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 선생님의 견성론
| 봉우 선생님의 가르침 | |||||||||||
|---|---|---|---|---|---|---|---|---|---|---|---|
| 홍익학당의 공부와 봉우 선생님 | 진면목 | ||||||||||
| 가르침들 | 연정 16법 | 원상문과 원상법 | |||||||||
| 원상법 12관절 | 원상혹문장 | 호흡법 소서 | |||||||||
| 구계법론 | 삼극주 | 오수주 | 대학 3강령 | ||||||||
|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 양심으로 극락세계 | ||||||||||
| 도와 덕을 온전히 통합적으로 | 성인들의 심법 | ||||||||||
| 봉우 선생님의 견성론 | 양심 개벽 | 개벽팀 | |||||||||
| 강의일자 | 2019. 02. 11. 月. |
|---|---|
| 게시일자 | 2020. 05. 11. |
| 동영상 길이 | 14:40 |
| 강의 중 인용 도서 | 백두산족에게 고(告)함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m6M8QR7Hs7E |
00:02
이거를 제가 하나 가져왔는데요. 이거 하나 읽어드려 볼게요. 그냥 이건, 깨어서 들으세요. 지금. 깨어서 천국 극락을 누리는 분들이 들으시면 좋을 거 같아서. 제가 예전에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봉우 할아버지가 쓰신, 봉우 할아버지의 견성론인데요. 이렇게, 견성론(見性論)은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봉우 할아버님 글 중에, 제가 이 글을 고2 때 본 글인데, 그 때는 이런 내용들이 안 보였는데, 나중에 공부하다 보니까 “봉우 선생님도 다 얘기 해 놓으셨네.” 하는 거를, 고2 때 만나서 읽었던 책인데, 이 글을 제가 쓴 건 2006년에 써 놨네요. 2006년이니까 학당 열고 한 3년 됐을 때, “어 이게 이렇게, 봉우 선생님도 견성을 강조했다.” 이 얘길 하고 싶어서 글을 정리해 놓은 게 있어요. 왜냐면 봉우 선생님 제자들한테 제가 그 때쯤에 견성 하라고 그랬더니 “봉우 선생님은 견성을 얘기한 적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호흡만 얘기했지 견성 얘기 안 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럴 리가.” 하고 선생님 글을 다시 보니까 분명히 있거든요. 그래서 써 놓은 건데 한 번. 선생님 글만 먼저 읽어 드리고 제가 이제 구절구절 한 번 풀이도 읽어 드릴게요. 이거 와 닿으시는지 한 번 읽어보세요. 봉우 선생님의 그 『백두산족에게 告함』이란 글에 이게 있습니다.[1] “내가 있다 없다 함도 모두 나요,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나라. 없고 또 없고 비고 또 비어도 나 아닌 게 없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은 것 또한 나로 말미암으니,” 걍 온통 나라는 거죠. 다 나니, “세상 사람들이여 삶과 죽음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빈 산 밝은 달에 참나를 깨달으라.”
01:58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있네 없네 하는 것도 나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우주가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있다 없다 뭐라고 따져도 나는 이미 있으니까 거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내 마음의 세계와 이 우주를 수놓고 있는 거죠. 보시면, 제가 풀이를 좀 했어요. 2006년에 풀이해 놓은 거라 지금 보면 좀, 안 쓰는 표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만 보시면 다 맥락은 같아요. ““내가 있다.”라는 느낌이 확고한 一念이나, 그런 “나라는 존재감”마저 초월한 순수한 존재감의 무념(無念)이나 모두 동일한 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있다 없다 해도, 나라는 느낌이 강하건 나라는 느낌을 초월한 거 같건, 결국 그게 태극(太極)이건 무극(無極)이건 다 나라는 거예요. 무극도 나다. 사실은 나다. 내 마음의 가장 본바탕이 텅 비어있을 뿐이지 그것도 나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나라.” 이거는요 “나라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현존한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영원한 현존이죠. 그러니까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다 “나요.” “없고 또 없고 비고 또 비어도 나 아닌 게 없으며,” “온 우주를 말끔히 내려놓은 무념의 극치, 텅 빔의 극치에 이르더라도 나다.” 사실은 나일 뿐이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음 또한 나다.” 하는 거는요 “무념에서, 텅 빈 무념에서 나라는 존재감이 생생해지는 일념으로 돌아오더라도” 즉 무극에서 태극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그것도 다 나의 나툼이지 무극도 원래 나였다.” 자, 그러니 “사람들이여 생사의 어떤 길을 찾고자 한다면” 요 구절은요 “시공에 의해 제약되어 생사를 지니는 현상계를 살아가더라도 그 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어떤 나를 찾고 싶겠죠. 사람들이. 그래서 생사의 길을 찾고자 한다는 게, 생사 속에 살면서 생사를 초월한 어떤 길을 알고자 한다면 “빈 산 밝은 달에 참나를 깨달으라.” 하면 왠지 마음이 열리시죠?
04:06
빈 산 밝은 달. 딱 이렇게 산에, 아무도 없는 산에 그 뭔가 나 홀로 있는 산에서 달을 보고 있는 그 마음을 상상하시면서 “나라는 건 본래 광명하니 필요한 거는 달 가리는 구름만 사라지면 된다.” 달이 훤히 뜬 거에서 이걸 보셔야 됩니다. 구름 걷히면 달이네. 근데 구름 있을 때도 원래 달은 있었죠. 그러니까 구름이 있건 말건 달은 늘 있는데 구름 걷히니까 달이 보이네. 요것은, 필요한 거는 달을 가리는 구름만 사라지면 되니까, 생각 감정 오감으로 분주하게 참나를 찾지 마시고, 생각 감정 오감을 내려놓고 나면 참나가 싱그럽게 드러날 거다. 그냥. 구름 걷히면 달 훤히 뜨듯이 원래 그냥 달이 떠 있었듯이. “시공 초월하여 존재하는 참나 자리를 시공에 의해 제약된 알음알이로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내려놓으라. 요즘 같으면 이제 “몰라 하라.”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겠죠. 그러면, “만약에 알음알이로 찾으면 분주할 뿐이지 참나를 결코 못 찾을 거다.” 요렇게 제가 풀이해 놓은 게 있어서 읽어 드렸습니다. 그게 하나고 두 개 더 있는데요. 다 『백두산족에게 告함』이란 책에 있어요. 요 구절 한 번 읽어 드릴게요. 원문으로. “물 흘러가고 구름 걷히면 본래 면목이 절로 드러나니 구차하게 이리저리 억지로 조장함이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맑은 향 한 대 피우고 차 한 잔 마시고서 고요히 앉아 참나를 돌이켜 보니, 푸른 산 흰 구름은 한가로이 자유로우며 흐르는 물은 밤낮으로 공연히 분주하구나.”[2] 이렇게 써 놓으신 게 있어요.
05:50
요런 것도 이제 한 번 풀어 드리면 “참나는 억지로 조장해서 되는 물건이 아니고 생각 감정 오감만 내려놓으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디 간 적도 없고 온 적도 없고 우주가 온통 난데, 나 밖의 게 없는데, 나를 잃어버릴 수도 없고. 지금 이게 다, 그러면 봉우 선생님이 뭐 불교도가 아니시지만 이미 다 얘기하고 계시잖아요. 오히려 이분은 유교에 가까우신 분이죠. 유교. 그래서 실제로 성균관 儒道會 理事長까지 하셨어요. 선생님은. 유도회 이사장, 大倧敎 總典敎. 벌써 우리 민족 대종교와 유교가 이렇게 하나로 돌아가는 삶을 사셨어요. 그래서 대종교 분들한테 지적도 당하고 그랬어요. “저 사람은 유교다. 봉우 할아버진 유교다. 우리 대종교를 위하지 않는 거 같다. 단군만 위해야 되는데 자꾸 공자 얘기를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편협합니다. 이렇게. 근데 이분은 그냥 삶 자체가 원융하게 사신 분이라. 그래서 참나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간 적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이 우주의 본바탕이 나예요.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도 나고 나도 나고 다 난 거예요. 한 생명이 이렇게 다양하게 나툰 것뿐이지 다 나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의 맨 밑바탕에 있는 그 의식에서 나와 남이 있을 수 없고 그냥 우주를 초월해서 나인 거죠. 그래서 “無始以來 이렇게 如如하게 존재해 온 거니까 일시적으로 물 흐려지고 구름에 가려진다고 하더라도” 물이 흐려진다고 해도 가만히 있으면 물 맑아지고, 구름에 달 가려져도 가만히 있으면 걷히니까 기다리라 이거죠. “어찌 이런저런 구차한 알음알이로” 꼼수를 부려서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교묘한 알음알이를 자랑한들, 불교에 대해서, 뭐 나, 참나에 대해서 아무리 현란한 말을 한들 참나는 더욱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제 이런 말, 제가 정리를 한 번 해 놨네요.
07:53
그대가 참나 찾고자 한다면, 아까, “향 한 대 피우고 차 한 잔 하고 딱 참나를 돌이켜 보라.” 했듯이 “그냥 정신 맑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밖으로 향하는 내 의식을 안으로만 돌이키십시오. 나에 대한 몰입을 하십시오.” 이게 回光返照라고 그러죠. “밖으로 나가는 빛만 안으로 돌이켜서 나라는 존재감의 근원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아까 “푸른 산 흰 구름은 한가로이 자유롭고, 흐르는 물만 밤낮으로 분주하구나.” 이렇게 해 놓은 게, 참나 상태에서 보면 이게 법공입니다. 참나 상태에서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알아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참나를 모를 때는 막 우주가 다 문제 있는 거 같고, 참나 못 만난 나도 문제 있고, 참나 못 만나면 어쩌나 하다가, 참나 만나고 보니까 어때요? 나도 본래 참나였고, 산도 물도 다 원래 지 알아서 다 자득하고 있더라는. 각자 자기 본성 지키고 있더라 하는 걸 깨닫습니다. 이게 법공이에요. 존재까지 이해하게 됩니다. 나를 이해하고 나니까 존재가 이해가 돼요. 우주가 이해가 돼요. 그러니까 선비들이 我空 法空 체험을 못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진리를 모를 수가 없습니다. 참나 알고 나면. 그래서 “흰 구름은 한가롭고 물은 바쁘고 이게 다 참나 나툼일 뿐이다.” 요런. 그래서 “마음 비우고 나니 만물이 본래부터 유유자적하였음을 알겠다.” 이렇게 얘기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하는 거고. 마지막 말이요 저한테 제일 감동을 준 말입니다.[3] 제가 수심결(修心訣)(강의)[4] 쓸 때도 이 구절을 강조했어요. 뭐냐. 이 말씀 이게 제일 저한테 감명 깊었어요. 들어보세요. 그냥 한 문장이에요. 아, 두 문장이군요. “나에게서 구하라.” 모든 답을 나에게서 구하라. 그리고 “나 밖에 내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서 구하라. 이게 저한테 되게 강력했어요. 나를 찾아야 되는데 어디에서 찾습니까. 나한테서 찾아야죠. 그래서 지금 내가 존재한단 느낌 밖에서 나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존재한단 느낌에 집중하시는 게 견성의 제일 최고 요결인 이유가, 나는 나에게서 찾아야 되니.
10:07
그래서, 제가 이제 풀어놓은 게 “나라고 하는 물건이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나라는 느낌이 있는 그 곳 뿐이다. 나라는 것이 그 외에 어디에 있겠는가. 다른 곳 기웃거릴 시간이 없고, 호흡법을 해서 법대로 되거든” 하는 거는 丹學을 제가 존중하는 입장이니까, 호흡법은 법대로 익히시되 “모든 관심을 나라는 존재에 향하게 하십시오. 이것이 회광반조의 실제입니다. 의식이 나라는 존재감을 향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고정되면, 다른 것에 향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감에만 몰입하면 참나가 자연히 훤히 드러날 겁니다.” 요 얘긴 아마 봉우 선생님 제자들한테 “호흡법 하시다가 호흡법 잘 되거든 틈 날 때, 맑을 때, 정신 맑을 때 호흡 잘 될 때 한 번 나라는 존재감에 집중해서 나를 찾아보십시오.” 이렇게 써놓은 겁니다. 이분들은 견성을 바라지 않고, 호흡을 해서 초능력을 얻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이런 말을, 제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할아버지 말까지 인용해서 해도 잘 안 먹혔던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지금은 모르겠어요. 지금은 제 강의 보고 듣고 하면서 견성하신 봉우 선생님 제자들이 많이 나오시지 않았을까. 그냥 혼자 추측을 해 봅니다.
11:26
재밌으시죠? 어디서도 못 듣는 겁니다. 이런 거는 제가 예전, 2006년에 써 놓고 제가 면우집에다 꽂아 놨더라고요. 근데 면우집(俛宇集)을 아까 우연히 낮에 다시 한참 찬찬히 다시 읽어 보다가 이게 하나 떨어지길래 “뭐지?” 하고 복사물을 보니까 이게, 이걸 그래서, 유튜브에 혹시 없으려나 해 가지고, 예전에도 한 번 읽어드린 기억은 나는데, 저희 소수 있을 때 읽어드린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가능하면 유튜브에 하나 올려 볼까 해서 들고 왔습니다. 재밌죠. 그러니까 이 마음 아시겠죠. 그러면요 이 마음 알면 우리가 그 마음 알고, 그 마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우리도 그 마음이 되면 이게 이심전심(以心傳心)입니다. 그 분 마음이 지금 내 마음에 그대로 복사가 돼서 나타나요. 예수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우리 마음에 임하면 지금 그게 성령이 임한 거고, 예수님 마음과 하나면 우리가 지금 이미 천국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마음은 천국 마음이니까, 천국에 사는 분의 마음이니까 우리 마음이 그대로 천국이자 천국에 사는 마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이제 공부예요. 고전은 이 맛에 읽는 겁니다.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려고. 근데 그 사람 말을 내 말로 하려고 읽으면 그냥 지식욕인데, 그 분 마음이 내 마음이 되게 만들려고 읽으면 고전은요 지금, 이 순간 다시 꽃이 피어요. 공자님이 다시 현신하는 거고, 누가 막 제 유튜브에다 “현 시대의 공자다.” 막 이렇게 써 놓고. 어떤 분은 막 “생불이다.”
13:04
근데 그 말이 저는 이제 좋은 게, 아마 공자님 부처님에다 비교해 주니까 고마운 것도 있지만, 그분들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살면 좋지 않을까요? 그게 중요하거든요. 예전 부처님 마음 가진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살면 그럼 부처님 같은 말, 부처님 같은 행동을 보여주겠죠.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이 살면 예수님이 하던 일을 하겠죠. 그래서 성도가 중요한 거죠. 하느님의 자녀, 聖徒. 진짜 하나님, 예수님의 제자는 그 마음 갖고 계신 분이 제자예요. 예수님 마음 그대로 갖고 계신 분. 그러니까 여기서 말을 해도 생각을 해도 행동을 해도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부처님도 그렇고 똑같죠. 그러니까 절에 부처님 마음 가진 제자가 얼마나 있나. 선비 중에 공자님 마음 가진 양반은 얼마나 되나. 이렇게 보시면 현 우리 수준이 나오고, 뭘 해야 될지도 나올 거 같아요. 봉우 선생님 가신지가 몇십 년 밖에 안 됐는데도 “봉우 선생님 마음 가진 제자가 있을까?” 하면 또 어려운 문젭니다. 미치게 호흡하고 있고 막 이런 분들은 있지만, “몸에 막 기운 돌아요.” 봉우 선생님이 돌리던 기운 같이 돌리던 분은 있는데, 그 마음 가진 분은 얼마나 있을까. 이 마음이 전수되는 게 참 중요합니다. 마음이 있고 기운이 있는 거지, 마음이 없는데 기운 돌면 뭐 합니까.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