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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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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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6. 10. 13.
동영상 길이 1:07:25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BwMnHqZojSE




61절입니다. 이거 다음 시간이면 ‘진심장’ 하(下)도 끝날 것 같아요. 되게 빠르게 나가고 있는데, ‘진심장’ 『맹자』 7편 중에 ‘진심장’편은 이제 곧 끝날 것 같은데요.

보시죠. 61절 “맹자가 이르기를, 성인은 백 세의 스승이다” 그래서 맹자가 볼 때 이제 백이(伯夷)나 유하혜(柳下惠)도 성인에 들어가죠. 실제 계제야 모르겠지만 이제 성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백이와 유하혜의 동생이 도척이라고 그때 나왔던 도둑이었죠. 전설은 그래요,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유하혜의 동생이랑 공자님하고도 유하혜가 한 100년 정도 텀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장자』에서는 공자님이 유하혜를 찾아가서, 동생 내가 좀 설득해 보겠다 해서 가서 도척한테 아주 깨지는 내용을. 식겁해가지고 공자님이 도망 나오는, (말이 안 되지만) 그런 우화가 이제 『장자』에 있는 거죠. 유하혜라는 유명한 분인데 백이와 유하혜가 그런 사람이다.

백(100) 세의 스승이면요, 세(世)를 보시면요, 보세요. 지금 백 세를 이렇게 지금 우리가 쓰는데, 요게 30이죠? 10, 20, 30이에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30은 30년을 말해요. 한 사람이 이렇게 30이 되면, 애를 낳으면 또 그 애가 30. 이렇게 해서 우리가 ‘대(代)를 이어간다’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세(개의) 대(代)를 맞춰서 30년 정도 지금 잡고 얘기하는 거예요. 백 세(대代)면 뭐죠? 3천 년인가요, 백 세(대) 그러면?

“백 세의 스승이니 백이(伯夷)·유하혜(柳下惠)와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백이의 풍모를 들으면 ” 바람풍(風)을 갖다가 풍모라고 지금 풀었는데,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백이의 풍(伯夷之風) 한문으로 그렇게 돼 있는데, “백이의 풍을 들으면, 유하혜의 풍을 들으면” 그러면 이 풍(風)은 어떤 사람이 움직이면 바람이 인다고 보는 거예요, 기운이.

그러니까 제가 움직이면 어떤 바람이 소문도 나고 뭔가 저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바람들, 그런 걸 말하는 거니까, 백이의 그런 풍모(뭐 어쨌다더라, 풍채가 어쨌다더라, 그 사람이 움직이면 뭐 어쨌다더라 하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 사나운 사내가(사나운 사람이) 아주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사람도, 그 얘기를 백이가 이렇게 했던 어떤 이야기들을 들으면(행적들이죠. 행적 같은 거죠) 그러니까 움직임으로 인해서 바람이 일어나니까 그런 움직임을 말해요.

“백이의 움직임을(언행을) 들으면 염치를 알게 된다” 아주 고집 센 사람도요, 염치라는 게 이거죠. 이게 청렴할 ‘염(廉)’자거든요. 풍(風)은 움직이니까, 일어나는 거니까 움직임이라는 겁니다. “어떤 움직임을 들으면 그 사나운 사내가 염치를 안다”는데 이게 이게 창고죠, 이거는. 이게 원형이 이거예요. 한쪽이 터져 있는 이렇게 집, 이 집에다가 ‘벼 화(禾)’자죠. 벼를 두 개를 이렇게 손으로 잡은 거죠. 이렇게 이거는 ‘겸할 겸(兼)’자가 되죠. 이렇게 벼 두 개를 이렇게 잡고 있으니까 ‘겸하다’고요.

벼를 이렇게 잡은 거를 어떤 집에다 놔두면, 여기는 어떤 일종의 창고겠죠. 그러니까 창고 담당자의 마인드, 마음 씀을 말해요, 렴(廉)은. 우리가 그러니까 ‘청렴하다’ 할 때 이걸 쓰잖아요, 청렴할 렴(廉). ‘염치’ 할 때도 쓰고. 그냥 뭐냐면 벼 관리를 되게 잘해야 해요. 네 거 내 거, 확실히 구분하고 그러는 마음이에요. 아주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그 욕심만 부리던 사나운 사내가 백이의 이야기를 딱 듣고 나면,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그래서 이렇게 분별을 잘하게 되더라, 이거죠. 네 거 내 거를 가르고, 그런 염치나 이런 분별이죠, 이게.

“나약한 사내가 뜻을 세우게 된다.” ‘내가 뭘 하겠어’ 했던 사람이, 백이(성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나도 성인이 한번 돼보겠다는 이런 입질을 하더라는 겁니다. 성인들 얘기를 들으면 이래야죠. 성인전들을 우리가 보면 백이·유하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 이때는 맹자가 지금 우리한테는 일종의 성인전의 대상이죠. 맹자나 공자 얘기를 들으면, 막 살던 사람이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고 뉘우치고, 나약한 사내가 “나도 성인이 잘하면 될 수 있겠다”라는 이런 희망을 갖게 되더라는 거죠.

유하혜도 마찬가지인데요. “유하혜도 야박한 사내가 유하혜의 그런 행적을 들으면 인심이 좋아지더라는, 야박하던 사람이 이제 사람한테 정을 더 쏟게 되고요, 못 된 사내가 되게 관대해진다.” 이 차이가 이거예요. 유하혜는 아주 너그럽기로 유명한 사람이고요. 백이는 절개 지키기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두 성인의 캐릭터가 틀려요. 그니까 백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뭔가 이렇게 곧은 절개를 세우게 되고, 유하혜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내가 너무 야박하게 살았다 하고 이렇게 좀 자신을 좀 더 풀더라는 거죠.

너무 이렇게 단속하면서 자기만 챙기던 사람들이 좀 더 마음을 열게 되고, 백이는 뭔가 뜻을 세워서 나도 그렇게 한번 (원칙주의자죠, 백이는 나름. 원칙적인 삶을 살아보자) 이런 뜻을 품게 되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백 세 전에 떨쳐 일어남에” 그러니까 “백 세(대) 전에(3천 년 전에) 태어났는데 그 이야기가 3천 년 뒤에 듣는 사람한테 감동을 일으키고 발심을 일으킨다면 그건 성인 아니냐?” 이제 성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냐. “하물며 만약에 친히 배운 자는 오죽하겠느냐!”

만약에 3천 년 뒤에 들어도 감흥이 일어나는데, 성인한테 바로 배우면 (이때로 성인이면 이제 공자님이죠) 공자님 밑에서 바로 배운 제자들은 오죽했겠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근 데 이 얘기가 재밌는 게 성인에 대해서 뭔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6:25

다시 읽죠, 61절. “맹자가 이르기를 성인은 백세(百世:오랜 세대)의 스승이니” 백 세면 아까 이 세(世)는 30을 합쳐놓은 글자거든요. 30년을 말합니다. 그래서 3천 년이에요, 백 세(百世)면. 3천 년의 스승이라, 이 얘기는 이제 3천 년을 지나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3천 년 뒤에 인간이 들어도 또 감동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양심은, 인간인 이상 양심은 똑같기 때문에 이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는 거는 시공을 초월하죠. 그래서 저희가 고전을 많이 봐야 하는 이유가, 지금 현대에 나온 책들은 100년 뒤에 남아 있으리라는 법이 없어요.

근데 3천 년, 2천 년을 건너오는 책은 인간 본성에 맞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 봐도 “좋다! 좋다!”하는 것들은 인간 본성이 담긴 게 많아요. 그래서 그게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문학이든 철학이든 그런 것들을 보면 인간의 아주 고질적인 문제점이나 아니면 인간의 희망이 거기 다 있죠.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본성의 아주 희망적인 부분이든 절망적인 부분이든 그게 잘 다뤄져야만 고전이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이제 힘들다고 막 써놨는데 그게 바로 100년 뒤에 “이게 뭐야?” 하면서 감정이입이 안 되면 버려지는 거거든요. 근데 100년 뒤에 봐도 슬프다고 그러고, 서양에서 봐도 슬프다고 그러고, 이게 인간 본성의 제일 공통 분모를 건드린 거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이 정도, 한 개인의 마음이 이렇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이제 전 세계적으로 하나일 텐데, 이게 각양이겠죠. 근데 이 인간의 남들하고 공통된 부분을 우리가 본성이라고 했을 때, 이 본성을 건드리는 건 동서양이 하나죠. 본성 건드리면 똑같이 나옵니다.

희로애락도 인간이 똑같아요, 얼굴 표정이. 심지어 동물들도 난 화났는지, 이게 지금 뭔가 창피해하는지, 뭔가 불만이 있는지 얼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희로애락이 원초적으로 올라오는 것도 성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사실은 같아요.

근데 이제 문화권 따라 올라오면서 왜곡이 일어나는데, 그 왜곡을 넘어서 있는 공통점, 여기를 건드려야만 우리가 고전이 될 수가 있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책을 써도, 이게 고전이 될 수 있다 없다를 알 수 있어요. 바로 제가 인간의 본성을 아주 건드린 책을 쓰면, 그게 이제 책이 남기만 한다면, 퍼지기만 한다면 그거는 고전이 될 확률이 아주 높죠. 왜냐하면 동서양 누가 봐도 그거 맞다고 할 테니까요. 8:42

그래서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성인’이라는 게 결국 여기서 말해주고 있는 게 이거죠. 성인은 제가 그려볼게요. ‘귀 이(耳)’자에, ‘입 구(口)’자에 ‘맡을 임(任)’자인데요. 이게 갑골문으로 보면 이렇게 돼요. 이게 이제 귀인데요. 여기는 입이고요. 사람이 요렇게 있어요. 요게 사람이에요. 그게 흙 위에 서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이걸 귀라고 보고, ‘입 구(口)’라고 보면 지금 글자로 봐도요, 이렇게 해서 이게 지금 사람인 거죠. 9:11

이게 이제 ‘흙 토(土)’ 위에 서 있는, 그래서 이렇게 돼버립니다. 이게 뭐냐면 흙 토 위에 서 있다는 건 땅이 이렇게 솟아 있는 데예요. 거기 사람이 딱 있어가지고,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여기 있겠죠. 뛰어난 사람이에요. 남보다 높은 데 서서, 잘 듣고 이걸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말로. 남이 못 듣는 걸 듣고 말해 줄 수 있는.

“적이 쳐들어온다!”라는, 적의 소리를 듣고, 아주 거기 높은 지역에서 관찰하고 있다가 얘기해 주는 사람도 이 그림에 해당이 되겠죠. 근데 아주 이거를 잘하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의 의미까지 가서 이걸 보자면 이게 단순히 이런 은밀한 소리가 아니죠. 이게 사실은 뭘 잘 듣냐면 유교 개념으로 보면 천명(天命)이에요. 하느님이 뭐라고 하는지를 잘 듣고 인간한테 얘기해 주시는 사람이에요.

이게 유대교에서도 이런 전통이 있죠. 이게 ‘예언자’라고 그러거든요. 하늘님 말을 듣고, ‘선지자’라고도 하고, 예전에 ‘예언자’라고도 해요. 남보다 이렇게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들이 성인(聖人)이죠. 유대교에서도 이러면 성인이죠. 이런 예언자들이 누가 임금이 될 지도 알아서, ‘사울왕’이나 이런 사람들, ‘다윗왕’도 가서 이런 예언자들이 기름을 부어줘요. 그러니까 아무나 부어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 돼요, 그 임금이.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대리인 격이 되니까. 그래서 이런 성인들이라는 게 결국 이겁니다. 그러면 이 천명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항상 얘기하듯이 이거예요. 하느님의 명령은 하느님이 인간 만들 때 명령어를 이미 입력해 놨어요, 프로그램으로 우리 내면에다가 ‘인의예지’라고. 인의예지 안 하고는 없죠. 그러니까 결국 천명을 잘 듣는다는 게,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인을 말하는 거예요. 나는 성인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 말씀이 뭐냐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인의예지죠. 인(仁), 내 몸으로 여기고, 거기다가 예를 다해서 그렇게 해서 딱 펼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인의예지를 펼치는 사람이 펼치라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죠, 명령이자. 중용도 이거고요.

하나님이 나한테 명령한 게 본성이라고 그랬으니까,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사실은 하나님 말 잘 듣는 게 되기 때문에 결국 성인이라는 건 별것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인의예지를 어떤 가림 없이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자기가 구현했기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11:40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라고 해요. ‘내가 하나의, 여기서 일정 시공간, 지금 이 문화에서, 제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구현했다.’라고 그런 자부심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나님을 좀 보여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양심, 내면에 있는 인의예지의 그런 프로그램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내가 말하고 평소에 하던 거, 너희들한테 말하던 거, 그거가 하나님의 메시지고, 내가 하는 모습이 하나님이 하라는 거 그대로 한 거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다.”라고 해서 얘기해 준 거죠.

근데 이 부분이 기독교에서는 하근기를 위해서 얘기한 거죠. 상근기는 그렇게까지 안 물어봤겠죠. 그러니까 하근기들이 물어보면 예수님이 버럭 그래요. “내가 그동안 너희랑 그렇게 같이 있었는데 모르느냐, 아직도!” 이러면서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 나랑 접속을 해라! 이렇게 얘기하는데, 나랑 접속하라고 얘기한 사람은 하근기예요. 12:33

상근기는 “바로 네 안의 하나님하고 접속해라.” 너도 받아봐. 너도 들어라, 받아서. 나도 통신해. 너도 접속해서 들으면 된다.12:48

이 얘기를 하는 게 상근기고 하근기인데, 이 하근기를 위한 경(經)이 만들어진 게 『요한복음』이에요. 상근기를 위한 게 『도마복음』이고. 지금 이 두 개가 다시 한번 또 붙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동안 『요한복음』 위주로 왔어요.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랑 접속해라” 이런 식으로 다 논리가 왔어요. 근데 『도마복음』에는 안 그래요. “네가 하나님이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죠. 결국 이게 이 성인을 놓고 이 사람을 보고 따를 거냐? 이 사람이 듣고 있는 이걸 따를 거냐? 이 차이죠. 나도 바로 천명이랑 접속하면 안 되느냐, 예수님을 거쳐야 되느냐, 요 문제죠. 13:30

이런 논리를 교회가 악용해서 지금 한 2천 년간 교회나 성당에서 “우리를 통해서 들으라.”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성인의 그룹이니까 이렇게 비유하기는 그런 거죠. “나를 통해야만 된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다이렉트로 바로 만날 수 있는 얘기를 자꾸 차단하죠.

그렇게, 그렇게 하면 교회나 성당이 의미를 잃게 되니까, 자꾸 우리를 거치라고 그러고, 우리 입을 통해서만 하나님 말을 들으라고 해요. 이건 엄청난 도그마죠. 이런 식으로 우리가 그런 거에 반대하는 거고, 『도마복음』에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앞으로 『도마복음』이 나오고 더 알려지고 하면 기존 천주교나 이렇게 개신교의 입장이 많이 좀 바뀌어야 할 텐데. 그래서 지금 부정하고 있는 거예요.

『도마복음』을 인정을 안 해주는 게, 그걸 인정해버리면 자기들 뿌리가 좀 흔들려요. 여기 동양에도 성인들이 다 있었는데 동양이라고 왜 성인이 없겠습니까, 양심 그대로 하면 성인인데. 그래서 양심대로만 그대로 하면 성인이기 때문에 3천 년 뒤에(100세 전에) 떨쳐 일어난 성인들의 행적에 대해서, 3천 년 뒤에 누군가라도 들으면 감동하고 발심이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도 양심이 똑같이 있으니까요. 내가 가진 양심을 3천 년 전에 누가 구현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나도 발심이 돼서 나도 한번 해보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거죠. 이게 이제 이 챕터의 골자입니다. 14:52

이거 하나 여담인데 기독교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보세요. 제가 양심이라고 흔히 우리가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게 이 정도라면, 여기에는 그 문화권에 되게 오염된 양심들을 양심이라고 하는 게 많아요. 뭐냐 하면 ‘3년 상은 지내야 한다.’ ‘부모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효도를 잘한 거다.’ 이렇게 어떤 그 문화권에 오염돼 있는 걸 우리가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게 많아요.

‘자살하면 지옥 간다.’ 뭐 이런. ‘자살하면 안 돼’ 여기까지는 괜찮은데요, ‘그러면 지옥 간대’ 뭐 이러면 벌써 하나 오염이 됐죠, 어떤 문화권이. 옛날 중세에 ‘자위행위 하면 지옥 간다.’, ‘자위행위 하지 말아야지’하는 그 마음은 우리가 누구나 좀 몸에 에너지가 떨어지고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지옥 간다.’ 이런 얘기들이 붙은 건, 다 이게 왜곡되어 있는 건데, 이걸 프로이트는 ‘슈퍼 에고’라고 그럽니다.

우리 에고 너머에 에고한테 자꾸 이래라저래라, 뭐라고 하는 도덕적인 명령을 하는 자를 ‘슈퍼 에고’라고 하는데, ‘슈퍼 에고’를 우리 흔히 ‘양심’으로 알고 있고, 이 ‘슈퍼 에고’는 알고 있는데 절대적 기준이 못 돼요. 이건 이미 어느 한 문화권에 오염된 걸 말해요. 이거는 다 후천적인 거예요. 지금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슈퍼 에고’는 후천적인 거예요. 다 믿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 들어서 무의식이 형성돼 있는 거예요. 무의식에 나를 뭐라고 뭐라고 꾸짖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에요. ‘도덕적인 자아’. 물건 훔치려고 할 때 ‘훔치지 마! 너도 남이 그런 너 걸 훔쳤으면 좋겠어?’ 이 정도 얘기하면 이건 선천적인 건데, 여기에 뭔가를 더 붙여서 얘기하면 이건 후천적인 거예요. 그래서 ‘슈퍼 에고’는 후천적인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양심으로 알고요, 지금 이번에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걸 봤는데, 천주교에 ‘양심 성찰’이라는 수련이 있거든요. 앉아서 양심을 돌이켜봐요, 자신의 양심을.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서 “양심을 다 믿을 수는 없다.”라고 얘기를 해줘요. 그러면 이게 “그래도 양심을 얘기를 듣는 게 하나님한테 가는 그래도 올바른 방법인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렇게 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칸트도 양심이 후천적인 거라고 봤어요, 철학자들이. 그러면서 칸트는 뭐라고 했냐면 자기는 ‘선의지’라고 부르는 게 따로 있고요. ‘도덕률’이라고 부르면서 이게 뭐냐면 쉽게 말하면 “네가 하는 행위가 누구나 해도 되는 행위만 하라”라고 마음에서 강렬한 명령이 내린다는 거예요. 이게 ‘정언명령’이라고 무조건 명령이에요.

이거 ‘도덕률’은 무조건 명령이에요. 제가 대학 체계를 해놨는데, 무조건 명령인 게, “네가 하는 이 행위가 보편법에 합당한 것만 하라!” 남이 해도 되는 것만 하라! 라고. 그래서 이거는 도덕 ‘선의지’라고 따로 보고, 양심은 후천적인 거라고 칸트도 좀 무시했어요. 17:36

근데 우리 『맹자』에서 말한 양심은요, 이게 아니라 이거거든요, 지금. 그렇죠. “인의예지 하라! 사단을 하라!” 하는 건, 인간이면 누구나 있는 거죠. 공통된 거죠. 거기에 이제 “측은지심 하라”라는 건 공통인데, “측은해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이러면 이거는 후천적인 거죠. 이걸 구분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양심은 “아, 나 양심에 찔려!” 하는 게 어렸을 때 하루 하지 말라고 한 짓이 그걸 어겼기 때문에 찔리는 거면요, 이거 찔리는 거예요. 진짜 양심에 찔리는 게 아니라. 진짜 양심은 ‘인의예지’예요. 핵심은 ‘인’이니까, 인의예지가 다 뭉쳐서. 그러니까 상대방이 나라면 기분 나빴을 일을 내가 했을 때 가책을 받는 거, 이게 선천적인 거지 여기에 뭔가 덧붙여지면 후천적인 거예요. 그거 좀 구분해 보시라고요.

이건 후천적인 양심이고요. 우리가 『맹자』에서 말한 양심은 이런 양심들의 공통점만 다시 모아놓은 겁니다. 공통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자위행위 하지 마라! 남한테 도둑질하지 마라! 도둑질하면 사형이다! 도둑질하면 지옥 간다! 도둑질하면 동물로 태어난다!” 많은 말을 붙일 수 있지만 핵심은 그거잖아요. “도둑질하지 마라.” 18:47

왜냐? ‘네 것도 누가 훔쳐 가면 기분 나쁠 거 아니냐’ 이거는 선천적인 거예요. 근데 여기에 뭔가 다른 문화, 그 문화만의 특색이 들어갔다면 그는 이제 후천적인 양심이다. 그래서 내 안에서도 이것도 하나의 고정 관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모른다는 마음을 자꾸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만 우리 원래 프로그램을 알 수 있냐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하고 구분이 안 돼요. 고정 관념하고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거랑 떼어서 봐야 해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 일으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해서 관찰해 볼 수 있으면, 뭘 원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덧붙인 생각들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가 돼요, 계속. 그래서 덧붙인 것들은 자꾸 맞는지 다시 검토해 보셔야 합니다. 19:25

천주교에서 양심 성찰 공부를 한다는데 우리 거랑 다른 게 이것 때문에 다르다는 거예요. 거기는 약간 못 믿을 양심을 지금(합니다). 가책은 주니까 연구는 하는데 정확한 원칙이 지금 맹자만큼 서 있지 않아요. 맹자가 얘기하는 선천적인 양심은 이거는 동서고금 남녀노소 공통입니다. 그걸 한번 잘 정리해 보시고요. 20:00

62번이요. 그 양심의 인의예지가 또다시 나오는데. 62번에 “맹자가 이르기를, 인자하면 사람다움이다.” 항상 얘기하죠, ‘인(仁)’자가 사람(남)하고 나를 똑같이 여기는 게 인(仁)입니다. 남하고 나는 똑같다. 이 말은 멋있죠. ‘인(仁)해야 사람이다’입니다. 인해야 사람이다. 인을 안 하는 사람은 사람이 좀 덜됐다. 20:28

그러니까 봉우 선생님이 “공자님만큼 가면 그래야 그제야 인간다움이 나온다.” 하는 게, 인이 좀 되거든요. 그러니까 나와 남을 둘로 보고 나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큰 한에는 사람다움이 떨어지고요. 이제 나하고 남을 같이 보고 좀 더 이렇게 마음이 열려서 대아적이 됐을 때, 그때야 이제 제대로 된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재밌는 게요, 지금 이게 ‘인(仁)’자인데요. ‘어질 인(仁)’자의 금문이나 전서에 가면 이렇게 나오는데요, ‘어질 인(仁)’자가. 우리 ‘동이족 이(夷)’자 있죠? 지금 ‘동이족 이(夷)’자랑 이게 예전에 통용되던 글자라는 게, ‘동이족 이(夷)’자가 원래 갑골문에서는 이렇게 썼거든요. 21:51

사람을 껴안아 주는 대인, 남을 이렇게 품어주는. 요 양쪽에 끼면요, 이게 우리가 아는 ‘협객 협(俠)’자예요. 그래서 이게 협객이라고, 협(俠)이라는 게 무협지에 협(俠)이 약한 사람 도와주는 거잖아요. 사람들을 내 휘하에서, 내가 도와주는 사람이죠. 끼고 도와주는 사람. 그래서 ‘협(俠)’자랑 같아요. 근데 이놈이, 요 사람이 슬그머니 여기로 들어왔죠? 요렇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돼버렸어요. ‘활 궁(弓)’자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이 의미를 살려서 ‘동이족 이(夷)’자의 전서나 이런 것 중에 이렇게 돼 있는 게 있어요. 이거랑 똑같죠. ‘남과 나를 둘로 보지 않는다’라는 게 ‘동이족 이(夷)’자의 전서 중의 하나예요. 이렇게 써도 ‘이(夷)’자도 되고, 이게 그러니까 ‘인(仁)’자도 되고. 통용돼서 쓰던 같이 쓰는 정도의 글자가 있어요. 22:57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동이(東夷)’나 ‘어질 인(仁)’이나 ‘사람 인(人)’이나, 이게 결국엔 ‘이래야 제대로 된 사람이다.’라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에 같이 쓰는 글자예요. 그러니까 “인자(仁者)는 인(仁)하냐?” 이런 말이 쉽게 나오는 게요, “인(仁) 해야 사람이지” 당연히 이렇게 하는 말이에요.

‘인(仁)은 사람다운 거다’. 제대로 된 사람이다, 인(仁) 해야. 근데 “합하여 말하면 도다.” 이래가지고 이 앞뒤가 안 맞아요, 지금 이 글이. 보세요! “인(仁) 해야, 인자해야, 사랑을 해야 사람이다. 근데 합하여 말하면 도다.” 이해가 안 되시죠?

그래서 주자가 이제 억지로 이걸 푼다고, “인(仁)은 이치고, 이데아고. 인(人)은 우리가 이제 물체니까 사람이니까 이치랑 이데아랑 만물이 만나야 거기에 도가 나온다.” 막 이렇게 풀었는데 도저히 그건 좀 안 맞고요, 이야기가 억지고요. 주자도 이렇게 풀어놓고도, 주자가 한 말이에요, 『사서 집주』에. 밑에 보세요. 23:43

“혹자가(송나라의 우무라는 사람인데요) 혹자가 이르기를,” 외국본에(이게 고려본을 말합니다. 지금 현재 고려본에 이런 게 발견되지는 않았어요.) 고려본에 “인야(仁也)” 아래에, 뒤에 보시면 있죠. “의야자는 의야라, 예야자는 리야라, 지야자는 지야라, 신야자는 실야라” 20자가 더 붙어 있더라 이거죠, 외국본에 보니까. 24:11

빠진 게 있다는 거죠. 지금 ‘합이언지(合而言之)’라는 게 설명이 안 되니까, 뭐랑 뭘 합쳐서 도라는 거냐? 이게 설명이 안 되니까, 이걸 넣어서 보시면 이렇게 되죠. 보세요! 이걸 넣어서 보면요, 지금 인의예지를 이렇게 그어놓고요, ‘인야자(仁也者)’는 쉽게 풀어줘요. 인은 사람다움이다.

그다음에 ‘의야자(義也者)’는 이게 ‘마땅할 의(宜)’자거든요. 뭔가에 합당하게 하는 거다(宜也). ‘합당하다, 마땅하다’예요. 그다음에 ‘예야자는(禮也者)’ 예라는 거는 ‘리야(履也)’라. 리는 ‘실천할, 밟을 리(履)’자거든요. 직접 실천하는 거다. ‘지야자는 지야(智也者知也)라’, 뭔가를 아는 거다.

아는 거, 실천하는 거, 사람다운 거, 합당한 거, 그다음에 인의예지신 중에 ‘신야자는 실야(信也者實也)라’ 이게 성실하다(實) 거든요. 여기서 잘 믿는다는 게 아니라 ‘신뢰를 준다, 성실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인의예지신 중에 ‘신(信)’은요. ‘신(信)’은 성실입니다.

이렇게 이 말을 해놓고 그다음 ‘합이언지 도야(合而言之 道也)’라는 게 이렇게 돼 있더라는 거죠, 고려본에는. 그럼 보세요. 합하면 합해보면, 인의예지 합한 거예요. ‘인의예지신이 도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딱 문장이 깔끔하죠. 그러니까 주자가 이렇게 본 다음에 이치는 극명해진다는 게, 주자도 이게 자기가 억지로 풀어놓고, 이 말을 최대한 풀어놓고 이걸 덧붙인 거예요.

“이렇게 풀면 깔끔하다. 근데 옳고 그름은 내가 모르겠다.” 직접 고려본을 본 건 아니라는 거죠, 지금. 그런 말이 있대요. 근데 이제 고려본이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어서 확신 있게 말을 못하는데, “이치에는 이게 맞다.” 이렇게 주자도 해놨어요. 우리가 볼 때 이게 맞죠.

도(道)는 인간도(道)인데, 인간의 길은 인의예지신밖에 없는데 인도는, 주역에서 ‘인도(人道)는 인과 의가 인도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인과 의가 나와야 합해서 도다.’라고 해야 하는데, ‘인만 나오고는 갑자기 도다’라고 나와버리니까, 이게 좀 빠진 구절이 있다고 보시는 게 맞습니다. 26:10

63절은요 “맹자가 이르기를, 공자님께서 노나라를 떠나실 적에 이르시기를, 더디고 더디도다, 나의 발걸음이여” 그러니까 고향 나라라서, 공자님도 고향 나라니까 애정이 더 깊잖아요. 고향 사람 먼저 밝혀야 맞죠. 공자님도 고향 사람 먼저, 자기가 거기에 자기가 태어났으니까요.

하늘에 어떤 뜻이 있는 거니까요. 거기서 자기랑 더 가까운 사람들한테 먼저 도를 펴고 싶은데, 도저히 안 되니까 떠나시게 됐는데요. “더디다 더디도다, 나의 걸음이여” 이렇게 얘기를 하셨다는 겁니다. 26:25

“부모 나라를 떠나는 도리이다.” 거부모국지도, 부모국을 떠나는 도리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나라 떠나실 때는 칼 같으셨다”는 거죠. 밥을 지으려고 물에다 이렇게 담가놓은 쌀이 있는데, “그 쌀을 손으로 이렇게 대충 받아서 쌀만 챙겨서 바로 나왔다”라는 거죠. 뭐냐 하면 밥을 하려고 물 앉혀놨다가도, 이제 바로 가도 된다고 하니까, 이제 떠난다고 바로 그 쌀 챙겨서 떠나셨다는 거예요. 다른 나라를 떠나는 도리다. 27:25

이게 성인도 자기 나라 더 이렇게 챙기는 그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이러면 이제 묵가에서는 “겸애를 못 했다. 똑같이 사랑해야지, 어떻게 이렇게 되냐?”라고 하는데 똑같이 받은 게 아니죠. 받은 대로 주는 거예요, 우주에. 그게 공정한 마음이에요.

이 사람한테 100을 받았으면 이 사람한테 100을 주려고 노력하고, 10을 받았으면 10을 챙겨주는 게 공정한 거지,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서 앞의 거 다 무시하고 또 똑같이 하면, 이 사람이 삐뚤어지겠죠? 100을 줬는데 10을 받고. 그러면 사람 마음이 다 100을 주는 게 아니라 다 10을 주죠. 제일 야박한 거 가지고 남한테 똑같이 해요.

그니까 『맹자』의 앞에 나왔어요. “제일 사랑하는 거 가지고 남한테 베푸는 사람은 인(仁)한 사람이고, 제일 야박스러운 거 가지고 진짜 사랑해야 할 사람한테까지, 즉 100 갚아야 하는 사람한테까지도 10 갚는 사람이 불인(不仁)한 거고, 100 갚는 그 마음으로 10 줄 때도 좀 더 챙겨주는 마음이 인(仁)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64절은요,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가”라고 되어 있는데, 공자님 얘기거든요. 공자님이 진나라 채나라 사이에서 한번 재난을, 7일간 밥도 떨어지고, 오도 가도 못하게 진나라·채나라에서 막아서, 그 들판에서 이렇게 굶주린 적이 있었어요. 이때 이제 우화들이 많아요. 이때 안자가 밥을 찾으러 갔는데 공자님이 의심했다 어쩌고 뭐 이런 얘기, 추접스러운 얘기들이 우화로 남아서 도는 얘기들이 많아요. 28:44

이걸 진짜로 믿고, 우화인데요 다(모두). 이 얘기 이상이 없어요. 우화인데 이제 그 얘기를 가지고, “공자님 비판하는 안자가 더 낫다.” 이렇게 이걸 소설로 쓴 게 곽말약인가가 쓴 소설이 있어요. 소설을 진짜로 믿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갔는데 안자가...” 안자를 이제 더 추켜세우는 소설이죠.

공자가 의심해서 “안자가 혹시 튀었나(도망갔나) 해서, 밥을 혼자만 구해오다가 튀었나?” 이런 거. 군자를 비하려고 쓴 거예요. 군자라는 사람들이 참 이렇다 하는, 그런 소설이 있어요. 이때의 얘기입니다.

“임금과 신하 간의 사귐이 없었어요.” 상하지교라고, 위아래에 서로 사귐이, 『삼국지』에 자주 나온,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를 주로 하는, ‘수어지교’라고 하는 게 있는데, 물과 고기의 만남이다. “그런 만남이 없어서 그렇다.”

『순자』 유자 편에 보면, 보세요. “공자님께서 남쪽으로 초나라에 가실 적에, 진나라 채나라 사이에서 재난을 당했다.” 한자도 똑같죠. 지금 ‘액(厄)’자가 이렇게 쓰여있는데요, 거기에. 우리가 흔히 쓰는 ‘액(厄)’자는 이거죠. ‘재난 액(厄)’자. 『순자』에도 똑같이 쓴 거 보면, 이때는 이게 그냥 널리 쓰였던 말인 거 같아요. 잘 안 쓰는 글자인데요.

“진·채 지간에서 액을 당했는데 7일간 화식(불에 익힌 음식)을 못 드시고, 명아주국에 쌀도 없었다.” 명아주국을 드셨고, 명아주국이 그냥 들에 있는 풀이죠. 흔한 풀인데 “그거 뜯어서 국 끓여 드시고, 쌀도 없어서 밥은 못 드시고, 제자들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왜 이런 얘기가 나오냐면, 임금과 신하의 사귐이 없어서 왜 이런 재난을 당했다는 거냐? 초나라 왕이 부른 거예요. 공자를 그나마 알아봤던 사람인데, 결국은 이 사람이 죽어버려서 결국은 무산돼요. 근데 진나라·채나라에 있다가 공자님이, 초나라 왕이 부르니까 한번 해보자고 가요, 왕도를 한번 펴보자 하고.

가는데, 진나라·채나라에서 그 얘기를 듣고 “초나라에 가면 큰일 난다, 성인이” 자기들은 쓰지도 않을 거면서. 그러니까 내려가는 분이 아무것도 못 쓰게 막아야 한다고 해서 막은 거예요, 사실. 그 바람에 이게 무산돼요, 초나라행이. 31:07

결국 초나라 왕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이제 아주 무산됐는데, 이게 뭐냐면 공자를 알아보는 임금이 없어서 그랬다 하는 거죠, 결론은. 진나라나 채나라 왕들이 알아봤다면, 공자를 알아봤다면 자기들이 썼던가 이렇게까지 안 나왔을 텐데... ‘적한테 가면 큰일 난다.’ 정도만 알아본 거죠. 내가 쓰지 않을 거면서. 이런 사연, 이것도 결국에는 뭐냐 하면 임금한테 제대로 등용이 못 되는 한이죠. 거기서 일어나는 사연이다. 31:22

맹자가 이런 데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자기가 등용이 안 되니까요. 세상에서 알아주질 않으니까 공자님도 결국 그런 일 당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맥계’라는 사람이 이제 선비인가 봐요, 그 당시에. 그래서 “맥계가 이르기를” 이름이 좀 독특한데 우리 ‘맥족’ 할 때, 그 ‘맥(脈)’자인데요. “맥계가 이르기를, 저는 남들의 입에 크게 순하지 못합니다.” 리(理)가 이게 결이죠. 이게 ‘구슬 옥(玉)’자랑 ‘임금 왕(王)’자 차이는 이겁니다.

여기 점이 하나 있고, 그렇죠? 근데 뭐냐면 이렇게 ‘마을 리’자 같은 경우, ‘이치 이(理)’자 같은 경우도, 여쭤보는 지금 마을인데 밭이 있는 땅을 말하거든요. 밭이 있는 전토, 이 흙을 가지고 밭 모양으로 이렇게 저렇게 구획을 해놓은 게 마을이라는 거죠. 그 래서 우리가 산 위에서 보면 마을들은 일정 어떤 질서를 가지고 이렇게 짜져 있다는 거죠. 32:44

밭 짜놓듯이 경계를 가지고, 이렇게 중심과 주변이 있고, 이렇게 밭처럼 만들어져 있는 게 마을인데, ‘구슬 옥(玉)’자가 변으로 쓸 때는 ‘임금 왕(王)’자처럼 쓰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보고 그냥 ‘구슬 옥(玉)’이라고 아는데, ‘임금 왕(王)’이랑 같은 글자인가 혹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요.

‘임금 왕(王)’은 갑골문이 이겁니다. 도끼, 일반적인 도끼는 ‘선비 사(士)‘자가 되고요. 임금은 좀 위에 하나 뭐가 더 있든지, 실물을 제가 못 봐서. 아니면 ‘이게 최고다’ 해서 위에다 하나 선을 더 그어줬든지 한 것 같아요. 원래는 ‘임금 왕(王)’도 이게 ‘선비 사(士)’중에 제일 대빵을 말합니다. 무사들 중에 제일 대빵 무사들. 예전에는 도끼 든 사람, 이거 무사가 먼저 시작하죠. 개념이 선비보다는 나중에 이 사(士)가 이제 선비도 되는데요, 지난 시간에 한 번 했지만.

무사 중에 제일 우두머리가 왕이죠. 거기서 온 글자고요, 이 왕은. 옥은 그게 아니고요. 이 점을 하나 찍어 놓은 이유가 이거예요. 이거랑 전혀 다른 글자예요. 옥은 옥 목걸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거 여기서 온 거예요. 이렇게 옥을 실로 꿰어가지고, 목을 동그랗게 깎아서 그걸 실로 꿰어놓은 거예요. 이렇게 왕들 여기에도 면류관에도 옥 걸려 있고, 목걸이로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그려놓은 거예요.

그래서 선으로 이걸 표시한 거예요. 옥을 쭉 이렇게 실로 연결해 놨는데 그게 동그란 옥구슬을 말한다는 의미로 점을 하나 찍어놓는 거예요. 이해하시죠? 그러니까 옥을 말해요. 옥에 보면, 여기 지금 책상 보시면 돼요. 책상에 결이 쭉 있죠? 이게 마을처럼 있잖아요, 나름.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이게 리(理)입니다. 34:06

그러니까 맥계가 “제가 대불리어인(大不理於人), 남들의 입에 그렇게 쭉 순조로운 결이 아닙니다.” 이 소리예요. 저에 대해 사람들이 되게 거슬려 합니다. 좋은 말이 안 나옵니다, 이런. 이 결 따라가면 이렇게 순조로울 텐데, 결에 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일반적인, 순조로운 결이 아니다. 34:26

제가 남들의 입에 제가 그렇게 순하지 못합니다. 맹자가 볼 때, 이 양반이 그런 말 들을 양반 아니었나 보죠. 맹자가 볼 때 “해로울 거 없다” 오히려 격려해 주죠, 해로울 거 없다. “네가 하는 행실을 봐라.”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얘기 안 해주고요. “해로울 게 없다. 선비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그냥 무성하다. 많다. 그래서 말들이 많은 거다.”

“시에 이르기를, 조마조마 걱정하는 마음이 사람을 노엽게 했네”라고. 내가 뭔가를 막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으니까, 남들이 다 화를 내더라는 겁니다. 그런 분은 공자님이고, 그런데 원래 이 시는요 보면 이런 내용이 아니고, 제가 누구를 너무 좋아해요. 남들한테 도저히 못 참고 얘기를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그런데 다 남들이 화를 낸 거예요. “그만 좀 해라”

이제 그러니까 누굴 좋아해서 마음이 너무 두근거려서 혹시나 도움이 될까 형제들한테 얘기했더니, 형제들이 막 뭐라고 한 거예요. “작작 좀 해라.”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사람들을 노엽게 했네.” 이거에 이제 비유한 거죠.

군자가 나라 걱정해서 조마조마했더니 남들이 다 막 욕을 하더라는 거죠. “너만 돋보이려고 하는 거냐? 너만 천사냐?” 이런 얘기를 많이 들으니까, 이게 공자님이고. 또 한 시에는, “사람들의 노여움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명성을 잃지는 않았네.” 사람들이 열받게 계속했는데, 그래도 명예를 잃을 정도로 안 됐다고 하는 문항입니다, 문항이. 이렇게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근데 우리나라에 반대 있죠, 아침에 오늘 드라마 ‘여인천하’가 하는데 조광조가 사약 받는 장면을 오늘 마침 하더라고요. 그런 게 이런 경우죠. 사람들을 노엽게 해서 결국 사약까지 받아내는. 그러니까 중종이 도저히 못 참고 사약 내린 거잖아요? 난리 일어나서 조광조가 너무 이렇게 칼같이 이렇게 인의예지를 너무 따지니까. 이것도 사람들의 이 교육이랑 똑같아요. 36:31

사람들을 인의예지 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인의예지의 잣대를 가지고 제가 이렇게 남을 비방하면 안 돼요. 그러면 남들이 싹 노여워해서, 저를 아주 그냥 뭉개버리고, “그냥 쟤만 없어지면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인의예지 잣대를(가지고) 제가 잘 덕을 밝히면서, 남들도 잘 깨어나게 해주는 게 목표니까 좀 더 잘 접근해야겠죠, 인의예지를 실천하는 군자들은. 36:56

66절은요, “맹자가 이르기를, 어진 자는” 그래서 바로 이 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진 자는 자신의 밝은 덕으로 남들을 밝혀주는데” 내가 원래 밝아야 해요. 내가 밝으면서 남을 밝혀줄 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어둠으로 남들을 밝히려고 한다.” 여기가 좀 잘못됐네요. 그 렇죠. 글자 하나 빠져야겠죠. 나무를 빼야겠죠.

어두움으로, 자신이 되게 어두우면서 남들을 밝혀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대학』에도 있지만, 『대학』에 “자신의 덕을 밝히고, 그다음 백성을 새롭게 하라”라고 돼 있죠. 자신의 덕을 밝히고.

보세요. ‘밝은 덕’ 하면요, 지금. 『대학』에서 ‘밝은 덕을 밝힌다’고 하면 뭔지 한번 보세요. ‘명덕(明德)’이 뭐겠어요? ‘명덕’은 원래 밝은 거예요. 그렇죠. 이게 목적어고 이게 동사니까, ‘원래 밝은 덕을 밝히자’는 거죠. 이게 원래 밝은 덕이에요. 근데 우리 내면을 보면 원래 밝은 게 별로 안 보이죠? 어둡잖아요. 38:29

원래 ‘밝은 자리’가 뭐겠는지 보세요. 이게 우리 양심이에요. 그게 미발이든 이발이든. 미발의 양심이 더 뿌리겠죠? 뭐냐면 내 안에 인의예지의 마음이요, 양심. 이게 뭐냐면 사단으로 발동하기 전에도 우리 마음 안엔 이미 밝은 게 꽉 차 있잖아요? 왜냐하면 안에 측은지심이 없는데 왜 건드리면 측은지심이 나오겠습니까? 38:51

그니까 겉으로 남들한테 이렇게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시공간 안에 표현된 양심도 양심이지만 표현되기 전에 그 순수한 의식, 순수한 마음도 이미 양심이죠. 우리가 깨어났을 때 느끼는 초연한 마음도 양심이거든요. 거기가 더 뿌리죠. 그게 움직여서 시공간에 나오면 사단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 양심을 말해요, 더 미발의 양심까지 포함해서.

그 양심을 다시 밝히라는 거예요, 후천적으로. 그러니까 오히려 여기는 미발의 양심이겠죠. 우리 안에는 다 ‘밝은 덕’이 있는데 왜 사단으로 표현이 안 되냐는 거죠.

그래서 이 밝힌다는 건요, 결국은 사단을 확충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양심은요, 여기서 말한 양심은, 사단의 뿌리고 뿌리에 해당한 양심이고요. 여기서 양심은 이게 좀 후천적 양심이죠. 이게 좀 구분되시나 한번 해보세요. 재미있어요.

‘선천적 양심’은요,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의 순수 의식입니다. 그렇죠. 양심은 순수한 마음이니까. 근데 이제 ‘후천적 양심’은 시공간 안에서 특정 상황에 나오는 양심이에요. 아기가 오늘 길을 가다가 할머니가 길에 쓰러져 계시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 이게 선천적 양심은 아니죠. 근데 이 선천적 양심이 그 시공간에 누군가를 대상으로 삐져나온 거죠, 밖으로.

그래서 그 삐져나온 걸 잘 확충해 주는 게 ‘명명덕(明明德)’이에요. 이해되시나요? 이놈은 원래 밝거든요. 선천적 양심은요, 우리 안에 있는 그 순수 의식은 원래 광명해요. 원래 잘해요. 원래 잘하니까, 제가 불쌍한 일을 보면 “슬퍼하라!”라고 해주잖아요, 바로. 슬픔까지 느껴요. 그래서 삐져나와요, 슬픔이. 40:21

근데 안에는 밝은데 겉은 밝지 않은 게 우리가 그걸 그러면 또 에고가 눌러버려요. 다 틀어버린다고요. ‘저거 좀 아닌 것 같아!’ 시비지심이 튀어나와서,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데 시비지심이 튀어나와서 ‘저 말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해도, ‘내가 뭘 알겠어’하고 흐려버리면 ‘명덕’을 밝히지 못한 거예요. 지금 ‘명덕’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줬는데, 자기가 뭉개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명덕을 밝히는 비법은, 사단 확충이에요. 시비지심이 ‘찜찜해!’그러면 더 알아보는 거고요, ‘자명해!’ 그러면 그걸 이제 한번 깊게 믿고 밀고 나가보는 거고요. 측은지심에서 ‘뭔가 이거는 잘못했어.’ 그러면 측은해하는 마음을 더 회복하는 거고요.

부끄러운데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수오지심은. 사양지심에서 ‘아, 이렇게 하면 좀 무례인데’하는데 해버리지 말고, 그 말을 좀 듣고 남에게 좀 무례하지 않게, 매너 있게 행동하는 거, 이게 ‘명명덕’입니다. ‘명덕을 밝힌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사단의 뿌리가 언제든지 터져 나올 준비가 돼 있는 게 ‘명덕’인데, 거기는 한 점 때가 없어요. 순수하게 터져 나올 준비가 돼 있어요. 그래서 실제 삐져나오면 우리가 ‘사단’이라고 하는 게, 네 가지 단서를 통해 그놈들이 삐져나왔다는 걸 아는데, 그걸 확충해 주지 않으면 안에만 명덕이지 겉으로는 불명상. 이해되시죠?

명덕을 밝힌다는 게 이 얘기입니다. ‘내 안에 있는 밝은 덕을 시공간 안에 끄집어낸다, 다시.’ 이게 되면 이제 성인이죠. 이것만 잘하면 성인이에요. 이게 잘 되면 자연히 뭔 일이 나겠습니까? 왜냐하면 ‘명덕’이라는 게 ‘사단’인데요, ‘사단’이 결국은 다 남하고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에요. ‘사단이 밝아지고 명명덕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요, 명명덕이 이루어졌는데 신민(新民)이 안 이루어진다고 하는 거는 말이 안 되는 말이에요. 그렇죠?

제가 측은지심이 넘치는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그러면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 러니까 명덕이 터져 나온다는 건요, 명덕과 신민은 동전의 앞뒤예요. 사실은 같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제가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남한테 부끄러운 짓을 할 리가 없거든요. 42:40

그러면 남한테 부끄러운 짓을 안 하고, 남을 측은해하게 되고, 남한테 양보하게 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게 되는데 어떻게 신민(新民)이 안 돼요? 그런 사람이 임금으로 있으면 당연히 더 넓은 사람들한테 영향력이 갈 거고, 임금으로 있지 않더라도 제가 오늘 만나는 제 가족, 또 제가 만나는 직장 사람들한테 신민을 하게 되죠, 제가.

그러니까 『대학』에서 안으로는 명명덕을 하고, 결국 밖으로 신민(新民)이라는 거는 남들한테 사단을 배려해 주는 거 하나라면,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제가 남들한테 사단을 베푸는 거랑 두번째 남들 안에 있는 사단도 거기에 또 호응해서 밝아집니다. 남들의 명덕도 밝혀주는 거예요. 그렇죠? 거기에 있는 양심을 끄집어내게 도와주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작업이 신민이에요. 43:18

그래서 사람들을 새롭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동전의 앞뒤인 거고, 이건 같이 일어난 작업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다 지어지선(止於至善), 최선의 경지에 머물러야 한다. 늘, 둘 다요, 양쪽 면이 다 최선이 되게 늘 신경을 쓰라는 거예요, 좀 더 완벽해지게. 그러면 명덕을 먼저 완벽하게 해야죠. 그러면 신민도 완벽해지겠죠.

이런 관점으로 이게 ‘대학의 도(道)’예요. 대학이 거기서는 도덕의 도가 아니고요. ‘대학지도’라는 건, 대학이라는 게 우리 지금 성균관이 대학이에요. 성균관에서 성균이라는 말은요, 중국 고대에 나오는 대학의 이름들이에요. 그걸 조선 때 갖다 쓴 거예요. ‘성균’이니 ‘국자감’이니 ‘태학’이니 다 같은 말이에요.

임금 자식들이나 공경의 자식들, 장차 나라를 이끌 그런 차세대 리더들을 교육하는 곳이에요. ‘대학’이니 ‘성균’이니 ‘태학’이니 하는 게. 거기에 ‘대학지도’는요, 그 대학교의 건국 이념이에요. 건학 이념. 그러니까 우리 대학에, 고본 『대학』 그대로 번역하면 그게 돼요. 제가 예전에 번역한 『대학』은 봉우 선생님의 뜻대로 푼 거고요. 원래 이 원문의 결을 따라가 읽으면, 그게 뭐냐면 그 도덕의 도가 아니고, 그런 거예요, 우리 뭐 ‘요리지도’ 요리에 도가 있다면 그런 정도예요.

그러니까 “우리 대학교에서 가리키는, 우리 대학교에서 지향하는 바는, 우리 대학 나온 사람들은 명덕을 다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해주고, 그래서 명덕과 신민이 둘 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자는 게, 우리 대학의 건학 이념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44:59

근데 이렇게 했는데요, 누구나 이렇게 제가 『대학』 때 얘기했지만, 자신을 밝히는 거는 더 본(本)이죠. 남을 밝히는 건 말(末)이에요. 왜냐하면요 이게 뿌리고 이게 가지죠. 뿌리가 없으면 안 되는 게 가지죠. 뭐가 더 먼저인지 보면 본말(本末)이 나와요. 뭐가 더 있지 않으면 이렇게 시행이 안 되겠는가.

신민을 먼저 하자고 하면 이게 없으면 시행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명덕이 먼저인 거죠. 명덕이 되면 자연이 신민이 되지만, 신민을 막 하려고 사람들을 새롭게 해주겠다고 제가 명덕도 안 하고 이렇게 외치면 될 일이 아니거든요. 명덕이 되면 자연히 넘쳐서 신민으로 흘러갈 텐데요. 이게 지혜로운 방법이죠. 그래서 본(本)이 이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하고 이거 하는 게 지혜로운 거지, 가지에다가 비료 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뿌리에다가 비료 주는 게 영리한 사람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맹자가. 45:56

어진 자는 내가 나를 먼저 밝혀서 그 밝음으로 남들을 밝게 해주는데, 지금 사람들은 자신은 어두우면서 신민부터 하려고 덤빈다는 거예요. 내가 당신들, 그러니까 정치가들이 무수한 올바른 신민의 공약을 남발해요. 다 내가 하겠다고 하는데 하나도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 정치가들 내면에 전혀 덕 밝히는 공부가 안 돼 있어서 그런 거죠. 당대 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죠, 학자나 정치가들을. 46:24

맹자가 그래서 ‘맹자의 사단 명명덕 하는 비법’입니다. 보세요. 맹자 사단 확충의 그 구절이거든요.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넓혀 나가서 채워줄 줄 알면” 넓히고라고 보시죠.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넓히고 채워줄 줄 알면” 여기서 ‘사단(四端) 확충론’이라는 말이 나왔거든요.

보세요. 측은지심이 일어났어요. 이게 재밌죠. 사단 확충하는 법을 아시는 게 중요하죠, 다른 내용보다도. 이건 이제 머릿속에 그려두시고요. 우리 안에 이데아가, 인의예지가 있습니다. 요놈이 이제 밖으로 이제, 이게 단(端)이라는 건 이겁니다. ‘설 립(立)’자에, 요거 요거는 ‘끝 단(耑)’자잖아요? 그때 말씀드렸지만, 싹이 삐져나온 요걸 말합니다, 끝.

그러니까 안에 인이 있다는 거를 알 수 있는 요 싹은, 측은지심이겠죠. 측은해하는 감정이 우리가 있다는 걸 알고, ‘우리 안에 인의 이데아가 있구나!’하는 걸 아는 게, 요게 단이라는 겁니다. 단서(端緖), 그러니까 실마리죠.

요거 하나를 이게 뭐의 끄트머리니까요. 왜 이게 단서라는 뜻이 되냐면요, 끄트머리를 자꾸 잘 우리가 추적해 들어가면 몸통을 만나겠죠. 그러니까 하나의 단서죠. 단서가 하나만 있으면 우리는 그걸 추적해서 몸통을 만날 수 있다. 그 몸통은 인(仁)이에요. 그래서 그 인이 밖으로 삐져나온 게, 우리가 (말하는) 측은지심이고요.

예(禮)가 밖으로 삐져나온 게 사양지심이에요, ‘예’라는 이데아가. ‘의’라는 이데아가 우리 안에 정의로운, 정의를 지향하는 그런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밖으로 삐져나오면, 수오(羞惡)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타나고요. 이게 시비를 가르는 마음으로 나타나면요, 근데 구분해 보시면, 인간한테 이거는, 인의예지는 도(道)이자 성(性:본성)이죠. 우리 안에 성으로 들어 있는 성은 기본 프로그램이에요. 기본 프로그램에 깔려있는 거고, 기본 프로그램인 게 명령으로 돼 있어요. “사랑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예절을 지켜라!” 이게 깔려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시공간 안에 있는 이 이데아를 우리는 알 수 없죠. 우리 시공간 안에서 몰라요.

근데 제가 마음을 탁 써보니까 이상하게 이런 경우에는 측은지심이 탁 나오더라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시비지심이 탁 나오고요. 그게 이제 제가 항상 예를 들지만 이걸로. 지금 만유인력 법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지금 이 정도밖에 안 나와 있는데, 제가 이 물건을 딱 드는 순간 만유인력 법칙이 적용하려고 대기하고 있겠죠. 바로 적용에 들어갔겠죠. 그래서 이걸 끄집어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제가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건 이런 개별 구체적인 상황이지만, 여기에는 만유인력 법칙이 이걸 끌어내렸고요, 이렇게 내려놓은 다음에 이 만유인력 법칙은 어디로 가 있느냐? 다시 시공을 초월해서 항상 존재합니다. 기본 명령어거든요. ‘어떤 놈이든 두 물건 사이에는 서로 당기게 해라’라고 기본 명령어가 돼 있는 거죠. 그게 이데아고요.

제가 이 상황에서 이놈을 딱 들면 이놈이 벌써 여기 와서 이제 작용을 하겠죠. 그래서 정확히 작용을 해서 떨어트립니다. 이게 개별사물 보편법칙 그거의 뿌리가 되는, 작용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 선천 정보, 그게 기본 프로그램이라 우리 안에는 인의예지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 선천 정보로 감동적인 얘기를 해 주면 확 마음이 일어나 버린다는(겁니다), 공식대로. 측은한 얘기를 들으면 ‘측은해해라’하는, 이 형이하적 공식이 그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면 여기서요, 이게 이데아라면 성(본성)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그런 ‘우주심’, 우주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거는 ‘성(性)’하고 ‘심(心)’은 좀 구분하거든요. 성하고 심은 구분하셔야 해요. 이 ‘심(心)’을 우리가 ‘명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성(性)’만 가지고 명덕이라고 못 해요. ‘덕’은 좀 작용을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성’은 하나의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심’이라고 할 때, 이걸 ‘우주심’이라고 하면, 보세요. 우주심은 이거예요. 제가 이걸 물건을 딱 들었잖아요. 그러면 기본 명령어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명령어가 있겠죠. 그걸 적용시켜라! 그럼 떨어진단 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이게 ‘신(神)’을 말해요. 이게 ‘심’은 곧 ‘신’인데요, ‘정신’. 이 본성하고 정신의 차이가 있어요.

이거는 주재자를 말해요, 경영자. 이건 프로그램이고, 지켜야 할 법이고, 이건 주재자를 말하거든요. 그럼 명덕은 주재자를 말하는 거예요. 이해되시나요? 프로그램과 주재자는 달라요. 우리가 ‘우주 의식’할 때는 ‘의식’이라는 거는 의식의 특징은 의사 결정이거든요. 의사 결정을 한다는 거랑 의사 결정의 기본 토대가 되는 프로그램하고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유전자는, ‘성’은 유전자에 해당하겠지만 유전자대로 우리 몸이 돌아가게 만드는, 경영하고 있는 거는 우리가 ‘심’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딱 들었을 때 지금 여기에 어떤 원리 법칙을 적용할 건지 결정하고, 그 법칙대로 이걸 끌어내리고 있는 이거는, 의사 결정한 거는 ‘심’이라는(거죠). 그럼 ‘신(神)’이 어디 있는지? ‘신’이 지금 여기 있어요.

이해돼요? 현대 과학자들이 기독교가 하느님이 저 옥좌에 이렇게 수염 기르고 앉아 계셔서 심판한다고 하니까 ‘만들어진 신(神)’이니(하면서), 스티븐 호킹도 막 신랄하게 욕하는데, 동양에서 보는 ‘신(神)’은 이거예요. 만유인력의 법칙을 집행하는 자요. 법칙은 ‘신’ 안에 있는 이데아고 자신이 갖고 있는 법칙대로 만물을 실제로 움직이는 자가 우리가 ‘신’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신(神)’은 이 순간 없는 곳이 없어야 돼요. 우주에는 ‘신’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제 비유를 들면 제 몸뚱이에 ‘신’이 꽉 차 있으니까 제가 여기 꽂으면 아프죠. 여기 치면 “아야”하죠. 아무리 발끝에 제가 모르게, 제가 모르고 있다고 해도 남이 이렇게 톡톡 치면 제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라면 알겠죠.

마찬가지로 우주 안드로메다 저편에서 뭔가 일이 있어도 ‘신’은 알고요, 지구에 뭔 일이 있어도 ‘신’은 알 겁니다. 우주의 의식을 상정하자고요. 그럼 우주 의식이 하는 일은 뭐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법칙대로, 이렇게 상황을 계속 만들고 있는 거요. 제가 이 얘기를 드린 이유가, 이 ‘성’대로 우리 마음 안에 측은지심이 일어나게 만드는 거는 ‘심’이라는 거예요. 두 개가 달라요, 영역이. 이해되세요?

법칙과 그 법칙을 이용해서 실제로 이를 만들어내는, 어떤 주재자로서는 우리가 ‘심’이라고 그래요. 주재자는 ‘신’이나 ‘심’ 아니면 ‘천제’ ‘제’라고도 합니다. ‘하느님’이라고. 이건 다 같은 거예요, 동양 동양철학에서 이런 용어들은요. 53:32

그래서 ‘천군’, 우리 마음을 ‘천군’이라고 부르는데, ‘군’ 이런 건 다 주재자예요. 그럼 이 경영자가 “이 법칙대로 해”라고 할 때 그 법칙이 ‘성’이자 ‘리’죠. 이해됐어요? ‘성’이자 어떤‘원리’, ‘원리’와 이‘심’하고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굳이 좋게 말하자면, 이 선천적인 ‘순수 의식’이고 ‘순수 원리’입니다. ‘순수 원리’고 ‘순수 의식’. 두 개가 달라요.

순수 원리·순수 의식, 조금 어려우시더라도 이번 기회에, 이거는 순수 원리고요, 우리가 이건 ‘원상(原象)’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식으로. 요거는 순수 의식입니다. 이거는 ‘원신(原神)’이라고 하는 겁니다. ‘원신’과 ‘원상’의 구분이 있어요. 이해되세요? ‘원신’은 의식 자체고, ‘원상’은 원신 상태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말해요.

그럼 저희가 원신에서 많이 멀어진 만큼 이 순수 원상대로 살지 않겠죠? 그러면 후천적인 의식으로 살면 순수하지 않은 원리대로 우리가 또 살아요. 왜곡된 또 법칙이 있어요. 이 법칙들이 나오면서 순수한 원리가 좀 왜곡돼서, 우리가 하는 것들이 다 그래요.

왜곡된 법칙을 가지고 많이 사는데, 우리 마음이 순수해지면 우리 순수 원리가 발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정신을 깨어나게 할수록 결국에는 인의예지가 더 잘 돌아가게 돼 있어요. 순수 원리를 따르게 돼 있어요. 우리 마음이 거칠면요, 후천적인 원리를 따라요. 여자를 보면 반응하고 돈을 보면 마음이 뒤집어지고.

이런 원리의 지배를 받다가, 우리 마음이 순수해지면 순수 원리를 구현하게 돼 있어요. 이게 소프트웨어면 이게 하드웨어예요. 이해되시죠? 소프트웨어고 이게 하드웨어예요.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도요, 거기에 그걸 실현할 수, 구현할 수 없는 하드웨어를 만나면 구현이 안 돼요.

우리 안에 왜 인의예지가 다 있는데 왜 저는 인의예지가 안 나오나요? 그 마음이 탁해서 그래요. 그러면 순수 의식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구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양심을 살릴 때 첫 번째로 해야 될 일이, 마음을 깨어나게, 순수하게 만드는 일인 이유가 이거예요.

이 원리를 아무리 우리가 들어도 안 돼요. 인간은 사랑과 정의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요, 안 일어나요. 그거는 한 286 가지고 486에나 구동되는 소프트웨어를 하겠다고 하니까 다 깨져버려요. 안 되니까 자기를 자책하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런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이게 실현이 안 된다는 거예요. 55:52

순수한 마음부터 찾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히 실현되니까. 순수한 마음이 그냥 자기 꼴리는 대로 해도 이렇게 돼요, 같은 거니까. 순수한 마음 안에 들어있는 원리니까요. 그래서 순수한 마음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사단을, 나한테 있는 거를 확충한다는 건요, 보세요. 이 마음 중에, 이제 제가 이거는 큰 두 가지 구분이고요, 원리와 마음의. 그러면 이게 뭘 증명하냐면요, 하느님이 어디 있냐? 저는 여기 있다고 그래요. 지금 끄집어 내리고 계시다. 하느님이 없다면 이걸 누가 끄집어내느냐? 이치대로 지금 기운을 부렸잖아요. 이게 ‘하느님’이에요. ‘이치대로 만물을 부리는 자리’요.

『주역』 철학에 이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주역』에 “우주는 ‘건(乾)’으로 만물의 이데아를 알고, ‘곤(坤)’으로 만물을 이루어낸다.” 쉽게 알아내고 ‘이지’, ‘간능’ 그래요. 『주역』 계사전에 “건은 ‘이지’ 쉽게 알아내고, 곤은 ‘간능’ 간단하게 해버린다. 근데 “건곤불측자가 신이다.” 건곤을 다 쓰는 자리가 우주 의식이다.

우주 의식은요, “여기 만유인력 법칙” 아니면 “여기 중력”, “만유인력 법칙 중에서도 중력 적용”, 이게 신이에요. 뭘 써야 될지 정확히 알고요, 원자핵 간에 또 행력, 강력, 약력 이런 걸 쓸 때도, 다양한 힘들을 쓸 때도, 뭘 써야 될지 자기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우주는.

제가 여기다 물을 떠 놓고 물에다가 커피를 부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인간 같으면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좀 망설일 겁니다. 우주는 망설임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지’예요. 그냥 알고 있어요, 여기서 뭘 써야 할지. 그게 우주 의식이에요. 뭘 적용해야 할지 원리를 그냥 알고 있고요, 그대로 적용해 버려요. 이해되시나요? 57:30

제가 아까 글자를 엉망으로 썼습니다. 이게 ‘바꿀 역(易)’자인데요. 여기서는 ‘쉬울 이(易)’자로 읽습니다. ‘쉬울 이(易)’자예요, 여기서는. ‘이지’ 쉽게 알아내고, 간단하게 능히 해버립니다. 그래서 남자들이요 이데아를 쉽게 알아내요. 여자들이 뭔가 잘해요. 그러니까 집을 지으려면 남자들이 이렇게 구조를 짜고, 여자들한테 인테리어를 맡기면 아주 아름다운 집이 나와요. 반대로 하면 엉망이 돼요.

왜냐하면 큰 그림을 읽어내는 데는 ‘건乾)’ 양기가 읽어내요. 이성적으로 큰 그림을 읽어내요. 그러니까 하나도 이게 지금 현실화하지 않았더라도 이 원리를 추적해서 이렇게 가야 맞는다는 걸 읽어내는 힘이 세요.

그러면 곤(坤)에서 보면, 저거 뭔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나? 현실화하는 걸 중요시하기 때문에 건은 실제로 해야 해요. 만들 수 있는 걸 중시해요. 실제 해버리는 거. 근데 우리가 추상적으로 쭉 상국을 해가지고, 인간은 인의예지로 살아야 돼. 이게 망하라는 얘기죠. 아주 추상적인 얘기기 때문에 와닿지 않아요, 곤한테는. 둘이 역할이 좀 달라요.

근데 협조를 해야 만물이 나와요. 건이 이데아를 읽어내야 하고요, 곤이 그걸 현실화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 마음, 우리 이걸 두 개를 다 하는 걸 ‘마음’이라고 그래요. 두 개를 다 하는 게 ‘신’이잖아요, 우주에서는. 건곤을 갖다 부리는 게 ‘신’이에요.

그렇듯이 인간한테는 이게 마음이라, 지난번 맹자 때 한 번 했는데요. ‘구중리 응만사’ 기억나세요? 그게 이걸 말해요. 건의 특징이에요. 뭇 이데아를 다 갖추고, ‘응만사’ 만 가지 일에 자유롭게 응한다. 이게 건의 특징이고 곤의 특징이에요. 59:39

‘전지전능’ 이걸 우리가 다른 말로 ‘이지간능’이라고 그랬는데 ‘이지’는 ‘전지’고요, ‘간능’은 ‘전능’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나 하는 거예요. 다 알아버리고, 여기에 무슨 원칙을 적용할지 그냥 알아버리고 그냥 해버려요. 59:57

판사 같으면, 이런 분이 판사라면 아주 쉽겠죠. 죄를 저질러 딱 왔다 해도 한 치 망설임 없이 검색이 바로 딱 돼서, 뭐 뭐 뭐 뭐 해서, 형량 얼마, 어떻게 하겠다. 바로 집행해 버려요. 여기에 가깝게 가는 게, 인간이 신에 가까이 가는 거예요. 별게 아니고 인간은 이데아를 더 빨리 알아내서 그 이데아대로 살아가면 신이에요.

그럼 인간은 뭐냐? 인간은 인의예지만 잘하시면 돼요. 신은 춘하추동·인의예지·금목수화토를 다 책임지셔야겠지만, 인간은 인의예지만 잘하면 천지에 제가 한몫을 해요. 춘하추동은 하늘이 아주 잘 돌리고 있고요, 금목수화토는 지구가 알아서 잘 돌리고 있어요. 문제는 인간이거든요. 우리가 인의예지로 못 맞춰주기 때문에 중간에서 깨져요.

여기까지만 하고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이것만 구분해 볼게요. 보세요. 보세요. 이걸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어요. 방금 전지전능에서 지적인 거랑, 요 세 가지는 능적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양지양능으로 치면 이게 양지(良知)를 말하고요, 이거 양능(良能)을 말해요.

세 개 하는 거고, 하나는 아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채워줄 수가 있어요. 제가 『대학 인간의 길을 열다』에 이걸 그려놨는데요, 시비지심이 제일 중요한 게, 요 세 가지도 다 이걸로 알아낼 수 있거든요. 시비지심이 제일 중요해요. 개념 파악이 안 되면 나머지 다 틀어집니다. 1:01:21

그래서 시비지심을 확충해 넓히고 채워주는 방법은 뭐냐? 시비지심은 자명한 걸 좋아하거든요. 체험과 개념이 합쳐진 거. 그러니까 늘 체형과 개념을 합치셔가지고 시비지심을 확충해 주셔야 해요. 제가 이거랑 이거 파랗고 이거 빨갛고 두 개 다르지? 이거 아는 정도의 시비지심으로는 뭔 일을 하나도 못 하거든요.

이런 섬세한 문제에 나아가서까지 인의예지를 읽어낼 정도로 시비지심을 길러야 하니까 계속해서 시비지심을 채워주셔야 해요. 채우는 방법은 자명한 것만 계속 주세요. 책을 읽으시더라도, 이게 책을 읽었는데 자명하지 않은 책을 계속 읽고 계시면 시비지심이 늘질 않아요.

죽어버려요, 오히려. 정신이 더 어두워져요. 그러니까 옳고 그름이 알 만한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연구를 해서, 내가 한 5개를 알았다면 6개를 알아내고, 7개를 알아내고, 8개를 알아가면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늘려가시면 이게 확충해 주는 거예요.

이렇게 시비지심이 먼저 확충되면, 측은·사양·수오지심이 일어날 때 알아요, 이게 측은지심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시비지심이 어두우면 측은하지 말아야 할 걸 측은해하고요. 범인들만 막 측은해하고, 피해자들은 별로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러면 잘못된 거죠.

시비지심이 먼저 정확해야, 개념이 좀 탑재가 돼 있어야, 둘 다 불쌍하지만 이게 더 불쌍한 거다 이런 걸 구분할 수가 있어요. 불쌍한 거, 부끄러운 거, 사양하는 거, 쟤가 좀 무례하게 굴지 않나 하는 걸 다 보고, 밀고 나가지면 확충이에요. 매일매일 그런 일만 하면 확충이에요.

측은지심에 맞는지 확인해 보고, 그걸 실제 실천하면 확충이에요. 능력이 확충되고요, 시비지심은 아는 게 확충이 돼요. 이렇게 돼서 확충을 해나가면, 불이 처음에 타오르고 샘이 처음 솟아나는 것처럼 처음에는 아주 불씨가 미약한데, 점점 확충해 가다 보면 어떻게 됐느냐?

‘사해를 보존한다.’ 사해는 중국을 둘러싼 네 바다예요. 그러니까 동서남북의 저 끝까지, 지구 끝까지도 사실은, 지금 지구로 치면 지구 전체에도 그 사단을 써먹을 수 있다니까요. 미국 가서도 이게 통용이 되고, 아프리카 가서도 사단을 쓰는데 싫어할 사람 없다는 겁니다.

근데 만약에 이걸 확충하지 않으면, 부모님도 못 모실 거다. 내 부모도 못 모신다는 거예요. 내 부모도 이게 안 나가면 측은하지가 않은데요. 그리고 효도를 안 하면서도 부끄럽지가 않고요, 마비가 돼요, 감정이.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사단(四端) 이게 명명덕(明明德)입니다. 내 안에 있는 좋은 덕을, 인의예지의 덕을 천하가 알게 표현하는 거, 이게 이제 명명덕이니까 사단 확충이랑 같은 얘기고요. 1:03:54

“맹자가 고자에게 이르기를” 67절이요, “산길을 다니는 것은” 이거 양심을 밝히는 어떤 팁입니다. 보세요. “산길에서 사람이 다니는 곳을 보더라도 잠깐만 사용해도 큰 길이 생기는데” 길이 좁았는데요,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한 번 지나가니까 길이 확 넓어지더라는 겁니다.

이게 우리 마음으로 치면, 양심을 겨우 좁은 길 정도로 하다가 갑자기 마음먹고 ‘사단을 한번 확충해 보자’하면 갑자기 길이 확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근데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띠풀로 확 막혀버린다.” 띠로 막힌다. “이제 보니 띠가 그대의 마음을 막아버렸도다.” 길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양심이 없는 것처럼 돼 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1:04:37

그러면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증상이 나타납니다. 사이코패스는 꼭 아니더라도 선천적인, 후천적으로 양심을 안 쓰다 보면 비슷해진다는 거예요. 나만 알고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남을 괴롭히는 거를 즐기는 그런 존재까지 되더라 하는 겁니다. 1:04:52

68번에 “고자가 이르기를, 우나라 임금의, 우임금의 음악이 문왕의 음악보다 낫습니다.” (다 못 하겠네요. 여기까지만 할까요? 지금 68번까지만 하겠습니다.) 우임금은 더 옛날분이죠. 우임금 음악이, 하·은·주 하나라 시조니까요, 하나라 지나고 주나라가 나왔죠. 한 몇백 년 전 양반이죠, 문왕보다는. 아니죠. 하 나오고, 은 나오고, 주 나오니까 주랑은 꽤 먼 양반이죠. 요임금이 2333년이잖아요, 단군 연대랑 같다고 보니까. 그러면 BC 2000년 전에 요임금은 그때 우임금 살고 있었거든요. 그쯤이에요.

그런데 주나라가 은나라 친 거는 한 BC 1000년 경이죠. 천몇십 년경. 그러니까 천년 차이 나는 양반이에요. “우임금 음악이 문왕의 음악보다 낫습니다. 왜 그러냐? 종의 끈이 벌레 먹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임금 음악을 연주할 때 치는 종이 따로 있는데, 그 종의 끈이, 종을 매달아 놓는 끈이 벌레 먹은 것처럼 아주 헤졌더라는 거예요. 그거 보면 (이 사람의 격물치지입니다.) 종이 그렇게 헤진 거 보면 우임금 음악이 좋아서, 많이 연주를 해서 저렇게 된 거 아니냐, 이겁니다.

이거 별 내용은 아니에요. 별 내용은 아닌데 격물치지를 좀 잘못한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한마디로 닦아요. “어찌 그걸로 충분하겠냐?” 그걸로 격물치지가 자명하냐, 그게? “성 앞에 수레바퀴 자국이 두 마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냐?” 우리가 성문을 보면, 성문은 수레가 한 대 통과하는 데잖아요.

그러니까 여러 대도 다니고 한 대만 거기 집중적으로 다녔으니까 얼마나 수레 자국이 깊이 패어있겠어요. “그게 말 힘세서냐?” 그러니까 “그게 음악 좋아서겠냐, 천 년 전부터 쳤으니까 그렇지!” 하는 말이 생략돼 있겠지, 이겁니다.

“수레 자국이 깊다고 그게 말의 힘이겠냐?” 그러니까 단순히 우임금 음악이 문왕의 음악보다 더 훌륭해가지고 그랬겠냐? 연도가 천 년 차이가 나는데. 천 년간 문왕은 한 달에 한 번 연주했었고, 우임금은 일 년에 한 번 연주했었어도 천 년간 연주하면 그게 더 차이가 날 수도 있지 않냐? 이런 식의 얘기를 한 겁니다.

오늘 사단 확충 얘기하다가 더 많은 얘기를 못 했는데, 오늘 유교의 계재론이나 이런 게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