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2강

홍익학당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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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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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틸로빠의 마하무드라의 노래와 족첸(大圓滿) 명상법
강의일자 2023. 07. 22. 土.
게시일자 2023. 11. 20.
동영상 길이 27:35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bnbJccmBiIM



00:08 그래서 제가 “린포체들 견성도 못하고 교학자로만 키워지고 있다” 이런 비판 많이 했는데 이 중론 가르치고 다니는 걸 구제라고 한다니까요? 중관파 사상 가르치고 다닙니다. 이 중생들이 걱정이요. 중생들이 혹시 이 펜이 고정불변의 영원의 실체로 알까 봐 걱정돼 가지고 그거 아니라고 얘기해 주고 다니는 거를 지금 거기의 자기 최고의 업무로 알고 있어요. 누가 우리 존재가 고정불변의 영원한 존재인 줄 알죠? 무상한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지들의 논리예요. 그렇게 논리에 빠지면 자기 세계에 갇혀서 다른 세계 이해를 못합니다. 모든 중생이 에고를 자신을 영원불변하다고 믿어서 이 고뇌에 빠져있다고 그 사람들은 생각해요. 왜냐하면 중관 논리가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지극히

01:00 제한된 부분적 자명만 공부해요. 이걸 가지고 중생들한테 가르쳐줘도 사실은 별 도움이 안 돼요. 우리가 언제 우리 인생 영원할 것 같아서 이랬나요? 무상해서 이랬지. 그러면 중생들이 영원한 줄 알고 지금 탐진치에 빠져 있으니까 무상한 줄만 알면 탐진치에서 벗어날 거라고 주장해요. 무상하니까 우리가 지금 탐내는 거 아닌가요? 이걸 왜 이걸 왜 또 먹죠? 식을까봐? 이때 이 맛 이 온도 놓치면 끝이에요. 이거 식으면 왜 먹어요. 저는 그래요. 또 식으면 아싸리 식으면 얼음을 넣습니다. 저는 이 애매한 상태에는 써먹을 데가 없어서. 그러니까 우리가 무상하니까 왜 오늘 이 순간이 귀하죠. 무상하니까요? 사라지니까 아무리 이 시간이 즐겁고 귀해도 사라지니까. 한순간을 우리가 최선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비밀을 얘기해 줄까? 이 세계는 무상해.” “와 엄청난데.” “그리고 더 충격적인 부처님만이 깨달으신 게 있어. 이 우주는

02:00 인과로 굴러가고 있어.” 도움 되세요? 인과로 굴러가니까 우리가 지금 수능을 보고 지랄하는 거죠. 돈 벌려고. 고생을 해야 돈 벌릴 것 같아 같아서. 그러니까 뭔 얘기냐? 그게 저기 상아탑 안에 궁전 같은 절 안에 앉아서 글만 보니까, 중생이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분들한테 카운셀링을 받고 그분을 멘토로 삼는다고요. 이게 현실이라고요. 냉정한 현실. 세계에 나갔더니 린포체 하면요 신격화돼 있어가지고 너무 받들어주는 거예요. 겨우 잠자고 있던 탐진치가 터져 나와요. 왜 잘 나가면 일이 터지죠? 그런데 탐진치 관리도 안 됐어요. 견성도 못 했으면 관리가 됐을 리가 없잖아요. 이런 분들이 전 세계 스승으로 나가면 일이 터지겠어요? 안 터지겠어요? 당연히 터지죠. 그러니까 지극히 중생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얘기를 신비한 언사로

03:00 말이 안 되는 말로 포장해서 그럴싸한 뭔가 있는 것처럼. 그래도 저는 욕만 하지 않습니다. 용수보살도 같이 가자고 제가 제안한 거예요. 용수(龍壽)보살도 결국 뭘 유도했다? 왜냐하면, 용수보살 쪽도 결국은 그거예요. 결국 달을 가리키는 아니 이거 이쪽 손가락이 더 많아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결국 이게 공성의 진리가 달이라면 이 공성의 진리를 인식하는 반야지, 무분별지 이게 정광명이에요. 정광명을 얻어야 돼요. 그런데 정광명을 실제로 얻어서 공성을 직관하려면 언어를 초월해야죠. 희론(戱論)이라는 언어유희를 떠남, 희론을 떠나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 희론, 모든 희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 자체가 공이요. 무자성, 자성이 없다는 걸

04:00 지적함으로써 세속제(世俗諦: 세속의 진리) 차원에서, 세속제 안에서 이 공과 무자성이 승의제(勝義諦: 가장 수승殊勝하고 깊은 진리)가 돼요. 그런데 이것은 세속제 차원에서 세속제를 떠나는 측면에서 분명히 승의제라고 하는 거고요. 진짜 이 승의제는 직관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거는 언어를 통해, 논리를 통해 우리가 이해한 거예요. 이 승의제를 논리적으로 이해한 겁니다. 진짜 승의제는 어떻게 해요? 직관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이게 중론(中論)입니다. 그런데 주로 이 세계 얘기는 잘 안 해요. 여기는 침묵의 세계고 언어를 초월한 세계잖아요. 여기는 잘 말을 안 합니다. 여기만 얘기해요. 여기. 희론을 떠나자고. 언어에 대한 공격, 이게 모든 중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요 이 중관파는 공종(空宗)이죠. 공종이에요. 공종의

05:00 지금 방금 말한 게 제일 심한 귀류논증 중관파를 예로 들어봤어요. 용수를 제일 잘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공종, 유식학은 상종(相宗)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선불교 쪽은 성종(性宗)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공종은 반야경 계통이에요. 반야경. 상종은 유식학, 성종은 불성, 화엄경 등등 모든 경전들이에요. 불성과 여래장을 이야기하는 모든 경전들. 그래서 공과 상을 종합해서 성종으로 갔다고 보는 거죠. 논쟁사를 보면 이렇게 흘러온 부분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반야경 이후 바로 화엄경 계통의 경전이 등장합니다. 그 이후 이 반야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공종이 등장하고 반야경에 대한 이 해석에 반대해서 우리가 더

06:00 잘 해석한다고 해서 유식학이 등장해요. 이 불성사상의 영향도 받으면서요. 이쪽도 불성사상 영향을 받으면서. 이러다 보니까, 이게 불교의 사실은 역사다. 그런데 불성, 여래장 계통 경전이 반야경 계통에 이어서 바로 기원후 1세기면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거 기원전이죠. 반야경은 기원전에 등장하고요. 유식학이니 용수보살의 중론이니, 공종에 대한 해석, 중론이니 하는 건 다 2세기 3세기 4세기 다 뒤입니다. 와서입니다. 화엄경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진 논쟁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불성사상이 훨씬 먼저 등장해요. 그런데 그걸 이해를 못 해서 해석하느라고 공종 상종이 나뉘어서 싸운 거라고요. 그러다가 결론이 원래 본성을 드러내는 이 종파(성종)가 동아시아에서 제일 이제 힘 있게 등장한 거죠. 이것도 한번 알아두시고. 또 아까 이 얘기를 왜 했냐면 귀류논증파는

07:00 공종 자체가 아니에요. 공종 자체는 반야경이에요. 반야경은 바로 참나 만나라는 경전입니다. “참나가 공이니 바로 참나 만나라”가 끝이에요. 반야심경도 그냥 “오온이 본래 공이니 참나 만나라”는 거예요. 이렇게 말꼬리 잡아 가지고 언어를 까는 걸 공종이라고 아실까 봐요. 공종의 한 지류입니다. 얘네들이 공종을 대표하는 것처럼, 공종하면 중관파 이렇게 얘기가 나와요. 상종하면 유식파. 상종이 유식파는 맞는데요. 공종이요 공종의 원래 핵심은 반야경이에요. 반야경은 오히려 그냥 곧장 참나 찾으라는 경전들입니다. 그리고 참나 안에 육바라밀이일 들어 있다는 경전입니다. 오히려 아공 법공 구공을 노래한 경전들이에요. 제 마하반야바라밀경 강의 보셨나요? 그게 공종이에요. 중관파랑 전혀 달라요. 문제는 용수가 그 공종의 경전들인 반야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기식 논리로 해석을 한 거예요.

08:00 언어에서 공을 설명해 가지고 진짜 공의 세계에 침묵하는, 언어를 떠난 공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려는 자기식 방편, 자기식 논리를 쓴 게 중관파예요. 혹시 공종을 중관파로만 알고 계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공종의 핵심은 반야경이에요. 여러분이 아는 반야심경, 금강경이 공종이에요. 그거 “바로 참나 만나라”는 경전으로 다 풀 수 있어요. 용수가 왜곡되게 푼 겁니다. 그게 지금 공종의 대표로 알고 있는 중관파고요. 그러니까 용수가 반야경을 이상하게 푸니까 유식학이 반발한 거예요. “그렇게 풀면 어떡해? 그렇게 풀어버리면 어떡해? 왜 언어화를 못한다는 거야? 우린 언어화할 수 있어. 언어가 설명만 잘하면 되지 왜 모든 언어를 다 공격해서 침묵에 들어가야만 안다는 거야? 왜 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는 거야?” 표현을 해본 거예요. 모든 우리 일체 유심의 세계를 표현해 본 거예요. 그게 유식학이에요. 결국 이 반야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나온 겁니다.

09:00 공종, 상종도 심지어. “왜 저따위로 해석을 하지?” 해서 이 역사를 제가 진행되는 것 따라 다 해 드릴 거예요. 먼저 반야경, 마하반야바라밀경, 8000송반야경이 제일 오래됐으니까 8000송, 마하반야바라밀경, 그다음에 반야심경까지 보고, 유식학으로 넘어가서 유식학이 주장하는 것들과 딱 연결해서 보면요 이 논쟁의 흐름의 역사가 보이실 거예요. 니네 중관파 포함해서 아예 공종 자체를 아직 모자란, 설명이 제대로 안 된, 핵심을 설명 못한 가르침으로 딱 규정해버리고, 유식학이 “우리가 진정한 결정판이다” 하고 주장해요. 근데 이것도 미진하다고 등장한 게 나중의 성종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승기신론, 우리는 원효대사 이래로 대승기신론이 최고였습니다. 선불교도 다 이 성종이에요. 바로 참나 찾으라는 게 이제 성종입니다. 근데 어떻게 보면 성종이, 제일 원래 반야경의 의미를 제일 잘 푼 게 성종이에요.

10:00 헷갈리실 수 있는데 이 얘기도 하나 알아두시면 좋겠고요. 그리고 아까 이거랑 별개로 현교 밀교를 공부하신다면, 여러분 지금 한국 불교에서 큰 스님들이 계속 참나 찾으라는 거, 주인공 찾으라는 걸요 현교 중관의 논리로, 지금 이재열 법사 같은 분이 중관의 논리로 대행 스님의 주인공을 비판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뭐 진제스님의 참나를 비판한단 말이에요. 이게 현교의 논리로 밀교를 공격하는 겁니다. 티벳불교식으로 보면 일체 무자성의 논리를 가지고 청정광명심 찾으라는 논리를 공격하는 거예요. 이게 이런 짓 하면 안 된다고요. 혼선만 빚죠.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못 해요. 오늘 하루 몰라 고민하겠어요? “참나를 찾아? 말어?” 아니 참나를 빨리 찾아야 되는데 “아 찾아야 돼? 말아야 돼?” 이걸로 고민하게 만든다는 게 이 귀한 시간을 하루하루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게 중생들한테 할 짓이냐는 거죠. 저는 자명하지도 않은 말로 혼선만 빚어서 “앗싸리 현교를 할 거면 무자성으로 가라. 너네는 그냥

11:00 너네들끼리 모여서 소수 정예로 무자성으로 가라.” 선불교는 티벳에서는 밀교예요. 왜냐하면 족첸이 밀교거든요. 족첸과 똑같아요. 선불교 최상승선인 족첸과 마하무드라가 밀교예요. 밀교 중에 최상승 밀교예요. 모든 에너지체 다 만들고 마지막에 결국 뭐 하겠어요? 몰라 해야 되거든요. 마지막에 탁 내려놓고 참나 안주하는 그게 최상승 밀교거든요. 밀교 중에 밀교, 탄트라 따지면 밀교 체계에서 무상탄트라, 무상요가탄트라라고 궁극의 요가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몰라 하시면 그게 궁극의 밀교예요. 학당에서 몰라 하는 게. 이게 족첸 마하무드라법 그대로 가르치는 거거든요. 저희랑 똑같거든요. 거기에 하는 게. 궁극의 밀교를 지금 여러분 홍익학당에서 배우시는 거예요. 근데 이 밀교 배우는 사람한테 어디 현교 배우는 애가 와 가지고 “무자성이다. 참나는 없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티벳에서도

12:00 족첸 마하무드라는 달라이 라마도 거기는 공격 못합니다. 최고급 선이기 때문에 거기에 아무 말도 못 해요. 그러니까 오죽하면 달라이라마가 절충안까지 주장하는 거예요. 정광명이 자기도 해봤더니 있거든요. 있긴 있으니까 이걸 어떻게든 논리의 세계에 편입한 겁니다. 연기적 의식 연속체라는 표현으로. 이것도 이해하시면 좋겠고요. 지금 한국 불교에서 참나 있냐 없냐로 싸우는 건 현교 밀교 가르지 않고 혼동 속에서 지금 서로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는 분은 그냥 즐기시면 돼요. “무자성, 어 무자성, 어떤 한 생각도 자성이 없지.” 그러고 “참나 있지.” 이게 모순된 것 같지만 이게 오히려 차라리 맞다고요. 아까 인지부조화 같은 린포체들의 말이 오히려 차라리 낫다고요. 두 개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논의되는 줄만 알고 한다면. 모르고 한다면 이제 인지부조화입니다. 이게 같은 차원에서 논의되면 인지부조화입니다. 달인지 손가락인지가

13:00 구분이 없어지고 “참나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근데 재밌는 건 아까 제가 린포체 비판한 거는 린포체들 글을 보면요 이게 같은 차원인 것처럼 다뤄져요. 그래서 제가 인지부조화라고 공격한 겁니다. 차원을 다르게 얘기하죠. 현교적으로는 무자성인데 밀교적으로는 청정광명심을 깨달아야 된다. 이렇게 얘기해 줘야 돼요. 차라리 모순되더라도. 그래야 듣는 사람이 혼돈이라도 안 오죠. 언어를 잘 쓰자고 언어 연구해 놓고, 언어를 혼동시켜 버리고 오히려 이게 더 문제 아닌가요? 자명한 언어 쓰기가 중요하다. 여기까지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데 서론 진도 중에 지금 되게 중요한 얘기예요. 서론격으로 한 겁니다마는. 틸로빠 갈게요. 틸로빠의 마하무드라의 노래. 이 틸로빠(Tilopa)가요 저기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 계보의 스승이거든요. 988년에서 1069년 요때 분인데요. 마하무드라라는 걸 이제

14:00 알리신 분이에요. 마하무드라, 마하가 대(大)죠. 마하가 대고요 무드라가 도장(印)입니다. 도장 인(印)자, 대인(大印). 우주 전체가 진리의 도장이라는 거예요. 꽝하고 찍힌 진리의 도장. 여러분 수행하시다 보면 “우주 전체가 한 덩어리로 진리구나”라고 느끼는 그때를 말하는 거예요. 참나 안에서 온 우주가요, 참나 안에서는 윤에게 열반계가 없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쪽 세계에 오면 언어가 바뀌어요. 이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써 언어입니다. 벌써 틸로빠만 해도. 중관파들은 언어를 지적하는 언어라고 했죠. 손가락을 지적하는 손가락. 입장이 달라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입장에서는 열반 진여의 세계와 생멸 윤회의 세계가, 닝마파 입장입니다. 닝마파 같은, 틸로빠는 까규파(Kagyupa)예요.

15:00 까큐파는 밀라레빠라는 유명한 고승을 배출한 그 전통 속에서 공부하는 파고요. 닝마파는 파드마삼바바 계보거든요. 핵심이 두 입장이 똑같아요. “윤회와 열반은 하나다” 이것을 한문으로 진속불이(眞俗不二). 이것을 명심하셔야 돼요. 여러분 티벳에서 말하는 밀교인데 밀교 공부를 하시려면 참나 체험을 하신다는 건, 참나 체험을 하신다는 건 참나에서 육근이 작동하죠? 이렇게도 그려 볼까요? 참나에서 육근이 작동합니다. 육근은 참나의 작용이에요. 육근은 참나, 정광명의 신비일 뿐입니다. 애초에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기존 불교에서 “윤회계를 초월하라” 이런 거는 다 날아가요. 대인이라는 말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지금

16:00 참나만 대인이 아니에요. 보고 듣고 맛보고 육근이 다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에 전체가 진리, 한 덩어리 진리예요. 대승기신론에선 이걸 일법계라 그래요. 전체가 한 법계인 줄 아느냐? 전체가 한법계인 줄 아느냐? 한 법계, 하나의 진리, 이게 진리의 도장 마하무드라 수행이에요. 닝마파에서는 똑같은 거를 뭐라고 하냐면? 뒤에 족첸수행도 나옵니다. 닝마파에서는, 닝마파, 여기는 까큐파, 닝마파에서는 족첸은 무슨 뜻이냐면 대원만(大圓滿)입니다. 대원만. 이게 뭐냐? 전체가 원만해요. 완벽해요. 원만하다는 거 완벽하다는 거예요. 둥글다. 완벽하다. 찌그러진 게 하나도 없다. 여러분 현상계는 찌그러져 있고 절대계만 완벽한 것 같죠? 이러면 대원만을 못 깨달으신 거예요. 이게 티벳밀교, 최상승 밀교입니다. 모든 에너지체 수행을 다 마친 뒤에

17:00 결국 뭐예요? 참나 안에 안주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궁극의 해탈도라 그래요. 이 족젠 이거를 마하무드라를 착첸이라고 합니다. 착첸. 대원만은 족젠. 이게 선불교 최상승선. 우리나라 선불교랑 통해요. 이것을 해탈도라고 해요. 해탈도는 완전한 진리와 합일되는 걸 해탈도라고 하고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편들을 닦는 걸 방편도라 그래요. 방편도는 우리가 아는 육바라밀 수행이나 에너지체, 보신(報身)수행 있죠? 환신수행. 에너지체를 티벳에서 환신(幻身)이라고 그래요. 환신수행. 이건(6바라밀, 에너지체=환신) 방편도이고요. 여기(해탈도)는 참나 안주입니다. 참나 안주는 해탈도예요. 그래서 아예 방편도를 안 닦고 해탈도만 바로 닦는 방법이

18:00 돈오돈수. 우리 조계종에서 돈오돈수라고 하는 거. 그냥 참나랑 합일돼 버리면 참나랑 합일되어 버렸는데 끝 아닌가요? 요게 해탈도만 닦는 방식이 있고요. 방편도까지 닦는 방식은 보살들처럼 육바라밀을 닦는 방식, 이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하고요. 티벳불교에서는 이 에너지체 닦는 것은 금강승(金剛乘)이라고 그래요. 티벳불교에서는 이 참나 안주도 금강승으로 보죠. 사실은 대승에 다 있는 건데 금강승에서나 하는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저런 밀교 논리랑 다 결합돼서 나오다 보니까 금강승의 논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놀려요 대승은 육바라밀로, 육바라밀을 원만하게 닦으려면 3무량겁이 걸려요. “대승은 오래 걸린다.” 이게 지금 달라이라마 주장입니다. “우리 티벳밀교는, 금강승은 에너지체 닦으면, 즉신성불이 가능해요. 그 생에 성불합니다.” 에너지체 닦으면 3무량겁 퉁쳐요.

19:01 이것도 안 닦고 그냥 참나 안주만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더 많고요. 에너지체 닦는 분들이 더 적죠. 그래서 “그냥 참나각성 해버리면 이미 부처 아니냐.” 이렇게까지 논리가 나간 거예요. 우리 선불교랑 똑같아요. 돈오돈수. 근데 사실상 들어가면 돈오(頓悟)가 쉽게 안 돼요. 점오(漸悟)도 있고 돈오(頓悟)도 있고 돈수(頓修)도 점수(漸修)도 있고 돈수도 있지만 왜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냐면요? 참나 안에 들어가면 끝이라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예요. 그러니까 참나 안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이건 차이가 있지만 일단 참나 안에만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예요. 돈오(頓悟) 참나를 정확히 깨달으면, 돈수(頓修) 더 닦을 게 없다. 이해되시죠? 그런데 만약에 제가 참나 각성을 했는데 참나에 안주를 못해서 좀 고생해요. 그러면 돈오점수예요. 그런데 결국 참나 안에 확실히 들어가면, 제대로 돈오하면 어떻게 돼요? 닦을 게 없어요. 나는 이미 부처니까. 그래서 돈오돈수라고 하는 거예요. 오(悟)도 점차 깨달을 수도 있고 닦음도 점차 닦을 수 있지만 참나에 안주하면 끝난다는

20:00 발상을 제가 돈오돈수식 발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 돈오돈수면 끝나요. 어떤 거 하실래요? 3무량겁 코스(6바라밀)가 있고요, 돈오돈수 코스(참나안주)가 있고, 즉신성불 이번 생에 부처되는 코스(에너지체=환신)가 있어요. “이거(돈오돈수 코스)랑 이거(즉신성불 코스) 주세요” 그러겠죠. 그게 티벳 금강생입니다. 요거랑 요거면 3무량겁 안 닦아요. 이번 생에 부처 되기 때문에. 따라서 그런 존재들이 린포체로 오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3무량겁을 닦은 적이 없어서 육바라밀 공덕이 없는데도 에너지체 닦고 참나각성 했다고 린포체가 된 거예요. 심지어 다음 생에는 견성도 안 하겠대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냥 린포체가 된다고요. 견성을 안 해도 린포체인데. 굳이 안 해도. 이렇게 하다 보니까 점점 가르침이 저질화되는 거예요. 육바라밀은 빠지고 에너지체와 참나각성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티벳, 제가 한 지난 1년간 구할 수 있는 국내 번역된 경은

21:00 거의 다 구해서 봤어요. 중관론 논의건 뭐건 간에 닝마파 쪽 경전이건. 그리고 내린 소감입니다. 아 이 사람들은 참나각성만 하거나 에너지체 만들 정도, 에너지체가 좀 닦일 정도, 그러니까 경지가 깊지도 않아요. 제대로 에너지체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에요. 그 정도밖에 안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이분들은 주로 시각화(視覺化)로 해결해요. 상상(想像)으로 해결합니다. 상상. 내 몸이 부처 몸이라는 상상으로 많은 걸 해결해요. 그래서 제대로 된 에너지체 배양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더 닦고 싶으시면 용호비결을 좀 참고하셔야 돼요. 용호비결을 보셔야 돼요. 제대로 된 에너지체 수련법들이 없어요. 거기 있는 밀교 것 다 구해 봤는데 그대로 닦으면, 이론은 한 10지 되는 이론을 갖고 있어요. 근데 그대로 닦으면 제가 볼 때 잘 닦아도 한 3지 정도 나와요. 그런데 심지어 그것도 대충 닦아요. 왜냐하면 닦는 시간이 형편없는 거예요. 6개월 닦으래요. 6개월에 한 몇 지씩 올라가는.

22:01 그 수행 과정인데 6개월 닦으면 다음 과정으로 간대요. 그럼 이거 엉망으로 닦는다는 얘기거든요. 형식적으로 맛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저렇게 닦아서는 에너지체 맛이나 볼까? 아니면 시각화된 에너지체, 시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상상으로 수행한 에너지체. 상상임신이 돼요. 그래서 제가 볼 때 이분들은 좀 심각하더라고요. 에너지체 닦는 수행하시는 분들 자체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잘 닦았다고 해도, 많이 쳐줘도 한 2지나 3지, 3단 밖에 못 가는 법을 내부적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한번 다 구해본 자료로는 그래요. 그런데 이론 자체는 그대로 닦으면 한 10지는 가는 이론은 있어요. 그런데 이론을 실제 적용하는 걸 보니까 여기서 여기 가려면 몇 지를 건너뛰어야 되는데 6개월 이렇게 잡아놨더라고요. 일단 말이 안 되죠. 그렇게 닦으면 아무리 닦아도, 거기 나온 이론을 초천재가

23:00 나와서 다 소화하면 제가 볼 때 한 3지까지는 가겠더라고요. 거기 밀교법으로 닦아서 3지까지는 가겠다. 조금 있다 밀교법도 얘기해 드릴게요. 아무튼 이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하실 때 정광명만 강조하시면 안 돼요. 이게(진여, 열반) 정광명 자리잖아요. 일체(진여, 열반, 윤회, 생멸)는 정광명의 작용입니다. 전체가 정광명인 거예요. 정광명의 작용도 정광명이다. 참나의 신비도 참나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 오늘 하루 여러분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육근작용, 탐진치, 번뇌, 망상이 다 완벽한 진리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이거를 생각으로 해서는 안 돼요. 참나 상태에서 그렇게 느끼셔야 돼요. 그게 대인, 마하무드라는 거예요. 대원만, 착첸, 족첸이 다 그겁니다. 밑에 마하무드라 닦는 법 한번 보실래요. 11) 마하무드라(大印ㆍ착첸)의 6원칙(틸로빠의 6원칙) ① 상상하지 말라! ② 생각하지 말라! ③ 분석하지 말라! ④ 명상하지 말라! ⑤ 숙고하지 말라! ⑥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두라! “마하무드라 착첸의 6원칙.” 이게 학당

24:00 몰라랑 똑같은지 아닌지 한번 보셔야죠. 첫째, 상상하지 말라. 어때요? 상상하지 말라. 일단 상상하지 않으려면 몰라 하셔야죠. 몰라 하고 어떤 상상도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수행하면 부처 되겠거니 하는 상상도 하면 안 돼요. 이걸 6조 스님이 뭐라고 그랬죠? 불사선(不思善) 선도 생각하지 말고, 즉 부처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불사악(不思惡) 악도 떨어질까 봐 걱정도 하지 마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이거죠. 상상하지 말라. 두 번째 생각하지 마라. 세 번째 분석하지 마라. 직장 가서 상사분들 이런 말 안 하세요? “너는 생각하지 마.” 이럴 때 성불하는 겁니다. “이건 이 자리인가?” 이렇게. 이상하게 수행 단체만 가면 거기 멘토들이 저더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요. 말대꾸하지 말래요. 이런. 상상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분석하지 말라.

25:00 분석도 하지 마세요. 이게 참나냐? 아니냐? 분석도 하지 마세요. 다 같은 말이에요. 명상도 하지 마세요. 이때 명상이라는 건 대상에 대한 몰입입니다. 어떤 대상에 집중하려고도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호흡에 집중하려고도 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최상승선은 이래요. 원래 명상해야죠. 그런데 최상승선이다 보니까, 바로 참나 접속을 해야 되니까. 어떤 대상도 세우지 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전체를 다 지금 몰라 하셔야 돼요. 숙고하지 마라. 고민도 하지 마라. 그다음에 뭐예요?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두라. 현존 상태에 만족하라. 저희 학당에서 존만이라고 그러죠. 존재에 만족하라. 지금 이거 다 하면 “몰라. 괜찮아”입니다. 몰라. 어떤 생각, 명상, 숙고, 고민 다 몰라. 분석도 안 해. 그런데 지금 괜찮아. 존재하는 것만으로 괜찮아. 이거예요. 과거 몰라. 미래 몰라. 우리 학당에서 지도하는 게 뭐죠? 과거 몰라.

26:00 미래 몰라. 지금 이 순간 현존에 만족하기. 끝. 몰라. 괜찮아. 하나 더 하면 자명. 어느 때보다 의식은 또랑또랑해. 자명이에요. 몰괜자가 이게 최상승법입니다. 틸로빠 얘기 들어볼까요? * 틸로빠(988∼1069)의 󰡔마하무드라의 노래󰡕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글인데요. 1. ‘마하무드라’(大印, 진리의 도장)는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그러나 성실하고 진실한 그대 ‘나로빠’를 위하여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제자가 나로빠예요. 나로빠가 최고의 교학자였는데 한계를 느껴요. 그래서 어느 날 스승을 찾으라는 계시를 듣고 찾아 헤매다 틸로빠를 만나서 이거 전하는 얘기가 무시무시합니다. 별의별 고행을 다 시켜요. 거의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이런 수준의 별의별 고행을 다 시켜서 업장을 털리게 한 다음에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 나로빠를 위해서 지금 이 노래를 하는 거예요. 마하무드라의 노래. 이 나로빠의 제자가 마르빠라는, 티벳에서 인도로 가서

27:00 경전을 구하다가 나로빠를 만나요. 그래서 마르빠가 경전을 구해 간 걸 가지고 온몸으로 구현한 분이 제자인 밀라레빠예요. 그래서 이 계보가 까규파 계보입니다. 틸로빠, 나로빠는 인도 양반들이고 마르빠부터 티벳 쪽이죠. 나로빠를 위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언어화할 수 없는데 언어화한다. 이게 노자 시작 아닌가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는 원래 말로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지만 도라고 부를게 이런 거죠. 지금부터 도라고 부를게 이거죠. 2. ‘공空’은 의지하는 것이 없다.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어떠한 애씀도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머무르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공空’은 의지하는 것이 없다.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없음에 의지한다. 공에 의지한다는 거죠. 텅 빔에 의지한다. 어떠한 애씀도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머무르면. 이게 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을 언어를 깨부수면서 논리를 통해 공을 깨닫는 게 아니라 그냥 몰라 하라는 거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마하무드라는 몰라 괜찮아하고 있으면 어떤 상태라는 거예요? 공이다. 이 공 자리에 마하무드라는

28:00 의지한다.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몰라만 하면 자유가 온다. 텅 빔 안에서. 여기서 텅 빔이라는 건 뭐겠어요? 몰라 했다는 건 뭐예요? 판단 중지. 어떤 판단도 하고 있지 않은, 어떤 2원성에도 빠지지 않은 상태를 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의 의미는요 논리의 한계를 지적해서 무자성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뭐예요? 몰라 해버리는 거예요. 단박 무심을 통해서 2원성을 초월해 버리는 거예요. A다 B다를 몰라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A도 B도 아닌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몰라를 통해 초월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을 것이다. 3. 허공을 응시할 때 ‘무無’를 볼 수 있다면, 만약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면, (모자母子융합, 모母정광명[참나]-자子정광명[각성]) 온갖 분별을 깨뜨리고 깨달음에 도달할 것이다. 허공을 응시할 때 ‘무無’를 볼 수 있다면, 만약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면, 여기 모자 융합이라고 하는데요.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건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것, 밖을 보지 않고요, 밖을 보지 않고요 내가 나를 들여다보라. 일단 방편으로 허공을 보라 그래요. 허공을 보라고, 하늘을 보라고도 하고요. 마하무드라 수행할 때는 텅 빈 하늘을 보면서

29:00 허공에 대해서 명상을 시킵니다. 그러다가 내면의 허공을 깨달아요. 대상을, 어떤 대상도 세우지 않고. 이게 지난번 그거 비슷하지 않아요? 힌두교 수행법 공처정(空處定), 처음에 공(空) 일체가 텅 비었다고 생각하라고 한 다음에 그다음에 바로 뭐였죠? 식처정(識處定), 참나 각성, 그 공을 알아차리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거. 그래서 방편으로 허공 응시도 가르칩니다만 그다음 포인트는 뭐예요? 마음으로 마음을 보는 거, 내가 나를 보는 겁니다. 그게 모자 융합이에요. 내가 나를 보는 게요 이 참나 자리가 엄마 모(母)라면 참나의 빛이 지금 생멸심(生滅心)이겠죠. 이 참나의 빛을 가지고 참나를 다시 알아차리는 겁니다. 즉 에고가 참나를 알아차리는 걸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은 참나가 참나를 알아차린 거예요. 왜냐? 에고도 참나의 빛이거든요. 참나를 알아차리는 그 마음도 참나의 작용이란 말이에요. 참나가 참나를 알아차립니다.

30:00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린다. 이게 엄마와 자식이 합해졌다는 거예요. 엄마의 자식인 그 자식이 다시 엄마를 찾은 거예요. 자기 본래 모습을 찾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참나 각성인 거예요. 참나가 엄마면 각성은 누가 했어요? 에고가. 자식이. 이게 다른 말로 염불(念佛)이에요. 염(念)은 누가 해요? 에고 가요. 자식이. 불(佛)은요? 참나. 엄마죠. 엄마를 염한다. 부처를 염한다. 다른 말로 참나를 각성했다. 온갖 분별을 깨뜨리고 깨달음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틸로빠는 다른 방편이 없어요. 그냥 참나 각성만 하면 부처라는 거예요. 완벽한 자유라는 거예요. 이거 이해되시죠? 이게 해탈도라는 거예요. 이 마하무드라가 해탈도라는 거 아시겠죠? 그냥 넌 이미 부처다 예요. 넌 이미 부처다. 이게 선불교예요. 돈오돈수 사상이랑 똑같아요. 4. 하늘을 떠도는 구름은 뿌리도 없고 집도 없듯이 마음속을 떠도는 분별심 또한 이와 같으니, ‘본래의 마음’을 보면 모든 분별이 무너질 것이다. 하늘을 떠도는 구름은 뿌리도 없고 집도 없듯이 마음속을 떠도는 분별심 또한 이와 같으니. 멋지지 않나요? 하늘을 떠도는 구름들 나타났다.

31:00 있나 보다. 무섭게 먹구름 됐다가 흩어지면 순간입니다.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아무 흔적도 없어요. 우리 분별심도요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는 온갖 분별심, 망상, 탐진치, 그거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또 없어서 죽을 것 같고 하는 모든 마음들이 구름 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참나 안에서 흩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정광명만 있어요. 거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구름일 뿐입니다. 본래 마음을 보면, 정광명 자리를 보면 모든 분별이 무너진다. 참나 51%, 정광명 51%로 존재하면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들이 잘 녹습니다. 나왔던 자리로 잘 돌아가요. 그러니까 이 마하무드라 수행에서는 탐진치랑 싸우지 않습니다. 이게 소승불교 위빠사나 수행이랑 달라요. 위빠사나 수행은요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일어나는 신수심법(身受心法), 오감의 작용, 감정 작용, 생각 작용,

32:00 이런 것들, 개념들을 늘 알아차려야 돼요. 대상을 알아차리다 보면 알아차린 자신을 알아차릴 때가 와요. 그때 열반을 각성해요. 그러니까 방편을 하나 쓰는 거죠. 그래서 번뇌나 감정이 일어나면 뭔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요, 즉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나고 사라진다 알아차려요. 그런데 마하무드라법은 안 그래요. 명상을 하지 마라고 했죠? 명상하지 마라는 게 그런 위빠사나 수행하지 마라는 거예요. 위빠사나식 대상 알아차리기 수행 하지 마라는 거예요.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마라는 건 아니고, 그런 식 위빠사나 하지 마라. 진짜 위빠사나를 해라. 진짜 위빠사나는 뭐냐? 그냥 참나 각성입니다. 참나를 각성하고 있으면 이게 그대로 지혜요 이게 그대로 선정이에요. 그대로 정혜쌍수인 거예요. 참나가 참나를 알아차리면 참나는 본래 고요하니까 선정이요 참나는 본래 자명하기 때문에 지혜인 거예요. 다른 걸 안 알아차려요. 그러니까 내 안에 일어난 생각 감정 오감이 아무리 일어나도요 참나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일어났다가

33:00 나온 자리로 돌아가고 끝나요. 하나하나 요격하러 다닐 필요가 없다고요. 기존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라고 해서, 마음에서 뭔가 하나 육근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요격하러 다닙니다. 뭐 하나 일어나면 동시다발적으로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요격하면서 돌아댕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하무드라나 족첸은 그냥 여기를 알아차려요. 딱 중심에 있으니까. 한눈에 파악이 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다 여기서 일어나고 여기로 사라지기 때문에 중심을 딱 잡고 있는 거예요. 태풍의 눈 같은 딱 중심을 잡고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가 일어나든 다 여기서 나갔고 여기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여유롭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그 탐진치를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참나를 알아차려요. 그리고 그 탐진치가 참나의 신비고 작용인 줄 알아버려요. 그러면 알아서 녹아서 사라집니다. 이게 마하무드라식 방법이에요. 5. 비록 말로써 ‘공空’을 설명하려 하지만, 공空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은 빛처럼 광명하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비록 의식은 본질적으로 공空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들을 포용하여 품고 있다. 비록 말로써 공을 설명하려 하지만, 말을 가지고

34:01 공을 설명하려 한들 텅 빔, 이 언어를 떠난 텅 빔이 설명이 되겠어요? 공은 결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은 빛처럼 광명하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자 지금 이분도 중관파식이 아니어도 멋지게 잘 설명하죠. 기본적으로 이런 발상들이 중관파식 발상과 통하죠. 무자성. 마음이 빛처럼 광명하다는 그것도 무상하다. 그렇죠. 그것도 언어일 뿐이니까. 근데 이렇게 설명을 해주면 좋죠. 그것도 언어와 상징일 뿐이니까 내려놔라. 그러면 비록 의식은 본질적으로 공하지만 그 안에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품고 있다. 텅 비었지만 모든 것을 품고 알아차리고 있다. 텅 비었지만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또 모든 것을 품고 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청정광명심을 언어에서 찾지 마라는 말을 한 겁니다. 이런 논리를

35:00 집중적으로 탐구하면 중관 논리가 나와요. 그러니까 중관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귀류논증 중관파식으로는 절대 논리를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시겠죠. 철저히 지금 이 틸로빠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서만 언어를 씁니다. 언어를 파괴한 언어가 아니라. 그러니까 이런 글 읽을 때는 여러분 뭐가 다른지 아세요? 중관 책을 보면요 칸트 헤겔 책 보는 거랑 비슷한 기분이 돼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보면 읽을 때마다 자명해지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정확하게 잘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된 책을 보시면요, 그런 언어로 된 책을 보시면 한 구절만 읽어도 자명해져요 그런데 언어를 깨는 언어는 철저히 머리를 써서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나도 같이 머리를 쏴야 되니까 힘들어지는 거예요. 두통이 와요. 그래서 칸트 책 한 페이지 이상 보시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어느덧 의식을 잃고 있어요. 뇌가 다운돼 버려요 그러니까 뇌한테 계속

36:00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계속하면 다운돼 버리거든요. 자명하지 않은 얘기, 체험 없는 얘기를 계속하면. 그런데 지금 이 글을 보시면서 느낌상 구분해 보시라고요. “요 글은 좀 읽을 때마다 뭔가 힘이 나고 자명해지는데” 이러면요 그러면 이런 게 중관파식 논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얘기했죠. 중관파 중에 자립논증 중관파는 달라요. 그쪽 글들은 읽으면 자명한 글들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늘 강조했던 “이 책 좋다”고 강조했던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 수습 차제라는 글이, 그분이 자립논증 중관 대가입니다. 그분들은 설명 잘해요. 그러니까 중관의 논리, “일체 공은 무자성이다”라는 논리를 취할 뿐이지 설명 다 해요. 잘해요. 유식학까지 다 받아들여서 자립논증 중관파는 그냥 여러분이 읽으시면 읽을수록 자명해지는 글을 잘 써요. 이게 자립 논증이에요. 귀류논증은 남의 말꼬리 잡아서 논리 타파에

37:14 다 난리 쳐요. 왜냐하면 언어에서 승부 보려는 애들이라서 그래요. 그런데 이분은 언어에서 승부 보려고 안 하죠. 언어를 통해. 이분 시인 같지 않아요? 애초에 노래잖아요. 시예요. 참나를 노래한 거예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몸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 얼마나 좋아요. 말도 편하게 해줘요. 중관 책은요 “대가리를 존나 굴려라. 그리고 긴장하라.” 예요. 시작부터 “긴장하라. 내 논리 따라오려면 긴장하라.” 왜? 내가 네 논리를 박살내주마 이거예요. 시작부터 너의 모든 고정관념을 논리로 박살내주마. 그런데 이거는 보세요. 6. 몸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켜라. 마음을 비우고 어떤 생각도 하지 마라. 텅 빈 대나무처럼 육체와 더불어 편안히 쉬어라. 주지도 받지도 말고, 그대의 마음을 푹 쉬게 하라. 마하무드라는 ‘무無’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여 때가 되면 그대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생각하지 말고 쉬어라.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켜라. 그냥 몰라 해라. 바로 몰라 하면 되지

38:00 뭐 쓸데없는 말 할 필요가 있어요. 마음을 비우고 어떤 생각도 하지 마라. 이거 몰라 안 하면 생각납니다. “생각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돼요. 계속 몰라가 최선이에요. 몰라를 계속 때려줘야 뭔 생각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게 돼요. 텅 빈 대나무처럼 육체와 더불어 편안하게 쉬어라. 대나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속을 비우고 쉬고 있어라. 주지도 받지도 말고 그대 마음을 푹 쉬게 하라. 마하무드라는 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게 텅 빔이 되는 것이다. 그냥 바로 텅 빔이 되게 유도해 버리잖아요. 이게 얼마나 좋아요. 이게 밀교법입니다. 밀교법. 그러니까 논리는 틸로빠도 다 논리는 중관 논리 공부하신 분이겠지만, 밀교적으로 얘기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논리 앞세우지 않고 체험을 가지고 얘기하니까. 이렇게 실천하여 때가 되면 그대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깨달음은 따 논 당상이다. “몰라만 하시면 반드시 참나 체험합니다” 이 소리예요. 7. 그대가 만약 아무 노력 없이 ‘자연스런 상태’에서 한가로이 안주할 수 있다면, 곧 그대는 ‘마하무드라’(大印)를 얻을 것이고 얻을 것이 없는 경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아무

39:00 노력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한가로이 안주할 수 있다면. 지금도 몰라 해 보세요. 같이. “몰라 괜찮아.” 이게 존재로 만족하기 아닌가요? “존재만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해.” 이 까규파는 참나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특히 강조 표현합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게 참나 자리예요. 나머지는 부자연하다는 거예요. 힘을 다 뺐는데 청정광명한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합니다. 곧 그대는 마하무드라를 얻을 것이다. 진리, 공성의 진리를 직관할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마하무드라 얻으려면 선정만으로는 안 돼요. 참나의 고요함만으로 안 돼요. ‘몰괜’만으로 안 돼요. ‘자명’이 있어야 돼요. 자명해야지 전체가 진리구나 하는 걸 직관하죠. 고요한 중에 만법이 참나의 작용이구나 이 진리를 직관해야 된다. 특히 법공을 직관해 줘야 돼요. 법공. 더 나아가면 구공, 의식 안에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구나 하는 구공까지 가야 됩니다.

40:00 법공 구공이 원래 둘이 아니에요. 법공의 심화편이 구공입니다. 그냥 법공이라고만 해도 돼요. “만법이 공하다” 안에 그 공 속에 만법이 다 들어 있어야 되거든요. 8.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머물라. ‘마하무드라’는 모든 수용과 거부를 초월하여 있기 때문이다. 아라야(Alaya, 일심一心)는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그것을 방해거나 더럽힐 수 없다. 어나지 않는 자리에 머물러라. 그러면 모든 현상들은 진리 속으로 융해되고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은 사라질 것이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는 것은 어떤 생각도 하지 마라는 거예요. 따지지 마라 그리고 자연스럽게 머물러라. 마하무드라는. 그러니까 뭐냐면 주지도 받지도라는 건요 지금 내가 내 마음에서 뭘 놓쳤네 얻었네 하는 득실도 따지지 말고 그냥 “OK. 딱 좋아”가 이거거든요. 따지지 마라는 거잖아요. 몰라 괜찮아 하는 거예요. 몰라는요 “따지지 마라. 괜찮아.” 같은 말인데 몰라는 일체를 부정해 버리는 방식이면 괜찮아는 “일체를 껴안아 버려. 지금 딱 좋아. 더 바랄 게 없어.” 이 소리고요. 몰라는 무지 쪽이죠. “어떤 판단도 하지 않겠다. 어떤 상도 세우지 않겠다.” 괜찮아는요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겠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다. 지금이 최상이다”라고 선언해 버리는 거예요.

41:01 “조금도 불만이 없다”라고 해버리는 거예요. “부족한 게 없다.” 이렇게 해버리면 주지도 받지도 않는 상태에 들어가시겠죠. “몰라. 괜찮아. 자명.” 이때 어느 때보다 자명하게 진리와 한 덩어리가 돼서 직관하게 됩니다. 마하무드라는 모든 수용과 거부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뭘 얻으려고도 뭘 얻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잡념이 일어나는 것도 거부하지 않고 잡념이 일어난 걸 수용하면서 그냥 몰라라고 해버리는 거예요. 판단만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라야 이 아뢰야(阿賴耶)랑 똑같습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지금 아라야라고 한 거예요. 일심, 아라야가 아뢰야가요 참나로도 쓰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얘기하지만 아뢰야식은 참나의 작용이거든요. 그러니까 참나를 아뢰야로 얘기할 때도 있어요. 아라야는 한마음을 말합니다.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생겨난 적이 없어요. 언어 밖의 세계거든요. 이게 중관 논리로 볼 때도요, 중관 논리로 보더라도 이 아라야, 청정 광명의 세계는 언어

42:00 밖의 세계라니까요 희론(戱論)을 초월한 세계니까 언어화하지 않고 침묵하면 돼요. 제가 달라이라마를 비판했던 것은 거기를 언어화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비트겐슈타인의 명언 있죠. “말할 수 있는 건 설명하고 말할 수 없는 건 침묵하라.” 이게 언어의 대가의 결론입니다. 언어화할 수 있는 건 자명하게 언어화하고 자명하게 언어화할 수 없는 영역은 침묵하라. 용수보살은 이 논리를 따라서 반야지의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한 거예요. 언어화할 수 있는 세계는 다 언어화해서 두드려 패고, 까고, 언어화할 수 없는 세계는 침묵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청정광명을 언어화해 버리면 문제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제가 달라이 라마식 논리에 대해 비판하는 겁니다. 청정광명은 언어화하지 마라. 차라리 언어화하지 마라. 그리고 차라리 어떤 언어도 무상하고 무자성이고 공하다고만 얘기하라. 그러면 모든 언어를 초월한 그 세계가 청정 광명의 세계가 될 테니까

43:00 어설프게 청정광명을 언어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차라리 그냥 부정하고 끝내라. 본래 생겨난 자리가 아니니까. 본래 생겨난 자리가 아닌데 이게 무상, 생멸하는 세계겠어요? 이게 연기(緣起)적 의식연속체겠어요?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더럽힐 수가 없다. 태어나지 않은 자리에 머물러라. 태어나지 않은 자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가 널 낳기 전 상태에 들어가라 이겁니다. 그럼 거기가 참나 자리다. 그럼 언어가 없는 자리다. 언어가 없는 자리인데 그거를 왜 언어화하냐고요? 차라리 아예 하지 말든가. 할 거면 정확한 방편을 써서 표현하든가. 그러면 모든 현상들은 진리 속으로 융해되고 아상과 아만은 사라질 것이다. 아상과 아만은 에고 작용입니다. 에고가 녹아버린다는 거예요. 에고가 진리 안에서 녹아버릴 것이다. 마하무드라법 배웠고요. 족첸법 배워 볼까요? * 족첸(大圓滿) 명상법. 오늘 엄청난 시간입니다. 이제 족첸까지 배울게요. 족첸 명상법 아주 쉬워요. 달라이 라마께서 강의하신 겁니다. 1.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생각하지 마라.

44:00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책에 첫 번째,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생각하지 말라. 과거 몰라 하라. 미래도 몰라 하라. 우리 똑같죠. 14조에 과거 집착하지 마라. 미래 걱정하지 마라. 2.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음이 그 자신의 흐름대로 가도록 놓아둔다. 두 번째, 분별하는 마음 내지 말고 마음이 자신의 흐름대로 가도록 놓아둬라. 내 이름도 몰라 하시고 그냥 존재만 하시면 돼요. 에고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존재만 하시면 돼요. 분별하는 마음, 따지는 마음을 내지 마세요. 몰라 하시면 돼요. 3. 마음의 빛나는 명료함이라는 본질을 관찰한다. 세 번째, 마음에 빛나는 명료함. 청정광명함이라는 본질을 관찰하라. 그러면 이때 참나각성이 된 거죠? “우와 또렷이 알아차리는 자리가 있네.” 자리를 관찰하라. 4. 그 본질을 인식하며 한동안 머무른다.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담앤북스, 44쪽) 네 번째, 본질을 인식하며 한동안 머물러라 그 상태로 그냥 머물러라. 이게 족첸법입니다. 파드마 삼바바가 가르치신 법이에요. 파드마 삼바바 가르침은 지난 시간에 했죠.

45:00 파드마 삼바바의 제목 길었던 책,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 어쩌고저쩌고 해서. 거기에서 청정 광명, 공적영지의 투명한 각성으로 모든 걸 설명했었죠. 그 자리에 안주하라고 하는 법이에요. 과거 몰라 하라. 미래 몰라 하라. 홍익학당 법이 뭐죠? 과거 몰라 하라. 미래 몰라 하라. 내 이름도 모른다 하라. 그다음에 지금 이 순간 현존에 만족하라. 이거 그대로입니다. 이게 족첸 방법이에요. 이게 간단한 것 같지만요 이게 특정 대상을 정해서 몰입하는 방식이 티벳에서 발달돼 있어요. 티벳은 어마어마하게 명상법이 발달돼 있어요. 시각화하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발전돼 있고요. 한 사람이 다 못 배워요. 그 정도로 많은데 이 모든 명상을 하지 마라는 거예요. 내려놓고 너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라. 이게 우리 선불교의 직지인심(直指人心)입니다. “어떤 밖의 대상을 하나도 보지 말고 곧장 너를 바라봐라”를

46:01 직지인심이라고 합니다. “너의 마음을 곧장 바라봐라.” 그런데 지금 선불교도 화두를 바라본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화두는 대상인가요? 참나인가요? 그래서 지금 화두선은 최상승선이 아닙니다. 화두를 보고 있는 한은 최상승선이 아닙니다. 제가 화두선도 염불선도 최상승선이 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얘기했어요. 뭐냐면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이걸 방편으로만 썼지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나 자신을 보면 돼요. 뜰 앞에 잣나무를 보면서 나 자신을 보면 돼요. 이뭐꼬 하면서 나 자신을 보면 돼요. 이뭐꼬 할 때 딱 몰라 괜찮아 상태에 들어가면서 나 자신을 알아차리면 직지인심이 돼요. 직지인심이 되는 데 방편이 되면 그나마 그건 최상승선의 범주에 넣어줄 수 있는데, 화두에 대한 몰입이 깊어져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성철스님의 방법은 땡입니다.

47:00 최상승법이 아니에요. 특정 대상에 몰입하고 명상하는 방법이지. 틸로빠나 틸로빠의 마하무드라건 족첸이건 어떤 대상도 세우게 안 합니다. 그냥 청정광명한 마음 자신만 봐야 돼요. 이해되세요? 그 중간에 화두가 끼어버리면 망한다고요. 뭐 망할 거까지야 아니더라도 뭐. 근데 최상승선이 아니게 되고 오래 걸리는 수행이 된다. 왜냐하면 이제 그때는 이제 몰입 단계를 올려가는 식으로 인제 시간이 걸려요. 그러니까 동정일여니 숙면일여니 하는 단계가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단계가 없어요. 지금 틸로빠에게 단계가 있던가요? 그냥 참나 자리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안주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다른 단계를 세우면 안 돼요. 그런데 티벳불교도 다른 기본 명상 얘기할 때는 9주심도라고 9단계 명상의 단계를 설정해요. 최상승선은 그거 다 날려버립니다. 9주심 안 세워요. 그냥 들어가라고 하지. 그런데 한국 불교는

48:01 화두를, 갑자기 최상승선을 잡는다더니, 화두에 집착하기 시작하더니, 화두는 원래 송나라 때 것이지 당나라 고승들, 선불교 선문답의 제일 영웅들은, 전사들은 선문답으로 다 깨달았지 화두를 닦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스승이 딱 지적해 주면 바로 깨달았어요. 밖으로 찾아서 헤매던 사람들한테 부처가 뭡니까? 하고 가니까 뭐라고 스승들이 그랬어요? 부처가 뭡니까? “짝!” 그러면 나 자신을 딱 돌아보게 돼요. 부처를 묻던 나 자신. 그러면 “그거다.” 이쪽 족첸 대가들이요 어떻게 견성하냐면 스승들이 한 번씩 지적해 주고 끝내요. “생각의 틈을 봐. 한 생각이 사라지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사이를 봐. 거기 머물러. 그렇지.” 지금 그래도 견성한 린포체들은 이걸로 깨달은 사람들이에요. 총리 린포체인가? 이 양반이 견성하신 분인데 이분은 정확하게 알고 얘기하세요.

49:00 이분도 수도원에서 못 배웠어요. 그렇게 수도원이 안 맞더래요. 사원에서는 안 맞더래요. 못 견디셔가지고 늘 도망갈 생각만 하고, 탈출할 생각만 하다가 집에 가서, 그런데 아빠가 린포체예요. 그런 경우는 좀 드물죠. 아빠가 린포체인데 아버지가 어느 날 부르더니,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이 있어. 거기를 넓혀봐.” 탁 깨달은 거예요. 그러고 사원에 오니까 경전이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얘기했죠. 견성 이후의 매뉴얼이라고. 당연히 경전이 재미있죠. 알고 나니까 재미있어진 거예요. 이런 사례들 그러니까 많습니다. 린포체들이 견성한 사연들 들어보시면. 다 거기도 선불교도 똑같아요. 마하무드라나 족첸 닦는 분들은 옛날 우리 당나라 때 선사들 깨닫듯이 깨달아요. 그게 진짜입니다. 화두 안 잡아요. 화두는 더 하빨이에요. 그런데 지금 화두가 최상승선이라고 주장을 하니까

50:00 제가 비판하는 겁니다. 심지어 화두에 몰입하는 단계까지 정해 놓으면요 진짜 멀리 돌아가자는 거죠. 지극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곧장 간택만, 선택만, 따지지만 마라. 그러면 바로 지도(至道)다.” 똑같은 소리 동양에 다 있어요. 마하무드라도 티벳 가서 배우고 이럴 필요가 없어요. 이거 선불교에 다 있어요. 전심법요(傳心法要)에 가면 황벽(黃檗)스님이 단박무심, 단박에 몰라 해버리면 바로 네 의식에 백천태양이 뜬다. 이 말을 성철 스님은 다 죽여버려요. 성철 스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선문정로에서 이런 거 인용해 놓고, “이 무심은 너가 번뇌 속에서 찰라 인식한 무심이 아니고 12지 부처 됐을 때 인식하는 무심이다” 이랬어요. 그걸 누가 해요? 그거 본인도 못해요. 선문정로가 엉터리인 게요 선문정로에 인용된 글들은 다 좋아요. 그거 들으면 여러분 바로바로 견성할 글들이에요. 해설이 죽여요. 뽑아 놓은 의도가, 성철 선생님이 “다 이거는

51:00 12지 가서 무심이지 네 따위가 얻을 수 있는 무심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다고요. 선문 정로가. 그런데 저는 반대로 선문정로 가지고 강의해도 돼요. 뽑아 놓은 구절들은 다 우리 식으로 풀면 다 좋은 얘기예요. 단박에 무심하라. 그러면 부처다. 그럼 성철 선생님이 그거 뽑아놓고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봐라. 단박에 무심하면 부처라고 하지 않았냐. 부처는 12지를 말한다.” 뭐가 이상하죠? 교학이 이거 똑같아요. 이분도 현교랑 밀교를 섞어버린 분이에요. 현교의 12지 체계를 선불교라는 밀교의 단박견성 돈오돈수 체계랑 섞어버리니까 돈오돈수 하면 부처라는 말하고 3무량겁 걸려서 도달하는 12지랑을 섞어 버리니까 이야기가 엉망이 된 거예요. 이 얘기는 해야겠어요. 현교랑 밀교를 함부로 섞으면 개판된다. 티벳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조계종이나 다른 모든 종단도 마찬가지예요. 이거 이해되시죠.

52:01 여기까지 이해하시면 정말 잘 따라오신 겁니다. 5분 쉴게요. 5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