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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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인문학 강의 - 맹자 진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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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일자 2010.
게시일자 2016. 09. 21.
동영상 길이 1:07:46
강의 중 인용 도서 맹자, 중용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KaanigehlgM



유교에서 말한 ‘성誠’이 보통이 아니에요. 이제 『노자』에서는 그거 하나라고 그래요. 그거를 유가에서는 ‘성誠’이라 그래요. 그래서 여기다가 뭘 거냐면 천·지·인 다 걸죠. 『노자』를 나중에 보시면,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지금 저렇게 장구하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저렇게 존재하되 두텁고, 사람 하나를 얻어서 이제 신령해 진다’라고 『노자』가 돼 있다면,

유교는 ‘하늘은 정성스러워서 저렇게 우주 만물을 덮어주고, 땅은 정성스러워서 만물을 심고 있고, 인간은 정성스러워서 중화中和가 나온다.’ 중용中庸, 자신의 ‘중中’(희로애락 미발未發), 우주랑 하나가 돼서 존재할 수 있고, ‘화和’ 이제 에고를 가지고 존재하는 순간일 때도 이‘중中’에 근거해가지고, 주변과 조화롭게 수작을 하더라. 00:53

우리가 이제 그림 보면 이거죠. 우주만물이 하나인 자리고요, 여기는. 만물이 각각인 자리. A라는 놈 · B라는 놈 · C라는 놈, 다 있는데 주변과 수작도 하면서 자기가 본래 하나라는 것도 잊지 않는 존재, 이 존재를 우리가 지향하는 거죠. 1:13

이거 ‘중中’이라고 그러고, 이걸 ‘화和’라고 하는데, 여기 이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수작이 가능하죠. 무한한 수가. 그래서 ‘중화中和’라는 거는 매 순간 새롭고, 지나가면 지나가버린 거고. 또 새롭게 수작할 수 있는 게, ‘중中’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새롭게 수작할 수가 있어요, 창조적으로. 1:31

근데 ‘중中’이 없는 사람은, 예전에 이랬던 기억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이미 꽝이죠. 하나라는 걸 모르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이거예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아니고.) 기독교에 보면요, 제가 요즘 『도마복음』쓰니까 기독교 구약에서도 이 얘기를 다 해준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 자리는 ‘I am’이다”. “하나님 이름은 ‘I am that I am’이다.” “나다!”하는 자리는 하나죠. ‘I am’일 뿐이에요. 그냥 ‘나 있음’이죠, 우리 말로는. I am hungry, I am 뭘 붙이면 개체가 돼 버리는데, ‘I am’인 자리는 ‘우주가 통으로 나’라는 자리예요. 그 ‘나’에서 움직이면 십계명이 나와야 돼요.

그러면 이게 우리가 말하는, 동양에서 말하는 ‘중화中和’랑 똑같아요. ‘I am’이 ‘중中’이고 십계명이 ‘화和’예요. 이렇게 수작을 잘하는 사람은 성인인데(하늘나라 가죠) 근데 예수님 때가 오면 이제 ‘I am’은 잊어버리고 십계명만 지키고 있는 거예요. 2:33

이제 바리새인들도, 바리새인들도 그때 양반들이라 우리 양반들이랑 똑같아요. “에헴”하고 귀족들로 돈 많고 계율 잘 지키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비판하냐면, 계율은 잘 지켰어요. 요새랑 또 달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컵을 예를 들면서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었다. 속도 좀 닦아라” 이 얘기를 해요. 2:51

“속은 시커먼데 겉만 번지르르 하면 되냐?” 그래서 ‘바리새인’ 할 때, 항상 예수님이 까는 방식, 까는 용어가 있어요. ‘외식하는 자’라고 그래요, 『성경』 번역이. 우리 말을 후하게 번역을 안 해주고 좀 짜게 번역해서 ‘외식하는 자’, ‘겉을 꾸미는 자’예요, ‘겉만 장식하는 자’. 겉만 자꾸 십계로 포장하는데 속은 ‘I am’을 모르더라는 거예요, 하나라는 사실을. 3:07

인류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원래 하나인 자리에서 십계가 나와야 도인데 안 나오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자리’를 계속 강조한 거죠. 이걸 이제 『신약』이라고 하는데 사실 『구약』과 『신약』은 같아요. 결국 이 자리 알고 하는 사람은 맞고, 모르고 하는 사람은 틀렸다라는 거예요. 이걸 『선어록』에 오면 아주 쉽게 표현해요. 3:28

어떤 스님인데 제자 둘한테 “야 가서 저기 (요즘 같으면) 발 걷어라! 발 걷어라!” 했는데 둘이 거뒀어요. 이게 화두 선문답인데, 보니까 스승이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고 그랬어요. 이게 다예요, 이야기가. 더 알 길이 없는데, 우리가 알 수 있죠. 하나는 깨어서 했고, 하나는 정신 놓고 했겠죠. ‘발’하면 ‘발’만 보고 발 올릴 생각만 했겠죠. 하나는 ‘깨어있음’ 내가 우주랑 원래 하나라는 것도 잃지 않으면서 발을 올렸겠죠.

발을 올릴 때는 올리고 내릴 때 내리는 건데, 그러니까 ‘선禪’이라는 건 이거예요. 다 같은 얘기예요. 선禪·유儒·불佛·선仙·기독교가 깨어있는 자리에서 나오는 건 다 맞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평생에 하는 말이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그대로만 살았다”라고 하는데, 하나인 상태에서만 산 거예요, 늘.

그러니까 하나라는 거랑 에고랑은 절대 또 충돌하는 게 아닙니다. 아까 여기 이‘중中’은 우리가 아까 그 하나인 ‘나 자리’라면 여기는 에고예요. 우리는 에고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아름다운 걸 표현할 수가 있어요, 하나인 줄 아는 사람이. 이게 하나인 줄 아는 사람은 이걸 통해서 지혜·인·의·예 이걸 다 표현할 수 있어요. 4:43

에고가 없다면 우리는 표현을 못 해요. 에고는 꼭 있어야 돼요. 에고가 없다면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고. 그 미발未發의 상태, 정보로만 있는 인의예지가 뭐가 아름답겠습니까 표현될 때 아름답지. 그것도 끝없이 또 새롭게, 우주가 끝날 때까지 새롭게 새롭게 표현되는 그 자체가 다 아름다운 거거든요. 5:01

그래서 이 미발未發에만 집착하는 분들이 이제 예전에 인도 명상이나 이런 거 하는 분들은 “오로지 하나로만 있고 싶다. 에고를 죽여버리자”라는 얘기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데 동양의 이론들은 안 그래요. 대승불교도(이 얘기 좀 하고 맹자 들어갈게요.) 5:14

대승불교도 만물을 3개로 갈라요. 절에 가면 요그림들 다 있어요. 세 점 찍힌 게 있고, ‘만卍’ 자 그려진 게 있죠. 그럼 이게 체·상·용(體·相·用)을 말해요. 이 『대승기신론』 보면 이걸 체상용體相用이라고 그러는데 이걸 다 해서 한 마음이에요, 일심一心. 5:26

우리로 그림 그리면 이거죠. 이 한 마음일 뿐인데, 이 한 마음이 본체는 텅 비어서 어떠한 차별도 없어요. 여기 만물이 하나인 자리에요. 대신에 텅 비어 공空하죠. 근데 그 안에 보면 그 안에도 정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우주는 꼭 셋으로 쪼개서 만물을 굴려야 한다는 이 이론이, 상相이 들어 있더라는 거예요. 5:45

그게 실제로 이 용用은 시공간 안에 들어오는 게 용用부터입니다. 체상體相은 이거는 법신이에요, 둘 다. 용用은, 보신·화신은 용用이에요, 영적인 세계. 우리가 아는 둘 다 현상계인데 보신은 영적인 현상계예요. (현상계가 이 물질계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더 고차원 현상계) 그다음에 우리가 아는 저차원 현상계, 물질계. 이 두 개에서 이거는 지·수·화·풍 아니면 이 오행을 돌리는 걸 말하죠, 운영을요. 그래서 이 용用으로 표현이 돼야 돼요. 6:22

체體와 상相. 그런데 보통 우리가 명상하시는 분이 “나 견성했다”고 할 때, 보통 이것만 알고는 견성했다고 하는 게 많아요. 하시다가 시공을 초월해서 우주 의식과 하나가 되면 “아! 내가 견성했다. 나는 우주랑 하나다.” 이런 말 하고 끝내는데, 그 자리에 뭐가 들어있더냐? 하면 아무것도 몰라요. 이데아를 하나도 몰라요. 6:39

예전에 소승불교는 이걸로 견성을 줬는데,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걸로는 모른다. 상용相用을 시켜봐야 된다.” 이 용用을 시켜보는 걸, 이 검증 기준이 뭐냐면 6바라밀이에요. 동양에서는 인의예지였다면, 불교에서는 6바라밀이에요. “참나자리에 나와 남이 있더냐?” “없더라” 그러면 거기에 어떤 상相이 있냐면 현상계에서도 서로 나눠 먹으라는 상相이 있다는 거예요, 원리가.

그래서 현상계에서 바로 참나가 나올 때는, 내 것도 남한테 좀 줄 수 있는 도리가 나오는 거죠. 그 용用까지 해야 ‘인정’, 이거 해야 대승에서는 1지地보살 따요. 소승에서는 이것만 갖고도 견성 취급을 받았는데, 대승에 올 때는 이거 안 쳐줘요. 7:20

그 참나자리에서는 화를 안 내더라, 남한테. 나와 남을 둘러 안 보니까. 그런데 왜 현상계에서는 왜 사소한 일에 화가 벌컥벌컥 나느냐? 그래서 인욕바라밀을 실천해야 참나를 아는 사람이에요. 이걸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게 ‘성통性通’이고, 여기까지가 ‘성통性通’이고, 이게 ‘공완功完’이에요.

‘성性을 통했다’는 게, 여기까지 상相까지 모르면, 상相이 그대로 나온 게 현상계니까 사실 상相에 정보가 다 있죠. 여기까지 알아야 ‘성통性通’이에요. 우리 이 정도 알고 ‘성통性通’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알려면 현실화해봐야 돼요. ‘공완功完’과 ‘성통性通’은 사실 하나예요. 공으로 다 현상계에서 표현할 수 없는 거는 알았다고 할 수도 없죠, 통했다고. 8:08

그리고 또 ‘공완功完’하려면 ‘성통性通’을 반드시 해야 돼요. 자기 안에 원래 있는 것만 할 수 있지, 인간이 없는 걸 할 수는 없거든요. 개가 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 해야 되니까, 인간 본성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내야 돼요. 8:22

우리가 지금 『맹자』를 하는 것도 이거예요. 이 참나 편하고 텅 빈 자리만 알면 좋은데 이 안에 인의예지가 들어있다라는 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맹자가 아주 쉽게,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사단四端을 가지고 예를 들어준 거예요. 사단이 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거든요, 그러면.

사단四端에는 제가 이제 첫 시간에 했던 얘기로 같이 보면, 이제 사단에서 이데아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이데아를 알고 싶다. 이데아의 세계, (여기는 만물이 하나의 세계죠)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현상계 안에서 존재하는 인과 공식들을 먼저 알아야 되는데, 그전에 뭐냐하면 우리가 이거는 인과공식도 현상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개별 사물만 보인다. 9:07

요놈만 보이죠. 요놈을 지금 존재하게 잡아주고 있는 공식이 있다는 건, 여기까지는 우리가 과학으로 알죠. 과학이나 철학으로 여기까지는 학문으로 해요. 근데 그놈의 이제 더 근원이 되는 선천정보는(미발의 상태는) 어디 있느냐? 하나인 상태에 있다. 과학에서 ‘양자장’이라고 하는 그런 상태. 그럼 우리가 여기서 추적해서 이렇게 들어가는 거거든요.

이게 이제 그럼 물리物理의 세계도 이렇게 돼 있다면, ‘물리物理’라고 그러고, ‘리理’는 사물에다 붙일 때 동양에서 ‘리理’라고 붙여요. 근데 인간한테 있는 ‘리理’는 우리가 ‘성性’이라고 붙여요. 같은 뜻이에요. 동양의 성리학은 이겁니다. ‘인성人性과 물리物理는 하나다’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 동양에서는? 물리를 탐구해 보면 오행五行의 힘이 나온다. 인간도 탐구해 보면 오행五行의 힘이 나온다. 09:50

그래서 인의예지신이다. 이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똑같이 맞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우리가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는 걸 보고 측은한 감정이 들었어요. 이 감정은 개별 구체적 사물이에요. 물질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에서 어느 시공간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에, 누군가를 상대로 해서 나오는 하나의 감정이에요.

근데 이걸 연구해 보면 보편적 인과공식이 있어요. ‘사람이 물에 빠지려고 할 때는 나랑 아무 관계가 없지만 내가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고, 감정이 일어나더라’하는 공식이 있어요. 이 공식이랑 이데아는 사실 하나예요. 한 놈인데 다 하나죠, 사실은. 특히 두 놈은 한 놈인데, 시공이 없으면 이데아로 있고 시공간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작용해요. 그래서 측은해하는 마음을 일으키더란 말이죠.

그런데 그 근원을 더 들어가 보면 ‘인仁’이라는 내 마음 안에, 참나 안에 ‘나와 남을 둘로 보지 보지 마라’는 정보가 있었다는 그게 있었으니까 이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에요. 이렇게 들어가서 측은지심惻隱之心 하나에서 인仁을 찾아냈잖아요? 그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우리가 인仁의 단서端緖라고 그래요. 이게 ‘설 립(立)’자에, 이게 이제 뭐냐면요, 땅에 싹이 조금 삐죽이 나온 거예요. 요거 보고, 우리가 땅 밖으로 나온 싹을 보고 이 안에 우리가 씨앗이 숨어 있다는 걸, 원래 여기 뿌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씨앗과 뿌리가.

그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야仁之端也’라고 하는 게요, 인仁이 살짝 삐져나온 게 ‘측은지심’이라는 거예요, 밖으로 시공간 안에. 그래서 우리가 측은지심을 보면 시공간 너머에 인仁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거. 이해하시죠? 이게 맹자의 기본 사상이에요. 이걸 아시고 보셔야 해요. 13:38

그래서 맹자가 어떤 말을 하냐면요, 내 마음 안에 다 들어가 봤더니 인의예지, 오행을 확인하고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아마 안 한 구절인지 모르겠는데) ‘만물개비어아萬物萬物皆備於我’ 라고 그래요. ‘만물이 다 나한테 갖추어져 있다.’ 유교 입에서 이런 말 나오니까 이거 불교에서는 원래 나오는 말인데, ‘만법유심萬法唯心’에 해당되는 말을 날려요. 이게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에 유교에서 이미 했단 말이에요. ‘만물개비어아萬物萬物皆備於我’, 만물이 다 내 안에 들어와 있다. 12:05

그럼 어떤 식으로 들어와 있느냐? ‘이데아’로 있는 거죠. 이걸 중세 신학에서는 뭐라고 하냐면요, 중세 신학에 만물이 하나님 안에 다 있어야 되잖아요? 중세 신학자들도 알아요. 이데아로 존재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아퀴나스가 이걸 뭐라고 전제하냐면 그러면, “하느님 안에 이 컵도 있고,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다 있을 텐데 어떻게 있느냐?” 그러면 (아까 검성이랑 했던 얘기) 양자장 세계에 그게 정보로 있겠죠. 그걸 아퀴나스가 표현하는 게 이렇게 표현해요.

표현이 재밌어서 항상 제가 많이 사용하는데 ‘탁월한 방식으로 있다’라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탁월한 방식으로 있다. 이게 중세 신학의 결론이에요. 그래서 ‘신 안에 만물은 탁월한 방식으로 있다.’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시공의 구애를 안 받는, 탁월한 방식으로 있다.『신학대전』을 이렇게 두껍게 썼는데 아퀴나스가 재밌는 사람인게, 이렇게 쓰고 막 신에 대해 설명해 가다가 미사 때 체험을 해버려요. 진짜로 하나 된 체험을 그때 해요. 12:53

그러니까 그 앞에 쓴 거는 머리가 좋아서 달빛으로 쓴 거예요. 분명히 참나의 힘이긴 하죠. 참나의 빛이긴 한데 달빛으로 썼어요. 타고난 재질로 썼다가 어느 날 미사 때 뿅 가버려요. 하나된 체험을 해버려요. 그러고 나니까 안 썼어요. 그 뒤로 안 썼어요. 『신학대전』이 지금 미완성이에요. 제자가 일부 보강을 했지만 미완성이 돼 버렸어요. 그 이유가 그 한마디로 하면 “내가 체험한 거에 비하면 『신학 대전』은 지푸라기랑 같다.” 13:23

그러니까 진짜 체험하는 것이 제일 짱이라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하고 하나가 되고 나니까 그전에 했던 말, 그걸 계속 논리를 이끌어 나가야 할 힘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 이야기였는데 중세도 있었고, 동양에도 있었고, 서양에도 있었고, 어디나 있었던 얘기에요. 인간의 개체인데 우리 안에는 우주랑 통하는, 우리 안에는 하나의 블랙홀적으로 통하는 자리가 있다는 거, 그걸 알고 거기랑 계속 접속하는 사람이 되느냐, 가끔 열어보는 사람이 되느냐, 아예 모르는 사람이 되느냐, 이 차이가 양심도 나오질 않아요.

그 안에 인의예지가 아무리 있어도 안 나오겠죠? 나올 때마다 커트 당해요, 우리 에고한테. 왜 그러냐면 제가 그때도 얘기했지만, ‘측은지심’ 왜 사단이라고 하는지 방금 제가 설명했죠? ‘사단四端’이라고 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의 단서端緖고요, 인이 살짝 삐져나온 거고요, 시공간 안으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가 살짝 삐져나온 거예요. ‘정의로워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삐져나온 거예요. 이게 사단四端이에요. 14:20

‘사랑하라’라는 메시지가 삐져나온 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요, ‘정의로워라’하는 게 삐져나온 게 수오지심羞惡之心이고요. ‘지혜로워라’하는 게 삐져나온 게 시비지심是非之心이고, (또 뭐죠?) ‘예절을 잘지켜라’하는 게 삐져나오는 게, ‘남한테 에티켓을 지켜라’하는 게 삐져나온 게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는 거죠.

이게 『성경』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항상 얘기하는 ‘말씀’이에요.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에요.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만 살았다는 게 이걸 지키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임의로 정한 게 아니라, 맹자가 발견한 거지 사실 우리 안에 동서양 막론하고 있는 거예요, 항상. 예수님은 여기 워낙 깨어 계시다 보니까, 늘 하나에 접속해서 살다 보니까 이 메시지를 늘 받으신 거예요. 한 라인이죠. 하나님하고 한 라인이에요. 15:16

이게 이 전화가 계속 오는 거예요. 뭐만 하려고 하면 “사랑하라!” “네 거 아니다, 절제해라!” 욕하고 싶은데 “참아라! 남 기분 생각해 봐라” 이렇게 해서 하나도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에고가 더 승하거든요, 도심보다는. 인심이 더 승한 사람은 해요. 이걸 다 차단하고 할 수 있어요. 15:41

근데 늘 하나인 채로 존재하다 보면 이제 이쪽이 주가 돼버려요. 그럼 예수님처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결론은 ‘나는 아버지랑 하나다. 나는 아버지랑 하나다.’ ‘나’라는 건 예수님의 에고예요. 그럼 결론이 ‘나는 아버지랑 하나다.’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나는 아버지랑 하나고, 난 아버지 말씀대로 사는 게 내 생의 양식이고’ 이런 말이 줄줄줄 나오면요, 이게 동양에서 말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단계예요. 16:08

종심從心이라고 하죠. 이때의 심心은 에고예요. 인심, 똑같아요. 내 인심이 “너 꼴리는 대로 해봐라”라고 해도 법도로 어긋나지 않더라는 건, 아버지가 세우신 법이에요. 그러니까 에고가 아무리 이제 개판을 치려고 해도요, 항상 이 메시지를 지적받으며 살다 보니까, 안에서 이게 자기가 돼 버렸어요. 그 프로그램을 어길 수 없게 돼버려요. 기존에 깔려 있던 이게 기본 프로그램이고요, 인간이라는 게 나올 때 이게 기본 프로그램인데 이 메뉴얼이 경전이죠.

메뉴얼이 뒤에 나왔죠. 연구하신 분들이 만들었는데 이게 기본 프로그램이고, 이 위에 깔린 모든 것들은 에고가 만들어낸 것들 다 응용 프로그램이에요. 어떤 일시적인 목적을 위한 에고의. 근데 우리가 그게 하나의 습習이라고 하는 거죠. 응용 프로그램들이 습習이에요. 그걸로 인해서 자꾸 이걸 하려고 하면요, 그게 작동돼 버려요. 자꾸 내가 깔아놓는 그것들이 작동해서 길을 막아요, 실행을. 17:08

근데 이제 하나가 될수록, 우주랑 하나가 될수록 이게 벗겨지면서 이게 고스란히 드러나더라는 거죠. 그래서 성인들은 부득이不得已해서 해요. ‘부득이不得已’라는 말을 좋아해요, 성인들은. 사랑 안 할 수가 없어서 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알아버린 거예요. 하나로 있으니까 저 사람 마음이 알아져버리는데 어떻게 해요. 17:27

물건을 (상대방을) 무시해야 훔치지, 상대방 마음이 느껴져 버리면 못 훔치잖아요? 더구나 이게 막 가족같이 느껴져 버리고 남 같지 않게 느껴져 버리면 못 훔치죠. 그러니까 아무리 악한도 이 안에 기본 프로그램이 이게 들어있기 때문에 성선설은 이거예요. 여기에 적절한 자극만 줘서 이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면, 양심을 소생시키면 죄 못 짓는다 예요. 17:47

그래서 ‘알면 죄 못 짓는다’는 얘기를 성인들이 다 해요. 알려면 이제 하나가 되는 체험이 있어야 되죠, 당연히. 이런 얘기예요. (맹자에 대한 얘기로 한번 주위 환기하고요, 이제 또 가면서 얘기하죠.) 18:07

오늘 3년상喪 얘기가 나오는데 이번 기회에(재미없는 얘기인데요) 3년상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 가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37절 “맹자가 이르기를 먹이되 사랑하지 않으면 돼지로 대접하는 것이다.” “먹이되”가요, 밥 잘 차려주는 거예요. 밥 차려주고 제때제때. 그럼 이게 ‘나를 사랑해서 그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하는 사람 마음의 속마음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돼지로 대접하는 거다. 18:37

왜냐하면 돼지도 그렇게 하거든요. 제때 먹이 주거든요. 제때 먹이 주는 걸로는 지금 이 경우는 효도를 얘기한 건 아니죠. 이거는 맹자가 어느 나라에 초빙받아서 갔는데 대접이 시원치 않을 때 나온 얘기인데요, 바로 밑에 얘기는 『논어』에 나온 얘기인데 둘이 이 표현이 비슷해서 참고하시라고 제가 썼어요. 이따 같이 보겠습니다. 18:55

“먹이되 사랑하지 않으면 돼지를 대접하는 거고, 사랑하되 공경하지 않으면 짐승으로 기르는 거다.”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이제 말이나 개도 그렇게 기를 수 있잖아요. 공경하지 않으면 그건 짐승, 개나 말 키우는 거랑 똑같다. “공경이라는 거는 예물을 받들기 전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 예전 같으면 이게 맹자 정도 부르려면 먼저 예물을 보내야 돼요, 폐백을. “우리 임금님이 좀 뵙잡니다”라고. 근데 맹자가 말한 건 이거예요. “예물만 보내면 뭐 하냐, 그 전에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지.” 이 말이 지금 어디 가서 대접이 시원치 않아서 지금 나오는 얘기거든요. “공경하되,” 또 공경을 했다 쳐도, 공경해가지고 불렀는데 실질이 없다면, 등용을 안 해주는 거예요.

만나주지도 않고, 나한테 뭐 힘도 안 실어주고 이러면 “군자는 헛되이 잡혀있지 않는다.” “나 떠날거야”라는 말, 결론이에요. “이런 식으로 계속 날 대접하면 나 떠나겠다”하는 말하는데 이 말이 나온 건데요. 이게 재밌는 게 이제 『논어』에 나오는 표현이랑 비슷해요. 보세요. 20:05

자유가 효도를 묻자, 공자님이 “지금 요즘 효자들은 봉양을 잘한다고 할 만하지” 부모님한테 먹을 건 잘 갖다 드리지 “근데 그거는 견마犬馬, 개나 말도 그렇게 한다. 공경하지 않으면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이제 요 표현을 맹자가 활용해서 사실 쓰고 있다는 걸 알면 재밌죠. 그이 정도만 어려운 얘기는 아니고요. 효도할 때도 이렇게 “나 밥 잘 챙겨드렸어” 이 정도면 만족하지 마라, 이런 말도 있고. 남한테 대접할 때도 공경이 빠져버리는 게 진심이 빠지면 안 되고, 진심이 있더라도 뭔가 실질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정도 이야기입니다. 20:36

38번이 재미있죠. “맹자가 이르기를 형체와 색깔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 우리 이 모양 이렇게 생기고, 이런 색깔 갖게 된 거에도 우주가 관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주적인 원리가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 다 이해하고 쓸 사람은 우주랑 하나 된 사람만 쓰겠죠? 성인만 할 수 있다. ‘성인이 돼야 눈·코·입 제대로 쓴다.’ 그러겠죠? 이게 인터넷 사줘도 초딩이 쓰는 게 다르고, 고딩이 쓰는 게 다르고, 맛을 알고 쓰는 사람이 제대로 쓰겠죠. 왜 이걸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사줬는지를 이해하고 쓰는 사람이 제대로 쓰고. 21:01

아까 어쨌든 하나님이 인의예지 프로그램 우리한테 다 깔아줬어도, 눈에도 다 깔아진 게 있어요. 뭐냐면 눈은 잘 보라고, 사물을 제대로 보고 인의예지 할 때 쓰라고 준 거잖아요? 근데 이걸 이상한 야동이나 보고 있으면 우리가 제대로 못 쓰는 거라는 이 얘기예요. 형체와 이 색깔은 하나님이 준 건데, 다 메시지가 있는데 제대로 쓰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지금 이게 인도식 명상이랑 달라요. 인도나 이런 불교를 좀 잘못하신 분은, 형색을 버려야만 도를 얻는다고 생각하세요, 하나인 것만 도로 아시니까. 근데 생각해 보면 하나인 것만 우주가 아니에요, 매 순간 변하는 것도 우주지. 우주는 이걸 다 표현해서 자기가 여러가지 표현해서 만들어가는데 ‘우주 중에 어느 하나만 나는 택하겠다’라고 이렇게 에고가 그것도 발동한 거예요. 그래서 우린 다 에고로 봐요. 그런 거 자체도, 그런 시도 자체도. ‘그냥 우주랑 같이 흘러라’라는 게 동양의 결론입니다. 22:06

(제 그 액자 있지 않나요?) 작은 액자 이게 면우 선생님이 그려놓으신 건데요, 그대로 제가 옮겨놓은 거예요. ‘일신유주’ 한 몸에는 주인이 있으면, ‘백체종성’ 백체가 다 말을 듣는다. 이게 주인이에요. 우리 텅 빈 자리, 체상용體相用입니다. 이게 똑같아요, 유교도.

본체는 텅 비었다는 거예요. 우주랑 하나 된 자리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거예요. 근데 그 안에 네 가지 상(이데아)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어떤 이데아냐? 인仁 ‘애연생육’ 만물을 살려주는 이데아가 들어있고, ‘천연품절’ 만물 그 안에도, 텅빈 중에도 절도가 있더라는 거예요, 어떤 질서가. 그게 예절이고요. ‘절연단재’ 하나이니까 이거 하나를 깨려는 어떤 에너지를 차단하고 있겠죠. 어떤 에고의 도발, 이런 불이不二 (오염되지 않는) 오염을 잘라버리는 그런 힘이 있다는 거죠.

불이不二란 더럽혀지지 않는 힘, 그런 이데아가 있고. ‘요염변별’ 옳고 그름을 이데아 안에서 분명히 가리고 있더라는 거죠. 다 알고 있더라는 거죠. 우주를 어떻게 굴릴지도 다 알고 있더라는 거죠. 여기서 인의예지의 이데아가 있는데 이게 표현됐을 때, 우리 마음에 표현되면 아까 사단이에요. 사단도 용用이고요, 이제 면우 선생님은 ‘백체종력’이라는 초점에 둬서, 몸에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그려놓은 거예요. 23:34

몸에 들어갈 때, 이게 지금 형색에 담긴 천성이에요. 입에는 ‘위불식사질이’, 사악한 거 안 먹는 이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입은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고만 알면 너무 표면적이고, ‘애먼 거 먹지 마라!’는 이치도 거기 같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더 배후의 이데아가 인의예지이기 때문에 인의예지를 여기다 적용해보면, ‘귀로는 이상한(음탕한) 소리 듣지 말라!’는 원리도 있다는 거예요.

‘손으로는 애먼 짓, 애먼 거 만지지 말라!’는 것도 있고, ‘냄새는 더러운 거 맡지 말라!’는 이치도 있고, ‘눈에는 좋은 거 보고 악한 거 보지 마라!’는 것도 있고, ‘발로는 이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원리도 있다는 거예요. 24:23

‘발은 돌아다니라고 있는 거지’라고만 안다면 너무 인의예지의, 더 깊은 이데아를 모르고 쓴다는 거예요. 이렇게 알고 쓰면 우리가 이데아가, 사단이 제대로 드러나면 손과 팔다리도 사실은 제자리를 찾는다는 거예요. 이거를 다른 말로 해놓은 게 제가 밑에 해놨죠, 『논어』에. 공자님이 안자, 제일 수제자인데 안자가 계재가 제일 높으신 분인데 그분한테 가르쳐준 게 이거거든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비례물시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마라.” 이게 눈·귀·팔·다리 제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거잖아요? 예냐 아니냐는 뭐라고 그러면 제가 아까 제가 한 얘기랑 비춰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죠. 양심이 합당하지 않으면, 양심에 합당하지 않은 짓은, (합당하지 않으면) 보는 게 양심에 꺼려지면 보지 말라는 거예요. 25:22

그게 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에요. 예수님이 이런 말 했어요. “눈이 잘못을 저지르면 눈을 뽑아버리거라. 두 눈 달고 지옥 가는 것보다 외눈으로 천국 가는 게 낫다. 팔이 이상한 짓거리 하면 팔 잘라버려라. 외팔이로 천국 가는 게 낫지, 두 팔 갖고 지옥 가는 것보단 낫다.” 이 얘기예요. 형과 색을 제대로 부릴 수 있으려면 성인이어야 된다. 『논어』도 그 얘기고요. 25:46

『시경』에 이게 유명한 얘기인데 아주 옛날 얘기죠. 『시경』이면 옛날 시인데 “천생증민天生烝民이” 증烝은 여러 백성입니다. “하느님이 여러 백성 나실 때, 유물유칙有物有則” 유물유칙이 요즘 과학자들 이거 가지고 하는 거죠. 이게 지금 여기 나온 유칙有則은 아까 말한 근본원리도 해당되고요, 근본원리에 해당되고 1차적으로는 인과공식이겠죠. ‘시공간 안에서 먼저 원칙이 있다’예요. 26:19

“하느님이 사물을 낼 때는 반드시 어떤 법칙이 있다” 이게 유명한 게, 유교에서는 이게 항상 모든 학문의 근거가 돼요, 이 『시경』의 이 말이.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원리가 있어요. 이게 원리가 시공 안에 들어와 작용하는 원리는 우리가 ‘인과공식’이라고 그러고, 시공 전에 그 원리 정보는, 순수 정보는 우리가 ‘근본원리’라고 하죠. 26:30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래서 “민지병이民之秉彝” 이게 지금 이것도 성리학인 게요, 보세요. 『시경』에 이미 성리학의 원형이 들어있어요. 우리가 잘못 알면 불교가 들어와서 유교가 성리학이라고 대충 만들어가지고 불도 제압하려고 나왔지 하는 그게 아니고, 『시경』에 이미 있어요.

보세요. 유물유칙有物有則은 이거는 물리物理잖아요, 지금. 물리物理를 얘기해요. 근데 곧장 예전 어른들은 물리物理랑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천지에서 물리物理를 얘기했다면 반드시 다시 인간의 본성 문제로 와요. 그게 뭐냐면 “민지병이民之秉彝”에요. 병이秉彝는요, 백성의 본성이에요. 설명하려면 어려운데 병이秉彝는 어떤 법도예요. 떳떳한 법도. 27:22

그러니까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듯이, 하느님이 백성을 낼 때 백성 안에 (우리가 말한 인의예지에요) 양심의 어떤 법칙을 주셨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법학에서 얘기하는 자연법입니다. 타고난 법이 있다는 겁니다, 양심의. 그래서 “호시의덕好是懿德” 의덕懿德은 뛰어난 덕이거든요. 뒤에 의덕이라는 거는. ‘뛰어난 덕을 좋아한다’ 이해되시죠?

이 유교에 그런 마인드는 어디에서 갔겠습니까? 이게 홍산문명에서 간 거예요. 백두산 동이족한테서, 이런 이야기 자체가. 보세요. 자연물이 있으면, 그러니까 이 자연은 놀라운 게 이 커피면, 제가 커피를 타서 마시다가 여기다 만약에 물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니면 뭐 우유를 넣으면 어떻게 변할까? 자기들은 다 알고 있어요. 우리 인간 같으면 커피 제가 커피인데 우유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얘를 밀어내야 돼, 사귀어야 돼 말아야 돼 할테지만 얘들은 인간보다 대단한 게 칼같이 정보를 가지고 움직이거든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28:20

그러니까 만물은 다 법칙이 있는데 인간은 그 정도의 강렬한 법칙이면, 우리가 여자 보면 반응하는 거, 식욕·성욕·물욕·명예욕 다 똑같아요. 그런데 그거는 잘 분석해 보면 이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법칙이 있고요. 해당되는 게 많아요. 순수한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법칙은 뭐겠냐 하면 ‘인의예지’라는 거죠. ‘순수한 마음’ 28:40

그 법칙이, 우리 안에 백성들이 그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병이秉彝라는 거는 법칙이에요. 떳떳한 법칙. 그렇기 때문에 요놈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걸 보면 좋아한다는 거예요. ‘호시의덕好是懿德’ 훌륭한 덕을 봤을 때 좋아하더라는 거예요. 진선미를 봤을 때 양심이 되게 좋아하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좋은 명상이 잘 되고 막 선행을 했을 때 기분이 좋잖아요? 실제 뇌 사진을 찍어보면 인간이 선행을 했을 때 제일 뇌가 보상을 많이 해준대요. 몸에 좋은 호르몬을 뿜어주는, 기분 좋은. 우리가 착한 일하고 기분 딱 좋을 때, 그때 이게 예전 어른들이 볼 때는 우리 안에 법칙이 있어서에요, 인의예지의 법칙이. 아까 설명드렸던 그게 안에 있으니까, 맞는 걸 하니까 양심이 좋아하더라는 거죠.

실제로 그 여자들도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상대방과 섹스를 계속하잖아요, 그런 창녀들. 그러면 뇌가 미친대요. 뇌 사진을 찍어보면. 양심에 어긋나고 있는 거죠.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하기 때문에 자연은 냉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거지. 그것도 어느 선을 넘어가면 우리가 몸도, 이 몸뚱이에도 법칙이 있는데 저희가 그 선을 넘어서면 이 몸뚱이가 암 선고도 하고, 병을 사망 선고도 내리잖아요. 법칙이 냉정히 있죠. 30:06

특히 몸뚱이는 우리 의지랑 상관없는 거 보면 이거 여기까지 하느님 세계예요. 저희 이걸로 머리 굴리고 있죠, 에고로. 여기까지는 자연물이에요. 다 물리법칙으로 돌아가는데 우리 에고가 자꾸 딴 생각을 하죠, 멋대로. 우리 몸뚱이에서 적용되는 법칙도 모르고 막 이렇게 말을 하니까 우리 양심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 이게 에고의 화인데요, 에고도 아까 말씀드린 죽일 게 아니라 잘 살려 못 쓰는 우리 탓이죠, 결국에는. 그렇게 보시면 되고. ‘성인이라야 때깔을 제대로 활용한다’

3년상喪 얘기인데요, 제나라 선왕이 상복을 입는 기간, 이제 예전에 3년상을 하잖아요? 그니까 임금은 특히 이제 3년 이상 해야되는데, 임금부터 서민까지 다 하는데 상복을 3년간 입는 거죠. 근데 이게 기간이 3년이고요, 실제 월수를 세면 27개월 정도 된대요. 2년 하고 한 두 달 더 해요, 두세 달, 27개월 정도. 3년상을 하는데 그동안은 이제 상복 입고 묘 지키기도 하는데 임금 같은 경우는 상복을 입는 거죠. 상복 입고 있는 거죠. 30:58

3년간 상복 입고 있는데 그걸 좀 단축시키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자 공손추가 (맹자 제자죠) “1년상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1년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니까 맹자가 “이는 혹자가(누가) 그 형 팔을 비틀고 있으니까 그 대가 지나가다가 야 좀 천천히 비틀어라 라고 말하는 꼴이다.” 그러니까 3년 안 하면 이제 안 맞지 않느냐? 이 얘기죠. “다만 효도와 공경을 얘기해라” 그냥 양심을 얘기해라. 효도 공경은 양심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거든요. 그렇죠. 측은지심과 사양지심이에요.

뭐냐하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나이 많은 형을 대할 때 좀 조심스러운 마음하고,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효성의 기초거든요. 얘기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제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기』 동양의 모든 몇 천 가지 예를 다 종합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양심이 좋아하는 거예요. 사단을 확충했을 뿐이에요. 사양지심의 합당한 거, 사양지심이 좋다고 하는 거를 채워줬을 뿐이에요. 32:02

그러니까 이것도 ‘3년 이상을 왜 해야 되느냐?’ ‘3년 하냐? 1년 해야 되냐?’ 이 문제가 아니라 맹자는 뭐냐면 ‘양심에서 3년 정도는 해야 양심이 좋아하지 않나?’ 이 생각인 거예요. 그 왕이 양심을 잃어버린 게 지금 더 문제인 거예요, 맹자가 생각할 때는.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이제 이 얘기가 하나 끝났고요. 왕자들 중에, 좀 뒤에 『논어』 얘기로 다시 할게요. 32:26

“왕자들 중에 그 어머니가 죽은 자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왕자들이 어머니가 하나가 아니라는 얘기죠, 이 말은. 왕자들 중에 어머니가 죽은 자가 있었다는 거는 본처 자식이 아니고 이 왕자는 서자를 말하죠. 그 서자의 생모가 죽었다는 거예요. 여러 왕자 중에 한 놈만 말하는 겁니다. 그놈이 죽었는데 스승이 그 왕자의 사부가 있겠죠? 사부가 우리 왕자님이 몇 개월 상복을 좀 입기를 청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손추가 “이런 경우에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앞의 얘기를 들고 나오니까 맹자가 “그러면 이 왕자도 잘못됐겠네요. 3년을 못 채웠으니까”라고 얘기를 하니까 (몇 개월 한 거잖아요, 3년이 아닌 거죠) 그런데 “맹자가 이르기를 이는 삼년상을 온전히 마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이니” 이 왕자의 경우는 지금 정확히 사례는 몰라요. 근데 『사서집주』에 보면요, 주자가 볼 때는, 이 경우는 서자는 보통 장례식날까지 상복을 입고 벗는대요.

그러니까 이 경우는 지금 몇 개월 더 입겠다는 거는, 좀 뭐냐하면 ‘너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몇 개월이라도 3년은 내가 못 해도, 몇 개월이라도 하고 싶다’ 정도로 생각한 거예요, 맹자는. 그러니까 “이 경우는 3년 상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니까 하루만 더 한다고 해도 이거는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거다.” 이 마음을 보는 거죠. 그 효심이 얼마나 지극하냐.

앞에 경우는, “제선왕의 경우는 아무도 막지 않는데 자기 혼자 하기 싫다고 줄인 거다.” 이해하시겠죠? 3년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유교는 다 그겁니다, 제가 아까 얘기했지만.) 유물유칙이고, 백성 안에는 이 유물유칙에 해당되는 게, 인간의 마음의 안에는 이게 동서남북도 똑같아요. 동서남북이랑 같잖아요, 실제 방위도.

그래서 이게 인의예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인의예지 볼 때 어떻게 봐야되냐면 잣대로 봐야 돼요, 자. 우리가 동서남북만 잴 수 있으면 나침판으로 모든 방위를 다 잴 수 있죠. 똑같이 인의예지만 잴 수 있다면, 이게 인이냐? 의냐? 예냐? 지냐? 인간사의 모든 일을 다 잴 수가 있죠.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의’를 갖다가 계속 확장시키면 모든 『육법전서』가 다 여기서 나오고요, ‘예’를 갖다가 밖으로 이거는 사양지심이죠. 인간의 공경스러운 마음, 남한테.

여기는 수오지심, 불의를 못 참는 마음을 확장시키면 모든 법이(지구상의 법이) 다 나오고요. 여기에 근거하고 있죠, 인간의 양심 중에 수오지심에, 사양지심에 근거해서 나가면 유교만 해도 3천가지 예가 있다고 그래요, 예전에. 3천가지 예가 결국에는 확충이라고 그러죠, 확충. 맹자가 확충이라고 그래요. ‘사단을 확충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그러는데요. 그 근거예요. 35:15

3천가지의 달인이 되는 것도, 공자님은 ‘예’의 달인이거든요. 근데 결국 들어가 보면 공자님은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못 막았을 뿐이에요. 남한테 공경하고 싶은데 이걸 못 막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더 공경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다 보니까 거기까지 간 거예요. ‘예禮’의 달인이 된 거예요.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논어』에도 보면 “장례 때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 예가 상례를(장례를) 후하게 치른들 뭔 소용이냐?”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슬퍼함이 본질인데” 그러니까 이게 본本이라는 거죠. 본本은 이 양심을 확충해주는 거. 확은 ‘넓힐 확(擴)’자고요, 충은 ‘채워줄 충(充)’자예요. 양심을 만족스럽게 해주는 것이 제일 첫째라는 걸 꼭 아시고. 36:00

그다음에 제야라는 아주 공자님한테 한없이 까였던 제자의 얘기가 있습니다, 『논어』에. 이것도 신나게 까인 장면인데요. 공자님이 뒷담화가 세신 분이라 『논어』에 보면 계속 나간 뒤에 꼭 뭐 한마디 하세요, 마음에 안 들었을 때는. 제야가 아주 낮잠 자다 걸려서 한 번 까인 것도 있고 해서 (심각하게 까였던 제자인데) 재주는 있는데 아주 문제 제자로 등장하죠.

여기서 제야·제여 같은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제야·제여 같이 보시면 됩니다. 제야라고 부르다가 또 제여라고 불러요. 제야가 물었어요. 꼭 이런 질문은 이런 친구들이 하죠. “3년상喪은 너무 긴 것 같습니다. 군자가 3년간 예절을 하지 않으면 (뭔가 실리적인 걸 들고 나와요) 나라의 예절이 좀 무너지고 3년간 군자가 음악을 안 하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겁니다. 곡식 이미 다 하여 새 곡식이 이미 자라고” 그러니까 한 1년 정도 되면 곡식도 한 번 순환하고요.

이건 좀 새로운 말인데 “불을 붙이는 나무도 새롭게 고치니” 이 말은요, 옆에 『사서집주』에 보면 예전에는 봄에는 느릅나무 가지, 버드나무 같은 걸로, 이게 불을 취한다는 게 이 나무를 비벼서 불을 취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근데 여름에는 대추나무·살구나무, 가을에는 떡갈나무·졸참나무, 겨울에는 회나무·박달나무 해서 1년에 한 번 나무가 한 번 돌아요. 그러니까 그 얘기예요.

“불 피우는 나무도 1년 단위로 순환을 하니 1년상이 옳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까 공자님이 딱 한마디 해요. 이 공자님의 태도를 보면 우리가 ‘예’라는 게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어요. 이 말 보세요. “쌀밥 먹고 비단 옷 입으면 마음이 편하더냐?” 이렇게 물어봐요. “너 양심은 괜찮으냐?” 그러니까 이 기간이라는 거는, 3년상이라는 기간은 양심이 만족하는 기간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제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또 표현이 달라야겠지만, 그 당시에는 딱히 뭐 그렇게 할 일이 없으니까 3년상 다 했던 때죠. 지금은 많이 바빠졌으니까 감안해야겠지만. “편하냐?” 그러니까 제야가 눈치없이 “편안한데요”라고 한 거예요. 37:58

공자님이 말씀이 “네가 편하면 그렇게 해라. 군자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는 맛있는 거 먹어도 달지도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마음이 슬퍼서 어디 좋은데 누워도 편안하지 않아서 3년을 그냥 먹지 말라고 한 건데” 그렇죠. 누구는 양심이 발달된 사람은 이렇게 해야 흡족했겠죠. 근데 제야는 양심이 좀 덜 발달되다 보니까 1년 하는 것도 힘든 거예요. 음식 맛이 너무 느껴지고, 그때부터는 다 알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자가 안타까워서 “편하더냐?”하니 “네. 편한데요”하니까 “원래는 그게 안 편해야 되는데” 이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근데 네가 편하다니 그렇게 해라”라고 허용해줘요, 공자님은. 하지 말라고 안 해요. 나가고 난 뒤에 이제 강렬한 뒷담화가 시작됩니다. 38:46

“제여가 인자하지 않으니, 자식이 태어난 지 3년 된 뒤에야 부모 품에서 벗어나는데 (그래도 3년 정도는 우리가 부모님을 잊지 않고 해줘야 마음이 흡족한 법인데) 그래서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상인데 제여는 그 부모에게 3년의 사랑을 받은 것인가?” 하면서 “쟤는 부모 사랑 못 받았나?” 이런 식의 얘기를 하고 끝내는 거예요. 이제 아시겠죠? 39:02

근데 이 3년상도 동이족들이 하던 거예요, 원래. 그래서 『예기』에 보면 3년상을 제일 잘 지킨 사람은 대련·소련이라는 형제가 나오는 데 동이족 사람들이에요. “동이의 자식이로다” 이렇게 나와요. 『예기』에 “대련과 소련이 3년상 훌륭히 끝냈다고 하니 참 동이의 자식이로다.” 이렇게 공자님 말이 나와요.

대련·소련 형제 일로 3년상이라는 걸 아시겠죠? 3년상은 이제 부모상이에요. 다른 상이 아니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기 때문에 이제 생긴 말인데요. 근데 이제 보통 아버지 살아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한 1년만 했대요. 1년만 상을 했대요. 39:57

사전에서 찾은 건데 “3년상 중에는 신주 모시고, 여막(오두막) 하나 짓고 아침 저녁으로 식사 올리고. 그러니까 살아계실 때처럼 대접하는 거예요. 아침 저녁 식사 올리고, 초하루랑 보름에는 또 이렇게 제사 지내고요. 밖에 나갔다가 혹시 나갈 일 있다가 들어올 때는 꼭 살아계신 것처럼 고하고 나가고, 들어와서 고하고. 하늘을 보면 안된다고 해서 이렇게 당잎 쓰고 다니고요(얼굴을 가리고 다니고) 술이랑 고기 안 먹고요. 초상으로부터 한 27개월까지 한 뒤에 이제 완전히 탈상을 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40:40

그다음에 40번이요.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의 가르치는 방법은(교수법은) 5가지가 있는데” 보세요. 하나하나 따져보세요. ‘단비時雨’라는 건 이겁니다. 제때 내린 비가 단비예요. “단비가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처럼有如時雨化之者” 그러니까 제자가 한참 제자 스스로 잘하고 있는 뛰어난 제자들이에요. 하나만 콕 찔러주면 그 순간에 물꼬만 터주면 되는 제자죠. 원래 본인이 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필요한 거 하나만, 물고만 터주면 확 터져버리는(완성되는) 제자를 말하고요. 그렇게 가리킬 때도 있고. 제자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두 번째는 덕을 이루게 해주는 것도 있고”

지금부터 제자들은 2번 3번은 혼자 힘으로는 못 크는 제자예요. 그러니까 “야 그래도 너 남 가르치는 재주가 있더라. 네가 그래도 효도는 잘하더라.” 이렇게 해서 부추겨주는 거예요. 그 사람의 잘한 장점을 “덕쪽으로 잘하는 거를 자꾸 부추겨서” 그걸 이루게 해주는 거예요. 아까랑 다르죠. 3번도 그래요. 재능, “야 그래도 너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더라” 해가지고. 이렇게 “재능을 자꾸 더 부추겨서 하게 하는 법”이에요.

네 번째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거”요. 물어보는 거에 답 잘해주는 것도 하나의 교수법이고요. 다섯 번째는 이거는 잘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혼자서 선으로 다스리게 하는 것도 있다.” 이거는 한문 보시면 ‘사숙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숙예자私淑艾者’라고 돼 있는데 ‘사숙’이라고 돼 있는데요. 이거예요. ‘사숙’이라고 돼 있죠? 우리가 ‘사숙하다’라고 그래요. 지금 봉우 할아버지도 직접 뵙고 배운 제자는 ‘제자’죠. 직접 못 배웠는데 하신 건 ‘사숙’하신 거예요. 42:14

개인적으로 공부하신 거예요. 맹자가 공자에 대해서 이 말을 써요. 공자님한테 “나는 공자님을 사숙했다”라고. 그러니까 직접은 못 배웠거든요. 자사의 제자로 지금 알려져 있으니까요, 맹자가. 그러니까 이런 경우 ‘사숙했다’고 그래요. 직접 못 배우고 남기신 책이나 이런 동영상, 요즘 같으면 cd를 보고 공부했다면 사숙한 거예요.

우리 홍익학당에도 사숙하는 분들이 많이 있죠. 직접 찾아오지 않고 사숙하시는 분. 사숙의 예자는 ‘다스릴 예(艾)’자예요. 그래서 혼자서 배우고 또 다스리는 그런. 이렇게 하도록 책이나 이런 말을 남겨놓는 거죠. 이거는 직접 가르치는 건 아니고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법도 있다. 43:14

41번은 맹자가 좀 공자님에 비해서 이렇게 되게 도에 대한 자부심도 세고, 좀 이제 부드러운 기상이 좀 없지 않냐 하는 말을 듣는 그런 이유가 되는 구절 중에 하나다. 41절은 “공손추가 묻기를 도는 참 높고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치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아서, 형체가 없는 하늘에 막 가라고 하는 것 같아서” 아까 이데아의 경지에 가면 하늘의 세계죠. “못 가겠다. 좀 쉽게 해주지 그러냐” 이겁니다.

“왜 저들로 하여금 (자기는 빼고 얘기했는데요. 자기도 포함해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달할 수 있어 라고 좀 눈에 쉽게 보여주고, 좀 쉽게 생각하게 해서 날마다 좀 힘쓰게, 부지런히 할 수 있게 인도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까 맹자가, “도목수(큰 목수)는 졸렬한 장인을 위해서 먹줄과 목을 고치지 않는다.” 이게 다루기 힘들다고 바꿀 수 있느냐? 잣대를 바꿀 수 있느냐?

예羿는 유명한 활 잘 쏘던 사람이죠. 하나라 때 아주 최고의, 중국 최고의 명사수죠. “예羿가 졸렬한 사수, 활 못 쏜다고 활을 조금만 당기라고 하면 되겠느냐?”이거죠. 활을 이 정도 당겨야 활이 나가는데 조금만 당겨라 라고 할 수 있겠느냐? 군자는 이 말이 좀 어려운 말인데요. “군자는 활을 당기거나 쏘지 않아도 화살이 발사되어 과녁에 적중된 듯하니, 적중하는 듯하니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중도에 서 있기만 해도 유능한 자 따라오는 법이다.” 이해되세요? 말이 좀 어렵죠. 주자주註나 이렇게 다 어렵더라고요, 이 말이. 44:40

그러니까 이거예요. 군자는 팔을 딱 당기고 서서 쏘지 않아도 맞추는 듯한 기상이 있다는 거죠. 뭐냐면 자세만 봐도 저 사람이 쏘면 맞겠다 하는 그게 있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뭐냐면 군자가 다 안 가르쳐준다는 거예요. 군자는 딱 중도에 서 있기만 한다는 거예요. 그럼 알아보는 자들은 보고 따라오게 돼 있다. 45:02

예羿가 한번 활을 딱 쏘는 거 봐도 사람들이 배우는 것처럼, 군자는 실제 활을 쏴서 맞힌다는 거는 일일이 찾아가서 제자를 가리켜주는 경우에 해당되겠죠. 그렇게 안 해도 활쏘는 모습만 보여줘도 거기에 감응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배우는 바가 있을 거다. 이해되시죠? 근데 이거 못 느낀 사람은 못 느끼겠죠. 그러니까 좀 상근기 제자들, 유능한 자는 따라오는 법이다.

이때 맹자의 마음은 좀 심사가 별로 안 좋았는지, 내가 별로 이렇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좀 보고 하라고 그래. 알아서 하라 그래”하는 이런 심사예요. 늘 이런 말만 있는 건 아닌데 이 구절에서의 뉘앙스는, “눈치것 좀 따라와라. 그거 일일이 그러면 다 먹여주랴” 뭐 이런. 근데 그 공자님도 『논어』에 보면 그거 있죠. 45:54

‘이게 하나의 탁자면 세 귀퉁이를 짚어주고 나머지 한 귀퉁이에 대해 대답 못 하면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런 건 있어요, 성인들도. 왜냐하면 상대방이 배우고자 하는 성의가 안 보인다면 가르쳐줘봤자 말을 버리는 게 되니까. 그런 경우예요. 그런 경우를 좀 세게 얘기하셨는데. ‘그쪽도 좀 따라와야지 이게 문만 낮아서 될 일은 아니다, 문턱만 자꾸 낮춰준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 재미있죠. 우리도 이렇게 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도 그래요. 사회 나가셔서 지금 이렇게 인의예지를 배웠잖아요? 인의예지를 배우면, 아까 이 안에 잣대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맞는 건 좋으실 거예요. 덕을 보면 좋아요. 양심에서 진짜 좋아하는 것들은 진짜 맞아서 그런 거니까 더 파보세요,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내 마음이.

또 양심에서 찝찝해하는 것들은 제가 이해 못 해도 양심에서 먼저 판단이 된다니까요. 양심에서 먼저 계산이 돼가지고 “저건 싫어”라고 말하는 게 찜찜함이에요. 그럴 때는 연구를 해봐야 돼요. 제 의식은 이해를 아직 못 했잖아요? 지금 양심에서 나왔는데 연구를 해봐야 돼요, 왜 찜찜한지 이 사안이. 연구해보다 보면 찜찜한 부분을 찾아내시면 또 사단이 확충될 겁니다. 47:00

이렇게 공부해 나가시면서 지금 직장이나 어디 계신 곳에서 ‘과하거나 모자라다’는 건 여기에, 인의예지에 과하거나 모자란 거예요. 양심에 부족하거나 양심을 너무 오버하거나. 사양이 너무 과하거나, 너무 사양한 모습이거나, 너무 거만하거나가 과부족過不足이죠, 사양 지심을 기준으로 봤을 때. 47:28

이제 이 정도 고개 숙여주는 게 맞는데요. “아이고 마~” 이렇게 하는 거는 뭔가 아부하려는 마음이 있고요. 목이 빳빳한 거는 ‘내가 잘났다’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과부족過不足이에요. 이거 안 하고 중中을 자꾸 잡으면서 살아가시면, 중도에 서 계시기만 해도 남들이 보고 알아보는 자들은 알아본다는 거예요. “당신은 뭔가 도를 아는 것 같다.” 이렇게 찾아와요. 이런 식으로 교수를 하겠다는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일일이 가서 “사단해라! 사단해라! 교회 다녀라! 교회 다녀라!” 이렇게 얘기하듯이 안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바르게 살면 상대방이 알아보고 따라올 거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양심이 있거든요. ‘양심은 양심을 알아보게 돼 있다’라는 신념하에 이렇게 가르치시겠다는 입장입니다.

42번은 “맹자가 이르기를” 이것도 말이 좀 뒷부분 가니까 말이 좀 난해한 말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도의 내 몸을 따르게 하고” 이해되나 보세요. “천하에 도가 없으면 내 몸의 도를 따르게 한다. 도에 남을 따르게 한다는 건 나는 못 들어봤다.” 어렵죠 이 말.

그런데 이게 이제 한번 추측해 보세요. 이게 항상 하시는 얘기잖아요. 천하에 일단 도가 없다는 건요, 대동 세상이 안 왔을 때, 태평세계가 안 왔을 때는 선비는 숨겠죠? 도가 없다면. 도가 왔다는 거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진 거죠. 그때는 집에서 안 불러주는 선비는 슬픈 선비예요. 도가 있는 세상이 왔는데 나를 안 찾는다 그러면 이게 참 쓸모가 없고, 내 공부 헛했구나 싶고, 이게 슬픈 일이에요.

그러니까 선비들은 도가 있는 세상에 가면 어떻게든 사회에 나가서 도를 펼치는 게 옳아요. 그래서 ‘겸선천하兼善天下’를 해야 돼요. 두루 천하와 선을 같이 누리고요. 무도한 세상이 돼서 내 도가 하나도 퍼질 것 같지 않으면, 깊은 산에 숨어서라도 혼자라도 도를 지켜야 돼요. 이 말을 지금 하고 싶으신 건데, 이 한문으로 봐서는 지금 어렵죠.

제가 풀어놓은 거 보시면, 천하에 도가 없을 때는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서 도를 펼쳐야겠죠? 도에 내 몸을 따르게 한다는 게 이거예요. 내가 좀 귀찮더라도 인의예지를 해야 되잖아요? 그럼 나가서 인의예지를 열심히 한다는 거예요, 도에다가 나를 맞추는데. 천하에 도가 없으면 내 몸에다 도를 맞춰야 된다는 거예요, 다 못하니까. 인의예지를 다 표현 못하니까 내 처지에 맞게 인의예지를 제약적으로밖에 표현을 못한다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죠?

‘도에다 나를 맞추느냐?’ ‘나에다 도를 맞추느냐?’ 근데 나에다 맞춘다는 게 에고에 맞추는 게 아니에요. 내 처지에 맞게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전에 은거한 선비들은 아주 불우하게 살아도 인의예지를 어기지는 않는데 인의예지를 확 펴지도 못하는 거예요. 50:01

보세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인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외치잖아요. 그런데 못 해준다는 거예요, 내 처지가 지금 불우해서 산에 가서 혼자 집 짓고 있는 처지에서 이걸 못 해줘요. 하지만 내 몸에서는 이걸 최대한 구현하고 산다는 거예요. 근데 유도한(도가 이루어진) 세상에 가면 일에다가 나를 맞춰야 돼요. 내가 싫더라도 사랑을 펼치는 데다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죠. 근데 이 얘기를 왜 하는지는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 말이 누구에 대한 반박인지가 나와요. 50:32

“도에 남을 따른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럼 이게 질문한 사람이 알겠죠. 이거 질문한 사람 말은 이거예요. 자기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나오면서, “저 사람들을 어떻게 도에 따르게 하지?”라고 하니까 맹자가 반발하는 거예요. 거기 그 말 듣기 싫어서.

“도가 있으면 도에 내 몸을 맞추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내 몸에 도를 맞추는 거지 도에다가 왜 남을 개입시키냐?”는 비판이죠. “도에다가 남을 따르게 한다는 말, 나 못 들어봤다.” 이해되시죠? 왜냐하면 우리가 도가 있는 세상이 오면 도를 가지고 남을 다스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내가 그걸 도를 내가 구현할 뿐이지 내 몸에서 도를 더 완벽하게 더 많이 표현할 뿐이지, 남하고는 애초에 관계가 없는 소리다 라는 거죠. 51:21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거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말인 것 같아요, 짐작컨대. 마지막 말이 “도에다가 남을 따르게 한다는 건 나 못 들어봤다”는 얘기는 남은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오로지 도에다가, 결국은 도랑 나랑이 문제지, 모든 거는.

인의예지가 나오는 거는 내 문제인데요. 내 양심 밝히는 문제인데 남의 양심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을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나부터 잘하면 남들한테 다 덕이 간다. 좋은 세상 되면 나를 통해 덕이 많이 갈 거고, 나쁜 세상 되면 나 혼자 지키겠지만 그래도 도랑 나만을 생각해야지 ‘왜 남들은 저럴까?’ 이런 말 하지 마라는 거죠. 나만 신경 쓰자. 이해되시죠? 말이 좀 어렵죠? 이 한문이 이게 난해한 건데요, 이런 뜻입니다. 52:00

43절은요, 맹자의 자부심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어요. 공도자公都子라는 제자가 말하는데, 등갱滕更이 군주 동생이래요. “등갱이 문하에 있을 때 (왜 예전에 합당한 바가 있었는데) 가르쳐 줄 만한데 왜 대답 안 해주셨으니까?” 질문을 했는데요.

맹자가 딱 잘라 다섯 가지를 얘기해요. ‘대답 안 해도 되는 다섯 가지.’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귀한 신분 믿고 질문하는 거” 내가 너보다~. 그렇죠. “어이 한 번 얘기해봐” 이런 정도에는 대답 안 한다는 거예요. “두 번째, 어짐을 믿고, 내가 너보다 더 현명하지” 하는 그런 태도로 나한테 질문하면 대답 안 한다는 거예요.

“세 번째, 나이 믿고, 내가 어른이니까 좀 얘기해봐”라고 하면 안 한다는 거예요. “네 번째, 공로를 믿고” 내가 좀 훈장 좀 탔지~ 하는 그런, 어깨에 힘 들어가서 물어보면 얘기 안 한다는 거예요. “다섯 번째, 우리 친한 사이니까 얘기 좀 해줘”라고 하면 얘기 안 해준다는 거예요. 진짜 성의를 가지고 물어보는, 그러니까 진심으로 배우고 싶어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면 얘기 안 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등갱은 이 중 두 가지 갖췄다”라고 했다. 모든 선배들이 1번과 2번을 꼽아요. 대화에는 없는데 왕 동생이다 보니까 아마 귀함 믿고, 또 자기가 또 머리 좋다고 생각하고 거만하게 질문해서 이런 대우를 받지 않았나 합니다.

이런 자세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제가 항상 착한 척하지 마시라고 하는 게요, 사단을 실현하는 거지, 제 에고가 더 선해 보이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도는. 맹자는 끊을 때 칼같이 끊어버리잖아요. 나나 너한테 도움이 안 된다 할 땐 잘라버려요. 왜냐하면 맹자가 얘기를 해줬어도 등갱이 결국 왜곡시켜서 써 먹었을 거예요. 그렇죠. 떠보려고 하는 질문이잖아요. 정보나 캐려고 하는 질문에 대답 안 해준다는 거예요.

우리 학당에도 누가 그렇게 떠보려고 질문 올리면 대답해 줄 필요가 없죠. 어차피 그 결과가 안 좋을 게 뻔하니까. 근데 그래도 얘가 희망이 보였다면 얘기를 했겠죠. 뭔가 얘가 그래도 싹수가 좀 보인다고 했을 때 얘기할 수도 있지만, 얘기 안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래도 이렇게 원망할까봐 얘기해 주고, 막 이렇게 정실에 이끌려서 이렇게 해야지 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정분에 이끌려가지고. 왜냐하면 친분 믿고 질문한 거는 대답 안 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보시면 좋고요.

44번은요 “맹자가 이르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에 잘 그치는 사람은 그치지 못할 수 없다.” 공부도 그냥 못하겠다고 금방금방 포기한다는 거예요. “두 번째, 두텁게 해야 할 것에 야박한 사람은 야박하지 못할 게 없다.” 부모님한테 야박하게 구는 사람은 누구든, 누군들 못 그러겠느냐는 거죠. 왜냐하면 자기한테 제일 은혜를 많이 준 사람한테도 그렇게 야박하게 하는 거 보면, 진짜 야박하게 해도 되는 사람한테는 얼마나 심하겠냐는 겁니다. 54:53

“그 나아감이 빠른 자는 물러남도 빠르다.” 이게 별 고민 안 하고 “나 그거 할래”라고 한 사람은 금방 “안 할래”라고도 금방 나오겠죠. 그래서 이거는 뭐냐면 맹자 밑에서 공부하는 분들을 맹자가 볼 때 나름 좀 비판하신 거겠죠.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안 된다.

『대학』에 나온 말입니다. 뒤에 보시면,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물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지소선후知所先後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 그 근본이 어지럽고 말末이 다스려진 자가 없고, 그 두텁게 해야 할 것에 박하고(야박하고), 야박하게 해야 할 것에 두텁게 하는 자는 있지 않다.”

이게 지금 나름 『대학』의 이 구절을 가지고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때 두텁게 할 거는 ‘수신修身’이에요. 지금 『대학』에서 이 말은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나눠서 얘기한 거든요. 보세요. (시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요게 뿌리죠. 나무가 있고요. 열매도 있고, 잎사귀도 있고.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이게 나무인데 말단이죠. 이게 ‘나무 목(木)’자의 갑골문이에요. 이게 이제 이렇게 끊어졌죠. 여기에 본本입니다. 그래서 본本은 보이지 않죠. 본本이 있고 밖으로 나오는 말단이 있는데, 수기修己로 치면 나를 닦는 게 본이고, 치인治人이 말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난번 말씀드렸지만 치인治人은 남을 다스린다고 하니까 내 통제 하에 두고 갈구는 게 아니고요. 이게 삽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이건 삽이에요. 삽으로 구멍을 낸다, 물에다가. 이렇게 물 흐르는데 물꼬만 터준 거예요. 막힌 데만 터주는 거예요. 그냥 그 부분이 답답해하는 거, 잘못된 것만 딱 고치라고 해도, 그 잘못만 고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잘못을 고쳤는데 계속 내 예속하에 두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기죠. 치인治人을 혹시 오해하실까 봐요. 56:47

수기修己는 나를 닦는 거고. 내 양심을 닦는 거고. 치인治人은 양심상 남한테 해줄 수밖에 없는 부분들, 부득이하게 도와주고 싶은 부분들,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 시비지심 때문에. 그것만 적절하게 도와주는 거예요. 근데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나와 남의 관계는 남녀노소, 어리고 늙고, 남녀를 막론하고 이 몸의 군주거든요. 군주 대접해줘야 돼요. 그러니까 지나친 내정간섭은 안 됩니다. 치인治人할 때 혹시 오해하실까 봐요. 유교나 이런 도덕에서는 절대 남도 그 사람의 군주거든요.

그 사람의 양심 정도에 의해서 그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 사람 양심을 개발시켜주는 데 도와줄 뿐이지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려고 들면 그 사람 양심은 오히려 후퇴해버립니다. 지나친 내정간섭은 오히려 그 나라를 망칠 수도 있어요. 57:44

그래서 항상 어리건 늙건 남녀노소 막론하고, 적절한 선에서만 해주고 빠져야죠. 물론 아주 깡패국가는 연합해서 치기도 하고, (이렇게 다구리죠) 이렇게 강력한 제재 수단이 동원할 때도 예외적으로 있는데요, 웬만한 경우에서는 이런 기본 원칙으로 외교를 해야죠. 서로 이렇게 상대방을 권할 때도.

그래서 치인治人도 그거예요. 남한테 적절하게 그 사람이 막힌 부분만 뚫어주고 바로 빠져나와야 돼요. 그 사람이 스스로 그걸 해결할 수 있게. 그래서 수기치인인데 수기修己가 본이고 치인治人이 말인데, 본에다가 더 후해야 돼죠. 비료는 여기다 줘야 되거든요. 비료는 뿌리에다 줘야지 열매에다 주는 게 아니죠. 그래서 많은 비료나 이런 거를 뿌리에다가 주는 게 이게 후한 겁니다. 58:22

수기가 튼튼해야지 치인이 되거든요. 근데 이제 맹자가 말한 건 이거죠. “두텁게 해야 될 건 야박하고요, (자기 공부는 안 하면서) 야박하게 그러는 사람이 남한테는 오죽 하겠냐”는 거죠. 자기 공부도 안 하는 사람이 남한테 훈수 두고 다니면 그게 치인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末에도 도움이 안 되죠. 58:56

이 45절 46절도 계속 이 『대학』의 이부분의 절로 읽어야 돼요. 맹자께서 일부러 그렇게 의도하고 썼더라고요. 『대학』에 나온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를 잘 염두에 두세요. 이거 하나 보고 들어가죠. 『대학』에 나온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는요, 이게 본本이 없으면 말末이 없는 거죠. 이게 본말本末관계를 한번 보셔야 돼요. 본이 없으면 말이 없는 거예요. 뿌리가 없으면 가지는 없거든요. 그래서 본말本末은 어떤거냐면, 본이 당연히 먼저죠. 그쵸?

이거를 제가 뭐라고 이름 붙였냐면 (이제 새로 『대학』 번역할 때 나갈 건데요) 구조적인 우선순위에요. 구조적으로 뭐가 먼저 있어야 되느냐의 문제예요. 이게 지금 물건에서는, 만물에서는 그렇고요. 사事는 일이죠? 일은 작용이에요. 물건은 어떤 개체를 말하고, 사事는 그 개체가 시공간 안에서 벌이는 작용입니다. 일이니까요.

‘일에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 이건 시간적인 우선순위에요. 그렇죠? 구조적인 우선순위랑 시간적 우선순위가 있는데, 이 두 개가 먼저 할 거죠, 선先. 이 두 개가 뒤에 할 거죠, 후后. 그래서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니라’라는, 항상 선先과 후後를 분명히 알면, 시간적 (이게 공간적인 문제라면) 우리 이건 좀 시간적인 얘기죠.

시공時空에서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 그리고 이 도道는 단순히 시공時空만이 아닌 게요 이제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겠죠, 만물 모두의 뿌리. 그 세계를 먼저 알아야 이 세계가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 세계가 먼저라는 걸 안다면 도에 가깝다. 이게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알아야 할 내용이 핵심이거든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가르침인데 이걸 어떻게 적용하는지 보십시다.

45절에요.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물건에 있어서는 아끼되 인자하지 않으며, (물건, 백성, 부모님 세 개를 나눠서 얘기합니다) 백성에게 있어서는 인자하되 친애하지 않으며, 부모님을 친애한 뒤에 백성한테 인자하고” (이렇게 돼 있군요.) “백성에게는 인자한 뒤에 물건을 아낀다.” 이해되시죠?

등급이 있다는 거예요. 물物에는 동물·식물 다 들어가요, 동식물. 그러면 이해되시죠? 요즘 이 세상이 많이 바뀌었죠. 반려동물이라고 그래가지고 동물이 인간보다도 좀 먼저예요. 동물 건드리면 네티즌들한테 악플이, 어마어마한 악플을(달아요). 동물 건드리는 게 최고로(안좋죠). 지금 이게 좀 약간 바뀌었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 양심상, 순수한 양심상(시공을 떠나서요) 어떻게 하는지 보자면, 부모님은 저랑 은혜 관계가 많죠. 저한테 너무 많은 걸 주셨어요. 제 생명을 주셨잖아요. 키워주셨고. 그러니까 부모님한테는 일반 백성보다 그냥 인자한 정도가 아니라, 나와 남을 둘로 안 본다도 정도가 다르거든요. 우리가 밖에 있는 사람을 나와 둘로 안 보니까 제가 돌은 던지지 않죠. 그 정도로 알면 된 사람이 있는데, 부모님한테 그 정도로 안 되고 제가 더 갚아야 할 게 많아요. 그러니까 부모님한테는 친애해야지 그냥 단순하게 인자하게, 일반인 누구한테나 제가 베푸는 인자함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1:02:11

근데 사람한테는 인자하게 대해야하고, 이제 물건한테는 그렇게까지 사람한테 대하듯이 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냥 사랑해주고 아껴주면 된다는 거예요. 차이 아시겠죠? 인간이라는 거는 역지사지를 해주는 거예요. 내 마음처럼 꼭 헤아려주고, 근데 동식물한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1:02:29

근데 요즘은 하도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동식물밖에 내 얘기 들을줄 데가 없잖아요? 동식물한테 정을 많이 쏟다 보니까 사람이 오히려 미워지고 동식물과 정이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됐어요. 인간관계가 많이 황폐해졌다는 거죠. 밤길 걷다가 사람 만나면 무섭잖아요.

근데 예전에 저희 할아버지가 해주신 얘기가, 예전에는 밤길 걷다 사람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는 거예요. 호랑이 만나는 게 무서운 거지. 근데 요즘은 밤길 갔다가 사람 만나면, 골목에서 사람만 마주쳐도 무섭잖아요? 지금 본래의 어떤 그런 질서를 많이 지금 넘어가 있다라는 걸 볼 수 있죠, 여기서.

『논어』에 이 얘기가 있습니다. 마구간이 불에 탔는데요, 『논어』에. 마굿간이 불에 탔다. 공자님께서 조정에서 물러나셔가지고 물어보셨다. “사람이 상했느냐?”라고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마굿간이 불에 탔는데요, 말 몇 마리 죽었느냐? 이거 먼저 물어보지 않고, 사람 상했는지만 확인하셨다는 거예요. 이것도 하나의, 나름 양심의 등급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더 중하다는 거예요. 1:03:28

지금 사람이 중하다는 걸 많이 잊고 사는 것도 문제죠. 우리가 요즘에는 ‘사람이 지구에 바이러스다’ 사람에 대한 되게 모멸찬 얘기들, 환경주의자들은 특히나 ‘사람 별거 아니다, 파리나 사람이나 같은 생명이다’ 이렇게 했는데, 우주적으로 작용한 역할이 정말 천지 차이가 나거든요. 근데 그 위상을 정확히 몰라주는 것도 인간에 오히려 독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더 (노력)해야 되는데 안 하고 있지, (인간이) 파리 정도의 노력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인간은 파리 이상의 걸 해내야 하는데. 46번도요 똑같습니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글입니다. 한번 보세요.

46번이 아주 중요한 글입니다. 우리 공부하실 때 필히 읽으셨으면 하는 곳입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지혜로운 자는 모르는 것이 없다.” 우리가 전지전능을 추구하잖아요, 공부하다 보면. 전지전능을 자꾸 추구하게 되는데 신에 다가가고 싶어서. 근데 인간은 한계가 있잖아요? 인간도 전지전능해질 수 있다고 그러면 그게 불가능하거든요, 사실은.

우리가 기껏 살아야 100년도 못 살고, 아주 제약된, 우주에 아주 귀퉁이 어디 한 군데서 살다가 가서 그게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 그것도 지금 한반도에서도 (저도 솔직히 못 벗어나 봤는데 아직) 이렇게 제약된 삶인데 전지하다는 건 사실은 힘든 얘기죠, 그 맛은 낼 수 있지만. 그래서 이 얘기를 해줘요. “지혜로운 자는 모르는 것이 없으나 당장 알아야 할 것을 급하게 여긴다.” 본말이 있다는 거예요. 본이 있거든요.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거든요. 1:04:05

그래서 “인자한 자는 사랑하지 않음이 없으나” 또 똑같아요. 지혜와 사랑을 얘기합니다. 진짜 사랑하는 자는 뭐든지 사랑해줘야겠죠. 하지만 “어진 사람을 친애하는 걸 더 급하게 여긴다.” 진짜 사랑받아야 할 사람 먼저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러고 여유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죠. 그러니까 요임금·순임금이면 맹자한테 부처님인들인데요(성인들인데), “그 성인들의 지혜로도 사물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은, (그때 다 알 수는 없었다, 요순도) 먼저 알아야 할 걸 급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1:05:28

“요순의 인자함으로도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해주지 못했다.” 왜냐? 먼저 친애, 사랑해줘야 될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본말을 얘기합니다. “3년상도 하지 못하면서 (3년상이 더 근본적인데요, 이것도 못하면서) 심화(3개월 상을 말하고요), 소공(5개월짜리 상이에요, 상이랑 상복 입고 있는 겁니다) 그걸 연구하는 것도 그것도 잘못된 거고” 본말이 전도된 거고, 일의 완급을 모르는 거고.

“밥을 크게 떠 먹고 막 국물 후루룩 마시면서 누가 이빨로 거기 끊어 먹는다고 지적질하는 것도 참 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육포 우리가 좀 끊어 먹는다고 뭐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더 험한 짓 하면서, 본말을 모르면 이런 짓을 한다는 거예요. 이 얘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성인이 되고 싶고 우리가 전지전능해지고 싶잖아요? 제가 ‘용호비결’을 그래서 쓴 거예요.

성인이라고 우주적인 걸 전지전능한 게 아니고, 인간이 당연히 알아야 할 인의예지를 잘 알고 잘 한다는 게 전지전능이에요. 이게 ‘인간적 전지전능’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는데요. 신적 전지전능과 다르기 때문에 이 본말을 잘 알고, 내가 구현할 수 있는 데까지 구현하는 게 최고예요. 근데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전지 전능을 학문의 목표로 세운 사람은 갑자기 딱 전지 전능, 컵을 본 거예요. “컵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을까?” 여기서 끝이에요. 인의예지 연구는 이제 언제 할지 몰라요. 이 컵 연구하다 끝나요.

운전만 할 줄 아는 것도 또 빠듯할텐데 “자동차는 어떤 원리일까?” 이 병에 걸려요, ‘지혜병’ 전지 하려면 다 알아야 되니까 미리 이것부터 알자는 거죠. 잘못된 거죠. 여유가 될 때 알아야 될 거죠. 시험 공부도 먼저 필히해야 되는 게 있고, 알아도 좋고 몰라주는 것들은 나중에 공부해야 되는데, 시험 공부 하려면 이 책을 다 알아야 된다고 그래가지고 그 책에 아주 사소한 것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아까 말한 ‘삼년상도 못 지키면서 막 소소한 거 들고나오고, 밥 소리 내서 막 개걸스럽게 먹으면서 뭐 이빨로 고기 끊어 먹느냐’ 이런 소리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1:07:22

그래서 이 얘기를 말씀드리는 거는 ‘사단四端을 먼저 알고 사단四端을 먼저 하시라’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여유 있을 때 하세요. 그러면 성인은 반드시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의 성인이 못 될 수는 있어도 인의예지의 성인은 돼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