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2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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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대승보살의 길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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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강의일자 2017. 12. 02. 土.
게시일자 2018. 09. 14.
동영상 길이 49:36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TgzJ4EDR47U



(00:08) 성령이 나를 리드하는 삶을 살고 싶으시면 이런 단계를 다 거치지 않고 어떻게 성령을 각성시켜요? 성령이 갑자기 한방에 딱 와서 나를 변화시켜줬으면 하는 그런 사심을 갖고 있습니다. 안 그래요. 성령 처음 만나도 성령과 금방 헤어져요. 성령 만났을 때는 하느님의 영적인 어떤 지혜가 와요. 그것도 그런데 금방 끊겨요. 그 느낌 사라지고 나면 인간적인 지혜로 그걸 채웁니다. 원래 신빨 떨어지면 책 보고 열심히 외우는 거예요. 그런데 단계가 깊어지면 만남이 자꾸 깊어져요. 성령의 은혜 안에서 한 시간씩 머물 수 있고 그 안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우는 거예요. 관점을 배우는 거예요, 올바른 관점을. 내가 마음대로 보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뿌리, 여기를 하느님이라고 바꿔서 이해해보세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힘을 배우는 게 다예요, 지관쌍운은. 하느님 안에 일단 머물 수가 없는데 본인 안에 성령 있다는 걸 모르는데, 무슨... 8급 논할 수도 없어요, 대부분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 오셨을 때 잘 만나신 분들도 계시는데요, 대부분은요 지금 성령 느껴지세요, 그러면 다 당황하십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심하게 구나.” 뭐 이런 표정이 되세요. 지금 성령 안 느껴지시면요, 예수님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나 있어서, 항상 함께 한다고 얘기하시거든요. 그 정도 안 되면 논할 수가 없어요. 지금 1급 단계 정도 되면 그 정도 가요.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보다 부족해서 그렇지, 하느님과 함께 한다, 이런 건 1급에서 이미 끝나요.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내 안에 있어서 내가 하느님으로 인해서 보고 듣고 말하고 산다, 다 나와야 돼요. 이게 법공이거든요. 이 말 다 나와야 돼요. 나의 존재의 뿌리가 하느님이라는 걸 모르고 사람들은 그냥 믿고 있는 거예요. 개념적 이해만 갖고 있어요. 체험적 이해가 있냐는 거죠. 체험적 이해라는 건요, 내가 하느님과 합일되어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자연스러운 이해입니다. 영적인 이해. 세상의 눈으로 보던 거랑 완전히 다른 상황. 하느님 관점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끌고 가시는구나, 이거 다 보여야 돼요. 내가 하느님이 되어서 보여야 돼요. 내가 하느님의 자녀니까 내가 알 수 있어요. 우리 성령을 통해서, 바울이 그랬죠, 하느님이 아는 것 성령을 통해서 우리도 다 알 수 있다고. 그 하느님 관점을 내가 알아야 돼요.

(02:49) 지금 이런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성령을 부흥했네, 성경만 외우고. 아니면 “믿습니다!” 충성 경쟁을 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다 부질 없는 거죠, 그건. 에고한테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 걸 통해 또 에고는 자기 삶을 어떤 방식으로 꾸려나갑니다. 에고한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요, 지금 이 영성 공부라는 측면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얘기들이에요. 그것은 그냥 아무거나 믿고 가시는 거랑 똑같아요, 그건. 꼭 하느님일 필요도 없다는 거죠, 그건 이미. 에고한테 그런 효과만 발생하면 뭐든지 가능한, 그냥 에고의 위안책일 뿐이에요. 하느님으로부터 진짜, 하느님의 영빨을 받아서 살고 싶으시면, 하느님을 만나야 돼요. 별수가 없어요. 그 하느님 안에서 내 삶을 하나하나 점검해야 돼요. 이 과정이에요. 불성을 만나고, 내 관점을 바꾸는 거예요, 지관이라는 것은. 내 관점을 뜯어고치는 거예요. 그동안 에고의 관점으로 살아왔던 것을요 참나를 안 만나면 뜯어고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뜯어고치실 건데요? 참나를 만나지 않고서. 경전에 나온 대로 뜯어고친다고요? 그건 안돼요, 왜냐? 외우시는 거지, 개념적 이해일 뿐이에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몰고 가는 것은 그냥 감정 뽕을 맞으시는 거지, 별 도움 안 돼요. 그냥 여러분이 누군가한테 되게 충성하면, 또 그것대로 살면 다른 맛이 생기죠. 그게 다예요. 그거 가지고 하느님하고 더 친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믿습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방송을 보고 유튜브 틀어보고 놀란 게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걸로 경쟁을 시키더라구요. 믿고 안 믿고는 별 의미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믿습니다!” 전 무서울 거예요. 뭘 믿겠다는 건지. 제 말은 이해를 못 하시는데, “믿습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님이 하시는 말은 다 맞을 겁니다. 믿습니다!” 제일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 저랑. 그냥 제가 “아!”하면 “어!” 해주는 게 소통이 된거지, 이해가 안 되는 과정에서 믿음이란 건 정말 무섭습니다. 맹목적 믿음이란 건. 노예 상태라구요. “믿습니다!” 상태는 뭔지 아세요? 노예 상태예요, 노예. 그런데 성경에 마침 좋은 구절들이 많아요. “나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봐, 종이라고 되어있잖아. 종이 어디 대들어? 주인이 말하는데 종이 어딜 대들어?” “주인마님이 아들한테 물려주겠다는데 어디 종들이...” 자기들이 종이 아닌 줄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착취당하는 거예요. 다 같이 종이면 가난한 날의 행복이 있는 건데, 같이 못살다 보면 또 거기 행복이 있는 건데. 누군가 하나는 그걸 악용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종입니다. 종입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주인 행세를 하는 놈이 나온다니까요. 아주 쓰레기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남 피 빨아먹는 존재. 남들이 진짜 힘들다고 할 때 거기다 빨대 꽂는 애들이 있어요. 피도 눈물도 없죠. 그런 존재들이 지금 한국 사회 정치, 종교 다 리더를 하고 있어요. 제가 보면 놀라요. 아니, 어떻게 마구니들이 앉아있어요. 일반인도 아니고 마구니들이 앉아있고, 일반인들이 거기 따라가고 있어요. 이 구조가 어떻게 생기는지 제가 너무 궁금해서 연구해본 거예요. 저게 왜 저렇게 된 건지.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해도 안 되고, 처음에는. 그런데 인간이 그렇구나, 약하구나, 하는 거죠.

(06:17) 그래서 성령 아니고는 답이 없다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연구해도 성령 만나셔야 끝나요. 견성하셔야 끝나요. 뭐, 다른 말로는요, 여러분은 너무 약합니다. 왜? 여러분 업대로만 판단하고 계세요. 기존의 고정관념대로. 고정관념을 날릴 거는 참나 밖에 없습니다. 별수 없어요. 참나 한 번 딱 만나시면 고정관념이 확 날아가요. 그 정도 무서움이 있어요. 이거 아니고는 답이 없어요. 어둠 속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멋진 말을 하든 의미가 없어요. “야, 지금 우리는 어디 있을까? 집이 얼마나 좋을까?” 서로 상상해봤자 부질없죠? 캄캄해서 안보여요. 근데 해 딱 뜨면 끝나요. 뭐 말도 필요 없어요. 망상도 필요 없어요. 해 뜨면 그냥 끝나요. 있는 그대로 실상 보면 끝나요. 입 딱 다물어집니다. 근데 캄캄할 때는 별의별 망상을 다 해보는 게 사람이죠. 별수가 없어요. 안 보이는 데 어떻게 해요. 이런 추측도 해보고, 저런 추측도 해보고. 그러니까 그렇게 캄캄한 중에 모여서 경전 토론을 하고 뭘 하고 한들, 부질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누군가 멋진 말을 해도요 “와, 말 멋지네. 그런데 진짜일까?” 끝없는 이 의문은 안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계시면 진짜 죽일텐데.” 뭐 이런 얘기들만 계속 하다가 날 딱 밝아지면 탁! 그 어디, 만화에 있던데요. 팩폭이 무서운 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아가리를 닥치게 만드는 힘이 있대요, 팩폭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실을 마주하면, 진짜 우리가 진리를 만날 때 팩폭 당하는 거예요, 여러분. 참나를 딱 만났을 때 팩트폭격을 당하는 거예요. 에고가 할 말을 잃어버려요. 에고의 아가리가 딱 다물어집니다. 이게 자명이라는 거예요. “아!” 나올 말이 비명 소리죠. “아!” 어쩔 거예요? “아!” 이건데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반야라고 하는 게, 반야는 고전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 진실 실 자, 여실지. 반야는 여실지다. 실상 그대로의 지혜. 팩트 그대로의 지혜라는 거예요. 이게 다예요. 그러니까 이 우주가, 이 우주의 팩트가 뭔지 알면 끝나는 거예요, 반야는.

(08:39) 그런데 머리가 좋은 사람은 팩트를 마주했을 때요, 뱀을 마주했을 때 뱀 다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뱀 다리를 그려요. 그래서 과해서 어긋나고요. 모자란 사람은 팩트가 이해가 잘 안되서 어긋나고요.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들은 팩트만 받아들여야 하는데 더 나가요. “어, 팩트 뭔가 좀 아쉽네. 다리를 좀 더 보태볼까?” 그래서 머리가 과해도 안 되고 너무 좋아도 안 되고, 너무 안 좋아도 안 돼요. 진짜 지혜는 뭐라구요? 있는 그대로 알고 딱 멈추는 게 지혜예요. “이거네!” 하고 멈추는 거. 제가 머리 과한 사람들도 만나봤는데, 아이큐만 좋은 거죠. 실상은 모르고 머리만 좋으니까 진실을 계속 왜곡시켜요. “이게 이거야!” 거기서 못 멈춰요. “그러면 이러고 이러고 이러겠네요?” “아니, 그건 팩트가 아니야.” “이거야!” 이 말이 안 됩니다. 사실 모자란 사람보다... 제가 볼 때 머리가 좀 안 좋은 게 더 좋아요. 머리 과한 사람은 제가 성공 확률이 거의 낮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진실을 얘기해도 벌써 머리가 딴 데 가 있어요. 그런데 모자란 사람들은 막 알아들으려고 노력이라도 하잖아요. 이쪽은 이미 자기 세계에 가 있어요. 제가 붙잡아도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에 붙잡을 겨를도 없이 떠나버려요. “진실은 이거야.” 하면 “아!” 하고 가버려요. 그리고 자기가 이미 말도 안 되는 집을 엄청 지어놔요. 그리고 그 집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부수지도 않아요. 더 힘들어요. 자기가 이미 이론을 많이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이론을 못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사실은 나중에 만듭니다. 그런데 이미 만들어버린 사람은 부수기 참 어려워요. 그래서 과유불급이라고 과나 불급이나 똑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어떤 관점에서는 과가 훨씬 안 좋은 부분도 있더라구요. 과했을 때 오히려 더 힘든 경우들을 전 많이 겪었거든요. 아이큐는 다 끝내주게 좋은 친구들인데, 가벼운 일상의 대화를 이해 못 해요. 설명이 안 돼요. “이건 이거잖아.” 이 얘기 이해 안 돼요. 이미 머리가 딴 데 가 있어서. 그래서, 적당히 모자란 게 좋다.

(10:54) 근데 중요한 것은 계속 모자라게 있으면 안되구요, 팩트를 정확히 이해하는 그 힘이 중요합니다. 팩트. 그래서 성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여러분, 팩트를 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믿음은 꽝이라는 거예요. 성령을 못 만났죠? 그럼 팩트를 말할 계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꽝이라는 거예요. 불성을 못 만났어요. 그럼 논할 수가 없잖아요. 불성을 안 만났는데 어떻게 아공, 법공의 지혜를 논해요. 아까 아가리 얘기 나왔죠? 아무튼 다물고 계셔야 돼요. 그런데 이분들이 떠들어버려요. “내가 견성은 안 했는데, 내가 웬만큼 알지.” 막 떠들어요. 이 짓을 멈춰야 되는데, “내가 견성을 못했는데, 내가 성령은 못 만났는데 죄인들은 확실히 심판할 수 있지.” “내가 견성은 못했는데, 누가 견성했는지 안 했는지는 내가 알아낼 수 있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입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고, 다 죽여버려요, 이런 존재들이. 그분들은 선의로 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세게 하는 거예요. 본인이 선의로 했다고 해서 악업이 아닌 게 아니에요. 선의로 한 게 결국 남한테 다 피해를 줬으면 악업인 거예요. 그분들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날려버리고 있는데 “나는 선의로 했어.” 이게 말이 됩니까? 실제 그런 분들이 너무 많아요.

(12:20) (성령을) 만나셔야 돼요. 만나지 않으면 팩트인지 아닌지, 여실인지 아닌지, 여러분이 무슨 수로 판단하실 거예요? 현상계 일이라면 가서 확인하면 되죠? 영적인 일이라면요? 명상하셔서 확인해야 돼요. 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분들도요, 믿음을 강조하는 건 정말 하급 신앙입니다. 충성 강조하는 건 하급 신앙이에요. “너 나한테 충성해, 안 해? 너 나 믿어, 안 믿어?” 이건 정말 하급이죠? 아무것도 준 게 없는데, “믿어, 안 믿어?” 까불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귀하노라!” 그러면서 계속 충성 시험을 하는데요 팩트를 보여주세요. 진정한 목자라면, 성령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본인이 바보 아닌 이상은 팩트를 확인할 수 있게 돼요. “아, 그렇구나.” 그럼 끝나요. 서로 진실을 가지고, 서로 소통하면 끝이에요. 억지 힘을 쓸 필요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건. 정말 자명하고 쉬운 길이에요. 그런데 어려워진 이유는 팩트를 모르는 사람들이 지껄이기 시작하면서 어리석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거에 얼마나 화가 나셨냐면, 옛날 성현들이. 노자에 보면 “감히 안다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함부로 아가리를 열지 못하게 하겠다!” 하는 식의, 강력한, 노자에서 제일 센 얘기 나오는 데가 그거예요. “감히 안다고 하는 것들 입 못 열게 하겠다.” 왜? 얘들이 입을 열면 다 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맘대로, 팩트가 아닌 걸, 맘대로 진실처럼 떠드는 애들 때문에, 일체 중생이 다 헤매고 있다. 진실만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진실만 얘기하려면 진실을 알아야죠. 저희는 진실만 얘기하자는 것만 강조해도, 또 여러분, 답답하시겠죠? 진실을 모르는데. 그러니까 만나게 해드리는 거예요.

(14:07) 그래서 8급에서 1급까지 오는 동안 참나에 대한 만남이 깊어지고, 그 만남에 기반해서. 자, 보세요. 선정에 기반해서 관을 닦으셔야 돼요. 선정을 넘어서서 가면 개념적 이해에 빠져버립니다. 확실하지 않아요. 자, 선정은 햇빛이고 관은 달빛이에요. 왜? 이 햇빛을 받아서 달빛이 이루어지죠? 여러분, 선정을 하셔야 관에 빛이 들어옵니다. 선정을 안 하고 관 공부 한다고 경전을 보고 계시면 달빛도 없는 밤에 혼자 추론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선정을 하면 태양을 만나죠? 직접적인 체험이 태양입니다. 태양을 만나면 달에도 어떻게 돼요? 달에도 빛이 들어와요. 태양이 비추면 달이 환해져요. 그 환한 개념을 가지고 보는 게 반야입니다. “이건 이렇고, 이건 이렇구나.” 하고. 그런데 짧다는 게 햇빛이 금방 끝나요, 8급에서는. 그러면 다시 캄캄해져요. 캄캄한데 아까 좋았던 기억은 있죠? 밝을 때 판단했던 것들은 있죠? 그 느낌은 있죠? 그걸 가지고 또 머리를 쓰니까 그전하고는 달라져요. 이제 확실한 체험에 기반, 팩트에 기반해서 추론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점점 깊어져요. 이땐 아직 약한데 점점 깊어지다 보면 체험과 지혜가 딱 맞아떨어져요. 그래서 나중에는 태양빛이 은근히라도 늘 들어오고 늘 정확한 이해가 함께하게 됩니다. 이게 짱인게요, 늘 선정상태에 여러분이 계실 수 없어요. 지금 태양은 밖에 떠 있지만 우리가 태양을 보고 있진 않죠? 이런 것처럼, 밝긴 하지만, 깨어서 살아가긴 하지만 늘 참나에 올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정 단계가 상당히 약해져 있어요. 그런데도 이미 깨어있음 속에서 확인한 지혜들이 생생하기 때문에 1급까지 가면 뭔 일 생기면 지혜가 먼저 출동해서 해결해 버립니다. “그건 진실이 아니야.” 하고 강력하게 그 지혜를 선언할 수 있는 힘이 엄청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뭔 일이 생기면 알약이 바이러스 잡듯이, 문제 들어왔다 하면 바로 지혜가 출동해서 요격해버려요. 그러면서 여러분 마음이 선정으로 강해져 버려요. 또 선정에 들면 지혜가 자동으로 출격해요. 지혜가 먼저 나가기도 하고 선정에 들면 따라오기도 하면서 이게 지관쌍운이에요. 하나만 닦아도 하나가 따라오는 정도까지 닦아놔야 명상에 들어도 지혜가 함께하고 뭔 일 생겼을 때 지혜로운 판단만 해도 내면이 깨어나 버려요. 이 정도 되면 1급입니다. 이게 자유자재되면. 1급만 되면 부처 다 된 것처럼 보조스님이 얘기할 만하죠? 아직 6바라밀은 제대로 못했어도 이미 이 정도면 6바라밀 판단도 잘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이 정도만 되면 고속도로 통과했다.” 라고 보조스님은 이미 고속도로 통과한 것처럼 얘기하세요. 8급, 7급이 ‘해오’, 2급, 1급이 ‘증오’ 해가지고, 여기서 이미 돈오는 다 한 걸로. 그리고 점수가 남은 것 뿐이지 지관쌍운 갖춰지면 보살되는 길에, 우리 식으로 말하면 톨게이트 통과했다, 라고 보조스님은 보시더라구요. 저는 1지까지 가야 톨게이트 통과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화엄경 입장이구요, 보조스님 입장은 화엄경에 대한 또 다른 입장들입니다. 다른 해석. 1주면 이미 부처 다 됐다고 봐야되지 않나.

(17:36) 이런 얘기들이 왜 나오냐면, 1지까지 가는 데는 무량겁 걸린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1지까지 언제 가냐.” 하잖아요. 1주는 해볼 만하잖아요. 만겁이니까. 1주까지는 일단 갑시다, 하는 거예요. 1주만 가면, 사실 1지를 톨게이트로 치면, 1주는 뭐에 해당될까요? 우리식 비유로 치면. 1주는 톨게이트 앞에 파란색 선 그어진 곳까지 온 거예요. 톨게이트 근처 가면 하이패스는 파란색 선 그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톨게이트가 빤히 보이는 지역까지는 온 거예요, 이미 1주면. 그러니까 “에이, 그 정도면 톨게이트 통과했다고 봐야지.” 보조스님은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이래야 사람들이 힘이 나서 “내가 이제 부처 다 됐다.” 하고, 1주면 해볼 만하니까. 보조스님도 1지는 멀리 본 거예요. 1지는 논하기가 너무 어려운 경지이니까. 무량겁 걸린다는 경지를 어떻게 쉽게 논해요. 1주는 해볼 만하다. 진짜 해볼 만한 건 해오구요. 해오는 10신 초니까, 막 처음 불교 믿고 참선한다고 왔다 갔다 하다가도 될 수 있다는 거거든요. 10신 초라는 건 이거예요. 절에 좀 몇 번 다니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경지라는 거예요, 해오는. 그러니까 해오 먼저 확보해놓고. 해오에 대해서 왜 보조스님이 막 칭찬해주느냐? 그것만 얻어도, 내 안에 불성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이 공부는 성공 아니냐는 거죠. 그래서 보조스님이 각 단계를 과하게 칭찬해준 맛이 있는데, 좋죠, 뭐. 그걸로 발심하시라는 거예요. 그 얘기 듣고 힘내시라는 거예요.

(19:14) 자, 대승기신론으로 가볼게요, ‘관’. ‘지’에 대해서는 전 시간에 설명드렸어요, ‘지’에 대해서는. “오직 모르겠다.” 해버리고요,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다.”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자, 대승기신론은 개념을 미리 줍니다. “일체는 참나의 작용이다.” 라는 개념을 품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몰라!” 하면서 다 내려놓고 그냥 존재하시라는 거예요. “일체는 참나의 작용이다.” 라는 개념을 먼저 주고 체험을 유도해서 체험을 얻으면 그 개념도 같이 꽃피우게 하는 방식입니다, 대승기신론 방식은. 그래서 대승기신론은 ‘선’이, 우리는 그냥 “몰라!” 라면요, 대승기신론은 “오직 모르겠고, 오직 마음뿐.” 이렇게, “오직 알아차릴 뿐.” 이렇게 방편을 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만히 계시면서 “오직 모르겠다.” 하고, “오직 알아차리는 나만 존재한다. 일체 대상은 다 참나의 작용일 뿐.” 이런 마음으로 앉아계시면 ‘지’가 이루어져요. 그런데 ‘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게 이제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지’를 하는 방편은 지난 시간에 읽어드렸어요. 자, 그다음 보세요. 1주 이전의 닦음입니다. 아직 1주는 안됐구요, 지관쌍운인데, ‘관’을 어떻게 닦을 거냐의 얘기입니다. <만일 사람이 오로지 ‘지’만 닦는다면,> 선정만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나태한 마음이 일어나서 여러 선행을 즐기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요, 오직 “몰라!”만 하고 계시면요 마음이 너무 가라앉거나, 너무 모르는 상태에 들어가거나. 나태한 마음이 일어난다는 건요 그 상태에 있다 보면 움직이기 싫어져요. 선도 하기 싫어요. 바라밀도 하기 싫고 오직 “몰라!”만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이겁니다. 너무 가라앉고 나태해져서, 여러 선행이란 건 나머지 바라밀들이에요. 나머지 바라밀들을 써서 온갖 선을 다 짓고 다녀야 하는데 선을 하지 않게 된다. 이거는 ‘자리’를 위배한다는 내용이에요. 자신을 이롭게 해야 하는데 6바라밀로 나를 이롭게 해야 하는데 자기도 이로워지지 않아요. 선정만 취했지 나머지를 안 취해버렸으니까요. 그다음에 <큰 자비를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이건 ‘이타’를 떠난다는 겁니다. ‘이타’에 위배된다. 남을 도와줄 생각도 안 해요. <이런 사정 때문에 ‘관’을 닦아야 한다.> 벌써, 지관쌍운에서 관을 왜 닦습니까?

(21:44) 자, 이때의 관은요 아공, 법공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보세요. 여러분, 제대로 선정에 들어가면 선정에 들어간 것만으로 이미 관이 이루어져요. 참나를 체험했잖아요. 참나를 체험한 그 팩트에 기반한 이해가 들어서겠죠. 그게 뭡니까? 아공, 법공이요. 나의 뿌리는 참나다, 아공. 참나에서 에고가 나왔다, 법공. 아공, 법공을 알았다고 쳐도, 알고도요, 지관쌍운을 닦더라도요, 관이 더 넓어지지 않고 거기 멈춰있으면 소승이 됩니다. 여러분, 아공만 얻어서 들어앉아 계신 분들을 아라한이라고 하고요, 법공까지 얻고 들어앉아 있는 분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힌두교 성자들이요. “일체가 브라만의 작용이다.” 하면서 안 움직여요. “그러니까 나는 안 움직일란다.” 똑같죠? 어차피 소승되긴 똑같아요. 아공, 법공을 알아도 소승이 됩니다. 하는 짓이 똑같아져요. 지혜는 다른데, 하는 짓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비판하는 ‘관’이라는 건 단순히 아공, 법공이 아니라 아공, 법공을 알아가지고 뭘 하는 걸까요? 양심분석하는 거예요. 양심분석까지 관이에요. 그래서 양심분석까지 안 하면요, 자, 이겁니다. 자, 에고의 뿌리가 참나인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대승기신론은 이미 명상을 할 때부터 일체가, 나의 뿌리가 참나고, 참나에서 모든 게 나왔다는 걸 주지시키고 명상을 시켰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지’만 얻어도 기본적으로 얻는 ‘관’이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란 걸 알아버려요, 아공, 법공은 이미 알고 있단 말이에요. ‘지’만 이루어도 그 ‘관’은 따라와요. 그런데 뭐가 부족하죠? 양심분석을 안 했기 때문에 상황 상황에 맞게 선악판단은 못해요. 그걸 못하면요 바라밀을 할 수가 없다는 게 여기서 지금 선행을 해야 하는데 이게 선인지 악인지 모르니까 선행을 못하죠. 자, 그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아공, 법공 정도는 얻었을 거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도 더 폭넓게 관을 닦아야 된다는 얘기는요, 양심분석을 계속 해야된다는 얘기예요.

(23:49) 자, 이게요. 요즘에는 그런 질문 덜 받습니다만 예전에 진짜 많이 받았어요. 딴 데서 명상도 하시고 잘 하고 오신 분들이 학당에 와서 당혹해하는 게, 뭔 노트를 쓰라고 하고, 양심분석을 하라고 하고... “그냥 견성하면 된 거 아닌가요?” 이런 질문 제가 숱하게 받았죠. “양심분석 꼭 해야 되나요?” 지금 그 답이 대승기신론에 써있는 거예요. 여러분, 양심분석을 안 하시면. 그 ‘관’이 양심분석이라니까요, 지금. 양심분석을 안 하면요, 나태해지고요 마음이 가라앉게 되구요, 선을 즐기지 않게 되고, 남을 도와줄 줄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분석을 해야되는 겁니다. 이 얘기입니다. 자, 5번 보시면 더 자세해요. 지관을 함께 닦아라, 하는 내용입니다. <일체의 때와 일체의 장소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온갖 선한 것을 실천하고 배워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자, 보세요. 기본적으로 보살도는요, 자신이 모든 장소, 모든 때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저희가 늘 하는 말 뭐죠? 역량에 맞게, 깜냥에 맞게. 온갖 선을 실천하고 배우는데 절대로 게으르면 안 된다. 자, 이게 보살도입니다. 다르죠? 요즘 절에 가도 이런 얘기 안 합니다. 어디서든 뭐 하라고 하죠, 절에 가면? “일체 처, 일체 때에 화두를 잡아라. 기약 없는 화두를 잡아라.” “그러면 스님은 되셨나요?” “나도 잡고 있느니라.” “그러면 저는 왜 잡아야 하죠?” “이만한 뛰어난 도리가 없느니라.” 해보지도 못한 분이. 이게 팩트가 아닙니다, 문제는. 팩트가 아니에요, 다 추측이에요, 추측. 신념, 그 개인의 믿음. 황당해요. 화두선 가지고 스님들 모여서 토론하는 것 전문을 보면요, 저는 꼭 보거든요. 황당해요. 아무도 견성을 못했는데 최고의 도리래요. “이만한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해야 한다.” “위빠사나가 더 쉽지 않나요?” “아니다, 쉽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쉽다고 하면 안 되고 진짜 최고의 수승한 도리이기 때문에 이걸 해야 한다.” 그러면 얘기를 하세요, 어떻게 쉽게 했는지 본인 얘기를 하세요. 아무도 얘기 안 합니다. 끝까지 그렇게 가요. 그래서 신나게 토론합니다. 화두선 문제 있다. 위빠사나나 티벳이나 다른 선을 도입해야 된다. 마지막, 그래도 화두가 최고니까 화두하자, 끝. 그래서 이런 무의미한 토론을 계속하시는 한은 한국불교는 끝물입니다, 지금. 제가 진단합니다만, 종교가 모두 끝물이에요.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구요, 종교가 다 끝물인 게, 창시했던 성자들의 맥이 다 끊겼어요. 지금 누구한테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제가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았어요. 맥이 다 끊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성인 닮은 양반들이 없다구요. 지금 어느 한 부분만 붙잡고 떠드는 분들은 많은데, 거기서 나름 일가를 이루신 분들은 있는데, 성인을 닮은 분들은 없다구요. 그게 문제죠.

(26:57) 공자 때도 그래요. 공자 때도 신통유계자(?), 6경에 신통한 사람이 72인이고, 총 3,000 제자가 있었다고 나오는데. 불교랑 비슷해요, 3,000 제자가 있는데 그중에 72인은 신통자이구요, 그중에 10명 공문십철이라고 십대제자가 있어요. 불교랑 똑같죠? 이쪽은 이쪽대로 독자적으로 정리되어 온 겁니다. 불교 영향받아서 이렇게 정리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너무 숫자가 비슷한 게, 예수님도 12제자 있죠? 72인의 제자를 전도시킨 기록이 있습니다. 12명 파견할 때가 있구요, 72명 파견할 때도 있어요. 어디에는 70명이라고 되어있는 것도 있지만 72명으로 내려오는 설이 있어요. 이런 숫자 맞추는 거 보면 또 신기해요. 서로 비슷하게. 아무튼 공문에도 그렇게 있는데, 공자님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다 갖춘 존재는 안자 밖에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한 부분만 닮아요. 이게 문제예요. 한 부분만 닮아도 사실은 문제인데. 사실 그나마 한 부분이라도 닮았는가, 물어보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죠, 지금. 그래서 원만하게 닮은 사람이 안 나오면요 공자가 어떤 존재인지 사람들이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어느 한 부분만 닮은 제자들에게 배워도, 알 수가 없어요. 한 귀퉁이만 배워요. 코끼리를 보고 다리만 보고 코끼리를 판단해도 안 되죠, 코만 보고 판단해도 안 되죠. 한 부분만 배운다는 건 하나만 잘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자님의 어느 한 부분만 닮은 거예요. 그럼 전체가 안 닮으면 사실은 문제가 커요, 이게. 공자의 원상은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원상복구가 안 돼요. 그래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겁니다.

(28:37) 자, 어떤 상황에서도 뭘 배우라고 했죠, 보살들은요? 선을, 최선을 다해서 6바라밀을 실천하란 얘기예요, 이게. 어느 상황에서도 6바라밀을 실천하라. 자, 보세요. <앉아서 선정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계실 때는 여러분 늘 선정에 들어계셔야 돼요. “모르겠다.” 하고 계셔야 됩니다. 그 외에는 뭐 하라고 되어있죠? <일체 때에> 그러니까 일이 없을 땐 선정에 들고요,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응당 해야 하는 것>, ‘응작’, 즉 선이에요. 자명한 것, 선과 <하면 안 되는 것>, 찜찜한 것, 악을 마땅히 남김없이 관찰해야 된다. 남김없이 관찰은요, 내가 살아가는 데 앞으로도, 지금은 안 닥쳤지만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상황이 있으면 미리 다 검토해 놓으라는 얘기예요. 남김없이 해 놓으란 건요 닥칠 때마다 분석하구요, 또 닥칠 게 예상되는 경우에도 분석해 놓아야 돼요. 선악을 판단해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고 머무르며 눕고 일어날 때>,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할 때든, 모든 때에, <항상 이렇게 지관을 함께 행해라.> 자, 일 없을 때는 “모른다.” 일 생기면, 선악 판단. 이게 지관쌍운입니다. 자, 이해되시죠? 지관쌍운. <이른바 비록 일체의 법>, 만물이죠? <만물의 본성은 생겨나지 않음을 알더라도> 이게 법공이죠? 자, 법공을 안다는 거예요. 당연히 지관쌍운을 얻은 분은 법공을 알아요. 일체만법이 다 참나의 작용인 줄은 알아요. 그러니까 그 자체의 독자적 본성이 있지 않다는 건 아는데, 그렇다 하더라도요, 보세요.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게 여러분 참나의 작용이니까 사실은 공성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일체만물이 공한 줄 알아도, 이 얘기예요. 공한 줄 알아도, <인연의 화합과 선악의 과보는 절대로 없어지고 무너지지 않음을 알아야 된다.> 이게 양면입니다. 한쪽만 알면 안 돼요. 한쪽만 알면 뭐라고 하겠어요? 지금 눈앞에서 악이 벌어지고 있을 때 뭐라고 하겠어요? “이 또한 공하니라.” 하고 눈 감고 있는 겁니다. 이러면 소승종자가 되는 거예요. “이 또한 공할 뿐 용서하고 넘어가자.” 하면 소승종자가 되는 거예요. 대승종자는 뭐죠? 선악을 판단해서 처리해버리는 거예요. 선악 판단에서요, 악인을 비난하고 이러자는 게 아니라, 선악을 판단해서 인류가 악으로 못가고 선으로 갈 수 있게 선의 힘을 키우고 악의 힘을 줄여서 카르마를 바꿔버린다는 거예요. 이거 못하면 꽝입니다. 우리가 막 악만 씹고 있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악의 힘을 누르고, 선의 힘을 키워줘야지 카르마가 바뀌잖아요. 그러면 저를 많은 분들이 저거는 과격해가지고 용서 이런 거 싫어하고 악인의 처단, “능지처참을 하자.” 막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 카르마가 그렇게 되면 엉망이 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여러분이 단순히 용서하고 넘어가면 카르마가 엉망이 돼요. 그런데 그런 용서도 있어요. 내가 용서해줌으로써 카르마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어요. 용서만 해줘도 상황이 좋게 풀릴 땐 용서해주셔야 돼요, 그때는. 그때 막 지적하고 계신 건 아닌 거예요. 내가 지적함으로 인해, 반성하려던 애가 다시 비뚤어져 버리면요, 꽝인 거예요, 그거는. 즉 보살의 핵심은 뭐예요? 카르마를, 악을 선으로 바꾸는 그 기술이에요. 결과로 입증할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 보살도라는 건 결과물로 입증해야 돼요. 악을 선으로 이렇게 바꿨다, 하는 게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처벌도, 용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유가, 처벌할 때 처벌을 못 하면 악이 더 커져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돼요, 진짜로. 교도소 들락거리다 점점 더 거물이 돼요. 거기서 자기들끼리, 도반들이 거기 있잖아요. 도반들하고 계속 검토하고 “아, 그때 이거만 잘했으면 안 잡혔을 텐데.” 멘토들한테 멘토링 받고 하다 보면 실력이 늘어서 나오는 거예요, 다음에. 그렇죠? 또 잡혀들어가면 시행착오, 아! 하면서 또 어디가 부족했는가 검토해서 더... 자, 인간은 당연히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또 단순한 처벌만도 답이 아니고 처벌은 강력하게 가되, 교화를 또 시켜야 돼요. 이게 복잡한 거예요. 이걸 귀찮다고 등한히 해버리면 카르마가 엉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엉망이 됐단 증거가 뭐냐? 정의감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제 아무도 정의를 하려고 안 하게 돼요. 정의를 해봤자 인정도 못 받고 이사회에서 탄압당하니까 악의 편이 느는 거예요. 정의의 편이 줄고 악의 편이 늘었다면 이 나라 법 제도는 잘못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카르마를 잘못... 종교계는요 카르마를 지금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종교계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오히려 선악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선을 누르고 악을 키워주고 있다, 그럼 지금 잘못된 겁니다. 용서했냐, 처벌했냐가 포인트가 아니고 포인트는 그거예요. 실제로 선의 힘을 키웠냐, 악의 힘을 눌렀냐. 그럴 수 있을 땐 용서도 답이고, 처벌도 답이고, 교화도 답입니다. 단, 이게 입증이 되어야 돼요. 카르마를 좋은 방향으로 반드시 틀었다 하는 게 입증이 되어야 합니다.

(33:49) 그러니까 이것부터가 다 분석이에요. 응당 해도 되냐, 안 되냐가요 지금 안아주고 끝내야 되는데, 지적을 해야 되느냐, 이거 판단부터가 지금 어려우실 거예요. 그거 양심분석 안 하면요 지금 내 양심에서 상대방을 나처럼 여기면서 분석해볼 때 여기서 내가 안아주고 끝내는 게 훨씬 상대방의 양심을 더 부흥시킬 수 있겠다면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지적을 안 해주면 욕심이 승리하고 양심이 지겠다 싶으면 그때는 악역도 해줘야 돼요. 순간순간 변해요, 이 상황은. 그러니까 선악에 대해서 어느 때, 모든 때, 모든 장소에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된다, 남김없이. 하지만, 역량껏. 자,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절대 이 선악의 과보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인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악연을 맺었건 선연을 맺었건 그 인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체가 공하지만, 동전의 뒷면에서 보면 모두 공인데요, 동전의 앞면에서 보면 인연과 선악의 과보는 엄정해요. 티끌 하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게 살아서 나중에 돌아와요. 자기한테. 석가모니가 가실 때 안 좋게 가셨죠? 뭐 나쁜 거 드시고 가셨죠. 그럼 그걸로 석가모니의 묵은 악업 푸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과보가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받아야 돼요. 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제자 앙굴라마라한테도 네가 살인죄를 많이 져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아라한 된 뒤로도 지나다니면 돌 던졌잖아요. 그거 감수하라고 말하잖아요, “맞아라. 그거 맞아야 네 업이 풀린다.”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일체가 공한 줄 아는 아라한이라도 자기가 맺어놓은 업은 자기가 풀어야 돼요. ‘결자해지’입니다. 도와줘요, 성자들이 많이 도와줘요. 보살들이 도와줘요, 그걸 대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35:39) 예수님한테 너무 많은 것 바라지 마시고, 예수님이 길 열어준 것만 해도 여러분 업 다 바꿔준 거예요. 아니, 도인 못 될 사람을 도인 되게 길 열어준 게 대속이지. 제일 안 된 게, 지금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죠? 저기 교회 가면. 뭔 얘기입니까? 내 꺼 더 갚아주란 거죠, 사람들이. “피 좀 더 흘리세요. 지을 죄가 아직 많거든요. 계속 십자가 위에 계시면서 내 죄까지 본인이 대속해 주세요.” 그러면 아무리 보살이라도 팔 걷고 나오실 겁니다. “일단 좀 맞자.” 왜냐? 왜 그런지 아세요? 내가 대속하는 건요 중생들 카르마 풀어주려고 한 거지, 선이 더 이기고 악이 더 물러나도록 도와주려고 대속을 한 거지, 나를 믿고 의지하면서 악에 주저앉게 하려고 대속한 게 아니기 때문에 혹시 그런 심보로 가서 기도하시면 아마 그날 밤 예수님이 찾아가실 겁니다. 다음날 일어나면 왠지 몸이 밤새 누가 밟은 것 같고 막 이럴 거예요. 여러분 양심이 아마 못 견디실 거예요. 여러분 양심이 여러분 양심을 벌하실 겁니다. 이거는 엄정한 도리가 있는 거예요. 대속이란 말이 위험한 거예요. 본인이 대속해 줄 수는 있는데요, 우리가 대속해 준 걸 감사하는 건 좋은데 거기다 살짝 보태고 계시면 안 된다구요. 그걸 핑계로 여러분이 더 죄 안에 주저앉으시면 그건 진짜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까지 다 망친 거예요, 예수님이 희생하신 것까지 다 망쳐버리는 거예요. 자녀가 잘되라고 내가 희생했는데 자녀가 타락해가지고, “우리 부모가 다 해줘.”하고 타락해버리면 그때 부모는 계속 그러고 계시면 안 돼요. 자녀를 다시 일깨워야 하니까 악역을 자처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이게 부모와 자녀 관계로 보시면 돼요. 하느님의 자녀란 면에서 보면 다 성자건 우리건 평등인데요, 성인들은 또 우리의 부모입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이런 거죠. 형제 중에 맏이랑 밑이랑 차이가 많이 나면 맏이가 업어 키우고 그러죠? 거의 부모죠? 그런 분이라고 보면 돼요, 성자들이.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부모처럼 생각해야 돼요. 원 부모는 불성이고, 비로자나불이고, 하느님이겠지만, 예수님의 자녀도 돼요. 왜? 보살들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보살들이 자기를 희생해서 여러분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대속을 하고 다녀요. 보살들이 하고 다니는 일이 다 대속이에요. 유마경 보면 다 대속하라는 거예요. “너는 아프지 않더라도 중생이 아프면 너도 같이 아파야 한다. 그게 부모니라.” 이런 거예요, 내용이 다. 그러니까 보살심은 부모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보살을 우리말로 이렇게 풀었잖아요. 보호하고 살펴주는 존재가 보살이다. 항상 보호해주고 살펴보고 잘 자나, 못 자나 살펴보고 보호해주고. 위험으로부터 막아주고. 늘 상태를 잘 살피고 있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대속이니 뭐니 기독교분들이 너무 왜곡된 상을 가지고 자기들 논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보면 못 된게요, 자기들 편하게만 논리를 펴요. 성인들의 속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요 나 유리하게만 논리를 펴요. “원래 우리 부모는 나를 위해 희생하는 걸 되게 좋아하셔.” 어머니가 정말 고기 좋아하는 데. 고기 좋아하죠, 그 부모님도 다 클 때 아이였으니까 고기 좋아하고 컸겠죠. 자녀 때문에 고기 양보해줬더니 나중에 이놈이 못 되어가지고 고기 사줄 수도 있는 경지에 가서도 “우리 어머니 고기 싫어하시더라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보니까.” 이런 망발 나올 수 있겠죠? 똑같은 짓이 지금 교회에서 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은혜는 고맙다고 하면서 유산 없나 보는 거구요, 틈만 나면 자기 유리할 때 자기 유리한 식으로 판단합니다. “아,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거 되게 좋아하셔.” 변태입니까? 왜 거기서 그러고 있겠어요? 예수님 좀 내려드리세요. “이젠 우리가 할랍니다.” 하고. 이게 효잔데. 제가 보면 안타까워요. 부처님은 옷 편하게 입고 앉아 계신 데, 절에, 예수님은 제일 힘들게 계세요. 그것도 사실 방편입니다, 보살의. 편하게 있는 건요 여러분도 나처럼 편해지시라는 거구요, 이러고 있는 건 “너 나만큼 힘드냐? 아니면 그냥 살아. 나만큼 힘든 거 아니면 살아라. 난 내 죄도 아닌데 이러고 있다.” 이러면 탁 깨달음이 오겠죠? 그러니까 그런 방편으론 좋은데 그거에 기대서 가려고 하진 마세요. 훌륭한 자녀는 못 되죠. 부모의 마음은 그렇다는 건 아시고, 자녀가 바로 서야 끝납니다.

(40:50) 보살은 사실 부모의 마음으로, 형제더라도 부모의 마음으로 우릴 도와주는 형제예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보살 상이 제일 정확합니다. 대속이니 뭐니도 제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도 제일 선명히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런 마음을 먹어야 “계속 내가 의지하면 안되겠다.” 하는, “나도 좀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부터라도 내 뒤에 오는 자녀들한테는 내가 부모 역할 해줄 수 있어야겠다. 그러니까 보살도가 좋은 씨를 뿌리면서 보살들이 늘어가야 이 인류가 사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선악의 카르마에서 선이 이길 수 있죠, 악을? 그게 이제 관건입니다. 인류는요, 선이 악을 이기게 하는 게 인간의 모든 업의 최종 목표여야 돼요. 선이 악을 이기게 하는 것. 지금 현 지구 상황을 보면 어떨까요? 악이 선을 이기고 있죠, 실제로? 여러분,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인류에선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건 뭘까요? 소수가 자꾸 악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소수가. 자기 재미 보자고 인류 전체를 위기에 계속 몰아넣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전쟁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왜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소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백성들도 다 전장에 내몰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내 일 아니면 괜찮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힘 있는 쪽에 악이 있는 거예요. 힘없는 쪽에 선이 있고. 힘 있는 쪽에 악이 있으니까 문제가 안 풀리고 있죠. 그럼 여러분이 보살이라면요, 지금 우주에서 파견된 보살이라고 치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구 상황이 안 좋습니다. 여러분, 이 학교 나오셔서 지구 현장에 가셔서 깨어서 6바라밀을 가지고 지구를 구조조정 해주셔야 돼요. 선이 악을 이기게 해주셔야 돼요. 나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선이 버틸 수라도 있어야 되고, 악을 당장 못 이기면 힘이라도 키워야 되구요, 나중에 힘이 커지면 반드시 악을 물리쳐야 됩니다.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들이 함부로 높은 자리에 가서 사람들 못 괴롭히게 막아줘야 돼요. 선악의 과보는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부 좀 했다는 분들이 “선악도 본래 없는 거야.” 어디 불경에 그런 말이 있나요? 근거가 없어요. 근거도 없는 소리를 가지고 “선악이 어디 있나요? 선악 또한 공할 뿐.” 중생 좀 도우라고 그랬더니요 이런 말도 해요. “중생이 어디 있느냐? 나와 남은 모두 공할 뿐.” 공한 주먹으로 좀 맞아 보시면, 없는 주먹으로 한 번 맞아보시면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죠.

(43:42) 이게 얼마나 갑갑한 얘기인 줄을 모른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과격한 얘기를 하는 이유가 저도 이 공부하면서 얼마나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몰라요. 어디서 출처도 없는 이런 얘기들을. 제가 경전을 공부하면 다 이런 얘기밖에 안 하는데 왜 세상에만 나가면, 도 좀 닦았다는 사람들은 다 이상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 말이에요. 어디서 잘못됐을까. 그 사람들이 자기들 에고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들어서 자기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이론을 꾸미고 자기의 마음을 꾸며가지고, 남들한텐 또 자기가 리더인 것처럼, 목자인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게 핵심 원인인 것 같아요.

(44:27) 자, <그렇지만 비록 인연과 선악의 업보를 알아차리더라도 또한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차려라.> 양면을 다 얘기해주시고 계세요. 인연과 선악의 업보가 절대로 엄정해서 없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 또한 본성이 따로 없다는 건요, 참나의 작용일 뿐이란 것도 알고 있어라, 공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라. 치밀하죠, 논리가? 대승기신론이 이렇게 치밀합니다. 저랑 이견이 많지만 이런 부분은 제가 적극 동감합니다. 100프로 동감하는 말씀이라서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구역에는 없어요. 지금 우리가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별기 이런거 보시면 거기에는 없는 번역이에요. 신역에만 있는, 구역은 진제스님이 역한 거고, 신역은 실처난다(?)가 역한 건데, 신역에만 있는 이 부분이 있어야 말이 돼요. 신역에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로지 ‘관’만 닦는다면,> 자, 이게 뭐냐면 아까 <오로지 ‘지’만 닦는다면,> 있었죠? 그 부분만 있고 끝나서 서운했거든요, 기존 번역에는. 그런데 신역에 찾아보니까요, 원문에는 ‘관’도 있었다는 거죠. 아까 ‘지’만 닦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죠? 나태해지고 선행을 싫어하게 되고, 남을 안 돕게 된다고 그랬죠? 만약 관만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지’를 안 닦고. 선정을 안 닦고, ‘관’만 닦으면, 보세요. <마음이 멈추지 못하고,> 첫째, “몰라!”를 못해요. 경전 공부를 아무리 해도요 마음 못 멈추면 답이 안 나옵니다. 저희 학당에 오신 분들 중 제일 안타까운 분들이 경전을 엄청 읽고 남 지도하고 강의도 하시고 그런 역할 하시는 분들이 오셔서 “몰라!” 하시라 그러면 눈이 막 못 멈춰요. 그런 분들이 참 안 돼요. 그러니까 ‘관’만 주로 하신 분들이요 몰라를 잘 못 하세요. “내려놓으세요. 모른다고 하세요.” 하는데, 내려놓을 게 너무 많으신 거예요, 그분은. 우리는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려놓잖아요. 그런데 “내려놓으세요.” 할 때 못 멈춰요. “내려놓으라구요? 내려놓는다는 건...” 또 막 경전 검색하고 계세요. “어느 경전에 그런 의미인가요?” “아니에요, 내려놓으시라구요. 지금 막 눈이 구르시거든요. 눈을 멈춰보세요.” “눈이 구른다구요?” 막 이제... 눈이 못 멈춰요. 그러니까 생각이 안 멈추는 겁니다, 계속. 뭔 말 들을 때마다 그 말을 가지고 또 경전 검색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습이 되어버린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본인이 멈추기 힘들 정도로 습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관’만 닦으신 분들은 마음을 못 멈춰요. 이게 첫째 핵심입니다. 두 번째, 의혹이 많이 생겨나요. 왜냐면 팩트를 모르죠? ‘관’만 닦았다는 건 경전 공부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나를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얼마나 의혹이에요. 다 의혹인데 참나를 만날 생각은 안 해요. “참나만 만나면 다 풀립니다. 참나 만나러 갑시다.” 그러면,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또 말을 막 하고 계신 거예요. 어쩌고 저쩌고. 참나를 내가 만날 때 만나더라도 이건 풀고 만나고 싶다느니... 막 이런 조건을 제시합니다. 뭐가 안 돼서, 뭐가 안 돼서... 예전에 제가 그런 분도 봤어요. 수행을 하는데, 단학을 배우러 어떤 분이 오셨는데 “단학을 제가 시킨대로 하세요.” 그랬더니 단학에 대한 도교 경전 전체가 다 이해되면 그 뒤에 하겠대요. 그럼 될 리가 없잖아요. 왜냐하면 팩트가 없는데 안 해본 분이 이론서가 다 자명하게 이해될 때 그때 수행을 하겠다는 거예요. “아, 이분은 이번 생엔 힘들겠구나.” 하고 보내드린 적이 있어요. 뭐 어떻게 해도 안들으시니까. 자긴 의혹이 있으면 못하겠대요. 그런데 의혹이 있을수록 해봐야 의혹이 풀리는데, 팩트를 만나야 의혹이 풀리는 데 그런 분 진짜 있습니다. 딱 이 얘기를 읽으니까 그분이 생각나는데요. 마음이 멈추지 못하구요, 그러니까 참나를 만나지도 못하고. 선정도 안 되는데 의혹만 엄청 생겨나요. 그리고 최고의 진리에 순응하여 따르지 못하며, 진리를 경전에서 본 것에만 집중하지 진짜 진리는 못 만나봅니다. 무분별지를 낳을 수 없다. 무분별지는 뭐죠? 참나를 만났을 때 오는 직관이요. 그러니까 머리로 따지지 않는 지혜이니까 무분별지입니다. 생각 이전에 그냥 통으로 직관하는 지혜가 있어요. 왜 참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진리를. 여러분이 참나랑 만날 때 뭔가 아는 게 더 늡니다. 그게 무분별지를 만나서 그래요. 그러므로 응당 지관을 함께 행해라. 이 구절이 빠져있더라는 겁니다. 자, 5분 쉬고 이제 보조스님 얘기를 통해서 정혜쌍수를 좀 정리해볼게요. 선정과 지혜가 함께 간다는 게 어떤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