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 선생님의 가르침 - 양심으로 극락세계를 이루는 방책
| 봉우 선생님의 가르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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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우 선생님의 견성론 | 양심 개벽 | 개벽팀 | |||||||||
| 강의일자 | 2016. 10. 19. 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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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자 | 2016. 11. 01. |
| 동영상 길이 | 52:40 |
| 강의 중 인용 도서 |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huPGwj_h8X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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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어드릴까 해서 가져온 게 봉우 선생님 일기예요. 봉우일기(鳳宇日記)라고. 이거(출판된 봉우일기)보다 훨씬 많습니다. 근데. 제가 갖고 있는 원본들도 꽤 되는데, 번역 안 된 거요. 60년대 50년대부터 쓰신 것들이에요. 밤에. 그게 모인 건데. 제가 갖고 있는 노트만 해도. 여기, 그 중에 일부만 이런 데 실렸더라고요. 거기에 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예전에는 그거, 이분 글씨도 한자를 막 略해서 쓰셔 가지고 저도 읽는데 쉽지 않았는데 좀 오래 보다 보니까 이게 보여서. 많이 도움이 됐었는데. 그 중에 이제 이미 공개된 것들인데, 그 중에 일부라도 좀 읽어드릴까 해서 가지고 왔는데요. 이런 얘기도 있고 이런, 별 얘기 다 있는데요. 천부경(天符經)을 풀이해 놓으신 것도 있고. 이분도 대단하신 게, 어려서 열 살 때 단군교(檀君敎) 바로 세워졌을 때 그때 가서 입교하시고 나철(羅喆)선생 만나시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제 단군을, 원래 대종교(大倧敎)에서 단군을 대황조(大皇祖) 그래요. 대황조(大皇祖)라고 우리 제일 큰 할배. 큰, 위대한. 둘 다(大·皇) 다 위대한이죠. 조상 할아버지. 이런 뜻이. 지금 우리 역사로 얘기하면 환웅에 해당되죠. 대황조(大皇祖). 그런데 대종교에서는요 단군하고 같은 존재로 봐요. 환웅이 하늘에 계시면 환인(桓因), 지상에 내려오시면 환웅(桓雄). 지금은 뭐 서자가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걸 여러, 분신을 나투듯이 나투는 것처럼 이해해서 하느님이 분신을 지상에, 육체를 입고 나투신 존재를 환웅 이렇게 보고 그 환웅이 임금이 돼 주신. 환웅(桓雄)을 天王이라고 하잖아요. 환웅천왕 해서 이 천왕의 의미를 단군으로 봅니다. 그래서 단군 중에 제일 처음 단군을 환웅으로 봐요. 그래서 단군을, 檀君大皇祖 이런 표현들을 옛날 어른들이 다 써요. 안창호 선생도 쓰고 다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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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大皇祖. 독립운동 하던 분들 다, 대종교 분들이 많으셨거든요. 다 檀君大皇祖. 그렇게 썼는데 봉우 선생님이 단군, 우리가 아는 그 단군을 대황조(大皇祖)라고 하면 안 되고. 元 단군, 그냥 단군이 아니고, 예, 근원적인 단군. 즉 단군 이전의 환웅을 얘기하는 거니까 그런 의미로 쓰세요. 그런데 봉우 선생님은 아무튼 본인의 대종교 철학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분 스스로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그대 아들은 북극성(北極星)에서 내려온 아들이다. 개벽 신호탄 쏘려고. 한반도에서 개벽이 시작되는데, 전 지구적인, 거기 신호탄 쏘려고 내려온 사람이다.” 해서. 본인도 공부하시다가 자기 근원을 확인하신 게 북극성(北極星)에서 주의선인(朱衣仙人)[1]인가 자기가 그런 선인이었다. 하면서. 그래서 여기 이제 그 개벽의 첫 싹이 나야 나중에 그걸 꽃을 피울 거 아닙니까. “꽃 피우는 팀은 따로 있고 나는, 싹을 내는 게 내 책임이다.” 그 내용이 여기에 다 쓰여 있어요. 싹이 좀 제대로 난 거 보고 갔으면 좋겠다. 하느님 좀 나중에 자기를 발령해 달라. 좀 죽는 걸 늦춰 달라. 이런 막 애절한 그, 하느님한테 바치는 글도 있을 정도로, 자기 책임인 거예요. 이분은 싹을 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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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소설 『丹』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게 언제죠? 84년도에 나왔죠. 그때 본인이 싹을 뿌리셨다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그 때까지 자기의 모든 경험과 이런 철학을 정리해 오다가, 공개를 해야 싹이 나지 않습니까. 공개할 자리가 온 게, 정신세계사가 세워져서 요가난다 책 내고 다음에, 우리나라에 그런 도인 없나 찾다가 찾아간 게 봉우 선생님을 찾아가서. 정신세계사가 소설 『丹』으로 일어섰죠. 그 당시에 100만부를 팔았으니까 어마어마. 그 첫 해애만 한 50만부 이상 판 걸로 알아요. 그 당시엔 우리나라가 책을 많이 보던 때라 지금은 그 수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책에 몰입해서 그럴 때라 그때 그렇게 팔렸겠지만. 그 책을 통해 우리나라에 씨를 뿌렸다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그게 싹이 좀 자라는 걸 보고 가신다. 고 그렇게 念하셨던 거 같아요. 근데 그 전에도 뭐 계속 그 씨를 뿌리고 하셨겠지만 제대로 뭔가 탁 파종이 된 게, 소설 『단』으로 인해 그 이후 우리나라에 丹學이니 氣功이니 하는 인구가. 예전에 나온 책이에요. 정신세계사에서 丹을 내고 몇십 년 뒤에 그걸 재조사 해서 그런 책 낸 거 봤을 때, 거기 우리나라 氣功 인구 200만 잡더라고요. 지금은 더 될 겁니다. 그 근원이, 들어가 보면 소설 『丹』 때 확 커진 게 많아요. 그 전에도 국선도도 있었고 뭐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전 국민적으로 확 퍼진 건, 소설 『단』이 유행하면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어떤 각성도 일어나고, 역사 얘기도 나와요. 소설 『단』에는. 역사 얘기도 나오고 우리 민족의 자부심, 우리 민족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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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능력을 얻어서 그걸 해결하라. 丹學으로.” 이런 게 많이 부각되다 보니까 이분이 원래 얘기하고 싶으셨던 게 대개 도덕인데, 그런 얘기는 좀, 소설이다 보니까 덜 나갔어요. 본인 일기에는 다 도덕 얘깁니다. 무슨 신통 얘기보다는. 그래서 그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데, 본인 얘기 중에도 신통한 얘기들이 우리가 봐도, 그냥 다른 거 아니라 이것만 읽어도 신통한데요. 보세요 “우리는 백두산(白頭山)族이다. 봉우일기 1권 p. 343 제목이 붙어있지 않음 ” 이분이 주장하신 겁니다. 동이족(東夷族)이 뭐 말이 좋건 어쩌건 간에, 이미 중국에서 동이 그러면 좋은 말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동이족(東夷族) 하는 거는 조금 우리로선 손해니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그 우리 예전 동이족(東夷族)들을 백두산(白頭山)族으로 부르자. 이렇게 이분이 주장하셨어요. “우리는 백두산(白頭山)族이다. 수천 년간 침체했던 運이” 3000년 침체했다고 그래요. 은나라 망한지 3000년이고 1974년에 와서, 73년·74년 정도 왔을 때 3000년이 끝나요. 그게 불교에선 북방불기 3000년하고 딱 맞습니다. 73년 74년 때가 북방불기 3000년 될 때예요. 근데 거기 說이 한 두 개 있는데. 그래서 석가모니도 73년·74년이니까 74년이면 甲寅生이고 73년이면 癸丑生이죠. 석가모니가 지금 癸丑生으로 보던가 甲寅生으로 보는 겁, 동양에서. 이게 안 맞죠. 인도랑은 안 맞아요. 우리 동양만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예요. 3000년. 그 3000년 연도가 BC 1027년 정돈데 그 때가 은나라 망하는 해에 해당돼요. 여러 說이 있는데 그 중에 한 說에 해당돼요. 근데 옛날 어른들이 그 연도부터 起點을 잡아서, 3000년 동이족(東夷族)이 고생하고, 3000년 끝나면 동이족(東夷族)으로 운이 온다. 해서 3000년의 어떤 계약이, 신선들끼리 계약을 맺었다. 이런 내용들이 소설 봉신방(封神榜) 이런 데에도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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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들 간에 뭔 계약을 했다. 동이족(東夷族)이 그때 姜太公한테 밀려서 주나라한테 망하고 은나라 후퇴할 때부터, 우리 민족 운이 쇠퇴한 걸 은나라 망한 걸 기점으로 계산해요. 근데 신기하게 그게 부처님, 우리,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부처님 탄생연도, 생일이 있는 그 연도가 된 거예요. 그래서 3000년을 계산하니까 지금 3000년이 넘었죠. 3000년, 지금 한 40년 넘었죠. 그래서 지금 여러 동양의, 아니 우리나라에서 나온 단체, 종교단체들 중에 그거 3000년 가지고 얘기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어요. “3000년 넘었다.” 하면서. 근데 北方佛紀를 포기했죠. 인도 거랑 맞춰보니까 너무 안 맞는 거예요. 500년이 더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인도 주장이 맞는 거 같으니까 그 쪽으로 다 맞춰서 지금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안 씁니다만, 옛날 절에는 北方佛紀가 쓰여 있어요. 그 3000년을 말해요. 예. “수천 년 침체했던 운이” 한 3000년 우리가. 왜 은나라가 중요하냐면요, 동이족(東夷族)인 고조선 쪽에서요 중원 진출을 해서 세운 나라가 은나라라고 보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뭐죠, 영국이 아메리카대륙에 미국 세운 거 같은 거예요. 지금 미국이 더 크죠. 그러니까 은나라가 더 강성해질 정도로, 고조선보다, 이 은나라가 중원에서 엄청난 힘을 얻었는데 은나라가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백인 운이 갔다.”라고 보는 거죠. 마찬가지로 “東夷族 운이 그때 갔다.”라고 보는. 은나라 망한 것부터 해서 동이족(東夷族) 운이, 이게 중원을 놓쳤다는 것에서부터 기점을 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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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른들이 그렇게 잰 거니까. 그렇게 보신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운이 의외에도 “수천년 침체했던 운이 의외에도 우리들이 살아있는 이 기간에” 뺏긴 건 3000년인데 선생님이 계산을 해 보면 한 “우리나라가 5000년은 운을 받게 됐다.” 이렇게 주장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때는 3000년, 뺏긴 것만큼 3000년 우리가 앞으로 운을 얻는다. 라고 주장하신 데도 있고. 본인이 數理 전문가신데, 동양의 산법들이 있는데 그걸 계산하면 한 5000년. 3000년(보다) 더 된다. 5000년 정도는 앞으로 백두산(白頭山)族한테 운이 온다. 이 주장을 하셨어요. 그 얘깁니다. “5000년 重明大運”이면, 중명이라는 거는 거듭 광명해지는. 예전에 원래 광명했는데. 그 타고르 詩 있죠. 예전에 우리 찬란한 이 한민족이 다시 한 번 타오른다. 하는 그 내용처럼. 이 타고르 시처럼 다시 거듭난다. “중명대운을 대황조(大皇祖)님이 여러 聖人들 哲人들 앞에서 포고하시고 天象에” 天文에도, 선생님은 천문에도 밝으니까 하늘의 별에 이미 그게 예고가 됐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시는 겁니다. “이미 예고하신 성스러운 빛이 출현했다.” 하늘의 별에서도, 지금 동양 천문학으로 볼 때 백두산(白頭山)族한테 운이 온다는 게 하늘에도 선명하고. 또 직접 보신 것처럼, 대황조(大皇祖)님이, 선생님은 대황조(大皇祖)님을 이렇게 환웅 환인으로 보니까 저, 북극성(北極星) 제일 주인이잖아요. 하느님으로 보는 거죠. 인간 중의 하느님. 불교에서 말하면 10地 보살이죠. 환인으로 보는. 대황조(大皇祖)께서, 그러니까 그 아래 성인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백두산(白頭山)族한테 5000년 운이 간다.” 이렇게 선포하셨다는 거죠. 개벽 온다. 그게 개벽이라고 보는 거죠. 우리 민족은. “세계 타국에서야 뭐라고 하든지 우리는 이 때 이 일을 묵과해선 안 된다. 대황조(大皇祖)님이 교시하신 대로 정신수련을 해서 性通功完을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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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통하고. 공완, 자기 공덕을 완수해라. 여기에서 보살도 하라는 거죠. 공완을 목표로 “非常力을 발휘하여” 노력해서 “性通功完 자리까지 완수하고” 각자 자기 본성 통한 만큼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해낸다면 “백두산의 다시 광명해지는 그 운의 역군으로 弘益人間 이념을 완성하여 전 세계 인류의 대평화일꾼으로 나갈 수 있다.” 하는, 그렇게 하자. 하면서 89년에 짧게 써 놓으신 글인데, 이 글이 예전에 제가, 요만한, 작게 이걸 출력해서요 수첩에 넣어갖고 다녔어요. 이건 지금 약간 번역된 말투 같아요. 원래 더 국한문 혼용 말투로 갖다가. 선생님은 일기 쓰실 때 다 국한문 혼용이라 번역을 좀 해야 돼요. 우리가. 그대로 쓰시니까. 한문투로. 그래서 아무튼 제가 예전에 한 번 그 많이, 마음에 품고 다니던 건데, 이런 개벽이 온다면 여기서 일꾼이 돼서 弘益人間 이념을 내가 완수해서 우리나라도 좋고 세계에도 좋은 일 생기면 좋겠다. 선생님 늘 주장이요, 한반도에서 평화의 싹이 난다. 요거예요. 그래서 별 게 아니고, 이제 전쟁 사라지는 평화의 운이 한반도에서 난다. 그게 개벽이다. 그게 뭐냐. 도덕이 뭔지 양심이 뭔지 한반도에서 전 세계를 가르친다. 그래서 자본주의 공산주의 양대 세력이 충돌해서 사람들을 엄청 죽일 때 한반도에서 평화의 기운이 나서 전 세계를, 예, 도덕으로 인도한다. 이런 간단한 그림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이 글에 보면 다 그래요. 다른 글에도. 그래서 저 강대국들, 사람 죽이는 거 우습게 아는 그 강대국들이 힘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다가 둘이 충돌해서 둘 다 힘이 빠지고, 그때 한반도에서 도덕, 이 운동이 일어나서 전 세계를 다시 밝히고. 스케일이 크세요. 나아가. 본인은 북극성(北極星)에서 그래서 파견됐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나아가 온 우주에도 긍정적인 평화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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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일이 시작된 게 온 우주에까지 긍정적인 어떤 작용을 한다. 이렇게 스케일 크게 주장하시더라고요. 그건 그분대로 보신 게 있어서 얘기하신 걸 테니까. 우리도 가면서 더 지켜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 얘기를. 어디 있더라. 제가 좋아하는 글이라. 이 글을, 제가 20대 때 열심히 보던 책입니다. 이게. 지금 파는지 모르겠네요. 이 책을. 98년에 나온 책이니까요 제가 20대 때 보던 책인데. 양심 이런, 도심이니 하는 것도 선생님 가르침으로 제가 배웠거든요. 그래서 보시면. 글 하나 읽어드릴게요. 제목이 道心과 人心 봉우일기 2권 「도심과 인심」 pp. 53~55 이에요. 양심과 욕심. “사람의 선함을 보고 선한 줄 알고 악함을 보고 악한 줄 아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 아니라도” 선악을 아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고 선이 옳고 악이 옳지 않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일인데, 어떤 이유로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소수고 악행을 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악한 줄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알고서 행한 것은 그 죄가 더 중한 것도 역시 누구나 다 아는데 무슨 까닭으로 악한 일인 줄 알면서 악을 행하는가. 이것이 사람으로 가장 의심나는 일이다.” 사람은 왜 이 모양일까. 이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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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항상 선생님은 대황조(大皇祖)님의 심법은 弘益人間이고, 弘益人間을 완수하기 위해선 우리가 본성을 통해서, 性通功完이 있죠. 그래서 실제로, 예, 보살도를 완성하라는 거고요. 이 가르침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이게 그대로 堯·舜의 가르침이 됐고 요·순이 주장한 게 뭐죠? 도심은 미약하고 인심은 위태로우니 항상 양심을 정밀하게 파서. 그러니까 惡이, 욕심이 양심을 가리지 못하게 양심, 인의예지를 정밀히 파라는 겁니다. 양심 분석을 정밀히 해서 한 결같이 양심한테 주도권을 주면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이게 書經에 나온 순임금의 가르침이죠. 요임금 가르침이 이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유교의 제일 心法으로 강조하시구요. 이게 옛날 성인들끼리 주고받던 제일 핵심이라. 자기 양심을 정밀하게 파고 한 결같이 거기에 하나로 올인하지 못하면, 한 결같이 밀고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선비로 안 봤어요. 그냥 사서삼경을 아무리 외워도 자기 양심을 정밀하게 판 사람이 아니면 선비 아니다. 이게 선생님 주장이라 항상 이걸 강조합니다. 道心 人心 精一. 그래서 여기에서도 “성인의 말씀 중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로지 惟精惟一, 정일하게 양심을 파면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도심은 맛이 없으나” 제가 어렸을 때 읽은 거예요. 처음에 도심이 뭔지 인심이 뭔지 이 글 보고 저도 공부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늘 도심 양심 그 제가 얘기할 때도 이게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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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내용이냐면, 설명해 주시는 게 “도심은 맛이 없으나 公正하고 인심은 맛이 있으나” 즉 도심은 자극적이지 않단 얘기죠. 자극이 없지만 공정하고. 인심은 자극이 있는데 “사특하고 구부러져 있다.” 진리가 왜곡돼 있다. 무미한, 淡淡無味한, 정말 밥이라, 밥 같은 거죠. 예. 그래서 이 “무미한 도심” 자극적이지 않은 도심을 “함양하는 가운데” 실천하는 가운데 “無爲而成” 무위, 함이 없는 中에 善이 이루어진다. 자극적인 인심을 “有味의 인심을 추종하는 중에” 인위적인 어떤 욕심이 들어가서 “有爲로” 욕심으로 뭔가 “만들어지는 게 惡이다.” 그러니까 자연 그대로 하면 善이 나오고, 양심만 따르면 무위라고 했죠. 근데 욕심을 부리면 인위적인 게 돼서 惡이 나온다. 그러니까 老子랑 유가의 가르침이 섞인 겁니다. 이분한테서. “선행의 대가는 곧 표현되지 않아도 악행의 대가는 곧장 진미로 化한다.” 악행의 대가는 금방 어떤 자극적인 쾌락을 준다는 거예요. 선을 했다고 그 정도 자극적인 쾌락이 오는 건 아닌데 악행의 대가는 항상 아주 자극적인 욕망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것이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일이 선이 아니거니 하면서도” 선이 아닌 줄 알면서도. 즉, 학당 식으로 하면 찜찜한 줄 알면서도 “그 하고자 함에 추종되어” 그걸 따라가서 “자기 행위를 용서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그냥 용서한다는. 이게 너무 자극적이라 안 할 수가 없어서. 어떻게 거기서 그걸 안 해?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행하는 일이 자기와 동일한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이 부정한 일이요 악하다고 평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그 일 하면 반드시 악하다고 할 사람이 자기가 할 때는 허용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면, 뭐죠, 뭐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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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처럼 이렇게 되고 만다. “이것은 그 眞味의 대가가” 그 자극적인 맛의 대가가 담담무미한 도심의 대가보다 일시적으로 나은 관계로” 당장에는 그 맛이 더 크니까 가는 거다.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지 알지 못하고 범한다고 못하겠다.” 진짜로 다 모르고 우리가 악을 한다고는 못하겠다. 알면서도 자기를 용서하고 가는 거 같다. 이거죠. 사람이면 분명히 이거 아니라는 거 아는데도 가고 마는, 이런 실존적인 문제가 있는 거 같다. 인간의 이런 욕심과 양심에 대한 진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냐면 “앞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대안을 내놓을 때는 이 진단이 필수니까. 요 말씀을 해 주시고 “그러하니 古聖의 말씀 중에” 성인들의 말씀 중에 “人誰無過리오 改之爲善이라 하시니” 다른 게 아니고, 사람인자 비록수자 없을무자 허물과자. 사람으로서 어찌 허물이 없으리오. 사람은 반드시 그런 허물을, 악을 지을 수 있다. 단, 고칠개자. 改之爲善. 그걸 고쳐서 선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예. 그렇게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아서 “고인의 말씀과 같이 知過必改” 허물인 줄 알면 반드시 고칠 수만 있다면 “비록 담담무미하나” 이 하는 게 없는 거 같은 중에도 자연스럽게 양심을 따르다 보면, 당장 자극적인 맛이 안 와도 “不知不覺 中에 一家를 이루게 되어” 자기의 에고의 “습성도 변해서, 그 인심도” 이게 되게 중요합니다. 그 인심도 “不踰矩 할 것이다.” 從心所欲不踰矩에서 그 心을 人心으로 보신 거예요. 선생님이. 우리가 그렇게 풀죠. 종심소욕불유구. 갑자기 어려운 말들을 선생님이 막 쓰시니까. 공자님 70의 경지가 뭐죠? 從, 따를종잡니다. 從心, 마음을 따르더라도. 不. 넘을유. 법도구. 이게 뭐냐면 욕심대로 행하더라도, 이 법도라는 건 천명이죠. 양심의 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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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를 어기는 법이 없다. 그래서 70의 경지, 이게 성인의 경집니다. 근데 이게요 욕심을 어떻게 때려잡아서 이러는 게 아니고, 양심을 계속 실천하다 보면 습성이 바뀌어서 욕심도 절제하게 되는 거죠. 스스로. 그러니까 지금 보시면, 자꾸 양심을 따르다 보면 부지불각 중에 일가를 이루게 되어 자기 에고의 습성이 변해서 인심도, 즉 욕심도 법도를 어긋나지 않게 되어 도심과 자연 접근될 것이다. 양심처럼 욕심도 변하게 될 것이다. 아시겠죠. 저희 학당 공부 하시는 겁니다. 한문으로 해 놓으니까, 말이 옛날 말인데 요즘 식으로 풀면, 이제 학당 얘기 들으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양심은 자극적인 맛이 떨어진다. 욕심은 자극적이다. 욕심의 성취는 곧장 진미로 화한다. 하지만 양심을 자꾸 따르다 보면 맛이 없는 중에 선을 이루게 되고 자기 욕심도 이제 양심을 따라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인의 경지에 가게 된다. 이게 그냥 대안이에요. 옛날 어른들 대안은 이거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갑자기 이야기가 스케일이 커집니다. 우리 마음 얘기 하다가 스케일이 커져요. “이 우주가 苦海라는 것은” 우주를 고해다 라고 말하는 것은 “惡이 충만한 연고요” 예. 그러니까 악이 충만해서 그런 거고 “만약 삼라만상중에 오직 사람의 일거일동이” 사람의 움직임이 “선행으로만 돌아온다면” 양심을 지키는 무위의 삶으로 돌아온다면 “이 세계는 그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태평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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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지금 이 우주에서 우리가 욕심을 버리니 이런 게 문제가 아니고 뭐죠? 목표가. 양심을 따르면서 욕심도 양심을 어기지 않게 만드는 거. 이것만 하면 그대로 극락이 된다. 탐진치를 없애서 극락이 오는 게 아니고 탐진치를 양심으로 다스리게 되면 극락이 온다. 우리가 늘 善을 행할 수 있게 되면 극락이 온다. 이게 대승철학입니다. 그래서 이 대승철학은요 지금 이렇게 이 세계를 극락 만들 방법을 연구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걸 지금 풀어 놓으신 거잖아요. 이 땅에서 사람 말고는 문제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만 양심을 따르게 되면 여기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죠. 극락이 되는 거죠. 대승불교도 그래서 정토를 중시합니다. 정토를요, 이 땅을 포기하니까 자꾸 아미타 정토를 가자고 하지, 원래 淨土신앙의 핵심은요 이 땅을 정토로 만들자는. 극락으로 만들자는 겁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뭐였죠? 요즘 기독교분들이요 자꾸 천국 갈 생각만 하세요. 예수님의 목표는 이 땅에 천국을 만드시겠다는 거였어요. 이 땅에 아버지 뜻이, 아버지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여기가 천국이 돼요. 지상천국이 원래 목표였는데, 지상천국을 포기하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나라도 어떻게든 천국에 가야겠다.”가 돼요. 불교도 똑같습니다. 극락을요 이 땅에 펼치겠다는 사상이 있고, 천국, 정토로 올라가겠단 사상이 있는데 왜 후자 쪽에 더 관심이 가게 될까요? 이 땅을 포기한 거예요. “여기가 언제 정토 되냐. 나라도 정토 가겠다.” 그래서 대승 보살이라면 목표를 원대하게 잡고, 이 땅에서 道를 펼 법을 연구해야죠. 그래서 그걸 연구하시는 분들이 동서양에 종교 불문하고 이 연구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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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욕심. 욕심을 어떻게 경영할 건가. 예수님도 “항상 나는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아버지 뜻대로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욕심도 부리고 다 하신 거예요. 다만 아버지 뜻에 맞게 했을 뿐이다. 내 뜻이 따로 있어요. 그래도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이게 예수님이 예수님 된 이윱니다. 聖人이 된 이윱니다. 예. 공자님 다 그렇게 사셨어요. 4大 성인들 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고. 그래서 그분들로 인해서(?) 이 苦海, 고해라고 이 우주를 오판하지 마라는 거예요. 선생님은. 우주가 고해다 하는 건 욕심이, 탐진치가 충만해서 그런 거지 양심이 탐진치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극락으로 변한다는 거예요. 이 우주를 버리고 열반에 들고 할 게 아니고 “어찌 고해라는 대명사가 나오리요.” 영원히 이 우주는 고해다. 가 아니에요. 소승철학은요 이 우주는 원래 영원히 고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희망을 품을 필요가 없고, 어쩌자는 거죠? 빨리 벗어나자는 겁니다. 어차피 현상계는 고해니까 벗어나자는. 그게 아니에요. 어차피 현상계는 욕심이 존재하니까 현상계를 떠나자는 거예요. 욕심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우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욕심이 있어도 양심으로 다스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극락세계 만드는 비법입니다. 그래서 봉우 선생님의 이 철학을요, 이분이 대승불교를 연구하신 그런 것도 아니에요. 이분은 동양의 이 儒學을 주로 해서 丹學을 공부하신 분이죠. 결론이 똑같이 나잖아요. 저는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주목해야 된다고 봐요. 후학들이. 아, 영성이라는 거는 똑같구나. 어떻게 파고 들어가도 같은 결론이 나오는구나. 저는 그렇게 연구했습니다. “어찌 고해라는 대명사가 나오리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우주가 고해로다 하는 말을 아주 싫어하셨어요. 고해가 아니라는 거예요. 실상을 알면 고해가 아니다.
28:02
이게 대승불교 철학 아닙니까? 이 우주가 본래 비로자나불의 작용이지 어떻게 고해냐 이거예요. 초기불교에선 고해로 단정하고, 빨리 떠나자고 하는데. 대승에서는 “현상계는 비로자나불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일 뿐이다. 현상계를 어떻게 버리느냐. 五蘊이 본래 空性이라 청정한데 어떻게 오온, 현상계를 버리느냐.” 이런 내용이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6바라밀만 하면 된다. 우리가 양심만 따르면 현상계는 극락으로 변한다. 이 주장이시구요. 그래서 “國與國間에” 나라 간에 “각자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族與族間에” 민족 간에 “각자 자기 민족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 사람 개인 간에 각자 자기 생업에 만족하여 욕심을 내지 않으면 된다. 극락과 고해의 차이라는 것은 安分이냐 欲求냐의 차이에서 생긴다.” 여기서 욕구라는 거는 어떤 그 소소한 욕심이 아니라 욕심을 끝까지, 욕심만 밀고 나갈 거냐. 안분, 양심으로 자기 욕심을 편안하게 진정을 시킬 거냐. 안분이라는 건 분수에 만족하는 거죠. 양심 있는 사람은요 “이건 내가 가지면 안 된다.”가 나와요. 안분지족이 별 게 아니고 이거를 제가 갖고 싶어요. 양심에서 찜찜이라고 해요. 안 가져요. 그러면. 이게 안분이에요. 근데 분수에 편안한 마음을 못 내는 사람, 분수에 만족을 못 하는 사람은 이건 내 게 아닌데도 가지려고 한다고요. 내 분수 이상을 가지려고. 나는 10억짜리 분수.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 뭘 보면 아냐면, 양심에 찜찜하다고 하면요 그걸로 돈을 땡기면 그건 내 분수 밖인 거예요. 양심을 어기면서 여러분이 뭔가를 취하시는 거, 여러분 분수 밖인 거예요. 그러니까 안분이냐, 분수에 만족하느냐. 즉 욕심을 적절하게 양심 어기지 않는 선에서 쓰면 만족인 거구요 양심 무시하고 욕심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면 이제 욕구불만에 빠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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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가 시작되겠죠. 그래서 안분이냐 욕구냐 그 두 차이가 크다. 그래서 개인 간에 나라 간에 민족 간에 서로 너무 욕심내지 말고 각자 자기 양심에 만족해서 분수를 지키면, 선을 지키면 전 세계에 평화가 온다. 요 얘기를 하신 겁니다. 이게 옛날 三均主義, 趙素昻의 삼균주의도 이런 주장이죠. 그래서 그 주장들이 항상, 이 선생님 말씀이 그 쓰는 용어가 그래요. 사람 사람 간에. 사람과 사람 간에. 개인 간에. 예. 민족과 민족 간에. 그러면 더불여자를 써서요 더불여잘 써서 族與族 人與人, 그럼 또 뭐 있죠, 예, 國與國. 그러면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사람과 사람 간에 서로 균등해지자. 가 삼균주읩니다. 항상 셋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민족 간에 서로 존중해서, 역지사지해서 서로 배려하자. 나라 간에 역지사지해서 서로 배려하면 전쟁 안 난다. 개인 간에 서로 역지사지해서 배려하면, 양심을 행해 주면 개인 간에도 공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인간이, 덩어리가 크건 작건 인간들이 모인 집단은요 결국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거죠. 그래서 그 서로 마음 배려하는 게 제일 답이다. 요 주장을 하시는 거예요. 내 욕심만 부리지 말고 상대방 입장 배려해서 양심으로 절제하라. “이 다음 세계가 태평세계가 된다는 것은 세계 인류가 모두 현재의 물질문명, 즉 무한한 욕구를 서로 마지 않는 관계로 고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서로가 자각하고 각자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할 방안을 수립해서 지상천국을 수립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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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기 나라, 자기 나라 챙기자는. 각자 다른 나라 먹을 생각 말고 자기 나라에서 분수에 만족하면서 자기 나라부터, 안정시켜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상천국이 이 땅에 들어선다. “이것이 극락세계라는 말씀이요 이 理想이 실현된다면 사람은 선이 있을 뿐이요 악은 없을 것이니” 이제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악을 덜 하게 되고 선을 하게 되면, 예, 악은 점점 없어질 거고 선은 점점 커지겠죠. “죄가 어느 곳에서 나오리요? 이것이 대황조(大皇祖)님의 弘益人間의 대이념이시고” 이게 별게 아니고, 양심 지켜라. 양심으로 욕심 다스려라. 하는 게 우리 민족 그 제일 어른이신 대황조(大皇祖)님의 弘益人間 이념이고 “孔夫子님의” 공자님의, 이 말이죠. 공자님의 “大同政策이다.” 모두가 화평할 수 있는 게 대동책이거든요. 대동의 어떤 방책. 대황조(大皇祖)님의 弘益人間이념과 공자의 大同策을 선생님이 제일 높이 평가하는 겁니다. 그게 극락세계 만드는 비법이다. 龍華世界 건설하는 비법이다. 해서 불교까지 이렇게 회통해서 보세요. “이거 말고는 다른 게 없다.” 그러면서, 지금 마지막 네 줄 남았는데 요 말이 커져요. “현대는 물질문명의 극치에서 죄악의 극치를 범하고 있다.” 욕심만 따라가라고 외치고 있으니까요. 양심을 돌아보게 안 시키니까 죄악의 극치다 이거구요. “이것을 정신과 물질의 융화, 二元合一로 현 세계를 구하자는 것이다.” 정신도 만족시키고 물질도 만족시키자는 겁니다. 즉, 이러니까 욕심을 버리자는 게 아니에요. 욕심도 채워주되, 물질문명도 발전시켜서 욕심을 채워주되, 정신문명을 발전시켜서 양심으로 그거를 다스리자는 거죠. 이 두 개가 균형을 이루면, 이게, 人心은 욕심문명을 상징합니다. 물질문명. 道心은 정신문명을 상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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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도심이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이 문명이 균형을 이루죠. 고 얘기시구요. “비록 그 싹은 터럭보다도 작으나” 지금 그 양심문명의 새싹이 우리 민족한테서, 본인도 평생을 걸쳐서 그 싹 나게 하려고 노력하셨잖아요. 근데 아무튼 그 사업에 대한 평가가, 또 우리 민족의 많은 도인들이 개벽 온다고 준비를 시켰죠. 그런데 그걸 총체적으로, 본인의 노력이나 이 선현들의 노력을, 해서, 현재 터럭보다 작다고 본 겁니다. 그 싹이. 아직 지구상에서만 해도 터럭보다 작지만 “오래지 않아 그 大光華가” 그 거대한 빛이 화려하게 뿜어내서 “온 우주를 덮으리라.” 온 우주를 다 광명하게 만들 그 싹이 지금 났다 이거죠. 싹이 났다. 이게 63년도에 쓰신 거예요. 그래서 평생에 걸쳐 싹을 이렇게 뭔가 싹이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신 건데, 그 싹이 소설 『丹』, 84년도에 소설 『丹』이 나오면서 그게 이제 싹이 좀 이렇게 퍼졌달까요? 아직 싹 상태지만 이 뭐죠 이렇게 어디 뭐죠 좁은 그 못자리판에서만 자라던 게 여기 저기 뿌려진 그런 격으로 이렇게 보신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싹들이 우리나라 전역에서 더 이렇게 자라는 거를 보고 싶으셨던 거 같은데. 63년도만 해도 진짜 소수만 이런 거 연구하지 않았겠습니까. 동학, 天道敎죠. 천도교, 증산도 증산교, 원불교 이런 데들이 개벽을 준비해 왔는데 그 성과라는 게요 현재 보면 알아요. 지금 양심 욕심을 선명히 구분하고 어떻게 양심 계발할지 그 답을 선명히 내서 자기도 그걸 실험을 해서 그렇게 살고 남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양심이 어떤 원리고 욕심이 어떤 원리니까 양심만 따르면 개인 간에 민족 간에 국가 간에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이 얘기를 본인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말할 수 있는 보살들이 각 종교에서 얼마나 나왔는가 보시면 아, 이게 지금 터럭보다 작다고 할만도 하죠.
36:30
전 인류가 지금 몇십억인데 그 중에 몇 명이나 그걸 하고 있을까요. 그럼 이게 터럭보다 작다고 말할만하죠. 근데 또 온 우주까지 계산하면 얼마나 작을까요. 하지만 그 작은 빛이 점점 커져서 지구를 50% 이상 밝히다 보면 점점 어둠이 사라져가겠죠. 그러다가 나아가서 온 우주까지 다 밝힐 것이다. 이런 願을 가지고 사는 게 보살입니다. 실제 우주를 다 밝히느냐. 그건 중요한 ㅎ 게 아니고, 지구만 밝혀도 어딥니까. 뭐 우주까지 얘기할 필요가 없는데, 양심이라는 게요 이 좋은 걸 온 우주랑 나누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이니까 말씀이 이렇게까지 나간다고 보시면 되겠어요. 진짜로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내 마음 하나 밝히기도 어려운 일이죠.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건요, 양심이라는 거는 내 마음 하나 밝히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내 양심은 알고 있어요. 내 거 밝히고 남의 거 밝히게 도와서 온 우주 거 다 밝히는 게 양심의 자연스러운 願입니다. 이거를 불교에서 本願 그러죠. 본래의 誓願이에요. 양심은 오로지 그걸 원해요. 온 우주를 다 밝히는 거. 이분이 보살이시라 이렇게 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게 재밌죠. 大學의 建學理念은 뭘까요. 이 얘기만 하고 끝낼게요. 불교나 지금 같아요. 근데 지금 불교는요 헤매고 계시더라고요. 유교의 제일 그 중요한, 그 글이 짧지만 중요한 글이 대학인데 거기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38:12
明明德. 君子가 되는 비결이에요. 明德이 양심입니다. 네 안에 있는 광명한 그 마음을 다시 밝혀내라. 그러니까 거듭중자 써서 重明이 돼요. 이게. 예전 어른들이 重明 그러면 원래 밝았던 거를 거듭 밝히는 거예요. 원래 밝았는데 다시 밝혀내는 거예요. 이게 원래 밝은 그 빛이 어두워진 건 아닌데 주변이 캄캄해지니까 빛이 드러나지 못하잖아요. 덮여있으니까. 덮인 덮개를 벗겨내면 어떻게 돼요? 다시 밝아지는. 원래 밝았지만 다시 밝아지는 맛이 나죠. 거듭 밝혀내라는 거예요. 원래 밝은 덕을. 자, 그다음에요, 예, 새롭게 하라. 백성이 새로워지는 거를 잘 도와줘라. 백성들의 양심도 날마다, 백성들 마음속에서요 양심이 샘솟아요. 그러니까 나라에서 정치 조금만 잘못하면 백성들이 난리 나죠. 양심이 끓어오른단 말이에요. 계속 샘솟고 있거든요. 백성들 안에서 양심이. 그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양심을 잘 도와줘라. 이게 新民이구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죠? 어디 가서 멈추자는 거죠? 서로가 양심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백성도, 국민들도 완벽히 구현하고 리더도, 보살도, 군자도 자기 양심 완벽히 구현하는 그 지경 갈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마라. 그러니까 보세요. 이게 모든 聖人들 보살들의 마음입니다. 우주에 한 명이라도 지금 누군가 죄를 짓고 있다면 여러분 양심이 다 밝아진 건가요? 아니죠. 그거 도와야 양심이 밝아지는. 그러니까 내적으로는요 내 양심을 완벽히 밝힌다는 건요 당연히 온 우주가 다 양심 지키게 될 때 내 양심이 만족해요.
40:00
그 전엔 찜찜하시겠죠. 그러니까 “내 양심 다 밝히자.(重明 明德)” 안에 사실은 뒤에 게(新民 止於至善) 다 들어있어요. 그걸 남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남들도 다 양심 지키게 된다는 거고, 이거를 통합해서 얘기하면 모두가 양심 다 잘 지키게 되는 게 군자의 願입니다. 이게 군자의 원이에요. 대학의 건학이념이고. 그럼 지금 한국 불교의 이념이 뭘까요. 自覺, 이렇게 돼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에. 曹溪宗이 이렇게 추구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自覺 覺他 覺滿.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해 준 다음에 깨달음이 온 천지에 꽉 차게 만들자. 보살의 당연한 서원이죠. 근데 지금 이것도요 대승불교의 원이라고, 우리 부처님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이거 고쳐야 된다고 불교 내에서 또 비판의 소리가 나오, 왜냐, 지금 그분들은 자꾸 소승 대승이 너무 헷갈려요. 지금 대승이라고 표방하다가, 이걸 안 하고, 말만 이렇게 해 놓고 안 하고 있으니까, 비판이 어떻게 나요? “부처님 법으로 돌아가자. 우리 교주, 맨 처음 교주이신 부처님 말씀대로 돌아가자.” 하니까 그 말씀은 또 소승적이거든요. 그 지금 헷갈리고 있습니다. 대승을 못 감당해서 일어난 일인데 답을 소승에서 찾으려고 그래요. 초기불교에서 찾으려 그래요. 안타깝더라고요. 지금 이 이념 너무 좋은데 이걸 하려고 노력할 어떤 방책을 찾아보지 이걸 아예 뜯어고치고 싶어하더라고요. 어차피 이거 걸어놓고 한 번도 이렇게 안 하니까. 뜯어고치자. 하는 주장까지 봤어요. 부처님식대로 돌아가자. 그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세요? “戒定慧 닦아서 열반을 증득하자. 그리고 그 열반을 남들하고 나누자.” 이렇게. 그러니까 내용이 딱 소승으로 돌아가 버려요.
42:02
그런 주장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죠. 이 뛰어난 불교학자들이 이런 얘길 해요. 그분들의 어떤 진심은 알지만 제가 볼 때 안타까운 게, 소승 대승이 막 섞여 있어요. 이게 대승의 이념입니다. 나를 밝히고 남을 밝혀서 온 우주를 밝히자. 군자의 원이듯이 보살의 원은 자각 각타 각만이에요. 내 불성을 최대한 밝혀내고 이 중생들의 불성을 최대한 밝혀내서 온 우주를 불성으로 광명하게, 화엄세계 만들어보자. 이게 양심의 바른 원입니다. 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양심 밝히는 법조차 모르는, 이 승려들이 문제죠. 그리고 또 재가신자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 제자들로서 어떻게 밝히실 건지. 양심을. 근데 이게 모순이에요. 불교의 모순이에요. “부처님 제자들로서 어떻게 하실래요?” 그러면 “부처님이 하신 대로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또 소승이 돼요. 제가 볼 때도 너무 힘들게 살고 계세요. 답 하나 찾는 게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가 소승 대승이 섞여버려서 그래요. 제발 제 강의를 보고 소승 대승 좀 나누세요. 대승의 문젠 대승으로 푸세요. 실제로 원이 보살도를 원하시는 겁니까? 열반에 들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정하세요. 열반에 들길 원하셨으면 철저히 초기불교로 돌아가세요. 한국 불교를 초기불교로 바꾸세요. 애매하게 우리가 대승이라고 하면서 초기불교식으로 가자고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전문가들이 그러고 있어요. “이 땅에 대승을 밝힙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빨리 삼학 닦아서 열반을 증득합시다. 부처님을 닮읍시다.” 그러면 또 초기불교로. 소승불교 쪽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제가 안타까워서 말씀드립니다. 봉우 선생님은요 아주 홍익보살이세요. 훌륭한 보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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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인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양심의 씨를 뿌리려고 엄청나게 고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기 보면 그 내용이 나와서. 또 제가 볼 때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이 부분을 제가 높이 사 드리는 거예요. 이분이 고생하셔서 제가 弘益人間을 배웠거든요. 이분한테. 이분한테 처음 들은 거예요. 弘益人間을 그렇게 푸는 걸 못 들어봤는데 이 양반이, 제가 열아홉 살 때 이분한테 들은 게 “弘益人間은 딱 정해져 있다. 나를 정확히 알아서 남을 알고, 또 남을 알아서 나를 알아내는 게 공부의 바른 순서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를 통해 나를 정확히 알면, 또 다른 나인 남도 알 수 있고. 남을 알면 남도 도울 수 있고, 그러면서 남도 또한 나를 돕게 된다.” 이게 기본이라는 거예요. 이게 공부의 올바른 순서기 때문에 이 원리대로, 弘益人間은 뭐냐, 이 원리에 입각해서, 내가 나를 먼저 정확히 알아서 “아, 내가 당하기 싫은 거는 남도 당하기 싫겠구나.” 하는 거를 꿰뚫어서, 내가 당하기 싫은 건 남한테 절대 안 하고. 내가 나를 정확히 이해해 가지고, 나는 이런 거를 받고 싶어하더라 하는 걸 알아내면, 남도 또한 나 같을 테니 남들도 이거는 받고 싶겠구나 하는 걸 정확히 파악해서 남들한테 그거 먼저 해 주자는. 그러면 남들도 또 나한테 그렇게 대할 것이다. 이런 원리로 인류가 서로 공생할 수 있다. 이게 우리 단군의 弘益人間 이념이다. 환웅의 弘益人間 이념이다. 이렇게 가르쳐 주신 그게요 머리에 딱 박혀서. 이분 글에는 어딜 펴도 다 그 얘기만 나옵니다. 남은 또 다른 나다. 그래서 남을 이해하는 게 사실은요, 여러분 남을 이해하는 게 나를 이해하는 거예요.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요 내 속에도 그게 똑같이 있거든요. 나를 압니다.
46:00
과거를 이해하는 건 과거의 나를 이해하는 거예요. 우리가 미래를 고민하는 건 미래의 나를 지금 고민하는 거고. 현재의 또 다른 수많은 나를 연구하는 건 결국 이 현재의 나의 여러 모습들을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의 나,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면요 과거의 나를 보는 거고요, 현재를 공부하면 현재의 나를 보는 거고,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는 거는 미래의 나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하는 거다. 결국은 다 나다. 하는 주장을 하세요. 다 나다. 다 나의 다른 모습들이다. 똑같으니까요. 남이 나랑 다를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여러분 이거 진짜 먹고 싶죠. 만약에. 그럼 남들보다 내가 제일 먹고 싶고 남들은 별로 안 먹고 싶을 거라고 전제하고 먹어요. 신기하죠. 내가 진짜 원하고 그게 희소할 때는요 꼭 이걸 나만 가져야 된다는 뭔가를, 相을 세웁니다. 그 때는 남하고 나를 딱 끊어버려요. 억울한 일 당할 땐 그렇게 또 남하고 연결시켜서 남들한테 “나 좀 봐주라.”고 하고. 내가 딱 또 원하는 거 챙기고 싶을 때는 바로 끊어버리고 “남의 마음은 나 같지 않을 것이다.” 전제하고 “이건 나만 좋아할 것이다.” 하고 맘대로, 이렇게 계속해서 에고를 조작해 가니까 마음이 엉망으로 쓰이는 거죠. 항상 남이 나랑 같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남한테 죄를 짓고, 어떻게 국가 간에 전쟁을 할 수 있을까요. 전쟁을 하면 상대방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되는데. 내 국민이 그렇게 죽어나간다고 생각하고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죽어나가고 내 형제들이 죽어나간다고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일 텐데 “남의 나라니까.” 하고 죽인단 말이에요. 그렇게 황금률이니 뭐니 그 율법으로 받고, 예언자들 통해서 경고 받았던 이스라엘이 하는 짓 보면 팔레스타인에다 얼마나 악독한 짓 겁 없이 하면서요,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나라도 더 죽이라 그랬다고 주장을 하더라고요.
48:03
팔레스타인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이제 그 지경까지 가면 돌아올 길이 없죠. 하느님의 뜻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키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되고 아버지의 뜻은 모두가 서로 하나라는 거예요. 다 똑같은 아버지 자녀라는 거예요. 그래서 남을 나처럼 바라본다는 게요 참 심오한 얘깁니다. 그 안에 道가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초능력을 얻고 뭐 별 걸 다, 차크라를 열고 별 짓을 다 해도요 마지막에 남을 나처럼 못 여기며는요 꽝인 겁니다. 그 사람 영성은요 바닥인 거예요. 뭐 그 화두를 터지고, 화두에 뭐 터지고 뭐 염불을 하다가 뭐 부처님을 봬두요, 남을 나처럼 못 여긴다. 6바라밀이 안 나온다. 꽝인 거예요. 공부 수준이요 그만큼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폭으로만 성취한 거밖에 안 돼요. 하늘을 보는데 아주 작은 대롱으로 보는 수준밖에 안 돼요. 그것도 보긴 본 거지만 전체를 못 보니까 엄청난 오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거를 선생님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제가 이분을 높이 보는 거고. 보살도를 이분을 통해 배운 거거든요. 저는 그렇게 보살도를 배웠어요. 불교로 배운 게 아니고 처음에, 제가 열아홉 살 때부터 이분의 언행만 되게 연구하고 관심 갖고 빠가 돼서 연구했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분 삶에서 그대로 보살도를 배운 거예요. 이분 삶에서 늘 주장하시는 게 “죄는 내가 짓고 편리는 뒷사람들이 보게 하겠다.” 항상 그 주장. 그게 보살도예요. 그러니까 이 손에 때 묻혀야 할 일은 내가 하고 그 복은 중생들이 받게 하겠다. 가족한테는 그런 생각 잘 하시죠. 내가 궂은 일을 하고 자식들은 복만 받았으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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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를요 사회에 확장시키면 보살이 됩니다. 이 사회 전체를 나의 가족으로 보는 거예요. 또 다른 나로 보는 거예요. 처음 본 사람도 또 다른 나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이미 달라요. 보살은.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내준다는 게 아니에요. 또 다른 나지만 못된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ㅎ. 못된 어떤 習에 쩔어 있는 나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이거 함부로 덤비면 안 돼요. 하지만 기본 전제가 “원수도 또 다른 나다.” 하는 시각에서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이. 원수도 사랑하라니까 원수한테 찾아가서 안아주고 막 이렇게 덤벼보세요. 어떻게 되나. 안타까운 사연 페북에서 봤는데, 사람이 착하다는 걸 입증하겠다고 행위예술가가, 30대 초반이시던데, 히치하이크만 해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뭔가 너무 예술적으로 접근하신 거 같아요. 너무 사람을 좋게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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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선 잘 통했어요. 다 그렇게 잘 태워주고. 터키 가서 바로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습. 그렇다고 해서요 또 다른 나가 아닌 게 아니에요. 못된 나일 수도 있잖아요. 이해해야 돼요. 못된 나라면 어떻게 움직일까도 고민하시면서, 이렇게 우리가 도덕을 밝혀가야 됩니다. 그게 어려운 거예요. 또 다른 나로 본다는 게 모든 그 “또 다른 나니까” 하고 다 배려해 주고 맞춰 주라는 게 아니고, 그거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받아들이세요. 저 사람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예. 그 마음을, 나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걸 가져야 되고 저 사람은 좀 참아야 되고. 이런 발상부터가 잘못됐다는 걸 이해하시면서 연구하시다 보면 여러분도 다 군자와 보살이 되는 거예요. 그런 양심의 소리 연구하는 전문가들일 뿐이에요. 그분들은. 별 게 아니고. 무슨 신통력으로 하는 게 아니고. 뭐 어떻게 보면 신통은 신통이지만, 양심의 그 힘을 가지고 그걸, 이런 일을 이뤄내니까 신통은 신통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말단적인 신통이 아니라고요. 오로지 묵묵히 양심의 소리를 따라가면서 양심과 함께 길을 걷다가 일어나는 그런 神通이니까 그런 고급 신통의 大家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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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우사상연구소의 한자표기에 의해 http://www.bongwoo.org/xe/106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