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3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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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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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3. 24. 土.
게시일자 2020. 06. 02.
동영상 길이 51:32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j18GclFAjmI




0:10 1주 보살 얘기로 쭉 갈게요. 1주의 경지가 뭐라고요? 이 참나가 확실하게 들어앉은 자리입니다. 이 참나가 보조스님은 정혜원명이란 말까지 썼어요. 이게(1주) 이 정도예요. 원래 이게 교학적으로 말하면 정혜쌍운이죠. 1주 보살의 경지. 내 안에 공적영지 텅 비어 있으나 적적 신령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성성. 마음에 별이 떴다는 거죠. 마음에 별처럼

1:01 반짝거린다. 적적성성한 자리. 내 정신이 늘 고요하면서 늘 깨어있어 보세요. 죽이겠죠. 그게 1주 보살이에요. 이 자리(공적영지)가 다른 표현은 뭐냐? 대승기신론에서 이 자리를 무념이라 그래요. 무념 자리. 여기가 생각 감정 오감이 없는 자리잖아요. 생각 감정 오감 이걸 염, 분별심으로 봤을 때, 분별심이 여기(공적영지)는 없거든요. 그래서 무념의 자리. 무념이니까 공적, 텅 비어있고. 무념이 단순히 생각이 없다로만 아시면 안 되는 게 텅 비어있는데 알아차리고 있어요. 텅 비어있는데 알아차리고 있다는 걸 말할 때 공적영지. 분별심이 없다는 걸 말할 땐 무념, 아니면 공. 다 같은 거죠. 공적영지가 무념이고 무념이 공입니다.

2:02 “몰라”를 통해서 이거 체험하셔야 돼요. “몰라” 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느끼시면 순수한 존재 상태, 순수한 의식 상태에 들어가시면 그 자리가 부처예요 부처, 전지전능한 부처. 그렇게 아셔야 돼요. 전지전능한 부처. 그런데 아까 교학적인 그런 입장이 왜 나오냐면요 대승기신론을 보셔도요 우리 안의 불성이 전지전능하단 얘기를 시원하게 안 해 주고요 내가 닦여서 불지까지 가면 내 안에서 전지전능하게 작용을 드러낸다는 얘기를 해요. 에고가 닦였을 때 드러나는 정도만큼 얘기를 한다고요. 에고가 닦이는 거 따라 안에서 드러난다는 얘기를 하니까 교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기 쉽냐면 불성이 우리 안에서 뭔가 제약되어 있다고 보는 거죠. 에고가 닦이지 않으면

3:01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못 한다. 그분들이라고 해서 아주 잘못된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 에고에 의해서 제약됐다는 관점을 더 주로 가지고 보다 보니까 막연하게 참나가 되게 제약된 존재처럼 설명해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이 얘기를 해줘야 돼요. 참나는 원래 전지전능한데요 우리 에고한테 그렇게 제약된 모습만큼만 드러내주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 자체도 전지전능해요. 이해되세요? 우리 에고가 업장이 많으니까 전지전능한 참나가 그 정도만큼 드러내주고 있는 거예요. 그걸 제약이라고 알면 안 된다고요. “내 참나는 좀 제약되어 있다, 못 났다”라고 이해하시면 안 되는 게 참나가 그만큼 드러내주는 거예요. 너한테는 이 정도가 알맞아 하고 드러내주는 거예요. 요건 좀 느낌이 다르죠. 요 느낌으로 이해하시지 않으면 뭔가 우리 안에 있는 참나가 제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럼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약이 없다면

4:00 여러분이 찰나에 불성을 만나도 전지전능한 불성이 여러분 마음 안에…. 불성을 만났다는 게 밖에 있는 불성을 만난 게 아니죠. 자 보세요. 기독교인들은 밖에 있는 하느님 만났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찰나라도 부처님을 만났다, 찰나라도 하느님을 만났다 이 얘기는 뭔 얘기냐 하면, 왜 이게 위대하냐면 찰나라도 불성을 만났다는 얘기는 그 불성이 내 안에 있는 거 아닌가요? 내 마음 안에 전지전능한 부처가 있다는 거를 찰나라도 알아 버렸으면 그 이후의 삶은 달라져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나 혼자 사는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내 존재의 뿌리가 전지전능한 부처다”라는 걸 알았다면요 이제 그 이후는 내가 혼자 막 아등바등 할 일이 아니라고요 찰나라도 만나면 문제 생겼을 때마다 주인공한테 맡기면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행스님 같은 분이 “만나고

5:00 안 만나고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맡기고 가라. 그러면 그냥 너 안에서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주인공으로서 너 안에서 그냥 역사를 한다. 전지전능한 작용을 펼친다.” 이걸 신뢰하고 가는 구조예요. 그러니까 그 10가지 믿음의 단계에서 첫 번째 믿음의 단계에서 우리가 실제로 의심 없이 믿고, 닦으라는 그 명상 “몰라” 하면서 이 부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찰나라도 만났으면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만난 거기 때문에 내 안에 전지전능한 하느님 부처님이 계시다는 걸 알았다는 건요 우리의 인격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라는 거죠. 이걸 의미 부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안에 이미 부처는 있어요. 그런데 나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나는 거기까지는

6:00 체험한 영역은 아니고 찰나찰나 내가 노력하면 바로바로 만날 순 있어요. 그 부처는 분명히 내 안에 있어요. 늘 계신지는 내가 더 체험해 봐야겠지만 나는 분명히 내 안에서 그 전지전능한 부처를 만났어요. 이런 체험이 여러분 안에서 자리 잡아가면서 여러분 인격을 바꾸는 겁니다. 전지전능한 부처가 아주 못 나고 잘 모르고 욕심 많은 에고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존적인 상황을 이해하시는 거, 이런 게 다 지금 공부고 지혜죠. 우리 안에서 부처를 만난다 이걸 “무념을 체득한다”라고 대승기신론에서는 얘기합니다. 이 부분 한 번 보실게요. 7. 무념은 부처로 향함. 이런 사정 때문에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중생이 능히 ‘무념’(분별심을 초월함)을 관조할 수 있으면 ‘부처의 지혜’를 향하게 될 것이다.”

7:00 이게 교학적 관점과 선가적 관점의 약간 다른 표현입니다. 표현이 달라요. 같은 무념이에요. 공적영지가 무념이에요. 여러분 안에 공적영지 여기는 시공이 없는 자리죠. 자타도 없는 자리죠. 그럼 닦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안에 있는 공적영지는 태초 이래 그 자리고 닦을 수 없습니다. 원만한 거기가 우주의 근원 자리고. 온 우주가 어디서 나왔겠어요? 공적영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공적영지를 받아쓰고 있는 거예요. 그 지혜와 힘을 공적영지로부터 받아쓰고 있는 거예요. 공적영지가 육근을 통해 드러나면 여러분인 거고.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때 에고를 통해 더 드러낼 순 있어도 공적영지를 더 닦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공적영지가 무념이죠. 그러면 지금 보세요. 대승기신론 이야기는 무념을 관조할 수 있으면.

8:01 에고가 자기 안에서 무념을 정확히 관할 수 있으면 그럼 이게 견성이죠. 내 본성을 본다면 나는 불지를 향할 거다. 향할 향자를 써놨어요. 불지는 뭐겠습니까? 구경각이죠. 부처의 깨달음입니다. 아까 말한 정각. 부처의 지혜를 향한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요 교학의 경전이지만 그 안에 선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선가에서도 중시됩니다. 육조 혜능스님이요 대승기신론에서 정혜쌍수라든가 무념이라든가 모든 중요한 아이디어들을요 그대로 가져와요. 그런데 가져와서 선불교식으로 표현해요. 저 밑에 보실래요. 육조단경에 뭐라고 표현되는지? 육조단경에 뭐라고 했죠? *육조단경.‘무념법’을 깨달으면. 내 안에서 무념을 깨달으면 ‘만법’에 남김없이 통하니. 이 무념 안에 육바라밀 다 들어있다는

9:00 거예요. 무념만 통하면 만법에 통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는 동안 육바라밀대로만 하면 돼요. 그게 만법이에요. 여러분이 무슨 일을 겪으시든지 육바라밀에 의거해서 처리하시면 됩니다. 처리 안 될 게 없어요. 다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육바라밀 법을 쓰면 되는 이게 만법입니다. 무념 안에, 텅 비어있는데 만법이 들어 있다. 육조스님도 공적영지지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공적영지 안에 육바라밀 다 들어있다는 거 아시는 거죠. 이 만법을 잘 닦으려고 열심히 닦아 가라 그러면 또 52레벨이 등장해요. 그런데 이분 어떻게 얘기해요? 이 무념만 알면 만법에 다 통해버리니 공적영지지 깨달으면 여기가 원래 전지전능한 자리니까. 전지전능을 육조스님이 뭐라고 했냐면, “자성이 본래 고요하니 자성 정이요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자성 계요

10:00 자성이 본래 어리석은 바가 없으니 자성이 혜다.” 육바라밀 다 갖춰져 있다. 계정혜도 다 갖춰져 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십니다. 아니 참나 자리가 어리석겠어요? 그러니까 자성이 본래 지혜롭고. 참나 자리가 어지럽겠어요? 본래 고요하고. 참나가 죄를 짓겠습니까? 본래 계율을 지키죠. 근데 이건 다 참나 얘기죠. 그러면 에고가 계정혜를 하느냐? 이건 다른 얘기인데 육조 혜능스님이 이 얘기는 안 해요. “참나가 원래 원만하다. 참나에 만법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못난 에고를 내려놓고 에고는 잘 났건 못 났건 신경쓰지 말고 곧장 몰라 해버리고 참나랑 통하면 거기서 육바라밀이 원래 완벽하니까 이 자리는 육바라밀 덩어리니까 계정혜 덩어리니까 계정혜가 그냥 터져 나올 거 아니냐.” 이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무념법을 깨달으면 여러 부처 경계를 보며. 부처가 결국 이거다. 육바라밀 잘하는 게 이게 부처인데 부처의 경계를 알 수 있으며, 무념의 돈법(단박 깨닫는 법)만 깨달으면.

11:01 단박에, 들어가기만 하면 단박에 무념과 통하기만 하면 단박에 완벽해지니까 이게 뭡니까? 돈오하는 순간 돈수죠. 그래서 ‘부처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곧장 부처의 이르게 된다. “무념법만 알면 부처의 이른다”라고 얘기합니다. 이를 지(至)자를 써요. 좀 느낌 다르죠? 아까 대승기신론에서는 “향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무념을 깨달으면 결국 12지 가도 이 무념인데 무념을 깨닫고 계속 닦아가서 부처까지 가란 얘기가 있으면, 지금 이거(견성)는 씨앗인 거죠. 이건(견성) 씨앗이고 이건(불지) 열매다. 열매를 얻어라. 대승기신론에서는 “너는 이미 부처지만 계속 부처가 돼야 된다”(향) 이 얘기를 하고 있다면, 육조 혜능스님은 “이 자리(무념)가 모든 부처의 핵이니까 이 자리를 얻으면 부처다.” 조금씩 말의 뉘앙스가 다르죠. 근데 실제로 여러분 무념을 만나 보면 같은 사태예요. 같은 사태인데

12:00 저렇게 표현을 달리한다. 여러분 몰라 해서 결국 참나 체험한 거예요. 참나 체험했는데 딱 나왔더니 어떤 멘토가 오더니 그 멘토는 뭐라 그래요? 너무 건방지지 말라고 방금 본 게 부처는 맞는데 계속 무념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육바라밀 닦아보면, 그 자리만 붙잡고 잘 살아가면 부처가 될 수 있어. “그 자리 잘 붙잡고 육바라밀 닦다 보면 부처가 돼.” 이렇게 얘기해주신 분이 있고, 어떤 멘토는 와서 뭐라 그래요? “거기 부처야 육바라밀 거기 다 완벽해.” 육바라밀 본래 거기 다 완벽하죠. 유교에서도 명덕이라고 하잖아요. 원래 광명한 나의 양심. 원래 양심 덩어리예요. 우리 안에는 인의예지가 원만해요. 육바라밀이 원만해요. “너 지금 그 원만한 부처를 만난 거야. 니가 뭘 하겠단 생각 말고 무념 하고 내려놓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육바라밀이 원래 원만하니까 넌 그대로 부처로 살아갈 수 있어.”

13:00 육조 혜능스님은 에고의 조건은 얘기를 안 하고요 참나의 완벽함만 얘기를 해버려요. 이게 착각이 일어나서, 성철스님 단계까지 가면 사실 착각하시는 거예요. 지금 참나가 원만하다 그랬지 에고가 원만하다고 얘기를 안 해요. 이 사람들은 이게 관심사가 아니거든요. 근데 이 원만함이 에고를 통해 드러날 때는 제약되어서 드러나요. 그게 참나가 제약돼서가 아니라 참나는 원만해요. 근데 보세요. 하느님은 원만한데 나를 통해서는 내 에고에는 해줄 게 별로 없을 수 있어요.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는 잘 안 드러나네.” 내가 욕심 부리고 내가 무지에 꽉 차 있으면요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요. 하느님이 못 나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 예수님한테 돌 던지던 사람들 안에도 다 하느님이 계실 텐데 그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지 못 해서 그 사람들 마음을 못 바꾸나요? 아니에요. 하느님의 자비가 거기서는 그렇게 드러나고 있는 거예요. 거기선 그렇게 드러나고 있어요.

14:00 우리가 제약을 입히지 하느님이 제약된 존재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 제약에 맞게 반응하시는 분일뿐이에요. 그 인연에 맞게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사실 그 자체가 다 전지전능이에요. 이런 에고한텐 이런 모습으로 이런 에고한텐 이런 모습으로. 실상을 이해하시는 게 중요하지 어느 한 쪽 입장이 돼 가지고 치우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육조단경만 읽으시면서 “어 이상하다 한방에 된다는데?” 자꾸 이렇게만 이해해 들어가시면 영원히 답이 안 나옵니다. 정확히 이해하셔야 돼요. 무념법 안에 만법이 남김없이 통한다는 건 여러분 에고 차원 얘기가 아닙니다. 참나가 그렇다는 얘기죠. 여러분 에고는 잘 안 통해요. 아니 이 무념법 하나를 못 통해서 몇 10년씩 참선하시는 분이 한방에 다 통한다는 말을 쉽게 하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무념 만나는데도 벌써 몇 10년 걸리시는 분들이 무념 안에 있는 만법을 한방에 다 드러낸다고요. 이게 다 말이 안 되는

15:00 소리라는 거 아시고. 근데 왜 이렇게 얘기했느냐? 왜 이 말 했는지 우리가 이해하면 돼요. 육조 혜능스님 말은 이 말 자체론 기가 막힌 말인 거예요. “무념이 있는데 무념 안에 육바라밀 완벽해. 그러니까 우리가 무념만 알면 우리는 부처야.” 원효는 중간에서 어떻게 풀이할까요? 원효는, 대승기신론은 이 부분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원효, 대승기신론소.“만약 중생이 능히 ‘무념’(분별심을 초월함)을 관조할 수 있으면 ‘부처의 지혜’를 향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씨앗의 자리’에 있을 때는 비록 분별심을 떠나지 못 했으나 능히 ‘무념의 도리’를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씨앗 상태에서는 에고가 아직 분별심을 갖고 있지만 무념을 볼 순 있지 않냐? 그러니까 업장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무념을 볼 수 있죠. 그럼 무념은 사실 원만한 부처 자리지만 에고의 분별심이 많기 때문에 씨앗 상태라는 거죠. 즉 뭡니까? 원효대사 말씀은 씨앗이니 열매니는 에고 기준이라는 거예요.

16:01 에고 기준이기 때문에 분별심이 있더라도 무념의 도리를 관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능히 관조하면. 능히 무념의 도리를 관조한다면, 에고의 조건에는 열악해도 우리 안에 있는 완벽한 자리 무념의 자리를 볼 수 있다면 이 무념 자리를 증득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부처라는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이 얘기라는 겁니다. “부처의 지혜를 향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무념의 도리를 관조하면 ‘불지의 무념’을 증득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씨앗’을 들어 ‘열매’를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씨앗을 들어 열매를 증명한 것이다. 이미 부처가 됐다는 게 아니라 부처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확실한 씨앗을 갖고 있다. 여기서 또 다릅니다. 여기서 교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냐 하면, 글로 이해하면? 글로 이해해서 그래요. 이 말은 퍼펙트한 말인데 글로 이걸 이해하는 분들이. 아까 교학자들에 대항해서 통현장자가 주장했다는 게 교학 자체에 대항한 게 아니에요. 대승기신론에서 이런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 구절을 풀이하는 분들이 어떻게 풀이해요? 이 견성은 씨앗 상태의 견성이니까 뭔가

17:01 제한된 견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씨앗이니까 제한된 불성이고, 이거는 열매니까 원만한 불성이다”라고 이해하시면 엉터리라는 거예요. 참나 체험 못 한 분이 경을 풀면 그렇게 푼다는 것입니다. 참나 체험을 하고 풀면 이렇게 풀어도 되는데, 즉 씨앗이라고 말해도 되는데, 에고 세계에서는 씨앗과 열매고요 본래 무념은 그냥 통으로 하나예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일을 벌써 “무념이 씨앗 상태와 열매 상태가 다른가 보다”라고 이해해 버리시면 그건 잘못된 발상이라는 거죠. 통현장자가 말한, 보조스님이 지적한 그건 아니다. “씨앗 상태에서도 이미 무념은 원만하다.” 여러분 지금 정신 차리고 일체를 모른다고 했을 때 정신이 선명했죠. 여러분이 상상하기 힘들지만 10지 보살의 경지는 상상하기 힘들잖아요. 여러분이 10지 보살이라고 해도요 모른다 하고 있으면 그 자리이지 않을까요? 왠지?

18:01 이걸 실험할 수는 있어요. 여러분의 레벨이 계속 올라갈 때마다 계속 그 자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세요. 그게 참나 자리예요. 에고한테 떨어지는 지혜와 능력과 자비가 달라지지 그 자리는 그 자리입니다. 제가 아무리 모른다 하고 봐도 그 자리는 늘 그 자리죠. 일체를 모른다고 존재하는 의식만 보면 그 놈은 늘 그놈이죠. 그게 시간 바뀐다고 변하고 그럴 물건이 아니에요. 그 얘기가 뭐냐? 즉 내가 일생을 통해 공부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지켜봤더니 늘 그 자리라면 12지 부처가 돼도 그 자리겠죠. 그 자리는 똑같다는 거예요. 저도 예전에 공부하다가 그걸 깨닫고요 안심이 됐어요. 계속 제가 공부를 하다 보니까 그 자리는 늘 그 자리인 거예요. 저는 바뀌는데 그 자리는 늘 그 자리에요. “야 그러면 나중에 부처가 돼도 이 자리겠는데.” 이 자리는 이 자리죠. 공적영지가 바뀌겠어요? 뭐가 바뀌겠습니까?

19:00 에고가 바뀌어요. “바뀌는 건 에고지 이 자리는 안 바뀐다”라는 확신이 들면서요 공부하는데 이해가 훨씬 쉽게 되더라고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고의 조건을 잠시 좀 망각해 보자 이거예요. 에고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즉 여러분이 지금 어느 상황에 계시건 에고 조건을 망각하고 그냥 무념에 들어가시면, 주인공한테 맡기시면, 주인공의 전지전능의 힘이 이미 여러분의 삶에 스며들어서 여러분 삶을요 탁월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내가 제약하지 말자는 거예요. “내가 9급인데 딱 9급만큼 나오겠지 뭐.” 이런 말이 다 부질없는 소리라는 거예요. 그 순간에는요 12지 부처 못지않게 내가 판단하고 행동할 수도 있다니까요. 왜? 그 부처가 그 부처니까. 12지 부처의 불성이 지금 내 안에 이미 있다니까요. 그럼 내가 내 조건만 망각해 버리고 내가 몇 급이니 몇 지니 내 역량이 부족하니 잘하니 못 하니 저건 못 하네 저건 잘하네 하지 말고 몰라 하고 맡겼을 때 그 순간에 어떤 지혜와 어떤 능력이

20:00 나올지 여러분이 어떻게 재단할 수 있겠어요? 물론 여러분 역량에 맞게 나오겠지만 그 역량마저도 여러분이 어떻게 다 재단합니까? 모른다 하고 맡기면 하늘이 알아서 부처가 불성이 알아서 해 주겠죠. 그럼 내 이상의 능력을 내가 분명히 끌어다 쓸 수 있고 그 순간만큼은 이미 지금 여기서 부처 못지않게 내가 살 수도 있는데 “나는 공부를 다한 뒤에만 불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실제로도 여러분, 공부도 안 한 분들이 더 멋있는 양심 작품 만들고 가세요. 공부한 분들은 몰라 해야 된다고 좋은 일을 잘 안 하고 가는데 오히려 공부도 안 한 분들이요 사람 구한다고 뛰어들어서 사람 구하고 죽고 그래요. 뭐가 그랬을까요? 그분 안에 있는 부처가 한 거죠. 여러분은 그 불성을 더 잘 받겠다고 공부하는 것뿐이지 그 부처가 그 부처예요. 그러니까 공부 안 한 분들도 위대한 독립운동도 하고 다 위대한 작품 만드실 수 있는 거예요. 그 순간에 정신만 딱 통하면

21:00 부처랑 정신만 통하면 뭔 짓이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초능력도 나오는 거고. 매순간 매순간 기적을 일궈내는 삶을 살 길을 이미 이론적으로 다 예전에 열어 놓으신 거예요. “그 부처가 그 부처다” 하는 주장이 이런 얘기까지 다 연결되어 있는 얘기라는 거 아셔야 돼요. 지금 여러분 “내가 부처가 모자라.” “지금 본인 안에 부처님 계십니다” 해도 “아우 그럴 리가요.” 이럴 필요가 없어요. 겸손 떠시지 마세요. 에고가 겸손 떠는 건 좋은데 참나를 모욕하면 안 됩니다. 그건 참나에 대한 모욕이 돼요. 에고가 겸손한 건 괜찮아요. “제가 참 모자라서 참나의 뜻을 다 구현 못 합니다.” 에고의 그런 겸손은 이건 괜찮은데, 물론 그것도 지나치면 안 되지만 그래도 그런 겸손은 좋은데, “우리 참나요 못 해요.” 이건 이상하잖아요. “내 안에 있는 주인공 좀 이상해요.”

22:00 이건 아니잖아요. 거기까지 가면 안 돼요. “제 안에 무슨 부처가 있겠습니까?” 이런 말들은 모욕이 돼요. 내 안에 있는 신성에 대한 모욕이 되니까 그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내가 길이요 진리다”라고 말할 때는 신성으로 얘기하시는 거죠. 에고 차원에서는 한없이 겸손한 분이죠. “나는 섬기러 왔다.” 항상 “하느님만 선하지 난 선하지 않다.” 에고 차원에서 항상 겸양하십니다. 이 두 개는 확실히 구분하셔야 돼요. 내 안에 있는 신성 차원에서는 그 자리는 하느님 자리고 부처님 자리예요. 그 부처님 자리 하느님 자리 믿고 사시냐구요? 사람들이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안 믿죠. 어쩌다 어떤 상황이 딱 펼쳐질 때라도 통하면 또 신통이 나오고 기적이 나오는데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은 늘 통할려고 공부하는 거죠. 근데 늘 끊어지지 않고 통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냥 내가 원할 때 만날 수 있으면 되는 거죠.

23:01 그래서 제가 아까 신사 정도만 되도 내가 원할 때 짧더라도 만남을 가질 수만 있다면 여러분 인생이 그럼 구원받으신 거라는 거예요. 왜냐? 짧다 길다도 에고 생각이니까 만나서 거기서 지혜와 능력을 끌어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죠. 그걸 제가 써놓은 책이 몰입 책이에요. 일반인들한테 부처란 말도 빼버리고 다 빼버리고 몰입 4단계에 들어가면 신바람이 납니다. 신명이 납니다. 그게 신하고 통한다는 얘기에요. 몰입만 하면 신하고 통해서 신통을 얻는 법이에요. 거기에 책에 제가 이렇게 써놨어요. “모르던 게 알아지고 안 되던 게 됩니다. 슈퍼의식 거기는 슈퍼맨 같은 자리예요. 슈퍼의식 자리라 슈퍼의식한테 도움을 청하면 해줍니다.” 요즘 식으로 써 놓은 것뿐이지 그게 비밀입니다. 내 안에 이미 완벽한 자리가 있어요. 그리고 내 에고가 실력이 나아질수록 나는 점점 더더더더

24:00 육바라밀을 구현하는 역량이 커집니다. 대박인 거죠. “난 이미 부처인데 계속 부처가 되어간다.” 이런 관점. 무념을 가지고 제가 또 얘기해 봤어요. 여러분이 1주 보살이 되신다는 게 별게 아니라 무념을 늘 관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무념을 관한다는 것은 선정이고요. 무념의 관점에서 현상계를 이해한다, 참나와 에고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혜구요. 그래서 일차적으로 1주 단계에서 선정이라는 것은 참나랑 떠나지 않습니다. 이걸 “본래삼매” 그래요. 참나를 떠나지 않아요. 왜? 여러분이 원래 무념이니까. 여러분 안의 원래 고요한 자리 공적영지가 드러난 거기 때문에 여러분이 참선을 하건 말건 그 자리는 무념이에요. 늘 여러분 안에 무념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어요. 그냥 늘 선정인 거예요. 그래서 따로 선정을 안 닦아도 늘 선정이니까 “본래선정 본래삼매”라고 하는 거예요.

25:01 대승기신론에서 “본래열반”이라고 나와요. 본래열반. 지혜는 뭐예요? 아공. “내 에고가 나의 주인이 아니더라. 참나가 나의 주인이더라.” 법공, 참나 입장에서 보면 참나의 작용이더라. “이 에고의 세계, 에고가 살아가는 현상계 전체가 참나의 작용이더라.”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더라.” “일체유심조”입니다. 그게 다예요. 여러분이 일체유심조만 알며 살아가도 지금 어떤 일을 여러분이 겪으시건 그건 여러분 육근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생각 감정 오감 차원에서 여러분의 마음이라는 VR을 통해 일어나고 있죠. 그걸 지켜보는 자가 그걸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지켜보는 자가 누구예요? 참나요. 공적영지요. 일체의 근원은 공적영지인 줄 알고 살아가시면 이것만 정확히 알고 살아가셔도 결국 차차차차 육바라밀 하시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일체를 참나의 작용으로

26:00 알고 살아가시면 그 안에서 욕심부리다가도 자명한 길을 찾고 아시게 되고, 찜찜한 것은 못 하시게 될 거고, 자명한 쪽으로 좀 더 가게 돼 있어요. 그러다 그러다 그게 이거예요. 1주 이후 그러다 그러다 더 알게 되고 더하게 되고. 1주 이후 10주까지라는 게 더 육바라밀에 대해 알게 되고, 참나의 작용에 대해 알게 되고, 더 육바라밀 실천하게 되고, 더 참나 자리를 알게 되고(10주=10해), 더 참나 자리를 하게 되고(10행), 더 자기가 닦은 공덕을 남과 나누게 되고(10회향). 그러다가 어느 날 선명하게 “내 마음 안에 내 안에 육바라밀이 원래 있었구나. 있던 게 나오고 있구나.” 내 안의 원만한 부처님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게 됐을 때 1지 보살 그러는 거예요. 내 안에서 활동하는 부처님이 어떤 공식으로 활동하는지를, 육바라밀의 공식으로 활동하신다는 걸 선명히 알게 돼요. 1주만

27:00 돼도 이미 알아요. 알긴 아는데 내 안에서 부처님이 진짜로 역사하는지 알려면 나를 통해서도 육바라밀이 나와야 내가 확인할 거 아니에요? 근데 내 몸으로는 아직 안 나오는데, 참나 자리에만 육바라밀이 있고 마음과 몸으로는 안 나오는데 “육바라밀이 내 안에 있다” 이 말은요 못 하면서 말로 떠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된 인가가 아니에요. 진짜 있으면 해보라구요. 못 해요. 분명히 이해는 합니다. 그 참나 안에 육바라밀이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어요. 고요한 순수의식 상태에서요 거기서 나와 남을 안 가릅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보시에요. 거기서 남한테 죄 지을 생각 안 해요. 정의고 지계예요. 참나 자리가 조화롭지 거기서 개인적인 사감으로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부분이 인욕이고 예절입니다. 게을러지지 않아요. 에고가 게으르지 그만하자 그러지 참나가 그만하자고 안 해요. 참나는 멈추는 법이 없거든요. 그러면 거긴 정진이고 성실이죠. 참나는 흔들리는 법이 없죠. 늘 고요하고. 참나는

28:00 거기가 일체 모든 정보가 다 거기 있죠. 어디서 나왔겠어요? 순수의식에 있다가 한 생각 일어나면 육근이 쫙 펼쳐집니다. 그럼 이 정보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시공 없는 자리에서 시공 있는 세계로 나온 것뿐이니까 거기는 모르는 게 없어요. 에고가 모르죠. 에고가 모르고 에고가 욕심 부리고 에고가 산란한 거죠. 이거까지 다 알아내요. 1주 보살만 되면 다 알아내요. 그러니까 아공 법공과 구공에 기초는 다 알아요. 구공에 대해서 즉 구공이라는 게 우리 안에 육바라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명하진 않아도 체험적인 이해는 다 할 수 있어요. 이 정도 얻어 가지고 만족해버리시면, “나 돈오돈수야 나 12지 됐나봐.” 이래 버리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그러고 계세요. 1주나 가가지고 12지 된 줄 아세요. 육바라밀 잘 못 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에고를 안 보고 참나만 보고 있으니까 참나가 육바라밀 잘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29:00 거기서는 이제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통현장자나 수심결의 관점을 택하셔야 됩니다. 보조스님의 관점이 탁월합니다. 대승기신론도 다 같은 얘기에요. 조금씩 표현이 다를 뿐이에요. 대승기신론 한 번 보실래요. 신성취발심이라는 게 1주 보살을 말합니다. 1주는요. 여러분 보세요. 여기 있죠. 이게 믿을 신자죠. 어느 종교로 보나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거든요. 처음 믿을 때 우리가 부처님도 만나고 하느님도 만나고 해요. 처음 믿을 때라는 게 이제 제대로 믿어지면. 그런데 제대로 만나서 부처님과 하느님하고 통한 믿음 뒤에도 10신이니까 믿음이 더 깊어지죠. 믿음이 깊어져 간다는 게 이제 9급 8급 7급 6급 5급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믿음이 완성되면 1급이 돼요. 1주 보살이 돼요. 그럼 사실 우리가

30:00 학당에서 하는 중요 공부가 다 화엄경 책에서 믿음의 단계라는 거 아시겠어요? 믿음이 깊어져가는. 단순히 지금 교회나 절에서 말하는 믿습니다의 믿음이 아니에요. 왜? 첫 번째 믿음에서 이미 견성을 하는데요. 견성 체험을 하는데요. 그 이후의 믿음은 다 뭐겠어요? 점점 시간이 연장되고 만남이 깊어져 간다는 것은 첫 번째 믿음에서 참나를 이미 만나요. 나머지 믿음의 단계들은 다 뭘까요? 레벨이 올라가는 거예요. 즉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우리가 주장하는 믿음이 아니라, 에고가 주장하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참나와의 교제예요. 그러니까 뭐냐면 확신이라고 보시면 돼요. 확신이 점점 커져가는 것. 참나를 만났더니 확신이 생겨요. 참나를 만나서 생기는 신뢰나 확신을 지금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만난 적이 없는데 믿고 있는 거 있죠. 지금 대부분 교회나 절에 가보면 “믿으십니까?” 하는 믿음은

31:00 본인이 유지해요. 믿고 있는 상태를 본인이 유지해요. 그러다 보니까 그 믿음이 약하죠. 그냥 자기가 억지로 끌고 가고 있는 믿음이에요. 하늘이 끌고 가주지 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요 하늘이 끌고 가는 믿음이에요. 하늘이 벌써 우리 에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불성이 나를 통해서 은혜를 주면서 끌고 가고 있는 거예요. 이 믿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 만났기 때문에 자연히 신뢰가 생기거든요. 눈(雪) 안 본 사람들한테 하늘에 뭐 하얀 게 떨어진다고 하면 그건 “아, 그래 믿을게. 믿을게. 믿는다.” 그런데 그분이 상상하는 거죠. 맘대로 상상하겠죠. 하늘에서 만두가 떨어진다거나 뭔가 떨어진다 얘기만 듣고 상상하고 있겠죠? 우리가 성경을 보다가 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준다 그러면 여러분 다 상상하시지 “믿을게요. 본 적은 없지만 믿을게요.” 그 정도로 진짜 믿고 있는 거죠. 믿을게요 하다가 진짜 눈 한 번 딱 보여주면 끝이죠. 눈 내리는 거 한 번 보여주면 “와아!” 합니다.

32:00 그게 지금 제일 첫 번째 믿음에서 이미 이루어진다고요. 그 뒤의 믿음은 뭐겠어요? 믿을 게 아니에요. 한 번이라도 봤거든요. 그 마음이요 이제 내 안에서 자랍니다. 그 믿음이 자라요. 확신이 자라는 거예요. 의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의심할 수 없는 그 확신이 자라는 것. 그게 자라다가 꽉 차면 믿음이 성취된다는 건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건요, 이제 내 안에 참나가 들어앉아 버렸어요. 그래도 그 중간에는 참나가 있다 없다 하는데 참나가 또 없으면 좀 흔들려요. 있으면 또 확신이 생겨요. 왔다 갔다 하다가 참나가 나를 안 떠나는 지경이 1주입니다. 머무를 주자. 참나가 내 안에 머물러 버렸어요. 이제 의심이 안 생겨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이게 신성취의 경지입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그 경지를 지금 믿음이 성취된 발심 그럽니다. 어느 종교나 믿음의 성취라는 건 저 경지예요. 성경에서도요 구원받는다는 14만 4천 명을 보면요

33:01 분석해보면 저 경지입니다. 신성취발심의 경지예요. 믿음이 성취됐어요.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어요. 이게 사도 바울식으로 얘기할까요?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경지.예요 그전에는요? 켜졌다 꺼졌다 해요. 그러면 켜졌을 때는 또 마음이 새롭다가 꺼지면 해이해집니다. 제가 흔히 드는 비유 있죠? 공부하라고 아들을 방에 들여보내고 엄마가 들락거려요. 들어오면요 아들이 깨어나죠. 엄마가 나가면요 해이해집니다. 왔다 갔다 하겠죠. 들어오면 또 공부를 해야 되니까. 그런데 이게 일반인의 믿음이 자라는 경지예요. 1주는 뭐라고요? 엄마가요 들어와서 문 잠갔어요. 들어앉았어요. 내 뒤에 그냥 딱 앉았어요. 그러면 모든 걸 내려놔야 되잖아요. 뭐 다른 시도를 할 수가 없잖아요. 에고가 제념하게 되겠죠. 그 경지예요. 1주라는 건요 성령이 참나가 대한 그냥 들어앉아 버렸어요.

34:00 이제 들락날락 안 한다고요. 그러니까 에고가 한 번 놓게 돼요. 그게 믿음의 성취입니다. 이게 의심이나 이런 것들을요 흔들리는 마음을 이제 한 번 놔요. 굳이 더 들고 다닐 필요가 없거든요. “성령은 혹시나 지금은 있지만 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우리 불성이라는 게 내가 자각을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런 의심들, 사소한 의심들마저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 의심들이 제념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돼요. “내 안에 불성이 있다.” “내 안에 하느님 있다.” “성령 있다.” 이게 그냥 받아들여지는 경지가 그게 정혜쌍수예요. 즉 늘 성령을 만나고 늘 불성을 만나고 그리고 늘 이해해요. 그 불성이 어떤 존재인지 성령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어요. 이게 정혜쌍운이라는 거예요. 늘 만나고 있고 늘 그 신성을 만나고 그게 선정이고요. 이해하고 있어요. 그 만남이 개념 없는, 이해가 없는 만남이 아니라 이미

35:00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참나는 어떤 존재고 에고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게 신성취발심입니다. 보실래요. 8. 신성취발심(법신에 대한 믿음이 성취된 발심, 1주의 돈오). 대승기신론식 설명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성취한 발심(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우리가 발한다는 걸까? 신성취, 믿음을 성취한 경지에서 내는 발심이라는 것은, 에고는 또 계속 발심을 합니다. 그 믿음을 성취하고 나서 이렇게 또 발심을 하는 거죠. 대략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3가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어떤 마음을 발한다는 걸까? 하면서 대략 세 가지다. 신성취 경지에서 내는 발심이 뭘까요? 1주 보살은 어떤 발심을 하나요? 이런 얘기에요. ① 첫째 ‘직심’(곧은 마음)이니. 곧은 마음을 발심해요. ‘진여법’을 바르게 알아차리기 때문이며(자리이타의 근본). 믿음이 성취됐다는 얘기는요 이미 내 안에 있는 진여, 공적영지를요 바르게 알아차리고 있어요. 내 안에 있는

36:00 무념을 늘 알아차리고 있어요. 따라서 직심, 곧은 마음. 양심입니다. 양심. 양심을 발하게 돼요. 다른 거 뭘 더 바라겠어요? 내 안에 이미 진여법이 있다는 것을 늘 알아차리게 돼버렸으니, 내 안에 진리가 늘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됐으니 이제 직심, 그게 양심입니다. 순수한 마음, 올바른 마음을 바라게 되고요. 사실은 이 발심이 자리이타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 1주 보살을 발심주라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초발심주. 그러니까 1주 보살이 뭔 발심을 해요? 지금 이 답을 대승기신론에서 내고 있는 거예요. 첫째 직심을 발한다. 양심 잘할 것을 발한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1주 보살이 하는 발심이 첫 번째 직심. 올곧은 마음을 발한다.

37:01 제가 예전에 많이 말씀드렸는데. 이 직심이요 이건 자리도 되고 이타도 돼요. 나와 남 모두 살리는 마음이죠. 직심이 옛날 이 곧을 직자가요 옛날에는 이렇게 써요. 지금 이게 세워진 거예요. 원래 이렇게 눕혀져 있었어요. 직이죠. 또 마음 심자 이게(㥁) 지금 덕 덕자의 옛날 글자 고자입니다. 여기에 나중에 이게(彳) 추가돼요. 근데 원래 이렇게(㥁) 만으로도 써요. 이게 지금 우리 한자에서는 이걸(彳) 추가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원래 예전 글자를 보면요

38:00 이게 사거리에서요 눈을 똑바로, 이게 눈이에요. 이게(눈) 원래 눕혀져 있어야 돼요. 이렇게 이게 숨은 곳이에요. 숨은 곳에 있더라도 눈이 똑 바르게 동서남북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갖고 길을 걷는 거예요. 길을 걸어갈 때 길을 정확히 보면서, 길을 정확히 본다는 것은 똑바로 본다는 거죠. 그래서 똑바르다는 의미를 갖게 됐는데 요거는요 양심입니다. 순리대로 순리대로, 그런데 마음 심자가 중요해요. “그런 마음을 먹고”라는 뜻이 있어요. 똑바로, 이게(직) 지혜면 요거(심)는 자비나 심적인 덕목이에요. 이게(직) 지혜의 덕목이라면 이거(심)는 좀 심리적인 덕목. 길을 걷는데 필요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똑바른 안목과 거기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39:01 그래서 이거를 이렇게 어렵게 안 풀고 그냥 풀 때는 직심이 똑바른 진리(직)대로 따르는 마음(심)이기 때문에 이게 양심이에요. 양심을 행한다. 지금 이게 행한다는 거예요. 이게(彳) 원래 예전에 사거리예요. 사거리를 이렇게(행) 지금 다닐 행자가 원래 사거리입니다. 사거리 그려 놓은 거예요. 길을 사방으로 어디든 걸어 다닐 때 똑바르게 보고 제 갈 길을 찾는 그 마음. 여러분 똑바로 보기만 해서는 안 돼요. 마음이 거기에 호응해 줘야 되거든요. 길은 똑바로 보여요. 저기가 내 목표 지점인데 이쪽에 딱 술집이 있어요. 그럼 마음이 이쪽으로 가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똑바로 보고 거기에 부응하는 마음까지 갖고 그 길을 걸어가야 길을 걸을 수가 있잖아요. 이 길 도자와 다르게 덕 덕자는 길을 실제로 걷는 거예요. 그런 마음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걷고 길대로 잘 따라 걷는 마음을 말해요.

40:00 덕은 실천적이고 마음의 어떤 인격을 나타내요. 인격과 어떤 실천. 길을 진짜 걸어야 되고 마음을 그렇게 먹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길을 걸을 수가 없거든요. 길 도자는 그냥 길을 의미해요. 덕은 뭐겠어요? 그 길대로 그 길을 잘 알아보고, 지혜로 알아보고 마음으로 그 길을 진짜로 성실하게 걷는 거죠. 순수한 마음으로 걸어주는 거죠. 유혹에 안 빠지고 잘 걷는 거죠. 이해되시죠? 그러다 보니까 자 이게 원형입니다. 이게 원형인데 그걸 예전에 요거(彳) 안 쓰고 고자로 이렇게(㥁)만도 썼던 거예요. 원래 이걸(彳) 나중에 붙였더라도 원래는 이게 있어야 되죠. 사거리를 의미해주는 행(행) 있어야 맞으니까 나중에 붙인 것뿐이고. 이 행자 있는 게 원래 의미에 맞죠. 이 뜻을

41:00 다 풀어주죠. 아시겠죠? 그러니까 직심이라는 것은 “양심, 덕의 마음” 이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진리대로 실천하는 게 덕이거든요. 진리, 길은 있는데 안 걸으면 소용없거든요. 그 길을, 진리를 실제로 걸어 주는 것은 덕입니다. “인의예지하라. 양심하라. 황금률하라.” 이게 길이면 덕은요 진짜로 해보는 거예요. 진짜로 그 길을 알아보고 양심적인 마음으로 그 길을 진짜로 실천해보는 거예요. 그게 덕이에요. 그래서 직심이라는 것은, 아주 올곧은 마음은 양심을 말합니다. 양심이 자리이타의 핵심이고요. 첫째 직심을 발하게 돼요. 이게 무슨 얘기냐? 여러분이 참나 안에 살게 되면, 참나가 여러분 마음에 완전히 자리 잡으면

42:01 자연히 여러분 에고를 통해서, 발심은 무념이 여러분 마음 안에 자리 잡으면 에고를 통해서 이런 마음들이 터져 나온다는 거예요. 뭐가 터져 나오느냐? 양심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나도 살리고 남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터져 나와요. 어떻게 살리느냐? “양심적으로 잘 살리겠다.” 그 다음에 ② ‘심심’(깊은 마음)이니 모든 ‘선한 행위’를 쌓아가기를 즐기기 때문이며(자리). 심심. 깊은 마음이 터져 나와요. 그 다음에 ③ 셋째는 ‘대비심’(큰 자비의 마음)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이타). 대비심이 터져 나와요. 이런 발심을 하게 되는데 심심이 자리 쪽이면 대비심이 이타 쪽이죠. 항상 이렇게 3개를 거론할 때는 변증법처럼 삼박자가 다 맞습니다. 직심은 자리이타가 다 근원이에요. 이거 하나만 얘기해도 돼요. 양심 터져 나오면 끝난 거죠. 그런데 양심이 터져 나오게 되면 심심, “모든 선한 행위를, 선행을 내가 다 해버려야겠다.” 대비심은요?

43:00 “일체 중생을 구해야겠다.” 즉 우리말로 하면 홍익인간입니다. 홍익인간의 마음이에요. 자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야겠다. 1주 보살이 뭘 발심하게 되겠어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 이런 겁니다. “이제 내가 죽고 참나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 할 때 그러면 내가 바라던 발심이 있겠죠? 여러분 에고가 바라는 건 뭐겠습니까? 호리피해죠. 이익은 얻고 손해는 안 얻었으면 좋겠다. 이건데 갑자기 뭘 발심합니까? 양심을 발심해요. “나는 앞으로 올곧은 마음으로 살겠다.” 이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거죠. 우리 안에 참나가 원래 양심 덩어리니까 “양심 잘해야겠다.” 왜냐? 1주 보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육바라밀 닦는 코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육바라밀 잘해야겠다는 거예요. 육바라밀만 잘하면 나도 살고 남도 다 살리잖아요. 그런데 그걸 좀 부연해 줍니다. 좀 더 풀어준 게 직심을

44:00 발했고 직심을 갖고 살면서 깊은 마음(심심), 모든 선행을 내가 다 하겠다. 결국 육바라밀이에요. 육바라밀 내가 완벽히 구현하겠다는 마음 발하게 되고. 그 육바라밀 가지고 뭘 해요? 이거(심심)는 “내가” 잘 되는 거잖아요. “내가” 육바라밀을 못 했는데 잘하게 된 거죠. 그걸(심심) 써서 뭘 하겠다는 거예요? 중생들을 다 도와주겠다는 마음(대비심)을 발하게 돼요. 그러니까 심심과 대비심은 직심을 풀어준 겁니다. 결국 하나예요. 양심바라밀. 이게 보리심을 발한 거예요. 왜 이렇게 풀 수밖에 없느냐? 1주 보살은 초발심주라고 불리죠. 이때 발심은요, 불경에서 발심은 발보리심의 줄임말입니다. 보리심이 뭐겠어요? “깨달음의 마음.” 이게 우리 동양식 표현의 양심이에요. “양심을 완벽히 구현하겠다”는 발심을 하게 돼요. 1주 보살 때 되면 여러분 뭘 발심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45:00 “육바라밀을 완벽하게 구현해서 부처가 되겠다.” 근데 그 안에는 뭐가 들어 있다고요? 육바라밀을 완벽히 구현하겠다는 마음 안에는 “내가 선해지겠다”는 마음과 “중생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다 들어있어요. 쪼개놓으니까 3개가 되지 하나로 말하면 그냥 “보리심”을 발하는 거예요. “양심” 잘하겠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1주 보살이 뭘 발심하겠어요? 양심 잘하겠다고요. 유교에서 군자가 어디에 뜻을 세워요? 양심 잘할 뜻만 세워요. 그럼 그 안에는 다 들어 있어요. “수기치인”이 다 들어있어요. 그 양심을 통해서 나를 닦겠다는 거랑 그 양심으로 인류를 돕겠다는 게 다 들어있죠. 대승기신론의 핵심까지 지금 이해했습니다. “자리이타.” “자리”와 “이타.” 그래서 “심심”은 깊은 마음 심오한 마음이니까 뭘 심오하다고 하느냐? 모든 선한 행위를 다 쌓아가기를 즐기기 때문에, 내가 육바라밀을 완벽히 구현하려고 마음을 냈기 때문에 심오한

46:00 마음이라고 하고. “대비심”은 일체 중생의 고통을 다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이타의 마음이라고 한다. 자 보세요. 우리 욕심은 나한테 이로운 거 좋아하고 나한테 해로운 거 싫어하는데 양심은 어때요? 나한테 육신, 쾌락으로 이로운 게 아니라 내 양심에 이로운 걸 좋아하고 내 해로움만 제거하는 게 아니라 중생의 모든 해로움을 제거하길 원해요. 이게 양심이죠. 욕심 하고 전혀 결이 다르죠. 욕심은 내 욕망을 성취하는 데 이로운 걸 좋아하는데 갑자기 내 양심을 성취하는 데 이로운 걸 좋아하게 되고. 욕심은 나한테 해가 오는 걸 싫어했는데 양심은 중생 모두에게 해가 오는 걸 싫어하게 된 거예요. 재미있죠. 이렇게 읽어내셔도 재밌습니다. 자리이타에서 지금 여기서(심심)는 나한테만 이로운 게 좋았는데

47:00 보살이 되면 양심은 나도 좋고 남도 좋아야 되는데 나도 좋다고 할 때도 양심 잘하게 되는 것을 내가 좋다고 하는 거고, 남을 이롭게 할 때도 결국은 남한테 이로움을 실질적으로 주고 해로움을 덜 주는 것. 남이 이로웠으면 좋겠고 남이 해로운 거 안 겪었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이타라는, 그 이로움 해로움이 확대되는 거죠. 나의 이로움 해로움만 따지다가 확장되는 거예요. 나의 이로움 해로움도 욕심 차원이었는데 양심 차원의 이로움 해로움으로 확장돼요. 사실은 결국은 이게 뭘까요? 결국은요 똑같아요. 욕심이나 양심이나 호리피해는 똑같아요. 욕심 차원은요 내가 이로웠으면 좋겠다는 거잖아요. “나!” 그런데 양심 차원은요? “나와 남” 모두가 이로웠으면 좋겠고 나와 남 모두가 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확장된 것뿐이에요.

48:00 사실은 똑같아요. 욕심은요? 내가 이로웠으면 좋겠고 내가 안 해로웠으면 좋겠다는 거고, 양심은 모두가 이로웠으면 좋겠고 모두가 안 해로웠으면 좋겠다. 여러분 그 마음 다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뉴스나 이렇게 페북이나 이렇게 보시면 가슴 아프죠. 나는 특별히 나쁠 일이 없지만 누군가가 사고 당했단 소식 들어도 기분 안 좋죠? 그거는 양심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양심은요 여러분도 모르게 뭘 지향하고 있어요? 모두가 이로워야 된다고 지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욕망이 충족이 안 되는 거예요. 대아적인 욕망을 불교에서는 원이라고 하죠. 원의 충족이 안 되는 거죠. 이게 지금 원이잖아요. 발심이라는 게 원인데, 원과 욕의 차이입니다. “욕”은 나한테만 이로우면 되는데 나한테만 안 해로우면 되는데, “원”은 모두가 좋아야 돼요. 안 그러면 내가 찜찜해요. 나는 재미를 봤지만 누군가한테 해를 끼쳤으면 찜찜해요.

49:00 그래서 저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육바라밀 밖에 할 게 없어져요. 그게 이제 내 삶을 더 이끌게 되면 이제 보살이 되는 거고. 찰나찰나 보살이던 분이 완연한 보살이 되는 게 지금 1주 보살 와서는 이제 보살 입문한 격이죠. 이런 발심들을 하게 됐다는 건요 이쪽이 우세하게 됐다는 거예요. 참나 쪽이 우세해진 거예요. 에고와 참나에서 참나가 주도권을 잡았다는 얘기에요. 이런 발심을 하게 돼요. 이런 방향으로 삶을 전환하게 돼요. 아직도 욕심이 猩猩하지만 이제 참나가 자리를 잡아버렸기 때문에 참나 뜻에 따라 사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되는 상태가 된 거예요. 참나가 뭘 원하고 뭘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여러분이 소중히 챙겨가야 되는 단계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걸 발심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기독교적으로 얘기해 볼까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이 경지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50:00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 그게 무념 안에서 안 살면 성령 안에서 안 살면 그 마음 안 생깁니다.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면서, “늘 성령 안에 살면서 모든 선한 건 다하고 모든 악한 건 다 하지 마라.” 그게 1주 보살의 선언입니다. 난 앞으로 이렇게 살 거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내 안에 육바라밀 있다” 하는 걸 알게 되면 1지 보살이 되고, 사도 바울처럼 사랑은 온유하고 인내하며 쭉 육바라밀 얘기를 하잖아요. 거기 육바라밀 덕목 다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인욕바라밀, 무례하지 않고 예절바라밀, 늘 성실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정의를 좋아하고 아무튼 다 나와요. 온유하고 겸손하고 육바라밀이 쫙 나옵니다. 내 안에 그런 거 있더라 하는 게 쫙 나옵니다. 이걸 선명히 알게 되면 1지 보살 되는 거예요. 바울 보살이죠. 바울 보살. 기독교식으로는 사도 바울. 불교식으로 바울 보살. 그래서 이런 분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수가 없다 하는 걸 말씀 드리고. 5분 쉬었다가 다시 하겠습니다. 예. 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