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2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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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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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2만5천송 반야경 2
강의일자 2023. 09. 23. 土.
게시일자 2023. 12. 23.
동영상 길이 34:30
강의 중 인용 도서 2만5천송 반야경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13O6ej6Dweo


반야경의 핵심

00:08 지금 지금 반야경은 핵심이 이거예요. 오온이 공하다. 오온이 공하다. 오온이 공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그랬죠. 오온은 독자적 자성이 없다. 공성이 자성이 된다. 공성이 그대로 오온의 자성이 된다. 이 공성은 정광명이죠. 청정광명심. 이게 다른 말로요 절대적 보리심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게 승의(勝義)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승의.

01:00 궁극적으로 진실, 궁극적인 진실상에서 볼 때의 보리심이 있고요 상대적 보리심이 있어요. 승의가 아니라 세속적 보리심. 현상계에서, 눈에 보이는 보리심이, 육바라밀이 현상계에서 구현될 때예요. 그러면 절대적 보리심은요? 구현되기 전의 참나 상태. 그래서 결과적으로 말하면 절대적 보리심이라는 게 무분별지예요. 무분별지는 뭐죠? 반야바라밀. 여기까지 분석이 안 되시면 문제 못 푸십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쫙 나와야 돼요. 그럼 상대적 보리심은 뭐겠어요? 나머지 육바라밀 전부요. 엄밀히 말하면 육바라밀에 반야바라밀 중에 분별지까지 포함해서. 그러겠죠.

02:01 반야바라밀 플러스 돼 있는 거죠. 어떠세요. 이렇게 이해되세요? 즉 오온의 세계에서 구현되는 겁니다, 세속보리심은. 승의의 보리심, 절대적 보리심은 무분별지 자체가 승의의 보리심이에요. 그래서 승의의 보리심, 절대적 보리심 접속하는 방법은 정혜쌍운이에요. 선정과 명상만 잘하면 돼요. 그래서 여러분 기독교적으로는 여기 이 경지가 칭의거든요. 절대적 보리심 만나는 게 무분별지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만으로 된다는 거예요. 믿음만으로 돼요 이거는. 칭의는 믿음만으로 된다니까요. 여러분이 선행을 해서가 아니에요. 잘 믿어서예요. 깨어났기 때문이에요. 성령을 만났기 때문에, 마음을 의심 없이 하나로 몰아서 일념을 유지했기 때문에 된 거예요. 선정 잘해서 몰라 잘해서 얻은 거예요.

03:03 상대적 보리심은요? 이건 성화의 영역입니다. 이거는 복혜쌍운, 반야방편 쌍운이에요. 반야가 무분별지가 인도해주고 그 이후 나머지 바라밀들, 복덕 쌓는 바라밀들이 따라가 줘서 그래요.

반야방편 쌍운

03:21 반야와 복덕. 반야와 방편 그러죠. 방편은 뭔가를 처방하는 거거든요. 실천적인 답을 내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명상에 들어야겠다. 이 경우에는 나눠줘야겠다. 이 경우에는 계율을 지켜야겠다. 실천적인 방법들이 나오는, 방법들을 쓰는 거기 때문에 방편이라고 합니다. 반야는 판단만 하는 거잖아요. 딱 알고만 있는 거예요. 반야방편쌍운을 닦아야 육바라밀을 총체적으로 구현해 냅니다, 현실에서. 이 방편을 써서 현실화시킨다는 거예요. 방편은 현실화해요. 현실화를 시켜야 돼요 구체적

04:01 행위를 통해서. 마음만 있으면 뭐해요? 나눠야 보시죠. 해야 보시죠. 그래서 반야는 아는 것이고요 방편은 하는 것입니다. 뭘 해야죠. 해야 한 거죠. 절대적 보리심은요 정혜쌍운으로 터득해요. 그렇죠. 참나 자리 만나는 거 가능하잖아요. 사실 이것도 부분적입니다. 정혜쌍운 만으로 터득하는 건 부분적이고요. 이 절대적 보리심도 총체적으로 만나려면 육바라밀을 닦은 뒤에 정혜쌍운에 들어가야 만나요. 이해되시죠. 원래 참나도 육바라밀을 다 갖췄다는 걸 내가 육바라밀 안 닦고는 이해를 못한다고요. 절대적 보리심을 만나놓고도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절대적 보리심이 나를 육바라밀로 인도한다는 것을 명상만 하신 분은 몰라요. 육바라밀을 실제로 해봐야 “아! 참나 만나니까 육바라밀이

05:00 절로 나오네.” 그러니까 해본 분이 압니다. 그래서 상대적 보리심까지 닦아야 같이 닦아서... 자 여기서 기독교식으로 칭의를 얻었으면 여기서 성화를 닦죠. 칭의를 얻고 성화를 닦아야 “아! 이 보리심, 성령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구나.”가 더 깊게 이해가 되겠죠. 그니까 칭의만 깨달은 사람이 이해한 성령과 성화까지 닦은 사람이 이해한 성령이 다르겠죠. 그러면 절대적 보리심이라는 거는 육바라밀 충만한 참나 자리랑 하나가 될 거예요. 여기까지 이해한 반야경은요 오온이 공허하다는 말이 단순한 말이 아니에요. 오온은 독자적 자성이 없습니다. 이 청정광명심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둘이 아닙니다. 청정광명심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오온이 공하다. “오온이 공하다.” 이 말을요 오온이 공하다는 말, 즉 무자성, 오온엔 자성이 없다는 말을...

06:01 일단 대표적으로 이렇게 중관파가 이해하는 방식이 뭐였죠? 오온은 연기하니까 공성이다.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 현상계적인 분석이죠. 오온은 연기하니까 자성이 없다. 현상계적 분석이 있고요. 오온의 본질이 공성이기 때문에 공성 자리에서는 진짜로 오온이 없다. 제가 아까 얘기한 차별상과 오염상이 없는 그 자리가 정광명 자리죠. 여기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진짜로 오온이 그냥 없어서 없는 거예요 이 자리에. 이 자리에는 오온이 없다. 정광명 자리에는 오온이 텅 비어 있다. 이게 지금 더 반야심경이나 반야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이라는 겁니다. 연기하니까 공하다가 아니라. 지금 반야경에서 연기 얘기가 안 나오잖아요 계속. 반야심경에도 연기 얘기가 없어요. 연기하니까 공하다라고 그런데 읽어버려요 다. 지금 모든 반야심경 번역 최근에 나온 것들 다

07:00 연기하니까 공하다로 해석합니다. 도올 선생이 한 거건 누가 한 거건 다 연기하니까 공하다로 반야심경을 읽고 있어요. 그 안에 연기라는 말이 안 나오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이렇게 이해하는 게 지금 중관파식 이해다. 용수보살이 이걸 강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용수보살도 사실은 진짜 공성 자리에 들어가야만 공성을 직관하는 무분별지와 절대적 보리심을 얻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용수보살도. 그래서 저는 모든 중관파를 비난하기보다는 중관파 중에 이렇게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분들이 있다. 중관파 중에도 청정광명심 자체를 강조한 이런 가르침도 있다. 쉽게 말하면, 지금 닝마파가요 닝마파도 중관파예요. 닝마파도 지금 중관파인데 제가 얘기한 자립논증, 자립논증 중관파는 유식 사상과

08:00 결합해가지고 일체유심조식으로 설명을 잘한다. 딱 닝마파가, 중관파 중에 닝마파가 뭐라고 정확히 얘기하냐면 “일체는 정광명의 작용이기 때문에 본래 독자적 자성이 없다.” 이 말을 그대로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귀류논증이라고요 보세요. 귀류논증은요 자기주장이 없어요. 자립논증은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요. 그러니까 설명이 명확하죠. 귀류논증은요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파는, 귀류논증이라는 건 자기 주장이 없고요 남이 말을 하면 말꼬리 잡아서 오류만 입증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이거 보시죠. 막 이렇게 하면서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다면 네 말이 맞다면 이런 모순이 생겨. 대답해 봐.” 이럽니다. 저쪽에서 탁 막혀요. 그러니까 말꼬리 잡아서 말 딱 막는 거예요. “참나가 있다고? 참나라는 건 언어인데 언어는 이미 연기의 세계인데 참나가 있다고?”

09:00 탁 치는 겁니다. “헉” 하면 지는 거죠. 말꼬리만 잡지 자기들 주장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립논증을 하려면 형이상학적 체계가 있어야 돼요. 형이상학적 체계가 있다는 얘기예요 자립논증은. 스스로 입증해야 된다는 건 뭐냐면 형이상학적 체계를 가지고 공성을 입증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쪽은 형이상학적 체계가 없고 말꼬리만 연기론으로 잡아가지고 무자성만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티벳에서 주류죠. 그런데 주류가 아닌 곳에서는 그냥 “오온이 참나의 작용이다”라는 말을 그냥 해요.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일단 여기까지 한번 설명 드리고 가볼게요. 두 번째,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면. 벌써 이 당시에도 반야경,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이미 등장하지 않나요 이런 의문이? 만약에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면,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면, 만법에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없다면. 초발심보살, 여기서 초발심보살,

10:00 여기에서 초발심보살은 8천송반야경에서는 그냥 발심만 한 보살을 말했어요, 뜻만 세운. 그런데 2만5천송반야경에서는 화엄경 체계가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초발심보살은 1지보살을 말합니다. 여기서 초발심은 뭐게요? 보통 초발심 하면요 이것도 초발심이에요. “내가 부처가 돼서 온 우주 중생을 다 건지리라.” 이게 이런 보리심, 이게 보리심이거든요. 깨달음의 마음을, 그리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보리심이에요. 깨달음을 얻겠다는 이 마음을 세우는 걸 초발심이라고 보니까 경지가 낮았어요 원래. 그런데 화엄경을 거치면서 진짜 초발심이라는 건요 이 절대적 보리심을 발할 때를 초발심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정혜쌍수로 절대적 보리심을 부분적으로 깨닫고요 육바라밀을, 상대적 보리심까지 닦아서 육바라밀을 원만히 닦아서 절대적 보리심을 부분적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깨달은 양반, 이분이

11:00 1지거든요. 그래서 이 1지보살들은 유식학에서 해서 통달위(通達位)라고 합니다. 알아야 할 걸 다 알았다. 육바라밀 밖에 우주에 진리가 없는데 알아버렸잖아요. 다만 연륜이 딸리다. 연륜이 낮아서 1지부터 10지까지 가면서 연륜이 높아진다.

1지보살(통달위通達位)

11:17 알아야 할 이치는 다 알았다 예요. 통달위. 다른 이름으로 견도위(見道位). 견성했다고요. 견도라는 건 절대적 보리심을 깨달은 겁니다. 이게 티벳에서도요 이건 이 전통은 그대로 내려와요. 지금 달라이 라마 쪽에서 다 주장하는 거예요. 견도했다는 건 절대적 보리심을 정확히 알아낸 겁니다. 내 안에 있는 이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육바라밀의 마음, 깨달은 마음인 보리심이 발출한 거예요. 정확히, 정확한 인식을 통해서 발출한 겁니다. 늘 샘솟아야 돼요. 늘 샘솟아야 1지입니다. 이거는 지금 티벳 불교에서도 늘 탐진치 올라오듯이 샘솟아야 1지라고 그래요.

12:00 이건 알아요. 지금 티벳 달라이라마 쪽도 주장하는 겁니다. 경전에 써있고 탐진치 올라오듯이. 외부 자극만 있으면 탐진치 바로 올라오죠. 탐진치 올라오는 데 노력하세요? “견물생심 해야지. 진짜 다음에는 꼭 해야겠다.” 이런 게 아니죠. “지난번 걸 놓쳤다. 홈쇼핑에 물건을 봤는데 욕심을 내지를 못해서 내가 못 샀다.” 이러지 않잖아요. 늘 출동 준비하고 있고 자극만 오면 견물, 생심. 끝이죠. 그래서 그러면 이게 견물생심인데 금강경에 뭐라고 나오죠? 응무소주(應無所住). 응당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마음에 뭔가 머무는 바가 하나도 없으면 이게 머무르는 게 없다는 게요 이게 공성 상태예요. 이게 참나 상태입니다. 응당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하나도 없어야

13:00 된다. 텅 빈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이생기심(而生其心) 마음을 내라. 이거는 보리심이에요. 이게 이제 상대적 보리심이에요. 보시바라밀 인욕바라밀 지계바라밀 육바라밀 잘하라는 소리예요. 뭔 마음을 내죠? 그러니까 텅 빈 마음, 즉 공성직관 상태겠죠. 응무소주라는 건요 공성 직관한 자리에서, 공성 직관한 하나도 집착하는 게 없는 그 자리에서 반야바라밀에서 마음 쓰라는 거예요. 그 반야바라밀을 가지고 마음을 내면 다 바라밀이 돼 버려요. 거기서 한 마음 내면 다 육바라밀이 나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은요 공성에 안주해서 공성을 직관하는 그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 항상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내면 그대로, 근데 마음을 내야 돼요. 왜 육바라밀 해야 되니까.

14:00 텅 빈 데서 안 끝나요, 대승은. 응무소주에서 끝나 버리면 소승이죠. 이생기심 반드시 마음을 내라 그래요. 내서 너의 육바라밀도 갖추고 남들도 육바라밀을 닦게 해주고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어야 되니까 마음을 내야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이 구절 외에도 금강경은 계속 보시바라밀을 하라는 얘기를 하고요. 하되 반야바라밀을 갖추고, 일체가 공한 줄 알고 보시를 해라 이걸 강조하고요. 또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게 중생이 텅 비어 있음을 알지만 일체 중생을 다 구제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응무소주 중생도 없어요 이 자리에서는, 참나 자리에는 중생도 없어요. 정광명 자리에는 중생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생 구제하는 마음을 내래요. 이상한 말이죠. 응무소주(應無所住)인데 생기심(生其心). 꼭 마음을 내라. 이게 금강경 논리입니다. 중생이 본래 없는 줄 알지만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해라. 모순적이지만 저게

15:00 대승의 모습입니다. 한편으로는 “몰라”를 하되 한편으로는 “알아”를 해야 돼요. 모르지만 알아요. 나와 남을 초월했지만 나와 남을 다 건져줄 줄 알아요. 이게 대승의 맛이거든요. [2.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의 법에 자성이 없다면, ‘초발심보살’(1지)은 어떠한 방편력으로 능히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능히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여기 질문도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면 초발심보살은 어떤 방편력으로 능히 보시바라밀을 행하여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 즉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 겁니까?” 이때 나올 수 있는 질문 다 나오지 않았어요. 초기 대승 경전들에 이미 아니 텅 비어 있다면 만법에 자성이 하나도 없다면 그냥 텅 비어 있으면 되지 이 텅 빈데 응무소주? 텅 빈 상태로 있으면 되지 자성이 없는데 불변의 본질이 없는데 뭘 가지고? 그러면 자기는 육바라밀을 다 갖추고. 여기 나오죠. 육바라밀을 다 실천한다는 건 자리(自利)예요. 나는 어떻게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16:00 또 뭐라고 나오죠? 다른 중생은 어떻게 성불시켜주며, 또 불국토는 어떻게 청정하게 하죠? 그러니까 에고의 세계를 어떻게 돌보죠. 텅 빈 것만 안다면 에고의 세계를 어떻게 돌봐가지고 자리이타(自利利他) 정토를 구축하죠? 자리이타를 통해? [3.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실천할 때, ‘초발심보살’(1지)에서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여래의 깨달음,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만법의 본성’을 잘 배운다. ‘만법의 본성’(염정染淨의 분별이 모두 ‘구공俱空’이되 정법淨法을 ‘구족具足’함)을 배우는 것을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의 도’라고 부른다. 이 도는 능히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구공具空), ‘중생’을 성취시키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 초발심보살에서. 초발심보살을 계속 강조하는 게 1지 정도가 되면 1지에서부터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면 불지(佛地)죠. 불지까지 가기까지 만법의 본성을 잘 배운다. 이 만법의 본성은 자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성이 없다고 왜 자성이 없다고만 하셨잖아요. 이거예요. 오온은 자성이 없다니까요. 연기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도 말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포인트는 이게 아니라는 거죠.

17:00 반야경에서 말한 포인트는 연기하니까 공이 아니라니까요. 오온이 본래 공인 거예요. 정광명 자리에서는 없거든요. 정광명 자리에서는 오온이 본래 없단 말이에요. 거기는 어떤 차별상도 오염상도 없단 말이에요. 그 청정한 정광명의 작용이 오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공성이 결국 만법의 자성이잖아요. 만법의 본질은 공성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만법의 자성은 꼭 뭐가 돼요? 공성이요. 그런데 이 공성 안에 육바라밀이 갖춰져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텅 비어 있는데, 오온이 본래 없는데, 오온의 독자적 자성이 없어서 텅 비었다고 한 건데, 독자적 자성이 없는데 이걸로 어떻게 육바라밀을, 그러면 누구를 어떻게 구제해요? 이렇게 나와 남을 어떻게 구제해요?” “왜 못 구제해?” 이거죠. 공성을 직관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한다면, 공성만 아는 게 아니라 뭘 더 알아요? 자성을 알잖아요. 텅 비어 있는 중에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공성의 체험

18:06 텅 비어 있는 중에 어떠한 오염상도 없는 걸 알잖아요. 그러면 오염상이 없다는 건 뭡니까? 죄를 안 지어야죠. 그러면 공성을 구현한다는 건 죄를 안 지어야죠. 공성을 구현한다는 건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아야죠. 공성을 구현한다는 건 어떤 부조화도 없어야죠. 성냄이 없어야죠. 이기적인 성냄은 없어야 되잖아요. 신기하지 않아요? 일체가 공하다면서 성질을 내고 있으면. 만법이 공하다면서 왜 성질을 내지? 만법이 공하다면서 왜 게으름을 부리지? 정진을 왜 못 하지? 논리는 있어요. 정진도 공하니까요. 막 헛소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러니까 이게 공병(空病)에 빠지면 이제 그건 개념에 빠져서 멀리 가버린 거예요. 본질을 모르면서 체험 없이 개념으로만 가면 멀리 가요. 어디서 멈춰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체험이 없기 때문에. 공성을 체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거예요,

19:01 지금. 공성을 체험해야만 남한테 나눠야 된다는 걸 실감나게 알고,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수용할 줄도 알고, 나태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알고, 늘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도 알고, 늘 자명해야 된다는 거 압니다. 이거는 해 본 사람만 알 거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에요. 그런데 오온이 연기적으로 공하다는 것만 계속 주입식으로 배우고 있어요, 지금 티벳 불교 같은 데는. 여기서 육바라밀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니까 뭐라고 배워요? “저 도적놈도 전생에 내 엄마였다. 이 개도, 길 가는 개도 전생의 내 엄마였다.” 이 짓을 하고 있어요, 계속. 나오게 하려고, 보리심이 나오게 할려고 이거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물어보기만 하면 다 엄마였대요 엄마론을 계속 주장해요. 중생 엄마론. 제가 이름 붙이면 중생 엄마론을 주장해요. 또 따져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전생에 나 못 키워서 막

20:01 젖동냥 다니고 고생하고 막 하다가 돌아가셨던 그 엄마가 지금 네 돈을 훔쳐갔어.” 그러면 조금 용서가 될 거 아니에요. “쓰시오.” 이렇게 할 수도 있잖아요. 이 마음을 일으키려고 무리한 방편을 계속 쓰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왜 그런 방편을 써야 되죠? 청정광명심에 공성의 마음으로 하라고 했지 반야경에서 그런 무리한 수를 쓰라고 한 적이 없는데. 모든 반야경은 공하니까 사랑하라고 나오거든요. 왜 공에서 사랑이 나오는지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연기공으로는. 그러니까 만들어낸 거예요. 계속 수많은 윤회 속에서 우리가 어쨌고 저쨌고. “3000년 전에 그때 기억나?” 뭐 이런 식의 이상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이상하죠. 그러면 결국 보지도 않은 얘기를 믿고 가는 거예요. 자명하지 않음에 자명하지 않음을 더하고 더하고 해서 이론을 전개하니까 사랑이 나오다 말고 나오다 말고 하는 거예요. 터져 나와야 돼요. 초발심은 터져 나와야 돼요. 늘 터져 나오고 있어야 돼요. 초발심보살은 뭘 해야 초발심이냐?

초발심 보살의 조건

21:07 제 강의에 있어요. 발출돼야 돼요. 저기 연못 같은 데, 분수대 가면 여섯 줄기로 물이 솟구치는 이런 경우 있어요. 계속 육바라밀이 터져 나오고 있어야 돼요. 왜? 공성을 직관만 하고 있어도 터져 나와야 돼요, 육바라밀이 자동으로. 왜? 그 안에 있는 자성이니까. 내 영원한 자성이라서 공성을 직관하면 공성 안에 구족(具足)해 있는, 갖춰져 있는 구공(具空)이죠, 공성 안에 갖춰져 있는 이 자성들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공성을 직관하면 이 자성도 직관돼 버리거든요. 직관되면 터져 나와요. 여러분이 계속 알아채고 있기 때문에 터져 나와요. 밑에 각주 보실래요. [반야바라밀을 통해 꿰뚫어 본 만법(5온)의 본성은 일체의 차별상과 오염상을 떠난 ‘무자성의 공성’이되, 동시에 청정한 법의 자성을 구족하고 있는 ‘진여眞如’(무루로서 참되고 무위로서 상주불변함)이다. 진여에 갖추어진 청정한 법의 자성은 ① 탐욕이 없음이며(보시바라밀의 자성), ② 파계가 없음이며(지계바라밀의 자성), ③ 요동하지 않음이며(인욕바라밀의 자성), ④ 정진하여 나태하지 않음이며(정진바라밀의 자성), ⑤ 산란하지 않음이며(선정바라밀의 자성), ⑥ 일체의 법이 공성임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음(반야바라밀의 자성)이다.] 반야바라밀을 통하여 꿰뚫어본 만법의 본성은 일체의 차별상과 오염상을 떠난 ‘무자성의 공성’이거든요. 그러면서

22:00 동시에 청정한 법의 자성을 구족하고 있는 진여이다. 참되고 영원하다는 진여. 무루, 오염이 안 돼 있으니까 참되고요. 무위, 작용이 없어서 영원불변합니다. 상주불변합니다. 이 진여 자리를 깨달으면요 진여에 갖추어진 청정한 법의 자성들을 알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 이 공성의 다른 이름이 8천송반야경에서도 법신이라고 불렀잖아요. 진리의 몸이라고요. 진리가 꽉 차 있다고 진리의 몸이라고 한 거예요. 진리가 없는데 왜 진리의 몸이라고 해요? 진리가 꽉 차 있어요. 뭐가 차 있는지 보실래요. 자 보세요. 제가 뭐라고 정리해 놨냐면 진여에 갖추어진 법의 자성은 첫 번째 탐욕이 없음이며 보시바라밀의 자성입니다. 탐욕이 없음 자체가 보시바라밀의 자성이에요. 파계가 없어요. 파계가 없어요. 지계바라밀의 자성이고요.

23:00 이 2만5천송반야경 안에서 다 살펴볼 거예요. 요동하지 않음이니까 흔들리지 않아요, 인욕바라밀의 자성이. 공성은 흔들리지 않아요. 공성은 나태하지 않아요. 정진바라밀의 자성이고요. 공성은 산란하지 않아요. 선정바라밀의 자성이 있고요. 일체 법이 공성임을 알아서 집착하지도 않아요. 공성을 직관하고 있어요. 그게 반야바라밀의 자성이에요. 육바라밀이 공성 안에 다 들어있네요. 그러면 이게 단순히 없음이어서는 안 되겠죠. 청정광명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육바라밀의 의미

23:31 공적영지이기 때문에 공성 안에서 영지, 알아차린다는 게 이미 지혜고요. 텅 비어 있다는 것들이요 나와 남이 없다도 되고, 산란함이 없다도 되고, 나태함이 없다도 되고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걸 정광명으로 안 보면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 그냥 없음일 뿐이거든요. 오온의 자성이 없음을 자성이 없음으로만 읽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그럼 왜 육바라밀을 해야 되는지가 설명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전생의 엄마론을 이제 들고 나온다니까요.

24:02 “아니 그냥 우리 무상한 연기 속에서 같이 구르고 있는데, 뭐 그렇게까지 내가 너 챙겨야 되나?” 이거죠. 나도 죽겠는데 무상한데. 나도 졸라 무상한데 너도 졸라 무상하고. 둘이 무상하게 살면 되지 왜 육바라밀을 해야 되죠. 이게 약해요. 그래서 계속 연기에만 집착하다 보니까 전생 인연을 막 끌고 와서 하소연하는 겁니다. “전생의 엄마였는데.” 이런 알 게 뭐예요? 사실 웬수였는지 어떻게 알아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계가 있어요. 이렇게 끌어내는 측은지심은 한계가 있어요. 이렇게 발출해서 터져 나오지 못해요. 육바라밀이 터져 나와야 돼요. 진짜로요 이건 실험을 통해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제가 가스라이팅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일체를 모른다 하고 내려놨더니 내 안에서 자비심, 관대함, 청정함,

25:00 그 따뜻함, 깨어 있음, 고요함, 그리고 그런 자명한 직관 이런 게 터져 나오는 경험을 하셔야 이게 성립합니다. 이 경험을 유도해야 되는데 자꾸 연기공만 분석하고 있으면 안 나와요. 어쭙잖은 전생론을 들고 와가지고. “내가 전생의 그 엄마 가만 안 둘라고 했어.” 이러면 어떡할 거예요? 아주 악연이어 가지고. 그런 악연들 많죠. 엄마 중에 버렸다가 또 죽으니까 보험금 타러 오는 엄마. 별의별 엄마가 다 있어요. 쉽지 않아요. 사바세계가 녹록치 않단 말이에요. 그런 불확실한 거에 기대면 안 돼요. 공성에서 바로 나와야 돼요 육바라밀이. 그러니까 보세요.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 초발심보살은요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만법의 본성을 잘 배워요. 1지부터 10지를 지나 불지(佛地)될 때까지 공부를 잘해요.

26:00 공성을 잘 배워서 만법의 본성을 배우는 것을, 만법의 본성이 결국 염정(染淨), 오염되고 청정하고의 분별이 모두 공해요 그 자리에는. 텅 비어 있지만 차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정법(淨法), 청정한 법이 딱 갖춰져 있어요. 그러니까 보세요. 공하다고 할 때는 청정하다 오염됐다가 다 없는 거죠. 그런데 갖춰져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청정한 게 갖춰져 있어요. 청정광명심 자리에 청정한 게 갖춰져 있지 오염된 게 있겠어요? 그런데 보세요. 청정광명심 자리에선 이원성이 없기 때문에 오염됐다 청정하다는 말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오염됐다 청정하다도 없지만 청정한 게 꽉 차 있다 이렇게 이상한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을 이해되셔야 돼요.

참나의 청정함

26:42 이 말을 이해 못하시면요 또 걸려가지고 “오염된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다고? 그러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거네.” 이렇게 돼요. 이렇게 이해해 온 중관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경고를 드리는 거예요. 오염된 것도 없고 청정된 것도 없다는 말은 청정한 걸로 꽉 차 있다는 거예요.

27:01 이원성이 없어서 오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예요. 참나를 만나보시면 고요함으로 충만해 있고 알아차림으로 충만해 있어요. 그러니까 알아차린다 모른다가 없어요, 거기는 이원성이. 이 말을 듣고 “아! 알아차리는 것도 없나 보다” 하시면 안 된다고요. “거기는 고요니 산란이니가 없어요.” 이 말은 고요함 자체이기 때문에. 산란이라는 게 애초에 없으니까 이원성이 없다는 얘기를 한 건데 고요함도 없나 보다 해 버린다고요. 고요함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지 고요함이 없는 건 아니라고요. 안다 모른다는 개념이 없는 거지 안다는 게 없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청정하다 더럽다는 개념이 없는 거지 청정으로 꽉 차 있어요. 이것까지만 이해하시면 반야경에서 안 헤매십니다. 안 그러면 다 헤매요. 그런 분들 있죠. 길 갈 때 함정 같은 함정 다 빠지고 가는 분들도 있단 말이에요. 나중에 자기가 뛰어들어요, 함정 비슷하면. 오래 걸려요.

28:00 막 그냥 판단만 잘하시면 함정에 안 빠집니다. 하도 빠지는 분들이 많아서 빠지는 게 룰이 돼요. “국룰('국민 룰' 또는 '국가 룰'의 준말, 국민 대부분이 받아들일 만큼 누구나 인정하는 규칙)이지.” 함정에도 빠지고 여기도 빠지고 저기도 빠지고. A 사이비교 나왔으면 이제 B로 가야지 해서 B 사이비교에서 또 당하고, C D 하다가 헤매다가 정법 만나면 진짜 정법 만났을 때 공부할 힘이 없어요. 하도 지쳐서. “아쉽지만 다음 생이다.” 이러고 갑니다. 이 짓을 계속하면 언제 공부해요? 그래서 만법의 본성을 배우는 거를 최고의 올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의 도라고 한다. 자 보세요. 올바른 도를 배우는 사람은요 이 공성을 배우는데 공성 안에 육바라밀이 충만한 공성을 배우기 때문에, 대승이기 때문에 에고를 돌본다고 했죠. 첫째, 자기 에고를 돌봐요. 육바라밀을 두루 갖춰요. 육바라밀을 갖추는 게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구공 원래 내 공성 안에 육바라밀이 들어 있으니까 갖추는 거예요. 구공

29:00 도리에 따라서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요 이게 올바른 도라고 나옵니다. 이게 올바른 보살도라는 얘기예요. 올바른 보살도는요 육바라밀을 갖춰야 돼요 내가. 직접 나눠봐야 돼요. 안 나눠보고는 육바라밀이 안 갖춰져요. 본성 차원에서는 갖춰져 있지만 에고 차원에서는 안 갖춰져 있어요. 나눠 봐야 돼요. 버릇이 안 들었잖아요. 지계, 계율도 지켜봐야 돼요. 인욕도 해봐야 돼요. 그렇죠. 정진도 해봐야 돼요. 선정도 해봐야 되고 반야도 해봐야 돼요. 그래서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그다음에요 다른 중생들도 나처럼 공고하게 도와야 돼요. 성취시키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3개가 계속 나오죠. 자리, 이타, 불국토. 이게 대승의 핵심입니다. 그냥 공성에 안주하고 끝낼 거면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육바라밀을 갖출 필요 없어요. 힌두교는 육바라밀 안 갖춰도 돼요. 참나에 안주했으면 끝나요. 육바라밀을 왜 했어요? 참나 안주하려고. 그러니까 육바라밀을 참나안주 이후에는 안 닦습니다.

30:00 의미가 없어져요. 중생 성취? 참나 안주하고 났더니, 꿈을 깼더니 나와 남이 없는데요. 누구를 성취시켜 줘요? 마하리쉬한테 가서 “중생구제 해야 되지 않나요?” 그러면 놀랍니다. “너는 있냐 중생이? 난 중생이 없다. 참나에는 중생이 없다.” 이럽니다. 할 말 없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참나가 불국토다. 뭘 더 청정하게 하냐?” 소승은 다 답이 있습니다. “육바라밀을 갖춰야죠.” “꿈을 깨라. 왜 꿈속의 너를 치장하고 있느냐?” “중생 구제는요?” “꿈속의 남을 또 왜 구제하겠다고 덤비느냐?” “불국토 건설은요?”

소승식 해법

30:40 “꿈을 깨라. 꿈속의 세계에 왜 집착하느냐?” 이게 소승식 해법입니다. 이런 게 도움 될 때가 있어요. 언제요? 몰라 할 때. 이런 거 생각하면 또 몰라가 안 돼요. “언제 내가 육바라밀 닦으며, 언제 내 가족들을 또 도와주며, 언제 우리 집이 불국토가 돼서 우리나라가

31:00 불국토가 될까? 돌겠네.” 할 때 소승보살이 소승성자들을 만나면 “놀고 있네. 에고가 문제다. 참나에는 문제가 없다. 에고가 문제다.” 그러면 “중생도 없다. 육바라밀도 없다. 참나의 세계에는 불국토라는 것도 없다. 정토(淨土)니 예토(穢土)니가 없다.” 하면 몰라가 잘 되겠죠. 그렇게 몰라를 실컷 하시면 힘이 충전되겠죠. 그 힘으로 또 뭘 하면 돼요. 또 “육바라밀 갖추기, 중생 성취, 불국토 건설”하시면 돼요. 됐죠. 그러니까 소승 성자들을 언제 만나시면 돼요. 몰라 하기 직전에. 몰라 하기 직전에 만나서 몰라 잘하고 나면 대승, 다시 대승 경전 보시면 돼요. 어때요? 이렇게까지 제가 실전 팁을 드리잖아요. 공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4.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구공具空, 정법구족淨法具足).] 네 번째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바라밀을 두루 갖춘다. 이게 기본이에요

32:00 반야경에. 그렇죠. 지금 연기하니까 공하다가 어디 있어요, 한 구절이라도? 그냥 오온은 자성이 공하다 이 말만 하는 거예요, 반야경은. 이걸 용수보살이 풀어주겠다고 덤벼서 만든 이론이에요. 연기하니까 공하다를 용수보살이 만든 이론이라고요. 오온이 왜 공한지 해명을 해줘야 되니까.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못 하니까. “아니 분명히 지금 내가 이 색깔이 보이고 다 물질이 있는데, 이게 왜 없다는 겁니까?” 하니까 뭐라고 말해야 되잖아요. “이게 있다고요?” 하면서 시작한 거죠. “따져보면 없을 걸요.” 따져보고 납득이 되면 어떻게 돼요? 더 이건, 오온이 공한 걸 화두를 품고 공부해야 되는데 납득을 시켜버려요. “아 공하네. 끝.”

오온의 공함

32:47 자 이제 무분별지에 들겠어요 이 사람이? 머리로 이해해 버렸는데요. “그러네. 이게 연기하니까 공하네. 끝.” 이것도 심각한 문제를 낳은 거죠 지금. 머리로 이해하고 끝내버렸어요 지금. 청정광명심에 들어가야만 공한 줄 알게 되는데 이 방편에서 끝나버린다고요. “연기하니까 공하다. 끝.” 더 공부 안 해요. 도와주려고 나온 방편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이런 겁니다. 도와주려고 나온 이론인데 독이 돼요. 그러니까 에고를 납득시켜가지고 정광명으로 향하게 하려고 도와준 건데 이게 오히려 독이 돼서 여기서 멈춰버린 거죠. 납득했으니까. “그러네. 연기하는 거 보니까 불변의 것은 세계에 하나도 없네요. 공하네요. 참 공하고 헛되고 무상하네요.” 그럼 뭐깨달은 것 같잖아요. 끝. 그런데 왜 께왓다경에서 석가모니는 그렇게 얘기 안 하고 “모든 곳에서 빛나는 그 무한한 의식 안에서 오온도 없고 4대도 없고 어떤 이원성도 없다.” 이 말을 왜 했을까요? 그리고 “오직 이 생멸 없는 이 세계가 있으니까 우리가 탐진치를 벗어날 수 있는 거다.” 이 말을 왜 했을까요? 께왓다경과

34:00 우다나를 종합해 보면, 이게 핵심이 다 들어가 있는데, 체험 없이 논하지 마라는 거예요, 탐진치의 소멸을.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3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