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 선생님의 대학 3강령 해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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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도 말씀드린 건데, 제가 그래도 공부를 아주 그 허투루 안 하게 된 거는 봉우 선생님을 잘 만나서, 선생님을 잘 만나서 열일곱 살 때 그 선생님 책을 보고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열일곱 살 때 고2 땐가 그래요. 고2 그 당시 봄방학 이런 게 있잖아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봄방학 때 제가 우연히 빌려 본 책이 『백두산족에게 告함』, 소설 『丹』 이런 걸 빌려 본. 『백두산족에게 告함』을 보고는 밋밋했어요 “음 뭐 착하게, 올바르게 살자.” 그 당시 그렇게 철학적으로 제가 공부한 적도 없고. 좋은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찾던 거는 조금 더 자극적인 거였어요. 근데 소설 『丹』이 그걸 딱 채워 주더라고요. 보고 났더니 딱 각을 잡고 제가 앉아 있는 “뭔가 해야겠다.” 그동안 무협지로 제가 단련돼 있었고, 중학교 내내 무협지만으로 살아 왔는데, 수업시간에 이렇게 밑에 무협지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자괴감이 들죠. ㅎ 그래서 “참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근데 이 손에서 이걸 뗄 수가 없는 거 같아요. 강력한. 지금 뭐 만화책이나 판타지 다 그렇게 보시겠죠. 그래서 아무튼 이게 안 말리면 끝이 없을 거 같은, 막 그런 세계에 대한 탐닉이 소설 『丹』을 통해 현실에 가능하대요. 이건 충격적인 얘기죠. 이게 가능하대요. 호흡을 뭐 몇 분 호흡, 1분 2분 호흡만 하면 가능하다. 그런 데에 매료돼서 시작했죠. 수행 시작하면서, 그런데 저는 단순히 수행만 즐긴 게 아니라, 해 보니까 丹學은 힘들어요. 호흡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수련의 이 힘든 걸 잊게 해 주는 게, 선생님의 철학이 儒佛仙을 회통한 철학이라, 집에 있던 공자 노자 책을 꺼내서 같이 비교하면서 보게 되고, 저를 이런 고전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셨어요. 그게 제일 큰 저기 선생님 덕인데,
낮에도 말씀드린 건데, 제가 그래도 공부를 아주 그 허투루 안 하게 된 거는 봉우 선생님을 잘 만나서, 선생님을 잘 만나서 열일곱 살 때 그 선생님 책을 보고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열일곱 살 때 고2 땐가 그래요. 고2 그 당시 봄방학 이런 게 있잖아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봄방학 때 제가 우연히 빌려 본 책이 『백두산족에게 告함』, 소설 『丹』 이런 걸 빌려 본. 『백두산족에게 告함』을 보고는 밋밋했어요 “음 뭐 착하게, 올바르게 살자.” 그 당시 그렇게 철학적으로 제가 공부한 적도 없고. 좋은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찾던 거는 조금 더 자극적인 거였어요. 근데 소설 『丹』이 그걸 딱 채워 주더라고요. 보고 났더니 딱 각을 잡고 제가 앉아 있는 “뭔가 해야겠다.” 그동안 무협지로 제가 단련돼 있었고, 중학교 내내 무협지만으로 살아 왔는데, 수업시간에 이렇게 밑에 무협지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자괴감이 들죠. ㅎ 그래서 “참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근데 이 손에서 이걸 뗄 수가 없는 거 같아요. 강력한. 지금 뭐 만화책이나 판타지 다 그렇게 보시겠죠. 그래서 아무튼 이게 안 말리면 끝이 없을 거 같은, 막 그런 세계에 대한 탐닉이 소설 『丹』을 통해 현실에 가능하대요. 이건 충격적인 얘기죠. 이게 가능하대요. 호흡을 뭐 몇 분 호흡, 1분 2분 호흡만 하면 가능하다. 그런 데에 매료돼서 시작했죠. 수행 시작하면서, 그런데 저는 단순히 수행만 즐긴 게 아니라, 해 보니까 丹學은 힘들어요. 호흡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수련의 이 힘든 걸 잊게 해 주는 게, 선생님의 철학이 儒佛仙을 회통한 철학이라, 집에 있던 공자 노자 책을 꺼내서 같이 비교하면서 보게 되고, 저를 이런 고전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셨어요. 그게 제일 큰 선생님 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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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이 너무 좋아서. 원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뜻은, 이게 形而上 形而下를 얘기하는 데에도 아주 좋았고. 이거(在明明德 在新民)는 修己治人을 얘기했지 지금 형이상 형이하를 얘기한 건 아니잖아요. “내 거 밝히고 남의 것도 밝혀주자.”지. 근데 형이상 형이하로 얘기 하려면 여기에서 끊어 읽으면 돼요(…明明 ˇ 德…). “道는 광명한(明) 본성을 다시 밝히는(明) 데에 있고. 德은 새로워지는 데에 있고.” 그러면 “사람은” 이 道와 德을 “최선을 다해서 구현하는 게 사람이다.” 天地人이 딱 나옵니다. 形而上, 形而下,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요 문장이 너무, 이렇게 끊어 읽으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선생님이 이걸 강조하신 거. 이게 철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문장이에요. 제가 이번에 낸 大學은 원 저자의 의도를 그래도 저는 중시하고 싶어서 원 저자 의도대로, 전체 글을 설명하려면 원 저자 의도를 알아야 설명이 좋죠. 다만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형이상 형이하를 나누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 선명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형이상학은 어디나, 원래 완벽한 無極 太極의 참나를 다시 복원하는 겁니다. 찾는 거예요. 德은요. 현실에서 이렇게 皇極을 구현하는 거예요. 현실에. 양심을 실천하는. 양심을 각성하는 게, 원래 밝았던 양심을 다시 밝혀내는 거고. 德은요 날마다 새로워지는 거예요. 날마다 새롭게 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 양심을 구현해야 돼요. 보세요. 仁義禮智의 양심은 안 바뀌죠. 절대 안 바뀝니다. 우주 영원히 仁義禮智예요. 양심은. 양심의 명령은 인의예집니다. 양심의 길은 인의예진데 德은 날마다 바뀌어요. 오늘 여기서 해야 될 양심이 있고요. 仁義禮智의 구현이 있고. 집에 가서 또 하셔야 되고. 내일 아침에 또 직장에서. 계속.
그 뜻이 너무 좋아서. 원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뜻은, 이게 形而上 形而下를 얘기하는 데에도 아주 좋았고. 이거(在明明德 在新民)는 修己治人을 얘기했지 지금 형이상 형이하를 얘기한 건 아니잖아요. “내 거 밝히고 남의 것도 밝혀주자.”지. 근데 형이상 형이하로 얘기 하려면 여기에서 끊어 읽으면 돼요(…明明 ˇ 德…). “道는 광명한(明) 본성을 다시 밝히는(明) 데에 있고. 德은 새로워지는 데에 있고.” 그러면 “사람은” 이 道와 德을 “최선을 다해서 구현하는 게 사람이다.” 天地人이 딱 나옵니다. 形而上, 形而下,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요 문장이 너무, 이렇게 끊어 읽으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선생님이 이걸 강조하신 거. 이게 철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문장이에요. 제가 이번에 낸 大學은 원 저자의 의도를 그래도 저는 중시하고 싶어서 원 저자 의도대로, 전체 글을 설명하려면 원 저자 의도를 알아야 설명이 좋죠. 다만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형이상 형이하를 나누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 선명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형이상학은 어디나, 원래 완벽한 無極 太極의 참나를 다시 복원하는 겁니다. 찾는 거예요. 德은요. 현실에서 이렇게 皇極을 구현하는 거예요. 현실에. 양심을 실천하는. 양심을 각성하는 게, 원래 밝았던 양심을 다시 밝혀내는 거고. 德은요 날마다 새로워지는 거예요. 날마다 새롭게 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 양심을 구현해야 돼요. 보세요. 仁義禮智의 양심은 안 바뀌죠. 절대 안 바뀝니다. 우주 영원히 仁義禮智예요. 양심은. 양심의 명령은 인의예집니다. 양심의 길은 인의예진데 德은 날마다 바뀌어요. 오늘 여기서 해야 될 양심이 있고요, 仁義禮智의 구현이 있고, 집에 가서 또 하셔야 되고, 내일 아침에 또 직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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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여러분 감동 받을 때 늘 있던 풀 한 포긴데 괜히 지나가다가 뭉클 해서 들여다 보곤 “야. 신기하다.” 늘 있었는데요, 처음 본 것처럼. 여러분 호흡 수련도 제가 그래서 그렇게 얘기해 드리는 거예요. 이 호흡 수련을요 “나 몇 초야. 몇 초 만들어야 돼.” 하고 재미 없게 하시면요 정말 재미 없습니다. 근데 숨 쉴 때마다 몰라로 자꾸 리셋 하면서 처음 숨 쉬는 것처럼 신선하게 만나야 이게 재밌습니다. 이 재미 없는 것도 새롭게 만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제가 예를 들잖아요. 설거지 할 때 몰라 하면 이게 또 재밌어진다고요. 재밌어지는 이유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지 않구요 깨어서 하면 다 새로워요. 매 순간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와요. 깨어서 상황을 대하니까. 근데 의식이요 반쯤 졸면서 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거는 이제 그 일이 지겨워서 반쯤.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고. 근데 딱 정신 차리고 보면 뭐든지 놀라워요. 뭐든지 새로워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살지 않고 보살이 어떻게 보살도를 하겠어요. 지겨워서. “아. 이거 몇 놈을 구해도 다, 역시 검은머리 짐승은 돕는 게 아니여.” 하고 ㅎ “열반에나 들 걸.” 하고 “오판했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보살이 가다가 지겨워지면. 근데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양심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살은.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에 모든 걸 맡기고 양심에서 올라오는 그 신선한 힘을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영감, 거기에서 나오는 자비의 힘을 가지고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거예요. 늘 만나던 상황, 또 어려운 역경도요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다가온 역경에 대한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번엔 이렇게 처리해볼까? 오늘은 왠지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이 상황을 처리해 보고 싶다.”
그니까 여러분 감동 받을 때 늘 있던 풀 한 포긴데 괜히 지나가다가 뭉클 해서 들여다 보곤 “야. 신기하다.” 늘 있었는데요, 처음 본 것처럼. 여러분 호흡 수련도 제가 그래서 그렇게 얘기해 드리는 거예요. 이 호흡 수련을요 “나 몇 초야. 몇 초 만들어야 돼.” 하고 재미 없게 하시면요 정말 재미 없습니다. 근데 숨 쉴 때마다 몰라로 자꾸 리셋 하면서 처음 숨 쉬는 것처럼 신선하게 만나야 이게 재밌습니다. 이 재미 없는 것도 새롭게 만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제가 예를 들잖아요. 설거지 할 때 몰라 하면 이게 또 재밌어진다고요. 재밌어지는 이유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지 않구요 깨어서 하면 다 새로워요. 매 순간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와요. 깨어서 상황을 대하니까. 근데 의식이요 반쯤 졸면서 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거는 이제 그 일이 지겨워서 반쯤.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고. 근데 딱 정신 차리고 보면 뭐든지 놀라워요. 뭐든지 새로워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살지 않고 보살이 어떻게 보살도를 하겠어요. 지겨워서. “아. 이거 몇 놈을 구해도 다, 역시 검은머리 짐승은 돕는 게 아니여.” 하고 ㅎ “열반에나 들 걸.” 하고 “오판했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보살이 가다가 지겨워지면. 근데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양심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살은.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에 모든 걸 맡기고 양심에서 올라오는 그 신선한 힘을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영감, 거기에서 나오는 자비의 힘을 가지고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거예요. 늘 만나던 상황, 또 어려운 역경도요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다가온 역경에 대한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번엔 이렇게 처리해 볼까? 오늘은 왠지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이 상황을 처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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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욕구가 계속 올라옵니다. 샘솟듯이. 그러니까 무한한 영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요. 남들한테는 보살이. 본인은 별 게 아니에요. 날마다 새로워지겠다고 막 노래하고 막 다지고 막 으쌰으쌰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몰라 괜찮아. 그러면 모든 선입견을 날려 버리죠. 어제까지 지겹게 그 일을 해 왔다는 생각을 날려버린 거예요. 몰라 괜찮아 하고 그 일을 탁 보니까 새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뇌도 더 활성화 돼 있죠. 몰입이 돼 있으니까. 그러면 더 창의적인 답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이 창조적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우주가 원래 창조적이라서 여러분이요 마음 리셋하고 우주의 흐름만 따라가면 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 보시면 “원래 우주가 이렇구나.”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창조적이고자 한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이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라는. 매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 이 순간에 아버지 뜻은 어딨는가를 어제의 기억으로 찾으면 안 되잖아요. “어제 아버지 뜻이 어딨었으니까 오늘 또 어딨겠지.”가 아니잖아요. “지금, 이 순간 아버지 뜻은 어딨지?” 하고,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성찰을 진행하다 보면요. 지금, 이 순간에 제일 자명한, 어제랑 달라진 나의 역량, 어제랑 달라진 이 상황 속에서 최선책이 또 나와요. 매일 매일 이렇게 창조성을 쓰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창조바라밀이라고 불러요. 6바라밀을요 잘 쓰면 창조바라밀이 돼요. 6바라밀이 다 함께 굴러가면서 창조를 해 내요. 우주는 이렇게 6바라밀을 가지고 우주를 매 순간 매 순간 새롭게 창조해 갑니다. 인간이 거기에 따라갈 수 있어야 되고. 그 힘이 있어요. 우리 안에는.
이런 욕구가 계속 올라옵니다. 샘솟듯이. 그러니까 무한한 영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요, 남들한테는 보살이. 본인은 별 게 아니에요. 날마다 새로워지겠다고 막 노래하고 막 다지고 막 으쌰으쌰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몰라." "괜찮아." 그러면 모든 선입견을 날려 버리죠. 어제까지 지겹게 그 일을 해 왔다는 생각을 날려 버린 거예요. 몰라 괜찮아 하고 그 일을 탁 보니까 새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뇌도 더 활성화되어 있죠. 몰입이 돼 있으니까. 그러면 더 창의적인 답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이 창조적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우주가 원래 창조적이라서 여러분이요 마음 리셋하고 우주의 흐름만 따라가면 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 보시면 “원래 우주가 이렇구나.”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창조적이고자 한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이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라는. 매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 이 순간에 아버지 뜻은 어딨는가를 어제의 기억으로 찾으면 안 되잖아요. “어제 아버지 뜻이 어딨었으니까 오늘 또 어딨겠지.”가 아니잖아요. “지금, 이 순간 아버지 뜻은 어딨지?” 하고,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성찰을 진행하다 보면요. 지금, 이 순간에 제일 자명한, 어제랑 달라진 나의 역량, 어제랑 달라진 이 상황 속에서 최선책이 또 나와요. 매일 매일 이렇게 창조성을 쓰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창조바라밀이라고 불러요. 6바라밀을요 잘 쓰면 창조바라밀이 돼요. 6바라밀이 다 함께 굴러가면서 창조를 해 내요. 우주는 이렇게 6바라밀을 가지고 우주를 매 순간 매 순간 새롭게 창조해 갑니다. 인간이 거기에 따라갈 수 있어야 되고. 그 힘이 있어요. 우리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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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창조력은 어서 나옵니까?” “道德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어 하시겠죠. “도덕책을 보라고? 창조적이 되고 싶은데.” 보통 창조적이 될 사람들 도덕책을 찢거나 이래야 되지 않나요? “파괴하라.” 진짜 파괴할 뿐이에요. 진짜 우주 자체보다 창조적일 순 없습니다. 사람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로운데요. 여러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미생물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이놈들이요 디자인이 장난이 아니에요. 털 달렸고 눈은 막 몇 겹으로. 다리는 막. 하나하나 개성 있게 생겼어요. 보이지도 않는 물건에까지 하늘은요 이렇게 디자인 하나 하나 신경 쓰시는 분. 이 창조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우주 전체가, 불성이 창조 덩어리예요. 우주를 창조해 내는 힘이기 때문에. 그 힘 받아 쓰시면 그냥 창조적이 되는 거지. 막 창조적이 되려고 노력하신다는 게 사실 웃기는 거예요. 여러분이 선입견에 빠져서, 무지와 아집에 빠져서 사시니까 창조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몰라 하고 깨어서 양심 따라 가시다 보면 매 순간 더 자명한 답을 찾게 돼 있어요. 어제 아무리 그렇게 해결했더라도 오늘 찜찜하면 못 하는 거예요. 오늘 자명한 그걸 따르는 거지. 물 흐르듯이 더 자명한 것으로 옮겨 다니는 게 창조적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창조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道德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어 하시겠죠. “도덕책을 보라고? 창조적이 되고 싶은데.” 보통 창조적이 될 사람들 도덕책을 찢거나 이래야 되지 않나요? “파괴하라.” 진짜 파괴할 뿐이에요. 진짜 우주 자체보다 창조적일 순 없습니다, 사람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로운데요. 여러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미생물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이놈들이요 디자인이 장난이 아니에요. 털 달렸고 눈은 막 몇 겹으로. 다리는 막. 하나하나 개성 있게 생겼어요. 보이지도 않는 물건에까지 하늘은요 이렇게 디자인 하나 하나 신경 쓰시는 분. 이 창조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우주 전체가, 불성이 창조 덩어리예요, 우주를 창조해 내는 힘이기 때문에. 그 힘 받아 쓰시면 그냥 창조적이 되는 거지. 막 창조적이 되려고 노력하신다는 게 사실 웃기는 거예요. 여러분이 선입견에 빠져서, 무지와 아집에 빠져서 사시니까 창조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몰라 하고 깨어서 양심 따라 가시다 보면 매 순간 더 자명한 답을 찾게 돼 있어요. 어제 아무리 그렇게 해결했더라도 오늘 찜찜하면 못 하는 거예요. 오늘 자명한 그걸 따르는 거지. 물 흐르듯이 더 자명한 것으로 옮겨 다니는 게 창조적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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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30일 (수) 02:07 기준 최신판

봉우 선생님의 가르침
홍익학당의 공부와 봉우 선생님 진면목
가르침들 연정 16법 원상문과 원상법
원상법 12관절 원상혹문장 호흡법 소서
구계법론 삼극주 오수주 대학 3강령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양심으로 극락세계
도와 덕을 온전히 통합적으로 성인들의 심법
봉우 선생님의 견성론 양심 개벽 개벽팀


강의일자 2017. 10. 18. 水.
게시일자 2017. 10. 25.
동영상 길이 25:30
강의 중 인용 도서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 초판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XGWMLknl-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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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도 말씀드린 건데, 제가 그래도 공부를 아주 그 허투루 안 하게 된 거는 봉우 선생님을 잘 만나서, 선생님을 잘 만나서 열일곱 살 때 그 선생님 책을 보고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열일곱 살 때 고2 땐가 그래요. 고2 그 당시 봄방학 이런 게 있잖아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봄방학 때 제가 우연히 빌려 본 책이 『백두산족에게 告함』, 소설 『丹』 이런 걸 빌려 본. 『백두산족에게 告함』을 보고는 밋밋했어요 “음 뭐 착하게, 올바르게 살자.” 그 당시 그렇게 철학적으로 제가 공부한 적도 없고. 좋은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찾던 거는 조금 더 자극적인 거였어요. 근데 소설 『丹』이 그걸 딱 채워 주더라고요. 보고 났더니 딱 각을 잡고 제가 앉아 있는 “뭔가 해야겠다.” 그동안 무협지로 제가 단련돼 있었고, 중학교 내내 무협지만으로 살아 왔는데, 수업시간에 이렇게 밑에 무협지 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자괴감이 들죠. ㅎ 그래서 “참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근데 이 손에서 이걸 뗄 수가 없는 거 같아요. 강력한. 지금 뭐 만화책이나 판타지 다 그렇게 보시겠죠. 그래서 아무튼 이게 안 말리면 끝이 없을 거 같은, 막 그런 세계에 대한 탐닉이 소설 『丹』을 통해 현실에 가능하대요. 이건 충격적인 얘기죠. 이게 가능하대요. 호흡을 뭐 몇 분 호흡, 1분 2분 호흡만 하면 가능하다. 그런 데에 매료돼서 시작했죠. 수행 시작하면서, 그런데 저는 단순히 수행만 즐긴 게 아니라, 해 보니까 丹學은 힘들어요. 호흡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수련의 이 힘든 걸 잊게 해 주는 게, 선생님의 철학이 儒佛仙을 회통한 철학이라, 집에 있던 공자 노자 책을 꺼내서 같이 비교하면서 보게 되고, 저를 이런 고전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셨어요. 그게 제일 큰 선생님 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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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그 내용에 있어서 참 중요했던 게, 그때 큰 그림을 그리게 해 준 게요, 선생님 주장이 이겁니다. “道는 불변이고 德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이 중심을 잡고 사는 거.

이게, 옛날 中字 중에 이렇게 생긴 中字가 있어요. 이게 원래 깃발이나 과녁에 적중한 어떤 그런 그, 화살이나 깃발의 모습이라고 보는데 선생님은 아무튼 창의적으로 해석하신 거예요. 이게 매번 새로워지는 中을 표시한다고 보신 거예요. 실제 甲骨文에 中字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근데 아무튼 잘 활용하셨어요. 그래서 이 大學에 있는, 대학에 “大學之道는 在明明德” 원래는 “밝은 德을 밝히는 게 道요” 이렇게 나가는 거를 “道는 밝은 거, 원래 밝은 거를 밝히는 데에 있고 德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데에 있다. (大學之道在明明 德在新.)” 이렇게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셔서 이렇게 푸셨는데요 아주 잘 푸신 거예요. 그게 원 저자의 의도라고는 안 봅니다만 이게, 그 문장이 너무 좋아요. 道는 밝은 거를 다시 밝히는 거고. 원래 완벽한 거고. 德은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가는 거다. 그 문장이 너무 좋아요. 그렇죠? 이해되세요? “大學之道는” 원래 “明明德에 있고” 있을재(在)字 써서. 그다음에 또, 이 道라는 게 여기(明明德)에도 있고 “在新” 예, 新民 그러죠. 백성을 새로워지게 하는 데에도 있고, 예, “在止於至善” 지극한, 이 兩者를, 나도 밝히고(明明德) 남도 밝혀서(新民) 최고의 선에 이르는 데에 있다. 지금 저희, 이번에 제가 낸 大學은 이렇게 풀었는데. 제가 예전에 낸 대학은 선생님 식으로 한 번 풀어봤어요. (선생님 식 “大學之道在明明 德在新 民在止於至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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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이 너무 좋아서. 원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뜻은, 이게 形而上 形而下를 얘기하는 데에도 아주 좋았고. 이거(在明明德 在新民)는 修己治人을 얘기했지 지금 형이상 형이하를 얘기한 건 아니잖아요. “내 거 밝히고 남의 것도 밝혀주자.”지. 근데 형이상 형이하로 얘기 하려면 여기에서 끊어 읽으면 돼요(…明明 ˇ 德…). “道는 광명한(明) 본성을 다시 밝히는(明) 데에 있고. 德은 새로워지는 데에 있고.” 그러면 “사람은” 이 道와 德을 “최선을 다해서 구현하는 게 사람이다.” 天地人이 딱 나옵니다. 形而上, 形而下, 그 중간에 있는 사람. 요 문장이 너무, 이렇게 끊어 읽으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선생님이 이걸 강조하신 거. 이게 철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문장이에요. 제가 이번에 낸 大學은 원 저자의 의도를 그래도 저는 중시하고 싶어서 원 저자 의도대로, 전체 글을 설명하려면 원 저자 의도를 알아야 설명이 좋죠. 다만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형이상 형이하를 나누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 선명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형이상학은 어디나, 원래 완벽한 無極 太極의 참나를 다시 복원하는 겁니다. 찾는 거예요. 德은요. 현실에서 이렇게 皇極을 구현하는 거예요. 현실에. 양심을 실천하는. 양심을 각성하는 게, 원래 밝았던 양심을 다시 밝혀내는 거고. 德은요 날마다 새로워지는 거예요. 날마다 새롭게 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 양심을 구현해야 돼요. 보세요. 仁義禮智의 양심은 안 바뀌죠. 절대 안 바뀝니다. 우주 영원히 仁義禮智예요. 양심은. 양심의 명령은 인의예집니다. 양심의 길은 인의예진데 德은 날마다 바뀌어요. 오늘 여기서 해야 될 양심이 있고요, 仁義禮智의 구현이 있고, 집에 가서 또 하셔야 되고, 내일 아침에 또 직장에서, 계속.

06:02

그러니까 현상계는요, 부처님도 얘기했죠. 현상계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거. 무상함이 생명이에요. 근데 같은 말도 다릅니다. 더 허무적이죠. “형이하의 특징이 뭡니까?” “무상함이지.” 그러면 뭔가 무상하죠. 뭔가. 근데 “형이하의 특징이 뭔가요?” “날로 새로워지는 거지.” 같은 사건인데 느낌이 다르죠.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 학당에서 我空을 가르칠 때 제가 그 부분을 강조하라고 멘토들한테 지도했어요. “무상함을 단순히 허무함으로 보지 않게 설명해 달라.” 현상계는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는.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형이상은 변할 일이 없죠. 형이하는 날마다, 아, 날마단 아니죠. 매 순간 변하는 게 현상계죠. 이 두 세계의 중간에서 여러분 잘 살고 계십니까? 지금. 그 중간에 여러분이 끼어 있어요. 여러분의 참나는 하늘을 닮아서 불변이고. 생각 감정 오감은 땅을 닮아서 날마다 변합니다. 매 순간 변합니다. 이 두 개의 조화가 중용이라는 거고, 보살의 길 군자의 길은 이 두 세계의 조화예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위법과 유위법의 조화예요. 이게 中道예요. 유교식으론요 道와 德의 조화예요. 이게 中庸이에요. 같은 거예요. 지금 여기서 여러분 한 번 울고 한 번 웃는데, 한 번 울고 한 번 웃는 거, 그걸 인간의 욕망이네 뭐네 해서 없애자 그러면 小乘인 거예요. 감당이 안 되니까 없애자고 하는 거예요. 큰 사람은 어떻게 해요? 喜怒哀樂을 양심에 맞게 쓸 뿐이에요. 기뻐할 일인지 아닌지. 기뻐도 어느 정도 기뻐할 일인지가요 꼼수가 아니라 양심에서 나와요. 양심에서 자명하다고 하는 만큼만 따라다니시면 자연스럽게 희노애락을 다 표현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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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꼼수로 하면요 그거는 연기죠. 사기 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양심에서 나와요. 매 순간 매 순간이요 이게 그 순간 그 순간이 다 귀한 겁니다. 무상해서 귀한 거고 날마다 새로워지니까 귀한 거예요. 묵은 거에 집착하고 계시면 안 돼요. 또 새로워지는 이 현실을 바로 수용하고 거기에 나아가서 양심을 구현할 생각을 하셔야. 묵은 걸 붙잡고 있으면 苦海가 시작됩니다. 근데 여러분 집에서 여기까지 오실 때 한 번 디딘 걸음을 고수하셔서는 못 와요. 그거 과감히 버리고 한 걸음 더 내딛으니까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신 거죠. 우리 살아갈 때 매 순간 매 순간을 지금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얘기 할 때 지금 이미 사라졌죠. 그 순간은. 과감히 여러분 흘려보내고 지금 또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신 거예요. 현상계는요 계속 새로워지는 게 본성입니다. 예. 그렇게 새로워진다는 것은, 묵은 거 고수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그런데 고수해도 되는 묵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게 道예요. 道는 영원불멸이라 그건 고수하셔야죠. 그래서 매 순간 양심을 각성해서, 몰입을 통해 몰라를 통해 양심과 하나 되고, 매 순간 양심 분석을 해서 새로워지는 상황에 맞게 양심을 구현하시는 것,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게 道·德·民이라고 해서 봉우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인간의 길이었어요. 이것은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이 大學 원저자의 의도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이 말씀은 너무 훌륭한 말씀이세요. 이런 인간 선언이 저는 아주 귀한 선언이었다고 봅니다. 형이상의 세계가 있고 형이하의 세계가 있는데 그게 天地죠. 하늘로 대표되는 형이상의 세계, 땅으로 대표되는 형이하의 세계. 그 중간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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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매 순간 매 순간 惡이 善을 이기지 못하게. 善의 힘을 키워서 惡을 제압하는, 양심의 구현을 해나가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형이상의 세계를 먼저 얘기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형이상의 세곕니다. 그 형이상의 세계에서는 아버지 뜻이 이미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형이하의 세계에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내 내면에서 善이 惡을 이겨서 지상천국이 되게 만들어야죠. 이게 크리스천의 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길입니다. 다 똑같죠. 보살의 길, 인간의 길, 뭔 길 뭔 길 해 봤자. 형이상에서, 不變의 형이상의 세계에 있는 진리를 萬變하는, 계속해서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현상계에 매 순간 매 순간 내가 거기 있는 곳에서 구현하겠다는 거. 내가 없는 곳에서 구현할 수는 없죠. 여기에 계시잖아요. 그럼 여기에서 구현하셔야 돼요. 뭐 발령이 딴 데로 나시면 거기에 가서 또 구현하시면 돼요. 내가 없는 곳에서 구현할 수는 없죠. 내가 있는 곳에서 구현하겠다는 거. 그럼 마침 여기에 있으니까 여기에서, 이 변화 속에서 양심을 구현하는 게 내 사명이다. 이렇게 아시면 인간의 길이 이 우주에서 열리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길을 안 걸어요. 이 길이 있다는 걸 몰라요. 求道熱 속에서 겨우 길 찾은 게 “우주를 버리고 참나의 세계로 떠나자.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자.” 조금 더 나가면 “어디 정토라는 좋은 곳이 있으니 거기 가서 오지 말자.” 이런 좁은 소견에, 그런 가르침에 빠져가지곤 답도 안 나오고요. 그, 대다수는 이걸 팔아먹지 또 여기까지 가는 길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열반을 팔아먹지 열반에 드는 법을 정확히 가르쳐 주는 분 지금 지구상에 몇이나 계실까요?

12:04

자기가 열반 안에 살면서 남도 열반으로 건네줄 수 있는 분 몇이나 계실까요? 많지 않을 겁니다. 정토로 여러분 인도해 주실 분들 많지 않을 겁니다. 그걸 파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그것도 그럴진대 진짜 이 道를 얘기하는 분은 또 얼마나 드물까요. 이게 안타까운. 근데 여러분은 다 양심이 있으시니까 이게 아주 희유한 길이긴 한데 이 길을 들어설 때 더 와 닿으실 걸요. “아 저런 길이 있다면 저게 짱이지.” 하실 걸요. 뭔 얘긴지 아시죠. 인간의 양심 프로그램에 이게 제일 합당하게 보이게 돼 있어요. “정토 가서 오지 말자.” 그럼 “아. 나 이대로 가도 되나?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니까 자기가 뭐라고 계속 궁시렁궁시렁 해야 돼요. 찜찜하니까. “열반에 들어버립시다.” “아. 그래도 되나?” ㅎ “뭐 갈 수 있다면 일단 가긴 갈 텐데.” 그게 내 양심에서는 찜찜하죠 “다른 중생들 다 고통 받는다는데 나만 빠져나가는 거 아닌가? 그걸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 아닌가?” 이런 생각 안 드세요? “나 혼자 좋은 곳 가고 싶다는 게 욕심 아닌가? 그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일까?” “아무개야 너 천국 가는 길 열렸다. 다른 중생들은 더 굴러야 된다. 너는 그래도 훌륭하니까 천국에 가자.” “예. 아버지. ㅎ. 지금 다 싸 놨습니다.” 그러면 이게, 아버지가 볼 때 “이 새끼가?” 할 수도 있죠. ㅎ. 그럴 수도 있죠. 그러면 여러분 모든 게 시험이라고 생각하시구요, 매 순간 매 순간 양심에 맞게 살아가신다는 게요, 이거 이상의 답이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조금만 여러분 잘 해주시면 여러분 에고는 금방 누울 자리를 보면 다리를 뻗어요. “아버지가 나를 좀 사랑하시는 거 같다.” 거만해집니다. 건방져집니다.

14:02

남들을 좀 우습게 봅니다. 신기하죠. 그렇게 돼 있어요. 여러분 에고는. 그 상황에서도 “음.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하고 딱 정신 차리시는 그 분이 진짜 효잔데. 진짜 효자의 길은요 끝없는 양심성찰의 길입니다. 하느님이 좀 은총 내려준다고 거기에,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오바 하시는 순간 그건 아닌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요 그 때는 침묵해요. 왜? 좋으니까. 順境이니까 덮자는 거예요. 너무 좋으니까 내가 볼 때 찜찜한 부분이 있어도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자꾸 자기와 타협을 해 버리시면요 알 수 없는 세계로 갑니다. 영성의 길은요 무서운 길이에요. 왜? 이건 우리가 만든 길이 아니라 우주가 정한 길입니다. 仁義禮智가 지금 이 현장에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구현된다면 이렇게 구현되는 게 제일 옳다 하는 걸 여러분이 아시니까, 그만큼 못 했을 때 찜찜하신 거예요. 내가 뭔가 양껏 못 했다 하는 게 있어요. 감이 있어요. 그 길에, 내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시는 거. 그게 인간이 가야 될 止於至善의 길입니다. 최고의 선에 머무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내 내면의 양심, 자명 찜찜의 신호를 보내는 양심에 깨어 있으려고 최선을 다하시는 거. 그리고 그 양심을 이 새로워지는 상황에 맞게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하시는 거. 묵은 상황에 집착하고 계시면 안 돼요. “어제는 이렇게 하니까 통했는데.” 이런 거 안 돼요. 어제는 양심적으로 했더라도요 그 기억으로 오늘 하고 계시면 그건 기억으로 하시는 거지 지금 양심으로 하신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이 현실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 하시면 여러분 德은요, 그게 깨어 있는 德이 아니고 양심에서 나온 德이 아닙니다.

16:00

그쵸. 예. 지금 내 양심에서 보내는 신호를 내가 지금 읽지 않으면서 “어제 좋았으니까” 하고 하고 계시는 거는 지금 아니라니까요. 지금, 이 순간 양심의 신호를 들으시고 그 양심의 신호에 따라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실 수 있느냐. 이거 이상의 인간의 길이 없습니다. 뭐 극락이니 뭐니 정토니 이런 건 다 이 이후에 생각하세요. 천국이니 하는. 일단 매 순간 매 순간 하늘의 뜻, 아버지의 뜻, 불성의 뜻에, 眞如의 뜻에 따라 사는 게 목푭니다. 여러분이 하셔야 할 그 삶의 길은 그런 겁니다. 그게 여러분의 목표여야 돼요. “이걸 해서 천국 가는 게 목표.” 그러면 그 순간 이건 수단이 됩니다. 아버지 뜻 따르는 게 수단이 돼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게 목표예요. 그러다가 천국 갈 수도 있고 어디 더 좋은 세계 갈 수도 있죠. 靈이 맑아서 더 좋은 세계 갈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 양심이요, 한 마리 어린 양을요 우주 중생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오죽하니 저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도 내려오셨겠어요. 와서 혹독한 그 고문 당하고 혹독한 일 당하고. “이렇게 해서라도 중생들이 더 구제된다면 나는 또 올 거다.” 하는 마음으로 오시지 않았겠어요? 그 마음이 양심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 탈출시켜준다고 약속했어.” 그것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빚 갚아줬다고 나 약속 받았어.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처럼 안 살아도 돼.” 이게 얼마나 무지한 생각인지 양심에 비추어선 다 아실 거예요. 분명히 속에 찜찜하실 게 있을 텐데요. 근데 천국 간다는 그 헛것에 취해서 잠시 잊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양심에서 오는 신호를요 안 듣고 있어요.

18:04

그 순간에도 울리고 있을 거예요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아버지가 막, 기도하다가 은총을 내쳐줘서 “와. 아버지가 나를 통해 이런 걸 표현하시는구나.” 하다가 딱 또 사람이 목에 힘 들어갑니다. “니네들은 아버지가 나만큼 사랑 안 하나봐?” 이렇게 하면서 쓱 “내가 제일 사랑 받아.” 하는 그런 마음이 들 때 “이건 아니지.” 하고 돌아 볼 수 있는 게 양심의 힘이고 그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근데 거기서 사람들은요 빠져버려요. 취해요. 한참 취해서, 정신 차리려면 한참 이제 안 좋은 소리 나오고 할 때 정신 차립니다. 그것도 정신 못 차리면 멀리 가고. 그러니까 매 순간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순간순간 변해요. 이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분이에요. 남들이 볼 땐 똑같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요 이분 마음은 계속 새로워요. 여러분 몰라만 하셔도 다시 태어난 기분 안 드세요? 이 커피를 지금 드시고 계셨어요. 몰라. 잠깐 몇 초라도 몰라 하고 다시 보면요 이 상황이 또 새로워요. 신선해요. 왜? 아까는 뇌에서, 그냥 마시던 커피 계속 마시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맞도 몰라요. 여러분 커피 처음에나 맛있죠. “딱 이 맛이야.” 그다음은요 계속 먹고 있는 거예요. 다 먹어야 되니까. 뇌가 그래요. 그러니까 처리할 때 뇌가 벌써, 제가 뇌과학자는 아니지만 이제 재미 없어요. 매너리즘에 빠져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몰라 하고 다시 딱 보면요 또 새로워요. “아. 이 맛이지.” 인생을 이렇게 매 순간 매 순간 새롭게 사시려면 “몰라!” 마음 리셋의 달인이 되셔야 돼요. 몰라 하고 여러분 만나면요 가족도 또 새로워요. “아. 너 이렇게 생겼었지.” 여러분 가족도요 매일 보니까 뇌에서 처리를 안 한다니까요. 대충 넘어가는. “음. 가족이군.” 하고 넘어가는. 근데 처음 만난 사람처럼 가족 얼굴 보고 처음 만난 사람처럼 만져보면요 전혀 다릅니다.

20:04

그니까 여러분 감동 받을 때 늘 있던 풀 한 포긴데 괜히 지나가다가 뭉클 해서 들여다 보곤 “야. 신기하다.” 늘 있었는데요, 처음 본 것처럼. 여러분 호흡 수련도 제가 그래서 그렇게 얘기해 드리는 거예요. 이 호흡 수련을요 “나 몇 초야. 몇 초 만들어야 돼.” 하고 재미 없게 하시면요 정말 재미 없습니다. 근데 숨 쉴 때마다 몰라로 자꾸 리셋 하면서 처음 숨 쉬는 것처럼 신선하게 만나야 이게 재밌습니다. 이 재미 없는 것도 새롭게 만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제가 예를 들잖아요. 설거지 할 때 몰라 하면 이게 또 재밌어진다고요. 재밌어지는 이유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지 않구요 깨어서 하면 다 새로워요. 매 순간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와요. 깨어서 상황을 대하니까. 근데 의식이요 반쯤 졸면서 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거는 이제 그 일이 지겨워서 반쯤.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거죠.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고. 근데 딱 정신 차리고 보면 뭐든지 놀라워요. 뭐든지 새로워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살지 않고 보살이 어떻게 보살도를 하겠어요. 지겨워서. “아. 이거 몇 놈을 구해도 다, 역시 검은머리 짐승은 돕는 게 아니여.” 하고 ㅎ “열반에나 들 걸.” 하고 “오판했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보살이 가다가 지겨워지면. 근데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양심에서 힘을 얻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살은.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에 모든 걸 맡기고 양심에서 올라오는 그 신선한 힘을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영감, 거기에서 나오는 자비의 힘을 가지고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거예요. 늘 만나던 상황, 또 어려운 역경도요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다가온 역경에 대한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번엔 이렇게 처리해 볼까? 오늘은 왠지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이 상황을 처리해 보고 싶다.”

22:01

이런 욕구가 계속 올라옵니다. 샘솟듯이. 그러니까 무한한 영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요, 남들한테는 보살이. 본인은 별 게 아니에요. 날마다 새로워지겠다고 막 노래하고 막 다지고 막 으쌰으쌰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몰라." "괜찮아." 그러면 모든 선입견을 날려 버리죠. 어제까지 지겹게 그 일을 해 왔다는 생각을 날려 버린 거예요. 몰라 괜찮아 하고 그 일을 탁 보니까 새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뇌도 더 활성화되어 있죠. 몰입이 돼 있으니까. 그러면 더 창의적인 답을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이 창조적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우주가 원래 창조적이라서 여러분이요 마음 리셋하고 우주의 흐름만 따라가면 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 보시면 “원래 우주가 이렇구나.”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창조적이고자 한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이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라는. 매 순간 아버지 뜻을 따를게요. 이 순간에 아버지 뜻은 어딨는가를 어제의 기억으로 찾으면 안 되잖아요. “어제 아버지 뜻이 어딨었으니까 오늘 또 어딨겠지.”가 아니잖아요. “지금, 이 순간 아버지 뜻은 어딨지?” 하고, 몰라 괜찮아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성찰을 진행하다 보면요. 지금, 이 순간에 제일 자명한, 어제랑 달라진 나의 역량, 어제랑 달라진 이 상황 속에서 최선책이 또 나와요. 매일 매일 이렇게 창조성을 쓰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창조바라밀이라고 불러요. 6바라밀을요 잘 쓰면 창조바라밀이 돼요. 6바라밀이 다 함께 굴러가면서 창조를 해 내요. 우주는 이렇게 6바라밀을 가지고 우주를 매 순간 매 순간 새롭게 창조해 갑니다. 인간이 거기에 따라갈 수 있어야 되고. 그 힘이 있어요. 우리 안에는.

23:46

그래서 이렇게 “창조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道德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재미없어 하시겠죠. “도덕책을 보라고? 창조적이 되고 싶은데.” 보통 창조적이 될 사람들 도덕책을 찢거나 이래야 되지 않나요? “파괴하라.” 진짜 파괴할 뿐이에요. 진짜 우주 자체보다 창조적일 순 없습니다, 사람이. 우주가 얼마나 경이로운데요. 여러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미생물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이놈들이요 디자인이 장난이 아니에요. 털 달렸고 눈은 막 몇 겹으로. 다리는 막. 하나하나 개성 있게 생겼어요. 보이지도 않는 물건에까지 하늘은요 이렇게 디자인 하나 하나 신경 쓰시는 분. 이 창조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우주 전체가, 불성이 창조 덩어리예요, 우주를 창조해 내는 힘이기 때문에. 그 힘 받아 쓰시면 그냥 창조적이 되는 거지. 막 창조적이 되려고 노력하신다는 게 사실 웃기는 거예요. 여러분이 선입견에 빠져서, 무지와 아집에 빠져서 사시니까 창조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몰라 하고 깨어서 양심 따라 가시다 보면 매 순간 더 자명한 답을 찾게 돼 있어요. 어제 아무리 그렇게 해결했더라도 오늘 찜찜하면 못 하는 거예요. 오늘 자명한 그걸 따르는 거지. 물 흐르듯이 더 자명한 것으로 옮겨 다니는 게 창조적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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