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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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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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석가와 2명의 브라만교 스승
강의일자 2023. 07. 15. 土.
게시일자 2023. 09. 16.
동영상 길이 59:24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5NN2t_7-kDk




00:08 오늘은 진여와 열반 중에서 오늘은 힌두교 탐방입니다. 힌두교 공부 좀 해볼까요? 힌두교. 부처님과 힌두교의 관계. 근데 우파니샤드까지 있죠. 라마나 마하리시 우파니샤드까지 해가지고 힌두교 오늘 좀 찐하게 한번 파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할려고 했던 얘기가 인간세계에 사바세계에 산다는 게 힘들거든요. 하루하루 저도 내일을 생각하면 힘들어서 일일일생을 주장하는 거예요. 일일일생의 핵심은요, “오늘 고민만 하자”는 거예요. “내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 내일의 나 엿먹어봐라 하고 오늘 뭐 큰일을 저지르실 그럴 분은 안 계실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거예요. 내일은

01:00 내일의 나한테 맡기면서. 한 생의 고민도 그러니까 오늘 하루의 고민도 우리가 다 감당 못하는데 내일 모레 오지 않은 것까지 고민하시면 죽어요. 못 살아요. 그래서 저희가 역지사지를 강조하지만 특히 너무 역지사지하고 너무 공감을 하시면요 한 개체는 못 살아요. 탐진치가 필요한 이유가 치(癡), 어리석음이 필요해요. 내 입장을 최우선시하잖아요. 모든 중생이 자체가 치(癡)잖아요. 그럼 이걸 버리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이걸 버리려면 몰라를 하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몰라라든가 역지사지라든가. 즉 ① 몰라 하고 내 입장을 내려놓든가. 아니면 ② 남의 입장도 내 입장과 똑같다 하면서 남의 입장까지 존중해 주든가. 두 방식의 해결책이 있겠죠. 나를 내려놓고 확장시키려면, 남까지 나로 여기든가 나라는 것도 내려놓든가? 두 방법을 다 써야 돼요. 몰라 괜찮아 해가지고 나를 내려놓고요. 또 자명 해가지고

02:00 자명은 사랑이니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자명한 진리 안에서 또 남을 보듬어줘야 되거든요. 남을 이해해줘야 되거든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지만, 이거를 잘 적절히 써서 너무 내 에고가 상처 입지 않게 잘 돌봐야 됩니다. 내가 포기해 버리면 내 에고는 누가 돌보는데요? 남의 입장을 헤아리다가 내 에고를 포기할 수는 없다구요. 그래서 나와 남이, 역지사지라는 건 나와 남이 같이 잘 살려고 하는 거죠. 같이 살맛나자고 하는 거니까 이 본질을 놓치고요. 티벳 불교 얘기하다가 생각난 거는, 티벳 불교는 이타주의입니다. 무조건 나를 버리고 남한테 맞추라고만 해요. 그럴 리가 없죠. 알고 보면 린포체들 계속 성추문 터지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론하고 실제랑 안 맞다고요. 그러니까 이론에만 도취해 가지고 티벳 불교 이타주의 짱. 근데 왜 우리가 그걸 좋아하는지 아세요? 아름답거든요.

03:00 왜? 어차피 내가 안 할 거거든요. “린포체들 우리가 공양해 줄 테니 니들이나 하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돼요. 내가 할 게 아닌 게 돼요. 왜? 이타주의를 어떻게 해요? 기본값이 다른데? 우린 탐진치 기본값이에요. 치가 기본이라 내가 제일 중하다구요. 곧 내 입장밖에 몰라요. 사실 죽을 때까지 내 입장밖에 몰라요. 죽기 전에 아마 가족하고 허심탄회한 대화 나눠보면 “내가 누구랑 살았지?” 할 걸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세계관 속에 살고 있을 수도 있어요. 평생 좋아한다고 사과 사다 줬더니, 죽기 전에 “사실 나 사과 싫어했어.” “그러면 뭘 한 거지 난.” 소통이 안 되면요. 왜냐면, 실제로 우린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게 이상한 게 아니라 실제로 지금 그럽니다. 집에 가서 가족 분들하고 대화 나눠보세요. 아마 모르던 사실들이 많이 드러날 거예요. 왜? 난 내 입장만 알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내 입장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그거를 뭐라고 할 수가 없죠. 탐진치 베이스에서 최선을 다한 거죠.

04:00 이타주의 이타주의 하는 것은 워낙 이기주의만 베이스에 깔려 있으니까 이타도 해보라는 거지, 방편이지, 공식적인 정법은요, “나와 남을 동등하게 사랑하라” 예요. 자타불이,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리이타예요. “너부터 행복하게 하면서 남도 행복하게 해라.” 왜? 너가 행복해봐야 “아 살맛난다.” 해야 “남도 얼마나 살맛나고 싶을까” 그래서 도와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하고 남을 도와준다는 건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내가 살맛나고 싶은데 나는 죽여요. “야 인욕, 보살이 인욕. 넌 좀 고행해.” 남한테는 되게 잘해주겠대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 변태들이 접근해 오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꼭 자꾸 여러분한테 살을 베어주려고 하고. “배고프세요? 살 좀 뜯어줄까요?” 아니 뭐가 이상하죠? 잘못돼 있어요. 공식에 위배된 것들은 반드시 부작용이나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이미

05:00 탐진치에 빠져가지고 6도를 윤회하는데 이미 부작용 아닙니까? 여기서 강한 약을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이 더 6도를 꼬이게 만듭니다. 맞는 말 같죠? 6도만 더 꼬여요. 그래서 린포체니 뭐니 활불(活佛)이니 해가지고 부처인 양, 심지어 린포체들 태어나면 그러니까 공부도 견성도 안 시킨다니까요. 린포체들은 어떻게 양성되냐면요 강사로만 양성돼요. 강사로만. 영어부터 배워요. 세계를 돌면서 후원금 모아 와야 되거든요. 영업을 해야 돼요. 영업맨들이에요. 일류 영업맨들을 키워내요. 거기에 견성 이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러고 있을 시간도 없는 거예요. 딱 찍어내듯이 교학으로 키워내거든요. 그래서 심지어 자기들이 뭐라 하냐면 “달라이라마 가도 달라이라마 찍어낼 수 있다.” 그래요. 자기들은 찍어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교학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년이면 달라이라마 찍어낼 수 있다. 이게 뭔 말이냐면 불법에 대해서 뭐가 단단히 잘못돼 있다는 겁니다.

06:01 교학으로 가면 바리새파밖에 안 나옵니다. 이론과 교리와 계율에 밝은 바리새파만 나와요. 심법을 배운 게 없잖아요. 달라이라마가 심법을 안 배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그런 식으로 찍어내면 그런 린포체, 그런 달라이라마밖에 안 나온다. 따로 배워야겠죠. 거기도 따로 배우죠. 그런데 핵심이 교학에 있다 보니까 심지어 린포체들은요 견성도 무시하고. 왜? 키워내기도 바쁘단 말이에요. 누가 물어봐도 쫙. 중간에 교학에 밝은 이 강사를 만들어내는 데 전념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 해결이 안 되냐? 기본값이 안 바뀝니다. 견성을 안 하시면 기본값이 안 바뀝니다. 기본값이 안 바뀐 상태에서, 그럼 탐진치 베이스라는 거예요. 기본값이 탐진치예요. 안 바뀌었다는 거예요. 린포체가 태어나고 부처가 태어나도 태어나서 공부 안 하면 기본값은요 탐진치예요. 견성해야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태어날 때 견성해서 오든가. 둘 중에 하나예요. 와서 견성 안 됐으면

07:01 견성하든가. 안 하면 기본값 탐진치고. 기본값이 육바라밀이 아니에요. 육바라밀이 아닌데 기본값이 아닌데 “이타주의로 가라”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리새파가 나와요. 계속 이타적인 양 굴어야 돼요. 이타적인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보살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으면 더더더 교리와 계율에만 얽매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롤 모델로 삼고 따라갈 수 있겠어요? 안 따라가요. 여러분 실제로 그래서 공양하고 복 빌고 끝인 거예요. “아이고 사람이 저렇게 어떻게 살아?” 뭘 빌어요? 나의 성공을, 그 사람들한테. 서로 기본값이 다른데. 그 사람들은 그럼 기본값이 다르냐는 거죠? 다른 것처럼 구는데 똑같단 말이에요. 똑같은 사람을 머리 깎아서 앉혀놓고 지금 이렇게 역할놀이를 하는 거예요. 설정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너는 기본값 바뀐 것처럼 굴어라”는 거죠.

08:01 그럼 바뀌었겠어요? 지금 성직자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안 바뀌었거든요.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성직자여야 해요. 서로 힘들어요. 그게 바리새파들을 만드는 거고. 자 그게 우리의 고뇌 해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된단 말이에요. 실존적 고뇌는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되는 건 출가건 재가건 탐진치 기본값입니다. 견성해서 육바라밀을 자기 기본값으로 알고 그 경전 매뉴얼대로 사는, 견성한 뒤에, 견성한 뒤에 기본값이 바뀐 뒤에, 새 기본값에 맞춰 살아가는 방법이 써 있는 글이 경전인데, 기본값이 탐진치인데 경전을 들입다 주입식으로 부으면 뭐가 나오겠냐고요? 그러면 또 다른 괴물이 나와요. 그럴싸한 괴물이 나와요. 그래서 이 사람들도, 그러면 왜 린포체들이 그런 많은 성 문제 일으키고 다니느냐? 티벳의 서열 넘버2라는 양반들까지 다 고소당하고 난리가 일어난단 말이에요. 뭔 일이냐?

09:01 기본값이 안 바뀌어 있는데, 지금 성인 군자 보살 노릇을 해야 되잖아요? 오히려 그분들의 고뇌를 여러분들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나라면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역지사지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역지사지라는 건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탐진치의 기본값을 갖춘 똑같은 실존 속에서 살아간다는 역지사지입니다. 여기서 너무 역지사지를 해도 안 되는 이유가요 내 탐진치가 있는데 그 이상을 하라 그러면요 이러면 사기(詐欺)를 치게 돼 있고 위선을 떨게 돼 있다니까요. 모든 사람 아픔에 공감하려고 하는 착한 사람 병에 빠져요. 그래야 될 것 같죠? 근데 그 공감이 도움이 될까요? 실제로 여러분 넘어져서 아파 죽겠는데 옆에서 다 “어째? 너 아픔이 내 아픔 같애.” 아무도 119도 신고를 안 하고 있어요. 죽어 가는데 싸가지 없는 놈이라도요 119 신고하는 놈이 제일 고마워요. 이 얘기는 뭐냐? 그럼 공감이 잘못됐다는 거냐? 아니에요. 공감은

10:00 분명히 양심의 발현입니다만 탐진치가 기본값이다 보니까 발현되다가 말았다는 거예요. 공감이 발현되다가 말면요 오히려 이게 어떻게 되냐면 더 독이 돼서요, 발현되다만 어설픈 양심은 에고를 더 에고 놀음에 빠져서, 탐진치가 기본값이니까 에고 놀음 속에서 자기 위안에 빠져요. 자기에게 감동합니다. 남에게 공감하는 나한테 감동하고. 아니면 또 남의 아픔을 공감하다 지가 그냥 아파요. 남도 도움이 안 되고 지만 아파요. 이에 대해서 남의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자기만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이 탐진치를 다룬다는 게 장난이 아니에요. 이런 무슨 경전 갖고 와서, 교재 갖고 와서 자 읽으면 다 아름다운 말이에요. 단 기본값이 육바라밀일 때는 아름다운 말이에요. 탐진치인 사람들한테 이걸 읽어주는 건 아름답게 즐길 수는 있지만 이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말은 아니에요. 그거는 침팬지들 앉혀놓고 인간의

11:00 언어 얘기해주는 거예요. 경전, “인간은 이렇게 산단다.” “우와 죽이네요. 전 언제 바지입죠?” 이런 거죠.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가 돼 버려요, 그래서 경전을 즐기시는 데만 빠지시다 보면 비슷합니다. 제 강의 즐기는 분들도 다른 데 말할 게 아니에요. 제 강의만 재미있는 분이 있을 거예요. “어쩜 이렇게 강의가 재미있을까. 근데 왜 내가 힘들 때 아무 도움이 안 될까?” 기본값이 안 바뀌니까. 탐진치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인데 탐진치가 조금도 제어되지 않으면 이게 문제는 똑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제 노파심에 경전, 제 강의나 경전 공부 다 좋은데 모든 기본, 모름지기 이 경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새로운 기본값을 가지고 새 사람 되는 법을 써놓은 겁니다. 새 사람 되는. “기본값이 바뀌셨죠? 이제 견성하고 나니까 내면에서 양심이 솟구치고

12:01 육바라밀이 솟구치는 게 느껴지시죠? 자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봅시다.” 이 책, 이게 경전이에요. 모든 경전, 십계명마저도 다. 그래서 율법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뭐예요? 뭐 거기도 허례허식이 많겠죠? 그런 율법은 문제겠지만, 양심적으로 살으라는 율법은 문제가 안 되겠죠? 그런 율법은 못 바꾸겠죠? 예수님도 그런 거는 일점일획도 못 바꾼다 하는 게 그거예요. 그런데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인정한 게 아닙니다. 선배들이 마구잡이로 만들어 놓은 전통에 대해선 부정해요. 그래서 안식일 날 그냥 일해 버리는 거예요. 안식일날 일하지 말라고 선배들이, 인간의 탐진치가 만든 율법은 거부한다고요. 하느님이 양심을 대변해서 주신 율법은 인정하는 겁니다. 똑같아요. 모든 율법을 인정하지만 율법이 답이 안 되는 거는 기본값이 안 바뀌었으니까. 기독교식으로 성령 안 받았으면 안 나와요. 성화가 안 돼요. 불교식으론 견성 못 했으면 육바라밀 못해요. 견성 못 했으면 바라밀이라고 붙일 수도 없어요.

13:02 견성 못 했으면 유사 바라밀이지 진짜 바라밀이라고도 못 해요. 이 정도로 달라진다는 걸 좀 아시고 내 실존적 고뇌를 해결하려면 견성해야 된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은 거예요. 기본값이 바뀌었는지 먼저 보세요. 자 내가 지금 힘들어 죽겠어요. 뭐 온갖 뭐 시련이건 뭐 아픔 뭐 지옥 같은 나날을 살고 계시다. 그럼 탐진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탐진치를 버릴 거냐? 못 버립니다. 그럼 승화시킬 거냐? 이타주의로 갈까? 봉사를 다니기 시작하세요. 봉사도 하루 이틀이지 기분 신날 때는 잠깐이고 이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할 거예요. 기본값이 그대로니까 일어난 일이에요. 육바라밀이 터져 나와서 하는 봉사는 죽을 때까지 해도 그건 지치지 않습니다. 에고는 지쳐요. 오해하지 마세요. 에고는 지쳐요. 그런데 내면에서 지치지 않는 힘이 올라오니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면에서 올라오는 기본값의 그 에너지와 명령이 없는 양반은

14:00 탐진치로 하다가는 착한 사람 병 빠져 가지고, 착한 척 어느 정도 하다가는 이제 힘들어집니다. 그때쯤 뭐예요? 다 짜증나요. 다 나를 죽이려고 덤비는 애들 같고, 에고 입장은 그렇게 돼요. 우울해져요. 욕망이 좌절되면 우울해지다가 나중에 어떻게 돼요? 분노에 빠져요. 탐진(貪嗔), 탐(貪)이 좌절되면 우울해지고, 슬프다가 진(嗔), 이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증오를 하게 되고 나 외의 모두와 싸우게 됩니다. 다 나를 죽이려고 덤비는 것들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탐욕이, 욕망이 좌절되면 우울해지다가 점점 타오르게 된다. 그러다가 진짜 더 깊고 깊은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들 수 있죠. 분노가 더 해결이 안 되다 보면 점점 더 슬퍼지다가 또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탐진치만 우리가 알아도요 우리 실존의 고뇌들을 이해하기 좋고. 단

15:00 탐진치를 극복하려면 탐진치로 안 된다는 거. 탐진치로 해결하려고 하니까 안 되더라. 그래서 그냥 이타주의로 해결하느냐? 안 되더라. 그래서 지금 티벳 불교에서 보살되려면, “보살은 뭐가 다릅니까?” “이타주의자다. 무조건 하루 종일 남 위할 생각만 한다.” 그건 신종변태입니다. 그런 사람들 피하세요. “나는 하루 종일 남을 위할 생각만 해요.” 그거를 에고가 즐기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미치게 즐기고 있는 거예요. 누가 여기를 이걸 깨려고 하면 난리 날 겁니다. 왜? 육바라밀에서 올라온 게 아니에요. 남을 위한다는 것도 내려놓으세요. 그런 거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제일 행복해요? 언제 제일 살맛나요? 본성대로 살 때 제일 살맛나요. 즉 지금 탐진치가 기본값이면 탐진치대로 살아야 살맛나고요. 내 안에 육바라밀의 기본값을 하나 더 찾으신다면 그 기본값대로 살아야 살맛나요. 육바라밀이 하자는 걸

16:00 했을 때 살맛나는 거지 남을 도와서 살맛났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내 본성에 맞는 짓을 할 때 살맛난다구요. 그런데 지금 본성이 안 바뀌었는데, 탐진치가 본성인데 육바라밀을 흉내 내려고 하면 살맛이 안 나요. 처음엔 기분이 나는데 “와 내 에고는 남들보다 뛰어나서 남까지 위한다. 나는 보살이다.” 이것도 이 기분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계속 손해 봐야 되면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우울해지고, 분노, 깊은 슬픔에 빠져요. 그렇죠? 에고가 상태가 안 좋아져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 이 시간 진여와 열반이라는 걸 왜 우리가 공부해야 되느냐? 진여와 열반이 참나 자리입니다. 참나 자리를 만나지 않으면 기본값이 안 바뀌어요. 지금 여러분 힘드실 때 맨 먼저 점검해야 될 게 명상부터 하셔야 돼요. 무조건 “몰라 괜찮아” 하셔야 돼요 모르지 않아도 “몰라” 하셔야 되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하셔서 기본값이 바뀌어야 새 안목이 생기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지고

17:00 탐진치가 한번 새로워져요. 그때의 탐진치는, 참나가 각성돼서 작동하는 탐진치는 이 상황을 이제 도울 수 있는 조력자가 됩니다. 문제아에서 조력자로 바뀌어요. 왜? 주도권을 참나가 딱 잡아버리면 기본값이 바뀌거든요. 51프로만 확보하세요. 양심, 참나 기본값 51프로, 양심 51프로, 참나 51프로만 확보하시면요 상황이 바뀝니다. 그때 아공 법공 구공도 들어오고 14조도 들어오고 그게 이제 재밌어져요. 왜? 내 본성에 맞으니까. 지금은 재미없어요. 내 본성에 안 맞으니까. 과거에 집착하지 마세요. “아니 과거에 집착해야 재밌는데.” 미래를 걱정하지 마세요. “미래 걱정이 내 유일한 낙인데.” 탐진치는 달라요. 에고는 시공 속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이래야 재미있어요. 참나는 시공을 초월해 살기 때문에 그런 거에 재미를 안 느껴요. 우주적인 명령, 육바라밀을

18:00 구현하라는 얘기만 계속합니다. 참나는 이렇게 서로 입장이 달라요. 이게 여러분 내면에서 이 실제로 체험되셔야 됩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교학으로 한 20년 깔아버리면 여러분 뇌는요 다 망가집니다. 이제 다른 걸 못 받아들이는 지경에 가요. 그럼 앵무새처럼 이제 여러분 머리에 깔린 교학만 강조하고 계속 곱씹어 보고 있습니다. 안에서 못 나와요. 저희는 반대합니다. 이런 이거 공부하실 때도 무조건 이걸 외우시라는 게 아니라 참나 하나 체험하시면서 매뉴얼로만 보세요. 스마트폰 하나 들고 매뉴얼 보는 거랑, 폰 없이 매뉴얼로만 보고 있는 사람. 무섭잖아요. 상상 속의 폰을 만지고 있습니다. 상상 속의 참나랑 대화하지 마시고, 참나 체험하시면서 매뉴얼로 보세요. “이 말이 맞나?” 그랬을 때 불교건 힌두교건 기독교건 맞으면 맞다고 하는 거고 내 참나랑 안 맞으면 안 맞다고 해야 되는데, 참나를 본 적이 없는 양반이

19:01 불교 이론으로 한 20년 머리에 깔아놓으면 기독교 경전을 어떻게 이해해요? 체험이 없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럼 이 참나를 체험만 해도 여러분은요. 자 IQ 한 430 정도 되는 인재가 여기서 현란한 중론(中論) 화엄경 다 뀄다고 치죠. 참나 체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IQ가 한 400이 넘어도 여기서 이 사람이 아무리 자명한 논리를, 자명한 논리를, 자명한 논리를 전개해도 전제가 이 수준밖에 안 돼요. 여러분이 IQ 한 50라고 치죠. 참나 체험했어요. 여기 서 계세요. 이 모든 게 사상누각입니다. 한 방에 날아가요 이 사람(IQ 430)이 아무리 논리를 전개해도 참나 체험한 순간 이건 다 쓰레기가 돼요. 참나 체험해서,

20:01 난 머리가 안 좋아서 참나 체험을 가지고 이 정도밖에 못 끌어냈다. 이 사람(IQ 50)이 훨씬 멀리 보고 자명하게 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위대한 철학자치고 논리학을 하신 분들이 없어요. 명상록 보시면,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논리학 공부 안 한 게 천만다행이다.” 그래요. “그런 데 빠져들었으면 나 끝났다.” 수많은 시간과 정력을 어디다 쏟았겠어요? 진정한 참나, 이 진정한 실상을 체험하는 데보다 개념에서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개념 자체가 희미한 달빛인데 달빛에서 달빛으로 가면 얼마나 희미해요? 내가 서 있는 기반이 태양빛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체험한 것, 누구도 체험한 거에 기반해서 밖에, 사고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체험 자체가 높아지면 참나를 체험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웬만한 경전 다 보면 다 이해가 됩니다. 이게 그 이유예요.

21:01 참나 체험만 해도 경전 이해가 돼요. 참나 체험 안 한 분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경전 이해를 못 합니다. 지금 전 세계 학자들 보세요. 참나 체험 안 한 분들이 경전 풀이한 거 보세요. 다 개념에서 개념으로 가는 개념 놀음이라 그런 책은요, 참나 체험하면 한 방에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이거 명심하시고, 참나 체험하고 경전은 그 매뉴얼로, 참나 체험을 통해서 얻은 새로운 나의 기본값, 육바라밀의 기본값을 확인하고 점검하고 배양하는 교재로, 매뉴얼로 쓰셔야 됩니다. 이건 거창한 얘기고. 그냥 아무튼 존나 힘들 때 기본값부터 점검하시라. 여러분 기본값이 탐진치면 뭔 짓을 해도 거기서 답이 안 나온다. 우울과 증오와 분노 속에서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고 나올 수가 없다. 기본값이 바뀌어야,

22:01 바뀌면요 이미 몸이 반은 나와 있어야. 이미 51프로 나와 있어요. 기본값만 바뀌어도. 거기서 자명한 14조식 사유를 하면요 아예 확 빠져나와 버립니다. 그래서 탐진치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그런 카르마랑 싸우지 마시고 잘 빠져나오시라. 그걸 없는 것처럼 하지도 마시고, 또 그거를 멋지게 탐진치를 포장하지도 마시고. 기본값을 바꿔라. 이게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입니다. 자 진여와 열반 이제 가볼게요 그래서 지금 불교 분들이 이런 강의 들으면 또 “힌두교가 웬 말이냐. 역시 힌두교였어.” 항상 의심하시는 분들이 힌두교라고. 어디 뭐 저기 인도라도 가보고 얘기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힌두교가 뭔지를 또 알고 얘기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힌두교 하면 기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냥 불교 내의 빨갱이죠. 빨갱이. “빨갱이야” 하면 끝이에요. 사고가 멈춰요

23:01 “몹쓸 놈이네.” 끝이에요. 이거는 불교에서 그럽니다. 불교에서 이렇게 딱 하다가 뭔가 안 맞으면요 “아이고 외도(外道)네” 그러면 끝이에요. “그 외도네”에는 뭐 힌두교 기독교 다 들어가겠죠. 근데 불경에 나오는 외도는 주로 힌두교죠. “외도네” 하면 끝이에요. 그런 자명함으로는 본인 인생도 근본적으로 구제를 못 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고. 자 우리가 힌두교를 왜 알아야 되냐? 부처님 당시에는 우파니샤드 시대라고 했죠? 베다 시대가 가고 우파니샤드 시대. 그래서 누구든 도를 닦으려면 출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전에는 브라만 계급만 닦았는데, 브라만 계급만 닦았는데 이제 누구나 도를 닦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어요. 우파니샤드 시대에. 석가모니도 사실은 브라만 계급이 아니잖아요. 크샤트리아인데 출가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래서 머리 깎고 출가해 가지고 도를 닦을 수 있게 됐어요. 이게 인도에서도 이런데요.

24:01 재미있는 게 중국에서도 공자님이랑 부처님이 동시대 분이거든요. 지구에 두 성인이 동시대에 살았다는 게 신기하잖아요. 둘이 만났으면 재미있었을 텐데요. 뭐 이렇게 서로 싸웠을 수도 있고. 뭐 모르죠. 알 수 없지만, 근데 재밌는데 이러면요 분명히 여기 악플 달립니다. “부처님은 3000년 전 분인데 어떻게 공자님이랑 만나나요?” 하는 허황된, 지금 세계 전체 불교 학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3000년 설을 그냥 절에 그 스님이 얘기했나 보죠? 들입다 믿는 특정 종교는 그걸 또 밀어요. 북방 불기는 3000년이거든요. 북방 불기는 아무리 봐도 석가모니랑 안 맞아서 동아시아에서만 쓰던 불기예요. 북방 불기론은 3000년 넘었어요. 이런 얘기하면 그거 들고 와가지고 꼭 댓글 다시는 분 있어요. 한 분은 계시더라고요. 동시대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공자님 동시대 분이고요.

25:01 신기하게 인도도, 꽉 막힌 계급 사회에서 우파니샤드 시대로 뭔가 조금 열렸죠. 도 닦을 수 있는 환경이 생기고 그럼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해서 학당을 열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예요. 우파니샤드 시대는 독자적인 학당을 열 수 있는 시대. 그때 부처님이 나오고요. 이쪽에서도요 모든 지식은요, 어떤 한 가문이 독점하던 시대에서 공자님 때 오면은 학당을 열 수 있는 시대가 와요. 그래서 공장님이 학파를 열고 그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었어요. 즉 지식이 어떤 신분 계급에 의해서 딱 제약적으로만 관리되던 시대에서 누구나, 평민도 공부할 수 있는 시대로 올 때 공자님이 등장합니다. 이런 역사적 시대적 변화 속에서 성인들이 출현했다는 것도 재미있죠. 그전에 출현하셨으면 재미없어요. 그 가문 사람 아니면 지식을 중국도 못 다뤄요. 인도도 브라만 계급으로 오지 않으면

26:01 또 그 정보를 못 다룰 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한테 가르쳐 줄 수도 없어요. 브라만 계급이 아닌데 베다를 들으면 잡아다가 귀에다 쇳물을 부었다는 얘기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절대 못 듣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이제 평민들한테까지 알려질 만할 때 이 성인들이 출현해 가지고 각자 학당을 열어서 도를 폈다. 요런 거 재밌죠? 그런데 재밌는 게 공자님도 또 스승을 찾아서 노자한테 가서 배우고 했듯이 부처님도 당시 스승인 브라만교의 위대한 성자들한테 찾아가서 도를 배웁니다. 출가하자마자. 그 얘기예요. 중아함경 제56권 나마경(羅摩經)에 있는 겁니다. 이름이 낯설죠? 바이샬리의 ‘알라라 칼라마’와 라자그리하의 ‘웃타카 라마푸타’ * 석가의 두 명의 브라만교 스승과

27:01 이제 있었던 이야기들을 써놓은 겁니다. 보시죠. 불경은요 시작부터 힌두교가 등장한다고요. 힌두교 성자들한테 가서 공부를 했으니까. 1.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근심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위 없는. 그러니까 “위 없는”은 최고예요. 최고의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자 ‘아라라 카라마’의 처소에 가서 그에게 물었다. … “현자여 나는 식처(識處)를 지나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자적하고 있소. 이것이 내가 알고 깨닫고 증득한 것이오.”라고 대답해 줍니다. 식처가 뭐냐면요 공처(空處) 처할 처(處)자입니다. 공처, 텅 빈 공에 안주하는 선정이에요. 공처정(空處定). 공이라는 곳에 안주하는 선정.

28:00 그런데 그다음에요. 식처정(識處定) 똑같아요. 그럼 의식만 있는, 무한한 의식만 있는 세계에 안주하는 선정입니다. 모든 게 텅 비어 있다가, 의식만 있다가 여기서 아트만이죠. 오직 의식만 있어요. 그다음에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무소유처정. 그다음에요. 일단 여기다 이렇게 쓸게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비상이라는 게요 아닐 비(非)자 생각 상(想)자, 그러면 생각이 없는 것도 또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선정, 즉 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선정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냥 들으면 되게 이상합니다. 보세요. 공(空)이 더 완벽한 것 같죠? 거기에

29:00 의식이 등장합니다. 벌써 이것보다 더 하급 같은데, 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다. 그러면 이제 생각(식識)까지 있네.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잖아요. 무소유는 빼더라도요. 무소유는 공 같잖아요. 그러니까 얼핏 보면 이상한 거예요. 비상비비상처정이 왜 제일 꼭대기일까요? 그런데 지금 이 찾아간 이 성자는요 알라라 카라마는 무소유처정을 얻었다는 거예요. 자기는 식처정은 넘어섰다. 뭘까요? 중요한 거는 지금 이 전체가 불교에서는 사무색계(四無色界) 선정으로 분류돼서 불교 체계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무색계 선정, 그럼 사무색정(四無色定)이죠. 사무색정. 이렇게 그러면 사색계정(四色界定)이 있겠죠? 인간이 지금 지구에서 사는 이 세계는요 욕계(欲界)예요. 욕계. 여러분은 지금 욕망 속에 살고 계시다고요. 욕계. 욕계가 정화되면요

30:01 색계(色界)에 태어나요. 색계는 아름다운 그런 형체를 갖고 있는 세계예요. 우리가 죽으면 가는 세계인데 아름다운 몸은 갖고 있어요. 욕망은 정화돼 있고. 그러니까 색계는 우리가 보는 뭐 아름다운 천신들의 세계예요. 선녀가 있다면 색계죠. 지금 욕계를 넘어서 그러니까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러니까 욕망은 없는 선녀예요. 욕망이 그득한 선녀면 아니겠지만. 자 혹시 사후세계라도요, 사후세계라도 욕망이 그득한 세계는 욕계입니다. 불교적으로. 그 사후세계라고 다 색계가 아니에요. 욕망이 정화돼서 욕망은 정화됐지만 아름다운 형체는 갖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럼 이 무색계(無色界)는 뭐냐면요 순수정신의 세계예요. 순수정신의 세계. 그러니까 형체가 없죠. 그런데 형체가 없는 존재들끼리 사는 세계라는 걸 설정하면 불교가 이상하잖아요?

31:01 이게 나중에 무색계천(無色界天), 색계천(色界天) 해서 그냥 그대로 욕계천(欲界天) 해가지고 그대로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래서 이거는 반대예요. 불교에선 이걸로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지만 이 우주의 여러 층, 여러 차원의 세계, 저는 이거는 일단 체계적이지 않다고 보고요. 자명하지 않다고 보고, 그 영계의 어느 반영은 되겠지만, 불교 이론에 이걸로만 재단하는 건 반대합니다. 왜냐? 이건 그냥 선정이에요. 선정에 기반한 체계예요. 즉 여러분이 자명한 건 뭐냐면 여러분 실제 명상하다가 이런 세계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명상하다가 들어가는 차원들을 다 하나의 우주로 설정해 가지고. 보세요. 사무색계(四無色界) 선정에 들어서 죽으면 그럼 사무색계천(四無色界天)에 태어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천(天)은 실제 이론상 형체가 없어요. 순수정신들만 있는 세계라는 거예요. 어떤 영적인 형체마저 없는

32:00 정신들만이 사는 세계, 상상하기가 힘들죠? 에너지체도 아닌, 설정이 안 돼 있어요. 여기는 정신만의 세계예요. 에너지체는 오히려 색계의 영역이죠. 에너지체라도 있다면 생겨요. 그럼 순수정신 영역에서 차원을 또 네 개로 나눠 가지고, 즉 공처정까지 닦다 죽으면 공처정의 세계에 태어나고 이렇게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게 자명하지가 않기 때문에 저는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시 오해하시는 거 없으시길. 저는 자명한 건 확실해요. 선정에 들면 이 차원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도, 우리 지금 우리 다 같이 선정에 들면 이 차원들을 다 체험할 수 있어요. 그럼 이렇게 얘기하고 끝내는 게 맞지 이걸 우주론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돼요? “내가 죽으면 식처정천, 무소유처정에 해당되는 천계에 태어나려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거든요. 지금 불교는 그래요. 그거는 반대예요. 왜냐하면, 이건 그냥 초기부터 선정의 체계였어요.

33:01 이게 다듬어져서 우주론이 돼 버립니다. 거기까지는 제가 안 나갈게요. 자 색계천은요 1선정, 우리가 흔히 아는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이에요. 자 이거는 석가모니께서 만드신 명상 체계입니다. 1선정 2선정 3선정, 이 4선정에서는 뭐예요? 그럼 결국 마지막 가면 4선정에서는요 이 정광명의 의식만 남아요. 여기(2선정)서는 희열, 여기(3선정)서는 즐거움만. 여기(2선정)서는 희열과 즐거움, 여기(1선정)서는 어떤 대상에 대한 미세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호흡에 집중하면요 호흡을 잡고 있는 미세한 의식은 있어요. 1선정에서 아무 다른 생각은 없고 호흡을 잡고는 있어요. 2선정 가면 호흡도 놔요. 희열과 즐거움만 있어요. 근데 3선정 가면 거친 희열이 잡혀요.

34:00 은은한 지복감 속에 빠집니다. 4선정 가면 그것도 없어지고 또렷하게 완전히, 우리가 말하는 참나 합일 상태죠. 참나 각성 상태. 여기서는 호흡도 사라진다고 그래요. 근데 호흡이 있어도 돼요. 이 의식 상태를 체험해 보시고 나면, 이 의식 상태, 4선정의 의식 상태가 뭔지 아시면 몸과 접속하면서도 체험할 수 있어요. 근데 일반적으로는 이게 몸과 접속이 끊어지면서 일어나니까 욕계, 자 “선정 저도 닦는데요” 그러면 욕계선도 있어요. 뭐냐 하면, 욕망이 아직 살아있는 선정, 깨어는 있는데 욕망이 살아있는 상태가 욕계 선정입니다. 그러면 욕계 선정에서 욕망이 정화돼 가지고, 이제 욕망이 정화돼서 의식이 깊어졌어요. 그럼 이때부터 색계 선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욕망이 정화됐다는 소리예요. 욕망이 이제 안 일어나요. 그런데 이 세계에서 뭔가 내 영적인 몸은 있는 것 같다는 거죠. 에너지체도 느껴질 수 있고. 여러분 이 상태에서는요

35:01 자 그런데 에너지체를 못 느껴야 됩니다만 에너지체를 느낄 수도 있어요. 실제로 이 선정에서. 그런데 무색계 가면요 이제 완전히 몸이 사라지고 없다는 거예요. 몸에 대한 감각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땐 에너지체만이 아니라 몸에 대한 감각이, 몸에 대한 감각과 함께 갈 수 있다고 봐서 색계선이라고 했는데, 이쪽은 몸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이쪽도 보시면, 호흡도 사라지는데 몸에 대한 감각이 있겠어요? 4선정까지 가면, 접속이 완전히 끊어지죠.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어떤 미묘한 접속이 된 채로 그 선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점을 강조한 겁니다. 이쪽(색계정)은 몸에 대한 감각과 함께 할 수 있는 선정이라는 거예요. 이쪽(무색계정)은 몸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그래서 첫 시작이 공(空)인 거예요.

36:00 몸도 사라지고 텅 빈, 텅 빈 상태에 의식이 들어가 있는, 이 색계 4선에서 몸에 대한 감각까지 완전히 사라졌다는 얘기고, 오로지 알아차리는 의식만 있다는 거고. 그 의식이요 이제 무소유, 진짜로 더 텅 비어가다가 마지막에는 아주 미세한 의식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것마저 넘어가면 뭐에 도달해요? 멸진정(滅盡定), 일체의 생각 감정이 다 사라진 멸진정에 들어간다. 이게 현재 불교의 아홉 선정의 체계(색계4선+무색계4선+멸진정)입니다. 저는 여기에 반대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방금처럼 설명해 드리는 방식이 색계니 무색계니라고 이름을 붙여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색계는 몸에 대한 감각이 있고 무색계는 몸에 대한 감각이 없어야 돼요. 몸에 대한 감각이 없는 중에 공에서 식으로, 무소유로 비비상으로 억지로 설명한 거예요. 왜 이게 억지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어요.

37:00 근데 이름하고 뭔가 딱딱 매칭이 안 됩니다. 자명한 매칭은 안 돼요. 억지로 설명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불교식 설명이고요. 왜 억지인지 아세요? 애초에 이 두 개는 다른 수행체계였어요. 석가모니는 견소 마지막 보리수 아래서 견도하실 때 이걸로 견도하십니다. 호흡을 관찰하다가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그럼 호흡 알아차리는 중에 욕망이 아직 치성하면 욕계선이고요.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이제 호흡만 알아차려지지 어떤 생각도 다 잡힙니다(1선정). 그다음에 호흡도 사라지고 희열과 즐거움만 남아요(2선정). 그다음에 즐거움만 남고(3선정) 그다음에 정광명 상태에 들어가는(4선정). 저기서 이제 석가모니께서 견성을 하세요. 이거는 석가모니께서 정리한 수행 체계고요. 석가모니께서 출가하자마자 바로 배웠던, 이미 이야기에 보세요. “나는 식처를 지나 무소유까지 갔어” 이 얘기는요 이미

38:00 공인된 수행법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또 다른 스승 찾아가도 그 다른 스승은 비상비비상처정의 대가예요. 자 그 얘기는 뭐예요? 학파를 불문하고 공인된 힌두교 브라만교의 수행체계였다는 거예요. 이게 선정 체계 다르다고요. 이건 석가모니 가르침으로 처음 등장한다면, 이쪽은 이미 당시에 누구나 닦고 있던 수행체계였습니다. 요가의 수행체계였다고요. 힌두교 요가 수행체계였다고요. 그러면 왜 이게 중요하냐면요 불교식으로는 공처정을 닦으려면 뭐까지 닦은 뒤여야 돼요? 색계 사선은 다 닦고 와야죠. 원래 아니라고요. 힌두교는 공부터 닦았다고요. 그럼 이게 실제 뭔지 아세요? 아니 공을 실제 터득했으면 끝이지 뭘 더 닦아요? 그게 아니라, 공처정이 별 게 아니라 앉아서 “내 몸이 공하다” 하고 염하면서 하는 선정이에요.

39:00 “내 몸뚱이가 공하다.” 그러니까 “몰라”를 하시는 거예요. 몰라. 앉아서 몰라. 몸뚱이 몰라. 몸뚱이, 생각도 소리도 몰라. 오감도 몰라.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일체를 몰라 하시는 수행법이 공처정이에요. 당시 힌두교 성자들은 이걸로 견성했다니까요. 처음에 앉으면 공, 공 그러다 보면 뭐만 남아요? 다 몰라 했으니까 알아차리는 의식만 남죠. 또렷한 참나 체험이 이때 일어납니다. “참나 체험했어요.” 학당에 오셔서 그러겠죠. “공처정하세요.” “몰라 하세요”가 이게 똑같은 거예요. “뭐가 일어나든 몰라 해버리세요.” 하는 게 “텅 비었다고 생각하세요.” 이거죠. 그러다가 “다 공했는데, 몰라 했는데 알아차리는 의식은 몰라가 안 돼요.” 식처정에 들어가신 겁니다. 그겁니다. 자 더 닦으시다 보면은 일체가 사라져서 텅 비어 있는데, 알아차리는 상태에 들어가실 겁니다. 요 무소유처정이 불교식으로 하면 멸진정이에요. 똑같애요.

40:00 왜냐하면, 무소유처정을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하거든요. 멸진정은요, 상수멸정(想受滅定), 생각과 느낌이 멸했다. 무상정, 생각이 사라졌다. 같은 겁니다. 그런데 이걸 외도 거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외도 거는, 이거는, 힌두교 거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정은 무색계4선 중의 하나지 멸진정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이 체계는 아홉 선정 체계는 불교가 억지로 만든 거라니까요. 그래서 이 무소유처정이, 사실은 지금 이 식처정만 가도 4선정하고 통해요. 지금 무소유처정이 멸진정이랑 통해요. 이게 힌두교식 사선정, 멸진정인 거예요. 공하다 공하다가 또렷이 알아차리는 의식만 남아요. 그러다가 더 들어가니까 일체 생각이 다 사라져요. 무소유처정. 멸진정에 들어갑니다. 미세한 생각마저 사라져서, 이때가 이때(식처정)는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이때(무소유처정)는 생각을 일으킬 수가 없는 거예요.

41:00 여기서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게 힌두교 성자들이 말하는 “합일무상삼매”예요. 라마나 마하르시나 라마 크리슈나나 다 얘기합니다. 힌두교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체계란 말이에요. 이게 합일무상삼매. 완전히 생각 없음과 참나랑 합일돼 버려 가지고 모든 게 시공이 사라지고 생각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져 버린, 일체가 사라져 버린 상태, 합일무상삼매가 무소유처정이고요. 비상비비상처정은 왜 더 위인지 아세요?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색계 4선이 아니고 원래 힌두교에서 생각이 일어나건 말건 항상 참나가 흐르는 상태, 그래서 비상비비상처정까지 가면 확철대오입니다. 힌두교식 확철대오. 이거(비상비비상처정)는 “본래무상삼매”라 그래요. 이거(무소유처정)는 합일무상삼매는 실제 생각이 사라졌다는 거고요. 본래무상삼매는 생각이 일어나 봤자 다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건 말건 늘 참나에 안주해 있는 삼매입니다.

42:00 즉 이거(무소유처정)는 삼매에 들어갈 때만 참나랑 합일돼 있다면 이거(비상비비상처정)는 뭐예요? 영원히 참나랑 합일돼 버려서 생각이 일어나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어진 상태. 그래서 보면 라마나 마하리시는 비상비비상처정을 강조하고요. 라마 크리슈나는 무소유처정을 강조해요. 합일무상삼매를 강조하는 분은 툭하면 그 라마 크리슈나는 툭 하면 멸친정에 들어가 버려요. 서 있다 자빠지고 해서 다리 부러지고 그랬습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깊은 삼매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중시하면요, 라마나 마하르시는 뭔 짓을 다해도 참나가 있는 것을 중시해요. 그 선정 방면에서는 둘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달라요. 다 이 체계 안에서인데 이걸 힌두교로 봐주지 않고 불교 안에서 변형된 것만으로, 이 무색계사선이라고 이름 붙여서 이해하시면 계속 이건 오해됩니다. 그럼

43:00 본색이 아니에요. 불교식 활용은. 불교는 이미 사선에서 이미 정광명 상태에 들어갔는데 다시 공처정을 사실은 또 닦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굳이 추가해 놨다는 거는 사선정에서도 아직 남아있는, 사선정에서도 몸에 대한 감각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남아있는 몸의 감각을 없애라 공(空), 그럼 의식만 남는다 식(識), 그래도 아직 미세한 여기서 일어나는 미세한 생각을 다 잡아라 무소유, 그런데도 아직 미세한 생각이 또 있으니 또 잡아라 비상비비상, 이렇게 설명해 가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궁색하지 않아요? 요게 이제 불교식 설명입니다. 원래 있는 그대로 보면 자명하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 하나 이해하시기가 어려워요. 왜냐? 불교로 이미 왜곡돼 있는, 불교 체계의 왜곡돼 있는 시각으로는 이걸 설명이 안 돼요. 그러면 이 양반은 사선정 다 이미 거쳐서 식처정까지 왔게요? 이상하지 않아요? 사선정은 부처님이 만드신 체계인데 부처님 스승은 이미 식처정에서

44:00 무소유처정을 갔대잖아요. 그러면 불교식 이론대로라면 사선정은 이미 다 씹어 먹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상하잖아요. 모순에 빠지죠. 그럼 사선정은 부처님이 만든 게 아닌 게 되죠. 이해되시죠? 그냥 이분은 공처정부터 식처정, 참나 각성했고, 참나 각성은 했는데 참나 각성이 아주 깊어져 가지고 일체 생각이 다 사라져버린 선정까지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분은 합일무상삼매의 전문가예요. 그래서 나는 거기까지 깨달았어. 그러면 이분은 수행 스타일이 어쨌겠어요? 라마 크리슈나처럼 한 번씩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죠. 그래서 또 한 번씩 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고. 그럼 이걸 또 와! 이거 얻은 게 얼마나 대견해요. 스스로, 내가 참나 합일을, 참나랑 완전 합일을, 시공을 초월한 그 합일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2. 나는 그 경지를 증득하기 위해 외지고 한적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마음을 다잡고 부지런히 힘써 수행했다. 그러자.

45:01 그러니까 이건 부처님 얘기예요. 아 그 말 듣고는요 나도 열심히 하자 해서 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무소유처정을 증득했다. 부처님 대단하신 게요 출가하자마자 가 가지고 바로. 영성 천재신 거죠. 그 스승 되게 오래 걸려서 했을 텐데 지금 바로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스승이 놀랬죠. 오래지 않아가 포인트입니다. 금방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현자여 그대 또한 나와 같은 이 경지를 증득했으니 나와 함께. 우리 학당을 경영합시다. 이거죠. 대중을 거느립시다. 내가 수석사범으로 해줄 테니까, 내 후계자가 되라 이거죠. 나의 후계자가 돼 주시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 경지는 지혜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무소유처정에 들어갔으니까 시공을 초월하니까 편하긴 한데 이거는 지혜가 더 개발되는 것 같지도 않고 나오면 다시 탐진치가 그대로 있으니까 이게 열반을 얻은 것 같지도 않고

46:00 이걸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이제 이 가르침 버리고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근심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위 없고 안온한 열반을 구해야겠다. 진짜로 생로병사를 초월하고 근심도 더러움도 없는 정말 최고의 열반을 찾아야겠다 하고 나옵니다. 이런 학생 짜증나죠. 여러분이 학원 운영자면 와서 엄청 잘해서 “야 너 인재다. 우리 도장을 우리 학원을 같이 한번 해보자” 했더니, “여기는 제가 찾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지금 바로 간 거예요. 3. 그러고는 곧 그의 가르침을 버리고 ‘울타라 라마자’의 처소에 가서 그에게 물었다. 울타라 라마자의 처소에 갔어요. 현자여, 그러니까 그 사람이 “현자여 나는 무소유처정을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성취하여 자적하고 있소. 이것이 (부친인) 나마께서 알고 깨닫고 증득한 것이오.” 이거 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도장이에요. 2대째.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거기 가가지고 이제 얘길 나눈 겁니다. 그러면 또 부처님이 어떻게 해요. 4. 나는 그 경지를 증득하기 위해 외지고 한적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마음을 다잡고 부지런히 힘써 수행했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했다. 나는 그 경지 증득하기 위해서 또 외지고 한적한 곳에 가서 열심히 했습니다. 또 오래지 않아서 얻어버렸어요. 부처님은 이미 라마나 마하리시 경지를

47:00 출가하자마자 얻으셨습니다. 비상비비상처정까지 얻었어요. 생각이 있건 없건 항상 깨어있는 참나 각성 상태, 정광명, 이제 우리 진여와 열반 우리 강의식으로 말하면 정광명 각성 상태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스스로 빛나는 무한한 의식을 이미 확보하셨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그 뒤로 6년을 고행하세요. 그러니까 부처님 6년 고행은 단순히 견성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었어요. 부처님의 6년 고행은 탐진치를 어떻게 다스릴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던 거예요. 힌두교 성자들은 삼매에는 달인인데 지혜가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고 탐진치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답이 없다고 석가모니께서는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지금 힌두교 성자라 라마나 마하리시 같은 대표적 성자도요 탐진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그런 말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만 진아(眞我)에 안주했으면 끝났다고 생각해요. 그럼 탐진치 다스리는 데 왜 소홀하냐면요

48:00 그러니까 최소한의 다스림만 합니다. 왜냐? “탐진치를 왜 안 다스리나요?” 그거는 카르마의 소산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참나 각성했을 때 내 에고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에고가 죽었는데 무슨 탐진치가 있냐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볼 땐 있는데요.” “네 우주에서만 있다”는 거예요. 너 법계에서는 있어 보이지만 내 법계에서 나는 이미 진아 자체고 에고는 죽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거는 이미 불에 탄 나무같이 재인 모습이지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가 아니라는 거예요. 즉 카르마처럼 보이지만 이미 업을 짓는 카르마가 아니라는 거예요. 영향력이 없는 카르마라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힌두교가 탐진치를 다스리는 법에서 게을리 하는 부분이 이겁니다. 참나 각성 했으면 끝났다고 하는 철학이에요. 우파니샤드 철학이. 그러니까 지금 부처님이 참나각성을 했더라도 여기서 불만을 가지실 만하죠? 그러니까 “현자여 그대 또한 나의 부친과 같은 이 경지를 증득했으니 나와 함께 대중을 거느립시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 경지는 지혜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버리고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근심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위 없고 안온한 열반을 구해야겠다. (중아함경 제56권 나마경羅摩經)

49:00 뭔 생각했겠어요? 지혜도 아니오. 깨달음도 아니요. 이건 열반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찾는 생로병사를 초월해서 진짜로 일체의 더러움 탐진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본값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다고 느낀 거예요. 근데 확실히 얻으신 것은 새로운 기본값을 각성하는 정광명, 순수의식, 초의식은 이때 스승들한테 이미 얻었다고 봐야 됩니다. 자명하시죠? 여기까지 잘 이해하셨어요? 그래서 이걸 아니까 나중에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한 건요 대표적으로 지금 전해오는 건 호흡법 실험했다는 것밖에 안 전합니다. 실제로 자세히 전해오지 않은 거예요. “숨을 멈췄더니 몸이 죽을 것 같더라.” 이것만 전해와요. 이미 견성하신 분이 6년 고행을 그것밖에 안 하셨을까요?. 힌두교 식으로는 이미 견성하신 분이 지금 참나 각성을 했는데, 즉 돈오는 했는데 점수에서 답을 찾으려고 수행하신 건데 점수를,

50:00 호흡 멈추는 것밖에 안 하셨을까요? 6년간. 수많은 실험을 하셨겠죠? 수많은 실험을 하셨는데 그걸 통해서 탐진치를 어떻게 다스려야겠다를 깨달으시고 팔정도와 사무량심 같은, 나도 닦고 남도 살리는 탐진치 다스리는 제압법을 터득하셨겠죠? 이렇게 포인트를 잡고 보셔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딱 얻으니까. 자 5번. 5. 나는 지금 매우 깊은 진리를 얻었다. 실제로 견도하셨을 때. 이 진리를 이해하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밝히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지극히 미묘해 지혜로운 사람만이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본인이 깨달은 경지가요 이미 6년 전에, 이미 참나 각성, 정광명 각성을 하신 분이 정광명을 가지고 탐진치를 다스리는 법을 6년 연구하셔 가지고 답을 얻으신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마무리는 이런 사선정으로, 호흡을 알아차리시다가 더 깊은 각성을 하셨지만, 6년 고행한 걸

51:00 바탕으로 깨달으신 거예요. 즉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출가하자마자 이 참나 각성을 하셨고요.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으셨고 이 참나라는 새로운 기본값을 가지고 어떻게 인간이 살아야 중도를 걸을 수 있고 해탈한 삶을 살 수 있고 탐진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닦으신 거죠. 6년간 고행하셔서 팔정도와 사무량심을 닦으셔서 마지막 마무리를 사선정을 통해서 쭉 관하시다가 하나로 소화하신 겁니다. 완전히 한 덩어리로. 돈오와 점수가 한 덩어리가 돼서 더 깊은, 즉 증오, 증득한 깨달음을 낳은 거예요. 그게 6년 고행의 정확한 이해라고 저는 봅니다. 이렇게 깊게 깨달으신 뒤에 “야 이거는 너무 깊은데. 이거 어떻게 얘기하지? 참나 각성도 못한 사람한테 참나 각성 이후 팔정도를 통해 탐진치를 다스려서 모든 업장을 소멸시키는 이런 법까지

5200 이거 어떻게 얘기하지?” 그런데 누굴 떠올렸어요? 맨 먼저 나는 먼저 누구에게 설법해야 될까? 과연 누가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면 기본적으로 참나 각성은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딱 떠오르는 게 알라라 칼라마가 떠오릅니다. 나륵가람(알라라 칼라마)은, 그 사람은 모든 기관이 근기가 잘 성숙되어 제일 먼저 제도할 만하다. 게다가 그는 내가 진리를 얻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얻으면 좋은 정보 달라고 뭐 그런 사이,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허공에서 신이 세존께 아뢰었다. 나륵가람은 7일 전에 죽었습니다. 7일 전에 죽었네요 하고, 복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지금 제가 읽는 번역은요, 곽철환 역 핵심 아함경이라는 문고판 책입니다. 아주 좋아요. 아함경의 핵심 정말 짧게 모아놓은 책인데요. 곽철환 씨의 핵심 아함경, 정우서적에서 나온, 거기에 나온 지금 번역을 제가 그대로 읽어드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읽어드린 거는

53:00 증일아함경 14권 고당품 제5경인데요. 7일 전에 죽었다네요. 그래서 6. 이 말을 들은 세존은 다시 생각하셨다. “참 애석하구나. 내 진리를 듣지 못하고 목숨을 마쳤구나. 이게 명 짧으면 도를 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진리를 들었다면 해탈했을 텐데. 그러니까 부처님은요 기본적으로 지금 참나 각성자 중에 찾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라한은 아예 지금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아라한들이, 일주일 만에 아라한 나왔다는 그 아라한의 깨달음과 부처님 깨달음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너무 심오해서 일단 참나 각성을 해온지 오래된 사람 중에 찾고 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부처님이 인정하는 자,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거는 이 힌두교 성자들은 부처님이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크게 깨달을,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금 아라한 정도의 깨달음이 아니라니까요 이 사람들은. 나의 깨달음을 그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금 찾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 좌절되니까. 아라한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54:01 그 아라한들이 일주일 만에 나와요. 그럼 이상하지 않아요? 이렇게 심오해서 미묘해서 배울 수 없다는 도를 1주일 만에 아라한들이 얻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아라한 깨달음과 부처님 깨달음은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 아라한도 뭐 수많은 또 마하가섭 같은 아라한과 또 다른 아라한들은 또 지혜 차이가 크듯이 아라한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부처님 이해할 정도, 나중에 마하가섭 정도나 나온다고요. 넓게 쳐서 사리불 정도나. 그러니까 이 심오한 깨달음을 바로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힌두교 성자들은 수준이 장난 아니었죠? 이거 아셔야 돼요. 부처님은 우파니샤드 성자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은 우파니샤드를 비판하지 않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의문시합니다. 왜 부처님이 우파니샤드 성자들을 까지 않았을까? 다 까고 다녔는데. 그러니까 온갖 잡다한 애들은 비판하는데 진짜 왜 정통 우파니샤드 브라만교의

55:00 가르침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았을까? 이게 하나의 의문이라고요. 왜 그러냐? 자기 선생님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인정했다고요. “조금만 더 팠으면 그분들도 탐진치를 다스려서 더 큰 해탈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믿었던 거예요. 자 그다음에 애석하구나 하고요. 그다음 그러면 이제 누구에게 설법해서 해탈을 얻게 하나? 울두람불(‘웃타카 라마푸타’)을 제도하자. 그에게 설하면 내 진리를 듣고 해탈할 것이다. 그러자 신이 다시 아뢰었다. “그는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누구한테 설법하나 하니까 또 웃타카 라마푸타가 떠올라요. 그 사람 제도하자 했더니, 복이 없기가 어제 죽었답니다. 그래서 망했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지금 각주 한번 읽고 갈게요 그래서 보면 6) 이미 브라만교의 스승은 ‘진아 안주’를 이룬 생존 해탈자’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이미 브라만교의 스승은요, 스승들은 진아 안주를 이룬 생존 해탈자의 경지에 이르렀어요. 그러니까 저기 알라라 칼라마는 라마 크리슈나 비슷하고. 이쪽 울타라 라마자는 지금 라마나 마하리시 비슷한 수행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비슷하다는 겁니다.

56:00 꼭 같다는 거예요. 비슷한 정도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분들을 부처님은요 존중했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래서 다만 그들이 그 자리만을 이를 궁극의 경지로 오인하여 ‘탐진치’를 완전히 정화하지는 못하고 있는 경지이다. 즉 그들의 경지가 오히려 아라한 급이에요. 왜냐?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시바경에서 “아라한들도 공부해야 되나요?” 하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했어요? “아라한들도 탐진치를 뿌리 뽑아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탐진치 뿌리 못 뽑고 이쪽은 열반 안주자 저쪽은 진아 안주자, 경지가 아라한하고 똑같다고. 이분들은 이미 아라한 경지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외도랑 아라한을 같이 치느냐?” 하는데 어쩔 수 없구요. 그분들은. 아무튼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는 분들, 이래서 이 말 하나 봐요. 귀 달린 분들은 암튼 귓구녕이 뚫리신 분들은 들리실 거예요. 이 말이. 예 귀 달렸다고 듣는 건 아니고,

57:01 들을 귀 가지신 분들만 이해할 겁니다. 그러니까 이해하시면 아주 재미있어져요. 장담합니다. 이해하면 진짜 재미있어집니다. 석가모니는 모든 번뇌의 뿌리인 탐진치를 영원히 뿌리 뽑아 일체 악을 짓지 않고 일체 선을 실천하는 경지로 나아갈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과거 7불 통계가 뭐예요? 일체의 악은 하지 마라. 일체의 선은 다 해라. 그래서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어라. 이게 과거 7불의 공통설법이다. 이후 찾아낸 답이 바로 뭐예요? 4성제 8정도 4무량심이다. 사무량심은 자비희사 남을 사랑해주고 남의 아픔을 같이 슬퍼해주고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해주면서 항상 이 모든 거를 에고로 하는 게 아니고 뭐예요? 정광명 참나 각성으로 해야 되기 때문에 평정심, 마지막에 자비희사(慈悲喜捨)는 버릴 사(捨)자인데 일체를 내려놓고 몰라 괜찮아 상태를 말합니다. 자비희사 자비에도 초연해지라는 거예요.

58:00 초연한 자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인간적 탐진치가 묻은 자비가 아니라는 걸 말하는 겁니다. 자비희사 자비희사와 팔정도 바르게 삼학을 닦는 팔정도. 팔정도 핵심은 계정혜예요. 바른 명상, 바른 견해, 바른 실천 이걸로 답을 찾아내신 거예요. 그래서 이거 나누고 싶었던 거예요. 어떠세요? 여기까지 보시니까. 재밌죠? 불경을 이렇게 읽어야지 고정관념으로 아무리 40년 50년 읽어도요 외도, “부처님이 초기에 외도에서 방황하셨네.” 끝. 비상비비상처정이 왜 도대체 선정의 맨 꼭대기예요? 이미 생각을 다 날려버린 무소유를 얻었는데 왜 아직도 뭐가 남아서 비상비비상이라고 하는지? 생각이 없지도 있지도 않은 선정이라고 하는지? 그게 왜 최고 경지인지? 항상 생각이 있건 없건 참나 각성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 경지가 최고입니다.

59:00 그 얘기를 라마나 마하리시의 가르침을 보면서 하나하나 짚어볼게요 한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5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