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2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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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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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한계
강의일자 2023. 11. 04. 土.
게시일자 2024. 02. 25.
동영상 길이 31:37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jQQ1IEb1i_w


00:06 오늘은 이제 중관파를 이제 마무리 한 번 할 건데요. 그전에 이런 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난번 우리가 그 늘 우리가 시작할 때는 지금 께왓다경으로 돌아가죠. 부처님의 말씀으로. 청정광명심. 청정광명심 안에는 청정광명심 청정광명심 요거를요. 청정심 그래도 되죠, 청정심. 정광명 이래도 되죠. 정광이라고도 번역한 경우 있었죠. 정광, 정광명, 청정심, 또 자성청정심, 이렇게 자성이 청정한 마음, 이렇게도 빛나는 마음이니까요 자성청정심 이렇게도 했어요. 그래서 수많은 용어로 지금 부를 수 있지만 그냥 순수한 의식입니다. 빛나는, 스스로 빛나는

01:00 순수 의식. 이 순수 의식 상태에서 뭐가 없었다 그랬죠. 오온 없었다. 오온 이건 이원성을 다 대표예요. 어떤 이원성도 거기는 없었다. 이 공을 무슨 공이라 그랬죠? 이 용어에 좀 익숙해지시게요. 승의(勝義), 뛰어날 승(勝) 의미 의(義), 궁극의 의미 뛰어난 의미로서의 공(空) 이거랑 이제 좀 상대해서 말씀드린 게 연기공(緣起空)이라는 것은 연기공 연기하니까 공하다. 승의의 공이 있고 연기의 공이 있습니다. 두 개가 되게 달랐죠. 이거예요. 청정광명심 자리 여기 무분별지죠. 무분별지 상태, 분별이 없는 상태, 분별이 없다는 얘기는요. 주객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이원성이 없어요. 이원성이 없는 상태에서 지혜는 작동하기 때문에 직관한다고요.

02:00 직관하는데 뭘 직관해요? 공하다는 걸 직관해요. 이 공성을 직관해요. 어떤 것도 이 자리에는 성립할 수 없다. 알아차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이걸 직관적으로 압니다. 이게 공성 직관이에요. 부처님이 이 얘기했어요. 그 자리에는 오온도 어떤 이원성도 지수화풍, 사대도 설 수 없다. 거기는 생멸 없는 세계고 불변의 세계다. 이게 공성직관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도 한번 정리해 볼겸요. 이 공성 직관과 또 차별화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뭐죠? 자성 직관. 공성 안에 자성이 또 꽉 차 있다. 텅 빈 것 같지만 이 청정광명심 안에는, 청정광명심 안에는, 청정광명심 안에는 이렇게 그리면 멋있습니다. 보석 같죠. 청정광명심 안에는

03:00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6가지 진리가 꽉 차 있습니다. 이게 자성이에요. 자성직관. 텅 비었죠. 텅 비었는데 이 중심 자리에서 알아차려보면요 6개의 자성을 갖고 있어요. 그때 반야경 할 때 했죠. 텅 비었지만 뭐가 없다고요? 거긴 성냄이 없더라. 텅 비었지만 탐욕이 없더라. 텅 비었지만 오염됨이 없더라. 텅 비었지만 성냄이 없더라. 부조화가 없더라. 텅 비었지만 나태가 없더라. 왜냐면 참나 자리가 어떻게 거기 나태가 있어요? 항상 깨어 있는데. 나태. 항상 깨어 있는데 거기는 둘이 없거든요. 나와 남이 없으니까 탐욕이 없죠. 그리고 거기에 어떤 나와 남이 없기 때문에 나만을 위한 그런 오염된 행위가 없어요. 청정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는 조화로운 상태이기 때문에 참나 상태는요

04:00 극도로 청정광명심 상태는 조화로운 상태이기 때문에 부조화가 없어요. 그래서 에고적인 성냄이 없습니다. 왜 이 모든 게 왜 그러냐? 에고가 없잖아요. 이 상태에서는 에고가 없다는 측면에서 무아입니다. 에고가 없어요. 여기 이 진아 자리에는 에고가 없어요. 진아가 무아인 거예요. 에고가 없으니까. 이 아(진아)와 이 아(무아)가 다르죠. 지금 그래서 이 자리에는, 왜 근데 또 아라고 하느냐? 알아차림은 있으니까 의식은 있으니까. 알아차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나태도 없어요. 왜? 에고가 없으니까요. 사실은 에고가 없으니까 나와 남 둘이 없고, 에고가 없으니까 에고의 이기적인 죄악이 없고, 에고의 분노가 없고, 에고의 나태가 없죠. 그 에고의 산란함이 없죠. 에고의 무지가 없다고요, 여기에는. 탐진치에서 치(痴)가 없잖아요. 그럼 반야죠. 치가 없으니까. 그게 자성, 원만한 자성을 갖추고 있는 겁니다. 텅 빈 공성이지만 동시에 원만한 자성을

05:00 갖추고 있어요. 이런 승의의 공, 궁극의 의미의 공을 깨달아야지 우리가 견성을 합니다. 귀류논증중관학파에서조차도 연기공 공부해가지고는 견성을 못 해요. 왜? 이거는 분석의 공이거든요. 달라이라마도 강조하는 게 분석을 떠나서 직관, 주객이 없는 직관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견도할 수 없다 그래요. 견성할 수 없다. 달라이 라마가 계속 주장하는 게 이거예요. 귀류논증중관학파도 똑같은 주장인 거예요, 그 점에서는. 분석은요? 희론(戱論), 언어유희일 뿐이에요. 언어의 유희에서 벗어나서, 주객을 떠나서 이원성을 떠나서 직관에 들어가야, 주객이 없는 직관에 들어가야만 우리는 공성만을 오롯이 봅니다. 공성만을 오롯이 직관할 수 있어요. 이게 무분별지 상태예요.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귀류논증 중관파는 뭐가 문제냐?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06:00 한 20년은 연기공을 분석해야 돼요. 막 이제 구사론(俱舍論)부터 시작해가지고 중관학파를 공부하는데 한 18년 20년 걸린다고요. 그런데 그 연기공은 뭐가 문제냐? 연기공에서 공은요 무상함이에요. 무자성이에요. 자성이 없다. 즉 여기서 자성은요 불변의, 불변의 실체, 존재를 말합니다. 불변의 실체. 연기하니까, 이건 논리적이에요,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죠, 당연히. 연기하니까 연기, 불변이라는 건 연기하지 않는다는 얘기거든요. 윤회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연기하지 않는 홀로 완성된 존재가 불변의 실체인데 불변의 실체를 자성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규정하는 거예요. 용수보살이. 그런데 연기해버리면 현상계에 연기하지 않는 게 없다면 연기하는 세계는 공한 거죠.

07:00 여기서 공은 단순히 없다가 아니에요. 무상하다 예요. 자성이 없다 예요. 자성이 없다. 불변하는 존재가 없다, 현상계에. 요 의미랑 요 의미 지금 되게 다르죠. 승의의 세계에서는 뭐예요? 없다 예요, 진짜. 그냥 오온이 없다 예요. 부처님이 오온에 자성이 없다고 말한 적 없죠, 께왓다경에서. 그냥 오온이 없다, 거기는. 지수화풍도 없다. 어떤 이원성도 소멸한다, 거기서는. 소멸해서 없다 예요. 이쪽은요? 있는데, 지금 펜은 있는데 연기하는 걸 보니까 이것도 연기한다는 거는 펜이 아닌 다른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인연이 화합해서 펜을 잠깐 만든 거기 때문에 펜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우리가 펜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망상이 시작돼서 뭐가 돼요? 영원한 펜이 있는 것 같이 생각돼요. 펜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펜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08:00 이제 이 오온의 화합과 이름까지 연기로 서로 만나가지고 만든 작품인 거예요. 펜이라는 건요 일단 언어와 이 연기하는 것들이 또 서로 인연이 돼서 상호의존적으로 서로 형성시켜주는 겁니다, 만나서. 이 펜이라는 거, 펜이 하나 등장하려면 언어가 있어야 되고 이 지수화풍이 모여야 돼요, 인연 따라. 지수화풍이 모이고 내가 이제 거기에다가 언어를 붙여요. 결국 오온 작용이죠, 한 마디로 말하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서 언어 이름 붙이고 하는 건 상(想)의 작용이니까요. 색(色)을 봤죠. 지수화풍이 모인 색을 봤죠. 수(受) 어떤 느낌을 가졌죠. 여기에 대해서 상(想) 이름을 붙였죠? 행(行) 갖고 싶다 갖기 싫다 의지를 일으키죠. 식(識) 이 모든 것을 식별한다고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식별하고 있어요. 그럼 이 모든 판단, 식별까지 포함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기해가지고 이 펜이 존재하는 거지 불변의, 나는 영원히 스스로 펜이었다 하는 존재가 있어요?

09:00 없죠. 현상계 안에서 불변하는 걸 찾으니까 당연히 없죠. 그래서 현상계 안에서만 연구해가지고 “연기하는 세계에서 연기하는 존재는 있지만 변하지 않는 건 없다”라는 것만 정립했다고요? 이렇게 해서 이게 귀류논증중관학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이거예요. 이걸(연기공) 강조하면 어떡하냐는 거죠. 중요한 거는 여기(연기공)서 빨리 이리(승의공) 가는 거거든요. 이런 분석도 좋아요. 이 말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연기하는 세계니까 영원한 게 없다. 이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뭐예요? 이거 부처님이 다 얘기하신 거예요. 연기공. 제법무아(諸法無我),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게 무아(無我)죠. 연기하니까, 제법은 연기하니까 나라고 할 게 없다. 영원한 게 없다. 부처님이 얘기하신 거를 다시 반복한 거예요, 연기공이라는 이론으로. 그러니까 지금 소승의 연장선에 있지 대승으로 진입을 못 했다고요.

10:00 활주로만 달리고 있지 날아오르질 못했어요. 이래가지고 제법이 무아니, 새로운 펜이 왔습니다, 제법이 무아니까, 만법이 무자성, 공이니까 이게 법공이다. 그랬어요. 이게 법공의 핵심이다. 이렇게 주장했단 말이에요. 귀로 논은 중판은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법공이란 뭐냐? 부처님 때부터 설해진 진리예요, 그냥. 제법 무아를 제법 무자성으로 바꾼 다음에 무자성은 공이니까 제법 공 따라서 법공은 부처님 때부터 주장돼 온 거기 때문에 소승 대승이 사실은 깨달은 게 똑같다. 아라한과 보살이 깨달은바 법공이 똑같다. 다만 아라한들은 출리심(出離心), 육도(六道)의 세계를 떠나려는 마음만 있고 보살은 보리심(菩提心),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요 차이뿐이다. 이래서 대소승 구분 자체도 안 되는 게 지금 귀류논증중관학파입니다. 대소승이 어떻게

11:00 다른지 자체를 출리심과 보리심만으로 구분하니까. 즉 깨달은 지혜 차원에서 구분을 안 하고 단순히 중생을 돕겠다는 마음이 있냐? 나 혼자 탈출하겠다고 하는 거냐? 이것만으로 대소승을 구분한다고요. 다르죠. 제가 구분하는 방식, 경전에 근거한 구분 방식과는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 얘기를 드린 거는 여기까지는 말씀드렸었고. 계속 말씀드렸던 거고. 우리가 실존적으로 볼 때요. 공부를 왜 합니까? 탐진지 때문에 하죠. 요 부분 한번 고민해 보자고요. 실존적으로 이런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 도를 닦는 거는 탐진치를 제압하려는 거 아닌가요? 이게 힘들죠. 어리석음이요 탐욕을 일으키고 이 탐욕은 반드시 좌절돼요. 성취될 때도 있죠. 있지만 내 뜻대로 또 안 되니까. 어리석음에 기반한 탐욕이라

12:00 딱 내 마음에 들게 성취가 안 되거든요. 성취됐다 했더라도 지금 우리는 영원할 것처럼 세상이, 생각하지만 무상하잖아요. 진리를 안다면 이 또한, 내가 얻은 성취 또한 무상(無常)할 거라는 걸 아셔야죠. 근데 그거를 우리가 생각 안 하다 보니까 이루었더라도 또 분노에 빠지는 거예요. 어리석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어리석어져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게 반복되는 겁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이 고리를 끊으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왜 공부하는지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 왜 공부하냐? 탐진치 때문에 힘들어서 하는 겁니다. 육도(六道)를 돈다는 거는 이거거든요. 그래서 탐진치가 육도를 만들죠. 이쪽 삼선도(三善道), 선도 쪽은요? 탐진치가 약한 거예요. 삼악도(三惡道)는 탐진치가 강해요. 이 차이입니다. 지옥은요. 지옥, 이 분노(嗔)가 너무 강해요. 축생은요. 무지(痴)가 너무 강해요. 아귀는요. 탐욕(貪)이 너무 강해요. 강한 쪽입니다.

13:00 또 수라는요? 수라는 질투에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러면 진(嗔). 탐진. 여기(축생)는 치(痴)라고 써야 돼요. 치, 진치. 인간계는 탐욕(貪) 쪽이죠. 욕심을 성취하려고 삽니다. 왜 삽니까? 욕망을 성취하려고. 수라계는요? 천신들이 부러워 죽겠어요(嗔). 배 아파요. 그러면 천국에 사는, 천상에 사는, 불교에서 천상에 사는 존재들은요? 어차피 견성은 못 했어요. 치(痴)예요. 그런데 이왕이면 이쪽(삼선도)이 낫죠. 탐진치가 있더라도 약한 쪽[삼선도: 수라(진)/인간(탐)/천상(치)]이 낫죠. 강한 쪽[삼악도: 지옥(진)/아귀(탐)/축생(치)]은 빡세거든요. 힘들어요. 그래서 이 탐진치의 지배가 심하냐 약하냐로 결국 6도가 펼쳐지기 때문에 탐진치를 벗어나야만 6도에서 탈출할 수 있어요. 수행을 하는 거는 탐진치 진정시키려고. 탐진치 제압하려고. 아니면 아예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열반에 들어가야만

14:00 탐진치 벗어난다.” 이게 부처님의 처방이에요. 탐진치 벗어날 수 있다. “고(苦), 너희들 괴롭지? 괴롭지? 이거 도느라고. 왜 그러는지 알아? 고(苦). 집(執), 탐진치 때문이야. 멸(滅), 이것만 없애버리면 열반이야. 도(道), 그럼 방법이 있어. 팔정도(八正道). 늘 깨어서, 깨어서 알아차리면서 지혜를 얻으면 돼. 그러니까 정혜쌍수, 마음챙김 잘하면서 지혜만 얻으면 돼.” 왜 지혜를 처음에 강조했을까요? 일단 탐진치가요 심하면요 탐진이 심하면 지혜가 오겠어요? 안 그래도 어리석은데. 탐진(貪嗔)을 누르려고 선정을 닦습니다. 치를 제압하려고 뭐해요? 지혜를 닦아요. 그래서 정혜쌍수가 답입니다. 팔정도의 핵은 정혜쌍수예요. 선정과 지혜가 닦이다 보면 밖으로 실천으로까지 나옵니다. “실천이 더 먼저 아닌가요?” 하는 건요 지혜 없는 실천을 말하고요.

15:00 이거는 지혜를 얻어서 하는 실천입니다. 명상 속에서 지혜를 얻어서 행동까지 바뀌면 끝나요. 그럼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삶이 가능해져요. 얼마나 벗어났느냐는 그 사람의 역량이고, 일단 탐진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렇죠. 탐욕이나 분노가 올라올 때 명상하고요. 몰라 괜찮아 하고. 어리석음이 이 무상․고․무아에 대한 어리석음, 열반의 자리에 대한 어리석음, 만법이 본래 공하다는, 청정광명심의 작용이라는 것에 대한 어리석음. 이 아공 법공 그리고 구공. 육바라밀이, 팔정도가 우리의 길이라는 것에 대한 어리석음, 이 구공에 대한 어리석음. 초기 불교도 구공이 있어요. 팔정도가 구공입니다. 이 8가지의 올바른 길만 따르면 우리가 산다는 거거든요. 열반 안에 팔정도가 있다는 얘기예요, 법륜이. 텅 빈 중에, 텅 빈 중에 법륜이 꽉 차 있었던 거예요, 원만하게.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법륜이 있다는 얘기거든요.

16:00 그게 구공이에요. 그래서 팔정도건 육바라밀이건 그 삶의 법칙을 알아가지고 따르면 끝나는 거예요. 자성이라는 건 법칙입니다. 삶의 법칙. 우주가 굴러가는 법칙. 텅 비었다는 것만으로는 법칙이 다 설명이 안 되죠. 텅 빔 속에서, 텅 빔은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를 초월했다는 얘기고, 그 자리에서 법칙을 찾아내야 돼요. 우주를 굴리는 법칙을 알아내서 나와야, 그래서 명상만 들고 그냥 나오시면 안 돼요, 지혜를 얻어서 나와야 여러분 삶이 바뀌어요. 왜 그러냐? 탐진치를 다스려야 되는데, 보세요, 명상만 닦고 나왔어요. 탐진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작동하겠죠. 나오는 순간 다시 작동해요. 결국 명상에 들어있는 시간만 편안해요. 그럼 이제 사회 활동 어떻게 하실 거예요? 움직이면 계속 치(痴)가 작동하는데. 그렇죠. 오히려 명상에 들었던 또 좋은 추억이 떠올라서 더 괴로워요, 사는데.

17:00 이해되시죠? 해외여행 한 번 갔다 왔더니 한국이, 여기서 사는 게 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요. 갔다 와서 위로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갔다 와서 거기 다시 갈 생각만 하고 있을 수도 있죠. “빨리 뜨자, 조금만 노력해서.” 명상만으로는 이거밖에 안 됩니다. 바뀌어야 돼요. 이 탐진치 때문에 내가 힘들다면 지혜를 얻어야 끝나죠. 치(痴)가 주범이거든요. 아공 법공 구공에 대한 무지가 탐진치의 치예요. 이걸 모르니까 헤매는 거예요. 그러면 명상 속에서 지혜를 얻으면 이게 제가 말하는 Z자 이론입니다. 명상을 통해, 선정을 통해서 청정광명심, 법신이라고 할게요. 법신의 현존에 접속하겠죠. 그다음에요. 공성, 아공 법공 구공, 공성에 대해서 직관하겠죠. 이게 공성 직관이 동시에 자성의 직관이 되겠죠. 이게 선정이면요.

18:00 이거는 무분별지라고 그랬죠. 지혜죠. 지혜 중에서 직관지죠. 그 직관지가 뭘 낳아요? 분석지를. 이제 공성의 직관에 대해서, 이 공성에 대해서 분석을 해내겠죠. 이 분석은 이제 언어로 합니다. 개념화까지 해야 돼요. 언어 개념화까지 해야지 이 업이 강해져요. 이 업이 강해져야 이 업이 인과(因果)를 과보(果報)를 낳아서 날 지켜줍니다. 이 과보가 이제 구현돼요, 실천으로. 그럼 이 진리의 실천, 여기 진리의 실천을 제가 바라밀 실천 이렇게도 해놨죠. 실천을 해야 됩니다. 보세요. 이게 계정혜(戒定慧)인데 선정에 들어가지고, 선정에 들어서 이 직관과 분석의 반야바라밀, 반야 지혜를 얻었어요. 그래서 실천에 옮깁니다.

19:00 선정에서 지혜로 실천으로 이게 이제 계(戒)죠. 이 구조로 삶이 변한다고요. 이게 이루어져야 변합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선정이 오죠. 선정이 와야 고정관념, 선입견 다 잡을 수 있어요. 에고를 내려놔 버려야 에고가 계속 나를 왜곡시키던 이 탐진의 그 마음의 결을 누를 수 있죠. 잠깐이라도 누르면 돼요. 그러니까 영원히 누르겠다는 게 아니에요. 명상하는 동안 잠깐만 눌러놓으면 내 욕망이, 감정이 진정되니까 그때 보여요, 진리가. 저기 무분별지에서 뭐가 보여요? 일체가 공하다는 게 보여요. 그렇죠. 열반의 자리는 공하고 불생불멸하고. 현상계는요 무상․고․무아로 날마다 새롭게 변해가고 시공과 인과성 이원성 속에서 굴러간다는 게 구별이 돼요. 두 세계가 구별이 되고. 나아가 이 보이는 모든 세계가 청정광명심의 작용이라는 것까지 알면 그게 진짜 법공이죠.

20:00 연기하니까 공하다 가지고요, 보세요, 이 선정 속에 들어가지고 깨닫는 지혜는 무분별지인데 애초에 달라이라마식의 귀류논증 중관파의 주장은 연기공은 분석으로 아는 거거든요. 결국 이 분석마저 다 떠나서 주객을 초월해서 공성만 직관할 때가 온대요. 여기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어요. 오는데 그때 견성을 한 대요. 연기공이 달라이 라마식 논리로 하더라도 귀류논증중관파 논리대로 하더라도 이 선정에 들 때 연기공이고 나발이고 다 날려야 됩니다. 무분별지 속에서 직접 체험해서 얻은 직관이 있어야 돼요. 요 직관은 오로지 공성만 직관됩니다. 달라이 라마식으로 하더라도 절대 오온이니 연기니 하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왜? 여기는 무분별 상태거든요. 개념이 없다고요. 그랬다 나왔을 때, 나왔을 때 공성을 분석할 때 이때

21:00 이제 언어 개념을 다시 쓰기 때문에 이때 연기공이니 뭐니 떠드는 건데 석가모니께서 무분별지에서 나와서 뭔 얘기를 했어요? 관세음보살이 무분별지에서 나와서 뭔 얘기를 했어요? 연기공 얘기를 안 했어요. 그냥 오온이 공하다 그랬지. 그 자리에는, 승의의 공 상태에서는 오온이 없다. 거기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减). 그렇죠. 거기 청정광명한 자리라고 그랬지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얘기는 안 했단 말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냥 이거는 현상계 설명할 때만 쓰는 말이에요, 제법무아(諸法無我)는. 현상계가 무상하다. 관점이 다르죠. 현상계가 무상하다. 일체개고(一切皆苦) 현상계는 괴롭다. 현상계는 무상하다. 현상계는 무아, 자성이 없다. 다른 말로 현상계는 공이다. 자 이건 다 현상계 얘기할 때만 쓰는 말입니다. 절대계에 대해서 열반은 적정하다. 고요하다. 열반은 공하다. 이때 쓰는 공과 연기공은

22:00 완전히 다르죠. 승의공(勝義空)은요 열반 자리를 설명하는 거예요. 사법인으로 나누자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해당된 얘기고 연기공(緣起空)은요.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에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완전히 다른 얘기라는 거 아시겠죠. 이거 구분을 못하면요 지금 귀류논증중관학파는요 속입니다. 연기공(緣起空)을 강조하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명상에 들면, 연기공에 관련된 공성을 깨달을 거다. 그러고 다시 나오면 연기공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거다. 이런 식으로 승의공을 제약해버려요, 연기공으로. 연기공만 알면 승의공은 우리가 겪어보지 않아도 연기공을 심화해서 이해하는 것일 뿐인 것처럼 설명해요. 완전히 다른 얘기인데. 연기공은 제법무아 얘기고, 승의공은 열반적정, 열반은 고요하다. 다른 차원의 얘기인데. 절대계와 현상계의 이 구분이 있는 이 차원의 이야기를 섞어서 얘기한단 말이에요,

23:00 오묘하게. 이해되시죠? 그래서 왜 이 얘기를 하냐? 진짜 실전적으로 실험해 보시라는 거예요. 탐진치를 박살내야 되는데 연기공 분석해가지고 탐진치가 박살나는지? 이 펜이 너무 탐나요. 이 펜이, 펜이 너무 탐나요. 그런데 보세요. 재밌어요. 이거 중관학파식 논리로도 재미있어요. 이 펜이 너무 탐난 이유는 중관학파식 분석은 펜이라는 이름에 집착해서 이 펜이 영원히 있는 것처럼 나한테 느껴진단 말이에요, 이 펜이 영원한 존재인 것처럼. 그래서 이 펜이 갖고 싶다는 거예요. 뭔가 좀 잘못됐죠, 분석이. 그런데 중관학파식 그런 말 빼고 보자고요. 우리가 지금, 우리 유식학파나 화엄종이 속한 법성종, 성종(性宗) 입장에서, 공종(空宗) 말고 이제 상종(相宗)이나 성종 입장에서 보잔 말이에요. 이 펜이 탐나는 건요 이 펜이, 지금 내

24:00 이 어리석음에서, 어떤 어리석음이냐? 연기한다는 걸 내가 몰라서가 아니라 펜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나 밖에 펜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예요. 유식학이나 상종이나 성종 입장은 이 펜 또한 내 의식의 작용인데 펜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내 의식 밖에 이 펜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법집(法執)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펜을 내가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 밖에. 소유하고 싶어 하고 욕망을 내고 못 가지면 분노한다는 거예요. 이게 더 와 닿으세요? 아니면 이게 펜이라고 할 때 영원한 존재가, 펜이 영원할 것 같아서 탐진이 일어나는 것 같으세요? “이게 영원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상태라면 병원 가보셔야죠. 그렇죠. 어린이집 다니는 애들도 그런 소리는 안 할 거예요. 그렇죠. 정신 차리고 사는 애들은 영원할 거라고 생각 안 할 거예요.

25:01 그러니까 탐내죠. 오히려 이게 무상하니까 탐이 나요. 지금 내가 못 가지면 못 가질 수 있거든요. 지금 가져야 돼요. 오히려 마감 임박이라는 거는 의욕만 더 덧붙입니다. 의욕만 솟구치게 해요. 마감 임박. 내가 안 가지면 누가 가질 거예요. 지금 이걸 안 먹으면 안 가지면 사라질 거예요, 곧. 더 애가 타게 만드는 요소지 오히려, 오히려 탐진에 양념이 되지, 이 치는 그렇죠.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 치가 아니라 그 지혜가 오히려 탐진의 양념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상종이나 성종 입장에서 딱 보자면 이거는 내 의식의 작용인데 치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지혜는 알아요. 이게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무분별, 주객을 초월해서 보면 이건 참나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요. 그런데 치는 나 밖에 펜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든 이걸 내 거로 하려면 소유를 해야 돼요.

26:00 근데 내 것이 못 됐어요. 그러니까 분노가 나요. 이렇게 관찰해가지고요. 명상에 들어서 이 또한 이 펜 자체가 무상한 물건이고, 이것도 맞는 말이니까 무상하고 무자성이라는 것도 분석하지만 그것만으로 분석하는 끝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사실은 이게 법공, 참나의 작용이다라는 것까지 이해를 해줌으로써, 그걸 분석함으로써 뭐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실천이라는 건요 탐진이 제압된다는 얘기죠. 실제로. 실제로 탐욕과 분노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가 그 펜을 다루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루는 모든 경험하는 모든 육근의 세계에 대해서 항상 깨어서 탐진을 일단 한 번 제압한 다음에 지혜로 아공 법공을 검토해서 육바라밀, 구공까지, 육바라밀로 나는 이 펜을 다루기만 하지. 이 펜 또한 내 마음의 작용일 뿐이니까 너무 거기에 연연하지 말자. 펜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27:00 오히려 나 밖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게 문명이고 어리석음이고 사실은 내 의식의 작용이다. 이 펜을, 내 의식에 나타난 펜을 육바라밀로 잘 쓰면 될 뿐이다. 좋은 인과를 남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렇게 지혜를 가지고 대할 때 탐진치가 저절로 진정이 돼가지고 올바른 행위가 나오겠죠. 이게 더 맞는 말 아닐까요. 이게 실전적으로 여러분을 해탈로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뭐가 탐진치를 제압하겠는가를 가지고 보시면 자명합니다. 이론 갖고 자꾸 떠들 게 아니라. 실제로 원래 불교는 이론 철학 아니잖아요. 실천 철학이지 그걸 가지고 진짜로 탐진치가 제압되는걸 봐야 확인되는 거죠. 탐진치 제압에 써보시라고요. 실제로 연기공만으로 제압이 되나? 승의공이라야 제압이 되나? 두 개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참나 자리에서는 일체가 공하다는 걸 알고 거기서 이 시공이 펼쳐졌다는 것도 알고 법공 차원에서,

28:01 그래서 이 펜이 지금 내 의식 안에 들어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펜 또한 내 의식의 작용일 뿐이요. 본래 공한 거니까 내 육바라밀에 맞게 잘 쓰면 될 뿐. 하지만 그 펜에 대한 내 탐진치까지도 사실은 참나의 작용이니까 하고 보듬어주고 끌고 가버릴 수 있는 거예요. 어떠세요? 스케일이 다르죠, 지금. 연기하다는 거 딸랑 하나 해가지고 그걸 계속 곱씹음으로써 탐진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게 말이 되겠냐고요? “이 펜은 사실 영원하지 않아. 이 펜은 사실 영원하지 않아. 이 펜은 자성이 없어. 펜에 자성이 없어. 영원한 펜이라는 건 없어.” 근데 펜은 또 써야 되잖아요. “펜으로써 기능, 잠시 기능할 뿐이지 영원한 자성은 없어. 영원한 자성은 없어.”

29:01 펜으로써 기능할 때 알뜰하게 쓰자는 거죠, 원래 이걸 만든 이유가. 이거 영원할 거라고 만든 거 아니죠. 펜 마르기 전에 잘 쓰세요, 빨리. 이상한 헛소리하지 말고. “영원하지 않으니.. 뭐 이런 이것도 뭐 이렇게 인연 따라 또 흩어질 뿐이니..” 막 이런 얘기하지 말고 지금 고생해서 만들어 놨으니까 석학들이 연구해서 만들었으니까 잘 써라 이거죠, 메시지가 이 펜의. 이 펜 자체랑 소통도 안 일어나요, 그런 식으로 분석해서. 쓰라고 먹으라고 해놨더니 “이 음식 또한 무상하고 왜 너희들은 음식에 집착하느냐? 음식은 영원하지 않도다.” 막 이런 얘기하면 “식기 전에 빨리 드세요. 상해요, 곧. 무상해서 곧 상해요. 지금 빨리 드세요. 깨어서 먹으면 그뿐인 거를 이상한 소리하고 있으실 거예요. 계속.” 연기공이 진짜 진리라면 우리가 이것만 분석할 때마다 탐진치가 뚝뚝 떨어져 나가야 돼요.

30:01 뭔가 이상하죠? 탐진치 제압에 도움이 안 된다면 이론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절대 무상․고․무아를 얘기하시고 이걸로 너희를 해탈에 인도했다고 안 했어요. “열반 자리가 있으니까 너희가 살았다” 그랬죠. “열반이라는 불생불멸의 세계가 있으니까 너희가 살았다” 그랬지 현상계가 무상․고․무아란 것만 안다는 것만으로는 절대 열반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열반 얘기 안 하고 끝냈겠죠. 열반 얘기하실 필요가 없죠. 현상계가 무상․고․무아야 몰랐지. 이제 고통 끝, 너희는. 근데 왜 열반이 있어서 너희가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는 그 우다나(優陀那, Udana)의 글이 왜 나올까요? 열반이라는 세계가 있어서 너희가 산 거다. 그 세계가 없었다면요? 무상․고․무아 속에서만 우리는 살았어야 했겠죠. 무상․고․무아가 없는 세계가 있다. 그렇죠. 이런 거는 승의공의 세계를 다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해탈하려면

31:00 청정광명심 안에서 궁극의 공을 찾아야지 이래야 견성도 되고 해탈도 할 수 있지. 연기공 아무리 분석해도 거기에서는요. 제법무아 일체개고 제행무상 이상의 무슨 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원래 그 차원의 얘기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3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