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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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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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우다나의 열반
강의일자 2023. 04. 22. 土.
게시일자 2023. 07. 26.
동영상 길이 55:25
강의 중 인용 도서 우다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m0vrgP_JG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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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못 들으신 분들은 요것만은, 지난 시간에 들으셨더라도 이것만 기억합시다. 포인트는 참나란 말을 쓰냐 안 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부처님이 얘기하신 광명심이기도 하고요. 정광명심, 청정광명심, 투명한 빛나는 의식, 시공을 초월한 빛나는 의식이 있다. 우리 내면에는 특징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무한하게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 있다. 이게 포인트지 이걸 참나라고 부르냐 마냐는 중요한 게 아니죠. 명칭이 뭐가 중요해요. 그렇죠. 이 실체가 있냐는 거예요. 그럼 지금 그 불교계에서도요 이 광명심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이 광명심을 인정한다면 이 광명심에 접속하는 게 모든 공부의 제일 핵심이 돼야 된다. 왜? 이 세계야말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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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고 이 세계야말로 열반이다. 그동안 모든 경전들은 부처님 이래 다 이걸 외쳤다. 청정광명심이 우리 안에 있다. 이게 모든 해탈의 근원이고 이 자리가 참되고. 보세요. 여기는 조금도 더러운 게 없어서 참되고요. 청정하다. 통하죠. 참되고요. 항상 똑같아서 같을 여(如)입니다. 늘 여여(如如) 현상계 어떤 존재도 무상하게 변하지 여여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여라는 말을 붙이면 여(如) 이거 하나만 써도 돼요. 불경에서 여만 만나면 참나의 세계라고 보시면 돼요. 시공을 초월한 참나의 세계 아니고는 절대계 아니고는 여가 붙을 수가 없습니다. 달라요. 변합니다. 열반, 열반이란 건 모든 번뇌가 없는 자리라는 거죠. 탐진치가 없는 자리란 뜻입니다. 불타서 다 사라져 버린 자리, 이렇게 소극적으로 표현하건 적극적으로 상주불변의 영원불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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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것이라고 표현하건 간에 이 청정광명심이 포인트다. 우리 안에는 그게 있다고요. 그래서 초기경에서 읽었죠. 그 자리가 있다고 했다. 빛나는 의식이 있다. 자 그런데 지난 시간에 나눠드린 자료는,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자 육근의 세계 부처님이 그랬죠.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는 육근의 세계, 일체 세계란 건 육근의 세계밖에 없다. 내 육근의 세계 안에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 있다. 청정광명심, 광명심이 있다. 자 그러면 이게 그대로 열반 아니겠는가 이겁니다. 지금 지난번 읽어드린 경전에서는 뭐였죠. 그래서 이 빛나는 의식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이 의식의 세계에는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어떤 물질도, 물질적 존재도 없고 여기에 어떤 이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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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고 같은 어떤 이원성도 없고 거기에 오온이라고 하는,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거든요. 그럼 요게요. 색깔이 있는 거라는 거는 물질을 말해요. 물질, 육체나 물질, 물질. 여기서 이 색(色)을 대표하는 게 지수화풍입니다. 그래서 이 불교는요 물질을 4개로 지수화풍(地水火風), 정신작용을 4개로 말할 때는 수상행식(受想行識) 그래요. 수(受)는 느낌 감정적인 거고요. 좋다 싫다. 상(想)은요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개념화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그냥 저는 이해하시기 쉽게 생각 그래요. 표상작용이니 뭐 이렇게 어렵게 얘기할 수 있는데 그냥 생각. 여러분 생각한다는 건 언어화 돼있죠. 어떤 이름을 붙여서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머리를 굴리는 걸 상(想)이라고 그래요. 행(行)은요? 그런데 그 떠올리는 것 중에 좋은 걸 만나면 어때요? 갖고 싶다. 싫은 거 만나면 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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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가 일어나죠. 의지 작용을 행(行)이라 그래요. 식(識)은요? 이 총체적인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식별합니다. 내가 지금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있어요. 식별이란 이건 알아차림이에요. 그래서 이 알아차림은, 이거는 이것도 알아차림인데 알음알이라고 그냥 부르는 이유가 대상이 있는 알아차림이에요. 대상이 변하는 거에 따라서 계속 내 식별 내용이 바뀌죠. 그래서 변화하는 알아차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빛나는 의식도 분명히 알아차림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따로 구분해서 순수 알아차림이라고 우리가 불러줘야 구별이 됩니다. 오온에서의 식(識)은요 지수화풍을 만나서 좋으니 싫으니 지수화풍이 어떠니 갖고 싶니 마니 하는 이 모든 걸 알아차리는 거예요. 내 의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아차리고 있는 거예요. 이해하시죠. 이게 식(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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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 식이고. 그래서 이 색깔을 알아차리는 것도 식(識)이고요. 결국 색깔을 뭔 색깔을 봤을 때 알아차리는 것도 식이고, 기분이 좋다고 알아차리는 것도 식이고, 그거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있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식이고, 갖고 싶네 마네 하고 의지를 알아차리는 것도 식이고. 그런데 이 모든 오온도 거기 “그 자리에는 오온도 설 수 없다. 지수화풍도 설 수 없다. 어떤 것도 설 수 없다. 그런데 빛나는 의식만 있다.” 이건 뭐예요. 이게 열반이잖아요. 이 묘사가 똑같다고요. 그것까지도 봤어요. 열반에 대한 묘사가 똑같다. 그래서 그때 읽어드렸는데 그때도. 자료를 나눠드린 거예요 오늘. 그때는 제가 그냥 읽어 드렸죠. 자료로 나눠드린 거예요. 우다나의 열반 보실래요. * 우다나의 열반. 새로 나눠드린 자료예요. 우다나의 열반. 이게 새로 받으신 걸로 보셔도 되고. 이제 새로 교재 받으신 분들은 4페이지에 이어서 있죠. 자 열반경이라는 게 열반을 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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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경이 여러 개 있는데요. 그중에 이렇게 있어요. 보세요. 뭐 연구해 보자고요. 석가모니가, 석가모니는 열반을 한 번도. 별로. 한 번도는 아니에요. 긍정적으로 잘 얘기하질 않았어요.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만. 탐진치가 없는 자리, 번뇌가 없는 자리 이런 식으로만 얘기했다고요. 근데 이 자리를 유일하게 다 긍정적으로 얘기한 게 빛나는 의식이다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게 이 빛나는 의식이라고 보는 게요 이게 당시 힌두교에 유행하던 우파니샤드의 가르침하고 그대로 통합니다. 그래서 외국 학자들 중에 석가모니는 신기하다. 다른 육사외도들, 그 우파니샤드에 대항해서 나온 게 육사외도입니다. 여러 여섯 외도라는 게요. 힌두교에서도 외도를 말해요. 정통 브라만, 그 당시 브라만교를 공격하던 불교 같은 거죠. 불교처럼 신생 철학들을 육사외도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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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6파 철학은 힌두교에서 정통철학이에요. 근데 그 보시면 부처님은 정통 육파 철학 중에 특히 우파니샤드를 계승했다고 보는 거에 이제 뭐 베단타철학 이런 게 있는데. 이런 우파니샤드의 정통 철학에 대해서는 별로 비판한 게 없는 거예요. 이게 이상하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더 재밌는 거는 석가모니의 스승이 우파니샤드의 도인들이에요. 또 심지어 스승한테 워낙 잘 배워서 다 인가까지 받았어요. 즉 뭐냐? 그 당시 우파니샤드 스승들은 마하리시, 우리가 아는 지금 힌두교의 마하리시 같은 도인이에요. 근데 석가가 그 도인한테 가가지고 바로 아트만 각성에 대해서 인가까지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랑 같이 아쉬람 운영하자”라고 하는 학당을 운영하자는 것을 부처님이 거부하고 나온 거예요. “아 이건 내가 찾던 그 진짜 해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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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간단해요. 진짜 해탈은 나의 탐진치의, 내 마음의 탐진치의 뿌리까지 뽑아야 되는데 이 양반들은 아트만만 딱 찾고는 이미 해탈했다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안 맞죠. 내가 찾던 거 아니다. “이건 궁극의 열반이 아니다” 하고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래서 그렇지 이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되게 존중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왜? 비판을 신랄하게 하지 않아요. 오히려 빛나는 의식이라는 우파니샤드식 표현으로 열반의 세계를 설명까지 해요. 그리고 본인이 깨달았을 때요, 여기 자료 다 있습니다. 나중에 읽어드릴게요. 깨달았을 때 맨 처음 떠올리는 게 그 스승들을 떠올려요. “내가 깨달은 거 너무 심오해서 일반인은 알 수가 없어. 그 스승들은 그래도 바로 내가 말하면 알 거야.” 신통으로 보니까, 말도 안 되지만 신통으로 보니까 바로 직전에 돌아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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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 이분들이. 앉은 자리에서 신통으로 봤대요. 요즘 같으면 이제 이게 천안통이죠. 천안통 천이통이 별건가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저기요. 아 돌아가셨어요.” 이거(스마트폰)를 그때는 신통으로 한 거죠. 그래서 신통이 필요 없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AI와 이거면요 신통에 쓸 시간에. 자 지금 천이통 천안통 얻겠다고 산에 가서 10년 20년 계실 시간에 돈을 모아서 이걸(스마트폰) 사세요. 그리고 남는 시간에 육바라밀을 공부하세요. 견성을 공부하세요. 지금 포인트가 그게 아니에요. 축지법을 얻겠다고 산에서 10년 20년 고생하지 마시고 KTX를 타세요. 비행기를 타시고. 지금 뭔가 착각하고 옛날식 공부를 하면 안 됩니다. 자 10년 20년에서 축지라도 얻으면 다행이에요. 못 얻으면요? 쉽지 않다. 그러니까 한 생을 걸고 축지를 하겠다고 하실 바에는 뭘 하셔야 돼요? 알바를 하셔서, 뭐라도 하셔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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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을 누려라 이거죠. 포인트는 물질문명을 누려라. 물질문명이 엄청난 신통이라는 거 아셔야 돼요. 인류를 해방시켜주고 있어요. 그래서 AI도 두렵지만도 우리가 분명히 갈 수밖에 없어요 그 길로. 인류는 계속 그렇게 걸어왔거든요. 진짜 우리 집에 있는 그 밥하는 그 밥솥이 뭐라고. 밥솥이 노비 일자리 하나 뺏었습니다. 밥하는 노비, 밥 짓는 노비 일자리 뺏었어요. 예전에 부잣집에는요 그 불 켜는 노비도 있어요. 호롱불 노비의 일자리를 스탠드가 뺏었습니다. 형광등이, 우리 이게 뺏었어요. 즉 물질문명이 하나 발전될 때마다 실업이 이어져오면서 우린 발전해 왔어요. 그런데 그 거기를 나쁘게 해석하면 나쁜데 좋게 해석하면 뭐예요. 인간의 삶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것도 있지만 또 하나는 인간을요 더 본질적인 일을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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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몰고 있어요. 지금 계속. 그 극치에요 AI는. “진짜 너는 뭐로 네가 인간이란 걸 보여줄래” 하고 내몰고 있습니다. 밥하지 마. 뭐하지 마. 계속.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 이제. 이제 뭐 또 알바라도 딱 갔더니 이제 또 키오스크(kiosk, 무인 주문기계)가 대체하네요. 필요 없대요. 또. 다행히 지금은 가보면 오작동도 많고 사람 하나 붙어 있더라고요. 다행인가. 아무튼 뭔가 근데 우리는 내몰리고 있습니다. 점점.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재밌어요. 하늘이 공부를 안 하면 견딜 수 없게 내몰고 있다. 우린 이런 연구를 이렇게 벼락치기라도 해야 된다. 벼락치기도 아니에요. 인류 3000년 지혜를 모아 가지고 인간의 본질을 벼락치기 하는 반입니다. AI 시대 이대로 좋은가. 뭐 이래가지고 모인 거죠. 지금 저한테도 자꾸 그런 강의가 들어와요. 어디 막 이런 어디 협회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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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기들 직종이 위태롭다는 거예요. 나아갈 길을 저한테 얘기하라는데 제가 어떻게 해요. 그 직종도 모르고 AI도 모르는 저한테. 근데 왜 저한테 의뢰했는지는 알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거죠. 우리는 뭘 해야 되나. 그 직종을 떠나서 사실은. 그래서 안 그래도 좀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얘기를 좀 많이 해야겠다. 자 2500년 전 석가모니께서 어떤 답을 내셨을까요? 인간은 뭐 하러 태어났다. 이거에 대한 답이 열반 찾으라는 거예요. 그럼 이 열반이 우리 안에요 우리 내면에 지수화풍과 오온이라고 했지만 결국 이 색(色)이 지수화풍이니까 우리 오온, 오온은 다른 이름으로 또 육근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감과 이 부분(색)이 오감을 상징하거든요. 이쪽(수상행식)은 마음을 상징하고. 오감과 마음이 육근이죠. 결국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육근밖에 없는데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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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 외에 다른 거 경험하신 분 있으세요. 다 지금 경험하는 게 오감과 내 마음, 울고 웃는 내 마음이거든요. 요 감정의 영역(수) 생각의 영역(상) 의지의 영역(행) 이건(식) 전체적인 식별, 알아차림. 이거밖에 없다고요 우리 의식도. 엄청 정밀한 겁니다. 그 당시 2500년 전 이런 이론이 다 나왔다고요. 인간이 경험하는 건 이거밖에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오히려 AI 시대에 더 빛날 겁니다. 이거 밖에 없다. 그래서 뭘로 그러면 너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인간이란 모름지기 이걸 찾아야 된다. 열반을 찾아야 된다. 이거 없는 세계가 있다. 이거 없는 세계로 가면. 이 세계들은 지금 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들은 탐진치의 세계고요. 여기는 공식이, 탐진치 세계를 지배하는 공식은 뭐예요? 첫째 무상해요. 고 괴로워요. 무아 내 것이랄 게 없어요. 이건 다 무상하니까 그래요. 무상하니까 내 것이랄 게 없어요. 계속 변하는데 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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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 그래요.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 계속 변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거는 내가 그런데 답이 있다. 열반으로 가자. 내가 가르친 팔정도. 팔정도라는 거는 삼학(계정혜)의 확장판입니다. 삼학은 결국 뭐냐? 선정이요 선정, 정신 차리고 지혜, 정신 차리고 이게 열반에 접속하는 거예요. 열반에 접속해 가지고. 그냥 보면 그냥 여러분이 그냥 생각하면 오온의 분별 밖에 안 돼요. 분별이 아니라 선정에 들어서 참나 접속해 가지고 열반 접속이라고 하죠 초기불교는. 열반에 접속하면 기본값이 바뀌어요. 여러분의 기본값이 바뀝니다. 열반이라는 탐진치 없는 세계에 접속해 가지고 거기서 지혜를, 생각을 해보면 다른 게 보여요. 이게 자명하고 이게 찜찜하구나.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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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 그대로 양심적으로 살아가시면 돼요. 이거만 하면 우리는 다 새로운 기본값을 깐 인간이 된다. 새로운 인간 뭐가 되냐? 아라한이라는 새로운 인간이 된다. 아라한을 만들라고 그랬어요. 지금 똑같아요. AI 시대 우리는 뭐가 돼야 될까요? 아라한이 됩시다 하는 거예요. 석가모니식 해법은. 그 당시 탐진치로 살아가는 중생들한테 아라한으로 가자 그래요. 예수님은 혈육의 자녀들한테 하나님 자녀로 가자 그랬어요. AI가 따라오면 우린 다음으로 가버리자. AI가, AI는 결국 색수상행식을 카피하고 있다. 우리는 열반으로 가버리자. 이겁니다. 그럼 거기서 나오는 기본값은 다른 기본값이 작동한다. 거기서는 팔정도가 굴러간다. 이 열반에 접속을 하면요 팔정도가 작동해요. 8개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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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가 작동해요. 부처님은 그 뒤로 이 팔정도에의 맞게 살아가신 거예요. 제가 늘 주장하는 이 이론이죠. 먼저 새로운 기본값에 접속하라. 그러면 새로운 인가. 새로운 게 자명해 보이고 새로운 게 땡겨요. 그때 거기다 맡기면 돼요. 여러분의 삶을 맡기면 돼요. 육근을 그걸 내비 삼아, 이때 이 지혜를 내비 삼아, 이 선정에서 오는 이 지혜를 내비 삼아 맡기고 살아가시면 돼요. 이대로 운전하시면 돼요. 그럼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필요한 거예요. 인간은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되고 개벽이 돼야 된다. 그러니까 이 열반도 그렇게 활용하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 묘사한 거를 보죠. 1. 「열반경3」 수행승들이여 열반의 세계란 이런 세계가 있다. 제가 이걸 할 때, 여러분 읽으실 때 이걸 포인트 삼으셔야 돼요. 지금 불교 공부하신 분들이요 오해하셔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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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반이 있고. 자 이런 열반, 불변의 무위라 그러죠. 변하지 않는 열반의 세계가 있고 이 열반의 세계, 여기 탐진치의 세계에서 떠나서 이 세계에 접속을 해야 돼요. 접속을 해야 여기서 새로운 지혜가 나오고 팔정도가 굴러갑니다. 이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열반의 세계를 만들어내야 되잖아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만들어내는 공부는 바리새파 공부입니다. 내가 율법을 잘해서 탐진치를 내 힘으로 때려잡으면 구원받을 거야. 예수님은요? 네 힘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때려잡고 있는 너 그 마음도 욕심이야 사실은. 자선을 베푸는 그 마음도 욕심이야. 천국 가고 싶어서 하나님한테 잘 보여서 천국 가려고. 포인트 얻어가지고 천국 갈려고. 지금 교회 이 마음으로 다니시면 다 지금 답 잘못 찾고 계신 거예요. 뭐가 잘못됐어요. 기본값이 안 바뀌었는데 너가 너 하던 똑같은 그 탐진치 방식으로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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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받겠다고.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 불변의 세계가 있다라는 얘기를 부처님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열반이 뭔지 설명 안 해주고 가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오해해요. 탐진치를 내 힘으로 때려잡아서 열반을 구현해 내려고 그래요 내 삶에서. 내 삶에서 조금의 탐욕도 분노도 어리석음도 없는 그런 삶을 한번 구현해 보자, 내 힘으로, 견성 안 하고, 참나 도움 안 받고, 열반 도움 안 받으면서. 즉 열반의 도움을 받아야만 우리는 더 궁극적인 열반이 들 수 있다는 겁니다. 열반에 접속해야만 진짜로. 보세요. 여기는, 이것만 구분하세요. 여기는 본래 탐진치가 없는 세계고요. 열반의 도움을 받아야만, 탐진치의 본성을 갖고 있는 내가 탐진치의 본성이 아닌 계정혜가 본성인 팔정도가 본성인 열반에 접속을 해서 기본값이 바뀌어야만 내 삶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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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가 구현되면서 현상 세계에서도 탐진치가 줄어들면서 사라져간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게 이건 종교 공통입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종교 공통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그 무위에 본래 열반이 존재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것도 여러분은 밖에 존재하면 안 돼요. 여러분 의식 안에 열반이 존재하지 않으면 절대 여러분은 그 열반에 접속할 수가 없고 그 열반을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부처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보자고요.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게 있다. (무위법인 열반은 생멸이 없는 영원불변의 존재이다.) 이게 무위(無爲)예요. 무위. 이거를 무위라 그래요. 여기 위(爲)가 조작하다는 뜻이에요. 조작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전혀 조작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즉 이 말은 뭐냐? 열반은 절대로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원래 존재하는 거지. 원래 존재하는 그 열반. 태어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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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나지도 않았다잖아요. 만들어지지도 않고 형성되지도 않았다잖아요. 근데 이런 설명을 듣고요. 공종(空宗) 쪽은 어떤 함정에 빠지는지 아세요. 중관파 같으면. “봐 없다잖아.” 뭔 말인지 아세요. 여기서 뭘 읽어내냐면요 저기 지금 저기 티벳 중관파 같으면 뭘 읽어내냐면 “태어난 적도 없고 생겨난 적도 없다고요. 존재하지 않는 거네.” 이럽니다.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건 없거든요. 이런 게 있다고 인정해 버리면 큰일 나요. 지금 달라이라마는 절대 이거 인정 안 합니다.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왜? 이런 게 만약에 있다면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는 게 인정되죠. 영원불변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인정해 버리면 힌두교 아트만하고 뭐가 다르냐는 거죠. 그래서 인정 안 해요. 특히 공종이 다 그런 게 아니에요. 공종 중에서도 그런 귀류논증. 모르셔도 되는데 아무튼 달라이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그 파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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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안 합니다. 공종인데 공(空)에서 또 멀리 간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 실제로 영원불멸의 실체를 부정해요. 그래서 이 청정광명심도 그쪽 주장은 이것도 무상하다는 거예요. 이것도 무상하다는 주장이에요. 왜? 근거가 간단해요. 이게 영원불멸의 실체가 돼 버리면 우파니샤드랑 똑같아진다는 거. 똑같아질까봐. 진리냐 아니냐가 아니라. 저 여러분 그 어떤 학자한테 “당신 주장 이거 맞습니까?” “아니요. 그 주장이 이렇게 돼 버리면요 제가 그 스티븐 호킹하고 똑같아지거든요.” 그러면 이 학자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럼 진리 아니에요 그게. 아니 당신이 연구해도 그 결론 밖에 안 나면 그게 진리네요. 진리를 알고 싶은 학자가 있고 내 주장을 고수해야 되는 학자가 있는 거예요. 아니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럼 제 주장이 쟤랑 똑같아지잖아요. 그럼 좋은 일 아닌가요. 인류 입장에서 좋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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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명하다는 얘기잖아요. 누가 연구해도 같은 결론이 나면. 아니요. 그러면 제가 제 독자성이 사라지는데요. 이런 식 논리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진짜 이런 논리를 쓰시니까 제가 비판하는 거예요. 힌두교랑 같아지면 큰일 나나요? 석가모니도 우파니샤드 도인들한테 배웠는데. 그리고 오히려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이 도인들은 진짜를 몰라. 이 도인들은 이 열반에만 안주한 거죠. 근데 석가모니는 욕심이 커요. 여기까지 싹 날려버리겠다는 거예요. 내 육근에서 탐진치를 날려버리겠다. 그래서 평생 닦으신 거예요. 이게 이 열반은 근데 문제는, 이것만 보고 힌두교 비판하고 부처님이 사신 걸 보니까 “아 열반은 평생 닦아서 이렇게 만들어가는 거구나”라고 오해한 사람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반에 지금 아무도 못 드는 거예요. 왜? 아무리 닦아도 탐진치가 사라지겠어요. 안 사라져요. 문제는 그 마음도 탐진치거든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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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졸라 안 닦이네.” 이게 탐진치죠. 자 미치게 닦고 싶다와 뜻대로 안 된다는 이게 다 분노거든요. 탐욕과 분노. 그래서 어리석죠. 진리를 모르니까 지금 답답한 거니까. 탐진치 3종 세트가 지금 계속 같이 가는데 열반을, 언제 열반에 도달해요. 도달할 수가 없어요. 이상해지는 거예요. 도달할 수 없는 열반을 제시한 게 돼요 석가모니가. 근데 재밌는 거는 석가모니는 열반의 세계가 있는데 이것부터 이상하잖아요. 지금 이런 발상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석가모니가 합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난 적도 생겨난 적도 만들어진 적도 형성된 적이 없어. 그럼 이게 진짜로 존재하지 않아서 이렇게 설명한 건지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어 설명한 건지 더 들어보자고요. 수행승들이여 만약에 이런 세계가 없다면 이런 세계가 진짜 없다면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떠난다는 게 있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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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의 세계가 유위(有爲)의 세계거든요. “진짜 무위의 세계가 있어. 만약 이게 없다면 유위의 세계에서 우리는 못 떠나.” 자 설명이 너무 친절하죠. “있어 그런 세계가. 무상(無常)의 세계에 대해서 진짜 유상(有常)의 세계가 있어. 영원한 세계가 있어. 그래서 떠날 수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떠날 수 있다고 하는 거야. 할 얘기 다 하셨어요. 분명히 그 세계는 있다고 하셨어요. 근데 이 말 듣고도 “아, 부처님 방편 잘 쓰셨네. 원래는 없습니다” 하고 끝나요. 있다고 고집하면요 힌두교랑 같아진다고 “아우 큰일 날 뻔했네” 하며 X표 긋고 간단 말이에요 지금. 여기서 잘 이해하셔야 돼요. 자 열반의 세계는 부처님 당시부터 무위의 세계로서 존재한다고 하셨다. 무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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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라는 건 조작할 수 없는 세계. 즉 열반은 또 하나 우리가 알아내야 될 건 열반은 만들어질 수 없다.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 이 방이 우리가 살아가는 육근의 세계예요 이 방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요 팔정도 계정혜를 닦아서 이 커튼을 치우는 것만 가능해요.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무위의 세계예요. 열반은 빛과 같아요. 우리가 커튼을 치우면 열반이 들어옵니다. 그럼 열반락이 펼쳐지고, 열반에서 지혜가 오고, 우리 팔정도가 굴러가요. 열반의 빛을 받아서 태양 에너지가 뭐 만물을 작동하듯이 태양, 열반의 빛 받아 가지고 우리가 육근을 굴리고 다 살아간다니까요. 팔정도를 굴린다니까요. 그런데 열반 자체는 우리가 만든 게 아니에요. 현상계적인 내 자아, 육근의 세계에서 탐진치를 줄여나가는 작업과 별개로 원래 열반은 탐진치가 없다라고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원래 그 세계는. 그래서 이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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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세계가 열반의 세계인 이유가 여기는 지금 오온이 없다라고 했잖아요. 오온이 없다. 여긴 이거 다 조작하는 세계거든요. 태어나고 생겨나고 다 있어요. 색깔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소리도 들렸다 사라지고, 생각도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 세계가 아니래잖아요. 이걸 떠날. 그러니까 부처님이 무상‧고‧무아한 이 세계를 우리 떠날 수 있다. 법구경 지난 시간에 읽었죠. 떠나야 된다. 떠나서 어디 도달한대요? 청정한 열반의 세계에 도달해요. 그래서 이 열반이 아라한이 되는 거는, 아라한이라는 건 결국 열반 안주자를 말하는데 열반에 들어앉은 사람. 부처님처럼 탐진치를 다 없애지 못 했기 때문에 아라한이 아라한인 거예요. 부처가 못 된 거예요. 아직 탐진치 때가 남아 있지만 아라한인 이유는 열반에 딱 들어앉아 버렸어요. 기본값이 바뀌었단 얘기에요. 이제 아라한들은 기본값이 열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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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세계가 내면에 항상 빛나고 있어요. 그래서 아라한인 거지 부처님처럼 탐진치가 없다면요 부처님처럼 다 꿰뚫어봐야죠. 아라한들은 절대 부처님처럼 역량이 안 됐습니다. 역량 개발하던 중이었지. 근데 왜 탐진치를 없앴다고 하나요? 열반은 원래 탐진치가 없으니까 이 자리에는. 원래 탐진치가 없는 이 자리에 들어앉았기 때문에 탐진치가 일어날 때 피할 순 있어요. “내 안에 섬을 만들어라” 그랬죠 부처님이. 섬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라한들은 탐진치가 일어나면 열반에 이렇게 들어가 버려요. 도피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자유자재로 경영은 못 해요. 부처처럼 업장이 다 떨어지지 않아서. 부처님만이 탐진치를 갖고 노는 거예요. 이 양반들은 탐진치를 보면 도피해요. 그러니까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거예요. 이거 이해 못 하시면 경전 읽을 때 다 이상해요. 어떻게 일주일 만에 아라한이 나왔는지도 말이 안 돼요. 부처님도 그 고생하신 탐진치 벗어나기를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닦으셨는데 도대체 왜 아라한들은 일주일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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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이 됐죠? 부처님보다 더 상근기인가요. 열반에 들어앉는 거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빛나는 의식 안에서 완전히 자리 잡는 게 아라한이었어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보름 만에 아라한들이 속출합니다. 1,250명 들어와서 바로 막 일주일 만에 아라한들 되고 난리 나요 이게 다 가능한 게 그것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안에 이 무위의 세계, 유위의 세계가 있다면 유위의 육근의 세계, 이 무상‧고‧무아가 지배하는 이 세계 말고. 열반에 이 무위의 세계를 따로 빼면 어떻게 돼요. 상(常) 영원하고 아(我) 참나의 의식이 있으면서 정(淨) 청정하고 락(樂) 고통이 없어요. 그래서 무상(無常)하지 않고 영원(常)하며 고(苦)가 아니고 락(樂)이며. 여기 무상‧고‧무아에 하나 더 하면 부정(不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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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지 못 하다. 더럽다고 해서 부정의 세계라고 하거든요. 부정관(不淨觀) 시키잖아요. 부처님 몸이 더럽다고 관(觀)하라고. 그럼 대신에 청정하다. 상락아정의 이 네 가지 덕을 뭐라 그래요. 열반사덕. 열반이 지금 4가지 덕이 있다. 이럴 때 열반을요, 열반을 실체로 보고 있는 겁니다. 영원불변의 실체. 영원불변의 실체라는 뜻으로 진여(眞如)라고 부른 거예요. 진여. 참되고. 열반의 세계는 청정(정淨)하니까 참(진眞)되고 영원(상常)하니까 여(如)예요. 상락아정의 다른 표현이에요. 청정하니까 참되고 영원하니까 여예요. 똑같다. 영원히 똑같다. 무상‧고‧무아랑 다른 세계의 이야기에요. 이 세계의 이야기를 안 하면 진여 열반을 부정하게 되고, 자기 안에서 뿌리를 찾지 못 하면 새로운 기본값을 깔지 못 하고 자기가 만들어내는 공부를 하게 돼요. 그러면 아라한을 표방하건 보살을 표방하건 다 바리새파식 공부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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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거예요. 계율주의자로서. 계율만 지키면 내가 구원받을 줄 알고. 즉 탐진치만 틀어막으면 구원받을 줄 알아요. 전혀요. 내면의 탐진치가 본래 없는 세계의 기본값을 못 깔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탐진치로 하는 거란 말이에요. 바라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바라밀은 기본값이 바뀌어 가지고 열반의 의식에서 나오는 게 바라밀이지 진여의 의식에서 나오는 게 바라밀이지 탐진치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은 탐진치예요. 제가 며칠 전에 라이브 때 그랬죠. 돼지가 살을 빼면 어떻게 돼요. 홀쭉한 돼지요. 기본값이 안 바뀌었잖아요. 잔인한 말 같네요.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돼지가 살을 빼면 날씬한 돼지가 된다. 이상하잖아요. 뭐지? 뭐지? 별 이야기가 아니라 기본값이 바뀌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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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값이 안 바뀌면 뭘 해도 그 맛이다. 예전에 군대, 군대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먹어도 다 같은 맛이 나요. 체험을 했어요. 어 신기하다. 분명히 음식이 다 달라요. 근데 다 같은 맛이 나요. 저는 냄새도 잘 못 맡거든요. 후각도 둔한데도 아 신기하다. 같은 냄새가 나는 거 같고. 기본값이 같다. 뭘 요리해도 여러분 다 딱 지 같은 거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아라한 본 따서 계율만 잘 지키면.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게율 잘 지키라 그랬어.” 근데 이 말보다 더 중요시해야 할 말이요 계율 잘 지키란 말은 이런 계정혜를 총체적으로 잘하라는 얘기고요. 실천까지 잘하라는 얘기고 맡김까지 잘하라는 얘기고요. 부처님이 가시기 전에 그렇게 강조한 얘기는 “너 안에 섬을 만들어라”는 얘기예요. 너 안에 섬을. 여기 있죠. *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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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고 준비했어요. 자등명 법등명. 얘기하다가 생각났어요. 내가 싣지 않았나? 이거 교재로. 자등명 법등명 이게 원 말이요 원 의미는요 등(燈)이 아니에요. 원래 그 경전에는 섬으로 돼 있어요. 섬. 이거를 초월 번역인가요? 등으로 번역해 준 거예요. 그 한역하시는 분들이. 원래는 팔리어 경전에서는 섬으로 돼있습니다. 말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등(燈)으로 바꾼 거예요. 원말이 이겁니다. 근데 잡아함경에 이제 섬으로 나온 경이 있어서 읽어 드릴게요. 아난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라. 여기서 섬이 의미하는 건 뭔지 아시겠죠. 귀의처랑 그러면 상응하는 거예요. 안식처예요. 안식처. 섬이라는 건요 보세요. 여기서 뭍에서 전쟁이 나도 섬으로 도망가면 되죠. 바다가 보호해 주고 있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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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처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이 육근의 바다에서, 육근의 바다에서 난리가 났어요 막. 오늘 또 이상한 걸 봐버렸네요. 난리 나고 흥분하고 막. 뭐 보고 느끼고 맛보고 막 난리 났을 때 빨리 어디로 도망가요? 배 타고 빨리 섬으로. 이 섬에 가면 열반이 있어요. 열반 안에는 또 팔정도의 진리가 있어요. 진리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죠. 열반과 진리. 자 열반의 세계의 기본값이 진리라는 거예요. 열반의 진리. 기독교도 똑같아요. 성령을 뭐라고 불러요? 진리의 영이라 그래요. 성령 안에 진리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인도한 대로만 살면 돼요. 성령 접속하고 성령이 인도한 대로만 살면 돼요. 끝. 이렇게 쉬운 게 초기불교도 쉬웠어요. 아라한 되는 게. 아라한 되는 것도 쉬웠고. 열반 접속하면 돼요. 성령 받아라 수준이에요. 열반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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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선정도 많이 안 시켰습니다. 부처님도 저 이상으로 분명히 얘기하는 거 좋아하시는 분이었어요. 선정할 시간을 안 주시더라고요. 초기불교 초기경들에 앉혀놓고 밤낮으로 얘기해요. 그러면 듣다가 해탈을 해요. 듣다가 아라한이 됐습니다. 듣다가. 쉬웠다는 얘기에요. 듣다가. 이 얘기만 계속하는 거예요. 무상‧고‧무아를 떠나라. 무상‧고‧무아. 그러면 이게 또 이게 최상승선이 된다는 것도 아셔야 돼요. 최상승선 별거 없어요. 뭐 닝마파 뭐 족첸이니 우리나라 선불교니. 이 최상승선이 부처님 당시 이미 다 설해진 거예요. 최상선이 뭔데요? 저기 티벳에서 최상승선을 닦는 게 이겁니다. 과거 몰라. 미래 몰라. “과거 몰라. 미래 몰라.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할 뿐” 하고 있는 게 최상승선이에요. “내 이름도 몰라” 하면서. 근데 이거는 이미 초기불경에서 부처님이 계속 강조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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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모른다 하라. 미래 모른다 하라. 다 내려놔라. 열반에 안주하라.” 맞죠. 자 이걸 이렇게 해봐도 똑같아요. 제행무상하다. 자 지금 여러분이 경험하는 육근의 세계, 육근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느껴 보시라고요. 육근의 세계가 무상하잖아요. 자 제행무상이라고 말하면서 육근을 몰라 해보세요. 몰라선(禪)이랑 똑같아요. 무상하니까 몰라 이거죠. 아니 홍익학당에 그 실천지침 14조 있는데 앞에 4조가 열반, 제행무상, 고, 무아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그럼 똑같은 거 아니에요. 초기불교의 최상승선이 있겠죠. 근데 우리 학당식은 티벳 최상승선하고, 부처님 무아선이라고 할게요. 무아선을 연결해 놓은 거예요. 제가 막 붙인 이름인데. 무아선을 연결해 놓은 겁니다. 왜? 과거 몰라 할 때 제행무상 생각하라 그랬고. 제행무상 하니까 과거 몰라. 일체는 고통이니까 미래 걱정 말자 미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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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그리고 제법에 내 거랄 게 없으니까 내 이름도 몰라 하자. 이쪽만 읽으면 닝마파 쪽 최상선이고요. 이쪽만 읽으면 초기불경 최상승선이에요. 다 합쳐져 버렸네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선(禪)할 때. 그 아라한 되기 제일 쉬운 법 특별히 공개합니다. 앉아서 마음에 막 번뇌들이 일어날 때 제행무상(諸行無常). 무상한 것들아 꺼져 이거죠. 무상 몰라. 일체개고(一切皆苦). 날 괴롭히는 모든 것들 몰라. 괴롭히는 건 내가 찾고 있는 열반이 아니니까 몰라. 열반을 찾는다는 느낌에서 몰라 예요. 무상하니까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에요. 난 집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내가 찾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서 집착하지 않겠다. 몰라.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 내 거라 할 게 없다. 생각 감정 오감도 다 내 거 아니야. 몰라. 열반적정(涅槃寂靜). 그리고 존재하시면 열반 상태예요. 너무 쉽죠. 이 얘기를 부처님한테 계속 들으니까 여러분도 아무리 아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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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어도 그렇지 하루 종일 듣는데 안 해 볼까요. “진짜 아 무상하다.” 진짜 할 때 들어간 거예요. 무상하네 하고 딱 했는데 어 열반에 접속됐어요. “어 부처님 지금 뭐 느꼈어요.” 얘기 듣다가 몰입해서 몰입이 선정이고 듣다가 사유를 하다가 정혜쌍수가 돼 가지고 탁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럼 딱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첫 깨달음 얻은 친구가 계속 듣다가 깨달아요. 설법 듣다가. 그때 부처님 완전 신나합니다. 첫 제자 얻었잖아요. “교진여(驕陳如)가 깨달았다.” 꼰단냐라고 하죠. “꼰단냐(Kondanna)가 깨달았다. 깨달았다. 법안(法眼)을 얻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눈으로 진리의 눈으로 보게 됐다. 기본값이 안 바뀌면 법안이 아니에요. 그냥 육안이지. 진짜 진리의 눈으로 보게 됐다 해서 그때 아라한이 됐다고 하는 경전도 있는데 보통 많은 경전에서 그때 수다원 이제 접속했다. 맛만 봤다고 봐요. 그 친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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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해준 거는 구족계(具足戒)라는 걸 줘요. 그러니까 너 이제 숲에 가가지고 뿌리를 뽑아라. 완전히 거기 네가 방금 체험한 거에 들어앉게 해라. 들어앉으면 아라한이 된다. 그래서 들어앉아서 바로 아라한이 돼요. 그래서 다섯 명 데리고 처음 부처님이 수업할 때 한 명이 이제 깨달은 자 나오고 이제 좀 있다가 이분이 아라한이 돼요. 그러니까 아라한 하나씩 만들어 가면서 아라한 된 사람이 걸식하러 가요. 탁발하러. 아라한 못 되면 어떻게 돼요? 계속 부처님 얘기를 듣는 거예요. “아, 나 마을 좀 갔다 오고 싶은데.” 아라한이 돼야만 나갈 수 있습니다. 실감 나죠. 제가 그때 했어도 비슷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계속 “이봐 내 얘기 좀 들어봐.” “저 밥 드셔야 되지 않나요.” “아라한이 갔다 와. 아라한이 이제 깨쳤으니까 갔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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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깨달은 사람은 못 나가는 거죠. 진실의 방 같은 거죠. 깨달아야만 나갈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공부했어요. 이게 지금 안 떠오르시면 가짜예요. “아 진짜 그렇게 되겠는데”가 떠오르면 불경도 진짜가 되고, 제 얘기도 진짜가 되고, 그리고 열반도 진짜가 됩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되고요. 이게 안 떠오르시면요 영원히 해보라고 하세요. 탐진치로 탐진치 아닌 거를 영원히 추적해 보라고 하세요. 뭐가 얻어지나? 그러다가 변태돼요. 보통 변태가 됩니다. 왜? 아니 말이 안 되는 걸 추적하니까. 하다하다 지쳐요 자기도. 가능한 걸 하라고 해야죠. 그래서 이 무위의 세계가 있으니까 가능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섬을 만들어라”는 얘기도 섬이 안식처예요. 도피처예요. 법은 귀의처예요. 똑같은 말이에요. 법이 귀의처가 돼요. 즉 “너 내가 간 뒤에도 너 안에 답이 있어. 너 안에서 답을 찾아야 돼.” 너 안에 답이 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무상‧고‧무아도 너 안에 있고요. 무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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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를 넘어서는 열반도 너 안에 있기 때문에 사법인이 다 너 안에 있으니까 법이 귀의처요 너가 귀의처라고 하는 거예요. “너 안에서 답을 찾아. 너 안에 다 있어. 나 죽은 거 신경 쓰지 마. 나도 영원하니까 열반의 세계에 안주한 나도 영원하니까 내 법신은 영원하니까 너도 너 안에서 불멸의 법신을 찾아.” 법을 찾아야죠. 열반과 법을 합쳐서 법신(法身) 그럽니다. 법신을 찾아. 진리를 지닌 열반의 세계를 진리의 몸이라고 해서 법신 그럽니다. * 바히야경 볼까요. 그 세계에는, 이 열반의 세계에는, 무위의 세계에는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고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지수화풍과 모든 이원성의 소멸) 결국 뭐예요. 지수화풍이 다 없대요. 똑같죠 설명이. 빛나는 의식 설명할 때랑 똑같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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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어요. 거기는 지수화풍이 없고 어둠과 빛이 없다는 건 이원성이 없다는 거예요. 이거 똑같죠. 거긴 지수화풍이 없고 어떤 이원성도 없어. 밝다 어둡다가 없어. 자 왜 설명이 똑같죠. 지금 열반에 대해 설명하시는데 빛나는 의식 설명이랑 똑같죠. 이쯤 되면 아무리 좀 그렇더라도 알아야 되지 않나요. “혹시 같은 건가?” 이 정도는 하지 않나요? 혹시? 지수화풍과 모든 이원성의 소멸이 똑같잖아요. 성자인 바라문이, 브라만 계급을 지금 바라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아내면 그는 물질계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전재성 역, 우다나-감흥어린 시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물질계 비물질계가 오온이에요. 자 물질계는 색(色)이고요. 비물질계는 수상행식(受想行識)입니다. 오온을 떠나고 그리고 즐거움과 괴로움, 이원성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 세계가 있대요. 지금 부처님은 계속 그 세계가 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자들은 계속 “지금 없다는 얘기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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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돌아버리는 거죠. 그렇죠. 있다잖아요. 그 세계가 있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나서 그리 가는 거라는 거예요 지금. 벗어나서 그리 가는 거예요. “무상‧고‧무아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상락아정의 세계로 가라. 영원불변의 실체의 세계가 있다.” 이거를 계속해서 지금까지 부처님은 무상만 얘기했다고 주장하시면 부처님도 돌아버리는 거죠. “부처님은 무상 무아만 주장하신 분이야.” 그런데 제가 이걸 무아선(禪)이라고 부를게요. 무아선. 이 육근의 세계를 초월하는 게 무아선. 제법무아니까 내 것 아닌 건 놔버리라고요. 몰라. 몰라선(禪)을 다른 말로 무아선이라고 할게요. 무아의 세계로 딱 가면 들어가면 뭘 만나죠? 상락아정은 진아(眞我)입니다. 열반경에서 상락아정을 진아라고 그래요. 진짜로 정확하게 진아. 무아선이 진아선이에요. 자 저도 똑같아요. 저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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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을 지도할 때 “최상승선은 몰라만 하면 됩니다.” 그럼 몰라만 하면 뭘 몰라라고 하는 거죠. “육근을 몰라 하세요”. 그럼 뭘 알아지죠. “참나가 알아집니다.” 몰라를 하면 참나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몰라 선(禪)인데 사실은 알아 선(禪)이죠. 참나를 알아야 되거든요. 공적영지를 알아야 되거든요. 공적영지는 늘 아는 자리잖아요. “육근을 몰라 하면 알아차림만 남습니다” 하는 소리가 뭔 소리예요? 몰라 하면 안다는 거죠. 무아하면 진아가 나온다는 거예요. 무아만 얘기한다고요 지금 다. 부처님은 무아만 얘기했다고. 진아 얘기하면 거의 죽여버려 이 수준이에요 지금. 그러니까 진아는 절대 불교가 될 수 없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분들이 너무 많은데 반면에 진아만이 답이라는 걸 아는 분들도 너무 많아요. 한국에 조사 스님들 다. 저의 이런 고민이 무색해요. 왜냐? 저를 그렇게 막 비방한 학자들도 스님 앞에 가면 못 따지거든요. 스님 앞에 가면 스님 뭐라 그러세요. “참나 찾으세요” 그러거든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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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너무 억울하잖아요. 나한테 와서 왜 참나 주장하냐고 화내고는 스님한테는 따지지도 못 하면서. “확 머리를 깎아야 되나?” 막 이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니 이거 뭐냐면 아니 진짜 큰스님들한테 따지지도 못 해요. 그냥 그분들은 근데 그분들이 저한테 힘이 되는 거죠. 그분들은 대놓고 참나 찾으라 그래요. 그냥 청화스님(淸華, 1923∼2003) 계속 참나 찾으라. 청화스님, 대행스님(大行, 1927-2012) 뭐 성철스님(性徹, 1912~1993) 다 참나 찾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무아병이 한번 걸리면 그분들이 다 사탄으로 보이는 현상이 일어나요. “와 한국 불교가 망했네.” 어디서부터 망했나 추적하니까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뭐 의천(義天, 1055~1101) 다 망한 거예요. 원효(元曉, 617-686)부터 망했어요. 원효도 망했어요. 원효도 한마음이 있대요 영원불멸한. 망했네. 어디서부터 망한 거예요. 우리나라는 다 망한 게 돼요. 자 한 생각 바뀌니까 다 망한 게 돼요 우리나라 불교가. 이상하죠. 본인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자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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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요. 옆에 이 도해는요 제가 또 강의 중에 자꾸 써먹으려고 해 놓은 거니까 기억해 두시고요. 혹시 제가 이제 강의 중에 이 도해 뭐 그림 그리면 여기다 그리시라고요 나눠드린 거예요. 무아의 특징경까지 하고 쉴게요. 무아상경(無我相經). 이 상락아정의 열반의식이 무상‧고‧무아에 반대된다. 이거 아시겠죠. 무아의 특징경인데 전재성 박사님 번역하신 거 그대로 가져왔어요. 무아의 특징경. 세존이 묻습니다. 자 여러분 이런 얘기 들으면서 여러분도 같이 들으면서 바로 열반에 들어갈 수 있어야 돼요. 제발 부처님 제자들처럼 얘기 듣다가 열반에 들어가세요. 이것 듣고 “예 예 저기 나무 밑에 가서 한번 해 볼게요.” 이게 아니에요. 부처님 제자들은 듣다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가능한지 보세요. 이 경전이 정확하다면 지금 깨달을 수 있어야죠. * 무아의 특징경, 1. [세존] 부처님 수행승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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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무상無常). [세존] 그렇다면 무상한 건 괴롭냐 즐겁냐? 자 여러분이 경험하는 일체 세계는 육근의 세계인데요 육근의 세계 중에 물질, “물질은 유상(有常)하냐 무상(無常)하냐?” “무상합니다.” “무상한 거는 괴롭냐 즐겁냐?” 좀 유도하시잖아요. 따라가 보세요. “괴로운데요.” 즐겁다고 하면 안 되겠지. 뭐 이런 솔직히 즐거운데 이럴 수도 있죠. 아무튼 지금 무상하다는 데 포인트가 있습니다. 무상하니까. 일단 무상하다는 전제를 왜 때렸는지 아셔야 돼요. 무상을 빼고 얘기하면요 물질은 즐겁냐 괴롭냐는 뭐라고 하시겠어요? 즐거울 때도 있고 뭐 괴로울 때도 있고 이러지 않을까요. 근데 무상을 왜 먼저 했을까요. 무상이 전제가 돼서 그래요. 무상해, 물질 무상하지? 근데 괴롭냐 즐겁냐 하니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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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다는 게 괴로운 거예요. 뭐냐면 아무리 좋아도 사라지잖아요. 밥 먹으면서 막 화날 때 있죠. 먹을 때마다 줄어드니까. 무상하니까. 이 맛있는 맛이 날아가니까. 혀에서 사라지고 양은 줄어들고 미치겠죠. 맛있을수록 더 화가 날 수 있죠. 자 이런 거예요. 무상이란 걸 전제하고 보는 거예요. 무상하니까 괴로운 게 되는 거예요. 괴롭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떠나보내야 되고 원하지 않는 걸 또 경험해야 되니까 괴롭습니다. 또 아파야 되고.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롭습니다. (고苦)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게 옳은가? (무아無我). 그러니까 제법무아의 핵심은 이거였어요. 부처님은 그거 네 거 아니지 이거예요. 예 제 거 아닙니다. 지금 못 따라올 게 없죠. 이러고 깨달았어요. 이 말만 듣고 이 양반이. 그러니까 아 물질 무상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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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구나 하고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해탈이죠.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자 그러니까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제법비아(諸法非我)죠. 제법 비아. 만법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도 제법비아로도 풀 수 있겠죠. 만법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제법무아. 제법에 나라고 할 게 없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꼭 제법무아만 고집할 게 아니다. 제법비아도 말이 맞다. 만법은 내 것이 아닙니다. 왜냐? 석가모니가 “이거 내 것이라는 생각 들더냐? 이게 나라는 생각 들더냐?” “안 듭니다.” 무상한 것들이 어떻게. 여기서 물질이라는 거는 대표적으로 육신이에요. 오온 중에서 오온을 얘기할 때 여기서 색(色)은 육신입니다. 왜냐하면요 이게 나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로써 거론되거든요. 오온을 얘기할 때는.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여기 색은 대표적으로 육신이죠 일단. “네 몸뚱이 무상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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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무상합니다.” 뭐 청춘도 한 때네요. 뭐 이럴 때 그때 몸이 즐겁냐? 괴롭습니다. 아플 일만 남았습니다.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죠. 무상하다는 건 변화해서 결국 죽는 거예요. 생한 건 멸한다. 이런 전제 속에서 괴롭냐 즐겁냐? 괴롭죠. 괜히 받아 가지고 이거 처치 곤란입니다. 그럼 그 죽을 때 갖고 가냐? 네 거냐? 영원히 네 거냐? 아닌데요. 이 말만 한 거예요. 이 말을요 그래서 2.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①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이때는 이제 몰라를 하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상‧고‧무아만 인식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아까 몰라선(禪) 하고 통한다는 게요. 무상‧고‧무아가 결국 최상승선이 되는 이유가 무상하니까 떠나야 돼요. 떠난다는 건 제일 쉬운 게 뭐예요. 마음에서 떠나보낸다는 거고 집착을 안 한다는 거예요. 집착 없애는 법이 뭐예요? 몰라요. 아 육근 무상하다.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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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뚱이 무상하다. 몰라. 생각 무상하다. 몰라. 느낌 무상하다. 몰라. 좋다고 했다가 싫다고 했다가 얼마나 변화무쌍해요. 몰라. 다 몰라 하면 뭐만 남을까요? 열반만 남아요. 그러니까 여기 시키는 대로 하시면 돼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② ‘감수’,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감수라고 번역하신 거예요. 전재성 박사님이. 생각을 또 지각이라고 번역하셨어요. ③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형성. 의지를 형성이라고 보셨어요. ④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뭔가 마음을 만들어 가는 걸 말합니다. 이 의지 작용을 통해서 마음이 만들어지는 걸 형성. ⑤ ‘의식’, 어떤 식별하는 작용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이 모든 것에서 떠나서 떠났다는 것도 사라져 버리면 깔끔한 무위(無爲) 상태에 도달하겠죠. 무상‧고‧무아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그 상태. 색수상행식이 하나도 없는 그 상태. 그 상태가 열반이고 빛나는 의식이라는 것까지 아셔야 여러분 답을 찾을 수가 있어요. 왜냐? 열반은 의식이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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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안에서 열반을 못 찾으면 없어요. 열반을 의식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열반은 내가 아닌 밖이 됩니다. 그럼 내 안에서 섬을 찾으라는 말이 뻥이 돼요. 이해되세요. 내 안에서 섬을 못 찾아요. 내 안에 열반이 없는데. 열반은 내가 도달해야 되는 어떤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마음의 상태예요. 상태라 하더라도 마음의 상태입니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해탈했다는,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난다는 것 자체가, 보세요. 이 말 자체가 나라는 걸 전제하고 있죠. 열반에 상락아정이 없다면 나는 해탈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의식이 없다면, 열반이 의식이 아니라면 열반에 완전 무위법의 세계, 만들어지지 않는 무위법의 세계에 도달하신 여러분한테 생각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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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 식의 생각 감정 느낌 하나도 없겠죠. 근데 이 자리를 체험하신 분이 체험을 한다는 것도 없겠죠., 근데 체험하신 분이 결국 한 생각 일으켜서 “나는 해탈했어”라고 말을 하시려면 열반은 뭐란 얘기예요? 의식이란 얘기예요. 열반이 진짜 무의식적인 뭐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럼 경험을 못 해요. 잠깐 의식의 공백이 있었을 뿐이지. 경험도 못 하신 그 영역에 대해서 해탈했단 말을 하실 수 있어요. 열반에 도달해도 여러분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의식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해탈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 자체도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잠깐 기절했다 나와서 “난 해탈했어” 이런 거랑 뭐가 달라요 그러면. 열반이 의식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 만약에 이 무상(無常)한 의식이 아니라면 여러분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야 되잖아요. 빛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이미 부처님은 어마어마하게 힌트를 다 주신 거예요. “그 자리는 의식이다. 네가 체험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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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세계다.” 계속 체험하면이란 말 쓰잖아요. “열반을 체험하면 해탈할 수 있다.” 3.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까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도다. 와, 나 이제 무상‧고‧무아의 세계는 끝났어. 이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아라한의 오도송)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분명히 알려면요 열반을 체험해야 돼요. 열반은 그런데 분명히 말하지만 체험의 영역이 아니라고요. 무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상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열반은 무위의 세계인데. 열반에 접속하려면 우리는 지수화풍과 오온을 다 떠나야 되는데. 왜 우리는 열반에 대해서 알죠. 아, 우리는 아니죠. 왜 이 양반들은 알죠. 의식의 세계니까. 그래서 빛나는 의식이라는 거예요.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경험했어도 자기의식의 가장 본원적인 순수한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나는 열반에 도달했고 나는 이제 윤회를 떠났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윤회를 초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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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제가 아니라 태국의 고승이, 남방불교 고승이 이렇게 풉니다. 자료 다 뒤에 있어요. “이제 윤회를 꼭 떠났다라기보다 윤회는 본래 없다”라고 깨닫는대요. “열반은 윤회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대요. “내 의식의 본질은 윤회한 적이 없다”라는 걸 깨닫는대요. “윤회의 세계에 들어간 적이 없다.” 무위의 세계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온 적이 없죠.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윤회를 떠났다는 본질을 뭐라고요? 윤회한 적이 없다. 그럼 또 윤회를 하고 말고는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대승이 돼요. 그 태국 스님은 대승으로 많이 오신 거예요. 근데 “진짜 난 윤회가 끝났다”라고만 생각하신다면 소승불교예요.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분도 똑같이 정광명심을 체험한 건 똑같으니까. 그 부분에선 똑같잖아요. 열반에 안주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여기까지만 이해하시면 이 이후 내용이 또 쉬워집니다. 혹시 이해 안 되시면 쉬는 시간에 저한테 조용히 찾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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