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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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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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영원불변하는 청정심을 깨달아 증득하라!
강의일자 2023. 04. 08. 土.
게시일자 2023. 07. 01.
동영상 길이 1:05:29
강의 중 인용 도서 시바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4dIbHRAY5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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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눠드린 교재는 지금 반야심경 반야부가 안 들어갔죠. 요 뒤로 이제 석가모니 남방불교 그리고 최상승선 바로 연계해서 이해해 볼 만한 석가모니 가르침이 힌두교적인 가르침과 어떻게 통하며 그러니까 이런 석가모니 부처님 때 얘기를 오늘 주로 할 거예요. 그 이후부터 해서 이제 불교 역사를 쭉 달릴 겁니다. 반야심경도 새 해석본으로 제가 지금 준비해 놨고요. 반야심경, 유식학 다룰 거고 화엄경이나 대승기신론, 수심결 쭉 해서 마지막 우리나라 선사들 가르침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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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의 공적영지. 가르침이 하나로 다 통하니까. 원불교에 있는 공적영지 가르침, 일원상 진리라는 짧은 글, 그 하나에 원불교의 핵이 다 들어있는 글이 있어요. 그걸로 마무리 지을까 해요. 원래 원불교가 불교혁신론을 쓰면서 불법연구회라고 해서 일제강점기 때 등장했거든요. 그 이후 원불교라고 따로 이름을 해서 이제 불교종단에서도 아예 빠졌는데요. 제가 이렇게 강의할 때 원불교를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평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혁신 불교. 거기까지 가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쪽 흐름 속에서 보면 재밌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강의 나가기는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경허까지, 실질적으로는 석가모니에서 원불교 소태산 선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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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르지 않을까. 여기까지 계속 약만 팔고 있는데요. 근데 다 알잖아요. 참나 찾으라는 얘기잖아요. 그렇죠. 달려 볼까요. 이제 다 오셨죠. 오늘 제가 이렇게 진도도 바로 시작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진도 나갈 게 너무 많으니까 다른 거 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시작해 보겠습니다. 진여와 열반. 제목이 그럴싸하지 않나요? 기독교 강의할 때, 기독교 신구약 총정리 할 때 제목을 성령과 구원이라고 잡았거든요. 이번에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지난번 강의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우연히 했다가 하다 보니까 답답한 거예요. 반야경 답답한데 근데 이 반야경을 비판한 게 유식학이거든요. 그럼 유식학을 내가 같이 해야 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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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반야경 가르침과 유식학의 가르침을 공종(空宗)이라 그래요. 공종. 앞으로 우리가 공부해 나갈 때 공종이. 이제 부처님 가르침이 있으면요. 부처님 가르침이 내려오다가 이제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대승시대가 열리는데 공종이 대승시대를 열어요. 반야심경으로 대표되는 일체가 공이라는 반야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 이 공종의 가르침을 비방하려고 나온 게 아니에요. 보완하려고 나온 거예요. 공만 강조하면 어떡하냐? 현상계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건 설명을 해줘야 되지 않냐? 이게 일체가 색즉시공만 얘기하면 색은 왜 있는 거예요? 어떻게 있는 거예요? 요 얘기해 줘야 되잖아요. 상종(相宗)이라는 유식학이 등장합니다. 일체는 아뢰야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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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으로 형성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는 모든 세계는 여러분 아뢰야식의 작용이에요. 그러니까 뭐랑 똑같냐면 요즘 시대에 와서 이해하기가 더 쉬워요. 여러분 각자 지금 VR로 인생 게임이라는 사이버 게임에 접속해 계신 거예요. 지금 실감나죠? 옆에 만져보세요. 실감나죠? 오감 정보가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이 지금 꿈속이시라면 진짜 같죠? 이런 영화 있잖아요. 잘 살고 있는데 와가지고 “당신은 지금 동면중이다 빨리 꿈을 깨라” 따르시겠어요? 꿈을 깨는 방법이 뭐냐면? 영화에서 “뛰어내려라 옥상에서.” 너무 리얼인데 제 말을 믿고 뛰실 수 있어요? 이런 것처럼 지금 우리더러 불보살이 와서 깨어나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들 지금 자고 있다. 깨어나라.” 이걸 리얼하게 받아들이셔야 돼요. “지금 깨어나라.” 그런데 “일체가 지금 내 의식 작용이다.” 이게 상종(相宗)의 주장이에요. 그래서 이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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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는 가르침이 “일체는 결국 여래장, 불성, 진여의 작용이다.” 그래서 공종(空宗)과 상종(相宗)을 종합했다고 하는 평가 받는 게 성종(性宗)이죠. 선불교니 대승기신론, 화엄경 다 성종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 부파불교,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서 부파불교를 이어서 이렇게 대승불교는 이런 식으로 크게 발전해 왔어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대충 흐름이라도. 그래서 저도 이번에 공종을 다루다 보니까 상종이나 성종도 같이 해서 중을 잡아들이게 하고 싶다 해서 시작했던 게 뭐 그럼 부처님 때부터 해야지. 부파불교는 지금 여러분 굳이 공부하시길 권하지 않아요. 칸트, 헤겔을 보시는 거랑 비슷해요. 그래서 어차피 인도나 서양이나 논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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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장점인 분들은 논리를 씁니다. 뭐든지 하나 잘하는 게 있으면 거기서 그걸 뽕을 뽑아요. 그래서 인도나 서양 철학은 제가 잘 안 권해요. 왜냐하면 여러분 있는 그대로 보시면 우리랑 논리 전개하는 방식이 너무 안 맞아요. 그래서 부파불교를 공부할 바에는 지금 남방 불교, 부처님 초기불교를 그 부파불교 가르침까지 계승해서 하고 있는 남방불교의 성자들 아잔 문(Ajahn Mun, 1870~1950) 아잔 차(Ajhan Chah, 1918~1992) 아잔 붓다다사(Ajan Buddhadasa, 1906-1993) 이런 가르침을 넣은 거예요. 그리고 공종 상종 성종의 대표적인 가르침들을 다 집약해 봤어요. 이렇게 보셔도 되고. 이렇게 접근해도 되고 또 불교를 나누는 관점이 이렇게 내려오던 이때 부처님 초기부터 해가지고 요 부파불교 때까지를 소승불교라고 하고요. 여기를 대승이라고 하고요. 여기까지 지금 다 교종이거든요. 그럼 이걸 현교(顯敎)라 그래요. 플러스 밀교(密敎) 가르침이 있습니다. 진언(眞言)도 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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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수련하고 에너지 수련하는 요 밀교수련. 그래서 의성신 에너지 몸을 만드는 거, 무지개 몸을 만드는 걸 중시하는 요 가르침을 이제 금강승(金剛乘)이라고 그래요. 소승 대승 금강승의 체계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소승 대승 금강승. 요렇게 대략 불교를 구분하고 시작하자고요. 진여와 열반. 들어가며. 제가 지금 이 강의를 전체적으로 이 관점에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먼저 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전체 일관된 주제가 뭔지 먼저 설명 드리고 시작해야 될 것 같아서요. 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진여와 열반의 증득이다. 이걸 둘로 보지 마세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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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을 6근으로 그리면 좋습니다. 공‧상‧성종이요. 제가 설명한 대로 따라 들어 보시면요. 부파불교부터 부처님 부파불교 공‧상‧성종이 밀교까지 해서 딱 하나예요. 다 하나의 가르침을 얘기하는 거예요. 좀 이견이 나는 가르침 하나가 있어요. 그게 제가 자꾸 강조하는 거예요. 그 이견이 나는 가르침이 지금 현재 달라이라마의 겔룩파의 귀류논증 중관파란 관점이 정말 특수한 관점이에요. 신기하게 특수한 관점이 가장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불교의 성하(聖下) 소리 들으시는 달라이라마 존자를 통해서 퍼지니까 이게 좀 심각하더라고요. 정말 특수한 가르침입니다. 나머지는 다 똑같은 소리를 해요. 그걸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티벳불교를 제가 미워해서 그런 거 아닙니다. 티벳불교에도 성종 상종 공종 다 있어요. 공종 상종 성종 티벳 불교 안에도 있는데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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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종이 강조되긴 하지만 성종도 그리고 밀교도 다 하나로 회통돼 있는데 유독 하필 정말 특수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 귀류논증 중관파. 이름도 벌써 특수하죠. 우리가 살면서 절대 알 일이 없을 이름인데. 이 특수한 관점을 가지고 불교를 보는 방식이 또 많이 힘을 얻고 있으니까 우리 원효 스님이래 원효 보조 서산 다 똑같은 성종입니다. 제가 이 성종 관점에서 말씀을 안 드릴 수가 없어요. 이 현교, 성종의 관점. 요 밀교에요 여기 선불교도요 티벳에서 그냥 밀교로 쳐줘요. 그냥 밀교의 제일 핵심이 에너지체만 있는 게 아니라 밀교가 에너지체에 상응하는 정신각성법이 뭐냐면 최상승선을 강조해요. 한방에 부처 되는 법이에요. 최상승법은요 한 방에 부처되는 참선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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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도 그걸 마하무드라나 족첸이란 이름으로 최상승선을 강조합니다. 원래 이게 인도 전통이에요. 인도에도 원래 있어요. 인도 요가 중에 최상승선을 강조하는 게 마하리시나 이런 분들이 있죠. 그리고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에 유행하고 있는 선불교. 요게 밀교적인 가르침으로도 통합니다. 그래서 이 현교적 가르침은 결국 보살도예요. 보살도. 육바라밀 잘해 가지고 보살도 닦자는 것. 언제까지? 3무량겁이 걸리는 거대한 길을 가자. 밀교 쪽이나 선불교는 뭘 좋아하죠? 돈오돈수. 단박에 끝내자. 한 큐에 가자. 한 방에 가자가 밀교의 핵심입니다. 한방에 가자. 한방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최상승선 닦아서 바로 참나랑 하나가 돼 버립니다. 그냥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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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하나가 돼 버리면 끝이라는 거예요. 또 하나 에너지 몸 만들어서 바로 참나와 하나가 되자. 부처 몸을 만들어서 부처라면 모름지기 삼신, 법신 보신 화신을 갖춰야 되니까. 최상승선은 법신 쪽이잖아요. 부처님의 참나와 내 참나가 하나가 돼 버리면 우리는 끝 아니냐. 원래 참나는 하나니까. 요게 돈오돈수론. 에너지 몸을 이번 생에 만들어 버리면 즉신성불론. 이번 생에 바로 성불한다. 그러니까 에너지 몸만 만들면 부처라고 보는 거예요. 에너지 몸 만들고 플러스 최상승선. 그래서 티벳 밀교에서는 요거(에너지몸)를 방편도 요걸(최상승선) 해탈도라고 합니다. 결국 해탈은 참나 각성이고요. 방편도, 해탈의 방편이 되는 건 에너지 몸을 만들고 해탈하죠. 요거는 한 생에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밀교 쪽은 어떻게든 한 생에 해결하자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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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교는요? 3무량겁 육바라밀 닦읍시다. 힘 빠지죠. 요 얘기 듣다가 이쪽 오면 눈 번쩍 뜨이죠. “이번 생 이렇게 놓치실 거예요? 부처가 될 수 있는 생인데.” 이게 또 방편이에요. 방편으로 활용하시면 돼요. 이런 느낌으로 차이가 있다. 이 정도 아시면 지금 불교에 대해서는 거의 중요한 건 알고 계신 거고. 자 항상 6근 작용 속에서 보자고요. 이 진여 자리가 열반 자리입니다. 진여와 열반은 둘이 아니다. 진여와 열반이요 우리가 늘 강조하는 공적영지입니다. 힌두교에서 참나라고 하는 공적영지. 그런데 많은 분들이 참나 얘기하면 거품을 물어요. 그래서 진여라고 제목을 달면 침착해지죠. 참나. “또 이 지랄할 줄 알았지.” 하다가 참나와 열반이 이럴려다가 진여와 열반 그러면 침착해지고. 진여? 잘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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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은 사실 하나예요. 진여와 열반이 다 하나예요. 열반이 결국은 어떤 해탈한 상태, 경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결국은 진여와 하나 되는 게 열반을 증득하는 거기 때문에 진여가 그대로 열반입니다. 이게 기독교식 성령과 구원과 좀 달라요. 성령과 완전히 하나 되는 거예요. 성령과 구원은 분명히 다른 말이지만 불교에서 진여와 열반은 하나로 쓰일 수가 있다. 다르게 쓸 수도 있고 하나로 쓸 수도 있다. 이것도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열반이라는 게 결국 뭐냐? 열반이라는 건 번뇌가 사라진 자리. 그럼 거기가 어디겠어요? 진여 자리예요. 진여가 뭐예요? 공적영지.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는 자리. 그래서 우리 6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안이비설신의 이렇게. 됐죠? 여기 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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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썼네요. 자 이 6근 밖에 내가 경험하는 게 없다. 놀랍고 되게 재밌는 이야기 아닌가요? 여러분이 경험하시는 마음의 VR은 이 6근으로 굴러갑니다. 이 의(意)는 이제 생각과 감정, 주로 생각이라고 많이 하는데요. 마음 작용이니까 생각과 감정을 다 포괄한다고 보시면 돼요. 이게 지금 공종에서도 이 안이비설신의가 본래 공이다. 여기를 공적영지. 공적하다는 것은 공성이라는 것도 되죠. 공성 플러스 영지. 뭔가 알고 있다. 텅 비었는데 알고 있다. 이게 이해가 되시면 체험이 있는 거예요. 진여 체험이 있는 분은 이 말을 알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비어 있어요. 어떤 분별도 없어요. 어떤 오염됨, 주객, 시공, 인과성, 이원성이 없어요. 그런데 알아차리고 있어요. 이 알아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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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는 그래서 “무시이래” 그럽니다. 태초도 아니에요. 시작도 없는 무시이래 계속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우리 안에 있어요. 그럼 이게 ‘나’겠어요? 묘하죠. 내가 아니라고 하기도 그런데 내 에고는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는 에고성이 없습니다. 에고성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참나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참나라고 말해도 이건 에고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내 의식의 근원이라서 참나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내 6근이 지금 6근이 굴러가면서. 보세요. 안이비설신의가 유식학으로 상종으로 치면 5식 먹어요. 그리고 의식(意識)은 6식인데 의식의 뿌리는 7식입니다. 그래서 7식의 작용을 6식으로 봐요. 그러니까 의(意) 하나에서 7식과 6식은 다 설명이 된다고요. 뭐냐면 이런 거예요. 안(眼)에는요 안근(眼根)이 있죠.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있고, 안식(眼識), 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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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한다는 작용이 있죠. 안근(眼根) 안식(眼識)이 있어요. 이근(耳根) 이식(耳識)이 있어요. 그러면 의근(意根)은 뭘까요? 의근(意根)과 의식(意識)이 있을 거 아니에요. 6식은 의식이라면 의근은 7식으로 봅니다. 대표적으로 여러 설이 있는데 7식이 에고예요. 에고라는 게 마음의 뿌리고요. 요게 일종의 눈과 귀 같은 감각기관인 거예요. 인식기관. 에고적인 판단의 근거인 거예요. 거기서 작동하는 게 의식(意識)인 거예요. 그러면 여기까지 7식 끝났죠. 그럼 여기 자리가 8식은 여기(진여=열반)서 먹겠죠. 이 자리에서 8식이 우주를 굴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죠? 그런데 이 의근(意根)이 모든 것을 ‘나’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거를 이 우주를 ‘내 거’라고 하는 거고. 이 우주를 굴리는 주체를 ‘나’라고 생각하는 거. 이 6근은 내 거, 이 6근이 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니까 힌두교나 불교나 에고를 타파하고 에고성을 타파한 그 자리에, 그런데 절대 사라지지 않는 그게


17:03

있어요. 열반과 진여. 보세요. 진여는 참 진(眞)자죠. 불교적으로 참 진은 무루(無漏)라는 겁니다. 무루. 요게 샐 루(漏)자 거든요. 새는 게 없다. 루는 번뇌를 말해요. 마음에서 호떡 터져서 잼 새는 거 있죠? 마음이 새는 게 번뇌입니다. 진이란 건 무루예요. 여(如)는요 항상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위(無爲)예요. 무위라는 거는 시간 공간 인과성을 초월했다는 거. 왜? 현상계에서는 똑같다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으니까. 현상계는 무상이 도리인데 여(如)를 어디다 붙여요? 여는 절대계에만 붙일 수 있어요. 그래서 진여라는 말 자체가, 진여는 절대계를 말합니다. 어떤 탐진치의 번뇌가 없는 자리도 절대계 밖에 없어요. 현상계는 탐진치가 안 묻어 있을 수가 없어요. 현상계란 자체가 뭔데요? 의근으로 굴러간다니까요.


18:02

현상계 자체는 이미 탐진치에서 시작된 거예요. 이 의근, 7식의 작용이 뭔데요? 아집이요. 내가 있다는 고집을 부려요. 그리고 법집. 일체가 내 거라고 고집부려요. 이건 내 거. 이건 나. 이게 아집 법집 다 걸려요. 이 법집을 제가 무지라고 부르잖아요. 무지랑 아집이 다 걸려요. 그래서 여러분의 2종 업장입니다. 지적인 장애 무지와 법집. 심리적 장애 아집. 나를 너무 아끼는 이 마음. 그래서 내 우주가 붕괴된다는 건요 타인의 우주가 붕괴된다는 거에서 오는 그 충격과 너무 달라요. 타인이 사라져도, 여러분 타인이 사라지는 게 내 우주에 끼치는 영향 때문에 우리가 슬픕니다. 그렇지 않아요? “날 두고 가지 마” 이런 거죠. 그분이 뭐 어떻게 아프게 가고 이런 거보다 “너가 가면 어떡해?” 이런 거죠. “난 어떻게 살으라고?”


19:03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해도 뭐예요? 내 사랑이 기반이에요. 내 사랑으로 우리는 모든 걸 판단하는 거예요. 그 모든 작용을 뭐가 해요? 7식이요. 그렇죠. 그래서 “인간의 이타적인 행동이 진짜 가능한가?” 이런 게 학계에서 의문이 되고 했잖아요. “아니 그게 어떻게 의문이냐? 불타는 집에 자기가 죽으면서도 자식을 구하는 그 마음이 이타(利他) 아니냐.” “아니다. 그것도 들어가 보면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는 자기 사랑이다.” 그러니까 자기 새끼에 대한, 자기 사랑 그 감정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다. 감정적으로 설명하더라고요. 진화론적으로는 유전자를 남기려고. 그것도 사실 이기적인 거다. 거기서 이기적인 거다 하는 놈도 이상한 놈이죠. 이타 이기가 섞여있다고요.


20:00

거기서 하나로 결론 내리려는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말리시면 안 돼요. 금방 말려요. 요게 이제 불교에서 유식학에도 이게 나와요. 변계소집성이라고. 우리는 언어를 딱 붙이면요 그때부터 없는 걸 만들어내서 즐겨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는 게 있어요. 변계라는 게. 유식학까지 갈 건 아닌데. 하여튼 나중에 유식학 때 해드릴게요. 변계(遍計). 두루 계산한다는 거예요. 다 계산한다는 거는 이름을 붙인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소집(所執). 집착의 대상으로 삼아요. 그래서 변계소집성은 사실은, 그 변계소집성이 작동하는 세계는 이제 어둠의 무명의 세계예요. 아집과 법집의 세계.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아집과 법칙의 세계입니다. 왜냐? “너 지금 뭐 들었어?” “펜.” 그럼 이 펜이라는 말이 이걸 다 설명할 수 있나요? 펜은요 뭔가 보편적인 이름이거든요. 지금 저는 개별 구체적인 걸 들었는데 이름은 보편 추상적이에요. 펜. 펜이라 함은 사전에 다 있어요.


21:02

내가 걔라는 증거를 지금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체험해서 찾아야죠. 그러니까 언어를 쓴다는 건 이미 지금 뭐가 안 맞게 돼 있어요. 그 언어를 쓰면서 우리는 얘한테 그러니까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 상을 만들어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죠. 언어 빼면 여러분 뭐 있어요? 슬프다. 기쁘다. 다 언어입니다. 언어와 내가 거기에 심상, 염체로 만들어요. 상을 만들어요. 내 마음속에서 다 이미지를 만든다고요.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고. 이게 변계소집성의 세계고 무지와 아집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잠을 깨라는 거예요. “지금 잠 깨고 실상을 봐라.” 실상을 안 보니까 나 밖에 지금 사물이 다 있는 거 같은데 실상을 딱 보면, 진여 열반 자리에서 딱 정신 차리고 보면 굴러가는 건 6근만 굴러가고 있고 이 6근도 나다 남이다 안 하고 구르는데


22:00

내가 “내 거다”라고 이름을 붙여서 내가 내 거로 삼고 있다 하는 것까지 쫙 꿰뚫어지는 요 가르침들이에요. 공종 상종 성종은 요 가르침들이에요. 얼마나 이거를 이해하느냐? 이걸 제가 늘 강조하는 아공 법공 구공 차원에서 이해하면 끝이에요. 진리가 많지도 않아요. 아공, “내 자아 내 에고가 사실은 실체가 없었구나.” 법공, “에고를 포함해 모든 존재들이 사실은 진여 열반의 작용이었구나.” 그렇죠. 구공, “그런데 그 진여 열반 안에 여기 안에 어떤 정보가 들어있냐? 육바라밀로 우주를 경영할 때 선이요, 이걸 어기면 악이 돼서 안 좋은 과보가 일어난다는 요 안에 근본원리가 숨어 있었구나. 공 안에 갖추어진 진리가 있었구나.” 끝이에요. 이게 다예요. 이게 불교고 이거는 불교를 초월해서 그냥 진리예요. 그래서 “우리 불교 어떻게 잘 되게” 이런 발상 하면 이미 변계소집성에 걸린 거예요. “우리 종교 신자 늘릴 방법인가요?”라고 묻는


23:01

거예요. “진짜 견성해서 부처 되나요?”를 묻는 게 아니라고요. 우리 종교 밖에서 부처되면 우리 종파 밖에서 부처 되면 우리한테 도움이 안 돼요. 자 이게 뭐라고 그래요? 변계소집성. 무지와 아집의 극치예요. 우리 종파 우리 종단 이 말을 하는 순간 이 사람들은 진리를 말할 자격이 없어집니다. 우리 종교. 이해되시죠? 진짜 깨어난 사람은 이런 말 안 한다고요. 그래서 진여와 열반의 증득이 사실은 모든 종교의 핵심이고요. 불교적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진여와 열반의 증득입니다. 탐진치가 사라진 자리. 자 무지와 아집을 다르게 말하면 뭐죠? 아집이요 탐욕이거든요. 탐욕이 방해받았을 때 분노를 해요. 법집은 치(痴) 어리석음이에요. 그래서 무지와 아집을 3개로 말하면 탐진치(貪嗔癡)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은요 탐진치가 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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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예요. 탐진치가 없으니까 참되다는 거예요. 요게 없으니까 참된 거예요. 그리고 이게 없기 때문에 참되면서 동시에 영원불멸하다는 거예요. 여(如)는요 상주불변 이런 말 쓰는데 영원불변하다는 겁니다. 영원히 머무르면서 변치 않는다. 그런데 만약에 저기 겔룩파 같으면 진여를 똑같이 쓰잖아요. 근데 겔룩파는,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참되면서 영원불변한 존재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럼 이걸 어떻게 번역하면 돼요. 원래 이 진여란 말은 “진실함 그대로”거든요. 진실함 그대로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거예요. 그냥 일체는 무자성. 아무 자성이 없고 진짜로 영원불멸하는 건 없다는 거예요. 그 중관파 는 “진짜 없다”는 거예요. 진짜 없으니까 진여란 건 진짜 없다는 그 실상이 진여라는 거예요. 진실로 없다. 진짜로 그렇다. 진여. 진짜로 그래. 이 정도로 풉니다. 이렇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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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문제는 요즘 불교 공부를 달라이라마 책으로 많이 하신단 말이에요. 이런 얘기까지 왜 해야 되지? 하는… 이건 거의 기독교에서 “여러분 성령이 존재합니다. 제발 성령 좀 믿어주세요.” 불교의 핵은 진여 열반인데 “진여 열반이 진짜 있어요.” 이 얘기를 제가 100페이지에 걸쳐서 해야 되는 이유가 달라이라마 그분 때문이 아니라 안 그래도 참나가 있는지 헷갈리고 있는데 그분이 확신을 주신 거죠. “진짜 없네. 달라이라마도 없다잖아.” 이렇게 돼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나서야 되는 거죠. 진여와 열반. 그래서 이거를 참나라고 부르는데 열 받으시는 분들은 전혀 뭐 힌두교도 모르고 모르시는 거예요. 힌두교도 모르고 선불교도 모르고. 여긴 근본적으로 에고성이 없어요. 불교 이론상 에고성은 7식까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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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식. 8식부터 벌써 우리 업보를 관리하는 8식부터 에고성이 없어요. 근데 이 8식도요 오염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저지른 수많은 업보의 필름들로 오염되어 있어요. 그걸 관리해야 되니까. 업장들을 관리해야 되거든요. 업의 종자들을 관리하는 자리라 오염되어 있다 그래요. 그래서 이 진여 여기는 굳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 드리면 9식이라고 불리는 청정식이에요. 여기를 참나라고 부르는 게 죄가 될 수가 없어요. 7식의 무지와 아집이 작동한 게 아니면 나라고 부르는 게 죄가 될 수가 없다고요. 이해되세요? 기본도 안 돼 있는 입장에서 지금 참 나 하면 “나. 나라고 그랬어?” 이렇게 등신 인증. ‘나’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제일 아집이 셉니다. ‘나’라는 건 없다면서 정말 고집부리고 다녀요. “나는 없다. 나는 없어. 나가 있다는 이거 잘못된 겁니다.” 제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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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부리는 분들이 내가 없다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없는 좀 찌그러져 있으면 좋겠는데요. 자기도 없는 분이 왜 와가지고 이렇게 나를 드러내는지? 이해되세요? 그 사람이 하는 말 다 자기 고정관념이거든요. 어디서 들은 말. 실상이 지금 여러분 이거 보시면 그냥 이해돼야 돼요. 7식이 작용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 말 하는 분들이 제일 문자에 걸리고. 그쵸. ‘나’라는 말에 걸려 가지고, 변계소집성에 걸려서 ‘나’ 하면 다 경기 일으키는 거예요. 이게 무지와 아집의 극치인 거예요. 실상은 뭐예요? 이미 내가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6근을 굴리는 주체란 말이에요. 여기서 이 자리에 영원한 알아차림이 있어요. 영원한 청정 광명의 알아차림이 있어요. 마음이라는 건 알아차림이란 뜻입니다. 보통 청정광명심 그러는데 요게, 알아차림이 심(心)자를 먹는 거예요. 영원불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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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의 알아차림. 왜 영원불변이라고 하냐면요 에고성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이 붙으면 에고성이 없는 거예요. 에고성은 영원불변할 수가 없거든요. 그렇죠.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중요한 거는요 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진여와 열반의 증득입니다. 이거 못 얻으면 열반도 없고 견성도 없는 거예요. 그냥 해탈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참나라는 명칭에 걸려 가지고요 어디까지 지금 우리나라 불교가 어느 지경인지 아세요? 달라이라마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분은 확신을 줬다는 거고. 이미 그 전부터 뭐예요? 참나 말만 하면 힌두교라고 경기를 일으켜서 지금 조계종 종정스님들도 다 참나라고 얘기하고 성철스님도 참나 찾으라고 하고 무조건 참나만 찾아야 끝난다고 원효스님도 다 우리 안에 상주불변의 법신이 있다고 일관되게 한국 불교가 외쳐온 게 참나가 없다가 되면 다 거짓이 되거든요. 이해되시죠? 알 수 없는 그 문자에 집착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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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모든 고승들의, 경허스님 포함해서 생을 걸고 참나만 찾으라고 외쳤던 분들의 가르침을 싹 날려버리는 심각한 지경에 지금 와 있다는 거예요. 참나 아니면 뭐래요? 무아요. 무아. 그런데 이게 무아라니까요. 에고성이 없잖아요. 그래서 무아가 진아입니다. 무아 아니고는 진아라고 붙이면 안 돼요. 그러면 그건 에고성이 붙어 버려요. 이해되시죠? 진짜 내가 없지 않으면 진아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에고가 붙어 가지고 오염시켜 버려요. 부처님이 왜 애초에 이런 진아에 대한 얘기를 안 하셨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변 안 하고 다 쳐버렸어요. 그 당시 하도 허황된 아트만 주장들이 많았어요. 아트만은요 엄지손가락만 하다. 아트만은 원자 같은 존재다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게 아트만을 상상해요. 진짜 변계소집성의 극치죠. 문자로 이름 붙여 가지고. 그게 나라는 거를 영원히 남기려고 사람들이 아트만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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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를 다 붙인 거예요. 내가 영원했으면 좋겠는 그 소망을 아트만에다가 붙인 거예요. 여러분도 나의 어느 부분이 영원하다면 좀 든든하지 않으세요? 근데 안타깝게도 이게 내가 아닌 나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진짜 깨달은 자가 아니면 여기다가 계속 나를 붙인다고요. 지금의 내가 영원하길 바라는 거니까. 이걸 날려버리는 거예요. 이걸 못 놓으면 열반에 못 들어가니까 부처님이… 탐진치를 놔야 들어가는데 나에 대한 이 탐진치가 그득한데 어떻게 열반에 들어가요? 그래서 무아를 주장하고 진아에 대한 아트만 주장을 절대 안 하시고 석가모니는 형이상학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괴로우냐? 그럼 괴로움은 탐진치 때문이다. 고집(苦集). 탐진치 때문에 괴롭다. 무지랑 아집 때문에 괴롭다. 고집멸(苦集滅). 그것만 네가 명상하면서 알아차려 가지고 내려놓으면 열반에 들어간다. 멸(滅). 그래서 도(道). 도는 명상하고 알아차리고 올바르게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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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혜 3학만 닦으면 탐진치 잡는다. 끝. 이게 불교 다예요. 부처님은 형이상학을 안 만들었어요. 그런데 부파불교 가면 벌써 힌두교에 대항하면서 나름의 형이상학 체계를 막 갖춥니다. 너무 번잡해져요 그래서 제가 읽기를 권해 드리지 않는 거예요. 너무 번잡해지기 시작해요. 마음의 형이상학을 만들기 시작해요. 인도인들이 가만히 있을 분들이 아니죠. 아트만도 다 변질시켰던 분들이 불교도 막 조작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신상이네” 하고 와서 막 조작을 한 거예요. 그게 부처님은 절대 원하셨던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괴롭냐? 안 괴로워져서 탐진치를 극복했다는 실제를 내놔 봐라.” 이거죠 “거기에 도움 안 되는 이론은 그건 너가 공부하지 마라.” 그래서 형이상학을 무기(無記)라 그러죠. 대답을 안 하셨다.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답을 안 하세요. 신경 쓰지 말라고. 너 고통, 탐진치 해결에 도움이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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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내가 밤새 얘기해봤자 결론이 안 날 주제들이다. 그냥 열반을 체험하라고 유도한 거죠. 네가 체험하면 네가 알 거다. 그러니까 체험을 유도한 거죠. 이론적으로 그 따지는 거 하지 마라. 그래서 진여와 열반이 강조된 건데. 중요한 건 참나란 명칭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존재하는 에고성을 초월한 진여 열반인 영원불변하는 청정심 청정광명심을 깨달아 증득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 내면에 여러분이 아닌 여러분, 나 아닌 나, 청정광명한 알아차리는 의식, 의식이니까 분명히 나의 근원인데 에고성을 초월한 의식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의식, 그 에고성을 초월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신처럼 업보를 공정하게 관리해 줍니다. 여러분이 업보를 관리하면 되겠어요? 그러면 엉망이죠. 오늘 이건 안 한 걸로 하고. 오늘 라면 안 먹은 걸로. 치킨도 안 먹은 걸로. 요거 좀 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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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해서 업을 정리해라 그러면 옆 사람하고 타협하고 있겠죠. 내가 네 거 이거 빼 줄게 너도 내 거 빼 줘. 그래서 여러분 업보 관리는 모든 종교에서 신의 영역입니다. 그 신에 해당되는 게 8식이에요. 불교는 8식부터 에고성이 없어요. 7식까지 에고성이에요. 8식 너머의 세계에 있는 이 진여의 세계를 참나라고 부른다는 것은 불교인들한테 “아니 어떻게 7식에서나 나오는 이 아집 작용이 이 8식 9식을 오염시켜.” 이렇게 이해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참나를 반대하는 이론도 계속 있는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똑같이 이런 조건이라면 진짜 무아를 안다면 참나라고 불러도 돼” 하는 대승열반경에서는 이 주장이 나와요. 우리가 이것도 다 읽을 거예요. “참나라고 불러도 돼” 하는 의견이 나오는 거예요. 티벳의 그 닝마파의 시조인 파드마 삼바바가 “이 청정광명한 마음을 외도들은 아트만이라고 불러”라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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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히 인정하는 것도 그거예요. 알고 얘기하면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뭔지 안다면 실체를 안다면. 모르고 얘기한다면 나라고 하는 순간 7식이 작동해서 내 거라고 또 우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지니까 그걸 반대하는 겁니다. 자 이것은 소승 대승 금강승이 모두 동일하다. 공종 상종 성종, 소승 대승 금강승이 다 동일하다. 다만 이 자리에서 인가하는 공성의 진리의 차이로 인해 3사도(士道)의 구별이 있다. 자 이 3사도란 말을 제가 처음 써봤는데요. 여러분 저 진여 열반 자리, 선정으로 접속합니다. 그러면요 자동으로 공성을 직관하게 돼 있어요. 이 직관은 이원성이 없습니다. 나다 남이다 주객이 없어요. 그냥 진리랑 내가 하나가 돼서 이해하는 거예요. 진리랑 한 덩어리가 돼서 이해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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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입니다. 참나를 인정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청정광명심을 인정하지 않는 겔룩파 중관파도 이건 인정해요. 즉 직관하는 순간만큼은 이원성이 없는 청정광명심이라는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이해되시죠? 그리고 이 청정광명심이 물론 불변은 안 되니까 변화한다고 봅니다. 변화하면서 인식하지만 아무튼 진리를 딱 그 주객 없는 상태에서 인식하는 건 맞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무분별지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인정해요. 원래 모든 종파에서 무분별지가 열반이고 진여예요. 그런데 겔룩파에서만 용수보살 가르침을 잘 계승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원성이 없는 무분별지는 인정하되 이것도 변화하고 있다. 무상한 거다”라는 주장을 꼭 같이 붙입니다. 이게 혹시 참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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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에요. 보이면 어때서 그렇죠? 중요한 거는 참나도 아니다가 아니라. 그 참나를 누가 비방하는 분 계시면요 “알겠어 참나라는 말을 이제 쓰지 말자.” 뭐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참나라는 말 안 쓸게. 근데 영원불변한 청정광명심이 있어? 없어?” 그러면 또 당황스럽겠죠. 그건 모든 경전에 있다고 나온 그 자리가 진여라고 하는 그 이름에 딱 맞는 그 의식이 우리 안에 그럼 있어? 없어? 만약에 진여 열반이 없으면 우리는 증득할 수가 없어요. 지금 심각한 문제예요. 해탈할 수 있냐 없냐가 걸려있는 문제예요. 진여 열반이 없다면 우리는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그 중관파식으로 일체가 무자성, 진짜 없다는 게 진리고 그 진리를 체득하는 게 해탈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렇죠? 그럼 그 주장과 지금 진짜 영원불변한 의식이 있다는 주장. 그런데 문제는 심지어 그런 중관파마저도 청정광명한 마음이 있어야 돼요. 왜? 공성을 직관해 줘야 되거든요. 왜냐? 이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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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거는 여러분 인생의 고(苦)의 세계를 넘어가는 데 도움이 안 됩니다. 이론으로 알아서 열반에 들 거 같으면 석가모니가 왜 고행을 했고 왜 “내가 얻은 진리가 정말 희유한 진리다” 이런 말을 했을까요? 책보고 알 정도라면. 아시겠죠? 그러니까 직관 무분별지가 없이는 불교 이론상 공‧상‧성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분별지가 반야지라는 거거든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들었을 때가 이거예요. 그러니까 선정은 전제고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선정 속에서 진여 열반의 공적영지 상태에서 일체가 공하다는 직관을 얻은 걸 반야바라밀을 행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는 절대로 5온이 공하다는 말을 못 하고요. 그 말을 한들 일체 고액을 넘어갈 힘이, 실천력이 안 나옵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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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에 의거해서 우리는 공성을 분석할 수 있어요. 분석은 반드시 분별지는 무분별지 다음에 옵니다. 불교에서 무분별지에 전제하지 않는 분별지는 의미가 없어요. 그거는 그냥 알음알이예요. 그래서 분별지의 공식 이름이 무분별후득지에요. 무분별 후에 얻어지는 지혜라고 해서 무분별후득지를 분별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냥 분별하고 계시면 그거는 반야가 아니에요. 공성에 대한 이원성을 초월한 주객이 없는 자리에서, 내가 공이고 공이 나인 자리에서 “일체가 공하구나”라는 걸 체득하시려면 청정광명심이라는 이 공성, 공‧성‧상 모든 종파에서 진여열반이 원래 공성인데, 중관파만은 공성은 진여 열반이 아니라 그냥 진리에요. 이 진여 열반의 의식으로, 이 청정광명심으로 알아채야 할 진리일 뿐이에요. 그런데 이 종파마저도 알아채는 그 순간에는 이원성을 초월해야 된다고요. 이원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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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에고성이 없는 지혜가 있어야 돼요. 이해되시죠? 다만 그게 무상하다고 말을 붙여서 영원불변한 그 참나처럼 되는 걸 막고 있는 것뿐이에요. 본인들도 다 체험해요. 린포체들 중에 중관파 린포체들은요 들어보면 그분들 린포체의 이야기 들으면 되게 헷갈려요. 열린 공간, 공적영지 자리를요 생각과 생각 틈 사이에 있는 열린 공간이래요. 그 자리를 알아요. 몰라 했을 때 나타난 그 상태예요. 몰라를 하래요. 몰라를 하면 그 자리 들어간대요. 그 자리 들어가서 거기서 일체가 다 공성이요 자성이 없다는 걸 알아야 된대요. 그러면 그럼 그게 영원한 우리 영원불변의 마음인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래요. 계속 이런 식 반복입니다. 그러면 공부하시는 분들 지쳐요.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있으면 있다고 하던가. 그걸 알아채는 의식은 있는데 공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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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랑 결코 같진 않대요. 이걸 끝까지 고수합니다. 왜? 근거가 웃겨요. 왜? 이걸 같다고 하면 힌두교랑 똑같아지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근데 왜 그 수많은 공‧성‧상종은 이 두 개가 다 같다고 얘기하죠? 아트만이랑 같다는 얘기가 아니라 진여가 그대로 공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반야심경부터 그래요. 최초의 대승경전이라는 8천송 반야경부터 그래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8천송 반야경 강의를 해드린 거예요. 제가 예전부터 반야심경 강의하면서 공성은 그대로 이거는 진여 열반이라고 주장했는데 8천송반야경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중관파는 자꾸 그거를 무자성(無自性), “영원불변한 건 없으니까 공이다”라는 없다라는 부정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 빼고는… 근데 지금 그 문파마저도 무분별지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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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심은 인정해요. “다만 영원불변하지 않다”라는 사족을 계속 붙이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뭔 얘기냐면 영원불변한 마음은요 중관파마저도 똑같이 체득해야 된다고요 선정을 통해서. 아시겠죠? 중관파식으로 여기다 쓰자면 선정을 통해서 청정광명심은 체득해야 돼요. 그리고 공성 직관이 일어나는 거예요. 단 공성이 그대로 청정광명심은 아니라는 얘기만 한다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 청정광명심 자체도 인정 안 한다면 심각한 거라는 거죠. 다만 그게 영원불변이냐? 중관파식은 “영원하긴 해. 불멸이야. 근데 불변은 아니야.” 끝까지 하나는 내가 뒷다리를 잡겠어. 불멸하고 다르잖아요. “불변은 아니야. 변하면서 영원해.” 이 논리를 씁니다. 이게 원래 유식학이 아뢰야식에다 쓰는 거거든요. 8식 아뢰야식은 업보를 관리해야 되잖아요. 여러분 업보를 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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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하고 있으니까 변하고 있죠? 근데 에고성을 초월해 있죠? 영원불멸의 마음이거든요. 영원불멸인데 변화하고 있어요. 이런 아뢰야식의 설명을 갖다 활용해 가지고 청정광명심을 설명하는 데 씁니다. 이거 나중에 제가 하나하나 다 해 드릴게요. 그래서 보세요. 이 공성의 분석, 그래서 이제 바라밀을 실천하는 거예요. 이게 다 동일해요. 바라밀을 실천합니다. 자 여기서 뭐가 달라지느냐? 바라밀을 실천. 아 여기 바라밀을 실천하면 이미 대승이네요. 이렇게 해서 이 공성, 깨달은 공성의 진리를 실천한다고 하죠. 자 이 직관하는 진리의 내용이요 아공의 진리면. 티벳 불교에서 3사도 나누는 걸 좋아해요.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 티벳불교 스타일의 하사도는요 하사가 그냥 복을 많이 지어서 천상계 태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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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에요. 즉 3악도(지옥, 아귀, 축생) 피하는 사람을 하사. 3악도 안 가려고 공부하는 사람. 중사는 아라한 되려고 공부하는 사람. 중사가 소승이죠. 상사가 대승보살이에요. 근데 저는 그렇게 안 보고요. 하사는 아공의 진리를 깨달은 아라한. 중사는요? 법공의 진리까지 깨달은 견성 도인. 이 공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깨달은, 구공 진리를 깨달은 이 양반들이 대승보살입니다. 제가 이렇게 나눠 버리면요 티벳 불교는 문제에 봉착해요. 티벳 불교는요 구공 얘기를 안 하거든요. 법공을 강조하거든요. 법공만 깨달으면 즉신 성불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거든요. 법공만 깨달으면 부처된다는 게 선불교가 이래요. 지금 선불교 닝마파 족첸 까규파 마하무드라는 에너지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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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했건 안 했건 깨달은 진리가 딱 법공입니다. 구공까지 안 가요. 왜? 구공까지 가려면요 지금 중관파 논리랑 충돌 납니다. 일체가 자성이 없다는 게 공인데 그 공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다 그러면 뭔가 웃기잖아요. 공이 부정어일 뿐인데 공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대요. 뭐 이상하죠? 그런데 버젓이 티벳 불교에 달라이라마께서도 강의하시는 까말라실라의 수습차제에 공을 깨닫더라도 구일체묘상공(具一切妙相空), 일체의 묘한 신묘한 형상을 갖추고 있는 공을 깨달으라고 돼 있어요. 이상하잖아요? 부정어로서의 공을 쓰는데 신묘한 형상을 갖춘 공이 가능한가요? 오온이 공하다는 건 오온이 진짜 없다 예요. 오온이. 자성이 없다. 오온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오온이 있으니까. “오온에 영원불멸의 자성이 없다. 그래서 공하다” 이거거든요. 오온은 계속 변하니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중관파는 오온은 변하니까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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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로만 공을 쓰자는 건데, 공 안에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는 말은 이상하죠. 이걸 어떻게 해명해도 방편으로 납득시키는 거지 선명한 이 구공의 진리가 안 나옵니다. 따라서 지금 제가 이렇게 구분을 해 버리면 대승불교 안에서도 둘로 확 걸려요. 법공까지 얘기하는 양반들하고 구공 얘기하는 양반들하고. 화엄경은 대놓고 구공입니다. 화엄경은. 초발심공덕품 제가 강의해 드린 거 다시 보시면 대놓고 계속 구공 얘기예요. 그래서 이 구공의 진리가 보리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티벳은 보리심은 강조하면서 법공을 강조하는 거예요. 보리심이 뭔지 지금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거예요. 보리심이라는 거는 공 안에 육바라밀의 영적 DNA가 선명히 박혀 있는 거예요. 이거는 반야경부터 강조되는 거예요. 우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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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육바라밀의 DNA가 있어서 반야바라밀만 얻으면 나머지 6바라밀이, 나머지 다섯 바라밀까지 해가지고 육바라밀이 총체적으로 출동하게 된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는 무조건 육바라밀 종교입니다. 육바라밀은 구공의 진리구요 자 이렇게 해서 제가 하사 중사 상사를 나눠보겠다는 겁니다. 그럼 아라한 불교와 법공불교, 구공불교가 육바라밀 불교가 나뉘죠. 참나를 부정하는 의견들이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요 단순히 참나라는 명칭을 부정해서가 아니고요. 참나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는 건 에고성을 피하자 하는 명분도 있기 때문에 저도 어느 부분 인정해요. 그건 인정. 그런데 문제는 영원불변하는 청정심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거예요. 아까 중관파 얘기했지만 영원불멸이라고 하면서 피해가요 그래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인식 능력으로만 얘기하지 그 자체가 진리란 얘기를 안 해요. 그런데 모든 지금 닝마파 깍규파 포함해서 모든 공‧성‧상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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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그 자리가 진여 열반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게 차이에요. 어떻게 의식을 진리라고 하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의식은 무상한 건데 아무리 청정광명심도 의식인 이상은 무상한 건데 어떻게 의식을 진리라고 하지?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중관파. 이게 그럴 수 있지 않나 하면 여러분은 선불교. 우리나라 전통이 좋은 게. 제가 옛날 성철스님 비판을 많이 했는데 티벳 불교를 만나니까 성철 스님이 우리 편이더라고요. 어느 날 한 편이 됐어요. “우리 참나를 부정하는 거야” 하고 막. 얼마 전 진재 종정스님 “달라이라마 견성 못 했다.” 성철스님 “용수는 문자 놀음에 빠져 있다.” 왜? 참나 얘기 안 하면 이게 다 인정 못 받거든요. 이게 우리나라 불교예요. 이거를 “아! 부끄럽다” 하시면 안 돼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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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물 좀 먹어서 “한국불교 부끄럽다. 아직도 참나 얘기를 하다니. 힌두교야 뭐야.” 이렇게 지금 풍토가 이렇다니까요 현재. 요즘 신상들이 다 남방불교건, 남방불교는 아예 열반 얘기만 하죠. 참나 얘기 안 하죠. 또 이런 중관파 불교. 이게 학계에서 학자들이 연구하기에는 너무 좋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참나 그러면 벌써 여러분 학자가 연구하기 불편합니다. 참나 체험이 없잖아요. 근데 중관파건 소승불교는 연구하기가 너무 좋아요. 왜? 거기서 요구하는 체험이라는 건요 무상 고 무아의 체험이에요. 이거 누구나 하는 거죠. 인생 무상하죠?괴롭죠 그냥. 내 것이랄 게 없죠. 자 이 체험만 있으면 연구할 수 있어요. 따라서 소승과 중관파가 학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참나 불교는요? 일단 연구하려고 스님 만났는데 선문답부터 날리시면 어떻게 연구를 해요? 아무리 떠들어도 참나에 대해서 맛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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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고 얘기하다 보면 본인도 자명하지가 않아서 신바람이 안 나요. 근데 무상 고 무아만 가지고 연구하려면 신바람 나요. 왜? 나도 체험했거든요. 이게 인간의 본질입니다. 체험과 개념이 결합되지 않으면 신바람이 안 나게 돼 있어요. 따라서 지금 참나 불교가 죽 쑤고 있는 거는 참나 체험자가 줄어들어서 그렇죠. 요즘 교회에서는 성령 얘기를 안 하고 절에서는 참나 얘기를 안 한다. 그거 빼고 다 잘한다. 그거 빼고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것만 힘들어한다. 그것만. 다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원불변하는 청정심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면요 “이 자리가 그대로 진여 열반이다” 이거를 여러분 인가하실 수 있는지 본인한테 물어보시라는 거예요. 이게 제일 핵입니다. 이걸 아시는 분은 이미 진여 열반의 세계에 지금 한 다리 걸치신 분이에요. 최소한 일별은 하신 분이에요. 이게 아직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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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닿는다? 그래서 기웃기웃 하다가 뭐 없나 하다가 논리의 세계로 빠지는 거예요. 논리의 세계는 여러분한테 복음의 얘길 얘기해 줘요. “원래 참나 없어. 뭘 찾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 “어쩐지 안 찾아지더라.” 하면서 가요. 모든 저기 꼴찌들이 아! 복음의 소식이 “사실 합격이란 없는 거야” 뭐 이러면 너무 좋죠. “내가 뭘 찾아 헤맸던 거야” 이렇게 돼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분들은 뭐를 해요? 활발하게 다니면서 참나를 누가 얘기하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견성했다고 하면 달려가서 공격을 합니다. “없는 참나를 어떻게 견성했대?” 하면서. 왜? 이게 중생이에요. 지금 탐진치 놀음이에요. 뭐라도 또 하나 얻으니까 못 견뎌요. 참나가 없다는 건 나는 공부 안 하고도 공부 20년 30년 한 사람을 깔 수 있는 무기예요. 이거를 중생들이 안 쓰시겠어요? 씁니다. 이러고 놀아요 지금. 그러니까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가는 거예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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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같이 합격을 못 하는 쪽으로. 그럼 부처님이 오신 보람이 없죠. 수많은 역대 조사 고승들이 그렇게 생을 걸고 실험해서 “참나 있다”고 외쳤는데, “참나 없다”가 그걸 뒤집기는 너무 쉬워요. 왜? 대부분 참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이 파급력은 더 큽니다. 누구 하나가 “난 체험했는데. 있더라”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니 원래 참나가 없는데 어떻게 체험했다는 거야. 너가 제 정신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뭐 이런 주변에서 그런 안타까운 대접 받고 여기 오신 분도 많이 계실 거예요. “난 분명히 체험했는데…” 그 나무위키에 티벳불교 가면요 이것까지 다 비판되어 있어요. “소위 참나론자들은 체험을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참나가 없다는 게 이미 논리적으로 논파된 이상 의미가 없는 소리다.” 그럴싸하지 않아요? 아 씨 내가 잘못됐나? 이렇게 돼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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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들한테 힘내라고 제가 이 강의를 하는 겁니다. 영원불변하는 청정심의 존재를 무수한 불교 경전에서 입증해 드릴 테니까 힘내시라고요. 논리적으로 극복했다는 소리만큼 개소리가 없어요. 그 논리라는 게 뭔데요? 납득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주장을 해놓고 자기들끼리는 논리적으로 끝났대요. 우리끼리 합의 봤대요. 이런 소리거든요. 대표적인 티벳 불교 중관학파의 참나 부정론이 뭔지 아세요? 자 여러분 이미 말립니다. 이게 변계소집성의 극치에요. 자기들이 문자 놀음의 극치에 빠져 있다는 걸 이렇게 설명해요. 이거는 저기 중관파에서 아주 대놓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만약에 이 진여열반이 참나라면 나라는 거는 오온과 분리되어 있느냐? 6근과 분리되어 있느냐? 같이 있느냐?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벌써 속임수가 들어가요.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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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 6근과 하나거나 다르거나. 5온 6근과 다른 나라는 게 있을 수 있냐? 이때 나라는 건 에고를 말하는 거죠. 자기들이 이미 에고라는 상을 지어놓고 6근이 없는 에고는, 나라는 건 상상할 수가 없잖아요. 그건 불가능. 6근과 하나인 아트만은, 6근은 근데 무상한데요? 그럼 이 아트만도 무상하겠네요? 땡. 논리적 증거. 논리적 입증 끝. 납득 되세요? 거기 납득 되시면 당하는 거죠. 근데 왜 논리적인 납득이 안 되는지 아세요? 왜 근데 왜 이거를 참나론자들이 시원하게 못 까는지 아세요? 너무 얼탱이 없기도 하지만. 참나는요 언어의 영역이 아니에요. 언어의 영역이 아닌 거를 자기들이 논리를 개설해 놓고 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라고 하고 여기에서 벗어난 논리는 어차피 인정 안 해줘요. 그리고 이 논리 안에서만 설명해 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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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참나론자들이, 참나를 체득한 분도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 참나는요 애초에 지금 이 시공 안의 언어로 설명되는 차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종경록(宗鏡錄)을 보는데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스님인 선불교 대가면서 정토종에서도 대가인데, 그분이 방금 같은 유식학자랑 논쟁벌이는 부분이 나와요. 저도 관심 있는 부분이라 봤는데. 유식학마저도 논리에 빠져요. 인도철학들은요 이렇게 문자를 세워놓으면 논리에 빠져요. 보세요. 진여는 참되고 무위, 똑같으니까 불변이잖아요. “영원불변인데 진여에서 어떻게 현상계가 나오느냐?” 하고 공격하는 유식학파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식학이 아뢰야식을 따로 세운 이유가 진여는 바로 현상계를 못 만든다고 본 거예요. 왜? 진여는 이름이 진여(眞如)니까 못 움직이잖아요? 이 느낌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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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답답함. 아니 참나를 참나라고 말하고 나니까 문자에 매인 거예요. 참나는 영원불변하다고? 불변인데 어떻게 변하는 게 나왔지? 안 되겠네요. 그래서 아뢰야식을 만들었다니까요. 아뢰야식이 우주를 낳았다. 상종. 진여가 우주를 낳았다. 성종. 대표적인 게 대승기신론. 진여에서 어떻게 우주가 나와요? 진여는요 자 따라해 보세요. 불변. 상주 불변. 끝. 논리 입증 끝. 이런 놀음에 빠지시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그 영명연수 스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럼 논쟁에서 진 거 같잖아요. 치밀한 논리를 써야 되는데 진여가 어떻게 우주를 낳았냐고? 그 자리는 불가사의 하니까. 또 더 공격하니까 이 스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흰 파도가 푸른 산 위에 이는구나.” 선문답을 날려버리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보면 웃긴데 그만큼 참나를 다루는 논리의 영역이 아닌 부분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체험을 강조하는 건데 그 사람들은 “아 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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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히니까 체험을 들먹이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모든 팁을 다 드립니다. 왜 여러분한테 이런 얘기 드리는지 아세요? 제발 굳건히 참나를 잘 지켜내시라고. 주변에 핍박이 아무리 와도. “참나인데 너는 왜 그래?” 막 이런 이상한 질문 가능하죠. “나라며? 난데 왜? 나는 전지전능하다며. 근데 너는 왜 그래? 이상하지 않아?” 이런 모든 것에 대한 여러분 이론적 토대도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선문답만 계속 절에 가서 한 30년 40년 들으면요 그러면 말을 못 합니다. 이해되시죠? 이뭐꼬만 계속 40년 하면 알아요. 예전에 어떤 스님이 저를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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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강의하게 하신 적이 있는데. 왜 절에서 저를 불렀나? 저더러 막 선지식이라고 하면서 왜 강의를 시켰나? 왜 그러냐면 그분도요 절에서 출가해서 내내 관세음보살만 외신 거예요. 경전을 보신 적이 없는 거예요. 경전공부 하려고 제 강의를 보신 거예요. 스님도 경전 공부를 제 강의 보고 하시는 거예요. 경전 공부가요 쉬운 게 아니에요. 더구나 체험 없는 분들이 번역한 책, 체험 없는 분들이 하는 강의를 들으면 참나 없다고 딱 결론 나기 딱 좋습니다. 안 그러면 참나 있다인데 과장된 얘기만 듣는 거예요. 환상. “참나가 죽인대. 참나 알면 인생 끝이야.” 뭐 이런 로또식 수행을 하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참나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런 분들이 찾아와서 “야 그러면 너 저기 바람 비 내리게 해 봐. 참나는 전지전능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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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결에도 나오잖아요. 고려말에도 그랬어요. 고려중후기에도 누가 견성했다면 와서 왜 신통이 없냐고 조른다고. 지금이랑 비슷해요. 그런 거 생각해 보시고요. 자 빨리 하고 좀 쉴게요. 에고성을 초월한 영원불변하는 청정심의 존재와 이 마음이 바로 진여열반임을 부정하는 것은, 진짜로 이 자리는 영원불변의 자리예요. 왜 그러냐면 어떤 이원성, 시공의 인과성이 그 자리는 없거든요. 그 자리 없으니까 진여죠. 그런데 알아차리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벌써 모순이에요. 텅 비었는데 알아차린대요. 벌써 논리적이지 않죠? 근데 진실은 이래요. 진실은 이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차원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를 논리적으로 “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네”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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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더 자명해”라고 밀고 나오는 분들을 보면 참나 체험이 없는 분들이기 쉽다는 거죠. 있어도 이론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거예요. 자기 체험을 왜곡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여러분 참나 체험 아무리 하셔도요 학당에 오셨으니까 그걸 참나라고 인가 받았죠. 어디 절에 갔으면요 뭐라고 했을까요? “그런 거는 삼매가 아니야” 그러면 끝나요. 여러분 집에 와서 누워 있어요. 공부도 못 해요. 왜? 내가 한 게 아니라는데. 그런 분들은 주로 또 뭐가 아닌지 얘기 안 해 줍니다. “그냥 아니야. 그걸 삼매라고 할 수 없어.” 그래 버리면요 이분은, 제가 이런 분들을 많이 뵀거든요. 이러면 그 이후로 공부 못 해요. 엄청 잘해서 견성까지 갔던 분이 이상한 지도를 받고 나가떨어집니다. 공부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려요 내가 한 모든 게 잘못됐다고 생각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해요. 진짜로 많습니다. 잘못된 소경의 길 안내라는 게 이거예요. 잘못된 길 안내 받으면 다 죽는 겁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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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는 체험하고도 헷갈릴 수 있다는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전해져 온 이 마음이 진여 열반임을 부정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전해져 온 불교 가르침의 최고 정수를 부정하는 것이고, 영원불변한 청정심을 깨닫지 못 하고는 진여를 깨닫는 견성도 열반에 안주하는 해탈도 불가능하다. 다른 게 해탈이 아니라 열반에 여러분이 들어앉아 사는 게 해탈입니다. 해탈은 자유자재거든요. 자유자재가 와요. 열반 안에 진여 안에 살아요. 진여를 정확히 직관 속에서, 체험과 직관 속, 선정과 직관이니까 정혜쌍수죠. 선정과 지혜의 쌍수로 이 자리를 이해하시면 텅 비었으면서 진리로 꽉 차 있다는 걸 알게 돼요. 텅 비었으면서 알아차린다는 것도 알게 되고, 텅 비었으면서 알아차리되 알아차려지는 진리가 그 안에 또 있어요. 공성이 공성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니까 무분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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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이 없지, 무분별지 이원성은 취해서 쓰면서 중관파처럼 둘이라고 계속 분리하려고 하는 그런 시도들. 나중에 달라이라마 직접 글로요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 제가 교재에 다 준비해 놨어요. 닝마파는 저걸 자꾸 하나라고 한대요. 중관파 입장에서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그 얘기를 달라이라마께서 해 놓으신 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지금 이 주제가, 앞으로 다룰 주제가 이미 다 등장한 거예요. 진여 열반이 그대로 우리의 청정광명심이라는 거, 이거 받아들이실 수 있겠는가? 이게 포인트입니다. 이게 열반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포인트예요. 아잔 브람(Ajahn Brahm) 스님 같은 분들은 상상 속의 열반을 찾고 있어요. 그럼 못 들어가요. 제가 볼 땐 그분도 이미 열반을 체험하고 있는데 그분은 알아차리는 자리는 절대 열반이 아니래요. 스승 아잔 차(Ajhan Chah:1918~1991)는 그 자리를 열반이라고 했는데. 아잔이 고승들한테 붙는 거예요. 아잔 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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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얘기했는데, 그 자리가 부처의 마음이라고 그랬는데, 알아차리는 마음이 부처 마음이라고 그랬는데 제자인 아잔 브람은 열반을 탐진치가 사라진 상상 속의 너무 청정해진 그 상태를 상상해요. 그러니까 현상계적으로 완벽하게 청정해진 상태를 상상한다. 본래 탐진치가 붙지 못 하는 그 자리가 열반인데. 그 자리 안에 들어앉는 게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이라고 해서요 모든 업이 지워졌으면 석가모니보다 천재예요. 왜냐하면 초기불경에 아라한들이 석가모니한테 말씀 듣고 7일 만에 아라한이 된 분들이 허다해요. 7일 만에 모든 업을 다 지우고 청정해져서 아라한이 됐다고요? 말이 안 되죠. 그냥 열반 자리를 깨달은 거예요. 알아차리는 의식을 깨닫고 거기 들어앉은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차린 동안 자기가 번뇌를 제압할 수 있으니까 아라한이라고 한 거예요. 모든 번뇌를 제압할 수 있는 경지라고. 실제 다 제압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나중에 읽어 드리겠지만 나눠드린 교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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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시바경(尸婆經)이라고. 시바경에서 그 얘기가 나옵니다. 아라한도 번뇌를 다 멸한 게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이 충격적으로 고백합니다. “번뇌 다 끝났는데 아라한들은 뭐 공부해요?” “탐진치의 뿌리를 영원히 뽑기 위해서 공부해야 된다”는 거죠. 눌러만 놓은 거지 다 닦은 게 아니에요. 다 닦았으면 부처 이상이죠. 보세요. 아라한이 만약에 탐진치 다 닦았다면요 부처 이상이어야 돼요. 부처랑 동등해야 돼요. 부처랑 아라한의 차는 엄청납니다. 그래서 18, 계속 이런 얘기 나오는데, 18불공법이라는 게 있어요. 부처랑 아라한이 겸상할 수 없는 18가지의 능력. 이런 게 왜 나와요? 겸상이 안 되니까. 보세요. 능력이 딸린다는 건 역추적하면 뭔지 아세요? 탐진치가 안 떨어졌다는 거예요. 무지와 아집. 업장은 이 두 종류밖에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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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종류의 업장이 안 떨어졌기 때문에 아라한과 부처가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안 떨어진 채로 아라한이 된 거예요. 이거를 이해를 못 하고 문자에 집착해서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끝냈다 그러면 업장을 다 지웠으려니 하고 읽으니까 이해가 안 되죠. 아라한이 어떻게 해서 아라한이 되는지 모르니까 모든 업장이 지워진 어떤 그런 청정한 상태를 상상하면서 도를 닦으면 영원히 도를 못 얻습니다. 어떻게 7일 만에 아라한이 됐는지를 연구해야죠. 합격생이라면 모름지기 7일에 된 놈을 추적해야죠. 뭘로 됐지? 그때 늦어도 보름에 됐다고요. 뭔데 아라한을 보름에 되냐고요. 할 만하니까 한 거예요. 그래서 이게 2,500년 전에 일반인도 했던 그거를 왜 우리가 지금 못 하냐? 7일 만에 아라한 나와야 돼요. 안 나오면 그 방법론에 잘못된 방법론이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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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 주장은 이거예요. 들어가면서 할 얘기는 다 했습니다. 충분히 쉬고 충분히 쉬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여유 있게 이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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