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11강
| 진여와 열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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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우파니샤드와 파드마 삼바바의 정광명 |
| 강의일자 | 2023. 07. 15. 土. |
| 게시일자 | 2023. 09. 30. |
| 동영상 길이 | 27:35 |
| 강의 중 인용 도서 | - |
|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hUHFoL-XF4M |
00:06
지금 근래에 존재했던 힌두교 성자의 가르침도 봤지만 그럼 부처님 당시 우파니샤드 사상에서는 이 정광명 자리를 어떻게 얘기했는지 또 살펴볼게요. 그전에 아까 질문이 나와서 이게 9식이면 요게 8식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이게 8식이라는 게 지금 거기 넘버로 보면 1번이 진아죠. 1번이 진아고요. 근데 이 그림이 되게 재밌죠. 우리가 마음속에 상상할 때 저 깊은 방에 들어가 참나 옆에서 자는 거예요. 잘 때는 기어 들어가서. 깨면 바로 튀어나와가지고 참나를 잊고 잘 살고요. 잠잘 때 이게 잠이 지금 7번이 잠이죠. 4번이 무지, 1번이 진아고요. 2번은 그냥 문인데 아까도 여기 점선을 표시해 놨죠.
01:01 근데 여기가 뭐냐 하면 지금 이 8식을 말해요. 이 참나의 빛이 여기를 때리고 있는 걸 말해요. 참나의 빛이 여기까지 미쳤다는 거예요. 그게 이제 8식인데 인도에서는 이 8식에 해당되는 거를 붓디라 그래요. 붓디. 요가수트라 강의 들으시면 나올 거예요. 붓디, 대지성 그럽니다. 위대한 지혜. 그 빛이 여기를 비춤으로써 이 거울에까지 닿으면 거울은 에고예요. 그러니까 5번이 에고고요 5번이 에고고 4번은 지금 무지라고 그랬죠. 무지라는 건요 무의식을 말해요. 무의식, 깊은 무의식의 세계라는 겁니다. 무지, 무명이죠. 무명. 인도식으로 말하면 마야. 마야 속에 빠진다는 거고요. 8번이 꿈이에요. 6번이 오감이고요. 9번이 생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시, 꿈, 잠. 힌두교는 항상 이걸 한 세트로 얘기해요.
02:00 우리 천지인 하듯이 생시 꿈 잠 이렇게 한 세트. 그래서 옴 하면요 옴 하면 여기가 보세요. 진아고요. 옴이라는 글자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옴 진아, 무지가 마야예요. 마야라는 장막이 덮고 있어요. 참나를 덮고 있는 장막이에요. 이걸 뚫고 나오면 깊은 잠, 여기서는 이걸 이제 잠이라고 해요. 잠. 여기는 생시, 요 중간에 이게 꿈. 옴이란 글자가 이렇게 이루어져 있어요. 이해되시죠? 이 옴이라는 글자 안에 이 그림이 또 들어있습니다. 근데 여기서는 이 무지를 저 밖에다 그려놨다면 여기는 무지가 참나를 가리고 있다고 보는 거죠. 참나를 가리고 있는 마야. 이 마야의 영향 속에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잠이 무지 속에 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 밖에 그렸냐 안에 그렸냐 차이지 기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옴까지 아셨으니까 이제 뭐.
03:00 3번이 뭐죠? 대지성. 붓디. 붓디. 대지성, 대지성이라고 합니다. 대지성, 지혜. 이게 아뢰야식의 미묘한 판단을 말해요. 우파니샤드 가볼게요. 정광명이 포인트입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이 정광명, 청정광명이라는 게 기독교 가면 성령이 돼요. 성스러운 영이잖아요. 청정광명에서 모든 곳에서 알아차리는 스스로 현존하는 빛이니까 기독교에서 하나님 이름이 뭐예요? 스스로 현존하는 자, 스스로 빛나는 자 스스로 알아차리는 자가 불교에서 말한 정광명이고 힌두교에서 말한 진아입니다. 힌두교의 신이에요. 힌두교의 신과 기독교 신이 다르지 않아요. 영원히 스스로 빛나는 자예요. 1. 이 도시의 지배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참자아이다. 그의 의식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 이와 같은 참자아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사람은 슬픔의 바다를 건너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세계에 도달한다. 이 도시의 지배자는. 이 도시 그러면 이 세상이죠. 육신과 내가 살아가는 세계.
04:00 이 도시의 지배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참자아이다. 그의 의식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영원히 빛난다. 이게 부처님 가르침하고 달라요? 똑같죠. 이와 같은 참자아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사람. 참자아와 합일된 사람 그럼 이제 삼매에 들어가겠죠. 삼매는 간단합니다. 여러분 적어두세요. 삼매 이코르 참나와 합일. 참나와 합일을 인도에서 삼매라 그래요. 그러니까 무상삼매는 생각이 사라진 삼매고요. 유상삼매는 생각이 아직 있지만 합일된 거예요. 참나랑 합일됐을 때 생각이 아직 남아 있으면 유상삼매 ,생각이 사라졌으면 무상삼매 그러는 겁니다. 2.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을 보는 사람, 자기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 유일한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를 누린다. (정창영 우파니샤드, 무지개다리너머)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을. 여기까지가 진아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의식의 빛. 이걸 보는 사람, 자기
05:00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 유일한 참나를 보는 사람은. 이게 참나라는 거죠. 참나에 대한 정의가 이 스스로 빛나는 순수 의식이에요. 따라서 이게 참나이기 때문에 이걸 무슨 논리로 박살을 내요? 논리로 박살낼 수 있는 건 언어의 세계까지밖에 안 됩니다. 중관파는 그래서 언어의 세계로 모든 걸 끌고 와요. 열반도 무상하다니? 열반도 언어잖아요. 그래서 무상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황하시면 안 돼요. 논리가 너무 다르니까 당황하실 거예요. 열반도 무상하다. 정광명도 무상하대요. 왜? 정광명도 언어잖아요. 다 그러니까 3차원의 존재도 2차원으로 끌고 온 다음에 2차원에서 박살내는 거예요. 다 죽였어. 3차원 없는 걸로. 이런 논리예요. 손가락만 아픕니다. 달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래서 그 유일한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를 누린다. 지복에 들어간다. 이게 다예요. 이걸 그냥 현대적으로 구현한 사람이 마하르쉬예요. 그래서 마하르쉬는 뭐예요? 인간문화재 같은 거죠. 기능
06:00 보유자. 그러니까 이 지복에 들어가서 참나와 합일을 하는 기능 보유자가 있어야 돼요. 글만 있으면 어떡해요? 악보만 있으면 어떡해요? 연주한 사람이 없잖아요. 연주한 사람이 뭐예요? 기능 보유자죠. 요즘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그럼 그 문화재들이 계속 이어와야 돼요. 이 도인들이 하는 역할이 그거예요. 어느 시대나 도인이 있어서요 원하는 사람한테는 그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돼요. 글로는 있으니까. 이걸 지금 시대에 봤어요. 누구한테 가서 이거 가르쳐달라고 하실 거예요. 이거 있는데. 지구의 기능보유자 이런 거 앞으로 둬야 되지 않겠어요? 참나각성 기능보유자. 나중에는 안 헤매도 되죠. 학당 오시면 되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그냥 학당, 동네 학당 가시면 돼요. 그러면 기능 보유자들이 항상 즐비해 있을 겁니다. 어때요?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자명한 거예요. 이 기능이 있냐 없냐? 이 기술 할 줄 아냐 모르냐? 모르는데 막 또 참나 기능 보유자 찾아갔더니 참나란 없다. 막 이런 개소리 하고 있으면 들을 말이 아닌 거잖아요.
07:00 나오면 돼요. 아무튼 방금 읽은 우파니샤드 이 내용은 정창영 씨가 번역한 우파니샤드. 무지개다리너머에서 나온 그 책인데요. 이 책이 참 읽기 편하고 좋아요. 우파니샤드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보시고요. 그다음. *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길 : 파드마 삼바바(연화생蓮花生)은 8세기 인도 파키스탄 왕족 출신의 밀종의 대사. 시간이 좀 남아서 파드마 삼바바. 연화생(蓮花生)이라고 하는데요. 그 옴 마니 반메 훔 할 때 반메가 파드마거든요. 그러니까 연꽃, 연꽃생, 연꽃에서 태어나셨다고 연화생이라고 하는 그 파드마 삼바바 티벳불교에 거의 뭐 시조격이죠. 닝마파의 조사고 티벳에서 초창기 때 티벳에 밀교를 전하신 파드마 삼바바, 밀종대사고 파키스탄 왕족 출신입니다. 8세기 때. 이분이 이제 글 이름이 길어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길.” 제목이 기니까 그냥 참나 각성 비결 같은 거예요. 참나 각성 비결.
08:00 한번 볼까요? 이분이 얘기한 게 얼마나 또 정광명 사상을 왜 그대로 잇고 있는지? 여기서 주목해야 될 건 여러분 지금 석가모니가 정광명을 주장했다. 볼 수 없고 무한하고 영원히 빛나는 순수 의식을 주장했다. 우파니샤드도 똑같았다. 석가모니 우파니샤드 스승으로부터 공부했다. 거기에 대해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 순수한 의식의 빛에 대해서 비판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장하셨다. 그게 이제 부처님 언어로는 열반이었다. 이게 불교의 핵이다 입니다. 진여와 열광 참되면서 영원한 자리가 정광명 말고 뭐가 있겠어요? 진여와 열반. 탐진치 없는 자리가 그 자리 말고 뭐가 있겠어요? 실제로 석가모니가 설명할 때, 정광명의 그 순수 의식을 설명할 때 뭐라고 하셨어요? 그 자리에는 지수화풍도 5온도 설 수 없다. 탐진치가 설 수 없다는 얘기를 하신 거예요. 여기까지 보셨으면불교의 핵은 정광명입니다. 정광명을 부정하면
09:00 다 불교가 아닌 거고요. 근본적으로 이제 불교 견성 해탈할 수 없는 겁니다. 견성도 해탈도 성불도 불가능한 거예요. 여기까지 아시면 이 사상이 힌두교 인도에서 태어나서 이제 티벳에서 도를 전하신 파드마 삼바바 안에서 “티벳 사자의 서”로 유명한 파드마 삼바바 안에서 어떻게 녹아 있는가를 보시면 되게 원초적인 언어로 이미 설명이 다 돼 있어요. 우리가 지금 궁금해 하는 거.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 정광명의 존재 여부, 그게 참나냐 아니냐? 이 모든 게 다 해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보려는 거예요. 보세요. 1. 이 ‘각성’(깨달아 알아차리는 본성)이 바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투명한 비어있음’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비어있음’이다. 이 상태는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윤회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각성, 이 깨달아 알아차리는 본성. 정광명 자리에요. 이 각성이 바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투명한 비어있음이며 그러니까 이 각성이, 이 알아차리는 의식이 고정된 실체, 그 안에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기 때문에 뭐라고 해요? 이 고정된 실체에 빠져가지고요, 언어 놀음에 빠져서 “이 자리는 결국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상한 자리다”라고 주장하면 안 돼요.
10:01 이거는 일체가 텅 비어있다는 얘기예요. 어떤 존재도 그 안에는 없다. 텅 비어있는 투명한 비어있음이다. 즉 투명한 비어있음이 뭘 해요? 알아차리고 있대요. 투명한 비어있는 게 알아차리고 있대요. 공적 영지를 얘기한 겁니다. 이 공적 영지, 각성이 바로, 즉 정광명이 바로 텅 비어있는 공이래요. 정광명이 공이래요. 이게 핵입니다. 최근에 제가 라이브 방송할 때도 질문이 중관파에서 말하는 중관파의 논리랑 우리 참나 각성의 논리랑 뭐가 다르나요? 그 같은 공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뭐가 다르나요? 중관파에서 말한 공은요 언어의 세계가 헛되고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그 공만 얘기해요. 그 이상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공은 그냥 실체가 없다는 그 진리일 뿐이에요. 그걸 알아채는 의식이 정광명이에요. 그런데 석가모니의 본 가르침은 뭐라고요? 정광명이
11:00 공이에요. 정광명이 텅 비어있다는 거예요. 정광명은 어떤 이원성도 없거든요. 이 안에는 어떤 이원성도 없다는 거예요. 정광명이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광명이라는 게 텅 비어있는 공이라는 거예요. 이 얘기랑 언어의 세계, 즉 달이 정광명이면, 이 달이 공하다는 얘기랑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조져가지고 여기에는 어떤 실체도 없다는 걸 주장한 공과의 차이입니다. 뭔가 다르죠? “달이 원래 공한 거야. 정광명이 공한 거야. 참나가 공한 거야. 참나라는 언어가 공한 거야.” 이 차이에요. 아시겠죠? 자 이 투명한 비어있음. 이게 공적영지고 정광명인데요. 이원성이 사라진. 이미 이원성이란 말을 하시네요.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비어있음이다. 이게 정광명이 각성이 공하다니까 이겁니다. 그 실체를 놓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 상태는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형태로
12:00 한정지을 수가 없다. 이게 무한하다. 또 뭐냐? 무형이다 이거죠. 석가모니 말하고 지금 그대로 통하죠.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 여기서 말한 영속적인 거 아니면 무한하지 않다는 얘기인가요? 그게 아니라 어떤 고유한 형태로서 영원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얘기는 시간성을 초월해 있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시간성을 초월해 있다. 그러니까 시간 안에서 어떤 고유한 형태를 지니고 영원히 버티는 게 아니라고요. 시공 밖에 있다는 얘기하는 거예요. 윤회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시간대 공간대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그렇다고 진짜 텅 비어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 밝고 선명하고 자명하다. 어떠세요? 이 이상. 그럼 이게 논리적으로 지금 말이 되는 말 같으세요? 하지만 알고 보면 다 뭐예요? 설명 잘하네. 설명 맛집이네. 이래요. 그럼 체험은 안 해보고 논리로만 접근하는 중관파가 볼 때는 전체가 말이 엉터리죠.
13:00 두 번째 보세요. 2. ‘비어있음’은 이 마음의 진정한 본성이다. 그대의 마음은 ‘텅 빈 공간’처럼 실체가 없다. 비어있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밝은 투명한 지혜로 ‘충만한 비어있음’이다. 비어있음은, 텅 비어있음은 이 마음의 진정한 본성이다. 그대의 마음은 텅 빈 공간처럼 실체가 없다. 그런데 비어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니다. 또 시작이네 하는 거죠. 또 시작이네. 하나만 얘기해라 제발. 뭐냐 이게. 그래서 논리학은 A면 A지 A인데 B로다. 뭐 이러면 어쩌라는 거예요. 그대의 마음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밝은 투명한 지혜로 충만한 비어있음이다. 어떠세요? 충만한 비어있음 나왔습니다. 이게 체험 안 하면 다 개소리 같다 이겁니다. 근데 설명 참 잘하죠. 이게 그래서 파드마 삼바바가 티벳 불교의 아주 시조입니다. 특히 닝마파, 제가 자주 거론하는 닝마파의 시조예요. 세 번째. 3.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어떤 형태에도 구속되지 않는 ‘비어있는 투명한 빛’이다. 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밝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상상해 보세요. 구름 한 점 없는데 태양이 광명해요. 어떤 형태에도 구속되지 않는 비어있는 투명한 빛이다.
14:01 이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순수한 알아차림 자체가 텅 비어있는 투명한, 자명한 빛이라는 겁니다. 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밝다. 광명하다.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곳에서 밝다고 했죠? 지금 석가모니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밖에 아니지 않아요? 그런데 우파니샤드랑도 그대로 이어지죠. 묘하죠? 네 번째. 4. ‘각성’(깨달아 알아차림)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투명한 빛’이다. ‘각성’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니 놀랍지 아니한가?10) ‘각성’이 만들어 내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지혜’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태어나지도 않고 따라서 죽지도 아니한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각성, 깨달아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각성 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영속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의 본질은 뭐예요? 생겨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생겨났는데 오래 버티는 게 아니고 생겨난 적이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시공 밖에 있거든요. 스스로 존재하는 투명한 빛이다. 이거 하느님이에요. 지금 이 말은. 스스로 현존하는 자. 이 스스로 존재하는 투명한 빛 말고 뭐가 스스로 현존할 수 있을까요? 각성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니 놀랍지 아니한가? 예수님은 “그 엄마가 낳지 않은 존재를 보면 절하라
1501 아버지시다” 했죠. 같은 얘기입니다. 태어난 적이 없다는 얘기예요. 각성이 부모 없는 자식이라니. “아 고아구나” 이러시면 안 돼요. 태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부모가 널 낳기 전에 넌 어떤 자리였냐 할 때 그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말했죠. 밑에. 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그대들의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하라. 바로 그 사람이 그대들의 ‘아버지’이시다.”라고 하셨다. (도마복음 15절)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경배하라 아버지시다. 똑같죠? 이 각성이 만들어내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지혜라니. 피조물이 아니에요. 지금 피조물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건 뭐예요? 오히려 창조하는 주체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게 닝마파의 핵심이에요. 태어나지도 않고 따라서 죽지도 아니한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생멸이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생멸이 없는 지혜. 이러니까 달라이라마 같은 분들도 이제 이런 거 닝마파 쪽 강의를 하면요 접고 들어가요. 닝마파는 우리 중관파랑은 다르지만 이 정광명이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16:00 진리를 알아채는 무상한 의식일 뿐이라고 정광명을 생각하지만 닝마파는 정광명이 그대로 진리라고 한다. 이거 정확한 분석을 뒤에 교재에 다 준비돼 있습니다. 진여와 열반 진도 나가면. 지금 시대의 흐름을 지금 왔다 갔다 한 것 같지만 일단 석가모니의 정광명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좀 붙였고요. 틸로파(Tilopa, 988–1069)까지. 이후는 이제 불경의 역사를 반야경부터 해서 시간적 흐름 따라 쭉 갈 거예요. 거기 가다 보면 이제 다 나옵니다. 중관파가 공종(空宗)이죠. 공을 강조하는 파와 상종(相宗) 유식파 일체 만물을 8식부터 저기 5식 이렇게 해서 설명하는 그 파들 간에 이제 충돌을 설명할 때 제가 다 설명 드릴게요. 5. 마음은 ‘투명한 지성’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에 비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마음은 ‘비어있으면서 투명한 지성’으로 충만하다. ‘비어있음’과 ‘투명한 지성’은 분리할 수 없다. 마음은 투명한 지성으로 빛나고 있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투명하다는 거는 자명하다고 이해하시면 좋아요. 자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뭐래요? 비어있다고 할 수도 없다.
17:00 그래서 마음은 비어있으면서 투명한 지성으로 충만하다. 여기도 지성이란 말 나왔죠? 아는 속성을 말합니다. 알아차리는 속성. 비어있음과 투명한 지성은 분리할 수 없다. 공적과 영지죠. 공성과 영지는 분리할 수 없다. 이게 다 이상한 말이라고요. 영지는 영원히 알아차려야 되잖아요. 그럼 영원히 알아차린 존재를 상정해버리면 중관파 논리가 깨져요. 중관파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알아차림 의식 또한 무상하다고 얘기를 해야 됩니다. 근데 무상한데 이 경전 상에서 영원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무상한데 변화하면서 영원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타협책으로 제안하는 게 이 정광명을 중관파 쪽에서는, 그러니까 어떻게든 수용하려고. 원래 용수보살은 말도 안 해요. 그냥 언어의 세계만 박살내고 끝내버립니다. 그런데 티벳 불교 중에 이렇게 밀교파들은 계속 정광명을 얘기하니까 참나 얘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실제로 티벳은요 이론 불교,
18:00 현교에서는 중관파를 중시하는데 밀교는 참나 얘기밖에 없어요. 이 두 개를 어떻게든 타협을 시켜야 되니까 달라이라마가 주장하는 게 의식 연속체라고 주장합니다. 연속체 즉 생멸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너무 미세하게 생멸하고 있는데 그대로 영원하다는 거예요. 왜냐? 보세요. 간단합니다. 부처님이 중관파건 밀교건 지금 부처님이 존재하셔야 돼요 존재하시면 안 돼요. 존재하셔야 되죠. 그럼 부처님 의식은 정광명해야겠어요? 아니면 다른 중생심이 있을까요? 정광명해야 돼요. 부처님 의식은 정광명해야 돼요. 부처님 의식은 지금도 현존해야 됩니다. 근데 영원불변이라고 해버리면 힌두교 참나론이 돼버리니까 미세하게 생멸하면서 영원히 가고 있다고 주장해야 돼요. 미세하게 생멸하면서 계속 일체만법이 공하다는 진리를 알아차리면서. 알아차리긴 해야 되잖아요?
19:00 진리를 알고 있어야 되잖아요? 부처님이 모르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정광명을 끝없이 알아차리는 의식으로서의 연기적, 생멸하는 의식 연속체로서 설명합니다. 이해되세요? 그럼 그게 일종의 뭐냐면 이게 아뢰야식, 8식이 그래요. 8식. 8식이 우리의 모든 업보를 알아차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카르마 짓는 걸 다 알아차리면서 반응해줘야 되죠. 근데 영원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폭포수처럼 흐르면서 영원하다 그래요. 그게 연기적 의식 연속체거든요. 8식. 그 설명법을 정광명에 도입해가지고 달라이라마는 저렇게 주장합니다. 정광명은 미세하게 생멸하면서 영원하니까 한편으로는 시공을 초월했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무상하다고 한다. 억지죠. 시공을 초월했는데 생멸하면 안 되거든요. 지금 파드마 삼바바에서는 없는 논리예요. 생멸하거나 말거나만 있지 생멸하면서 영원하다는 논리가 없죠. 달라이라마의 고육지책입니다. 왜? 아니 4대 문파를 다 회통해야 되는데
20:01 안에서 싸움이 나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갖다 붙여준 거예요. 따라서 우리 중관파랑은 분명히 입장이 다르지만 어떻게든 닝마파도 진리라는 거, 밀교도 진리라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해서 같이 가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용수보살의 주장이 아니에요. 중관파의 입장이라는 거예요. 용수는 애초에 언어로 다 박살내고 끝내 저런 정광명의 세계에 대해서는 더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용수보살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그 보왕론 같은 거,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그런 데서 똑같이 우리가 주장한 지금 의식이 무한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는 내용은 인용은 해요. 용수보살의 저작으로 알려진 저서에서 그래도 우리가 얘기한 부처님 정광명 주장이 인용은 돼요. 그런데 더 자세한 설명은 붙지 않습니다. 부처님 말씀으로 인용은 돼요. 용수보살이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는 알기 어렵죠. 그리고 심지어 그 작품은 이제 위작으로
21:00 보거든요. 용수의 직접 저작으로는 안 봅니다. 다만 용수의 사상의 전개 속에서 이루어지니까 광의의 용수의 사상으로 볼 수 있죠. 그래서 거기에서 더 발전시켜서 연기적 의식 연속체로 보는 입장까지 주장합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안 해요. 왜 저게 영혼 불멸하다고 해버리면 논리가 깨져요. 중관의 논리가 깨져요. 무슨 대학원 과정에서도 안 할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제가 지금 잘하고 있나 걱정은 되는데. 뭔 짓거리인지 우리가 토요일 날 놀자고 모여서 너무 깊이 들어간 기분이 있어요. 저도 그거 다 느낍니다. 그래서 6번 볼까요? 6.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실체’라고 부르고, 어떤 보수적인 사람들은 ‘참자아’라고 부른다. 성문聲聞들은 ‘무아’라고 부르며, 관념론자들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초월적 지혜’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불성’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마하무드라’(大印)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에너지 초점(빈두)’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진리의 영역’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토대’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평상심’이라고 부른다. (정창영, 티벳 사자의 서, 시공사)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이제 재밌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 정광명을, 공적영지를 마음의 실체라고 부르고. 모든 문파를요 파드마 삼바바가 껴안아버립니다. 어떤 보수적인 사람들은 참자아라고 부른다. 이거 힌두교 사람들이죠. 파드마 삼바바는 참자아도 인정했어요. 참나 가능.
22:01 성문들은. 부처님 육성 듣고 공부했던 소승 성문들은 무아라고 부르며 이 자리를 무아라고 부르며 무아도 지금 참나다고 주장한 겁니다. 관념론자들은 마음이라고 그냥 마음이라고도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초월적 지혜, 시공을 초월한 지혜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들은 불성, 부처의 성품이라고도 부르며 알아차리는 성품이 그대로 부처의 성품이다. 부처는 각자(覺者)거든요. 알아차리는 존재가 부처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마하무드라, 대인(大印)이라는 건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진리의 도장이라는 겁니다. 우주가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도장이에요. 그럼 그게 법신이고 참나죠. 어떤 사람은 영적 에너지 초점, 빈두라고 부르고 여기서 빈두는요 정액입니다. 근데 밀교에서는요 정액을 보리심이라고 불러요. 이 정액이라는 거는 남자의 정액 하얀 정액과, 하얀 정액이 여기 있고요. 여자의 정액,
23:00 붉은 정액이, 피에 해당되는 정수와 피에 해당되는 게 사람, 한 사람 몸에도 또 다 있다고 봐요. 이게 이제 용호(龍虎)입니다. 티벳 밀교는 이 두 개가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승강을 하다가 이 하얀 백보리심 적보리심이 합쳐지면 원기, 근원적 보리심이 각성이 돼가지고 우리 도교식으로 말하면 참나 원신과 근원 에너지 원기가 딱 합일되듯이 쿤달리니와 참나가 합일되듯이 이게 하나로 합해진다 그래요. 이게 이제 밀교 수행법이에요. 나중에 또 제가 얘기해드릴게요. 필요할 때. 그러니까 보리심이라고도 불러요. 그러니까 그거를 갖다 참나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거예요. 영적 빈두. 빈두가 정액이라는 뜻이에요. 참나를 되게 물질적 원기(元氣) 차원에서 보는 거죠. 엄밀히 말하면 빈도는 원정(元精)이죠. 정기신(精氣神) 중에 액체 형태의 근원 에너지 원정, 기체
24:00 형태의 근원 에너지 원기, 의식 형태의 근원 원신(元神), 이렇게 정기신의 근원을 의미할 때 말하는 건데 밀교 쪽에서는 정기(精氣)를 중시해서 이렇게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의 영역이라고 부르고. 법계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법계, 참나를 법계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만물의 토대라고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여긴 선불교 쪽입니다. 평상심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선불교도 이미 거기 그 당시에 교류 했어요. 교류를 했단 말이에요. 평상심까지 수용합니다. 그러니까 다 수용한 거예요. 불교 전반의 모든 걸 힌두교까지 다 수용해서 파드마 삼바바는 통 크게 공적영지라고 주장했어요. 이런 걸 공부해야죠. 안 그러세요? 이걸 공부하시면 여러분이 헤매시겠어요? 힌두교랑 싸우는데 목숨을 거시겠어요? 참나 각성해가지고 빨리 기본값 바꿔서 위대한 보살도를 닦는 데 초점을 두시겠죠. 이게 차이입니다. 올바른 불법이라는 거는
25:01 우리 안에 있는 보리심, 정광명이 그대로 보리심이에요. 정광명 안에 왜 보리심이냐? 정광명을 제대로 깨닫고 나면 공적영지, 공인데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한 점이 알아차리고 있는데 더 들어가 보면 육바라밀의 진리가 꽉 차 있단 말이에요. 거기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꽉 차 있으니까 지혜와 방편, 지혜와 자비가 꽉 차 있는 자리예요. 그래서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이라는 건 지혜와 자비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 의식 안에 지혜와 자비가 꽉 차 있다는 거예요. 정광명이 텅 비어서 알아차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진리가 꽉 차 있기 때문에 진리가 있다고 해서 만법이 갖춰진 몸이라고 법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의 몸. 그래서 이 자리가 그대로 법계, 진리의 세계가 되고 진리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리심이 그대로, 정광명이 그대로 뭐예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돼요.
26:00 보살이 걸어야 할 길, 보살도가 정광명 안에 보리심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여러분은 보리심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돼요. 보리심이 자명하다면 하고 찜찜하다면 하지 않으시면 돼요. 이게 다예요. 이게 유교에서 뭐라고 그래요 치양지(致良知). 양지가 하라면 하고 양지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이거 말고는 유교가 없다. 불교 보리심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이거 말고 불교가 없다. 성령이 까라면 까고 하지 마라면 하지 마라. 기독교는 이거 말고 없다. 끝. 유불기 합일 다 됐죠. 포스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마라면 하지 마라. 제다이까지. 끝. 근데 이 포스가 기(氣)거든요. 따라서 유불선 합일도 됩니다. 포스가 기거든요. 기가 하라면 하고 기가 하지 마라면 하지 마라. 원기가 쿤달리니요 포스인 겁니다. 불멸의 에너지를 말해요. 그 에너지가 이미 진리 덩어리라 그 에너지가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론자들이 볼 때는
27:00 에너지가 우리를 인도해요. 성령론자가 보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요. 마음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보리심이 우리를 인도해요. 양심이 우리를 인도해요. 이것만 다른 거예요. 근원적으로는 다 같습니다.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2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