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2강

홍익학당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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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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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석가모니 부처님의 빛나는 의식
강의일자 2023. 04. 08. 土.
게시일자 2023. 07. 22.
동영상 길이 1:25:26
강의 중 인용 도서 께왓다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sXkBZ3SXF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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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올바로 서서 진짜 영성을 계발하는 데 지금 도움을 못 주는 종교적 가르침은요 앞으로 점점 이 땅에서 이제 자리를 잃을 겁니다. 사이비가 횡행하고 이런 거랑은 별개로요 영성 계발에 도움이 안 되는 종교, 내 안의 신성을 계발시켜 주지 못 하는 거면요 그냥 유튜브 보지 뭐 하러 종교단체를 가겠어요? 친목 모임 하러 갈 거 아니면 외로워서 사람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니라면. 근데 원래 종교가 친목 모임 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니잖아요. 애초에 천국 열려고, 이 땅에 불국토 열려고, 열반으로 인도하려고 나온 거잖아요. 원래 사명, 원래 미션을 잃어버리면요, 이제 그 퇴색되죠. 그래서 저는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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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로 돌아가자. 홍익학당이 주장하는 건 궁극의 오지라퍼죠. 내 종교도 아닌데 그분들이 볼 때는 “아니 저 머리도 안 깎았으면서 왜 그렇게 불교에 집착하는지? 왜 자꾸 불교를 걸고넘어지는지?” 하실 수도 있고, 목사 신부님들은 “왜 이렇게 성경 강의를 해대는지?” 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심심해서 저도 뭔가를 해야 돼서 영성을 도와주려다 보면 종교를 다루지 않고는 하기 힘들고. 사실 종교 없이 하고 싶어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어요. 우리 안에 참나, 진짜 내가 있습니다. 우리 육근을 굴리는 진짜 내가 있어요. 이걸 깨달으신 분들은 진리와 자유, 평화와 육바라밀과 양심 안에서 살아가실 거예요. 우리는 그게 다예요. 이걸 돕고 싶은 건데 이런 내용들을 담은 게 기존 종교 경전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근데 그게 왜곡되어 있는 걸 보니까 또 답답해서 이렇게 나서게 된 겁니다. 그냥 보살도 차원에서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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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모든 불교의 이런 진여와 열반이란 주제로 불교를 지금 다루는데 자 요건 항상 잊지 마세요. 육근, 육근 안에 뭐 유식학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는 겁니다. 지금 공종 상종 성종 다 들어 있어요. 이 그림 안에 이 자리가 진여 열반 자리입니다. 진여 열반 자리고, 육근이, 여러분이 경험하는 육근이 여러분이 사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남의 우주에서 어떻게 육근이 굴러가는지 몰라요. 짐작하는 거예요. 이거 빨갛죠. 다들 빨갛다고 하니까 “나랑 같은 거를 보는구나” 하고 사는 거예요. 진짜로 우리가 보는 게 똑같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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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릅니다. 추측하는 거죠.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건 내 우주밖에 없다고요. 인간이 왜 악해질 수 있는가 내 우주에서는 남들은 다 객이거든요. 나만 주인이거든요. 각자 이런 우주를 살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정신 잠깐 놓으시면 멀리 가실 수 있는 거예요. 남의 아픔은 바로 전달이 안 돼요. 내 아픔은 나한테 바로 전달이 되지만 내 우주에서 알아차리는 자가 나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자가 남이 아니라 나란 말이에요. 내가 알아차린 우주를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고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세계라는 거는, 세계라는 건 여러분 오감과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요. 대상. 객관으로만 알아차리는 자가 주관이면 그럼 여기서 아까 안이비설신의 했을 때 주관이 성립된다고요. 내가, 이 보는 이 자가 나라고 하는 에고의식이 붙어요. 내가 보고 있다. 이 ‘나’라는 에고를 날리고 진여 열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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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려다 보니까 나라는, 아트만이라는 말을 비판도 하고 내려놓게 시킨 거예요. 무아를 해야 들어가니까. 이런 것 때문에 무아가 자꾸 강조된 겁니다. 이걸 내 거라고 주장해야 되니까. 근데 보세요. 저는 이제 불교에 대해서 제가 좀 비판적으로 얘기한다면 불교들은요 대게 이 에고를 혐오합니다. 망상으로 치부하고. 자 유식학도 이 일체 현상계가 본래 공하다고 하면서도 에고는 없는 거라고 자꾸 몰고 가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에고라는 이름이 붙어 가지고 문제가 다 생겼다는 거예요. 모든 문제의 근원이 탐진치다 보니까 그 탐진치의 근원이 결국은 이 에고를 위한 마음 아니겠어요. 에고가 있다는 것부터 어리석음이고. 독자적인, 우주랑 분리된 독자적인 내가 있다는. 그냥 사실은 진여 열반에 올라타 가지고 “내가 주인이네” 하고 착각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에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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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으로만 몰고, 자꾸 어리석음으로 무지와 아집을 타파하자 무지와 아집을 타파하자. 저는 이거에는 반대합니다. 불교를 떠나서 무지와 아집이 없이는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육바라밀을 체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탐진치 없이는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뭐 불교 강의 뭐 대승기신론이나 수많은 경전을 다루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에요. 에고를 너무 혐오 대상으로만 보는, 이 에고야말로, 이 에고 작용이야말로 놀라운 참나의 신비라는 거예요. 참나 작용이 신비입니다. 나라는 걸 설정해 준 거. 게임을 하려면 내가 있어야죠. 사바세계에서 시공간 이원성이 생기려면 주객이 나뉘어야죠. 주객 나누는 게 우주에서 얼마나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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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의 다르마의 작용인데요. 나를 그냥 부정하고 시작하려고 하는, 에고를 혐오하는 발상은 저는 반대합니다. 에고가 아무리 문제가 있더라도, 모든 문제의 주범 같더라도 에고를 잘 살려 쓰는 게 불국토건설이고 중생구제지 에고를 부정하면요 구제할 중생도 없어요. “나와 남이 어디 있냐?” 그러면 누굴 구제해요? 그런데 악착같이 중생은 구제하라고 그러거든요. 그럼 뭐냐? 일체세계가 오온의 세계가 본래 진여의 작용 공이라면 반야심경처럼 에고의 작용 또한 참나의 작용이다. 이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지와 아집은 자꾸 줄여나가는 건 맞지만, 무지와 아집을 줄여 나가는 건 맞지만 우리 무지와 아집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발상은요 이 현상계를 날려버리자는 거거든요. 우리는 현상계에서 어떤 경험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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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육근을 갖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결여되어 있어요. 그냥 그 초기 소승식 해탈주의가 아직도 불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거죠. “그냥 꿈 깨면 그만이지 왜 꿈속에서 뭔 좋은 일을 하려고 하지?” 이런 거예요. 꿈속에서 왜? 여러분 보살도 하는 거 꿈속에서 하는 거거든요. 그럼 “꿈 깨면 여러분 그냥 매트릭스 밖에 나가 버리면 참나만 있는데 왜 굳이 현상계에 머물면서 보살도를 하겠다는 거야? 그게 고집이야?”라고 인도 성자 마하리시 같은 성자들은 보살을 비판했어요. 왜 꿈속에서 좋은 꿈을 꾸려고 하지? 불국토라는 거는 좋은 꿈이거든요. 꿈 깨면 열반으로 들어가 버리면 되는데 뭔 미련이 많아 가지고 현상계에 남아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느니. 남의 꿈들을 다 변화시키겠다느니. 그냥 꿈 깨라고 얘기하는 거는요 저는 거기에 반대합니다. 그건 힌두교적인 소승불교적인 발상이다. 초기불경에 어떻게 돼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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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얘기들이 나오는데요. 2페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빛나는 의식, 광명심이라는 게 여기서 등장합니다. 이후 모든 불교에 등장하는 청정광명심의 원형이 초기불교 경전에 등장한다는 거 알아두셔야 돼요. 광명심. 보세요. 2번 먼저 볼까요. 범천의 초대경이라는데요. 맛지마 니까야에 있습니다. 특징도 한계도 없이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열반의식)이 있다. [범천의 초대 경, 맛지마 니까야]. 특징도 없대요. 자 이 진여 열반의 세계를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특징 없습니다. 이런 말이 그거랑 통하죠. 자성이 없다. 불교의 자성이라는 건 어떤 특정 본질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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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물의 어떤 본질들. 그러니까 컵 그러면 컵에 본질이 있잖아요. 펜하고 다른. 그럼 컵, 펜 이렇게 부를 때 본질이 있죠. 이게 자성이에요. 그래서 우리 일체만 법이라는 거는요

다 자성들이에요. 근데 불교는 자성하면 또 경기 내요. 자성이 없어야 돼요. 공병(空病)에 빠져 가지고 자성이 없어요. 자성이 있는데 자성이 없어야 돼요. 펜 뭐 산은 산의 자성, 물은 물의 자성, 고정 불변의 자성이 있죠? 자성이 있어요. 왜 우주는 탄생하면 항상 산을 만들고 물을 만들까요? 여러분 육근은 왜 움직이면 항상 육근일까요? 주무시고 일어났을 때는 7근이 움직인다든가 이런 일이 없죠. 의식이 항상 작동하면 육근으로 돌아갑니다. 고정된 자성이 있어요. 근데 불교는 자성을 얘기하면 이 자성이라는 것은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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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 자성이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을 자성, 자성의 대표적인 게 아트만이거든요. 영원불멸한 자아. 영원불변한 자아를 반대하면서 불교로 전개되다 보니까 자성 전체를 비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자성을 인정해요. 왜냐? 소승불교는 아공만 인정하잖아요. 내가 실체가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라고 여겼던 게 뭐죠? 육근 덩어리잖아요. 육근조합. 오온 화합물이었어요. 오온이나 육근의 화합물을 인연 화합물이죠. 인연이 뭉친 거를 나라고 여겼기 때문에 독립 고정 불변 실체의 자아라는 건 없다는 게 입증됐죠. 그러니까 참나가 아니라 어떤 고정 불변된 에고라는 건 없는 거죠. 그렇죠. 그건 확실하죠. 그런데 대신에 법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초기불교를 계승한 부파불교에서는 법공은 인정 안 하고 법유(法有) 자성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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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자성이 없다면 왜 현상계가 꼭 이 모양으로 굴러가겠어요. 과학법칙이 있듯이 각각 사물마다의 어떤 본질적인 특징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인정합니다. 이거를 반대하고 나온 게 대승불교다 보니까, 법공을 주장하려다 보니까 자성을 부정하는 특징이 있어요. 자성을 부정해야 모든 만법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것도 오류가 있다고 봐요. 서양철학의 이데아론이나 조선 선비들의 그런 만물의 원리 이론은 원리가 초월해서 있거든요. 그러니까 보세요. 시공을 초월해서 산의 원리가 있고 현상계에 산은 어때요? 플라톤의 이데아도 시공을 초월한 본질로써 이데아가 있고 시공 안에서는 무상하게 변하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해당되는 본질이 아닌 변화하는 실체들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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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시공 안에서 변화하는 세계는 기의 세계고, 조선선비도 불변의 원리의 세계가 있고 변화하는 기의 세계가 있어요. 그런데 무상하게 만물이 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성이 없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근데 왜 산은 꼭 산이요. 물은 물일까요? 사람은 딱 사람, 이렇게 나와야 사람이고 그렇죠. 자성이 우주의 법칙이 아예 없는데 사람이 이렇게 계속 찍어져 나온다고요. 뭔가 이상하죠. 그러니까 이게 원래 불교가 부파불교에서는 그런 자성, 이데아적인 자성을 인정한 겁니다. 그게 있으니까 항상 정신작용이 일어나고 물질작용이 일어나고 구별이 되는 거죠. 그런데 대승불교는 법공을 얘기하려다 보니까 뭔 말을 하고 싶었냐면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 돼야 되잖아요. 일체가 우리 불변 의식의 작용이 되려면 사물마다 독자적인 이데아를 사물이 갖추고 있으면 안 되죠. 그러니까 초기 부파불교식 주장은 이 사물한테는 이 사물의 본질이 있다. 이데아가 있다는 식이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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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대승에서는 이데아가 어디 있어야 돼요 다? 모든 이데아가? 바깥에 이렇게 사물마다 갖고 있으면 안 되지 않아요? 왜냐면 이 사물은 지금 여러분한테 객관 대상일 뿐인데. 이데아는 다 어디 있어야 되죠? 여러분 우주에서? 진여 안에 있어야죠. 이 안에 이데아들이 들어 있어야죠. 그래서 바깥 사물에 자성이 없단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걸 오해해 가지고 아예 자성이 없다는 식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이게 왜 이렇게 존재하죠? 날마다 왜 태양이라는 거는 자기 자성을 가지고 어떻게 움직이죠? 저 자체는 계속 무상하게 변하는데 뭐가 있어서 저 태양만의 본질을 계속 유지시켜 줄까요?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자성이 어디 있어야 돼요? 여러분의 의식 안에 있어야 돼요. 여러분 진여 자리 안에 자성이 있어야 돼요. 따라서 일체 만법은 여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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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 자성을 자성으로 삼아야 됩니다. 즉 플라톤이 “이데아가 사물에 있다”고 했는데 그 이데아가 다 어디 있어야 돼요? 우리 마음 안에. 기독교는 어떻게 발전했죠? “신의 마음 안에 있다”가 됐죠. 근데 우리 불교는 뭐예요? 신의 마음을 어디서 찾아요? 우리 안에서. 그래서 모든 일체 만법에 이데아가 어디 있어야 돼요? 우리 안에. 이렇게 가는 겁니다. 자성이 없다는 말은요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빛나는 의식에서 우주 만물이 다 나왔는데 여기 자성이 없다고 해버리면 뭔 소리죠? 공하다고 하잖아요. 특징이 없다는 건 공하다는 거잖아요. 공하다는 말은 자성이 없다는 거거든요. 뭐냐면 여러분 텅 빈 그 빛난 의식을 체험했을 때 거기 어떤 특징이 없죠. 모든 자성을 감추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자성도 등장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 빛나는 의식이 산의 자성을 구현하고 있다면 이미 산이지 그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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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의식은 모든 우주에 무한한 걸 구현할 수 있는 자리여야 되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 자성도 그 자리에 시공 인과성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자성을 품고 있어요. 자 그러니까 제가 얘기하던 그거 있죠. 텅 비어 있으면서도 구공, 텅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구족, 만법을 다 갖추고 있다. 요 측면을 이해해 주셔야 돼요. 그러니까 자 특징이 없다고 하는 건 어떤 측면을 얘기하는 거겠어요? 그 자리는 어떤 특정 자성이 점령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텅 비어 있다는 거.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 인과성이 거기는 없다는 거예요. 그 측면에서는 텅 비어 있어요. 어떤 특성이 없고요. 특징이 없고 한계도 없어요. 그럼 무한하다는 거죠.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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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이 없고 무한하다. 자 일단 이런 의식이 있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여기 육근 중에 이런 의식이 있을까요? 육근 안에? 부처님이 일체 세계를 구성한다고 했던 육근 안에 벌써 특징이 없는 의식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요? 없죠. 이 의식은 자성이 있어요. 오감에서 들어온 정보를 조합해서 이 생각 감정을 일으키는 게 자성이라고요.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이죠. 자성이 달라요. 그러면 생각은 생각 역할을 해줘야 되고 감정은 감정이 울고 웃고 이 작용을 해 줘야 돼요. 다 다르잖아요. 이게 자성이에요. 다 다른 자성이 있어요. 그런데 이 자성이 독자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해서 공 이러는 거예요. 하나하나 자성이 독자적인 게 아니에요. 우리의 텅 빈 의식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따지면 텅 빈 의식 안에 갈무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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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공인데 구족이다”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구공(俱空)은 이걸 해줘야겠네요. 그냥 진짜 여기 모두 구(俱)자, 어떤 것도 모두 없는 자리에 모든 게 다 들어있어요. 벌써 이게 뭐죠? 벌써 또 4차원 세계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리는 언어로 설명이 안 돼요. 그러니까 이걸 자꾸 언어로 설명해 버리면 이상해지는 거예요. 보세요. 특징이 없다고 해놓고 또 보세요. 모든 곳에서 빛난대요. 그럼 이것도 자성 아닌가요? 어둡진 않다는 거잖아요. 따지면 이것도 자성이라고요. 자성이 특징이 없는데 무한하며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대요.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자성이라고요. 어둡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고 있대요. 왜? 알아차리는 의식이라고 했으니까. 알아차리고 있는 자성을 구현하고 있다고요 지금. 그러니까 텅 비어 있으면서도 알아차리는 자성은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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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고 있는데 텅 비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알아차려지는 대상이 결국 또 엄청난 진리들이 알아차려져요. 그러니까 우주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육근이 탁 굴러가는 겁니다.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 업보가 어디 하나도 안 가고 그대로 구현돼서 나오는 거예요. 익어 가지고 익어서 나와요. 익어 가지고 제때 딱 그것도 최적의 타이밍에 딱 빚 갚으러 옵니다. 탁 떴을 때 학폭. 무섭게 작동하죠. 내가 업을 주재하면 이렇게 안 하죠. 근데 누구도 못 해요. 우리 각각 법계를 살아가지만 이 모든 법계를 관장하는, 법계를 초월한, 에고성이 없어야 되니까 법계를 초월한 의식이 관리하는 거예요. 카르마의 업의 종자만 관리할까요?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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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라고 하는 진리 종자도 다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유식학에서는 이런 이데아들을 뭐라고 하냐면 이데아들을 본유종자라고 합니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던 종자. 이 종자 때문에 꼭 육근이 펼쳐지는 거예요. 오온이 꼭 펼쳐지는 거예요. 갈무리 됐다가 탁 펼쳐지면 꼭 오온이 작동하는 거예요. 이 본유종자가 이데아예요. 이게 자성이고. 그러니까 또 불교적으로 부파불교의 자성론을요 법공에 반대했던. 법이 실제로 있다. 진짜 자성이 있다. 안 그러고는 정신 이런 작용들이 일어나겠냐? 정신작용도요 여러 기분들이 하나씩 다 자성이라고 생각했어요. 불교적으로. 그러니까 경험하는 것들이 물질적으로 경험하는 것들 정신적으로 경험하는 것들 다 모아 가지고 그리고 열반도 하나의 다 고유 성질을 갖고 있잖아요. 열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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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그래서 법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몇 십 개씩 우주를 구성하는 이데아들을 정리해 보는 거예요. 이런 작업들이 일어났다고요. 부처님 가시고 나서. 부처님 땐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의 또 형이상학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그 법을 100개로 확정해요. 100개의 법이 있어요. 동양이랑 다른 게 동양이 100개를 만들면 음양오행을 어떻게 엮어서 좀 구조화 시키거든요. 거기는 그냥 100개가 나열돼 있어요. 재미가 없죠. 불교 재미없는 게. 동양처럼 음양오행으로 구조화를 시켜줘야 암기하기도 좋고 그렇죠. 그냥 들입다 이런 감정 저런 감정 이런 정신현상 저런... 불교 자성론까지 다 본 겁니다. 자성을 부정하지만 불교에 분명히 자성은 있다. 그런데 왜 자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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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말을 강조하느냐? 공한 데서 우주가 펼쳐져 나오게 때문에. 서양철학식으로 얘기하면 이데아를 플라톤이 얘기했지만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이데아는 어디 있는 게 되느냐? 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게 돼 버려요. 그럼 신의 세계를 공이라고 봐 버리면 텅 빈 중에 이데아가 존재했던 거예요. 그래서 적절한 때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생기는 거예요. 빛의 자성이 원래 없었다면 신이 빛이 있으라고 할 수 없는 거죠. 이해되시죠. 그래서 여러분도 지금 빛과 어둠이 생기는 것도 다 빛과 어둠의 자성이 다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그래서 다 그걸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법, 일정한 법칙을 갖고 있는 것들이에요. 자성을 갖고 있는 것들이에요. 근데 이 자성이 결국 갈무리돼서 여러분 의식이 그대로 자성이라는 게 충격적인 거죠. 이 펜의 자성이 나라니! 내 의식이라니! 말이 내 의식이지 내 의식이 아니에요. 나의 의식의 근원이라는 거지 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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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거든요. 우주적인 의식의 우리가 빨대를 꽂아서 사는 거거든요. 에고라고 생각하고. 이 정도 느낌 오시죠. 그런데 석가모니께서 지금 충격적인 말을 한 겁니다. 특징도 없대요. 그럼 일반적인 오온의 의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온의 의식은 특징이 있어요. 무한하대요. 한계가 없대요.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 있대요. 이걸요 지금 우리나라 니까야 번역하는 분들은 이렇게 번역을 안 해요. 근데 지금 서양이나 서양학자들이나 달라이라마도 이렇게 번역하십니다 똑같이.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의식이 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거든요. 이 두 구절을 의도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번역가들도 다 틀어놨더라고요. 근데 이제 서양의 논문에는 이렇게 정확히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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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죠. 아니 어떻게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경전 번역을 틀면 어떡해요. 그 위에도 보실래요. 논리가 명확해요. 그 위에가 더 정확한데요. ‘의식’(열반의식)은 볼 수 없고. 자 특징이 없다에 “볼 수 없다”라는 식으로 또 설명도 되어 있습니다. 볼 수 없고요.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나는, ‘빛’이 나는 의식이 있다. 근데 보세요. 문제는 이겁니다. 이런 의식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제 중관파가 또 개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지금 중관파에서 말하는 청정광명심이라는 건데. 청정광명심은 겔룩파도 강조해요. 왜냐하면 겔룩파나 닝마파나 다 밀교가 딸려 있거든요. 밀교는 되게 청정광명심을 중시합니다. 말을 안 할 순 없어요. 그러니까 티벳 불교가 중관파라는 현교와 밀교수행이 결합된 형태거든요. 밀교는 오로지 청정광명심을 닦는 거예요. 닝마파나 가뀨파나 다 사캬파나 청정광명심을 강조해버려요 그냥.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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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고 해요. 겔룩파만 이걸 어떻게든 “이것도 변화한다”라고 끌고 가려고 하는 거죠. “이것도 무상하다.” 이것만 다른데 자 이렇게 끝낼 수도 있는데 이게 열반이란 증거가 그러면 있어야 되잖아요. 이해되시죠. 열반은 불교에서 공이 무위법입니다. 열반이라는 거는요 이렇게 불교식 자성론에서 무조건 열반은 무위법에 들어갑니다. 무위라는 거는 여여(如如)예요. 조금도 변화가 있으면 안 돼요. 즉 무상하면 안 돼요. 그대로 충돌 나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지금 중관파 쪽에서는 열반이라는 거를, 진여 열반을 공성, 무자성의 진리로 보고 이 진리를 인식하는 어떤 광명한 마음 정도로 보려고 한다고요. 광명한 인식 능력 정도로. 이해되시죠. 그런데 이게 그대로 열반이란 논리가, 이게 지금 그런데 저는 더 압도적인 다수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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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게 좀 파격적으로 보이신다면 그만큼 이게 좀 논리 밖에 있다는 거겠죠. 근데 이게 진실입니다. 자 석가모니 가르침 볼까요. 께왓다경 디가니까야. 그런데 여기서, 이 의식 자리에서 지수화풍(4대)은 견고하게 설 수 없으며. 지수화풍이 일단 존재할 수 없대요. 색수상행식 중에 색이 날아간 겁니다. 지수화풍은 물질을 구성하거든요. 물질이 여긴 없대요. 그리고 길고 짧은 것, 미세하고 거친 것, 아름답고 더럽다는 것. 이원성을 말합니다. 이원성이 없대요 여기는. 어떤 특징이 없다에, 무자성에 지금 이거는 이렇게 설명이 되겠죠. 어떤 이원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죠. 어떤 이원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원성도 없다는 것은 시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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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겁니다. 인과도 없다는 거예요. 인과도 이원성이거든요. 인과가요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 예요. 부처님이 얘기하신 연기법.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서 이곳이 있다인데 이것도 이원적이어야 되거든요. 이원성이 없대요. 그리고 더러운 게 없다. 그랬죠. 청정하다는 겁니다. 여기는 지금 청정하다. 더러운 게 없대요. 정신과 물질작용 즉 오온이 남김없이 소멸한대요. 여기는 오온도 못 붙는대요. 육근 작용이 없대요.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그럼 여기서는 오온의 식별로 봐야겠죠. 오온이 사라지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한다. 여기가 열반 자리라는 거겠죠. 초기불경에서 열반 말고는 이런 설명을 들을 자리가 없어요.

초기불경에서는 이런 얘기 안 합니다. 무상 고 무아의 세계만 노래하죠. 열반은 지극히 소극적으로만 다뤄져요. 번뇌가 없는 자리 이럴 때만. 그런데 가끔 “거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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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이 없고 영혼 불변하며“ 이렇게 적극적으로 설명하실 때가 어쩌다 한 번씩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때 설명하는 딱 그 느낌으로 설명하신 거예요.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을 얘기하다가. 재밌죠. 이런 자리가 있다. 그러면 지금 부처님은 진여 열반이 그대로 특징이 없고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 즉 청정광명심이라고 얘기하신 거죠. 그리고 부처님은요 그러면 그 부파불교가 아공만 주장한 거지 부처님은 아공을 주로 강조하게 했어도요 지금 이것도 아공이죠. 너의 모든 오온이라는 자아를 소멸시켜라. 오온이란 자아를 완전히 초월한 그 자리, 시공 인과성 이원성이 없는 그 자리도 무한한. 무한하다고 했으니까 그 자리에도 무한함은 있어야 되잖아요. 무한한 모든 곳에서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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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식은 있다는 거죠. 그렇죠. 그러면 일단 아공의 진리도 나오고요. 그 다음 보실래요. 부처님은요 아 3번 먼저 볼게요.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이 마음의 본질은 빛난다는 것이다. 빛난다는 거는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뭐 이렇게 뭐죠. 태양처럼 빛나는 의식이라고 해서 색깔적으로 이렇게 환한 빛이 보인다는 건 아니죠. 알아차린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탐진치로 고생한 것은 빛나는 마음의 본질의 문제는 아니야 이겁니다. 빛나는 알아차림은 문제가 없었어. 그 알아차림은 계속 청정했는데 밖에서 들어온, 객진번뇌라고 그러죠. 밖에서 들어온 이 번뇌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럽혀진 거야 그동안.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다가오는 번뇌에서 벗어난다.(전재성 역주, [앙굿따라니까야], 빛나는 마음의 경). 즉 보세요. 이 말이 구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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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요 영원히 청정광명입니다 무한하게. 무한하게 청정광명하고 있어요. 밖에서 번뇌가 들어와서 가렸다가 그 번뇌가 떠난 것뿐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그렇죠. 마음은 빛나는 거다 원래. 번뇌가 와서 오염시켰다. 마음은 빛나는 거다. 그 번뇌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번뇌가 오건 말건 뭐예요? 청정하게 빛나는 게 마음이다. 그 옛날 선사들이 이 공간을 더럽혀 봐라 이런 거랑 똑같아요. 공간은 더럽힐 수가 없다. 우리 마음은 탐진치로 오염돼도 이 마음의 가장 본질인 이 빛나는 의식은 더럽힐 수가 없다. 알아차리는 건 더럽힐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막 추악한 생각을 하죠. 그러면 마음은 더럽혀진 거죠. 추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는 그 자리는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 자체는 더럽힐 수가 없어요. 생각 감정 오감이 더럽혀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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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는 그 육근의 본질은 더럽힐 수가 없다. 요거는 이제 전재성 박사 번역이고요. 앙굿따라 니까야, 빛나는 마음의 경이에요. 제가 읽어드리는 이게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특징이 없고 무한하고 모든 것에 빛나는 의식이 오역돼 있는데요. 이게 이 번역을 바로잡고 보면요 다 보이는 게 이후 모든 불교, 남방불교 금강승불교 모든 불교에서 이 용어를 가지고 이론을 전개한다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파드마 삼바바도 계속 이 얘기만 합니다. 특징이 없고 무한하고 빛나는 순수 광명한 의식. 정확하게 읽고 있어요 이 경전을. 그러니까 충격인 거예요. 저도 지금 저기 뭐야 현진이가 동국대 불교 박사를 안 갔으면 오역으로 못 읽었다니까요. 제가 영어 책을 볼 일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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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어로 된 책에는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었다고요. 충격 아닙니까. 영어를 안 해도 적절한 때가 되면 알아지더라. 이런 결론에 도달해 봅니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요 석가모니께서 아공은 확실해요. 법공은요? 하실까봐 4번 읽어 보실까요. 다음 페이지요. 잡아함경 13권 319편인데요. 일체라고 물어봐요. 저기 브라만 학원 다니는 외도가 와서 물어봐요. 일체란 뭡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체의 세계, 내가 경험하는 일체의 세계라는 건 뭡니까? 일체라는 거는 12처를 말하는데. 12처라는 건 별거 아닙니다. 육근 작용이에요. 시각(眼)과 색깔(色), 청각(耳)과 소리(聲), 후각(鼻)과 향기(香), 미각(舌)과 맛(味), 촉각(身)과 촉감(觸), 마음(意)과 법칙(法)이다. 우리 마음은 사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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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을 읽어내거든요. 본질을 읽어내는 게 마음이에요. 그럼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 나는 ‘이 일체 외의.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와가지고 나는 이 일체 외의 다른 일체를 별도로 세우겠다’라고 한다면 이건 말일 뿐이니. 있을 수가 없는 거다는 거죠. 우리가 경험하는 건 육근이 전부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육근의 세계가 전부다. 육근의 작용의 세계가 전부다. 물어보면 모르고 의혹만 커질 거다. 왜 그런가? 별도의 일체라는 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雜阿含 제13권 319) (일체유심의 법공法空의 진리 갖추어짐). 존재할 수 없다. 자 부처님은 법공에 대한 감각이 있으시죠. 자 “모든 곳에서”가 벌써 힌트입니다.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라는데 어디가 모든 곳이죠? 육근이요. 모든 육근 작용의 자성 역할을 주는 게 뭐라고요? 특징이 없는 무한한 빛나는 의식이요. 이걸로 인해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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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이 굴러가요. 모든 곳에서 빛난다는 게 산에서도 빛나고 강에서도 빛나고 이게 아닙니다. 놀라운 게요. 이 특징이 없고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 지금 여러분 저를 보고 계신 의식이에요. 그 의식이 있어서 제가 있어요.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그 의식이 묻어 있습니다. 그 의식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펜이요? 독자적인 펜을 여러분 죽을 때까지 보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바라보는 그 의식이 주관이라면 객체로서의 사물만 경험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은. 이해되세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알아차리는 내 의식의 객관으로 경험되는 거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가 없어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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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어 있어요. 정확히 얘기하면 이것도 객관적 펜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육근에 포착된 펜이지. 즉 여러분이 봐주니까 여러분 마음 안에서 현존할 수 있는 펜입니다. 바라보는 여러분이 없다면 지금 존재할 수 없어요.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거 마음에서만 아닙니까? 객관적인가요?” 여러분이 객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 마음밖에 없어요. 착각하는 거예요.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고 이름을 지어 놓고 상상하고 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게임할 때요 내 모니터 밖에 못 보지만 사실은 어떤 그런 객관적인 필드에서 게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사실은 내 모니터. 그러다가 어느 날 좋은 모니터에서 게임하는 친구를 보면 원래 게임 색깔이 이랬나? 내 모니터가 이상했단 걸 아실 수 있죠. 근데 우리 마음은 다른 사람 모니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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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가 없습니다.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계속해서 탐진치 작용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순수한 나, 그 모든 걸 넘어선 순수한 나의 알아차림의 빛에 의해서 육근이 그렇게 굴러갔던 거예요. 그게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에요. 예전에 도마복음 할 때 얘기 드린 적이 있어요. 돌멩이를 들어봐라. 거기 내가 있다. 나무를 들어봐라. 내가 있다. 그걸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돌멩이를 들었는데 “왜 예수님이 있지?” 진짜 내가 있는 거예요. 돌멩이를 들어도 거기 내가 있고. 보세요. 이 펜이 존재하려면 이걸 바라보는 여러분이 있어야 됩니다. 바라봐 주는 의식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펜을 보는 거 같지만, 돌멩이 하나를 보는 거 같지만 여러분은 계속 여러분을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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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경험하건 여러분은 계속 주관과 객관의 만남을 체험하는 거지 객관에만 정신이 팔려서 주관을 놓치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 이 객관과 주관을 넘어서서 이 모든 것을 존재 가능하게 해주는 의식이 알아차림이에요. 그냥 순수 알아차림.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여기 의식이 주관이면요 나머지는 객관이라고 만약에 치자면요 객관을 바라보는 주관 이걸 넘어서 바라보는 게 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요 주객 이원성이 없는 거예요. 주관 너머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의식이에요. 주관이 객관을 경험하는 것을 다 알아차리고 있어요. 이해되시죠.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뭘 해도 순수한 객관이라는 건 체험하실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요. “일체세계가 뭡니까?” “너가 경험하는, 너 우주에서 경험되는 육근작용 그게 일체 전부야. 그 외에 걸 누가 얘기한다면 그건 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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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떻게 존재해요?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에 의해서 존재해요. 부처님이 법공을 모르셨을까요? 강조를 안 하신 거예요. 왜? 이걸 얘기하면 또 형이상학이 성립돼요. 힌두교가 법공에 강하거든요. “일체는 브라만의 작용이야. 브라만이 꾸는 꿈이야.” 막 이제 헛소리가 막 나옵니다. 그런 거 싫어서 나온 거라. “그런 소리 하고 있지 말고. 이봐 그러지 말고 마음 챙겨 가지고 일체가 무상 고 무아인 것만 좀 알아차려 보는 거 어때? 그럼 마음이 진정될 텐데 고통이 사라지고 탐진치가 옅어질 텐데 이건 안 하고 브라만에 막 맹신하고 있으면 답이 나오나 어딘가 아트만 있을 것이다. 내 몸 안에 어딘가 찾고 있으면 답이 나오나?” 이 소리죠. 아트만을 물질세계에서 찾으니 찾아지겠어요. 근본부터 잘못돼 있죠. “알아차리는 너가 아트만이야.” 이 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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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이런 전법을 쓰신 거예요. 그래서 법공 얘기도 안 합니다. 그럼 아공 법공. 구공을, 석가모니가 구공 모르셨을까요? 석가모니 같은 성자가. 구공이라는 게 뭔데요? 육바라밀이죠. 그러면 육바라밀의 원형이 뭔데요? 삼학이요. 계정혜. 육바라밀도 계정혜 확장판입니다. 그 육바라밀 보시면은요 지계와 지혜와 선정에다가 보시 정진 인욕을 더 추가한 것뿐이에요. 또 이 삼학을 다르게 부풀리면 팔정도가 되죠. 자 팔정도 보이시죠. 석가모니가 구공을 모르셨을까요? 텅 빈 열반 안에 진리의 자성들이 들어 있는대요. 그래서 바르게 행동하게 정업. 정어. 바른 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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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정명. 정견. 바르게 보고 정사유. 바른 노력 바른 깨어 있음 정념. 정정진 바른 선정. 방금 여기 해놓은 그 위치 순서가요 제가 일부러 재밌게 팔괘대로 해놓은 거예요. 부처님이 팔괘대로 팔방을 다루고 계신 거거든요. 정견은 리괘거든요. 눈. 정사유는 지혜의 자리거든요. 물 흐르듯이 사유가 이어지는. 이거는 발로 걸어가는 거거든요. 정업. 태괘는 입이거든요. 바르게 말해라. 바르게 행동해라. 이건 산은 땅이 하늘하고 만나는 거거든요. 깨어 있는 거거든요. 정념. 땅은 무한하게 두텁게 쌓여가는 거죠. 정정진. 하늘은 순수하게 맑은 선정 상태죠. 정정. 요 바람. 여기는 순명하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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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에서 순명. 하늘의 의미 하늘을 받들고 있는. 그래서 손괘 자체가 순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릎 꿇고. 손을 이렇게 받들면서. 정명하고 잘 통하죠. 한자까지 통해요. 저게 순명의 자리인데. 왜 또 순명이 되냐면요? 주역 강의인데. 요거 입이죠. 입이 명령이거든요. 근데 뭐 먹는 데다 쓰고 있고. 여기는 입이 뒤집어져 있죠. 하늘이 명령하는, 위에서 말하고 있는. 위에서 말하는 거에 밑의 음이 순명하는 모습. 그래서 순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겸손하게 명을 받는다. 이건 재미로 한 거예요. 굳이 놓자면 저 같으면 팔괘로 놓겠다.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구공을 모르시면 팔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열반에서 팔정도가 펼쳐져 나온다고요. 그럼 살아계신 동안 팔정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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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하다 가셨어요. 그러니까 이게 힌두교랑 다른 겁니다. 참나 찾고 나서 힌두교는 참나 안에만 있었어요. 석가모니께서는? 팔정도를 굴렸어요. 사무량심이라는 자비희사. 자비심을 닦았어요. 이게 불교의 본질입니다. 참나에 만족해 있는 스승들하곤 헤어졌잖아요. 부처님 출가하자마자 참나 만났어요. 힌두교 도인들 만나서, 최고 수준의 우파니샤드 도인들 만나서 바로 인정받고 나랑 같이 우리 아쉬람 운영하자 그랬어요. 됐다고. 딱 보니까 여기서 있다가 각이 안 나와요. 참나 안주를 하고 있고 탐진치가, 업은 그대로 있는데 업장이 안 닦였는데 참나만 보고 있으니까 해결된 거 같죠. 석가모니가 “이건 답이 아니다” 해서 나와서 호흡법 실험해보고 팔정도, 사무량심 이런 거 깨달아 가지고 불교를 따로 여신 거예요. 그리고 불교 막 열었을 때 스승들 찾았던 건 그 스승들이 내 말만 들으면 금방 깨달을 텐데. 그 스승들도 업장을 정화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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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데 이 소리입니다. 이해되시죠. 힌두교랑 불교 차이는 참나냐 아니냐에 목숨을 거시면 안

돼요. 영원불변한 의식. 요게 왜 안 되냐면요? 특징이 없고 무한하며 모든 것에 빛나는 의식은 전형적인 우파니샤드의 참나 설명입니다. 그럼 이 구절은 그대로 뭐냐면요 석가모니가 스승한테 배운 거를 안 잊어 먹고 잘 써먹고 있었구나 밖에 안 돼요. 이해되세요. 뒤에 또 설명 드릴게요. 각주 한번 가보실래요. 각주 미리미리 제가 조금씩 말씀 드렸어요. 2번 각주요. 열반의 자리에는요 각주 2번 있죠. 2페이지 2번. ‘열반’의 자리에는 4대도 5온도 일체의 차별상과 이원성도 존재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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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왓다경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예요. 께왓다경의 각주죠 지금. 따라서 승의(勝義) 무자성(無自性)’인 ‘공성(空性)’이다. 불교에서 승의 그러면요 최고로 뛰어난, 보통은 절대계를 의미해요. 그 승의제 반대가요 세속제여가지고요. 그 사성제처럼 제는 진리란 뜻입니다. 여기는 세간의 진리를 말하고요. 승의제는 출세간의 진리를 말해요. 그러니까 이건 불가사의한, 헤아릴 수 없는 세계예요. 절대계를 의미합니다. 이쪽이 절대계, 이쪽이 현상계. 그러니까 세속 안에서 우리 눈으로 보고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진리구요 이거는 경험할 수 없는 진리. 승의는 뛰어나다는 뜻이에요. 뛰어난 의미, 궁극의 의미를 갖고 있는 진리 이런 뜻인데 승의의 무자성이라는 건요 단순하게 이런 거예요. 단순하게 보세요. 단순하게 세속계의 세계를 연구해 보면 어때요? 특징이 무상이거든요. 무상하니까 결국 무자성 맞죠? 아니 현상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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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없다는 거잖아요. 왜냐하면 계속 변하니까. 이거 펜의 자성이 있다고? 가만히 분석하니까 플라스틱은 펜을 모르는데. 전혀 펜을 모르는 애들 모아다가 펜을 만든 거예요. 이런 걸 근거로 해서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무상하다는 건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일반적인 그 중관학파가 강조하는 무자성이고요. 승의의 무자성은요? 중관학파는 이걸 승의의 무자성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연기하니까 무상하니까 공이다. 그런데 유식학부터는요 거기 중관학파에 반대한 유식학부터는 이 승의제의 무자성을 승의의 무자성이라 그래요. 즉 뭐냐? 그 진여가 지닌 그 특성 없음, 이원성을 초월함을 승의의 무자성이라 그래요. 차원이 다르죠. 거기에는 이원성이 없다는 얘기예요. 텅 비어서 어떤 이원성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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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의 무자성이라고 쓴 겁니다. 일반적으로 중관학파에서 승의의 무자성이라고 하는 건 무상하니까 자성이 없다 예요. 이거는 유식학에 오면 승의의 무자성이 아니고. 괜히 유식학 얘기를 꺼냈습니다. 유식학에서는 이거를 승의의 무자성. 현상계에서 적용되는 이거를 생(生)무자성 그래요. 즉 생겨날 때 혼자서 못 생겨나고 남한테 의지해서 생겨나니까 자성이 없다. 이건 승의의 무자성. 그 다음에 3무자성을 얘기하는데 하나가 또 있어요. 상(相)무자성. 이건 뭐냐면요? 이거는 언어에 집착해서 만들어낸 환상이에요. 그래서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중관학파는 이 두 개(생무자성, 상무자성)를 중시합니다. 즉 여러분은 다 언어에 집착한 겁니다. 사실은 인연 따라 굴러갈 뿐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중관학파 주장이에요. 여기에 유식학파는 뭘 보태냐면 승의의 무자성이 있다. 그건 진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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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요. 진여의 세계는 자성이 없다. 왜? 어떤 더러운 것도 거기 못 들어가니까 여기 나오죠. 어떤 차별상도 어떤 이원성도 거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더럽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무자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공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스스로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 존재하니. 그러니까 열반은 분명히 무자성이에요. 특징이 없어요. 그런데 스스로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 있어요. 따라서 독립 고정 불변의 실체인 상락아정, 영원하고 지복이면서 참나이면서 청정한. 즉 영원하고 지복이고 청정한 참나가 자성이죠. 그게 그대로 자성이죠. 이게 존재한다는 걸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가지고 분석해 보면. 이해되시죠. 영원히 빛난다잖아요. 영원히 빛난다는 게 이미 자성이란 말이에요. 영원불변이 들어가 버린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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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런 논의를 보고 선불교 밑에 각주는요 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보면 이해가 잘 되실 걸요 밑에 보세요. 이 석가모니 가르침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모든 불교에 들어 있다니까요. 여기 한 물건이 있어 한 물건이 있어 근데 그것은 본래 밝고 신령스러워. 신령스럽다는 건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본래 밝고 스스로 알아차려. 그런데 생겨난 적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생멸이 없어. 일단 생멸이 없다잖아요. 그런데 자꾸 중관파는 생멸이 있다고 한단 말이야. 어떤 특이한 논리를 쓰냐면 “아 그 자리는 시공을 초월해 있어서 생멸이 없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의식 자체는 생멸을 해” 이런 논리예요. 이해되세요. 이거는 4차원 세계를 우리가 설명해 보겠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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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자 뭐라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언어로 표현이 안 되는 세계라는 거예요. 그 생김새를 파악할 수도 없다. 보이질 않아요. 특징이 없고 보이지 않는데 밝고 신령한 물건. 이게 석가모니가 말한 그거예요. 그게 진여 열반이에요. 이 선가귀감에서도. 또 백운화상어록 한번 볼까요. ‘지극한 도(至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깊고 밝으며 텅 빈 것‘이다. 텅 비었다는 건 어떤 자성이 없다는 겁니다. 근데 깊고 밝다는 건 존재해요. 심오하면서 밝다는 건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알아차리고 있는데 텅 비어 있어요. 여러분 참나 만날 때 그렇죠. 어떤 것도 없어요. 알아차리고만 있지. 신기하죠. 의식은 있는데 어떤 것도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정확하게 육근이 나온다니까요. 그럼 알고 있었단 얘기예요 이 자리는.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체험하실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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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하고 순수하되. 미묘하다는 거는 우리가 논리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순수해요. 청정해요. 그리고 빛나고 신령스럽게 밝아요. 모든 증언들이 대게 모아지죠. 밝다죠. 뭔가 밝다. 임사체험처럼 빛을 봤어요. 뭐 이런 거죠. 참나의 세계에 다녀오신 소감이 어때요? 뭔가 빛이 보였어요. 뭐 이런 느낌이에요. 밝았어요. 말과 그림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요. 임사체험 하듯이 모든 참나 체험자가 자꾸 이렇게 하면 체험 안 한 사람들은 짜증낸다니까요. “어디서 또 뭘 봤구만.” 이럴 수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독창적으로 표현하시라. 근데 이런 천재들도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해요. 그렇죠. 말과 그림으로 설명이 안 되고요. 알음알이와 지혜로 미칠 바가 아니고요. 여기서 지혜라는 거는 머리 굴려서 이렇게 통박을 굴려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요.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이런 사람들이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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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을 만들어내요 갑자기 또 가운데가 아닌. 뭔가 하나 보태는데요. 공간도 없더라는 거예요. 거기는 공간도 없고요. 시방세계에 투철히 사무치고요. 모든 세계에서 빛나고 있고요. 모든 이 말은요 자기가 다른 세계 가본 것도 아니잖아요. 시방세계를 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모든 육근의 경험을 다 그 자리에서 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내가 만약에 은하계를 보면 그 은하계도 그 의식이 빛내서 알아차려진 거예요. 은하계도 지금 참나로 인해 존재합니다. 증명해 봐라 그러면 은하계를 보여 달라고 하세요. 딱 보면 “음 나로 인해 우주에 지금 생생하게 빛나고 있다” 이런 식이에요 이 양반들이. 이런 말을 이렇게 날려버리고 설명을 안 해주니까 다들 환상을 품게 된 거예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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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자성.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상을 세워서 우리가 이해해요. 요거는 이게 유식학의 세 무자성입니다. 나중에 다 나오니까요. 시방세계에 투철하고요. 그럼 공간만 얘기하면 재미없죠. 그럼 항상 또 시간 얘기를 하겠죠. 가지도 오지도 않으면서 그윽이 과거 현재 미래에 통한다. 거기는 시간성도 없다. 그러니까 모든 시공간을, 자 시공이 4차원 시공간이죠. 지금 현대물리학에서 4차원 시공간을 통으로 알아차리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요. 함께 간다고요. 함께 빚어내는 직조물이에요. 이 우주라는 거는 시공이 함께. 시공은 어디 있어요? 내 마음에요. 내 마음이 있어요. 요즘 물리학자들이 “시간을 흐르지 않는다” 막 이런 책 내면 돌아버리죠. 근데요. 철학적으로도요 시간은 흐를까요? 시간은요 공간은요 우리가 만물을 다양성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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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펼쳐내는 수단입니다. 공간이 있어야 펼쳐지거든요. 여기저기가. 시간은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면 시간으로 밖에 설명을 못 하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변화만 있지. 변화를 인식하는 수단이 시간이라니까요. 여기서 이렇게 간 거를 뭐로 설명하실 거예요? 시간 밖에.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변화만 있다. 변화를 인지하는 게 시간의 형식으로 우리가 변화를 설명한 거예요. 공간의 형식으로 다양성을 설명하고 시간의 형식으로 내 우주에 있는 모든 변화를 설명해요. 시간이 흐른다라고 설명해요. 사실은 변화하고 있는 것뿐이죠. 이런 얘기 어디 가서 하시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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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야지” 뭐 이런 생각하게 하시죠. 좀 말 좀 줄여야겠다 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서 시공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있는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냥 여러분 마음의 변화에요. 시공 안에서 이렇게 굴러가는 것은 육근이 계속 굴러가고 있다는 거예요. 포인트는 육근이 굴러가고 있는데 그걸 시간으로 설명한단 말이에요. 공간으로 설명하고. 근데 이 시공이라고 한 덩어리 하나의 사태. 시공도 내 안에서 인연법이 굴러가고 있는 하나의 사태를 설명하는 거예요. 무대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무대. 공간이란 무대에서 시간이라는 변화를 때려줘야 그 안에서 연기가 굴러가는 게 설명이 되니까. 이 모든 게 시공을 초월한 참나 자리 알아차림이래요. 뭔가 느낌 오지 않으세요. 참나 상태로 있으시면 여러분 오늘 하루 계속 장면만 바뀌는 거지 집에서 여기 와도 장면만 계속 바뀌는 거, 오감만 계속 바뀌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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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살어 말어” 뭐 이럴 건 아닌데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초연하게 보고 있으면 완전히 다른 인식이 가능하죠. 이런 것들이 기본입니다. 법공 체험의 기본. 이런 게 체험이 됐을 때 법공이라는 진리가 알아져요. “일체가 내 의식 작용이구나. 일체유심이구나.” 이런 걸 깨달으신 분이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들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분들 뭐 이런 분들

아닙니다. 그냥 법공을 아신 분들이에요. 공부 좀 하시다가 법공을 아신 분들이 오도송을 남기고 해가지고 지금 유명해지신 거예요. 여러분도 그 이상 다 누리실 수 있어요. 뭐 엄청난 분들 아니에요. 뒤 캐보면 뭐 별짓 다하셨을 거예요. 린포체들도 지금 서양 가니까 막 문제가 많거든요. 다 그렇죠 뭐. 아니 사바세계가 어디가 깨끗하고 더럽고. 다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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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솔직하게 우주에서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제안을 해요. “솔직하게 다른 중생들 절대 모르게 할 테니까 너 우주에서도 하고 싶은 거 얘기해 봐” 그러면 말도 못 할 것들 나올 걸요 저부터요. 제가 저한테 이렇게 물어봐요 솔직하게. 아 안 되겠어. 탐진치가 어디 하나도 안 갔구나라는. 저는 진짜 탐진치가 어디 하나도 안 갔구나. 그러니까 제가 아라한의 경지도 유추 가능하다는 거예요. 참나를 51%로 해놓고 사니까 남이 볼 때 볼만해지는 거지. 잠깐만 참나 끄고 얘기해볼까 그러면요 뭐 이상한 게 나온다니까요. 솔직하게 저는 저한테 한번 솔직하게 항상 대화를 걸어보면 아직도... 남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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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이렇게 저를 봐주시는 거는 그것도 저예요. 근데 그거는 저도 가식 떨진 않아요. 근데 다만 그거는 정신 차리고 있을 때라는 걸 아셔야 돼요. 정신 차리고 있을 때. 그러니까 업장이 관리되고 있을 때예요. 근데 우리가 술만 먹어도 업장이 관리가 안 되잖아요. 속에서 술 먹여 보면 압니다. 뭐 이렇게 점잖은 친구 말 과묵한 친구, 술 먹이면요 주사가 주사가. 평소 말 못 했던 거 술 먹을 때만 해요. 그럼 술 딱 맨 정신 돌아오면 관리되고 있어요. 안 나옵니다. 좀 이성을 약하게 해놓으면 나오죠. 근데 도를 닦는다는 거는 그런 건 아니죠. 이성으로 누르는 건 아니에요. 깨어있음으로 누르는 거기 때문에 점점 더 내 업장이 관리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탐진치의 그 심오함을요 우리가 그걸 끊었네 뭐 이렇게 건방 떨 일이 아니에요. 기회가 안 돼서 못 하고 계신 거예요. 기화만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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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하늘이 다행히 기회를 안 줘 가지고 그나마 이 정도 살고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기회가 안 와서 내가. 기회가 왔는데도 안 할 실력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함부로 남을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거예요. 나한테는 안 온 기회가 왔단 말이에요. JMS. 나는 그 나는 정명석이다가 아니죠. “나는 신이다.” 많은 분들이 비판하면서 동시에 부러워할 거예요. 아 저건 뭔데 저렇게 살아 이렇게. 이게 묘한 심리입니다. 근데 이게 사바세계의 중생은요 탐진치가 있어서 누군가를 사이비 교주 아니라 누가 성공했다 그러면

이게 부럽다 하면서도 속에서 또 다른 게 올라오죠. 같이. 깨어 있어야, 육바라밀이 51% 나를 지배해야 기뻐해 줄 수 있다니까요. 같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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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차려야 기뻐해 주지 내 라이벌인데 먼저 승진한대요. 그걸 기뻐해 줄 수 있다고요 여러분이? 진짜 기뻐해주고 있으면 저는 의심할 것 같아요. 나중에 뭔 뒤통수를 치려고. “솔직히 좀 서운하다” 뭐 이런 양반이 오히려 낫지 막 과하게 수위찬탄하고 이게 쉽지 않다니까요. 그러니까 극도로 깨어있을 땐 가능해요. 자 그러니까 인류가 진화하려면 답은요 인간의 꼼수와 이런 가식으로 위선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도 바리새파들 보면 막 욕한 게요. 가식 떠니까 가식 떨면 끝이에요. 가식을 떨면요 개선의 여지가 없어요. 솔직해야 돼 일단. 아 저는 근데 왜 이때 이런 이상한 생각이 날까요? 그 사람은 가능성이 있어요. 저 죄인 같아요. 막 (가슴을 치며) 또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있으면 그것도 답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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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 나는 근데 솔직하게 내 안에 있는 죄성에 솔직하고 예민한 상태 그거는 필수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나아질 수가 있고 그 사람 힘으로는 안 돼도 성령이 임하면 나아진단 말이에요. 즉 견성을 하면 나아진단 말이에요. 무조건 진여 열반에 뿌리를 박잖아요. 진여 열반은요 성질이 다릅니다. 육바라밀이 본성이에요. 건드리면 무조건 육바라밀 팔정도가 계정혜가 튀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몇 개죠? 무조건 튀어나와요. 이게 51%가 아니다. 보니까 힘을 못 써서 그런 거예요. 보통. 보통은 튀어 나오는데 힘을 못 써요 여러분 일반인도 나와요. 양심이 나오잖아요. 양심이에요 저게 육바라밀이. 양심이 나오는데 힘이 약하죠. 그래서 예전 그 유고 경전에 도심은 미약하다 그러잖아요. 미미하다. 나오는데 힘이 약하다는 거지

1:00:00

그게 없다는 애기는 아니에요. 누구나 나옵니다. 근데 자기 욕망을 이길 정도로는 강하지 못 하다는 거지 일반적으로는. 그러면 보살이란 어떤 존재냐? 계정혜 육바라밀을 닦아가지고 상시 이게 원만하게 터져 나오게 만든 것뿐이에요. 이게 왜 영원불변한 청정광명심을 모르고는 답이 없냐면 이 자리를 각성하지 않고는 절대 나아질 일이 없다니까 인간들이. 이걸 각성 안 한 사람들끼리 모여 가지고 서로 성스러워지기 대회를 열어 버리면 지금 우리처럼 되는 겁니다. 바리새파들이 창궐하는 거예요. 나는 뭐 금욕을 했네. 나는 잠을 안 자네. 뭐 오만 이상한 변태 괴인들이 등장해요. 잠을 왜 안 자는지 도대체? 그렇죠. 하늘이 잠 안 자라고 한 적은 없죠. 자 보세요. 소승대승 다 부질없는 게요. 영원불변 청정광명심을 만났으면, 이 자리가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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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이 자리를 못 만난 게 문제지 하나님을 만났으면 하느님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불교도 똑같아요. 이 자리 만났으면 이 자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부처님은 그걸 팔정도, 사무량심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 자리가 이걸 시키더라. 대승불보살들은 육바라밀이라고 얘기한 거예요. 육바라밀을 시키더라. 그 자리가. 그러니까 여기에 윤회를 멈추니 마니가 없는 거예요 애초에. 태어나면 태어난 대로 계속 육바라밀만 하고 다니면 되는 거예요. 이게 보살이에요. 즉 윤회를 벗어나니 많이도 다 사심이었다는 걸 알고 다 내려놓고 오로지 맡기는 거예요. 내 모든 생명을 이 청정광명심 이거를 이제 대승불교에서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보리심. 보리심한테 다 맡겨요. 육바라밀의 마음이 보리심이에요. 유교의 양심이 보리심이에요. 선비들은요 살고 죽고 생각 안 해요. 진짜 선비들은. 양심에서 하라고 하면 해요. 그냥 왕한테 그리고 죽어요. 하고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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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죽으면 좋은데 구족이 멸해지고 막 이래요. 삼족이 멸해지고 최악인데도 해요. 양심이 하라면 해요. 이런 게 선비 보살 군자 사도의 모습입니다. 가라면 가야 돼요. 하늘이 가라면 가요. 여기에다가 내가 뭐 이렇게 윤회가 싫으니 어쩌니 보태면은 보살이 아니죠. 그래서 왕양명 선생이 불교 도교를 공부하다 유교로 전향한 이유가 다시. 원래 유교였지만 불도를 오래 닦아요. 에너지체도 다 배양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불교적으로도 다 도를 터득했는데 유교로 다시 와서 뭐라고 하냐면 이 말을 했어요. 참나를, 그분은 공적영지를 양지라고 불렀잖아요. 양지가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된다. 그게 치양지(致良知)예요. 이를 치(致)자 양지. 하자는 것만 하면 된다. 치양지. 양지를 구현하라. 여기다 뭐라도 하나 보태면 다 사심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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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이 양지 위에다 뭘 보탰냐면 똑같은 양지 공부한 거는 맞는데 인정했어요. 진기(眞己) 진아(眞我)도 인정했어요. 이게 진아인데 맞는데 여기다 불교는 무생. 안 태어나겠다는 사심을 보탠다 도교는 여기다가 장생 오래 살고 싶다는 사심을 보탠다. 사심 다 빼고 나면 인의예지 하라는 천리만 남는다는 거예요 내 안에. 양지는 계속 천명을 전해줘요. 나한테 인의예지를 하라고 똑같이 보살로 바꾸면요? 내 안에서 다르마의 명령이 뭐예요? 육바라밀 하라는 명령만 계속 와요. 여기에 윤회를 하니 마니 이거를 보태고 있으면 뭐예요? 이미 여러분은 아직 프로가 아니다. 프로보살러는 그렇지 않다. 그냥 윤회를 발령으로 생각해요. 그때부터는 물론 저는 육바라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육바라밀 군장 딱 챙기고.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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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 1지 보살을 찬양할 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주 어디든 다 방문해 가지고 육바라밀만 알리고 다닌다. 이게 1지 보살의 경지다. 우주 어디를 가더라도 군말 않고 가고 육바라밀을 펼치는데 어떤 경우에도 피로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때 제가 여기 설명할 때 과하다 그랬죠. 육바라밀은 피로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에고는 피로하다. 너무 경전들이 세게 써 있어요. 아 에고는 죽죠. 근데 51%가 끌고 가니까 하는 거죠.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청정광명심만 알면 모든 문제의 해결됩니다. 여러분. 여기 뭘 자꾸 보태고 있으면 여러분은 여러분 꼼수와 여러분 지혜가 부처님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거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이런 청정광명심보다도 내 꾀가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디선가 알 수 없게 주워들은 그 정보들이 훨씬 낫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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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각주 4번 보시면요. 나중에 또 다시 읽어 드릴 텐데 열반경 한 구절 볼까요. 참나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게요. 이 열반경은 강력하게 참나를 주장합니다. 진아란 말을 아예 써요. 각주 4번이 페이지 밑에 있죠. 아까 못 읽은 각주들 읽어드린 거예요. 위에 본문은 지나갔는데. 자 ‘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래장’이다. 나라는 게 여래장이래요. 여러분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 의식의 핵이 여래장이래요. 그러니까 7식을 말하는 게 아니죠. 청정9식을 말하는 거죠. 청정식을. 여래장이라는 건 여래의 씨알이라는 겁니다. 여래의 모든 그런 지혜와 권능을 품고 있는 씨알.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요 열반경에선요 상락아정을 주장하거든요. 상락아정이 열반이다. 열반사덕이 상락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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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5페이지 보시면 열반4덕 법신4덕이란 말이 나와요. 그림. 보이시죠. 그림. 상락아정 보이시죠. 열반4덕입니다. 이것만 해도 구공이에요. 공 안에, 진여 열반 안에 상락아정의 자성들이 들어있대요. 속성들이 상(常)은 영원함이요. 락(樂)은 지복이요. 아(我)는 참나요 참 자아요. 정(淨)은 청정함이래요. 이 4가지 속성이 들어있대요. 그러니까 특성이 없다고 해놓고 또 들어가 보면 또 특성이 나온다니까요. 끝없이 모든 게 다 나와요 거기서. 특성이 없다는 거는 구현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텅 비어 있다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관찰해보면 텅 비어있는 중에 벌써 영원함이 있고요. 영원함을 갖추고 있고 청정함을 갖추고 있고 의식성을 갖추고 있고. 의식성이 나에요. 참나가 별게 아니라 알아차리고 있고요. 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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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이에요. 어떤 번뇌도 없어요. 왜 더러운 게 다 초월됐으니까 청정하고, 번뇌에서 다 초월했기 때문에 지복인 거예요. 번뇌가 없으니까. 이런 게 이 나라는 것이 애초부터 항상 무량한 번뇌에 덮여 있어서 중생들이 보기 어렵다. 똑같죠. 빛나는 마음이 여래장이고 지금 진여고 열반인 거 아시겠죠. 여기까지만 일단 근거를 갖고 봐도. 그리고 부처님은 법공을 알고 계셨다. 강조는 안 하셨어도 이게 또 다른 형이상학을 낳을까 봐 힌두교처럼 그리고 복잡한 교리 속에 빠질까 봐 말씀 안 하셨지만 법공마인드를 갖고 계셨다. 법구경의 3법인에 대한 가르침 상락아정 얘기 좀. 지금 이거를요 상락아정에 연결시켜 보려고 그래요. 자 보세요. 특징이 없다 이러면 청정함(淨) 아닌가요. 그렇죠. 그리고 어떤 특징이 없다는 게 어떤 이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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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원성도 없다는 거는요 번뇌가 없다는 거니까 락(樂)도 되죠. 상락.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라는 건 아(我)겠죠. 나라는 의식성이 있다. 청정. 그리고 이 무한하다는 건 영원함(常)과 통하겠죠. 자 상락아정을 얘기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우리 안에 자 “열반의 세계는 상락아정이다” 그렇게 본 거예요 실제로 후대에.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그걸 열반4덕이라고 하는 거예요. 상락아정을 열반4덕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분명히 세속제를 얘기할 때는 뭐라고 하셨어요? 무상 고 무아 이것도 진리예요. 세속제예요.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은 무상해요. 무상하니까 괴로워요 무상하다는 거는 아무리 좋은 순간도 지나가 버리거든요. 괴롭죠. 무상 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얘기예요. 내 통제 밖이다. 현상계는. 무상 고. 무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는 무아라는 거.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상락아정에 대응하려면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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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말고 하나 뭐가 더 있겠어요? 무상 고 무아. 부정(不淨). 불교에서 부정관(不淨觀)을 많이 시키죠. 내 몸은 더럽다는 관법도 합니다. 이거는 막 고름 덩어리고 막. 요즘 같은 시대 특히 부정관이 필요해요. 스마트폰만 켜도 너무 유혹적인 게 많이 나오거든요. 그럴 때마다. 옛날에 부정관 언제 시켜요. 주로 남성 수행자들이었잖아요. 그때 출가할 때 처음에. 여성은 나중에 받았잖아요. 그럼 남성 수행자들 모아서 숲에다 모아두면 볼만 했겠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거든요. 실제로 그 율장 보면 별일이 다 있었어요. 그래서 부정관을 계속 시키는 거예요. 또 그 탁발(托鉢) 나갔다가 하필 또 아가씨를 봤다. 그럼 그날 공부 되겠어요? 밥 갖고 와가지고. 그러면 부정관을 시킵니다. 이 몸뚱이도 사실은 지방이요. 고름이요. 이거를. 인도는 시체를 막 태우고 하잖아요. 지금도 시체 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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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가면 볼 수 있죠. 타다 남은 시체들 떠다니고 그래요. 평소 시체도 보고 해가지고 몸을 실감나게 더럽다고 관하는 겁니다 부정관이. 무상 고 무아 부정을 정면 부정한 게 상락아정이에요. 그러니까 현상계는 더럽고 영원하지 않고 내 것이 아니고 괴로웠는데 열반의 세계는 영원하고 지복이요. 어떤 번뇌도 없고 순수한 나요 진짜 내 것이라는 거예요 거기는. 이렇게 보는 게 맞겠죠. 이렇게 얘기하면요 상락정은 다 인정하는데 초기불교 분들이 아(我) 가면 또 거품입니다. “아 하나님! 어떻게 무아를 했는데.” 이게 열반경 가면 나와요. “그땐 방편 때문에 내가 무아라고 했고 진짜는 참나라고 해도 맞아”라는 게. 이후 열반경은 자세히 풀어 드릴게요. 나중에 저 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다 맛배기에요. 법구경 3법인까지 가볼까요. 일체 행위는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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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자 제가 법구경 3법인을 읽을 때 강조하고 싶은 건 여러분 그럼 과연 부처님 때도 상락아정 의식이 부처님한테 있었을까? 포인트가 이겁니다. 부처님은 이 무한한 빛을 생각할 때 상락아정이라고 생각했을까?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당연히 상락아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처님 때도 진짜 그랬을까?”라는 느낌으로 보자고요. 유명한 법구경의 3법인 구절 가지고 볼게요. “일체 행위(行)는 무상하다”(諸行無常)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아공의 진리죠.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난다. 이 말이 포인트입니다.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대요. 근데 부처님은 항상 의식이 뭐죠? 빛나는 마음이 있고 거기에 객으로 번뇌가 붙었다. 근데 그 번뇌성 중에 무상함을 내려놓은 거죠. 무상하다는 그 번뇌가 지닌 무상하다는 속성을 알고 나니까 번뇌가, 탐진치가 놓아진 거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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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던 건 무상하다는 걸 못 봐서 괴로웠다는 거잖아요. 그 무상하다는 진리를 알고 나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벗어난 주체가 있단 말이에요. 그게 빛나는 마음이라니까요. 빛나는 마음이 여기서 포인트가 벗어난다는 거예요. 벗어나 보니까 뭐예요?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벗어나 보니 청정하더래요. 자 그런데 뭐예요? 뭐로부터 벗어났죠? 무상이요. 그러니까 무상으로부터 벗어났는데 청정하더래요. 그러면 무상에서 벗어나면 상이겠죠. 아주 뭐 아니면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겠죠. 무상에서 벗어났더니 상이고 청정하더라. 그 다음에 일체 “모든 행위(行)는 고통이더라”(一切皆苦)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에서 벗어났겠죠. 그럼 그 빛나는 의식은 고통이겠습니까? 지복이겠죠. 그래서 제가 지복의 열반의식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겁니다. 아까는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이게 이렇게 얘기되어 있는 거는 청정한 열반의식을 말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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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거는 영원한 열반의식일 거고요. “일체의 법(法)은 내가 아니다!”(諸法無我)라고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거기서 떠나면 어떻게 돼요? 무아를 떠났으니까 진아를 만났겠죠. 참다운 나를 찾았겠죠.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다 떠났으면 참다운 나를 만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다. 벗어난다. 원래 떠난다로 번역했다가 벗어났다로 고쳤는데 하나가 안 고쳐졌네요. 자 이렇게 참나인 열반의식에 안주하는 거겠죠. 이게 열반경 가면 이게 바라밀이라고 한다니까요. 방금처럼 무상함을 떠나는 거를요 떠나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상(常)바라밀, 영원바라밀이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바라밀이라는 말은, 바라밀이 저 궁극의 세계로 건너갔다는 뜻이죠. 초월적인, 궁극의, 완성의 의미예요. 그래서 보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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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바라밀 그러면 초월적인 보시고요 궁극의 보시입니다. 즉 이 공성의 마음으로 진여의 마음으로 행하는, 보리심으로 행하는 궁극의 보시 초월적인 보시 보시의 완성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영원함이라는 건 무루의, 조금도 번뇌성이 없는 무루의 영원함, 무루의 진아, 무루의 청정함, 무루의 그런 지복으로 간 거죠. 그래서 이걸 열반경에서 상(常)바라밀 락(樂)바라밀 아(我)바라밀 정(淨)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라밀 하면요 무루를 먼저 떠올리시고요. 조금 더 번뇌성이 없는 무루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궁극의, 초월적인 이런 뜻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냐하면 한문으로 번역해도 도피안(到彼岸)이라고 그러죠. 저 언덕으로 건너갔네. 완전히 청정한 세계로 열반의 세계로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현상계 것이 아닌 거예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뭐예요. 보시바라밀은 저 세상 보시. 느낌 오세요. “이건 이 세상 보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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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저 세상 보시야.” 이 느낌입니다. 여기서 저 세상이란 저 열반의 세계를 말하는 거예요. 저 세상 참나. 때가 묻은 그런 오염된 참나가 아니야. 이겁니다. 청정한 참나야 이해되시죠. 자 이 3번까지만 보셔도 분명히 주체가 있죠. 뭔 말이냐면 열반이라는 게 의식이라는 게 지금 초기경에서 입증 가능하냐 이거예요. 열반을 진짜로 텅 빈 세계로 안다거나 열반을 뭐 의식이 아닌 다른 데서 찾고 있냐 이거예요. 아니에요. 원래 의식은 빛나고 무한하고 특징이 없고 어떤 번뇌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번뇌성이 붙었다가 번뇌성이 떨어져 나가기만 하면 그대로 열반인 거예요. 이렇게 쉬운 거예요. 열반이 쉬우니까 아라한들이 1주일 만에 열반에 안주한 거예요. 아라한에 도달한 거예요. 탐진치를 다 없애고 아라한이 되려면 못 돼요. 7일 만에 탐진치 없앴으면 부처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 자 4번. 이것도 우리랑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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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죠. 이게 최상승선도 이거밖에 없어요. 법구경에 이미 최상승선이 나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라. 과거도 몰라. 미래에서 벗어나라. 미래도 몰라. 현재에서도 벗어나라. 현재도 몰라.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미 존재의 피안, 열반의 세계에 가 있어요. 이미 열반의 세계로 건너가 버려요. 이렇게 건너가서 일체에서 자유로워진 마음은, 마음은 있어요 여전히.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 또 중관파가 붙으면 이때 “자유로워졌지만 사실은 생멸하고 있다.” 막 이런 얘기하시겠지만 그냥 그러라고 하세요. 그 정도면, “영원불변” 하는데 옆에서 “영원불멸” 하면 그 정도면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기서 달라이라마와 다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갑시다. “불멸” 그렇게 합시다. “불변” 뭐

1:17:00

언어 그거 가지고 싸울 일 있어요? 불멸로 가자. 거기도 변하는 거 같은데 괜찮은 것 같은데. 같은 걸 느끼는 거잖아요 아무튼. 과거 몰라 미래 몰라 현재 몰라 했더니 존재의 피안으로 건너갔어요. 일체에서 자유로워졌어요. 그 마음이 원래 특징도 없고 무한한 모든 곳에서 빛나는 그 마음이었으니까 그 마음은 이게 상락아정의 마음 아니겠어요.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자 여기서도요 “아 아라한이 되면 이제 윤회는 끝났구나. 부처님도 윤회 이제 마지막 생이라고 하던 윤회 끝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요 여러분 그 참나 자리에 가면요 거긴 생사가 없어요. 원래 이원성이 없는 세계라고요. 이원성이 없는 세계에 도달했다라는 그냥 이야기로 받아들이시면 꼭 내가 다시 안 태어나겠다는 의미로 이걸 이해 안 하셔도 된다고요. 그 자리는 원래 생사가 없다니까요. 영원불변의 자리니까요. 영원불변의 자리에 도달한 소감이 이래야죠.

1:18:03

“난 이제 윤회가 없구나”라고 말하고 계속 윤회해도 괜찮아요. 그 자리는 윤회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뭐라고 하면 돼요? “윤회란 본래 없는 것이다.” 됐죠. 아라한과 보살을 어떻게든

화해시켜 봅니다. 아라한 “윤회 끝이다.” 보살 “윤회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해되시죠. 근데 뒤에 보면요 태국의 아짠 붓다다사는요 그런 식으로 얘기해요. “열반은 늘 우리랑 함께 있고 접속만 하면 되고 열반에 도달해 보면 윤회가 본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묘하죠. 이런 아라한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딱 그 아라한하고도 또 함께 갈 수 있는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요. 뭐만 하나가 되면요? 영원불변의 그 청정광명심 안에서 하나만 되면요 소승 대승 금강승이 다 나로 꿰어집니다. 방금 지금 여기 이 문장 보시면서 이게

1:19:00

얼마나 후대에 많은 불교의 영향을 주는지 아시겠죠. 과거 현재 미래 몰라 해라. 그러면 그 생멸이 없는 그 자리에 도달할 거다. 이게 지금 최상승선이에요. 이게 족첸이나 마하무드라가 다 이거예요 그냥. 과거 몰라 미래 몰라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할 뿐. 이 순간은 현재도 아니에요. 자 과거 현재 미래할 때 몰라 하는 현재랑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 할 때 그 현재랑 다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랑 한 세트인 현재는 언제를 말할까요? 과거와 미래의 중간쯤이요. 그래서 대략 한 몇 분 정도를 말해요.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언어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실제로 현재를 집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진짜 현재에 머물러라 이런 얘기는요 영원에 진입하란 소리예요. 시공을 떠나야 돼요. 이 순간 현존만 하려면.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랑 한 세트인 현재는 과거 미래의 적당히 걸치고 있는 그 몇 분 정도를 우리가 대략, 그래도 몇 초 정도는 가지고 얘기하는 거죠 현재라고 하면. 왜냐면 현재라고 말할 때

1:20:04

벌써 지나고 있잖아요. “현-재-”는 현재인가요? 과거인가요? 말 끝나자마자 이미 과거가 되어 있죠. 그래서 현재라는 건 근데 우리가 현재라고 인정해 주거든요 언어적으로. 그 정도를 현재라고 봐주자고 상(相)을 만들어서 우리가 쓰고 사는 거예요. 저는 이것도 다 거짓이라고 안 보는 거예요. 상(相)무자성도요 유식학에서는 혐오해요 헛것이라고. 끈이 뱀처럼 묶여져 있었다. 그걸 우리가 보고 뱀이다 이런 거. 이게 상(相)무자성. 상(相)을 보고 뱀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노끈이 이렇게 생긴 거였어요. 노끈이 인연 따라 이렇게 뭉치고 있었어요. 이게 실상이다. 뱀은 헛거다. 버려라. 그런데 인간의 세계는 안 그래요. 저 뱀이 중요해요. 뱀으로 보고 쓰고 있는 게 인간 삶에선 중요해요. 인간은요 헛것을 좀 보면서 살아요. 살아져요. 이해되시죠. 이걸 “펜이다” 할 때 다 알아보시잖아요. 개별 구체적인 얘를

1:21:05

보편 추상적인 펜이라고 했는데도 여러분 이거라고 알아보세요. “펜 줘” 그러면 “어떤 펜? 펜 일반?” 뭐 이러면 돌아버리죠. “어떤 장르? 어떤 종류를 말하는 거야?” 돌아버리죠. “그거”라고 하겠죠. “사람 만나고 왔어.” 누군지 애매하잖아요. “사람? 여기서 사람이란?” 뭐 이런 애들 만나면 돌아버리겠죠. 그러니까 그것도 잘 쓰고 살아야 돼요. 자 현상계는 버릴 게 없다. 탐진치도 버리지 마세요. 버려지지도 않아요. 제가 장담하건대 이 경(經) 쓰신 분들 전체가 탐진치에 허덕이다 사셨을 겁니다. 그러다가 깨달으신 거예요. “탐진치는 이렇게 관리하는 거다”라고. 그런데 설정은 해야 돼요. 영원한 이상으로써. 탐진치 없는 세계에 대해서 노래하시는 건 영원한 이상으로써 예요. 영원한 이상도 존재하지 않는 상(相)인데 여러분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죠. 이것도 역할을 한다니까요.

1:22:06

존재하지 않는 건데도 나한테 엄청난 영향을 줘요. 내가 부처가 되리라는 그 생각이요 영원한 이상인데요 그게 나를 다 잡아 준다니까요 지금. 왜 이 작용을 무시하냐고요? 불교를 보다 보면요 언어의 함정에 빠져서 이런 것들을 디테일한 걸 너무 버려요. 저는 그게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새 불교를 연다면 탐진치도 껴안고 다 껴안아 줘야 돼요. 에고도 껴안고. “미안했다 에고. 너무 혐오했다.” 모르면 혐오합니다. 알면 사랑할 수 있어요. 에고도 사랑해주고 저런 헛것들도 다 사랑해줘야 돼요. 그게 우리 우주를 만들어요 헛것들이. 자본주의가 하는 게 뭐예요? 영화 만드는 게 뭔데요? 헛것 만들기죠. 근데 여러분 막 불교는 또 헛것 공격하고. 영화 기대하고. 어벤저스. 재밌는 것 좀 해주지. 그럼 이게 헛거거든요 그게. 그게 여러분 삶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데요.

1:23:05

전체를 껴안으세요. 일체가 참나 작용이에요. 쪼잔하게 이것만 참나 작용 요거는 빼고 이르지 마세요. 기존 불경들을 보다 보면요 다 뭔가 좀 쪼잔한 구석이 있어요. 이론을 전개하다 보면 뭔가 함정에 빠져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본래 없는 것을 범부의 망상으로 갖가지 추측‧억측을 통하여 있다고 집착하게 하는 것) 때문에 그것조차도 특징입니다. 참나의 작용이 특징이라고 좀 봐주고 다 안으면서 마음이 중심에 영원불변의 청정광명심만 딱 박혀 있으면 남이 뭐라고 안 해도 스스로 내면과 대화해가면서 육바라밀의 길, 팔정도의 길, 사무량심의 자비의 길을 계속 닦아 가실 거예요. 여러분은 그냥 보살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실 거예요. 그래서 견성이 중요한 겁니다. 견성을 하면 보리심이 작동해서 여러분을 보살도로 인도하실 겁니다. 그래서 다양한 보살이 존재하지만 결국 한 길로 가고 있다. 우리는 중생구제라는 하나의

1:24:02

사업을 하고 있다. 껴안을 수 있게 되겠죠. 그래서 겔룩파도 껴안고 다 껴안아서 가자고요. 영원불멸이라고 좀 하죠 뭐.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어요. 이 말은 맞지 않아요.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서 좀 대동불교. 그렇죠. 대승불교, 대동불교의 길로 가면 어떨까. 그래서 이 땅에서 홍익보살들이 많이 나오셔서 홍익대동 세계를 여는 데 이 진리들이 활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여러분이 꼭 견성하셔서, 기독교로 치면 성령 받으셔야 돼요. 성령과 상담하시면서 이 길을 가시면 가장 청정(淸淨) 무루(無漏)의 보살도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도 다 껴안고 가자고요. 그것도 다 참나의 불가피한 작용이라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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