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특집 - 모든 불교는 청정광명심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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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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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강의일자 2023. 07. 22. 土.
게시일자 2023. 10. 28.
동영상 길이 40:55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J-NBw28jemA



00:08

그 지금 진여와 열반 이 강의가요 엄청 중요한 강의입니다. 지금 불교 한 2500년 역사에 석가모니 때부터 경허 스님까지를 쭉 훑으면서 불교 역사 전체를 훑으면서 지금 약간 왔다 갔다는 하지만 큰 흐름에서는 불교 역사를 따라가요. 그래서 마지막 이제 선불교에서 끝낼 텐데 쭉 따라오면서 불교 전체가 하나로 관통돼 있다는 것을 소승 대승 다 막론한 걸 지금 주장하려는 거예요. 예전에 성철 스님이 중도로 해가지고 소승부터 대승 선불교까지 꿰신 적이 있는데 100일 법문에서. 예. 그건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제가 볼 때 자명하지 않은 부분도 많아서 그걸 더 넘어선 버전으로 진여와 열반이라는 주제를 제가 한번 해 볼게요. 중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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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해요. 왜냐하면 중도도 정의가 다 달라요. 그러니까 진여와 열반으로 가자고요. 그래서 진여와 열반이지만 핵은 뭐라고요? 우리 강의 들으신 분은 알 텐데. 지금 일관되게 제가 뭐 얘기만 하고 있나요? 진여와 열반 시간에. 왜 다 목소리가 다르죠. 근데 들리지는 않지만 왜 다르다고 느껴질까요? 정광명, 정광명심, 청정광명심 들어가며 붙어 있었잖아요. 청정광명심을 알아야 된다. 우리 안에 순수하게 빛나는 무한하게 빛나는 빛의 의식, 초의식. 이 초의식, 이 초의식이 진여와 열반이에요. 이 초의식을 참나라고 부르는 파도 있는 거고 힌두교처럼. 또 불교 안에서도 열반경 가면 참나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지금 자리를 참나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뭔가 난감하시다면 참나라고 안 불러도 좋다. 제가 제안했잖아요. 청정광명심이 있다. 초의식이 있어요. 뇌과학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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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식에는 초의식이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거예요. 불교 강의하시는 뇌과학자인 박문호 박사 이런 분 초월의식이 있대요. 초월의식은 있어요. 하지만 우주에 영원한 건 없다. 그게 뭐냐면 항상 두 가지 얘기를 한다고요. 중관론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교학적으로. 일체 고정불변의 존재는 없다. 이 얘기가 교학적으로는 계속 습관적으로 나갑니다. 불교는 왠지 모든 일체를 부정해야 되니까. 근데 초월의식은 당연히 있어요. 이 차이 갭 아시겠어요? 이론적으로 어떤 것도 고정불변의 존재는 있으면 안 돼요. 현상계에. 그런데 초의식은 있어요. 이런 느낌으로. 청정 광명심은 있어요. 과학적으로도 있고 여러분 경험으로도 있고 있어요. 그런데 이 자리를 있다고 해 버리면 고정 불변의 실체를 인정하게 돼서 힌두교처럼 돼 버린다고 해서 불교는 자꾸 무자성, 공 얘기만 하려고 해요. 공을 얘기하려고 그래요. 자성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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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라는 얘기를 하고 싶고. 나라는 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고. 이게 불교를 조금만 알아도 여기에 세뇌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게 돼요. 초월의식은 있는데 고정 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 두 얘기가 이게 참나고 이게 무아인데. 원래 둘이 같은데. 텅 빈 자리가 참나예요. 텅 빈 자리가 초월의식, 시공이 텅 빈 자리가 초월의식 자리예요. 이런 건 하나예요. 그래서 모든 불교는 청정광명한 초월의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초기 불교에서 우리가 읽었지만 이미. 이 자리가 지수화풍이 없어지는 자리요. 이 지수화풍이 없어지는 이 자리가 열반이요. 지수화풍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탐진치를 떠날 수 있다고 얘기한 거다라는 말까지 부처님이 고백하는데도 영원한 세계는 또 없대요. 황당한 인지부조화인데 이게 여러분 스님이 얘기하면 여러분 말도 못합니다. 그냥 듣지. 아 어렵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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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어렵다.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다가. 팁은 뭐냐? 지들도 정확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거예요. 이 결 따라서는 없다고 해야 돼요. 이 결 따라서는 있다고 해야 돼요. 그러니까 두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지부조화 상태예요. 정확히는요. 이게 지금 티벳불교만 해도 현교에서는 무자성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야 돼요. 밀교에서는 청정광명심이 있다고 해야 돼요. 이 모순된 체계로 계속 불교가 지금 가고 있는 겁니다. 이거를 제가 타파하지 않으면 여러분 아무도 견성 못 해요. 장담하건대 견성 못 해요. 부처는 차치하고 견성을 못 해요. 왜? 네가 본 게 본성인지 내가 본 게 본성인지 알 길이 없어요. 다 찢어져 있어가지고. 교학 심학 따로. 선불교도 티벳에서 보면 선불교도 밀교입니다. 선불교는 밀교에 속해요. 그러면 밀교 쪽에서는 바로 참나 찾으라고 그래요. 지금 선불교는 참나 찾으라고 그래요. 그럼 교학한다는 양반들은 뭐라는지 아세요? 어디 참나가 있냐고 큰 tm님들이 미쳤다고 힌두교라고

05:00

또 욕합니다. 달라이 라마나 남방불교 연구한 분들은요, 스님들은 또 욕해요. 참나가 어디 있냐고. 이렇게 모순된 얘기. 티벳 안에도 똑같아요. 중관론이 현교인데 현교 중관론 공부한 사람들은 무자성, 어떤 것도 존재하면 안 돼요. 열반도 무자성이에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고 결론 냅니다. 경전에서는. 그런데 밀교에서는요 청정광명심 찾으려고 별짓 다 해요. 거기 식 선불교인 족첸, 마하무드라 수행하고요. 오늘 다룰 거지만 거기에 에너지 호흡 수련해서 단전에 불 일으켜서 뚬모수행이라고 하는데 배꼽불 수행을 해서 몸 안에서 정광명을요 실체화시키려는 수행까지 합니다. 밀교적으로는 이렇게 철저히 청정광명을 인정하면서 현교에서는요 청정광명도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다 이렇게 결론 내야 돼요. 모순된 체계로 불교가 달려오고 있어요. 거기에 대한 답은 지난 시간에 드렸는데

06:00

기억하시나요? 이 현교가 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현교도. 중관론이 문제지. 중관론이 이 지랄을 하고 다녀요 중관론 한번 읽으시면 여러분은 끝납니다. 거기 병이 걸려요. 스님들도 여러분이 딱 보시면 보일 거예요. 중관병 걸렸냐? 안 걸렸냐? 중관론 읽었다. 초기불교병도 있어요. 무아병, 제법무아병에 걸리거나 중관론의 일체 무자성병에 걸리면 제법 무자성병에 걸리면 뭐가 문제냐면, 특히 중관론은 언어를 파괴하기 위해서 만든 언어의 모음집입니다. 중관, 용수보살의 중론, 원래 중송이라고 하는데 이제 후대 중론이라고 불러요. 요 중론의 핵심은요. 어떤 언어도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줘서 언어를 파괴해서 침묵하게 만드는 거예요. 한마디 말도 못 하게 만들어서 침묵하게 해서 침묵 속에서 청정광명을 깨닫게 하려는 겁니다. 원래. 그러니까 이 용수보살의 태도가 정말

07:00

재미있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복습이기도 합니다. 달이 청정광명이라고 하죠. 달이 청정광명심이에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이게 언어죠. 그러면 이름을 붙이겠죠. 청정광명. 그러면 중관론이 하는 게 뭐냐면요? 중관파들이. 중관파의 모든 경전은 언어를 박살내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과 비교를 했던 거예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선 서로 통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자명한 언어를 쓰자는 거예요. 목적이. 용수는 그게 아닙니다. 언어 자체가 잘못됐다. 언어 자체가 실상을 조금도 반영할 수 없다는 거예요. 실상은 뭘까요? 무상하게 연기하는 것만이 실상입니다. 무상하게 인연 따라 찰나찰나 변해가는 것이

08:00

실상이고요. 이 실상에 대해서 이거를 언어화 해버리면, 이 실상을 언어화 해버리면요 손가락으로 딱 뭔가 손가락을 세워서 언어를 통해서 가리키면 비트겐슈타인은 정확한 실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선별해내자는 거라면, 용수는 모든 손가락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모든 언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상의 언어건 절대 이런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언어건 다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는 자는 갈 수 없다. 이런 주장을 합니다. 화살은 날아갈 수 없고 가는 자는 갈 수 없고. 여러분이 그런 언어로 이렇게 훈련하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숨도 쉴 수 없다 예요. 언어적으로. 즉 뭐만 공격하냐면 언어만 공격해요. 언어만. 실상은 도도하게 연기가 흐릅니다. 이 도도하게 흐르는 연기의 세계를 언어화하는 순간 고정 불변의 실체를 상정한 거라는 거예요. 이게.

09:00

제가 뭘 들고 있죠? 무상한 인과 속에서 잠시 이 모습을 하고 제 손에 있는 이걸 들고 있어요. 이걸 제가 펜이라고 하는 순간 얘는 고정불변에 펜이 있는 것처럼 상정한 그 언어에 의해서 제약이 이루어집니다. 왜곡이 일어나요. 망상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펜은 없어요. 이거 이해되세요? 펜은 없어요. 있는데요? 연기하는 실상이 있을 뿐이죠. 펜이라는 게 없다고요. 그래도 있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펜이라는 언어가 말이 안 된다고요. 이거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펜이라고 고정 불변의 펜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 마음에 왜곡을 일으켰다고요. 이게 무지고 이게 지금 모든 무명입니다. 탐진치의 근원이고. 그래서 이걸 박살내는 거예요. 펜은 자성이 없다. 따라서. 두 가지 측면입니다. 언어는 실상을 반영할 수 없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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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없다. 두 번째 실상도 연기하고 있다. 연기한다는 건요? 연기한다는 건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겁니다. 저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거든요. 이 펜이 있으려면 수많은 원인이 모여서 이 펜의 지금 이 모습이 됐겠죠. 고정불변의 실체를 용수는 자성이라고 불러요 자성이 있다면 자성은 고정불변이니까 바뀌면 안 돼요. 즉 한 번 펜인 애는 영원히 펜이어야 돼요. 그런데 펜이 아닌 것들이 모여서 펜이라고 불리는 게 나왔잖아요. 따라서 이놈은 자성이 없다 예요. 그러니까 연기적 측면에서 자성이 없다. 그래서 결론 무자성. 무자성. 자성이 없다. 존재하는 건 사실 다 지금 언어화된 건데 언어를 통해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의미를 지니는 건데 용수는 일체가 의식의 작용이라고 안 봐요.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는 건 경험하는 실상에 대해서 언어화한 겁니다. 다. 따라서 언어화할 때 왜곡이 일어나서 우리가 고정불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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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지 이 언어 자체가 망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언어화된 모든 거는 자성이 없다. 상호의존적인 모든 존재들은 자성이 없다. 그래서 무자성을 공이라고 하고. 결국 이 언어화된, 즉 연기의 세계가 언어로 표현된 세계를 세속제라고 합니다. 현상계. 현상계. 여기는 승의제라고 해서, 보통은 모든 학파가 청정광명의 세계를 승의제로 보는데 중관파는 이걸 승의제로 보는 게 아니라 공을 승의제로 봅니다. 이게 아니라. 그래서 자 사물의 두 면이에요. 중관파 연구는 사물의 두 면. 한쪽 면은 연기, 언어, 무상의 세계면 한쪽은 무자성, 공의 세계입니다. 여기는 승의제라고 그래요. 뛰어난 승이라는 건 뛰어난 의미라는 거거든요. 보통 절대계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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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세속제 현상계 시공 안의 세계 시공 밖의 세계를 의미하는데 중관파는 절대계를 따로 상정하지 않고, 그냥 우리가 지금 보는 세계는 연기적으로 있어요. 있는데, 연기하면서 있어요.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해요. 이걸 우리가 언어화하는 순간 왜곡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왜곡이 일어나고 탐진치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깨어나려면 이 모든 걸 이걸 꿰뚫어 봐야 돼요. 매트릭스를 꿰뚫어 보듯이 내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가 실상 어떤 자성도 없다. 고정 불변의 실태 하나도 없다는 걸 꿰뚫어 보는 거예요. 분명히 있는데,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학파들이 다 무자성으로 결국 몰고 가니까 공병에 빠졌다고 하고 자기들은 현실의 실체를 부정한 적이 없으니까 우린 공병이 아니라고 하는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있다니까 우리는. 비는 내리지 않는다 예요. 중관파 주장이.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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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연기 작용이 있는 거지 비가 내린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 이해되세요? 비가 내린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표정이요 반은 고개를 끄덕이시고 반은 시작부터 왜 이러나 하는. 언어를 깨는 말장난. 언어를 깨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언어가 잘못돼 있다는 걸 지적함으로써 공을 드러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공을 드러내는 수많은 방식이 있죠? 몰라 하면 공해집니다. 몰라 하면 일체를 초월해 버려요. 이게 밀교식 공 체험법이라면 중관파식 공 체험은요 침묵하게 만드는 거예요. 침묵하게. 어떤 언어도 쓸 수 없게. 내 언어가 실상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고, 실상도 무자성이요. 언어화된 세계도 무자성이라는 걸 지적해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세계가 본래 자성이 없고 고정불변의 건 하나도 없구나. 즉 이데아와 참나를 부정하게 만들어요. 청정광명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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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중관파 친구들은 손가락만 공격하지 달을 공격하지 않아요. 손가락만 조져요. 그러니까 청정광명심이라는 말이 무상하다는 거예요. 이 말에 당황하시면 안 돼요. 아니 부처님도 열반에 들어가라고 그랬는데, 중관파는 열반도 자성이 없대요. 왜? 이름이잖아요. 열반이요 언어일 뿐이고요. 열반의 실상도 결국 보면 인연 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합니다. 열반이라는 건 탐진치로부터 벗어남인데 그럼 탐진치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인연 속에서 설명된 거 아닌가요? 인연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 아닌가요? 그런데 그러면 열반이 만약에 자성이 있다면,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면 영원히 열반이었어야죠. 이런 논리에 계속 말리시는 거예요. 듣다 보면 동의도 안 돼요. 뭐라는 거야? 아무튼 결론이 뭐냐? 이렇게 결론은 정해져 있어요. 무자성. 어떤 것도 자성이 없다. 상호의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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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난 것이 독자적 성품이 있을 리도 없고. 이런 거예요. 만약에 그들이 공격하는 게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거예요. 이데아가 불교에서 자성이에요. 만약 너네들이 말하는 불변의 삼각형이, 뭐 불변의 펜이 있다면 왜 연기 속에서 펜이 존재하느냐 그냥 떡하니 펜이 영원히 펜으로써 있어야지. 동감되세요. 이 말이? 이걸 지금도 합니다. 논리라고 이게 논리라고 해요. 이데아가 왜 시공 속에서 불변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되죠? 전제가 잘못돼 있어요. 지난 시간에 얘기했죠.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고. 이 양반들은 전제가 이데아나 이런 모든 세계를 부정하고요. 손가락의 세계에서만 논하는 겁니다. 현실의 체험 가능한 세속제, 시공 안에서 언어화된 세계만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청정광명도 언어화된 청정광명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걸 공격해요. 열반도 언어화된 탐진치의 소멸이라고 하는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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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연이 묻어 있는, 그리고 그것도 열반이라는 언어를 갖게 된, 그 열반을 공격하는 거예요. 열반도 자성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만약에 중관론을 읽다가 헷갈리는 게 다른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에 달을 대상으로 합니다. 모든 경전들이. 불경들이. 달을 어떻게든 표현해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 감각으로 중관파 계통의 경전을 읽으면 작살나는 거예요. 혼돈의 혼돈에 빠집니다. 왜? 얘네들은 손가락만 조지거든요. 관심이 손가락이에요. 우리가 쓴 언어로서의 열반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게 영원하냐? 존재하느냐? 그게 이데아냐? 이데아 아니잖아요. 당연해요. 플라톤도 현실에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어요.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했지. 그러니까 그림자의 세계에서 그림자를 공격해서 본체까지 논리적으로 털었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 중관 입장입니다. 그래서 참나도 하나도 안 털리고 다 안 털려요. 그런데

17:00

재미있는 건 진짜 용수보살은 청정 광명을 과연 부정했을까요? 여기 지금 청정광명 이게 부처님 마음인데 부처님 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용수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청정광명도 부정돼요. 참나도 부정되고. 왜냐? 언어화된 청정광명은 부정된다고요. 왜냐? 언어의 세계에서 청정광명하다면 영원히 청정광명한 존재를 상정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벌써 중관론이 깨집니다. 중관 논리가 깨져요. 중관 논리는 어떤 것도, 진짜 어떤 것들이요. 어떤 것도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거예요. 세계 그런데 이 세계가 세속제를 대상으로 한다는 거예요. 이걸 놓치시면 안 돼요. 열반마저도 세속제 차원에서 논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용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 준다고 했을 때, 일체를 청정광명도, 청정광명이라는 것도 언어화된 이상

18:00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구나 공하구나 하고 딱 내려놨을 때 용수보살은 뭘 주장하냐? 그랬을 때 진짜 공성을 딱 직관하는 반야지가 각성된대요. 그 반야지가 정광명이에요. 여기까지 따라오시겠어요? 많이 못 따라오신 것 같아요. 많이들.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참나라는 것도 이래요. 중관파가 대표적으로 공격한 게 참나거든요. 참나는 없대요. 그렇죠? 참나가 없다는 공격은 손가락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진짜 달, 참나의 실체에 대한 비판이 될 수가 없다고요. 언어에 대한 비판이고 인과 세계 안에서, 인과 세계 밖에 있는 존재를 인과 세계 안에서 조지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시면 맞아요. 그래서 결국은 용수보살도 주장하는 게 언어의 세계에서 하나도 세울 게 없어져요 그러면. 열반도 말을 못 하게 돼요.

19:01

그런데 이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열반도 언어 아닌가요? 열반도 내려놓으세요. 부처도 개념 아닌가요? 부처도 죽여야죠. 참나를 만나려면. 이 느낌이에요. 부처도 죽여라. 조사도 죽여라. 열반도 죽여요. 정광명도 죽여야죠. 왜냐하면, 정광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게 정광명이 아니잖아요. 언어화된 모든 세계는 자성이 없으니 내려놓고 침묵에 들면 진짜 정광명 속에서 만법이 공하다는 참 진리를 바로 직관하겠죠. 무분별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원래 이 중론도 어쩌자고 나온 거예요? 견성시키려고 나온 거예요. 침묵시켜서 견성시키려고. 그런데 쓴 논리가 언어를 공격하는 언어를 썼어요. 달을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공격하는 언어, 언어의 한계를 지적해서 언어를 날려버리려는 언어를 썼어요. 그래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이거를 다른 경전처럼 읽어버리면, 금과옥조로 읽어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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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긴다고요. 그러면 누군가가 정광명을 얘기하면 정광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광명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체험도 안 해본 놈이, 글로 공부한 친구들이 이걸 읽어버리면 무서워진다고요. 이해되시죠? 그러면 이제 다 욕하고 다녀요. 참나가 어디 있어. 정광명이 어딨어. 반야지가 어딨어. 고정불변의 실체는 하나도 없어. 이게 그런데 린포체들한테도 보인다고요. 린포체가 한쪽으로는 정광명 찾으러 가면서 정광명은 초의식인가요? 정광명은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 불교에서는 자성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뭐라는 거야? 뭐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설명이 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동시에 나가요. 린포체들한테서. 그나마 달라이 라마가 자명하신 게요 달라이 라마는 그렇게 얘기 안 해요. 린포체들한테 보이는 공통의 병증입니다. 청정광명을 찾으라고 하면서 청정광명은 실체가 없는, 그러니까 언어 차원에서 청정광명을 깠다가 본체 차원의 청정광명을 찾으라고 하는, 달인 청정광명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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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청정광명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그러면 니들이 생각하는 고정불변의 실체라는 것은 현상계에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냐는 거죠. 지금 이데아의 세계에 관심 없어요. 참나의 세계 몰라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오온과 육근의 세계에서 참나가 있냐? 거기서 정광명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어디 있어요. 그게. 없죠. 당연히 그러면 실체가 없는 거 아니냐 이거예요. 그러면 뭐 답답하죠. 아니 달이 저기 떠 있는데.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뿐인데 저게 달이야. 이게 달이라고? 죽을래. 여기를 쪼개볼까? 분석해 볼까? 어디에 여기 달이 있냐? 그러면 여러분 달이 없다는 거 아는데도 억울하죠. 뭔가? 아니 이게 달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우리는 달을 가리킨 손가락이었는데. 왜 손가락 가지고 지랄이지? 이런 의문이 생긴다고 해요. 이거를 잘 소화를 못 해내면요 완전히 잘못된 불교관을 갖게 됩니다. 이제 언어로 이제 도통한 사람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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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그냥 입에 방광(放光)해가지고 입에서 다 깨고 다닙니다. 언어로만. 참나가 어디 있어? 티벳 중론에 나온 논리예요. 참나가 오온과 둘이거나 같거나 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고 하면 오온과 같거나 달라야 된다. 전제부터 이미 여러분을 고정시킵니다. 가스라이팅 들어간 겁니다. 둘 중에 하나다. 그러면 벌써 동의가 되세요? 참나 체험한 분은 동의가 안 돼요. 체험 안 한 분들은 안 그래도 나 체험도 못해서 절에 갈 때마다 꿀렸는데 무기가 생겨요. 이 새끼들 다 잘못 이상한 거였구만. 참나가 없대잖아요. 참나 깨달았다는 사람들 숱해요. 그러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이런 경전 읽으면 환호하는 분들? 참나 체험 없는 분들. 글로 공부하는 분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이걸로 이제 나도 당당하게 “이것들이 다 허상을 쫓고 있었구나.” 이렇게 가는 거예요 이제. 참나가, “있지도 않은 참나를 찾으라고 나를 애먹였구나.” 분노까지 일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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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한국 불교 바로 잡아야겠다. 조계종 엉망이다. 이렇게 가요. 자연스럽게 이렇게 가요. 이해되시죠? 이것 때문에 그래요. 린포체들도 정확히 설명을 못 해 줍니다. 청정광명만 예로 들더라도 청정광명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단 얘기죠 부처님은. 왜 그러냐면 부처님은 청정광명의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언어를 썼어요. 그러니까 무한하고 형상이 없고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는 초월적 의식이 있다고 주장하신 거예요. 이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써 쓴 언어예요. 그런데 린포체들이 지금 중관 사상을 공부해서 쓴 논리는 뭐냐면 청정광명도 무자성이고 이것도 실체가 없고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견고한 실체가 아니고 청정광명이 고정불변의 실체였다면 왜 지금 청정하지 않느냐? 영원히 청정해야지 광명했으면 영원히 광명해야지 왜 너의 의식은 에서는 지금 광명이 없느냐? 왜 너의 의식은 탐진치에 빠졌느냐? 라고 공격해요. 그럴싸하죠.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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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죠. 왜냐하면, 근대도 있는데, 지금 내 안에서 청정광명하게 빛나고 있는데, 여러분 참나가 빛나고 있는데, 여러분한테 누가 이런 논리 쓰면 어떠신 기분이 드실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이? 아니 청정광명이 고정불변으로 청정광명하다면 그러면 여러분 듣다가 “이 자리는 영원히 청정광명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너의 그런 탐진치 의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상하죠? 이게 논리의 함정이에요. 영원히 그 자성이 그렇다면 거기서 왜 아닌 게 나왔느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참나는 없는 거라고 결론을 내요. 참나는 자성이 없는 거고.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는 거고. 따라서 영원한 참나라는 건 없는 거다. 상호 연기하는 실상만 있는 거다. 딱 때리면 여러분 수긍되세요? 지금도 빛나고 있는데. 이 얘기를 듣는 내내 빛나고 있는 이걸 뭐라고 해야 돼요? 그러면 이런 경험을 하게 돼야 돼요. 체험했다면. 그런데 체험 안 하신 분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무기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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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참나 깨달았다던 놈들 다 나와.” 이렇게 돼요. 뭘 깨달았다는 거야. 논리적으로 없다는데. 이 말이 지금 둘 다가 이해가 돼야 돼요. 이 논리도 이해가 되고 이것도 이해가 돼야 됩니다. 지금 실상이 이해된다는 건 입체적인 이해거든요. 여러분 입체적으로 제가 이해를 시켜드립니다. 쓰는 언어가 달라서 그래요. 그럼 이 언어 구별 없이 깜빡이 없이 들어오듯이 언어 구별 안 하고 들어오면 청정광명은 허상이다가 돼요. 그리고 청정광명이 허상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은 청정광명이 진짜 없다고 여기서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게 그 사람들은 밀교적으로 또 청정광명을 찾아서 헤매요. 이상하죠? 청정광명이라는 말이 허상이라는 거예요. 살불살조(殺佛殺祖)처럼 이해하시라고요. 그래서 그 말을 버리고 내려놨을 때 진짜 청정광명의 의식을 만나요. 이해되세요. 여기까지? 이런 거 얘기하는 게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전 세계에서 유일할 거예요. 지금 이거를 중관론의 한계를 연구하면서 어떻게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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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까지 연결시켜 드릴지 제가 지금 고민한 얘기인데요. 중관파의 실상이 이겁니다. 따라서 이 중관파는요 철저히 세속세계 언어의 세계만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승의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체가 무자성이고 공하다는 건데요. 사실은 이들은 이걸 바로 청정광명이라고 안 한다고요. 이래버리면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과 똑같아진다고 걱정해요. 그런데. 하나 더 나갈게요. 그런데 실상은 승의제의 본질은 청정광명이에요. 사실은. 이 말을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근데 침묵 속에서 알아라 이거예요. 이걸 말로 떠들지 마라. 말로 떠들면 다시 세속제로 들어와 버리니까. 이 느낌 아시겠습니까? 이게 원래 용수보살의 의도인데, 린포체들도 모순된 채로 쓰고 있는데, 그 사람들 안에서 모순됐지만 인지부조와 같지만 뭔가 하나로 통해진 느낌도, 지금 이런 느낌으로 린포체들이 이해했다는 것도 아셔야 돼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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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인데, 충돌 나는 부분인데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하나로 소화됐을까? 현교와 밀교가 돌아갈까? 이 감각인 거예요. 언어적으로는 부정, 밀교적으로는 체험. 이해되시겠어요? 차라리 린포체들처럼 두 말을 다 해 놓으면 이해는 안 되지만 본래의 논리에 충실은 하는데. 달라이 라마가 제시한 방법은 또 달라요. 달라이 라마는 이 청정광명심을 의식 연속체라고 불러버립니다. 연기적. 왜 그러냐면 연기적 의식연속체는요, 청정광명은, 청정광명이 진여의 세계라면 진여는 불변이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진여는 불변이고 우리의 육근은 생멸하죠. 우리의 육근의 세계는 생멸한다면, 이 중간층의 연기적 의식 연속체를 설정해서 육근처럼 생멸은 하되 진여를 바로 인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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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의식으로 설정하는 거예요. 즉 고정불변의 참나가 있다고 하면은 논리에 충돌, 현교 밀교를 합칠 때 충돌이 나니까 이쪽은 고정불변의 정광명이 있다. 이쪽은 정광명은 무상할 뿐이다. 자성이 없고 무상할 뿐이다. 충돌이 나니까 달라이 라마가 주로 미는 논리는 합쳐 가지고 중간 단계에서 영원한데. 부처님의 마음이니까 얼마나 영원하겠어요? 부처가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이 청정광명은 부처님 마음이니까 영원한데 동시에 끝없이 생멸하고 있다. 그런데 영원한데 생멸하는데 불멸이다. 그러니까 생멸하면서 영원히 간다 이거예요. 계속 생멸하면서 영원히 가는 거. 자 이렇게 논리를 세워버리면 뭐가 문제인지 아시겠어요? 각각의 논리가 있었는데, 어중간한 절충안이 나와 버리면 두 논리가 다 안 맞게 돼요. 이해되세요? 차라리 용수 논의는 언어로서 청정광명을 공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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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게 만들어서 내적으로 영원불변의 청정 광명을 체험하게 하는 거라면. 청정광명을 이렇게 무상하다고 정의를 내려버리면 정의를 내려버린 순간 청정광명은 그냥 현상계에 생멸하는 존재가 돼버리죠. 뭐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이게 지금 이게 달라이 라마가 취하신 절충안인데 이상하지 않냐고요? 참나를 변화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끝낸 거예요. 정광명을. 이러면 원래 중관론 취지랑도 안 맞다고요. 모든 변화함을 공격해서 내려놓게 만든 다음에 정광명을 사실은 만나게 해야 되잖아요. 왜냐하면, 깊은 삼매 속에서 무분별지, 정광명의 의식을 통해서 공성의 진리를 직관하게 만드는 게 중관파거든요. 거기까지 가 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방편을 쓴 건데, 방편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거예요. 지금 달라이 라마식 절충안은 정광명을 언어화해 버린 거예요. 이제 언어 안에서 수용해 버린 거예요. 이게 정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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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좀 뭔가 이상하죠? 언어를 초월시켜야 되는데 언어화해 버렸다고요. 언어의 세계 안에서 정광명 자리를 마련해 줬다고요. 그럼 이제 이해가 되죠. 음! 정광명은 무상한 의식. 육근과 같은 무상한 의식. 그래서 임시로 이름을 영원불변의, 언어라는 게 한계가 있지만 이건 있어요. 언어가 한계는 있지만 방편으로 언어화는 할 수 있다. 방편으로 쓰면 된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만 알고 쓰면 된다. 그래서 청정광명 의식을 저렇게 자리매김을 해버리면 시공 안에서 자리가 생겨버려요. 이건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논리에서 문제가 생겨요. 어떻게든 시공 밖으로 쫓아줘야 되는데. 그래서 중관파들이 제일 많이 쓰는 게 이거예요. 희론을 여읜다. 희론이라는 게 이렇게 언어유희 이런 차원인데요 언어 놀음을 희론이라고 그래요. 놀 희(戱)자 논할 론(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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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론을 희론을 떠난다. 희론을 떠난다는 표현을 써요. 언어를 떠나는 게 목표입니다. 중관 사상의 목표는요 언어의 세계, 논리를 떠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논리의 세계의 한계를 직시하고 논리를 떠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달라이 라마식 절충안은 논리를 떠나야 되는데 논리를 떠나서 정광명을 만나야 되는데 논리 세계 안에 정광명의 자리를 줘버린 거예요. 그건 뭔가 원래 중관 사상과 안 맞다는 거예요. 제 생각은. 여기까지 이해되세요? 이래 버리면 그냥 현상계의 한 존재가 되거든요. 무상하게 변화하는 그 자리를 정광명이라고 방편으로 우리가 이름별로 써 버리면 되는 거예요. 언어를 떠난 그런 반야지의 세계마저 시공을 떠난 세계를 언어화해 버렸다는 거예요. 언어를 떠난 세계는 떠난 대로 둬야 되는데 차라리. 원래 중관 논리에 충실하려면. 그것을 절충한다고 현교랑 밀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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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하다 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시작은 가벼운 얘기로 시작하는데 오늘은 시작을 엄청 무거운 얘기로 시작했어요. 방편이 진리로. 그렇죠. 뭐냐 하면, 언어를 깨는 언어라는 것은 방편인데 이게 진리를 담은 언어처럼 여겨진다는 거죠. 사람들한테는. 원래 경(經)이라는 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니까. 그런데 이거는 손가락을 지적하는 손가락이에요. 중관 논리는. 다른 얘기하지도 않는다고요. 손가락을 감히 가리키지 못하게 손가락을 날려버리는 손가락이에요. 그래서 침묵하게 만들면 그러면 오히려 마음에 달이 뜬다는 거예요. 그렇죠.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대충. 이런 얘기 어디서 못 듣습니다. 지금 중론 사상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중관파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지금 몰라요. 학자들은. 중관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관파에 푹 빠져버리고. 아닌 학자들은 아예 그냥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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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는 청정광명. 밀교나 선불교로 치닫고. 체험으로 치닫고. 언어의 세계에 들어온 교학자들은 다 중관론에 치여서 저걸 어떻게? 이 언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감해서 다 그냥 무자성, 무아병에 빠지고. 이해 되시죠? 밀교는 참나 만나라고 그러고. 교학은 지금 무아라고 외치고 있는 이 중간에서 여러분이, 학자도 길을 찾기 힘든데, 고승도 길을 찾기 힘들게 지금 이론이 찢어져 있는데, 불교 신자가, 일상생활 하시는 분들이 어느 여가에 이걸 연구해서 본인이 고승도 못 푼 문제를 풀어서, 원효대사는 나야 가능하지 말이 돼요. 이거 안 되니까 지금 다 같이 죽는 상황인 겁니다. 들은 거는 많고 정보는 범람하는데 아무도 교통정리를 못 해줘요. 그래서 제가 해드리는 거예요. 중관파 얘기 들으면 일단 마음 비우고 들어라. 더 해 봐. 이런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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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뭐도 해보고 더. 다. 아직 부정 안 한 거 있으면 더 해 보고. 막 다 무자성. 공. 막 가는 자는 갈 수 없다. 말하는 자는 말할 수 없다. 나도 떠들 수 없다. 막 이제 더더. 그다음 뭐 해야 돼요? 결국 몰라 해야죠. 이제 우리 몰라 해 보자. 아 이거구나. 몰라 속에서 청정광명, 반야지, 무분별지로 진리를 깨닫습니다. 일체가 공하다는 진리를 거기서 깨달아요. 목표는 똑같아요. 같은데 자 문제는 뭐냐? 진리를 담은 언어를 공부한 적이 없고 언어를 공격하는 언어만 공부하신 분은 견성한 뒤에도 또 말하는 게 지랄 같아요. 이해되시죠? 또 계속 부정만 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진리를 언어로 담아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진리를 언어로 그래도 담자는 파가 중관 내에 자립중관파예요. 자체적인 주장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원래 중관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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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류논증 중관파가 더 주인데. 뭐냐 하면, 남의 말꼬리 잡아서 그 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만 공격하는 거. 귀류라는 건 너의 말이 맞다고 쳤을 때 이런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말꼬리 잡는 논리가 귀류 논리거든요. 귀류 논증 중관파예요.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가. 나머지 문파들은 다 자립논증 쪽입니다. 자립논증은 설명할 건 설명하자는 거예요. 말로 설명할 건 다 하면서. 즉 이 차이예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언어를 쓸 거냐? 손가락만 공격할 거냐? 귀류 논리는 손가락만 공격하는 거다. 남이 뭔 말을 하면 그 말의 모순점만 짚어낸다고요. 가는 자는 갈 수 없다. “지금 가는 자가 어디 있냐? 넌 지금 안 갔다.” “아까 갔잖아.” “아까 간 거는 과거고. 아직 안 갔잖아. 그럼 가는 자가 어디 있냐?” 매순간 가는 자는 없는 거예요. 근데 나는 가고 있어요. 이상하죠? 가는 자라는 말을 날려버리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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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자는 갈 수 없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 가는 자가 서 있던 공간이 있었을 거 아냐.” “가는 자가 없는데 가는 자가 서 있던 공간이 어떻게 있어.” “가는 자가 잠시 멈춘 그 순간이 있을 거 아니냐.” “가는 자가 본래 없는데 가는 자가 서 있는 순간이라는 게 어디 있냐.” 이게 중론 사상이에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이런 파괴적인 언어, 파괴하는 언어만 연구하다 보면요, 진리를 깨달은 뒤에도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설명할 수가 없다니까요. 이 언어로는 설명이 안 돼요. 이래서 이 학파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공부를 해가지고 멀리 갈 수가 없어요. 진리를 담는 결국 언어라는 건 결국 다른 경에서 빌려와야 돼요. 설명을. 화엄경이나 이런 대승기신론, 이런 다른 경에서 빌려오지 않으면 깨는, 파괴하는 언어만 구사하고 있다. 중론은. 그래서 중론만 연구하신 분들은 언어에 대한 공격에 능하고, 즉 언어의 세계에서 공함을, 무자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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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없음을 입증하는 데는 능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청정 광명을 깨닫고, 침묵 속에서 공성의 진리를 인가하고, 그 침묵 속에서 얻은 진리를 방편으로 언어화해가지고 중생을 인도하는 데는 능하지 않다. 그래서 고수가 나오기 힘들다. 제가 1년간 지금, 작년 7월부터 티벳 불교를 가지고 중관파를 연구했습니다. 귀류 논증, 자립 논증, 연구해 봤는데 1년간 연구한 소감, 결론을 발표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연구해 보다가 허탈한 것도 있고, 자명한 것도 있고, 시원한 것도 있고 해서 공유하는 거예요. 쫄지 마시라. 거기서 참나가 없다고 해도 쫄지 말고. 뭐가 있다 해도 언어의 세계의 얘기니까. 원래 그 언어를 놔야 돼요. 부처라는 언어도 놔야 돼요. 부처가 되고 싶다는 말도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선사들한테 “저 부처 되고 싶어요.” 하면 부처라는 그 개념을 놔야 부처가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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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를 선사들은 몽둥이질로 그거를 침묵시켰다면 용수는 무서운 거죠. 자 이리로 봐. 부처란? 왜 부처가 되고 싶다는 말이 허상인지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아무 말도 못 하겠죠. “부처가 되고 싶다라는 거는, 부처라는 자성이 있다면 넌 이미 부처일 것인데, 부처가 되고 싶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고, 자성이 부처면 영원히 고정불변의 부처일 텐데.”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되고 싶다는 게 자성이 있다면 영원히 되고 싶어야 되잖아요. 다 뭘 말 하나도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침묵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조용 조곤조곤 해서 침묵시켜요. 어느 방편이 좋을까요? 저는 이쪽을 권하는 거예요. 그냥 몰라 하시고 나와서 후련하게 언어화해야지 언어의 모든 한계를 지적해서 견성시키면 견성한 뒤에도 언어를 쓰겠냐고요? 제대로. 파괴적인 언어만 쓰지. 달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손가락으로 기능하지 못하더라고요.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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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그쪽 경전들의 한계가 그거예요. 깨달은 뒤에도 계속 부정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기존 불교에도 없는 게 아니에요. 그 논리가. 공에 진짜 들어가려면 공이라는 생각도 놔야 되거든요. 왜? 공이라는 생각 자체는 상이에요. 모든 상을 놔라 밖에 아닌 거예요. 결국 중관파 논리를 다 해봤자 일체의 상은 다 허망하니 놔라. 금강경에 나오는. 일체의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놔라. 그럼 여래가 보일 것이다. 끝이에요. 이 말을 그렇게까지 해 가지고 무수한 사람들을 생고생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 깨달은 뒤에도 진리도 제대로 표현해 할 수 없는 그런 논리를 가르쳐서 쓰겠느냐? 이걸 티벳 가면 20년씩 배우는데요. 이런 중론의 마스터가 돼야 밀교를 가르쳐줍니다. 학당에 오면요 밀교부터 시작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이게 티벳과 우리 학당의 차이예요. 우리는 체험과 개념을 계속 비교하면서 올바른 손가락인지? 달을 계속 체험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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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정확히 가리켰는지? 자명하게 만들어가는 방식을 쓴다면 그쪽은 20년간 손가락만 조지다가 갑자기 밀교 공부를 해요. 난감하지 않아요? 20년간 개념으로 머릿속을 도배해 버리면요 고정관념이요 꽉 들어차서 이제 다른 뭔 말을 해도 다 부정만 합니다. 그 말도 부정 그 말도 부정. 모든 게 공하다. 공병에 빠져요. 이게 공병에 빠졌다는 거예요. 현상계가 없다고 해서 공병에 빠졌다는 게 아니에요. 뭐든지 결론을 공으로만 몰고 가니까 공병에 빠졌다는 거예요. 무자성만 지적하려고 하니까. 자 여러분들 너무 제가 힘들게 한 것 같아서 5분 쉬고 진도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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