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30강
| 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 51 | 52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 69 | 70 |
| 71 | 72 | 73 | 74 | 75 | 76 | 77 | 78 | 79 | 80 |
| 81 | 82 | 83 | 84 | 85 | 86 | 87 | 88 | 89 | 90 |
| 91 |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百 |
| 강의일자 | 2018. 03. 24. 土. |
| 게시일자 | 2020. 06. 01. |
| 동영상 길이 | 58:16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g6udv8eN6fk |
0:11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게 되게 중요한 겁니다. 지난 시간에 천태지자스님, 통현장자. 장자라고 하는 건 이분이 거사세요. 스님의 아니신데 이분이 풀이한 신화엄경론이라는 게요 화엄경 풀이집인데 이게 선사들한테 그렇게 주목을 받습니다. 선사들이 중시해요. 교학에서는 청량국사란 분이 쓴 화엄경소와 초가 있어요. 그게 주목을 많은데 그게 교학적으로는 풀이를 잘해주신 건데 이통현장자는 보면
1:00 견성하신 분이 쓴 화엄경이 이렇다. 견성한 분이 풀이한 화엄경이 나와요. 그래서 선가에서 조사 스님들은 통현장자를 되게 높게 친다. 이통현장자가 쓴 신화엄론을 보시고 보조지눌스님이 쓴 글이 원돈성불론이에요. 원돈성불론이라는 게요 통현장자의 신화엄론의 핵심을 요약하고 또 그 요약본을 가지고 당시 교가나 선가들이 서로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풀어주려고 한 겁니다. 천태지자스님은 마하지관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이분이 거의 천태종의 이론을 다 잡아주신 분이고요. 지금 천태종 그러면 이 천태지자스님의 이론 체계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죠.
2:00 그런데 천태지자스님이나 통현장자 보조지눌의 핵심이 뭐였죠? 1주 보살이면 1주가 화엄경에선 초발심주라고 하거든요. 1주가 초발심에 정각을 이룬다. 정각이라고 하는 건 부처님이 얻으신 거예요. 이게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구경각 그러죠. 구경각을 말해요. 무상정등정각 그게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깨달음이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 깨달음인데 대승에 오면 이미 역사성이 옅어지죠. 그래서 궁극의 깨달음을 상징하게 돼요. 꼭 석가모니께서 얻으신
3:00 깨달음이라기보다는 대승불교 체계에서 최고의 경지의 깨달음, 궁극의 불지에서 얻는 깨달음이죠. 1지부터 10지 그리고 보통 11지 12지 이렇게 치는 데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주장하는 것은 원래 화엄경 체계는 10지에서 끝나는 체계인데 뒷분들이 11지는 등각이라고 부르고 12지는 묘각이라 그래서 이제 부처님 하고 동등해졌다, 그리고 신묘한 부처님의 구경각이 드러났다 해서 11지 12지는 거의 구경각인데 11지는 번뇌가 사라졌다. 여기(12지)에는 지혜를 얻었다. 구름이 걷혔다(11지) 태양이 떴다(12지) 이 정도 수준입니다. 거의 여기가 찰나인데요 그래도 구분을 해가지고 11지는 등각. 등각이란 말이 이미 무상정등정각에서 온 말이라서요 등각이 이미 부처인데 이제 완연하게
4:00 지혜를 얻은 경지를 묘각이라고 구분해 가지고 불지. 그런데 보통 1지부터 10지까지 얘기하고 등각은 찰나로 설명하고 그냥 묘각을 불지. 유식학은요 1주에서 10지, 불이지 있어요. 그런데 대승불교 화엄종 이런 데서 체계적으로 정리될 때 1지에서 10지 그리고 11지 해당되는 등각, 12지에 해당되는 묘각, 이렇게 해서 12지 체계로 열두 단계 체계로 이렇게 정립이 돼요. 지금 이 정각이라는 것은, “초발심은 1주인데 1주가 곧장 12지 부처의 묘각의 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주장이에요.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화엄경의 구절을 아주 제대로 풀어서 이걸 통현장자가 강조한 겁니다. 이통현장자가 이렇게 치고 나오니까 이런 사상들이 보조지눌스님한테 영향을 줘서 원돈성불론이란 걸 쓰게 만든 거예요.
5:01 원만하고 단박에 부처가 되는, 왜 원만하다고 했느냐? 화엄경이나 법화경이죠. 보통 원만하다는 경전에서는 화엄경 법화경을 치는데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더 높이치고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을 높이치고. 단박에라는 건요 선재동자가 한 생에 부처가 되죠. 단박에 부처가 되는 그런 비결이 나와 있는 경전이죠. 원돈은 화엄경입니다. 원돈에서 성불하는 것, 원돈성불론이라는 것 자체가요 화엄경에서 말하는 부처되는 법에 대한 보조스님의 논문 요거예요. 결국 이거예요. 원돈성불론을 보면 다 “통현장자가 뭐라고 했느냐?”를 계속 인용하면서 얘기해요. 통현장자의 주장에 대한 요약, 그리고 통현장자의 주장이 이걸(1주=초발심주=정각) 극대화시키는 거예요. 이걸 뭐랑 연결시켰냐면요? 당시 선종에서 주장하는 게 뭐죠?
6:01 견성성불. 당시 선불교의 핵심 주장이 견성성불이에요. 견성하면 성불이다. 여러분이 참나만 보면 그대로 부처다. 이게 선가에서 유행하는 거였어요. 선가에서는 1지부터 10지 11지 12지 이런 것을 다 무시합니다. 이거를 뭐라고 하죠? 이게 교예요. 모든 화엄종의 경전이나 천태종의 주요 경전이나 대승기신론이나 대승경전에서 주장하는 능가경이나 이런 모든 체계가 있어요. 10지 체계, 최소한 10지 체계는 다 공유하고 그 이후 조금씩 설명이 달라지더라도 이 기본 체계가 있는데 이런 10지 체계를 설명한 게 교라고 할 때, 교외별전. 우리는 경전 외에 별도로 전해 온 거다라는 걸 주장하기 때문에
7:00 이런 교학체계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참나가 있죠. 우리 오온의 자아, 에고, 작은 나, 에고가 참나를 딱 본 순간 이게 견성이죠. 견성하는 순간, 이 참나는 원래 부처예요. 그냥 부처가 아니라 전지전능불입니다. 이거(참나)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죠. 이거(에고)는 시공 안의 세계고. 여기(에고)는 시공 안이고 여기(참나)는 시공이 없다고요. 시공 없는 차원에서는 닦을 수도 없어요. 따라서 1주 안에 있는 부처나 1지 안에 있는 부처나 10지 안에 있는 부처나 12지 안에 있는 부처나 부처는 똑같아요. 선불교는 이 점에 주목해서 우리가 견성한 순간
8:00 우리 주체가 에고에서 참나가 돼버리면, 견성을 해서 참나가 나의 주체가 되면 이 에고는 거들 뿐이고 참나가 주체니까 참나 자리에서는 그대로 부처라는 거예요. 에고의 조건을 신경 쓰지 않고 이제 참나로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식으로 생각해보세요. “이제 내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삽니다” 하는 것처럼 “이제 내 안에 부처가 사십니다” 하는 순간 이게 교외별전 사상이에요. 이 에고를 가지고 얘기하면 1지부터 10지 11지 12지 구분은 다 에고적 구분이죠. 현상계적 구분이에요. 즉 이 전지전능한 불성이 현상계에 어느 정도 드러나느냐는 그 역량에 따라 달라요. 그런데 그 역량에 따라 다른 그 주체, 에고를 놔버리고 얘기하면 견성했을 때 이미 부처인 거죠. 관점을 바꿔보시는 거예요. 근데 저는 이걸 같게 봐요.
9:00 같은데 서로 어느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거를 회통해준 게 지금 보조지눌스님이 고려 중후기에 통현장자 이론을 가져와서 회통을 도와준 거예요. 이거 꼭 알아 두셔야 돼요. 지금 한국 불교가 개판이 됐거든요. 그런데 그 답을 찾으려면요 보조지눌스님의 원돈성불론이나 수심결을 읽으시면 그 안에 답이 다 있는데 답을 놓고도 못 찾아요. 또 막연히 선불교의 견성성불론 이것만 믿고 환상을 품으십니다. 이게 왜 환상으로 작용하느냐? 견성성불론 이론도 정확히 모르는 거예요. 달콤하기만 한 거예요. 이게 한방에 부처된다는 얘기로만 들려요. 원리를 알고 나면요 다 한 얘기입니다. 우주에는 하나의 공부 밖에 없어요. 누구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고 누구는 걸어가고 이렇게 다 이게 다른 거 같죠? 들어가 보면
10:00 공부는 하나의 원리 밖에 없어요. 왜? 마음이 똑같이 생겼거든요. 우리 마음이 다 똑같아서요 다 자기 닦은 만큼 좀 빨라지고 덜 닦으면 어렵고 닦으면 수월하고 이 차이인데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참나는 원래 전지전능합니다. 완벽합니다. 이 에고가 업장이 시커매요. 그래서 빛이 잘 안 드러나요. 지금 밖에 태양의 떠도 우리가 블라인드 치고 커튼 치고 있으면 캄캄합니다. 태양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 마음의 부처가 무능해서 다른 사람 다른 중생들 안에 있는 부처는 되게 전지전능한데 내 안에 있는 불성은 무지무능한가 보다 이게 아니에요. 우주에 불성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서 어떻게 이원성이 있어요? 여기(참나)는 이원성이 없습니다. 여기는 내 불성 남의 불성이 없어요. 그래서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돼요. 당나라 이후 어떻게 불교가 전개해 왔는지를 간단하게만 아시면, 이 정도면 지금 여러분 복잡한 현대불교 이론을 다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11:00 현대에 와서 복잡해진 거죠. 이원성이 없기 때문에 나와 남도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12지 11지가 없어요.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교외별전은 경전에서는 에고 관점에서 1지부터 10지. 1지도 지금 높아요. 1지 전에 뭐가 있죠? 처음에 10신, 10가지 믿음의 단계가 있어요. 그 다음에 10주, 10가지 머무르는 단계. 여기서 첫 번째가 1주인 거죠. 그 다음에 10행, 실천의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10회향, 회향의 단계가 있어요. 총 몇 단계입니까? 총 52위가 있어요. 이것도 학파 따라 조금씩 달라요. 일단 이게 제일 기본입니다.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12:00 등각 묘각. 요 체계를 외워두세요. 이게 제일 기본이에요. 그러면 한 에고가 처음 불교를 믿을 때가 언제겠어요? 여기 1신 때 처음 믿은 거예요. 처음 부처님 믿고 내 안에 부처 있다는 진실을 믿고 도를 닦기 시작해서 1주까지 벌써 왔으면 여기서는 참나 안주, 1주가 그거죠. 내 안에 참나 있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자나 깨나 참나랑 함께 살아가는 경지가 1주예요. 1주까지 오면 여기서부턴 초견성입니다. 그런데 육바라밀을 더 닦고 육바라밀을 더 실천하고 육바라밀을 내 것으로 갖고 있지 않고 그 공덕을 남한테 돌렸을 때 1지에 들어가요. 1지 이때 제대로 된 견성입니다. 뭘 견성했어요? “내 본성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있다”는 걸 알았어요. 1주의 초견성은요?
13:01 “내 본성 안에 공적영지 있다”는 걸 알아요. 제 강의 많이 들으신 분 이런 설명이 좀 익숙하시죠. 그런데 1주 견성 때 공적영지의 참나를 얻고, 1지 견성 때 육바라밀을 갖춘 참나를 얻었다고 구분하지만 실제로 다를까요? 불성이 달랐을까요? 1주 아니라 처음 믿었을 때도 여러분 공적영지 차원의 참나 체험이 가능합니다. 이건 찰나를 체험하더라도, 처음 믿었을 때도 참나 체험합니다. 믿고 기도를 하건 명상을 하건 참선을 하건 뭔가 시공이 초월한 체험을 한 번씩 해요. 사실은 그때 불성 만난다고요. 그게 안착된 거고(1주), 이제 그 불성에 심겨진 육바라밀의 비밀까지 선명히 이해한 것뿐이에요(1지). 이게 다예요. 그런데 실제로 처음 만났을 때 이
14:00 공적영지도 사실은 다 똑같아요. 이게 전지전능 부처예요. 전지전능한 부처를 내가 처음 믿고 가피 받고. 1주에 들어가서 그 자리 믿고 살면서 또 가피 받고. 1지에서 확실히 이 자리는 가피를 받는데 내 에고의 역량이 52레벨이 있는 거지 참나에 52레벨이 어딨어요? 참나가 열심히 도 닦아서 레벨 올립니까? 여러분(에고)이 올리는 거지. 이 모든 게 에고 차원의 에고 놀음입니다. 에고 차원에서 구분되는 거지 시공을 초월한 차원에서는 구분할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 이해하시죠? 제가 평소에 늘 “1주 보살은 공적영지의 참나만 드러나요. 1지 가야 이 육바라밀 양심이 드러나요.” 하는 건 에고의 조건에 따른 구별이지 본질은 저 부처나 이 부처나, 여러분이
15:00 오늘 처음 놀러오셨다가 제가 “몰라 하세요” 해서 몰라 했다가 “헉 이게 뭐지?” 그 부처나 여러분이 12지 돼서 느끼는 부처는 다 똑같은 부처예요. 에고의 업장에 따라 에고한테 다른 가피 다른 영향을 주고 있을 뿐이에요. 즉 태양은 똑같은데 블라인드 색깔이나 그 밀도에 따라 들어오는 빛이나 이런 게 달라 보이는 것뿐이에요. 블라인드를 또 제가 만약에 색깔을 요란하게 하면 또 요란한 빛이 들어오겠죠. 다 달라 보이는 거예요. 각 레벨마다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요 하나의 참나 밖에 없다는 걸 아셔야 되는데, 교학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요 몰라요. 왜 선불교가 치고 나왔느냐? 그 사정부터 말씀 드리면, 교학으로 공부한 분들은 52레벨이 다 다른 줄 알아요. 52레벨을 글로 공부한 분들은, 경전만 공부한 분들은 참나가 다 다른 줄 알아요. 글로 배우다 보면 1주 보살 때 드러난 참나랑 1지 보살 때 드러난 참나가 또 다른 것 같단 말이에요.
16:01 그 꼴이 답답하니까 “너 그래도 바로 부처 만날 수 있어.” 하면 교학자들은 선불교 분들한테 “어허 이 사람들이 공부를 막 하셨네.” 합니다. 1신에서 1주 가는데 원래 만겁 걸립니다. 만겁 닦아야 돼요. 1신에서 1지까지 가는데 1아승기겁이 걸려요. 1지에서 7지 가는데 1아승기겁, 7지에서 10지 가는데 1아승기겁 해가지고 총 3무량겁을 닦아야 10지까지 가요. 이미 시간도 정해져 있고 그 정도 닦음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거죠. 요즘 “1만 시간의 법칙(이상훈, 위즈덤하우스, 2010)” 이런 책 있죠? 만 시간 닦아야 어느 분야의 달인이 된다. 그런 것처럼 불교의 원래 이론이 있다고요. 1아승기겁을 닦으면 1지가 된다. 또 1지에서 7지까지 가는데 또 그만한 시간이 걸린다. 7지에서 10지 가는데도 그만한 시간이 같은 시간이 걸린다. 그 비율이 같다.
17:00 자 요렇게 얘기가 나왔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학자들은 벌써 느긋한 거죠. 경전을 조금 읽으면 느긋해요. 예전에 신림동에 공부하러 들어갔는데 일이 년에 끝내고 나올 생각을 안 하고 딱 들어갈 때부터 선배를 만나면 선배가 “10년은 잡아라.” 왜? “내가 10년째 안 되고 있거든.” 그러면 ‘아 10년 걸리는구나.’ “그러면 제가 이제 어떡해야 될까요?” “바둑부터 배워라. 10년간 버티려면 바둑을 할 줄 알아야 된다.” 그래가지고 이제 빨리 끝내고 나올 생각을 안 하고 10년을 살 생각을 하고 들어가서 연구합니다. 교학자들이 주로 그런 거예요. 빨리 부처될 생각은 안 하고 “내가 지금 40년째인데 부처 불성을 못 보고 있다.” 그러면 위의 선배가 그렇게 지르면 아래는 다 “아 힘들구나. 그러면 열심히 교학을 연구해서 지식이라도 많이 갖고 있자.”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견성이 되나요? 교학 공부가 글로
18:00 빠져서 재미는 있게 하는데 지도 공부하는 거죠. 실제 가본 적은 없고 지도를 멋지게 제작하는 연구만 하고 있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지도 다 던져버리고 “한방에 가는 법이 있어”라고 치고 나온 게 선불교예요. “한방에 그냥 가면 돼. 그냥 몰라 해.” 선문답들이 다 그러잖아요. “부처가 뭡니까?” “그 입 다물어.” 내용이 다 그거죠. 요즘 “아닥하라” 그러잖아요. 아가리 닥쳐라. 선문답이 다 그거예요. “부처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는데 그 입을 탁 다물게 하는 거예요. 왜? 말로 찾지 마라는 거예요. “교학자들처럼 말로 찾지 마라. 말 딱 멈춰 봐라. 판단중지 해라. 그 자리가 부처다.” 바로 들어가는 거예요. 바로 부처를 가르쳐 주려고 교외별전이라는 아주 비상수단을 쓴 겁니다. “한방에 바로 부처될 수 있다. 이런 교학체계랑 상관없이 그냥 부처될 수 있다. 경전 안 봐도 좋다.
19:00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불성을 바로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걸 딱 치고 나오면서, 또 이 선불교가 좀 과한 게, 탁 치고 나오면서 참나를 찾으면 이 모든 체계, 이 에고 놀음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1지 10신 10주 이런 모든 놀음에서 벗어난다. 요렇게 이런 식으로 치고 나온 거예요. 10지 가 봐라. 니가 10지라고 해 봐라. 10지도 더 닦아야 되지 않냐? 그 10지도 견성 못 한 거다. 10지도 부족한 거다. 12지에 비해서는 부족한 거잖아요. 에고의 세계에 들어가면 너는 한계가 생긴다. 그러니까 에고를 벗어나서 참나로만 살면 어떤 한계도 없다. 왜? 거기는 전지전능한 부처 자리 아니냐. 거기 육바라밀 다 들어있다. 다 들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참나만 깨쳐서 참나로만 살아가라. 그 뒤로는 에고 조건은 얘기를 안 해버려요. 그런데 선불교식으로 깨닫더라도 실제로는 어떨까요? 선불교식 논리대로라면 견성 즉시 성불이거든요.
20:01 실제로 다 부처일까요? 육바라밀 다 잘할까요? 아니에요. 에고의 조건이 어디 가나요. 그대로 있어요. 다만 선불교에서는 에고의 조건을 안 보는 거예요. 즉 나는 이제부터 오늘부터 참나로 살기로 한 거예요. “에고는 죽고 참나가 산다”는 관점에서 살아가요. 에고의 부족한 부분을 안 봐요. 난 참나 부분만 주목해요. 그래서 원래 부처는 하나니까 이 공적영지의 마음으로 이 안에 육바라밀도 다 들어있다고 봐요. 다만 교학의 입장에서는 이 단계(1주)에서는 공적영지지 잘 드러나지 육바라밀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선불교 입장에서는 “가만있어도 깨어있는 게 보시요 지계요 인욕이고 정진 아니냐! 깨어서 내가 탐욕 안 부리면 보시요, 나태하지 않으면 정진이요, 남한테 죄 안 지으니까 깨어서 있는 것 자체가 지계요, 나태하지 않으니 정진이요, 화 안 내니 인욕이요, 깨어있으니 선정이고
21:00 안다 모른다도 없으니 반야 아니냐!”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말은 다 맞아요. 그 말 맞아요. 맞는데 밖으로 이 에고를 통해서 육바라밀을 잘 표현하지 못 하지만 참나 세계에 육바라밀이 다 있다는 것만으로 자위하면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선불교가 문제가 뭐냐면 이런 교학의 지리한 논리를 딱 한방에 날려버리고 바로 부처 만나게 해준 데까지는 선불교가 장점이 있고, 그리고 부처로서 바로 살아가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도 좋은 장점이에요. 즉 내가 중생으로서 3무량겁을 고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부처가 됐다고 믿는 거예요. 그 말도 맞아요. 왜? 내 안의 불성 만났으니까. 아니 불성은 시공을 초월한다니까요. 시공을 초월한 관점에서는 불성 만나셨으면 여러분 이미 부처인거예요. 그러나 형이하의 관점에서는 부처가 아니죠.이요 모순 속에 살아가요. 그런데 이때 선불교는 참나 관점만을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돈오돈수를
22:00 주장하는 분들, “한방에 부처 됐으면 끝인 거지. 뭘 더 따져.” 그럼 이런 선불교 관점에서도 사는 동안 실제로 공부가 늘겠어요 안 늘겠어요? 늘죠. 지혜가 놀고 자비가 늘어요. 왜? 에고가 자꾸 참나랑 놀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또 이 레벨이 바뀌어요. 이 바뀌는 것을 이 선불교에서는 에고 놀음이라고 신경을 안 쓸 뿐이지 실제로는 형이하의 세계에서 자기가 닦여요. 그 닦이는 것을 뭐라고 하냐면? 여기(선불교)는 에고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에고를 절대 부정합니다. 법신향상사라 그래요. 법신이 향상되고 있을 뿐이다. 참나가 더 드러나고 있다. 철저히 참나 관점이에요. 에고가 닦였다고 보지 않고 참나가 더 드러나고 있다. 됐죠? 여기도 발전한다는 얘기에요. 발전합니다만 그 발전을 난 이미 부처라고 했으니까
23:00 적극적으로 발전을 설명하면 말이 안 맞잖아요. 이미 부처인데 또 부처가 되어야 되면 안 되니까 이미 부처인데 점점 부처로서 솜씨가 좀 더 노련해진다. 이런 느낌으로 설명하고 끝냅니다. 전 이 관점도 되게 좋아해요. 왜? 학당에 오셔서 여러분 몰라 체험하다가 이 정도는 공부하셔야죠. 제일 기본이 몰라 플러스 뭘까요? 아공 법공의 지혜.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셔야죠. 아공 법공의 지혜라는 게 뭔가요? 에고와 참나의 정확한 구별이죠. 그리고 에고와 참나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 결국 이 둘 간의 관계, 이거 이해하는 거예요. “아! 이건 에고고 이건 참나고, 에고는 참나의 작용이구나.” 이게 아공 법공 핵심이죠. 아공 법공 그러면 어려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참나와 에고의 사정을 이해하는 거예요. 몰라를 통해 참나를 체험하고 참나와 에고의
24:00 사정을 이해하는 게 다예요. 이게 공적영지 1주 보살, 이 정도면 1주 보살이 됩니다. 이 정도면 벌써 10신에서 부처를 만났다고 할 수 있고. 즉 그게 찰나일지라도 안착되면 1주가 되는 거죠. 그 정도 체험이 안착되면 1주가 되는 거죠. 학당에 오셔서 몰라 해서 참나 만나기만 해도 저희가 뭘 드려요? 여기(1신)에 해당되는 게 누군지 아세요? 처음에 이거보다 더 빨라요. 처음에 공적영지를 체험하고 그게 개념으로 정립되죠(체험+개념). 몰라 하다가 이걸 체험만 해도 저희 학당에서 뭘 주냐면 신사 드려요. 신사. 그 이유가 왜냐하면 축賀해주는 거예요. 부처님 만났잖아요.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 만났잖아요. 이해는 아직 못 했어요. 체험에 대한 이해까지 하시면 문사, 학사쯤 되죠. 이해까지 하시면.
25:00 이해되세요? 학사부터는 8급입니다. 신사는 9급이에요. 학당에 오시면 9급도 구원받습니다. 원래 불교이론 체계가 그래요. 이게 지금 선불교와 교학을 합해서 얘기해 드리는 거예요. 선불교에서는 그냥 “이 머꼬?” 하다가 아니면 차 마시다가 “부처가 뭡니까?” 했다가 “야, 차나 마셔.” 뭔가 확 와요. 그럼 벌써 9급인데 이해도 잘 못했어요. 참나를 찰나 만났단 말이에요. 임제스님한테 가서 “부처가 뭡니까?” 하면 와가지고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립니다. 머리가 하얘지겠죠. 선생님이 여러분 멱살을 잡고 흔들 때 어떻겠어요? 이걸 제가 해 볼 수도 없고. 누가 여쭤봐 주시면 제가 가서 막 멱살을 흔들어 보면 그 분 머리가 하얘져요. 판단중지가 일어납니다. 그거예요. 임제스님이 “그거야!” 하고 말 나와요. 찰나지만 뭔 느낌이 있어요. “이건가?”
26:00 이런 잽을 계속 맞다 보면 어느 날 “아!” 할 때가 옵니다. 그 스승하고 계속 같이 지내다가 밥 먹다가 한 소리 듣고. 똥 누다가 한 소리 듣고. 뭐 하다가 한 소리 계속 듣다보면요 “아! 할 때가 이 느낌인가?” 다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러다가 “아!” 할 때, 쉽게 말하면 학당에서 말한 신사 체험을 해요. 신사는 참나 체험만 하신 거예요. “아!” 그걸 아공 법공식으로 이렇게 개념적으로까지 제대로 이해하시면 저희가 8급 드려요. 9급에서는 체험만 하는 거죠. 그것만 해도 귀하다. 왜? 부처를 만났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걸 통현장자가 주장한 거예요. 통현장자가 초발심이 이미 정각이고. 이 얘기가 그거예요. 이게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게 아니라 사실은 에고는 모자라지만 초발심 때 얻는 그 깨달음이 12지 가서 얻는 깨달음하고 사실 같다는 거예요.
27:00 우리 안에 있는 부처가 같은 부처라는 거예요. 그런데 통현장자가 주장해요. 더 나아가서 “처음 믿을 때, 10신초, 1신에서 이미 사실은 그 부처를 우리가 만난다”라고 주장해요. 그 주장 그걸 저희가 이제 설명 드립니다. 저희가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는 거예요. 10신초의 그 만남도 체험적 만남이 있고 이해까지 하는 만남이 있다. 이게 오래 안 가도 돼요. 한 번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찰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죠. 여러분 교회 다니는 분 소원이 찰나라도 하느님 한 번 만나는 거지 하느님을 1시간 이상 만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죠. 찰나라도 만나길 원하죠. 그 만남이 이루어졌다니까요. 그게 첫 믿음(1신) 때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교학체계에서 어렵게 생각했던 이런 성불을 통현장자가 이런 선불교의 도전을 받고 교학 입장에서 화엄경을 가지고 선불교를 완전히 회통시켜준 거예요. 그러면서 선불교한테도 길을 제시해 준 거죠.
28:01 놀라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실은 너희가 화두를 잡고 선문답을 통해 체험하는 그 참나 체험은 10신초에서 이루어지고, 실제로 돈오에 들어앉는 것은 화엄경의 체계로 1주 보살이면 이루어진다. 너희가 성불했다고 하는 그 경지가 이때 이미 교학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너희는 거기서 멈춰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제 나는 돈오돈수 부처됐다고 하는데 끝이 아니다. 실제로는 에고는 안 닦였기 때문에 에고를 닦는 이 지난한 일을 계속 닦아가면서 너희가 말하는 법신향상사가 일어나는 거고. 일반 교학에서는 참나가 자라나는 걸로 설명하는데 그게 아니라 선불교랑 회통해서 원래 이미 부처인데 부처가 부처로서 닦음이 없는 닦음을 통해 불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선불교적 관점을 교학에다가
29:00 써먹은 거예요. 기존의 교학은 에고의 관점에서 보니까 에고가 닦인 만큼 실력이 계속 느는 걸로, 불성이 내 안에서 자라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불성은 이미 완전하고 이미 완전한 불성이 드러나는 거다. 지금 태양이 밖에 있죠. 우리가 창을 열어요. 그러면 태양 빛이 들어와요. 근데 태양 빛을 우리가 만들었나요? 아니죠. 닦음 없는 닦음이라는 게요 에고가 최소한의 노력은 해줘야 되는데 그 노력에 따라서 전지전능한 참나가 드러나요. 그러면 그 참나는 우리가 한 게 아니잖아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하느님의 힘이죠. 하느님의 지혜와 힘이 내 안에 드러나는데 나는 거들었을 뿐이지 내가 한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미 부처라는 걸 알고 난 뒤로는 이 부처의 가피로, 은혜로 살아가면서 에고가 적절히 닦는다는 행이 거들어주기만 하면 온전히 불성은 드러나게 된다. 점점 더 불성은 드러난다. 그래서 닦음 없는 닦음을 닦아야 된다.
30:01 이게 제일 정비된 이론이고 제일 아름다운 이론입니다. 즉 나는 이미 부처지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미 천국은 왔지만 아직 완연한 천국은 아니다. “이미 나는 부처지만 아직 완연한 부처는 아니다.” 선불교는 이미 부처라는 것만 자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교학은 아직 너는 부처가 아니라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통현장자는 이걸 종합한 거예요. “이미 부처지만 날마다 더욱 더 부처가 되어간다.” 이걸 보조지눌이 아름답게 본 겁니다. 이거다. 그래서 원돈성불론을 써서 당시 선불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한테도 얘기해주고 교학에 빠져 있는 사람들한테도 얘기해주는 거예요. 선불교 사람들한테 뭐라고 해요? “너희 견성해도 더 닦아야 된다.” 교학에 빠져있는 사람들한테 “너희 바로 성불할 수 있다.” 견성했다고 믿는 사람한테는 견성이 성불 맞지만 이미 부처된 거 맞지만
31:00 즉 1주가, 초발심이 정각인 건 맞지만 초발심 그대로 정각, 온전한 건 아니다. 지당한 얘기인데 이 지당한 얘기를 주장을 한 게 통현장자고 보조지눌이에요. 이게 우리 고려 때 있었던 작업입니다. 이 작품이 계승되어와서 경허스님, 만공, 혜월, 수월 다 수심결의 도움을 받아서 견성합니다. 그리고 견성 이후의 길도 수심결의 도움을 받아서 잡아요. 원돈성불론의 관점에서 공부 방향을 잡고 갔어요. 즉 “난 이미 부처다”라고 외치시면서도 더 부처가 되기 위해 다 노력하셨어요. 그런데 성철스님이 등장해 가지고 판을 깬 거예요. 다시 선불교적 관점으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부처면 끝이지 돈오면 돈수지 더 닦아야 된다는 게 어디 있냐?” 경허도 처음에 그랬어요. 경허스님도 “선불교 책을 보면, 한방에 부처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바로 부처인데 왜 보조스님은
32:00 돈오 이후 점수해야 된다고 했을까?” 하고 비방하셨다가 본인이 견성하고 나서 체험과 개념을 갖고 보니까 보조스님이 맞아서 송광사에 가서 한 달간 참회 기도했다고 전해 와요. 그러니까 그 이후로 관점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경허스님 제자 중에 만공, 혜월, 방한암스님이 유명한 분이죠. 그 방한암스님 제자가 탄허스님인데, 방한암스님이 돈오돈수 점수에 대해서 써놓은 글도 제가 읽어봤는데 관점이 같아요. 이래요. 그래서 탄허스님한테 그랬대요. “돈오점수를 알아야 된다.” 그래서 이통현장자의 화엄경 이런 거를 조금 번역해주기를 바란 거예요. 그래서 탄허스님이 “할 거면 제대로 하자” 해가지고 이 신화엄론에다가 교가에서는 교학자들이 최고로 치는, 설명 제일 잘했다고 치는 청량국사의 화엄경소초를 합쳐서 그 신화엄경합론이란 책을 10년 걸쳐서 번역하신 거예요.
33:00 아주 우리말 번역은 아니고 한문 조금 알면 읽을 수 있게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해 놨어요. 일단 읽을 수 있게 해놨다는 데 본인이 자부하시고. “난 화엄경 알리려고 여기 태어났다”라고 주장하시고 이 화엄경에다가 생을 걸고 작품을 남기고 가셨거든요. 그런데 그분들도 결국 다 같은 이론입니다. 돈오한 뒤에 이미 부처가 돼서 그 이후로 닦음 없는 닦음. 이미 부처로서 닦는 거예요. 그전의 교학적 입장은 부처가 되려면 3무량겁 뒤에 얘기고 나는 지금 모자란 닦음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통현장자 이래 뭐가 강조되느냐? “넌 이미 부처인데 닦고 있다”는 관점이 강조된 거예요. 느낌 다르죠. 중생 입장에서 3무량겁 뒤에 여러분 부처될 수 있습니다랑, 사실 다음생도 모르겠는데 3무량겁 뒤를 어떻게 알아요? 지금 여러분한테 “이번 생에 여러분은 이미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34:00 부처로서 연륜이 쌓여 가는 것뿐입니다.” 뭐냐면 면허증은 이번 생에 나온다는 거예요. 면허증은 부처 면허증이 이번 생에 나와요. 근데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려면 한 3무량겁 가야 된다. 느낌 다르지 않아요? 면허증 이번 생에 받는 거랑 3무량겁 뒤에 제대로 된 면허증이 나갑니다랑 지금 먼저 면허증은 받고 실력이 점점점점 좋아진다. 부처로서의 솜씨가 좋아질 뿐이라는 관점. 다르죠? 요 관점이 놀라운 관점이다. 이게 고려 중기 이후에 보조지눌스님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이미 다 밝혀졌어요. 교재가 다 나오고 그대로 공부해 왔어요. 그런데 근래에 와가지고 돈오돈수론이 나오면서 그분들은 지금 단순한 교학체계랑 이걸 구분을 못 합니다. 선불교 하는 분들은 교학 체계랑 지금 이런 통현장자나 보조스님의 작업을 이해 못 해요. 이분들이 볼 때는 다 교학적으로 이해해요.
35:00 다 물리쳐야 할 교외별전의 교로만 봐요. 지금 제가 인용한 것 보실래요. 천태지자스님 글 어디서 인용했습니까? 성철스님의 선문정로에서 인용. 욕하려고 인용해 놓은 걸 제가 갖다가 풀어드린 거예요. 그 밑에 통현장자의 신화엄론도 성철스님의 선문정로에서 욕하려고 인용해 놓은 거를 제가 가져왔어요. 이 뒤에 성철스님이 신랄하게 욕합니다. “어디 감히 10주초에 더 나아가서 10신초에 성불을 했다고 망발을 한다.” 성찰스님 논리 보세요. “12지에 가야 부처다. 화두 터지면 12지다.” 이분은 황당한 논리를 전개하십니다. 이해되세요? 아니 원래 선불교라면, 교외별전을 아신다면 아예 신경 쓰지 말아야 돼요. “보조스님이 뭐라고 했건 그건 교과에서 하는 소리고 우리는 한방에 부처될 뿐이다. 1지에서 10지 12지 이런 분별을 우리는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36:00 나와야 되는데 제일 좋은 거 한번 먹겠다고 나오신 거예요. “우리는 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놓고 제일 좋은 거 상석에 “우리는 한방에 12지다.” 여기서 이미 잘못된 거예요. 분별을 안 할라면 에고의 이런 수행 체계를 다 부정해야 되는데, 필요할 땐 부정하시다가 딱 급할 때는 또 제일 좋은 12지만 우리가 먹겠다고 나와 버리면 안 맞는 소리입니다. 실상은 성철스님이 말한 그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가 뭔데요? 정혜가 성성적적해서 원광명한 경지에요. 그게 1주 보살에 해당돼요. 1주를 거치면서 이미 우리 안에서 정혜가 원명합니다. 지난번에 읽어드렸죠. 원돈성불론에 이미 나왔죠. “1주 보살이 되면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고 광명하다.” 보조지눌스님이 주장했어요. 그게 1주 보살이라고 강조했어요. 그래서
37:00 선불교하는 분들은 교학과 굳이 비교하겠다면 체계적으로 비교해야 되고, 그럴 거 아니면 차라리 아예 비교하지 마시라. 우리는 교외별전이다 하고 깨끗이 교학과 어떤 간섭도 하려고 하지 마시라. 어중간하게 섞어서 우리가 12지다 하고 주장해버리면 맞지 않기 때문에 다 틀어집니다. 왜냐? 교학에서 12지는 에고가 완전히 정화된 경지를 말하고, 선불교에서 견성해서 성불했다는 거는 에고를 보지 않는 거예요. 참나가 이미 부처란 얘기를 하는 거예요. 두 개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인데 이걸 섞어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섞으려면 아주 정밀하게 잘 아는 분이 섞어야 되는데 제가 선교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잘 된 작품으로 통현장자의 신화엄론과 보조스님의 원돈성불론을 지금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걸 인용해 와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불교 얘기 좀 했지만 우리가 지금 알아야 될 것은 지금 홍익학당에서는 그럼 어떻게 지도하고 있느냐? 이 방식을 현대적으로 지금 구현하고 있는 데가 없어요. 저희 홍익학당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38:03 학당에 오셔서 등록하면 9급입니다. 배우겠다고 하시면 9급이에요. “몰라” 하다가 여러분 그 날로 체험 가능합니다. 딱 와서 “하루 체험할게요” 하고 와서 “몰라 몰라” 하다가 턱하니 시공도 사라지고 나만 존재하는 체험을 하셨다. 그럼 여러분 사실은 신사급의 체험을 하신 거예요. 우리가 그렇다고 이제 바로 드리지는 않지만 자격증은 좀 진짜로 잘하시나 지켜봐서 드리니까. 아무튼 그런 체험을 하신 거예요 여러분. 일단 그거 엄청 중요한 체험하신 거예요 여러분. 근데 처음에 중요성을 본인이 잘 몰라요. 몇 번 와서 하시다 보면 “아! 이게 참나네. 이게 부처 자리네”라고 자기가 알아요. 개념적으로 다 이해하지 못 해도 이게 중요한 체험이란 건 알아요. “이게 학당에서 말하는 참나를 내가 체험한 거구나!” 이거 알아요. 이거 알 정도 되시면 신사 자격이 돼요. 그리고 거기서 “그럼 한번
39:00 설명해 보세요. 참나와 에고는 어떻게 다른가요? 참나는 어떤 속성이 있고 에고는 어떤 속성이 있고 둘은 어떤 관계인가요?” 여기까지 여러분이 참나를 계속 만나보면서 자명하게 얘기하실 수 있으면 이제 확실하게….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이 1신에서 얻는다” 이게 해오입니다. 해오. 찰나지만 이 선정과 지혜가 원만한, 찰나지만 그 안에 참나에 대한 정확한 선정 체험과 참나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 정혜가 갖추어지면 정혜쌍운이 갖춰지면 “해오”고. 그게 아주 안착을 하면 안주하면 이걸 뭐라 그래요? “증오”라 그래요. 증득할 증자입니다. 이제 여러분 게 된 거예요. 요거는 해오는 이해, 이제 참나를 알 정도는 됐다(해오). 그리고 참나에 아예 들어앉았다(증오). 그러면 이게 학당에서 1급, 1주입니다. 10신은 지금
40:00 이 10신에서 1신 중에 9급도 있고 8급도 있어요. 그러면 한 8급 체험하고 참나에 대한 체험과 이해도 갖고 그게 안착이 돼서 1급이 되고. 이 얘기는 지난 시간에 다 드린 걸 새롭게 다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예전에 다 말씀드렸어요. 유튜브에 “대승 보살의 길을 밝히다” 앞 부분 강의 들으시면 엄밀하게 단계별로 다 구분해서 나와요. 9급 8급 7급의 특징, 5급 6급의 특징 다 나와요. 그래서 1급까지 가면 정혜쌍수, 선정과 지혜가 쌍수 그래도 되고 쌍운 쌍으로 움직인다고 쌍운 해도 됩니다. 정혜쌍운이 안착됐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1주 보살은 이제 참나랑 끊어진다는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라 에고에서 올라와요. 참나랑 멀어졌다는 신호가 올라오면 빨리 참나에 관심을 더 주면 돼요. 아예 끊어질 순 없는 거니까.
41:00 이게 여유가 생겨요. 참나랑 이제 한 덩어리로 살아가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선정에 바로바로 들고. 선정에 안 들더라도 정신이 좀 차려져 있는 거죠. 정신이 차려져서 참나랑 떠났다는 생각이 안 들고 살아가고. 지혜로는 아공 법공, 아까 말한 참나와 에고에 대한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일체유심조,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란 걸 알아요. 에고가 그 정도까지 닦이면 1주라는 거지 원래 참나는 육바라밀 덩어리입니다. 이때도 그럼 육바라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육바라밀이 삐져나오는데 선명하게 이해한 부분이 아공법공이라는 거지 육바라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직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1급 정도 되면 “내 안에 육바라밀 있다”는 것에 대한 체험적 이해는 있습니다. 자명하진 않아도 계속 느껴요. 자기 안에서 육바라밀이 올라온다는 걸 계속 느껴요. 그런데 언제 자명하다고 하냐? 육바라밀 내가 잘했을 때 자명하다고 해요.
42:00 실제로 안에서 나오는 걸 잘 받아 써서 잘했을 때 자명하다고 인정하니까 이미 1급만 돼도 자기 안에 육바라밀 나온다는 거 알아요. 육바라밀을 잘 못 해서 아직 인가를 안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선불교에선 요 정도에서 만족해버려요. 자기 안에 육바라밀 있다는 걸 아니까 잘하는 줄 알아요. 또 “나는 이제 부처니까 더 안 닦아도 된다” 그래가지고 안 닦아 버려요. 그러면 큰일인 겁니다. 보조스님은 그런 분들을 위해 글을 쓴 거예요. 원돈성불론.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또 교학자들한테는 “육바라밀만 닦고 있지 마라. 견성을 해라.” 그리고 선가한테는 “견성만 하고 있지 마라. 육바라밀을 해라.” 그래서 서로 바뀌어야 원만해진다. 그 얘기를 지금도 못 한다니까요. 한국 불교에서 이 얘기를 시원하게 못 한다니까요. “견성한 뒤에는 닦음 없는 닦음을 통해서 법신을 더욱 드러내서 육바라밀을 이 땅에 구현해 봐라.” 이 말 하면요 “더 닦으라고? 우리는 돈오돈수인데 한방에 끝인데.” 이딴
43:00 말에 집착한 소리나 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보통 돈오도 못 했다는 게 문제예요. 돈오도 못 한 분이 환상 속의 돈수를 얘기하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진짜 돈오하신 분은 알아요. 진짜 돈오를 하면 알아요. 가짜 돈오한 분들은 몰라요. 자기가 끝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가짜 돈오입니다. 왜? 그게 돈오는 맞는데 제대로 지금 전후좌우가 안 보이시는 거예요. 돈오하고 한참 지나서 전후좌우 보고나면 자기가 깜짝 놀랍니다. 자기가 예전하고 똑같다는 걸 알아요. 자기 업장이 안 털렸다는 걸 알아요. 그때 놀라는데 그런 놀라는 체험도 못 해 봤다는 얘기거든요. 환상 속에 계신 거죠. 신비체험을 통한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그 신비체험이 꼭 무슨 초능력이나 이런 게 아니라 참나 안에서 살아가는 그 신비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신비 속에서 그게 다인 줄 아는 거예요. 실제로는 자기의 그런 묵은 습관 묵은 사고 이게 그대로 있는데도
44:00 이건 내 꺼로 안 보고 “나는 참나다” 하고 에고를 무시하면서 참나로 살아가시는 거죠. 탄허스님도 그 얘기하세요. “선불교에서는 닦음을 신경쓰지 않는다. 참나 자리만, 시공 끊어진 자리만 얘기한다.” 현상계,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시공 안에 있는 그 사람이 보입니다. 본인은 시공 넘어선 자기를 보는데 그런데 문제는 중생들은 그 사람한테서 뭘 봐요? 시공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언행이 개판인 거예요. 미투 운동에 안 걸리면 다행일 정도의 그런 언행들을 실제로 하고 계신 거예요. 견성했다는 사람들이 도로 미화되고 있을 뿐이에요. “저 사람이 도를 얻어서 저러나보다. 저거 성희롱인가? 나를 깨우쳐주시려고 저러는 거겠지.” 이렇게 신자들이 엄청 이해하고 가고 있는 거지 그분들 자체는 사실은 변한 것 없이 가고 있는데 본인은 변했다고 생각해요. 이해는 돼요. 왜? 본인은 본인 안에 있는 시간 끊어진 자리만 보고 있거든요.
45:01 자기는 지금 엄청 부처가 됐다고 느끼는데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느끼는 이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모순을 타파하려면 “나는 이미 부처지만 날마다 더 부처가 돼야 된다”는 사상을 가져야 돼요. 그게 제가 쓴 수심결에 나오고 제가 이번에 원음방송에서 강의한 거, 원음방송이랑 공동 제작한 게 있어요. 원불교쪽 가서 강의해가지고 지금 유튜브에 2편 올라갔습니다. 그거 총 8편일 거예요. 하나씩 올려줄 테니까. 수심결 보시면 그 안에 이제 보조스님의 이야기로 이런 사정 얘기가 잘 나오니까 꼭 참고하시고요. 이게 다 연결됩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이 강의의 핵심은 9급에서 1급 가는 내용을 지금 되게 더 초점을 두고 있어요. 왜냐? 9급에서 1급 가고 1급에서 1단까지 가는 거, 1지가 1단이거든요, 1단까지 가는 것에 되게 중시합니다.
46:00 1단부터 10단 가는 과정은 화엄경에서 제가 4년에 걸쳐서 다 해드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는 9급인데 화엄경은 1단부터 시작한다는 게 문제에요. 그럼 이게 안 맞아요. 제가 최근에 어떤 블로그를 봤는데 탄허스님이 번역하신 통현장자의 신화엄론에 더 추가한 내용을 신화엄경합론이란 책이요 지금 사시려면 150, 160 그래요. 제가 이번에 전세한다고 대출도 받고 그래서 질렀죠. 화엄경 학당에 와 있어요. 큰 돈, 책을 100만 원 넘게 사니까 세계관도 달라지는 것 같고. 재미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저도 책 덕후인데
47:01 100만 원 넘는 건 쉽게 못 지르겠는데 탄허스님이 생을 걸고 하신 건데 저라도 꼭 이해해 드리고 싶어서 사서. 핵심 내용은 다 아는데 꼼꼼히 한 번 읽어 드리고 싶어서 샀어요. 또 제 대학 때의 소원이요 도서관 좋은 자리 잡고 탄허스님이 번역한 경전 화엄경이나 이런 거 보면서 커피 한잔 뽑아서 그것 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이번에 그 소원을 이루게 생겼는데 화엄경 강의도 요즘 관심이 가는 차에 그 체계에 다시 제가 “얼마라고 그랬죠?” 다시 알아본 거예요. 예전에 비싸서 아예 쳐다도 안 봤는데 그 말이 또 저를 자극했어요. “한 명이라도 이 책을 알아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들을 괜히 들어가지고 며칠 죽 그걸 보는데 참 고생해서 해놓으신 거죠. 그 핵심 내용은 이미 학당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 탄허스님이 생을 걸고
48:00 화엄경을 번역하려고 했던 게요 요거 얘기하려는 거예요. 방금 제가 말씀드린 그것, 여러분 다 아셨죠. 여기서 하고 있죠. 하고 있다는 게 제가 또 뿌듯했어요. 그분이 평생에 하고 싶었던 것은 그걸 알리고 싶어서 화엄경을 번역하고 알리고 한 건데 지금 일어나고 있잖아요. 바로 오면 불성 만나게 해 드리고, 시공 끊어진 자리, 생각 끊어진 자리 만나게 해드리고, 그 자리를 부처로 받아들이고, 그 자리와 함께 어떻게 살아가는지? 육바라밀 어떻게 닦는지? 그런 걸 저희가 다 준비해서 해드리잖아요. 그분 말씀 들을수록 저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뿌듯해지기도 그랬고. 이 얘기만 하고 5분 쉴게요. 탄허스님은요 이 신화엄경론이나 유불선 책 다 번역하셨죠. 제가 대학 때도 그분의 노자도덕경을요 그때 저한테 진짜 큰돈이었어요. “왜 이렇게 책이 비싸.” 하면서 투덜거리면서 그래도 안 살 수가 없어서 그때 돈으로 또 꽤 제가 낸 거 같아요.
49:01 대학 때 그거 사서, 노자도덕경이 상하 2권인데 그거 들고 왔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노자 번역할 때 제일 도움된 책이 탄허스님의 노자도덕경이었습니다. 거기 중국 고대의 웬만한 주들은 거기다 번역해 놓으셨어요. 국한문혼용식으로 많이 했지만 보면 다 알 수 있게. 거기서 노자도덕경에 대한 기존의 모든 풀이를 제가 한 눈에 착 보는 거는 탄허스님 책으로 도움 받아서 했어요. 물론 제 입장은 또 좀 다르지만 그 책 도움을 엄청 받았습니다. 예전에 탄허스님 노자 딱 들고 노자 풀이 제가 DVD 강의 찍을 때 한 일이요. 다음 강의 전에 준비하러 탄허스님 노자 그거 하나만 딱 들고 명동의 커피숍 딱 가서 혼자 딱 펴고 오늘은 몇 장, 노자가 총 81장이잖아요. “오늘 최소한 두세 장은 끝내고 가야 된다” 하고 거기서 그걸 토대로
50:00 제가 명상을 하고 사색해서 답을 찾아냈거든요. 그런데 재밌는 게 탄허스님도 공부하실 때 번역하시고 그 외 시간은 다 참선이었어요. 누가 인터뷰를 했는데 예전 학당에도 그거 캡처된 사진 올려놨어요. 다큐에 나왔어요. “경전 번역 외에 뭐 하시냐?” 하니까 “참선하지.” 하면서 “생각 없는 자리에 들어가는 그 공부, 생각 없는 공부가 제일 큰 공부야. 생각이 있는 공부는 그것만 못 해.” 하면서 생각 없는 데 들어갔다 나오신다면서. 제자들 증언이 경전 번역하다 막히면 딱 놓고 또 생각 없는 자리에 들어갔다 나와서 풀고. 하루 종일 이것만 하세요. 손님 접대, 번역, 참선. 이걸로만 살아가신 거예요. 탄허스님 모토가 저랑 완전히 다릅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일어나라.” 저는 자다가 눈 뜨면 웬 떡이냐 하고 한 번 더 자는 행복감을 누리는데 그분은 저녁 8시에 딱 주무셔서 2시간을 자건 3시간을 자건
51:00 자다가 눈 뜨면 딱 일어나세요. 다시 참선, 번역. 완전한 덕후의 삶이죠. 그분 화엄 덕후십니다. 화엄 덕후. 그래서 제가 인정해 드리는 분이라. 제가 스님들 중에서, 근래의 스님들 중에서 제일 인정하는 분 중에 한 분이기 때문에. 다른 스님들은 참나 체험이 진하면 개념이 약하고 다 이래요. 뭔가 부족해요. 체험은 맞는데 개념이 틀어져 있거나. 이분 같은 경우는 자기가 정확히 체험하고 개념화를 정확히 하신 분이기 때문에 제가 존경하죠. 그 책을 산 소감도 그런 게 쌓여서 저도…. 대학 때, 심지어 대학교 4학년 때요. 린포체랑 둘이 신촌에 가면 “민들레 영토”라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초창기 민들레 영토 찻집이 있었어요. 심리상담도 해주고 둘이 앉아서 심리상담 그날 받구요.
52:00 아니면 대학교 4학년 되면 우울하잖아요. 이제 뭐해야 되나 하고. 그래서 마침 누가 와서 이제 도형 그려 달라기에 그리니까 설명도 해주더라고요 듣고. 하여튼 뭐 제 성격 아는 것도 좋지만 “둘이 뭐할 거냐?” 그 얘기 하다가 제가 “야 탄허스님처럼 유불선 경전을 싹 한 번 번역해 보려고.” 제가 그분 뵌 적은 없지만, 꿈을 꿀 때도 탄허스님이 사신 걸 보고 저도 많이 힘을 낸 거니까 저한테 많이 도움을 주신 분이라서. 봉우 선생님과 함께 많이 도움 주신 분입니다. 봉우 선생님이랑 또 탄허스님도 잘 아세요. 그 얘기를 저도 들어서 뭔가 더 친근하게 느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분들이 그렇게 알리고자 했던 게 “생각 없는 자리 들어가면 바로 부처고 부처로서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53:00 닦음 없는 닦음을 실천하라”는 거예요. 계속 육바라밀 하면서 닦되, 열심히 닦되 난 원래 부처라는 걸 알고 원래 닦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 열심히 닦는 모습. 이게 인간의 길이라는 겁니다. 이 미묘한 감각을 아신 분들이 계셨다는 게 저는 너무 든든하고. 또 같은 방한암스님 제자에 대행스님 계시잖아요. 탄허스님이 승적 없으면 안 된다고 대행스님을 다시 승적 회복하게 하는 거 다 도와 드리고 했죠. 대행스님이 원래 승적이 사라졌는데 탄허스님을 통해서 다시 승적 회복하신 걸로 알아요. 그런데 보세요. 대행스님이 “내 안에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전지전능하다. 주인공한테 다 믿고 맡겨라”는 말이 나오려면 그 이론적 배경이 뭐겠어요? “견성을 못 했어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전지전능한 원만한 부처가 중생 안에
54:00 들어있다”는 그 믿음이에요. 그 철학이에요. 그걸 전제해야만 우리가 주인공한테 믿고 맡긴다는 게 가능합니다. 안 그러면 교학적으로 생각하면 내 레벨에 맞게 참나가 드러날 뿐이라면, 그래서 나는 원만한 참나 원만한 부처를 내 안에서 못 느낀다면 어디다 믿고 맡기겠어요? 믿고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안에는 전지전능한, 즉 내가 못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 내 안에는 전지전능한 원만한 부처가 있다는 걸 전제해야만 가능한 겁니다. 다 같은 철학이라는 거예요. 그 철학의 응용은 무궁하구요. 우리가 알고 쓰고 있는데도 무슨 원리로 그렇게 쓰는지를 설명해주는 게 지금 이런 신화엄론이나 보조스님의 원돈성불론의 주장입니다. 이게 진짜 감사한 일인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한방에 부처된다는 쪽에 관심을 돌리는 게 제일 안타까운데 또 그분들이 한방에 되지도 않으세요.
55:00 생을 걸고 한다는데 된다는 분 못 봤어요. 그래서 저는 권합니다. 홍익학당에 오셔서 “몰라” 체험해서 그게 최상승선이니까 몰라를 통해 참나 만나시고, 육바라밀 공부법 배우시면. 저희가 학당에서 신사 인정해 드리는 기준이 이거죠. 참나 체험하셨는가랑 육바라밀 노트 쓰실 줄 아는가? 양심 노트 쓰실 줄 아는가? 이게 다예요. 그러면 여러분 이미 부처랑 만나면서, 부처랑 대화하는 법은 육바라밀로, 부처를 만나는 건 “몰라”로. 자 여러분 늘 대통령님과 함께 살지 않아도 대통령님을 원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몰라”라는 팁이 있고 대통령님과 올바르게 대화할 수 있는 양심분석법을 갖고 계시다면요. 지금이 대통령이 엄청난 빽이 되는 시대는 아니죠. 아무튼 든든하지 않으세요? 이게 근데 우주 대통령이에요. 우주 하느님이에요. 우주 하느님을
56:00 수시로 만나고 올바르게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법을 아신다면 문제 해결된 거 아닙니까? 찰나면 뭐 어때요. “1주는 되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찰나찰나 만나면 되죠. 뭘 계속 만나려고 하세요. 계속 만난다고 뭐 특별할 게 있나요. 그 부처라면 어차피 그 부처라면 여러분이요 하루 종일 정신팔고 있다가도 지금 “몰라” 하는 순간 그 자리가 오늘 하루 종일 만났어도 그 자리예요. 그러니까 신경도 쓰지 마시고. 이것도 에고 놀음입니다. 찰나니 짧으니 기니 에고의 세계에선 따져야 맞는데요. 본질만 바로 얘기하자면 지금 “몰라” 하면 바로 부처님 하느님 만나잖아요. 그리고 양심분석하면 그 분의 의도, 하느님의 의도, 부처님의 의도 읽어내실 수 있잖아요. 그럼 된 거예요. 그럼 인류는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신사면 구원받은 거다”라는 얘기를 요즘 하고 다니는 겁니다.
57:01 신사만 되셔라. “몰라” 해서 참나 만날 줄 알고, “나 몰라 하면 참나 정확히 만날 수 있어” 이 말 하실 수 있냐구요? 그리고 참나 만나고 나면 “나 양심분석 그거 하면 자명 찜찜이 선명해져.” 그러면 여러분 끝난 거예요. 구원받으신 거예요. 그게 짱이에요. 바로 1주까지 안 가고 10신초에 우리는 사실 다 이미 구원받을 수 있다. 이분들의 주장에 근거해서 제가 주장해보는 겁니다. 오늘 지금 여기까지 하고요. 지금 우리 1주 얘기하다가 지나간 거 다시 한 번 훑어본 거예요. 1급의 경지 얘기하다가 9급에서 1급까지 얘기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더 살펴봤습니다. 왜? 이왕이면 통현장자나 보조지눌스님들 얘기 나왔을 때 이 얘기는 한 번 꼭 드려보고 싶어서 제가 드렸습니다. 예, 5분 쉬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5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