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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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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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2만5천송 반야경 1
강의일자 2023. 09. 23. 土.
게시일자 2023. 12. 16.
동영상 길이 54:09
강의 중 인용 도서 2만5천송 반야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YnUk2Fnmde4


신인류 프로젝트

00:08 신인류 프로젝트가 핵심이 몰라거든요. 여러분 제가 양심 양심 하지만 사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중생한테 필요한 건 양심보다 몰라예요. 양심은요 어려워요, 잘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수백 겁 양심을 닦아온 분들이 있는데, 이번 생에 양심 처음 만난 분들도 있을 거고 그걸 비교한다는 게 어렵죠. 양심은 도의 극치입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영역이에요.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양심을 잘하자고 말을 안 할 순 없지만, 제가 진짜 이번에 맡아서 개벽을 꼭 성취하겠다는 건요 양심으로의 방향성을 잡아들이는 거랑

01:00 양심을 진짜 끝내주게 잘하게 해드리는 건 아니에요. 우리 갈 길이 이거고 양심의 기준, 14조로 양심의 표준을 잡아 드리는 것, 이 방향으로 우리는 달려가야 합니다. 이게 보살도입니다. 이걸 제시해 드리는 거랑요 실천적으로 지금 터득하셨으면 하는 것은요 이것만 되면 개벽이다 하는 건 여러분 일상에서 몰라가 흐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빡쳤을 때 참나한테 맡길 수 있는. 빡쳤을 때 내 감정이 너무 탐진치로 힘들 때 몰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이게 6도를 돌고 있는 중생들이 정토로 접속시키는 거거든요. 6도 어디에 있건 지옥에 있으시더라도 몰라 하실 수 있는 힘을 기르셔야 돼요. 일단 몰라 입니다. 물에서 빠져나와야 뭘 하죠. 양심은 그 다음 얘기라는 거예요. 이것도 참나 자체가 양심이기 때문에 양심이 아닌 것도 아니에요. 다만 양심을 잘한다는 건 다음 문제라는 거예요.

02:00 이렇게 얘기해드립니다. 일단 양심을 붙잡아야 될 거 아니에요. 참나를 붙잡아야 그다음 희망이 보이죠. 그래서 여러분 실천적으로 여러분 삶에서 변화가 일어나려면요 이거 되면 보살이고 이거 안 되면 보살 아니다. 중생이다. 딱 저한테 만약에 한마디로 하라고 그러면 빡쳤을 때 몰라 하실 수 있으면 보살이고요. 그때 몰라 안 되면 중생입니다. 제 강의를 아무리 좋아하시고 뭐 해도 그냥 강의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새로운 지식에서 희열을 느끼시는 건 다 좋은데 영적 지식이 또 자명하기까지 하니 너무 재밌고 다 좋은데 여러분이 진짜 여러분 법계에서 탐진치가 들끓을 때 진정을 못 시키시면 중생입니다. 그냥 영적인 지식을 좋아하는 중생이에요. 학당 강의를 좋아하는 중생인 거예요. 자명한 강의를 좋아하는 중생이 돼요. “내 삶이 자명하냐?”라고 물어보면 그건 아닌 거예요. 왜? 탐진치가 들끓을 때 어떤 수단도 쓰지 못하고 그걸

03:00 막을 수 없다면 그게 중생이에요. 그게 6도를 도는 거예요. 탐진치가 들끓어 가지고요 탐진치가 좀 가볍게 작용하면 3선도 무겁게 작용하면 3악도가 펼쳐지는 거예요. 다 탐진치 작용이에요. 탐진치는요 에고가 있어서 작동하는 겁니다. 에고로 인해서 탐진치가 힘을 얻어요. 에고를 몰라 해버리고 바로 참나 접속하실 수 있는 그 힘, 에고를 진짜 뭘라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모든 스펙, 여러분의 모든 성취, 여러분의 모든 지식, 여러분이 쌓은 모든 업을 몰라 해버릴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무소유예요. 물건 내다버리고 이러는 거 다 부질없어요. 그렇게 해서 뭘 얻으시려고요? 그건 에고적인 얻음이에요.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참된 평화는요 에고를 내다버려야 돼요. 에고를 몰라 해야 돼요. 그런데 뭐 에고를 영원히 버릴 수 있냐? 그게 아니라 에고를 초월할 수 있냐는 거예요. 참나랑 접속하기 위해서 에고를 버리는 겁니다.

04:00 옛날, 간명하게요 조선, 양심 그렇게 강조한 데가 조선 선비들 때 아sP요. 그때 퇴계 선생이 오직 선한 생각 오직 양심만 강조했던 그분이 경(敬) 깨어 있을 때는 선념도 잡념이라고 그랬어요. 좋은 선한 생각도 잡념일 뿐이다, 깨어나려고 할 때는. 깨어나려고 할 때는 그것도 버려야 돼요. 진짜 무소위로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천리, 인의예지의 천리 그 자체랑 하나가 돼요. 이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름 잡는 거예요, 뭔가. 내가 인의예지가요. 교회 가면 그런 짓 많이 하죠. 하나님한테 설교해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뭐고 사랑은 뭐고 뭐는 뭡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겠어요? “몰라 해라. 그런 거 좀 내려놔라. 너의 그 인간적인 관점, 사랑에 대한 관점, 구원에 대한 관점, 성령에 대한 관점 다 내려놔. 잡스러워. 오롯이 바쳐라, 네 영혼을 나한테.” 그러면

05:00 하나님과 딱 하나가 돼 버려요. 깨끗이 몰라 하실 수 있는 분은요 보살이고요. 그거 보살 아니라 소승성자도 그건 해요. 그러니까 최소 조건, 보살하려면 정도는 해야 돼요. 그 기술은 익히고 소승 익히고 대승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소승을 익힌다는 건 아니고 소승에서 최고의 무기로 삼는 그것을 대승은 기본으로 익혀야 됩니다. 에고 초월하기. 죽이기가 아니에요. 초월하기. 그다음 대승의 맛은 에고 돌보기죠. 이렇게 넘어갑니다. 제가 에고를 돌보는 방법을 육바라밀로 제시하고. 제가 만든 것도 아니에요. 대승불교의 기본 가르침이에요. 수없이 노래하지만 육바라밀의 아름다움에 취하셔서 여러분이 여러분 참나를 못 찾으신다면 이거는 여러분의 기본값에 변화를 주지 않기 때문에 바리새파를 하나

06:00 양산하는 꼴밖에 안 된다, 기독교적으로. 호박에다가 줄을 긋고 계시다, 수박되길 바라며. 질적으로 다르다는 거예요. 기본값이 다르다는 거. 참나 접속해야만 여러분은 신인류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 신약 그러는데 저는 구인류 신인류 한번 얘기해 보고 싶어요. 신인류는 빡쳤을 때 참나한테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에요. 주인공한테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에요. 성령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에요. 이 얘기를 제가 뭐 끝없이 드리겠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 봅니다. 그래서 지녀와 열반 시간의 핵심도 진여, 청정광명한 마음, 청정심, 청정광명심, 정광명, 다양하게 부르지만 이게 참나자리예요. 이 참나자리가 부처님 때부터 경허 스님 때까지 한결같이 이어져 온 불교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이 참나를 모르고 불교를 논하고, 공으로 불교를 논하고,

07:00 연기로 불교를 논하는 건요 다 호박에다 줄 긋고 있는 겁니다. 수박되기를 바라고. 그래가지고는 영원히 열반을 맛볼 수 없고 해탈을 맛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열반을 맛보고 해탈을 맛보실 수 있어야 돼요. 뭐만 하면 돼요? 에고만 놓으면요. 쥐고 있던 에고만 놓으면 여러분은 이미 청정광명심 그 자체예요. 지수화풍과 오온, 생각 감정 오감의 작용이 소멸된 그 자리에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 있다고 했죠, 부처님이. 이걸 모르면서 공을 논하는 거 다 엉터리입니다. 그건 공이라는 하나의 또 상이에요. 청정광명심 자체가 공이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소승과 대승의 공부

07:48 오늘 이제 같이 읽을 마하반야바라밀경 요건요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번역이고 서기 2세기경 작품. 이거는 화엄경 이후예요. 앞에 8천송반야경은 화엄경 이전입니다. 그래서 정밀한 10지 체계가 등장하지 않아요. 그래서 10지 체계를 확립한 게 화엄경이었잖아요. 대승보살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확정했거든요. 그래서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10지 체계가 나옵니다. 연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죠. 2만5천송반야경이라고 불리고요. 8천송반야경의 확장판입니다. 그래서 이거 말씀드리면요. 이게 참나가 있고 에고가 있잖아요. 에고는 불교식으로 오온입니다. 오온이 낯서실 수 있는데, 오온은 생각 감정 오감이에요. 소승은 에고를 부정하자는 게 소승입니다. 오로지 참나에 접속해서 참나 안주, 소승의 목표는요

09:00 참나. 힌두교에서는 참나. 열반, 소승 불교에서는 열반에 안주한다는 겁니다. 머문다. 이거 외에 다른 목표가 없어요. 안주. 소승 수행은요. 대승 수행은요? 이게 제일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소승과 대승은. 대승은 에고를 버리지 않아요. 참나의 작용으로 봐요. 참나의 작용으로 보기 때문에 이 에고를 통해 이 오온을 버리지 않고 오온을 통해서 뭘 하느냐? 자리(自利) 나의 오온을 돌보고요. 이타(利他) 남의 오온을 돌봐요. 그래서 자리는 육바라밀 갖추기죠. 이타-성불. 사실은 이것(자리)도 성불이죠. 육바라밀을 갖춰서 성불하고 남들도 성불시켜주는 거예요. 똑같아요. 사실

10:00 자리가 성불이고 이타는 중생 구제, 이렇게 많이 얘기하는데요. 이타도 결국 성불시켜 주겠다는 거예요. 그렇죠. 이타는 내가 성불하고. 뭘로요? 육바라밀을 닦아서. 육바라밀을 베풀어 주는 거죠. 보세요. 내 에고 돌보기예요. 육바라밀을 잘한다는 건 에고를 돌봐야 돼요. 자 소승 수행이 좋은 게 뭔지 아세요? 소승 수행이 진짜 매력적인 게 있어요. 여러분 힘들면, 저도 소승 성자들 책을 봐요. 지금도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러니까 소승 수행을 제가 지향하느냐? 그건 아닌데 소승 성자들의 경전이 더 도움될 때가 있어요. 여러분들한테도 권해 드리고 싶은데 또 소승을 지향하게 되실까 봐 함부로 못 권하는데. 인도 성자를 책이나 초기 불경이 도움될 때가 있어요. 언제냐? 에고를 초월해서 참나 접속을 해야 될 때요. 이때는

11:00 에고를 냉정히 버려야 되거든요. 퇴계 선생도 그 유학자, 인의예지 따지는 퇴계 선생도 인의예지에 대한 생각도 버리라고 그랬어요. 그래야 인의예지 자체랑 만나니까. 이해되시죠? 에고의 흔적을 날려버려야 돼요. 그래야 참나랑 깨끗한 참나를 만나요. 그래서 소승 수행은 에고를 초월해가지고 이 육근의 세계 오온의 세계를 초월해가지고 참나와 열반의 세계, 불생불멸의 그 세계에 들어가겠다는 거거든요. 그때 여러분 이게 결국 뭐예요? 이걸 출리심(出離心)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떠나겠다는 마음, 지금 이게 몰라 아니에요. 몰라를 하시는데 출리심이 소승보다 부족해가지고 에고를 못 떠나시면 여러분은 대승보살도 못 되는 거예요. 소승도 못 되고 대승도 못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에고를 못 놓고 있다는 건요 탐진치를 못 놓다는 거예요, 내가. 오해하시면 안 돼요. 대승은

12:00 에고 돌본다면서요? 그러면 탐진치 이거 활용하는 거잖아요. 안 버리는 거잖아요. 안 버리는데 견성은 해야죠. 탐진치가 참나의 작용인 줄은 알아야죠. 탐진치를 그냥 데리고 가는 게 아니에요. 참나의 작용이라고 해서 탐진치의 뿌리를 알고 참나의 작용인 줄 알고 쓰는 거예요. 그냥 탐진치도 인간이 탐진치를 어떻게 버려. 활용해야지. 이게 지금 대승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대승이 제일 중시하는 거예요. 왜? 참나 각성이 이 공성의 직관, 참나 각성이 참나의 안주라는 게 대승에서는 공성직관이죠. 이걸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중에 엄밀히 말하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해요. 분별지(分別智) 말고요. 분별을 초월해서 참나 상태에서 육바라밀과 텅 빈 공성과

13:00 그 안에 갖춰져 있는 육바라밀을, 두 가지를 직관하는 거예요. 텅 비어 있으면서 꽉 차 있구나. 이 공성 직관을 얻는 이 상태를 사실은 이게 참나안주죠. 둘이 아니에요. 이게 같은 거예요. 여기(소승)서는 공성(空性)만 주로 봅니다. 공성만 보고 안주해버려요. 이쪽(대승)은요? 공성을 직관하는데 이 공성이 육바라밀로 충만해 있는 공성이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돼요? 밖으로 에고 돌보기 할 때 육바라밀을 실천해 줘야 돼요. 그러면 안에 있는 이 육바라밀의 진리를 밖으로 육바라밀을 에고의 세계에 끄집어내야 되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관점에 서게 되죠. 이게 대승이에요. 육바라밀을 끌어내가지고 구현해 보여야 됩니다, 에고의 세계에. 그래서 내 에고의 세계에서 육바라밀을 구현해 보여야 돼요. 남들도 다 육바라밀 하게 만들어야 돼요. 자 두 가지입니다. ①내가 육바라밀로 그들을 대해야 되고 ②그들 자체적으로도 육바라밀이

14:00 실력이 늘게 도와줘야 돼요. 방법이 내가 남들을 육바라밀로 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진리가 필요하면 진리를 가르쳐주고, 근심을 덜어주고, 육바라밀을 계속 그들한테 베풂으로써 상대방 안에 있는 불성이 또 각성돼서 육바라밀을 구현할 수 있게, 그들이 그들의 에고를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이 두 개가 이루어지면 거기가 불국토죠. 거기가 정토죠. 대승의 목표는 중생구제, ①육바라밀 갖추기, 육바라밀을 갖춰 성불하기, ②중생을 구제해서 성불시키기, ③불국토 건설하기. 딱 이 세 가지입니다. ①자리 ②이타 ③불국토 건설. 이건 다 에고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거죠. 참나의 세계에, 열반의 세계에 불국토가 어디 있어요. 그냥 자체가 불국토죠. 열반이 불국토고 참나 자체가 불국토죠. 이런 불국토를 자성정토(自性淨土)라고 하죠.

15:00 그냥 내 자성이 정토고 자성이 열반인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게 소승이죠. 내 자성에만 안주하면 돼요. 거기는 나와 남이 없어요. 여기는 이원성이 없죠. 나와 남이 없어요. 누구를 도와줘요? 소승성자한테 “중생을 도와줘야죠.” 그러면 “누구를 도와줘요? 참나밖에 없는데. 에고가 있어야 남도 있죠. 전 에고를 죽였다니까요. 에고를 초월했다니까요.”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윤회를 초월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윤회 안 한다는 건요 이원성 세계를 떠났기 때문에 윤회를 할 수가 없잖아요. 간단하게 에고가 없으니까 윤회도 없는 겁니다. 에고가 없으니까 어떤 문제도 없는 거예요. “에고가 문제다”거든요. 에고가 문제다예요. 탐진치가 문제다. 그래서 에고를 떠났어요. 에고 너머에 내가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에고만 난 줄 알았더니 너머에 참나가 있었어요.

16:01 참나 알고 나니까 얼마나 기뻐요. 이제 참나만 나로 선언했어요. 에고는 내가 아니에요. 에고는 살든지 죽든지 이제 너 알아서 해라. 놔 버리고 오로지 참나와 열반에만 몰입하는 겁니다. 다른 걸 안 봐요. 평생 사는 동안 생존해탈자, 깨달은 아라한들은 이제 에고를 버리고 열반에 안주하는 데 포인트를 둡니다. 여기서부터 힌두교랑 불교가 갈리는 게. 힌두교는 진짜 에고를 안 봐요. 버려요, 죽었다고. 불교는요 에고가 아직 남아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는 동안 팔정도를 지켜서 에고를, 또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돌봅니다. 이게 대승의 또 싹이 된 거예요. 에고를, 애매하죠, 여기 소승불교는 에고를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에요. 에고를 또 철저히 관리합니다. 그런데 어차피 나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아요, 아라한들은. 그러니까 힌두교처럼 버리면서도 끝까지 돌보다가 버리겠다는 거예요. 이게 이상하죠.

17:00 “그러면 끝까지 돌봐야 되는 거 아닌가? 왜 돌보다 버리나?” 하니까 대승이 나온 거예요. 이건(소승) 중간적입니다. 하지만 열반에 안주하면 모든 게 끝난다는 점에서는 소승적이에요, 소승 불교도. 끝까지 돌보겠다는 건 없어요. 돌보다가 열반에 들면서 끝내는 거죠. 에고를 적당히 돌보다 끝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나 각성한 이후에 팔정도로 삶을 죽을 때까지 관리하겠다. 소승불교. 참나각성 이후에 에고는 진짜 포기하고 살겠다. 에고는 내가 아니다. 죽었다고 보고 살겠다. 힌두교. 아니다. 참나 각성은 시작일 뿐 이제 에고 돌보기는 시작됐다. 영원히 윤회하면서 육바라밀을 더더더 정밀하게 갖춰가서 원만한 인격을 내가 만들어 보이겠다. 내 안의 참나가 그대로 현현한 듯한 예수나 부처, 위대한 보살들의 그 모습을 내가 내 인격으로

18:00 에고로 보여주겠다. 몸까지 에너지체까지 갈고 닦아서 몸으로도 보여주고 마음으로도 보여주고 우주 안에서 색수상행식을 총동원해서 보여주겠다. 에고를 이제 다시 안 버리고 취한 거죠. 이게 대승입니다. 이 두 개 이해하셔야 돼요. 그래서 반야경이라는 건 이미 대승이에요. 그래서 반야경에서 공성을 강조한다는 건 공성에 안주해서 공으로 끝내겠다는 게 아니에요. 일체가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서, 참나 자리를 안 거예요. 그냥 막연히 공을 안 게 아니에요. 참나를 알고 보니까, 청정광명심을 깨닫고 보니까 이 자리에는 지수화풍이건 에고건 생각 감정 오감이건 일체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텅 비었다는 거예요. 이 텅 빈 자리를 알고 나니까 오히려 어떻게 돼요? 이 텅 빔 속에 육바라밀이 꽉 차 있는 걸 보는 거예요. 나와 남이 없고 텅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오히려 뭐가 있느냐? 보시가 있고 지계가 있고 인욕이 있고 정진의 근본 원리들이 있더라.

19:01 텅 빈 자리에 나와 남이 없죠. 여기에 보시바라밀의 근본이 있는 겁니다. 텅 빈 자리에 나와 남이 없는데 왜 밖에서 움직일 때는, 우리가 육근을 쓸 때는 나와 남을 이렇게 따지죠? 나와 남을 덜 따져야 되지 않겠어요. 그럼 내가 갖고 싶은 것만큼 남도 갖고 싶다는 걸 둘로 보지 말고 남하고도 좀 나눠야 되지 않겠어요? 이래서 보시바라밀이 나옵니다. 텅 비어서, 청정광명심이 텅 비어 있다는 거예요. 여기 청정광명심이 빠져버리니까 자꾸 문제가 생겨요. 그냥 텅 빔이라고 하니까 없는 거잖아요, 텅 빔은. 없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건데 이렇게 논리로 흘러가면 티벳 불교 중관파처럼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는. “그럼 아무것도 없는데 왜 우리가 육바라밀을 해야 되죠?” 이게 나와요. 텅 빈 공, 청정광명심이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있는 걸 보고 그 자리에는 나와 남이 없길래 밖에서도, 그 청정광명심의 작용인 현상계에서도

20:00 나와 남을 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고, 그 자리에는 죄지음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도 죄를 안 지으려고 지계바라밀을 지키는 거예요. 그 자리는 성내지 않기에 조화롭기에 밖에서 나와 남의 관계에서도 육근의 세계에서도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거고요. 그 자리는 쉬는 법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도 나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그 자리는 고요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도 늘 깨어 있으려고 하는 거고. 자리는 진리를 모르는 적이 없죠, 진리 자체니까. 밖에서도 반야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거고. 그러니까 공성이 그래서, 청정광명심 자리가 전지전능의 자리 공성의 자리라서 밖에서도 전지전능 공성을 구현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공부가 열매를 못 얻어요, 뿌리가 없는 공부는. 그 자리에는 진짜로 없는 자리라고 해 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러면 이 현상계는 정말 무상한 것밖에 안 돼요. 무상한 세계를 살면서 어차피 텅 비어 있고 무상한 세계를

21:00 살면서 계속 선을 하라고 하는 말이 먹힐까요? “야 너도 무상해. 있는 동안 좀 더 먹어.” “어차피 무상해, 현상계는.” 이런 논리로 빠져들겠죠. 이거는 뭐 말단의 극단적인 예지만 청정광명심이 빠져버린 공부는 힘이 없다. 보리심이 나오지도 않아요. 육바라밀의 마음이 계속 솟구쳐야 되는데 머리로 계속 따져야만 나오는 거예요. “아 우리는 무상하다. 우리는 실체가 없다. 그러니까 내 거 너무 고집하지 말고 남한테 뭐라도 하나 이것도 나눠주자. 어차피 무상하니까.” 이걸 자기가 계속 설득해야 됩니다. 개념으로 하는 공부는 힘들어요. 하다가 “아 어차피 무상한데 뭔 지랄이야.” 하면 또 공부가 탈선해요. 이 짓을 하고 있어요, 중관파 공부를 하다 보면. 계속 머리로 따집니다. “내가 왜 여기에 집착했지.” 혼자 또 머리 때리고. “또 집착해버렸네. 다 언어일 뿐인데,

22:01 펜이라는 것도 말일 뿐인데 왜가 왜 펜에 집착했을까?” 하고 계속 이 지랄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뭐예요? 몰라요. 청정광명심 바로 접속해야지. 모든 문제는 에고로부터 일어난다니까요, 오온으로부터. 그거 바로 버려야 산다는 게 소승 성자들의 가르침이에요. 이 가르침에만 집착해서 소승이 된 거지 이 가르침 자체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무조건 에고 버리실 수 있어야 돼요, 몰라 할 때. 5분 몰라 할 때 온 우주를 놔야 돼요. 우주 자체를 놔야 돼요. 시공간도 놔야 돼요. 시공도 놔야 되는데 지금 뭘 쥐고 계시는 거예요? 시공도 놓고 초월하실 수 있을 때 진짜 대승 공부가 시작됩니다. 소승은 이 대승 공부 초입에 있는 이거를 딱 붙잡고 “공부 끝” 해버리는 거예요. “이것만 얻어도 살 만하다.” 이것만 얻어도 살 만하거든요. 그래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것만 얻어도 살 만하다는 것을 소승 경전들은 끝없이 노래하고 있어요.

23:00 그러니까 제가 힘들 때는 소승경을 보시면서 방편으로 쓰시면 좋아요. 소승 수행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대승 수행인데 소승 성자들이 잘 가르친다는 거예요, 부분을. 놓으라고 해 줘요. 지금 보세요. 보통 여러분 고민이 이거죠. 육바라밀이 안 돼서 고민돼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자꾸 잘못된 선택이 쌓여갈까? 그때 대승성자한테 만나면 “육바라밀을 더 잘하라”고 자꾸 코치하겠죠. 죽겠죠. 잘 안 되는데. 소승성자를 만나면 “육바라밀도 에고다. 에고가 문제다. 에고를 버려라.” 그러면 시원합니다. 깔끔하게 버리고 참나로 들어가요. 이 방편 괜찮죠? 그러니까 소승 성자들한테 들은 이분들은 참나로 돌아가라는 말밖에 안 하기 때문에 AI 같은 존재들이죠. “참나로 돌아가라. 참나로 돌아가라.” 그런데 내가 친구랑 싸웠어요. “친구도 에고의 세계에서나 친구가 있지 참나에는 친구가 없다.” 주식 문제로. “참나에는 주식이 없다. 참나에는

24:00 돈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못해서. “참나 안에는 나와 남이 없다.” 돌아가요 참나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때 쓰시라고요, 이분들을. 참나 AI 정도로 쓰시라고요. 돌아가고 나면 뭐가 나오겠어요? 어차피 여러분이 대승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 기본값이 바뀌면서 육바라밀이 터져 나와서 이리 또 가서 더 육바라밀을 잘하게 돼 있어요. 이해되시죠? 왜 소승 성자들도 필요한지? 이분들은 이 과목 교사들이에요. 참나 과목 교사. 다른 건 모릅니다. 육바라밀은 다른 선생한테 배우시오. 우리는 오로지 참나한테 돌아가라고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일단 돌아가질 않아서 기본값이 갖춰져 있지 않은데요. 기본값이 지금 에고인데 참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육바라밀을 해요? 당연히 안 되죠. 그래서 인류, 신인류 프로젝트는 소승 성자들과 함께 협업해서 일단 중생들을 에고를 놓고 참나랑 만나게

25:00 도와주는 데 여기에 관건이 있다고요, 지금 현재는. 그래서 기본값을 바꿔야, 즉 이게 기독교식으로 하면 성령을 일단 만나야 될 거 아니에요. 성령을 아무도 안 받았는데 자꾸 육바라밀 율법 잘 지키겠다고 그러면 바리새파밖에 안 되니까. 칭의죠. 성령 만나서 칭의 되게 하는 것 돕는 교사들이라고 해요. 소승 성자들. 일단 성령 받게 하는 겁니다. “나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 하고 다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을 영접하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님이 뭐라고 그래요?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네 몸처럼.” 그러면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면 되죠. 아시겠죠. 이게 소승과 대승 공정입니다. 저게 하나예요. 원래 소승이 이라는 건 없는 거예요. 그냥 대승이에요. 대승인데 에고 버리고 참나 만나는 부분까지를 되게 거기만 별도로 뽑아가지고 완결된 과정인 것처럼 소개하면 소승이 되는 거예요. 출리심, 여기는 이 육바라밀의 마음은

26:00 보리심. 출리심과 보리심의 조화가 수행의 핵심입니다. 출리심만 강조하는 데가 소승일 뿐이다. 여기까지 보시고 반야경을 보셔야 돼요. 반야경은 대승 경전입니다. 왜 대승 경전인지 이 관점에서 보세요. 이걸 지금 모르시는 분들이 저 불교방송 이런 데 보면, 이런 반야경을 다 니까야라든가 초기불교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이런 금강경, 반야경을 다 해석해 버려요. 죽어버려요 그러니까. 대승이 사라지고 소승만 남아요. 그래서 지금 조계종 같은 데가 대승불교인데도 거기 가면 빨리 윤회를 떠나라고 합니다. 어쩌라는 건지? 그러니까 소승을 하라는 건지 대승을 하라는 건지 모르게 얘기해요. 막 섞여 있어요. “여러분 중생 구제 우리 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 윤회를 떠납시다.” 섞여 있어요. 어쩌자는 건지? 이게

27:00 두 개가 다른 얘기인데. 다른 얘기인지도 몰라요. 인지 부조화 상태. 하나예요. 머릿속에서 철저히 갈라보셔야 됩니다. 그래야 도움이 돼요. 보세요. 보살마하살은 반야심경도 다 이런 지금 2만5천송반야경이나 8천송반야경의 그 핵심 내용을 요약한 게 반야심경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거 있어요. 다만 반야심경도 여기 교재에 들어있습니다. 제가 새번역한 반야심경이 들어있어요, 뒷부분 가면. 반야바라밀에 대한 핵심 심법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에 대한 심법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꼭 모든 경전을 써머리했다 이런 느낌보다 이거 하나만 보면 다 통하니까 써머리가 된 경전이라고 보는 거예요. 반야심경은요 반야바라밀에 대한 핵심 심법을 담은 핵심을

28:00 담은 경전이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나머지, 반야심경을 알 정도면 반야경 전체를 다 통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 그 논리가 논리니까. 그래서 보시면 이게 반야심경과 비슷하죠. 보살 마하살은 8천송반야경에서는요 보살마하살 이러면 마하살이 위대한 보살이거든요. 일반 보살보다 더 위대한 보살을 말하기 때문에 원래는 10지 체계에 들어간 보살, 1지보살 이후를 말하는데 8천송반야경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었어요. 10지 체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2만5천송에 오면 보살마하살 그러면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1지 이상의 보살을 의미하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

28:45 [1.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공성ㆍ청정ㆍ진여ㆍ법신ㆍ열반)에 들어간다(법공法空).] 그래서 보살 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생각나시죠. 반야바람의 핵심이 뭐예요? 무분별지 공성직관. 참나는 정광명이죠. 청정광명심에 접속해서, 에고가 청정광명심에 접속해서 공성을 직관하고 있을 때 이때가 무분별지입니다. 공성을 직관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그림 그렸었죠. 공적, 영지. 이 영지가 뭘 직관한다고요? 첫째, 텅 비어 있다는 공성을 직관하겠죠. 공성을 직관하는데 굳이 또 구분해 보자면 공성 안에 갖춰져 있는 자성까지도 직관합니다. 자성이라는 것은 여기서 자성은 불변의 본질을 의미해요. 불변의 본질. 불변의 본질을 직관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영지는 알아차림이잖아요. 알아차리게 돼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립니다. 텅 비었다는 걸 알아차려요 첫째. 두 번째 텅 빈 중에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는 걸 알아차려요. 또 다른 관점으로 말하면 상락아정이 갖춰져 있는 것도

30:00 알아차려요. 이 공성자리가 영원하고 지복이면서 나요, 참나인 자리요 청정하구나. 이렇게도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상락아정을 알아차릴 수도 있어요. 텅 비었지만 그 가운데 청정하고, 예 참나예요, 지복이고 영원하구나. 이렇게 알아차릴 수도 있는 겁니다. 여섯 가지 기준으로 나눠보면 육바라밀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육바라밀 이런 걸 자성이라고 하자고요. 상락아정을. 텅 빈 공성 안에 자성이 꽉 차 있어요. 자성이라는 건 영원불변의 실체죠. 영원불변의 실체니까 이게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입니다. 이데아로 꽉 차 있어요. 여기 이데아가 있으니까 사실 이 안에 오온의 이데아가 있으니까 밖으로 오온이 나오죠. 불변의 본질이 있으니까 여러분이 한 생각 일으키면 무조건

31:00 오온이 작동합니다. 육근의 이데아가 있으니까 한 생각 움직이면 무조건 육근이 작동합니다. 그렇죠. 명상했다가 들어왔더니 육근이 칠근으로 바뀐 적 있으세요? 칠근이 오근으로 바뀌고. 항상 똑같이 움직입니다. 이게 불변의 본질이 있다는 거예요. 중관은요, 중관파는 자꾸 불변의 본질 없다는 얘기만 하려고 해요. 자성이 없다. 무자성이 핵심 교리잖아요. 자성이 없다는 얘기만 하려다 보니까, 이런 불변의 본질까지도 자꾸 없다고 부정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티벳에서 나온 최근의 달라이 라마나 제자들 주장들 보면요 이데아 부정론입니다. 이데아,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 같은 건 없다 이 얘기를 꼭 해요. 잘못된 부분입니다. 이데아가 왜 없어요. 불경에도 다 자성이라고 해서 나오는데 있으시죠. 그래서 이 공적영지를 정광명을 청정광명심 줄여서 청정심이라고 할 때 자성이 청정하다고 해서 자성청정심이라고도 부르는 겁니다. 자성이 청정한 자리.

32:00 무자성에만 집착하면 안 돼요. 무자성은 언제 없다고요? 이거랑 별개의 독자적 불변의 실체는 없는 겁니다. 아(我) 에고나 만법, 나나 남이나.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자아건 남이건 독자적 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 공성 외에.” 그래서 이거 아(我)와 법(法)을 다 해가지고 오온으로 퉁칠 수 있죠. “오온은 불변의 실체인, 독자적 불변의 실체인 자성이 없다.” 지난 시간에 이거 했죠. 오직 이 공성 자체가, 이 공성의 작용이 오온이니까 아와 법이니까 아와 법의 존재도 그 자성이 공성이다. 이해되시죠. “아와 법은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다.”

33:00 이 “독자적”이라는 걸 강조해야 돼요.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다.” 그런 의미로 오온은 자성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자성은 있다. 공성이 자성이다. 이거, 반야심경 이거 아시면 반야심경 다 아신 거예요. 어떡하세요? 다 아셨어요, 지금. 수업이 끝나버렸어요. 이거 알면 다 아신 거예요. 아와 법. 존재하는 모든 건 불교에서 아와 법밖에 없습니다. 나와 남, 나와 에고와 존재 그 자체. 물론 이 만법 속에 나도 들어가지만 분리해서 얘기할 때는 아와 법 이러면 나와 남, 주관과 객관이에요. 주관과 객관 모두가 사실은 독자적 실체가 없다. 텅 비어 있다. 어디에서? 정광명 자리 안에서는. 이게 없어요 중관파는. 정광명 자리 안에서는 이 말을 해 줘야 되는데.

중관학파의 자립논증과 귀류논증

33:56 그런데 구분하자면 중관파 안에도 이 주장을 하는 중관파가 있고요. 달라이라마가 속한 그 중관파가 이 말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귀류논증중관파가 있고요. 중관파도 크게 둘이 있어요. 자립논증파가 있고. 자립논증파는 제가 좋아하는 까말라실라 수습차제라고 수행의 단계 연구하신. 그분들은 유식학과 함께 연구하기 때문에 유가행중관파라고 합니다. 유가행이라는 건 요가행이에요. 유가를 닦으면서 수행하는 유식학파들은 원래 요가행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거든요. 그래서 유가행파라고 그래요. 한문으로 유가, 요가라는 뜻입니다. 요가행파 중관파고요. 그래서 이 요가행파 중관파의 특징은 일체 만법이 내 의식의 작용인 줄 알아요. 내 아뢰야식의 작용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일체유심조 관점이 있어서 우리가 이해하기 좋죠. 불경 본맛하고 통해요. 귀류논증 중관파는 경량부 중관파라고 진짜 이 펜이 밖에 있다고 믿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35:00 내 의식의 작용을 안 봐요. 이 펜은 내 밖에 있어요 진짜로. 그냥 얘들이 분석해 보니까 무상해서 공하다는 거예요. 영원한 실체가 진짜 없다는 거예요, 어떤 것도. 정광명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가행파들은 정광명의 작용이라고 보는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정광명이 내 안에 있고 아뢰야식이 작용해서 현상계가 구현됐다고 보는 거예요. 지금 일체만법의 근원이 공적영지 정광명 자리다 이것을 인정하는 중관파가 있고요. 일체를 공적영지 작용으로 봐야 설명이 되거든요. 이걸 이해하는 중관파가 있고, 이것만 기억해 두세요, 이거를 근본적으로 이렇게 보지 않는 중관파가 있다. 정광명도 무상한 의식일 뿐이라고 보는 중관파가 있다. 그래서 그냥 정광명보다 공을 강조하는 겁니다. 공(空). 이 우주에는 영원한 게 하나도 없대.

36:00 이데아도 없고 영원한 게 하나도 없대. 이렇게 자성이 없다는 걸로 모든 걸 설명하는 중관파가 있고, 정광명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 자성이 없다, 다른 만법들은. 이 정도로 보는 중관파가 있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그래서 제가 비판하는 중관파는 이 정광명을 인정하지 않고 공병(空病)에 들어 있는 중관파입니다. 그런데 이 중관파의 이런 논리가요 불교에 여기저기 다 스며들어 있어서 꼭 자기가 무슨 중관파를 지향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냥 이런 논리를 펴는 겁니다. 우주가 지금 연기(緣起)하니까 공하다. 연기하니까 변화하니까 공하다. 이 말에 만족하시는 분들은 정광명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잖아요. 지금 정광명을 빼고 설명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중관파는 왜 이렇게 됐냐? 용수보살이 문제냐? 용수도 정광명을 인정했어요. 문제는

37:00 그 제자들이 오해한 겁니다. 잘못은 용수한테 있죠. 왜? 용수는 정광명은 인정했어요. 무분별지에 들어가서 이 공성을 직관해야 된다는 걸 인정했지만 언어로, 에고의 세계가 공하다는 걸 언어로 입증하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오해가 나온 거죠. 보세요. 에고의 세계가, 오온의 세계가 공한 이유는 “오온은 참나랑 별개의 자성이 없고요 참나의 작용일 뿐이기 때문에, 참나 자체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온이 본래 자성이 공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참나를 빼고, 정광명은 따로 빼버리고, 무분별지의 세계는 인정하지만 용수보살도, 이걸 빼버리고 오온의 세계에서 오온이 공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정광명 빼고 설명하려면? 오온의 세계가 공하다는 거. 공은 무자성이니까 어떤 자성도 없다. 그게 공하다는 거다.

38:00 이렇게 딱 정리를 내리고. 하나 더 연기하니까 공하다.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죠. 자 이 펜, 지금 이 펜을 여기서 공하다고 우리가 얘기하려면, 자명하게 결론을 내려면 현실에서 체험 가능한 체험이면 되지 영적 체험인 무분별지가 지금 필요 없잖아요. 무분별지를 빼고 얘기한 거라고요. 이거 지금 공하다고 용수보살이 해버린 겁니다, 중론에서 공하다고. 왜? 이거 연기한다. 이 파란색 하나도 인연이 모여서 나왔다. 이 플라스틱도 인연이 모여서 나왔다. 지수화풍이 모여서 된 거다. 뭐 하나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있어서 영원불멸해 가지고 요게 나온 게 없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우리가 펜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는 것도 또 하나의 연기다. 펜이라는 이름 덕에 얘가 펜이 된 거다, 지금. 그렇죠. 이렇게 보니까 일체는 연기하네. 자성이 없네. 영원한 자성이. 이 안에는 이 자체에는 영원한 게 없네. 현상계에 집중해 가지고 여기에 영원한 게 없다는 얘기만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데아가 없네.

39:00 이래서 이데아가 없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이데아를 여기서 찾아요. 플라톤도 쓰러지죠. 이데아를 여기서 찾으면. “이데아 못 봤는데요.” 하니까 플라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건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닌데. 감각의 세계가 아닌데요. 이데아는 애초에. 그런데 이 용수보살 따르는 중관파들의 오류가 감각의 세계에서 이데아를 찾아요. 아무리 찾아봐도 불변하는 게 안 보입니다. 없는 걸로. 무자성 공. 끝. 너무 쉽죠. 이 병이 지금 불교 전체를 다 물들여 가지고 한국 불교도 다 썩어 있습니다. 이 논리밖에 없어요. 연기, 무자성, 공. 공부 더럽게 안 하는 거예요. 정광명을, 지금 정광명을 날려버린 거예요, 불교가. 기독교가 하느님을 날려버립니다. 비슷해요. 불교가 정광명을 날려버려요. 하느님 빼고는 다 잘해요. 하느님 만나는 것 외에는 기독교도.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앰프도 최고급 앰프로 해서. 하느님 만나는 거 외엔

40:00 다 잘해요. 불교도 기도도 잘하고 천도재도 잘하고. 정광명만 날려버려요. 정광명 없이도 가능하게 만들어버린 이론이 중론(中論)이에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런 이론을 공부한 다음에 다 내려놓고 정광명을 만나라고 용수는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말이 와 닿아요? 일단 이론으로 다 조질 수 있는데. 인간은요 인간의 에고는 개념화 해버릴 수 있으면 아는 줄 알아요. 자기가 공을 다 아는 줄 알아요. 소유만 늘어난 거예요. 지식만 더 늘어나요. 공성에 대한 지식이 더 늘어나가지고 더 못 놓게 된 거예요. 사실은 놓으라고 용수는 한 건데. “현상계도 봐. 이 현상계 이 펜 하나만 해도 연기하니까 공하지. 무자성이지. 이게 반야경의 핵심이야. 그러니까 내려놓고 무분별지로 들어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만 이미 여기서 공이 다 설명돼 버리니까 안 하는 거예요.

41:01 이젠 이 논리만, 논리로 무장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누가 참나 만났다면 “참나? 그것도 개념인데.” 참나라는 개념이죠. 참과 나가 만났죠. 인연에 의해서. 그럼 참나도 무상한 거 아니에요. 열반도 니르바나 탐진치가 없다고? 탐진치가 일단 있어야겠네. 탐진치가 있다가 없어졌으니까 연기로 존재하네. 무상하네. 열반도 작살나고요. 다 공이 돼요. 무자성으로 인한 공. “열반도 공 윤회도 공 모든 게 공이네.” 하고 논리로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면서 또 민망하니까 “공하다는 것도 공하다”는 논리를 또 주장해서 “공이라는 개념도 공하다” 해서 깨끗하게 논리로 끝내버린 거예요, 체험 없이. 이게 중관파의 제가 계속 비판하는 문제입니다. 그 용수보살의 그 단점을 극대화시킨 게 귀류논증 중관파예요. 이 용수보살의 단점을 보강한 게 저기 아까 말한 유가행 중관파들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귀류논증 중관파를 지금 누가 택하고 있냐?

42:01 티벳 겔룩파, 달라이라마 쪽이 그것을 주장해서 전 세계에 지금 교학을 귀류논증 중관파가 최고봉인 줄 알고 지금 교학공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걸 누가 비판해야 되는데 달라이 라마가 성하, 폐하로 불리는 분한테 누가 감히 불교에서 지금 말을 하겠어요? 저라도 해야지. 그러니까 아무도 이런 말을 안 하고 달라이라마 이론 가져다가 한국 불교를 다시 난도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우리 큰 스님들이 해 놓은, 원효나 예전에 모든 보조 지눌이나 견성하신 큰 스님들이 해 놓았던 참나, 주인공 얘기를 다 날려버리고 있어요. “참나, 주인공 주인과 공이 만났네. 이거 연기네.” 주인공 다 날릴 수, 언어로 된 건 다 날릴 수 있죠. 그래서 모든 언어를 해체하는 철학이 용수보살의 중론이었거든요. 그건 정광명 들어가라고, 언어에

43:00 집착하지 마라고 원래 시작된 일이었는데, 언어로 해체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한테 무기가 된 거예요, 체험 없이. 이래서 문제가 된 겁니다. 언어만 분석해서 날리고 끝내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반야경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얘기하는 건 그건 중관파들의 문제점이다. 원래 반야경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지 정광명심을 얘기한 겁니다. 보살 마하살은 마하반야바라밀, 즉 정광명 상태, 무한하게 빛나는 순수 의식 상태에 들어가서 공성을 직관할 때 이 소리입니다.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 그 자리에 만법이 있어요? 아니 정광명 자리에 만법이 없잖아요. 지금. 보세요. 텅 비어 있잖아요. 여기 뭐가 있어요? 이 텅 비어 있음, 공성을 직관하는 거죠. 이걸 직관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 거기엔 만법 자체 형상이 텅 비어 있고 오로지 뭐만 있어요? 청정광명심

44:01 진여 열반만 있는 거죠. 그래서 공성. 무자성도 맞아요. 여기에서 말한 무자성은 이겁니다. 자성 충만하고 한편으로는 이걸 무자성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때는 뭐예요? 아와 법, 아와 법이 여기는 오온과 지수화풍 사대, 이런 것들에 자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의 무자성이에요. 청정광명심의 자성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이게 없는 게 아니라, 나니 남이니 하는 이원성 세계의 그 자성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이원성 세계에. 무자성이라는 건 차별상이 없다는 얘기고요. 오염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차별상은 뭐죠?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 인과성 주객이 찢어지고 이런 게 없잖아요. 오염성은 뭐가 없어요? 무지, 아집으로 탐진치로

45:00 무지와 아집이 탐진치죠. 무지와 아집 탐진치가 오염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여기 탐진치도 없어요. 이 공 자리에는 탐진치도 없고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도 없어요. 인과성도 없어요. 그렇죠. 그래서 무자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 무자성을 아무 데나 적용해서 “청정광명심도 없다”로 날려버리면 안 된다고요. 저게 잘못해 가지고 청정광명심까지 태워버립니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자성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자성이 청정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것도 거짓입니다.” 이렇게 가버려요. 중관파가 잘못 탈선하면. 아시겠죠. 부처님 이래로 청정광명심은 기본입니다. 이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고 생멸이 없는 세계고 지수화풍 사대나 오온이 없는 세계라고 부처님이 이미 께왓다경에서 얘기했죠. 그러니까 없다는 것은 오온과 사대가 없다는 거예요. 순수 의식은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부처님이. 그 있다고 한 순수 의식까지

46:00 날려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요. “순수의식이 어디 있어?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지.” 거기에 꽂혀가지고. 모든 건 자성이 없어야 된다는 것에 꽂혀가지고. 자성이 있어요. 텅 빈 중에 자성이 꽉 차 있습니다. 그 자성이 오히려 뭐예요? 이 공성 안에 갇혀진 자성들이 사실은 아와 법을 만들어 내는 불변의 본질인 자성이 됐겠죠. 그러니까 독자적 자성이 없다. 이렇게 보셔야 돼요. 독자적인 별개의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이 펜에,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지금 귀류논증 중관파가 “이 펜이 공하다”라고 하면, 뭔 생각을 하느냐? “그렇지. 펜은 이름과 지수화풍의 합작이지.” 연기하는 지수화풍과 펜이라는 생각 감정의 만남이니까. 결국 이게 뭐예요? 합치면 오온의 작용이에요. 그렇죠. 오온의 작용일 뿐이죠.

47:00 “오온의 작용일 뿐이니까 연기하니까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니까 독립된 불변의 실체가 없지. 당연히.”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거를요 티벳 불교 안에서도 닝마파라든가 저희랑 입장이 같은 일체유심조로 보는 관점에서 일체를 참나 관점에서 보는 관점에서 이걸 보면 이게 펜이 왜 자성이 없죠? 두 가지 자성 없음을 이해하시라고요. 중관파식, 나누면 중관파식 자성이 없음은 이 펜이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연기하는 걸 보니까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예요. 지금 여러분 입장, 지금 홍익학당은 닝마파랑 사실 입장이 같거든요. 이거 자성이 없다는 건 뭔 말이에요? 참나의 작용이니까 자성이 없죠. 이 펜이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니까요. 참나의 작용일 뿐이지. 이래서 자성이 없는 거죠.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죠. 둘 중에 누가 해탈할 수 있을까요?

48:02 누가 해탈할까요? 정광명 안에 안주해가지고 일체를 정광명의 작용으로 보는 사람이 해탈할까요? 정광명은 본 적도 없고 이게 연기하니까 대가리 엄청 굴려가지고 분석 쩔어가지고 “연기하는 것 다 내가 꿰뚫어 봤으니 독자적으로 윤회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중관파에서 자성이 없다는 건 “독자적으로 윤회하지 않는 그런 불변의 존재는 없다. 펜은 지금 분명히 변화하고 있는 걸 보니까 자성이 없다.” 이 정도 의미입니다. 이게 도움이 되실까요, 해탈하는데? 정광명 안 만나고는 해탈 없습니다. 진여 안 만나고는요 열반 없어요. 열반 못합니다. 해탈 못합니다. 이런 논리로 아무리 무장해도. 이 논리는요 제가 이런 논리 닦을 바에는 저기 가서 양자물리학 닦으시라고 했어요. 차라리. 팩트 체크라도 하면서 공부하시라고.

49:00 이런 무상하다는 이거 하나 가지고 끝없이 밀어붙이지 마시고. 연기한다. 아니 과학에, 모든 만법은 서로 의존해서 존재한다. 이건 과학의 기초밖에 안 되겠죠. 그걸 철학이라고 하면 과학자들이 어떻게 볼까요? “응 그렇지. 그러지 말고 상대성 이론이라도 연구해 보지 그래. 그러지 말고 양자물리학이라도 좀 공부해 보지 그래.” “그런데 일체는 다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거 아닌가요?” “그거는 1 더하기 1은 2 수준밖에 안 되지 않아요. 과학에서.” “만법은 다 변한다.” “그렇지. 어쩌라고요?” 그래서 그거 가지고 로케트 띄우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뭐냐면 철학을, 얼마나 철학이 하찮게 돼요? 그러니까 철학이 무시 받는 거예요. 그거를 불교는 또 뭐라고 포장하는지 아세요? “과학이 인정했다. 불교를 인정했다.” 인정했죠. “그렇지 그 말은 맞지.”

50:00 “만법은 다 연기하지 않나요? 인과로 굴러가지 않나요?” “그렇지.”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지 않나요?” “그렇지.” 지금 이렇게 인정받으시면 좋으세요? 과학자들이 그 말 듣고 “와! 나 이제 오늘부터 불교다.” 이럴까요? “쟤네들 언제 양자물리까지 올까?” 이러겠죠. 그거는 그냥 1 더하기 1은 2 수준이잖아요. 과학적으로 봤을 때. “우주는 진동하고 있다.” “그렇지.” 어쩌라고요? 그래서 그 진동을 어떻게 쓸 건데요? 어떻게 이해할 건데요? 그러니까 과학에다 갖다 대면요 과학자들이요 불교를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그 예전에 그래도 어떻게 이런 말이라도 했네.” 이거예요. “그 원시시대에 미신에 안 빠지고 과학적 사고를 했네.” 이런 종교로 만들고 끝낼 거예요? 지금 과학자들한테 가서 “당신들이 시공 안에 인과성 안에 이원성 안에서는

51:00 전문가지만 시공 너머 정광명 알아?” 이렇게 나가야지 과학자가 “역시 철학은 또 다른 영역이구나” 하지 않겠어요? 불교 관계자분들이라도 이거 보시고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아시면 좋겠어요. 성철 스님이 아인슈타인이 색즉시공을 입증했대요. E는 MC의 자승(E=mc²)이라는 걸 통해. 돌아버립니다, 그 지경까지 가면. 참나 아는 분이 어떻게 그런 말 할까요? 색즉시공은 일체가 참나 작용이라는 소리인데 과학자가 뭘 증명해요? E는 MC의 자승이 무슨 색즉시공이에요? 그럴 바에는 그냥 영화 색즉시공 한 편 때리시는 게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엉뚱한 소리를 할 바에는 에고라도 즐겁게 해 주세요. 웃긴다는 거 아시겠죠. 불교가 이렇게 개념으로 분석으로 불교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이런 교학적 시도와 정광명에서 불교를 찾았던 심학적

52:00 이 시도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데 교학적 시도들이요 참나 체험도 없는 정광명 체험도 없는 열반 체험도 없는 사람들이 교학을 갖다가 난도질에서 일반 대중은 누굴 걸 더 이해하기 쉽겠어요? 누구 말이? 교학이죠. 중생들은 체험이 없으니까 체험 없는 사람들 말이 더 와 닿아요. 그럴싸하단 말이에요. 체험으로 하는 말을 들으면 황당하단 말이에요. 보세요. “너 알어? 펜이 너 니가 만든 거 알어?” “또라이구나” 하겠죠. 그런데 그 사람 붙잡고 “봐. 이거 흰색 빨간색 이것도 다 빨간색이 그냥 존재해? 여러 색 중에 하나로 다 연기 속에서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 그게 모여서 펜이 됐잖아. 이거 얼마나 무상하니. 영원한 펜이란 건 없지. 그래서 공한 거야.” “아! 설명 잘하네. 맛집이네.” 그런데 한 사람은 “이거 이 펜이 너 참나 작용인데...” “이 새끼 멀리해야겠다. 황당하다.”

53:00 그러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자꾸 진짜배기 말은 자꾸 이상해지고 신비화되고, 이 교학을 완전히 연기하니까 공하다가 점령한 겁니다, 지금. 소승과 대승의 기묘한 짬뽕이에요.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사실은 소승 이론이에요. 제법무아, 만법은 내 것이랄 게 없다가 더 확장돼서 “만법에는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 따라서 만법은 공하다”라는 소승에서 끌어낸 변종 법공 이론이에요. 대승의 법공 이론은 전혀 아닙니다. 그게 그냥 정광명의 작용이니까. 정광명 자리에서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온, 사대가 없는 그 자리에 일체가 작용이라서 일체가 다 같이 공한 겁니다. 이거 아시겠죠? 쉬는 시간 갖고 이어서 가겠습니다. 5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