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2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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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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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2만5천송 반야경 3
강의일자 2023. 09. 23. 土.
게시일자 2023. 12. 30.
동영상 길이 53:24
강의 중 인용 도서 2만5천송 반야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bF0TzbDgzos



청정심과 에고의 세계

00:07 육바라밀도 제가 요즘 육바라밀 얘기도 육바라밀도 어려우시면 초긍정과 따뜻함이 흐르는가 보자. 초긍정과 따뜻함이 흐르면 육바라밀 상태다. 그게 더 할 만하게 해드리지 않나요 제가. 내가 힘들게 하려고 온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 불국토를 확장해야 되는데 참나 안 만나고는 불국토라는 게 없어요. 참나를 안 만났는데 무슨 불국토예요? 예토(穢土)지. 또 다른 또 다른 예토일 뿐이에요. 6도를 도는 것뿐이고요. 내가 너무 행복한데요. 그러면 천상계지 그게 정토는 아니에요. 천상계지.

01:01 정토가 아닌 그건 천상계죠. 그래서 참나 안 만나면 답이 없다. 이게 제일 골자고요. 자리이타도 별게 아니고 이런 청정심, 에고의 중생심, 이 청정심이 그대로 보리심이에요. 그래서 보리심, 보리심과 정광명은 둘이 아닙니다. 다만 정광명 얘기할 때는 절대적 보리심이라고만 해주면 돼요. 그러면 상대적 보리심은요? 정광명의 작용이죠. 그러니까 둘이 아니에요. 같은 거예요. 결국 보리심의 본체죠. 청정심. 그래서 이 청정심을 제대로 깨달으면 육바라밀이 안 나올 수가 있나요? 소승은 청정심만 붙잡고 끝내자는 거고요. 최소한의 도리만 하고 끝내자고, 대승은 청정심을

02:01 에고의 세계 중생심의 세계에 구현하자는 겁니다. 그럼 에고의 세계는 니 에고가 있고 내 에고가 있으니까 내 에고 기준으로 자리(自利) 타인의 에고 기준으로는 이타(利他) 그러는 겁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근데 이건 둘이 아니에요. 하나예요. 왜냐하면 내 에고를, 지금 지금 온 우주에 육바라밀을 구현하자는 게 포인트예요. 육바라밀이 그대로 정토예요. 육바라밀이 구현된 세상이 정토예요. 그러면 나의 세계에서 육바라밀 구현, 남의 세계에서 육바라밀 구현, 해서 정토, 불국토 완성이죠. 정토는 확장되겠죠. 불국토는 확장되겠죠. 그렇죠. 이게 다인데 둘이 아닌 게. 자리의 핵심이 뭔데요? 나를 이롭게 한다, 남을 이롭게 한다 하니까 구분이 생기시는데 에고의 세계니까 구분해서 말한 것뿐이에요. 들어가 보면 하나예요. 자리는 뭔데요? 내가 육바라밀 잘하는 거. 이타는요? 남한테 육바라밀 잘해주는 거. 그럼 그게

03:00 둘일까요? 내가 육바라밀을 열라 잘해야지. 누구한테 하는데 육바라밀을? 나한테도 남한테도 내가 육바라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대로 이타행(利他行)이죠. 자리이면서 이타행이에요. 왜? 그 혜택을 누가 입어요? 나를 만난 중생들이 보겠죠. 내가 육바라밀로 계속 대해주니까. 나와 남을 육바라밀로 대하자는 거죠. 육바라밀 잘하자는 거. 결국 그게 이타행이에요. 그대로 내가 육바라밀을 잘할수록 남은 나한테 도움을 많이 받게 되죠. 내가 육바라밀 안 할수록 남들은 나한테 피해를 입게 돼요.

반야심경의 핵심

03:37 그렇죠. 그러니까 자해해타(自害害他)가 돼요. 내가 육바라밀 안 하면 자해해타가 돼요. 내 마음부터 예토로 지옥으로 만들고 남도 지옥으로 만드니까. 이해되시죠? 간단하다. 결국 에고 돌보기다. 내 에고 잘 돌보는 거, 남의 에고 내 에고 안 가리고 에고들을

04:00 잘 돌보는 게 대승이다 이겁니다. 이게 대승이다. 그러려면 그러려면 이 청정심 안에 중생심, 육근, 오온의 세계 말고 오온의 자성이 되는 반야심경의 핵심은, 반야경의 모든 핵심은 이거 하나라고 그랬죠. 오온 육근이 본래 아니, 오온 육근의 독자적 자성은 없다. 독자적 자성은 없다. 그런데 이 공성 자리, 보리심, 이 청정심 자리, 이게 그대로 오온의 본성이다. 오온은 이 청정심의 작용이니까. 그래서 오온의 본성은 뭐다? 자성은? 공성이 자성이다. 그래서 반야심경,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이렇게 풀어야 된다고 했죠. 오온개공을 풀면 “오온은 독자적

05:00 별개의 자성이 없다. 다만 공성을 자성으로 삼는다.” 이렇게 해야 완벽한 해석이 됩니다. 지금 여기 뭐 연기니 뭐니 낀 거 없죠. 오온이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이거 헷갈리지 마시라 그랬죠. 여기에는 이원성이 없어요. 이원성이 없다 보니까 오염됐다 청정하다, 염정(染淨)의 구분이 없어요. 그런데 다른 의미로 뭐예요? 정법(淨法)만 가득 차 있어요. 정법 구족(具足), 정법이 구족하니까 구공이라고 하죠. 공 안에 정법이 구족해 있으니까 구공, 이원성이 없으니까 함께 구(俱)자 써서 함께 구자는 나와 남, 아(我)와 법(法)을 말합니다, 주관과 객관이 모두 모두 공하다. 아공 법공을 통합해서 구공이라고 합니다. 아공 법공을 다 갖춘 그 구공(俱空), 아(我) 법(法)이 아예 흔적도 없는

06:00 여기에는 나와 남이 흔적도 없어요. 반야심경이 다 없다고 하잖아요. 여기는 사성제도 없고 12연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12연기는 진리인데 진리도 없대요. 차별상(差別相)이 없어서 그래요. 12연기라는 차별상이 없는 거예요. 여기는 아와 법이 다 없어요. 여기는. 그런데 만법이 또 꽉 차 있대요.

반야바라밀의 의미

06:19 자꾸 이상한 말하는 이유가 달라서 그래요,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차별상, 차별상과 오염상(汚染相)이 없다, 없어서 그렇지 정법(淨法)은 꽉 차 있다. 이거 이해를 못해가지고 반야경을 잘못 읽어버리면 공병(空病)에 빠집니다. 보세요. 그래서 이 부분 그때 제가 한번 읽어드렸는데 또 다시 읽어드릴게요. [5. ① 세존이시여, ‘보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아끼고 탐냄이 없기 때문이다(인색을 얻을 수 없음). ② 세존이시여, ‘지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파계가 없기 때문이다(파계를 얻을 수 없음) ③ 세존이시여, ‘인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인내와 인내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인내하지 못함을 얻을 수 없음).] 세존이시여, 보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보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왜냐? 자 청정심, 요 참나각성이 반야바라밀이라고 그랬죠, 그대로. 그게 왜 반야바라밀이냐? 무분별지(無分別智)니까요. 무분별한 상태에서 지(智)한다는 거는

07:00 직관입니다. 즉 공성 직관이에요. 공성 직관이, 반야바라밀이 그대로 보시바라밀이다. 왜? 공성 직관을 안 했는데, 이 공성을 직관 안 했는데, 이 안에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는 이 공성 직관을 안 했는데 어떻게 보시바라밀을 해요? 우리가? 공 자리를 모르는데, 청정광명심을 모르는데 어떻게. 보리심의 발현이 육바라밀이죠, 상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은 이 절대적, 여긴 절대적 보리심 자리죠, 절대적 보리심의 작용일 뿐인데 보리심을 모르는데, 절대적 보리심을 모르는데 우리가 상대적 보리심을 한다고요? 공성을 모르는데 보시바라밀을 한다고요? 반야바라밀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반야경 계통들이 반야, 반야 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 반야, 무분별지 때문이에요. 즉 참나각성이라는 뜻이에요 반야바라밀은. 사리불이여 아끼고 탐냄이 없기

08:00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문답식으로 지금 진행하는 거예요 이야기가, 자 아끼고 탐냄이 없다 그랬어요. 보시바라밀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저도 압니다. 이러니까 세존이 잘 아네. 아끼고 탐냄이 없어서 그래. 아끼고 탐냄은 게 없다는 건요, 보세요, 그럼 이거 지금 염법(染法: 정법淨法의 반대)만 없다고 했죠. 아끼고 탐냄이라는 염법만 없다고 그랬습니다. 헷갈리시면 안 돼요. 지금부터 잘 따라오세요. 염법이 없지, 청정광명심에는 염법이 없지, 더러운 염법이 없지. 아끼고 탐냄이 없으니까 뭐만 있어요? 여기 무욕이 있겠죠. 무욕(無慾). 공성에는 무욕이 있죠. 그거 제가 써놓은 거예요. 탐욕이 없음이며. 각주에 보시바라밀의 자성이 뭐라고요? 무욕이요 [반야바라밀을 통해 꿰뚫어 본 만법(5온)의 본성은 일체의 차별상과 오염상을 떠난 ‘무자성의 공성’이되, 동시에 청정한 법의 자성을 구족하고 있는 ‘진여眞如’(무루로서 참되고 무위로서 상주불변함)이다. 진여에 갖추어진 청정한 법의 자성은 ① 탐욕이 없음이며(보시바라밀의 자성), ② 파계가 없음이며(지계바라밀의 자성), ③ 요동하지 않음이며(인욕바라밀의 자성), ④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음이며(정진바라밀의 자성), ⑤ 산란하지 않음이며(선정바라밀의 자성), ⑥ 일체의 법이 공성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음(반야바라밀의 자성)이다.] 탐욕 없음이 있어요. 탐욕 없음은 있잖아요. 정법(淨法)은 있다는 거예요, 포인트가. 정법은 있어요, 무욕이라는.

09:03 무욕이라는 정법은 있습니다. 염법이 없죠. 염법이 뭐예요? 오염된 법. 아끼고 탐냄. 그건 에고나 할 짓이잖아요. 여러분 잘은 몰라도 청정광명심은 안 그럴 것 같지 않아요? 대충. 이거 때려잡아야죠. 이거 이거 못 맞추면 안 돼요. 여기 왠지 염법 없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에고가 없으니까 탐진치가 없으니까 아끼고 탐냄이 없겠죠. 그럼 무욕이 있겠죠. 세존이시여 지계바라밀도 반야바라밀입니다. 계율 잘 지킨다는 것도 공성. 알아야 돼요. 그렇지 사리불이여 파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염법만 없다고 했죠. 저 밑줄 그은 것들은요 염법만 부정한 겁니다. 밑줄 안 그은 것들은요 정법 염법을 다 부정해요. 이게 헷갈리게 써놨다고요. 파계가 없대요, 여기는. 거기에 뭐가 있어요? 파계가 없는 게 지금

10:00 청정하다는 얘기죠 무욕 청정. 파계가 없다는 게 정법이죠. 세존이시여 인욕바라밀은. 인욕도 반야바라밀입니다. 이제 우리가 뭘 기대하겠어요? 성내지 않는다. 요동하지 않는다. 이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인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다. 사리불이여 인내함도 인내하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다. 이건 염법 정법을 다 부정했죠. 그렇죠. 그럼 여기 2번까지 따라오다 3번에서 흔들리겠죠. “그럼 인내도 하면 안 되나?” “인욕도 아니네.” 이제 이런 망상이 일어나요. 여기는 성냄이 없다는 게 정법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한 이유는 뭐겠어요? 염법과 정법의 구분이 없다는 거예요, 거기는. 원래 성내지 않는 자리라서 성낸다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내한다 만다가 없다는 얘기인 거예요. 이 두 말을 섞어서 써버리시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지금 경전에서.

11:00 예전에는 제가 막 경전 화냈잖아요, 이 구절. 마하반야바라밀(=2만5천송 반야경) 경전을 왜 이렇게 쓰냐고. 안 그래도 죽겠는 사람을 살리려고 쓰는 건데 살려주다가 손 놔버리는 격 아니에요, 지금. 중생 입장에서는 겨우 따라오는데. 겨우 따라오는 입장에서요 이걸 딱 알아듣고 “음! 염정에 다 구분이 없지.” 이러면 이게 중생인가요? 그 사람들 이미 보살이지. 이런 수험서 싫어해요. 보살 합격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험서. 수험생은 이해할 수 없고 합격해야 이해하는 수험서 싫어해요. 합격한 뒤에 공부하라는 거예요 뭐예요? 수험생 입장에서 써야 되잖아요. 자 여기서는 정법 염법 부정, 염법 부정, 갑자기 염법 정법을 다 부정해버립니다. 네 번째도 밑줄 없는 거 보니까 분위기 안 좋죠. [④ 세존이시여, ‘정진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나태나 정진이 없기 때문이다(나태를 얻을 수 없음). ⑤ 세존이시여, ‘선정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고요함과 산란함이 없기 때문이다(산란을 얻을 수 없음). ⑥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사리불이여,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없기 때문이다(무지를 얻을 수 없음). (구공具空의 반야바라밀 안에 6바라밀의 근본종자가 두루 갖추어져 있음).] 정진바라밀도 반야바라밀인데요. “나태나 정진이 다 없다” 이래버립니다. 그럼 “아 정진할 뻔했네.” 이거잖아요. “아 인내할 뻔하고 정진할 뻔했네.” 그 분별이 없다는 거예요. 차별상이 없고 오염상이 없다.

12:00 오염이 안 돼 있으니까 차별도 없고 오염도 없다. 이해되시죠? 선정바라밀도요 고요함과 산란함이 다 없대요. 짜증나죠. 그다음에 반야바라밀은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또 없대요. 그런데 제가 이걸 깨달았습니다. 밑줄 그은 게 2개죠. 1번 2번 챙기세요. 반대되는 놈을 찾았거든요, 제가. 경전을 뒤져서. 6번. [6.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찌하여 ‘보시’를 할 때, 이것이 ‘지혜의 방편력’ 때문이며 ‘보시바라밀’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①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재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능히 ‘보시바라밀’을 두루 갖추는 것이다(인색을 얻을 수 없음). ② 죄와 죄가 아님을 얻을 수 없기에 응당 ‘지계바라밀’을 두루 갖추며(죄를 얻을 수 없음). ③ 마음이 요동하지 않기에 응당 ‘인욕바라밀’을 두루 갖추며(동요를 얻을 수 없음). ④ 심신이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기에 응당 ‘정진바라밀’을 두루 갖추며(나태를 얻을 수 없음). ⑤ 산란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니 응당 ‘선정바라밀’을 두루 갖추며(산란을 얻을 수 없음). ⑥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없음을 알기(텅 빈 중에 무한하게 알아차리는 빛나는 의식임, 무분별지)에 응당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무지를 얻을 수 없음).] 합치면 돼요. 한 경전이기 때문에 한 경전에서 염정(染淨)을 다 갖다버린 거랑 염법만 버린 게 있었죠. 다행히 6번을 보니까 아마 이렇게 찾아보라고 했나 봐요. “한번 니가 찾아봐야지. 내가 다 얘기해 주랴.”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보세요.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립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찌하여 보시할 때 지혜의 방편력 때문이며 보시바라밀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보시라 하더라도 왜 그게 지혜의 힘이라고 합니까?

13:00 무분별지의 힘이죠. 직관의 힘이죠. 공성 직관의 힘이죠. 왜 그럽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재물 요 3개가 있어야 되잖아요. 항상 기부하는 사람과 기부 받는 사람과 기부하는 그 물건이 있어야 되잖아요.

보시바라밀의 의미

13:16 요 3개가 본래 다 공한 줄, 참나 자리에서 공한 줄 아는 게 반야바라밀이죠. 참나 자리에서 보시를 한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여러분 공함에 포인트를 두시면요 보시 못해요. “기부하세요.” “1억 할까요? 2억 할까요?” 하는데 거기서 “1억도 공하고 2억도 공하다.” 해버리면 큰일 나죠. “얼마를 기부할지도 모르는 그런 멍청이 기부를 하고 있는 건 공한 줄 알아야 된다. 기부 받는 자도, 받는 자도, 기부하는 1억도 본래 공하다.” 이래가지고 기부하시겠어요? 보시하시겠어요? 그 소리가 아니에요. 참나각성 상태에서 기부하라는 얘기입니다. 일체가 공한

14:00 그 자리에서 만법이 공한 줄 아는 그 보리심의 마음으로 기부하라는 얘기예요. 포인트가 잘못돼 있어요. 공한 줄 알고 하라는 거는 예수님 말도 또 헷갈려요. “오른손이 한 거 왼손 모르게 하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아 왼손이 안 것 같애.” 기부하려다가 왼손이 알았네. 뭐 뭐예요? 지가 알면 다 아는 거지. 뭔 말일까요, 이게? 상이 없는 자선을 하라는 겁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하라는 거예요. 에고의 마음으로 하지 말고. 이거를 구분 못하면요 보시, 기부 못 해요, 여러분. 첫 번째는 그러니까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재물 요 세 가지가 능히 공한 줄 아니까, 여기도요 이게 연기(緣起)하니까 공하단 말 안 했죠. 그냥 이게 공한 줄 아니까, 참나각성 자리에서는, 청정심 자리에서는 그게 공한 줄 아니까 그냥 보시바라밀을 하는 거다. 여기서도 딱히 지금 정법을 얘기하지는 않았어요.

15:00 두 번째 죄와 죄가 아님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럼, 죄나 죄 아님 그러면 염법 정법 다 부정했죠. 신기한 게 아까는 1번 2번만 인정하더니 여기서는 1번 2번만 부정하고요. 3번부터 보세요.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니 인욕바라밀을 갖추며. 왜 이 두 개를 합쳐보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을까요? 쉽게 공부시키지 않겠다. 그렇죠. “알아먹는 학생만 데리고 가겠다” 이런 거 아닙니까. 근데 신기하게 보세요. 4번 정신이 아... 보세요. 그러니까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니. 인욕 나왔죠.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그다음에 심신이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기에. 정진한다잖아요. 정진이라는 정법이 있대요. 나태하지 않는대요. 다섯 번째... 그게 정진바라밀을 갖추고요. 다섯 번째 산란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니. 산란하지 않대요. 고요함이 정법이 있는 거죠. 마지막도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만법이

16:00 공한 줄 알기에. 직관하고 있는 거죠. 직관하고 있기에. 진리를 자명하게 알고 있는 거죠. 자명한 직관. 이 자명함이 또 자성이죠. 자 보세요.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이미 공성 안에 정법이 갖춰져 있다는 걸 설명을 다 했습니다. 염정의 구분이 없다는 건 이원성, 차별성이 없다는 얘기고 그 와중에 정법이 꽉 차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게 대승기신론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요 육바라밀이 진리의 자성이라는 걸 분명히 밝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지금 마하반야바라밀경을 통해서 찾아낸 게 이거죠. 똑같아요. 그럼 제가 했던 이 작업을 선구적으로 누가 먼저 해서 대승기신론을 쓴 겁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대승기신론 옆에 각주로 있어요. [① ‘진리의 본성’(참나의 본성)은 탐욕이 없음을 본체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보시바라밀’을 닦으며, ② ‘진리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아 5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지계바라밀’을 닦는다. ③ ‘진리의 본성’에 고뇌가 없어서 성냄과 번뇌를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인욕바라밀’을 닦으며 ④ ‘진리의 본성’에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어서 나태함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정진바라밀’을 닦는다. ⑤ ‘진리의 본성’이 항상 안정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본체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선정바라밀’을 닦으며, ⑥ ‘진리의 본성’이 광명함(진리의 본성은 무한하게 알아차리는 빛나는 의식임, 무분별지)을 본체로 삼아 어두움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고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 이다.] 보실래요. 진리의 자성, 진리의 본성, 진리의 자성이에요, 지금. 진리의 본성은

17:00 탐욕이 없음을 본체로 삼음을 이해하여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여 보시바라밀을 닦으며. 어떠세요? 구공이 설명 최고로 잘 돼 있죠. 진리의 자성이 꽉 차 있는데 진리의 자성, 진리의 본성이 탐욕이 없음이 본체이기에 에고가 순응해서 안 따를 수가 없잖아요. 공성이 그러니까 자성이 그러니까 따라서 보시바라밀을 행하며. 탐욕이 없이 남을 대해야 되며. 그렇죠. 그래서 내가 받고 싶은 거 남한테 줄 수 있어야 돼요. 두 번째, 진리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아. 오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기에, 청정하고 오염되지 않기에. 똑같죠, 마하반야바라밀경이랑. 그걸 이해해버렸기 때문에 진리의 본성에 순응하여, 어쩔 수 없이, 순응하여는 부득이하게입니다. 부득이하게 뭘 해야 돼요? 지계바라밀을 지켜주셔야 돼요.

진리의 본성

18:00 이렇게 해야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죠. 이런 게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도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거예요. 귀류논증은 이런 짓을 안 한다고요. 꼬투리 잡아서 “무상하니까 공하다. 연기하니까 공하다”만 주장하지. 이건 체계적으로 형이상학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자성이 이러니까 부득이하게 현실에서도 어떻게 해야 돼요? 절대적 보리심이 생겨먹기를, 본체가 오염되지 않으니 작용에 있어서도 오염이 없어야 되니까 지계바라밀을 해야만 하는 거예요, 부득이. 이렇게 해서 육바라밀을 닦아야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구공에 입각해서. 대승기신론이 그런데 마하반야바라밀경에 기반하고 있다는 거 아시겠죠. 용어가 똑같잖아요. 세 번째 보실래요. 예측하실 수도 있어요. 진리의 본성에 고뇌가 없어서 성냄과 번뇌를 벗어나 있으니. 요동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니 인욕바라밀을 해야 되며, 진리의 본성에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어서, 거기는 에고가 없다는 거예요. 오온이 없다는 거예요.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다는 건

19:00 차별상이 없다는 얘기고요 오염상이 없다는 겁니다. 차별상이 없고 오염상인 나태도 없다는 거예요. 몸과 마음은 차별상이고요 나태는 오염상입니다. 오염상이 없대요. 그래서 정진해야 된대요. 어떠세요? 뒷부분을 안 봐도 아시겠죠, 이제. 여러분이 경전을 안 봐도 아시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경전과 한마음이 되신 거 아니에요? 어때요? “약 좀 팔겠네” 막 이러시는... 여러분은 이미 지금 경전을 지금 쓰고 계세요, 마음으로. 자 예측해볼까요? 진리의 본성이 항상 안정돼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본체로 삼았기에 선정바라밀을 부득이 닦으며. 마지막, 진리의 본성이 자명함, 광명함으로 본체로 삼기에. 이게 무분별지 상태 아닙니까? 진리를 직관하고 있기에, 이미 진리를 알고 있기에 우리도

20:00 에고의 세계에서 뭘 닦아야 돼요? 순응해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되는 거예요. 대승기신론이 짱이죠. 원효스님이 왜 대승기신론을 제일 강조했는지 아시겠죠.

대승기신론의 의의

20:11 이 대승기신론은 반야경을 이미 종합하고 있다는 거 아시겠죠. 대승기신론은요 반야경과 그 중관학파의 반야경 사상과 유식학 사상을 통합해서 만든 통합적 경전입니다. 가장 완비된 공종과, 지난 시간에 했죠, 공종과 상종을 통합해서 성종으로 통합시킨 최고의 경전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불교도 교학적 근거를 대승기신론에다 많이 갖다 대는 거예요. 뒤로 가보세요. 동그라미. 설명은 좀 다르게 됐지만 이게. 공종을 한번 정리해 볼까요. 공종 상종 다 이렇게 정리해서 해드릴 거예요. 이 하나의 그림을 이해하시면 다른 종파도 다 이해하시기 쉽게 제가 체계적으로

21:00 설명을 드릴 거예요. 공종 이제 나왔으니까 상종 성종, 유식학할 때는 상종을 이 그림으로 그려드릴 거고요. 또 대승기신론 할 때는 성종을 그려드릴 거예요. 그래서 이 그림만 가지고 비교할 수 있게. 지금 이게 공종이에요. 여러분 공종 다 나왔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경 읽으면서 찾아낸 겁니다, 이게. 이 중생심의 세계는 오온의 세계고요. 제가 왜 이게 오온 12처 18계를 했냐면요 반야심경 읽으실 때 보면 “오온이 공하다” 나오고 그다음에 “12처 18계도 공하다”고 나온단 말이에요. 12처는 뭘까요? 색 성 향 미 촉... 쓰기 싫으니까 글자도 대충 쓰는데요. 이게 육경(六境)이라 그래요 경계. 육경을 뭐가 인식해요? 육식(六識)이 인식해요. 색은 뭐가 봐요? 눈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22:00 신(身) 의(意) 법(法)은 법칙입니다. 법칙은 마음이 꿰뚫어 봐요. 저건 저렇게 생겨먹었구나. 그래서 법칙을 꿰뚫어서 법칙을 개념화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개념화 작용이 일어나요. 여기는 감각이고요. 오감, 오감의 세계고. 18계는요. 이 이 식(識)이 어디서 일어나냐? 육근(六根)을 또 강조합니다. 6가지 감각 기관. 눈 이걸 구분한 겁니까? 안식(眼識)과 안근(眼根)을 구분해요. 눈이 색을 만나매 알아차리는 거죠 안식으로. 그럼 18계가 돼요. 결국 다하면 뭐예요? 육근이에요 육근. 12처 18계는 육근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제가 오온과 육근이면 돼요. 오온과 육근의 세계가 중생심의 세계고요. 세속의 보리심의 세계입니다 여기는. 세속 보리심 아까 얘기해 드렸죠. 세속 보리심. 여기는 절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 이미 말씀드렸죠.

23:00 육바라밀의 세계고요, 여기는. 절대적 보리심의 세계입니다. 청정광명심 자리는 이게 다른 이름이 진여니 열반이니 청정함이니 또 다른 이름 하나 거기 더하면 법신, 법신 자리예요. 만법이 꽉 차 있잖아요. 청정법으로 꽉 차 있어서 법신이라니까요. 법신 하면 떠오르셔야 돼요. 청정법 그 자체, 청정한 만법 그 자체가 법신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무욕 청정. 여기, 여기 성냄이 이쪽이 조화죠. 인욕이 조화죠. 그래서 ①무욕 ②청정 ③조화 ④정진 ⑤고요 ⑥자명 이 6가지 자성이 꽉 차 있어요. 청정 자성이 청정법으로 꽉 차 있습니다. 텅 비어 있는데 청정법으로 꽉 차 있다는 말을요, 보세요, 단순히 “오온이 연기하니까 공하다” 즉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라는 부정으로만 공을 썼다면 공 안에 육바라밀 꽉 차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죠. 이해되시죠? 공 안에 육바라밀이 꽉 차 있으려면 그건 실체여야 됩니다.

24:02 실체라는 걸 자꾸 부정하려고 그래요. 중관파의 잘못된 오류가 실체는, 영원한 실체는 있으면 안 된다. 왜? 자성이 없어야 되니까. 그거에만 꽂혀가지고 그 개념에만 꽂혀서 이 영원한 순수의식 자체도 부정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달라이라마처럼.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게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 중에 뭐죠? 무분별지. 현상계에서 펼쳐지는 거는 반야바라밀 중에 분별지. 됐죠. 이거 다 이해되시지 않아요?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이걸 알다니! 보계경(寶髻經) 한번 보실래요. 각주. 이게 경전적 근거가 또 있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이런 반야경 사상이요 반야경에 있는, 이 구공 사상이 담겨 있는 또 훌륭한 경전이 대승기신론도 있지만 또 경으로는 보계경이라는 대승경전이 있거든요. 보실래요. [5) “‘사랑의 마음’(慈愛)의 갑옷을 입고 ‘연민의 마음’(大悲)에 머무르면서 ‘일체의 신묘한 형상을 모두 갖춘 공성’(구일체묘상공具一切妙相空)을 증득하는 선정을 닦아야 한다. 일체의 신묘한 형상을 모두 갖춘 공성이란, ① ‘보시’를 떠나지 않으며 ② ‘지계’를 떠나지 않으며 ③ ‘인욕’을 떠나지 않으며 ④ ‘정진’을 떠나지 않으며 ⑤ ‘선정’을 떠나지 않으며 ⑥ ‘반야’를 떠나지 않으며 ⑦ ‘방편’을 떠나지 않는다.”(보계경寶髻經)]

25:00 사랑의 마음의 갑옷을 입고. 이런 스타일은 꼭 성경식 표현이 돼요. 뭔가 갑옷 입고 뭐 칼 들고 이런 아이템 장착하듯이 하라는 거. 사랑의 마음의 갑옷을 입고, 연민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사랑은요 내가 받고 싶은 건 남한테 퍼주고 싶은 마음이고, 연민은요 남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짠한 마음 측은지심이죠. 결국 사랑과 자비 합치면 자비잖아요. 이 자비의 짠한 마음이 측은지심이라고 하는 건데요. 연민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이런 말은요 자비심이 보리심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근데 보리심은요 단순히 자비심만이 아니에요. 보리심이라고 할 때는요 육바라밀을 통합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혜 플러스 자비고요. 둘로 나누면 그러니까 반야와 방편이거든요.

26:00 온갖 방편, 실천 능력 갖고 있어야 돼요. 아는 능력, 실천 능력, 하는 능력 그러니까 알기만 하고 할 줄 모르면 보리심이 아니에요. 보리심은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어야 됩니다. 유교의 사단도 보면요 이게 보리심이에요, 그대로. 유교의 사단이요 양심의 본체가 있고 작용이 있다면 사단이라는 건 이미 밖으로 싹이 난 거거든요. 네 가지 양심의 싹이거든요. 싹 단(端)자거든요. 그럼 보시면 측은지심 이거 하는 거죠. 수오지심 정의로운 마음 이것도 하는 거죠. 사양지심 이것도 양보하는 거죠. 이거 조화, 이거는 정의 구현, 이건 자비, 시비지심 이건 아는 거예요. 이건 하는 거고 이건 아는 거죠. 이건 지혜 쪽이고 이거는 방편 쪽이죠. 유교의 사단도 똑같아요. 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포인트가 지혜와 사랑.

27:00 보리심도요 지혜와 자비. 다만 6개로 나눴을 뿐이에요. 유교랑 유교의 양심이요 불교의 보리심입니다. 양심이 꼭 사랑만 말하지 않죠. 지혜도 말하죠. 그것만 아시고 보시면. 그래서 사랑을 먼저 강조하는 겁니다. 사랑의 마음을, 보리심이 있다면 연민의 마음이 없을 수는 없어요. 이 자비심, 사랑이 제일 중요하니까. 이 사랑의 마음을 갖추고서 지혜로 공성을 깨달아야 된다는 거예요.

불교의 사랑과 지혜

27:29 자비와 지혜를 얘기하는 거예요. 자비를 먼저 갖추고 지혜를 깨달아라. 그 지혜는 뭐냐? 일체의 신묘한 형상을 모두 갖춘 공성을 증득해야 된다. 그 공덕을 증득하는 선정을 닦아야 된다. 선정이라는 건 참나각성이죠. 참나각성을 하는데요 보세요. 참나각성, 선정을 통해서 참나각성을 하는데요 이 참나는요 에고가 자비심을 키우면서 지혜도 길러야 되는데 그러려면 선정에 들어야 된다.

28:00 그런데 선정 속에서 뭘 알아야 되느냐? 일체의 모든 형상을 갖춘 공성을 깨달아야 돼요. 그래서 이 형상을 갖춘 공성이라는 거는 보시를 떠나지 않으며 지계를 떠나지 않으며 인욕을 떠나지 않으며 정진 선정 반야를 떠나지 않고 일곱 번째 이거를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방편이라는, 일곱 번째가요 방편바라밀이라는 게 이걸 잘 쓰는 거예요. 육바라밀을 자유자재로 쓰는 거. 방편이라는 건 형편에 따라 너무너무 정확하게 적재적소에 잘 쓰는 거예요. 육바라밀, 방편바라밀까지 이 7개를, 육바라밀이죠 그 핵심은, 다 갖추고 있는 공성, 일체의 신묘한 형상이라는 게 육바라밀이에요. 일체의 신묘한 형상을 갖추고 있는 공, 이래서 제가 이 구절에서 착안해서 구공이라는 단어를 제가 만든 겁니다. 원래 예전에는 불교에서는요 다 이 단어만 썼어요. 구공(俱空)을 얻으면 1지다. 구공을 얻으면 견도다. 저는 음은 똑같은데 이거(具空)를 씁니다. 이 말에는

29:00 아와 법이 텅 비었다는 쪽만, 공성만 강조되잖아요. 공성만 강조되고 자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불공(不空)의 측면이 너무 생략돼요. 공성만 강조되니까. 저는 자성을 강조하고 싶어서 구공(具空)이라는 단어를 쓰는 겁니다. 제가 만든 단어인데 다른 어디서 구공을 보시면 구독자인 줄 아시면 돼요. 스님들 논문에도 이런 거 나올 때 있더라고요. 강의 보셔서 그렇습니다. 구공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냐? 구일체묘상공(具一切妙相空)을 제가 줄여서 만든 거예요. 구일체묘상공. 육바라밀을, 만법을 갖추고 있는 공입니다. 구공. 제가 이 말씀드리는 게 불교에 이런 말이 원래 있는 줄 알고 막 쓰시면 안 된다고요. 그렇죠. 논문 쓸 때 이렇게 써버리면 지도교수님이 이상할 거 아니에요. 잘못 쓴 줄 알죠. 발음이 비슷한데 글자도 비슷한데 맛이 달라요. 구공(俱空)과 구공(具空)은 두 개의 전혀

30:00 다른 의미입니다. 근데 이게 한 경지라는 거예요, 저는. 완벽히 텅 비어야 완벽히 꽉 채울 수 있으니까. 근데 보세요. 여기 이미 나왔죠. 공을, 선정을 통해 공에 진입해가지고. 선정을 통해 공에 들어갔다는 건 무분별지를 말하는 거예요. 무분별지 속에서 공을 직관했는데 그 안에 보시 지계 인욕이 다 갖춰 있대잖아요. 바로 그걸 구현할 수 있는 능력도 있대잖아요. 그래서 전지전능한 자리라고 하는 거예요. 불성이 뭘 마음대로 해서 전지전능이 아니라 진리를 꿰뚫어보고 있고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리라니까요. 원만 구족하게 전지전능한 자리입니다 불성 자리가. 이걸 접속하는 거는 선정으로 가능해요. 그래서 몰라 하고 접속만 해놓으면 여기서 진리가 인가돼요. 직관이 되는데 이 직관되는 진리가 뭐가 직관되냐? 공성, 텅 비어 있음도 직관되지만 꽉 차 있음도 직관이 돼야 돼요. 그래야 대승기신론처럼 꽉 차 있으니까 “아! 만법의 본성이

31:00 육바라밀이네” 하고 부득이 육바라밀을 하게 되는 거예요. 에고가 변해가요. 그럼 에고가 절대적 보리심을 깨닫고 상대적 보리심을 구현해 나가는 거예요. 유교에서 양심의 본체를 인의예지인 걸 깨닫고 작용으로 측은 사양 수오 시비지심의 사단을 닦으면 성인이 되는 것처럼 보리심의 육바라밀을 깨닫고 본질을 깨닫고 세속의 세계에서 구현하면 부처가 되는 거예요. 불보살이 되는 거예요. 여기는 성현군자가 되고 여기는 불보살이 되는 거. 통하죠. 대승의 세계는 다 통합니다. 왜 기독교는 자꾸 천국을 강조할까요? 대승이라서 그래요. 자꾸 구원과 천국을 강조하는 거는 여기서도 뭐지? 불국토를 강조하는 건 똑같아요. 성불과 불국토를 강조하는 거랑 똑같은 겁니다. 대승이 오면 다 똑같아요. 불보살들이 사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대승은.

32:00 소승은 에고를 다 버리려고 합니다. 불보살 세계를 만들려면 너무 힘들어요. 또 윤회해야 돼요. 복잡합니다. “나 그냥 열반에 들어서 끝내고 싶어.” 합니다. “나 그냥 참나에 들어가서 쉴래.” 이게 소승의 본질입니다. 소승은 어느 한 부분까지만 가는 길을 전부로 포장했을 때 소승이라고 하기 때문에 애초에 소승은 없는 거예요. 오로지 우주는 대승 한길만 있는 겁니다. 어느 부분적 자명에 집착해서 만들어진 진리가 소승인데 그건 방편으로 쓸 때만 아름다워요. 방편으로 부처님께서 제시할 때, 대승을 닦을 근기가 안 될 때, 참나각성이랑 열반 안주라도 시켜놓으려고 방편으로 쓸 때는 아름답습니다. 그 이후에 대승이 등장해서 뿌리를 뽑아준 거예요. 그건 방편이었다. 그래서 법화경이나 모든 경전들이 “그건 사실 방편이었다. 이제 부처 되자. 아라한으로 네가 끝낼 존재가 아니다. 부처되고 끝내자.”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대승이.

방편적 소승 수행

33:03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소승 대승 확실히 아셨을 거예요 오늘. 그래서 내가 수행할 때도 “내가 몰라 한다고 소승 아닌가?” 하지 마세요. 그게 올바른 대승의 길이에요. 그것만 강조해 놓은 걸 소승이라고 하는 거지. 소송 수행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시원하게 몰라 하셔야 돼요. 소승 성자보다 더 잘 몰라를 하셔야 돼요, 몰라 할 땐. 그건 몰라는 단순히 육도의 세계, 육근의 세계, 에고의 세계를 버리는 게 아니라 참나를 만나려고 그러는 거예요. 보리심을 깨달으려고 하는 작업이에요. 보리심을 깨닫고 나면 다시 돌아와서 현상계에서 아버지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듯이 진리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돼요. 그게 불보살입니다. 그리고 그게 불국토 건설, 천국 건설의 사명이에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해야 된다고 그랬죠. 그게 사명이니까. 그래서 보살은 하기 싫은데

34:00 참나를 만날 때마다 “아! 참나가 육바라밀이네. 아쉽다. 참나가 탐진치였으면 되게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나면 육바라밀 해야 돼요. 나눠야 돼요, 참나가 그러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니까요. 이거를 불교식으로는 다르마의 명령이라고 그러고 기독교식으로는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성령을 만날 때마다, 진리의 영이다 보니까 성령을 만날 때마다 진리가 알아져요. “서로 사랑하라.” 나와서 어쩔 수 없이 황금률, 자비를 실천해야죠. 마찬가지로 참나를 만날 때마다 육바라밀의 사명을 받아서 오는 거예요. “나눠라.” 그리고 마음도요, 사명만 주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바꿔놔요. 기본값이 바뀌니까 내 마음이 바뀌어 있어요. 참나를 만나고 나면 할 만하게 돼 있어요. 왜? 참나는 전지전능한 자리이기 때문에 지혜만 주지 않아요. 능력까지 주지. 바꿔놔요. 마음이 관대해져 있습니다. 그걸 제가 간단하게 초긍정의 마음,

35:00 따뜻한 마음으로 변해 있으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초긍정의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분명히 바뀌어 있으십니다. 육바라밀이 구현되는 마음이에요 그게. 그걸 펼치면 육바라밀이 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이거예요. 몰괜자는요 이 참나 자리에 들어갈 때 방편이라면 초긍정과 따뜻함이라는 건 에고가 변해 있을 거라는 얘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몰괜자는요 “차가운 쇠공 버리고 불 속으로 뛰어듭시다” 이 소리고요. 불속은요 몰괜자 하면 불 안에 들어가 계실 거예요. 이거 이런 느낌으로 주로 쓴다면 초긍정 따뜻함을 제가 얘기하는 거는요 그러고 나면 이 차가운 쇠공인 에고도 뜨거워져 있을 겁니다. 초부정적이던 친구가 초긍정으로 바뀌어 있고 차갑던 친구가 따뜻해져 있을 겁니다. 에고가 바뀐 걸 제가 강조하고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즉 상대적 보리심 차원에서 얘기한 거라고요. 전문 용어로 얘기할게요.

상대적 보리심

35:57 몰괜자는 절대적 보리심 깨닫자고, 정혜쌍수 닦자고 한 얘기라면 초긍정이니 따뜻함이니 이거는 상대적 보리심을 실천하자고 제가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상대적 실천인 상대적 보리심의 실천은요 육바라밀을 잘한다는 건 어려워요. 그러니까 잘한다는 데 초점 두지 마시고 “한다. 순응해서 한다. 이게 하늘의 뜻이니까 아버지 뜻, 하늘의 뜻을 구현해내겠다”는 사명감으로 접근하시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나를 만나는 게 칭의(稱義)고 기독교적으로 육바라밀을 구현하는 게 성화(聖化)입니다. 에너지체 만드는 게 영화(榮化)고. 기독교랑 대승불교는 하나라는 이유가 제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교리적으로 하나예요. 유교랑도 하나입니다. 양심 구현하자는 거예요 결국. 사랑 구현, 자비 구현, 보리심 구현, 양심 구현, 이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하나라는 게 보여서 제가 말씀드린 거지 억지로 합쳐서 드린 말씀

37:00 아니에요. 이제 좀 시간 나니까 귀류논증 중관파인 겔룩파의 광명심 한번 알아볼까요? “기분 좋았는데요. 여기서 끝내셔도 됩니다” 막 이러시고. 한번 볼까요? 똑같은 이 그림이에요. 이 그림을 여기다 그려놓으니까 위상을 알겠죠. 이쪽은 에고 쪽이죠 간단하게. 그런데 귀류논증 중관파는요 참나를 설정을 안 해요. 그러니까 이 에고 자리에다가 정광명을 놓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광명이라는 건 달라이라마는 무상한 걸로 봐요. 무상한 걸로. 이 이후 본격적으로 설명 들어가는데 오늘은 여기서 끝날 것 같아요. 무상한 걸로 봐요. 이거를 뭐라고 전문용어로 연기적, “연기하는 의식 연속체”라고 합니다.

달라이라마의 무분별지無分別智

38:01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봐요. 연기하는 의식 연속체, 즉 끝없이 생멸하고 있어요. 끝없이 생멸하고 있는데 영원한. 그런데, 그런데 이게 연기적 의식 연속체인데요. 절대 안 사라져요. 영원불변이에요. 아니 불멸이에요. 소멸은 안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을 하죠. 생기고 소멸하는데 이 자체는 안 사라지니까 영원하다고 보는 겁니다. “영원불멸” 하는 이 정광명이 에고의 위상에 놓여지고요. 이 연기적 의식 연속체가 무분별지를 통해서 뭘 직관하느냐? 공성을 직관한다는 식의 구조입니다. 좀 다르죠, 설명이. 이해되시겠어요 여기까지? 그러니까 여러분 무분별지를 닦는 그 정광명의 마음이 영원불변의 마음은 아니라고 본다는 거예요 그냥.

39:01 그런데요 그거 빼고는 다 똑같아요. 어떻게 보면요 귀류논증파랑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뭐만 인정해 주면 돼요? “그래 변해. 변해. 변해. 변하는데 영원해. 영원하지.” 그리고 정광명이니까 진리를 아는 마음은 정광명이에요. 진리를 직관하는, 직관한다는 거는요 주객이 없다는 거거든요. 그럼 뭔지 아세요? 무분별지가 갖는 이 말은 의미는? 진리랑 이 정광명이 하나라는 얘기예요. 무분별하다는 건 주객이 없는 중에 안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공성의 진리를 직관한다는 건요 하나로 만났다는 거예요 둘이. 한 덩어리였다. 주객을 나눌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정광명인 내가 있고 공성의 진리인 너가 있어.” 이렇게 알아가는 건요, 이렇게 알아가는 거는 에고의 세계에서도 분석밖에 안 돼요. 이렇게 주객이 있는 건 분석이라

40:00 그래요. 주객이 없는 거를 지금 이걸 직관이라 그래요. 직관할 때는 주객이 없어요. 나와 남의 분별이 없어요. 즉 진리가 나요 내가 진리인 자리에요. 이렇게까지 들어가서 깨달을 수 있는 의식이 정광명이에요. 공성의 진리를 그냥 직관할 수 있는 자리가 정광명이에요. 그럼 뭐 설명을 들어보면 거의 참나죠. 근데 왜 달라이라마가 왜 절대 부정하는지 아세요? 이거를 영원불변하다고까지 해버리면 힌두교의 참나랑 구별이 안 돼서 예요. 구별 안 된다고 진리를 이렇게 하시면 돼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럼 우리가 힌두교랑 똑같아지는데요.” 뭐 이러고. 진리가 중요한 거예요? 아니면 문파를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문파를 유지해야 되니까”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부분 입장 차이. 더 자세히 해드릴 거예요 나중에. 근데 일단 여기까지만 보세요. 자 겔룩파 입장에서는요 정광명은 그러니까

41:00 무분별지도 들어야 되고 영원불멸하기도 해야 되는데 또 생멸해야 되고 무상해야 되면서. 왜? 무상하지 않으면, 무상하지 않으면 자성이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걸 인정하게 돼요. 불변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귀류논증 중관파는 참나라는 불변의 실체를 인정해버리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부정합니다. 부정하고 다만 이 무분별지를 통해 깨닫는 이 공성이 승의(勝義)의 진리다. 궁극의 승의의 진리. 승의제(勝義諦)라고 하죠. 궁극의 진리고. 여기는 이 공성이란 말은 무자성이라는 말이고. 무자성의 세계는 독립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고 일체법은 언어로 존재하고 세속제는 연기일 뿐이요 승의제만이 공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냥 이 공성의 진리를

42:00 깨닫는 게 불법이다. 결국 뭐냐? 이 공성이라는 건 연기하는 거다. “연기하니까 공이다를 깨닫는 게 최고의 궁극의 진리다.” 이게 다입니다. 이상하죠? 이건 현상계적 진리지 절대적 진리가 아닌데. 보세요. 이분들은 세속제와 승의제를 나누는 기준이 좀 달라서 그래요. 보세요. 여길 보시면 이게 승의제예요. 진리의 세계고 에고의 세계는 세속제(世俗諦)예요. 세속의 세계죠.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불멸의 청정광명심의 세계를 말하거든요. 근데 이런 청정광명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설명하다 보니까 정광명은 그냥 인식하는 의식일 뿐이고 진리가 가장 영원한 승의의 진리가 되죠, 이 공성의 진리가. 그래서 이분들은 철저히 조금

43:00 현상계적 사고입니다. 절대계로 들어가지 않는다고요. 이분들이 말하는 승의제, 일반적인 승의제는 절대계를 말하거든요. 세속제는 현상계. 근데 이 귀류논증파에서는요 이렇게 보셔야 돼요. 지금 존재하는 것들은 이쪽이 세속제고요 이쪽이 승의제인데 절대세계를 의미한다기보다, 보세요, 연기하는 세계고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쪽은. 무자성이에요. 그런데 연기하니까 무자성이고 공성의 세계예요. 무자성과 공성을 승의제라 그래요, 그냥. 그러니까 절대계가 지금 빠져 있다는 거 아시겠어요? 정광명 속에서 직관하는 절대계를 빼고 얘기하면, 이 사람들도 알아요, 정광명 속에서 직관이 이루어진대요, 공성 직관이. 이게 진짜라는 건 얘기해요. 이게 찐인데 이거는 차치하고 주요 논리는 다 여기(세속제)서 이루어집니다. 자 눈에 보이는 게 연기하고 있지. 지수화풍과

44:00 오온과 사대의 작용이죠. 연기하고 있죠. 이거 하나도. 여기에다 이제 펜까지 이름까지 얹어줘야 되죠. 언어까지, 결국 언어까지 해서 연기를 이루는 겁니다.

공성의 직관

44:11 상호의존적이에요. 이 지수화풍과 펜이라는 이름이 또 나의 감정이 만나가지고 이 펜에 대한 이 세계가 형성돼요. 그런데 따져보면 무자성이라는 건요 연기하지 않는 독립 불변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이 펜에 지금 연기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다 상호의존적으로 만들어져 있죠. 이 펜을 구성하고 있죠. 내 법계에 펜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펜은 있어요. 연기하면서 언어로 있어요. 그런데 따져보면 영원한 게 없어요. 따라서 공이라는 거예요. 끝. 현상계 설명 끝냈어요, 지금. 정광명은 가야 된다고는 얘기만 하고요 달라이라마는 항상 “하지만 이걸 직관해야만 1지에 도달할 수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45:00 여기는 아직 분석의 영역이다. 분석을 떠나야 된다는 말만 하지 분석은, 계속 여기서 분석해서 끝내버려요. 이야기를 완결지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기를 승의제라 그래요. 지금 승의제까지 다 깨달으신 거예요. “공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 거예요. 세속적으로는 이 펜은 있지만 승의적으로는, 궁극의 진실에서는 없다. 현상계 안에서 얘가 연기하니까 없다라고 했을 때 연기는 세속제가 되고 없다는 거는 궁극의 진실이 돼버려요. 끝. 그래놓고 “궁극의 진실을 정광명에서 직관할 수 있다.” 뭔 말일까요? 이런 걸 한 번도 달라이라마는 정확히 더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끝나요. 근데 정광명에서 직관한다는 건 다른 걸 수가 없잖아요. 께왓다경에서 말한는 석가모니께서 “순수의식 상태에서는 오온도 없고 지수화풍, 사대도 없더라.” 그 직관밖에 없어요, 존재하는 건.

46:00 그렇죠. 무분별지의 직관이랑. 무분별지 자리에서는요 아무것도 없어서 공하다고 직관하는 거예요. 자 이상하죠. 여기서는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게 궁극의 진실이라고 했다가 마지막 무분별지에서는 그냥 없어서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사실은 모순돼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요. 왜? 여기는 신비체험의 얘기로 치부해 버려요. “이거는 직관해봐야 알아.” 얘기 안 해요. 여기만 계속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것만 한 20년 배우고 직관은 나중에, 나중에. 밀교적 수련이나 체험은 나중에 하라고 그럽니다. 체험보다 뭐가 중요하다? 교리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가 겔룩파의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한 20년씩 저 교리만 가르쳐요, 지금 가면. 10년 배워도요 이제 이런 중관파 교리의 기초나 배우는 거예요. 좀 뭔가 이상하죠? 그럼 만약에 이렇게까지 다

47:00 논리로 무장해서 답 다 내신 분이 명상 속에서 깨닫는 그 공성이라는 건 뭘까요? 그러니까 이게 모순될 수 있다고요. 이 논리만 따라가다 보면 그냥 여기는 오온이 없어서 없는 거고, 여기는 오온이 연기하니까 궁극의 진실 차원에서는 없다는 거고. 유기적이지 않아요. 저는 이것, 이 논리를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부분적 자명이라는 거죠. 연기하니까 공하다. 이거 맞아요. 그렇잖아요. 이거 연기한다는 측면에서요 고정된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현상계 차원에서의 자성 없음인 거죠. 절대적 차원에서의 자성 없음은 없어서 없는 거예요. 절대적 차원에서 자성 없음은요 차별상과 오염상이 없어서 없는 거예요. 현상계 차원에서 자성 없음은 연기하니까 없는 거예요. 둘 다 수용하시면 돼요. 둘 다 수용하는 게 유식학(唯識學)입니다. 유식학은 둘 다 수용해서 얘기해요.

유식학의 무자성無自性

48:00 그래서 유식학은 자성 없음을 3단계로 논해요. 어떻게 논하는지 이것까지만 맛 보여드릴까요? 유식학 들어가면 이게 다예요 유식학은. 유식학도 반야경 연구하다 나온 거예요. 용수보살식 이 주장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깊은 논의를 할 수가 없지. 이거는 부분적 자명이다”라고 유식학자들이 주장했어요. 그들의 주장이 뭐냐 하면요 연기하니까, “오온 사대가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 맞아. 이거를 생무자성(生無自性)이라고 그랬어요. 즉 “생겨난 게 독자적으로 생겨난 게 없고 항상 상호의존해서 생겨나니까 자성이 없지.” 그리고 언어를 주목했어요. 펜이라는 언어는요 펜이란 영원한 물건이 있을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펜 그러면 영원히 펜이어야 되잖아요. 실상에서는 영원한 펜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언어 자체가 갖고 있는 망상에 의한 무자성. 애초에 실체랑 맞지 않는 이름을 갖고 있다. 언어를 붙인 데서 오는 무자성, ①상무자성(相無自性). 연기하면서 발생한다.

49:00 그러니까 상호의존적인 발생, 상호의존적 발생이기 때문에 독자적 발생이 없어서 ②생무자성(生無自性). 그리고 마지막에 이 정광명에서의 직관은 ③최고의 궁극의 의미의 무자성(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차별상과 오염상이 없어서 무자성. 유식학은 이걸 다 껴안아버립니다. 놀랍죠. 중관파보다 유식학이 훨씬 설명을 잘했어요. 근데 티벳에서 유식학 얘기하면 “우우!” 이럽니다. “우우! 유식(唯識) 우우! 만법이 내 의식의 작용이라고. 우우! 막 이 세 가지로 무자성을 설명한다고. 우우! 우리 귀류논증이 짱.” 밑도 끝도 없이. 이해되시죠. 오늘 유식학까지 살짝 넘어갔습니다. 근데 유식학 이해되지 않아요? 너무 설명 잘하지 않았어요? 퍼펙트한데. 맛만 보여드렸어요. 이제 유식학의 세계로도 이제 곧 들어갈 거예요. 반야심경 끝나면 유식학으로 갈 겁니다.

50:00 그래서 “단계적으로 결국 청정광명심의 그 공함을 설명하려다가 이런 이론들이 끝없이 나오고 있구나” 하는 걸 아시는 게 중요합니다. 청정광명심만 잡으면 돼요. 이런 거 몰라도 돼요. 세 가지 무자성, 몰라도 돼요. 참나에는 없어요. 간단하게 이걸로 요약할게요. 참나에는 없습니다. 에고에는 있어요. 이해되시죠? 겔룩파식의 그런 귀류논증 중관파에서 말하는 공성은 진짜 법공이 아니에요. “현상계에 존재하는 법이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논리는 소승불교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연장선일 뿐이에요. 대승의 법공은 “만법은 청정광명심 자리에서는 본래 없고 만법 자체가 청정광명심의 나툼”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대승의 혁신적인 선언입니다. 왜? 석가모니께서는

51:00 청정광명심 자리에서는 텅 비어 있다는 얘기만 했지 일체가 거기서 나온다는 얘기는 안 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초기불교가 소승적이라고 하는 거고. 대승불교는 거기서 일체 만법이 나툰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만법이, 오온이 공하다”라는 걸 주장하면서 등장한 겁니다. 그게 제법무아랑 비슷해 보이니까 용수보살은 제법무아의 논리를 가지고 만법에는, “아(我)가 없다는 건 만법(萬法)에는 고정된 독자적 실체가 없다는 거다. 그게 법공이다. 소승 성자들도 알았다. 그게 대승에 와서 강조된 것뿐이다. 만법에는 독자적 실체가 없다. 왜? 연기하니까 없지 않냐.” 소승식 설명이에요. 소승식 변종 법공입니다. 근데 안타까운 거는 반야경이 이미 대승 법공을 다 외쳤는데 후대에 나온 용수보살이 그걸 소승식으로 틀었다는 거예요. 더 잘 풀어준다 그러면서. 안타깝잖아요? 화엄경 반야경 이미 다 등장해서 진리를 노래하고 있는데 대승의 진리를. 가장

52:00 제2의 석가라는 분이 등장해가지고 잘 풀어줬다고 풀어준 게 이겁니다. 틀어버린 거예요. 그 왜곡이, 지금까지도 그 왜곡이 벗겨지지 않고 있는 거예요. 진리 그대로 지금 경을 못 읽고 용수보살의 눈으로 진리를 보면 다 잘못됩니다. 안타깝죠. 그분이 이것도 하나의 방편으로 쓰신 건데 이게 방편이 독이 돼가지고 오히려 진리를 이해하는 데 방해를 주고 있다. 경전을 이해하는 데 방해를 준다. “일체의 우주 만법은 청정광명의, 공적영지 청정광명의 나툼일 뿐이다”라고 보고 체험적으로도 확인하시면서 가셔야 안에서 육바라밀이 샘솟는 경지, 샘솟기만 해도 돼요. 잘할 필요 없어요. 샘솟기만 해도 여러분이 견도(見道)를 하고 1지 보살에 들어가서 당당히 보살이 되실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살도를 설명 안 하고 보살도를 하자 그러면요 소승인지 대승인지도 알 수 없는 도를 닦게 됩니다. 예.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5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