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4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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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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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6. 23. 土.
게시일자 2020. 09. 15.
동영상 길이 57:52
강의 중 인용 도서 대승기신론, 심통성정도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i_CI4xh5ai0



0:12 심통성정도를 한 번 읽어 볼게요. 우리가 그동안 공부한 게요 이거 읽을 정도 돼요. 자신 있으시죠. 살아남는 사람만 데리고 가면 안 되겠죠. 자 달려보겠습니다. 이 중에 상도는요 중국의 원나라 때 정복심이라는 철학자께서 그리신 거예요. 원나라 때 유명하신 선비들이 많아요. 그 선비 분이 그리신 거를 상도로. 지금 이게 상도입니다. 유튜브에는 아마 자료 화면 좀 올려 주실 거예요. 상도가 여기까지예요 상도 중도 하도.

1:00 선을 좀 그어서 보시면 편해요. 먼저 상도부터 한 번 설명해 볼게요. 예전 어른들도 마음을 이렇게 그렸는데 마음이 통괄 통(統)자 썼습니다. 통, 성과 정을 통괄한다. 이게 마음인데 마음은 성과 정을 통괄해서 마음 이래 놓은 거다 이것입니다. 아까 우리 얘기한 것 기억나세요? 한마음 기억나세요? 이렇게 해서 그려볼게요. 한 마음은 어떻게 돼있다 그랬죠? 한 마음은 이게 본체, 이게 작용. 이게 일심. 본체 안에는 진리의 형상(⊛). 이게 체상용이라고 하는 대승기신론의 큰 뼈대입니다.

2:00 본체 안에 형상이 있고, 이 형상이라는 것은 결국은 이게 법이에요, 법. 진리. 진리의 형상이거든요. 그래서 자 텅 빈 공성 같은데 그 안에 육바라밀의 진리의 형상이 들어있어요. 진리의 정보가 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진리의 몸, 법신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법신인데 법이 없으면 엉터리죠. 법신이라는 건 진리의 몸입니다. 왜 진리의 몸이냐? 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만법이 다 들어 있어요. 우주의 만법이 들어 있는데 동양에서요 천지만물의 모든 진리는 음양오행으로 꿰뚫어지죠. 똑같이 불교에서도 만법은 육바라밀로 꿰뚫어집니다. 재밌죠. 동양에서 음양(2) 오행(5)으로 꿰뚫어졌다고 할 때 불교는 삼학(3) 육바라밀(6)로 꿰뚫어졌다 그럽니다. 같아요. 음양이 있으면 또 종합이 있고. 아까 오행도 토가 음양이 있으면 또 6이 되니까 같니다만 살짝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게 더 재미있는 거예요. 살짝 다른데 통할 때 훨씬 또 진리를 입체적으로

3:09 만들어줍니다. 여기다 기독교 또 보태면 더 재밌어요. 기독교는요 여기까지 가면 또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만 잠깐 갔다 올게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할 때 이게(본) 이 자리가 성부입니다. 성부 안에 진리(상)가 있어요. 성부 안에 진리, 그리고 성부의 작용(용)이 있어요. 삼위일체 이론에서 성부의 작용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부 안에 있는 이 진리를 성자라 그래요. 후대 가톨릭에서 정립된 삼위일체 이론이 이렇습니다(체․상․용=성부․성자․성령). 똑같아요. 원래 예수님은 이렇게 안 봤어요.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진리의 말씀, 그리고 이 하느님이 성령이라는 게 내 안에 내려와 있으면 진리의 작용이니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성령 안에 진리의 작용이 다 들어 있어요. 진리의 말씀이 들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현상계가 작용이라는 게 아니라 작용이라는 건 현상계에 작용

4:06 하시는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본체 하느님과 현상계를 경영하시는 그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의 본체 안에 있는 진리의 말씀 로고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요한복음이 이렇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이 로고스대로 천지 만물이 만들어졌다. 이 천지 만물을 만든 로고스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 이렇게 해버리니까 사도들은 성자 예수님을 로고스 차원에서 보는 겁니다. 그럼 이게 생소하신 거 같죠. 사실은 똑같아요. 지금 작용으로 나타난 그 성자는 불교에서 보신, 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럼 보신, 화신이 아닌 법신은 뭐죠? 진리 그 자체인 부처님이에요. 그 관념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적으로 왔다 가신 보신과 화신으로 나타나신, 카르마를 가지고 우리 눈앞에

5:09 나타나신 예수님보다 그 예수님 안에 있던 진리에 주목한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법신은 어떻게 되죠? 예수님의 법신은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죠.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구조가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사실은 원래 불교적인 거예요. 하나로 통해요. 부처님 가셨을 때부터 부처님한테 법신이란 말을 가시기 전부터 썼고요. 부처님 보면서도 사람들이 진리라고 봤어요. 부처님이 지금 말을 하고 있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진리가 저렇게 말씀하고 계시다라고 봤어요. 그 시각이 있었어요. 예수님한테 그게 강화된 것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성부 안에 있는 진리로 보려는 사도들의 관점이 형성된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 임했을 때 성령. 하느님은 본체. 그런데 하느님 안에 이미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셨다고 보는 거예요.

6:09 요런 관점을 이해해 주시라고요. 기독교적인 관점입니다. 예수님을 진리로 보는 관점. 또 지금 이런 체상용을 정확히 이해하시면 큰 그림 차원에서도 이해가 되실 거예요. 유교도 똑같습니다. 유교도 보세요. 마음 안에 본성과 감정이 다 있다는 건요. 본성은 마음의 본체예요. 감정은 마음의 작용이에요. 자 이걸 유교식으로 그려 놓으면 여기 지금 이 자리에다가 본체는 똑같고. 오행의 형상(⊕)을 그려 놓으면 여기가 본체고, 본체 안에 오행의 형상이 있죠. 이게 지금 본성이고 이게 한자로 본성이니까 성. 마음 안에 살아 있는 어떤

7:02 근본원리 이런 뜻입니다. 한문으로 원리(리). 이게 성리학이에요. 본성이 원리다. 우리 본성, 우리 마음의 본체 안에는 형이상학적으로 변치 않은 불변의 어떤 원리가 새겨져 있다. 아까 우리가 불변의 근본원리 알아 알아내는 공부 했잖아요. 직관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근본원리가 있다. 그게 본성이다. 그러면 감정은요? 보세요. 감정은 작용입니다. 이 감정은 우리 희로애락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생각이나 감정이나 마음이 작동한 건 다 지금 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생각 감정 오감이요 사실은 지금 큰 그림에서는 정이에요 성리학에서는 정. 왜냐하면 마음(忄)이 파랗게(靑) 색깔을 가지고 드러난 걸 말해요. 성은 마음(忄) 안에 살아 있는(生) 어떤 근본원리를 말하는 거고, 이거(情)는 마음(忄)이 형이하의 세계에서 현상(靑)으로 드러난 거예요. 꽃피운 거예요. 대표적으로 지금

8:04 감정이라고 부르는데, 생각 감정 오감의 요소가 다 있습니다. 작동한 걸 말해요. 마음이 한 번 굴러간 거예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육근이 작동한 것을 지금 유교에서는 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음은 형이상학적으로 시공이 없는 본체의 영역(성)과 시공이 있는 감정의 영역(정)을 통괄(통)한다. 전체가 마음이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이해하셔도 지금 네 글자 봤어요. 심통성정 네 글자. “오! 좀 하는데” 이렇게 아셔야 돼요. 내가 좀 하는데 이게 보이다니. 내가 좀 하는데 하셔도 되고. “오! 선비들이 좀 하는데”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심통성정. 이게 지금 할 말 다 나온 거예요. 퇴계 선생님은 이걸 더 풀어 주는 것뿐이에요. 심통성정. 마음 안에 본체와 작용이 다 있고 본체 안에는 형상, 본성,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게 근본원리로서 존재하는데. 자

9:05 이때(성)도 원리잖아요. 아까 유교는 안팎이 다 하나라고 봤죠. 이 원리가 그대로 작동하면 보편법칙 아닙니까. 유교에서는 보편법칙과 근본원리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놀라운 거예요. 이것(보편법칙)도 원리예요. 원리인데 자 유교에서는 요거(근본원리)는 주자가 이렇게 썼습니다. 구분을 했는데 소이연. 시공을 초월한 근본적인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대해서는요 만물의 소이, 까닭이 되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 해서 소이연. 보편법칙에 대해서는 형이하의 세계가 반드시 따라야 되는 법칙이기 때문에 형이하학적으로 표현되는 법칙이에요. 이거(보편법칙)는 소 마땅 당자 써서 소당연. 소당연지리 이럽니다. 이거(근본원리)는 소이연지리.

10:06 그래서 여기(근본원리)에 대해서는 불가역. 절대로 고칠 수 없다. 시공을 초월해서 이미 완결된 정보예요. 이건 고칠 수가 없어요. 요거(보편법칙)는 시공 안에서 끝없이 표현되는 법칙이에요. 불, 용납하지 않는다 용, 그칠 이자, 불용이.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걸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다. 형이하학적인 보편법칙. 사랑해라. 정의로워라 그건 절대로 바뀔 수 없다. 사람의 원리, 동물의 원리 절대로 바뀔 수 없다. 바뀌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원리(근본원리)와 요놈이 밖으로 표현된 시공 안에서 나타난 원리, 소당연(보편법칙). 우리 안에 인의예지가 들어있죠. 소이연. 못 바꿉니다. 참나 안에 있는 정보를 여러분이 어떻게 바꿔요. 내가 텅 빈 양심을 갖고 있어요. 마음의 본체를 갖고 있으니까 작용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소이연의 원리를 따라야 됩니다.

11:03 그러면 마음에서 현상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현상계에서 소이연이 소당연으로 표현돼요. 자 사랑하라. 우리가 인(仁)해라 라는 원리를 갖고 있으니까 보편법칙에서 어떻게 되죠? 부모님이 나이 드셨을 때는 이렇게 대하고, 일어났을 때 부모님을 어떻게 대하고, 형제한텐 어떻게 사랑하고, 와이프는 어떻게 사랑하고, 자식은 어떻게 사랑하고, 인류는 어떻게 사랑하고. 수많은 보편법칙이 나옵니다. 아시겠어요? 보편법칙은 현상계 안에서 무궁해요.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르게 해야 돼요. 이럴 때는 이게 사랑이고 저럴 땐 저게 사랑이고. 이럴 땐 들어주는 게 사랑이고 저럴 때는 매정하게 거부하는 게 사랑이고. 사랑 하나 가지고요 우리는 지금도 다 못 경험했어요. 앞으로 인류는 또 무한한 세월을 경험해야 돼요. 그래도 다라는 게 없습니다. 조금씩 조건이 달라지면서 그때는 이렇게 이때는 이렇게. 재미있죠. 이건(근본원리) 시공을 초월해 있고 이건(보편법칙) 시공 안에서

12:01 그치지 않고 우리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이런 법칙 저런 법칙 다양한 법칙을 상황이 바뀔 때마다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돼요. 여러분이 이 법칙을 많이 알아야 현상계적으로, 자 구조적으로는 이 원리가 있어서 우리가 현상계 안에서 무궁한 변화 속에서 다양한 법칙을 가지고 사랑을 구현해 내야 돼요. 그쵸. 이럴 때는 이런 게 옳다. 이럴 땐 이런 게 옳다. 이렇게 다양한 법칙을 가지고 구현해야 돼요. 하지만 현상계적으로 공부할 때는 소당연부터 시작해서 보편법칙을 연구하다가 근본원리를 직관하게 되는 겁니다. 구조적인 부분하고 현상계적인 부분이 이렇게 달라요. 우리가 접근해야 될 때는 이쪽(정)이 더 우선순위가 높아요. 이쪽(성)이 더 나중이에요. 아시겠죠? 공부할 때 여기(정)서 시작해야 돼요. 그래서 공자님이 어떻게 논어에서 얘기했냐 하면 하학이상달 하는 게 공부다. 나는 그렇게 공부했다.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도달했다.

13:01 보편법칙부터 연구해 가지고, 이건 학문화 가능하니까 학문화된 양심학을 내가 연구해 가지고, 경전을 연구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됐다 이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다가 하느님과 하나가 됐다. 하학이상달이에요. 일단은 배워야 돼요. 보편법칙을 많이 배우다가 보편법칙을 하나하나 아까 제가 얘기한 것처럼 체험적으로 연구하고 자명하게 연구하다가 내면에서 이미 성령이 임해 버려요. 드러나 버려요. 그럼 이제 내 안에서 나오는 성령의 소리를 듣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논어에 나온 하학이상달법이에요. 보편법칙이 변한다는 게 아니고요. 우주에는 무한한 보편법칙이 있어요. 그러니까 상황 상황에 맞는 보편법칙을 끝없이 적용해내야 되는 거예요. 그 상황 되면 그거 적용하는 거죠. 또 상황이 바뀌었으면 다른 보편법칙을 적용해야 되고. 계속 바꿔야 돼요. 하나만 고집한다. 답이 안 나와요. 그래서 바리새파들, 율법주의자가 답이 안 나오는 이유가 뭐냐면요?

14:01 경전은 사실은 모든 상황에 대한 율법을 얘기해 줄 수가 없어요. 결국 율법을 자유자재로 적용하려면 성령과 통하지 않고는 안 돼요.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어학을 하건 뭘 하건 우리가 어떤 공식처럼 외운 것만 가지고 그냥 적용했다가는 방편력이 없는 거예요. 방편은 형편에 따른 처방인데 상대방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관된 처방만 하다 보면 그거 큰일 납니다. 이런 얘기 나가도 되나 모르겠네. 군대 가면 다른 증상으로 가는데 다 같은 약 받아 와요. 나눠 먹으면 돼요. 뭐가 아파요. 뭐가 아파요. 이거 몇 개 안 되게 처방이 있어요. 그런 뜻이죠. 그런 것처럼 방편력이 떨어지는 거죠. 저는 주사를 못 맞는 뭐예요. 아니면 저는 뭐예요. 만약에 환자마다 다양한 형편이 있다면 맞춰서 조금씩 가감을 해야 되잖아요. 그게 방편이라고 하는 거예요. 형편에 따른 처방. 보살도는 방편력이 중요합니다. 짱이에요.

15:07 사람을 구제하려면 제자들의 근기 따라 처지 따라 다양하게 가르침을 줘야 돼요. 그쵸. 그게 결국은 사실은 보편법칙에 능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보편법칙만 연구하면 안 되고 보편법칙에 능하다가 근본원리 통해 버려요. 그러고 나면 이제 자유자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소이연, 소당연)가 다 원만해질 때 방편력이 극대화 돼요. 그거는 제가 화엄경 강의 때 많이 말씀드린 것 같구요. 여기서 어떻게 거기까지 가버렸죠? 심통성정. 지금 제 4글자 했습니다. 놀라셨죠? 재밌는 게 정복심이라는 선비께서 어떻게 설명했냐? 주역에 나온 용어예요. 적연부동이 본성이요. 본성은 적연부동. 고요하여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세계다.

16:04 형이상학적 세계를 말합니다. 고요해서 어떤 움직임도 없는 세계. 원래 주역에서 저 말은 그런 건 아니었어요.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건데 여기서 적연부동의 의미는 그런 어떤 마음 상태보다는 마음의 본체적인 면을 상징하는 용어로 씁니다. 원래 주역에서는 이게 명상하라는 의미라고요. 점칠 때 명상하란 얘기인데 이게 현재 여기서는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는 말로써 형이상의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설명한 겁니다. 요 세계가 본성이고, 감이수통. 어떤 감정이 일어나 가지고 통한 상태, 밖으로 뭔가 작동이 일어난 상태를 감정이라고 한다. 성과 정을 분명히 구분해줬습니다. 이게 한 마음의 두 모습이죠. 적연부동한 본체, 시공 없는 세계, 고요한 세계와 늘 느껴서 작동하고 있는 세계, 감정을 느끼고 일으키고 있는 세계, 감정의 세계. 두 가지 세계를 구분하자.

17:03 본성과 감정. 자 그러면서 요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지금 본성의 세계죠. 소이연지리가, 적연부동이 본성의 세계예요. 그리고 지금 보편법칙이 작동하는 세계가 감이수통의 세계예요. 여기가 감정의 세계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본성 차원과 감정 차원에서 좀 구분해 주는데요. 놀라운 얘기를 해요. 마음은 성과 정을 통합해서. 저 같으면 이렇게 안 그렸습니다. 어떻게 그렸게요? 도너츠죠. 도너츠. 이 도너츠가 맛이죠. 성 정 심 이러면 끝이죠. 마음(심)은 성정을 통합한다. 그래서 본성은 이렇고 감정은 이렇다. 이렇게 도해로 책을 냈을 텐데. 그래서 본성 차원에서는

18:03 품목지수 품화지수 품금지수 품수지수 품토지수 뭔 소리입니까? 빼어날 수(秀)자잖아요. 오행의 기운 중에 빼어난 기운을 품고 있다. 그 얘기는 뭡니까? 본성 차원도 감정 차원도 사실은 우리 마음(심)이듯이 사실은 기예요. 전체가 에너지입니다. 전체가 에너지란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일체가 에너지인데 특히 본성 차원의, 이 적연부동의 상태의 마음, 시공을 초월한 이 마음 상태를요 유교에서는 허령지각이라고 합니다. 지금 정복심 선생은 허령지각이란 말을 안 썼는데 대신에 기라는 표현을 쓴 거예요. 기품. 그 본성 상태가 이미 오행의 기를 갖추고 있대요. 이건 원기 상태예요. 이때 이 허령지각의 에너지는 진원지기라고 하는 원기 상태입니다. 사실은 시공을 초월한 에너지예요. 시공을 초월한 에너지인데

19:05 텅 비어서 신령한데 알아차리고 있다. 이게(허령지각) 불교의 참나죠. 유교에서는 이걸 허령지각을 양심이라고 봅니다. 허령지각은 이미 에너지예요. 그래서 이 허령지각의 에너지 안에, 여기에는 이미 오행의 기운 중에 빼어날 수자 썼습니다, 빼어난 기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기가 있어야 리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성 상태 적연부동에서 고요한데 그 텅 빈 본성 안에 뭐가 들어 있겠어요? 오행의 에너지가 있으니까 거기에 오행의 원리로 임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기를 갖고 있으니까 구. 여기 구공이죠. 구. 자 보세요. 지금 유교에서 구자를 썼습니다. 구. 갖출 구(具)자. 구. 뭘 갖추고 있다고요. 사랑의 원리를 갖추고 있으니 그것 인(仁)이다.

20:02 애지리라고 했죠. 구애지리. 사랑의 원리를 갖추고 있대요. 그게 인이다. 또 뭐라고 했죠? 구경지리. 남을 공경하는 원리를 갖고 있으니 그게 예절이다. 이게 마땅히 의(宜)자, 의입니다. 마땅히 문제를 마땅하게 해결한다.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마땅함의 원리를 갖고 있으니 그게 정의(의)다. 또 분별력의 원리를 갖고 있으니 그게 지혜(지)다. 또 진실함의 원리를 갖고 있으니 그것이 신이다. 인의예지신의 원리를 갖고 있다. 예는 지금 여기서 뭐라고 했죠? 공경(경). 인은 사랑 애자. 애지리. 사랑의 원리가 인이요. 공경의 원리가 예요. 합당함의 원리가 의요. 분별력의 원리가 지요.

21:00 진실함의 원리가, 성실함의 원리가 신이다. 지금 할 얘기 다한 거예요. 허령지각이 텅 비어있는 알아차림, 불교에서 말한 공적영지죠. 허령지각 안에 이미 에너지가 있고, 그 오행의 에너지에 상응해서 오행의 원리들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이건 시공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적연부동의 어떤 것도 움직임이 없는, 시공의 움직임이 없는 그 세계에 이미 오행의 원리와 기운이 갖춰져 있다. 정복심 선생께서 지금 이걸 다해서 뭐라고 했나요? 여기 옆에 위심체. 마음(심)의 본체다. 본체란 말까지 지금 나왔습니다. 그럼 마음의 작용은 뭐죠? 위심용. 마음의 작용이다라고 밑에 나오죠. 그 작용이 뭡니까? 측은지심부터 작용이에요. 여기를 나눠 가지고. 원리를 갖췄다(구애지리)까지가 마음의 본체구요.

22:03 그래서 이 사랑(인)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난다고요?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그것이 사랑의 싹이다(인지단). 싹 단(端)자입니다. 이 원리(구애지리)가 밖으로 싹(단)이 나면 뭐가 된다구요? 측은지심. 그건 이미 감정입니다. 작용입니다. 시공 안에 어떤 감정이, 생각이 표현된 거예요. 작용이다. 보세요. 아까 여기 성정 나눈 데다가 옆에 보면 이것도 보이시죠. 미발이 성이고(미발위성) 이발이 정이다(이발위정). 본성은 발동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미발. 아닐 미(未) 발동 발(發). 감정은요? 이미 이(已) 발동 발(發). 이발. 이미 발동한 상태. 아까 그칠 이자로도 썼는데 지금 여기서는 이미 이자입니다. 감정은 이미 발동한 상태의 마음의 작용이에요.

23:03 마음이 작용한다는 건 시공간 안에서 작용합니다. 시공간 내에서 마음이 작용할 때는요 이제 측은하다 이게 감정이 하나 형성되면 다른 거랑 이제 또 배치되면서 자기만의 성질을 부려요. 측은하다 그러면 불쌍하다는 마음이 일어나 버립니다. 이 예절의 마음에서 사양지심, 남한테 양보하고 싶은 공경의 마음이 일어나 버려요. 한 번 이제 일어나 버리면 그 마음은 자기대로 생명력을 갖고 우리 안에서 작동합니다. 정의감이 수오지심이 한 번 일어나 버리면 그것대로 또 작동합니다. 수오지심하고 측은지심이 또 서로 충돌나면서 작동해요. 그래서 이제 현상계에서 오행 상생상극이 서로 돕기도 하고 배격하기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굴러갑니다. 그런데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서는 이게 구분이 있으면서도 전체가 그냥 한 덩어리에요. 그래서 구공 그럽니다. 본성이 이런 원리를 갖고 있어요. 본성 차원에서는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저런 분별은 있지만 혼연하게 한 덩어리로 섞여 있어요. 우리가 현상계에서 따져볼 수는 있지만 참나 차원에서는 저게 한 덩어리로 녹아져

24:04 있습니다. 태극이라는 것도 우리가 그려놓으면 태극에 음양이 있죠. 그 음양이 참나 차원에서는, 태극 차원에서는 시공이 없고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한 덩어리로 이게 갈무리되어 있어요. 이게 현상계 들어오면 찢어집니다. 현상계 안에 들어오면 이 하나하나의 감정들이 다 찢어져요. 찢어져서 드러나요. 그게 사단입니다. 이게 측은지심, 이거는 사양지심, 요건 수오지심, 요건 시비지심. 맹자는 여기까지 사단만 얘기했는데, 사단 플러스 요거는 성실지심이라고 해서 정복심 선생님께서 이걸 나누었습니다. 요거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래서 성실지심이라는 게 뭘까요? 측은지심, 측은한 마음이에요. 사양지심, 양보하는 마음. 수오지심,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하는 마음. 성실지심은요 앞의

25:01 그 4가지가 성실하게 일어나는 마음이에요. 앞의 4개에 이미 다 들어 있으니까 그래서 맹자가 따로 얘기 안 하고 뺀 거예요. 앞의 그 4가지가, 측은지심이 여러분 성실하게 일어나지 않나요? 조건만 보면 마음이 똑같이 되지 않나요. 그게 성실지심. 성실하게 작동한다. 여기까지 됐죠. 상도 하나 다 보셨어요. 어때요? 이해되세요? 죄송한데 제가 너무 판을 키웠습니다. 마음의 본체와 작용, 마음 안에는 인의예지의 근본원리가 들어 있다가 형이하의 세계에서 작동한다. 작동해 가지고 이런저런 각각의 보편법칙의 결에 따라서 측은한 마음도 만들어내고. 이런 경우에는 “측은해해라” 하는 법칙이 작동해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쌍한 사정 들으면 늘 눈물이 나고 늘 가슴이 울려요. 또 이런 경우에는 분노하라는 보편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26:01 들으면 울컥해요. “이건 아니지.” 꼬맹이들도 부당한 일 당하면 이건 아니지 합니다. 준우도 지금 제가 괜히 가서 때리면 아주 부당하다는 눈빛으로 변합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를 때리려고 덤빕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갑자기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그 억울한 표정이 나와요. 로고스입니다. 사람 마음 안에서 로고스가 작동해요. 그 일을 당하면 딱 작동합니다. 정의감, 그리고 또 남한테 겸손한 마음,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도 똑같아요. 학계의 연구입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까 꼭 그렇진 않은 거 같지만 학계의 연구는 18개월 되면 아동들은 그게 자동으로 나타난다고 그럽니다. 남에 대한 공감능력 측은지심. 정의감 수오지심. 부당한 일을 보면 울컥해하는 마음. 그리고 사양지심 남하고 눈치를 보면서 조화를 이루는 마음. 시비지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 요런 것들이 나타납니다.

27:04 애들 뭐 바로 “맞아. 아니야.” 설득 안 됩니다. “안 이뻐.” 그러면 설득 안 돼요. “이거 이쁘지 않냐?” “아니.” “이렇게 하는 거야.” “아니야.” 자기대로 다 있어요. 시비판단을 해요. 우리 안에서 이게 작동해버려요. 그걸 잘 작동하게 도와주는 게, 자연의 결에 맞게 작동하게 도와주는 게 종교고 철학입니다. 그것만 해주면 되는데 종교 철학끼리 싸우고 있고 이게 난리가 아니죠. 또 그것을 작동도 못 시켜본 사람들이 지도자라고 지도하고 있고 철학자라고 굴고 있고 성직자라고 구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엄연한, 인류 어느 문명에서도 그런 철학자 종교가가 나와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참 구현 안 되는 거 보면 신기할 지경이죠. 안 하려고 작정한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간단한데도, 참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우고

28:03 퇴계 선생의 가르침으로 들어가 볼게요. 퇴계선생 식으로 한 번 그려 볼게요. 상도 이해하셨으면, 상도 중도 하도 어떻게 다르냐면요. 상도는 자 이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이라는 본체와 감정이라는 작용이 있다. 그런데 감정도 오만 가지 감정이, 작용이 있는데 본성은 인의예지신이고. 이게 갖출 구(具)자. 그래서 불교로 치면 이게 구공입니다. 유교는 구리입니다. 구리. 원리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감정 차원에서는 인이 뭐로요? 측은지심으로. 의가 수오지심으로, 예가 사양지심으로, 지가 시비지심으로, 신이 성실지심으로 작동하더라.

29:04 요거는 사단의 세계라고요. 사단 플러스 성실까지 더하면, 하나 더해서 5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 책에도 5단이란 표현도 쓴 거예요. 성실지심 넣어 가지고 5단이라고 표현했어요. 지금 5단이잖아요. 보시면 싹 단(端)자가 다섯 번 나오죠. 양심이 다섯 가지 싹입니다. 이게 왜 싹이냐? 보세요. 이게(인의예지신, 리) 씨라면 요건(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성실지심) 싹이에요. 씨알에서 싹이 난 겁니다. 밖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속에 있던 원리가 밖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시공 밖에 있던 게 시공 안에 들어온 거거든요. 여러분 마음 안에 텅 비어있는 허령지각만 있는데, 요 본성이 있는 마음이 허령지각인데 허령지각 안에 이런 본성이 들어 있다가 밖으로 터져 나온 거예요. 그런데 지금 뭐만 설명하고 있나요? 사단만. 사단칠정론 중에 사단의 세계.

30:01 사단이라는 건 양심의 싹이거든요. 양심의 싹. 양심의 싹만 가지고 본성과 감정을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퇴계 선생이 보탠 겁니다. 더 보탠 거예요. 보세요. 중도 보세요. 중도 이렇게 그렸어요. 심. 여기에다 허‧령‧지‧각 써놨죠. 아예 써놨어요. 요 마음이 허령지각이 우리 마음 중에 가장 근원적인 마음이다. 기독교로 치면 영혼육 중에 허령지각은 영이예요 영. 혼작용이 일어나기 전의 영을 말해요. 마음의 본체. 그 마음의 본체 자리에 본성이 새겨져 있습니다. 색깔을 바꿔 써 볼게요. 허령지각 안에 본성이 새겨져 있어요. 이 본성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인의예지의 본성이 새겨져 있어요.

31:01 이제 여러분이 전문가 아니세요. 구공이죠. 전형적인 구공. 우리 허령지각의 마음 안에 허령지각이 참나 자리잖아요. 참나예요. 허령지각은 제가 이번에 다시 개정해서 낸 수심결의 핵심이죠. 공적영지, 텅 비어 고요한데 신령하게 알아차린다. 텅 비어 있는데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의식, 이 뜻입니다. 유교에서 이 양심 자리는요. 유교에서 양심은 간단해요. 허령지각이에요. 텅 비어 신령한데요 자명하게 선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어요. 또 그 안에 인의예지 원리를 품고 있어요. 그래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나는 거기에 오행의 원리가 들어가 가지고 감정이 펼쳐집니다. 자 여기까지 지금 유교심리학을 연구하고 계세요. 초월심리학이죠. 여기까지 따라오시겠죠. 지금 불교랑 유교가 둘인가요?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공조에서 유교를 제가 많이 할 거예요. 사실은 이유가

32:05 이거예요. 불교는 구공에 대해서 유교같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요. 아공 법공을 되게 자세하게 하고 바로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넘어가 버려요.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보강하는 겁니다. 이게(사단) 튀어나와서 육바라밀이 나오고 덕이 나오고 하는 거예요. 이게(사단) 밖으로 나가면 뭐가 된다구요? 현상계는 사단의 세계와 칠정. 이 양심이 발동한 게 아니에요. 여기(칠정)도 분명히 오행의 원리는 들어 있고 이런 양심의 원리에 기반은 하고 있지만 에고가 51% 이상인 철저히 욕심을 위해서 발동한 감정인 칠정하고, 양심이 51% 이상인 이 사단하고 서로 충돌이 난다는 거예요. 이건 사단은 양심을 더 위해서 나온 마음입니다. 이쪽(칠정)은 욕심 충족을 위해서 작동한 거예요.

33:01 그러면 둘이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죠. 그렇죠. 퇴계 선생이 지금 이 얘기 들어가려는 거예요. 지금 정복심 선생은 순수한 마음 사단만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퇴계 선생은 사단 칠정이 싸우는 세계를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마음 안에는, 허령 안에 인의예지신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사단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똑같아요. 그런데 지금 싸우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싸우면 요건 이제 하도예요. 하도. 충돌 나는 세계는 하도에서 설명해요. 중도에서는 퇴계 선생이 하나 더 가요. 지금 사단 얘기는 해줬죠. 사단이 참나의 작용이다. 참나의 작용으로 참나 안에 인의예지가 있어서 사단이 나오게 돼 있는데 사단만 알면 안 되고. 자 사단이 나올 때, 결국 양심 51% 위주의 마음이 확 작동할 때 그게 양심인데. 양심 51%의 마음이 작동할 때, 인의예지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탁 터져 나올 때,

34:10 칠정도 함께 돌아가더란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현상이 칠정도 나타난다. 칠정 또한 이게 오행의 원리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때의 칠정은 사단하고 싸우는 에고의 마음의 칠정이 아닙니다. 사단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칠정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상도 중도 하도의 차이가 이거예요. 상도는 마음의 작용을 사단 위주로 얘기했어요. 다 본성과 감정을 통합해서 얘기하는데, 중도는 사단에다가 칠정을 보태 본 거예요. 그런데 이때는요 사단이 확실하게 주도권을 잡고 있어요. 칠정은 보조적이에요. 그러니까 사단 칠정이 이땐 다 같이 뭐예요? 다 같이 양심일 뿐이에요. 양심.

35:01 진리를 구현하려는 마음이라고요. 아까 51% 이렇게 쓴 것은 좀 지워주세요. 51%로 구분하면 헷갈리고, 이렇게 구분하자구요. 진리 그대로의 마음이 사단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그대로 작동한 이 사단의 문제는, 에고라고 하는 기의 세계, 에너지 세계에서, 진리가 그대로 작동했는데 참나 에너지가 아니라 좀 더 거친 에너지죠. 거친 에너지 세계에서 사단은 작동해요. 측은해한다던가. 벌써 감정 아닙니까. 측은하다. 사양, 양보한다. 옳고 그름을 막 따져야 된다. 이 마음이 있으면 안 따지면 답답하다. 자 이미 감정이 작동해버렸죠. 이 세계에는요 기의 세계에 현상계 안에 이미 들어 왔거든요. 사단은요 필연적으로 홀로만 움직이지 않고 칠정과 함께 움직입니다. 그때의 칠정은 사단을 도와요. 그래서 저때는 양심이에요 양심. 사단 칠정

36:03 다해서 양심. 지금 중도는 사단으로써의 양심의 싹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칠정 또한 양심의 싹을 돕는다는 얘기를 퇴계 선생이 하고 싶은 거예요. 이 경우가 뭐냐? 이런 거예요. 남의 안타까움을 보고 측은했다가 슬픔이 올라올 수도 있죠. 그때의 슬픔은 인류의 사정이 안타까워서 슬픈 거지 나 좋자고 나오는 슬픔이 아닙니다. 그럼 그 칠정, 희로애락 중에 그 슬픔은 지금 양심입니까? 욕심입니까? 양심이에요. 그러니까 양심으로 작동하는 칠정을 써 놓은 거예요. 그래서 보시면 밑에 사단을 가운데 놓고 칠정으로 겉을 싼 다음에 선일변만을 말한다(언선일변). 오직 선인 경우, ‘양심인 경우만을 말한다’라고 해 놓은 거예요. 이거 대단한 겁니다. 엄청 치밀하게 접근하신 거예요. 또 하나 그럼 옆에는 뭐가 나왔겠어요? 옆에 하도는 사단 칠정 싸우는 세계입니다. 보세요. 그러니까 지금 하도 갈 때는 여기부터 수정해요. 자 어떻게 바뀌나 보세요. 하도로 갑니다.

37:06 하도로 갈 때는 허‧령‧지‧각인 건 똑같은데, 허령지각 안에 본성이 있는데 지금 마음이라 마음의 세계라. 이 본성이 작동해서 밖으로 정이 되는데, 이걸 전제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여기(심)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 심(心)자는 전체를 다 마음이라고 보는 건데. 마음의 본체라는 측면에서 이게 영이고 양심이라고 했죠. 가장 본체가 되는 양심으로서 이 마음을 얘기할 때 허령지각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미 이 허령지각 안에 이 심 안에는 인예신의지. 인과 예는 목화, 신의지는 토금수. 여기는 이 원리로 오행을 써

38:10 놓으셨어요. 인예신의지의 오행의 원리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 또 본연지성이라고 본연 써 놨습니다. 그런데 기질지성이 또 있다. 기질지성은요 청‧탁‧수‧박이 나뉜다. 요렇게 해놨습니다. 중도까진 따라오셨죠. 허령지각 안에 인의예지신의 원리가 들어 있어서 밖으로 사단이 나온다. 상도입니다. 사단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사단이 칠정을 겸하지만 사단이 위주일 때의 칠정은 에고 작용이지만 에고의 욕심으로서의 칠정이 아니고 양심을 돕는 칠정이기 때문에 선이다. 오직 선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하도는 기질의 세계까지 얘기하겠다 이거죠.

39:04 기질의 세계는 뭐냐면요. 지금 우리 에고 안에 본성이 내재돼 있잖아요. 에고는 기와 질이 나뉩니다. 기는 지적인 측면이랑 관련되어 있고, 질은 행적인 측면과 관련돼 있어요. 즉 질은 양능, 즉 양심의 실천력과 관련되어있고 이거(기)는 양지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성이, 허령지각이 그대로 구현돼서 지적인 판단을 하는 게 양지인데, 기가 맑으면 청, 맑으면 선악을 그대로 아는데, 기가 이쪽이 탁하단 말이에요. 기가 탁하면요 판단이 안 돼요. 양지가 발현이 안 됩니다. 선악 판단이 잘 안돼요. 양심적인 판단을 잘 못해요. 이게 자명한지 찜찜한지 구분을 잘 못 합니다. 질은요. 질은 청탁인 게, 같은 말인데요 청탁을 썼으니까

40:08 여기 한자에 나오죠. 순수할 수(粹)자를 써서 수. 얼룩말 박(駁)자. 이게 잡박하다. 무늬가 있는 말이니까 잡스럽다는 거예요. 질은 바탕 질(質)자 질료 질(質)자입니다. 자 순수한 성, 순수한 양심이 순수한 마음의 질료를 통과해서 표현될 때는 양심의 실천력, 즉 양능이 구현되는데 잡박한 질료를 통해서 표현될 때는 양심이 실천이 잘 안 돼요. 기질이 맑으면서 청수하면 어떻게 될까요? 성인이에요. 맑으면 양심이 시비지심을 통해 온전하게 판단하고 측은 사양 수오지심을 통해 온전하게 욕심을 제압해서 리드해 버려요. 마음을 다스려 버려요. 청수면 성인이고요. 청수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보살, 현인이고.

41:05 잡박, 탁하고 박하면, 탁박하면요 소인이 되고 소시오패스가 되고 하는 거죠. 아시겠죠? 자 본성 안에 이렇게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나눠놓은 것은요. 이제 하도는 철저히 에고가 탁하고 박한 세계까지 겸해서 얘기하겠다는 거예요. 아까 사단에 칠정이 순순히 협조하는 경우에는 양심 위주의 사람, 청수한 사람의 얘기고. 기질이 이제 탁하기도 하고, 박하기도 하고, 탁박하기도 하고, 탁하기만 하기도 하고, 박하기만 하기도 하고 다양한 케이스가 나올 거 아니에요. 이런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인의예지신에서 사단이 바로 나오기도 하지만 이 기질의 청탁수박에 가려져서 칠정이 51%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우리를 리드할 수도

42:04 있다는 거예요. 사단이 51%로 리드해주면 제일 좋은데 칠정이 우리를 리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칠정이라는 건요 사단하고 싸우는 칠정이에요. 이때는 욕심의 칠정이에요. 이때는 욕심의 칠정이 출몰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기질이 맑고 순수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기질이 탁하고 잡스러우면 욕심의 칠정이 출몰해 가지고 이쪽 욕심에 주도권이 많이 가겠죠. 칠정에 주도권이 주로 간다. 이게 심각해요. 여기서는 주도권 싸움이다. 사단이 이기느냐? 칠정이 이기느냐? 그런데 아까 얘기했지만 여기(중도)서는 사단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단 플러스 사단을 돕는 칠정까지 포함했어요. 즉 측은지심에서 나온 사랑, 수오지심에서 나온 분노 이런 것들은 지금 칠정이지만 이 칠정은 양심이잖아요. 칠정이긴 하지만 인의예지 원리에서 나온 거잖아요. 에너지 작용이긴 하지만 양심을 구현하려고 작동한, 일어난 에너지

43:04 작용은 다 양심 쪽에다 붙여서 보는 거고. 인의예지를 구현하려는 게 아니고 내 사리사욕을 구현하려고 하는 에너지 작용인 칠정은 욕심으로 보고 둘 간에 충돌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퇴계 선생이 구분을 선명하게 했어요. 이때(중도)의 사단이나 칠정은 원리가 그대로 발동했다. 이발. 이(하도) 칠정은 에너지 차원에서 내 욕심만 추구하려고 발동했다. 기발. 이렇게만 해놓으니까 이것도 잘하신 건데 당시 고봉 기대승 선생께서 나이 차이가 꽤 나시는데, 젊은데 아주 천재적인 학자죠. “이발 기발을 어떻게 찢습니까. 다 이거 에너지 작동이잖아요. 사실은 사단이건 칠정이건 다 에너지 작동이죠. 이걸 이발 기발 찢어 놓으면 안 되죠”라고 비판했지만 퇴계 선생은 포기할 수 없는 게 그 체계 안에서는 그 설명도 그 설명법대로 일리가 있어요.

44:07 퇴계 선생을 우리가 한 번 이해해 보자고요. 퇴계 선생은 본성이 그대로 나오고 원리가 그대로 작동한 에너지적인 현상이지만 원리가 그대로 작동한 사단과, 철저히 에고적인 작동, 에고의 마음이 작동한 기발, 에너지 작동이 더 강한 칠정은 종자가 다르다고 본 거예요. 그쵸. 참나에서 나온 사단하고 에고에서 일어난 마음인 칠정은 종자가 다르다. 물론 칠정 중에도 인의예지의 원리, 즉 참나의 작동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랑 이 경우는 분명히 구분해 보자. 요 주장이 나온 거예요. 사단칠정론 중에 칠정이 무조건 에고의 욕심이라고 보시면 안 돼요. 일부의 칠정은 사단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기 때문에 사단에 들어갑니다. 여기까지 따라 오셨어요? 그러니까 퇴계 선생이 기대승 선생하고 논쟁하다가 양보합니다.

45:05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이발, 원리가 발동하지만 사실은 에너지 작동이니까 이발기수. 이해되시죠? 인의예지 원리가 작동한 거지만 에너지 세계에서 일어난 현상이니까 원리가 먼저 발동하되, 인의예지 원리가 발동했지만 에너지가 함께 호응해 준 거죠. 에너지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니까. 실제로는 측은한 것도 에너지고 다 에너지거든요. 그 다음에 칠정은 기가 먼저 발동했지만 그 안에 또 인의예지 원리가 타고 있다고 합시다. 기발리승. 인의예지가 드러나고 있지는 못 하지만 타고는 있다고 봅시다. 그래야 원리와 에너지가 함께 돌아가지 않느냐 이렇게 양보한 게 지금 이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본성 차원에서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있고 감정 차원에서도 사단과 칠정이, 욕심과 양심이 나뉜다. 현상계에서는 이렇게 찢어진다 하는 걸 강조한 게 하도입니다. 어떠세요? 본성 차원에서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 어떻게 다른지 아세요?

46:08 우리 참나가요 참나 차원에는 인의예지 원리가 그대로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구공이에요. 그런데 기질지성이라고 하는 건 달라요. 기질지성은 에고의 본성입니다. 즉 여러분의 에고가 지닌 기질의 맑고 흐림 잡스럽고 순수함에 따라서 참나가 왜곡된 부분이에요. 참나가 이미 왜곡돼 있어요. 그래서 기질지성 그러면 이미 선악이 갈립니다. 성인의 기질과 악인의 기질이 이미 갈려 있어요. 그러니까 성인의 기질은 아직 선을 한 건 아니지만 선을 할 수 있는 기질 상태고요. 악인의 기질은 악을 한 건 아니지만 참나가 기질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이미 악을 하기 위해 최적화된 기질을 갖고 있어요. 에고의 조건에 따라 참나가 가려진 상태의 본성을 기질지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47:03 기질지성도 더 따지고 들어가면 원래 참나이기 때문에 선하지만 기질의 의해서 왜곡된 부분을 보면 선악이 갈려 있다고 보는 게 맞아요. 그래서 여러분의 기질지성은 이미 선악이 갈려 있다. 청탁수박이 갈려 있고 따라서 기질지성이 선하기 좋은 조건과 악하기 좋은 조건으로 갈려 있고, 그게 움직이면 실제로 선악이 갈립니다. 기질지성이 작동하면 선과 악이 선명히 드러나요. 지금 판단이 잘 안 되고 행동이 잘 안 되고 이게 바로 드러나 버려요. 주자학에서 말하는 기질지성이라는 것은 불교의 업보랑 통하고요 영성지능하고도 또 통합니다. 기질이 훌륭하냐 맑으냐 탁하냐는 영성지능이 높냐 낮냐가 돼요.

48:01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요 기질이라는 게 믿음이 약하냐 강하냐? 기질 자체만 놓고 보면 그건 하나의 업보고요. 그 업보가 두터우냐 얇으냐가 선근이 두텁냐 얇으냐 업장이 많냐 적냐가 되고, 믿음이 약하냐 강하냐가 되니까 기질이 맑다 그러면 영성이 높다는 얘기고요. 기질이 좀 잡스럽다 그러면 영성이 떨어진다는 얘기고. 기질 자체를 들여다보면 기가 맑다 탁하다는 건 업보가 많다 적다가 되는 거예요. 찌꺼기가 많냐 적냐예요. 찌꺼기가 없고 맑으면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찌꺼기가 많으면 드러날 때 본성이 온전히 못 드러나고요. 기질은 청탁수박이 갈립니다. 본연은 늘 인의예지신입니다. 그래서 인의예지신이 그대로 드러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사단이고요. 그 사단을 돕는 칠정이고. 기질이 움직여서 작동하며는 칠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기질 따라 칠정에 치우치고 또 그런 부분들이

49:08 달라지고요. 목 기운 금 기운 또 기운 따라서 또 감정이 어느 분야가 더 심하게 드러나고 덜 드러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죠. 근데 그 기질은요 우리가 선악을 판단해 볼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양심을 따랐냐 안 따랐냐가 기질의 세계는 기질이 작동해버리면 딱 바로 드러나요. 또 두 가지 구분, 본성 차원의 구분과 사단과 칠정의 구분을 좀 이해하시면 돼요. 자 정리해볼게요. 우리 본성 안에는 인의예지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원리가 온전히 드러나면, 참나의 작용이 드러나면 사단이라고 하는 양심이 우리 안에서, 에고 차원에서도 감정 차원에서 양심이 작동합니다. 그런데 그 양심에는 사단이라고 하는 좀 더 순수한 요소와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좀 더 거친 요소가 종합돼서 합쳐져서

50:06 작동하는데 둘 다 사단이 더 순수해요. 왜냐하면 측은한 마음 자체인데 그게 사랑이나 두려움 이런 감정들하고 합쳐지거든요. 이게 더 순수하고 이게 좀 더 탁하기는 합니다만 요런 기질의 청탁 말고요. 뭐가 더 순수한 에너지 차원帶이냐 누가 좀 더 무거운 에너지냐만 구분하면, 감정은 좀 더 섞인 에너지입니다. 사단은 좀 더 순수한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칠정까지 포괄해서 인의예지를 구현하려고 했던 감정이라면 퇴계 선생은 그건 다 양심이라고 보자는 겁니다. 거기까지는 사단으로 보겠다. 그럼 중도에서 나온 칠정은 사단과 하나가 된 칠정이고, 하도에서 나온 사단하고 싸우는 칠정, 기발로써의 칠정은 이건 순수하게 에고의 욕심입니다. 나 하나에 대한 걱정에서 나오는 감정들이에요.

51:01 내 욕망이 성취되면 기쁘고 내 욕망이 좌절되면 분노하고. 이런 식은 인의예지랑 사단이랑 관계가 없잖아요. 들어가 보면 여기에도 오행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오행은 들어있는데 사단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것, 그건 기질의 작용이라고 보자는 거죠. 그래서 기발이라고 보자는 거죠. 기발.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기질도 더 본원에 들어가 보면 뭐죠? 사실은 원리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쵸. 아까 얘기했죠. 불교에서 육바라밀이 왜곡돼서 거기서 잔인이 나오기도 하고 무례함이 나오기도 하고 나태함이 나오기도 하지만 근원은 육바라밀의 원리가 제일 근원이죠.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원적으로는 본연지성이 제일 근본이고요. 이 본연지성이 기질에 의해서 왜곡됐을 때 기질지성이 되는 거구요. 본원은 이것(심)입니다. 기질지성은 이게(심) 왜곡된 현상이에요. 이게 왜곡돼서 사랑이 왜곡돼요.

52:00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잔인이 돼요. 기질지성 차원에서는요 그게 밖으로까지 표현될 때 왜곡 현상이 일어나요. 이런 기질 속에서도 원리가 드러날 때는 사단이 나오는 거고요. 이런 조건 속에서 기질에서는 다 칠정만 나온다 이런 게 아니에요. 이 두 가지 현상은 본성 차원에서 두 개를 나눠 본 거고. 감정 차원에서는 이런 기질 속에서 양심이 구현될 때는 사단이 나오고, 욕심이 구현될 때는 칠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질이 탁하고 순수하지 못 하면 칠정의 지배를 많이 받게 될 거고, 이게 맑고 순수하고 청수할수록 사단이 승리하는 쪽으로 가겠죠. 누가 더 51% 헤게모니를 장악하느냐는 기질이 맑은 쪽으로 가면 점점 양심이 51%가 될 거고, 기질이 탁하고 박하면 점점 칠정이 승리하는 쪽으로, 욕심이 승리하는 쪽으로 가겠죠. 그래서 결국 제가 얘기하는 “양심 51%가 늘 되게 합시다” 이 말을

53:07 주자학식으로 말하면 “기질을 교화해서 맑고 순수하게 만듭시다”라는 거랑 같은 얘기입니다. 이게 양심 승리예요. 양심이 승리하게 하자.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장을 정화합시다.” “영성을 높입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믿음을 강화합시다.” 다 같은 얘기입니다. “성령이 더 드러나게 만듭시다” 이거예요. “성령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실천합시다.” 이게 불교에서는 “업장을 텁시다” 이거고, 유교에서는 “기질을 교정합시다.” 율곡이 기질을 교정하자는 주장을 많이 했죠. 율곡은 기를 강조하다 보니까 “기질을 바꿔야 성인이 되지 않냐” 하고, 퇴계는 원리를 강조하다 보니까 “원리가 드러나면 성인이 되지 않냐” 하고. 같은 얘기 아닌가요? 같은 얘기인데 조금씩 포인트가 다른 겁니다. 율곡은 “결국에는 기질이 바꿔야만, 업장이 털려야만 본성이 드러난다.”

54:06 퇴계는 “본성만 드러나면 된다.” 같은 공부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지금 서로 많이 강조하다가 주리파, 주기파가 갈립니다. 여러분은 둘 다 아셔야 돼요. 다 좋은 말씀이에요. 우리만 잘 활용하면 돼요. 저런 입장에서 나온 말씀이구나. 구공이라는 건 여러분 안에 있는 인의예지 원리, 육바라밀 원리를 드러내자는 겁니다. “본체에 있는 형상을 작용을 통해 드러냅시다.” 불교적으로 육바라밀 드러내면 이게 사단이죠. 그렇죠. 지금 여기는 오행이 그려져 있습니다만 오행도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법신 안에 있는 육바라밀의 원리죠. 육바라밀의 원리를 밖으로 드러내면 사단이죠. 사단에 해당되는 게 불교에서 뭐죠? 육바라밀이요. 그쵸. 또 육바라밀이 양심이죠. 육바라밀하고 충돌하는 마음이 칠정의

55:01 세계 욕심이구요. “육바라밀이 51%냐? 욕심이 51%냐?” 불교적으로는 이렇게 얘기하면 되고. 유교적으로는 “사단이 51%냐? 칠정이 51%냐?”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똑같지 않나요? 이런데 조선 선비들이 “불교는 안 돼” 이것도 웃기는 거죠. 대승불교랑 똑같은 소리예요. 그리고 이미 주자부터 대승불교에서 많이 배웠어요. 유교를 이렇게 정리하기까지 불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때 다 믹스가 된 거예요. 그래서 딱 맞춰보면 이렇게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유교에서 싫어하는 건 소승불교지 유교도 원리가 똑같기 때문에 대승불교랑은 싸울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유교를 정리하는 데 도움까지 이미 받아 버렸단 말이에요. 주자 입으로 한 말입니다. “10년간 불교만 공부했다. 불도만 공부했다.”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이미 영향을 다 받을 건 받아버렸어요. 불도 중에 자명한 내용을 자기가 다 흡수했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서로 하나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내용이 맞춰보면 또 하나고.

56:04 원래 하나였는데 또 중간에 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니 더더구나 하나처럼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 이 내용들이 좀 어려우실 수 있어도 유튜브에 올려놓을 테니까 또 보시고 공부하시다 보면 됩니다. 이제 구공의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 보자구요. 아공 법공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구공의 세계로 들어가시면 여러분 공부에도 도움이 되실 거고 유교나 기독교는 곧장 구공을 향합니다. 불교는 아공 법공이라는 기본 단계에 많이 힘을 빼요. 유교 기독교 불교가 서로 어우러지는 게 제일 좋아요. 왜냐? 불교는 인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은 구공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의 해탈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까 아공 법공 위주로 공부를 해요. 그 인도문화에서 나온 불교는 아공 법공에 꽤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나 유교는 “곧장 양심하자”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요. “곧장 하느님 뜻 구현하자” 이렇게 얘기해버리면 되거든요.

57:05 중간에 열반이라는 걸 거칠 필요가 없잖아요. 불교와 유교 기독교가 좀 다른 것처럼 되어 있지만 들어가 보면 대승불교 기독교 유교는 한 철학이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공 법공은 불교 위주로 강의했고 구공부터는 기독교나 유교가 많이 등장할 거라고 미리 예고 드리는 겁니다. 예. 마치겠습니다. 5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