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0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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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 |
| 강의일자 | 2017. 11. 11. 土. |
| 게시일자 | 2018. 01. 22. |
| 동영상 길이 | 56:53 |
| 강의 중 인용 도서 | 수심결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FzFgpphUb6U |
(00:04)
보조 지눌 스님의 <수심결>에서 해오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다 보셨을 텐데. 제 수심결 출간한 지 오래됐죠. 다들 보셨을 텐데, 같이 또 읽어 볼게요. 보조 스님이 이제, 스님한테 묻는, 질의 응답을 통해 견성시키는 내용입니다. 자, “진리에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대에게 하나의 문을 가르쳐 주어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근원'...” '그대의 근원'이라는 게 근원 원(原)자를 썼는데, “근원으로 돌아가게 해 버리겠다.” 참나를 각성시켜 주겠다,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이 여러 방법이 있다 이거죠.
(00:52) 지금은 관음법문을 쓰는 겁니다, 관음. 소리를 관(觀)해 가지고 진리를 깨치는 그 방법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자, 저기- “지금 저 까마귀 울며 까치 지저귀는 소리 들리는가?” 여러분 지금 밖의 차 소리 들리세요? 스님이 “예, 듣고 있습니다.” 보조 스님이요, “그렇다면 소리를 듣는 '그대 자신'을 돌이켜 들어 보라.” 소리를 듣는 데 일단 몰입하셨다가 '소리 듣는 나는 누구지?' 하고 나로 돌아가고, 소리 듣는 자가 되어 보라. “그 듣는 본성 자리에 소리가 있는가?”, “그 자리에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이게 잘 따라간 거죠, 지금 그 제자분이. “훌륭하다. 이것이 관음입리지문(觀音入理之門). '소리를 관(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다.” 해서 관음법문이라는 거죠.
(01:50) 관음입리. 관음. '소리를 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다. 이게 다예요. 이 자체가 최상승선이에요, 이건. 소리를 듣는 나로 바로 들어가면 최상승선이죠. 소리를, 소리를 듣는 것 자체에 몰입했다가 소리를 듣는 나 자신을 찾아가면 단계를 거치는 수행도 되지만, 소리 듣는 나로 곧장 들어가면 바로 최상승선이기도 하고. 꼭 최상승선이야 되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어렵지 않죠? 그냥 소리 듣는 나를 찾으면 돼요. "거기엔 소리가 있냐?" 이거죠. 오직 들을 뿐이죠? 그 자리에는. 알아차릴 뿐이에요, 사실은. 듣는다는 것도, 지금 소리도 없는데 소리를 듣는다 하는 말도 없죠. 그러니까 "알아차릴 뿐!"인 상태로 존재하시라는 거예요.
(02:44) 소리에 끌려가지 말고 소리를 듣는 나 자신으로 존재해 보라. “내가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그 자리(소리 듣는 그대 자신)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일체 없었다고 했다. 이미 얻을 것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었다면 그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 아닐까?” 그 자리는 그러면 소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텅 비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空)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나 자리를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이 “어, 그런데 거기가 그냥 텅 비어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알아차리더라구요.” 이 얘깁니다. “광명하여 어둡지 않더라구요.”
(03:28) 제자가 너무 잘 따라와 주죠? 자기가 쓴 글이라 그래요. 가정해서 쓴 글이라. 대답을 너무 앞서가면서까지 맞춰 주잖아요. 이게 실제라면 아마 스승이 그랬을 거예요. 오버하지 말라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하고 싶은 얘기를 따라와 주는 거죠. "거기 텅 비어 있더냐?", "아니요. 텅 비어 있지만 않고 광명하여 어둡지 않던데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텅 비어 있지 않은 본체인가?”, “형상도 모양도 없어서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가 모든 부처 · 조사들의 '생명' 자리다.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04:09) 이제 의심하지 않는 단계에 들어갔죠? 여기가 해오 자리예요. 지금 이 양반이 참나를 체험했죠. 그리고 이해했죠? 자, 참나를 체험했고 왜 이 자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는지까지 이해했어요. 생각 · 감정 · 오감이 일체 없는 텅 빈 자리인데 거기서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참나는 속성이 텅 비어 있으면서 알아차린다.'까지 안 거예요. 그렇죠? 그럼 이게 해오죠. 참나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했다구요. 여기 이제 아공 · 법공이 다 들어있는 거죠. “그대가 만약 참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게 된다면 의심이 '단박' 사라진다.” 자, 이래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겁니다.
(04:50) 자, “참나를 단박 깨치게 되면 동시에 이제 이해가 밀려오게 돼 있고, 그 이해까지 얻게 되면 의심이 사라진다. 의심도 단박 사라진다.” 자, 그래서 참나를 정확히 만나게 되면 참나를 이해해 버리게 되고, 우리는 그 이해를 통해 의심을 끊게 된다. 이게 초기 불교 때부터요, 견도(見道). 도를 진짜 보면 의심이 사라진다고 되어 있는 게 이겁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 오래 못 머물면 분명히 다시 의심은 싹터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미 이해의 씨가 뿌려졌죠. 이해해 버렸단 말이에요. 이게 이제 그걸 막아줍니다. 그러면서 이게 싸우다가 완전히 승리하고 끝나면 증오가 되는 거예요.
(05:33) 그래서 이분 이 말씀이, 의심이- “그렇게 참나 자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면···” 일단 만났는데 이제 의심할 수 있어요? 참나가 존재한다는 걸, 만났는데 의심할 순 없잖아요. 1초라도 만나면 이제 의심이 불가능합니다.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러고도 의심한다는 건요, 그 기존의 습기(習氣)가 남아서 의심하는 거지 분명히 이해, 확고한 이해가 뿌리를 내려요. 만나서 이해했으니까.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일어나 버리면 의심이 단박에 사라진다. 이제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잖아요. "어, 내가 다시 지금 그걸 못 느끼고 있어. 그런데 그 자리는 분명히 있어. 안 사라지는 부분이 있어, 이제." 확고한 부분이 생겨요. 다시 흔들리는 부분도 생기지만 확고한 부분이 생깁니다.
(06:22) 그래서, “여기서 대장부의 강한 의지가 분출하게 될 것이며···” 이제 맛봤는데 이제 의욕이 나죠. “참되고 바른 견해가 발동하여···” 지혜가 발동하죠. 참나를 만났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서 오는 그 지혜는요, 막연하게 상상하던 게 아니에요. 참나에 대해서 상상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참나에 대해 상상한 분들이 현재 불교 경전들을 강의하고 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일 무서워요, 이분들은. 자기가 상상한 얘기를 하고 있어요. 경전을 보고 자기가 상상한 걸 가지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가는 거예요. 그 말 듣곤 아무도 못 가요.
(06:58) 그런데 진짜 체험하고 나면 확실한 이해,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당연히 발동하겠죠. 왜? 직관도 하게 되고 직관의, 직관에 바탕을 둔 추리가 이제. 당연히 추론이 일어나요. “진리의 참맛을 직접 보며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참맛을 직접 봤죠. 그리고 스스로 긍정했죠. "맞다!" 이해도 생겼죠. 이해해서... 이겁니다. 자, 보통 이 직관의 영역을요, 정견(正見)이라고 그래요, 불교에서. 올바른 견해가 생겼다는 건요, 직관을 한 거예요. "아!" 그리고 추론, 올바른 추론을 뭐라고 하냐면요. 추리나 추론입니다. 올바른 추론을 정사유(正思惟) 그래요. 올바른 전제에 서서 올바른 논리를 펼쳐나가면요, 이분은 이제 직관과 분별이 다 원만해지겠죠.
(07:53) 정견은요, 직관에 기반을 둡니다. 직관에. 그 정견을 말로 표현하면은 또 이렇게 보편 법칙이 되겠지만 저 근본 원리에 대한 직관에 바탕을 둔 게 정견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견으로, 정견으로 정립된 그런 개념을 가지고 이렇게 굴려 가는 게 정사유예요. 이게 맞다면... 이거죠. "무상하다. 일체 무상하다." 하는 정견이 표출되면, 그건 직관을 바탕에 둔 거죠? 그리고 그 정견을 가지고 이제 굴려서 쓰면 정사유예요. "일체가 무상하니 그럼 이것도 무상하겠네. 내가 겪은 이 고통도 무상하겠네." 이렇게 올바른 사유를 하게 된다는 건요, 올바른 직관에 바탕을 둔 추론을 계속 전개해 가는 걸 말해요. 그래서.
(08:42) 자, 정견은 직관을 강조한 얘기고, 정사유는 추론을 강조했다. 사실은 둘이 또 만나는 작용이 있지만, 아무튼 어느 쪽에 더 포인트를 두고 있는지만 구별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견해가 발동한다는 건 정견, 정사유를 다 얘길 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참나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올바른 사유까지 계속 이제, 올바른 추론까지 전개하게 되니- 자, 이 정도 오면 이 자리가,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 해오처(解悟處)다.”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예요. 깨달음을 이해한 자리도 되고. 이해하여 깨달은 자리.
(09:25) 보조 스님이 주를 달았어요, 각주를. “(이것이 비록 '증오'가 아니고 '해오'이긴 하지만) 이 자리에는 다시 계급의 차례가 있을 수 없는바, 이것을 단박(돈, 頓)이라고 하는 것이다.” "해오다."라고 해 놓고 본인이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여기는 이게 단박이라고 내가, 이걸 돈오라고 부를 수 있다 이거예요. 해오도 돈오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자리에는···” 왜? “다시 계급의 차례가 없다.” 그, 보세요. 짧지만 그 순간 불성을 만났고, 불성을 이해했단 말이에요. 그게 그 짧은 순간 우리는 영원과 통한 거예요. 여기에 단박, 여기에 계급과 차례를 붙일 수 없다. 그 순간에 우리는 참나와 하나가 된 거다. 짧더라도 그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래서 단박이라고 한다.
(10:17) 여러분 이때, 해오 때 이미 기독교로 치면 해오 때 이미 하나님과 만난 거예요. 기독교 식으로 이해해 보실래요? 해오라는 것은요,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만났어요. 근데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 상상만 하고 기도만 하다가 만났어요, 다이렉트로. 이게 관상(觀想)이에요. 관상을 통해서. 묵상(默想), 묵상할 때는 자기가 상상해서 하는 거예요, 묵상은.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직 못 만났어요. 묵상을 하다가 -묵상은 비행기 활주로를 계속 달리는 겁니다- 탁 날아오를 때가 관상이에요. 딱 날아오르면서 하나님을 만나 버렸어요. 그럼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나요, 이제?
(10:56) 하나님 어떤 분인지 느낌이 왔을 것 아니에요. 직관이 오고, 직관이 온 걸 가지고 생각을 정립하니까 추론이 되어서 올바른 하나님관이 생기겠죠. 다시 못 만나더라도 지금 해오는 해 버린 거예요. 이해해 버린 거예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서 다시는 의심할 수가 없어요. 흔들릴 수는 있어도 이제 의심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흔들리는 영역은 있지만 확고한 영역이 생겨 버린 거예요. 확고한 이해가 생겨 버린 게 있어요. 그럼 그건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 순간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럼 하나님이 계속 실력이 느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원래 완전한 존재죠.
(11:36) 완전한 존재랑 내가 잠깐 만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만남 자체는 단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계급이나 차례를 붙일 수가 없다. 내 영성이 계속 계발되겠지만 그 순간만 놓고 보면 그건 단박 깨달은 거다. 온전한 하느님을 만난 거라는 거예요. 그걸 보조 스님은 되게 강조합니다. "이미 완벽한 부처를 그대는 만났다."는 거예요. 내가 노력해, 내가 노력해 가야 당연하고, 내가 노력해 가는 과정 속에 있고, 그 과정 속에서 부처를 만난 거지만 그 부처 자체는 완벽한 존재죠. 하느님 자체는 완벽한 존재죠. 완벽한 분을 내가 만난 거예요. 완벽한 자리를 느낀 거예요. 그래서 그 부분에 있어서는.
(12:27) 지금 레벨, 계급을, 계급과 차례를 붙일 수는 있죠. 해오는 계급과 차례를 붙이면 8급, 7급의 자리예요. 붙일 순 있는데 이때의 그 깨달음만큼은요. 그때 그 깨달음은 하느님하고 통한 거예요. 영원과 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거기에다가는 계급과 차례를 붙이지 마라." 이 말을 왜 했을까요? 원래는 이런 말 안 해도 돼요. 그냥, 그냥 8급이라고 하면 돼요. 왜 그러냐? 선불교에서 하도 난리를 쳐서 그래요. 선불교에서, 화두하다 참나 만나면 "내가 단박에 부처 됐다!"라고, 단박에 부처 됐다는 얘기를 자꾸 한단 말이에요.
(13:06) "나는 레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선불교는 입장이 그거죠. "1지부터 10지? 9급 9단 체계 이런 거는 개나 줘라. 우리 선불교에는 그런 거 안 통한다.", "우린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그런 레벨 따지는 교종의 대승기신론, 화엄경의 그런 교종과 별도로 전하는 가르침이라 화두 딱 터지면 바로 부처다." 이 논리를 믿고 있는 양반들이 화두를 잡다가 탁 참나 체험하면 "내가 부처다!"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철 스님이 그 자리를 12지니 불지니 얘기하는 건 안 맞아요. 왜? 교학 체계랑 연결해서 설명하시면 안 돼요. 교학과 완전히 따로 놀아야 돼요.
(13:46) 그런데 성철 스님은 문제가 뭐냐면, 화두에서 터진 것을 교학의 12지라고 갖다 붙이려고 하니까 엉망이 되는 거예요. 보조 스님도 이해를 못 하게 되는 거예요. 보조 스님은 선불교랑은 다르죠, 입장이. 그러니까 보조 스님을 이해 못 해요, 선불교 쪽은. 보조 스님은 선불교와 교학을 조심스럽게 접근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선불교 입장에서 교학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면요, 완전히 꼬여 버려요. 자기들은 1지부터 10지 가는 것, 6바라밀 수련을 안 닦았는데, 갑자기 화두 터지더니 12지라고 우기는 거는. 자기들 말대로 교외별전이면 끝까지 그냥 따로 가시는 게 맞아요. "경전 외 우리는 따로 전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공부 루트가 달라요.
(14:28) 그러니까 산을 오르는 방식이 달라요. 그래서 자기가 겪은 걸 가지고 바로 막, 다른 루트의 길을 걷는 사람들하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조 스님은, 제가 왜 인정하냐면. 조심스럽게 이 두 단계를 접근시킵니다. 선불교에서 "와! 깨쳤다! 내가 부처구나! 단박에 내가 부처가 됐구나!" 하는 게 해오더라는 거예요, 보통. 이해되세요? 화두 붙잡고 터진 사람들, 보통 보니까 해오더라는 거예요. 이 얘기를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거예요. "단박에 부처 만났다는 느낌이 들 거야. 그게, 해오가 원래 그렇거든." 근데 해오는 8급이잖아요? 우리식, 이제 학당식 기준이죠.
(15:08) 원래 8급이라는 말도 없지만 아무튼 낮은 급수라는 것은 확실하죠. 해오는 낮은 급수잖아요? 그 화엄.. 저랑, 저는 입장이 다릅니다만 원래 불교의 수행 단계가 어떻게 되죠? 52단계 체계가 있죠. 10신(信), 그 다음에 10주(住), 그 다음에 10행(行), 그 다음에 10회향(廻向), 그 다음에 10지(地), 마지막 11지, 12지 불지(佛地). 총 52단계. 저는 이걸 날려 버렸죠, 저는. "10주랑 10행이랑 10회향이랑 10지랑 다 같은 거야." 제 입장은 "이것이 다 동일 체계다.", "11지, 12지는 어차피 우리가 못 가." 저는 10단계로 딱 정리하고. 10신은 그냥, 10주 전의 그냥 10가지 믿음의 단계일 뿐이지 굳이 레벨 안에 들어올 필요가 없어요. 근데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이렇게. 화엄경을 가지고 후대 사람들이.
(16:13) 원래 이게, 제가 말씀드린 게 화엄경의 본 형식이에요. 그런데 기원 후 1세기 때쯤에 화엄경 10지경이 나올 때 이런 체계로 나왔는데, 그냥 10지만 얘기했어요. 그게 다른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한 거예요. 10지에서 끝내요, 그리고. 더 안 들어가고. 11지, 12지까지 안 가고. 근데 뒷사람들이 만들어 내요. 10지 체계로 만들고, 여기서 부처까지 가는 단계를 하나 또 만들고, 그 밑에다 화엄경에 나오지도 않는 10신을 갖다 붙여요. <보살영락경>이나 이런 데 있는 걸 갖다 붙여요. 왜? 10주 전의 단계가 또 필요하니까. 그래서 수행의 단계를 설명.. 화엄경에 나오는 이 용어들을 이용해서 설명은 했는데, 그 수행의 단계를 설명하다 보니까 이제 아주 번잡해졌죠.
(16:59) 그래서, 제가 보는 체계는 아닙니다만 보조 스님이나 대승기신론은 다 이 체계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체계를 설명 안 드릴 수가 없어요. 왜? 이분들의 말을 이해하려다 보니까. 그래서, 10신에서 해오가 와요. 10신. 그것도 10신 초에. 뭔 얘긴 줄 아세요? 여러분 불교 막 믿고 얼마 안 있다가 해오는 한다구요, 원래. 10신 초에 오는 거예요, 해오는. 그러니까 여러분 불교 믿고, 불교 믿을 때도 뭔가 직관이 동해서 믿었죠? 그런데, 믿고, 거기서 하라는 명상도 하고 하다가 지금 아공 · 법공까지 이해되고, 내 불성도 맛보는 것은 "10신 초에 이미 해오 된다." 이거예요.
(17:40) 그러니까 얼마 안 걸린단 얘길 하고 싶어서 보조 스님이 이걸 강조합니다. "10신 초에 우리 바로 부처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만난 부처가. 자, 52단계로 치면 첫 단계인데 그때 만난 이 해오의 깨달음에서 만난 우리 부처는, 우리가 12지에서 만나는 그 부처 그대로다, 사실은. 그러니까 레벨을 말할 수 없고, 우리는 첫, 처음 믿는, 제대로 믿는 그 순간 제대로 우리는 부처를 이미 만난다,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보조 스님이. 이 얘기가 왜 나왔느냐? 선불교 사람들이 "우리는... 너희는 52단계 졸라 겪으세요. 이번 생은 안 될 겁니다. 영원히 가 보세요. 우리는 화두 들고 단박에 부처 됩니다." 재수 없죠?
(18:34) 그래서 보조 스님이 이론을 낸 거예요. "너희가 말한 그게 해오야. 우리도 그냥 믿기만 하면 바로 겪는, 믿고 얼마 안 돼서 겪는 일이야, 그게." 이 얘기를 세게는 못 해요. 왜? 선불교 분들이, 그 선불교 분들은 납득을 못 하죠. "우리는 경전 외에 따로 전하는 가르침이에요. 우리랑 왜, 우리를 엮으세요?" 그러니까 보조 스님도 안 엮어요. 되도록 안 엮으면서 얘기하는 거예요. "어, 너희는 너희 길이 있지. 하지만..." 그러면 교학을 설명하는 데 넣어버리는 거예요. "우리 교학의 이때 해오를 겪게 되지." 그 해오를 얘기하는데 묘하게 선불교의 견성에 유사하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들으면 알 수 있게. 이 얘기를 죽 듣고 있으면 불쾌한 거죠.
(19:19) 성철 스님이 불쾌해진 게 이런 부분도 있어요. "뭐야? 10신 초에 오는 해오를 가지고 견성이라고?" 여기에 열 받으신 거죠. "우린 불지, 12지인데. 화두 견성하면 12지야!" 성철 스님 주장이 이거예요. "12지다." 화두를 들고 여러분이 동정일여만 돼도, "동정일여(動靜一如)만 돼도 이미 이제 1지 이상이고,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화두 잡히면 7지 이상이고, 깊은 잠 속에서 화두 잡히면 8지, 9지, 10지이고. 확철대오(廓撤大悟)하면 12지야." 자, 이것은 성철 스님의 말도 안 되는 이론입니다. 왜? 교외별전인데 왜 교학 체계를 가지고 설명하세요? 그렇죠? 자기들이 교외별전이라고 했죠. 이게 붙여서 설명하면 안 돼요, 애초에. 그리고 맞지도 않고요. 그분들이 말한...
(20:13) 그래서 보조 스님이 미리 해 놓은 거예요. "그게 해오라니까! 그래서, 참나 딱 만나면 그게 해오야." 충격적이죠. 완전히 충격적인 얘기를 보조 스님이 해 놓은 거예요. 이래서 성철 스님이 완강하게 보조 스님을 이단으로 몰고, 파내자고 한 거예요. 족보에서 파내자고. "보조 스님을 끌어내자." 이해되세요? 보조 스님의 이 말씀이, "그 자리는 차례가 없는 자리다." 이게, "이게 선불교에서 말한 견성 자리다. 견성 첫 체험을 말한다."라고 얘기한 거예요. "견성의 첫 체험이 우리가 말한 해오고, 너희만 처음 겪는 게 아니라 우리도 원래, 교학 이론에서도..."
(20:59) 교학 이론과 선불교를 사실 회통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선교일치(禪敎一致). 근데 대놓고 막 섞으면 안 돼요. 왜? 선불교에서는 우린 교외별전이라고 거부하기 때문에. 다름을 존중하되, 들어 보면 통하게 해 놓은 거예요. 들어 보면 다 통하게. 근데 듣고 나면 선불교 분들이 되게 불쾌해지게 되어 있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띄워 주는 거예요. "너희는 그냥 한 방에 부처되는 길이잖아. 우리 얘기 신경 쓰지 마. 근데 우린 또 그래." 막 이런 식으로 해서 이런 논리를 전개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하고, "보조 스님이 말년에는 인정했대, 참선을." 성철 스님이 그래요. "근데 끝까지 고집을 못 버렸어, 이 양반이." 이제 이런 식으로. 이해를 못 하신 거예요, 지금. 보조 스님의 논리를 이해를 못하신 거예요.
(21:51) 띄워 주면서 까니까. 띄워 주는 것 보면 "전향했나, 이분이? 회심했나?" 이러고. 근데 또 은근히 또 까니까 "아, 이거 끝내 이 양반 고집을 못 버리네?" 이렇게 쓰여져 있어요, 성철 스님 책에 나오는 보조 스님의 모습이. 통탄스러운 거예요. 제가 뭐 보조 스님 빠도 아니고, 보조 스님이 설명을 너무 잘해 놓으셔서 제가 그 자명함에 감탄해서 제가 이렇게 설명드리는 것뿐이에요. 성철 스님식대로 해 보세요. 그래서, 화두가 꿈속에서도 있다가 깨쳐서 견성 딱 체험하면 12지라고요? 얼마나 말.. 교학을 얼마나 무시, 그건 교학에 대한 너무 무시입니다.
(22:32) 교학을 너무 모르시는 소리예요. 12지가 어떤 경지인 줄 알고, 여러분. 전지전능한 신의 경지예요, 12지는. 화두 터져서, 그 정혜쌍운 정도 얻은 경지가 아니라구요. 정혜쌍운 이제, 정혜쌍운이 시작된 자리가 해오죠. 첫 체험. 선정과 지혜가. 자, 깨어 있음이 흐르고 깨어 있음 속에서 지혜가 정립되는 그 첫 체험. 그게 짧지만 첫 체험 한 게 해오예요. 예. 그런데 그, 짧지만 그게 현상계 시간으로는 여러분. 현상계 시간으로는 "나 3초 체험했어." 해도 그 자리는. 원래 완전한 자리를 여러분이 체험하신 것 아닌가요? 그 자리 자체는요, 시간과 뭐 이렇게 이원성을 가지고 잴 수 없다구요. 레벨을 가지고 잴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완전한 자리이기 때문에.
(23:18) 퍼펙트한 하느님과 여러분이 3초 간 만났다고 하면 여러분 기준으로, 여러분 에고 입장에선 3초 만난 거지만 그건 영원한 그 자리에 여러분이 합일되신 것이기 때문에 영원함 입장에서 보면 그 자리는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 체험의 어느 한 부분은 영원을 만난 거예요. 여러분 에고 입장에서는 끊어졌네, 약했네, 강했네, 어쨌네 하시지만 그 참나 입장에서 보면 여러분 영원한 자리인 거예요, 그 자리는. 그렇죠? 그 체험이. 영원, 영원한 자리랑 함께했던 거죠. 여러분 입장에서 그 시간이 짧았네, 강도가 약했네 이런 말 하실 수 있어도.
(23:59) 그래서 이런 관계도 나중에 이해하시게 되면 에고가 이제 궁시렁대는 게 자꾸 줄어요. 늘 그 자리라는 걸 알고 에고의 입장에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자꾸 줄어들어서, 늘 참나 자리에 더 힘을 실어 주면서 살아가실 수 있어요. 그게 확철대오구요. 그런 삶이 아주 안착되어 버리면 확철대오 했다고 하는 거예요, 별게 아니라. 그래서, 이제 이런 얘기들도 입장이 조금씩 바뀌어야 이해가 됩니다. 에고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잘 안 돼요. 에고의 입장에서 수행을 하면요, 에고가 이 참나를 뭔가 이렇게... "극복해 내리라!", "내 것으로 만들리라!" 하고 접근하는 것 같지만 그런, 에고의 망상이에요. 그 힘이 다 빠지고 나면 확철대오가 와요.
(24:41) 내가 참나 안의 존재라는 걸 알고 힘이 빠집니다. 내가 궁시렁댈 필요가 없다는 걸. 내가 참나를 만났네, 못 만났네라는 말도 필요없다는 걸 다 알아요. 이미 참나 속에 있으면서. 내가 진리의 바닷속에 살면서 혼자 막 깝치는 거예요. 물고기가. 바다랑 싸우다가. "그냥 내가 바닷속에 있네." 하는 걸 받아들이고 끝내는 거예요. 원래 그렇습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 찾겠다고 돌아다녀요, 처음에. 그러다가 이제 바다를 체험하고, 그거를, 그게 나라는 걸 못 받아들이다 나중에 이제 완전히 수긍하고, 내가 바닷속에 산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쓸데없는 생각이나 힘이 다 빠지면 확철대오가 와요.
(25:23) 의지력으로 덤비는 게 아니에요, 수행은. 진리를 모르시는 소리예요. 에고가 어떻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원래 그런 세계를 우리가 이해하는 거죠. 원래 여러분은 이미 참나 상태라는 걸 받아들이는 단계인 거예요. 많은 수행을 통해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냥 실상을 받아들이는 것. 내 안에서 희노애락이 하나 일어나도, 욕심이, 추잡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마저도 다 참나에서 이렇게 올라온다는 걸요, 관하실 수 있으면 그냥 받아들여져요. 거기에 내가 더 망상을 안 보태면 다 그러고 다 사라져요. 그렇게 돌아요, 계속. 그래서 망상과도 안 싸워요. 망상이 참나로부터 나오는데요. 그래서 그걸 6바라밀로 좋은, 깨어서 그냥 그걸 좋게 쓰는 거예요. 잘 관리해 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26:10) 실상을 알고 나면 에고가 더 설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흐름을 따라가면서 살아가다가... 그 흐름의 끝에 6바라밀이 있습니다. 6바라밀의 흐름을 타고 가면 우주를 내가, "나도 하나의 작은 하느님으로서 우주를 경영할 수 있구나." 하는 이런 또 깨달음이 오실 거예요. 이런 큰 흐름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뭐 이런 거 이렇게 싸우고 할 게 아니구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처음 공부해서 시공을 초월한 순간에 만난 하느님은 퍼펙트한 하느님, 퍼펙트한 부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돈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단박에 의심이 사라져서도 돈오지만, 단박에 우리가 그 완전한 불성을 만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도 돈오입니다.
(26:57) 자, “그래서 믿음의 '원인'이 모든 부처의 '결과로서의 공덕'과 일치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비로소 믿음을 이룰 수 있다.” 자, 믿음이 확고해져야 해오인데, 처음에 믿고 시작했던 게 이해가 된 거잖아요. 믿음이 확고해졌다는 거예요. 믿음이 자리잡은 건데 믿음이 자리잡으려면요. 믿음의 원인이, 씨앗이 모든 부처의 결과로서의 공덕, 열매랑 일치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때 해오예요. 해오라 이거예요. 자, 해오는요. 보세요.
(27:38) 내가 부처를 믿게 만든 게 이 부처님이죠. 이게 믿음의 씨앗입니다. 내가 이 길을 떠나게 만든 그 믿음의 씨앗인 그 부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이 공부를 다 마쳐서 얻을 그 부처님이랑 다르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냥 완벽한 자리더라는 거예요, 거기가. 내 안에 부처가 생생하더라는 거예요. 6바라밀 덩.. 제가 이 얘기를 쉽게 하는 게 이거예요. "참나는 6바라밀 덩어리입니다." 라고 하는 게, 참나는 퍼펙트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소화를 못 해서 그렇지. 에고가 다 소화를 못 해요. 못 따라가요, 참나를. 그런데 에고가 참나를 일별(一瞥)했어요. 한번 만났어요. 한번 봤어요. 한번 봤더라도 완벽한 참나를 본 거예요. 에고의 입장에서는 그게 이해가 안 될지 몰라도, 참나 입장에서는 완벽한 참나입니다. 이 정도 사정은 알아야 해오다 이거죠.
(28:30) 처음엔 이해가 안 될 수 있어도, 이게 납득이 돼야 해오다. "아, 그렇구나. 내가 부처를 봤구나." 자, 이 얘기를 왜 굳이 강조했다구요? 예전 교학에서는 이런 얘기를 강조 안 했는데, 누가 강조했냐면요. 통현 장자란 분이 강조했어요, 화엄경을 풀면서. 원래 화엄경은 이런 식으로 설명 안 했는데 통현 장자란 분이 화엄경을 설명할 때 "초발심 시 바로 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 때 바로 정각이다. 초발심 때 이미 부처 된 거다."라는 이런 논리를 확대해석하면서, 첫 그 부처님과의 만남, 제대로 된 첫 믿음. "나 처음 믿은 그 순간 귀하도다." 하는 이 부분을 강조해서 푼 거예요.
(29:13) 처음, 초발심 때 바로 정각한다는, 불지가 된다는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미 통현 장자가 이런 논리로 화엄경을 풀었어요. 보조 스님이 그걸 배우신 거예요. '이 논리면 선불교랑 교종을 하나로 회통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통현 장자의 화엄경 풀이랑 이 선불교를 지금 하나로 회통시키는 작업을 보조 스님이 한 거예요. 근데 보조 스님의 이런 회통한 걸 하나도 이해 못 하고요. 지금 성철 스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분들이 논문 쓰면요, 보조가 막판에 회심했냐, 안 했냐? 이것만 신경 써요. 막판에 화두선으로 돌아섰냐, 안 섰냐? 그 사람 생애 그 작업을 전혀 이해 못 하시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29:59) 엄청난 작업을 해 놨는데 이해 못 한 사람들이 "그래서 화두선이라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이해 못 하는 거죠. 여러분은 이해해 주셔야 됩니다. 고려 말에, 우리나라 고려 말에 이런 엄청난 양심 작품이 이미 나왔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셔야죠. 저는 안타까워서 그래요. 이런 작품을 낸 민족이, 왜 오백 년 뒤에 다시 지금 갈 길을 잃어 가지고, "화두를 해야 되나, 위빠사나를 해야 되나, 뭘 해야 되나? 염불을 할까?" 막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충격적인 거죠. 철학적 후퇴입니다. 명백한, 이런 체계를 다 잃어버린 후퇴입니다.
(30:40) 자, "처음 제대로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부처를 만난다, 완벽한 부처를." 자, 이 얘기를요. 조금만 더 하고 쉴게요. 보조 지눌의 <원돈성불론>에서 한번 보실래요? 원돈성불론이요, 화엄경에 기반한 성불론이라는 거예요. "원만하되 단박에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 화엄경에는 나온다." 그런데 일반 화엄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 화엄경을 풀이한 논문에 이런 주장이 나와요. 그 주장을 보조 스님은 적극적으로 취하신 거예요. 왜? 선교(禪敎)를 고급지게 회통시켜 보려고. 이런 회통이 아닌 회통은요, 이게 올바른 회통이 아니죠. 그래서 10신 초의 해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번 보시죠. “이 일승원돈문(一乘圓頓門...” 오직 한 길이라는 거예요. 부처로 가는 오직 한 길.
(31:35) 소승, 대승이 아니고 '일승' 그럴 때는요, 사실은 대승을 말해요. 자, 보세요. 소승에 대비해서 대승 하면 두 길이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따지고 보면 대승밖에 없는 거예요. 소승은 잘못된 길인 거예요. 그래서 일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직 부처가, 불보살 되자는 “이 일승의 원만한, 원만한 부처가 단박에 되자는 이 문을 가탁하는 자는 10신의 처음에···” 처음 믿어서, 그 처음 믿음은 뭔가 불순물이 많은 믿음이죠. 그냥 "나 부처님 믿기로 했어." 한 그 믿음이 제대로 딱 이해와 함께 자리 잡을 때의 그 믿음. 그때가 이제 올바른 정각이라는 거예요.
(32:15) “10신의 처음에 '근본지의 과보의 바다(根本智果海)'를 얻음이요,···” 말이 어렵습니다. 근본지는 이제 불지죠. 여러분, 여러분 이 뿌리가 되는 지혜, 우주의 뿌리가 되는 지혜, 이 부처의 지혜의 과보라는 게, 열매라는 건. 보세요. 열매라는 건 12지를 말하는 거예요. 불성에 갇혀진 지혜가 여기는 씨앗 상태인데 여기서는 열매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자, 씨앗 상태에서는 에고는 모르고 부처는 아는데, 에고는 못 따라가니까 그걸 전부로 알면 안 되고. 씨앗 상태라 하더라도 이미 사실은 부처. 불성 자리는 씨앗이나 열매나 똑같다는 거예요. 에고 차원에서만 달라지죠.
(32:58) 에고가 이해를 못했을 때는 씨앗 상태라고 하고, 에고가 그 불성이 갖고 있는 전지전능을 다 배웠을 때는 열매 상태라고 할 뿐이지, 사실 불성은 씨앗과 열매가 없지 않나요? 하느님 자리에는 씨앗과 열매가 없어요. 근데 하느님을 처음 믿을 때 내 마음 안에서 하느님은 씨앗 상태죠? 내가 하느님을 완전히, 완덕의 경지에 가서 하느님을 닮았을 때는 열매 상태의 하느님이 내 안에서 구현되죠. 근데 그건 에고 입장이에요. 부처 입장에서는 씨앗이니 열매니가 없습니다. 하나예요, 그냥. 그러니까 '근본지(根本智)의 과해(果海)'라는 게요.
(33:33) 사실은 열매의 바다란 말할 필요도 없이 근본지의 바다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열매라고 쓴 것은 우리가 12지 가서 증득할 그 불성, 이 말이에요. "우리가 공부를 완전히 완성했을 때 얻을 그 부처의 지혜를, 지혜의 바다를 처음 믿었을 때 이미 얻었다, 우리는." 보조 스님이 계속 이것을 강조하는 것 아시겠죠? 여러분 당당.. 여러분 이런 얘기 안 들으면요. 막 교학 너무 좋아요. 근데 여러분 선불교로 손님 뺏기지 않겠어요? "선불교 가면은 한 방에 부처 된대." 근데 이제 교학, "나는 교학. 그래도 이 경전대로 공부하고 싶어.", "그래? 여기까지 가는 데 3무량겁 걸리고 일단, 일단 1지까지 가는데 1무량겁이 걸리고..." 이러면 의욕 잃잖아요.
(34:25) 내가 어느 지점쯤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교학 하면) 나 부처 못 되는 거야?" 보조 스님이 여러분을 위해 "아니야. 처음 믿었을 때 이미 견성은 해.", "그럼 나머지는?", "그냥 부처. 이미 부처인 줄은 알고 부처로서의 어떤 품위를 배우는 데 이 시간을 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이미 부처된 뒤에, 돈오된, 돈오한 뒤에... 이미 여기서 돈오는 했잖아요. 여러분 이번 생에 누구나 돈오할 수 있는 거예요. 왜? 10신 초는 누구나, 처음 믿으면 10신 초인데, 그럼 믿으면 다 돈오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이미 부처인 거예요. 나머지 세월은요, 무량겁은요? 부처로서의, 조금씩 닦아가는, 연륜을 닦아가는 것뿐이에요. 자, 그러니까 보조 스님이 또 다른 여러 가지 비유 들잖아요.
(35:10)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미 돈오한 순간 사실 재벌의 상속자인 거죠. <별에서 온 상속자> 이런 드라마 있잖아요. 막 섞여 가지고 막 중국, 중국에도 그 드라마 만들어 가지고 중국인들도 창피하다고 했던, 별에서 온 상속자. 그래서, 근데 내가 상속자라는 걸 안 거예요. 돈오는요. 여러분이 부처란 걸 안 거예요. 내 안에 원만한 부처가 갖춰졌단 걸 안 거예요. 내가 상속자라는 걸 안 거예요. 그럼 그 나머지는요? 상속자 수업 받는 거죠. 기분이 다르지 않나요? 상속자고, 내가 재벌 2세예요. 재벌 2세로서 2세 교육을 받는 거랑, 저 끝에 가야 재벌 된다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그때까진 거지로 살아야 되는데. 자, 완전히 다른 스토리죠?
(36:03) 이게 선불교로 인해서, 교학에서 뭔가 이런 자극을 받아서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강조된 거예요. 원래 교학에 이런 내용이 없는 건 아닌데 강조된 거죠. 단박 부처가 된다는 주장이 중국을 휩쓰는데 교학 체계에서도 뭔가 내놔야 되죠, 입장을. "너네는 그냥 무량겁 가세요. 우리는 부처 될라니까." 이런 얘기를 계속 들으니까 "우리도 있는데! 단박에 부처인데? 나머지는 그냥 부처 되는 수업인 거고." 부처로서 이제 배우는 거죠. "부처로서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 뿐이다." 이게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론의 핵심입니다. 돈오 단박에 하고. 그러니까 돈오도, 증오의 돈오가 원래 진짜 돈오인데 해오부터 강조하는 게, 더 쉽게 접근하는 거죠. "누구나 바로 해오 합시다." 자, 왜 그런지 아세요? 왜 증오를 얘기를 많이 안 하고 해오에 더...
(37:00) 돈오의 핵심은 사실 증오예요. 1주 보살이 진짜 돈오죠. 그런데 왜 해오에 돈오.. 이것도 돈오는 맞죠. 왜 이걸 더 강조하느냐? 불교 이 이론에서 10신에서 닦아서 1주 되는 데까지 불교 이론상 만겁 걸린다고 돼 있어요. 여러분 벌써 또 의욕이 꺾이겠죠. "나 아무래도 이번 생에 처음 불교 믿은 것 같은데. 불안한데?" "만겁 뒤에 1주 보살 된다." 불교 이론이 만겁 걸린다고 나오니까, 요 얘기보다 보조 스님이 무슨 얘길 더 하고 싶겠어요? "처음 믿은 그 순간 이미 해오다. 돈오했으면 됐지!", "여기(증오)까지 가는 건, 돈오하면 여기까지 쉽게 가. 일단 돈오만 하면, 해오만 하면 증오도 보여." 해오가. 아니 뭐 정혜.. 여기서(해오에서) 정혜쌍수 기초가 이미 닦였는데 정혜쌍수 잘하면 증오인데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37:56)
그러니까 즉 정혜쌍수의 핵심 심법을 이미 얻는데, 해오에서. 해오에서 이미 참나 만나고 아공 · 법공의 근본 원리까지 직관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보조 스님의 아주 친절한, 이게 지금 설명이에요. 누구나 이번 생에 다 해오에 들 수 있으니 이것, 만겁은 문제 될 게 없다는 거예요. 사실은 만겁 얘기... 여기까지만 가면 알아서 증오도 다 될 거라고 본 거예요. "만겁 안 걸리고 이번 생에 다 증오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전에 그렇게 쓰여져 있으니까 경전에서 누가 또 가지고 이의 제기 할 수 있잖아요. "만겁 걸린다는데요?" 그러면 안 되니까 해오 얘기를 지금 계속 하시는 거예요. 왜? 해오는 10신 초에 바로 얻는다고 경전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으니까.
(38:43) 자, 그러니까 이 다음 말이 나오는 거예요. “만겁 동안 닦은 뒤에 10신의 마음에 가득 참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분명하다.” "만겁 뒤에 돈오가 오는 게 아니라 10신 초에 돈오가 바로 온다니까!" 이 얘기예요. 이해되시겠죠? 여기서 만겁이라는 건, 1급 되는 데까지 만겁 걸린다는 불교 이론을 전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 부처, 원만한 부처를 증득하는 데, "만겁 걸린 뒤에 얻는 게 아니라 바로 얻을 수 있다니까? 화엄경에 근거해서 볼 때도." 근데 그 화엄경은 통현 장자의 화엄경론을 말하는 거고요. “다만, 초심(初心)의 범부(凡夫)가 인연을 만나 바야흐로 자심의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를 깨달음이요,···”
(39:29) 그러니까 지금 이 10신 초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진짜 초심자가, 이제 막 불교에 귀의한,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한 중생 범부가 인연을 만나 참선도 배우고 이렇게 명상하는 법도 배우고 지혜 공부도 배우다 보니 바야흐로 내 마음에 근본 뿌리가 되는, 근본이 되는 보광명지, 두루 광명하게 비추는 그 참나 자리를 깨달음이요, “점수의 공(功)이 지극해진 연후에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니까 점수의 공이 지극해지려면요. 해오 뒤에... 자,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 이론은요, 해오 뒤에 점수(漸修) 해서 증오를 얻고, 증오 뒤에 또 점수 해 가는 이론입니다.
(40:14) 그러니까 돈오점수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해오를 돈오로 보면 이 돈오 이후 점수 해서 증오를 얻는 거고, 증오를 돈오로 보면 1주 보살의 돈오 이후 점수를 해서 1지부터 또 10지를 닦아가는 거구요. 그러니까 지금, 지금 얘기하는 점수는 여기겠죠? "해오 이후 점수가 꽉차서 만겁 걸려서 얻는 증오가 아니고 내가 말하는 것은, 지금 경전에서도 말하는 그, 처음의 돈오라는 것은 해오를 말한다." “점수의 공이 지극해진 연후···” 진짜 점수의 공이 지극해지려면은 이제 12지 불지까지 가야겠죠. 근데 그건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겁 뒤에 얻는 그 1주의 증오처가 아니다." 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누구나 바로 해오할 수 있다."
(40:58) “그러므로 원리(理)와 지혜(智)가 비록 나타나나, 많은 생의 습기(濕氣)가···” 자, 그래서. 그러니까 처음 범부가, 여러분 막 명상 배우고 경전 좀 읽다가 딱 돈오를, 해오를 한 거니까 원리와 지혜는 나타나요. 아공 · 법공의 원리와, 아공 · 법공의 원리를 깨치는 그 지혜. 원리는 그, 내 마음에서 깨치는 건 지혜고, 지혜의 내용물이 원리죠. 그러니까 원리를 지혜로 깨닫는 그 경지를 얻겠지만 “많은 생의 습기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습기가 많아서 생각마다 침노해서 흔들어요. 그 깨달은 걸 또 흔들어요. 지혜를 자꾸 흔들어요. 그래서, 작위가 있어서 이제 막 노력을 해야 돼요.
(41:45) “형색(色)과 마음(心)이 다하지 못함이니, ...” 그러니까 지금 참나에 계속 안주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지혜와 내가 깨달은 이치가 자꾸 흔들려요. “그러니까 10신의 범부의 해오처(解悟處)라고 하는 것이다.” 이해는 했는데 아직 자기 것으로 못 만든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해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해되시죠? 지금 설명 다 됐죠? 자, 그럼 이거 뒤에까지 읽고 나면 "좀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라고 해도, "근데 너는 12지 부처를 깨달았다니까? 이미 넌, 너의 마음 안에는 12지 부처가 이제 들어섰다니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보조 스님이. 이 얘기가 해 주고 싶은 말은...
(42:30) 선불교에서 화두 잡고 가다가 딱 처음 깨쳤을 때 "참나 만났네!" 하는, "나 부처 됐네!"라고 우기는 게 대부분 이 상태라는 거예요. 해오처. 그래서 선불교 하는 분들이 보조 스님 얘길 들으면 경허 스님처럼 아주 존숭하는 분도 있는 반면, 경허 스님 계열처럼. 또 성철 스님처럼 아주 혐오하는 분도 나오는 거예요. "이거, 이거, 이거 우리 선불교에 위협이다.", "이 얘기는 완전히 우리 선불교를 딱 데려다가 저기 교학의 밑에다가 그냥 처박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게, 자꾸 싸움으로 이해하시면 안 돼요. 그래서 보조 스님이 경전하고 이 선은 하나로 봐야, 원래 하나라는 거예요.
(43:14) 하나니까, 회통하려다 보니까 이렇게 나온 얘기랑. 선하고 교학을 싸움 관계로 알고 "우리 선이 끝내 줘!"라는 얘길 하려고 지금 이렇게 막... 교학의 이론에 맞지도 않는 얘기를 막 주장하시면 안 되는 거죠.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죠? 왜 그런지 아세요? 간단하게 얘기해 드릴게요. 성철 스님이 화두 터져서 마지막 가면 12지라고 우기시는데, 그 12지의 내용을 성철 스님이 얘기하는 걸 다 들어보면 정혜쌍운밖에 안 나와요. 이것도 안 나옵니다. 반야 · 방편쌍운도 아니에요. "6바라밀은 하근기나 하는 거다" 하는 게 성철 스님 주장이고, "정혜쌍운. 항상 광명하고 항상 알아차리면 부처다."라고 주장하세요. 그게 1주 보살이라니까요?
(43:58) 그리고 그 1주도 그 자리 들어앉아 1주인 거고, 노력 없이. 노력을 해서 유지해야 되면 해오 상태예요. 화두 터져서 깨쳤는데 그 상태를 노력으로 유지해야 되면 해오예요. 습기가 침노하니까 노력으로 유지하면 해오고. 노력을 안 해도 한번 깨치고 난 뒤에 노력 안 해도 늘 그 자리면 해오, 아니 정혜쌍운 1주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이렇게 구분하시면 돼요. 아직 1지는 구경도 못 한 거예요. 왜? 6바라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이게 교학 체계. 이 교학 체계가 싫다는 것은 사실 들어가면 6바라밀에 대한 거부입니다. "우리가 6바라밀 수행해 가지고 1지부터 10지를 언제 어느 세월에 무량겁 걸려서 밟느냐?" 빨리 부처 되고 싶다는 욕망이 눈을 가리는 거예요. "빨리 부처되고 싶다!"
(44:43) 그런 길은 없습니다. 근데 보조 스님이 얼마나 자상해요. 길을 열어 주잖아요. "그것도 부처야." 하고 얘기해 주는 거예요. "그것도 부처야." 그래서 육조 스님의 영향도 받아요, 보조 스님이. 선불교의 뿌리인 육조 스님. "육조 스님이 우리가 단박에 무념이 되면 바로 부처라고, 견성하면 바로 성불이라고 얘기하셨던 것은 이걸 얘기한 거다."라고 보조 스님이 해명해 주는 거예요. 해오 때, 이때 견성했을 때 우리가 바로 부처 된다는 얘기는, 원래 부처는 원만하니까, 원래 부처는 원만하니까 우리가 처음 믿은 그 순간 만난 부처라 할지라도 그 12지 부처랑 똑같은 부처라는 거예요.
(45:26) 그 부처를 우리는 만났죠. 그러면 우리 에고가 수용을 다 못 해서 그렇지 내 안에 원만한 부처가 살아 숨 쉬는 건 똑같다는 거예요. "해오한 사람이나 12지나 똑같다." 이런 설명이, 설명을 정말 잘해 주신 거예요. 해오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했으면 뭐 여러분 논문도 쓰시겠네요. 그렇죠? 지금 더 아실 건 없어요. 해오가 이거다 하는 건 더 설명드릴 게 없는데. 뒤에 또 설명이 나와요. 그 해오에 대해서. 그래서 해오나 증오에 대해서 뒤에 또 설명을 드리기로 하고요. (강의 자료 보면서) 이게 제가 뒤에 잡아놨는데 한번 미리 읽어 볼까요? 8페이지 한번 가 보실래요?
(46:16) 통현 장자의 <신화엄론(新華嚴論)> 거기서 뭐라고 했길래 보조 스님이 이렇게 탄력 받아서 얘기하시는지 한번 보실래요? 이통현의 신화엄론. 이 분이 참 대단한 분이죠. 이분은 스님도 아니죠. 이통현 장자라고 하는, 이분은 거사인데 화엄경을 평생, 거의 선적인 정신으로 화엄경을 풀이해 놓으신 거예요. 대단한 분입니다. 자, 이분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실래요? 미리 살짝 맛보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읽어 드릴게요. “10주 초에···” 1주 보살이라는 거예요. “1주 보살에 곧장 견성하여···” 원래 1주에 견성하는 게 정식 견성입니다. 해오는 아직 내 것은 안 된 거니까, 습기 때문에. “1주에 견성하여 법신의 지혜를 일으키면 곧 정각(正覺)을 이룬다.”
(47:04)
진정한 초발심은 사실 1주예요. 그전의 믿음이라는 건 아직 약한 초발심이에요. 그런데 제대로 초발심이 1주라고 하는 것은 1주 보살, 1주의 경지, 1주의 이름이 뭐죠? 1주. 10주 중에 1주의 이름이 발심주(發心住)입니다. 그러니까 초발심에 정각한다는 게 딱 제일 원만한 설명이에요. 1주 보살 때 바로 정각한다. “1주에···” 10주 초심은 1주예요. “1주 보살(=十住初心)에 여래불과지법문(如來佛果地法門)을 바르게 증득한다.” 여래의, 부처의 그 열매의 경지. 12지 경지를 말하는 거예요. 12지 경지의 법문을, 진리의 문을 바로 증득한다. “1주에 그 지위가 불과(佛果)랑 동등하다.” 1주 보살이면 이미 12지다. 자, 이 얘기를 이분도 왜 하겠어요? 선불교를 겨냥한 거죠.
(47:50) "너네 그 자꾸 견성하고 부처됐다고 우기는 게, 원래 1주면 부처랑 맞먹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교학적 설명을 해 줘 버리는 거예요. 교학에서, 화엄경 체계 안에서 선불교도 지금 설명해 버린 거예요. 선불교는 싫겠지만. "우리는 교외별전이라니까! 아니라니까!" 자꾸 우기시겠지만 교학 입장에서도 선불교가 보이는 거죠. 그런데, 그러면 누가 저한테 그러겠죠. "교학 입장에서 선을 본 것은 왜 인정해 주고, 선 입장에서 교학을 본 것, 아까 몽중일여면 7지고... 그건 왜 그러냐?"
(48:30) 말도 안 되니까요. 전혀 교학... 교학이 아니라 교학의 레벨만 갖다 설명하고 있지, 교학적 설명이 하나도 안 되니까 그건 거부하는 겁니다. 왜? 교학의 1지부터 10지 체계는 6바라밀의 연성 정도거든요. 그 설명이 하나도 없고 화두 하나로 1지부터 10지부터 설명하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건 애초에 잘못된 설명입니다. 참고하실 필요가 없어요. 근데 지금 이 통현 장자는 분명히 화엄경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선불교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이분이 훨씬 설명을 잘하고 계신 거예요. 1주. “1주에 이미 불과랑 동등하다.” 1주가 되면 일과 일이...
(49:20) 왜 그러냐? “일과 일이 서로 융합하며 통하고, 거듭 거듭 다함이 없으니···” 이 말이 뭔지 아세요? 어려운 말입니다. 이게요, 1지 안에 10지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1주 안에 10주가 다 들어 있고. 1지 안에 10지가 다 들어 있듯이 또 1주 안에 52단계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한 레벨 안에. 이런 얘기예요. 일과 일이 서로 통한... 그러니까 화엄경의 이론이죠. "하나 안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 즉 1주 보살 안에도 이미 사실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10지 체계가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 지위마다 부처랑 다 통한다.” 사실 2지 보살도 부처고, 3지 보살도 부처고, 1주 보살도 부처란 거예요. 왜? 그 각, 그게 그 뭐죠.
(50:05) 그,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하나에 우주가 다 비치는 것처럼 각 레벨레벨마다 부처의 모습을 닮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랑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1주 보살들도 이미 부처랑 동등하다. 왜? 레벨레벨이 다 부처의 경지이기 때문에. “이를 깨달으면···” 이런 이치를 제대로 깨치는 게 1주 보살이에요. 1주 보살 돼서 딱 보면 "아, 내가 부처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더 닦아 가야 되지만 "난 이미 부처구나." 이런 이상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 말을 말하는 겁니다. 그... 1지, 2지 그 각각의 일들이 서로 통해 있다는 거예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다함이 없다. 그러니까 한 레벨, 한 레벨에 우주의 모든 레벨이 들어있단 얘기예요.
(50:51) 그러니까 “이걸 깨달으면 1주가 불과라는 걸 이해할 수 있고, 바야흐로 '원만한 원인(圓因)'이 된다.” 아직 과보를 맺지, 열매를 맺지 않았지만, 씨앗이지만 이미 원만하다는 거예요. 씨앗 상태이지만 이미 원만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각각의 물방울 속에 모두 바다가 있으며···” 지금 이 얘기하는 거예요. 물방을 하나하나에 모든 바다가 이미 투영되어 있죠. “각각의 레벨(지위) 안에 모든 불과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레벨이라는 건 1지부터 10지를 대표해서 52레벨 다 얘기할 수도 있구요. 자, 여기까지만 볼게요. 나중에 다시 제가 설명 제대로 드릴게요. 다시 설명, 1주 보살 설명할 때...
(51:30) 일단 이통현 장자의 논리 스타일이 어떤지 아시겠죠? 이통현 장자가 말.. 화엄경을 풀어 가는 스타일이. "1주 보살에 이미 견성했다. 그런데 10신 초에 이미 또 부처를 봤다. 처음 믿는 그 순간 이미 또 부처를 증득한 것이다." 이런 논리를 해 나갈 수 있는 근거는, 물방울 하나에 바다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52레벨 한 레벨 한 레벨에 이미. 10신 초라 그러면 처음 믿었을 때요. 1부터... 보세요. 10신 초라고 하면 뭐겠어요? 10신에서도 1신부터 10신까지, 1지부터 10지까지 있듯이 또 구별이 있겠죠. 그때 중의 처음이라는 얘기예요.
(52:09) 진짜로 처음 믿었을 때. 진짜로 처음 믿었을 때, 바로 믿어서는 아니겠지만 처음 믿고 좀, 수행 좀, 공부 좀 했을 때. 절에 처음 다니고 이제 공부도 좀 했을 때 이미 해오. 부처, 내가 부처라는 것 견성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금 이번 생에 다 가능하다는 거예요. "누구나 해오만 해 놓으면 이미 자기가 부처인 줄 아니 남은 생을 무량겁 닦아 간들 이미 부처로서 닦아 가는 거니까 그것은 이미 부처 아니냐?" 이게, 선불교에서 견성했다고 하는 게 이것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실제로는. 거기서 화두 깨쳐 봤자 해오 아니면 증오인 거예요. 증오면 더 낫고, 해오면 뭐...
(52:55) 그래서 그 선불교에서도 그 깨치고 보림(保任) 공부 한다는 게 점수죠. 해오하고 보림 해서 증오 얻는다는 거예요. 보림 공부부터 한다는 게. 자, 경허 스님도 화두를 잡다가 탁 터졌습니다. 처음엔 해오죠. 탁 터졌을 때 해오죠. 거기서 곧장 증오 단계로, 안주하는 단계로 가셨는지 어쨌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그분은 천장암인가요? 가셔서 1년 간 보림 공부를 합니다. 점수를 더 다져서, 증오를 튼튼하게 해서 나오셨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죠. 그분이 1년 간 딱 그 참나 자리를 잘 지켜요. 안 잃어버리게 잘 지키고, 그 참나의 관점으로 자기가 그동안 닦았던 경전을 다 다시 점검합니다. 참나의 눈으로 지혜를, 그러니까 정견 정사유를 전개해서 원만하게.
(53:44) 행은 하신 게 없고. 그냥 그 절에서 앉아 계셨으니까, 1년 간. 그래서 개념을 다 정립하고 지혜를, 정혜쌍수를 마스터하고 움직이십니다. 그 다음에 행을 닦으러 나가세요. 바라밀 닦으러 나가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경허 스님의 사례만 봐도 우리가 전형적으로 이... 그래서 경허스님이 원래 공부할 때는 보조 스님을 같이 비난했어요. "돈오하면 바로 부처지, 무슨 돈오 이후 점수가 왜 필요해?" 경허 스님 입장도 같았어요. 그런데 자기가 깨치고 보니까, 1년 간 벌써 점수로 보림하셨죠? 그러고 가서, 송광사 가서 한 달 간 참회 기도 하셨대요, 보조 스님 영전에다. "죄송했습니다. 몰라뵈었습니다." 하고. 이분이 그래도 크게 가신 분인 거예요. 이해하시겠죠?
(54:32) 이런 그 고승들이 걸어온 행적이 그대로 있고 지금 교과서가 다 전해 오는데, 지금 이렇게 소상히 해 놨는데 답답하죠? 그러면 화두는 차치하고 해오라도 지금 우리나라에 넘쳐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해오라도 되고 이걸 무시하면 제가 이해하겠는데요. 로또식으로 견성 바라고 앉아 가지고 해오 구경도 못 하시면서 "아, 우리는 해오 안 한다!" 무시하는, 이런 거는 참 안타까운 상황인 거죠. 해오라도 일단 챙기세요. 제가 다른 말씀 안 드릴게요. 해오라도 챙기시고 나면 알아요. 자기가 부처인 줄도 알고 아공 · 법공의 핵심 알아요. 늘 그 상태가 아닌 거지, 알아요. 그러면 일단 문제가 해결돼요.
(55:20) 그래서 홍익학당 법이요. "뭐 8급도 어렵네." 하세요, 오시면. 학사가 8급인데, 학사도 어렵죠. 왜 어려울까요? 원래 거기서 부처인 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 어려운 거예요. 쉬운 게 아닌 거예요. 저희가 그 법 그대로 지도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다른 데 가면 9급, 8급 우습죠. 근데 학당에서는 8급이면 아공 · 법공을 깨쳐야 돼요. 왜 그런지 아시겠어요, 이론이? 8급에 이미 알아야 돼요. 자기가 그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없을 뿐이지, 알아야 돼요. 근데 여러분이 진짜로 그렇게 아시나요?
(55:56) 진짜로 내가 부처고, 아공 · 법공에 대해 확신에 차서 "이거야!"라고 말하실 수 있나요? 그 정도 하셔야 학사가 됩니다, 학당에서는. 8급, 7급 인정해 드려요. 이해되시... 이해되겠죠? 왜 그런지. 거기가 해오처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러니까 여러분 계산 잘 하세요. "일단 해오라도 확보하자, 이번 생에. 그럼 남는 장사다." 그렇죠? 보조 스님이 그 얘길 하신 거예요. "해오만 확보하면 선불교 부럽지 않다." 아시겠죠?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