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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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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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공종空宗, 상종相宗, 성종性宗
강의일자 2023. 09. 09. 土.
게시일자 2023. 12. 02.
동영상 길이 41:02
강의 중 인용 도서 8천송 반야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7u8AdiqiuUg


상락아정常樂我淨

00:07 8천송 반야경 자 드디어 지난 시간에 티벳 밀교도 한번 봤고요. 지금 우리가 하나씩 정리해 가고 있는 거 아시죠. 힌두교도 한번 봤고 티벳 밀교도 한번 정리했고 이제 반야경 쪽으로 왔습니다, 저희가. 부처님 가르침이 이제 정광명 사상이요 청정광명(淸淨光明) 이게 힌두교에서 참나라고 하는 거예요. 순수자각 참나 이게 반야경 계통에 오면요 참나를 공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만 달라지는 거예요. 똑같아요. 정광명(淨光明)입니다. 청정 광명 순수의식이에요. 순수의식 빛나는 순수의식 순수한

01:00 순수하고 영원한 현존. 여기다가 뭐만 더 보태면요 지복에. 이것만 보태면요 보세요. 순수하다 청정이죠. 지복이다 락이죠. 영원하다 상이죠. 현존한다. 내가 있습니다. 나라고 해서, 여기서 나라는 것은 에고의 내가 아니에요.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대로 참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 이름이고. 하나님 이름이에요.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이것 말고 다른 이름이 있어요?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자 말고 있어요. 하나님을요 기독교에서 영원한 현존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현존 영원히 현존하신다. IM 상태. 나는 스스로 있는

02:00 나다. 지복에 순수한 영원한 현존. 이게 지금 힌두교에서 말한 참나예요. 그래서 대승불교 나중에 다 할 겁니다. 대승불교 경전 중에 열반경, 대승열반경이 있습니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아예 대놓고 인정합니다. 참나라고 상락아정을 강조하거든요. 대승열반경에서 상락아정의 아(我)가 진아를 말한다라고 아예 인정합니다. 힌두교 애들이 오히려 참나 설명을 잘 못하길래 내가 참나 부정했지 진짜 참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아예 때려버립니다. 대승불교에 오면.

공종空宗, 상종相宗, 성종性宗

02:42 그래서 대승불교는 참나불교예요. 이제 와서 참나가 있네 없네 하는 이 모든 문제 사단이 참나를 공으로 설명한 반야, 이 반야부 계통, 반야경 계통. 반야부라고도 하고 반야경 계통이에요. 공종.

03:00 공종의 사상 때문에 지금 오해가 일어난 겁니다. 공하다고 하는 사상. 그래서 참나는 공하다라고 설명하니까 공한 것만이 아니고 불공(不空)의 영역이 있다. 공만 설명한 것은 반쪽짜리다. 공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이게 유식학(唯識學)입니다. 유식학이 등장해서 상종(相宗)이라고 합니다. 공에 대항해서 상, 현상계의 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있어요. 공만 얘기하면 안 된다. 공은 반쪽짜리다 여기서 그래서 이 가르침은 미료(未了), 료(了)는 완료됐다는 거예요. 미료는 완료되지 않았다. 모든 걸 다 밝힌 가르침이 아니다. 미료의 가르침이. 이쪽은 료의 진짜 깨달은 궁극의 가르침은 이거다. 유식학이다.

04:00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공에 대해서 불공이 다른 게 아니에요. 진여의 세계가 있다. 텅 빈 것만이 아니다. 진여의 세계다. 이 진여의 세계를 더 구별해 보면 태극처럼요 무분별지, 그 지혜가 뭘 알아차려요? 진여의 진리를 알아차려요 궁극의 진여의 세계를 들어가 보면요 이 궁극의 세계 안에서 또 주객을 나눠보면 결국 지혜가 뭘 알아차려요? 진리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알아차림을 무분별지라고 해요. 분별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림. 분별없는 중에 여러분의 지혜가, 즉 무분별의 지혜가 진리를 알아차려요. 이 자리가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는 거예요. 이게 진여 자리다. 단순히 공으로만은 설명하면 안 된다. 이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05:01 유식학이. 그래서 이 두 개를 종합해서 공종, 상종을 종합해서 나온 게 성종(成宗)이 나와요. 이 대표적인 경전이 능가경이나 대승기신론입니다. 대승기신론이 등장합니다. 이게 이제 선불교의 논리가 다 이거예요, 선불교는. 여러분이 흔히 가서 절에 가서 불교도 하고, 배운 건 성종이에요. 우리나라 불교는 조계종이 성종이란 말이에요. 선불교 조계종이 선불교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공종이 엄청 들어와 있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이 두 개를 종합하다 보니까, 두 개를 종합하다 보니까 공도 갖다 쓰고 상도 갖다 쓰고 다 갖다 썼던 거예요, 성종이. 그러다 보니까, 공의 논리 중에 좀 잘못된 공의 논리들이 많이 들어와 가지고

06:00 개념을 흐리고 있는 겁니다. 성종은요 확고해요. 성종이 뭔지 아세요? 청정광명심종이에요. 유식학은요? 이 상을 강조하다 보니까, 진여를 이렇게 강조하면서도 실제 이 모든 상의 근원은 어디라고 보겠어요. 보세요. 이거 차이입니다. 모든 상은 사실 공하다. 공종. 모든 상은 진여에서 나왔다고 못해요. 진여는 영원불변의 세계거든요. 여기는 불변의 세계입니다. 유식학만 해도 개념에 걸려가지고요 여기는 영원불변의 세계니까. 상들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러면 유식학 하면? 목까지 올라오시는데. 아뢰야식에서 나왔죠. 팔식설. 상은 팔식이 만들어내거든요.

07:01 아뢰야식을 강조합니다. 여기는 공. 공은 자성이 없다는 거다. 무자성을 강조합니다. 자성이 없다. 일체 만물은, 일체 만상에는 자성이 없다. 일체만상은 다 텅 비어 있다. 자성이 없다. 이쪽은요? 일체만상은 아뢰야식이 만든 거다. 너의 의식이 만든 거다. 너의 의식의 작용이다. 성종은요? 일체만상은 청정광명심의 작용이다. 이게 진여예요. 진여가 바로 만들었다. 진여가 바로 상 만들었지. 진여랑. 보세요. 영원불변인데 상은 변화의 세계죠. 유식학만 해도 아직도 미료인 거예요. 여기서 볼 때 둘 다 미료인 거예요. 얘는 뭐에 걸려 있어요? 불변의 것에서 변화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유식학자들만 해도. 인도식 논리를 배운 사람들이라

08:00 불변에서 어떻게 변화가 나오는지 설명을 못 해요. 따라서 변화, 모든 변화는 아래에 아뢰야식이 만듭니다. 그리고 이 아뢰야식이 만드는 모든 변화의 그 너머에 궁극에 진여가 있어요. 결국 우리는 진여를 깨달아야 돼요. 이런 식의 주장이에요. 여기는 결국 궁극에는 공이 있어요. 텅 빔이 있어요. 궁극에는 진여가 있어요. 그런데 텅 빈 공과 꽉 찬 불공의 이 진여가 둘이 아니라는 걸 유식학은 이미 주장했습니다. 이게 둘이 아니다. 여기서 오히려 너무 공에 집착하고 있다. 그래서 텅 비어 있다는 측면에서 유식학은 3무자성이라는, 맞다. 무자성 맞다. 그런데 다만 네 말은 맞는데 무자성이라는 측면은 자성이 없다는 측면도 맞다. 왜? 진여의 세계는 원래 공하거든요. 공성의 세계잖아요. 이것은 유식학도 인정해요. 진여는 원래 텅 비어 있어요. 그러니까 무분별지가 가능하죠. 텅 비어 있는 지혜, 이게 공적영지 아닙니까. 공적영지를

09:00 강조하면 성종입니다. 그런데 성종에서는 이미 통합된 거예요. 공성과 우주를 낳는 모든 만상의 근원인 영지, 한마음, 이래서 한마음교고요. 일심, 한마음, 진심, 참마음 이런 걸 강조하면 공적영지, 여기서 말한 공적영지, 이걸 강조하면 이게 주인공, 이런 것까지 나가면요 이게 성종이에요. 평상심. 아시겠죠. 청정광명심이 제대로 자리 다시 복권한 겁니다. 유식학에서만 해도 청정광명심이 인정받으면서도 우주만상의 근원으로는 인정받지 못해요. 아뢰야식이 만들어야 되거든요. 변하는 것은 변하는 게 만들어야 돼요. 유식학만 해도 아뢰야식 사상이에요. 성종이 오면 그냥 간단하게 처리해 버려요. 공이면서 상이죠. 보세요. 공이면서 텅 비어 있으면서

10:00 우주 만상의 근원이에요. 진공(眞空)이면서 묘유(妙有), 묘하게 만들어내요. 불변이면서 변화시켜요. 논리를 넘어가 버렸습니다. 성종은. 그래서 유식학이 못 받아들여요. 불변이면서 변하라니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논리적으로 안 맞잖아.” 성종은 뭐라고 했겠어요? “논리를 떠난 세계잖아.” 얘들이 논리에 빠진 여기 공성의 중관파, 유식파 다 논리에 빠졌어요. 근본적으로 논리의 함정에서 못 벗어나요. 벗어나 버려요 공상은 둘이 아니다. 공상불이(空相不二) 해버리면 끝입니다. 아주 쉬워요. 성종에서는 둘이 아니다. 불교 전체를 지금 보면 이게 다입니다. 삼 박자 사고. 공상(空相) 충돌해서 성(性)이 나왔다.

11:00 그런데 골 때리는 것은 이렇게 등장해서 역사적으로 이게 나오기까지 꽤 걸려요 BC 이런 공종이 BC 100년부터 지금 8천송반야경이 BC 100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데 공이 강조되다가 상이 강조되다가 아뢰야식이 강조되다가 결국 다시 참나가 나와요. 이게 뭘 얘기하느냐? 결국 이게 다인데 한 부분 부분들만 드러난 거예요. 참나의 공한 모습. 이렇게 보셔야 돼요. 참나가 이때 등장하고 이때 없었다고 보시면 안 돼요. 왜 그런지 아세요? 중관론마저도 결국 무분별지를 인정한단 말이에요. 무분별지를, 청정광명심을 인정한다고요. 중관론마저도 청정광명심을 이미 인정하기 때문에 공도 청정광명의 공이죠 근본적으로는. 다만 중관론은요, 이 청정광명심의 공 말고도 현상계의 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12:00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을 논리적으로 공으로 얘기하려고 해요. 청정광명심은 본래 공하죠. 청정광명심에는요 부처님이 얘기하셨죠. 오온도 4대도 어떤 이원성도 거기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청정광명심에는요 5온 4대 이원성이 없어서 공인 거예요. 기억하시죠. 께왓다경에 무한한 의식 안에서는 오온도 사라지고 4대 지수화풍 4대도 사라지고 길고 짧다 아름답다 추하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진다. 그러면 청정광명심 상태는 뭐만 직관하겠어요? 무분별지가 청정광명심인데 청정광명심으로 직관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게 뭐겠어요? 1차적으로? 공이요. 텅 빔을 직관해요.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이해되시면 불교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 겁니다. 자 제가 그리는 그림으로 이해해 보시면 쉬워요

공적영지性宗

13:02 여러분은 공적영지교를 지금 우리가 성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공적영지교예요 수심결은 공적영지교의 경전입니다. 성종의 경전이에요. 반야심경은 공종의 경전입니다. 유식삼식송은 상종의 경전입니다. 구분하세요 이제. 서로 달라요. 그러니까 주력으로 설명하려는 부분이 달라요. 이걸 싹 꿴 게 지금 성종이에요. 불교 전체를 꿰어버린 게. 그래서 이걸 대표적인 게 대승기신론이 잘 깼습니다. 아주. 공종과 상종을 다 꿰버려요. 아뢰야식도 등장시키면서 공과 불공을 밀고 나가요. 그래서 이 진여에는 공과 진여가, 불공이 다 있다 하면서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불변과 변화를 다 포괄해버립니다. 대승기신론이. 원효 스님이 대승기신론을 그렇게 중시했던 게 그런 이유입니다.

14:00 요거 하나면 불교 총정리가 되니까. 이 전통이 우리나라 전통입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통해서 성종의 핵심 종지인 일심(一心) 사상, 한마음 사상을 밝혔고요. 그게 그다음 또 보조 지눌을 통해 수심결로 더 극명하게 천명되고요. 공적영지라는 이름으로. 그게 조선 시대에 와서는 선불교를 통해, 고려 말에 들어온 선불교로 이 공적영지를 곧장 찾아라. 주인공 찾아라. 평상심 찾아라. 진심 찾아라. 한마음 찾아라. 공적영지 찾아라. 이게 선적 전통을 통해서 또 내려와서 지금 우리 조계종까지 온 거예요. 천태종도 다 마찬가지예요. 성종이에요. 천태종도 성종이고. 한마음 안에, 한마음 안에 공 이런 3단계 공 상 성의 세 측면이 다 있다. 이걸 천태종은 공관 이쪽은 현상계를 관찰하는 가관(假觀) 공관(空觀) 이쪽(성종)은 중도관(中道觀) 이걸 꿰뚫어서

15:00 함께 관찰한다. 공적으로 공의 측면을 관하고, 현상계 측면을 관하고 마지막에는 두 측면을 삼박자 사고를 통해 통합적으로 관한다. 여기 천태종의 일심삼관(一心三觀) 사상이거든요. 자 천태종 조계종 이런 뭐 태고종 포함해서 대표적인 우리나라 종단들은 성종의 종단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이거에 강해요. 통합에 강하죠. 통합시켜서 좌우 통합, 이 공상통합 이걸 다 시켜서 녹여냈던, 신라 때부터 녹여냈던 우린 전통을 갖고 있어요. 불교 전통. 이제 와서 모른 척하고 헷갈려 하고 이럴 필요가 없다. 자 그림으로 그려 드릴게요. 공적영지를 이해해 보시면, 공과 불공이 별게 아닌 게 텅 비어 있단 말이에요. 왜 반야경은 공을 강조했을까? 이걸 한번 이해해 보자는 거예요. 청정광명심을

16:00 그림으로 그리면 이것(⊙)입니다. 학당 로고예요. 이 부분이 공입니다. 공성(○) 영지(ㆍ) 이걸 공적(空寂)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공적영지 텅 비어있음만 표현하려면 원을 그리면 돼요. 점 하나를 딱 초점을 두면 이게 알아차리는 주체라는 걸 표현해요. 텅 비었는데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이게 진공(○)이에요. 진공(眞空)의 세계고 이게(ㆍ) 영지(靈知)가 묘유(妙有)입니다. 때문에 우주 만상이 다 나타나거든요. 텅 빔만 있었으면 안 나타났겠죠. 텅 빈 중에 알아차린단 말이에요. 이 알아차림이 텅 비어 있어요. 부처님 얘기 들어보세요. 모든 곳에서 빛나는 무한한 의식, 만법을 알아차린다. 모든 곳에서 빛난다는 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각 감정 오감을 알아차리는 의식이라는 겁니다. 그게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거예요.

17:00 여러분의 육근밖에 여러분은 모르시죠. 여러분 육근, 그 모든 걸 누가 알아차리고 있죠? 정광명(淨光明)이요. 그러니까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죠. 이해되세요?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는 의식이 있다. 그 의식 안에는 오온(五蘊)도 사대(四大)도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는데 빛나고 있는 의식을 지금 그려놓은 거예요. 그 의식이 알아차립니다. 그 의식이 뭘 알아차리느냐? 처음에 뭘 알아차리겠어요? 공성(空性)을 직관해요. 자기 공성을. 텅 비었다는 걸 직관해요. 부처님이 얘기하셨잖아요. 오온이 없더라. 여기 다 간단하게 오온이 없다는 걸 직관해요. 이 자리에는 어떤 만법이 없고 오온이 없구나 하는 걸 직관해요. 그러면 공의 측면이죠, 이게. 이게 지금 공(空)의 측면인데 그럼 불공(不空)의 측면에서는요? 자성(自性)을 직관합니다. 이 안에 자성이 꽉 차 있구나라는 걸

18:00 직관해요. 벌써 보세요. 청정광명한 자성을 갖고 있죠. 청정광명한, 자기 자체가 갖고 있는 자성을 직관하는데요. 일단 자성이 청정광명한 의식이라는 것도 그 의식은 영원히 그 자성이 뭐예요? 불변의 본성이 있죠. 청정광명하다는 본성이 있어요. 순수하다. 상락아정이요. 순수하다 영원하다 지복이다 항상 알아차린다 하는 본성이 벌써 4개나 꽉 차 있죠. 불공입니다 이게. 대승기신론이 이 논리로 설명해요, 불공을. 대승기신론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던 작업이에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여기서는 또 무한한 자성이 들어있다니까요. 4가지 기준으로 보면 상락아정, 여섯 가지로 보면 육바라밀. 육바라밀의 자성이 들어 있는 걸 관찰합니다. 텅 비어 있다는 측면은 뭐예요? 공. 그래서 다른 식으로 말하면 함께 구(俱)자 써서

19:00 일체가 공한 측면(俱工)이고요. 그 안에 분명히 자성들이 있는 걸 알거든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불변의 자성의 종자들이 있는 걸 알아요. 그러면 이 부분은 뭐라고 하겠어요? 구족(具足) 꽉 차 있어요. 구족은 모두 갖춰져 있다는 거예요.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어요.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게 갖춰져 있어요. 이거는 공적영지를 전제해야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이 영지(靈知)가 알아차려 주는 겁니다. 영지가 알아차려 주는 거죠. 제가 이 그림 그려드린 게 이 그림(⊙→⊛)만 이해하시면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일타강사 같죠? 이것만 이해하시면 돼요. 이거 다 지금 이 그림 하나로 이게 다 설명이 되는 겁니다. 공적한데 영지가 있어요. 이 영지가 하는 짓이 뭐예요?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는데 결국 보세요. 지가 지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공적영지가 원래 하나잖아요. 영지가 공적을 알아차린다는 건

20:00 지가 지를 알아차린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대상화해서 알아차릴 때 첫 번째 공하다는 걸 알아차려요. 다음에는 공한 중에 6개의 종자가 꽉 차 있다는 걸 알아차려요. 공한 중에 보시, 공한 중에 어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보시의 종자, 그러니까 나누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요. 나눔이라는 불변의 원리, 종자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요. 또 절제해야 된다는 지계, 인욕 수용해야 된다는 것. 이걸 어떻게 알아차리냐면 여러분 참나 상태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오온(五蘊)이 없다는 것도 알아차려지지만 동시에 텅 빈 중에 알아차리다 보면요 결국 뭐냐 하면요 거기는 나와 남이 없어요. 나와 남이 거기 없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계에 나왔을 때도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나눌 수 있어야 돼요. 절대계에서 없었기 때문에. 청정광명심에서는 나와 남의 구분이 없었다고요. 즉 나와 남을 둘로 보지

21:00 않았어요. 그렇죠? 광명에서는 그러니까 보시의 종자가 있다는 겁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종자, 자성이 있고요. 여기서는 지계, 절대 이 자리에서는요 그 청정광명 상태에서는 더럽혀짐이 없습니다. 탐진치의 더럽혀짐이 없어요. 즉 탐진치에 지지 않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계, 계율을 지킬 수 있는 종자가 있어요. 절제의 종자가 있어요. 그다음 인욕, 그 자리에서는 참나는 성내지 않습니다. 참나는 조금도 못 받아들이는 게 없습니다. 그 상태, 조화로운 상태 그래서 인욕바라밀의 종자가 있다는 겁니다.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참나의 속성을 현상계에 끄집어내 쓰는 거예요. 이 덕목들이 우리가 만들어낸 덕목이면요 인위적입니다. 이건 인위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참나 상태만 들어가 보시면, 거기는 나와 남이 없고요. 니 것 내 것이 없고요. 거기에는 분노가 없고요. 못 받아들이겠다는 게 없고요. 거기는

22:00 오염되는 게 유혹에 지는 게 없어요. 유혹이 없어요. 거기에서는 청정하죠. 파괴가 없다고요. 자리에서는요 정진, 나태가 없습니다. 첨나는 나태한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정진 자체라고요. 지계 그 자체, 인욕 그 자체, 그리고 참나는 늘 깨어 있어요. 선정 그 자체예요. 참나는 자명해요. 반야 자체입니다. 무지라는 게 없어요. 참나 상태에서는 자명 그 자체예요. 참나에서 구현된 속성입니다. 자 이게 중요한 게 구현된 속성이에요. 구족(具足)돼 있다는 게 이미 구현돼 있는 부분이 있고요 구족돼 있다는 거에는요 구현되지 않은 것도 있어요. 갖춰져만 있지 원리가 구현되고 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건요 갖춰줘는 있어요, 원리가. 상락아정이 있다면 무상의 원리도 있겠죠 같이. 구현은 안 되고 있어요. 한 생각이 일어나야 구현됩니다, 무상 고 무아가. 현상계에서만

23:00 구현되는 원리가 있다고요. 하지만 이미 갖춰져 있다고 보는 거예요, 진여의 세계에. 그런데 갖춰져 있지만 구현되지 않은 게 있고 구현되는 게 있습니다. 저 육바라밀은 구현되고 있어요, 참나 상태에서. 참나 상태에 구현돼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와 남이 없고요, 거기에는 오염됨이 없고요, 거기에는 성렘이 없고요, 거기에는 나태가 없고요, 거기에는 산란이 없고, 거기에는 무지가 없어요. 이해되시죠. 참나는 육바라밀의 속성을 갖고 있다.

논리적 공성을 너무 강조한 중관사상

23:27 이것을 중관 사상처럼 단순히 공으로 접근하면 못 풉니다. 중관 사상이 문제예요. 공종이 문제가 아니에요. 공종은요 저 청정광명심에 공성의 직관을 강조한 거고요. 상종은요 저기에서 이 수많은 상들이, 결국 진여 안에 있던 상들이 현상계에 구현된다는 걸 강조한 거고요, 아뢰야식을 통해서.

24:00 성종은요 아뢰야식도 이 진공묘유의 작용일 뿐이지 아뢰야식이 별게 아니고 아뢰야식과 진여를 별개로 생각하지 마라. 진여가 다 하는 거다. 아뢰야식도 또한 진여의 작용일 뿐이다 해서 하나로 꿰어버린 겁니다. 한마음으로 다 꿰어버린 거예요. 그게 성종이에요. 결국 청정광명심 하나로 끝나는 거예요, 불교는. 청정광명심의 한 측면들을 봤던 거죠. 기존에 더 웃긴 건 뭐냐면 아니 왜 꼭 그렇게 단언합니까? 청정광명심은 성종에서나 강조된 거지 일심이니 진심, 공종 이전에는 그러면 또 상종 이전에는 혹시 없던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논리가 발전해서 나온 거지 그전에 없던 거 아닙니까? 공정도 청정광명식으로 푸는 게 문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돌아보세요. 석가모니 때부터 이미 강조된 게 청정광명심입니다. 석가모니도 청정광명심 안에, 열반 안에서 모든 게 공하다고 했지

25:00 그냥 공을 얘기하지 않았어요. 첫째. 또 두 번째, 이 공종이 한참 나올 때 이 중간에 화엄경이 이때 이미 등장해요. 화엄경은 성종의 경전입니다. 성종은요 공종 사상이 한참 태동할 때 BC 100년부터 공종 사상이 나왔다고 보는데 AD 1세기쯤에 화엄경이 등장해요. 화엄경에서 이미 성종 다 정리했습니다. 이미 정리된 화엄경을 이해 못해 가지고 중관파가 등장한 거예요. 중관파는 화엄경 이후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공종은 정광명의 공한 부분을 강조해서 유식학 말처럼 아직 원만하게 모든 걸 밝힌 게 아니었어요. 공만 얘기했지 이 상을 얘기 안 했잖아요. 그 안에 어떤 진여가 있는지? 진여의 종자들인지? 얘기 안 했는데 중관 사상이 화엄경 이후에 등장해서 화엄경 논리까지 끌어다가 공종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 가지고 모든 만법이 없다는 측면만 강조해 버려요, 청정광명심 얘기보다는. 그러면서 지들도 들어가 보면

26:00 결국 견성은 청정광명심을 깨달아야 견성해요, 논리가. 그런데 청정광명심은 체험의 영역이니까 따로 날려버리고 분석의 영역에서는 청정광명심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온은 연기하니까 공하다. 연기(緣起)하니까 상호의존적으로, 이 펜 하나도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니까 불변의 펜이란 게 없기 때문에 이 펜은 공한 거다라는, 논리적으로 공을 주장하는 논리에만 너무 천착해버려요, 중관 사상이. 그래서 얘(중관사상)들만 사실은 곁길로 가고 나머지는 계속 청정광명심을 또 유식학도 강조하게 되고 더 원만하게 설명한 성종이 등장하는데 결국 여기까지 와서 이루어진 게 뭐냐면요 화엄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반야심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때 이루어진 겁니다, 성종까지 와서야. 이해되세요. 경이 더 먼저라고요. 경을 해석하다가 중관 사상이 등장했는데 반야심경이니 화엄경이니 하는 공종, 성종의 경전들을 해석하다가

27:00 등장한 중관 사상이 오히려 경의 핵심 가르침을 밝히는 이 근본 흐름을 망치고 있다고요. 잘못, 오도(誤導)되게. 자꾸 연기하니까 공하다. 여러분 절에 가시면 공하단 얘기 설명하려고 다 그 얘기하시죠. 틱닉한 스님도 늘 “구름이 구름 홀로 있을 수가 없고 땅이 받쳐줘야 되고 별이 위에 있어야 되고 모든 인연으로 있으니까 또 이게 공한 겁니다. 연기하니까 공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지만 그건 본질이 아니에요.

청정광명심이 공空하다는 것이 불교의 본질

27:25 청정광명심이 공하다는 게 불교의 본질입니다. 청정광명심은 왜 공합니가? 청정광명심에서는 왜 만법이 공합니까? 오온이 공하다 이 핵심 논리가요 청정광명심에서는 오온이 없으니까 공하다 예요. 자 오온은 청정광명심 상태, 참나 상태에서 없어요. 텅 비어 있어요, 오온이. 그래서 공하다는 거예요. 나와 남이 없어요, 거기서는. 이원성이 없고

28:00 시간성 공간성이 없어요, 청정광명심에서는. 그래서 공한 거예요. 반야심경의 오온이 공하다는 거는 공해서 공한 거예요. 무분별지 상태에서 보면 없어요, 아무것도. 그래서 공한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이 계속 없다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거기는 뭐 아무것도 없다. 사성제(四聖諦)도 없고 십이연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왜? 없으니까. 참나 상태에서는 만법이 없어요. 간단합니다. 이거 공종 상종 다 포괄해서 여러분 성종까지 참나 상태에서는 만법이 없어요. 에고 상태에서는 만법이 있어요. 끝. 직관적이죠. 지금 이게 있죠. 여러분. 그런데 컵 있는데요. 왜 공이라고 하죠? 에고 상태시네요. 참나로 들어가 보세요. “좀 더 좀 더” 하다 “아” 하다 사라집니다. 다시 나와요. 없죠? 예. 지금 있죠? 왜 그럴까요? 본인이 에고 상태니까.

29:00 에고 세계에서는 남이 있어요. 참나 상태에서는 남이 없어요. 됐죠. 너무 쉽죠. 이게 다예요. 왜 오온이 없죠? 참나 상태니까. 반야심경은 참나 상태에서는 남이 없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거기서는 오온이 없더라. 나오니까 오온이 있더라. 나오니까 오온이 있으니까 오온이라는 놈이 공하단 말을 할 수 있게 됐죠. 나와서 보니까 얘기한 거예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에 들었다가 나와서 얘기한 겁니다 사실은. “오온이 공하더라. 거기는 오온이 없더라.” 오온만 없는 게 아니라 사성제니 뭐 아무것도 없더라. 됐죠. 참나 상태에서는 없더라 만법이. 에고 상태에서는 있더라. 없을 때는 무분별지, 있을 때는 분별지. 분별해 줘야 되니까 나와서. 있으니까. 됐죠. 이게 다인데 공성상 나눠서 지금 공상성 나눠서 싸우고 있다고요. 본질은 간단합니다.

30:01 참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아차림만 있습니다. 그 알아차림이 그런데 뭘 알아차리냐? 육바라밀을 알아차리고 만법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알아차림 안에 오히려 모든 게 다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알아차림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게 다 있습니다. 그래서 법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만법이 알아차림의 작용으로서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것뿐입니다. 만법이 참나 상태에서는 없더라. 에고 상태에서는 있더라. 결국 이 모든 것은 참나의 작용이더라. 이걸 깨닫는 게 본질입니다. 보세요. 이 알아차림이 공적영지 할 때 이 알아차림이 만법을 알아차리죠, 이렇게. 이 알아차릴 때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알아차려질 때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하나인데 지가 나눠 가지고 이 안에서 주객을 나눠 가지고 한쪽은 알아차리고 한쪽은 알아차려지고 그래요. 지가 지를 알아차려요. 대상이 없거든요.

31:00 청정광명심은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여기에는 오온이 없더라”라고 “텅 비었더라”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동시에 한편으로 “육바라밀로 꽉 차 있더라”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 알아차리는 토대를 알아차리는 자리를 지혜라고 하고 알아차려지는 자신을,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지혜가 진여를 지혜가 진리를 알아차린다. 근데 사실 알고 보면 전체가 진여다. 왜? 진여란 말이 원래 참 진(眞)자 참되면서 여(如) 영원불별하다 똑같다 늘 똑같다 참되되 영원하다는 뜻이거든요. 참되면서 영원한 자리는 뭐밖에 없어요? 청정광명심. 청정광명심이 빠져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에서 공만 남고 청정광명심이 빠져버리면 뭐가 공하다는 건지? 만법이 공하다는 의미가 뭔지? 이걸 논리적으로 용수보살이 설명하려다 보니까 청정광명심에서 진짜 공성을 직관하는 것은

32:00 체험의 영역으로 신비의 영역으로 빼버리고, 분석의 영역에서는 오로지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얘기만 한 거예요. 연기하니까 공하다. 이 말을 여러분이 용수 보살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참나 상태에서는 없습니다 이게. 에고 상태에서는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참나를 모르는 사람한테 이게 없다는 걸 설명해야 돼요. 따라서 이거의 본질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 보시기에 에고에게는 있죠.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없는 겁니다. 있는데요. 이 컵은요 지수화풍이 모인 겁니다. 원래 컵이 있었을까요? 영원한 컵이 있나요? 지수화풍이 모여서 잠시 컵의 모양 한 거 아닌가요? 그럼 컵이라는 이름도 잠깐 붙은 거지 이거 곧 변합니다. 이거 조금만 두면 물 흐물흐물해지면 더 이상 컵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됩니다. 보세요.

33:00 컵은 있습니다, 에고한테. 대상으로써 컵은 있습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불변하는 컵은 없죠? 이 정도 설명으로 만족시켜요. 만족되세요? “아! 컵이 없는 거였네, 본질적으로.” 이거는 요즘 그런 걸 요즘 진리라고 떠들면 좀 애매하잖아요. 그럴 바에는 양자역학을 배우시라. 차라리 물리학을 배우시라. 이게 지금 혹시 여러분이 영원한 건 줄 아셨던 분 있으세요? 컵이 영원한 건 줄 아셨던 분? 그런 분들한테는 충격이겠죠. “와! 이게 컵이 영원하지 않다니 충격인데.” 구겨서 던지면서 “충격인데” 이러겠어요? 이상하죠? 이 말로 해결되는 게 없어요. 컵은 참나 자리에서 없는 겁니다. 그게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의미예요. 참나 빼고 연기하니까 공하다고 지금 불교 방송의 모든 스님들이 같은 얘기를 한다니까요. 자기는

34:00 성종이라면서 논리는 중관 사상을 가져다가 얘기한다니까요. 성종이면 모름지기 성종이라면 이 컵 하나도 참 마음의 작용이라고 얘기해야 돼요. 불변하면서 변화하는 진공묘유의 작용이라고 얘기할 줄 알아야 돼요. 이런 말 못합니다. 컵이 왜 없나요? 컵 보이시죠. 하지만 이 컵은 연기한다는 것은 상호 의존적이거든요. 이게 있어서 이게 있다. 인과 속에서 이원성 속에서만 존재하거든요. 지수화풍이 서로 모여가지고. 자 보세요. 두 가지 연기가 있습니다. 중관 사상에서 말한 두 가지 연기가 있어요. 지수화풍이 모여서 이 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계라는 것은 지수화풍만의 세계가 아니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오온이에요. 여러분 오온의 세계에 살아요. 이거 잊지 마세요. 지수화풍만 객관성이 아니에요.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에 살아요 여러분은. 지수화풍은 오감작용에서만 연기고요.

35:00 결국 이 컵이 여러분 마음 안에 의미를 가지려면요 컵이라고 불러줘야 돼요 여러분이. 언어도 연기입니다. 이 컵 지수화풍이라는 물질과 언어, 개념이 만나면서 여러분 안에서 컵이 된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 추억들이 곁들여지면서 이 컵이라는 게 여러분의 법계에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오온 작용, 생각 감정 오감이 총체적으로 작동해서 컵이 만들어져요. 이거는 근대나 뭐죠 현대나 나오는 분석철학에서도 서양에서 똑같이 봐요. 세계는 객관적 세계만 세계가 아닙니다. 주관적인 세계와 객관적 세계가 합쳐져서 우리가 말하는 살아가는 세계가 만들어져요. 언어와 객관적 세계가 만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만들어져요. 여러분이 체감하는 세계는 단순한 이 컵이 아니에요. 컵이라는 언어까지 다 여러분의 세계를 만들어요. 그렇죠. 이 부분을 본 거예요 중관 사상은. 따라서

36:00 이 컵이라는 건 언어와 지수화풍의 연기하는 것들의 연합과 언어와의 또 연합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어느 것 하나 무상하지 않은 게 없어요. 변화하지 않는 게 없어요. 따라서 컵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적으로는 존재해야 된다. 자성이라는 건 연기하지 않으면서 불변으로 존재하는 게 자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컵에는 자성이 없다. 이걸로 반야심경을 설명했어요. 반야심경 쓴 사람도 놀랄 겁니다. 탁월한데 뭔 소리야? 사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반야경을 쓰신 분들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요. 연기하니까 공하다고 안 했다고요. 반야심경 어디에도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말이 없어요. 그냥 오온이라는 놈은 공하다고 그랬지. 왜? 청정광명심 무분별지에서 보니까 없으니까.

37:00 왜 홍시 맛이 나느냐? 이런 거죠. 나니까. 똑같아요. 왜 오온이 없다는 겁니까? 없으니까요. 이 말을 지금 절에서 불교학자들이 저는 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없으니까요. 오온이 왜 공해요? 없으니까요. 찾아봐 있나?. 잠깐 내가 찾아볼게요. 찾으면 죽는다 하고 딱 무분별지 들어가면, 나와요. 그럼 있더냐? 있으면 가짜죠. 있으면 명상 잘못한 거죠. 이해되시죠? 무분별이 아니죠. 유분별지에 들어갔던 거지. 무분별지 들어갔다는 자체가 분별이 없는 세계인데 거기 어디 나와 남이 있고 인과가 있고 연기가 있어요 거기에? 오온이 있고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애초에. 됐죠. 이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당하고 자명하면 일상에서 써 보세요. 그럼 일상의

38:00 탐진치가 정화되실 겁니다. 실천적으로 뭔가 효과가 나야 돼요. 실증이 안 되면 가짜입니다. 불교는 이론 하자고 나온 그 종파가 아니에요. 철학이 아니에요. 부처님 때 부처님 때 이론 따지면 부처님 대답도 안 해줬어요. 너 그거 죽을 때까지 따져도 너 탐진치 소멸 안 된다. 탐진치를 제압 못하는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런 이론은 아예 전개도 안 했어요. 우주에 대한 뭐 우주 무한한가요? 대답 안 했어요. 부처는 죽고 어디 가나요? 대답 안 했어요. 실증할 수 없는 거, 현상계에서 실증할 수 없는 건 대답 안 했습니다. 실험할 수 없는 건 그건 너의 탐진치 제거에 도움 안 된다. “명상에 들면 오온이 공하다.” 이 말을 석가모니께서 하셨죠. 참나 자리에서 순수광명의식에서는 없다, 거기는 오온이. 그러면 그 말 그대로 구현하면 돼요. 그러면 오온이 없다는 얘기는 뭐예요? 탐진치가 없다는 얘기예요, 거기에는. 그럼 탐진치 없는 세계가 열반인데 왜 빛나는, 모든 곳에서

39:00 빛나는 순수의식과 접속하지 않죠? 왜 자리를 무시하죠? 왜 분석을 하고 있죠? 논리적으로 계속? 분석은 탐진치의 세계인데. 나와 남이 이미 찢어져 있거든요. 분석의 세계는요 나와 남이 찢어 찢어져 있습니다. 나와 남이 찢어졌다는 건 이미 치(痴)예요. 나와 남이 둘로 쫙 갈려져 있죠.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면 대상에 대해서 탐내든가 분노하든가 하게 돼 있어요. 탐진치가 작동합니다. 갖고 싶든가 갖기 싫든가. “우리과 애들이, 여자들이 나를 두고 자꾸 싸워. 니가 가지라고.” 최악이죠. 탐내든가 혐오하든가. 대상이 있어야죠, 일단. 이게 탐진치예요. 대상을 세울 때 이미 치예요. 원래 대상이 없거든요. 나와 남이 없거든요. 원래는 광명 안에서는 나와 남이 없어요. 무명 안에서는 나와 남이 찢어져요. 참나 안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요. 에고 안에서는 나와 남이 펼쳐져요.

40:01 만상이 펼쳐져요. 됐죠. 이거 설명하려다가 공종, 유식종 다 나온 겁니다. 성종. 이게 불교 전체예요 지금. 이런 전체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그리고 답이 오로지 일이관지(一以貫之) 청정광명심(淸淨光明心)이란 걸 모르면서 불교를 공부한다? 허망한 탐진치 놀음이에요. 6도 중에 또 어딘가 하나 단단히 자리 잡고 계신 거에요. 탈출할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탈출할 생각이 없는 분들한테 제시하는 유사정토 유사열반에 만족하지 마시라. 사기다. 그건 사기다. 저 10분만 쉬고 이제 8천송반야경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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