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3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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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0일 (일) 19:22 판 (https://cafe.naver.com/bohd/7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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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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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4. 28. 土.
게시일자 2020. 07. 11.
동영상 길이 46:16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hN302MFfleg



0:11 1주 보살 1급의 경지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뽑아놨어요. 자 초발심보살. 대승기신론 에 이런 말이 있네요. 대승기신론에서는 초발심보살이라 그래요. 그런데 이게요 원래 화엄경에서 초발심보살은 1지 보살입니다. 왜냐? 보세요. 1지라야 발심이 제대로 된 거예요. 육바라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입지가 된 게 초발심이란 겁니다. “육바라밀을 진짜 잘해야겠다”라고 마음에서 변치 않는 확신이 생긴 게 발심인데 발심은 변하면 안 돼요. 아침에 오늘 나 배우될 거야. 저녁쯤엔 또 가수될 거야. 이런 발심은

1:00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발심이 아니고 “세세생생 생을 관통해서 난 육바라밀만 잘할 거야” 이 발심이 진짜 발심인데 그 발심은 1지부터 생겨요. 1주 보살에서는 불성을 구현할 거야는 되지만 아직 육바라밀 해서 딱 떨어진 게 아니란 말이에요. 육바라밀이 옳은 줄은 알아요. 그런데 그거면 다라는 건 아직 몰라요. 1지는 육바라밀이 다라는 걸 아는 경지에요. “우주에 육바라밀이 다야.” 지금 제 얘기 듣고 여러분 다 아시죠? 여러분 친구 분들한테 육바라밀이 다야. 근데 목에 칼이 딱. “진짜 다입니까?” 그러면? 아니 유튜브에 그렇게. 저도 들었어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아시겠죠? 1주만 해도 육바라밀이 자명하고 귀하다는 건 알아요. 육바라밀이 옳은 줄은 아는 게 1급이고 1주고, “진짜 육바라밀이면

2:00 다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다입니다”라고 말하려면요 1지는 돼야 해요. 1지는 육바라밀이 다라는 걸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덕후가 된 거예요. 그게 단 줄 알아 버렸잖아요. 그럼 이제 죽으나 사나 육바라밀만 챙기면 우주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알아 버렸어요. 시간의 문제지 우주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풀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면 1급에서 1지까지는요 결국 이때(1급) 이미 알아요. 육바라밀이 자명하다는 건 알아요. 1급에서 1지까지는 자명해서 해보고 자명해서 해보고 이 경험치를 쌓는 시간이에요. 경험치가 쌓여서 쌓여서 자연스럽게 익어서 어느 날 그냥 “그게 다네.” 내가 육바라밀로부터 도망가려고 엄청나게 노력해 봤는데 그냥 “도망갈 길이 없더라” 하는, 스스로 이렇게 인정하는 거죠. 수용. 오케이. 이게 여러분이 의지가 앞서서 인가하려고

3:00 하시면 안 돼요. 진리 인가는 항상 피동적으로 일어나요. “이게 맞네. 내가 졌소.” 인정. 인정 이 말이 되게 적극적이지 않죠? 인정. 그러니까 내가 도망갈 길이 없다는 거예요. 인정. 인가는 이런 식으로 일어납니다. 왜냐? 여러분이 아직 해볼 수 있으면 또 해봐요. 육바라밀이 답이라고 혹시 아닐 수도 있잖아요? 또 해보고 또 해보고. 아니면 육바라밀이 답입니다 하고 아직 여러분은 수용이 안 일어났는데 여러분 내면에서는 아직 자명하지 않은데 뭐 저 피터팬이 헛소리할 리는 없고 육바라밀이 답 맞아요 이렇게. 이건 여러분이 적극적인 거예요. 적극적이면 아직 진리의 수용은 아니에요. 수용은 인가는요 인욕이잖아요. 인욕바라밀에서 인욕이 인가잖아요. “치욕스럽지만 맞네.” 이게 인가입니다. 진리는 인가를 여러분이 하실 때 수동적인 상태여야 그게 깨끗해요. 즉 내가 힘을 다 빼고

4:01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들이는 경지. 다른 수가 없어서 받아들이는 경지. 1급은요 육바라밀을 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뿐이에요. 늘 깨어서 아공 법공을 베이스로 깔고 가잖아요. 그러면서 육바라밀을 자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할 때 자명 찜찜은 이미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감각이 예민해져 있다고요. 그리고 내 위주의 판단이 아니라 참나 위주의 판단을 할 자신도 있어요. 참나가 자명하다고 하는 거, 참나가 찜찜하다고 하는 거, 이거 구별할 줄 알아요. 그 부분에서는 이제 달인이에요. 그분이 이 정도 실력 갖추고 열심히 달렸을 때 육바라밀에서 답이 딱 떨어져야 1지에 들어갑니다. 미심쩍은 게 없어야 돼요. 1급이 되고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려도요 1급 보살 불러다가 “육바라밀 자명하냐?” 그러면 “아직 조금 미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러면 더 가는 거예요. 아직 더 가야 되는 거예요.

5:00 계속 가서 딱 떨어질 때가 와요. 어느 날 “이거는 천지에 이거 밖에 없더라.” 이게 딱 나와요. 거기까지는 엄청난 실천을 통해서 내공이 쌓여야 그게 떨어지는 거지 그냥 갑자기 알아지는 거 아니에요. 제 책보고 필 받아서 “오! 육바라밀이 진리였구나!” 저녁쯤에는 또 잊어버리고 살아요. 아까 진짜 감동적이었는데 저녁쯤에는 “육바라밀이요? 아! 육바라밀” 하고. 이렇게 깜빡깜빡하는 건 발심이 아직 아니라고요. 진짜 발심은 1지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이미 1주에서 “참나를 밝히는 게 내 인생의 길”이라는 그 정도 발심은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도 초발심이라고 해주는 거예요. 원래 초발심은 이건데(1지) 이것(1주)도 초발심으로 봐준다. 1주부터는 발심했다고 봐 주는 겁니다. 그것뿐이에요. 감 더 오시죠? 좀 다르다는 거 아시겠죠? “진짜 육바라밀이 답이구나”라는

6:01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여러분 어떻게 하셔야겠어요? 육바라밀 분석을 시도 때도 없이 하셔야 돼요. 그래야 이게 빨리 답이 나요. 작은 일에도 하시고 큰일에도 하고 나랏일에도 육바라밀, 가족하고 싸우고 삐졌을 때도 육바라밀. 진짜 사소한 걸로 삐지잖아요. 계란 노른자 아껴 먹었는데 가족이 안 먹냐 하고 가져갔다. 그러면 큰일에 대범한 사람도요 되게 사소한 데서 무너집니다. 막 성질내고. 자기도 좀 자괴감 들죠. “도는 왜 닦았냐?” 저도 그래요. 되게 작은 일에 크게 상처받고. 사실 크고 작은 게 없어요. 어디든 육바라밀을 써야지 되게 큰 데만 잘 막는다고 이게 아니에요. 작은 데도 무너져요. 지금도 위대한 그 유명인들 위대한 사람이라고 위인전까지 나온 사람들

7:00 되게 작은 일에 무너집니다. 작은 일에 방심했다가 나중에 큰 거 다 날려먹어요. 크고 작은 게 없다니까요. 나중에 보면 작은 게 큰 거고 또 큰 게 작은 거고 그래요. 어디나 육바라밀 투입되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온다는 이걸 아실 때까지 계속 경험치를 늘려 가셔야 돼요. 해 본 사람은 빨리 답을 내고 그냥 감동만 받고 계시면 이게 더뎌요. 그래서 감동만 받고 가시면 안 돼요. 그게 다할 때가 와요. 다시 시들해져요. 근데 계속해가지고 자명하게 만들어 버리는 게 최고입니다. 나를 계속 그런 상황에 몰아넣어서 육바라밀로 문제를 계속 해결하게 시켜가지고 그냥 “아 육바라밀 말고 뭐가 있겠어.” 여러분이 항복선언이 빨리 나와야 돼요. 이게 다 에고 항복이에요. 인욕은, 진리 인가는 에고가 항복할 때마다 점프해요. 에고가 항복을 안 하잖아요? 그건 아직 아닌 거예요. 육바라밀이라고? 아직 아닌 거예요. 더 가셔야 돼요.

8:01 더 구르고 구르셔야 육바라밀 하고 항복이 돼요.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도 양심이 답이라는 데 아직 항복 안 하세요. 힘들 때만 양심 부르짖고 조금만 살 만하면 양심 안 따집니다. 국민이 항복선언 나야 돼요. “진짜 양심이 답이더라” 이 말 나올 때까지 또 많은 시련을 겪어야 됩니다. 망하라는 게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는 시련이 와야 되겠죠? 여러분도 똑같아요. 남의 일은 우리가 “너 좀 굴러 봐야 돼.” 그러면서 자기는 구를 생각을 별로 안 하죠. 빨리 빨리 굴러서 답 내는 게 장땡입니다. 계획적으로 굴러야 돼요. 아무데나 가서 막 구르지 마시고 육바라밀에 맞게, 육바라밀 훈련장에서 구르시면 제일 빨리 레벨 딱 따요. 그게 좋아요. “나 회사에서 평생 굴렀는데요. 육바라밀 잘하지 않나요?” 아니요. 소시오회사에서 구르다 보면 소시오가 돼요. 소시오의 노하우들을 그대로 전수받아요. 그쵸.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9:00 폭력 가정에서 또 폭력 자녀가 나오고. 다신 안 할 것 같죠? 선근이 있는 사람이 구르면요 폭력 가정에서 자라도 자기는 안 합니다. 선근이 부족한 사람이 구르면 같이 돼요. 보고 들은 게 다 그거 밖에 없어요. “우리 아버지는 이럴 때 자녀한테 어떻게 대하셨지? 아 때리셨지.” 때려요. 당당해요. 왜? 자기한테는 그게 공식 같거든요. 다른 경험치가 없어요. 때려서 맞고 이런 식의 경험치만 있지. 그래서 안아주는 그 길은 경험해보지 못 했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그게 낯선 거예요. 그런데 영성이 있으면 양심을 가지고 안 가본 길도 가볼 수가 있는데 영성이 부족하면 사실은 더 못 갑니다. 하던 대로 하게 돼 있어요. 왜 회사가 엉망이고 사회가 엉망이냐? 다음 소시오가 소시오 상사들 밑에서 계속 배양되고 있거든요. 다크포스들이 계속 대를 이어서 다스베이더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쪽은 제다이 한 명 있고 두 명 있고

10:01 이러면 상대가 되나요? 제가 그런 영화 보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게 항상 상대방들은 물자도 풍부하고 조직력도 좋고 항상 조직도 튼튼해요. 그렇죠. 배신도 안 하고. 이쪽은 서로 그렇게 배신하고 물자도 부족하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게 제가 볼 때는 그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게 사람들이 이익 앞에서는 그렇게 단결을 잘하는데, 양심으로 단결을 한다는 게 진짜 힘들다는 그런 부분에 대한 또 방증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봐요. 그런 영화 생각하시면서라도 “나부터 좀 제다이로 거듭나자” 하는 마음을 먹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1급은 제가 그래서 이렇게 비유합니다. “1급은 석사, 1지는 박사.” 석사는 뭐죠? 박사논문 쓸 자격은 됐다는 얘기죠. 양심 연구 제대로 할 양심 박사 될 자격이 된 정도지. 근데 누구는 석사부터 자질이 보여요. 어, 친구 박사논문 제대로 나오겠는데.

11:01 누구는 이 친구가 박사를 갈 수 있을까? 이게 선근의 차이라는 거예요. 누구는 1급 딱 되고 거기서 멈추고 누구는 1지까지 달려갑니다. 1급의 힘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1급에서 얻은 선정과 지혜의 자유한 힘을 가지고, 자유자재의 힘을 가지고 육바라밀 연구를 해버려요. 그럼 답이 나와 버려요. 요 느낌 아시겠죠? 1급이 왜 중요하냐? 1급이 돼야 육바라밀 연구를, 에고를 초월해서 연구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전에 양심 연구를 하면 다 에고적인 연구 밖에 안 돼요. “양심 해서 더 손해 봤다더라.” 이런 에고적인 계산이 나와요. 그런데 양심을 양심이 있는 그대로 연구하려면 1급 실력 이상이 돼야 된다는 건 맞는데. 그런데 제가 학당에서 9급만 돼도 저는 사실은 구원받았다고 본다는 거는 뭐냐면? 짧아서 그렇지 연구 실력이 좀 약해서 그렇지 9급만 넘어가도 양심에 대해서 짧게 짧게 계속 연구할 수 있어요. 참나랑 만날 수 있으면 참나 안에서 짧게 짧게 양심에 대해서

12:00 연구를 계속해놓으시면요 그게 엄청 고속으로 1급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1지까지도 고속으로 달리게 돼요. 그래서 저는 9급부터 잘하셔야 된다. 이게 1급 된 뒤에 잘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9급부터 참나를 잠깐 만나는 사이에도 양심에 대해서 고민해 보세요. 잠깐 깨어 있는 동안에도 그냥 양심에 대해서 고민해 보세요. 선근이 약한 게요 잠깐 깨어있는 과정에도 깨어있다 황홀하다만 따져요. “와! 나 방금 힐링됐어. 황홀해.” 명상을 평생하는데 이런 얘기만 계속합니다. 누구는요 인생의 10분 명상에서도 양심에 답을 얻어서 나와요. “아!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사실 짧은 하느님과의 만남, 참나와의 만남에서 뭘 얻어내느냐가요 그게 영성이 높고 낮고예요. 만나는 것도 중요한데 잠깐 잠깐 만날 때마다 내 인격을 변화시킬 답을 계속 얻어내시면요 여러분이 1급보다 훨씬 대단하실 수도 있어요. 실제로 9급이 1급보다 더 위대한 양심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13:00 보세요. 1급 잘못돼서 계속 “아 황홀해. 나 참나야” 하면서 사고치고 다니는 1급도 있겠죠. 근데 어떤 9급은요? 평상시 그냥 눈 풀려서 살다가도 탁 하루에 5분 깨어있는 동안 양심분석해서 되게 중요한 결정을 해요. 이분 인생이 훨씬 더 찬란한 결과를 낳게 돼있어요. 여러분 급수 가지고 사람 재단할 수도 없는 게요 결국 여러분 위대한 일을 하신 분들 보면 일반인이에요. 고승이 위대한 일을 하던가요? 나라 살리고 이런 거 독립운동 일반인들이 해요. 양심에 잠깐 감동한 사람이 큰일을 저지릅니다. 잠깐이라도 양심에 자기를 맡긴 사람이 큰일을 저지르지 평생 참나를 연구해도 참나를 되게 겉돌면서 연구하시면요 보면 일생에 도움 안 되는 경우 세상에 많아요. 아시겠죠? 그래서 9급부터 이게 하나의 계급이라 하더라도요 군대 계급, 병장인데 막 나라 구한 병장 될 수 있다고요. 소장인데 나라

14:00 팔아먹을 소장도 있고. 그러니까 결국 위대한 공덕을 누가 짓느냐는 꼭 레벨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찰나 깨어나서 해버리면 공자님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들은 나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게요. 뭐 꼭 나보다 더 높은 레벨을 갈 거라는 의미보다는 “너 깨어서 성령의 뜻대로만 살면 나도 못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짓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거 가능하세요. 제가 9급부터 이미 여러분은 참나한테 맡기기만 하고 양심분석만 하시면 이미 위대한 보살이실 수 있어요. 저 보살은 하루에 5분만 활동해. 나머지 스물세 시간 얼마는 좀 눈 풀려 있어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큰 죄는 안 저질러요. 그리고 눈 딱 번쩍할 때 엄청난 선행을 해버려요. 그럼 이 양반이 사실은 결과적으로 훨씬 위대한 업적을 짓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고승은 반대로 하루에 23시간 깨어 있어요. 분명 별거 없이 깨어 있어요. 나머지

15:00 1시간 동안 막행이 짓을 하고 다녀요. 이거 마이너스입니다. 나중에 보면 마이너스입니다 이게. 저분은 막 한 달씩 선정에 들어 계셔. 선정 한 달 동안 별로 하신 일 없는 거고. 선정 속에서 뿅 가계셨다가 나오면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셔. 이 사람하고 눈 풀려 살다가도 딱 보고서 결재할 때만 눈 딱 빛나면 돼요. 어떤 회장님인데 평소에는 그렇게 맨 골프채 닦고 있고 별이 없어요. 근데 뭐 크게 남을 괴롭히진 않아요. 그런데 중요한 결정할 때만 눈빛 돌아가서 양심분석해서 해버려요. 결과적으로 이분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요거 계산하셔야 돼요. 내가 몇 급이다 뭐 이런 거보다 깨어서 그때 양심에 딱 순수하기만 하시면 내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양심이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잘 맡기는 사람이 사실은, 제가 볼 때는 더 보살도를 잘 아시는 분이예요. 견성해야 된다고 오매일여 해야 된다고 산에서

16:00 사십 년간 나오지도 않고 오매일여 오매일여. 결국 오매일여 못 하고 돌아가셔요. 자 이런 경우 참 난감하잖아요. 뭐라고 하기도 난감하잖아요. 그런 분보다 일상에서 살아가시면서 동네 편의점에서 내가 알바를 한다. 알바하면서 보살도 엄청나게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모르죠. 자기는 자기 안에서 육바라밀의 힘을 키워가기 때문에. 이거는 막연하게 정신 승리 하시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정신 승리 그때 말씀드렸죠. 깡패한테 얼굴 다 맞고도 얼굴로 내가 다 막았다고 이렇게 혼자 그냥 생각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이게 실제하고 안 맞은 건 아닌 거예요. 정신 승리는 그냥 그건 위안책이지 자기가 진짜 얼굴로 막은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괴감이 들어 죽겠는데 혼자 정신 승리하는 건 답이 안 되고요. 저는 이거예요. 진짜로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시건 남들이 볼 때 저평가 받는 일을 하시더라도 그걸 하면서 자기는 육바라밀 공부를 하고 있고 육바라밀 실력이 느는 걸 알잖아요. 그럼 진짜라는 거예요. 그런데

17:00 남들이 볼 때는 위대한 보살도한다는 분들 있어요. 그렇게 봉사 뛰고. 속은 메말라 있어요. 남들이 하도 잘한다고 하니까 멈출 순 없는데 언제까지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되게 고민하시는 분들 많아요. 메말라 버리신 분들. 이러면 실제로는 육바라밀이 안 닦여요. 속에서는 지금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어요. 여담인데 김수환 추기경이나 테레사 수녀 이런 분들도 후반이기 가서는 하느님이 안 느껴진다고 다 고백했어요. 하느님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게 남이 보는 그런 모습하고요 속 내면은 또 다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진짜 이제 죽음이 다가오니까 하느님한테 의지가 안 되는 거예요. 솔직한 얘기하신 거예요. 테레사 수녀도 고백했다고 요즘 하느님이 안 느껴진다고 어떤 신부님한테 보낸 편지 글에 그게 다 나왔거든요. 책으로 나왔어요. 근데 저는 그게 솔직한

18:00 얘기에요. 우리 인간은 실존적으로 그래요. 그럴 때도 참나랑 계속 만날 수 있는 실력을 안 닦으시면, 그러니까 잘 될 때는 되는데 안 될 때 답이 없다니까요. 근데 1주만 돼도 이미 안 되고 되고가 없는 경지에요. 얼마나 이런 것들이 귀한지 아십니다. 보세요. 이미 1주만 해도 귀한데. 초발심보살도 문제가 있는데요. 9. 초발심보살(1주 보살). 보살(초발심 보살)이 이러한 3가지 마음을 발하면, 법신을 조금 볼 수 있다. 참나를 제대로 본 건 아니다라는 게 대승기신론 입장이에요. 참나 안에서 살고 있는 초발심보살도 사실은 참나를 제대로 본 건 아니다. 그래서 조금만 봤다. 한문으로 소분. 소분은요 작은 분량만큼 봤다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이 그림 그려 놓은 겁니다. 참나에서 선정과 반야의 어느 부분만 본 거예요. 육바라밀을 전체적으로 본 게 아닙니다. 견성. 내 안의 본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밖에 못 봤다라는 거예요. 초발심보살도 이미 참나

19:00 안에는 살아요. 발심했다는 건요 발심이 안 사라진다는 거예요. 불교에서 “이 사람은 발심보살이다” 그러면 발심이 이제 멈추지 않는 분인데 그런 분도 참나를 만나서 사실 발심한 건데도 참나에 대해서 조금만 이해했다. 그럼 참나를 언제 이해했냐? 대승기신론에서 1지 보살부터는 법신보살이라고 불러줘요. 이름이 아예 법신보살이에요. 다르죠. 참나 봤다는 거예요. 여러분 막말로 1지까지만 가놓으면 일단 법신보살입니다. 일단 검은 띠예요. 검은 띠라는 점에서 1단이나 9단이나 똑같잖아요. 일단 검은 띠 다 놓으시면 제일 안심이고 안 되도 일단 빨간 띠는 따셔야죠. 1급은 빨간 띠 이미 땄어요. 검은 띠가 넘봐지고. 제 욕심이 9급만 돼도 구원입니다 말하지만 솔직히 저 욕심은 여러분들이 다, 여러분들이 학당에 오시면 1급까지 끌어올려드리는 게 저의 욕심이에요.

20:00 그리고 1급 이후 살아가시는 동안 1단까지 가실 수 있을 거라는 거예요. 1급 정도 실력만 확실히 체크하고 제 강의 꾸준히 들으시면서 양심 중한 줄 알고 사시면 사시는 게 그냥 살아가는 게 그대로 수행이 돼요. 그렇잖아요. 무슨 일이든지 양심으로 자명하게 하시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다보면 사는 과정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1단은 따고 가시지 않겠는가. 이게 제 현실적인 전략이에요. 학당에서 1급까지는 계속 확실하게 지도해 드리고 1급 이후는 살아가시면서 계속 실력이 느시게 만드는 거. 혼자 살아도 계속 양심을 못 버리게 만드는 그게 저희 일단 목표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신 분들이 많이 나오시는 게 인류를 위해서 제일 좋은 일이에요. 이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정치 뭐 다 좋죠. 다 좋은데 정치도 사람들 보살 만들려고 하는 거지. 사람들 보살 만드는 거 그거 권력 없이도 할 수 있잖아요?

21:00 바로 해버리면 저희는 지금 이게 제일 귀한 일입니다. 뭐 저희도 정치도 다 필요하면 하겠다고 선언한 거지만 제일 귀한 거는 보살 많이 만들어내는 게 제일 인류를 위해서 남는 장사거든요. 좀 더 노력해 주시고요. 대반열반경은 대승열반경입니다. 소승불교에서 중시하는 열반경이 있어요. 초기불교에서 나온 열반경이 있고 대승불교에서 나온 열반경은 대승적인 내용이 엄청 들어가요. 거기는 10지 체계 이런 거 다 들어가 있어요. 거기서 뭐라고 하냐면 10주 보살 그러면 1주 보살이에요. 10주 보살이란 말은요 1주부터 10주를 헤아리는, 카운트 하는 그 레벨을 그렇게 따지는 그 경지에 들어간 보살이라는 거니까 기존의 1주에 들어섰을 때 10주 보살이 됐다고 보는 거예요. 10지 체계 안에 들어가면 10지 보살이라고 하는데 그건 10지가 아니라 1지 보살만 돼도

22:00 불경에서는 10지 보살이라고 해주는 게 10지 체계에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10주 보살은요 1주 2주 3주를 헤아리는 그 체계에 들어간 보살이에요. 그러면 1주 보살입니다. *대반열반경10주 보살(1주 보살)은 여래성을 조금만 보아서 안다. 10주 보살은 여래성을 조금만 알 수 있다. 다 똑같죠. 다양한 대승경전에서 똑같은 입장을 보인다는 거 아셔야 돼요. 왜 이런지 이제 아실 거예요. 1지가 재밌는 게. 1주는 참나에 안주는 했다라는 거잖아요. 1지는 땅 지자죠. 땅처럼 굳어졌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기독교에서는 열매를 맺었다. 불교에서는 땅처럼 견고해졌다. 통하지 않나요? 육바라밀의 실천이요 견고해져야 돼요. 육바라밀의 실천이 어떤 결실을 맺어야 그때부터 성화가 되고 그때 1지가 되고 하는 겁니다. 칭의는요? 이건 노력 안 해도 돼요. 명상만 잘해도 얻어요. 기독교식으로는 이거는 기도만 잘해도 얻어요. 기도만 잘해도 어느 날 뿅 가면 얻어요. 아,

23:00 내 안에 성령이 있을 거라고 하거나 아니면 성령 받았구나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성령 안에 거하면 얻는 거예요. 이건(성화) 아니에요. 이건 성령의 뜻대로 진짜 살았을 때 얻는 거예요.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 경지는 이건(1급) 정혜쌍수 이건 화두만 들고 있어도 얻어요. 요 경지(1단)는요? 육바라밀 못 하면 못 얻어요. 화두로 견성한 고승이 주변 사람들한테 육바라밀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면 영 그 상태로 가는 겁니다. 1급으로만 가는 거예요. 큰 죄 안 지으면 다행이고. 또 탈선해버리면 그나마도 1급도 날려먹고요. 그래도 그나마 양심 지켰을 때, 육바라밀을 잘은 안 해도 크게 어기지는 않았을 때 그 1급이라도 유지되는 거예요. 누군가는 육바라밀을 전공해 가지고 1지로 가버려요. 그런데 1급에서 1지는요 하늘이에요. 안 보여요. 실제로 확철대오 해서 얻으신 분들이 왜 거기서 멈추느냐? 자기 위에 하늘이 없는 줄 알아요. “양심하라”가 답이라고는 상상도 못 합니다.

24:00 저는 그런 분들 만나서 대화해 보는데요. 24시간 깨어 있어요. 그런데 양심이 답이라고 하면 화내요. 어디 양심. 저한테 윤리를 버리래요. “인의예지 육바라밀 그런 건 에고의 놀음일 뿐이다.” 제가 지켜보잖아요? 본인 삶에 본인 양심 어겨서 계속 사고 터져요. 그때마다 “몰라”로 이겨내고 계세요. 그러니까 업은 칼 같습니다. 말 싸가지 없이 나가면 그런 결과 반드시 그 사람한테 와요. 그런데 본인은요 계속 그거를 하늘이 시험한다고 생각하고 계속 더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답이 안 나와요. 재밌죠. 인과는 칼 같습니다. “저한테 야 윤리를 버려. 그거 다 에고 놀음이야.” 그러면서 자기는 계속 맞아요. 자기가 저질러서 그걸 계속 맞아요. 그래서 진짜 가능하구나 하는 거. 저는 현장에서 진짜 그런 분들하고 살아보면서 얻은 거기 때문에 견성해서 1급에서 탈선해버리거나

25:01 1급에서 멈추신 분들은 심각한 문제 있다는 것을 저는 막연한 추측이나 이론으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런 분들하고 지내 봤는데 제가 아무리 대승 얘기를 해도요 쉽게 빠져나오게 못 하겠더라고요. 몇 년을 제가 같이 지내다 포기했어요. 이분도 양심이 있으니까 결국 이분 맨날 화내시는 거 보면 본인은 비양심적인 일 보면 화내고 그래요, “그럼 양심이 답이잖아?” 그러면 또 아니래요. 열반이 중요하대요. 몇 년을 지내 봤는데 저랑 놀다가 저녁쯤이 되면 대승적이 돼요. 저녁쯤에는 되게 대승적인 얘기를 하세요. 자고나면 “그래도 열반이 중요한 것 같애.” 다시, “어제 잠시 내가 방심했어” 하고 다시 돌아가세요. 다시 “나의 해탈이 제일 중요해” 하고 딱 돌아가요. 어떻게 해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때 제 실력도 짧았겠지만 지금은 또 다르겠지만 이게 벌써 한 십 몇 년 전 얘기인데 한 17년 전 얘기인데 그거 안 되더라고요 정말

26:10 엄청난 그게 하나의 장입니다. 그 장을 못 벗어나요. 그 장의 지배를 받아요. 소승이라는 장의 지배를 받으면 누구 말도 안 들어요. 제가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잠깐 방심하면 멀리 가십니다. 공부 실컷 해 놓고도 그렇게 됩니다. 대반열반경에 또 이런 얘기들이 있어요. 대반열반경이 무서운 경인 게 대반열반경은요 초기불교 공부하는 분들이 진짜 싫어합니다. 이 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얘기랑 그 뒤의 얘기. *대반열반경: 상주불변의 여래성. 여래성은. 참나 얘기를 해요. 여래성은 여래의 씨알은 진실로 영원히 소멸하지 않으니. 이러면 초기불교 분들은 이런 부분이 힘들어요. 아트만 사상이잖아요. 영원히 변치 않은 게 있으면 안 되거든요. 초기불교에서는 다 무상해야 되는데 영원히 소멸하지 않으니 마땅히 여래성이

27:00 항상 존재한다. “상주불변하는 물건이다”라고 얘기해서 그래요. 항상 존재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물건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말 진짜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거 이거 힌두교다. 열반경 아주 싫어해요. 힌두교적인 교리다 하는데.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게 이거를 부정하기 때문에 초기불교 소승불교가 도저히 대승을 이해 못 하는 겁니다. 참나 인정 안 하면요 육바라밀이 제대로 시작 안 됩니다. 딱 관찰해 보세요. 참나 인정 못 하는 분들은요 궁극적으로 육바라밀을 추구할 수가 없어요. 육바라밀을 좋다고는 하겠죠. 그런데 생을 걸고 육바라밀 하겠다는 원은요 참나에 확고하게 안착했을 때만 발심이 일어나요. 그 전에는 안 일어나요. 왜? 영원한 물건인 참나가 나한테 육바라밀을 명령하기 때문에 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참나가 불확실하죠? 그럼 육바라밀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힘이 없어요. 동력이 없어요.

28:00 그래서 “그냥 이번 생에 적당히 하고 열반 열차 오면 빨리 타고 그냥 집에 가야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 가기 전까지만 내가 육바라밀 할 게” 하는 마음이 돼요. 그런 한계가 있습니다. 밑에 또 보세요. *대반열반경: 상주불변의 나. 아예 나라고 해요. 한문도 보세요. 아(我) 그러죠? ‘나’라는 것이 바로 ‘여래장’이니. 이러면 이게 불교인들이 힘들어합니다. “제발, 경에 왜 이런 말이 있는 거야.” 나라는 것이 여래장입니다 여러분. 참나가 아예 인정돼요. 참나가 여래장이니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 ‘나’ 없는 사람이 있어요? ‘나’라는 존재감 없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힌두교 경전 같죠?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이 애초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어서 중생들이 볼 수 없는 것이다. 다 ‘나’라는 존재감이 있는데 ‘나’라는 존재감을 직시하지 못해서

29:00 중생들이 헤매고 있는 거지. 나라는 게 여래장이란 걸 알고 나면 다 불보살 될 수 있다. 이 이론이에요. 그래서 10주 보살 되면 나라는 것을 보긴 보는데 조금 본다. 나라는 것의 본질을 조금 본다. 자 기독교식으로 성령을 만나긴 하는데 성령 안에 새겨져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성령 안에 새겨진 진리가 다른 식 표현으로 하느님의 형상이에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 한다는 거예요 아직. 성화, 거룩해지려는 노력을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형상이 거룩하니까 같이 거룩해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실제로 거룩한 사람만 하느님의 형상을 아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가서 성령 받았어. 그런데 조금도 거룩하지 않아요. 그럼 그 친구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지식으로 알 순 있어도 모르는 거예요. 왜냐? 알면 자기도 같이 거룩해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똑같은 얘기입니다. 여래의 씨알, 여래의 육바라밀의 진리가 우리 안에 다 갖춰져 있는데

30:01 중생들은 그게 덮여 있어서 모르는 거예요. 알아낸 만큼 자기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자 보세요. 창세기 때부터 인류를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지금 하느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인간들 하는 꼬라지 보면 하느님의 형상이 안 보이잖아요. 이게 번뇌에 완전히 덮여 있는 거예요. 번뇌를 깨고 애초에 원래 있던 형상을, 하느님의 형상을 복원하려면, 그럼 인간은 원래 하느님처럼 거룩해지게 돼 있다고요. 거룩하게 살게 원래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이 지금 봉인되어 있어요. 그걸 다시 풀어내려면 성령 때려야 돼요. 먼저 성령의 벼락 한 번 치고. 성령이 이제 임해 가지고 성령이 내 안에서 이제 주인 노릇을 할 때 그 봉인이 조금씩 풀려요. 그래서 하느님의 형상이 나한테 온전히 드러나서 내가 실제로 그 하느님의 형상을 감당할 정도로 성숙해지려면 1지 보살은 돼야 된다는 거예요. 1급 보살은 성령하고 일단 친해진 사이지

31:00 성령의 진리랑 친해진 사이는 아니에요. 하느님의 형상이 아직 안 나와요. 그게 자연스러운 계발 단계에요. 여러분 기독교인 중에 하느님의 형상이 그 사람을 통해 나오는 사람 있으면 그 양반이 1지 보살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그 양반은 1지 보살이에요. 불교에 오면 1지 자격증 나와요. 1단 단증 받아가세요 하는 그런 정도 실력은 돼요. 교회 사는데 성령이 늘 24시간 멸하지 않고 선악을 정확히 판가름하며 하느님의 안목으로 양심을 지켜가면서 거룩해진 존재, 이 정도까지가 그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의 경지예요. 성화의 경지. 성화는 아직 끝이 아니에요. 이제 시작이에요. 이제 시작이라서 1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이후 엄청난 단계가 또 있습니다. 불교도 그래요. 지금 보시면 경전에서 뒷얘기는요 하지도 않아요. 왜? 중생들이 그런

32:00 얘기까지는 지금 과하다 해서 어디까지나 “나 있는 거 아냐?” 이런 정도. 경전들이 모든 경들이 공력을 쓰는 것이 1급까지 끌고 가는 데 공력의 7, 8할을 거기다 써요. 뒷얘기는요 많이 안 해줘요. 제가 볼 때는요 그 경을 쓴 저자도 많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참나까지는 확실히 아는데 육바라밀도 옳다는 거는 아는데 자기가 한 경험담을 말하기에는 경을 쓰신 분들도 실제로 자기 내공도 부족한 경우들이 많아요. 얼마나 어려운 얘기인지 아셔야 돼요. 아니 실제로 불교의 1지도 드문데 2지 3지 4지 보살들이 역사적으로 많았겠어요? 많지 않았겠죠. 경전에 높은 레벨의 내용이 그렇게 실제로 많이 안 나와요. 대부분의 경전은 “참나나 깨달으라” 정도가 많아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말은 하죠. 높은 경지 말은 하는데 그게 지식으로

33:01 말하지 경험담으로 말해 주는 경전들을 많지 않다고요. “내가 10지 와보니 10지가 이렇더라” 이런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 “10지 가면 죽인다더라”의 경이지. 다 가면 좋을 거라는 거죠. 논리적으로 추리를 해요. “내가 1지까지 와보니까 10지는 죽이겠구나” 이렇게 경을 써요. 그래서 어느 경을 보면 1지까지 가는 길은 자명하고 그 이후 길은요 대략적이고 뭔가 모호한 얘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그 저자가 1지까지 아는 분이에요. 그거 다 보면 실제로는 구분됩니다. 저는 이제 전문가니까 보면 여기서부터는 이제 소설을 쓰고 계신 거예요. 경들이 여기까지는 자명했는데 여기서부턴 뇌피셜로 시작된 경우가 많아요. 대승기신론도 보면요 1지까지 가는 길은 되게 자명해요. 그 이후는 진짜로 되개 뇌피셜이 많아요. 제가 대승기신론 강의할 때 호된 질책과 함께 그거 다 잡아 드릴 거예요. 요거는 실제에 가면 이렇게 안 됩니다 하고. 막 질러 놓으신 말들이 되게 많아요. 이런 느낌이에요. 다른 분들이 보고 과하다고 할지 모르는데

34:08 저한테는 그게 자명한 얘기니까. 대승기신론이 보면 그 저자 분은, 그거 마명보살이 쓴 거 아니에요. 더 뒤에 분이 쓴 걸로 보는데. 좀 영업맨 같아요. 막 다 된다고 해 놓은 거예요. 저는 이제 계발자면 어 이거 안 되는데. 팜플렛에 너무 과하게 나간 게 많은 거예요. 뭐 몇 레벨 되면 뭐 다 된다. 실제 해보면 그 레벨에 그거 안 돼요. 그래서 그거를 제가 대승기신론에도 거품 쫙 빼 드리고 여러분이 할 만하게 레벨을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화엄경 할 때도 그런 작업했죠. 화엄경에서도 좀 쎄게 질러 놓으신 거 제가 다 잡아 드렸어요. 대승기신론은 좀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거 더 많이 잡아 드릴 겁니다. 대승기신론 저자는 높은 레벨에 가보신 분은 아니에요. 그 부분은 추리예요. 내가 해본 걸 가지고 추리하는 거예요. “내가 닦아

35:03 보니까 이게 이렇게 된 걸 보면 저 위에는 이렇게 될 거다”라는 거죠. 그리고 경전들이 많으니까 경전을 잘 정리하면 또 길이 추리가 돼요. 그런데 경전에 있는 성인들의 여러 자료들도 과연 자명한 자료인가 이것도 문제가 돼요. 불경 연구할 때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 다양한 분들이 “이거는 불성의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다” 하고 다양한 수준의 경전을 내놔 버렸어요. 그래서 어느 경은 소승 대승 막 섞여있고 어느 경은 대승 얘기만 하고, 이것도 천차고, 대승 안에서도 몇 지까지 얘기가 자명한지 아닌지 실제로는 다 천차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 잘 안 해 드리는 게 지는 몇 지라는 거야 이런 비판 들을까봐 않는데, 자명하게 아닌 부분들이 있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육조단경도 보세요, 여기도 그렇게 높은 차원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육조단경 자체가 확철대오까지만 자세해요.

36:03 어떻게 하면 확철대오 경지에 갈 수 있나? 그 심법이 나옵니다. *육조단경.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선정과 지혜를 근본으로 여긴다. 이 얘기는 참나가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알아차리고 있잖아요. 본래 고요함이 선정이고 본래 알아차림이 지혜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냥 몰라 하고 곧장 참나만 잡아” 이 얘기를 이렇게 쓴 거예요. “참나만 바로 붙잡아” 이 얘기를 선정과 지혜를 중시한다. 첫째로 미혹하여 지혜와 선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마라. 선정과 지혜의 본체는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보세요. 참나는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알아차리지 고요함 따로 닦고 지혜 따로 닦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다. 육조단경의 이 말씀이 수심결에도 그대로 인용됩니다. 참나는 본래 고요하죠. 그 고요함이 본체고 알아차림이 그 작용이고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다.

37:03 그러니까 지혜를 쓸 때는 선정이 지혜에 있으며. 알아차릴 때는 그 알아차릴 때 이미 지혜 작용에서 고요함이 있고. 그러니까 여러분 자명하게 알면 고요해야 돼요. 그리고 선정을 쓸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다. 고요할 때는요 고요한 중에 정신이 자명해야 돼요. 자명하게 알고 있는 상태여야 돼요. 선지식이여 이 뜻은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다는 것이다. 선정과 지혜는 항상 함께 다녀야 됩니다. 이게요 확철대오하는 심법입니다. “알아차리되 고요하고 고요하되 알아차리고 있어라. 늘 이 자리에 안주하면 너는 이미 부처다.” 이게 확철대오예요. 사실 부처 아니죠. 그런데 확철대오까지만 보통 제시하기 때문에 선불교는 1주 이상은 관심 없습니다. 1주까지만 만들어요. 견성하면 바로 부처다 해서 1주만 되면 넌 이미 부처다. 사실 진견성은 아니에요. 이건 초견성 정도는 돼요. 초견성만 하면은 이거는 부분 견성인데 그래도 부처다. 이미 참나를 봤지 않냐. 이미 너는 고요하면서 알아차리지 않느냐.

38:04 이미 선정과 지혜가 하나인 줄 알지 않았느냐. 그러면 너는 부처다. 이게 육조단경의 논리입니다. 육조단경 때문에 그 이후 선불교는 1주까지만 추구해요. 화엄 체계에서는 1주까지 대승 체계에서는 1주까지만을 추구하고 이분들은 그걸 부처가 됐다고 하지 1주라고 안 해요. 용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헷갈려요. 여기서는 이게 부처 됐다고 보는 거예요. 자 보세요. 선불교에서는 부처의 정의가 달라요. 대승불교에서는 12지에 대해서 전지전능해져야 부처라고 하잖아요. 선불교에서 부처라는 건요 늘 깨어있고 늘 고요한 사람이에요. 늘 고요하되 늘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거예요. 육바라밀 잘하는가도 묻지 않아요. 늘 고요하면서 늘 깨어있는 존재. 그게 대승 체계에서는 1주 보살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선불교에서 그게 부처예요. 선불교는 1주 1지 이런 체계가 아니라 별도의 체계이기 때문에

39:00 화두나 몰라를 통해서 한방에 그 자리 들어가 버리면 공부가 그냥 끝난 거예요. 그래서 이후 과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과정이 없어요. 아는 사람들은 있는데 자세한 과정은 없어요. 왜냐? 화두 터지는 것도 평생의 난제인데 언제 육바라밀 같은 견성 이후의 얘기를 하겠어요. 이분들은 견성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했을까요? “지금 육조스님이 선정과 지혜는 둘이 아니야란 얘기를 왜 했을까?”까지 아셔야 돼요. 누가 얘기를 하면요 왜 이 말 하는지 아셔야 돼요. 일반적으로 여러분은요 지금 절에 가시면 선정과 지혜를 둘로 가르칩니다. 왜? 그 말도 원래 맞는 말이에요. 선정과 지혜를 둘로 얘기하는 것도 맞는 말이에요. 육조스님은 그거 잘못됐다고 하잖아요. 그 얘기가 뭐냐면 그거는 선불교 입장인 거구요. 또 서로 얘기하는 차원이 달라요. 절대계 차원 얘기냐 현상계 차원 얘기냐에 따라서 달라요.

40:03 현상계 차원에서는 선정과 지혜는 둘입니다. 즉 1선정부터 4선정까지 그리고 몰입의 4단계로 들어가는 선정 수련은 별개고, 지혜 계발, 아공 법공의 지혜를 챙기는 건 별개예요. 그런데 참나 자리, 절대계로 가면요 원래 알고 있고 원래 고요해요. 그러니까 지금 육조스님이 말한 건 참나 차원 얘기를 하는 거예요. 곧장 그냥 “몰라”만 해서 바로 참나 들어가 버리면 원래 고요하니까 선정을 이룬 거고, 원래 알아차리니까 지혜를 얻은 거야. 그러니까 “원래 너가 갖고 있던 선정과 지혜를 되찾아”라는 가르침인 거고.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절에 가면 4선정부터, 일단 기본 명상부터 가르치죠. 이거는 선정과 지혜를 둘로 보는 거예요. 명상공부하고 경전공부 따로 하고 이 두 개가 만나서. 그런데 현상계의 수행을 중시하는 차원에서도 만나서 가다가다 보면 나중에 하나로 모인다는 거예요. 나중에 결국에는 하나가 돼요. 그게 하나로 녹아요. 왜? 참나가 드러나니까.

41:01 결국 참나가 드러나면 하나로 녹아져요. 왜? 참나는 본래 고요하고 본래 답을 알고 있으니까. 근데 그 최상승선을 가르치는 육조단경은 닦아서 그렇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바로 들어가자는 거예요. 오히려 바로 들어가서 여기서 이제 에고의 세계로, 현상계로 선정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는 방식입니다. 대략만 이해하시면 돼요. 최상승선 방식은 바로 참나를 깨달은 다음에 에고를 길들이는 거예요. 참나에 맞게 고요하게 만들고 지혜롭게 만들고. 결국 시간은 걸려요. 최상승선도 결국 시간 걸려요. 왜냐? 여러분이 바로 참나 만나도요 참나랑 한참 지내야 알아요. 참나 바로 만나서 아는 게 있어요. 그걸 오도송도 쓰고 하는데 한참 지나면요 아공 법공이 정밀해져요. “아!” 이 소식이 오고 한참 지나면 마음을 다루는데 에고를 명상을 통해 다루는 것도

42:01 자유자재해져요. 이분들한테는 참나 만나는 게 더 중한 거예요. 근데 일반적인 선불교가 아닌 대승 체계에서는 에고를 갈고 닦아서 나중에 참나를 만나게 하는 방식이에요. 결국은 참나나 에고나 다 선정과 지혜의 달인이 될 때까지 어차피 가야 돼요. 그 선후의 문제입니다. 뭘 먼저 닦느냐?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육조단경에서 “선정과 지혜를 둘로 보지 마라”는 것은 절대계 차원의 선정과 지혜를 얻으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에고 차원에서 선정과 지혜 잘하는 것 부질없다.” 6조 스님은 좀 그런 입장이에요. “4선정 니가 아무리 들어가 봐라 너 참나 모른다” 이런 식 입장이에요. “참나랑 선정과 지혜가 둘인 줄 아는 한 너는 아직 에고 상태다” 이런 입장이에요. 그런데 4선정 들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지혜를 얻어서 참나의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닌 이 경지를 얻으면 그 양반도 견성

43:00 하는 거죠. 선불교 쪽은 최상승선 입장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기존 방식을 되게 비방하는 듯이 나오니까 신수대사가 그런 기본적인 선정과 지혜 강조했다고 사실은 육조스님이 깐 거거든요. 불교에서 자기 라이벌이잖아요. 신수대사 그쪽은 기본적인 그런 명상과 지혜 수련을 좀 더 강조했고, 6조 스님 오면 바로 참나 만나라 이걸 강조했고 하다 보니까. 이쪽(신수대사)은 선정과 지혜를 구분해 가지고 차근차근 닦아가는 걸 좀 더 강조했고, 육조스님은 바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 차이에서 지금 입장을 대변하는 건데 실제로는 신수대사도 다 견성한 양반이라 신수도 결국 둘이 아닌 하나의 얘기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아는 거랑 좀 달라요. 신수대사도 육조스님이랑 비슷해요. 그런데 그(신수대사)쪽은 그런 방편을 더 인정하는 쪽이고, 에고의 그런 닦음도 인정하는 쪽이고, 6조 스님은 에고의 닦음을 되게

44:06 비방하는 쪽입니다. “신경도 쓰지 마. 그냥 몰라 해. 선정, 지혜, 4선정 그거 다 개나 줘. 너 그냥 참나로 들어가. 거기 원래 고요해.” 6조 스님은 이런 식으로 계속 몰아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가르침도,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래 거기가 참나야. 거기에는 계정혜가 온전해. 육바라밀이 온전해.” 왜? 그 자리가 무슨 죄를 짓겠으며, 그 자리에 뭔 나태가 있으며, 그 자리에 무슨 이기심이 있어요? 참나 자리에. 넌 이미 온전해 하고 참나 얘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현상계에서는 안 닦여 있는데. “참나는 원래 온전하니까 원래 온전한 그 자리 얻었으면 된 거야”라고 이렇게. 그 경지가 대승 체계에서 1주 보살 밖에 안 돼요. 왜? 육바라밀이 형편없거든요. 이런 얘기를 좀 귀담아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선불교 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해서는 보살이 안 나온다는 거.

45:04 그리고 지금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확철대오도 안 나온다는 거. 저는 그분들이 보살은 차치하고 원하시는 확철대오라도 빨리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보살은 우리가 할 테니까 저는 그분들을 위해서도 이 강의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확철대오도 못 나온다. 원리를 모르시고 덤비면. 닦기는 화두를 닦아 놓고 바라기는 12지 부처가 되고 싶어 하는 그런 망상에 빠져요. 그거 망상입니다. 업보가 그대로 있는데 참나를 바로 만났다고 무슨 12지가 돼요? 왜 이런 망상에 빠지느냐? 참나만 바라보는 선불교의 특징이에요. 참나만 바라보다 보니까 자기가 부처된 거 같아요. 참나만 바라본다면요 1주 보살은 24시간 참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경지죠. 여기서부터는 부처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1주 돈오의 경지는 어떤가? 한 번 또 보시죠. 4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