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3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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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0일 (일) 19:21 판 (https://cafe.naver.com/bohd/7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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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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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8. 04. 28. 土.
게시일자 2020. 07. 05.
동영상 길이 1:12:44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AKIrITWG9wU



0:12 다른 경전 공부도 좋지만 이 강의가 사실은 꼭 필요하신 강의예요. 실제로 내가 각 단계별로 어떻게 닦아야 되는지 급수 올라가는 데 도움 되는 강의예요. 모든 경전 강의랑 별도로 필요해서 이 강의를 올해 시작했어요. 시작한지 꽤 됐는데 지금 진도는 많이 못 나갔습니다. 지금 몇 급하고 있나요? 1급까지 왔죠. 이전 내용들을 많이 들어보시면 9급에서 1급 오는 내용들이 많이 설명될 겁니다. 1급까지 왔는데 사실은요 지금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의 초반부예요. 화엄경은 1단부터 시작합니다.

1:01 그 아래 급수 분들이 화엄경 봐서는요 공부 방향을 잡는 덴 좋은데 보시면 당장 내가 뭘 할 건 없어요. 부분부분은 할 수 있죠. 그런데 거기 말한 대로 되려면 한 1단은 돼야 해요. 화엄경이 사실은 한 1단은 돼야 그게 제대로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화엄경의 문제점은 뭐냐? 제가 얘기하는 10지품만 보시건 화엄경 전체를 보시건 보시면 “너무 아름다운 내용인데 나랑은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다 좋은데 난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느끼시게 될 거예요. 제가 탄허스님의 화엄경 140만 원짜리를 지르면서 다른 분들 블로그 상품평을 좀 봐야 되잖아요. 대충 분위기가 어떤가 봤더니 너무 아름답다고 한 구절만 읽어도 환희가 일고. 근데 끝에 가서

2:00 마지막 문단은 “다 좋은데 어떻게 보살이 돼야 되는지는 모르겠다.” “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다른 대승경전처럼 보살이 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다 그것 써 놓은 건데도 왜 그렇게 느끼시냐? 그게 1단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화엄경 스토리가 9급부터 시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중간에 통현장자나 이런 분들이 1단부터 시작하는 화엄경을 1지부터 10지 가는 게 중요한데, 10지품이 제일 핵심인데, 1주 보살만 되면 부처된다는 식으로 화엄경 내용을 다 끌어내려봤어요. 설명을 통해서 풀이를 통해서. 그런데 사실은 1주도 어렵죠. 그래서 제 강의에서 1급까지 가는 거 먼저 소상히 설명하고. 1급이 1주 보살에 해당되거든요. 그래서 이제 1급까지는 거의 왔어요. 1급 이후로

3:01 9급에서 1급까지의 공부를 마무리 지으면서 1단에 이르는, 1단을 향해 가는 내용이 지금 스토리인데 왜 제가 초반부 밖에 안 됐다라고 하냐? 사실 1급에서 1단 가는 내용에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게 참 많아요. 지금 ‘난 1급된 뒤의 모습을 들어야겠다’ 이러실 수도 있는데 근데 지금 그 공부가 직결돼 있어요. 설명은 1급부터 1단 가는 길에서 지금 설명 드린 내용들이 사실은 9급부터 원래 시작이 돼야 돼요. 기초 공사는 계속 진행이 돼야 되기 때문에 제가 이제 또 오늘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 거예요. 오늘 내용은 9급에서 1급까지 지금 닦은 내용을 마무리 짓고 1급에서 1단 가는 길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될 겁니다. 그럴 때 겸해서 보시면 좋은 게

4:01 수심결을 겸해서 보시면 그 부분에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보시면 힘이 나실 거고. 제가 따로 이런 거 안 할 때는 “화엄경 보기 전에 그럼 뭘 봐야 되냐?” 그러면 그냥 수심결 권했다고요. 다른 경전을 봐서는 9급에서 1단 가는 내용이 안 나오니까 후대 분들 중에 그런 취지로 쓰신 거죠. 공부를 막 시작해서 9급에서 참나 체험하고 그게 안착돼서 1급이 되는 내용을 다룬 게 사실 수심결이에요. 수심결에는 육바라밀 닦음이라는 건 자세히 안 나와요. 그게 또 문제예요. 그래서 제가 1급까지는 참나 각성을 어떻게든 만들어내는데. 1급에서 1단 갈려면 육바라밀 아니면 답이 안 나오거든요. 수심결이 그 부분에서는 소략돼요. 왜냐하면 보조스님이나 다 “1급 어떻게 만들 거냐?” 거기에 관점이 있어요. 1급만 되면 알아서 지가 부처돼서 살아 갈 거다.

5:01 지금 우리가 말하는 1급이 선불교에서 확철대오죠. 지금 불교 가도 확철대오까지만 얘기하죠. 육바라밀 닦음은 얘기 안 하잖아요. 그런 전통에서 1급까지만 대게 강조되는 거예요. “1급만 되면 스스로 개척해 나갈 거다” 하는 식이에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역사적으로 스스로 개척하시는 것 같지 않아서 제가 이제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그리고 제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설명을 드릴 텐데 경고는 아니고 미리 예고를 드리면 불교 분들한테는 “어! 왜 내가 저걸 봐야 되지?” 할 수도 있는 게 유교 거를 많이 갖다 할 거예요. 제목은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인데 “초반부에 불교 좀 하더니 유교를 많이 하네”라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그게 아주 불편하신 분들은 불교 관련되는 데까지만 보셔도 충분해요.

6:01 그런데 좀 열고 보시는 분들은 유교 거를 보시면 유교는요 초점이 1단 만드는 게 초점이에요. 양심 전문가 만드는 게. 그런데 불교는 사실은 문제가 있어요. 유교나 기독교에 비해서 불교가 그렇게 많은 분들이 닦으면서 보살이 안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견성해서 산에 처박혀 있는 도인이나 아라한이나 사실 수준이 결국은 아라한이에요. 보세요. 지금 대승에서는 결국 견성해서 산에 처박혀 있고, 소승에서는 아라한 돼서 숲에 들어가 있는, 가끔 설법하러 나오시겠지만. 절도 살려면 영업 뛰셔야 되니까. 본질은 뭔지 아세요? 대승이라는 게 뭔지 지금 현재 감도 잡혀 있지 않아요. 대승 보살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감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불교의

7:00 심각한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교나 기독교 강의를 할 때 그 부분을 되게 찬양하는 거고 그 부분들을 강조하는 거죠. 불교에서도 대승불교가 그걸 얘기한다고 제가 계속 강조해 드린 거예요. 그런데 대승불교가 경전에는 있는데 현실적으로 승이 조직에서 이 수행이 되고 있지는 않다고요. 수행하는 걸 보면 결국 자기의 열반, 자기 해탈이에요. 자신의 견성.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죠. 그 문제가 불교는 현재까지 1급까지 가는 길을 강조해요. 경전에는 10단까지 가는 걸 써놓고 실제로 닦는 것은요 극소수 분들만, 불교인들 중에 영성이 원래 대단하신 분들만 알아서 원효스님처럼, 원효스님은 이미 7단 8단, 7지 8지까지 가셨다고 인정받는 공인된 분이니까 가끔 가는 분은 나오는데 대다수는 어떻게 가는지 길이 안 보인다구요. 내비가 어디까지만 얘기되는가 하면

8:01 1급까지만 잘 안내해주지 1급 이후부터는 길이 없다고 나온다니까요. 현재 경전에는 있는데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그 길은 없는 길이랑 똑같아요. 견성해봐야 알지 견성 이후의 길은 몰라요. “견성하셨나요?” “야 견성이 장난이냐.” 이렇게 되면 사실은 그 길을 제대로 걸어온 분 자체가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다 모르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남들이 다 모르면 조금 아는 사람이 도인 행세를 할 수가 있습니다. 왜? 다 나보다 모르니까. 내가 막 질러도 다 받아줘 버려요. 자 이렇게 전반적 수준이 떨어지면 수준이 낮은 사람이 큰 도인 행세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길이 더 멀어져요. 왜? 이분은 가본 적이 없거든요. 이게 다른 종교도 다 똑같은데 불교계에서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다른 종교에는 잘하는데 불교는 못 한다는 건 아니에요. 다 못 하시는데 불교는

9:00 이런 방식으로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거긴 또 거기대로 심란해요. 아무튼 제가 이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 강의에서 강조하고 싶은 게 1급까지보다 사실은 1급에서 1단 가는 그 내용을 강조해주고 싶은 이유가 1급까지 간 뒤에 보통 그냥 소승으로 흐르고 끝납니다. 오늘도 읽어가겠지만 1급의 핵심은 참나한테 다 맡기고 쉴 수 있는 경지예요. 애쓰지 않아도 참나가 흘러요. 이게 되게 중요해요. 애쓰지 않아도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알아차리는 참나가 컴퓨터의 알약이나 바이러스 잡는 프로그램처럼 24시간 실시간 감시를 하면서 돌아가는 경지입니다. 이 정도하고 대승으로 확고한 의식이 없다면 그냥 숲에서

10:00 산에서 자기 하나 쉬기 딱 좋은 상태가 돼요.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다음 길을 너무 자명하게 알면 안 걸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자기도 모르겠고 견성은 했고 이 정도에서 딱 멈추기 좋은 설명이 “열반에 들어라.” “해탈하라.”이런 내용들이 불교에는 가득하죠. 초기불교의 내용이 소승적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가득해요. 그리고 초기불교 이후에 부파불교에서도 철저히 소승으로 흘렀기 때문에 불교 탄생하고 한 500년 이상 소승적인 내용이 지배했다구요. 그 전통이 지금도 그 뿌리가 계속 살아서 또 대승으로 가는 보살들 발목을 다 잡아요. 한창 견성해서 대승 가야 되나 할 때쯤에 “왜 세상에 욕심을 내느냐?” “너의 해탈에 신경 써라. 너는 열반에 들었느냐 오온을 버려라.” 이런 스토리들이 지금 여러분한테는 그렇게 안 와 닿아요. 왜? 오온 어떻게 버려요? 견성한 양반한테 그게 딱 와 닿으면 공부가 거기서 다 끝나는 거예요.

11:01 왜? 그걸 할 만한 실력은 됐거든요. 이해되세요? 열반에 들어앉을 정도 실력을 됐다구요. 참나에 들어앉을 정도의 실력은 됐다고요. 그런데 그런 가르침을 딱 만나면 소승으로 딱 전향하고 끝나는 겁니다. 왜? 더 노력 안 해도 되거든요. 내가 어느 한 봉우리로 올라갔어요. 그 봉우리에 대한 찬양서들을 자꾸 읽다보면 다음 봉우리로 향할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왜 다른 데 가야 되지? 오히려 이 봉우리가 진짜네. 열반이 다네. 참나 만났으면 견성 얻었으면 끝난 거네. 이게 대승의 선불교랑 소승불교적인 경전에서 지지를 받아 버리면 여러분은 딱 거기서 공부 멈추게 돼요. 그래서 지금까지 불교가 나온지 2,500년이 됐는데 대승을 제대로 한다는 데가 없어요. 아니면 현실하고 적당히 타협한 걸 대승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현실하고 타협할 때

12:00 “중생 구제를 위해서 그렇다” 해버리면 그럴싸하거든요. 그런 게 대승인줄 알아요. 그래서 진짜 대승은 드러나지 않았다. 진짜 대승 밝히려고 쓴 게 수심결이에요. 그런데 심지어 여기서도 육바라밀에 대한 닦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이 안 되고 있다. 분명히 대승의 원리는 정확히 밝히고 있어요. 견성 이후 본격적인 대승 공부가 시작된다는 얘기는 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귀한 책이고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닦아서 대승 보살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지혜와 자비를 닦아라” 이렇게만 해놨어요. 근데 그 지혜와 자비를 닦아라가 육바라밀 닦아라라는 것은 제가 책의 풀이에서 보강을 해드렸어요. 그 부분이 부족하니까. 그런데 견성해서 육바라밀 닦아라로 가시려면 여러분이 견성을 하시되 투철히 해야 돼요. 내 본성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다를 못 보면 대승으로 못 가요. 진짜 대승 보살로 못 가요. 본성 안에서 공적영지라고 해서 평안함과 알아차림만

13:00 추구해 버리면 공부가 거기서 딱 멈춥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참나덕후는 되는데 양심덕후는 못 돼요. 1급 정도면 참나덕후죠. 열반덕후인데 양심덕후는 1단 돼야 우리가 인정하거든요. 헤매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1급에서 1단까지가요 1급까지 가는 길보다 어떻게 보면 더 멀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대승경전에서 이 불교 공부를 시작해서 만겁 정도면 제가 얘기하는 1급, 1주 보살이 되는데 1단까지 가는 데는 무량겁이 걸린다라고 하는 게요. 이 기간(만겁)은 아무것도 아니죠. 이 기간(무량겁)에 비하면 그게 1급에서 1단까지 가는 게 얼마나 먼가를 얘기하는 거예요. 꼭 저 기간이 아니더라도 저만한 비율로. 비율은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참나 안에 들어앉아 자유자재로 산다는 거랑

14:00 양심 잘한다는 거랑 천지 차이구나” 하는 걸 아셔야 돼요. 여러분 주위에, 당장 우리나라에 돌아다녀보세요. 참나 깨달은 사람 많아요. 학당까지 안 오셔도 주변에 참나 아는 사람들 많아요. 그런데 “그 참나가 양심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별로 없어요. 아마 손꼽힐 겁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거예요. 그건 어려운 얘기에요. “육바라밀을 잘한다”라는 말 들을려면요 우리나라에 그런 도인들은 찾기 힘들어요. 보통 도인들이 육바라밀 없기가 더 쉬워요. 일단 뭐 부모 자식 버리고 나간 사람들이에요. 집 나간 사람들이에요. 일단 사단 없기가 쉽고. 자기 하나밖에, 자기 소중한 것 밖에 몰라요. 대부분 그런 양반들이 도 닦습니다. 이게 잘못 됐다는 거예요. 소승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수행판을 점령하고 있어요. 그런 분들은 대승은 감각도 없습니다. 대승의 선근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소승의 선근이 있는 분들이에요. 소승의 선근이 뭔지 아세요?

15:00 집 잘 나갈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요. 사실 부모 버리는 데 그렇게 마음에 동요 없어요. 산에 가 있으면 그렇게 좋아요. 내 고향 왔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양심 감각이 있는 분들은 거기 있으면 못 견디게 되어있어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게 돼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이게 주객이 전도되면 어떻게 돼요? 소승 성자들이 진짜 도인이고 대승적인 사람들이 세상에 물든 사람으로 판단되고 있는 현재의 절의 풍토를 가지고 보면 진짜 보살들은 절에서 쫓겨난다구요. “저거 저거 세상에 대한 욕망이 많아. 자꾸 중생을 돕겠다고 그래. 견성이나 할 일이지.” 그럼 견성 잘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평가받는 거죠. 아라한들이 최고로 평가받고. 오히려 중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넘쳐나는 사람들은 “나는 왜 이런 마음을 못 끊을까? 왜

16:00 열반에 못 들까?” 해서 고뇌해야 되는 지금 시점이에요. 이런 시점에서 제가 이런 강의를 하는 겁니다. 1급에서 1단 이게 그냥 장난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나 이렇게 경전 많이 봤어요” 이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에 유교를 왜 섞어?” 불교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경전을 안 남겼는가를 알 수 있어요. 육바라밀 잘하는 비법만 엄청 남겨놨어야 돼요. 그런 경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참나 만나면 황홀해진다는 경전만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요 유교가 잘해 놓았구요. 우리나라 조선 선비들이 5백 년간 인의예지만 연구해놨어요. 우리 본성 안에서 도덕 법칙이 어떤 식으로 내재돼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구현하면 되는가에 대해서. 원래 보살들이 해야 돼요. 대승불교에서 그쪽으로 발전이 안 되니까 오히려 그런 대승 보살들이 유교에 태어나가지고 엄청 발전시켜 놓은 거예요.

17:01 그거는 버리고 우리 불교만으로 대승 보살되겠다. 재주 있으면 한 번 해보시든지. 자유자재로 현상계에 들어가서 장사하면서 육바라밀 써보고 정치하면서 육바라밀 써보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육바라밀로 진리의 명령으로 진여의 법성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 지금 나와야 대승 보살의 상이 잡혀요. 그전에는 보살상이 안 나온다니까요. 지금까지 안 나왔다니까요. 일단 머리 깎고 이렇게 화려한 법복 입으시고 딱 앉아 계셔서 무슨 보살도를 해요? 그러니까 벌써 이것도 꼭 그렇게 입으면 안 되냐? 안 되냐 되냐도 아니에요. 그게 양심에 맞냐 아니냐지. 양심의 소리만 듣고 살아가시는 분이 보살이에요. 보살은 진짜 간단해요. 어렵게 생각하실 게 아니고 양심의 명령대로만 사는 존재예요. 그러려고 견성한 거예요. 견성해서 온 우주를 나의 참나의

18:00 작용으로 딱 꿰뚫어본 그 실력을 얻은 다음에, 그럼 그 실력을 얻은 다음에 뭘 해야 되느냐?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 돼요. 그게 보살인데 그 정도 얻은 뒤에 양심 얘기를 안 하고 우주를 초월했다는 얘기만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삼계를 초월했네. 우주를 초월했네. 일체가 나랑 둘이 아니네.” 그런 얘기만 해대지. “그래요 그러면 한 번 양심을 보여 주세요” 하면 양심, 잠깐 대화 나누는 사이에도 무례합니다. 상당히 무례하고 편견에 꽉 차있고. 그렇게 또 자기들이 신자들이 해석해요. “아 진짜 무례하고 편견 가득하신데 야 저런 게 도인의 모습인가 보다.” 보통 이해를 못 하는 내가 참 속인이구나 하고 자기를 반성해요. 사이비 교주들이 왜 장사가 되냐 하면 신자들이 알아서 반성하면서 따라와요. 자기를 자책하면서. “왜 내가 교주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했을까?” 예언을 해요. 엉터리예요. “아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

19:00 나한테 일부러 틀린 예언을 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해서 또 반성합니다. 그 말을 듣고 또 휘둘려서 자신을 반성합니다. 그러니까 사이비 신자가 되실 자질들이 있는 분들은 계속 헛것을 보면서 따라가시는 분들이에요. 자기가 스토리를 다 채워가요. 교주가 막 던지는 것도 자기가 다 스토리를 만듭니다. “이래서 이러셨구나 이래서 이러셨구나.” 얼마나 이게 교주하기 편합니까. 그런데 꼭 사이비적인 고의적인 사이비 교주가 아니더라도 진리를 모르면 이게 사기가 돼요. 나는 좋을 의도로 권했는데, 여러분 좋은 의도로 권했는데 친구한테 권했다 주식 쪽박나면 여러분 좀 거시기 하죠. 여러분이 사기 친 게 되잖아요? 그거 오를 거야. 떨어졌어요. 나는 친구 어려워 보여서 사실은 도움주려고 한 얘기예요. 그런데 더 어렵게 만들었어요. 이게 사기입니다. 사기가 꼭 악의로만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이

20:00 안 맞았으면 사기가 돼요. 그러니까 지금요 영적인 세계에 선량한 사기꾼들이 엄청 많다는 거 아셔야 돼요. 악질적인 사기꾼도 당연히 있구요. 선량한 사기꾼도 많다는 건요 무지한 거예요. 무지한데 좋은 의도예요. 좋은 의도인데 무지하면요 그것도 참 무섭습니다. 욕하기도 뭐한데 나는 피 봤단 말이에요. 그걸 누구한테 하소연해요? 그러니까 영적인 데 있어서는요 그런 변명 들이 통하지 않습니다. 정확해야 돼요. 그래서 보살이 되는 정확한 방법을 제가 제시해 드릴 때 유교건 기독교건, 성경도 제가 가져다 얘기해 드릴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현재까지는 불교의 위주인데 앞으로 유교 위주로 많이 갈 거란 걸 미리 말씀 드리고. 그 분량이 되게 많아요. 여러분 복 받으신 거죠. 누가 유교에서 1급에서 1단 가는 팁만 뽑아서, 유교 경전과 선비들 문집에서 뽑아서 해드립니까. 그거 해드릴 테니까 그 자료 어디에서

21:01 듣기 힘든 자료들 많아요. 제가 다루는 거에는 번역 안 된 자료들이 많아요. 그거 해드릴 테니까 보시면서 여러분 본성을 이해하시는 데 좋은 자료로 활용하시기 바래요. 현재까지는 오히려 지금 양심 얘기를 안 하고 “어떻게든 늘 깨어서 늘 또랑또랑한 참나를 잘 챙길 거냐 그리고 아공 법공의 지혜를 어떻게 얻을 거냐?”에 주목했습니다. 앞으로는 이제 구공 쪽으로 갈 거예요. 양심 얘기로. 이 얘기만 미리 좀 적어놓고 갈게요. 현재까지 우리가 다 아공 다뤘죠. 아공. 그다음 법공을 다뤘어요. 아공 법공에 대한 지혜 플러스 늘 깨어 있을 수 있는 선정. 이 경지가 1주. 안주할 주자. 안주할 수 있다는 건요 애를 쓰지 않고

22:01 완전히 내맡김의 경지입니다. 누구한테? 지혜와 선정한테. 근데 지혜와 선정, 늘 지혜롭고 늘 고요한 상태. 결국 이건 뭐냐? 결국 참나 자리죠. 참나 자리의 자연스러운 작용이죠. 그래서 참나한테 애를 쓰지 않고 완전히 맡기고 내가 쉴 수 있는 경지가 1주에 안주했다 그럽니다. 편안하게 안락하게 참나에서 쉰다. 참나에 머문다. 1주부터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참나한테 모든 걸 맡기고 쉬어도 되는 경지예요. 내가 노력 안 해도 자동으로 24시간 뭐가 작동되고 있냐면 고요하라는 프로그램이 계속 작동되고 있어요. 여러분 계속 참나의 깨어 있음이 늘 흘러요. 은은하게라도 늘 흘러요.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늘 흐릅니다.

23:00 관심을 내가 늘 바로 줄 수 있기 딱 좋은 정도로 흐르고 있어요. 그리고 지혜가 흐른다는 건 아공 법공의 지혜가 내 안에서 흐른다는 건요 내가 알고 있어요. 아공 법공을 너무 자명하게 알고 있어요. 그 알고 있다는 그 지혜가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공 법공의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해결하게 돼요. 1주라는 건 이게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요 정도까지 가면 확철대오라고 하는 거예요. 절에 있건 어디 있건 이러면 이제 살맛이 나거든요. 자동으로 늘 깨어서 뭔 일 생기면 자동으로 마음이 자꾸 리셋되면서. 그러니까 이제 화가 나죠. 확철대오 해도 화나죠. 화나도 좀 있으면 리셋 돼요. 24시간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참나를 놓치지 못 하기 때문에 참나의 관점을 계속 잡고 살아가니까 리셋되어 버려요. 그리고 지혜가 자꾸 내 안에서 “이렇게 판단하는 게

24:00 자명하지 않아?” 하는 식의 인도가 계속 있어요. 죽이죠. 1주만 되도 죽이겠죠. 그런데 그럼 노력 안 해도 되냐? 아니요. 더 열심히 공부해야죠. 저 정도는 기본으로 깔려 있다는 거예요. 저 정도는 깔려있고. 여러분 그거 비슷해요. 알약이나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있죠? 그 백신프로그램. 24시간 돌아가는데 그것한테만 맡기긴 좀 그렇죠. 여러분. 따로 가서 좀 정밀검사 의뢰해야 더 자세히 해 주죠. 마찬가지로 늘 기본적으로 깨어있는데요. 그래도 1주 보살도 틈날 때마다 명상합니다. 왜? 더 깨어 있으려고 더 지혜로워지려고. 그래서 에고가 계속 도와주고 관심을 가져줘야 우리 무의식의 있는 업장까지 빨리 더 털려면 바빠요. 양심 잘하려면 바빠요. 우리 안에 얼마나 이상한 게 속에 많은데요. 지금 여러분 몇 십년 사시는 동안 아직 못 튀어나온 것도 있어요. 지금 조건이 안 되서 못 나와요.

25:00 솔로. “여자와 만나면 내가 진짜 막 진짜 잘할 거야” 하는데 못 만나면 못 하잖아요. 그 인연이 안 되면 못 하기 때문에 여러분 뭐가 나올지 모르는 것도 아직 있어요. 그러다가 권력이라든가 뭔가 딱 만나면 안에서 어마어마한 갑질의 습기가 막 올라오면 갑자기 없이 살 때는 그랬던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변했다는데 변한 게 아니라 안에 있어서 대기하고 있던 것들이 올라온 거예요. 본인도 모르는 거 많아요. 여러분도 지금 모르시죠? 통장에 10억 꽂아드리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아 친구랑 다정하다가 갑자기 연락 끊고 사라질 수도 있고요. 본인도 놀랄 거예요. 나한테 이런 게 있다니 하고. 그러니까 안 해봐서 모르는 거 많아요. 우리가 몇 십 년 살았다고 해도요 해본 거에 대해서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대충 알고 있을 뿐이에요. 자기가 자기 성격을 사실 모릅니다. 내 성격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잖아요. 가르쳐 주는 데도 없어요. 애니어그램,

26:00 별자리 온갖 것 다 뒤지고 사주, 무슨 살이 있나 다 보고 해서 조금 감을 잡고. 근데 이거는 조금 도와주는 정도고 실제로 내가 살면서 부딪쳐 본 경험으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금 이해하는 거죠. 자기가 자기 대충 알죠. 그런데 정확히는 모르시니까 한 실수를 또 하고 또 하고 있잖아요. 결국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 대략만 알고 있어요. 내가 술집 가면 분명히 술 마실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은 혹시 모르잖아 하고 또 들어가 봅니다. 또 마시고 있어요. 이 짓을 모르는 척하면서 계속하고 있잖아요. 자기 성격도 정확히 자기가 규정을 안 내리기 때문에 개념화를 안 해요. “나는 이러 이런 사람이다”라고 안 하기 때문에 모호한 채로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 성격마저도 자명한 영역이 아니에요. 의도적으로도 모호하게 두고 있어요.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있어요. 알고 싶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그 영역이 있어요. 정확히 안다는 게 사실은

27:01 자기 성격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참나에 안주해 가지고 늘 깨어서 고요하게 살아간다는 그 프로그램 하나가 여러분 내면에 딱 깔리기만 해도 삶이 조금 변해요. 다는 아는 건 아닌데 우리 안에서 이게 작동이 되면요 적절하게 잡아줘요. “요건 자명하지 않아?” 이런 게 일상화되는 거죠. “이건 아공 법공에 비추어서 너 이렇게 판단하는 건 아닌 거 같애”라고 이게 잡아주고, 마음을 자꾸 리셋 시켜줘요. 요 두 개 깔리는 살만해집니다. 그게 확철대오예요. 두 개가 깔리면 살만해져요. 이걸 억지로 까는 게 아니라요 원래 참나에 내장돼 있는 기능이에요. 그걸 살려 쓰는 거예요. 여러분이 억지로 깔아서는 여러분 저거 못 깔아요. 살다가 계속 놓치죠. 잠깐 잠깐 계속 망상에 빠져 있는데, 여러분이 망상에 빠져 있어도요 저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어야 돼요. 돌아가면서 실시간 감시를 하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28:00 자명선을 넘으면 자명하지 않아 “찜찜찜찜” 신호를 보내주고, 또 마음이 막 산란해 있으면 “깨어나라 깨어나라” 하고 자꾸 신호를 보내주는 거예요. 그게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1주의 경지라고 하는 거예요. 1급의 경지. 저 정도만 해도 일반인에 비하면 하느님이죠. 초기불교나 소승불교에서 강조하는 아라한이 저 정도예요. 숲에 저러고 있으면 살 만해요. 보세요. 자동으로 마음이 리셋되죠. 무슨 일 생겨도 소승불교는 이제 아공 법공 구공 중에 아공만 공부하잖아요. 아공은요 자동으로 이 지혜가 실시간 이걸 계속 날려줘요. “무상 고 무아.” 그래서 밥 좀 맛있게 먹다가 야 맛있다. “무상 고 무아, 무상 고 무아” 계속 신호가 옵니다. “그렇지 무상한 거지.” 다시 이제 식욕이, 또 다시 식감 떨어져요. 그래서 무상 고 무아, 계속 실시간으로 가르쳐줘요.

29:00 “니가 지금 하는 것 무상한 것이다. 괴로운 것이다. 무아다.” 이게 자명하지 않으면, 고정관념을 우리가 믿어서 그렇게 신호 보내주면 이건 인간적인 거구요. 자명하니까 내면에서 계속 그 신호가 자동으로 일어나서 와요. 원래 자명한 거 아니면 여러분 안에서 계속 이렇게 힘을 가지고 활동할 수 없습니다. 무상 고 무아도 자명한 거예요. 맞잖아요? 부분적인 자명이죠. 좀 더 들어가면 법공의 신호를 받아야 돼요. 법공은요 일체유심조. “일체는 니 참나가 만드는 거다.” 이 신호가 계속 와요. 그러면 이 정보가 계속 와서 나로 하여금 이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을 하게 도와주는 게 그게 1주의 경지인 거예요. 요 정도는 베이스에 깔려요. 우리 판단의 베이스에 깔려요. 그러니까 “선정과 지혜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하는 거죠. “여기에 맡기고 산다. 노력하지 않아도 지혜와 선정이 흐른다”는 얘기에요. 요 정도 살면 그전 하고는요 자기 삶의 격이 다 달라져요. “그전에 되게 힘들었는데

30:01 요즘 살만해졌다 하게 돼요.” 왜냐? 웬만한 잡음은 리셋시켜 버리고 또 계속해서 무슨 판단하려고 할 때 아공 법공의 자명한 정보를 계속 우리 내면에서 우리한테 보내준다고요. 그러니까 맡겼다는 건 내가 노력 안 해도 그 신호가 와요. “깨어서 해결해야지. 깨어서 해결해야지. 그건 올바른 판단이 아니잖아.” 이 신호가 계속와요. 이게 원래 여러분 안에 참나의 내재된 진리니까 이게 자명해지는 거지. 그리고 늘 함께할 수 있는 거지. 인위적으로 여러분이 생각해낸 거 있잖아요. 깨어 있으면 그런 건 오히려 날아가 버려요. 여러분이 망상 품은 것은요 여러분이 맘대로 내려오는 결론들은요 깨어 지내다 보면요 그게 오히려 힘이 약해지고 자꾸 날아가요. 자명하지 않으니까. 자명하지 않은 것들은 날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보시면 이 지혜는 여러분 자명한 지혜입니다. 이거는 이렇게 서로가

31:00 서로를 살리게 되어 있어요. 이거 보시면 아실 수 있어요. 자명한 지혜는요 선정을 강화시켜요. 올바른 선정은 자명한 지혜를 강화시켜요. 이 두 개가 서로 도와주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이게 함께 굴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명하게 뭘 알아내시면 마음에 안정이 와요. 그런데 자명하게 알고 계시지 못 하면 마음이 요동하게 돼 있어요. 불안하게 돼있어요. 자명함을 우리는 계속 추구하게 되어 있죠. 이게 지혜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겁니다. “자명한 걸 알아라”고 계속 인도해요. 자명해야 선정이 온다는 거예요. 또 선정에 들어야만 자명해져요. 잘못된 선정은 선정에 들어도 머리가 좋아지지가 않는 거죠. 자명해지지가 않고. 잘못된 지혜는 마음의 안정이 안 일어나요. 그래서 여러분이 실제로 여러분이 진짜 진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요 그 진실을 곰곰이 따져 봤을 때 선정에 드느냐 안 드느냐 보면 알 수 있어요.

32:00 즉 마음이 진정되느냐? 아니면 마음이 오히려 찜찜해하더냐? 마음이 자명해하더냐? 보시면 이게 하늘하고 수작하는 법이에요. 내가 생각을 해봐요. “이건 이런 게 아닐까?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가만히 그걸 품고 가만히 깨어서 보면요. 마음이 시원해지고 자명한 쪽으로 가면 이게 진리일 확률이 높은 거예요. 근데 품고 있는데 마음이 막 더 번잡해지면 요건 억측일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따져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원래 있는 그걸 찾아가는 거예요. 원래 내가 알아야 할 걸 알아야 내가 안정이 되는 거고, 마음을 안정시킬 줄 알아야 불순물이 떨어지면서 이 지혜가 진짜 더 자명한 지혜로 빛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 안에서 지혜와 선정의 참 모습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늘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경지가 1주 보살,

33:00 1급의 경지입니다. 저 정도 되면 부처됐다고 해버려요. 보조스님은요 1주면 부처라고 봐요. 이미 부처라고 봐요. 이미 그 사람 안에서는 불성이 역사를 시작했다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로 치면 저게 성령 안주에 해당되거든요. 성령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 강림했으면 이미 하느님 사람으로 보죠.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보는 이유가요 아직 기특한 짓 안 했는데도 “하느님이 이미 너의 영혼에 역사를 하셨다.” 보세요. 이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과 24시간 함께 살아가는 경지예요. 성령이 내 영혼 안에서요 24시간 감시하면서 나를 인도하는 경지예요. 죽이는 경지죠. 어느 종교나 1주 보살 그 전과 그 후는 레벨이 다릅니다. 어느 종교나 그 1주 전에는 자꾸 끊겨요. 정신 차리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같고. 잠깐 방심하면 하느님하고 멀어진 것 같고. 그런데

34:00 1주 이상은 자기 안에서 늘 24시간 돌아간다는 걸 알아요. 참나가 역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성령이 늘 나랑 함께 하신다는 거 알아요. 거기에 대해 어떤 의심이 없습니다. 내가 뭔 짓을 하고 있건 심지어 내가 추악한 짓을 할 때도 지켜보고 계신다는 거 알아요. 느끼면서 해요. 인가하면서 느끼면서 합니다. 변태 같죠. 인간들이 그래요. 명상 공부 좀 하셔서 참나 아시잖아요. “참나가 날 지켜본다”는 느낌 가지면서 이상한 짓 하고 있어요. 이게 아직 못 멈춰요. 이 습의 움직임을 못 멈춰요. 그래도 참나랑 함께해야 돼요. 그래야 멈출 때 멈춰요. 그나마 두 번 할 걸 한 번 하고 멈춰요. 이걸 못 느끼는 분은 두 번 세 번 네 번 합니다. 그런데 깨어서 하다보면요 부모님이 빤히 보시는데 공부 안 하고 이상한 짓을 계속할 순 없잖아요. 아무래도 다시 공부하게 돼요. 그래서

35:00 처음에 저게 “내가 내 습을 못 멈춘다 하더라도 참나랑 계속 지내라”고 하는 게요 지내다 보면 이게 뭔가 민망해서라도 멈추게 돼 있어요. 참나가 계속 지켜보죠. 아빠가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부모가 날 보고 있다. 이런 느낌처럼 하느님 아버지가 날 계속 보고 계시단 느낌이 강력해지면요 뭘 하라 마라 하기 전에 알아서 멈춰요. 조금씩 조금씩 진정이 돼요. 그래서 참나 각성이 중요한 이유가 제대로 성인이 되기 전에. 참나를 못 만나면 성인까지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성인까지 가는 길은 멀지만 참나 각성이 시작이다. 기독교에서도 구원의 시작은 성령 체험입니다. 왜냐? 성령이 내 안에 임하지 않으면 내가 안 바꿔요. 인간은 하던 짓을 안 바꾸게 돼있어요. 내가 지금 하던 짓대로 하는 이유가 뭡니까? 늘 하던 대로 하는 이유가? 그게 우리한테 강렬한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러면 강렬한 쾌락보다 더 강렬한 뭔가

36:00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안 멈추게 돼 있어요. 그 강력한 게 뭐냐? 강력한 진통제 강력한 진정제를 하느님이 줘요. 그러니까 하느님을 만나버리면 갑자기 강렬한 쾌락을 줄 것 같은 그 대상이 하느님의 그 빛에 가려서 그런 쾌락에 대해서 뭔가 식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뭐 그렇게까지 내가 이걸 추구해야 되나?” 하는 마음으로 변해버려요. 즉 이게 우리 호르몬 가지고 얘기하면요. 도파민이 나오면 그거 안 하면 죽는다는 마음 상태가 된다고요. 빨리 못 하면 막 식은땀 나요. 술꾼이 막 술 따면서 식은 땀 나요. 빨리 따야 되니까. 빨리 먹어야 되는데. 그 과정도 못 견디겠다. 그런데 만약 담배 피우면 담뱃불 라이터 붙이는 것도 막 짜증나는 거죠. 빨리 빨리 지금 빨리 빨리 빨리 상태가 되는데 도파민이 나오면 호르몬 갖고 얘기하면 그래요. 세로토닌이 나오면 도파민이 진정돼버려요. 갑자기 평온해져요. 그러니까 담배 좋아하시는 분도

37:01 불붙이기 전에라도 1분만 몰라 하고 붙이자. 그럼 1분 몰라 하고 나면 맛이 딱 좀 다릅니다. 식감이 좀 떨어지죠. 꼭 해야 되나 하는 일단 판단의 여지라도 생겨요. 그게 뭐냐면 진정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로 의학적으로도 도파민의 그 강렬한 힘을 진정시키는 게 세로토닌인데 명상을 하면 그게 나오는 거예요. 육체적으로만 얘기해도. 아시겠죠. 그러니까 영적으로도 얘기해 보자고요. 참나와 하느님이 주는 그 은총과 그 빛이 아니고는요 그 강력함이 아니고는 그런 강력한 욕망의 자극이 되는 그 쾌락, 너무나 선명하고 자극적인 쾌락을 누가 진정시키겠냐는 거죠. 그게 안 되니까 인간이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그게 진정이 안 되니까. 그래서 양심전문가, 참나 전문가는요 그 부분에 있어서

38:00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일단 진정시키는 법 알아야 돼요. 저희가 몰라니 뭐니 해서 깨어나게 유도해 드리는 이유가 뭐든지 일단 안 깨어나면 고정관념에서도 못 나오고. 지혜를 얻으려면 무지를 깨야 될 거 아닙니까. 선정을 얻으려면 여러분의 그 산란한 욕심을 진정시켜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그 욕심과 무지를요 일단 선정과 지혜로 진정을 시켜 놓으면 이것만 해도 이미 분명히 부처 아니냐는 말 나올 정도죠. 이게 그런 자린 맞죠. 그게 1주 보살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아공 법공까지는 알아요. “현상계가 무상 고 무아구나.” 그리고 “열반 자리, 참나 자리가 진짜로 있구나.” 했기 때문에. 아공은요 정확히 설명 드리면 아공이라는 것은 아는 에고입니다. “공은 실체가 없다.” “에고라는 건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만 아시는 거예요. 아공은요 이 정도까지만 아는 겁니다. 내가 집착했던

39:00 에고라는 게 알고 보면 무상한 존재고. 여러분 에고가 뭡니까? 생각 감정 오감. 알고 보니 무상하고 사실은 이게 고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들이 아니었고. 그게 영원히 내가 그걸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생각이니 감정이니 오감이니. 실제로는 여러분이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쵸. 아주 제한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열반이 진짜구나” 아는 요 정도입니다. 법공은 여기서 공은 의미가 달라요. 이런 “에고를 포함한 에고와 에고 플러스 세계가 알고 보니 공이었다.” 여기도 독자적인 실체가 없더라. 이 부분은 똑같이 풀이할 수 있는데. “에고는 독자적 실체가 없더라.” 이 정도 선에서 끝나야 되고, 법공은요? “만법이 독자적 실체가 없더라.” 그런데 두 가지 의미로 풀어야 돼요. 그래서 결국 공은 또 참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40:00 “만법이 본래 참나더라.” 자 법공에는 참나 개념이 등장해요. 이게 달라요. 아공이랑 달라요. 왜? 아공은 초기불교에서는 참나 개념이 없어요. 만법을 낳는 참나 개념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법공 개념을 아공까지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법공을 얻은 사람한테 아공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되겠어요? “에고도 참나의 작용이더라”가 되면, 아공을요 “에고도 참나의 작용이더라”로 푸신 분은 이미 법공의 경지에 가 계신 분이에요. 말만 아공이지. 이것 구분하시겠어요? 원래 아공이란 얘기는 “에고가 독자적 실체가 아니더라”까지에요. 아공에서 얻는 건. 그래서 여러분이 아공이 더 얻기가 쉬운 거예요. 여기까지 판단하는 건 더 쉬워요. 그런데 법공의 단계에서는 “에고를 포함한 만법이 참나의 작용이더라” 하니까 아공도 이제 이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법공이 그런 의미로 아공을 쓸 수도 있어요.

41:00 제가 만약에 여러분 아공 아시겠어요 했을 때 여러분이 예 “에고라는 게 독자적 실체가 아니더라고요.” 그럼 이게 초기불교식 아공 단계고. “에고가 참나의 작용이더라고요” 그러면 여러분 사실 법공 단계예요. 그건 법공 단계에서 승화된 아공이에요. 여기까지 아시겠죠? 그 단계가 좀 다릅니다. 자 여기까지 자유자재로 알았다 해도 우리는. 첫 구절 내용을 설명 드리려고 지금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네요. 이 두 가지 그림만 제가 그려 놓을게요. 자 도너츠 2개가 있습니다.

42:01 본래 고요하고 본래 자명해요. 이 지혜를 자명으로 읽으세요. 본래 선정을 본래 고요구요. 참나 자리가고요하고 본래 지혜는 자명한 자리예요. 이게 제가 얘기한 참나덕후의 경지입니다. 에고 안에 이게 늘 흘러요. 여기에 안주를 했기 때문에. 안주라는 거는 애를 쓰지 않고 맡길 수 있는 경지입니다. 힘 빼도 참나가 늘 흘러요. 참나가 흐르기 때문에 여러분 에고에 계속해서 두 가지 작용이 일어나요. 깨어있게 만들고 지혜롭게 만들어줘요. 지혜를 잃어버리지 않게 만들어 주고 깨어있게 만들어주는데 이게 노력해서가 아니라

43:00 그냥 알고 그냥 고요해요. 근데 그전 단계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9급에서 1급까지 오는 동안은? 알려고 노력하고 고요하려고 노력해야죠. 그럼 늘 노력만 했느냐? 아니에요. 찰나찰나는 이렇게 맡기고 쉴 수 있는 경지가 9급부터 있었어요. 제대로는 8급부터 있었죠? 짧지만 이런 경험을 하셨죠? 짧지만 참나 상태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참나가 흐르며 노력하지 않아도 그 상태에서 자명하게 아공 법공이 이해가 되는 체험을 계속 짧게 짧게 합니다. 이게 1급 와서 처음 체험된 게 아니고 1급은 이게 포인트예요. 1급은 늘 그런다. 애쓰지 않아도 그렇다는 거. 이 체험을 짧게 하면 어떻게 돼요? 짧게 하면은 8급에서 7급입니다. 조금 길어지면 6급에서 5급.

44:00 원할 때마다 되면 4급에서 3급. 늘 되면 2급에서 1급. 2급은 좀 부족한 게 있다가 다듬어지면 1급. 그 앞 급수는 조금 부족하고 이게 확실해지고, 부족했다가 이게 확실해지고, 부족했다가 확실해지고, 부족했다 확실해집니다. 인간은 이런 영적 발전을 할 수밖에 없어요. 다른 종교도 다 똑같아요. 인간은 영성 공부시키면 무조건 이 단계를 거칩니다. 조금씩 조금씩. 제가 이렇게 지도하고 다니다가 티베트 불교에서 나온 수행의 단계 이런 책들을 봤어요. 놀랬잖아요. 결국 참나가 흐른다는 것은 선정과 지혜가 흐르는 거죠. 선정과 지혜가 처음에 짧게 흐른다. 그러니까

45:01 티베트 시간 계산법으로 이게 몇 시간 동안 되는지 체크해가면서 조금씩 시간을 연장해가라. 이거 보면서 제가 놀랬잖아요. 저희는 그걸로 급수까지 정해 놓았는데. 거기도 공부법이 실제로 똑같다는 거예요. 저는 미리 정해 놓고 나중에 경전보다가 발견하면요 감격이 와요. 양심 노트도 한 생각 안에 양심이 다 들어가야 된다. 이런 것 노트까지 만들어 놓고 양심노트, 사단 노트를 처음에 만들었죠. 인의예지로. 나중에 화엄경을 딱 뒤지다가 7지 보살은 한 생각에 10바라밀이 다 들어있다. 엄청난 감격이 왔죠. 육바라밀 노트 만들 때 그 문구를 아예 책에다가 달아서 냈었어요. 나중에 발견하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그걸 보고 따라했으면 덜 재미있는데 이건 너무 자명해서 제가 밀어붙였는데, 제 안에서 너무 자명하다고 하니까 밀어붙였는데 다른 경전에 그게 돼있는 것 보면요 디테일하게 맞아 떨어질 때는요

46:01 전慄이 오죠. 누구한테 얘기해도 얘기하기가 너무 복잡해요. 야 이게 육바라밀이라는 게 있는데 이러면 안 되니까 저 혼자 막 흥분해서 괜히 가가지고 지르고. 내가 나한테 膳물이나 주자. 인터넷 쇼핑하고. 에고까지 기쁘게 해주려고요. 이런 게 공부 재미죠. 여기까지만 해도 참나덕후 아시겠죠. 근데 이게 1급이에요. 1단은요 더 무서운 양반이에요. 양심덕후면 제가 얘기했잖아요. 거의 양심 성애자. 이런 분들도 좀 변태들이죠. 뭔 일이 있어도 참나로 해결해버려요. 이게 이미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불교에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경지 가면 선불교에서는 확철대오 했다고 하는 거예요. 뭔 일이 있어도 이 양반은 선불교에서는 정혜쌍수로 다 해결해버려요..

47:00 그런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아쉬워요. 왜? 이런 분들한테서는 인격이 안 보여요. 인격이 아직 원만하지가 않아요. 개판이라는 게 아니라 여기서 탈선하면 정말 문제아가 나옵니다. 참나를 알고 있는데 정말 소시오패스가 등장할 수도 있고요. 그 사람은 선근이 짧았던 거죠. 그래도 여기서 이 정도 해도 양심의 선근이 있는 분은, 아직 1단까지 못 가서 1급인 분은요 이분들은 벌써 이 정도 오면요 이제 양심이 옳다는 거 압니다. 왜? 지혜가 이제 인도해줘요. 그리고 선정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고 지혜가 양심으로 인도해요. 그래서 사실 1급만 넘으면요 이미 부처 됐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선근이 좋은 분들한테는 이게 해당돼요. 이미 이 사람은 양심을 잘해요. 1급만 되도요 내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체험은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이 어떻게 되냐? 자명해지게 되면 1단이 되는 거라

48:00 1급만 돼도 이미 자기 안에 양심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근데 딱 떨어지게는 몰라요. 체험은 있어요. 즉 내 참나가 나를 사랑과 지혜, 정의, 성실, 몰입, 인욕 쪽으로 나를 끌고 간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아직 자명하진 않다는 건요? 아까 내맡김이 1주였죠? 1급이었죠? 1지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도 역시 내맡길 수 있어야 돼요. 즉 내가 애를 쓰지 않고 내맡겨도 내 안에서 육바라밀이 흘러요. 늘 육바라밀이 흐르는 경지가 돼야 해요. 그때 여기에는 선정과 지혜만 있는 게 아니라 육바라밀이 총체적으로 갖추어져서 “몰라”만 해도 육바라밀의 요소들이 나를 끌고 가는 게 느껴져야 돼요. 사랑이 저 사람한테 그러지 마라고 하고, 저 사람 이해하라 그러고, 정의가 피해주지 마라 그러고,

49:00 인내가 수용하라 그러고, 정진이 더 노력하라 그러고, 선정이 깨어 있으라 그러고, 지혜가 아공 법공만 아는 게 아니라 구공의 경지에서 즉 육바라밀에 있어서 그게 자명한지 찜찜한지 판단해 줍니다. 여긴(1급) 아직 자명 찜찜 판단이 아공 법공이 기준이에요. 그러니까 주로 여기서 오는 판단들이 뭐겠어요? 여러분들이 아공 법공 정도 깨달은 확철대오자를 찾아가서 상담하면요 “저 요즘 힘들어요” 그러면 다 뭔 얘기 하겠어요? “내려놔. 일체가 참나의 작용임을 알아. 그것들 다 무상한 거야.” 본인 전공이 이거라니까요. 여기서 멘토링이 이루어진다고 보셔야 돼요. 확철대오자는요 이 이상의 답이 없습니다. “무상 고 무아.” 그렇죠. 그리고 “다 너 마음먹기 나름이야.” “일체유심조야.” 많이 들어보셨죠. 절에 가면 주로 이런 얘기해 주시죠. 그분들이 추구하는 진리, 그리고 얻은 진리가 그 정도라는 거예요.

50:00 아공 법공까지 아시면 이런 조언 밖에 안 나갑니다. 고급 무속인은 모르지만 웬만한 무속인 찾아가면 답이 굿과 부적이죠. 뭐냐? 자기들이 문제 해결하는 데 그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아공 법공까지 아시는 분들한테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내려 놔.” “니 마음을 돌려 먹어.” “무상한 거야. 집착하지 마.” 자 그런데 1지 보살을 찾아가면 어떻게 조언해 줄까요? “너 육바라밀하고 있냐?” “육바라밀에 비추어 자명하냐?” “그 일이 사랑에 맞냐? 정의에 맞냐? 지혜에 맞냐? 인욕에 맞냐? 정진에 맞냐?” 요소별로 성찰하게 해줍니다. 다르죠. 그런데 뭔 일이 있어도 참나로 해결하는 덕후랑 무슨 일이 있어도 육바라밀로 해결하는 덕후. 이걸 한 번 비교해 보면서 생각해보세요.

51:00 그래야 좀 느낌이 와요. 뭔 일 있어도 다 참나로 해결하는 그 정도의 몰입도로 양심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재밌겠죠? 그건 진짜 또 신기한 물건이죠. 그 정도가 1지 보살이에요. 10지는요? 완전 노련하게 하는 거구요. 1지는 육바라밀이 자기 안에서 흘러요. 10지는 흐르는데 맡기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처리해요. 그게 10지고요. 1지는 맡기기는 하는데 문제는 많아요. 실제로 육바라밀로 처리하는데 애로사항은 많습니다. 다만 늘 맡길 수 있냐? 육바라밀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바라밀한테 맡길 수 있느냐 예요. 그런데 맡겼을 때 진짜로 내가 맡기면서 잘 처리하느냐는 또 그게 1단부터 10단까지의 연륜에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건 지금 한국 불교 아니라 전 세계

52:00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티베트불교까지 다 해서 지금 육바라밀로 문제 해결한다는 의식이 없다니까요. 불교계 분들한테 가면 다 “무상합니다. 세상에 다 집착하지 마세요. 내려놓으세요. 무상한 거예요. 영원한 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좋은 말인데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육바라밀의 공식을 갖고 얘기해줘야 돼요. 그냥 용서하세요. 자비를 베푸세요. 요 말로는요 요건 아직 지금 1급의 경지 밖에 안 돼요. 1급에서도 다 그건 알죠. 사랑해야 되고 자비로워야 되고. 다 아는데 육바라밀로 정확하게 분석이 안 돼서 1급인 거예요. 육바라밀로 정확히 분석하면서 육바라밀이 흐르게 되면 그게 1지 보살의 경지예요. 이게 기독교로 얘기하면요 이게 칭의라고 여러분이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경지고요. 이거는 성화라고 나 자신을 진짜

53:00 거룩하게 만든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열매예요. 1지 보살을 이거를 성화의 열매를 얻었다고 해요.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또 이걸(성화) 제일 높이 칩니다. 사실은 이거(칭의), 별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과 예수님이 얘기하는 건 이쪽(성화)이에요. 자 보세요. 하느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그 영혼이라는 평가가 이거예요. 모든 성경에서 제일 높이 치는 건요 거룩해져라. 진리가, 말씀이 너를 거룩하게 할 거다. 예수님도 씨가 떨어져서 가시나무에 떨어지면 못 자라고 하다가 좋은 땅 얻으면 몇 배의 수확물이 난다 할 때 그 씨를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이 말씀이라 그래요. 말씀이 뭐냐면 다 이 진리예요.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진리를 정확히 품고 살아가는 존재. 이걸 진리에서 나온 사람, 진리가 낳은 사람, 진리의 열매, 빛의 열매, 의의 열매. 이게 다 성경에 나온 표현들이에요.

54:01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이거는요 하느님의 진리를 온전히 품은 사람만 듣는 칭호지 노력 안 해도 얻는, 하느님의 은혜로 받는 성령 받은 거 가지고는 아직 거룩하다 말 안 붙여요.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너희는 이제 성령 받았으니까 이제 뭐해야 되냐? 거룩해져라 그래요. 거룩해진다는 게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운 자녀가 됐다라는 이거는 불경에도요 그대로 나온 얘기입니다. 보세요. 부잣집이 아들내미를 잃어버렸어요. 부잣집 아들내미. 그래서 아들이 거지 소굴에서 거지랑 같이 컸어요. 요즘 한국 드라마랑 똑 같아요. 나중에 부자가 자기 아들이란 걸 알았어요.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자 이것입니다. 부자의 아들이란 건 알기만 하면 나는 부자의 아들이에요. 거지 아들로 알았는데 부자 아들이 됐어요.

55:00 혈육의 자녀로만 알았는데, 나는 육신의 어떤 부모를 가진 자녀로만 알았는데 하느님 자녀란 걸 알아요. 놀라운 체험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면 그냥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돼요. 내가 노력을 안 해도 자동으로. 문제는요 그 다음이에요. 부자의, 재벌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지만 하는 습성이 거지 습성이에요. 부자 아들로서 습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요. 거룩해진다는 게 뭐냐면 이제 하느님 자녀답게 좀 품위 지키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알고 살아. 그거는요 엄청난 실천을 통해서 열매 맺을 때만 거룩해집니다. 그래서 지금 칭의에서 멈추고 성화로 못 가요. 불교만 제가 비판했는데 교회도 비판하면 지금 현재 교회에 여기(칭의)서 여기(성화)로 가는 이게 없어요. 사실 이것(칭의)도 못 얻어요. 칭의도 몰라요. 그냥 교회 가서 세례 받으면 의로워진 줄 알아요. 일단 성령 받아야 의로워지는데 그걸 모르고요. 성령 받은 다음에

56:00 성령 뜻대로 살아야 내가 거룩해지는데 거룩해지질 않아요. 거룩해져야 구원받는데 다들 구원받은 줄 알아요. 최악이죠. 보세요. 성령도 못 만났는데 구원받은 줄 알고 살면 이거는 불교로 치면 견성을 못 했는데 부처된 줄 알고 사는 거랑 똑같아요. 갑자기 절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실 좀 그렇긴 해요. 왜? 절에 가기만 해도 여러분들 보살님이라고 불러 주잖아요. 보살인가? 이미 절에 가면 그냥 보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말과 똑같아요. 보살인 줄 알고 보살이 정토 못 가겠어 그냥 사시는 거랑 같은 거예요. 이게 어디나 공부 안 되는 데는 다 비슷합니다. 이게 비슷해요. 꼴찌들끼리도 모아놓으면 대게 잘못 돼가는 과정이 비슷해요. 아 이러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또 잘하는 사람들은 잘하는 사람대로 비슷한 결이 보이겠죠. 잘하는 쪽으로 가야 돼요. 우리가 공부는 못해도 요건 잘해야 돼요.

57:00 영성 공부는 잘해야 돼요. 요거는 인간한테 제일 중요한 공부니까. 다른 공부는 못해도 되는데. 요 부분에 대해서 제가 다시 한 번 설명 드립니다. 1급과 1단은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대승경전에서 엄청난 세월이 걸린다라고 말한 이유가 이거예요. 여기서(1급) 여기(1단) 온다는 게요 쉬운 길이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되게 쉬운 길이예요. 선근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여길 쉽게 와요. 왜냐? 아니 늘 깨어있고 늘 자명한 판단할 수 있게 됐다면 양심을 어떻게 안 할 수 있어요? 양심분석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양심분석 잘하시는 분은요 1급 때 이미 1단의 맛이 나요. 깨어 있을 때 양심분석 해버린단 말이에요. 그게 늘 내맡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미 잘한단 말이에요. 왜냐? 늘 깨어 있기 때문에 늘 양심분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상태에요. 양심분석만 습관화되면

58:00 이분은 이미 보살이고 사도예요.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 보살이나 사도들을 보면 1급 단계가 많아요. 그런데 천하의 막행이 교주들도 보면 1급 단계가 많아요. 이게 극과 극입니다. 1급 가가지고 양심 버린 사람은 멀리 가는 거고 1급 가서 양심 귀한 줄만 알면요 이미 이 사람은 사실은 1단 됐다고 봐도 될 정도의 실력이에요. 이미 깨어 있어서 이미 분석을 잘하기 때문에. 그러겠죠? 그래서 저희 학당에서 양심분석을 초장부터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1급 된 뒤 완전히 결이 달라집니다. 양심에 동의 못 하고 1급 가신 분은요 간 뒤에 부처됐다고 갑자기 또 이상해져요. 사람들을 아래로 보고 갑질하고 다녀요. 영적 갑질. 내가 부처다 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양심 안 사람은요 갈수록 겸손해져요. 내가 뭘 한다고 하면서 늘 자기 돌아보면서

59:00 양심 더 잘할 생각 밖에 안 해요. 남 비판보다 자기반성을 더하면서 늘 자기를 또 밝혀서 세상을 밝게 하려고만 생각합니다. 요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도의 길입니다. 실제 사도들을 보면요 대부분 1급에서 1단 사이들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 가지고 하느님 진리를 실천하라고 내면에서 명령하는 존재들은 이미 사도인데 1급만 돼도요 이미 그 명령의 소리가 들려야 맞다고요 어느 정도. 여기(1단)처럼 완전히 뭐 자유롭게 들리지는 않더라도 깨어 있으면 원래 계속 들려야 돼요. 제가 이런 얘기로 비판하는 이유가 지금 견성으로만 인도하지 왜 보살이 안 나오느냐? 견성 단계에서 견성 전부터 양심 얘기를 안 가르치니까 견성 이후에 엉망이 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제가 양심 분석하는 법을 초장부터 강조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같이 공부를 닦아가야 돼서. 제가 말씀드린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의 체계에서는 시작부터

1:00:01 양심 공부가 겸행돼서 가고 있는 체계입니다. 1급 보살은 아공 법공에 대해서만 확실히 아는 게 아니라 저희가 말하는 1급 보살은요 다른 데랑 달라요. 저희가 말하는 1급 보살, 저희가 말하는 확철대오자는 양심분석 상급에, 구공에 대해서 체험적 이해는 분명히 있으면서, 아직 자명하진 않더라도 체험적 이해, 자명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있으면서 늘 깨어서 늘 자명한 판단할 수 있는 분이에요. 이 정도면 이미 양심의 달인도 될 수 있습니다. 제대로 공부한 1급은 양심덕후 맛이 이미 나야 돼요. 제가 편의상 참나덕후 양심덕후 나눴지만 이미 여기(1급)서부터 양심덕후의 큰 어떤 자질이 이미 갖춰지고 있다고 보셔야 돼요. 이게 제가 얘기하고 싶은 대승보살도와 대승보살도를 표방하지만 그냥 견성에 집중하거나

1:01:00 열반에만 집중하는 공부랑 보살도 공부는 근본부터 달라요. 그래서 수심결에도 나옵니다. 수심결에도 이런 내용이 나와요. 대승경전마다 나와요. “너가 온 우주 중생을 다 아라한을 만들 수 있더라도 대승 가르침 처음 들은 사람만 못 하다”라고 나와요. 왜 이렇게 광오한 말을 하나? 이게요 양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양심 모르고 열반에 든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게 대승경전의 입장이에요. 좀 과한 비교지만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를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양심 모르면 아무리 여러분이 열반에 들고 자유자재 신통을 얻더라도 의미가 없다. 이 정도로 강력하게 대승경전들이 다 경고를 하는데 아무도 이 경고를 주의 깊게 안 들어요. 그 경전 다 읽고 나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오케이! 이제 화두만 잡으면 되겠다.” “오매일여.” 결국은 다 자기 견성할 거 밖에 생각 안 해요.

1:02:01 그러니까 이런 말들이 이렇게 들려요. “역시 화두가 짱이구나.” 이렇게 들려요. “대승이 짱이야. 즉 소승보다 대승이 짱이야. 그런데 대승의 꽃은 화두야. 따라서 난 화두만 잡으면 돼.”라는 이상한 논리들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앉아버린다는 거예요. 제가 진짜배기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모든 대승은 양심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얘기만 드리고 5분 쉴게요. 진짜 공부는 늘 참나 안에 살면서 늘 깨어 있으면서 늘 몰라 하시면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대승 보살은 공부는 더 없어요. 남한테 잘해야 되지 않나요? 그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양심에 안 부끄럽게 사세요. 안 돕는 게 부끄러우면 돕는 거고, 안 도와도 당당하면 그냥 사시면 돼요. 기준이 양심이어야지 도와야 된다가 되면 여러분은 또 도와야 된다는 집착에 끄달려요. 양심이 시켜서가 아니에요. 왜 돕고 계세요? “그래도 보살인데

1:03:00 도와야죠.” 보살도의 의무사항처럼 되어있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요 여러분 그거는 공덕 쌓는 일은 맞아요. 남 도와준 건 공덕은 됩니다. 다만 보살도랑은 좀 다른 차원의 얘기예요. 보살도는요 양심에 명령만 따르는 사람이지 뭐 해야 되지 않냐 이런 체면상, 너 보살이라고 했는데 좀 기부해야 되지 않냐? 그래서 기부하고 있다. 이것은 보살도랑은 좀 다른 얘기입니다. 그거는 에고의 욕심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에고의 체면치레로 하고 있는 거예요. 자 이런 종교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믿음도 양심만 믿어요. 자기 양심에 실존. 내 안에 분명히 인류 모두를 위하는 마음이 확고하게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하면 세속적으로 성공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내 삶을 양심을 따르는 데만 바치겠다. 이분이 보살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인류 중생을 위해 나를 내놓겠다 그러면

1:04:01 인류 중생도 “넣어둬. 넣어둬” 할지 몰라요. “내놓지 마. 내놓지 마.” 그거 무서워요. 함부로 내놓겠다는 사람 무섭거든요. 보통 사고치는 사람들이 인류 위해 막 자기를 내놓는 사람들이에요. 이상한 짓을 해요. 인류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욕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에요. 지 문제도 해결 못 하면서 인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요 인류를 걱정하는 근원이 뭔지 들어다 보셔야 돼요. 양심 때문에 걱정하는가? 아공 법공을 알면 세상에 안 휘둘리듯이, 구공의 진리를 알면요 인류를 위하고 싶다 하다가도 이 마음이 어디서 나왔지? 내 안에 있는 참나의 양심적인 명령일 뿐이에요. 참나의 양심의 명령에 더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갈 뿐이에요. 거기서 도우라고 하면 돕는 거고 마라고 하면 마는 거예요. 기준이 내 양심이어야지 “밖에 있는 뭔가 위대한 업적을 남겨야 된다. 위대한 사역을 해야 된다, 사역은 오지사역이 최고지

1:05:00 선교는 오지로 가야 된다” 이런 식으로 위험한 지역으로 갈수록 내가 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 같은 이런 모든 건 다 자기 욕심이에요. 자기 욕심입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자녀가 효도하겠다고 막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부모는 “제발 그러고 다니지 말아라.” 이걸 바라는데, 자녀는 “아니오. 저는 더 제가 진정한 자녀란 걸 보여드릴게요.”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형제를 위해 제 살을 내 놓겠습니다 이런. 그게 양심이 시켜서 하는 건가요? 욕심이 시켜서 하는 건가요?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 상당히 욕심꾼들이라는 건 다 아시죠? 근데 말할 때 보면 지금 대한민국과 온 국민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덤비는 분들은 다 국회의원들이에요. 누구도 그런 얘기 안 하죠. 그런데 자기는 막 다 내놓겠대요. 대한민국을 위해 내가 이러는 거래요. 그럴까요? 그 얘기는 뭐냐면요?

1:06:00 남을 위해 뭐든 내놓겠다는 사람들은 사실 들어가 보면 진짜 욕심이 큰 사람들이 많아요. 이게 가짜 보살도와 진짜 보살도의 구별법입니다. 진짜 보살도는 조용히 묵묵히 자기 양심에 충실할 뿐이에요. 가짜 보살도는 그렇게 생색을 내고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고 해요. 희생하는 자기 캐릭터에 감동해 있는 거예요. “우와 나는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자기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대견한 거죠. 그런 자뻑 보살도는 우리가 얘기하는 보살도가 아닙니다. 보살도를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양심에 더 순수해지시는 게 좋아요. 지금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에고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가 아니라 솔직히 내 양심이 이게 모두에게 이롭다고 하느냐 아니냐? 즉 자명하다고 하느냐 찜찜하다고 하느냐? 양심은 항상 모두에게 이로울 때만 자명하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라도 손해가 가면 하지 마라 그래요. 찜찜하다 그래요. 그 양심의 신호를

1:07:00 계속 들으면서 살아가시면 어떻게 될까요? 그 실험이 보살도의 실험이에요. 인류 중에 일부가 양심에만 한 번 순수하게 살아볼까 하고 걸은 길이 대승의 길이고 보살의 길이고 홍익의 길이에요. 우리 선조들은 홍익인간을 국시로 삼았죠. 그게 양심의 길이에요. 우리는 그런 DNA가 있어요. 그러나 지금 잘한다는 건 아니에요. 지금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다시 복원하자는 거죠. 옛날의 그 대승적인 보살심을 복원하자. 이래서 공부하시는 거고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는 오로지 그냥 이 공부예요. 그래서 되게 심플합니다. “늘 참나 상태로 깨어서 살면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 그러면 여러분은 위대한 보살이에요. 그 길의 끝에 10지 보살도 있고 다 있는 거예요. 여기에 다른 걸 보태실 필요가 없어요. 딱 하나 제가 더 보태 달라고 하는 것은 호흡수련.

1:08:00 기력이 있어야 가니까. 먼 길을 가려면 기력이 있어야 되니까. 호흡수련만 해주시면 정신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그게 도움이 돼요. 음식으로 그게 해결되면 제가 음식을 권하겠는데 호흡수련을 해야 정신력이 강해지는 걸 어떡합니까. 호흡수련 하셔서 정신력 키워서 지치지 않고 이 길을 즐겁게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엄청난 일을 하늘이 여러분한테 요구하지 않았어요 진짜로. 인류를 구하라고 안 했어요. 그냥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인류를 구하는 길이라고 했지 하늘은 절대 “인류를 구하기 위해 뭔가라도 해라” 이렇게 하지 않아요. 아시겠죠. 힘 빼시고. 저도 가끔 인류를 구하고 싶잖아요. 양심을 갖고 있으면 인류를 구하고 싶어요. 이게 순서입니다.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니 인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당연하잖아요. 인류를 다 구하고 싶은데 나의 역량과 처지를 딱 보면 하늘이 당장 뭘 하라고 이런 마음을 먹게 한 거

1:09:00 아니란 것도 알죠. 그래서 내 역량에 맞게 함으로써 나는 최선을 다하는 보살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류를 구해야 된다가 앞서면요 양심 돌아보지 않고 앞서면 무리한 짓을 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욕심에 빠져가지고 실족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모든 좋은 의도로 덤비신 분들도요 보살이 덜 된 분들은 좋은 일 하다가 사고를 쳐요. 장애인들을 돕겠다고 시설을 만들어요. 장애인들을 많이 모아놔요. 그리고 성폭행을 시작합니다. 악질들은 애초에 그런 의도로 한 사람도 있겠지만요. 좋은 의도로 했더라도 양심이 계속 지지를 못 해 주는 일은요 지치게 돼 있어요. 결국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써 자기가 자기한테 보상을 주려고 하는 거죠. 그럼으로써 본 의도랑은 전혀 상관없는 반대의 짓거리를 하면서 실족하는 분들이 실제로 진짜 많습니다. 모든 분이 그런 건 아닌데 요건 단적인 예고요. 이런 식으로 뭔가

1:10:00 좋은 일하려고 했다가 결국 결과가 참담하게 끝나는, 모두를 해롭게 하고 끝내버리는. 왜 잘못 되었는지를 아셔야 그 길을 안 갈 거 아녜요. 그리고 보살도는 애초에 그렇게 잘못될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것도 아셔야 보살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죠. 왜냐하면요 지금 뭔가 양심적으로 세상의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이 다 미투에 걸리고 뭐에 걸리고 다 걸려서 실족하면요 “애초에 인간은 양심 하는 물건이 아닌가보다” 오해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에요. 그게 제대로 된 보살도가 아니라서 그런 거예요. 제대로 된 보살도는요 쉬우면서도 쉽지가 않아요. 사실 알고 나면 쉽거든요. 근데 모르는 에고한테는 이건 되게 오묘하고 낯선 길이에요. 어떻게 살으라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먹을 거 입을 거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와 정의만 구하라.” 하느님 나라, 성령을 구하고요. 하느님 나라에서 시키는 정의만 실천하라는 얘기에요. “그러면 나머지 다 해줄게.” 그 말이 또 곧이 안 들리죠? 아시겠죠. “하느님 나라 정의만 구하면

1:11:00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또 이제 에고가 계산 때리고 있어요. “베팅을 해 말어?” 이게 아니라 양심을 따르다 보면 그냥 이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돼 있고 하늘이 나한테 이 길을 가라고 했으면 하늘이 이 길을 갈 수 있게 잘 서브(serve)해 주겠지 하는 그런 확신이 생겨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역량이 허락한 만큼 욕심 내지 않으면서 가면 가요. 근데 이렇게 가다가도 하느님 믿고 욕심 막 베팅을 더 하다가 망가지고. 순간 자기 마음을 주체 못 하면 어만데 가버립니다. 근데 하늘과 잘 조율하면서 이 길을 가는 게 이게 예술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대승불교, 유교, 기독교, 우리의 홍익사상은 인간의 최고의 길로 다 그 길을 제시하고 있어요. 이게 사도의 길, 보살의 길, 군자의 길, 우리 민족 삼일신고에서 말한 철인의 길입니다. 요 길을 잘 걸어가시는 데

1:12:00 뭐 도움이 되는 팁을 아무튼 제가 역량이 허락하는 한 드릴 테니까 팁 없어서, 정보가 없어서 못 간다는 말은 제가 못 나오게 해드릴 거예요. 여러분이 안 해서 못 가지 정보가 없어서 못 갔어요 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안 되게, 저 때문에라도 그런 말 못하게 꼭 만들겠습니다. 예 이제 5분 쉬고 또 진도 나갈게요. 1: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