수행이 제대로 되지는 않지만 보시도 해보고 지계도 해보고. 에고의 마음으로 먼저 하겠죠. 몰라는 잘 안 돼요. 선정도 공부하죠. 몰라 공부도 하고 아공 법공 얘기도 듣고 하다가 “아!” 하고 참나 체험하고 아공 법공이 이해가 된 거예요. 근데 오래 머물지 못 하는 게 “해오”예요. 그게 찰나로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 “아!” 할 때 부처를 만나고 내 안에 불성이 있다는 걸 알아버리고 불성의 안목으로 세상을 한 번 봐요. 아공 법공의 지혜를 가지고 봐요. 그러니까 이 해오만 얻어도요 이제 불성에 입문을 한 겁니다. 그런데 입문은 했는데 1주 보살 되면 사실은 전문가가 된 거예요. 늘 참나 속에 있다는 건 전문가죠. 참나 전문가죠. 참나덕후고. 그런데 양심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 아직 남았어요.

21:00 육바라밀 전문가 되려면 아직 육바라밀 공부를 많이 해야겠죠. 1지 보살된 뒤에는 이제 공부가 심플해집니다. 육바라밀만 죽어라고 하면 돼요. 이제 공부할 만하거든요. 그 내용은 미리 소개해드리면요. 혹시 제가 오늘 진도 거기까지 못 나가더라도 미리 말씀 드리면 오육 페이지 있죠? 5, 6 페이지가 이제 그 공부하는 법입니다. 5, 6, 7, 8 페이지가 양심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1주 보살이 체계적으로 닦아가야 되는 공부 단계예요. 자 다시 오시구요. 천태지자선사 얘기 해볼게요. 양심 얘기 미리 드렸던 거죠? *천태 지자, 마하지관.예 천태지자 스님 얘기. 마하지관이란

22:00 글에요 1주에 진입하면, 자 초주에, 1주 보살에 진입하면 무명을 깨뜨리고 불성을 보나니. 불성을 본대요. 1주만 되면 불성을 확연히 보나니 화엄경에 이르기를. 화엄경을 근거로 댑니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더 중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의 근거는 화엄경에서 대고 있는 것뿐이에요. 법화경을 제일 중시하는 종파가 천태종입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초발심할 때 이미 정각을 이룬다라는 화엄경의 주장이 바로 이 뜻이다.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이 오묘한 말이다. “초발심이 그대로 정각이다.” 정각은 부처님의 깨달음이거든요. 어떻게 초발심이 정각이 될까요? 이제 처음 발심했다는 건데? 그런데 이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23:00 정확히 읽어내려면 제 화엄경 강의 들으시면 알 수 있지만 초발심이란 건 원래 화엄경에선 1지를 말해요. 그런데 또 1주기도 해요. 1주의 이름이 발심주예요. 화엄경에서 초발심 그러면 처음 믿은 순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화엄경에서 초발심이란 건요 처음으로 진정으로 여러분이 발심하게 된 거예요. 발심이라는 건요 이 말의 줄임말입니다. 발보리심. 아까 보리심이 양심이라고 그랬죠. 그리고 여긴(양심) 이미 온전해요. 여러분이 에고를 가지고 자꾸 양심을 어기고 있는데도 여러분의 양심은 이미 온전합니다. 여러분이 수용을 못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왜? 양심의 근원이 시공을 초월한 마음이기 때문에 양심에 근원은 이미 온전해요. 그게 계속 여러분한테 자극을 주는데 여러분 안에서 양심에 공명하는 마음이 미약한 거지

24:00 양심 자체는 원래 온전합니다. 성령이 온전하듯이 원래 온전합니다. 마찬가지로 보리심은 원래 온전해요. 이미 양심은 온전한데, 이걸 불교에서 본각이라고 그럽니다. 본래 이미 깨달아 있는데 발보리심이라는 것은 시각이에요. 대승기신론에선 끝없이 나오는 말인데 어려운 용어 한 번만 쓸게요. 본래 깨달아 있는데 비로소 깨달아요(시각). 여긴 에고 입장입니다. 에고 입장에서는요 이제 공부 시작한 거고 이제 깨달은 거죠. 참나 입장에서는 우리는 본래 온전해요. 발보리심이란 말은 되게 어려운 말이에요. 보리심을 발동했다 그러는데요. 우리 에고의 보리심과 공명하는 에고의 마음도 보리심이라고 하기 때문에 두 보리심이 있는 거예요. 원래 온전한 보리심을 내가 에고 차원에서 온전히 구현하겠다고

25:00 마음먹은 그 양심도 보리심입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발동했다고 할 때, 발보리심 그러면 이때는 보리심을 흔히 “깨달으려고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보리심을 그냥 “깨달은 마음”이라고 풀이해야 돼요. 두 의미가 있는 이유 아시겠어요? 그래서 이걸 불교적으로는 “절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 그럽니다. 절대적 보리심은 원래 온전해요. 그런데 에고 차원에서 드러난 상대적 보리심은 더 완전해지고 싶어 하죠. 아퀴나스가 한 말인데요. 여러분 안에서 이런 거예요. “내가 신을 찾아 갈구하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신이 계시기 때문이다.” 즉 여러분이 보리심을 성취하고 싶으신 이유는요 원래 여러분 안에 보리심이 온전하게 갖춰져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발보리심이라고 할 때 번역을 할 때 일반적으로 저때의 보리심은 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 이렇게 풀어요. 이렇게 번역을 해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원래 보리심의 의미는 원래 이미 온전한 마음이라고요.

26:00 이미 온전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면서 나를 더 온전해지라고 내 에고한테 뭐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온전한 양심이 여러분 에고한테 양심적이 되라고 외치는 그 소리가 또 양심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서는 양심을 계속 계발해가야 되지만 원래 근원적으로 여러분 양심은 이미 온전해요. 자 같은 얘기입니다. 보리심을 계속 계발해야 되지만 이미 보리심은 온전하다. 자 “여러분은 계속해서 깨달음을 추구해야 되지만 이미 원래 깨달아 있다.” 이런 느낌으로 보리심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초발심이라는 건 보리심이 제대로 발동했다는 거예요. 진짜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확 냈다는 거예요. 그거는 사실은 1지 가야 진짜 발심이 됩니다. 그런데 1주부터도 발심으로 인정해줘요. 그럼 그게 1주의 발심이에요. 원래 화엄경은 1주랑 1지가 같습니다. 그런데 그 52위 수행 체계. 불교는 할 때마다 이걸 또 해야 되니. 10신에서

27:00 10주로 가고 10행으로 가고 10회향으로 가고 이게 10지로 이어져서 플러스 11지 등각, 12지 묘각. 그래서 여기(묘각)가 부처거든요. 그래서 부처까지 가는 데 총 52체계예요. 원래 화엄경은 그냥 10지 체계일 뿐인데 이 복잡한 체계가 짜여지면서 어려워져요. 그럼 여기서 1주 보살은 여기잖아요. 10주 중에 첫 번째가 1주고. 1주도 이름이 발심주잖아요. 근데 화엄경에서 원래는 10지 중에 1지가 발심주, 발심지란 말이에요. 52 체계로 찢어지다 보니까 두 발심주가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 여기서 말한 1주 보살은 참나 안에서 발심입니다. 참나 안에서 발심한 거예요. 여기서 말한 1지 보살은 양심에서 발심한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 화엄경에 초발심시정각이라는 것은 1지 보살의 발심을 말합니다.

28:00 1지 보살이 이미 탁 마음 냈을 때 그 안에 육바라밀이 다 들어 있으니까 이미 깨달았다라고 인정해 줬는데 이 말이 이제 어떻게 응용되느냐? “1주 보살 때, 우리가 발심했을 때 이미 부처다”라고 보조지눌도 이 입장인 거예요. 1주 때 이미 부처됐다. 더 나아가서 10신초, 1신, 처음 믿을 때 이미 해오를 얻었으니까 이때(1주) 발심한 거나 사실은 이때(1신) 해오나 이게 끊김이 있어서 그렇지, 업에 많이 침노당해서 그렇지 사실은 질적으로는 똑같다. “이미 처음 불교 믿고 얼마 안 돼서 우리는 사실 부처될 수 있다” 이런 주장까지 가요. 아시겠죠. 여기까지 아시겠죠. 여러분 학당에 오셔서 지금 보통 이 상태(1신)로 오셨다고 치죠. 학당 오셔서 “몰라” 좀 하세요 해서 몰라 하다가 견성 체험해버리시고 아공 법공 얘기 듣고 이해하시고 이러면요 학당에 와서 한 달 정도 공부하시다 보면 될 수도 있어요.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2900 참나 체험도 하고 아공 법공도 꽤 이해하실 수도 있어요. 그렇죠. 이런 식이에요. 불교 믿고 얼마 안 돼서도 우리는 그때 이미 부처의 싹이 제대로 자랄 수 있다. 근데 진짜는 1주 보살 됐을 때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정말 진짜는 1지 부처인데 보통 공부 시작해서 1주 보살되는 데 만겁 걸린다고 하고요 1지까지 가는 데는 1무량겁이 걸려요. 1아승기겁이 걸려요. 그러니까 지금 계산하면 1지 보살된 뒤에 육바라밀 잘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도 얘기를 할 수 있어요. 정혜쌍수가 된다고 해도 육바라밀을 잘 택해서, 수많은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전제하고 있어요. 수많은 생의 경험, 육바라밀 경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약자도 돼보고 강자도 돼보고 남자도 돼보고 여자도 돼보고 다양한 삶의 경험들 속에서 육바라밀이 내 안에서 익어가야만 1지 보살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 “1주 보살 되고 조금만

30:00 육바라밀 하면 금방 1지 되겠지” 이건 사실 안 맞고요. 다만 여러분들이 전생에 얼마나 공부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희망을 갖고. 그리고 저는 이 무량겁을 꼭 절대적 시간으로 안 봐요. 하루를 10년처럼 공부하시면 땡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올바른 피드백 받으면서 공부하면 저는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했을 때 이번 생에 다 1지 갈 수 있다”라고는 주장합니다. 왜냐? 보통 여러분 공부 안 되는 이유는요 그 본인이 거부해서 안 됩니다. 예전부터 논어에 나와요. “상지랑 하우는 어쩔 수가 없다.” 공자님이 뭐라 그랬냐면 원래 영성 지능이 뛰어난 사람과 영성 지능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바꿀 수가 없다. 뭐냐? 높은 사람은 끌어내릴 수가 없고. 워낙 잘 아니까, 영성 지능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끌어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뒷사람들이 공자님 너무 하시네. 너무 쉽게 포기하시는 거 아닌가? 뒤에 그래서

31:00 주자나 이런 분들이 각주를 그렇게 달죠. 본인이 원하지 않는 거다. 선생님이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선생님이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하우는 제자가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상지나 하우는 다 그 스승이 해줄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거예요. 스승이 너는 하우야 이게 아니라 본인이 원하지 않아요. 그런 문제가 생기니까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거구요. 저는 발심을 해서 간다면 누구나 분명히 가능하다. 왜? 다 양심 갖고 계시니까요.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을 꼼꼼히 깨어서 관찰하다 보면 누구나 양심 전문가 되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몰라의 달인이 돼 가지고 선정 속에서 계속 내 양심 관찰하다 보면 당연히 전문가 되죠. 너무 지당한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당연히 저는 가능하다고 얘기해 드리는 거고요. 이제 천태종 얘기부터 들어볼게요. 1주 보살에 진입하면 무명을 깨뜨리고 불성을 딱 보게 된다. 견성을 한다.

32:00 초견성을 해요. 견성을 하나니 화엄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룬다라는 말이 이 말이다. 그러니까 “1주 보살만 되면 이미 부처다” 이 말을 천태종도 하고 싶은 거예요. 이와 같이 42위를 단계로 삼아 구경의 묘각을 이룬다. 이 얘기가 뭡니까? 10신은 이미 지났고 1주 때 이미 부처 됐잖아요. 이미 부처 돼서 42단계를 더 거쳐서 구경의 묘각까지 간다는 건 진정한 부처까지 간다. 1주 때 이미 불성을 봐서 이미 부처인데 부분적인 부처고. 이거예요. 이미 부처는 됐으나 온전히 부처가 된 건 아니다. 근데 온전한 부처는 마지막 묘각의 경지인 52레벨까지 가면 묘각 부처가 된다. 지금 천태종 주장 이해되시죠. 동륜위에 들어가서. 동륜위라는 것은, 즉 불의 수레바퀴의 레벨이라는 것은 이게 지금 1주를 말하는 거예요.

33:00 1주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니. 1주만 들어가도 끝내 준다는 얘기가 이겁니다. 자 보세요. 무생법인은요 “생겨난 적이 없는 진리를 자명하게 인가한다, 이해한다”는 겁니다. 무생법인은 원래 8지에서 되는 거예요. 8지에서 되는 건데요. 8지에서 이미 부처가 돼요. 여러분 8지에서 무생법인을 얻으면 부처가 돼요. 뭔 소리냐 하면 생겨난 적이 없는 진리 있죠. 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가해요. 육바라밀을요 온전히 인가하게 돼요. 그럼 8지부터는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무생법인은 얻고 나면 이제 여러분은 끝난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아무리 노력을 안 해도 무조건 육바라밀하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하려고 안 해도 성령의 인도에 끌려가고 있는 경지예요. 그러니까 이제 8지부터는 자유죠. 그 자유라는 건 무생법인인데 8지부터는 여래로 분류합니다. 8지부터는 화엄경에

34:00 보시면 8지부터는 여래의 무리가 된 걸로 분류해줘요. 여래에 속해요. 8지부터는 여래라고 불러도 됩니다. 왜? 본성 그대로 사니까. 그런데 1주에 이미 무생법인을 얻는다는 얘기는 1주 때 이미 8지에서 얻는 육바라밀의 진리도요 1주에서 이미 정혜쌍수 얻을 때 기본은 다 얻는다고 보는 거예요. 그 불성이 그 불성이지 뭐 다른 불성 있나요? 소화를 다 못 해서 그렇지 불성은 그 불성이다. 불성이 안주하게 됐는데 그 불성이 그 불성이지. 성령이, 하느님이 그 하느님이지 뭐. 여러분 1주 보살에서 만약에 성령에 안주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계신 성령하고 내 성령이 다른가요? 성령은 같잖아요. 서로 소화해내는 그 힘이 다른 거지. 성령 뜻을 얼마나 따르느냐 그 능력, 역량은 다르지만 불성 차원에선 똑같다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다 이해를 못 해서 선정과 지혜만 이해했다 하더라도

35:00 이때 이미 불성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1주면 게임 끝났다. 이미 게임 끝났다. 이미 천국은 왔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부처는 됐다. 이 사상이요 신기하게 천태종도 이걸 지지하죠. 화엄경에서도 똑같이 지지해요. 이걸 다 융합해서 보조스님도 지지해요. 고려 때 우리 민족이요 불교를 공부할 때 “1주면 이미 부처다” 밀어붙였던 겁니다. 그게 다 날아가 버리고 지금 또 “화두만 터지면 12지 부처다” 하고 또 선방에 앉아 있는 이런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은 퇴화입니다. 퇴화, 퇴화됐어요. 이때 이런 정밀한 이론들이 다 나왔어요. 지금 이런 이론은 세계 어디 갖다 대도 다 맞아 떨어지는 이론이에요. 이런 이론 다 어디 가버리고 갑자기 화두만 깨치면 12지 묘각이 된다는 성철스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냐. 갑자기 화두 터지면 원래 1주인데 1주가 되어야 맞는데 화두 터지면

36:00 묘각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맞지 않는 소리예요. 애초에 이런 경전 체계랑 상관없다고 해서 교외별전이라고 하거든요. “우리 선종은 이런 교종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서 별도로 전승된 거다. 그래서 우리는 화두만 터지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 교리 체계에서 보면 그 경지는 1주 보살에 해당돼요. 왜? 화두 터져서 얻는 것은 정혜쌍수거든요. 재밌는 게 성철스님 “화두 터져서 그럼 뭘 얻습니까?” “내외명철 정혜원만.” 그러면 교학체계에는 1주 밖에 안 돼요. 차라리 교외별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린 교학체계로 설명이 안 된다 그냥 부처다”라고만 주장하시면 되는데 짬뽕을 해가지고요 “화두 터지면 12지다” 주장해버리면 섞여버려서 안 돼요. 이건 전혀 다른 논리 체계예요.

37:00 “화두 터지면 부처다”라는 얘기는 “화두 터지면 불성 안에 살아간다”는 말이지만 실제로 연구해보면 정혜쌍수 밖에 못 얻습니다. 화두 터지면 육바라밀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교학체계에서 볼 때는 1주로 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거부하고 화두 터지면 무조건 12지여야 한다고 주장해버리시면 이거는 이제 짬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구분해서 얘기하시라. 성철스님은 지금 선문정로에서 교학체계를 깔려고 이걸 인용하신 거예요. 화두 터지면 12지다 하는 걸 주장하고 싶어서 이거 비판하려고 인용한 거지만 이 인용 글이 우리한텐 더 중요합니다. 보세요. 동륜위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니 ‘불성을 봄’(견불성)이라고 부르며 ‘법신이 드러남’(법신현)이라고 부르며. 1주만 되면 무생법인을 증득해버리니까 내가 에고로 만든 게 아니라 원래 생겨난 적이 없고 태어난 적이 없는 진리를 그대로 보게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나니까 그걸 “불성을 봤다. 견성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견불성이라고 부르며 법신이 드러났다. 법신현

38:00 “내 안에 있는 진리의 몸이 드러나 버렸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8상으로 부처가 됨’(팔상작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8상으로 부처가 됨” 이 말은 뭘 의미하냐 하면요? 실제 1주 보살이 8상 부처라는 건요 안 맞죠. 여러분이 절에 가면요 부처님의 인생을 8가지 상으로 그려 놓은 거 있어요. 그게 8상이에요. 이 얘기가 뭐냐면 석가모니가 했던 행적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경지라는 거예요. 여래의 본체를 얻었다 하는 겁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게 다 8지 보살 가야 설명되는 얘기인데 1주에다가 다 몰아넣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1주만 되면 8지 부처님이랑 똑같은 그 불성을 얻게 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 얘기를 해놓은 거예요. 천태종에서도 1주면 부처 된다는 주장을 한 거예요. 성철스님은 이게 못 마땅하신 거구요. “1주에 무슨 부처냐? 12지 가야 부처지. 따라서 우리는 화두 터지면 무조건 12지다. 1주 아니다.” 이 논리를 펴시려고 이걸 들고 오신 거예요. 안 맞는 소리죠.

39:00 이 주장이 천태종이 당연히 더 맞아요. “1주에 이미 부처지만 우리는 42레벨을 더 지나서 묘각 때 진정한 부처가 된다.” 이 주장이 맞죠. 이건 돈오점수잖아요. 1주에서 이미 돈오 했고 점수를 더 닦아서 부처가 된다는 거니까 돈오점수설은 성철스님이 거부하죠. 돈오돈수. 화두 터지면 그냥 부처다. 그런데 그 얘기는 이런 교학체계랑 무리하게 짬뽕시킬 필요가 없는 소리다. 아예 이런 걸 근거 삼아서 비판하고 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냥 차라리 성철스님은 “화두 터지면 부처다. 교학의 레벨로는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게 옳다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자명해져요. 그래도 우리가 또 만남을 주선해 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왜곡된 만남이 아니라 자명한 만남을 가지려면 서로의 논리에 충실하는 게 더 중요해요. 그래서 교학적으로는 “1주에 돈오하고 온전한 점수를 거친 다음에 진정한 부처의 돈오를 얻는 것은 12지 가서다.” 이런 논리입니다. *이통현, 신화엄론.통현장자라고

40:00 화엄경에서는 제일 대가죠. 청량국사의 화엄경소랑 통현장자의 화엄경론은 제일 유명한데요. 이 두 가지를 공부하는 게 기본입니다. 화엄경 공부하는 사람들은. 탄허 스님이 내 생은 화엄경 알리려고 왔다라고 자부하신 분이 해놓으신 것도 이 화엄경론과 화엄경소를 합본으로 해가지고 국한문으로 번역해 놓으신 것. 온전한 우리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읽으려면 힘들지만 그걸 다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해 놓으신 게 평생사업으로 하신 거예요. 이통현장자의 장자라고 하는 게요 스님이 아니세요. 그런데 스님보다 존경받는 놀라운 분이에요. 선의 정신으로 화엄경을 풀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후로 화엄경 공부에 있어서 이 신화엄론이라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분이 그걸

41:00 주장하셨어요. 그 전의 화엄경은요 1지부터 10지가 중요한데 이분이 뭘 주장하냐면 1주에서 이미 견성했다고 자꾸 주장하세요. 왜? 당시 선불교의 분위기에서는요 견성이 그렇게 오래 안 걸리거든요. 근데 화엄경은 무량겁 거친 뒤에 견성을 하면 이 화엄경이 얼마나 답답한 경전이 됩니까. 그러니까 이통현장자가 “10신초에 이미 견성하고 견성이 다져지는 건 1주면 이미 견성 확고해진다” 이 주장을 펴신 거예요. 보세요. 십주초수에 곧장 견성을 하여. 10주초에, 10주초는 1주를 말합니다. 1주에 이미 견성 곧장 견성을 하여 법신의 지혜를 일으키며 곧장 정각을 이룬다. 화엄경을 이렇게 풀었어요. 초발심시변정각을 “10주초에 발심주에 이미 견성했다.” 그럴 만하죠. 보세요. 1주 이름이 발심주예요. 발심주에 정각한다는 화엄경 이론을 갖다 붙이면 1주에 이미 견성한다. 선가에서 얻는

42:00 확철대오를 우리 교가에서는 이미 1주에 우리도 똑같이 견성한다. 이렇게 주장할 만하죠. 제가 원형을 찾아보니까 원형의 화엄경은요 발심주는 사실 1지예요. 논리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해도 이것도 일리가 있거든요. 왜? 참나에 들어앉거든요. 이런 논리에 의거하더라도 양심에 온전히 들어앉진 않지만 분명히 참나에 들어앉는 건 맞죠. 참나와 양심을 조금 구분해서 쓰더라도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양심에 확고하게 들어앉습니다. 즉 정혜쌍수는 확고해지기 때문에 이 말도 맞아요. 일리가 있어요. 그래서 저희도 지금 홍익학당에서도 홍익선원에서 이걸 인정해서 1주를 1급으로 보고 1지를 1단으로 보고 구분합니다만 1급만 되도 이미 참나 안에서 살아가는 건 확고해지니까 이미 확철대오했다라고 저희가 통합적으로 선불교랑 이 교학체계를

43:00 통합해서 저희가 지도하고 있습니다. 학당의 공부 과정을 소개해 드리는 차원에서도 이걸 읽어드리는 거니까 경전과 지금 저희 학당에서 선원에서 하는 거랑 같이 설명 드리면 그래요. 1주가 1급을 말하는 거예요. 1급과 1단의 구분입니다. 십주초심에 여래불과지법문을 바르게 증득한다. 그래서 1주에 여래불과지법문, 여래의 부처의 과보가 이미 일어난 법문을 바르게 증득한다. 이 말은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뭔 말일까요? 여러분이 1급 보살, 1주 보살이 돼서 참나 안에 이미 거하시죠. 그 참나는 이미 여래의 불과를 갖고 있다는 건요 12지 가야 드러나는 여래의 과보, 여래의 그 능력을 온전히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소화를 못 하시는 거지 여러분이 얻은 불성은 1주 때 이미 완전하다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이미 완전하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교학체계로 치면요

44:00 10신에서 1주를 거치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단계죠. 여래의 인이에요 12지 가야 뭘 얻어요? 여래의 과보를 열매를 얻죠. 그런데 12지 가서 얻는 여래의 과보를 1주 때에, 이미 씨앗이나 뿌린 경지 밖에 안 되는 1주로 봤던 그 경지 때 그 씨알 안에 이미 완전한 여래의 과보가 들어 있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거예요. 즉 이런 거예요. 이런 공격을 많이 받거든요. 자 이것만 아시면 이해될 거예요. 씨앗 상태의 견성이 있죠. 견성. 그러면 같은 견성도 과보 상태의 견성이 있겠죠. 뭐가 다를까요? 이때(과보 상태)는 부처의 능력이 온전히 나한테 드러나 버려요. 그런 불성을 보고 있는 거고요. 씨앗 상태의 불성을 보고 있다는 건요 불성을 보고는 있지만 내가 구현은 못 해요. 그러니까 제한된 불성이 되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게(씨앗 상태) 돈오. 1주의 돈오입니다. 이게(과보 상태) 점수의 극치(12지 묘각).

45:00 자 1주에 돈오를 하고 점수의 극치(12지)에 가면 과보가 열매를 맺는다. 그럼 이때(1주)의 견성은 모자란 견성이 돼요. 모자란 견성이죠. 이렇게 되기 쉬운데 돈오점수론의 그 핵심은요 이때(1주) 모자랐고 이때(12지) 온전해졌다가 아니라 이때(1주) 이미 부처가 됐고 이때(12지) 더 완전한 부처가 됐다는 개념을 설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뭘 강조할 수밖에 없을까요? 분명히 레벨로는 씨앗 뿌리는 레벨이 맞는데, 에고 입장에선 씨앗 단계가 맞는데 이때 본 불성은 이미 이건 인과를 초월한 단계기 때문에 이미 온전한 불성을 봤다는 거예요. 요 부분을 강조하는 겁니다. 불성을 봤다는 그 측면은 분명히 이제 공부 시작 단계인 건 맞는데, 초발심 단계인 건 맞는데 그때 본 부처는 12지의 부처지 제약이 있는 부처가 아니라는 거예요.

4600 불성에 제약이 어떻게 있냐는 거예요. “내가 소화를 못 했을 뿐이지 이미 본 건 온전한 부처를 봤다.” 이걸 주장하는 이유가 선불교가 그 당시 유행하면서 “견성 즉시 성불이다”를 주장했잖아요. 선불교는 견성성불을 주장하는데 교학체계가 비판 받잖아요. “니네는 견성하고 겁나 오래 있다 성불하더라. 3무량겁 더 가고 성불하더라.” 자 이때 이통현장자가 논리를 논리로 쳐버린 거예요. “어! 우리도 견성성불인데 똑같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뭔 소리야?” “어! 우리도 견성했을 때 그 성이 사실은 온전한 부처야.” 그럼 논리가 만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선불교랑 교학이 함께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래서 보조스님 이걸 택한 거예요. 통현장자의 이 주장과 당시 간화선이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선교합일이 가능해져요. 통현장자의

47:00 논리여야만 이게 가능해져요. 안 그러면 “이땐 씨앗 뿌리고 한참 있어서 수확, 열매 맺어”라고 논리가 이렇게 나가버리면 선불교랑 완전히 따로 놀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게 정확한 지적이에요. 사실은 선불교도, 화두선 하는 사람들도 견성했다고 부처가 안 나와요. 근데 성불이라는 것은 불성을 온전히 봤다는 걸 얘기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그 확철대오에서 얻었다는 성불의 경지가 1주 밖에 안 돼요. 사실은 통현장자가 정확하게 설명하신 거예요. “니네가 말한 견성은 어 성불 맞아. 그런데 1주야.” 선불교 분들은 이제 난감해지죠. “아니 왜? 우리는 견성이고 성불이고 우리는 12지지.” 성철스님도 이 주장을 했잖아요. 성철스님도 아직 납득이 안 되신 거예요. “우리 견성했어 성불했어. 그러니까 12지야.” 통현장자가 “그래 견성했어 성불했어. 맞아 1주야.” 이거 이해되세요? “어 1주야 그게.” “아 이거” 해봤자 안 돼요.

48:00 왜? 화두선 터졌다고 12지 부처는 아니거든요. 정확하게 설명한 거예요. 보조스님도 정확하게 보신 거예요. 육바라밀 못 하면 12지 부처 아니죠. “원래 우리 화엄경도 초발심에 1주에 바로 견성해. 그리고 바로 성불이야.” 이렇게 논리를 쳐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고려 중후기 때 우리나라에 이 논리가 완전히 정립되면서 선불교랑 교학의 회통이 이미 다 이루어졌던 거예요. 그걸 조선시대 거치면서 또 까먹고 또 날려버리고 선불교만 우세하면 다시 이런 교학체계 다 버리고 선불교만 최고로 치는 시대로 또 와버렸죠. 근데 실제 조선 때만 해도 안 그랬습니다. 그런 분위기도 있었지만 결국에 경허스님 이런 분들은 다 수심결 보고 공부하셨거든요. 결국 경허스님이나 다 이 논리를 따랐다고요. 그런데 돈오점수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경허스님이나 다 부정하면서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는 나랑 향곡스님 둘이 새로 주장한 거다”

49:00 하면서 새롭게 치고 나온 거예요. 지금 종정이신 진제스님 스승이 향곡스님입니다. 성철스님이랑 두 분이서 돈오돈수론을 다시 주장한 거예요. 밀고 나온 거예요. 재밌는 건 그 친한 친구 분인 청담스님은 돈오돈수론입니다. 1지 2지를 되게 중시했어요. 청담스님의 금강경대강좌 보시면 1지 2지 체계를 저만큼 설명 다 해놓으셨어요. “1지에서 들어앉으면 아라한 되고 거기서 더 공부에 나가서 2지 3지로 가면…” 뭐 이렇게 청담스님이 레벨을 되게 중시하셨어요. 그런데 아무튼 향곡스님과 성철스님은 무조건 돈오돈수. “화두 터지면 부처야.” 4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