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와 열반 4강

홍익학당 아카이브
보급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3월 11일 (월) 14:59 판 (https://cafe.naver.com/bohd/76230)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진여와 열반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부제 열반의식과 상락아정常樂我淨
강의일자 2023. 04. 22. 土.
게시일자 2023. 07. 30.
동영상 길이 1:08:15
강의 중 인용 도서 -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i1M88BWH7gA



0:05 요 그림 그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열반4덕 열반에 4가지 덕이 있다. 상‧락‧아‧정 그림 있죠. 그림 보시면 돼요. 이게 열반이다. 열반의 다른 이름이 뭐라고요. 진여. 참 진(眞)자 참되며 영원불변하다. 여(如)는 영원불변이에요. 근데 이런 진여도 만약에 중관학파 같으면 영원불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중관학파가 다 그런 것도 아니에요. 얘기하면 어려워지고 귀류논증(歸謬論證) 중관학파라는 달라이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겔룩파가 귀류논증 중관학파거든요. 티벳 안에서도 유일하게. 귀류논증이라는 게 말이 어려운데 귀류논증은요 남의 말꼬리만 잡지 자기주장을 안 하는 게 귀류논증이에요. 다른 중관학파 닝마파나 이런 쪽도

1:05 중관학파인데 중관학파라는 거는 공종(空宗)이에요. 공(空)을 강조하는 거예요. 공. 그러니까 텅 빔을 강조하는 철학이에요. 그걸 반대하는 철학은 이제 또 상종(相宗). 서로 보완이죠. 반대라기보다. 이론은 반대되는 것 같지만 보완이에요. 상종 아니 텅 비었는데 왜 우주가 존재하냐고? 왜 나와 남이 존재하냐고? 그럼 이게 일체는 아뢰야식의 의식의 작용이다. 만법유식을 주장하는 상종, 만법유식 일체개공을 주장하는 공종. 일체는 텅 비어 있다. 그러니까 텅 비어 있다 꽉 차 있다 이 이야기에요. 공종과 상종의 조화가 진실이겠죠. 그래서 사실은 텅 빔을 얘기한 공종도 진실이에요. 우리 참나를 제가 공적(空寂)이라고 그러죠. 공적 그걸 강조하면 공종이에요. 영지(靈知)를 강조하면 또 상종이에요. 이 연기(緣起)의 의식의 작용으로 만법이 나왔으니까. 여러분 주무실 때는

2:04 깊은 잠에서 공적 했죠. 나와 남이 없었죠. 아침에 일어나니까 지금 벌써 나와 남이 펼쳐지고, 뭐 내 육신과 이 세계가 경험되고 난리가 아니죠. 아침에 깬 뒤로 지금까지 되게 난리가 아니시죠. 주무셔야 끝나요. 다시 깊은 잠의 트랙에 들어가야 공의 세계로 들어가요. 공(空)과 상(相)은 우리의 실존이에요. 이 두 세계가 하나예요 결국. 하나로 굴러가요. 그래서 이 중관학파라는 거 이쪽(공空) 입장의 중관학파 이쪽(상相)은 유식학파 크게 중관, 우리가 공으로 보는 게 우리가 진짜 중도로 보는 거다 해서 중관학파고요. 만법유식을 모르면 현상계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모른다. 공만 얘기하면 되냐 상을 설명해 봐라. 근데 이제 중관학파 쪽에서는 특히 그 귀류논증은 남의 말에 오류, “네 말이

3:00 맞다면 왜 이런 오류가 생기냐?” 이게 귀류논증학파예요. 자기주장 안 하죠. 얘네들 말싸움하면 지랄 같겠죠. 귀류는 지 주장을 안 해요. 내 주장 만하면 말꼬리 잡아서 그래 네 말이 맞다면 왜 이렇게 됐지? 탁 이런 식으로 재수 없게. 근데 반대 그 중관학파는 자립논증 자기 주장해야 되니까 거기는 자립논증학파는 유식학파를 받아들여 버려요. 그래서 받아들여서 다 설명하면서 공이라는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서로 이제 만나게 돼요. 그러니까 자명한 것들끼리 만나요. 영 안 만나지는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따로 놀아요. 진짜 공이라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진짜로. 그래서 만약에 이분들이 진여를 푼다면, 이거 그냥 양념이에요, 진여를 이렇게도 풀 수 있다. 진여의 원 뜻은 진여하니까 참되고 영원불변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이거는 딱 이제 이미 참나의 세계를 아는 분들 이야기예요. 인정하는 분들, 영원불변의 실체를 인정하는 분들은 이렇게 풀고요. 이런 중관학파 중에서도 더

4:02 극단적인 중관학파는 진여를 그렇게 안 풀고, 원 의미는 진여가 한문이 아니잖아요. 원래 인도 말로는 여(如), 같다, 있는 그대로와 같다는 뜻이에요.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에요. 본 모습 그대로, 본모습과 똑같은, 본모습과 같은 그 상태. 여기서 이거를 영원불변의 실체를 읽어내는 사람들은, “영원불변한 실체, 늘 있는 그대로 진실되면서 늘 똑같은 그 상태”를 찾아낸 거고요. 이분들(중관학파)은 “우주에는 영원한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진리가 우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렇게 또 주장해요. 그러면 또 말이 되죠. 이래서 둘 다 말이 되기 때문에 계속 가는 거예요. 둘이 이제 못 친해지는 거는 둘 다 설명하면 말이 돼요. 같은 경전인데 반야심경을 (중관학파는) 이렇게 풀어요. “오온은 무상. 무상하니까 영원불변한 게 하나도 없다. 아이고 무상해라. 끝.”

5:03 근데 이쪽은요 “오온이 공하다는 그 공은 진여를 말한다. 오온이 본래 진여다. 진여의 작용이다.”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되죠. 문제는 이게 끝까지 달라요. 같이 가요. 경전이 (양쪽으로) 다 해석이 되게 얘기를 해 놓은 거예요. 저는 경전 쓴 분이 잘못했다. 뭔가 정확히 해야지. 지금 혹시 이렇게 읽는 놈 있으면, “아니야” 이런 게 있어야 돼요. 저 같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오래된 경전이고 내려오다 보니까 그 문파에서만 이렇게 막 이야기가 되다 보니까 또 다른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이게 또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거에 대해 좀 취약한 부분이 있어요. 한 문파에서 계속 자기들이 이게 우리가 최고 진리지 하고 막 이렇게 암송하다 보니까 내려오다 보니까. 여러 학파의 입장을 정리하고 설명해 주고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명확하게 무슨 의미다라는 걸

6:00 제시해야 되는데 그런 왜곡이 많이 내려와요. 후대에 이제 충돌이 나다 보니까 서로 막 얼마든지 왜곡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역사적으로 중관학파가 먼저 등장했어요. 그래서 공을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니까 거기에 반발해서 유식학파가 등장한 겁니다. “아니 반야심경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지. 오온이 공하다니. 그럼 오온은 어디서 나왔냐. 오온은 아뢰야식의 작용으로 생겨난 거고 아뢰야식의 본질이 공한 거지. 오온 자체가 그냥 어떤 자성이 하나도 없는, 그렇게 단순히 파악하면 안 되지. 우주에 자성이 없으면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이렇게 치고 나온 거죠. 여기까지는 양념이고요. 오늘은 이것만 아시면 돼요. 오늘은 이거 나중에 진도 나갈 때 다 나올 겁니다. 미리 한번 맛만 보여드렸고요. 진여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진실 그대로”라고 풀 수도 있다. “진실 그대로”라고 풀 수도 있다. 근데 일반적으로는 참되고, 그럼 참되면 불교에서 무루(無漏)라

7:05 그래요. 없을 무(無) 샐 루(漏). 누수되는 게 없다. 비 새는 걸 말하는데요. 번뇌 루(漏)자로 풉니다. 번뇌가 없다. 여(如)는요 여여(如如)하다는 거는 영원불변하다. 무루하면서 조금도... 보세요. 청정하면서 영원하다고 했으니 이미 진여죠. 그렇죠. 그래서 열반의식과 상락아정(常樂我淨)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자 소승불교에서요 소승불교에서 “무상‧고‧무아”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대승불교의 오면요 대승은 처음에는 반야심경 같은 반야부 경전들이 처음에 등장해요. 그래서 공을 먼저 강조합니다. 근데 이 공을 강조하다가 열반경, 이제 상(相)을 강조하는 유식학(唯識學)이 있다면요 공(空)과 상(相)을 같이 정리해서 통합한 가르침이 성종(性宗)이에요. 성종.

8:01 “둘이 싸우지 마.” 대승기신론, 열반경 다 성종이에요. “다 싸우지 마.” 여기서는 만법유식(萬法唯識), 만법은 유식이다. 오로지 의식 작용이다(유식唯識) 이건데, 여기서 이 의식이 일단은 8식이라고 알려진 아뢰야식(阿賴耶識)이거든요. “우주는 아뢰야식이 창조했어. 근데 이 아뢰야식의 본질은 진여야. 본질은 진여의 세계야. 이게 무위(無爲)의 세계고(진여=무위).” 똑같아요. “그래. 원래 우주의 본질은 공이야. 공이야. 무위의 세계야.” 무위만 얘기했느냐(공종). 여기는 우주가 나오는 과정, 여기서 주객이 다 펼쳐지거든요. “주객이 다 만들어지는 이 8식이 본질이 본래 진여고 그게 무위야.”(상종.) “너네 그럼 둘 다 어느 한 측면만 얘기하고 있는 거 같아. 그러니까 본래 공인데 공적한 중에 영지가 있어서 이

9:02 진여가 영지야. 그래서 영지의 작용이 8식이야. 8식에서 우주가 나왔어. 너네 설명 잘했는데 8식에서 우주가 나왔다고 막 얘기하면 안 돼. 일체는 이 진여, 영지의 작용으로 봐야지. 더 뿌리가 있잖아. 왜 너는 8식으로만, 8식에서 우주 나왔다고만 해. 8식은 본래 진여의 작용인데.”(성종.) 그래서 이 성종은 우주만물은 진여에서 나왔다는 진여(眞如) 연기론(緣起論)을 주장합니다. 근데 유식학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줄여서 뢰야라고 해서 뢰야(賴耶) 연기론(緣起論)이라고 그래요. 아뢰야식에서 8식이 연기한다. 그러면 왜 그러냐면 유식학을 한 분들도 인도 철학자들은요 언어의 함정에 되게 잘 빠져요. 인도철학 하는 분들은 언어의 함정에 잘 빠져요. 서양이랑 비슷해요. 논리의 세계에 되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8식은 변화하는 거냐? 불변하는 거냐? 8식은 변화하는 거예요. 왜? 우주를

10:01 굴려야 되니까. 진여는요? 이름이 불변이잖아요. 자 답 나왔죠. 유식학파 입장에는 이겁니다. “자, 글 못 읽어? 진여-불변, 8식-변화. 우주는 변화로 만들어지는데 불변이 어떻게 변화를 낳아?” 이렇게 성종을 공격합니다. 근데 우리 선불교는 다 성종이에요. “일체는 참나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이게 유식학파에서는 의문인 거예요. 참나-불변, 아뢰야식-변화. 그러면 우주는 뭐가 낳았겠어요? 아뢰야식이. 근데 아뢰야식의 본질은 진여. 그러니까 선불교 선사는 갑갑한 거예요. “돌겠네 이거(진여)의 작용이 이거(변화)라며?” “맞다고.” “그러니까 이게(변화) 나왔지.” “아니라니까 이건(진여) 불변.” 그래서 그 (유식학파) 논리랑 싸우면요 답답해요. 언어에 딱 매여 버려요. “불변에서 어떻게 변화가 나와?

11:00 끝.” 그래서 종경록(宗鏡錄)에 보면 유명한 선사 분이 유식학파랑 이렇게 방금 이 말싸움한 게 나와요. “진여에서 우주가 나왔다니까.”-선불교. 유식-“진여는 불변이라니까 변하지 않는 게 어떻게 변화하는 세계를 낳아?” 그러니까 (선사 분이) “흰 파도가 푸른 산에 넘실대는구나” 하고 선문답 날리고 대화를 끝내더라고요. 아 이거 대화 안 되네. 그러니까 선사들도 대화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더더구나 말이 안 되겠죠. 뭔 말이냐면 “언어로 풀지 마라” 이 소리예요. 왜 이 함정에 빠지는지 아세요? 마치 언어로 이렇게 변화라고 해놓으면요 여러분 아뢰야식을 마치 아시는 거 같은데, 아뢰야식이 변화라고 했는데 아뢰야식이 여러분의 카르마를, 업보를 어떻게 관리해서 딱 필요할 때 업보를 내놓는지 아세요? 그럼 그 아뢰야식이 변화라고 한다고 해도 이게 눈에 보이는 변화상이 아니죠. 아뢰야식만 해도 이미 불가지(不可知)에요. 알 수 없는 세계라고요 벌써.

12:01 근데 진여는요? 불변 하면 아는 거 같죠. 이게 고정된 언어의 함정이라고요. 진여를 고정된 이런 어떤 물건처럼 생각하시는 거예요. “불변이잖아 얘가 어떻게 우주를 낳아.” 이 말이 함정이란 걸 아시겠어요? 마치 진여를 아시는 것 같은데 진여 변화상이요 우리가 감지할 수 없다는 얘기일 뿐이에요. 진여가 불변이란 얘기는요 보이지도 않고 무한해서요 감지 자체가 안 된다는 얘기에요. 진여가 변화하는지 안 하는지를 아는 우리의 이원성의 세계에 들어오질 않아요. 그런 얘기지 고정된 불변하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미. 그런데 언어의 함정에 빠진다면 딱 이렇게 돼 버립니다. 이게 지들이, 유식학파들이요 맨날 얘기하는 다른 애들 비방할 때 다 변계소집성에 빠졌다고, 두루 계산해 가지고 집착하는 병에 빠졌다. 어떻게 빠지느냐? 언어를 만든 다음에 이미지를 만들어낸대요. 이름 지어 놓고 지들이 이미지 만들어 놓고 집착한데요.

13:00 이게 지들이 제일 잘하는 거, 유식학파 지들이 제일 잘하는 거예요. 지들이 또 8식까지 이름 다 정해 놓고는 딱 언어의 집착에 걸려 가지고 우주가 어떻게 나오는지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아뢰야식도 모르면서 언어화 해놓고는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그걸 깨버리고 성종이 나온 거예요. “놀고 있네. 일체는 공적영지 참나의 작용이야.” 참나 연기론을 주장해요. “불변에서 어떻게 변화가 나와요?” “그건 네가 알아내.” 그것까지 어떻게 얘기해요. “네가 알아내. 오직 체험으로 알 수 있어.” 이렇게 말하고 가버리는 거죠. 이해되시죠. 이 얘기 자세히 들어놓으면, 여러분한테 또 논리적으로 이렇게 공격해오는 분이 있을 수 있어요. 특히 귀류논증학파 말꼬리 잘 잡기. “어 이게 말이 안 되는데요?” “말이 안 되니까 진리야.” 이런 배포가 있으셔야 돼요. 쫄아 가지고 “어 내 참나 가짠가? 참나 자꾸 느껴지는데 이게 가짜란

14:01 말인가?” 이러면 변계소집성에 완전히 당한 거예요. 자기가 체험하면서도 자기를 의심해요. 이렇게 돼 버려요. 제가 얘기했잖아요. 달라이라마 그분도 참나 체험하고 계신데 동시에 참나를 부정하잖아요. 왜? 논리에 빠진 거예요. 논리에선 참나가 없어야 돼요. 그런데 난 체험해요. 얘(체험)는 얘(참나)가 아닌 그게 되는 거죠. “얘(체험)는 참나라고 부르지 말자.” 이렇게 스스로 모순에 빠져요. 이게 이런 게 인도철학만이 아니라 서양철학의 한계입니다. 언어라는 건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무지를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이걸 펜이라고 부르는 순간. 여러분이 경험하는 거는 여러분 육근 작용에 중에 이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서 글씨도 써지고 이런 소리도 나고 이렇게 작동하고 있는 것뿐이죠. 여기다 여러분이 펜이라고 딱 이름 붙이는 순간 얘는 펜이 돼요. 여러분 우주에서 펜이 돼요.

15:02 이제 펜 하면 이게 떠오르고 이걸 보면 펜이 떠올라요. 여러분 우주는 이미 펜이라는 이름으로 각색된 겁니다. 꼭 이 영원불변의 이름도 아니에요. 얘가 펜으로 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여러분이 그냥 부른 거지. 다른 문화권에서 또 다르게 부르겠죠. 이렇게 근데 그 펜 하면 벌써 보편적인 이름이에요. 펜. 얘만의 이름이 아니에요. 뭐하고 똑같냐면 여러분이 제 우주에 사람으로 지금 기억되는 것과 같아요. 그렇죠. 이거 펜. 그러면 얘 비슷한 수많은 애들 서로 지금 파란 펜, 이제 이런 식으로 조금씩 구분해가는 거죠. 근데 언어를 딱 붙이는 순간 영원불변의 펜이 있는 거 같아요. 영원불변의 보편적인 펜하고 지금 내가 경험한 이 사태를 붙여버린 거예요. 그럼으로써 오류가 시작돼요. 그런데 이 오류가 없으면요 우리는 살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이 변계소집성을 없애자는 게 유식학

16:04 주장인데, 저는 그게 아니라, 변계소집성은 이 자체가 탐진치거든요. 이게 있어야 우주가 삽니다. 그래서 우주를 살려면 판타지가 필요한 거예요. 펜 할 때 그냥 이걸 펜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어떻게 부를 거예요. 지금 딱 몇 시 몇 분쯤에 시각에 흰색으로 보이면서 이렇게 소리가 나고 이렇게 이렇게. 아 소리도 벌써 언어를 썼네요. 소리가 나고 할 때 소리 그러면 보편적인 소리잖아요. 근데 내가 들은 건 지금 그 찰나의 존재했던 그 의미인데. 음도 또 언어네요. 이제 돌아버리는 거예요. 언어가 없으면 못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진 거예요. 그거는 중관학파건 유식학파건 성종이건 다 똑같아요.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요. 육근의 체험에 언어를 붙여 가지고 이해하는 거예요. 그게 육근의 세계예요. 육근 중에

17:02 의근(意根)이 하는 일이 그거예요. 언어화시키는 거예요. 언어화해서 이미지를 입혀 버려요. 그러면 영원한 펜이 이 펜하고 만나는 거예요. 영원한 펜과 내가 경험한 개별 구체적 사건이 보편추상적인 그 이름하고 딱 만나면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이름, 언어를 쓰고 살아가요. 이 자체가 다 모순이라고요. 그러니까 뭐 수학이나 물리학 이런 데서 뭐 불확정성 원리니 뭐니 하는 것처럼 언어 자체가 그래요. 언어로 정확한 도를 찾는다는 거는 그래서 불가능해요. 언어는 방향만 가르쳐 주는 거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귀류논증 같은 걸 쓰면 함정에 빠집니다. 말꼬리 잡아서 자기가 이긴 거 같아요. “참나! 참나라고 하셨어요?” 끝난 거예요. “참이란 모름지기 나란 모름지기...” 이러면, 다 분해하고 나면 없어요. “미안하다. 내가 참나라고 해서.” 이렇게

18:00 끝나요. 그냥 그것만 있는 거예요. 모든 문제는 경험만 있는데 거기다 참나라고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시작된 거죠. 그러면 그 말의 모습만 꿰어가지고 내가 자명한 진리를 얻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말 자체가 원래 모순적이라니까요. 한 마디도 말 못 합니다. “밖에 하늘 파래요?” 그러면 제가 하늘이라고 했잖아요. 제가 하늘이 파랗냐고 물어본 건 꼭 저 하늘을 말한 건 아니죠. 이건 이제 꼬여가죠. “어느 하늘을 말하는 거야?” 하늘이 어느 하늘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뭐냐면 이게 함정에 빠진다. 그런데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중관파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다. 왜? 언어화된 건 다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쓰거든요. 펜 하면 영원한 펜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영원히 우주에서 얘는 펜인 거예요. 이런 종자는 펜인 거예요. 거기에 얘가 부합하니까 펜이라고

19:00 부르는 거예요. 사람 그러면 영원히 사람이라는 종자가 있는 것 같아요. 영원히. 그러니까 이거는 사람이다라는 고유의 특성이 있는 거 같죠. 이게 언어의 함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걸 깨트리는 논리가 “공하다. 영원한 사람이 어디 있냐. 영원한 펜이 어디 있냐. 네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무상하게 변하는데.” “그러네.” 하고 끝나요. 귀류논증파는 언어만 공격하고 이겼다고 착각합니다. 자기들이 참나 부정했대요. 참나를 논파했대요. 제가 왜 욕을 많이 하냐면 그런 재수 없는 게 있어서요. 참나론자들을 욕하는 잖아요. 나무위키에도 써 있어요. 달라이라마 티벳 불교, 나무위키 찾아보시면 참나론자를 욕해요. 참나론자들은 체험을 강조한다 하지만 참나는 체험이 불가능하다. 왜? 논리적으로 참나가 없다는 게 논파됐기 때문에. 그러면 여러분 다 한목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거예요. 여기 참나 경험하신 분들은 다 “뭐야? 그러면 내가 경험한 건 뭐야?”

20:02 이상하죠. 그건 언어의 함정을 공격한 겁니다. 이 양반들이 한 건 실상이. 그러고 노는 거예요. 언어의 한계를 막 까면서 “봐 진짜 이 세상은 없는 거야. 없는 거야. 넌 날 때릴 수 없어. 때린다라는 거는 존재하지 않거든.” 맞아 봐야 정신을 차려요. 이상하게 때린다는 게 없거든요. 때린다. 영원불변한 때림이라는 게 어디 있냐. 땅바닥에 딱 엎어져 봐요. “아 이상하다. 때림이 없는데 왜 맞았지?” 뭐가 이상하죠. 이상하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그러니까 그 언어의 한계를 지적해서 무자성(無自性), 공성(空性)을 주장하는 귀류논증파식 주장은 무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이 쓰는 모든 그 세계는 모순에 가득 차 있어요. 이걸 유식학파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때문이라고 한 거예요.

21:00 근데 지들마저도 또 언어에 걸려가지고 “진여는 불변이니까 변화하는 걸 못 만들어 내.” 막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제 얘기 듣고 들으시니까 이해되지 이대로 여러분이 스스로 경전을 찾아서 요 몇 구절 읽으시면 딱 공부를 포기하시게 됩니다. 내 길은 아니었던 걸로. 뭐라는 거야 얘들이. 이해되시죠. 이렇게 언어의 함정에 빠지는 게 무섭다. 그래서 이거를 완전히 넘어서서 봐야 돼요. 이 프레임에 한번 빠지면 끝나요. 그래서 유식학파의 프레임에도 빠져도, 또 변계소집성이라고 남은 신나게 까는데 자기는 또 변계소집성에 걸려 있다는 걸 또 못 알아채요. 이게 이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언어의 질곡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하고. 제가 이렇게 조금씩만 맛보기 보여드리는데 변계소집성 이거 모르신다고 당황하지 마세요. 나중에

22:01 질리게 나올 거예요. 유식학파가 이제 대기하고 있어요. 나중에. 그러면 유식학파는요 우주를 분석할 때 세 가지 속성 밖에 없어요.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성질. 이게 우리가 말하는 연기(緣起)예요. 연기, 인연법, 연기법을 연기법. 멋있게 풀지 않았어요. 인연 따라 일어난다. 타자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질.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두루 변(遍)자거든요. 두루 두루 계산(計) 다 따져 가지고 이름을 붙여 가지고 소(所). 그다음 뭐죠. 집(執) 그러니까 두루 계산한다는 건 언어화 하는 거예요. 이거는 하늘, 이건 땅, 다 해놓고는 거기 집착해요. 하늘 땅이 진짜 영원히 있는 것처럼 집착해요. 똑같은 짓거리죠. 진여라는 걸 진여라고 이름 붙여 놓고 얘는 불변해야 된다고 집착해요.

23:00 똑같은 이걸 자기한테 다 적용해 봐야 돼요.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그 사람들이 또 언어를 제일 강조하고. 에고가 없다는, 무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면 제일 고집 세요. 아집 제일 있어요. 항상 이런 한계가 있어요. 재밌죠. 변계소집성, 의타기성(依他起性.) 그런데 이 모든 세계를, 그러니까 여기(변계소집성)는 오류의 세계죠. 탐진치의 망상의 세계. 이건(의타기성) 인연의 세계. 그러니까 유식학파는 이제 여러분 안 보셔도 아실 수 있어요. 존재하는 건 다 의타기성 밖에 없다는 거예요. 인연 따라 존재할 뿐인데 괜히 이름을 지어서 영원한 존재처럼 착각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영원한 하늘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예요. 그럼 이걸 다 떠나면 유식학파도 진여의 세계에 도달하겠죠. 진여는요 뭐라고 부르냐면 원만하고(圓) 본래 완성돼 있고(成) 성실할 실(實)자

24:04 진실한 본성(性)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열반에 해당됩니다. 원성실성. 보세요. 상락아정으로 원만하고, 원만한 덕을 다 갖추고 있고, 원만하고 다 이미 성취돼 있어요. 그러니까 무위법이라서. 만들어 가는 세계가 아니에요. 유식학파도 결론 똑같죠. 그러면 중관학파도 결론이 똑같아요. “이게 공이라니까. 텅 비어 있잖아.” 텅 비어 있는 중에 원만하면서 공(空) 원(圓), 그 안에 진실한 상락아정의 성품을 갖고 있는 세계, 이러면 퍼펙트하죠. 이게 성종이에요. 방금 제가 주장한 식이 성종이에요. 성종은 종합해 버려요. “너네 그만 싸워. 합쳐.” 우리나라 불교는 성종이 주가 됐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뭐 이제 신라 원효대사도 성종, 대승기신론을 강조했죠. 그 고려 수심결도 성종, 선불교도 성종.

25:00 우리나라는 전통으로 성종 불교예요. 근데 달라이라마 공종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 공종인 귀류논증파의 티벳 불교 보고는 여기 휩쓸리시거나, 남방불교 소승불교에 휩쓸리거나 하면 걸어온 길이 아깝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 넘어서 성종까지 갔는데. 근데 큰 책임이 누구한테 있어요. 큰스님들한테. 왜? 우리나라가 선불교만 강조하다 이렇게 된 거예요. 화두만 자꾸 화두만 잡으라고 하다가 이런 이론을 다 잊어버리고 제대로 공부를 안 해요. 절에 가면 화두만 잡으라 그래요. 화두만 터지면 된다고. 거의 이런 로또식 수련이 돼요. 그러면 자세한 내용도 모르는데요 화두만 찾으면 그렇게 참나를 체험하면 뭐 하냐고요. 언어화를 못 하는데.

26:03 언어화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불교 역사가 보여주는데 언어화를 세련되게 못 하잖아요. 내가 체험한 게 안 먹혀요. 부정당해 버려요. 이런 식으로. 특히나 선불교는 화두에 체험만 얘기하지 언어화 하는데 더 문제가 있죠. 언어화 하면 또 안 돼요. “대답해 보거라. 말 안 쓰고.” 뭐 이런 식이에요. 어이! 뭐 때려야 되고, 바닥 치고 이러는 거. 멱살을 흔들고. “오케이 통과.” 그러면 “나는 뭘 얻은 거지?” 스승한테 정확히 받았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몇 대를 거치다 보면 필링해서 필링으로 전수되는 가르침은요 몇 대 지나면 “어 저 필링이 아닌데” 그러면 끝나요. 언어화 안 된 가르침은 객관성 확보가 안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언어를 써야 돼요. 단 변계소집성을 우리는 수용하고 가자고요. 오히려 적당히 판타지가 있어야 재밌습니다.

27:05 누가 저 하늘 그랬다고 해서 그런 사람 있으면 친구 하겠어요. “야 밖에 하늘 좀 봐봐.” “하늘이라 함은 넌 어느 하늘?” 있잖아요. 개그맨. 그런 얘기하는 아저씨. “어느 하늘을 말하는 거냐? 하늘이란?” 뭐 이러면 대화 안 되죠. 근데 이게 그 함정을 파고든 거예요. “펜 좀 줘 봐.” “펜이라 함은 뭐 모나미도 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고 어떤 펜을 말하는 거야?” “저기 눈에 보이는 그거.” 이게 어려워지는 거죠. 언어의 함정이에요. 우리는 그걸 말하면 알아서 쓴단 말이에요. 그게 뭘 말하냐면 그걸 활용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 줄 아셔야 돼요. 그래서 제가 늘 주장하는 거예요. 탐진치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이게 구체적인 예 중에 하나예요. 언어생활 자체가 탐진치 덩어리인데 그게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안 그러면 소통을 못 해요.

28:04 이해되시죠. 자 그래서 부처님이 표현하신 언어입니다. 이 상락아정은 후대 대승불교가, 특히 성종이 표현한 거예요. 성종이. 공종 상종이 아닌 성종이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공종은 상락아정이라고 말 안 해요. 자 소승불교는 무상‧고‧무아만 얘기해요. 대승불교 중에서도 처음 반야경 계통은 상락아정을 얘기 안 하고 공을 얘기해요. 그렇죠. 공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제 이 성종 계통의 경전에 와서야 상락아정이 그대로 이게 진아, 참나라는 주장까지 나옵니다. 어디 나오냐? 열반경에. 대승 열반경. 소승 열반경 말고 대승 열반경에 보면 아예 진아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한 거예요. 소승불교에서는 무상‧고‧무아를 강조한

29:00 것과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상락아정의 여래장(如來藏)과 불성을 강조한다. 여래장이라는 건요 여래의 씨앗이라는 겁니다. 뭐죠. 장(藏)이 원래 자궁 안에 잉태되어 있는 걸 말해요. 그러니까 여래가 잉태되어 있지 온전한 여래는 아닌 거죠. 그 여래장은요 불성 같은 거예요. 여래의 씨알. 그러면 어느 때 쓰겠어요. 여래장은? 그냥 여래겠죠. 이 자체가 여래인데 이게 무지와 아집 번뇌에 쌓여 있을 때 여래장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참나를 여래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온전히 드러나지 못 하고 있는 여래란 뜻이에요. 온전히 드러나고 있지 못 하는 여래의 씨알. 그래서 여래장이나 불성을 강조한다. 같은 말이에요. 대승불교의 여래장 사상을 강조하는 경전들인 대반열반경. 요게 대승열반경입니다. 대반이라는 건요 대반 열반이거든요. 마하 열반이라고 해요. 부처님이 깨달으셨을 때 이미 열반 얻으셨죠.

30:01 부처님 돌아가실 때는 진짜 탐진치 뭐 오온 다 사라지겠죠. 돌아가신다고 하면 그래서 마하 열반, 위대한 열반이라고 대반 열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돌아가실 때 완벽한 열반에 들어가신다고 본 거예요. 그 사상 때문에 지금도 스님들 돌아가시면 열반을 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승만경(勝鬘經) 이게 또 재밌는 경인데 대승경에는 이제 여성 파워가 세어지면서 승만 부인이 설한 경이에요. 승만 부인이 여래장을 설합니다. 상락아정을 설하고. 승만부인경이 승만경이고요. 대승기신론에서 강조하는 덕목으로. 대승기신론도 상락아정을 강조합니다. 요 세 경전에서는 아주 강조돼요. 상락아정이 대놓고. 그래서 열반4덕 법신4덕이라고도 불립니다. 승만경에서는 여래의 법신은 상락아정이라는 걸요 상(常)바라밀 락(樂)바라밀이라고까지 표현해요. 상(常)바라밀 락(樂)바라밀

31:02 아(我)바라밀 정(淨)바라밀로 설한다. 바라밀은 열반의 세계, 저 세상 거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저 세상 락(樂), 저 세상 아(我)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무상‧고‧무아를 떠나서 상락아정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게 그대로 아(我)바라밀 상(常)바라밀이 되는 거예요. 열반의 세계의 영원함, 열반의 참 자아, 열반의 지복감, 열반의 영원함을 체험하는 게 그대로 바라밀이에요. 그래서 ‘열반’(번뇌가 완전히 소멸됨)이 바로 ‘진여법신眞如法身’, 즉 참되고 상주불변의 진리의 몸이니 열반이 지닌 4가지 ‘자성’ 중 ‘정(淨)’, 청정은 참 진(眞)자 ‘진眞’(참된 무루)과 통하며, ‘상(常)’은 상주불변과 ‘낙樂’(지복감)은 ‘여如’(상주불변의 무위)와 통한다. 그리고 ‘아我’는 ‘법신法身’(에고성을 초월한 지혜 광명의 진리의 몸)과 통한다. 그리고 상과 락은 그러니까 락까지 포함해서 제가 한번 해본 거예요. 자 상(常)은 여(如)고 불변이고 청정함은 참 진(眞)자, 진이다. 진여 이렇게만 얘기해도 되는데요 진여 이렇게만 얘기해도 되는데

32:02 락(樂)도, 그러면 락도 어떤 번뇌도 없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상(常)과 똑같다(樂=常). 여(如)에다 한번 붙여 볼 수도 있고, 붙여 보자는 거예요. 아(我)는 법신. 이 아(我)라는 건 참나를 말하니까 의식성이거든요. 참나가 있다는 건 의식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상락아정을 진여법신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냐 이거죠. 법신이라는 거는 또 지혜, 알아차리는 의식 자체를 법신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법신의 다른 이름이 지혜신이에요. 지혜신. 아는 몸. 진리를 알고 있는 몸. 그래서 법신(法身)이 지혜신(智慧身)이라고도 또 쓰기 때문에 진여법신 의미 안에 상락아정을 다 한번 때려 넣어 볼 수 있다 이거죠. 상(常) 영원하고 락(樂) 조금도 번뇌가 없고 정(淨) 청정하고 ‘나’인 이 자리를 다른 말로 진여법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냐 이거죠. 참되고 상주불변하면서 알아차리는 자리.

33:04 자 요거는 이제 각주 읽었고요. 부처님 말씀 가지고 한번 볼까요? 부처님 말씀 가지고. 부처님이 경전에서 께왓다 경에서 이렇게 얘기하시죠. 특징이 없고 볼 수 없다고 하셨어요. 특징이 없고 볼 수 없다. 어떤 특성도 없다. 이게 지금 공종에서 공을 강조하게 된 이유입니다. 여기는 특징이 없고 볼 수 없어. 텅 비어 있어. 여러분이 참나 세계 체험하면요, 참나를 체험해 보시면 거기는 어떤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 인과성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간을 인지할 수가 없는 거죠. 알아차리는 상태만 있어요. 시간 공간에. 한 생각이 일어나야 우리가 시간을 체크하거든요. 배고파 할 때 여러분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밥 먹을 시간인가 이런 게 아니고요. “배~고~파~” 하려면 시간이 전제돼야 돼요. 이해되세요. 배고파라는 건 시간이 흘러야 우리가 언어를 쓸 수가 있어요. 말을 할 수가

34:03 있어요. 언어라는 게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우리 의식에서 시간성이 작동하는 겁니다. 배~ 고~ 기다려야 돼요. 그러니까 지나간 과거의 ‘배’라는 언어를 붙잡고 지금 나오는 ‘고’라는 언어를 합치고 앞으로 나올 ‘파’를 예상해야 돼요.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우리가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또 공간성이 있어야 여기저기 다양한 존재를 우리가 떠올릴 수가 있어요. 다양성이 떠오르려면 마음속에 공간성이, 여기랑 저기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간성 공간성 인과성 이원성. 나와 남이 존재해야 되고. 이원성, 나와 남이 존재하죠. 인과성, 그 둘 간에 또 어떤 인과 작용을 일으키는지가 나와야 돼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존재하거든요. 우리 마음속에서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 인과성을 몰라 해버리고 존재하시면 오직 알아차림만 존재합니다.

35:02 시간을 인지할 수 없는 그냥 알아차리는 상태. 나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때는. 참나 상태에서 나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시공을 초월한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절에서 본래면목, 본래의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 자리는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근데 한 생각이 일어나야 내가 몇 살인지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나이가 인지됩니다. 아직 참나 상태가 아닌 거예요. 자 그래서 부처님 말씀 중에 열반에 상락아정에 부합하는지 한번 보자는 거죠.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특징이 없으면서 무한하게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열반하고 부합하는지 열반4덕에. ① “첫째 보이지 않고 특징이 없다”고 한 게 텅 빈 측면이잖아요. 그런 측면과 지금 통하는 열반4덕은 정(淨)과 락(樂)이 있다는 거죠. 정(淨): 잡염상(雜染相)이라는 게 어려울 수 있지만 오히려 잡(雜)스럽게 오염(汚染)된 형상(形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 공간 이원성에

36:01 오염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잡스러운 오염성이 없다 그리고 잡염상ㆍ차별상이 없는 무자성(無自性). 그래서 어떤 특징도 안 보인다는 거예요. 어떤 시간성 공간성 이원성이 있어야, 인과성이 있어야 뭐 언어화하고 파악하는데 파악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특징이 없다는 건 이런 거라는 거죠. 그래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얘기한다. 이때는 청정하다. 고요하다. 그리고 락(樂)은 번뇌가 없다는 얘기죠. 그럼 일체개고(一切皆苦)랑 반대되는 거죠. 번뇌가 없다 그러면 특징이 없는데 어떻게 괴로울 수가 있어요? 어떤 특징도 없는데 괴로울 수가 없죠. 어떤 특징도 없기 때문에 오염상도 없기 때문에 청정해요. 오염될 수가 없어요. 오염되지 않은 청정함과 번뇌가 없다는 거죠. 어떤 번뇌도 없는 상태. 이걸 부처님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죠. 그 다음에 뭐라 그랬죠. ② 무한하다 그랬죠. 무한한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무한하다고 했으니까 이 무한함은 상(常)과 통하겠죠. 상주불변(常住不變). 영원함과 통하겠죠. 무한하다는 건 영원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37:03 제행은 무상하다는 건데 이 자리는 영원하다. ③ 그 다음에 빛나는 의식이라고 했죠. 의식성은 뭐죠? 아(我): 만법의 자성(自性)이자 자아(自我). 만법의 자아, 만법의 본질이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요 자아가 아트만인데 힌두교에서도 이미 그 전에 쓰던 거죠. 그쵸. 그 당시 브라만교가 자아(自我) 그러면요 본질을 의미하기도 해요. 본질, 자성(自性), 나만의 특성, 나.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만법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도 풀 수 있지만 만법에서 어떤 영원한 본질이 없다라고도 푸는 거예요. 아(我)를 본질로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자면 만법의 본질인 자리, 만법의 자아인 자리,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만법에는 자아가 없는데 열반의 세계에 가니까 그 만법, 모든 만법의 나(我)인 자리가, 만법의 본질인 자리가 있더라는 거죠. 그걸 나 아(我)자로 한번 받아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은 부처님이 말하신

38:05 거랑 열반4덕이 맞죠.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번 또 검증해 보는 겁니다. 진짜 그 특성 없는, 무한하게, 모든 곳에서 빛나는 그 의식이, 빛나는 의식이, 청정광명심이 열반이 맞는가를 한번 따져 본 거예요. 이미 벌써 지수화풍이 없고 그 자리에는 어떤 이원성이 없다는 면에서 이미 한번 검증해 봤지만 진짜 열반4덕하고도 통하나 한번 본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이미 상락아정을 얘기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초기불교에서 이미 상락아정한 열반4덕을 말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건 어디에도 없어요. 제가 주장해 본 거예요. 저는 남이 하는 것도 잘 안 합니다. 제가 찾아내서 해본 거니까. 이상하다 그러면 주장한 제가 비판 받아야죠. 열반의식과 진여법신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39:00 ① 특징이 없고 볼 수 없다. 참되다죠. 참 진(眞)자. 참 돼서 무루, 번뇌성이 없다는 거고요. ② 무한하다는 건 여(如).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무위(無爲)랑 통하죠. 상주불변한 자리. 여(如). 상주 불변은 무위만 가능해요. 유위(有爲)는 상주불변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행무상이 현상계의 진리예요. 제가 이번에 한번 새로 주장해 본 거 있죠. 제행무상(諸行無常) 너무 우울하다. 제행무상. 진리는 맞는데 그래서 제행신상(諸行新商) 항상 제행은 무상하다는 얘기는 날마다 신상(新商)이라는 거죠. 매순간 신상이에요. 지나가 버렸으니까. 매순간 새로워진다. 이렇게도 한번 파악해 보시라고요. 무상에서 우울감만 느끼실 필요가 없다. 무상하다는 건 진리 맞는데 그 얘기는 날마다 매순간마다 새롭다는 것도 진리라는 거예요. 영원해야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현상계가 무상하다는 걸 고(苦)와 슬픔만 느끼시는 것도 맞지 않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 고라는 거는 우주적인 괴로움이지

40:06 무상함에서 오는 괴로움이지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것을 또 즐기는 그 여유도 있어야 돼요. 날마다 새로워지는 현상계를. 그래서 제행무상을 제행신상. 일체개고(一切皆苦)인데 “누가 고(苦)인 줄 모르나. 그런데 날마다 신상이래잖아.” 그럼 일체신나. 그리고 제법무아, 진아(眞我). “만법은 참나 작용이야. 내 것이 아닌 동시에 다 내꺼야.” 이것도 가능하죠. 소승과 대승을 또 섞어보면 이런 재밌는 것도 가능해요. 이런 모든 말의 책임은 제가 지니까 쓰세요. “누가 그런 망발을 하느냐?” 하면 제가 책임지니까. ① 특징이 없고 볼 수 없음: 진(眞). ② 무한함: 여(如). ③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 법신法身(주객의 이원성 초월한 무분별지無分別智). 아까

41:02 얘기했죠. 법신이라는 거는 진리를 알아차리는 몸, 진리의 몸 다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주객의 이원성을 초월한 무분별지 자리를 말한다고 보시면 돼요. 자 어려운 말 하나 나왔습니다. 이것만 아시면 앞으로 모든 강의가 듣기 쉬워지고요. 이거 모르시면 계속 힘들어지시니까. 무분별지(無分別智). 무분별지는요 여기가 진여열반의 세계잖아요. 진여열반(眞如涅槃). 진여열반, 진여열반에 접속을 하죠. 제가 항상 얘기하죠. 접속, 그 다음에 이 진여열반 자리에서요 우리 안에 육바라밀의 진리가 인가가 됩니다. 요게 무분별지예요. 무분별지라는 건요 아공 법공 구공의 이 진리를요, 무분별지는 지혜죠. 지혜잖아요. 아공 법공 구공의

42:02 진리를 직관하는 자리예요. 직관지에요, 참나 자리에서 직관해요. 그러니까 참나 접속이 이루어지면 자동으로 이 진리가 직관돼요. 인가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제가 인가라고 부르는 거예요. 직관돼요. 이거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니에요. 참나 상태. 이게 뭘로 아냐면요 되게 괴로웠어요. 남한테 뭘 주니 마니 괴로웠어요. 근데 딱 몰라 하고 참나 직관했더니. 참나 상태, 참나 접속을 했어요 처음에. 접속했더니 참나 상태에서 여러분이 의식하지 못 한 중에 직관을 해버려요. 진리를. 우주적 진리. 아공 법공 구공을 여러분은 몰라도 참나는 알고 있어요. 왜? 이건 우주 진리니까. 우주 진리를 직관해 버려요. 그래서 직관한 뒤에 다시 우리 육근의 세계에 돌아오시면 육근의 세계에서 변해 있어요. 좀 전에 뭘 알았는지 관대해져 있고 “아 그 사람도 살아야지.”

43:02 뭐 이상한 생각이 나옵니다. 이게 직관했다는 증거예요. 직관하고 나서 뭘 하냐면 육근 차원에 내려오면 분석을 해요. 분석은 육근으로 하는 거예요. 분석을 하려면 생각 감정이 있어야 되잖아요. 생각 감정을 떠나서 직관의 세계에서 바로 진리랑 하나 되어 가지고. 여기서 중요한 건 무분별이잖아요. 생각을 못 해요. 여기는 이원성이 없어요. 따라서 이게 지금 참나 상태라는 거예요. 참나 상태에서 진리랑 하나가 됐다가 떨어질 때 진리랑 하나 됐을 때 뭘 알아요. 그게 무분별지예요. 요게 직관이 일어나 버려요. 그리고 탁 떨어지면 떨어질 때 우리 생각에서 딱 이제 이해가 돼요. “아! 뭐는 어떠니까 어떻게 해야겠구나” 분석이 돼서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이거 어디다 쓸까요? 이쪽에다 그려볼게요. 요것만, 이거 기억하세요. Z자 이론. 이렇게 그리시면 돼요. 여기

44:04 쌍방향입니다. 이것만 일방향이에요. 여기 뭐죠. 지금 진여 열반의 현존, 진여 열반 현존. 이게 접속이죠. 이게 접속이죠. 그 다음에 여기서 인가가 이루어져지죠. 진리 직관 직관해요. 아공이건 법공이건 구공이건 여기서 공부한 만큼 아무튼 뭔가 알아내요. 공부한 만큼 알아낸다는 건 벌써 이제 에고가 개입된 거죠. 그 이전에 이미 통으로 진리는 알아요. 우리는 아는데 이때, 에고도 같이 직관을 해요. 에고한테 뭔가 알려진 정도가 여러분 역량 수준만큼 그 직관한 거를 느껴요 이 에고도 같이 공명하면서 직관하면서 뭔가 느껴요. 생각 이전에 알아요. 이때 에고도 같이 직관이 일어납니다. 생각을 안 했는데 알아진다는 의미에서

45:00 알아져요. 그러면 이 에고가 이제 뭘 해요? 진리를 분석해요. 이제 이때는 육근이 작동하는 거죠. 그래서 진리를 실천합니다. 모든 공부는 영적인 공부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왜 여기는 한 방향, 일 방향이냐? 사실은 이게 그냥 하나예요. 그러니까 참나 접속을 하거나 열반 접속을 하면 자동으로 여러분은 진리를 직관할 수밖에 없어요. 안 할 도리가 없습니다. 쌍방향이 아니에요. 이 에고의 직관 가지고 얘기하면 쌍방향이에요. 그러니까 열반에 들었다가 에고가 직관하게 만들어, 에고가 직관하느냐 안 하느냐? 근데 이 참나 자체는 원래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일방향으로 해놓은 거예요. 이해되시죠. 참나는 원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참나에 접속만 하시면 여러분도 진리를 같이 알아버려요. 그래서 에고가 뭔가 좀 느껴요. 이때 제 얘기 있잖아요. 자찜으로 느낀다고. 아 이게 자명하고 이건 찜찜하고. 뭔가 느낌으로

46:03 와요. 생각 이전에 느낌으로 오면 우리는 그 직관을 이제 에고적 차원에서 느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분석의 재료로 써요. 무분별지라는 거는 분별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알아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에고의 직관까지 좀 포괄해서 말을 하겠지만 본질은 원래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앞으로 불교 얘기할 때 이 부분을 반야라고 하거든요. 이것도 반야바라밀이래요. 반야바라밀이 두 종류가 있어요. 반야바라밀은 두 종류가 있다는 거 알아두세요. 이게 다 반야바라밀이에요. 자 반야바라밀은 직관과 분석을 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근데 둘로 나누면 이거는 무분별지라고 한다. 분별이 없는 지혜. 요거는요? 분별지. 무분별지와 분별지를 종합해

47:01 가지고 진리를 정확하게 구성해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때가 많아요. 반야바라밀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갖고 나머지 이 육바라밀, 이것도 반야 이것도 반야니까요. 반야바라밀하고 나머지 다섯 바라밀, 실천에 해당되는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합치면 이것도 육바라밀이 되죠. 그래서 반야바라밀경 계통에서는 반야바라밀과 나머지 6바라밀을 얘기할 때가 있어요. 이때 이 반야는 뭐냐는 거죠. 반야바라밀도 둘로 나누어서 얘기할 때가 있다고요. 그럼 뭔지 아셔야겠죠. 왜냐하면 반야가 인도해 주지 않고 어떻게 실천을 해요. 이 반야는 이쪽에서 길안내도 해줘야 되고 동시에 진리도 알고 있어요. 형이상학적으로 진리도 꿰뚫어 보면서 형이하학적으로는 다른 모든 실천의 길 안내도 해줘야 돼요. 반야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반야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바라밀도 안 된다는 거예요. 반야가 진리를 직관해 준다는 게요 기본값이

48:09 새로워지는 거예요. 진리를 직관하는 그 순간, 여러분 참나 접속해서 진리를 알고 있을 때 여러분 기본값이 바뀐 거예요. 여기서 나오면 이상하게 이상한 자찜이 나와요. 기호(嗜好)가 바뀌어 있어요. 기본값이 바뀌었기 때문에 기호가 바뀌고 자찜의 기준이 바뀌어 있고 이때 바라밀이 가능해져요. 이때 해야 바라밀이에요. 그러니까 참나 접속을 안 하고 바라밀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이런 질문 많아요. “견성 안 하고 참나 접속 안 하고 육바라밀 되게 잘 하시는 분이 있는데 보살인가요?” 그러면 저는 “육바라밀 잘하신다는 건 정말 전생에 좋은 선근이고 영성 지능이 높으신 거고 다 좋은데 견성을 하고 하셔야만 바라밀이라고 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기본값이 바뀌어서 나와야 바라밀이라고 한다. 그것도 의식적으로. 근데

49:01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바라밀을 할 수가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 본성이 원래 기본값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양심의 기본값이 작동해서 여러분 홀린 듯이 할 때 있죠. “나 절대 물에 안 들어가.” 어떻게 아끼던 강아지가 물에 있네요. 자동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내가 미쳤나?” 구해내고 나서 “홀린 듯이 들어갔다.” 바라밀을 하신 거예요. 계산 안 하고 했어요. 그때 바라밀이 일어난 거예요. 근데 늘 이러지 못 한다고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이 바라밀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요. 근데 보살은 의식적으로 그걸 일으키는 게 보살이라고요. 왜? 모든 중생은 무의식적으로도 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해야 보살이라는 얘기는 이 얘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무의식적으로 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요. 너무나 귀한 행동이지만 무의식적으로 했기 때문에 뭐가 지나가는지 본인도 몰라요. 잠깐 기본값이 바뀌었었는데 “내가 미쳤었나”라고 해요. “안

50:01 그래야지. 조심해야지. 다음부터 안 그래야겠다. 미쳤었나 보다.” 기본값이 잠깐 바뀌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기본값 중에 분명히 양심도 있다는 건 알아요. 자기도 자기가 유달리 기특할 때 있죠. 어쩌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막 우주도 아무도 관심 없는데 혼자 막 뿌듯해 가지고 “이 감동 누구랑 나눌까.” 막 이런 게 있단 말이에요. 기본값 바뀌어서 그래요. 기본값이 바뀌면 특징이 땡기는 게 바뀌는 거예요 지금. 이게 자명해졌고 갑자기 이게 재밌어졌고 이게 싫어졌단 말이에요. 이게 완전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뀌었대?” 그러면 뭐 주변에서 그러겠죠. “죽을 날 됐나 보다. 사람 바뀌면 죽는다더니.” 그게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보살이라고요. 이해되시죠. 이게 원래 보통은 죽을 때나 돼서 바뀐다. 뭐 이런 정도로 사람은 안 바뀐다. 바뀌었단 말이에요. 이거 바꾸는 비결입니다. 기본값 바꾸는 비결이 이거예요. 참나 접속만 하면 자동으로 바뀌어요. 그 바뀌는 걸 얼마나 에고가 소화해내고 그걸 분석으로 또 언어화

51:06 시켜요. 언어화까지 시켜서 딱 고정불변 시켜가지고 내가 저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화 한다고 할 때 탐진치를 써가지고 고정불변의 존재처럼 딱 굳히는 작업이 들어가요. 이게 변계소집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오류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작업이 있어야 여러분 마음속에 그 염체가 힘을 가져요. 언어화를 해야 힘을 가져요. 그러니까 우린 그 현상계의 모든 재료를 보살도의 재료로 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언어화 시켜서 이거를 실천으로 옮기는 도구로 쓰는 겁니다. 동물이 못 하는 게 언어화죠. 언어화를 해야 딱 고정시켜요. 날아갈 체험을 고정시켜요. 기록해 놓지 않은 그 기억은 사라집니다. 제가 대학 때 그 구절을 보고 그 뒤로 열심히 메모를 더 열심히 했어요. 적어 놓지 않은 건 진짜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체험에. 제 체험과

52:02 쇼펜하우어 말이 딱 만나면서 “아 적어 놔야겠다 진짜.” 제 머리 믿었다가는 흔적도 없어져요. “우리가 만났었나?”가 돼요. 나중에 진짜. 그러니까 언어화가 꼭 필요하다. 언어도 활용해야 된다. 이렇게 실전적인 보살학교 없습니다. 다 “언어 버리라” 그래요. 그런 애들이 제일 말 많고 그래요. 언어에 집착심하고. 언어를 활용하세요. 언어는 원래 이상한 겁니다. 활용하세요. 잘 활용하는 게 귀한 거지 버리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자 이렇게 해서 기본값이 바뀌어요.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참나 접속해서 인가를 해가지고 “참나 접속, 진리 인가, 맡김.” 거기에다 내 삶을 맡겼는가? 이게 여러분 하루 보살도 수행의 매력이에요. 내가 오늘 무슨 공부했는지는 이걸 떠올려보시면 알아요. 얼마나 의식적으로 접속해가지고 기본값을 바꿔서

53:00 바라밀을 끌어내어 썼는가. 이게 기독교인들도 꼭 들어야 돼요. 이 부분이 성화의 비밀이에요. 성령 각성해 가지고 강력한 믿음으로 성령과 하나 된 다음 기본값이 바뀐 상태에서 의로워진 상태, 칭의, 구원받은, 원죄가 사해진 그 상태에서 죄성이 사라진 기본값으로 사랑 정의가 솟구쳐 나올 때 그걸 표현하는 거예요. 땡길 때, 땡길 때 그걸 내가 좋아서 해야 그게 거룩한 행위가 나와요. 거기서 성화가 나와요. 칸트 식으로 괴로운 채로, 의무감으로 해야만 도덕이다. 칸트는 정말 또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게 바리새파 철학이에요. 바리새파 철학은요 좋아서 하는 거 싫어해요. 칸트는요 우리가 동정심 때문에 좋아서 남을 도와주잖아요. 그건 도덕이 아니래요. 왜? 지가 좋아서 한 거래요. 뭔가 이상하죠. 또 언어의 벽이 또 시작됐죠. 언어라는 게 이렇게 무서워요. 정말

54:00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언어 마구니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왔다 여기서 걸려요. 뭐 똥차 피하다... 뭐 있잖아요. 이거 피하려다 여기 걸려요. 그러니까 공(空) 아니면 상(相), 막 난리가 아닙니다. 어느 한 군데 빠져가지고 허우적거리게 돼 있는데 칸트는 “아니 정언명령, 우주가 명령, 신이 명령을 하는데 너가 하는 행동에 의지의 준칙이 반드시, 너의 법계의 행동 원칙이 보편적 법계에, 보편 법칙에 맞게 행동하라.” 말은 다 좋아요. 그래서 이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 때 도덕이래요. 이걸 모르고. 그러니까 제가 말한 의식적이지 않다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걸 의식하지 않고 하는 동정심 때문에 하는 행동은 선(善)이 아니래요. 도덕이 아니래요. 뭔가 하나는 잡는데 하나를 또 놓쳐요. 왜냐하면 기본값이 바뀌어서 하면 좋아서 하게 돼있어요. 의무감 때문에 계속하신다는 건 지금 뭔가 이상한 거거든요. 기본값은 안 바꾸고

55:04 “아! 괜히 칸트 책을 봐가지고 안 할 수가 없네” 하고 도덕을 계속 하고 계시면 하실 때마다 우울하겠죠. 그러니까 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식의 도덕론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본값을 안 바꾸고 하자는 거는요 그 스토아학파식 주장이나 이것도 다 기본값이 바뀌어서 이루어지면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고요. 기본값을 안 바꾸고. 소크라테스도 보세요. 내면의 다이몬이 시켜서 했어요. 소크라테스 삶은 딱 이겁니다. 이걸로 설명 가능해요. 지금 4대 성인 다 이걸로 가능합니다. 기독교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가 없고요. 뭘로 거룩한데요? 억지로 해서 거룩할 수가 없어요. 바리새파도 다 억지로 했어요. 소크라테스식은요 내면의 다이몬의 현존을 느낍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신기하게 다이몬,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은 하라는 일은 없는데 하지 말라는 일은 꼭 있었대요. 이게 뭘 말하는지 아세요? 제가 늘 얘기하는 다이몬의 현존을 느끼면

56:06 다이몬이 내면에서 직관의 신호를 보내요. 그러면 나의 기본값은 이걸 하고 싶어요 지금. 자 탐진치의 기본값은 이거 하고 싶어 합니다. 탐진치라는 건요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써도 돼요.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인간의 잘못된 속성 세 가지가 탐진치로 나옵니다. 분석이 똑같아요. 자 탐진치 때문에 인간은 이게 땡겨요. 근데 다이몬이 내면에 또 다른 나의 기본값이 뭐라고 해요? 다이몬은 먼저 하라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항상 제가 늘 주장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뭘 해야 될지는 욕심이 가르쳐 줍니다. 탐진치의 본성이 가르쳐줘요. 뭘 오늘 해야 될지? 어차피 여러분은 거기 오늘 계실 거예요. 오늘 땡기는데. 그렇죠. 뭘 해야 될지는 아니 참나가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고요. 뭘 해야 될지를 바로. 욕심이 먼저 크게 외치죠. “오늘 저기 가야 돼.” 여러분의 카르마를 감안해서 외칩니다.

57:03 그러면 그게 딱 떴을 때 참나 접속을 딱 하면, 다이몬 접속을 하면 다이몬이 얘기를 해 줘요. “찜찜.” 그러니까 할지 말지는 다이몬이 결정한다는 게 이거예요. 뭘 하라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하려고 할 때 방해는 꼭 하더라. “찜찜. 졸라 찜찜.” 계속 찜찜 버튼을 계속 누르는 거예요 여기서 다이몬이. “웬만하면 하지 마라. 양심에 걸린다.” 그러면 요 기본값은 또 따로 있는 거죠. 내 기본값은, 에고의 기본값은 하고 싶어 했어요. 참나의 기본값이 반대한 거예요. 이거를 의식하며 살다 보니까 성인이 됐어요. 그럼 이분은 지금 두 개의 기본값을 쓴 거죠. 이래서 성인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이분은 바라밀이 가능했던 거예요. 내면의 소리가 안 들리는데 소크라테스가 하지 말래서 하지 않는 정신은 바리새파밖에 안 된다고요. 철학책을 하필 읽었더니 도덕법칙이 그렇다 그래서 어쩔 수

58:01 없이 부득이하게. 칸트 말도 가능하려면 이겁니다. 자 칸트 말이 맞으려면 이러면 칸트 말도 맞아요. 칸트를 버릴 순 없잖아요. 칸트 말도 맞으려면 자 칸트도 우리 내면에 있는 그런 참나의 접속이 된 거예요. 뭘 하려고 했는데 참나 접속이 딱 돼서 참나가 도덕법칙이 어긋난다는 이유로 “찜찜찜찜” 하니까 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안 했어요. 이러면 좀 애매하죠. 이러면 억지로 참긴 했지만 그 내면의 신호를 받고 움직인 거죠. 그게 직관의 신호면 그분이 억지로 했더라도 다른 기본값에서 그래도 전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더 자명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51% 싸움을 한 것뿐이지, 억지로 했다는 건 51% 누가 승기를 잡느냐의 싸움이었지 기본적으로 내면에서 솟구친 그 소리는 도덕, 우리 내면에 있는 도덕 법칙에서 올라온 거죠. 실천 이성을 통해 선(善) 의지를 통해 올라온 거면 그것도 도덕 맞아요.

59:02 그러니까 칸트씩 이론이 맞으려면 내면의 선 의지에서 딱 솟구쳐야 돼요. 거의 신성의 메시지여야 됩니다 그게. 근데 그거를 내가 받고 부득이, 아 나는 진짜 하고 싶었는데 그 도덕법칙을 알고 나니까 부득이 내 욕망을 절제하면서 참았을 때 도덕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칸트씩 이론이 뭔가 좀 빠지긴 했지만 이렇게 회통에 볼 수는 있다고요. 회통해 볼 여지는 있기 때문에 제가 말씀 드렸고요. 소크라테스 식으로 이해하시면 간단합니다. 내면에서 신호가 와서. 근데 그렇게 하면은 “기분이 좋거든요” 할 수도 있잖아요. “왜 그렇게 했어요?” “기분이 좋거든요.” 다른 기본값이 좋아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기본값이 좋아한 건 도덕 맞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분이 좋으면 안 된다는 식의 칸트 얘기는 그런 부분은 잘못되어 있다는 거예요. 기분 좋아서 한 거는 도덕이 아니다. 아니에요. 그건 두 가지 기본값에 대해서 또 정밀하게 얘기를 못 하신 거예요. 우리 안에는 그 기본값이 작동하면 감정이 바뀌어버려요. 감정체계가. 그게

1:00:04 기분이 좋아지고 그게 땡길 수가 있어요. 그렇게 못 했을 때 오히려 애가 타는, 탐진치가 바뀌어 버려요. 탐진치는 비슷합니다.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데 기준이 바뀐 거예요. 나는 이걸 얻어야 기분이 좋아. 탐욕이었고 이거 못 얻으면 화가 났는데, 기준이 바뀌니까 모든 사람한테 이걸 못 줘서 제가 짜증이 나고 주고 싶은 탐욕이 일어나면 바뀐 거죠. 기준만 바뀌면 탐진치는 문제가 안 돼요. 변계소집성, 탐진치, 언어 다 문제 안 돼요. 다 보살도의 재료일 뿐이에요. 제법진아(諸法眞我). 다 내 겁니다. 다 내 오류예요. 내 무지고 내 아집이에요. 안 버릴 거예요. 그래서 경영만 잘하면 돼요. 이게 대승입니다. 경영만 잘하면 돼요. 왜? 여기서 가 또 더 따져요. “아니 경영을 잘한다고 해도 그거 다 마구니고 오류 투성이라니까.” “네가 꺼져라 마구니야. 마구니도 본래 공하니라.” 이렇게 나가야 돼요 대승은. “본래 열반이니라.” 이해되세요. “언어도 본래 열반이고 공하고 다 본래 공하지 무슨 공

1:01:05 불공을 따지는 거야.” 이렇게 치고 나갈 배포가 있으면 대승보살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벌써 그래서 공(空)을 얘기하고 그래서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얘기를 하는 거고 거기서 경영, 육바라밀 보살도가 또 나오는 거예요. 이게 다 종합돼서 나가는 거예요. 이게 대승불교가 장난이 아니에요. 근데 우리나라 대승불교는요 그래서 지금까지 회통불교라고 이걸 회통시켜서 종합적으로 잘 이해한 불교였어요. 왜? 성종이 회통불교거든요. 성(性)은 공ㆍ상(空ㆍ相) 회통불교예요. 그래서 이 회통불교였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무 지금은 성종 안에서도 선불교에만 치우치면 이건 회통이 안 돼요. 그렇죠. 그러면 또 남방불교나 이런 공종의 가르침에, 공격에 또 흔들립니다. 회통이 안 돼 있기 때문이에요. 회통이 넉넉하면 그걸 껴안고 갈 텐데. 녹여 버리면서. 그래서 좀

1:02:05 큰 그 개념을 잡고 가시고. 진여법신(眞如法身)까지 오늘 했고 무분별지(無分別智)라는 게 뭔지 오늘 좀 아시겠어요. 무분별지는 여러분이 달라진 기본값에서 자동으로 알고 있는 그 직관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별을 하지 않았는데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무분별의 특징은 분별이 없다는 건 이원성이 없는 세계예요. 즉 주객이 없는 세계에서 아는 거예요. 이건 진여가 아는 거지 여러분이 아는 게 아니에요. 주객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는 게 아닌 게 무분별지고 진리 직관이고요. 그런데 여러분한테도 알려져요. 그래서 이걸 제가 에고의 직관이라고 따로 쓴 거예요. 이제 이 직관의 결과물이 여러분한테 알려져요. 여러분도 같이 공명하면서 에고가 필링을 느껴요. 이제 내가 분명히 느껴요. 내가 뭔가 느낍니다. 이게 자명하고, 이게 찜찜하고, 이게 땡기고, 이건 안 땡기고, 이게 딱 알아져요. 그래서 여러분 사실은 진리

1:03:00 직관은 참나 그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여러분 모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선정에 들면 자동으로 직관이 일어나는 걸 아는 거지. 여러분 이때는 이원성이 초월해 있기 때문에 내가 뭘 알았다고 말을 못 해요. 여기 나오면 느낌이 있겠죠. 이 느낌을 가지고 분석해서 아는 거예요. 이것도 간단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명상에 들었다 나오면서 “아 알았어.” 이게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명상에 들어가서는 진리랑 하나가 된 거예요. 이 부분이 포인트입니다. 진리 직관이라는 건 진리랑 하나가 된 거예요. 이때는 여러분이 진리였던 거예요. 내가 사라지고 진리만 있었어요. 진리를 안다 모른다 하면 안다 쪽이지만 안다라는 그 생각이 없었던 거죠. 나와 남이 없으니까. 진리 그 자체가 됐다가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게 진리다”라고 이 에고의 느낌에 전달돼요. 그 느낌을 가지고 언어화해서 “나는 해탈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열반에 들어갔다 나올 때 “나는 해탈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예요. 들어가서 나왔을 때 “나는 해탈했다.” 이

1:04:02 과정이 없다면 갑자기 나는 해탈했단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왜? 그냥 의식의 공백만 있어야 돼요. 진짜 열반이 거기는 어떤 의식이 침투할 수 없는 세계라는 그 말 그대로라면 그냥 혼절해있는 공백만 있어야 돼요. 이해되시죠. 의식의 공백이 있는 게 아니라 연결이 있고 거기서 나는 해탈했다라는 주장이 나오려면 정확히 직관한 거예요. “아 이게 해탈이고 이게 열반이구나”를 직관하고 나와서 그 느낌, 필링을 가지고 분석한 거예요. “나는 해탈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윤회해 들지 않는다”라고 윤회를 초월했단 말이 딱 나와야 돼요. 이게 안 나오시면 공부가 잘못된 겁니다. 이 과정이 정확히 일어나면, 이때 아공의 진리만 알아도 이 말이 나와야 되고. 법공의 진리까지 깨달으면 이제 그 화두가 터진 그 깨달음이 나와야 되고. 구공의 진리까지 가면 보살도가 나와야 돼요. 그런데 여기 진리 직관 하나라면서요? 근데 왜 아공 법공 구공을 따지시나요?

1:05:04 에고가 수용하는 게 달라요. 에고는 자기 카르마대로 밖에 수용을 못 합니다. 그래서 에고의 직관이 달라지는 거지 진리 직관 똑같아요. 거기는 언어를 떠난 세계고 나와 남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저기선 차별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몰라만 하시면 부처님하고 차별이 없는 거예요. 하느님하고도 차별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도 저 의식일 뿐이에요. “I AM THAT I AM.” 하면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 자체잖아요. 하느님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성령과 하나가 되고 부처와 하나가 됐는데 나와서 달라지는 거예요. 에고가 느낀 그 직관이 달라요. 자기 그릇만큼 밖에 못 느껴요. 그래서 그 느낌. 그래서 아라한들은 딱 아공의 진리만 직관해 가지고 언어화해서 살아가요. 견성한 도인은 딱 법공의 도리까지만 알아내 가지고 언어화해서 선문답 던지면서 살아가요. 구공 도인은 딱 구공을 깨닫고 나오니까 선문답 날리고 하는 것도 다 부질없어지고 뭘 해요?

1:06:03 육바라밀 잘하려고만 열심히 살아요. 남이 보건 말건 내 우주를 육바라밀로 경영하는 데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언어니 탐진치니 다 귀한, 일체 공한, 일체 다 공한 재료로 알고, 내 의식의 작용으로 알고, 육바라밀로 경영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본래 공인데 가리지 말자. 잘 먹고 잘 잘 쓰자. 이렇게 가면 보살도입니다. 좀 이해되시죠. 지금 초기불교 경전 가지고 대승보살도까지 좀 융합해서 말씀드렸는데 잘 이해하셨으리라고 믿고요. 이 모든 게 “몰라 괜찮아 자명” 실천하면서 “접속 인가 맡김”만 하자는 제 주장의 이론적 배경일 뿐이지 이런 걸 실천하시는 분이 진짜 보살도를 걸으시는 겁니다. 이거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내 삶에 적용 안 하면

1:07:00 꽝이잖아요. 근데 적용하는 법은 간단해요. “몰라” 한 번 하면 열반현존, 진여현존, 참나 현존, 참나직관, 진리직관, 아공‧법공‧구공 직관이 일어나고, 거기서 내 에고가 내 그릇에 맞게 필링을 느낀 것만큼 그걸 가지고, 그 느낌을 살려서 분석해 가지고, 내 삶에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것뿐이에요. 매일매일 이렇게 사시는 게 바라밀을 닦으시는 거고, 보살되는 길이고, 기독교식으로는 칭의 성화를 날마다 체험하시는 길입니다. 날마다 거듭나시면서 거룩한 삶으로 가시는 길이에요. 종교를 떠난 얘기인데 종교적으로 얘기하려니까 양 종교 언어를 빌려다 설명한 거지 이거 다 변계소집성이에요. 언어의 장벽에 빠지시면 안 돼요. 뭔 느낌인지 아시면 돼요. 예 마치겠습니다. 1:0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